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어둠과 빛
툭, 투둑-
창밖으로 빗소리가 들렸다.
늦은 봄을 지나 여름을 알리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알브레히트에 돌아와 정착한 지도 벌써 한 계절이 지났다.
그 짧은 사이, 참 많은 일들이 벌어졌다.
‘어……?’
문득 저 멀리 저택의 현관 앞에 비를 맞으며 서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갑자기 내린 비에 우산이 없는 모양이다.
‘언제 또 찾아온 거야?’
테오도르는 내가 만나 주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미련하게도 매일같이 찾아오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평소 같았더라면 ‘또 찾아 왔네’ 하고 가볍게 넘겼을 터이나, 하필 오늘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가 내리는데 상식이 있다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나는 애써 그를 무시하고자 하였으나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상식이 없잖아.’
시간이 째깍째깍 흘러갔다.
신경이 쓰여 창 밖을 다시 내다보자, 여전히 그가 현관 앞에 서 있었다.
보통 저러고 있다가 정원에서 노는 아이들의 눈에 띄는 날에는 아이들과 짧은 인사를 나누고 돌아가곤 했으나, 오늘은 비가 와서 아이들도 실내에서만 놀았다.
‘저 미친놈이 계속 저기 있으려나 봐.’
결국 나는 우산을 들고 바깥으로 나갔다.
“무슨 궁상이야?”
그의 머리 위로 우산을 씌워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이브!”
비를 맞고 축축해진 테오도르가 나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건넸다.
오늘의 선물은 꽃다발인가 보다.
“젖었잖아?”
“아…….”
테오도르는 그제야 제가 들고 온 꽃다발이 젖은 것을 알아차린 듯 화들짝 놀랐다.
그러더니 곧바로 두 눈썹을 추욱 늘어뜨리며 사과를 했다.
“미안해…….”
“미안한 걸 알면 앞으로는 조심해. 이런 식으로 사람 신경 쓰이게 하지 말고.”
“으응…….”
꼭 비 맞은 강아지처럼 울상이 된 모습에 괜히 찜찜한 마음이 들었으나, 냉정하게 축객령을 내렸다.
“이만 돌아가.”
“알았…….”
테오도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일 때였다.
“잠깐.”
나는 다급히 테오도르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고는 놀라 휘둥그레진 눈으로 그의 복부를 쳐다보았다.
젖은 셔츠 안쪽에 그의 복부를 칭칭 감은 붕대가 비쳤다.
그리고 그 붕대에 피가 배어 나오고 있었다.
“다친 거야?”
“어?”
나의 물음에 두 눈을 끔뻑이던 테오도르가 내 시선을 따라 자신의 복부를 내려다보았다.
“아……!”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알아챈 듯,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별거 아냐.”
테오도르는 가볍게 대꾸하며 손으로 복부를 가렸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치워 냈다.
“별거 아니긴. 피가 비치고 있는데.”
별거 아니라는 그의 말과 달리, 스윽 훑어보기에도 굉장히 아파 보였다.
“미, 미안. 황궁에 가서…….”
“따라와.”
나는 테오도르의 팔을 붙잡은 채로 저택으로 끌고 갔다.
쓸데없이 버티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테오도르는 슬쩍 열이 오른 얼굴로 쫄래쫄래 따라왔다.
그러다가 저택 실내로 발을 들일 적에, 그가 망설이는 얼굴로 머뭇거렸다.
감히 제가 나의 영역에 들어서도 되는지 걱정하는 얼굴로.
테오도르가 허락을 구하듯 나를 슬쩍 쳐다보았다.
축 늘어진 두 눈썹과 나보다 훨씬 더 큰 신장에도 불구하고 꼭 나를 올려다보는 듯한 황금색 눈동자가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일부러 내 앞이라 불쌍해 보이려는 거 아냐.’
그런 의심마저 들 정도로 불쌍한 강아지의 모습이었다.
테오도르는 잠시간 입술을 달싹이다가 조심스럽게 내게 물었다.
“저, 이브…… 내가, 들어가도…….”
“들어와.”
순간 그의 얼굴이 환해졌다.
“말해 두는데, 비가 오는 날에 그렇게 있는 거 싫어.”
나는 그런 그를 향해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 관리 못해서 아픈 채로 나타나는 건 더 싫고.”
“……미안.”
잠시 밝아졌던 그의 얼굴은 다시금 침울해졌다.
비 맞은 강아지 꼴로 계속 사과하는 모습에 약간의 동정심이 치밀었으나, 이런 것은 확실히 말해 둬야 한다.
이런 모습을 봐 봤자, 초라한 그의 모습에 통쾌하기보다는…….
‘계속해서 신경만 쓰이잖아.’
나는 테오도르를 손님방으로 데려갔다.
그가 걷는 걸음마다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젖은 발자국에 어쩔 줄 몰라하며 열심히 내 뒤를 쫓았다.
* * *
저택의 의사가 테오도르를 살폈다.
“칼에 맞은 상처군요.”
젖은 붕대를 걷어내자 드러난 그의 상처가 무척 참혹했다.
“칼에 맞은 거라고?”
“한 번 베인 곳을 여러 차례 다시 베인 흔적이 있습니다. 상처가 제대로 아물 때까지 당분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잠자코 의사의 설명을 듣던 내가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음…….”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내 시선을 회피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누가 겁 없이 알브레히트의 황제에게 칼을 겨눈단 말인가.
‘설마.’
문득 스치는 생각이 하나 있었다.
“어둠을 공인한 일 때문이야?”
“으응…….”
테오도르는 눈에 띄게 내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런 거라면 조금 납득이 갔다.
테오도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관념 속에 뿌리 박혀 있는 악을 공인하겠다고 선언했다.
필히 목숨을 걸고서라도 이를 제지하려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날 회의장에서 테오도르를 향한 사람들의 시선 또한 몹시 불건하였고.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황궁의 삼엄한 경비는 둘째치고, 테오도르가, 그 테오도르가 고작 암살자들에게 이렇게 당한다고?
‘말도 안 돼.’
오래전, 내가 그의 측근 호위로 지내던 시절.
나는 그 직책이 무색하게도 할 일이 없었다.
테오도르가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어렸을 적부터 숨겨 온 가호의 힘이 아니더라도, 그는 어지간한 기사들보다 강했다.
수년에 걸친 지난 전쟁 속에서도 한 번도 다친 적이 없다고 들었다.
마물들마저 눈이 마주치면 두려워 달아난다는 남자가 아닌가.
최근 그가 어둠을 받아들인 이후 쇠약해졌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지만…….
‘하지만 셀린느 님이 그건 헛소문일 거라고 했잖아. 가호의 힘은 그런 식으로 사람을 해치지 못한다고.’
테오도르를 물끄러미 응시하는 내 얼굴이 차츰 딱딱하게 굳어 갔다.
‘테오도르를 습격한 암살자가 엄청나게 대단한 실력을 갖고 있거나, 그게 아니라면…….’
어느새 의사가 처치를 완료하고, 새 붕대를 갈아 주었다.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는 아니나, 이미 여러번 덧난 상처입니다. 부디 조심해 주십시오.”
의사가 나간 뒤, 나는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너, 설마 일부러 이런 거야?”
“……!”
이에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들켰다!’ 하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 그게…….”
머뭇거리던 그가 아랫입술을 아프도록 꾸욱 깨물었다.
“……미안해, 이브. 어쩔 수 없었어.”
그러더니 고개를 수그리며 주절주절 변명을 시작했다.
“네가 자기 관리도 못해서 아픈 모습 보이는 거 싫어하는 거 아는데…….”
“아는데?”
“어, 어차피 너는 나 싫어하잖아. 그러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러니까 내 말은…….”
테오도르는 힐긋힐긋 내 눈치를 살피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이런 것도 닮았네.’
그런 테오도르의 모습에 에르와 리아가 혼날 때의 모습이 겹쳐졌다.
나는 무섭게 팔짱을 끼고서 그를 쳐다보았다.
조금 전 몹시 아파 보였던 그 참혹한 상처가 생각이 났다.
왜 일부러 그런 짓을 하지?
고통을 즐기는 타입이었나?
아니면 나한테 불쌍해 보이려고?
혹 그 괴소문을 낸 것도 테오도르의 짓인가?
테오도르는 정상인들과 사고의 범주가 조금 달랐으니, 내게 관심과 동정을 사고자 일부러 소문을 내어 암살자들에게 당해 주는 것이라 하여도 아주 이상하게 여겨지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만일 정말 그가 나의 관심을 요구한 것이라면 구태여 내게서 상처를 숨기고자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럼, 왜…… 설마?’
이때 문득 떠오른 가설에 내 미간이 왈칵 찌푸려졌다.
“테오도르, 너…….”
“강하게 반발하는 무리들이 있어.”
내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린 것을 눈치챈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항변했다.
“내버려 두면 제국민들 사이에 침투해서 제국을 더 혼란스럽게 할 거야.”
“그래서, 그들을 뿌리 뽑으려고 스스로 미끼라도 됐다는 소리야?”
어이가 없어서 큰 소리가 나갔다.
“너도 봤잖아? 그날, 내가 어둠을 공인하겠다고 했을 때 귀족들의 반응.”
테오도르는 나를 이해시키겠다는 듯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귀족들뿐만은 아니지. 일반 제국민들도 마찬가지일 거야.”
“어차피 시간이 흐르면 사람들은 인정하게 되어 있어!”
나는 조금 화가 나서 외쳤다.
이만한 일을 벌이면서, 그가 사람들의 반발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들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고, 당장 얼마간은 혼란이 있겠으나 세월이 지나가며 차차 적응될 일이었다.
의사는 테오도르의 상처가 같은 자리를 수차례 베여 아물지 못하고 있다 했다.
그러니까 자객들의 습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는 황궁의 경비를 강화하기는커녕 이미 ‘수차례’라는 표현을 쓸 정도로 스스로 미끼가 되어 자객들에게 여러 번 몸을 내어준 것이다.
굳이 단기간에 해결을 보기 위해 스스로를 해치는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브.”
이때, 테오도르가 조심스러우면서도 굽히지 않는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리아는, 어머니가 검은 머리를 싫어한다고 울었어.”
리아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는 멈칫했다.
“리아의 검은 머리는 내가 물려준 거잖아. 그리고 어쩌면, 테네브리스의 가호도…….”
“…….”
“내가 어렸을 때 그것 때문에 겪었던 좋지 않은 일들까지 리아에게 물려주고 싶지 않아.”
어린 날의 일을 언급하는 테오도르의 표정이 아주 작게 일그러졌다.
내가 테오도르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의 머리 색을 숨긴 채였다.
[마법이야. 내 머리 색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아버지가 페르디난트에 부탁해 마법을 심어두었거든.]
어렸던 테오도르는 분명 담담한 말씨로 그렇게 말하였으나.
[끔찍하지 않아요.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내가 건넨 말에 한동안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다가 뒤늦게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기뻐하던 그를 기억한다.
테오도르가 그 검은 머리로 인해 얼마나 많은 흉흉한 소문에 휩싸였는지는 알브레히트의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그를 위협한 것들이 단지 소문뿐만이 아니라는 것 또한 그와 함께 보았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알게 되었다.
친모를 잃은 어린 1황자를 죽이고자 하였던 암살자들 중에는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이들 외에도, 그를 어둠의 현신이라 여긴 무리가 보낸 이들이 있었으니까.
“게다가 리아는 이미 어둠을 사용했고…… 그날 회의장에서 내게 향했던 시선들이 언젠가 리아에게도 이어질 거야.”
테오도르는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리아도 조금 더 자라면 분명 의문을 갖게 되겠지. 왜 사람들이 검은색을 싫어하는지. 왜 자신을 두고 좋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지.”
“…….”
“그래서 나는 리아에게 감히 누구도 그런 시선을 보내지 못하도록 뿌리 뽑을 거야.”
“…….”
“리아가 더 자라기 전에, 모두.”
나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만일 테오도르가 나 때문에 희생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당장 그만두라고 말할 터였다.
그렇지만 그가 제 몸을 다쳐가면서까지 일을 벌이는 것은 내가 아니라 리아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건 내가 대신해 주지 못하는 일이었다.
“이브, 혹시나 네가 걱정할까 봐……. 절대로 네 환심을 사려고 그러는 게 아니야.”
