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Epilogue
테오도르는 회복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며칠 더 저택에 머물렀다.
덕분에 사람을 좋아하는 에르와 리아는 잔뜩 신이 났다.
창가에 앉아 테오도르가 아이들과 놀아 주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나의 새로운 일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시간은 빠르게 흘러 테오도르가 돌아가야 할 날이 되었다.
“아조씨 꼭 가야 해? 안 가면 안 돼?”
“아조씨, 가지 마요. 웅? 리아랑 같이 놀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붙잡으며 매달렸다.
테오도르는 그런 아이들의 애교가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지, 양 볼을 불그스름하게 붉혔다.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것을 쳐다보다 대신 나섰다.
“아저씨는 바빠. 안 돼.”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테오도르는 진짜로 바빴다.
불과 어제 낮에만 해도 아르민이 그가 결재해야 할 서류를 잔뜩 들고 오지 않았나.
그러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내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지만, 테오도르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반항기 가득한 그 표정에 테오도르가 안절부절못하며 아이들을 달래기 시작했다.
“에르, 리아. 고집을 부려서 어머니를 힘들게 하면 안 돼.”
그러면서도 슬쩍슬쩍 내 눈치를 살피는 것 같기도 했다.
“대신…… 나중에 아저씨 집에 초대할게.”
그 말에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
“진짜루?”
“으응…… 너희 어머니만 허락한다면…….”
이에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아이들과 함께 나를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눈빛 또한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셋이 저렇게 있으니까…… 정말 닮았네.’
새삼 한 번 더 깨달은 사실에 기분이 묘해졌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닮았다.
외양은 나를 닮았으나, 하는 행동이나 말투, 기호 같은 것이 누가 보아도 테오도르의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을 테오도르와 인사시킨 후 먼저 올려보낸 뒤, 나는 그를 배웅하기 위해 마차가 기다리는 현관까지 함께 갔다.
테오도르는 나란히 걷는 그 순간이 퍽 어색하다는 듯 조심스럽게 내 보폭을 맞추면서도 기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테오도르.”
내 부름에 그가 걸음을 멈추고 나와 마주 보았다.
“응, 이브.”
달뜬 두 뺨과 은은하게 휜 두 눈이 가장 먼저 시선에 들어왔다.
이름을 불러주자 기뻐하는 그 모습이 꼭…….
‘강아지 같아.’
강아지를 키워 본 적은 없지만, 만약 키우게 된다면 꼭 저런 모습일 것이다.
테오도르의 그 커다란 몸 뒤로 보이지 않는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리는 것 같았다.
“이브……?”
내가 불러놓고 아무 말이 없자,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나를 한 번 불렀다.
나는 그런 그를 향해 대뜸 말했다.
“아프지 마.”
“어……?”
“나를 아프게 해 놓고서 네가 아프면 어떡해.”
“아…….”
원망 속에 숨겨 둔, 채 감추지 못한 걱정을 그 또한 알아차렸나 보다.
“그러니까 아프지 마.”
“……응.”
테오도르는 희미한 미소를 내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게. 아프지 않을게.”
웃으며 건넨 그 담담한 대답에 이상하게 가슴이 서걱서걱했다.
“아픈 모습, 더는 보이지 않을 테니까…….”
테오도르가 두 눈을 난처한 듯 휘며 속상한 목소리를 내었다.
“울지 마, 이브.”
“…….”
나는 그제야 뜨거워진 눈시울을 느끼며, 황급히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 냈다.
“안 울었어.”
고집스럽게 말하자 테오도르가 피식 옅은 웃음을 흘렸다.
“응, 넌 안 울었어.”
“진짜야.”
“응, 진짜로.”
“정말이야.”
“응, 정말로.”
내 억지에 고분고분하게 맞장구를 치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보자 괜히 눈물이 더 나올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그런 나를 보며, 차마 내 어깨를 다독여 주지 못하고 파르르 떨리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차라리 알아채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내가 이브를 달래 줘도 될까. 하지만 내가 달래 주면 싫어할 거야. 그러니까 참아야 해.’ 따위의 생각을 하고 있는 게 훤히 보여서.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테오도르를 태운 황궁 마차가 떠났지만, 나는 한동안 다른 일에 집중하지 못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테오도르와 마주할 때면 스스로가 초라하다는 생각보다도, 그가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 것은.
[너는 전혀 초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그게…… 네가…… 나를 보고 마차를 타기 싫다고 할까 봐…….]
[그야, 당연히…… 네가 날 싫어하니까.]
[미안해, 이브. 다시는 그런 말 안 꺼낼게. 아빠라느니 그런 말…….]
[미안해, 미안해, 이브…….]
[내가 널 죽인 거야……. 내가, 내가 널…….]
하나씩 밀려오는 기억들에, 나는 느리게 두 눈을 꾸욱 내려 감았다.
하나의 시점을 꼽기에는, 너무나 많았다.
내 앞에서 끝내 약해지고 말던 그의 순간들이.
그게 참, 마음이 아팠다.
이따금씩 인정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나는 이제 그만 인정해야 했다.
내가 테오도르를 더 이상 진실로 미워하지 못한다는 것을.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를 온전히 용서하고 말았음을.
