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 비서님.”
“네, 변호사님.”
“연락하세요, 박 실장님께.”
“네?”
의외로 정서의 대답은 단출했다.
연락해보라는 그녀의 말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수연이었다.
수연의 되물음에 정서는 별일 아니라는 듯 은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연락해서 확인해 주세요. 그동안 저는 본부장님을 차로 모시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뇨, 본부장님은 제가…….”
“편히 전화해요. 박 실장이 뭐라고 할지 궁금하네.”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견이 입을 열었다.
좀체 끼어드는 일이 없고 무심하기만 한 그로서는 다소 낯선 반응이었다.
정서가 견을 바라보았다.
견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일부러 그랬다, 견은.
명백했다.
“……차로 가시죠.”
정서는 견의 낯선 반응을 의식하면서도 짐짓 당황하지 않은 척 말을 이었다.
견은 그녀를 따라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뒤늦게 정서는 깨달았다.
기사가 없다는걸.
기사님이 없었다.
견이 직접 운전해 오겠다고 고집을 부려, 차 앞에 선 것은 세 사람뿐이었다.
이렇게 되면 수연이 운전하고 견이 뒷좌석에 타고 자신이 조수석에 타는 것이 옳은가?
아니면 자신이 운전을 하고 둘을 뒷좌석에 태워?
“무슨 생각을 해? 안 타고.”
거침없이 차로 향한 견이 조수석의 문을 열어 주었다.
여기 타라는 건가?
운전 시키는 게 못 미더워서?
정서가 머뭇거리며 차에 타자 견은 곧장 운전석으로 향했다.
“어?”
아니, 이건 예상에 없는 선택지다.
어떤 상관이, 그것도 재벌 후계자가 자기 아래 일하는 사람 둘을 태우고 기사 노릇을 한단 말인가.
게다가 이러면 수연이 뒷좌석, 그것도 상석에 타야만 했다.
“잠깐만요, 본부장님.”
“왜?”
“거기 타시게요?”
“그럼 내 차를 내가 운전하지 누가 운전해?”
“……그럼 제가 뒤로 가겠습니다.”
“됐어.”
견은 그렇게 말하며 몸을 정서의 쪽으로 숙였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에 그녀의 몸이 굳자 그가 긴장하지 말라는 듯 씩 웃어 보였다.
“재밌네.”
“……뭐가 그렇게 재밌으세요.”
“윤정서한테 대드는 사람, 오랜만 아니야?”
달칵.
벨트를 채우는 소리가 들렸다.
견은 정서가 그 자리에 위치하도록 못을 박았다.
그저 이 상황이 흥미롭기만 한 모양이었다.
정서가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든 게 아니라 이 비서님은 본인의 일을 하신 겁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든 그저 넘어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어쩌면 이 일에 더 적합한 분이실지 모르죠.”
“그런데도 굳이 전화를 걸어 확인해 보라고 했다?”
“…….”
“그건 박 실장이 윤정서 편 들어줄 걸 확신해서였잖아.”
견의 말이 옳았다.
정서는 박 실장이 그녀의 말을 들어 줄 것을 알고 있었다.
누구보다 그녀를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틈만 나면 전화해 견의 위치를 물었던 이였으니, 그녀의 의견을 무조건 따르라 전할 것이 분명했다.
차라리 우선적으로 확인시켜 주는 편이 나았다.
견에게 다른 마음을 품은 사람이라면 더욱 그랬다.
견은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며, 상관으로 모시기에도 벅찰 지경이니 혹여라도 연애 상대로 본다면 단념하는 편이 좋을 거라고.
“예, 맞습니다.”
“확인 사살이라니, 잔인하네.”
“제가요?”
정서는 태연히 되물었다.
정작 그녀가 궁금한 것은 왜 그 타이밍에 견이 끼어들어 상황을 중재했는지였다.
평소라면 그냥 지켜보고 말았을 것을.
아니다, 오히려 그녀를 곯려 주려 일영 병원으로 가자 앞장섰을지도 몰랐다.
“그래요, 네가요.”
“새로 오셨으니 적응할 시간이 필요하시겠죠. 전 그 시간을 드렸을 뿐입니다.”
“그래, 뭐. 그런 걸로 해.”
견은 이쯤 물러날 생각이었다.
정서가 핸드폰을 꺼내 저에게 온 연락을 확인할 즈음 뒷좌석의 문이 열렸다.
“……선웅 병원으로 가겠습니다.”
수연은 낯빛이 좋지 않았다.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는 안 봐도 뻔했다.
박 실장은 가혹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하는 일에 있어서는 똑 부러지는 사람이었다.
아마 정서의 말을 듣고 나서 정서 나름의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
정서는 옆에서 저를 바라보는 견의 시선을 느꼈다.
한 방 먹은 것을 잘 되갚아 줬다는 칭찬이 담긴 시선이었으나, 유쾌할 것은 없었다.
“본부장님, 그런데 왜 거기 타 계신지 여쭤도 될까요?”
“편히 앉아요, 이 비서. 어차피 운전은 내가 할 테니까요.”
“예…….”
수연의 시선이 흘깃 정서가 앉은 조수석을 향했다.
괜히 가시방석이네.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며 반사적으로 안전벨트를 손으로 쥐었다.
그게 수연에게는 자리를 지키고 싶어 하는 것처럼 얄미워 보일 줄도 모르고.
“그럼 출발하지. 벨트 매요, 이 비서.”
“아, 네. 감사합니다.”
수연은 저를 챙기는 듯한 견의 목소리에 잠깐 뺨이 상기됐다.
물론 정서는 그것을 알아차릴 정신이 없었다.
그녀가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패드를 꺼냈다.