테오도르는 내 눈치를 슬쩍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네게 용서를 받기 위함도 아니고…….”
혹여나 제가 또 용서를 받고자 나를 귀찮게 하는 것으로 보일까 봐 걱정하는 듯한 말투와 표정이었다.
테오도르는 잠시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피가 통하지 못한 입술이 창백하게 질려갈 무렵, 그가 간신이 입을 뗐다.
“나는 그냥…….”
다소 잠긴 목소리로 그가 나직이 말했다.
“나도 리아의 아빠니까.”
그 순간 나는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깨달았다.
테오도르도 아이들의 아버지라는 것.
이제까지 나는 테오도르가 아이들의 생물학적 아버지지만, 진짜 아버지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은 내가 테오도르를 떠나기로 보다 확고하게 결심을 굳히게 만든 계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나는 테오도르가 내 아기를 해칠 것이라 생각하였다.
내가 나의 친부인 오스발트를 아버지라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는 아버지는 내 아기에게도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배 속에서 움트던 나의 아이가 언젠가 어른이 되어 사실을 알게 되더라도 나의 그런 판단을 이해해 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오스발트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최근 들어 조금씩 느끼는 중이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테오도르는 에르빈을 구하기 위해 주저 없이 벤야민에게 달려들었다.
나중에 모든 사건이 마무리되어서야 알게 됐다.
벤야민이 에르빈을 제물 삼아 정신 조작을 시도하고자 하였다는 것을.
자칫 잘못하였더라면 테오도르의 정신이 망가져, 살아 있어도 살지 못한 존재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그리고 테오도르가 자칫 자신이 위험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벤야민에게 뛰어들었다는 것까지.
[리아에게 감히 누구도 그런 시선을 보내지 못하도록 뿌리 뽑을 거야.]
또, 테오도르는 오딜리아를 위해 스스로 어둠술사가 되어 공격을 받는 중이었다.
타인을 위해서는 결코 할 수 없는 희생이었다.
[안녕, 에르. 리아.]
매일매일 아이들을 보며 대하는 그의 태도에도 진심이 담겨 있었고…….
[으윽…… 누가 이런 함정을…….]
심지어 그는 아이들이 실망할까 걱정하며 일부러 따가운 밤송이가 가득한 함정에 빠져 주는 수고까지 감행하지 않았나.
그리고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며, 에르와 리아가 태어났을 때.
[어, 어떡해, 네, 네가…….]
[아……. 에르와 리아야…….]
정신 사나울 정도로 옆에서 발을 동동 굴리더니, 아이들이 태어나는 걸 보며 눈물을 훌쩍이기까지 했었다.
만약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그런 오해들로 갈라지는 일이 없었더라면.
그래서 테오도르가 내 옆에 있어 주었더라면.
아이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온전히 함께하였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아냐. 쓸데없는 생각이야.’
나는 곧바로 머릿속에 피어오르던 의문을 모두 지워냈다.
“…….”
“…….”
한동안 내가 말없이 있자, 테오도르가 또다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 그게, 이브, 나는 그…… 내가 애들의 아빠가 되겠다는 게 아니라…….”
“…….”
“그러니까 그 부성애로…….”
“…….”
“아니, 내가 말 실수를…….”
“…….”
“미안해, 이브. 다시는 그런 말 안 꺼낼게. 아빠라느니 그런 말…….”
“…….”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내 시선을 받은 테오도르가 양손을 다소곳하게 모은 채로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 봤자 거대한 체격은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지만.
침묵이 흐르는 방 안에, 고요한 숨소리만이 흘렀다.
똑똑.
마침 노크 소리와 함께 로라가 깨끗한 옷을 가져다 주었다.
“브리안 님의 셔츠를 가져왔는데, 사이즈가 맞을지 모르겠어요.”
“고마워, 로라.”
나는 로라에게서 건네받은 셔츠를 들고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그가 본래 입고 있던 옷은 다시 입기 힘들도록 젖어 버린 상태였다.
테오도르는 깨끗한 흰 셔츠에 팔을 꿰었다.
‘조금, 작나?’
브리안 또한 체격이 작은 편은 결코 아니었으나, 테오도르의 체격이 워낙 좋던 탓에 옷이 조금 작은 느낌이 들었다.
특히나 가슴 쪽의 윗단추가 잘 잠기지 않았다.
몇 번 단추를 잠그려다 놓치는 그의 모습에, 나는 한숨을 쉬며 다가갔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그의 셔츠 깃을 붙잡았다.
“어, 어……?”
순식간에 테오도르의 얼굴이 발그레 물들었다.
“이, 이브…….”
“가만히 있어 봐. 네가 에르나 리아도 아니고, 셔츠 단추도 못 채우면 어떡해?”
“아, 응…… 고마워…….”
톡.
톡.
내 손에 의해 단추가 하나씩 잠겨 갔다.
“윽…….”
귓불까지 토마토처럼 새빨개진 테오도르가 이상한 신음 소리를 냈다.
그러다가 노려보는 내 시선에 찔끔 위축되었다.
단추를 목끝까지 모두 채워 준 뒤에 몸을 물렸다.
잔뜩 숨을 참고 있던 테오도르는 그제야 숨을 터뜨렸다.
그럴 적에 그의 얼굴은 꼭 수줍어 하는 새신랑 같았다.
어이가 없어서 절로 한쪽 눈썹이 치솟았다.
나는 테오도르가 그렇게 순진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에도 내게 고백을 하고 순식간에 입을 맞추는가 싶더니, 정신 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나를 침대 위로 이끌지 않았나.
“이브, 정말…… 정말 고마워…….”
두 뺨이 발그레해진 테오도르는 내가 채워 준 단추를 연신 만지작거리며 중얼거렸다.
나는 그것을 외면하며 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사이 비가 조금씩 그쳐 갔다.
“비가 완전히 그칠 때까지 머물다 가든가.”
나는 퉁명스럽게 말하고서, 문을 쾅 닫고 자리를 떴다.
* * *
방 안에 혼자 남은 테오도르는 닫힌 문을 가만히 응시했다.
이브는 따뜻하면서도 차가웠다.
칼같이 선을 긋는 이브의 태도에 다친 부위보다도 가슴이 더 조일 듯 아프고 괴로웠다.
감히 그 이상을 바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마저도 감사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
테오도르는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뜨리며, 손바닥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브…….”
그녀의 이름을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짙은 괴로움이 묻어나 있었다.
조금 전, 그녀가 단추를 채워주기 위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코끝으로 훅 끼치는 그녀의 향기 때문에 한순간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을 뻔했다.
과거, 당연하게 사랑을 나누었던 때처럼…….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꾸욱 깨문 채로, 참아 냈다.
그녀가 바로 앞에 있는데도 그녀에게 더 다가가지 못하고 참아야 한다는 사실이 괴로웠으나, 테오도르는 곧바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오늘은 이브가 나한테 우산을 씌워 줬어.”
그곳에 서서 비를 맞고 있던 것은 결코 의도한 게 아니었다.
그녀를 보러 왔다가 갑자기 내리는 비에 걸음을 돌리기가 아쉬워서.
그래서 조금만…….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기다렸다가, 그때에도 그녀가 오지 않으면…….
그러한 마음으로 기다리던 조금의 시간들이 모여 그녀의 눈에 띄었나 보다.
무시하고 내버려 둘 수도 있었을 텐데, 착한 이브는 우산을 들고 제게 와주었다.
“그리고 의사도 불러 줬고…….”
이만 돌아가라고 선을 그어 말하면서도, 제 상처를 못 본 척하지 못하고 저택으로 데려왔다.
“게다가 단추도…….”
화르륵.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테오도르는 또다시 열이 올랐다.
이번에는 얼굴뿐만이 아니라 온몸에 열이 오르는 기분이었다.
테오도르는 다시금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앓는 듯한 신음소리가 손바닥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정말 따뜻한 친절이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헷갈리지 않고자 굳이 제 목소리로 되새겼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이브는 이렇게 친절을 베풀었을 거야.”
나직한 저음이 아프게 내리깔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아니었더라면 더 상냥하게 대해 줬을지도 모르지.”
꺼낼수록 스스로를 아프게만 하는 말들이었으나, 이러지 않으면 자꾸만 주제넘는 희망을 가져 버리고 말 테니까.
욱신욱신-
심장의 고통을 외면하며, 테오도르는 계속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비가 그치고 테오도르는 황궁으로 돌아갔다.
체르니시아 저택의 손님방에 머무는 동안, 비가 영영 그치지 않길 바랐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비는 금세 그쳤고, 테오도르는 더 이상 그곳에 머무를 명분이 없었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아르민이 그를 맞이했다.
“다녀오셨습니까, 폐하.”
“오전에 결재한 안건들은?”
“모두 처리하였습니다. 아, 그리고 이쪽은 새로 올라온 보고서들입니다.”
테오도르는 무심한 낯으로 아르민이 새로 내미는 서류들을 훑었다.
아르민은 불안한 낯으로 그를 힐끔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보통 새벽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 시간 전까지 업무를 다 끝내었다.
그래야 이브와 아이들을 만나러 갈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는 이브와 아이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손님이라서, 당당하게 문을 두드리지 못하는 처지였다.
운이 좋으면 그들을 일찍 마주치고 돌아오는 날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은 날에는 오후 늦게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점심을 거를 때가 잦았고 식사 시간이 들쑥날쑥해졌다.
게다가 요새는 밤마다 찾아오는 암살자들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거기다 스스로 미끼가 되겠다며 그들에게 살까지 내어준 탓에 몸이 아주 많이 상한 터였다.
4년 전, 이브 로웰린의 죽음으로 미쳐 버렸을 때.
그때에도 황제는 제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리고 이보네를 다시 찾은 지금, 테오도르의 상태는 그때와 비교하여 아주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가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보고 멀쩡하다고 여기는 것 같으나, 가장 측근에서 모시는 아르민과 린든만이 그 사실을 알았다.
“그자는?”
서류를 대강 훑으며 오후에 해야 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한 테오도르가, 짤막하게 물었다.
기민하게 그가 말하는 대상을 알아차린 아르민이 잽싸게 대답했다.
“린든 경이 심문 중입니다.”
“내가 가지.”
테오도르는 얼마 전 제 복부에 구멍을 내놓았던 암살자가 갇혀 있는 지하 옥사를 찾아갔다.
“폐하!”
마침 그곳에서 암살자를 심문 중이었던 린든이 테오도르를 향해 인사했다.
“실토했나?”
테오도르가 차가운 시선으로 암살자를 힐긋 눈짓하며 물었다.
오전에 이브의 앞에서 보이던 것과는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냉랭한 태도였다.
“아, 아직…….”
“비켜라, 린든.”
테오도르는 싸늘한 눈으로 암살자를 쳐다보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자박, 자박.
유독 음산하게 느껴지는 발소리에 암살자가 고개를 들었다.
“……!”
그러다가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고는 숨을 홉 삼켰다.
암살자의 동공에 공포가 잔뜩 서렸다.
잠시간 암살자를 스산히 응시하던 테오도르가 히죽,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안녕, 쥐 손님.”
비속어 하나 들어 있지 않은, 무척이나 나긋하고 상냥한 인사였다.
착한 강아지는 바르고 고운 말만 쓰는 법이다. 주인이 있는 곳에서도, 없는 곳에서도.
그러나 정작 그 착한 인사말에 암살자의 표정이 희게 질려 갔다.
아름답게 웃고 있는 테오도르의 주위로, 검은 어둠이 으스스하게 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이윽고, 처절한 비명이 이어졌다.
길지 않은 심문 끝에 테오도르는 썩 만족스러운 정보를 얻어 냈다.
“이렇게 조금만 겁주어도 실토할 것을.”
테오도르는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암살자를 보며 혀를 쯧 찼다.
“너무 온건하게 심문한 것 아니냐, 린든.”
“제가 온건한 게 아니라, 폐하께서 과격하신…….”
린든은 조금 억울한 목소리로 중얼중얼 변명했다.
린든의 검을 뺏어 든 테오도르가 주저 없이 암살자를 베었다.
만약 그들이 노리는 상대가 제가 아닌 리아였다고 하더라도, 그 어린아이를 잔인하게 습격하였을 놈들이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테오도르의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신병은?”
