15.
차은호가 낯이 익다니.
정말 은호가 견이 아는 사람이라면 역시 하 회장의 사람이거나 백영 그룹과 관련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쩐지 거짓말을 할 것 같은 사람으로 느껴지진 않았으니 대학생이란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대학생이면서 자유분방하게 머리를 염색하고 다녀도 눈에 띄지 않으며 이런 심부름을 맡아 할 사람?
그럴만한 인물이 누가 있지?
“…….”
바쁘게 움직이는 정서의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견은 제 말에 동요한 다음 입을 앙다물어 버린 그녀에게 다가섰다.
무심코 고개를 들자 견의 턱에 정서의 이마가 부딪혔다.
“아!”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무르는 정서의 어깨를 쥐어 붙든 견이 허리를 숙여 그녀를 마주했다.
정서는 옅은 통증이 느껴지는 이마를 손으로 문지르며 생각했다.
낭패라고.
하필이면 은호 때문에 정신이 팔린 거라 생각하기 너무 좋은 타이밍에 그렇게 행동했으니 말이다.
“정신이 팔렸네.”
“예?”
“아니라고 할 셈인가?”
“…….”
“윤정서가 남자 하나에 정신이 팔려?”
“…….”
빤한 견의 시선이 정서를 꿰뚫고 있었다.
물론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정서가 은호에게 정신이 팔린 것은 사실이었다.
은호가 누구인지, 누구의 사주를 받아 움직이는지 아는 것이 그녀에게는 지금 이 순간 가장 중요했으니까.
그렇다고 은호에게 설렜다거나 호감의 감정을 느꼈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견이 그렇게 오해할 거란 생각 역시 하지 않았다.
그저 은호의 도발에 잠깐 기분이 상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럴듯한 핑계도 대질 않네.”
그녀의 침묵이 오히려 그의 심기를 거스른 모양이었다.
정서는 그제야 태연하게 헛웃음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견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 버거웠다.
아직 견에게 은호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킬 수 없었으니까.
“……핑계 댈 것이 없는 사이이니까요.”
“‘사이’?”
말꼬리 잡는 건 견의 스타일이 아니다.
아까부터 묘하게 그답지 않게 굴고 있었다.
정서는 고개를 돌려 다시 견을 보았다.
“뭐가 그렇게 기분이 상하신 걸까?”
“내가 기분이 상한 걸로 보이나, 윤 비서는?”
“아니면 이렇게 지루한 서류 검토를 시키진 않으셨겠죠. 어련히 알아서 비서진이 준비해 주셨을까요. 이런 자료에 의문 갖지 않는 분이셨잖아요?”
“성실한 타입이 취향인가 싶어서.”
견이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어 그녀의 턱을 쥐었다.
대개 눈높이를 맞추거나 그녀보다 낮게 고개를 두던 그의 모습과는 다르게, 드물도록 위압적인 모습이었다.
정서를 그의 통제 안에 두고 싶다는 것처럼.
“……성실한 타입?”
“길도 모르는 건물을 헤매며 열심히 배달하고 있는 남자?”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럼 왜 명함을 줬을까?”
“…….”
그의 시선이 집요하게 얼굴을 훑었다.
아니라고 부정해 봤자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견의 촉은 놀랍도록 발달해 있다.
시간을 너무 오래 끌어서도 안 된다.
분명 둘 사이에 그가 모르는 무엇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될 테니까.
그러니까, 답은…….
“혹시 다음에 심부름…….”
“역시 더 말 섞기 귀찮았던 건가?”
견의 말에 정서는 핑계를 둘러대던 것을 뚝 그쳤다.
굳어 있던 견의 얼굴이 얼핏 풀리는가 싶더니 아까까지 그녀를 긴장감 있게 옥죄던 모습이 멀끔히 지워졌다.
견이 그제야 정서의 턱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세워 맞은편에 앉았다.
“뭐, 어련히 알아서 했겠지. 남자라곤 나밖에 관심 없으니까, 너.”
“……눈 돌릴 틈을 주셔야죠.”
어쩐지 너무 쉽게 물러나는 것이 석연찮은 느낌이었으나, 더 무슨 말을 하기 쉽지 않았다.
견이 이쯤 물러나 주기로 결심했다면 일단 따르는 편이 나았다.
어차피 더 좋은 선택지도 떠올리지 못했다.
“좋은 자세네. 더 분발해야겠는걸.”
“그것만큼은 사양하겠습니다. 여기, 별도로 표시한 이곳과는 더욱 긴밀한 사이를 유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나머지 선택지도 무난합니다. 우호 관계를 맺어서 나쁠 곳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
“예.”
“다행이네.”
여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서는 정리한 자료를 견에게 내밀었다.
견의 시선이 자료를 흘깃 훑는 것이 보였다.
“그럼 저는 이만 일어나 보겠습니다.”
“어디 가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기사는 안 났던데. 잘 정리했어, 기자랑?”
“……예, 잘 정리됐습니다.”
견은 오늘따라 유난히 날카로웠다.
정서가 찔릴 만한 부분만 쏙쏙 골라 찌르는 것이 날을 잡은 것만 같았다.
그냥 집에 돌아가 쉬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히 하던 그녀가 입꼬리를 희미하게 올렸다.
“걱정 마세요. 문제없습니다.”
“그래, 뭐. 윤정서가 그렇다니까 믿어야지.”
“감사합니다.”
정서는 그렇게 말하고 비로소 본부장실을 빠져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대로 걸음을 옮기자 뒤로 견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늘은 좀 자.”
“……네?”