자작한 보슬비가 내리는 어느 오후.
무심코 창밖을 내다보던 나는 테오도르의 마차를 발견했다.
‘비가 오는 날에는 오지 말라니까.’
테오도르는 이후로도 저택을 방문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대체 매일같이 찾아와 선물을 전해 주는 일이 뭐가 중요하다고…….’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면서도,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마차가 멈추고, 테오도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히도 오늘은 커다란 장우산을 쓰고 있었다.
비 맞는 게 싫다 했더니, 우산을 챙겨온 걸까?
내가 건넨 사소한 말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그가, 조금은…….
‘귀여워.’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퍼뜩 놀라고 말았다.
‘아니, 내가 무슨 생각을……!’
나는 재빨리 고개를 휘휘 저으며 생각을 떨쳐냈다.
이상했다.
그를 온전히 용서하였음을 깨달은 이후로, 자꾸만 나도 모르게 이런 생각들을 하고 만다.
괜히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 닫혀 있던 창문을 힘껏 열었다.
보슬보슬 내리는 빗줄기를 쳐다보며 열을 식히다가 다시금 테오도르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
그런데 테오도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그가 한 여성을 에스코트하며 마차 아래로 내리는 것을 도왔다.
커다란 우산에 가린 탓에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구지……?’
테오도르는 혹여나 여자가 비에 맞을까 봐, 우산을 여자 쪽으로 기울이고 있었다.
그 바람에 그의 한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갔다.
테오도르는 타인에게 저런 친절을 베푸는 이가 아니었기에 여자의 정체가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여자와 함께 저택 안쪽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우산 아래 여자의 얼굴을 발견했다.
“……!”
순간 나도 모르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설마…….”
나는 빠르게 아래로 내려갔다.
타닥, 탁, 탁.
다급한 발소리가 내 뒤로 이어졌다.
1층으로 내려가자, 사용인들이 테오도르와 노년의 여성을 맞이하고 있었다.
“세상에……!”
나는 믿을 수 없어 그 자리에 굳어 버렸다.
그러자 여자가 나를 보며 괄괄한 목소리로 외쳤다.
“씩씩한 성격은 여전하구나, 이보네!”
“그랜시 할머니!”
나는 한달음에 달려가 여자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랜시 할머니였다.
보수적이고 엄격한 성격 탓에 가끔은 무서워하기도 하였으나, 그러면서도 줄곧 그리워하였던 그랜시 할머니였다.
언제나 나보다 컸던 그랜시 할머니가 이제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지나간 세월의 흔적에 새삼 마음이 아파졌다.
“무슨 일…….”
소란에 내려온 브리안도 그랜시 할머니를 발견하고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랜시 노마님?”
“오, 브리안! 너도 살아 있었구나!”
그랜시 할머니가 반가워하며 외쳤다.
브리안 또한 조금 전에 내가 그러했던 것처럼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하다가, 이내 달려와 그랜시 할머니를 부둥켜안았다.
모두가 놀란 가운데, 오직 테오도르만이 홀로 소리 없는 미소를 내지으며 우리를 지켜보았다.
* * *
“그때 난리를 겪고 체르니시아의 성을 버리는 대가로 살아남았지. 그 사실이 부끄러워, 네가 살아 체르니시아의 가주로 돌아온 것을 알면서도 찾지 않았다.”
나와 브리안, 그랜시 할머니는 응접실 테이블 앞에 앉아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런데 저 남자가 찾아와 네 얘기를 하더군. 이보네가, 당신을 찾는다고.”
멈칫.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이야기였다.
“이보네가 당신을 많이 보고 싶어 하니, 만나 달라고.”
“아…….”
“당연히 나는 그 말을 듣지 않았다. 너희들도 알잖느냐? 내 고집이 보통 고집이어야지.”
그랜시 할머니는 큭큭 웃으며 이야기를 이어 갔다.
“그런데 저 남자가 몇 달씩이나 찾아와서 부탁을 하는 통에 끝내 거절하지 못하고 마음이 흔들렸지 뭐니.”
“몇 달씩이나 찾아왔다고요?”
“그래. 내 살다 살다 저렇게 지독한 사람은 처음 보았단다.”
그랜시가 혀를 쯧쯧 차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나는 잠시간 말을 잃었다.
문득 오래전, 내 이름과 가족들을 모두 되찾아 주겠다던 테오도르의 약속이 떠올랐다.
“아무튼, 정말 다행입니다, 노마님.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우리를 다시 안 볼 생각을 했어요?”
브리안이 그랜시를 향해 조금은 서운한 투로 말했다.
“4년 전까지만 해도 앓던 병이 깊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거든. 그때 한번 죽은 목숨이었다고 생각했지.”
“그런 일이…….”
그랜시 할머니가 덤덤하게 꺼낸 이야기에 덜컥 걱정이 들었다.
“지금은 괜찮으세요?”
“그럼. 감사하게도 황실에서 4년 전에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준비한다는 명목으로 이 늙은이까지 챙겨 준 덕에 완쾌했단다.”
“아…….”
테오도르가…… 챙겨 주었구나.
