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5)

04.

그녀를 선택한 것은 견이 아닌 하곤 회장이었다. 

그러나 견은 그가 단순히 골칫거리 아들이 저지른 문제들을 해결해달라는 의뢰를 맡긴 것으로 알 터였다.

단순히 떠보는 건가?

정서는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다. 

어떤 사건을 맡아도 법정에서만큼은 냉철함을 유지하는 그녀였다. 

그러니 이 정도의 포커페이스는 어려운 일도 아니다.

“회장님이라고 하세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여긴 너랑 나뿐인데.”

“본부장님이 다른 문제를 일으키신 것은 아닌지 여쭤보셨습니다.”

“그래?”

견은 고개를 들었다. 

가까웠던 몸이 멀어지며, 정서의 눈높이가 조금 더 올라갔다. 

그가 손을 뻗어 정서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갰다. 

문고리가 아래로 눌리자 잠금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렸다. 

역시 그냥 뱉어 본 말인가. 

그녀가 속으로 안도하는 찰나였다.

“그럼 우리 결혼 얘기는 아직 못 들은 건가 보네.”

툭. 정서의 손이 아래로 떨어졌다.

“결혼 얘기라뇨?”

정서는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되물었다. 

견이 결혼을? 그런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석연찮은 점은 그뿐이 아니었다. 

결혼 얘기 앞에 ‘우리’가 붙었다. 

우리라니. 

우리라는 단어는 나와 너를 포함하는 단어로써, 이 상황에서는 견과 정서를…….

“우리 결혼하잖아.”

“예?”

“회장이, 아니. 하 회장님이 그런 얘기 안 했어?”

“전혀 들은 바 없습니다. 대체 무슨 말을 하시는 건지.”

견이 입꼬리를 씩 올려 웃었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숙여 정서의 목덜미를 파고들더니 숨을 깊숙이 들이켰다.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변화한 것이 느껴졌다. 

정서는 견의 숨결이 제 어깨를 간질이는 열띤 감각에 주먹을 말아 쥐었다.

“좋네.”

“무슨 얘기냐고 여쭸습니다.”

“가자. 배고파.”

견이 문을 열고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었다. 

평소라면 매달리는 쪽이 견일 터였지만, 앞서 그가 뱉은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 때문인지 이번에 매달리는 쪽은 정서였다. 

정서가 견의 뒤를 바짝 쫓으며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결혼이라뇨? 농담이시죠.”

“우리 회장님 성격이 어디 농담할 성격이신가.”

“회장님께서는 저한테 그런 언질 한 번도 주신 적 없습니다.”

“알잖아. 그 영감 성격. 그런 중대한 얘기는 아랫사람에게는 절대 안 해. 물론 난 널 내 옆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그 성정에 누굴 옆에 두겠어?”

“본부장님, 자꾸 논점 흐리지 마시고 똑바로 좀 얘기해 주세요.”

로비라고 새겨진 버튼을 누르는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견은 정서를 못 본 체하며 휘파람을 불었다. 

휘이, 휘. 여유로운 그 모습이 그녀의 성질을 긁었음은 자명했다. 

정서가 손을 뻗어 견의 팔꿈치를 쥐었다. 

그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정서를 내려보았다.

“뭐가 그렇게 궁금해? 우리 결혼하라는 얘긴데.”

“정말로 회장님이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

“그래. 했어.”

“대체 무슨 말을 하셨길래 홧김에 그런 말까지 내뱉으시게 만드신 겁니까.”

정서는 인상을 찌푸렸다. 

견은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는 듯 정서를 따라 미간을 찡그렸다.

정서는 투명한 얼굴에 쌍꺼풀이 옅고 큰 눈을 가졌다. 

피부가 창백할 정도로 하얗고 볼은 불그스름해 의외로 곰곰이 뜯어 보면 귀염성 얼굴이다. 

그러니 쌍꺼풀이 짙고 깎아 내지르는 날렵한 턱선을 가진 견의 얼굴과는 대비되었으나, 이상하게도 묘한 표정에서 두 사람은 비슷해 보였다. 

오래 보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홧김이라니? 너랑 내가 결혼하는 게 이상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한 일이죠. 저는 든든한 뒷배도 없고, 가진 것도 없어요. 본부장님같이 백영 그룹의 차기 회장으로 거론되는 사람은 원래 비슷한 배경을 가진 사람들끼리 만나는 겁니다.”