“말썽 안 부릴 테니, 좀 쉬라고.”
“…….”
정서가 뒤를 돌아보자 턱을 괴고 그녀를 올려다보는 견의 얼굴이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득하기만 한 깊은 눈을 하고 그는 그녀를 따라 흐릿하게 웃었다.
“내일 봐.”
&
정서는 씻고 나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다.
침대와 책상만 놓인 방은 언제 떠나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로 물건이 거의 없었다.
대신 큰 캐리어 가방 하나가 방구석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건 자주 열렸다 닫혔던 듯 지퍼의 고리가 슬쩍 느슨했다.
“……잠잠하네.”
견은 아까 자신이 뱉은 말을 지킬 모양인지 어쩐 일로 그녀에게 연락이 없었다.
말만 그렇게 뱉어두고 어디서 누굴 만나 술을 마시고 있을지는 몰랐지만, 정서는 우선 신경을 끄기로 했다.
유별나게 구는 건 견의 오랜 특징이다.
일일이 예민하게 받아들인다면 오래 견딜 수 없을 것이다.
오래 견딘다고?
정서는 무심코 한 생각을 다시 되짚었다.
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그녀는 미래를 생각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고 말하는 편이 맞았다.
하지만 하 회장이 자신과 견의 결혼까지 생각하고 있는 이상, 더 이상 계획 없이 벌어지는 일들을 대충 수습하며 지낼 수는 없었다.
결혼이라니.
정서는 결혼을 하는 모습을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결혼이라는 것은 허상일 뿐이라고, 간혹 정말 행복하게 사는 사람도 있었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을 것이라고.
그녀는 내내 그렇게 믿어왔다.
좋은 본보기가 없었으니까.
정서의 어머니는 그녀가 어렸을 때 도망쳤고, 그녀의 아버지는 없는 게 나았을 사람이었다.
어린 마음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이라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 그런 생각은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알았다.
태어났으니 살아야지.
끝까지 살아야지.
더 이상 그 사람에게 무엇도 빼앗기지 말아야지.
아버지라는 작자 때문에, 아무것도 잃지 말아야지.
‘저 남자가 나를 찾아와 돈을 받아 갔다.’
하 회장은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또다시 그녀의 삶을 휘두르려 하고 있었다.
순순히 내어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가져야지, 더 높은 곳에 올라서 다시는 건드리지 못하도록 밟아야지.
그때.
그때 제대로 했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 큰 비밀도 그가 숨겨 줄 수 있었을까?
문득 정서는 하루도 멀어지지 못한, 과거의 어느 날을 떠올렸다.
비가 쏟아지던 날, 그 다리 위에서.
정서를 맹렬히 지켜보던 그 눈빛을, 머리 위로 쏟아지던 그 빗물을.
하루도 잊지 못했다.
&
언제 잠들었을까.
머리를 대충 말리다 잠들었는지 눈을 떴을 땐 어느새 새벽이었다.
지이잉.
정서는 저를 깨운 핸드폰 알림을 찾아 손을 뻗었다.
대충 소리가 나는 쪽을 더듬자 손에 핸드폰이 잡혔다.
견일까, 문득 그런 생각을 했으나 전화 온 번호는 등록되지 않은 번호였다.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잤어요?
이 목소리는…….
기억을 오래 되짚을 필요가 없었다.
어딘가를 달리는 중인 듯 살짝 숨이 찬 것 같은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녀가 황급히 몸을 세웠다.
눈두덩에 남아있던 졸음이 떠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디야.”
― 질문이 파격적이시네요. 그런 건 친밀한 사이에나 묻는 거 아닌가?
“만나서 얘기해.”
― 자고 있던 거 아니에요? 되게 부지런할 것 같이 생겨서 아직 자요?
“…….”
― 농담이에요. 삐쳤어요?
“그런 거 아니니까 어딘지 말해. 얼굴 보고 물어 봐야 하니까.”
― 내가 누군지가 그렇게 궁금해요? 아닌가. 그냥 내가 누구 사주로 움직이는지가 궁금한 건가? 그런 거면 좀 서운한데요. 나에 대한 순수한 궁금증인 편이 더 낭만적이잖아요.
이십대 초반의 남자애가 낭만을 얘기한다.
정서는 그런 경우를 보지 못했다.
확실히 은호도 보통의 사람이 아니었다.
“전화했다는 건 용건이 생겼다는 거잖아. 나에게 받을 것이 생긴 모양인데 협상을 하려면 적어도 기본 예의는 갖춰야지. 금방 나갈 테니까 어딘지 애기만 하면…….”
― 봐, 곧장 일 얘기. 난 그래도 그쪽 곤란하지 않게 핑계도 대 주었는데.
그 핑계 덕분에 얼마나 곤란했는지 알까.
아마 모르겠지.
알면 더 좋아할지도 모르겠다.
정서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쨌든 먼저 말을 걸어올 생각을 했다는 건 좋은 신호다.
그녀에게 원하는 것이 없는 상대보다 원하는 것이 있는 상대를 대하는 것이 더 편했다.
“그 빚도 갚을 겸 밥 살 테니 만나.”
― 데이트 신청이에요?
“만남의 이름은 붙이기 마련이고. 곤란하면 장소랑 시간 보내 줄 테니까…….”
― 오늘은 곤란해요.
“왜?”
― 그쪽이 모시는 분 만나야 하거든.
“내가?”
― 예. 하곤 회장. 아닌가?
정서는 입이 벌어졌다.
하지만 새어 나오는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은호는 정서에 대해, 너무나도 많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