4년 전이면, 내가 죽었다고 알고 있었을 때이다.
그런데도 테오도르는 죽은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내 가족들을 찾아 챙겨 주었다.
내가 살아 있다는 걸 알기 전까지, 그는 살아도 산 사람 같지 않은 모습으로 살아왔었다.
그랬던 그가 내 가족들을 찾아 챙겨 줄 때에는, 무슨 생각을 품고 있었을까. 어떤 마음으로 그리했을까.
“그런데 저 밖에 수상한 검은 머리 놈 말이다. 나를 찾아와 이보네를 만나 달라 매일같이 괴롭히던 저놈, 혹시 황제 폐하 아니냐?”
이때, 그랜시 할머니가 창밖을 힐긋 가리키며 물었다.
안에서 쉬고 있어도 된다고 했으나, 테오도르는 굳이 바깥이 편하다며 우산을 쓰고서 청승맞게 정원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테오도르를 아세요?”
“모르기는 한데, 저런 까만 머리에 황금 눈이 흔하진 않지.”
그랜시 할머니의 말마따나, 테오도르는 누구나 한 번 보면 곧바로 알아볼 만큼 흔치 않은 외양을 지녔다.
“황제가 왜 신분마저 숨긴 채 저러는 거냐?”
“그건…….”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브리안을 힐끔 쳐다봤다.
브리안도 할 말이 무척 많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망설였다.
이때였다.
두 쌍의 눈동자가 응접실 입구에 빼꼼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였다.
“어머, 에르, 리아!”
“어머니!”
“어머니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짧은 다리로 오도도 뛰어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뭐냐, 저 쥐방울만 한 체르니시아는?”
그랜시가 아이들을 보며 두 눈을 끔뻑였다.
“어머니, 저 할모니 모예요?”
“할모니 누구야요?”
아이들은 낯선 어른에게 관심을 가지며 초롱초롱 눈을 빛냈다.
“생긴 게 어떻게 보아도 체르니시아군.”
그랜시 할머니가 아이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그도 그럴 것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누가 보아도 나를, 브리안을, 그리고 지금은 돌아가신 군터 할아버지와 다른 가족들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제 아이들이에요. 얘들아, 인사해. 어머니의 할머니야.”
“어머니의 할머니?”
아이들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두 손을 배꼽 위로 공손하게 모으고서 그랜시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저는 리아예요.”
“저는 에르예요. 그런데 정말로 할머니가 어머니의 할머니예요?”
“그럼 할머니는 리아의 할머니도 되는 거예요?”
그랜시 할머니는 아이들과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아이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내 귓가에 목소리를 낮추어 대뜸 물었다.
“설마…… 그놈이 애들 아빠냐?”
나는 황제를 ‘그놈’이라 칭하는 그랜시 할머니의 담대함보다도, 숨기던 사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는 것에 더 놀랐다.
“어떻게 아셨어요?”
“이 나이가 되면 보이는 것들이 있지. 생긴 건 체르니시안데, 하는 행동이 그놈과 똑 닮았구나.”
그랜시 할머니가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가리키며 말했다.
어느덧 아이들은 그랜시 할머니의 옆에 자리를 잡고서 이것저것 질문 공세를 시작했다.
‘그랜시 할머니의 눈에도 아이들이 테오도르를 닮아 보이는 걸까?’
나는 신기한 눈으로 그랜시 할머니와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 * *
응접실에 아이들과 그랜시 할머니, 브리안 오빠를 남겨 두고서 테오도르를 찾아 나왔다.
“폐하는 어디 계시지?”
“저쪽 바깥에 계십니다.”
바깥은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사용인들이 알려 준 곳으로 향하자, 우산을 쓰고서 정원을 둘러보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테오도르.”
나의 부름에 그가 곧바로 나를 돌아봤다.
“아, 이브……!”
그의 두 뺨이 수줍게 물들어 있었다.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의 표정이었다.
테오도르는 저택에 선물을 바리바리 싸 들고 찾아올 때면 늘 저런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러다 내가 아무런 언급 없이 지나치면 금세 두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렸고…….
혹 내가 그의 선물에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기라도 하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활짝 웃었다.
“고마워. 그랜시 할머니가 아프지 않도록 신경 써 주고, 이렇게 내게 데려와 주어서.”
“아…….”
화르륵-
테오도르의 얼굴이 귓불까지 빨갛게 달아올랐다.
“도움이 돼서 기뻐.”
그가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활짝 웃었다.
이번에는 꼬리만 살랑거리는 게 아니라 머리 위에 뾰족한 귀도 솟아나는 것 같았다.
그래, 이처럼.
마땅히 받아야 할 감사 인사에도, 테오도르는 이렇듯 기뻐하였다.
‘하긴. 테오도르는 오래전에도 그랬었지.’
오래전. 그러니까, 그가 한차례 기억을 잃기 전.
그때에도 그는 나와 함께하는 순간순간마다 저처럼 기뻐하였었다.
그가 내게 주었던 어두운 상처의 그늘에 가려, 잊고 있던 빛나는 순간들이 하나씩 생각날 때마다 이처럼 가슴이 울컥였다.