“잊었어? 나 서자잖아. 적통도 아니고, 그냥 밖에서 낳아온 자식.”

견의 목소리 표면이 다소 거칠었다. 

그 덕에 정서는 알 수 있었다.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이 그의 기분을 거스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렇다고 하지 않을 수 있는 말들은 아니었다.

“본부장님이 어떻든 지금 자리가 본부장님의 가치를 증명해 줍니다. 게다가 저는.”

“윤정서 겁나?”

“예?”

“네가 가진 오명이 네게 오점이 될까 싶어 겁나냐고.”

정서는 자신을 돌아본 견의 시선에서 날카로운 공격성을 읽었다. 

지그시 입술을 내리 물었다.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사실이었다. 

그녀는 블랙 기업을 변호했다. 

명백한 과실이 있는 기업이었고 단순히 돈 때문에 그 사건을 덥석 맡았다. 

지긋지긋하게 저를 따라다니는 그 남자를 떼어 버리기 위해서였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변명은 늘 늦다.

정서의 눈앞에서 기업을 고발했던 이는 목을 맨 채 발견됐다. 

거액의 위로금과 격려금을 챙겨온 참이었는데. 

이것만 있으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너무 낙담하지 말라고. 

그녀에게는 익숙하지 못한 위로의 말도 몇 마디 해보려고 몇 번을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랬는데. 

‘너구나, 천박한 그 변호사가.’

정서가 급히 사람을 내리고 신고를 했을 때는 너무 늦었다. 

참고인 조사를 마치고 나왔을 때 하늘에서 내렸던 비는 그녀를 향한 벌과도 같았다. 

로펌에선 그녀에게 한두 달 쉴 것을 권했다. 

로펌의 이미지를 지키기 위한 명분이었을 터였다. 

그러니까 팽당한 거다. 

발 빠르게 그런 그녀를 찾은 것이 하필이면 하회장이었고.

‘알아들었으면 내려. 고민할 시간은 하루면 충분하겠지.’

그때까지만 해도 망나니로 정평 난 백영의 하견이 그녀가 알던 하견임을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비를 맞으며 정처 없이 걷던 그녀에게 우산을 펼쳐준 이가 그 하견임은 확실했다. 

슈트 차림에 긴 검은 장우산을 들고 하견은 그녀를 마주 보았다.

‘뭐 해, 여기서.’

마치 동네 친구를 우연히 마주친 듯 여상하기만 한 어투였다. 

어이가 없었다. 

정서는 견을 밀쳤다. 

견은 밀어내도 밀어내도 끈덕지게 붙어왔다. 

결국 그녀는 조금 울었다. 

견은 그런 정서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 주었다. 우는 모습을 가려 주었다. 

그래서 그녀는 거리의 사람들에게 무방비하게 슬픔을, 분노를, 무력함을 노출하지 않아도 됐다.

견은 그날 비를 많이 맞았고. 

다시 만났을 때까지 감기를 앓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런 견을 정서가 맡게 되었을 때 그는 마치 제가 그녀를 고용한 것처럼 굴었다. 

하회장과 그녀의 거래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제가 회장님에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내 질문은 그게 아니었어. 네가 내 오점이라고 생각하냐고.”

“…….”

견이 고개를 기울였다. 

로비를 지나가던 직원이 이쪽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정서는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이러지 말자는 듯 견의 손목을 움켜쥐었다. 

견은 끄떡없었다. 

외려 걸음을 옮기려는 그녀를 끌어 제 품으로 당겼다. 

안길 듯 말 듯, 두 사람의 허벅지가 맞닿았다.

“이상하잖아.”

“뭐가요. 사람들이 봅니다, 쫌.”

“그런 건 사랑하는 사람들끼리나 하는 걱정인데.”

“……뭐라고요?”

“내가 너한테 그렇게 애틋해?”

정서는 견을 밀쳐냈다. 

이런 시시껄렁한 농담에 어울려 주는 대신 결혼 얘기를 꺼낸 의중을 정확히 알아야 했다. 

일을 제대로 처리 못 하면 같이 나락으로 보내버리겠다는 건가? 아니면 설마.

