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본부장님.”
“응?”
“아침부터 헛소리가 과하십니다.”
견이 낮은 소리를 내며 키득거렸다.
그리고 손을 뻗어 정서의 뺨을 쥐어 들었다.
그녀가 무얼 하냐는 듯 물끄러미 보자 그가 다른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려 주었다.
마치 연인처럼 애틋하고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그러니까 방 같이 쓸 걸 그랬지?”
“주시하는 눈이 많습니다.”
“또 말해야 해? 여기 눈이 우리 거 말고 또 어디 있냐고. 설마 남들 보는 앞에서 하는 취미 있어?”
정서의 눈이 동그래졌다.
이런 농담은 아무리 들어도 면역이 생기지 않았다.
아마 견이 아닌 다른 누군가 했다면 무척 불쾌했을 것이다.
비단 견과 친밀한 사이여서가 아니라, 그가 가진 힘인 것도 같았다.
부담 없고, 불편하지 않게 이런 말들을 잘도 내뱉는 것.
정서는 그게 그가 가진 여유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견이 여유를 갖고 있는 이유는 뻔했다.
가진 게 많아서가 아니라,
“정서야.”
잃을 것이 없어서다.
정서는 그것을 십 년 전에 깨쳤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견은 어디서든, 언제든 훌쩍 떠날 수 있다.
지금은 그녀의 옆에 있었지만, 그는 내킨다면 또 떠날 것이다.
“네.”
“오늘 어디 갈까? 너 거기 떡볶이 좋아하지 않았나, 그 철물점 옆에 있던 분식집.”
“점심, 저녁 모두 선약 있으십니다.”
“거기서 밥 먹을 생각 없어. 얼굴이나 비추고…….”
“드셔야 합니다. 이후 일정이 바쁘십니다. 촬영지 먼저 둘러보시고 로케이션 확인하러 미리 온 스태프들에게 격려 인사도 하셔야죠.”
“내가 안 해도 되잖아.”
“하셔야 합니다.”
“왜?”
견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정서는 견에게서 두어 걸음 물러났다.
이 정도가 그녀가 지켜야 할 거리였다.
너무 가까워지면 아마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옷 입고 준비하세요.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윤정서.”
견이 손을 뻗었으나, 정서가 더 빨랐다.
문으로 다가가 벌써 문고리를 움켜쥔 그녀를 보며 견이 허탈한 숨을 내뱉었다.
“도망칠 땐 약삭빠르지.”
정서는 그제야 입술을 지그시 내리 물었다.
이렇게 말하면 그녀라고 할 말이 없겠는가.
십 년 전, 영원에서. 그 지긋지긋한 곳에서.
그녀를 놔두고 떠나버린 것이 견이었다.
눈이 차게 내리던 날, 함께 서울에 가자는 약속을 장난처럼 내뱉곤 하던 그가 떠나버리던 날.
정서는 눈길 위에 더럽게 길을 낸 바퀴 자국을 따라 한참을 뛰다 고꾸라졌었다.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마치 잔상처럼 퍼져나갔다.
애써 기억을 지우려 눈을 지그시 감았다 뜬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옛 모습이라곤 하나도 남지 않은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예. 배웠습니다.”
“…….”
“제가 이런 건 좀 빨리 배우는 편이라서요.”
정서는 그렇게 말하고선 걸음을 옮겼다.
견은 문을 닫고 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정서가 지나간 자리에서 옅은 꽃향기가 났다.
취향은 바꾸기 어렵지.
그 향은 묘하게 촌스러웠고 견은 본디 조금은 촌스러운 것이 좋았다.
정서의 뺨을 쥐었던 손바닥 위 아직 서려 있는 온기도 그의 장난에 기죽지 않고 되받아치는 성미도.
가진 것도 별로 없으면서 그걸 지키겠다 바득바득 싸우며 사는 애처로움이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왜 그렇게 눈에 밟히는지.
그래도 그녀는 굽히지 않는다. 꺾이질 않는다.
윤정서가 여전히 윤정서라서, 미친 X이라서.
견은 여전히 정서가 좋았다.
&
“새로 오신 분이죠.”
고급스러운 식당에서는 우아한 클래식이 흐르고 있었다.
점원들의 말소리조차 적어 큰 소리를 내는 이들은 아무도 없었다.
정서는 저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어지간히도 신경 써서 골랐구나.
그녀는 제 역할을 몰랐는지 저와 꽤 비슷한 스타일의 정서를 보고 조금 당황한 듯했다.
견의 비서실에서도 이런저런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그나마 견이 말을 잘 듣는 정서와 가장 비슷한 여자를 찾아 고른 것을 보니.
“네. 윤…….”
“윤정서입니다. 변호사예요. 현재 하견 본부장님을 돕고 있습니다.”
정서가 손을 내밀었다.
여자는 손을 맞잡았다가 놓았다.
손이 놀랍도록 찼다.
견은 손이 찬 여자를 좋아하지 않는데.
그런 생각을 무심코 하다가 금세 정신을 차리고 머릿속을 비워냈다.
제가 생각할 일이 아니었다.
누구도 탓하지 않았지만, 정서는 괜히 민망해졌다.
“인수인계는 잘 받으셨죠. 궁금한 점 있으실까요?”
“아뇨, 없습니다.”
“네, 그럼…….”
정서가 외투를 잠그고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잠시만요.”
“네?”
“본부장님께서는 주로 식사를 혼자 하시나요?”
