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85)

14.

“정체요? 내 정체라…….”

나른한 음성이 공간을 메웠다.

정서와 은호는 대치한 듯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은호가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고뇌 중인 듯했다.

정서는 그런 은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차은호, 23세. 서울시 XX구 XX동…….”

은호는 앞서 저를 향해 정서가 읊어대던 제 신상 명세를 내뱉기 시작했다.

정서의 얼굴이 와락 구겨졌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느냔 말이다.

“그건 나도 아는 거고.”

“누구냐면서요. 보통 자기 소개할 땐 이름, 나이 그리고…….”

“직업을 말하지?”

정서가 선수를 가로챘다.

은호는 자신에게 틈을 주지 않는 정서가 재밌는지 잠깐 웃는가 싶더니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래요, 뭐…….”

은호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축고 있는 헬멧을 천천히 벗었다.

다시 드러난 얼굴은 아까보다는 조금 상기돼 있었고 어쩐지 눈빛이 더욱 밝아져 있었다.

마치 이 상황이 몹시 즐겁다는 것 같아서 정서는 다소 의아했다.

“대학생이에요.”

“대학생?”

“네. 대학생.”

“근데 왜…….”

“그때 그랬냐고? 아니면 이런 곳에 이런 차림으로 나타났냐고?”

은호는 제 차림을 내려다보았다. 

후드티에 찢어진 청바지.

날라리처럼 보이지는 않았지만 단정한 차림으로도 결코 볼 수 없는 모양새였다.

알긴 아는 모양이구나.

정서가 속으로 생각할 때쯤 은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고개를 숙이면 코가 닿을 거리가 되었다.

“알면 설명을 좀 하지? 나 바쁜 사람인데.”

“이렇게 매사에 날로 먹으려 해요?”

“날로?”

“그렇잖아. 인생사 기브 앤 테이크라는데. 나 지금 아무것도 못 받았는데?”

“받았잖아.”

“뭐요.”

“내 뒷담화.”

정서는 짧게 답했다.

은호의 눈꼬리가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얼굴이 피었다.

꽃이 피어나듯 예쁘게도 환해지는 얼굴이 정서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건 당신이 준 게 아니잖아.”

“누가 줬든 받았으면 됐지.”

“아……. 보통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긴 했는데, 진짜 내 예상을 뛰어넘는다.”

예상.

은호는 그렇게 말했다.

누군가를 예상하기 위해선 존재를 먼저 알아야 한다.

은호가 누가 됐든 정서를 미리 알고 있었고 견의 정보를 빼돌리려 했으니.

“대가로 얼마 받았는데?”

정서가 물었다.

하 회장의 사람이든, 견이나 하 회장을 견제하는 다른 사람의 지시를 받고 움직였든. 

은호가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은 동일했다.

“글쎄요.”

은호가 곰곰이 고민하는가 싶더니 손가락을 펼쳤다.

하나, 둘, 셋.

점점 펼쳐지던 손가락이 넷에서 멈칫하는가 싶더니 툭 아래로 떨어졌다.

“잘 모르겠어요. 통장을 안 들여다봐서.”

“돈이 궁한 것도 아니면 이런 일을 왜 하는데.”

“재밌잖아요.”

“재밌어?”

“네. 난 엄청 재밌는데. 덕분에 재밌는 사람도 만나고.”

재밌는 사람이라 함은, 정서를 가리킨다는 듯 은호가 빙글빙글 웃었다.

묘하게 자꾸 피해 간다.

이렇게 낭비할 시간이 없는데.

정서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흘러내린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그 짧은 틈에 은호의 눈빛이 변했다.

정서가 고개를 숙이느라 그에게서 시선을 뗀 찰나. 

은호의 눈빛이 정서의 무방비하게 드러난 희고 가는 목덜미와 묘하게 처연한 기색이 서려 있는 눈꼬리로 향했다.

“아무튼 난 너한테 원하는 답을 들어야겠어.”

“그러니까, 뭘 줘 봐요.”

“뭘 원하는데.”

정서가 고개를 들어 다시 은호와 눈을 맞췄다.

은호는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 되었다.

그때였다.

발소리가 복도에서 들리는가 싶더니 문이 벌컥하고 열렸다.

정서를 향해 있느라 문을 등지고 섰던 은호의 뒤로 들어온 것은…….

“……하견.”

견이었다.

정서는 갑작스러운 견의 등장에 당황한 듯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견은 거침이 없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선 회의실 안에 순식간에 침입해 정서의 앞에 섰다.

어느덧 나란히 서게 된 견과 은호가 시선을 돌려 서로를 응시했다.

침묵이 흘렀다.

“…….”

“…….”

아무도 섣부르게 입을 열지 않았다.

견은 예의 그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로 은호를 보았고 은호는 어쩐지 재밌는 것을 본다는 듯 힐긋 웃었다.

‘쟤도 만만찮은 미친놈이구나.’

견의 앞에서 경직하거나 당황하지 않는 사람은 매우 드물었다.

정서는 그런 생각을 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아직 은호가 누군지 파악도 되지 않았는데 견과 충돌하게 둘 수는 없었으니까.

“여긴 어쩐 일이세요, 본부장님.”

“윤 비서가 전화를 받지 않아서 말입니다.”

“제가요?”

정서는 그제야 제가 수연과 대화하러 나올 때 핸드폰을 챙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알았다면 챙겼을 텐데.

