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85)

06.

돌연 결혼을 허락하겠다니.

정서는 갑작스럽게 돌변한 하 회장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아까까지 아버지를 빌미 삼아 흠잡을 땐 언제고 갑자기 결혼을 허락하겠다니.

자연스레 아랫입술이 떨렸다.

“방금까지 제게 흐르는 천박한 피를,”

“대신 조건이 있다. 한 달 안에 그 자식이 옴짝달싹 못 할 치명적인 문제 하나를 일으켜 주기로 한 약속 기억하지.”

“……기억합니다.”

대화의 흐름을 종잡을 수 없다. 

정서는 성급히 일을 그르치지 않으려 인내했다. 

반면 하 회장은 제 몫의 찻잔을 들어 후하고 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태도를 고수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한순간도 약자로 보이고 싶지 않은 그의 오만이었다.

참을성이 유난히도 없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멱살이라도 흔들며 묻고 싶은 마음을 애써 숨기고 있을 때 비로소 주름진 입술이 열렸다.

“그 문제가 네가 되었으면 한다.”

“네?”

“생각해 보니 한 달 안에 네가 약점을 쥐여준다고 해도 그걸 내가 어떻게 믿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되레 그 자식과 짜고 나를 상대할지도 모르지 않니.”

정서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제 와 신의의 문제를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설령 그 문제를 걸고넘어진다고 하더라도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그저 그녀가 다시 커리어를 쌓아 복귀할 발판을 마련하기 전까지 기댈 구석이 백영 뿐임을 어필하는 수밖에는.

“회장님, 그 문제라면 염려치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게다가 제가 정말 결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오히려 본부장님의 편에 설 확률이 높아지는 걸 텐데요.”

“과연 그럴까?”

“대체 왜 이러시는지 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성적이지 못한 선택이십니다. 회장님께서 이렇게 행동하시는 거, 회장님답지 않습니다.”

“자신답지 못하게 행동하는 건 그 자식이다.”

하 회장이 혀를 내어 입술을 훑었다. 

지긋한 주름이 그의 이마에 잡혔다. 

정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중을 파악해야 했다. 

마음을 읽어서, 주도권을 쥐어야 했다.

“개차반처럼 살며 경영 의지조차 보이지 않던 놈이 네 이름만 들으면 이빨을 드러내.”

“그게 무슨…….”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은 큰일을 할 수 없는 법이지. 그러니 네가 길들여라. 그리고 내가 신호를 주면 같이 사라져 주는 거야. 아이가 클 때까지만이다.”

아이? 

아이라면, 설마.

하 회장의 장손에게 숨겨진 아이가 있었던 건가.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 않는 발언이었다.

“역시 눈치는 빠르구나.”

“하지만 당시 아드님은 대학생이었습니다. 교제 중이던 여자분도 없었던 걸로…….”

“달려서 태어났는데, 없다면 사내구실을 못 하는 놈이라는 건데. 내 아들이 그럴 리 없지. 친자 검사까지 마쳤다.”

이제야 이해가 됐다. 

그녀를 고용한 이유.

견을 필요 이상으로 견제했던 이유 역시도 알 수 있었다. 

견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굳이 위험을 다 떠안아 길들일 수 없는 개를 후계자로 앉히고 싶지 않다는 뜻.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다.

“제가 왜 이 제안을 수락할 거라 생각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만약 제가 정말로 본부장님과 결탁할 생각이 있다면 불리할 만한 사실을 알려 주신 거니까요.”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뉘지. 지배하는 자, 지배를 받는 자.”

하 회장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자신의 책상으로 가 무언가를 집어 들더니 테이블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사진이었다. 

동시에 정서의 표정이 굳었다. 

사진 속에는 남자가 찍혀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에 서서 무언가를 받고 있는 남자는.

“알아보겠어?”

정서의 아버지였다.

어떻게 잊겠는가. 

단 한순간도 잊은 적이 없는 얼굴이다. 

아니, 잊으려고 해도 지워 버리려고 해도 끝끝내 튀어나오는 그 얼굴이다.

정서의 자세와 표정이 눈에 띄게 경직된 것을 확인한 하 회장은 만족감을 구태여 감추지 않았다. 

약점을 쥔 사람은 그럴 수 있었다. 

약점이란 그런 거였다. 

한 사람을 쉽게도 옥죄었다.

“나를 찾아왔다.”

“예?”

아버지가요?

뒷말은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나가지 않았다. 

아버지라고 불러본 적도 없는 사람이다. 

이제 와 새삼스레 그런 다정한 단어가 나갈 리 없었다.

도대체 왜.

거지 같은 인생을 이만큼 밀어내 줬으면 됐지, 또다시 등장해서는.

그것도 약점을 잡혀선 결코 안 될 사람 앞에 등장해서 다시 한번 제 인생을 흔드는 걸까.

“네가 내 말을 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이 되겠지.”

“이 일과 상관없는 사람입니다.”

한참 만에 서늘한 음성이 정서의 입에서 새어 나갔다.

곧이어 하 회장이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저 남자가 나를 찾아와 돈을 받아 갔다.”

돈. 

정서는 순간 피가 차게 식는 것만 같았다. 

저한테 그렇게 뜯어간 것도 모자라서, 이제는 하 회장까지 찾아왔다니.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정서의 입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았다. 