“변함없습니다.”
“그의 처형이 일주일 남았던가.”
테오도르는 머릿속으로 날짜를 헤아려 보았다.
쨍그랑-
검이 바닥에 부딪치며 내는 날카로운 쇳소리를 뒤로하며, 테오도르는 지하 옥사를 나섰다.
* * *
비가 그친 오후.
오전 내내 저택 안에 갑갑하게 머물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아직 마르지 않은 잔디 위를 뛰어다니며 놀았다.
나는 창을 타고 넘어오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소파에 몸을 묻었다.
테이블 위에는 테오도르에게 받은 젖은 꽃다발이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차마 그대로 갖고 돌아가라고 할 수 없어서, 대충 치워 둔 것이었다.
무심코 그것을 쳐다보던 내게, 문득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오래전.
테오도르에게 나의 진명을 밝히고, 그와 체온을 나눈 직후.
나는 그의 품 안에서 바스락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그만 돌아가 봐야 해요, 폐하. 아니, 돌아가 봐야 해, 테오.]
아직은 존대를 거두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게 조금 어색하던 때였다.
그만 돌아가려는 나를, 테오도르는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싫어, 이브. 가지 말고 내 옆에 있어, 응?]
그가 꼭 칭얼거리는 듯한 소리를 내며, 내 허리를 답삭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내 품에 파고들며 내 몸 이곳저곳에 입을 쪽쪽 맞추었다.
[사랑해, 이브.]
[읏, 테오…….]
그가 쏟아 내는 사랑에 정신 못 차리던 나는 이내 화들짝 그를 밀어냈다.
[자, 잠깐만!]
[으응?]
그러자 그가 둥글게 휜 두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일단 돌아가서 씻기도 해야 하고……!]
[씻고 싶어서 그래? 그럼 여기로 목욕물을 가져오라고…….]
[안 돼! 절대 싫어!]
그럼 테오도르의 시종들에게 내가 그와 밤을 보낸 것을 알리게 되지 않는가.
[그러다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어떡해?]
[뭐 어때?]
테오도르는 정말로 그게 무슨 문제가 되냐는 듯한 말투였다.
그러며 다시금 내 몸을 와락 끌어안으며 속닥였다.
[가지 말고 나랑 놀자, 이-브]
[뭐 어때가 아니야! 숨기기로 했잖아, 당분간은.]
[황제궁의 사용인들은 모두 입이 무거우니까 괜찮아. 혹 입을 가볍게 떠들고 다니는 이들이 있으면, 내가 모두 죽여 버릴게.]
테오도르는 킬킬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했다.
우리가 관계를 숨겨야 했던 것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체르니시아의 딸임을 밝힐 수 없었던 내가, 성별마저 숨긴 채 그의 측근 호위 노릇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가뜩이나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테오도르에게 남색을 한다는 소문까지 더할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여자라고 밝히는 것 또한 불가했다.
처음 그의 손을 잡고 황궁에 들어섰을 때는 알지 못했지만, 본래 황족의 측근 호위는 불미스러울 수 있는 스캔들을 피해 동성의 기사를 임명하는 게 원칙이라 했다.
테오도르는 황궁의 사용인들 몇몇이 알게 되는 것쯤이야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그의 흉악한 본성을 알지 못했던 당시의 나는, 그가 아무리 유능한 황제라 하여도 소문이 퍼지는 것을 아주 막기는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끝내 돌아가겠다는 나를 말리지 못한 테오도르는 무척 아쉬워하였다.
[그럼 이브, 가기 전에 우리 한 번만…….]
그 예쁜 얼굴로 나와 떨어지기 싫어 울먹울먹하는 바람에, 결국 나는 새벽 동이 트기 직전이 되어서야 내 숙소로 돌아갈 수 있었다.
곧바로 출근하기 위해 몸을 씻으며 테오도르를 약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가 내 몸 이곳저곳에 남긴 흔적들 때문에 조금 곤란했으니까.
출근을 위해 목깃을 빳빳하게 세운 채로 다시 황제궁에 찾아갔을 때.
복도에서부터 꽃향기가 피어났다.
나보다 일찍 나와 있던 기사들은 폐하가 또 미쳤다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에 의아해하며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집무실 안이 온통 꽃으로 뒤덮여 있는 게 보였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놀라 두 눈을 끔뻑이며 묻자, 마침 내 자리에 꽃잎을 한 장 한 장 뜯어 깔고 있던 테오도르가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어제, 제대로 된 프러포즈를 하지 못했잖아.]
[그러니까, 프러포즈를 위해 이렇게 요란하게 준비를 한 거라고?]
불과 두어 시간 전까지 같이 있었는데, 언제 그 짧은 시간 동안 이렇게 준비한 거지?
[사랑해, 이브.]
테오도르가 내 눈앞에 꽃다발을 들이밀며 활짝 웃었다.
그럴 적에 그의 손톱 밑에 알록달록한 꽃물이 들어 있었다.
그것을 보자 괜히 눈가가 뜨거워져서,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던 기억이 난다.
순간 놀란 테오도르가 꽃다발을 손에서 놓쳤고, 우리는 온몸에 꽃향기가 배도록 꽃잎 위를 뒹굴었었다.
‘그때랑 같은 꽃이네.’
이후로 잊고 있었는데, 꽃을 보자 그가 매일같이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날들이 떠올라 기분이 기묘해졌다.
잠자코 테이블 위의 꽃을 응시하던 때였다.
“어머, 오늘은 꽃이에요?”
마침 주변을 정리하던 로라가 젖은 꽃다발을 발견했다.
“폐하도 참 대단하신 것 같아요. 어떻게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이렇게 찾아오는 걸까요?”
“그러게 말이야.”
“이건 버리실 거지요?”
로라가 테오도르의 꽃을 가리키며 물었다.
로라는 내가 혼자서 아이들을 낳고 기르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던 탓에, 유독 테오도르를 향한 감정이 좋지 못했다.
“이보네, 설마 황제의 이런 선물 공세에 마음이 흔들리는 건 아니지?”
옆에서 브리안도 한마디 거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네가 황제가 보는 앞에서 그가 네게 했던 짓들을 똑같이 되돌려 주어야만 직성이 풀릴 것 같거든.”
“어머, 똑같이라니요, 브리안 님! 두 배, 아니, 세 배쯤은 되돌려 주어야 한다고요!”
브리안과 로라의 대화에 괜한 웃음이 피식 나왔다.
“둘 다 고마워, 내 편에 서서 그렇게 말해 줘서.”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정말 그렇잖아!”
“맞아요! 이건 편을 드는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 발끈해 주는 두 사람 덕에 조금 전까지 기묘하게 술렁거리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아무튼. 고마워, 두 사람 모두. 그리고 로라, 꽃은 바로 버리지 말고 며칠만 화병에 꽂아 두자.”
“다 젖은 꽃을요?”
“꽃을 잘못 관리해서 이렇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는데, 애꿎은 꽃을 버리면 꽃이 불쌍하잖아.”
“으음…… 알겠어요.”
로라는 어쩐지 불만스럽다는 표정이었으나, 내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방으로 돌아온 테오도르는 자신의 셔츠에 피가 튄 것을 발견했다.
조금 전 암살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묻어난 것이었다.
옷을 갈아입기 위해 무심코 단추에 손을 가져다 대던 순간, 테오도르는 멈칫했다.
이브가 제 단추를 채워 주던 그 감각이 다시금 생각이 났다.
“아…….”
그의 잇새로 나직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너무…… 좋아.”
테오도르는 한 손바닥 위로 고개를 파묻으며 중얼거렸다.
그럴 적에 그의 귓불이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와 잠시 닿았을 뿐인데.
그것도 살결이 스친 게 아닌, 그저 이 자그마한 단추 끄트머리에 그녀의 손가락이 닿았던 것뿐인데.
그럼에도 여전히 그녀의 향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셔츠를 갈아입지 않았다.
피 묻은 셔츠를 갈아입지 않고 그대로 황궁을 활보하는 황제의 모습에, 황궁의 사용인들은 ‘또다시 황제의 기행이 시작되었구나.’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의사가 찾아와 붕대를 갈아야 한다고 하였는데도, 테오도르는 필요 없다고 거절했다.
저녁이 되어 씻을 시각이 되어서도 테오도르는 옷을 벗지 않고자 했다.
[그렇지만…… 폐하께서 씻지 않는다는 사실이 혹 이보네 님께 알려지기라도 하면…….]
아르민이 걱정스럽게 중얼거린 말에, 그제야 테오도르는 꾸물거리며 셔츠를 벗었다.
이브에게 나쁜 놈에 더해 더러운 놈까지 될 순 없었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울적한 얼굴로 셔츠를 벗은 테오도르는, 셔츠의 단추를 모조리 뜯어 유리병에 모아 두었다.
그러고는 이전에 이브가 뿌린 소금을 모아 둔 유리병 옆에 두었다.
그러자 꼭……
“이브의 향이 느껴지는 것 같아…….”
테오도르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실실 웃었다.
“미친 사람 같아요, 형님.”
어느 틈에 제 방에 찾아온 에른스트가 시비를 걸었다.
“황제의 침실에 함부로 드나드는 게 중죄라는 것을 잊었나?”
테오도르는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돌아보았다.
“죽어 간 놈들과 같은 꼴이 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오는 거지?”
“우리 사이에 그런 무서운 말씀을.”
에른스트는 가볍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는 겁도 없이 테오도르의 유리병을 만지작거렸다.
“이보네의 향이 나네요.”
“만지지 마.”
잔뜩 분노한 테오도르가 에른스트에게서 유리병을 낚아챘다.
감히 에른스트 따위가 이브의 향이 묻어나는 물건을 만진 게 화가 나서, 테오도르는 두 눈을 흉흉하게 치켜떴다.
어지간한 이들이라면 겁을 먹고 움츠릴 시선이었으나, 에른스트는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그거 알아요, 형님? 이보네가 곧 결혼을 한대요.”
“뭐……?”
“결혼이요, 결혼. 이보네가 결혼을 할 거라고요.”
쿵!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아래로 거세게 추락했다.
“뭐, 슬슬 그럴 때도 됐죠. 아이들도 이보네가 결혼하길 바라는 것 같고.”
“…….”
“아, 에르랑 리아가 제게 그랬거든요. 아빠가 갖고 싶다고.”
“…….”
에른스트가 재잘재잘 떠드는 동안 테오도르는 사색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브가, 결혼을 한다고……?
아이들도 그걸 바라고……?
그러다가 한참 뒤에, 그가 겨우 입술을 달싹여 물어보았다.
“누구와……?”
이것을 물어보는 게 옳은지, 얼핏 망설임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글쎄요.”
에른스트는 빙긋 웃으며 대답해 주지 않았다.
“이보네에게 직접 물어보시든가요.”
“…….”
테오도르는 두 주먹을 꾸욱 말아쥐었다.
이브가 결혼을 한다.
이브가 저를 두고 결혼을 한다.
이브가 저를 두고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한다.
‘당연한 거야. 이상할 것 없어. 이브도 이제 자리를 잡았으니,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무심코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문득 제 생각의 오류를 알아차렸다.
‘아니. 나는 왜 아이들을 위한 거라고 합리화하는 거지? 꼭 아이들 때문에 이브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것이길 바라는 것 같잖아.’
스스로의 비겁한 마음을 알아차린 순간, 테오도르는 쓰게 인상을 썼다.
‘이브는…… 그런 이유로 배우자를 선택할 사람이 아니야. 분명 자신을 아껴 주고 사랑해 주는 이를 만나게 된 거겠지.’
비록 저는 그녀를 아프게 하기만 했지만, 그녀가 선택하였을 새 남자는 분명 그녀를 소중히 대해 줄 것이다.
초라하고 비참한 감정이 아닌, 밝고 좋은 것들을 그녀에게 알려 줄 것이다.
‘어쩌면…… 이브도 그 남자를 사랑할 테고…….’
어차피 이제 이브와 저는 되돌릴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나.
감히 그녀의 마음을 바라지 않고, 감히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기로 다짐하지 않았나.
‘잘된 일이야. 이브에게는, 분명 잘된 일이야.’
