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85)

12.

늘 그렇듯 분주함이 맴도는 사무실 안, 정서의 자리는 법무팀 한구석이었다.

그녀를 신경 쓰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앉은 자리는 갑작스레 생겨난 것이었기 때문이다.

‘본부장 라인이래.’

‘알만하지, 누가 뭐래.’

그녀가 처음 입사했을 당시, 여러 말들이 오고 갔다.

당연한 일이었다.

공식적으로 채용된 인력이 아닐뿐더러, 그녀의 소문은 이미 매스컴을 통해 익히 알려졌으며 법무팀에 공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서는 개의치 않았다.

정서에게는 당장 사는 일이 중요했다.

그녀가 알기론 ‘생존’만큼 중요한 일이 없었다.

어차피 자리에 오래 앉아 있을 일도 거의 없었다.

그녀는 견이 저지르는 문제들을 해결해야 했고 가끔 따로 하 회장이 묻곤 하는 질문들에 법률적 자문을 줘야 했다.

그러기도 바빴다.

어차피 그녀 인생에 다정한 친구나 동료가 있었던 적은 드물었다.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서류를 정리하던 정서는 문득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검은색, 안이 비치지 않는 두터운 스타킹이 그녀의 다리에 감겨 있었다.

이전의 상황을 회상해 보자면.

정서는 수연이 오기 전에 본부장실을 빠져나오려 애를 썼지만, 견이 그녀를 붙잡았다.

지금까지 일으킨 말썽으로 충분하지 않았느냐고, 스캔들 두어 개 정도 터뜨리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리고 지금 그 꼴로 나간다면 반드시 소문이 날 것이라고, 본부장에게 은밀한 취미가 있다는.

“소문은 이미 충분히 돌고 있는데…….”

오히려 수연을 그런 모습으로 마주치는 게 더 껄끄럽다는 것을 몰랐던 걸까?

견은 노크 소리를 듣고 손수 걸음을 옮겨 수연에게서 스타킹을 받아왔다.

안을 들여다보는 수연의 시선을 피해 등을 돌리고 앉았으나 수연은 알았을 것이다.

그녀가 그 방에 있었다는 것을.

됐어, 더 생각하지 말자.

지나간 일을 더 생각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해결할 다른 과제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고작 애 하나를 다루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들어? 그 망나니 자식이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일렀는데.’

하 회장이 그녀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견의 문제이기는 했지만, 무슨 일인지 확실하지 않은 그 문제가.

“대체 뭐지?”

정서는 곰곰이 생각했다.

스캔들이 나지 않았어도 하 회장의 인맥으로 견의 부적절한 사진이 찍혔다는 것 정도는 알 수도 있었다.

아니면 사진을 찍었다는 전지훈 기자가 사진을 이용해 직접 협박이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그 미스테리의 남자, 차은호는 누구인가.

자신을 믿지 못한 하 회장이 다른 이를 고용했을까?

역시 파 볼 구석은 차은호뿐이었다.

생각을 그렇게 굳힌 정서는 자신의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전화하라고 던진 명함은 영 효력이 없는 걸까?

“저기, 윤 변호사님.”

변호사로 재직할 당시 사람 찾는 일을 도와주었던 사무관에게 연락이라도 해봐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

정서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앞에 선 것은 수연이었다.

“아, 이 비서님.”

정서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마주했다.

수연이 정서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정서는 그것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시간 괜찮으세요?”

수연은 입꼬리를 올리고 예쁘장하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눈이 경직되어 전혀 온화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정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거절할 명분이 그녀에게는 없었다.

&

둘은 사내 휴게실에 마주 앉았다.

한참 업무 시간이라서 그런지 다행히 휴게실은 한산했다.

정서는 수연이 건네준 커피 컵의 표면을 손으로 문지르며 침묵을 지켰다.

수연이 무슨 말을 하고 싶어 자신을 부른 건지 알 수 없었다.

아까의 행동 때문일까?

하지만 그 전에 수연 역시 견과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분명했다.

본부장실을 빠져나오는 수연의 얼굴을 보아서나, 견의 풀어헤쳐진 셔츠를 보아서나 말이다.

그러니까 괜히 눈치 볼 필요는 없어.

정서는 마음을 다잡았다.

“……혹시 기자님은 찾으셨나요?”

“네?”

그러나 침묵을 깬 수연의 입에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였다.

정서가 예상치 못한 말에 잠시 놀라 되물었다가 놀란 표정을 금세 얼굴에서 지워냈다.

괜히 동요했다.

이런 악수를 두다니, 그녀답지 못했다.

“아, 기자님이요. 예. 찾았습니다.”

“그럼 사진 문제도 잘 해결된 건가요?”

“아…….”

수연의 얼굴에는 조금의 걱정이 서려 있었다.

자신이 그 상황을 완전히 책임지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갖고 있는 건지도 몰랐다.

일하게 된 지 얼마 지나지 않고 일어난 일이니 더 그러겠지.

뒤늦게 정서는 조금 반성했다.

너무 경계한 것은 아닌지 마음이 조금 풀어지려는데 수연이 이어 말했다.

“아직까지 스캔들이 나지 않은 것은 보았는데. 혹시나 싶어 전화를 해보았더니, 받지 않으시더라고요.”

“전화요?”

정서의 목소리 끝이 조금 날카로워졌다.

이미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말한 일이었다. 

그러니 온전히 제 일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전화를 했다는 거지? 