그리고 전영 데일리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이 비서님.”
“네?”
시간이 없었다.
기사가 터지기 전 어쩌면 그 자료를 빌미로 연락을 해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반드시 이 소식조차 하 회장의 귀에 들어갈 터였다.
하 회장이 말한 그 숨겨진 장손이 자랄 때까지 후계자의 자리는 견이 지켜야 했다.
오히려 굳건해 보일수록 좋았다.
아들이 제 몫을 해내면 하 회장의 입지를 지키는 것에 도움이 될 테니까.
“연예 쪽뿐 아니라 정치 쪽으로도 한 번 훑어보세요.”
“아, 네…….”
아까의 일로 자존심이 상했겠지만, 게다가 뒷좌석에 탄 것이 마음이 쓰이겠지만.
수연의 마음까지 돌봐줄 시간은 없었다.
그래도 격려의 말을 하나 건네야 하나?
박 실장이 알아서 잘 말했겠지?
그런 생각을 했을 때 차는 부드럽게 대로변에 접어들었다.
뒤늦게 다쳤을 견이 걱정되었다.
아무리 멀쩡해 보인다지만 운전을 맡겨도 될까.
그런 생각을 하며 무심결에 정서가 견을 빤히 바라보자 그가 입을 열어 낮게 읊조렸다.
“닳아져.”
“네?”
“너무 빤히 보면 닳아진다고.”
“아…….”
“공과 사는 가려서 합시다. 잘 하시잖습니까, 윤 변호사님.”
굳이 짓궂게 한 번 더 덧붙인다.
뒤에서 빤히 수연이 듣고 있는 걸 알면서 그런다.
정서가 견을 잠시 매서운 눈초리로 보다가 이내 시선을 돌렸다.
일정을 정리해야 했다.
급하게 올라가게 되었으니,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 짐을 챙겨 달라고 부탁해야 하는데.
“잠시 통화하겠습니다.”
핸드폰을 들어 비서실에 있는 박 실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아까 통화한 것 때문인지 다행히 바로 전화를 받았다.
“늦은 시간에 연락을 드려 죄송합니다. 혹 괜찮으시면, 비서실에 있는 직원 한 명만 로만 호텔로 보내 주시죠. 될 수 있으면…….”
― 뒤탈 없는 직원으로 보내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 본부장님께서는 괜찮으십니까?
“보고 받은 바 없으세요?”
― 네? 예, 없습니다. 아까 다치셨다는 연락만 받았는데요.
이상했다. 방금 수연이 박 실장에게 전화를 해 확인했다면 구태여 정서에게 다시 견의 상태를 물을 필요는 없을 터였다.
정서의 시선이 룸미러를 향했다.
수연은 심각한 얼굴이 되어 정서가 건네준 태블릿 PC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제가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쉬세요, 박 실장님.”
― 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으십니다, 윤 변호사님.
정서는 태연한 척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가방에 넣었다.
견이 그런 그녀를 흘깃 바라보았다.
정서는 아무런 동요 없이 전방을 주시했다.
조금 뒤 수연이 정서에게 태블릿 피씨를 건넸다.
“여기요. 여기, 이 사람인 것 같습니다. 혹시 괜찮으면 본부장님께서 한 번 확인해 주실 수 있을까요?”
수연의 시선이 조심스럽게 견을 향했다.
마침 신호에 맞춰 정차한 차에 견의 시선이 태블릿을 향했다.
맞는 듯 눈썹 한쪽을 들어 올리더니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맞는 것 같네요. 실력 좋네, 이 비서님.”
수연이 견의 말을 듣고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정서의 시선이 잠시 견을 향했다가 돌아왔다.
이상하다. 기분 나쁠 것도, 신경 쓸 것도 아닌데.
왜 신경이 쓰이는 거지.
알 수 없다.
“수고하셨습니다.”
정서는 페이지 속 얼굴과 인적 사항을 확인했다.
전지훈 기자, 사회부.
역시 타켓이 장소영은 아니었다.
연예부 기자가 아닌 사회부 기자가 견의 뒤를 쫓았다는 건, 견이 누군가의 타깃이 됐다는 건데.
“제가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예. 혹시 제가 도울 일이 있으면 언제든 말씀 주세요.”
수연은 매끈히 웃어 보였다.
기분이 상했던 것이 금세 풀린 건가?
견의 말 한마디면 사르르 풀려?
의외로 쉬운 타입일지도.
“네, 감사합니다.”
의뭉스러운 기분이 들었으나 그것도 그뿐이었다.
차가 매끄럽게 어둠을 갈랐다.
우선은 전영데일리 쪽에 아는 사람이 있는지, 정서와 견의 편이 되어줄 사람이 있는지 확인하는 게 급선무였다.
정서가 연락책을 찾는 동안 세 사람은 어느새 서울에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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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웅 병원 응급실은 한산했다.
견은 모든 검사를 마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게 하겠다는 정서의 말에 고분고분 검사실로 향했다.
커피를 사 오겠다며 멀어지는 수연의 뒷모습을 보며 정서는 핸드폰을 들었다.
「전영데일리 정다연 기자 010-XXXX-XXXX」
문자 내용은 단출했다.
로펌을 다니던 시절에 정서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는 기자였다.
정서가 가진 정보 두엇을 내주어서라도 기사가 나가는 것을 막는 편이 나았다.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려던 때에 핸드폰이 울렸다.
하 회장이었다.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이 시간에 하 회장이 전화를 걸 이유가 뭐가 있지?
그녀는 입안의 여린 살을 습관적으로 깨물며 전화를 받았다.
그러자 대뜸 고함이 들렸다.
― 어디서 뭘 하고 돌아다니는 거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