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은호의 눈꼬리가 휘었다.
얼핏 웃는 것 같았다.
왜 웃어? 이 순간에?
내 뒷담화를 같이 듣자는 건가?
다행히 내려올 생각이 없는 듯 남자는 계단 위에 못 박힌 것처럼 서서 말을 이어갔다.
“맞아, 윤정서. 걔가 다 조종하는 거야. 어떻게 꼬여 냈는지는 몰라도, 그 미친개가 이 여자 말이면 사족을 못 쓴다잖아. 임원 회의에도 참석한 적이 있대. 모르지, 그 회의실에 둘만 남았다던데. 둘이 거기서 뭘 했을지.”
순간 정서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수치스러워서가 아니라 화가 나서였다.
저를 둘러싸고 이런 소문이 나리란 걸 예상 못 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 듣는 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친밀하지도 않은 은호와 이런 말을 듣자니 기분이 영 좋지 못한 것이다.
굳는 정서의 얼굴을 물끄러미 살피던 은호가 그녀의 입에서 손을 뗐다.
‘기다려.’
은호는 저를 향한 정서의 시선에 대고 이렇게 입 모양을 해 보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다시 썼다.
그리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 잠깐만…….”
은호의 발소리를 들은 남자가 뒤늦게 목소리를 줄였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은호는 계단을 빠르게 오르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려는 남자의 시야를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그가 정서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뭡니까? 여기 외부인 출입 금진데.”
“아, 안녕하세요. 제가 퀵 배달을 왔다가 길을 잃어버려서 말씀 좀 여쭈려고요.”
“퀵? 아…… 근데 어디 퀵입니까? 헬멧이 그 헬멧이 아닌데.”
“그래요? 따로 심부름 시키셔서 그랬나 봐요. 여기 본부장실이 어디에 있어요?”
“…….”
은호의 말을 듣던 남자의 얼굴이 굳었다.
“거긴 왜요.”
“왜냐뇨. 심부름 시키신 분이 본부장님이시니까 그렇죠.”
“……누구냐고 다시 묻습니다. 외부인이면 경비를,”
“부르시려고요?”
은호는 생글생글 웃었다.
그러곤 고개를 숙여 남자가 차고 있던 사원증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남자는 은호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숙였다 제 목에 걸린 사원증을 발견하고 황급히 그것을 뒤집었다.
“이 사람이 보자 보자하니까 질문에 대답도 안 하고,”
남자의 손이 은호의 어깨에 닿은 순간.
은호는 마치 이 순간만 기다린 사람처럼 남자의 손을 잡아 꺾었다.
“먼저 손 대신 겁니다. 경영팀, 박석형 이사님.”
박석형 이사?
정서는 이따금 회의 시간에 저를 빤히 바라보던 남자를 떠올렸다.
좀체 말하는 일이 없어 목소리를 외우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었구나.
시선이 어쩐지 불쾌하게 따라오는 것이 기분이 나빴었는데.
“이거 안 놔? 이 봐, 너 누구야. 헬멧 벗어봐. 이거 안 놔?”
남자가 거칠게 저항하자 은호가 남자를 놓았다.
남자의 몸이 그대로 뒤로 넘어가는 것도 잠시 곧 요란한 소리가 났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넘어진 모양이었다.
“아!”
“아, 죄송해요. 놓아달라고 하셔서. 그럼 이만 저는 가보겠…….”
은호가 그렇게 말하고선 몸을 돌려 내려가려던 때였다.
“괜찮으세요?”
정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들자, 생글 웃고 있는 정서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을 리가……. 당신은.”
남자는 정서를 발견하고 표정이 일그러졌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직감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이사님, 어쩌다가 넘어지신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혹시 이 사람하고 아는 사이입니까?”
“예? 아, 이 분이요. 저희와 제휴 맺은 퀵 업체에서 가끔 손이 모자르면 제가 따로 부탁하는 분이에요.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당황해 횡설수설하는 남자를 앞에 두고 정서는 안타까운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다치진 않으셨어요? 크게 넘어지신 것 같은데.”
그리고 손까지 내미는 관용을 보였다.
남자가 머뭇거리며 내밀어진 손을 보는 사이, 정서는 제 옆얼굴에 와닿는 은호의 시선을 고스란히 느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잘 오르다가도 순간 방심하면 넘어지는 게 사람이잖아요.”
“…….”
“다음엔 발밑을 좀 더 잘 확인하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모르잖아요. 아래 계단이 아니라, 다른 게 있을지.”
남자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정서는 내민 손을 거두며 손목에 찬 시계를 보았다.
“늦겠다, 그럼 저 먼저 갈게요. 혹 도움 필요하시면, 팀원분 부르시는 게 좋겠어요. 마침 경영팀이 위층이니까, 맞죠?”
은호의 입이 턱 벌어졌다.
그녀의 모든 말에 뼈가 있었다.
사람이 친절하게 잔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은호는 방금에야 깨달은 것만 같았다.
“가요, 우리는.”
정서가 휙 등을 돌리며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호가 그 뒤를 따랐다.
텅, 텅.
발소리가 울리는가 싶더니 정서는 그대로 한 층을 더 내려갔다.
지금 이 층으로 들어가면 보나 마나 저를 기다리는 수연과 마주칠 게 뻔하니까.
제대로 정체를 알아내기 전까지 누구도 은호를 마주하게 할 수 없었다.