“왜 말 안 했어? 그랜시 할머니를 찾아서, 모시고 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고.”
테오도르는 이미 몇 년 전부터 그랜시 할머니의 병환을 살펴 주었다.
또 내가 알브레히트에 돌아온 이후로 줄곧 그랜시 할머니를 내게 모셔와 주고자 노력해 왔다.
처음 내가 그와 막 재회했을 때, 그는 어떻게든 내 마음을 돌리고자 물심으로 노력했었다.
만약 그가 내게 이런 노력들을 알렸더라면, 그를 향한 내 마음이 조금은 더 너그러워졌을지도 모른다.
“너랑 약속했잖아. 네 가족들 찾아주기로.”
그러한 내 의문을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잠잠히 웃으며 답했다.
“네가 그걸 얼마나 바랐는지 아는데, 미리 말했다가 실망시키면 어떡해.”
“…….”
이에 내 입술이 그대로 다물렸다.
당시 나는 자꾸만 나를 찾아오는 테오도르가 자신의 감정만 앞세운다고 생각했었다.
이기적이고 나쁜 강아지라고 비난의 눈으로 그를 보았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는 혹 내가 실망할까 봐, 내가 모르게 날 위해 하던 일들을 알리지 않았고…….
‘기억을 잃기 전에도 체르니시아의 복권 문제로 귀족들과 첨예하게 다투면서도 한 번도 힘들다고 말하지 않았었잖아.’
사실 테오도르는 누구보다 내 감정을 우선하는 사람이었다.
딱 한 번,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달라고 울긴 했으나…… 이후로는 더 이상 그런 고집 부리지 않고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행동했다.
어쩌면 테오도르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하는 것이 그만큼이나 절박했던 건지도 모른다.
사람의 마음이 참 간사했다.
내가 받은 상처에 눈이 멀었을 적에는 오직 그것만이 보인 탓에 그가 밉기만 했는데.
이제는 그의 지난 행동 하나하나를 나 자신에게 변명하며 납득시키고 있었다.
마치 그를 용서해야 하는 이유를 찾기라도 하듯이, 무의식적으로.
“그래서 노부인의 마음이 돌아설 때까지 말 못 했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가던 테오도르가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더 일찍 찾아주지 못해서 미안해, 이브.”
테오도르는 내가 가장 바라던 것을 들어주었으면서, 내게 더 일찍 그것을 이루어 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과를 하고 있었다.
‘그게 왜, 네가 미안할 일이야?’
울컥, 샘솟은 감정에 나는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검은 장우산을 펼쳐 쓴 그를 한참이나 쳐다보는 것밖에는.
“테오.”
나는 느리게 입술을 떼며 그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나는 이제 내가 초라하지 않다는 걸 알게 된 것 같아. 네 덕분에.”
톡, 톡, 토도독.
가느다란 이슬비가 우산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내 손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래서, 이제는 초라했던 순간을 모두 지워 내도 될 것 같은데.”
데구루루 빗물 방울이 손바닥을 타고 손목 위로 굴렀다.
그 위로 남은 선명한 흉터 자국을 알아보고 멈칫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나는 싱긋 웃으며 물었다.
“네가 치유해 줄래?”
“아…….”
나를 담은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그가 자신의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이내, 툭-
그가 들고 있던 검은 우산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브…….”
테오도르는 내리는 보슬비를 맞으며 나를 보았다.
“이거, 내가…… 내가, 나 때문에 생긴…….”
차마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너 때문에 생긴 거니까, 네가 없애 줘야지.”
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를 용서하기로 마음먹은 이 순간에 거짓 위로를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울음을 참기 위함인 듯, 입술을 앙다문 테오도르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가 조심스럽게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수그렸다.
서늘한 입술의 감촉이 손목 위로 닿았다.
잠시간 그렇게 맞닿아 있던 그가 느리게 입술을 뗐다.
그의 입술이 떠난 자리는 아주 작은 흠집 하나 없이 깨끗했다.
더 이상 초라했던 과거는 남지 않은 새하얀 손목을 들어 보이며, 나는 테오도르를 향해 생긋 웃었다.
“고마워, 테오.”
“…….”
테오도르는 눈가가 발개진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걸을래?”
“그래도…… 돼?”
“싫어?”
내 눈치를 살피던 테오도르가 그 말에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
그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났다.
테오도르는 바닥에 나뒹굴던 자신의 우산을 주워들고서, 내 옆에 나란히 섰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나는 내 우산을 접고서 그의 우산 속으로 들어갔다.
“어……?”
순간 그가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바보같이 굳어 버린 얼굴이 귀여워서, 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우산을 따로 쓰면, 거리가 너무 멀잖아.”
“으, 응……. 그렇지…….”
테오도르가 우산을 내 쪽으로 슬쩍 기울였다.
나는 테오도르와 함께 걸었다.
테오도르는 ‘맞아. 너무 멀어.’ 하고 자그맣게 혼잣말로 중얼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후다닥 시선을 피했다.
푸흡,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참고서 그에게로 몸을 살짝 붙였다.
팔꿈치가 닿자 그의 몸이 더욱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를 내버려 두고서, 나는 산뜻한 발걸음을 내디뎠다.
