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뭐 이런 미친 놈이 다 있어?”
정서의 손이 문고리에 닿았다가 그대로 멈췄다.
문 너머로 요란한 소리가 울렸다.
우당탕하고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이내 울음소리가 들렸다.
좀 더 기다렸다가 들어갈까.
어차피 언제 들어가든 험한 꼴 보는 것은 같은데.
정서는 그렇게 생각하고 고개를 들었다.
이 호텔 스위트룸에 방문하는 것도 이번 달에만 벌써 세 번째다.
그녀가 등장하면 이제 직원은 군말 없이 키를 내어주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역시 달갑지 않은 손님이라는 거지.
지금 이 문 너머에서 누군가를 울린 남자가.
똑똑.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그녀는 숨을 가다듬고 문을 두드렸다.
노크는 늘 형식일 뿐이다.
카드키를 대고 잠금을 해제하자 문이 열렸다.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바닥을 구르고 있는 술병과 쿠션, 그리고 디자인 조명까지.
발이 걸려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히 걸음을 옮긴 그녀의 발이 멈춘 끝에는 사람이 있었다.
바닥에 쓰러져 울고 있는 사람이.
“왔어?”
“……네.”
남자는 웃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늘 그렇다.
아이처럼 천진하다.
정서는 이 남자의 천진함이 무섭다.
아이는 무슨 짓이든 저지른다.
그게 아이의 본능이므로.
조금 흐트러진 셔츠 차림의 남자를 가만히 바라보던 정서가 걸음을 옮겨 그가 매고 있는 넥타이로 손을 가져갔다.
가까워진 거리, 숨결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남자는 낮은 소리를 내며 웃었다.
“여전히 쓰러진 사람한테는 눈길도 안 주네.”
“제가 모시는 분이 아니니까요.”
단출한 대답을 내뱉었다.
쓰러진 사람이 신경 쓰이지 않는 게 아니었다.
다만 조금이라도 먼저 신경 쓰는 기색을 내비쳤다간 남자의 기분이 더욱 뒤틀렸을 것이다.
이 남자를 잘 다루기 위해서 정서는 몇 번의 시행착오를 거쳐야 했다.
지난한 시간이었다.
“어쩌다 성격 다 죽었어? 미친 X라 불리던 윤정서 어디 갔어?”
“눈앞에 있습니다.”
정서가 고개를 들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그 덕에 입술이 닿을 것처럼 가까워졌다.
짙고 곧은 눈썹, 쌍꺼풀이 진 커다란 눈에 기다란 속눈썹.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사나운 인상을 만들었다.
잘 깎은 조각 같은 얼굴에 날렵한 턱선을 지녔지만, 예쁘게 치켜 올라간 입꼬리는 마치 만찬을 앞둔 우아한 포식자의 모습과 다름이 없었다.
아무리 남자에 관심이 없는 그녀라도 숨을 참게 되는 얼굴이었다.
“여기?”
남자는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정서는 한심한 장난에 어울려 줄 생각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남자는 저를 가리키던 손으로 그녀의 턱을 움켜쥐었다.
거센 손길은 거침이 없었다.
아주 조금의 관심도 빼앗기기 싫어하는 성미.
평범하지 않다는 것을 안다.
평범한 직장 상사와 부하의 관계도 의뢰인과 변호사의 관계도 아니었다.
알고 있다.
알면서도 아마 앞으로도 될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람이 지나온 시간 때문에.
정서는 사납게 눈을 흘겼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댈 뿐이었다.
“화내지 마.”
“낸 적 없습니다.”
“왜?”
“…….”
“왜 화를 안 내. 매번 내가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데.”
“사람을 폭행하는 건 말썽이 아니라 범죄라고 누누이 말씀드렸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내 전문 변호사인 네가 책임져야지.”
“하 견 본부장님,”
“견아.”
견은 자신을 부르는 정서의 호칭을 정정해 주었다.