“그렇잖아. 난 이미 잃을 것도 없는 망나니야. 내가 망나니로 소문나지 않은 건 유능한 변호사 덕분이고. 그 유능한 변호사를 평생 내 곁에 둘 기회를 얻었어. 뭐, 사랑 같은 낭만적인 소리로 설득될 너였다면 몇 번이나 했겠지. 사랑타령. 근데 내가 아는 윤정서는 그렇게 시시한 여자가 아니야.”

“…….”

“내가 백영의 꼭대기로 올라간다면, 그 옆엔 네가 있어야 해.”

견은 손을 뻗어 정서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마치 물리적 형태를 지닌 것과 같이 내려앉는 음절 하나하나가 무게가 있었다.

“들었어? 네 지긋지긋했던 모든 것을 내가 끝내주겠다는 소리야.”

견은 예쁘게도 웃었다. 

정서는 몸이 바짝 굳었다. 

청혼인가? 아니, 이런 날치기식 청혼이 다 있나.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대체 지금 견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걸까. 

결혼이라니, 갑자기? 

정서가 아직 정신을 차리지 못한 틈을 타 견이 그녀를 차에 태웠다. 

저녁을 먹는 내내 정서는 귀가 웅웅댔다.

&

살면서 적을 만들지 않는 것이 현명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다만, 어떤 사람들은 자연스레 적이 생기기도 한다.

정서는 태어날 때부터 오직 태어남의 이유만으로 어쩌면 평생을 짊어져야 할 적을 구했다. 

그것이 정서와 견의 공통점이라면 공통점이었다.

“잠을 영 못 잔 얼굴이네? 내 프로포즈가 너무 감동적이었나.”

견의 젖은 머리칼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정서가 걸음을 옮겨 수건으로 그의 뺨을 타고 흐르는 물기를 거둬 주었다.

“형편없었습니다.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견은 얌전히, 온순한 개처럼 그녀의 손에 제 얼굴을 맡겼다. 

이런 모습만 보면 영락없이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애 같았다. 

정서는 지난밤 종일 뒤척인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하 회장은 견을 제대로 속일 작정이었다. 

그녀를 자신이 숨겨놓은 심복인 줄 꿈에도 모르도록, 그저 사고 치지 않게 단속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도록.

알고 있었지만 치밀하고 무서운 사람이었다. 

한편으로는 어리석고 나약한 사람이기도 했다. 

정서가 보기에 견은 한 번도 백영의 후계자 자리를 탐낸 적이 없었다. 

정식으로 대를 이어야 했을 본처의 아들이 죽고 본처 역시 쇠약해지자 견을 백영으로 불러들인 것은 하 회장 자신이었다. 

그래놓고 이제와서 그 아들이 자신을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노망에 사로잡혀 견제하는 꼴이란.

“재한 그룹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밤에? 설마 김영운지 뭔지 하는 새끼가?”

견의 눈이 번득였다.

“이름 기억하시네요.”

망나니에게는 전형성이라는 것이 있다. 

일단 앞뒤 안 재고 달려들고 내일이 없는 것처럼 굴며 사고를 수습하는 능력이라고는 없다. 

심지어는 누구에게 어떻게 굴었는지조차 기억 못 하는 게 다반사다.

그러나 견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그렇게 굴면서도 놀라울 만큼 이성적인 부분이 있어 제가 저지른 짓이든 남이 저지른 짓이든 죄다 꿰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아도 건드리는 사람을 공격할 때 그는 순식간에 약점을 움켜쥐었다.

“머리가 좋잖아, 내가.”

“오만하신 것도 여전하시고요.”

“사람이 변하면 뒤진대, 정서야. 나 오래 살고 싶어. 너랑.”

가운이 벌어진 사이로 견의 탄탄한 복근과 허벅지가 드러났다. 

아침부터 흐트러짐 없이 정장을 차려입은 정서의 모습과 몹시도 대비되는 풍경이었다. 

정서는 견에게서 풍기는 옅은 비누 냄새를 저도 모르게 들이켰다. 

옛날부터 이 청량하고 청결한 향이 좋았다. 

그 모습을 본 그가 웃었다.

“밝히지 마.”

“예?”

“너 나 보고 군침 삼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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