내리는 빗소리가 듣기 좋았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름날 내리는 빗줄기를 좋아했었다.
보슬보슬한 여름비는 끈적끈적한 더위를 씻겨 주니까.
꼭, 어린 날 나의 비밀 친구처럼.
“테오.”
“이브.”
나와 테오도르가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우리는 함께 걸음을 멈춰 선 채로 마주 보았다.
“너부터 말해.”
“아, 그…….”
선심 쓰듯 기회를 주자, 테오도르가 머뭇거리며 곧바로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러더니 이내, 그가 조금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다.
“결혼한다는 이야기 들었어.”
“……?”
뜬금없는 소리에 내 눈이 똥그래졌다.
“축하해.”
그러나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으며 중얼거리는 테오도르는, 그러한 나의 표정을 보지 못했다.
“그런 이야기는 어디서 들은 거야?”
“에른스트에게…… 에르랑 리아가 말해 줬다고…….”
“아.”
나는 잠잠히 고개를 끄덕였다.
‘브리안 오빠와 나누는 대화에 관심을 기울이더니, 그런 엉뚱한 말을 하고 다녔나 보네.’
이래서 아이들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되는 건데.
“저, 이브. 혹시 상대가 누군지 물어봐도…….”
“왜? 설마 죽이려고?”
“아, 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야!”
순간 놀란 테오도르가 허둥지둥 손을 내저었다.
“나는 그냥…… 축하해 주려고…….”
“축하?”
“으응……. 잘된 일이니까…….”
테오도르의 고개가 천천히 바닥으로 향했다.
“어, 어차피 애들도 아빠를 갖고 싶어 했고……. 아, 그러니까 에르랑 리아가 에른스트에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애석하게도 나는 테오도르를 너무 잘 알아서, 그가 마음에 없는 말을 꺼내고 있다는 것도 곧바로 알 수 있었다.
그와 함께 겪었던 몇 차례의 일로 인해, 그가 나를 좋아한다는 걸 너무나 명확하게 알아 버렸다.
테오도르는 내가 없으면 숨 쉬는 것마저 괴로워하는 남자였다.
그랬는데, 여전히 나를 좋아하면서, 이렇게 내게 축하를 말하는 그가 참 신기했다.
“너를 많이 아껴 주고 사랑해 줄 수 있는 그런 남자를 만나면 네게도 좋은…….”
축축한 땅바닥만 내려다보며 웅얼거리는 그를,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나를 봐 봐.”
“어……?”
“시선 피하지 말고. 나를 똑바로 봐 봐.”
그 말에 테오도르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괜찮아?”
“…….”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해도, 에르랑 리아가 다른 남자를 아빠라 불러도, 그래도 넌 괜찮은 거야?”
그러자 테오도르의 눈이 또다시 울먹울먹하게 습기를 머금었다.
“난, 난, 괜찮…….”
입술을 파르르 떨며 대답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그 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또르륵-
서러운 눈물 한 방울이 테오도르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한 방울에서 시작된 눈물은 점점 늘어나 그의 온 얼굴을 적셨다.
“테오…….”
내가 그의 눈물을 속상한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허겁지겁 변명을 시도했다.
“미안해, 이브. 울어서 미안, 아니, 아니…….”
그러다 이내 결심이 섰는지,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떴다.
“……사실은 안 괜찮아.”
그러고는 창백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 용서도, 사랑도 바라면 안 되는 사람이라는 거 알면서 이렇게 말해서 미안해.”
“…….”
“그런데, 나 정말 안 괜찮아.”
“…….”
“네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는 거…… 에르랑 리아가 다른 남자를 아빠라 부르는 거…… 다 안 괜찮아.”
입 밖으로 꺼내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는 듯, 그가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염치없는 거 아는데, 그렇지만…….”
차츰 그의 목소리에 더 이상 숨기지 못한 울음기가 묻어났다.
“나, 나는…… 아직, 흐윽, 아직 너 좋아해서…….”
“…….”
“네가, 흑, 네가 그랬잖아. 네가 사랑했던 남자는, 내 기억이 없어지면서 함께 죽은 사람이 되었다고…….”
그래, 내가 그런 말을 했었다.
초라한 나를 방어하려고 꺼내었던 그 말이, 그에게는 이처럼 아픈 가시로 남아 박혀 있었나 보다.
“그럼 걔는 죽은 걸로 치고, 흐읍…… 나는, 나는 그냥, 사랑해 주면 안 돼?”
결국 테오도르는 아이처럼 엉엉 울며 내게 물었다.
“말도, 안 되는 말이라는 거 아는데, 나, 나 이제 진짜, 진짜로 착해, 흐, 끕, 착해질 테니까…….”
나는 숨을 헐떡이며 우는 그에게 한 발짝 성큼 다가갔다.
“울지 마, 테오.”
뻗어 올린 손바닥이 그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조금 전 그가 우산을 쓰지 않고 내리는 비를 맞은 탓에 조금 축축했다.
“이……브……?”
테오도르는 울던 것을 멈추고 멍하니 내가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나는 천천히 손을 내려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가 기억하는 것보다 피부가 많이 까칠해져 있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의 얼굴이 왜 이렇게 상한 건지 알 것 같아서.