몸을 돌리자 여자가 물었다.
정서는 그런 그녀의 모습을 살폈다.
그녀의 살짝 치켜 올라간 입꼬리에는 수줍음이 묻어 있었다.
시원스럽게 뻗은 눈꼬리에 어린 호기심과 기대가 고스란히 읽혔다.
궁금한 게 있냐고 물은 건 자신이었지만, 이런 질문을 할 줄은 생각지 못했다.
당연히 업무에 관련된 질문을 하리라 생각했는데…….
잠시 머뭇거린 사이, 여자의 시선이 느릿하게 정서의 얼굴을 훑었다.
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식사요?”
“네. 듣기론 주로 변호사님과 같이 드셨다는데, 저도 그러려나 싶어서요.”
“아…….”
질문의 의도가 뻔했다.
‘정서’가 대체될 수 있는 자리에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었다.
견의 성격을 묻는 질문이기도 했다.
그저 젊은 여자라면 좋다고 같이 식사를 하는 편인 건지, 아니면 그것이 ‘정서’라서 식사를 같이 한 건지.
“때에 따라 다르십니다. 오늘은 저녁 약속까지 잡혀 계시니, 룸에 들어가 계실 때 홀에서 식사하세요. 아마 법카로 식사비 청구하시면 될 겁니다.”
“아, 그래요?”
“네. 더 궁금한 거 있으실까요?”
여자는 머뭇거렸다.
뒤늦게 여자의 이름과 간단한 약력을 떠올렸다.
정서와 같은 대학 경영학과 출신으로 나이는 두어 살 더 어렸던 것 같고.
이름은 이수연이었지.
자기소개서는 평이했지만,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여자처럼 보였다.
고생을 안 했다. 손을 보면 알았다.
누군가를 보필하는 일이 잘 맞을까?
애초에 비서를 할 성격으로는 보이지 않았는데.
재보다 잿밥에 눈독을 들이나.
이를테면, 하견의 연인 자리라든지.
“혹시 오늘 귀가를 호텔로 하시나요? 룸은 예약돼 있던데.”
정서는 잠깐 수연의 눈을 응시했다.
룸의 안쪽에서 작은 기척이 들렸다.
곧이어 견의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상대가 무어라 권하는 것을 거절하는 기색이었다.
들어가 봐야 하나. 잠깐의 망설임이 흘렀다.
그 기색을 읽었는지 수연이 입을 열었다.
“제가 들어가 볼까요?”
적극적인 면은 마음에 들었다.
어쩌면 견에게 갖고 있는 호감이 수연이 그의 곁을 지킬 이유가 되어 줄지도 몰랐다.
다들 처음엔 견의 외모와 지위에 혹했다.
그 마음이 일주일을 넘기기 힘들어서가 문제였지.
하지만 수연은 다를지도 모른다.
“그러세요. 혹 무슨 일이 생기면…….”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그럼 잘 부탁드립니다.”
정서는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가 들었다.
그대로 돌아서서 걸어가는데, 자신을 뒤쫓는 시선이 느껴졌다.
묻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왜 굳이 저에게 이런 옷과 머리 스타일을 권했을지, 변호사라면서 왜 견의 비서처럼 일거수일투족에 따라붙는지.
하지만 정서가 설명해줄 필요는 없었다.
그녀가 자리를 비웠다는 사실을 알면 견은 분명 화를 낼 터였지만, 그것 역시 마찬가지였다.
정서는 곧장 택시를 불렀다.
견과 같이 오는 바람에 차를 챙기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웠다.
&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백영 그룹 본사였다.
정서는 꼭대기 층을 누르고 올라가기를 기다리는 동안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한 치의 허점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타인에게 얼마나 무례한지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모욕당하지 않으려면 철저해야 했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문이 열리고 자리에 앉아 있는 하 회장이 보였다.
허리를 숙여 인사한 정서는 하 회장의 앞에 섰다.
자리를 권하는 말도 없이 대뜸 하 회장이 말했다.
“결혼을 하고 싶다더구나.”
“……권하신 건 회장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결혼하라고 했지, 너와 하라고 하진 않았다. 너를 고집한 건 그 자식이야.”
“거절하셔도 될 일이셨습니다. 거절하는 게 마땅하시고요.”
“왜.”
“예?”
똑똑.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곧 문이 열리고 찻잔 두 개가 테이블에 놓였다.
여전히 정서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서 있었다.
“앉아. 내가 널 올려다봐야 되겠니?”
하 회장은 불쾌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제야 정서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차에서 짙은 향기가 풍겼다.
쓰디쓴 차였으나, 그녀는 한 방울도 남기지 않는 예의를 보였다.
“너도 신분 상승을 꿈꾸는 거 아니냐. 네 아비가 한 짓 알고 있다.”
“…….”
“사람 죽일 용기조차 없어 자잘한 범죄나 저지르고 다닌 잡범, 그런 아비를 두고 자란 너도 똑같이 천박한 피가 흐르지. 타고난 핏줄은 속일 수 없는 법이니까.”
당신이 그렇게 냉대하는 아들에게는 당신의 핏줄이 흐르고 있습니다.
정서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꾹 참아 눌렀다.
전이라면 아직 식지도 않은 하 회장의 찻잔을 들어 얼굴에라도 뿌렸을 텐데.
성질이 많이 죽었다.
“하시고 싶은 말씀을 하세요.”
“그 자식을 주마. 결혼을 허락하겠다는 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