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바닥에 부딪힌 손바닥과 무릎이 시렸다.
하지만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집에서 막 뛰쳐나와 달리는 남자가 향한 곳은 비상계단이었다.
오 층이었으니, 계단이 더 빨랐다.
정서는 바닥을 짚고 일어나 절뚝거리며 계단으로 뛰어갔다.
“전지훈 기자님! 전지훈 씨!”
남자의 이름을 외치며 따랐지만, 남자의 발소리는 점점 더 멀어졌다.
이대로 놓칠 순 없었다.
별안간 왜 그녀를 밀치고 도망간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지금 놓쳐선 안 된다는 사실만은 확실했다.
한참을 걸어 내려가자 주차된 차에 시동을 걸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정서는 하필이면 택시를 타고 온 저의 판단을 자책하며 남자를 붙잡기 위해 달리고 또 달렸다.
남자가 저를 따라오는 그녀를 보고 황급히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잠시만요, 저기요!”
정서는 끼익 소리와 함께 출발하는 차를 보고 눈을 깜빡였다.
여기서 놓치면 끝장이다.
안 그래도 하 회장에게 아버지라는 약점을 잡힌 상황인데 여기서 더 물러날 수는 없었다.
하는 수 없었다.
눈 딱 감고 정서가 차 앞으로 뛰어들었다.
차의 헤드라이트로 인해 그녀의 얼굴이 밝아지는가 싶더니 차 바퀴가 아스팔트와 마찰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반사적으로 몸이 웅크려졌다.
무언가가 정서의 위를 덮치는 느낌이 점점 가까워질 때였다.
“미쳤어요?”
얼마나 지났을까, 목소리가 들려왔다.
질끈 감았던 눈을 천천히 뜨자 모자를 쓰고 선 젊은 청년이 보였다.
눈이 동그랗고 전체적으로 미남 상인 남자였는데, 모자를 깊게 눌러쓴 터라 고개를 숙이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적어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 남자는 전지훈 기자가 아니다.
그렇다면 전지훈 기자의 집에 든 도둑이라도 되는 걸까?
그래서 이렇게 다급히 도망치는 거라면?
뒤늦게 정서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기자라면 무조건 붙잡고 보아야 했지만, 다른 종류의 범죄자라면 정서가 끼어들 일이 아니었다.
“그, 저 그러니까…….”
그녀가 어색하게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무르기 시작했다.
남자는 그런 정서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마치 누구인지 기억하려는 눈빛이었다.
어둠 속에서 번뜩이는 눈빛이 제법 두려웠다.
모자 아래로 비죽비죽 튀어나온 탈색된 머리칼이며 시원하게 긴 입꼬리 같은 것이 꼭 사람을 홀릴 것처럼 잘 생겨서 더욱 그랬다.
도망가.
정서의 본능이 경고하던 순간이었다.
하필이면 뒤로 내딛던 다리가 꼬였다.
순식간에 몸의 중심이 무너졌다.
뒤로 넘어가며 정서는 생각했다.
정말 가지가지 한다고.
“확실히 미쳤네.”
남자는 단언하듯 그렇게 말하고선 정서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순식간에 그녀의 몸이 남자의 품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큰 체격 때문인지 남자는 무리 없이 정서를 일으켜 세웠다.
잠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이 놀라웠다.
그저 아이 같았다.
대학이나 다닐 나이로 보였고, 누군가의 집에서 다급히 빠져나왔다고 하더라도 강도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순진히 사람을 믿기에는 그녀의 인생이 녹록지 않았다.
정서가 밀쳐내자 남자는 그녀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차에 뛰어든 패기는 어디에 두고 이제 와 무서워하지?”
“그야…… 나는. 것보다 거기 당신 집 아니잖아. 당신 누구야?”
“아…… 역시, 역시 맞구나.”
남자는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서의 얼굴에 의문이 피어올랐다.
“내가 누군지는 중요하지 않고, 나보다 늦었다는 게 중요하지.”
“뭐?”
“당신이 원하는 정보는 내가 가져갈게. 당분간 풀진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좋아.”
알고 있다.
정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 남자는 정서가 누구인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이곳에 왔는지 확실히 알고 있었다.
어떻게?
정서는 눈을 크게 치떴다.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러니까 이만…… 뭐야?”
남자가 뒤를 돌아 차로 향하려다 정서에게 팔이 붙잡혔다.
정서는 남자에게 바짝 다가서며 눈을 맞췄다.
“내놔.”
“뭐라고요?”
“내가 원하는 정보, 내놓으라고.”
“하, 이게 막무가내로 들이댄다고 받을 수 있고 그런 게 아니거든요.”
“아니면? 뒤지는 수밖에.”
정서가 손을 뻗어 남자의 바지춤을 더듬기 시작했다.
남자는 기겁하며 몸을 뒤로 물렀다.
순간 닿은 허벅지의 단단한 감촉이 그녀의 손바닥 위를 헛헛하게 맴돌았다.
“변태예요? 남의 몸을 막…….”
“아까 밀친 값이라고 생각해.”
남자의 시선이 그제야 힐긋 생채기가 난 정서의 무릎과 손바닥을 향했다.
뒤늦은 죄책감 같은 것이 남자의 얼굴에 피어오르는 것을 보며 정서는 확신했다.
풋내기다.
이 남자는 풋내기였다.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밀치고 차로 올라타 가버려야 했다.
더불어 그는 어쩌면 일의 내막까지는 잘 모르고 있을지 몰랐다.
어떤 정보를 가져오라는 말만 듣고 단순히 고용된 알바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 가능성이 컸다.