그러니 그녀의 결혼 소식에 마땅히 제가 하여야 할 것은, 그녀를 축하하고 응원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걸어갈 길을 반짝반짝 빛이 나도록 닦아 내고, 그 위로 꽃을 뿌리는 일이었다.
‘그런데, 왜 난……. 나는, 왜…….’
꾸욱, 말아쥔 손등 위로 핏대가 불룩 섰다.
이런 시답잖은 질투심을 닮은 감정은 그녀의 따스한 온정으로 용서받았던 제가 감히 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거세게 말아쥐었던 두 손을 천천히 펴며, 짧은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혈관을 쥐어짜는 듯한 괴로운 통각이 조금도 사라지질 않았다.
그런 테오도르의 모습에 에른스트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괴로우면 차라리 이보네를 찾아가 말하지 그래요? 아직 널 사랑하고 있으니까, 한 번만 봐달라고.”
“…….”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에른스트를 응시했다.
“에른스트.”
대꾸할 가치도 없는 말은 무시하며,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도와줄 일이 하나 있다.”
“으응? 제가요?”
“앞으로 일주일. 그 안에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황궁을 탈출할 거야.”
벤야민의 탈출을 이야기하는 테오도르의 얼굴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너는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뒤를 쫓아, 그들의 근거지를 알아내.”
이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물었다.
“형님은요?”
“…….”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침묵을 삼켰다.
* * *
테네브리스의 가호, 어둠.
오랜 시간 악으로 규정되어 온 그 힘에 반하는 무리가 있다는 것은 일찍이 모두가 예상한 바였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에 한 발짝 더 나아가, 이번 일을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무리가 있을 것이란 걸 짐작했다.
그러니까, 최근 제국 내에 있었던 일련의 불미스러운 사건들로 인해 세력을 모두 잃어버린 페르디난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마법사들 말이다.
테오도르의 짐작과 같이, 어둠에 대항하는 집단과 페르디난트의 추종자들이 손을 잡았다.
막상 마물 떼가 하늘을 뒤덮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이들이, 어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같잖은 명분으로 암살자를 보내 오는 게 퍽 우스웠다.
“테오도르 황제!”
로브를 뒤집어쓴 페르디난트의 추종자들이 동시에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푸른 빛이 이곳저곳에서 번쩍이며 테오도르의 어둠과 부딪쳤다.
“죽어라, 이 마물 같은 놈!”
“제국을 위협하는 어둠의 현신!”
테오도르를 공격하는 것은 마법사들만이 아니었다.
가호를 발현하지는 못했으나 뛰어난 실력을 지닌 암살자들이 어둠 속 곳곳에서 튀어나와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챙-!
챙강-!
테오도르는 열댓 명의 암살자를 홀로 상대하며 옅은 인상을 썼다.
벤야민의 처형을 이틀 앞둔 날이었다.
그들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벤야민을 빼돌리고자 할 것을 알았다.
벤야민은 이틀 뒤의 처형을 위해 며칠 전 황제궁 서쪽 첨탑으로 신병을 옮겼다.
사형이 확정된 제국의 가장 악질적인 죄인들만을 다루는 서쪽 첨탑의 감옥 열쇠는 오직 두 명이 지니고 있었다.
한 명은 황궁 전체의 경비를 담당하는 린든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바로 테오도르였다.
그동안 밑밥은 충분히 뿌려 두었다.
테오도르는 그들이 간을 보듯 보내 온 암살자들에게 부러 당해 주었고, 공식 석상에서 몇 차례 쇠약한 모습을 연출하기까지 했다.
그리고 이번에야말로 저들이 총공세를 해올 것이라 여겼다.
페르디난트를 추종하는 불온 세력들과 함께 어둠에 반발하는 이들을 한 번에 뿌리 뽑을 수 있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이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테오도르는 보다 확실한 미끼가 되어야 했다.
그래서 최근 일주일, 매일 저녁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부러 호위를 물리고 홀로 산책을 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그들은 예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황궁 내에 잠입해 테오도르를 공격해 왔다.
기회를 노린 테오도르는 부러 느슨하게 틈을 벌리었다.
암살자의 검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으윽…….”
테오도르는 어깨를 붙잡으며 주춤거렸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페르디난트의 마법사 중 하나가 그를 향해 술식을 펼쳤다.
‘뭐지……?’
익숙하면서 불쾌한 느낌에 테오도르가 멈칫, 하던 중.
순식간에 암살자들이 테오도르를 에워싸며, 여러 개의 검날이 테오도르를 겨누었다. 그리고,
“폐하!”
린든이 때맞춰 기사들과 함께 나타났다.
“이 무도한 것들, 당장 폐하의 곁에서 물러나라!”
기사들은 이를 바드득 갈며, 테오도르를 에워싼 습격자들을 노려보았다.
“서쪽 첨탑의 열쇠를 내놓으면 황제를 놓아주지.”
그들 중 하나가 감히 황제의 목에 검을 겨눈 채로 협상을 시도했다.
“젠장.”
린든은 욕설을 짓씹으며 그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사전에 테오도르와 미리 협의된 바였으나, 습격자들은 두 사람이 시선을 교환하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우리의 뒤를 쫓거나 허튼짓을 하는 순간 너희 황제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다.”
테오도르를 향해 술식을 펼쳤던 마법사가 음산한 목소리로 위협하고는 동료들과 함께 자리를 떴다.
마침내 주위가 조용해졌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괜찮다. 어깨를 조금 베인 것뿐.”
놀라 다가오는 린든을 향해,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대꾸했다.
그의 시선이 서쪽 첨탑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습격자들의 요구에 따라 첨탑 주변의 경비를 해제하였으나, 어둠에 몸을 숨긴 에른스트가 곧바로 저들의 뒤를 쫓을 것이다.
제가 직접 쫓지 못하는 게 조금 아쉬웠다.
그렇지만 제게는 시간의 거울이 있으니 에른스트가 어둠을 펼치면 통로를 통해 곧바로 이동이 가능했다.
테오도르는 애써 아쉬움을 달래며 걸음을 돌렸다.
“제리코를 불러와라. 저들이 내게 어둠을 시전한 것 같으니.”
마법사가 술식을 펼친 순간 느껴지던 익숙하면서도 불쾌한 느낌은 분명 테네브리스의 어둠이었다.
어둠의 가호를 타고 나지 못한 이들이 펼칠 수 있는 건 ‘흑마법의 서’에 기록되어 있는 것들 뿐이었다.
굳이 기록을 일일이 확인하는 수고를 들일 필요조차 없었다.
테오도르가 얼마 전 황궁으로 데려와 마물 관리직에 임명한 제리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고대 사도들의 시대부터 살아온 제리코라면 이 불쾌한 술식이 무엇인지 곧바로 알아낼…….
“헉……!”
순간 테오도르가 생각을 멈추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갑작스레 눈앞이 흐려지며 머리가 쪼개질 듯 아파 왔다.
“윽, 으윽…….”
얼굴을 고통스럽게 일그러트린 테오도르가 돌연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폐하!”
“폐하!”
놀란 기사들이 황급히 그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십니까?”
“상처 때문, 아니, 설마 흑마법이……!”
“젠장, 제리코는 지금 어디쯤…….”
이때였다.
테오도르가 수그리고 있던 고개를 벌떡 들어 올렸다.
“아, 안 돼……!”
“폐하……?”
“이브…… 이브가…….”
그가 허공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희게 질린 그 얼굴 위로 짙은 공포가 서려 있었다.
“이브……!”
절망이 뒤섞인 목소리가 밤하늘을 괴롭게 울렸다.
* * *
“이보네 님! 이보네 님!”
늦은 밤중, 체르니시아 저택의 문을 두드리는 손님이 있었다.
마침 아이들을 재우고 아래로 내려오던 나는 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직접 맞이했다.
“무슨 일이지요?”
행색을 보아하니 황궁의 기사였다.
황궁 기사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내게 외쳤다.
“폐, 폐하의 상태가 위독하십니다!”
“위독이라니……?”
“이보네 님께서 와 주셔야 합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이동하며 하지요. 우선 출발을……!”
갑작스럽게 찾아와 인사도, 설명도 없이 대뜸 황궁으로 가자는 그 말에 당혹스러움보다 걱정이 덜컥 들었다.
지난번에 테오도르가 다친 것을 이미 목격했기 때문이다.
‘아니야. 괜찮을 거야.’
그래. 괜찮을 거야. 테오도르잖아. 다른 사람도 아니고.
애써 그는 괜찮을 거라 곱씹으며 겉옷 하나만 걸친 뒤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황궁을 향하는 도중 기사가 내게 상황을 간략히 설명해 주었다.
“어둠에 반발하는 이들과 페르디난트의 추종자들이 손을 잡고 폐하를 습격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폐하께서 당하시고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탈출을 했습니다.”
“벤야민이…….”
“현재 황궁 내에 에른스트 황자님도 자리를 비우셔서, 바깥으로 사실이 알려지면 큰일 납니다.”
“…….”
궁금한 것이 많았으나, 일단은 말을 달리는 데에 집중했다.
어느덧 황궁 정문을 통과하여 황제궁 앞까지 당도했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이상했다.
황궁 경비대가 아닌 황제의 직속 호위단이 황제궁의 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린든 경!”
“아, 이보네 님!”
심각한 표정으로 기사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하던 린든이 나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예요? 분위기가 왜…….”
“황제궁의 사용인들을 잠시 다른 곳으로 내보낸 참입니다.”
“네? 왜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급습을 당했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응당 사용인들의 손이 필요할 텐데…….
‘어……?’
이때였다.
닫힌 황제궁의 문 안쪽에서 정체불명의 소리가 들려왔다.
홱!
절로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이게 무슨 소리지요?”
“아, 이보네 님. 그게…… 실은…….”
린든이 절절매며 난처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는 그를 두고서, 닫힌 궁전의 문을 열어젖혔다.
“아윽……!”
그러다 곧바로 들려오는 신음 소리에 멈칫했다.
“아흑, 읏, 흐윽…… 안 돼…….”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이 안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안 돼, 안 돼, 이브! 안 돼……!”
처절한 비명 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나는 황량한 복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테오도르……!”
“헉, 허억…….”
그러자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기고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나를 반겼다.
“이브…… 이브…… 이브…….”
연신 내 이름을 부르짖던 그가 바닥에 몸을 만 채 끅끅 울었다.
그가 흘린 눈물이 바닥에 뚝뚝 고였다.
“테오……도르……?”
조심스럽게 그를 불러보았다.
그러자 그가 별안간 홰액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 벌겋게 충혈된 두 눈과 마주친 순간,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아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나도 함께 바닥에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마치 영혼이 빠져나간 것만 같은 그 얼굴이, 꼭 죽은 사람의 것 같았다.
핏줄이 터져 붉게 충혈된 두 눈은 내가 아닌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폐하께서 어둠에 당하셨습니다. 가장 끔찍한 시간 속에 사람을 가두는 술식이라고…….”
어느새 내 뒤를 쫓아온 린든이 주절주절 설명했다.
“가장 끔찍한 시간……?”
“네, 가장 괴로운 기억을 극화시켜 영혼을 파괴하는 저주입니다.”
“말도 안 돼. 테오도르잖아요. 테오도르가 그런 것에 당할 리 없잖아요.”
“신체의 강함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걸 이보네 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문 채 테오도르를 가만히 응시했다.
그가 갇혀 있는 시간대를 왠지…… 알 것 같았다.
“미안해, 미안해, 이브…….”
왜냐하면…….
“내가 널 죽인 거야……. 내가, 내가 널…….”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내 이름만을 읊으며 울고 있었으니까.
내가 죽음을 위장하고 달아났던, 그때.
테오도르는 그 시간대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우윽, 윽…….”
급기야 그가 울다 못해 구역질을 하기 시작했다.
“이, 브, 우우욱…….”
그러나 몇 번을 게워 내도 나오는 것은 신물뿐이었다.
“기억이 극화된 탓에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하십니다.”
나는 테오도르와 한 차례 시간의 흐름을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 속에서 내가 떠난 뒤 괴로워하는 테오도르를 보았다.
사람들 앞에서는 멀쩡하게 국정을 운영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그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 테오도르는 미쳐 버렸으며, 세상의 섭리를 어기면서까지 나를 되살리고자 했다.
어떻게든 내 죽음을 부정하고자 하였던 그의 몸부림이었다.