후회는 늘 늦었다.

그렇다고 해도, 어떻게 여기 있다는 걸 알았을까?

당황한 듯 정서가 견을 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업무 시간 중에 자리를 비우는 프로답지 않은 모습, 매우 드문 걸로 아는데. 급한 용무라도 있었던 모양이지?”

“아…… 아닙니다. 이 비서님과 대화하러 나왔다가 이 분이 길을 잃으신 것 같아서.”

“길을 잃은 것 같아 빈 회의실로 초대해 딱 붙어 대화를 나눈다?”

견이 그제야 은호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서를 보았다.

눈빛에 무언가가 일렁이는 것이 보았다.

분노일까, 배신감?

어찌 됐든 둘이 충돌하는 것만큼은 막고 싶었던 정서가 무어라 변명을 해보려 입을 벌렸을 때, 은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음에 들어서요.”

“?”

견과 정서의 시선이 동시에 은호를 향했다.

은호는 어려울 것이 없다는 얼굴로 제 머리를 헝클어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한낱 배달원이 길을 헤매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다가와 길도 알려 주고. 외모도 수려하시고. 제가 반했어요.”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아니, 이건 최악이다.

그런 변명을 둘러대서는 안 됐다.

상황을 악화시킬 뿐이다.

정서가 눈을 크게 치켜뜨고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끄러미 은호를 응시하고 있던 견의 입꼬리가 비틀렸다.

잠시 동요하는가 싶던 견이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반했다?”

“네. 그래서 번호 좀 여쭤보려고 하는데……. 마침 방해받은지라. 혹시 괜찮으시면 잠깐만 시간 주시겠어요? 금방 끝날 것 같은데.”

은호는 한술 더 떴다.

망했다. 혹시나 견이 주먹을 들어 은호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정서는 그걸 자신이 몸으로 막아야 할지, 어째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호가 정말 위험한 사람이라면 무슨 써서라도 견이 돌발행동을 하는 것만큼은 막아야 했으니까.

“잠깐만요, 그게 아니라.”

정서가 다급히 입을 여는 사이, 견이 몸을 틀어 아예 은호 쪽을 보았다.

은호도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고 섰다.

둘 사이에 또다시 침묵이 흘렀다.

“본부장님, 무슨 일로 찾으셨는지 말씀해주세요. 급한 일 아닙니까? 그리고 그쪽은 이만 나가세요. 여기 외부인이 함부로 출입할 수 있는 곳이 아닙…….”

“내가 불러 줄까요?”

견의 입에서 나온 것은 뜻밖의 말이었다.

무언가가 꾹꾹 눌러 찬 목소리였는데 어쩐지 위압감을 풍겼다.

손쉬운 분노가 가벼운 견제는 아니었다.

견답지 않다.

정서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견 역시 은호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었다.

이제껏 정서에 대해 헛소리를 하고 다니는 남자를 상대하던 견의 태도와는 사뭇 다른 걸 보면 확실했다.

“네?”

“번호.”

은호는 견의 얼굴을 오래 응시하더니 피식 웃었다.

이렇게 하면 겁을 먹을 줄 알았나 보지.

하지만 밀릴 생각은 없었다.

“아뇨, 괜찮아요. 직접 주시지 않는 거면 의미가 없을 것 같아서요.”

“…….”

“전 이만 가봐야겠네요. 다음에 또 만나요, 우리는.”

은호가 가볍게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허공에 들었다 놓으며 몸을 틀었다.

견의 시선이 은호의 뒤통수에 와 박혔다. 

그리고 찬찬히 다시 정서를 향했다.

예상치 못한 은호의 태도에 동요하던 정서는 그 동요를 오롯이 견에게 들켰다.

표정을 수습할 틈이 없었다.

견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고 정서가 이후 어떻게 처신하여 이 상황을 타개해 나가야 할지 골몰하느라 정신이 없을 때.

은호는 쐐기를 박았다.

“생각해 보니까 제가 명함을 받았네요.”

“……!”

“전화드릴게요.”

쾅.

회의실 문이 닫혔다.

&

“…….”

“…….”

적막이 어린 본부장실 안, 견은 말이 없었다.

정서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소리도 없이 자근자근 씹었다.

이렇게 씹다가 피를 볼지도 모를 일이었으나, 지금은 차라리 그렇게 해서라도 이 침묵을 깨는 게 낫지 않나 싶을 지경이었다.

‘전화 드릴게요.’

그렇게 말하고 훌쩍 떠나버린 은호 덕분에 견과 정서 사이에 냉한 분위기가 흘렀다.

견은 한참 조용히 서 있다 정서에게 자료 검토를 요청했고, 정서는 그 덕에 다시 본부장실에 들어와 자료들을 살피고 있었다.

제작하게 될 드라마의 투자사들의 리스트. 

그중 위험한 기업은 없는지, 앞으로 관계를 이어 나가고 발전시키면 좋을 투자사는 어디인지 같이 검토해달라는 견의 말은 너무나 상식적이어서 외려 이상했다.

이런 자료나 검토시키려고 급하게 찾았다고?

말이 안 됐다.

자료는 핑계고 그냥 정서를 찾았는데 자리에 없어 당황했겠지.

그러다 회의실에서 그녀를 찾은 거고.

눈은 자료를 향해 있었지만, 생각이 딴 곳을 배회했다.

그걸 모를 리 없던 견이 입을 열었다.

“그 남자, 낯이 익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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