“얼마 받았어.”
“네?”
“그거 전달하는 조건으로 얼마 받았냐고. 그래 봤자 백이나 이백 정도지. 더 줄게. 얹어서 더 줄 테니까 나한테 넘겨.”
“허, 참. 웃기는 여자네.”
남자의 입에서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정서는 남자가 입고 있던 블루종의 지퍼를 내렸다.
그리고 드러난 남자의 가슴팍 안으로 불쑥 손을 넣었다.
“아, 미쳤어요? 뭐 하는 거야.”
“존대를 할 거면 하고, 말 거면 말아.”
정서는 딱 잘라 말하며 남자의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순식간에 지갑을 열어 보자 신분증이 나왔다.
차은호, 스물세 살.
정보 값이 빠르게 입력됐다.
“차은호.”
“내놔요.”
은호가 정서의 손에서 지갑을 거둬갔다.
정서는 은호의 얼굴을 빤히 살피며 말했다.
“난 누구든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허튼 생각은 하지 말고, 얌전히 넘기는 게 좋을 거야.”
“네. 그럼, 뭐. 또 뵙는 걸로 하죠. 전 이만 갈게요. 진짜 늦었거든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은호의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은호는 정서를 뒤로 밀어내곤 차에 뛰어들지 말라 한 번 더 경고했다.
완력으로 은호가 가진 것을 빼앗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작디작은 USB를 어디에 뒀을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고.
그렇다면 그녀가 선택할 방법은 하나다.
“받아!”
차 문을 닫기 전 가까스로 정서는 자신의 명함을 던져 넣었다.
은호는 운동 신경이 좋은지 그것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받아냈다.
“전화해.”
정서의 말에 은호는 의미를 알 수 없이 웃어 보이는가 싶더니 곧 차를 출발시켰다.
미끄러지듯 출발해 멀어지는 차를 보고 정서는 크게 한숨을 내뱉었다.
하루가 길어도 너무 길었다.
피곤했다.
어쨌든 내일 아침에 기사가 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했다.
택시를 부르며 정서는 출근 전까지 잘 수 있는 시간을 계산했다.
어림잡아 네 시간이었다.
&
“오셨어요, 변호사님.”
“네, 오랜만입니다.”
본부장실 밖에 위치한 사무실에는 견을 보필하는 세 명이 앉아 있었다.
어떤 본부장이 비서를 셋이나 두고 쓸까 싶었지만, 견의 사정은 좀 달랐다.
워낙 사고를 많이 치고 다니니 잔심부름부터 일정 관리, 업무 관리까지 세 사람은 있어야 했다.
물론 그러고서도 정서가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별일 없죠?”
정서의 물음에 박 실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었다.
새벽을 거의 뜬눈으로 지새우고 나오는 길까지 여전히 아무런 기사도 올라오지 않았다.
뒤늦게 연락된 정다연 기자는 전지훈 기자가 오늘 연차를 내고 출근하지 않았으며, 혹시 데스크로 올라오는 기사가 있거든 바로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니 일단 한 고비는 넘겼다.
문제는 다음 고비다.
혹시나 은호에게서 연락이 올까 싶어 핸드폰을 꼭 움켜쥐고 있었지만, 핸드폰은 잠잠하기만 했다.
마치 그녀를 새까맣게 잊은 것처럼 말이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박 실장이 걱정되는 얼굴로 정서를 보았다.
정서는 그저 힘없이 웃어 답했다.
수연의 자리를 힐긋 보니 비어 있었다.
“아, 하견 본부장님께서 따로 심부름을 시킨 모양입니다.”
“심부름?”
“예. 보아하니, 뭔가 맡길 게 있으신 모양이더라고요.”
둘이서? 아침부터?
묘하게 속이 뒤틀렸다.
그러나 정서는 내색하지 않았다.
곧 문이 열리고 본부장실에서 수연이 빠져나오는 것이 보였다.
수연은 상기된 뺨을 한 채였다.
어쩐지 표정에 동요가 깃들어 있었는데 그것이 들뜸인지 창피함인지는 알 도리가 없었다.
“…….”
정서가 인사할 틈도 없이 수연은 고개를 짧게 숙인 채 빠르게 정서를 지나쳐 걸었다.
비서실을 빠져나가 복도로 향하는 발걸음이 급했다.
정서는 고개를 갸웃 기울이고선 걸음을 천천히 본부장실로 옮겼다.
똑똑.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 견은 셔츠 단추를 채우고 있었다.
왜?
도대체 왜?
아침부터 셔츠 단추를 채울 일이 뭐가 있다고? 왜 벗었는데? 넥타이는 왜 풀고 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은 정서의 걸음이 뚝 멎었다.
견은 고개를 들어 정서를 한 번 보더니 얼굴을 와락 구겼다.
기분이 대번에 상한 사람 같았다.
성큼성큼.
견이 정서를 향해 걸어왔다.
정서는 그 자리에 멈춰 서 그의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눈으로 훑었다.
둘이 뭘 했길래?
그런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그녀의 시선이 테이블에 올려진 반쯤 비워진 찻잔을 향했다.
어딘가 씁쓸한 향이 나는 것이 홍차 같았다.
“뭐야, 너.”
“……무슨 말씀이십니까.”
견이 정서의 턱을 움켜쥐었다.
그리고선 그녀의 얼굴을 들어 이곳저곳 꼼꼼히 살피는가 싶더니 곧 손을 내려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한 손 안에 가득 들어찬 그것을 들어 올린 견이 말을 이었다.
“설명해.”
“무슨 말씀이신지부터, 말을 해야…….”
“설명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