그와 함께 보았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저 시절의 그는 이따금 잠에서 깨어나 혼몽한 정신에 현실과 꿈을 구분하지 못하고 저처럼 숨이 넘어가도록 울었다.
“이, 이브…… 이브…… 내가, 헉, 내가…… 내가, 윽, 미안…… 미…….”
제대로 문장을 끝맺지조차 못하고 울음 섞인 숨을 토해 내는 그 모습이 내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저를 부른 이유는…….”
“폐하를 저 시간대에서 꺼내 주십시오.”
“어떻게 하면 되지요?”
“이보네 님이 죽었다고 믿고 계시니, 살아 계신 이보네 님을 보여 드리는 것만이 폐하를 저 시간대에서 꺼내 드릴 수 있다고 합니다.”
“…….”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이브! 안 돼, 이브……!”
그사이 테오도르는 벌떡 일어나 고함을 치고 있었다.
나는 그의 앞에 멈추어 섰다.
“테오.”
그리고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이브……. 이브…….”
그러나 그는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계속해서 나를 찾았다.
“테오!”
나는 그의 얼굴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아 내 쪽으로 고정시키며,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크게 불렀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멈칫하였다.
“이……브……?”
마침내 그의 초점이 내게로 맞춰졌다.
그의 동공이 가늘게 떨렸다.
테오도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래, 나야, 이브. 나 여기 있어.”
“이브……! 살아, 살아 있었어……!”
테오도르가 가쁜 숨과 함께 울음을 토해 냈다.
“살아 있었어! 이브가, 이브가 살아 있었어!”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얼굴을 감싸 쥐고 있는 내 손을 함께 적셨다.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선 채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흐윽, 흑, 이브, 내가, 내가 미안해, 내가…… 내가, 널…….”
서럽게 울던 그는 이내 지쳐서 픽 쓰러졌다.
쓰러지는 테오도르의 몸을 린든이 재빠르게 다가와 부축했다.
“괜찮은 건가요?”
나는 린든에게 기대어 있는 테오도르의 몸을 쳐다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
조금 전에는 그의 상태에만 신경 쓰느라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몸의 상처 또한 심각해 보였다.
테오도르는 상의를 탈의한 채 복부에 붕대만 감고 있었는데, 지난번 보았던 그 상처가 또다시 터져 붕대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몸의 상처야 금방 나으실 겁니다. 그보다는 정신 쪽이 걱정이지요.”
린든이 한숨을 푸욱 내쉬며 설명했다.
“당장은 이보네 님께서 와 주셔서 폐하를 진정시킬 수 있었지만…… 이건 임시방편입니다. 시전자를 찾아 술식을 제거하지 않는 한.”
나는 눈을 감고 쌕쌕 숨을 내쉬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붉고 까슬해진 눈가에 자꾸만 시선이 머물렀다.
“벤야민이 달아났다고 들었어요.”
“아, 실은 에른스트 황자님께서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쫓고 계십니다.”
“에른스트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린든의 말에 놀라 그를 쳐다봤다.
“에른스트까지 위험해지는 건……!”
에른스트까지 이 일에 휘말려 버리다니, 걱정이 더해졌다.
작은 장난에도 눈물을 글썽이곤 하던 에른스트가 걱정이 되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보네 님. 에른스트 황자님께서는…… 쉽게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검도 못 쓰고 가호의 힘도 없잖아요!”
“아, 네, 뭐…… 정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믿을 구석이 있어 드리는 말씀이니…….”
린든은 어색하게 말끝을 얼버무리며 변명했다.
수상쩍었으나, 그의 말마따나 아무런 방비도 없이 에른스트가 홀로 그 뒤를 쫓았을 리는 없을 것이다.
“그보다 저는 폐하가 더 걱정입니다. 지금은 간신히 잠드셨지만, 눈을 떴을 때 이보네 님이 계시지 않으면…….”
임시방편이라고 하였으니,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테오도르는 또다시 조금 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리라.
“그렇다고 저택을 비운 채 테오도르의 옆에만 있을 순 없어요. 저택에 아이들이 있단 말예요.”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대답했다.
내가 저택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아이들이 아침에 일어나 나를 찾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이들을 황궁으로 데려오는 것도…….
“저, 이보네 님. 그럼 폐하를 저택으로 데려가 주시면…….”
이때, 린든이 내게 제의했다.
처형을 이틀 앞둔 날, 밤.
벤야민은 타의에 의해 탈출하게 되었다.
사전에 그와 협의되지 않은, 그의 추종자들이 벌인 짓들이었다.
“벤야민 님!”
“그간 얼마나 고초가 크셨습니까!”
“테오도르 황제, 그 망할 작자가……!”
벤야민은 자신을 따르는 이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
그러곤 말없이 몸을 돌렸다.
그는 이브를 떠올렸다.
자신을 차갑게 쳐다보던 그녀의 눈동자가 생각이 났다.
벤야민은 어금니를 악물었다.
그의 손등에 핏대가 흉흉하게 섰다.
“테오도르 황제는 곧 자멸할 겁니다.”
“어차피 에른스트 황자는 힘도 없지 않습니까.”
“알브레히트 황가를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 미친 황제가 테네브리스의 힘을 공인하겠다고 날뛴 덕에, 일이 쉬워졌습니다.”
그의 추종자들이 뒤편에서 저희끼리 떠들어댔으나, 벤야민의 귀에는 어느 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이미 더 이상 제게 웃어 주는 그녀를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벤야민은 많은 것을 포기했다.
그녀의 마음 한 자락도.
흘러가는 어여쁜 미소 한 줄기도.
그리고 두 번 다시 그녀의 친구나마 될 수 없는, 저 자신의 삶마저도.
하여, 그는 저를 찾아온 이브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미 내려놓은 삶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시간에 순종했다.
“테오도르 황제는 다시 재기하지 못할 겁니다. 고대로부터 전해 오는 가장 끔찍한 흑마법에 걸려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를, 벤야민은 힐긋 쳐다보았다.
“흑마법……?”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벤야민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그러자 벤야민의 관심을 받은 남자가 기쁜 얼굴로 설명했다.
“네, 아시다시피 시전자의 피가 없으면…….”
* * *
테오도르는 꿈을 꾸었다.
이브와 사랑을 나누던 시절의 꿈이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이었고, 더위를 싫어하는 이브가 퍽 좋아하는 계절이었다.
‘조금 더 따뜻하게 입고 다니면 좋을 텐데.’
테오도르는 셔츠 바람으로 돌아다니는 이브를 보며 생각했다.
아주 추운 날씨는 아니지만, 저러다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따뜻하게 입으라니까…….”
“뭐 어때.”
걱정이 되어 건넨 말에도, 그녀는 그저 까르르 웃기만 했다.
불어오는 바람결에 그녀의 머리카락이 하늘하늘 흩날렸다.
턱선 길이의 머리카락은 그사이 꽤 자라 빗장뼈 부근까지 내려왔다.
그녀는 유독 머리가 빠르게 자랐다.
그건 아마 강한 가호의 힘이 있는 덕일 테다.
이브는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찮다는 듯 쓸어넘겼다.
비죽 튀어나와 있던 머리카락 몇 올이 그녀의 귓바퀴 뒤로 차분히 넘어갔다.
테오도르는 그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왜 그래?”
문득 그를 돌아본 이브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테오?”
한참을 대답하지 못하고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대답했다.
“……예뻐서.”
“뭐, 뭐야…….”
그러자 순식간에 그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이브는 부끄러운 듯 시선을 데구루루 피하며 뺨을 긁적였다.
그 모습에 울컥 사랑이 샘솟아서, 테오도르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
“자, 잠깐, 테오. 테오? 테오!”
이브가 제 어깨를 찰싹찰싹 때리며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를 꽈악 끌어안고서 놓아주지 않았다.
제 품에 포옥 안기는 그녀의 온기가 좋아서.
너무 좋아서.
눈물 나도록 좋아서.
“테오……?”
조금 당황한 듯한 이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혹시 울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울어.”
테오도르는 그녀의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이브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잠깐만! 이거 놔! 얼굴 좀 봐야겠어! 우는 목소리잖아!”
품에서 벗어나려고 버둥거리는 이브를, 테오도르는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싫어. 안 놓을 거야.”
테오도르는 고집스럽게 대꾸했다.
‘놓으면, 도망갈 거잖아…….’
그러다 문득 스치는 생각에 스스로 놀라 멈칫했다.
‘어? 이브가 도망간다니. 내가 왜 이런 생각을…….’
그 틈에 이브가 테오도르의 가슴팍을 화악 밀쳐냈다.
“뭐야! 우는 거 맞잖아!”
발갛게 부은 테오도르의 눈가를 보며, 이브가 버럭 외쳤다.
그녀는 화가 나고 속상한 표정으로 물었다.
“왜 그래? 누가 울린 거야? 속상한 일 있어? 내가 가서 다 혼내 줄게!”
이브는 마음씨 여린 테오도르를 누군가 괴롭혔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하여튼 테오, 너는 너무 사람이 착해서 문제야. 누가 괴롭히면 이렇게 훌쩍훌쩍 울지 말고 혼내 줘야지!”
씩씩거리며 화를 내는 그 모습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테오도르는 피식 웃고 말았다.
그러자 이브가 뭘 웃냐는 듯 두 눈을 샐쭉하게 떴다.
“안 되겠다. 내가 옆에 계속 있어 줘야겠어.”
“계속 있어 준다고?”
“응. 넌 너무 물러서. 내가 지켜 줘야 한다니까?”
이브는 꼭 공주님을 지키는 멋진 기사님처럼 말했다.
“지금도 지켜 주고 있잖아.”
테오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어느새 눈물이 쏙 들어갔다.
아까는 왜 그렇게 서글펐는지 모를 일이다.
이브는 누군가 제게 실수라도 하면 늘 먼저 나서서 혼내 주곤 했다.
제 앞으로 슬쩍 나서며, 본래라면 제게 호되게 징벌을 당하였을 이들에게 단정한 말투로 훈계를 하는 것뿐이었지만…….
그런 이브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테오도르는 기꺼이 관대한 마음으로 그들을 용서해 주었다.
테오도르는 이브가 좋았다.
너무 좋았다.
정말 좋았다.
그녀가 너무나 좋아서 정말 어쩔 줄 모르겠다.
양손으로 이브의 얼굴을 감싸 쥔 테오도르가 그 작고 예쁜 얼굴만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뭐야, 너 오늘 이상해…….”
이브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그러자 테오도르는 이브의 눈가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사랑해, 이-브.”
테오도르는 그녀의 이름을 부를 때면, 늘 그 이름 끝을 길게 늘여 부르곤 했다.
그럼 그녀는 두 뺨을 슬쩍 붉히면서도 수줍게 ‘나도…….’ 하고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좋아서, 너무너무 좋아서, 끝도 없이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나무 위에 올라 속닥속닥 떠들다가, 어느 틈에 그녀가 제 어깨에 기대어 스르륵 잠이 들었다.
한 겹의 얇은 셔츠가 역시 추워 보였다.
‘지난번에도 감기에 걸렸잖아.’
테오도르는 성력으로 그녀의 몸을 감쌌다.
그럼에도 안심이 되지 않아 자신의 옷을 벗어 그녀에게 덮어 주었다.
“사랑해.”
그가 자신의 코끝을 잠든 그녀의 코끝 위로 토옥 부딪치며 속삭였다.
“사랑해, 이브.”
몇 번을 토해 내도 부족한 사랑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마음은 그 끝을 모른 채 커지기만 해서, 자꾸만 이렇게 흘러넘쳤다.
차츰 해가 저물고, 밤이 되어 갔다.
이런 곳에서 계속 자면 감기에 걸릴 것이다.
그 언젠가, 바깥에서 사랑을 노닐다가 그녀가 감기에 걸렸던 일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저는 한동안 그녀의 곁을 떠나지 못하고 병간호를 하였고…….
아픈 그녀를 두고 중요한 행사에 참석하였다가 말 위에서 떨어지는 사고를…….
‘음……?’
문득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날의 기억이 흐릿했다.
‘이상하네…….’
테오도르는 묘하게 껄끄러운 기분을 느끼면서도,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그녀를 깨워 실내로 들어갈 참이었다.
“이브, 벌써 밤이야. 어서 들어가자.”