“아직 나를 좋아한다는 거, 정말이야?”
“으, 응…….”
가까워진 거리에 숨을 홉 참은 테오도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착해지겠다는 것도, 정말이야?”
“응…….”
“에르랑 리아의 아빠가 되고 싶어?”
“응, 응…….”
힘없이 대답하면서도 재차 고개를 끄덕이는 그 모습을 보자, 자그마한 미소가 내 입가에 피어났다.
“솔직하게 말해 줘서 고마워.”
“이브……?”
갑작스러운 대화의 흐름에 그가 따라오지 못하고 두 눈을 끔뻑였다.
이 멍청한 표정마저 귀여워 보이는 걸 보니, 나는 이제 정말로 그를 미워하던 마음을 완벽하게 떨쳐냈나 보다.
“내가 그랬잖아. 용서는 해도, 사랑은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으응…….”
“그런데 사실은 아니었어. 너를 사랑하는데, 여전히 사랑하는데 용서하지 못하는 초라한 마음에 인정하지 못한 거야.”
“어……?”
“그리고 이제는 너를 모두 용서했는데…….”
당황한 그를 향해, 나는 그 어느 때보다도 산뜻한 표정으로 웃으며 물었다.
“우리, 다시 사랑할까?”
“……!”
곧바로 고개를 끄덕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 아무런 답도 하지 못했다.
괜히 머쓱해져서, 나는 뺨을 긁적이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너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면…….”
“아, 아니!”
이때, 굳어 있던 테오도르가 잽싸게 대답했다.
“너무…… 좋아, 이브…….”
그가 나를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좋아서…… 꼭 꿈 같아서…….”
내 고백이 믿기지 않는다는 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울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이 당장 보듬어 주고 싶을 만큼 안타까웠다.
느리게, 그를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입술이 닿는 순간, 테오도르는 다시금 우산을 놓쳐버리고 말았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나는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테오도르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 목과 허리를 그러쥐는 게 느껴졌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오랜 아픔과 상처와 눈물이 넘나들며 차츰 흐려져 갔다.
맞물린 입술을 뗀 순간, 우리는 눈이 마주치며 동시에 푸스스 웃고 말았다.
조심스러운 입맞춤의 끝에 남은 것은 이처럼 깨끗하고 새하얀 웃음이었다.
그 사실이 너무나 벅차서, 내리는 빗속에서 우리는 조금 더 오래 맞닿았다.
부슬부슬 내리던 빗줄기가 차츰 멎어갈 때까지.
축축하던 풀 잎사귀 위로 따스한 햇볕이 드리울 때까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어머니를 찾아 바깥으로 나올 때까지.
그렇게, 오래도록.
“오늘은 어머니가 아주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어.”
아침 식사를 마친 직후.
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나란히 앉혀 놓고 이야기했다.
“쭝요한 이야기?”
“구게 모에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고개를 오른쪽으로 갸웃하며 물었다.
어쩜 고개를 갸웃할 때의 방향과 각도마저도 테오도르를 닮았는지, 참 신기할 노릇이다.
“아버지를 만나러 갈 거야.”
“……!”
“……!”
순간 아이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아버지? 아빠요? 에르랑 리아에게도 아빠가 있어요?”
“진짜 아빠 만나러 가는 거예요? 아빠는 어디 있는데요?”
이제까지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한 번도 내게 아버지가 궁금하다거나 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내가 꺼낸 말에 곧바로 이것저것 물어오는 것을 보니, 궁금하지 않았던 게 아니라 궁금한 걸 참고 있었나 보다.
나를 힘들게 하지 않으려고 그런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어른들의 사정으로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던 아이들에게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궁금한 게 많아도 우선 양치를 하고 외출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 아빠가 에르랑 리아를 기다리고 계시니까.”
“에르는 치카치카 하러 갈게요……!”
“리아는 로라랑 머리 예쁘게 할 거예요……!”
아이들은 당장 외출 준비를 하겠다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뒤, 단장을 마친 아이들과 함께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이동했다.
“리아, 나 아빠 만날 생각에 가슴이 콩딱콩딱해.”
“리아두 그래, 에르. 그런데 리아 머리 새까맣다고 아빠가 싫어하면 어떡하지?”
“아냐, 리아 머리카락 예뻐.”
“그치만…….”
“진짠데. 만약 그러면 에르가 아빠 혼내 줄게!”
“안 돼! 그러다가 아빠가 에르까지 싫어하면 어케!”
아이들은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저희끼리 속닥거렸다.
아빠를 만난다는 기대감에 잔뜩 부푼 채였다.
마침내 우리를 태운 마차가 황궁의 정문 통과하고, 황제궁 앞에서 멈추었다.
“어? 지지 아조씨……?”
마차 아래로 폴짝 뛰어내린 에르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뭐어? 지지 아조씨라고?”
뒤따라 내린 오딜리아의 두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 그러더니 이내…….
“마, 마, 마, 말두 안 대!”
오딜리아가 소리를 빼액 질렀다.
“리, 리아……?”