은호에게서 견의 사진이 담긴 외장 하드를 받아내 부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십일 층에 다다르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은호를 빈 회의실로 이끌었다.
“자 이제 말해, 누구야. 너. 대체 정체가 뭐야?”
&
수연이 시계를 들여다봤다.
분명 금방 온다더니, 뭐에 홀린 사람처럼 뛰쳐나간 정서가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뒤늦게 몸을 일으켜 정서가 사라진 쪽으로 걸음을 옮겨 보았지만 이미 그녀는 자취를 감추고 난 뒤였다.
“…….”
수연은 다 식어 미지근해진 커피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쓰레기통에 그대로 집어 던졌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진 컵의 뚜껑이 열리며 음료가 이리저리 튀어나오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대체 어딜 간 거야.”
하필이면 그때였다.
수연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도, 핸드폰을 귓가에 댄 채 멈춰 선 견과 수연이 마주한 것도.
견은 수연의 옆에 놓인 쓰레기통과 수연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수연이 당황한 듯 얼굴을 붉혔다.
이런 모습을 견에게 보였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전화 안 받습니까.”
견이 짤막하게 물었다.
수연은 제 손에 들린 채 지이잉 울리는 핸드폰을 급히 들었다.
‘하견 본부장님’
황급히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전화는 끊겼다.
견이 핸드폰을 쥐고 있던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렸다.
그리고 난감하다는 듯 손을 들어 눈썹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 불성실한 사람일 줄은 몰랐는데요.”
“죄송합니다. 자리를 비운 건 잠시 윤 변호사님께 물을 것이 있어서…….”
“윤 변호사에게 물을 것이 있습니까, 이 비서가? ……이상하네요. 둘의 업무 내용이 겹치던가?”
견의 목소리는 나긋하지만, 힘이 있었다.
마치 수연에게는 그럴 권리도 자격도 없다는 듯 선을 긋는 것 같았다.
그에 수연은 무언가 분한 느낌이 들어 손에 들린 핸드폰을 더욱 꼭 쥐었으나, 물러서지 않았다.
지금껏 지켜본 바에 따르면 견은 자신에게 지는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지고지순한 여자도, 세련된 여자도 그리고 화려한 여자도.
전부 그의 타입이 아니었다.
정서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가진 게 없는 여자, 조금은 망가진 여자, 그럼에도 지지 않고 대드는 여자.
견은 그런 여자를 좋아했다.
그것을 알게 된 수연이 여기서 물러난다면 그건 견을 포기하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저지른 잘못을 책임지고 싶어서요.”
“이 비서가 저지른 잘못?”
“네. 파파라치가 따라붙었는데도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본부장님을 위험에 처하게 했습니다.”
“위험?”
다시 되물은 견이 수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 두 걸음.
두 사람의 거리가 충분히 가까워진 순간 견이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수연과 눈높이를 맞췄다.
“이 비서 눈에는 내가 위험에 처한 것처럼 보이나?”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제 말은.”
수연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꼈다.
견은 웃고 있었지만,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견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차가웠다.
이렇게 차가운 눈빛을 정서의 앞에서는 한 번도 보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을 대할 때 견은 종종 이런 눈이 되었다.
고작 이틀이었지만, 확실했다.
“아니면 그저 윤 변호사를 괴롭힐 구실이 필요했나?”
“당치 않습니다. 제가 왜 변호사님을…….”
“난 상관없는데.”
“……예?”
“윤정서를 괴롭히든 말든, 난 상관없다고.”
“그게 무슨…….”
견이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수연에게서 시선을 돌려 쓰레기통을 바라보았다.
쯧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을 숙인 견이 손을 뻗어 엉망이 된 쓰레기통에서 나뒹구는 커피 컵을 쥐었다.
“본부장님!”
당황한 수연이 황급히 말리듯 견의 팔을 쥐었다.
그의 손에서 뚝뚝 피처럼 커피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닦을 것, 닦을 것이.”
수연이 당황해 주위를 둘러보는 동안 견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역시 없었다.
촌스러운 향이 나는, 밋밋하게 생겨 아무 의미라고는 없어 뵈는 손수건을 들고 다니는 여자는.
“됐습니다.”
견은 차갑게 수연에게서 제 팔을 빼내었다.
그리고 손에 들린 컵을 들어 그 안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더니 코에 대고 냄새를 맡았다.
씁쓰름한 커피의 향이 맴돌았다.
수연은 그 모습을 보며 어쩐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잘못한 것이 없으면서도 그랬다.
설마 제가 무슨 짓을 저지르기라도 했을 거라 생각한 건가.
“이 비서.”
“예.”
“윤 변호사는 뜨거운 커피는 안 마십니다, 속에 화가 많거든.”
“…….”
“그러니 다음에 커피를 사 주려거든 아이스로 사 줘요.”
“……예. 시정하겠습니다.”
“그것만 빼면 나머지는 상관없습니다.”
견이 컵에 묻은 정서의 립스틱 자국 위를 엄지로 느릿하게 쓸었다.
고작 손짓 하나가 묘하게도 도발적이어서 수연은 숨을 참았다.
“윤 변호사를 괴롭히든, 귀찮게 하든 알아서 하세요.”
“…….”
견은 그렇게 말하고선 컵을 다시 쓰레기통에 넣으며 돌아섰다.
멀어지려는 견의 뒤로 수연이 물었다.
“어째서죠?”
수연의 물음에 견은 돌아보지도 않고 답했다.
“그 여자는 그럴수록 재밌어지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