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정서는 귀가 아파 순간적으로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냈다.
노기가 가득한 하 회장의 목소리는 오랜만이었다.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을 몇 번 보인 적이 없는 사람인데.
순간 불안감이 엄습했다.
“회장님, 무슨 일로 이러시는 건지…….”
― 고작 애 하나를 다루지 못해 이 사달을 만들어? 그 망나니 자식이 멋대로 날뛰지 못하게 하라고 내가 몇 번을 일렀는데.
설마. 설마 벌써 기사가?
말도 안 돼.
사회부 기자라면 오전에 기사를 낼 터였다.
시간이 벌써 자정을 향해 가는데 이 시간에 누가 기사를 쓰고 읽는단 말인가.
황급히 핸드폰을 들어 포털 창을 열었다.
― 건방지게 이제는 대답조차 없구나.
귀에서 떼어 낸 핸드폰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대답해야 하는데, 뭘 알아야 대답을 하지.
정서는 ‘죄송합니다’라고 짧게 대답하며 ‘하견’으로 검색한 결과 창을 확인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몇 시간 전에 검색했을 때와 결과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최신순으로 보아도 그랬다.
혹 SNS 상에 올라온 것이 있을까 싶어 세 개의 SNS를 번갈아 확인해 보았지만, 그것 역시 잠잠했다.
“…….”
그럼 기사는 아직 안 나갔다.
기사가 나가기 전이라면 이 일 때문에 화가 난 것이 아닌가?
그새 견이 다른 사고라도 쳤단 말야?
도무지 알 수 없는 답답함에 정서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안쪽에서는 견의 보호자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정말이지 첩첩산중이었다.
“회장님께서 노하신 이유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었다.
우선 하나씩 해결하는 수밖에.
물론 이유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지만, 뒤지다 보면 나올 것이다.
“제가 해결하고 다시 연락드릴 테니 염려 마세요.”
― 가진 것 없이 자신만만한 건 여전하구나. 한시라도 빨리 수습하는 게 좋을 거다.
뭐라 덧붙일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정서는 황망히 핸드폰을 내려보았다.
그리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응급실로 들어섰다.
처치 의자에 앉아 있는 견은 양복을 무릎께까지 걷어 올리고 있었다.
정강이뼈를 따라 기다랗게 난 상처를 꿰매는 중이었다.
당황한 정서의 얼굴에 핏기가 가시자 견이 손을 들어 그녀의 눈 앞을 가렸다.
“부를 필요 없다고 내가 말했을 텐데.”
“아무리 그래도 보호자님께서 아시는 게 도리라…….”
“아니에요.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상태가 어떤가요?”
“네 바늘 정도 꿰매면 될 것 같네요. 마취를 했습니다만, 아프긴 아플 겁니다.”
정서는 제 눈 앞을 가리고 있던 견의 손을 쥐어 내렸다.
그러나 놓지는 않았다.
꿰매는 동안 내내 잡고 있을 생각이었다.
견은 그런 정서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입꼬리를 씩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정서의 턱을 부드럽게 쥐었다.
“이쪽 봐, 이쪽. 소독약 치덕치덕 바른 상처보다 반반한 낯짝이 훨씬 보기 좋잖아.”
“…….”
보는 눈도 있는데 뻔뻔스러운 소리를 잘도 했다.
이런 상처를 가지고도 어떻게 아프단 내색 한 번을 안 했는지, 운전하는 내내 불편하진 않았는지.
정서는 속이 상했다, 저도 모르게.
“그런 다리로 잘도 운전하셨네요. 절뚝이지도 않으세요?”
“다친 줄도 몰랐는데.”
“정말 그러셨으면 신경이 죽었단 소린데, 영 심각하네요.”
정서는 미간을 찡그린 채로 되받았다.
견이 그런 정서를 가만히 바라보다 그녀의 손에 놓인 자신의 손에 힘을 주었다.
정서의 시선이 다시 견을 향했다.
“기사 때문에 그래?”
“예?”
“윤정서 기분 안 좋잖아, 지금.”
“상사가 다친 사실을 숨겨서요.”
“그거 아닌데. 다른 이유가 있는데.”
견이 눈을 가늘게 뜬 채 정서를 보았다.
샅샅이 살피는 모습이 금방이라도 무얼 알아내려는 사람의 기색 같았다.
하지만 알아낼 수 있을까.
“말 안 듣는 상사 말고 무슨 이유가 더 필요한지…….”
사실이긴 했다.
정서가 하 회장에게 깨진 이유도 오롯이 견 때문이었으니까.
따지고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그녀가 시선을 떨구자 견이 예쁘게 입꼬리를 올렸다.
“다시 봐봐.”
“네?”
“내 얼굴 봐. 그럼 풀리지 않을까?”
“본부장님.”
“응?”
“화를 돋우는 방법엔 몇 가지가 있는데…….”
굳이 말을 잇지 않고 정서는 눈을 치켜떴다.
그러자 견이 사르르 눈꼬리를 내리며 웃었다.
그 나름의 애교였다.
정서는 뒤늦게 이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그것도 본인의 직무와 의무 때문에 자리를 피하지도 못하고 견디고 있는 의료인의 비애를 떠올렸다.
의사와 눈이 마주치자 정서가 어색하게 웃었다.
“나한테는 웃어 주지도 않고.”
“제발, 입을 다물어 주세요. 차라리 비명을 지르시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아픈 거 참지 마시고.”
정서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견이 속도 없이 그런 그녀의 손등을 엄지로 쓱 훑었다.