누구에게, 설마 전지훈 기자에게?

“네. 그 기자님, 성함이 전지훈이셨잖아요. 출근도 안 하셨다는데.”

“제가 해결하겠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요.”

“지금까지 윤 변호사님께서 본부장님과 관련된 일 일체를 맡아서 진행하셨다는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제가 있을 때 벌어진 일이고 제 잘못도 있는 것 같아서……. 끝까지 책임지고 싶었어요.”

수연이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러자 어쩐지 억울하고 속상한 얼굴이 되었다.

마치 자신은 제 일에 책임을 다하고 싶었는데, 어찌 그것을 탓하냐 되묻는 듯한 표정이었다.

정서는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늘 해 오던 일이니 자신에게 맡기고 안심하라고 격려해야 할까?

그게 아니면 다 해결됐으니 걱정할 것 없다고?

“걱정하실 일 없습니다. 잘 해결했습니다.”

“…….”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정서가 하는 말을 믿어도 될지 수연이 살피는 것 같았다.

유쾌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 일만큼은 그녀의 일처리가 완벽했다고 보기도 애매했다.

마침 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던 중이기도 했고.

“그렇다면 다행이에요.”

한참만에 입을 연 수연이 작게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물끄러미 자신이 준 커피를 바라보았다.

아직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정서의 행동을 의식하는 것 같았다.

하는 수 없군.

정서는 커피를 들어 한 모금 삼켰다.

뜨거운 것에 영 젬병인 그녀가 천천히 커피를 마시자 그제야 수연은 조금 만족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입에 좀 맞으세요?”

“네, 좋네요.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한 정서의 눈에 복도 끝에 선 오토바이 헬멧을 쓴 남자가 들어왔다.

수연은 정서가 한눈을 파는 줄도 모르고 눈을 내리깐 채 말을 이었다.

“솔직히 어제는 경황이 없어서 제대로 말씀을 못 드렸는데…… 제가 이런 일을 하는 건 처음이에요. 그래서 많이 부족합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남자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복도 안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손에 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봐선 택배나 퀵 배달이 온 것은 아니고.

퀵 배달을 하기 위해 온 것이라면 조끼 같은 유니폼을 입었을 텐데.

기업과 제휴를 맺어 쓰는 업체는 단 한 곳이었다. 

견 때문에 퀵으로 합의서 등을 보낼 일이 많았던 정서는 회사를 드나드는 해당 업체 직원들의 얼굴이나 체격을 거의 다 익혔다.

저런 사람은 없었어.

이상한 예감이 그녀를 감쌌다.

그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이곳을 그냥 제멋대로 종횡무진으로 움직이게 둬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그래서 도와주셨으면 해요. 저 이 일 꼭 잘 해내고 싶거든요, 그러니까……. 윤 변호사님?”

수연은 제 말을 듣지 않고 어딘가 정신이 팔린 듯한 정서를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이미 남자는 둘의 시야에서 사라진 뒤였다.

정서가 다급히 몸을 일으켜 섰다.

“저, 수연 씨. 죄송해요. 잠시만요, 확인할 게 있어서.”

“네? 갑자기 무슨.”

“잠시만요! 금방 올게요.”

정서가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남자가 사라진 복도로 향하던 그녀의 시야에 복도 끝에서 비상계단의 문을 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비상계단은 출입증 없이는 드나들 수 없는 곳이었다.

“잠시만요.”

정서가 소리내어 남자를 불렀으나 야속하게 비상계단의 문이 닫혔다.

덕분에 그녀는 더욱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비상계단에 사원증을 대고 문을 열자, 그녀가 마주한 것은…….

“뭐야? 나한테 왜 그렇게 집착해요. 무섭게.”

“……너는.”

“이러면 곤란하죠. 난 설레는 사람인데, 이런 거에.”

헬멧을 벗어 드러난 나풀거리는 금발의 탈색모, 서글서글하게 큰 눈.

무엇보다 그림처럼 예쁘장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

아무리 타인에 무관심한 그녀라도 기억할 수밖에 없었다.

“차은호. 스물 셋. 서울시 XX구 XX동…….”

“아, 잠시만. 내 주소까지 외우고 있어요?”

“거기 안 살잖아.”

“그걸 어떻게 알아요?”

“온라인 부동산에 매물로 나와 있던데.”

“와…… 좀.”

“멋있어?”

“소름 돋는데.”

정서와 은호가 동시에 말했다.

그때였다.

누군가 비상계단의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아, 하견?”

견을 지칭하는 목소리가 들리자 자동으로 쫑긋 세워지는 정서의 귀를 아는지 모르는지.

은호는 그녀의 손목을 대뜸 쥐어 끌었다.

“뭐 하는,”

“쉿.”

은호가 정서의 입을 틀어막으며 그대로 정서의 몸을 뒤로 떠밀었다.

계단 위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시야에 단정한 구두가 들어왔다.

“걔는 그냥 별거 아니니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어차피 결재 신청 올리면 서류에 사인이나 하는 허수아비야. 하 회장님이 앉혀 둔 나부랭이나 다름없지. 오히려 골치 아픈 건 걔 뒤에 있는 여자야. 그 누구더라. 변호사, 있는데.”

정서는 저를 언급하는 것을 듣자 대번에 몸이 굳었다.

남자가 말하는 것은 누가 보아도 저였다.

물론 지금 제 입을 잘도 틀어막은 은호조차 아는 사실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