예상치 못한 그 반응에 테오도르가 어쩔 줄 몰라 하며 아이를 불렀다.
“아조씨가 왜 여기 있어!”
“아, 그게…….”
“아, 아, 아조씨가 진쨔루 리아 아빠야?”
직선적인 그 물음에 테오도르가 멈칫했다.
그리고 소심하게 대답했다.
“응, 리아. 내가 에르와 리아의 아빠야.”
“……!”
“……!”
아이들은 충격받은 얼굴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우, 우으, 우으으으…… 으아앙!”
울먹거리던 오딜리아가 그 자리에 선 채로 울음을 터뜨렸다.
“으아아아아앙!”
그러자 에르빈이 바닥에 주저앉으며 함께 울기 시작했다.
흡사 나라를 잃고 통곡하는 수준이었다.
‘역시 우는 것도…… 닮았어.’
당황하여 아이들을 달래고자 우왕좌왕하는 테오도르의 눈가도 조금 붉었다.
그리고 아마 그런 세 사람을 쳐다보는 나의 눈가 역시도.
* * *
언제 그렇게 울었냐는 듯,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의 양팔에 매달려서 걸었다.
나는 뒤따르며 그들을 감상했다.
“있지요, 아조씨. 아조씨이.”
“아이참, 에르. 아조씨가 아니라 아빠잖아.”
“아, 맞다. 아빠!”
오딜리아의 타박에 에르빈이 헤헤 웃으며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긋 보았다.
“아빠. 에르가 아조씨라고 해서 화난 거 아니죠?”
에르빈이 테오도르의 손등에 뺨을 비비적거리며 물었다.
“어, 어……?”
나에게는 익숙한 것이었으나, 테오도르는 에르빈의 애교에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가 곧바로 대답을 못 하자, 에르빈이 테오도르의 손등과 손바닥에 뽀뽀를 쪽쪽 했다.
“우웅, 미안해요. 에르가 실수했어. 에르는 아가니까 용서해 줘요. 웅?”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사랑스럽게 속닥거리는 말에 테오도르는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어케, 에르. 아빠 화났나 봐.”
“아, 아빠. 화 많이 났어요?”
그가 계속해서 아무런 말이 없자, 에르빈이 안절부절못하기 시작했다.
‘좋아서…… 죽으려 하는군.’
물론 뒤에서 지켜보는 나는 그가 화가 난 게 아니라 너무 좋아서 굳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챘지만.
“에르, 빨리 아빠한테 사과해.”
“아빠, 미안…….”
“아니야, 에르!”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에르빈이 울먹하기 전에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아빠는, 음, 에르한테 화 하나도 안 났어.”
스스로를 ‘아빠’라고 지칭하는 게 아직은 어색한가 보다.
테오도르의 뺨이 수줍게 물들어 있었다.
“그럼 뽀뽀해 줘!”
“응……?”
“화 안 났으면 ‘우리 에르 사랑해’ 하고 뽀뽀해 줘요! 어머니는 뽀뽀해 주신단 말야.”
“내가…… 그래도 돼?”
“에르 아빠잖아!”
에르빈은 어서 뽀뽀를 해 달라며 고개를 젖혀 들었다.
테오도르는 머뭇거리면서도 아이의 요구에 따라 허리를 숙였다.
그러고는 아이의 뺨에 쪽- 소리 나게 입을 맞춰 주었다.
“‘우리 에르 사랑해’도 해 줘야지!”
“아…… 우리 에르, 사랑해.”
“헤헤.”
어느새 기분이 좋아진 에르빈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헤실헤실 웃었다.
테오도르는 퍽 감격스럽다는 듯한 얼굴로 멍청하게 에르빈을 쳐다보고 있었다.
“리아도! 리아도 뽀뽀해 줘요!”
이때 테오도르의 반대편에 있던 오딜리아가 그의 손을 쭉쭉 잡아당기며 보채기 시작했다.
“리아도 ‘사랑해’ 해 줘요!”
“응, 우리 리아도…….”
테오도르는 조금 목이 멘 목소리로 오딜리아에게도 말해 주었다.
“사랑해.”
이번에는 그의 입술이 오딜리아의 이마에 닿았다.
오딜리아는 신이 나서 깡총깡총 뛰었다.
내가 그 장면을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문득 아이들이 테오도르를 소매를 붙잡아 당겼다.
테오도르가 몸을 숙여 주자, 내 쪽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속닥속닥 귓속말을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나를 두고 저희끼리 나누는 비밀 이야기에 의아할 무렵.
몸을 일으킨 테오도르가 내 쪽을 돌아봤다.
“이브.”
그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응, 그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말끝을 흐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테오도르의 뒤편에서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이 썩 수상했다.
“아이들이 이상한 말을 한 건…….”
순간 내 목소리가 뚝 끊겼다.
오른쪽 뺨에 닿은 이 촉촉하고 따스한 감촉은…….
“……!”
“사랑해, 이브.”
테오도르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며 내게 말했다.
“너…….”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내가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뭘 하는 거냐고 따지려 할 적에, 그가 수줍게 변명했다.
“에르랑 리아가 부탁해서 그런 거야. 어머니에게도 사랑한다고 해 주라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나와 테오도르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식.