그러나 그녀는 일어나질 않았다.
“이브……?”
테오도르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이브. 이브……?”
그래서 평소라면 일어나지 않는 그녀를 안고 침실로 돌아갔을 텐데, 그러지 않고 재차 그녀를 흔들어 깨웠다.
“이브, 어서 일어……!”
툭.
그녀가 테오도르의 품으로 쓰러졌다.
그럴 적에 그녀의 몸은 차갑고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브! 이브!”
놀란 테오도르가 화급히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그녀의 심장이 뛰지 않았다.
이브가 죽었다.
“안 돼, 이브…… 이브……! 이브……!”
그가 죽은 이브를 끌어안으며 울부짖을 때였다.
-테오도르!
불현듯 어디에선가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 정신 차려!
테오도르는 뻑뻑한 눈가를 움직였다.
내내 감겨 있던 무거운 눈꺼풀이 그제야 들렸다.
“이……브……?”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자신을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이브의 얼굴이 보였다.
“이브……!”
테오도르는 상반신을 벌떡 일으켜 앉았다.
“잠깐, 테오도르. 그렇게 몸을 함부로 움직이면……!”
“윽…….”
그의 복부에서 또다시 핏물이 배어 나왔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는 두 눈으로 허겁지겁 이브를 훑었다.
꿈.
모두 꿈이었다.
이브는 죽지 않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안도감이 밀려왔다.
테오도르는 이브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브…….”
그가 연신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흐느꼈다.
“…….”
이브는 제 허리춤에 파묻힌 테오도르의 검은 머리통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녀가 커다란 강아지를 쓰다듬듯 테오도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직 밤이야. 더 자.”
“하지만…….”
테오도르는 섣불리 고개를 끄덕이지 못했다.
잠을 잤다가 또다시 이브가 사라질까 봐 무서웠다.
그런 그의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이브가 그의 두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달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라지지 않을게.”
“……응.”
그 말에 묘하게 안심이 되어, 테오도르는 다시 침대 위로 몸을 뉘었다.
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꼬옥 잡고서 다시금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잠든 그를 내려다보며 이브는 얇은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네…….’
그녀의 미간이 야트막하게 찌푸려졌다.
린든의 부탁에 따라 체르니시아 저택으로 그를 데려왔다.
만일의 일이 생길 경우 곧바로 대처할 수 있도록, 제 방과 같은 층에 있는 손님방에 그를 재운 터였다.
잠든 그가 걱정되어 복도에 나왔다가, 헐떡이는 숨소리에 그가 잠들어 있는 손님방의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리고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악몽을 꾸고 있는 테오도르를 발견한 것이다.
[안 돼, 이브…… 이브……! 이브……!]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이브…….]
다행히도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곧바로 인지하고서 다시금 고요히 잠이 들었지만…….
이브는 불규칙적인 숨소리를 내쉬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멀거니 들여다보았다.
유독 또렷한 이목구비가 며칠 새 수척해져 있었다.
병색마저 묻어난 그 창백한 얼굴빛에 자꾸만 가슴이 시리게 가라앉았다.
이브는 자신의 마음을 아프게 적시고 있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았다.
슬픔이었다.
테오도르가 아파하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저를 찾으며 우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제가 남긴 상처로 괴로워하는 게 슬펐다.
테오도르가 과거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갇혀 있는 모습이 슬펐다.
그리고 그중 가장 슬픈 것은…….
여전히 자신을 사랑한다는 그에게, 차마 나도 아직 너를 조금 사랑하는 것 같다고 대답하지 못하는 까닭이었다.
그렇게나 단호하게, 아주 작은 여지도 없이 관계의 종결을 선언하였는데.
어째서 너는 아직도 나를 사랑하는 걸까.
왜, 너는 나 때문에 이렇게 아파하는 걸까.
“바보 같아…….”
이브는 자그맣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꼬옥-
그러나 테오도르가 붙잡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
조금 전, 제가 사라질까 두려워 눈을 감지 못하던 그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이브는 꼭 저 자신이 울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왜 이렇게 가슴이 울컥거리고, 코끝이 시큰한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한 건지도.’
그러나 그녀는 곧바로 생각을 고쳐먹었다.
어쩌면 테오도르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제가 이렇게 울고 싶은 마음이 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에르가 감기에 걸려 온종일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끙끙 앓았을 때.
리아가 넘어져 무릎에 커다란 상처를 달고서 눈물을 뚝뚝 흘렸을 때.
그때에도 이브는 꼭 지금처럼 마음이 아팠다.
제가 대신 아프고 싶었으나, 그러지 못해 뜨거워지려는 눈가를 꾹꾹 눌러야 했다.
왜냐하면…….
사랑하니까.
에르와 리아를 사랑하니까.
그래서, 그렇게 마음이 아팠다.
그리고 저는 에르와 리아를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테오도르를…….
“…….”
이브는 두 눈을 꾸욱 내리감았다.
툭, 후드득-
그러자 감긴 눈가를 타고 눈물 한 줄기가 흘러내렸다.
* * *
“으헉, 헉! 사, 살려 주…….”
컥, 하는 소리와 함께 발치에 매달려 있던 남자가 고개를 꺾으며 쓰러졌다.
에른스트는 따분한 표정으로 발끝을 툭툭 털었다.
“죽음을 불사한다더니.”
에른스트는 혀를 쯧, 차며 뺨에 튄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애석하게도 번져나간 핏자국은 그의 얼굴에 붉은 자국만 만들어 냈다.
허공에서 피어난 검은 창살이 바닥에 쓰러진 남자의 몸을 꿰뚫었다.
꺽꺽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숨을 거두었다.
[페르디난트를 따르던 이들이 어둠에 대항하는 무리와 합세하였다. 그들은 이미 죽음도 불사르고 있어.]
죽음을 불사르네, 마네 하며 황제를 공격하기까지 하였으면서.
막상 죽을 때가 되니 제 바짓자락을 붙잡고 목숨을 구걸하는 꼴이 우스웠다.
[듣자 하니, 어둠에 물든 알브레히트 황가를 무너뜨리고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구출하여 새 왕으로 세울 거라더군.]
벤야민 페르디난트에 대한 기억은 무척 듬성듬성하였으나, 그럼에도 그를 향한 분노만큼은 선명했다.
그의 영혼에 얼룩진 테네브리스의 부스러기는 먼지처럼 작았으나, 그 안에 깃든 페르디난트를 향한 분노는 온 세계를 삼킬 만큼 극렬했으니까.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어디에 있지?”
에른스트가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며 물었다.
그의 주위로 피어난 어둠이 아직 죽지 않은 이들을 위협하듯 너울거렸다.
이에 모두가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조금 전까지 저 새까만 어둠이 동료들을 어떻게 학살하였는지, 모두가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들 입을 꾸욱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고집스럽게 버티는 그 모습들에 에른스트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너울거리던 어둠은 사방에서 검은 가시의 형태로 뭉치기 시작했다.
“흐익……!”
누군가가 괴상한 숨소리를 내며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쾅!
콰앙!
쿠과과과광!
수십 개의 검은 가시들이 사람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근거지를 알아낸 다음에는요?]
[살려 두면 언젠가 리아를 위협할 놈들이다.]
테오도르의 짤막한 답에는 그들을 전부 멸살해도 좋다는 무언의 허락이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제가 형님을 도와 그자들을 완벽하게 뿌리 뽑아 드리지요.]
에른스트는 거침없이 어둠을 개방했다.
그의 안에 억눌려 있던 난폭한 어둠이 신이 나 날뛰었다.
그러나 죽어 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에른스트의 얼굴 위로 점차 짜증이 어리었다.
이만한 소란에도 불구하고,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머리털 하나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대체 어디 있는 거지?’
* * *
테오도르는 한참이나 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그의 귓가에 ‘또다시 사라지지 않을 테니까 이제 놓아줘.’ 하고 속삭인 순간, 마법처럼 스르륵 손이 풀렸다.
땀에 젖어 흐트러진 그의 머리카락을 정돈해 준 뒤, 복도로 나왔다.
잠이 오지 않았다.
습관처럼 아이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려고 걸음을 옮길 때였다.
휘이잉-
문득 불어오는 바람에,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내가 창을 열어 뒀었나?’
열린 창을 닫고자 창가로 다가간 순간.
멈칫.
창밖으로 보이는 인기척이 나를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벤야민…….”
벤야민이 새하얀 달빛을 받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안녕, 이브.”
그가 나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순간 내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실례할게.”
그리고 그사이, 벤야민이 창 안으로 훌쩍 넘어왔다.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의 남자가 복도 위를 굴렀다.
“테오도르 황제가 흑마법에 걸려서 미쳐 버렸다면서?”
내가 그쪽을 힐긋 쳐다보자, 벤야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무슨 생각인 거지?”
“내가 시전자를 데려왔어. 이자의 피가 있으면 황제에게 발동된 흑마법의 술식을 지워 낼 수 있을 거야.”
그는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설명했다.
“뭐……?”
“이자를 넘길게.”
벤야민은 대뜸 내게 제안했다.
“내가 이자를 넘길 테니까, 넌 나한테 와.”
곧바로 드러낸 그 속내에 나는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테오도르의 술식을 해제하는 대가로, 널 용서하고 네 곁에 있으라고?”
명백한 조롱 조의 반문에, 둥글게 휘어 있던 벤야민의 눈매가 서서히 굳어 갔다.
“……용서하지 않아도 좋아. 그냥 내게 오기만 해.”
“내가 그딴 협박에 응할 것 같아?”
“…….”
벤야민은 잠시간 입술을 꾸욱 깨문 채로 나를 쳐다보았다.
원망의 빛깔이 담긴 시선으로 나를 쳐다보던 그가 한참 뒤에 입술을 열었다.
“응. 너 아직 좋아하잖아, 테오도르 황제.”
그가 웃음기가 싸악 가신 목소리로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대답했다.
“무슨…….”
“네 무의식 속에는 온통 그자뿐이지. 이미 봤어. 널 차지한 게 누군지.”
순간 당황한 나를 향해, 그가 감정의 고저가 드러나지 않는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알면서도 외면한 사실을 들먹이며 그자가 날 도발했을 때, 어찌나 죽이고 싶던지. 너는 절대 모를 거야. 평생이 가도 알지 못할 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읊조리는 그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벤야민이 입꼬리를 비릿하게 말아 올렸다.
“참 가엾지. 네가 죽은 시간에 갇혀 버린 테오도르 황제 말이야. 아, 내가 일전에 말한 적 없었나? 네가 그 가짜 허수아비를 남기고 남쪽의 섬으로 달아나 있는 동안, 테오도르 황제가 어떻게 미쳐 버렸었는지.”
벤야민은 큭큭 웃으며 내가 떠난 시간의 테오도르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했다.
“그 작자에게서 네 허수아비를 빼앗아 불태웠어. 네 뼛가루라도 내놓으라면서 검은 재만 남은 흙바닥 위를 뒹구는 그 볼썽사나운 모습을 네가 봤어야 했는데!”
“…….”
물론 나 또한 이미 보아 알고 있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아무런 대답이 없자 그가 조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어차피 테오도르 황제를 용서할 생각 없잖아, 이브? 그러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어 줄 수 있는 거잖아.”
“미쳤어, 벤야민?”
나는 어이가 없어서 차가운 눈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내가 테오도르를 용서하고 말고와 그건 별개의 문제야.”
“……!”
“나는 테오도르를 용서할 수 없는 것처럼, 아니, 그보다도 훨씬 더 너를 용서하지 못해.”
“왜……! 어째서!”
벤야민이 버럭 역정을 내었다.
“나도 널 사랑하는데!”
그가 씩씩거리며 발갛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테오도르 황제 못지않게, 그렇게 오래전부터 너를 사랑해 왔는데! 어째서, 나는……!”
“뭐? 사랑?”
감히 그가 내놓은 그 단어에 내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사랑.
벤야민은 끔찍하게도, 사랑이란 이름으로 자신의 추악한 감정을 포장하였다.
내가 페르디난트 저택에 갇혀 지내온 그 십여 년의 시간 동안 나를 고립시킨 것도 그에겐 사랑이었고.
카타리나의 학대를 묵인하고 내가 저택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내버려 둔 것도 그에겐 사랑이었으며.