별거 아닌 동작이었는데도 손가락에서 전해지는 열감 때문인지 기분이 묘했다.
괜히 몸 구석 어딘가가 간지러운 느낌이 들었다.
“다 됐습니다.”
의사는 드디어 해방이라는 듯 거뜬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납을 완료하자 처방전이 나오고, 당분간 무리한 움직임을 삼가라는 주의가 내려왔다.
“무리한 움직임이라면…….”
견이 말끝을 흐리는 것을 보고 정서가 참지 못하고 그의 소매를 쥐어 끌었다.
뒷말은 안 들어도 알았다.
나 아파, 환자야.
뒤늦게 앓는 소리를 하며 견이 걸음을 옮겼다.
정서는 어처구니 없다는 듯 견을 바라보았다.
“본부장님!”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커피를 챙겨 든 수연의 모습이 보였다.
정서는 견을 부축하던 손을 슬쩍 내렸다.
수연은 어색하게 떨어진 자리에 멈춰 섰다.
“괜찮으세요? 어디 다친 곳은…….”
“처치 다 끝났습니다. 가시는 길은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네가?”
“예. 제가 운전하겠습니다.”
정서가 견에게 손을 내밀었다.
차 키를 달라는 몸짓이었다.
견이 고뇌하는 표정을 지었다.
얼굴에는 의심을 가득 띄운 채였다.
그 장난이 오래될수록 수연의 표정이 굳었다.
정서는 당장이라도 견의 손에서 차 키를 가져오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내리누른 채로 애써 웃었다.
“믿어도 되려나?”
“예, 괜찮습니다. 본부장님.”
“그래, 그러면. 뭐.”
견이 한참 만에 키를 건넸다.
그러자 수연이 견에게 다가섰다.
“부축해드리겠습니다.”
“부축?”
“예. 다리를 다치신 것 같아서.”
수연의 시선이 견의 다리로 향했다.
짙은 색의 정장에 피가 얼룩진 것이 얼핏 보였다.
견의 시선이 정서를 향했다.
왜 하필 이 순간에 자신을 의식하는 걸까, 견은.
정서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황급히 차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시죠. 그런데 나를 지탱할 수 있습니까? 연약해 보이는데.”
“물론입니다. 편히 기대세요.”
수연이 냉큼 견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견은 그런 수연을 힐긋 내려보았다.
수연에게서는 옅은 향수 냄새가 났다.
산뜻한 과일향이.
“…….”
“…….”
그 사이, 벌써 차에 도착해 운전석의 문을 열고 있던 정서가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견은 자연스레 수연과 몸을 밀착한 채였다.
수연의 몸이 긴장으로 조금 굳는 것이 느껴졌다.
붉게 달아오르는 수연의 귓바퀴를 보며 정서는 고개를 돌렸다.
신경이 쓰였다, 이상하게도.
견이 수연에게 순순히 기댔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그라면 됐다고 성가셔 할 것이 분명했다.
이제껏 모든 비서들에게 그랬다.
왜 수연이 예외가 됐을까?
아까까지만 해도 자신과 투덕거리기 바빴으면서.
이상하게도 서운함이 몰려왔다.
애써 무시해야 했다.
감정의 동요는 들키는 순간 약자가 되는 것이다.
애써 감정을 숨기고 운전대를 잡자 다리가 닿지 않았다.
견과 그녀의 피지컬 차이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서가 자신의 신체에 맞춰 조정하는 사이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타시죠, 본부장님.”
수연의 부축을 받고 걸어온 견이 고개를 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느릿하게 안을 훑는 시선의 끝에 정서가 걸렸다.
어쩌면 조수석에 탈지도 모르겠다 생각하는 것도 잠시, 견은 수연의 말을 따랐다.
얌전히 뒷좌석에 오르고 그 반대편으로 수연이 탔다.
완전히 기사가 됐다, 정서는.
역시 묘하게 기분이 상했으나 애써 태연을 가장했다.
벨트를 매는 것을 확인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고작 이십 분 남짓한 거리가 어찌나 멀게 느껴지던지.
정서는 정적에 휩싸인 차를 열심히 몰았다.
&
새벽 두 시.
정서는 잠들 수 없었다.
정다연 기자에게 연락을 했지만, 아직 답이 없었다.
늦은 시간이라 잘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사진을 찍었다는 기자에게 직접 연락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신호가 몇 번이 울리도록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단체로 짜고 치나?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사회부가 어째서 견을 쫓아다니는지, 대체 하 회장이 알아낸 정보는 무엇인지.
무엇 때문에 그렇게 길길이 화를 내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해결되지 못한 문제를 쌓아 두고 마음 편히 잘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정서는.
쿵쿵쿵.
결국 그녀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직접 찾아가는 것.
정서는 택시에서 내려 문을 두드렸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그 기자가 미혼이었다는 사실이었다.
온 가족이 산다고 해도 깨웠어야 할 노릇인데, 그나마 죄책감이 덜했다.
“전지훈 기자님, 나와 보시죠.”
정서는 다시 한번 문을 두드렸다.
어떻게 해서든 얼굴을 보고, 그 데이터를 파기해야 했다.
대체 무슨 이유로 견을 쫓아 영원까지 찾아왔는지 알아내는 것은 덤이었다.
복도식 아파트 창문 안쪽을 힐긋 들여다봤다.
집에 없나?
조용한 사위에 복도에 꺼져 있던 불이 툭 하고 꺼졌다.
그때였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누군가 정서를 옆으로 툭 밀쳤다.
그녀의 몸이 그대로 바닥으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