작은 웃음이 입가에 번져나갔다.
“나도 사랑해, 테오.”
나는 그가 내게 준 짧은 입맞춤을 다시금 돌려주며 속삭였다.
* * *
“황제? 구롬 아빠가 미친 황제야?”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서 황궁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던 에르빈이 불쑥 물었다.
“으, 으응?”
테오도르는 당황하여 두 눈을 끔뻑였으나, 오딜리아는 신이 나서 손뼉을 쳤다.
“우와! 에르 말이 맞았어! 지지 아조씨는 미친 황제고, 아빠가 지지 아조씨야!”
“…….”
까르륵 터져 나온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테오도르는 그만 말을 잃고 말았다.
충격받은 테오도르를 대신하여 내가 나섰다.
“에르, 리아. 그런 나쁜 말은 누가 알려 줬지?”
“이거 나쁜 말이에요? 예전에 밀까루 아조씨가 쓴 말인데…….”
“에르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어머니에게 설명할 수 있어?”
“우웅…… 아니요.”
“뜻을 모르는 말은 함부로 쓰면 안 돼. 나쁜 말일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계속 나쁜 말을 쓰면 아빠가 속상해서 울지도 몰라.”
“……!”
“……!”
테오도르를 언급하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화들짝 놀랐다.
그러고는 혹시나 테오도르가 울진 않을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아빠 미아내요. 이제 구런 나쁜 말 안 쓸게요. 구러니까 울지 마세요.”
“마쟈, 마쟈! 아빠는 미친 황제 아니야! 지지 아조씨도 아니야!”
“으응…….”
테오도르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어색한 표정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계속 걷다가 커다란 나무를 발견했다.
“어? 나무다!”
“엄청 큰 나무야!”
아이들의 외침에 나와 테오도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나는 나무를 알아보았다.
4년 만에 보는 것이었지만, 모를 수가 없었다.
이 나무는…… 그와 나의 어린 날의 기억이 깃든 약속의 나무였으니까.
“올라갈래?”
테오도르가 내게 물었다.
“그럴까?”
나도 웃으며 화답했다.
그러자 그가 아이들에게 다가가 몸을 낮췄다.
“에르, 리아. 이쪽으로 와.”
“우웅?”
“왜요, 아빠?”
아이들이 테오도르에게 쪼르르 달려와 안겼다.
“읏챠.”
테오도르는 양팔에 아이들을 하나씩 안고서 나무 위로 뛰어올랐다.
“우와……!”
아이들의 감탄이 이어졌다.
‘이런 건 역시…… 아빠가 있으니까 좋네.’
실없는 생각을 하며, 나도 그 뒤를 쫓아 나무 위로 올라갔다.
“여기, 엄청 시원해!”
“그리고 엄청 높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에게 안긴 채로 신이 나서 재잘거렸다.
“그래, 하지만 아빠랑 함께 있을 때만 올라오는 거야. 알았지?”
테오도르가 다정하게 웃으며 아이들에게 일렀다.
“웅웅, 알았어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각자 나와 테오도르의 무릎을 차지하고 앉아 도란도란 떠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들은 쌕쌕 잠이 들었다.
“잠들었네…….”
테오도르는 여전히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아이들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떠들다가도, 금세 지쳐 버리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 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나와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삶에 테오도르가 함께하는 순간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었으니까.
이따금 그러한 꿈이라도 꾸는 날에는, 스스로의 나약함을 탓하며 애써 지워 내곤 했다.
막상 현실이 된 순간은 눈물겹도록 평화롭고 따스하였다.
잠든 아이들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조금은 먹먹한 감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려왔다.
무심코 고개를 들던 나는 테오도르와 시선이 마주쳤다.
문득 어린 날, 이 자리에서 그와 나누었던 약속이 생각났다.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
테오도르 또한 같은 것을 떠올린 모양이다.
나를 향해 저처럼 아스라한 미소를 짓고 있는 걸 보면.
“테오.”
“이브.”
우리는 또 동시에 서로를 불렀다.
그 사소한 것에도 우리는 자그마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먼저 말해.”
“아니, 너부터…….”
서로 먼저 말하라고 양보를 하다가, 결국 내가 먼저 말했다.
“그냥. 내일 두 시에도 여기서 만날래? 너랑 나랑 에르랑 리아랑, 이렇게 넷이.”
“어…….”
그 제안에 테오도르가 두 뺨을 슬쩍 붉히며 웃었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다음 날도 매일매일 여기서 만나자고 말하려 했는데.”
이에 우리는 또다시 잔잔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약속하는 거야. 잊어버리면 안 돼.”
“응, 절대. 절대 안 잊어.”
장난스럽게 건넨 말에, 테오도르는 사뭇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나는 그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사랑해, 테오.”
“나도…… 사랑해, 이브.”
그가 내 뺨에 입맞춤을 돌려주며 수줍게 답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에게 아빠가 생긴 그 여름날,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에서.
이제는 둘이 아니라 넷이 됐지만, 오랜 약속이 앞으로도 영원히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렇게 우리는 활짝 웃으며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내 남자의 인성이 조금 이상하다>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