하루아침에 기억을 잃은 연인이 다른 여자와 떠들썩한 사랑을 나누는 걸 지켜보도록 종용한 것마저 그에겐 사랑이었다.
참을 수 없는 역겨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나를 독점하기 위해 나의 모든 불행을 초래한 남자가, 이제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한다.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내게 알려 주었던 사랑을 떠올렸다.
비록 테오도르는 인성이 못난 망아지 같은 남자였지만, 그는 언제나 내 행복을 빌어주었다.
말로는 나를 독점하고 싶다 하면서도, 그는 나의 이름과 가족들을 찾아주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틈에서 웃을 수 있게.
모두의 앞에 인정받으며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이름으로 나설 수 있게.
마치 나의 행복이 자신의 행복인 양, 그는 그러했다.
평화롭던 나의 행복을 흔든 것은 바로 벤야민이었다.
그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이전에는 이해하지 못했으나 지금은 그 이유를 안다.
그러니까 그가 ‘사랑’이라고 감히 이름 붙인, 나를 향한 그 역겨운 감정 때문에.
그로 인해 나는 하루아침에 연인을 잃었고, 에르와 리아는 아버지 없이 자라야 했다.
기억이 돌아온 테오도르는 나를 잃은 채 스스로의 목을 졸랐고,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아이들의 앞에 아버지로 나서지도 못한 채 그저 희생을 감수했다.
그 모든 비극을 초래한 이가 다름 아닌 벤야민이었다.
그런 주제에.
내가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평화를 다 깨부순 주제에.
“감히, 사랑이라고?”
뻔뻔하게 사랑을 입에 담은 벤야민이 마치 징그러운 벌레처럼 끔찍하게 느껴졌다.
테오도르가 내게 어떤 잘못을 저질렀든, 저 결과를 빚어낸 장본인이 바로 벤야민 아닌가.
“이브……?”
나의 분노에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벤야민.”
나는 그를 향해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머니에게 아이들을 건드린 존재가 받아들여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
“……?”
그가 내 말을 곧바로 이해하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그가 이해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그런 일들을 자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 너와 나의 악연을 정리하자.”
나는 곧바로 검을 뽑아 들었다.
“그게 네 선택이야……?”
벤야민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그를 차갑게 노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벤야민의 목울대가 야트막하게 일렁거렸다.
그가 천천히 푸른 마기를 끌어냈다.
페르디난트의 가호였다.
그가 마기를 펼치는 모습에 검을 더욱 강하게 고쳐 잡던 때였다.
“……!”
순간 눈 앞에 펼쳐진 예기치 못한 상황에 내 두 눈이 놀라 커졌다.
그의 마기가 공격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닥에 엎어져 있던 남자였다.
아까부터 입이 틀어막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던 피투성이의 남자가 두 눈을 부릅뜨고 버둥거렸다.
“너, 무슨 짓을……!”
“본디 시전자를 죽이면 남은 술식은 사라져야 마땅하지만.”
벤야민이 무표정한 얼굴로 남자를 쳐다보았다.
홰애액-
이내 푸른 마기가 남자를 덮쳤다.
“죽이지 않고 존재 자체를 세상에서 지워 내면, 술식은 망자의 저주가 되어 영원토록 존속하게 되지.”
“……!”
남자를 덮친 푸른 마기가 천천히 허공 속에 흩어져 사라졌다. 남자와 함께.
쿨럭.
벤야민이 창백한 얼굴로 피를 토했다.
“젠장, 반작용이 벌써…….”
“너, 설마…….”
나는 입술을 깨물며 그를 보았다.
조금 전 그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 것만 같았다.
오래전, 벤야민은 루돌프를 죽이기 위해 다른 이들의 생명을 제물로 흑마법을 사용했었다.
루돌프가 흑마법에 당해 죽은 탓에 그가 내 손목에 남긴 술식은 사라지지 못했다.
만일 그가 그것과 같은 원리로 조금 전의 남자를 제거한 거라면…….
“네 생명을, 제물 삼은 건가?”
벤야민은 희미한 미소를 얼굴 위로 띄우며 대답했다.
“네가 내게 오지 않겠다며.”
“……!”
“내가 어떻게 설득해도, 내게 오지 않을 거잖아.”
조금 전에 그가 제거한 남자는, 테오도르에게 어둠의 술식을 시전한 자라고 했다.
그 남자의 피만이 그를 괴롭히는 술식을 지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벤야민은 지금, 테오도르를 어둠에서 꺼낼 유일한 수단을 제거한 것이다.
“내가 널 가질 수 없다면, 테오도르 황제도 마찬가지야.”
“……멍청한 소리.”
스으윽-
내 손에 들려 있던 검 끝이 벤야민의 목을 겨누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피하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다시 뜰 뿐이었다.
나는 그런 벤야민을 잠잠히 노려보며 말했다.
“테오도르는, 한 번도 나를 가지려 한 적 없었어.”
테오도르는 단 한 순간도, 나를 소유하려 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내게 소유되길 바라던 남자였다.
“그게 너랑 테오도르의 차이야.”
“……!”
순간 벤야민의 눈이 커지며,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테오도르는 매 순간 내게 어여쁨을 받고자 안달이 난 사람 같았으나, 단 한 번도 내게 그러한 감정을 강요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나의 뜻을 먼저 존중해 주었다.
내게 버림받을까 전전긍긍하면서도, 내가 결코 애정을 돌려주지 않을 것을 선언한 뒤에도, 그는 그러한 자신의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네가 나를 향해 품은 마음이 사랑이 아닌 이유이기도 하고.”
“아니야, 난…….”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하려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그만두었다.
내가 쥐고 있던 검날 주위로 녹색 검기가 서리기 시작했다.
한때 친구라 믿었던 이를 베어 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나,
‘벤야민을 살려 두면…… 또다시 아이들과 테오도르를 위험에 빠뜨릴지 몰라.’
그러한 생각이 나의 결심을 더욱 단단하게 해 주었다.
“그러니까, 벤야민.”
한 번 표적으로 삼은 것은 절대 놓치지 않는 체르니시아의 녹색 검기가 벤야민의 몸을 칭칭 감았다.
나는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내 결심을 알아차린 그가 제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꼿꼿하게 힘주어 뜬 벤야민의 두 눈가가 붉게 물들어 갔다.
그리고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왜 울어?]
[네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처럼 작은 여자애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난 벤야민이야.]
[어……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벤야민은 가족들을 잃고 혼자가 되었던 내 옆을 채워 준 유일한 친구였다.
삭막한 페르디난트에서 버틸 수 있었던 단단한 지지대였다.
그렇지만 그가 벌인 죄악들을 모두 알게 된 지금은 모두 퇴색된 과거일 뿐이다.
“두 번 다시 보지 말자.”
“…….”
주르륵.
벤야민의 눈에서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오랜 세월 알고 지냈으나, 벤야민이 우는 것은 처음 보았다.
느리게, 내 손에 들린 검이 그의 몸을 베어냈다.
“윽…….”
털썩.
벤야민이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그대로 고꾸라졌다.
“이브…….”
바닥에 엎어진 그가 희미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읊조렸다.
“나의, 이…….”
그러나 꺼질 듯 희미하던 그 작은 읊조림은 금세 바스러지고 말았다.
죽어가는 눈동자가 끝까지 나만을 좇다가 툭, 감기었다.
질긴 악연이 끊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같은 자리에서 이제는 더이상 친구라 부를 수 없는 옛 인연을 지켜보다 몸을 돌렸다.
* * *
날이 밝기도 전에 황궁으로 사람을 보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즉살하였다고.
에른스트와 린든을 비롯한 황궁 사람들이 곧바로 저택을 찾아왔다.
벤야민은 본래 내일이면 처형될 제국의 가장 극악한 범죄자였다.
제국을 위협한 중죄인을 즉살하는 것은 제국을 보호하는 3대 가주로서의 권한이자 동시에 마땅한 의무였다.
황궁에서 나온 기사들이 벤야민의 시신을 옮겨 갔다.
죽은 그는 카타리나와 함께 효수될 것이다.
“이보네, 괜찮아? 혹시 그자가 네게 위험한 짓을 한 건…….”
에른스트는 걱정되어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괜찮아, 에른스트.”
순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러는 너야말로 괜찮은 거야? 네가 직접 황궁의 습격자들을 쫓았다면서. 위험한 일은 없었어?”
“으, 응……. 괜찮아.”
에른스트는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대답했다.
‘어?’
문득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린든이 옆에서 해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꼭…… 오래전에 아르민 경이 나와 테오도르를 볼 때 짓던 표정이랑 비슷한데.’
그러나 그러한 것에 신경 쓸 틈은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린든 경. 벤야민이 술식의 시전자를 제거했어요.”
나는 린든을 붙잡고 초조하게 물었다.
술식을 해제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없어졌다.
“술식을 해제할 다른 방법이 필요해요.”
그렇지만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리라.
[그럼 이, 이건 어떻게 한 거예요?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제게 술식을 걸었는데…….]
나는 오래전, 테오도르가 내 손목에 남아 있던 루돌프의 술식을 해제해 주었던 것을 기억한다.
[신성력이야.]
테오도르는 술식을 해제한 힘이 레오브란테의 가호라고 하였다.
그가 내게 남아 있던 술식을 해제해 주었던 것처럼, 어쩌면 그를 괴롭히는 술식을 해제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지 모른다.
“오래전에 테오도르가 신성력으로 술식을 해제한 걸 본 적이 있어요. 레오브란테에 부탁을 하면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요?”
“아…… 네, 이보네 님. 그렇다면 제가 바로 레오브란테를 찾아가…….”
내 말에 린든이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며 말에 올라타려 할 때였다.
“테네브리스의 본질은 어둠이야.”
잠자코 있던 에른스트가 나와 린든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어둠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빛이니까, 레오브란테의 신성력이라면 형님을 괴롭히는 술식을 해제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담담한 어조와 달리, 에른스트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그렇지만 사람마다 지닌 가호의 크기가 다르니까, 평범한 성력으로는 술식을 해제하기 힘들 거야.”
성인이 된 이후에 가호를 발현시킨 셀린느는 다른 발현자들에 비해 가호의 힘이 약한 편이었다.
지금 에른스트는 그 사실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래도, 모르는 거잖아. 할 수 있는 건 다 해 봐야지.”
지난밤 테오도르의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이미 한 번 보았던 나는, 마음이 절박해졌다.
린든이 레오브란테로 떠난 뒤, 나는 신전에도 사람을 보냈다.
부디, 누군가 테오도르를 그 저주와도 같은 악몽에서 꺼내 주길 간절히 바라며…….
* * *
테오도르가 며칠째 보이지 않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매일 찾아오던 사람이 보이지 않으니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지지 아조씨 왜 안 오지?”
정원에서 놀던 에르빈이 정문 쪽을 힐긋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이렇게 놀고 있으면 늘 저 앞에 단정한 자세로 서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우리가 아조씨 만나러 갈까?”
이때 오딜리아가 에르빈을 향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웅? 어케? 리아 아조씨 집 모루쟈나.”
“있지, 에르. 이고 비밀인데…….”
오딜리아가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양 손바닥을 펼쳤다.
그러자 작은 손바닥 위에서 검은 기운이 스르륵 피어났다.
“우와, 이고 모야? 밤하눌 같아!”
“이케 하면 아조씨 만나러 갈 수 있어!”
오딜리아는 검은 기운을 허공에 펼쳤다.
그러자 아이들의 몸이 간신히 통과할 만큼 작은 문이 생겨났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검은 문을 통해 공간을 건너갔다.
그러자 커다란 방이 하나 등장했다.
아이들이 방 안으로 발을 디디자, 검은 문이 스르륵 사라졌다.
“리아! 조기, 아조씨!”
에르빈이 침대 위에 누워 있는 테오도르를 가리켰다.
“아조씨 코 자고 있네.”
“어? 아조씨 피나!”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의 복부에 감긴 붕대를 발견했다.
흰 붕대에 피가 얼룩덜룩 묻어나 있었다.
“아조씨 아야 했어.”
“아조씨 아야 해서 에르랑 리아 만나러 못 온 거야.”
아이들은 울상이 되어 중얼거렸다.
그 중얼거림을 듣기라도 한 건지, 잠든 테오도르의 잇새로 끙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조씨, 어케…….”
