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85)

11.

“대체 뭘 설명하라는 건지…… 왜 이러세요. 이거 좀 놓고…….”

“다쳤잖아.”

“네?”

“내 것에 흠집 나는 거 싫다고 몇 번을 말해야 너는 알아듣지?”

아.

그제야 정서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신고 있는 검은 스타킹으로는 채 가려지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견의 눈썰미가 지나치게 좋아 미세하게 절뚝이는 그녀의 걸음걸이를 눈치챘거나.

“좀 넘어졌습니다.”

“얼마나 거창하게 넘어지면 손바닥도 까져?”

견이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손목을 쥐었다.

위로 향해 있던 손등이 뒤집어지자 생채기 난 손바닥이 드러났다.

붉은 상처가 불균형하게 난 손바닥을 가만히 보고 있던 견이 그대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묻었다.

살짝 쓰라린 느낌 위로 뜨거운 입김이 닿았다.

“……회사입니다, 본부장님.”

“여기가 어딘지는 나도 알고 있어.”

“아시면 거리를 지키시죠. 상처는 치료하겠습니다.”

“언제?”

“예?”

“이럴 때면 너는 손수건을 쥐여주곤 하지.”

“…….”

“그 촌스러운 냄새 나는 손수건.”

“시정하겠습니다.”

정서의 딱딱한 목소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견이 고개를 들었다.

치켜 올라간 그의 눈꼬리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대놓고 보여주었으나, 정서 역시 물러나기 싫었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흐트러진 그의 차림을 보니 더욱 그랬다.

“내가 싫다고 했어?”

“싫지 않으십니까?”

“오늘따라 삐뚜름하게 구네.”

“……아닙니다.”

“그냥 넘어진 게 아닌가? 예전에도 이상한 곳에서 허술해서 종종 넘어지곤 하더니.”

“…….”

“그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견의 목소리의 끝이 교묘한 빛을 띠었다.

마치 그녀가 그에게 미묘하게 날을 세우는 이유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아, 이거 아닌데.

잘못하면 말려들겠다 생각한 순간. 

정서의 허벅지를 쥐어 당긴 견이 장난스레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질투해?”

“……질투라뇨.”

“방금 이 비서가 여기서 나갔고, 나는 넥타이도 매지 않은 채로 셔츠 단추를 채우고.”

“…….”

“여기서 무슨 짓이라도 벌였을까 봐 신경 쓰이는 거 아니야?”

“그런 거 아닙니다.”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면서도 망설이지 않고 부정했다.

절대로 견에게 구실을 주면 안 된다.

조금이라도 그를 신경 쓰고 있다고, 혹시 둘이 무슨 관계라도 되었을까 봐 잠시 초조했다고.

그런 마음을 들킨다면 견은 분명 그것을 약점처럼 쥐고 흔들 것이다.

자신이 틈을 주지 않는 지금에도 이렇게 구는데, 만약 틈이라도 보인다면…….

그 이후는 상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정말?”

견이 되물었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서는 천천히 견에게서 뒤로 물러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정말입니다.”

견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그러나 아까부터 그녀를 살피는 것 같은 눈빛, 어쩐지 맹렬하고 의뭉스러운 기색을 띠는 눈빛만큼은 떨어지지 않고 그녀에게 와 붙었다.

“김 비서, 구급상자 있나?”

방심한 틈을 타 호출 버튼을 누른 견이 곧장 물었다.

정서가 그럴 것 없다며 황급히 견에게 다가섰지만, 견은 정서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듯 검지를 들어 보이더니 말을 이었다.

“가져다줘.”

― 다치셨습니까?

“아니.”

― ……예. 금방 가겠습니다.”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견은 쏟아지는 정서의 따가운 시선을 즐기듯 양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곧 들리는 노크 소리에 책상에 기대었던 몸을 일으켰다.

“들어와.”

정서는 뒤로 두 걸음 물렀다.

견과 가까운 거리에 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구급상자가 들어왔다.

테이블 위에 내려두던 김 비서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박 실장 다음으로 오래 일한 김 비서는 주로 경비 처리나 소소한 심부름을 맡았기 때문에 종종 정서와도 얘기를 나누곤 했다.

“…….”

김 비서의 시선이 정서를 훑었다.

정서는 그제야 뒤늦게 견의 차림새가 영 갖추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떠올렸다.

자기 때문이 아닌데, 졸지에 이런 오해를 받게 될 줄이야.

아니라는 뜻으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보인 정서를 보고 김 비서는 어색하게 미소 지으며 문을 빠져나갔다.

“와서 앉아. 목석처럼 서 있지 말고. 그리고 스타킹 벗어.”

“본부장님, 지금 그런 얘기를 나눌 때가 아닙니다.”

“벗으라는 얘기를 늘 그런 식으로 듣나, 윤 변호사는?”

견이 고개를 힐긋 들어 정서를 보았다.

구급상자를 열고 어느새 소독약까지 챙겨 든 다음이었다.

‘그런 식’에 힘을 줘 말한 건 일부러 정서를 창피하게 만들려는 것이겠지.

정서 역시 아무런 타격을 입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애써 화끈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고서는 견의 맞은편에 가 앉았다.

“거기 말고 여기.”

견이 자기 옆자리를 두드렸다.

정서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그럼 뭐가 중요한데? 어제 그 기자?”

“……예. 우선 막기는 막았지만,”

“막았는데 뭐가 걱정이야? 뭐 골칫거리라도 생겼나?”