물론 정서는 견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자신이 맡은 재벌 도련님이라고 해도, 자신을 쥐락펴락할 수는 없었다.
그건 그녀의 일이 아니었다.
그녀의 일은, 미친개라고 불리는 하견이 멀쩡한 사람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으어어.”
그때였다.
바닥에 쓰러진 채 분하다는 듯 울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피가 잔뜩 흘러내리는 얼굴에 정서가 지그시 입술을 물었다.
아무리 보아도 폭력의 잔해는 익숙해지지 않는다.
견은 그제야 한숨을 나른히 내쉬고는 아무 수건이나 손에 닿는 대로 움켜쥐었다.
수건으로 자비 없이 남자의 얼굴을 문대기 시작하자 남자가 신음을 흘렸다.
물론 견은 들어줄 생각이 없었다.
정서는 그런 견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무릎을 굽혔다.
견의 미간이 자연히 찌푸려졌다.
“실례지만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너 내가 누군지 몰라?”
아까까지 견에게 실컷 맞아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 듯 남자가 되물었다.
남자의 코에서 비죽 흐르는 피를 무심한 얼굴로 보던 정서가 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자 견이 정서의 손수건을 낚아채듯 빼앗아 갔다.
빼앗기기 싫은 모양이었다.
작은 손수건조차도.
이어 그는 정서의 고개까지 끌어 저와 눈을 맞추게 했다.
금방이라도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정서는 숨을 참았다.
“뭐 하시는 겁니까.”
“내 거 주지 마.”
“제 겁니다.”
“네 것도 주지 마.”
“비키세요. 해결해야 합니다.”
“윤정서.”
견이 정서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견의 눈동자는 늪과도 같다.
깊숙이 파고들어 빠질 것만 같은 눈이다.
누구든 이런 견의 응시 앞에서는 움츠러들었다.
심지어는 그의 상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정서는 달랐다.
오래전, 그러니까 십 년 전에 그녀는 이미 이 눈을 마주했었고.
그 눈빛에 빠져 죽을 것도 같았으며, 열병을 앓듯 몇 계절을 앓다가 빠져나왔다.
두 번 다시 빠지지 않으리라, 정서는 그때 이미 다짐했었다.
“나 봐.”
“보고 있습니다.”
“아니야, 너 안 봐. 다시 만난 이후부터 넌 한 번도 날 안 보고 있었어.”
견의 재촉에 정서가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견의 눈에 비친 정서는 십 년 전 교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그 사실을 견은 알고, 정서는 몰랐다.
“……저기요.”
바닥에 누워있던 남자가 몸을 일으키며 둘을 불렀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로 서로를 마주 보고 있던 두 사람은 그제야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아쉬운 허망함이 견을 감쌌다.
“압니다. 재한 그룹 둘째 아드님, 김영우 책임님이시죠. 혹시 뇌가 다치셨을까 봐 한 번 여쭤봤습니다. 보아하니, 머리를 다치시진 않은 것 같군요.”
“이거 어떻게 할 거야. 지금 내 얼굴 안 보여? 국민 그룹 백영의 후계자가 이런 개차반 미친놈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들이 어쩔 것 같아? 내가 싹 다 고소할 거야.”
“오늘은 우선 돌아가시죠. 밑에 차 대기시켜놨습니다. 추후 연락드리겠습니다.”
“내 말은 하나도 안 듣고, 개 같은 X이.”
남자가 손을 뻗었다.
생각이 너무 짧았다.
그녀가 눈 하나 깜짝 않고 가만히 있자 견의 주먹이 날아왔다.
퍽하는 강한 소리와 함께 남자는 다시 바닥으로 고꾸라졌다.
견의 주먹 위에 생채기가 생긴 것이 보였다.
정서는 견의 손에 쥐어진 제 손수건으로 그의 주먹을 감쌌다.
“성질 좀 죽이시죠.”
“키스해 줘.”