저도 모르게 지나치게 힘을 주어 입술을 문 탓이었다. 

버석한 입술에 알싸한 통증을 느낄 여유도 없었다. 

하 회장이 금액을 말하지 않는 까닭은 간단했다. 

애초에 그녀가 갚도록 둘 생각이 없는 것이다.

정서는 선택해야 했다. 

이어서 할 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이든지, 거절하고 나와 다시 아버지라는 인간이 만든 굴레 속으로 처박히든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정서는 선택했다. 

벗어난 과거로 돌아가는 선택지는 처음부터 없었다.

&

정서는 쉴 새 없이 울려 대는 핸드폰을 바라보며 초조한 낯빛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자리를 비운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사고를 쳤을까.

「어디야.」

「위치추적기라도 심어둘 걸 그랬다.」

「지루해, 지루해, 지루해.」

「의뢰인의 연락을 이렇게 무시하는 변호사도 있나?」

「네가 안 오겠다면 오게 만드는 수밖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 핸드폰을 가방에 넣어둔 채로 오래 걸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해가 진 후였다. 

핸드폰을 확인하자 물밀 듯이 쏟아지는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은 대부분 견의 것이었다. 

견의 것이 아닌 번호 하나는 새로 온 비서 수연이었으니 안 봐도 무슨 상황인지 짐작이 갔다.

“기사님, 죄송한데 조금만 더 빨리 가 주시겠어요?”

“네, 알겠습니다.”

기사에게 특별히 부탁한 정서가 핸드폰을 귓가에 가져갔다. 

한참 신호음이 가는가 싶더니 곧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정서는 앞뒤 재지 않고 일단 견부터 불렀다.

“본부장님, 어디세요. 지금 가는 중입니다.”

― …….

“본부장님? 다치셨다 들었습니다. 병원으로 가면 될까요? 본부장님, 제 말 들리세요?”

― 정서야.

나긋하고 무거운 음성이 정서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누군가 심장을 움켜쥔 것처럼 허벅지에 올려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말씀하세요, 듣고 있…….”

― 어떻게 그랬어?

“네?”

차가 막 수연이 일러준 병원 응급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한적한 곳에 위치한 병원이라 그런지 한산하기만 해 오히려 스산할 정도였다. 

원래 다니던 병원으로 향해야 할까. 

아니, 그럼 하 회장의 귀에까지 소식이 들어갈지도 모른다. 

정서는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기 위해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숨소리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 어떻게 죽은 새를 손에 쥘 수 있었어?

갑자기 이게 무슨 소리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정서가 택시에서 급하게 내렸다. 

그리고 병원으로 뛰어 들어가려던 때에,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느꼈다. 

본능이 그녀를 주차장 한편에 놓인 으슥한 산책로로 이끌었다.

“본부장님.”

― 이름 불러 줘.

“어디세요? 저 병원 도착했습니다. 응급실에 계세요?”

― 정서야, 이름 불러 줘.

“…….”

정서의 걸음이 멈춘 곳에 그가 있었다. 

벤치에 앉아 있던 견은 몹시 지쳐 보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견이 입고 있는 흰 셔츠가 붉게 물든 것이 보였다. 

정서는 핸드폰을 든 손을 내리고 황급히 뛰어갔다.

“본부장님!”

“왜 이제 와.”

“치료는요. 왜 여기 계세요. 얼마나 다치신 겁니까, 예?”

정서를 올려다보는 견의 얼굴에 난 생채기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제법 날카로운 것에 긁힌 듯 한눈에 봐도 아린 상처에 그녀가 입고 있는 재킷의 안주머니를 뒤졌다. 

안주머니에서 나온 건 손수건이었다.

“습관은 여전하지.”

“이 비서님은 어디 계십니까. 어딨길래 다친 사람을 혼자 두고…….”

“정서야.”

견이 정서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순간 중심을 잃은 정서의 몸이 그의 위로 쏟아졌다. 

견이 팔을 뻗어 정서를 끌어안았다. 

얼결에 그녀는 견의 허벅지 위에 앉은 모양새가 되었다.

“!”

정서가 놀라 견의 어깨를 손으로 쥐었다. 

견은 그 손을 끌어 제 목에 둘렀다.

정서는 말릴 새도 없이 그의 행동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코끝으로 머스크 향이 깊게 스며들어와 금세 속을 간질였다.

허리를 깊숙이 끌어안으며 그녀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견이 웅얼거리듯 말했다.

“왜 매번 이래야만 날 보러 와?”

“고개 좀 들어 보세요. 어디 다치신 겁니까. 잠깐만, 이거 좀 놓고. 야!”

참다 참다 못한 정서가 황급히 손을 내려 견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견의 짙고 깊은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그것이 가로등 빛을 받아 반짝인 순간. 

견은 정서의 고개를 끌었다.

순식간이었다.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정서가 견을 밀어내려 했지만, 순식간에 그의 혀가 입술을 비집고 들어왔다. 

자유롭게 유영하듯 입천장을 간질이고 혀뿌리를 깊숙이 탐하는 그의 몸짓에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이럴 때가 아닌데, 이래선 안 되는데.

“……읏.”

드디어 틈이 생긴 걸까.

맞물린 입술 새로 탄성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이었다.

정서가 견을 밀어내려 해도 그가 끈질기게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두 입술이 마치 자성을 지닌 듯 맞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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