견이 소독약을 꺼내 정서의 상처 위에 발랐다.

따갑고 알싸한 통증이 손바닥에 전해지자 정서가 손끝을 움츠리며 몸을 슬쩍 떨었다.

그 모습을 본 견이 피식 웃었다.

“애도 아니고 이런 거에 엄살은.”

“엄살 안 부렸습니다. 그리고 원래 소독약은 따가운 게 정상입니다. 누구처럼 생살을 꿰매도 안 아픈 게 정상이 아니라요.”

“내가 언제 정상이었던 적 있나.”

“드물게 혜안 깊으신 말을 하시네요.”

말은 그렇게 했어도 견의 손길은 조금 더 섬세하고 조심스러워졌다.

심지어 입술을 동그랗게 오므려 후, 하고 바람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동그란 뒤통수가 꼭 사과처럼 예쁘다.

견에게 붙을 수식어치곤 지나치게 깜찍하고 소담했지만, 그런 생각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언젠가 한 번은 쓰다듬어 보고 싶다.

무심코 한 생각에 정서가 스스로 놀라 물러날 때 즈음 견이 고개를 들었다.

“이제 못 미루지, 벗어.”

벗어.

위압적이지만, 강요하는 의사는 전혀 없다는 듯 쿨한 어조.

정서라면 어려웠을 것들이 견에게는 쉬워도 너무 쉬웠다.

“그건 곤란합니다. 들어오는 거 뻔히 보셨습니다, 다들.”

“그 고리타분한 정장 치마 아래 드러난 게 맨다리인지, 검은색 스타킹에 둘러싸인 다리인지는 나만 신경 쓰면 되는 일 아닌가?”

“…….”

황당함에 할 말을 잃은 정서가 가만히 견을 바라보았다.

견은 그런 그녀를 가만히 마주 보고 있더니 이내 씩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말을 쉽게 들으면, 윤정서가 아니지.”

“아셨으면 포기…….”

부우욱.

그때였다.

스타킹이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찬 바람이 그녀의 맨다리에 와닿았다.

“하견!”

정서는 그제야 견의 이름을 부르며 조금 큰 소리를 냈다.

그녀의 무릎께에 고개를 기댄 채 한쪽 무릎을 기대고 앉은 그가 마치 강아지처럼 그녀를 올려다보며 씩 웃었다.

“그러니까 말을 듣게 해 줘야지.”

“뭐 하는 짓이야.”

“걱정 마. 다른 짓은 안 해.”

지금 누가 그걸 걱정했냐고.

정서는 제 복숭아뼈 부근에 놓인 견의 손을 보았다.

허벅지 안쪽을 만지지 않고, 아래에서부터 차근히 찢어낸 것이 마지막 예의는 지킨 것만 같은 모양새였다.

미친놈인 주제에 지킬 건 또 지키는 게.

그게 진짜 웃긴 거지.

정서가 견을 밀어내려 어깨를 잡았지만, 견은 꿈쩍도 없었다.

“거하게도 다쳤네.”

“별거 아닌데 일 벌이지 마시죠. 더는 안 참습니다.”

“어차피 혼날 거, 마무리하고 혼나지 뭐.”

견은 가볍게 답하고는 소독약을 꺼냈다.

상처에 바르자 반사적으로 정서의 허벅지에 힘이 들어갔다.

슬쩍 들리는 그녀의 발뒤꿈치로 견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신고 있는 낮은 굽의 검은 구두를 따라 시선을 옮기자 옴싹하게 들어간 발목과 둥그렇게 솟은 복숭아뼈가 보였다.

탐스럽다.

그의 시선이 그 동그란 뼈에 고집스럽게 와 붙다가 그녀의 상처로 오른다.

연고도 제대로 바르지 않아 자칫하면 흉 질 것이 뻔한데 신경도 쓰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흔한 밴드 하나 붙이지 않고 스타킹을 신은 채 출근한 것을 보니.

“어제 곧장 집으로 간 게 아닌가?”

“네?”

“들어가는 길에 넘어질 만한 곳은 없던 것 같은데.”

“…….”

그걸 어떻게 알지?

견은 정서가 사는 곳에 와본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알기론 그랬다.

“아, 저번에 너 아프다고 해서 찾아갔었어.”

“기억이 없습니다.”

“기억을 못 하는 거겠지.”

“얼굴을 봤다면 기억하지 못했을 리가 없습니다. 게다가 제가 언제 아프다고…….”

“됐어.”

견은 정서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우스꽝스러운 꼴로 나갈 거 아니면 스타킹 벗어.”

“됐습니다. 차라리 이 꼴인 게 낫습니다.”

“내가 스타킹 찢는 취미가 있다고 전사에 알리게?”

“…….”

“기다려.”

견은 그렇게 말하고는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정서가 말릴 틈도 없이 어딘가로 전화를 건 그가 입을 열었다.

“스타킹 좀 부탁합니다.”

“!”

정서는 하다하다 이제 누군가에게 스타킹 심부름을 시키는 견에게 경악해 눈이 크게 뜨였다.

황급히 말리려 뻗은 그녀의 손을 견이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예. 신는 스타킹 맞습니다. 기왕이면 속이 비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끊어, 얼른.”

공기가 많이 섞인 목소리가 정서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속삭임의 형태를 띤 아우성에 가까웠다.

견은 정서와 눈을 맞추고 씩 웃으며 다음 말을 덧붙였다.

“천천히 와도 괜찮습니다, 이 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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