“보는 눈 있습니다.”
“뭐 어때.”
“저는 해결해드리는 사람이지, 풀어드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뭘 풀어. 내 욕구?”
견이 정서의 손을 끌어 제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다.
탄탄한 허벅지 근육이 손바닥으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정서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견을 보았다, 미간을 찌푸린 채로.
“하지 마십시오. 성희롱입니다.”
“불쾌해?”
“아뇨.”
“그럼…….”
“아무 느낌 없습니다.”
견의 표정이 와락 구겨졌다.
정서는 손을 내려 견의 허벅지를 쓰다듬다가 그대로 중심부로 손을 옮겼다.
딱딱히 굳은 것이 손바닥 아래로 느껴졌다.
꼿꼿하고 크다.
본 적은 없지만 만지는 것만으로도 알 수 있다.
미친 개에게는 미친 X의 방식으로.
이것이 그녀가 익힌 생존법이다.
“불쾌하십니까?”
남자는 두 사람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인지하고 조용히 스위트룸을 빠져나갔다.
문을 닫으며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도 잊지 않았다.
견은 정서의 손목을 잡아 더 깊숙이 끌어당겼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아니. 더 해 줘.”
“본부장님.”
“견아, 라고 해야지.”
예전처럼.
견이 덧붙이며 정서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갸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면 뭐가 달라질 줄 아는 모양인데.
정서는 그저 평소처럼 무심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견은 정서의 손을 깍지 껴 포갠 채 마디를 엮어 가두듯 했다.
그의 입술 새로 새는 더운 숨이 그녀의 목덜미를 달궜다.
정서 역시 아랫배가 간지러운 느낌이 든 것은 사실이었으나.
이렇게 허비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손을 떼어 내려는데 견이 그녀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이를 세워 아프게 정서의 목덜미를 깨물었다.
“아! 아픕니다.”
“나도 속상해. 내 마음이 더 아파.”
“제발 정신을 좀 차리십시오.”
“내가 정신 차리게 생겼어? 네가 이렇게 나오는데. 미친개보다 더한 또라이, 그게 너잖아.”
“예. 맞습니다. 제가 더하니까, 죽기 싫으면 그만두세요.”
정서는 그렇게 말한 뒤 견에게서 떨어져 나왔다.
그리고 견의 흐트러진 매무새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다듬어 주고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이 정서를 따라왔다.
“회의 늦으십니다.”
“내 비서는 뭐 하고 네가 왔을까.”
“그만두셨답니다. 미친개 모시는 일, 그만하고 싶다고.”
“다들 약해 빠졌네. 자원봉사도 아니고 돈 받고 하는 일, 내가 뭘 얼마나 괴롭혔다고.”
“자기 객관화가 안 되는 건 여전하시네요.”
“내가?”
견이 억울하다는 듯 과장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정서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눈 하나 깜짝 않고 마주 보는 그녀의 손을 견이 움켜쥐었다.
“다시 생각하니 나한텐 좋은 일이네.”
“네?”
“윤정서가 오는 거잖아. 사고칠 때마다.”
“저에게는 다분히 유감인 일이죠. 다음번은 없습니다. 조심하세요. 새로운 비서는 삼 일 내로 고용할 예정이라고 합니다.”
“윤정서.”
견이 정서의 손을 끌어 제 목덜미 위에 두었다.
펄떡이는 심장이 손바닥에 전해질 때 정서는 어쩐지 몸이 뜨거워졌다.
살아 숨 쉬는 견이 제 앞에 있다는 것이.
누구든 물어뜯는 것을 즐기는 자가 가장 약하고 예민한 부분을 제게 내민다는 것이.
“목줄 쥐어봐, 네가.”
“…….”
“견이라고 불러, 그럼 내 주인이 되는 거야.”
정서의 눈빛이 흔들렸다.
하나, 곧 고개가 돌아갔다.
이로써 견은 열 번째로 그녀에게 거절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