“에르가 아조씨 호 해 주면 안 돼?”
“우, 웅?”
오딜리아의 말에 에르빈이 몸을 움찔하며 테오도르의 복부를 쳐다보았다.
붕대에 감긴 면적이 너무나 크고, 또 얼룩덜룩 묻어난 핏물이 무서웠지만…….
“웅! 에르가 아조씨 호 해 줄게.”
그렇지만 테오도르가 아픈 건 싫었다.
에르빈은 용기를 내어 테오도르의 상처에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고는 언젠가 무릎이 까진 오딜리아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호오-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정말로 효험이 있던 걸까?
끙끙 앓던 테오도르의 미간이 천천히 펴졌다.
“어어? 술식이다!”
오딜리아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며 외쳤다.
테오도르의 상처 위에 새겨져 있던 술식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더니, 서서히 흩어져 사라졌다.
“술식, 없어졌어.”
“어케 된 거지?”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할 때였다.
내내 감겨 있던 테오도르의 눈꺼풀이 스르륵 들렸다.
* * *
테오도르는 어김없이 악몽을 꾸고 있었다.
악몽은 매번 비슷했으나 변주를 가지며 찾아왔다.
이번 꿈에는 자신의 아이를 임신한 이브가 등장했다.
꿈속에서 그들은 이브의 부푼 배를 쓰다듬으며 행복에 빠져 있었다.
[있지, 테오. 너는 아들이 좋아, 딸이 좋아?]
[음……. 너를 닮으면 둘 다 사랑스러울 것 같은데.]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그녀의 콧잔등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의 얼굴이 화르륵 붉어졌다.
[아니이, 그런 말 말고…….]
[그럼 우리 쌍둥이를 낳을까?]
테오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러나 아득한 행복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테오, 당신의 아이예요!]
돌연 나타난 카타리나가 웬 남자아이를 가리켜 자신의 아이라 주장했다.
검은 머리카락, 황금색 눈동자…….
누가 보아도 테오도르와 똑같이 생긴 남자아이였다.
[테오도르, 너 어떻게……!]
이브가 배신당한 눈으로 자신을 보았다.
테오도르는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러나…….
[아뺘.]
테오도르를 닮은 가짜 아기가 그에게 찰싹 달라붙는 순간.
이브의 두 눈에 경멸이 떠올랐다.
[날 배신했어.]
[아, 아니야, 이브!]
[날 배신하고 저 여자와…….]
[아니야, 아니야, 이브! 정말, 정말 아니야!]
[…….]
[이브! 이브……!]
이브는 제게서 뒤돌아 뛰쳐나갔다.
[안 돼, 가지 마, 이브! 정말, 정말 아니…….]
[테오! 어딜 가세요? 당신의 피앙세는 나잖아요!]
[아뺘! 아뺘!]
이브를 붙잡고자 하였으나, 카타리나와 그녀의 아이가 테오도르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들을 떨쳐내고 싶었다.
그러나 몸이 마치 밧줄로 꽁꽁 묶인 것처럼 움직이질 않았다.
까르륵거리는 카타리나의 웃음소리와 칭얼거리는 아이의 목소리가 저주처럼 남아 테오도르를 속박했다.
[안 돼! 안 돼……!]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붙박인 채로 절규했다.
그러나 그의 몸은 같은 자리에서 단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죽었습니다.]
기사가 전한 말에, 그제야 그의 몸을 속박하던 힘이 풀렸다.
[안 돼, 안 돼, 그럴 리가……!]
테오도르는 사늘하게 식은 이브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울었다.
이브가 죽었다.
이브가 또, 죽었다.
악몽의 끝은 늘 이브의 죽음이었다.
그리고 저는 단 한 번도 그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브는, 또 저 때문에 죽었다.
[이브, 흑…… 윽…… 이브……. 내가, 내가 널 죽였어……. 나 때문에 네가 죽었어…….]
그가 고통스러운 가슴을 짓이기며 괴롭게 울고 있을 때였다.
[아조씨 왜 울어?]
[아조씨 속상해?]
[에르가 호 해 주까?]
[리아가 안아 주까?]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그의 앞에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에르…… 리아……?]
이내 아이들을 알아본 테오도르가 엉엉 울었다.
[미안해, 미안해, 에르. 미안해, 리아. 내가,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이브가…….]
[어? 어머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에게 안긴 이브를 발견했다.
[어머니 코 자고 있네?]
[아, 아니야, 에르. 너희 어머니는 자는 게 아니라…….]
테오도르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상황을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눈물만 끅끅 삼켰다.
[어머니이, 일어나요!]
[아이참, 어머니! 벌써 아침이란 말예요!]
그런 테오도르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한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브에게 매달려 애교를 부렸다.
그런데 이때.
이브의 눈꺼풀이 깜빡이는가 싶더니 그녀가 잠에서 깨어났다.
[어머니, 일어났다!]
[어머, 에르, 리아?]
몸을 일으킨 이브가 아이들을 발견하고 활짝 웃었다.
아이들은 신이 나서 그녀의 품에 안겨들었다.
어……?
순간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세차게 흔들렸다.
이브가…… 죽지 않았어……?
이브가…… 살아 있어……?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이들과 키득키득 웃으며 대화하던 이브가 그를 돌아보았다.
[왜 그래, 테오?]
[아니, 방금 전에…….]
이때,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그들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어머니, 아조씨 이상해!]
[아조씨 울었어!]
[아조씨 속상하대!]
순간 이브가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아이들을 돌아봤다.
[어머, 얘들아! 아저씨라니! 아빠한테 그게 무슨 소리야?]
[아빠?]
[아저씨가 리아랑 에르 아빠야?]
이브는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한테 아저씨라고 하니까, 아빠가 속상해서 울지.]
그 말에 아이들이 테오도르에게 쪼르르 달려와 그의 팔에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아빠, 미아내.]
[아빠, 속상해써?]
에르와 리아가 자신을 아빠라고 불렀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한참 전부터 그의 육신과 정신을 잠식하고 있던 괴로운 고통이 서서히 사라져 갔다.
번쩍!
눈이 뜨이고, 제게 찰싹 달라붙어 있는 에르와 리아가 보였다.
* * *
“에르…… 리아……?”
테오도르는 아이들을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럴 적에 그는 몹시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아조씨 일어났다!”
오딜리아가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에르가 아조씨 호 해 줘써!”
에르빈 또한 신이 나서 설명했다.
“리아가 아조씨 있는 곳으로 찾아왔어!”
“마쟈, 마쟈! 구러니까 에르랑 리아가 아조씨 호 해 준 고야!”
“……?”
테오도르는 잠시간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정신이 드문드문했던 지난 기억들이 하나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분명 저는 황제궁 뒤뜰에서 습격을 당하였고…….
암살자의 검이 복부를 뚫고, 그 위에 술식이…….
그러다 그는 자신의 상처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아…….”
테오도르는 에르빈이 성력으로 자신의 상처를 치유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쉽게 사라질 상처는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조금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에르, 혹시 머리가 어지럽다거나 아프진 않아?”
“웅?”
에르빈은 고개를 갸웃했다.
건강해 보이는 아이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안도했다.
만약 저를 치료하다가 에르의 건강이 나빠졌다면, 이미 용서 못 하는 스스로를 더욱더 용서 못 하게 되었을 테니까.
“구론데 요기가 아조씨 집이야?”
“아, 여긴…….”
테오도르는 희미한 기억 속, 제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이브의 집으로 옮겨졌던 기억을 떠올렸다.
이브가 밤새 자신을 보살펴 주었다.
그리고 저는 이브의 손을 잡고서 가지 말라고 울었고…….
화끈-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내가…… 무슨 추태를…….’
개새끼가 되겠다더니, 정말 개처럼 바닥을 기며 울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이브가 모두 보았다.
끔찍했다.
“아조씨 왜 구래? 아직도 아파?”
이때, 테오도르의 어두운 안색을 본 에르빈이 두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에르가 또 호 해 줘?”
“리아도 호 해 주께.”
“아, 아니, 아픈 게 아니…….”
당황한 테오도르가 저도 모르게 말을 더듬던 순간.
쪼옥-!
에르빈의 입술이 그의 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
테오도르는 놀라 그대로 굳어버렸다.
쪼오옥-!
오딜리아가 이에 질세라 반대쪽 뺨에 입을 맞췄다.
“……!”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커졌다.
“헤헤, 이제 안 아푸지?”
아이들은 저희의 행동이 테오도르의 심장에 어떤 무리를 일으켰는지 알지 못한 채, 그저 까르르 웃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사라졌다.
로라의 말로는 오전부터 아이들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저택이 발칵 뒤집혔다.
나는 초조한 마음을 누르며 사용인들과 함께 아이들을 찾아 저택을 헤집었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아이들을 찾을 수 없었다.
‘대체, 어디에…….’
저택을 샅샅이 뒤졌다.
들여다보지 않은 곳은 딱 한 군데였다.
‘설마…….’
나는 내내 닫혀 있던 테오도르의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어젖혔다.
그러자 그 안쪽에서 도란도란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구래서, 리아가 물꼬기를 잡고 싶었는데에…….”
“아이참, 리아. 구냥 물꼬기가 아니라 어머니가 좋아하는 물꼬기잖아.”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목소리였다.
“에르, 리아. 여기서 뭘…….”
서둘러 아이들을 데리고 나오려던 나는 방 안으로 성큼 들어갔다가, 침대 위에 옹기종기 앉아 있는 테오도르와 아이들을 발견했다.
“테오도르?”
순간 내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테오도르가 멀쩡하게 앉아 있었다.
아직 안색이 창백하고 눈 아래가 거뭇하긴 했지만, 바닥을 기며 울지도 않고 나를 찾아 괴롭게 흐느끼지도 않았다.
“아, 이브.”
테오도르는 머쓱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넸다.
“너, 어떻게……!”
순간 나도 모르게 눈가가 왈칵 뜨거워졌다.
“이, 이브?”
그런 내 반응에 테오도르가 당황하여 나를 불렀다.
“어, 어머니?”
“어머니 울어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놀라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아니야. 어머니가 왜 울어.”
나는 금세 감정을 추스르고 차분하게 가라앉힌 목소리로 아이들에게 물었다.
“에르, 리아. 왜 여기에 있는 거야? 없어져서 한참 찾았잖아.”
그 말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의 뒤로 쏙 숨었다.
“아조씨가 아파서 호 해 준 거예요.”
“마쟈! 나뿐 짓 안 했어요!”
몸은 테오도르의 뒤로 숨긴 채, 고개만 빼꼼 내밀어 변명하는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오려 했다.
축 늘어진 눈썹과 강아지처럼 올망졸망한 눈동자, 그리고 꼼지락거리는 손가락.
혹여나 혼이 날까 봐 눈치를 보는 모습이 테오도르와 조금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진짜야, 이브. 내가 아파서 아이들이 같이 있어 준 거야.”
안절부절못하던 테오도르가 아이들을 대신해 변명해 주었다.
“에르랑 리아가 너무 착해서 내가 아픈 걸 지나치지 못하고…….”
“그래, 알겠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그제야 테오도르와 아이들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렇지만 에르, 리아. 자리를 비울 때는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가야 하는 거야. 걱정했잖아.”
“네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말끝을 길게 늘이며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오도르를 돌아보며 물었다.
“몸 상태는 어때?”
“아……. 이제 좋아졌어.”
“좋아졌다고?”
쉽게 믿지 못하는 내 눈빛에 테오도르가 재빨리 덧붙였다.
“정말이야. 에르가 치료해 줬어.”
테오도르가 자신의 복부를 보였다.
불과 오전까지만 해도 아프게 짓물러 있던 상처가 깨끗이 아물어 있었다.
“에르가 치료를……?”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테오도르의 복부와 에르빈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어지간한 신관들이나 레오브란테의 가주인 셀린느도 저렇게 큰 상처는 치료하지 못했다.
대륙의 가장 뛰어난 의사들에게조차도 불가능한 영역이었다.
일전에 테오도르로부터 에르빈이 성력을 발현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너무 대단하지, 우리 에르?”
에르빈이 치료한 건 비단 육신의 상처뿐만이 아니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면 늘 나를 찾아 울부짖던 테오도르가 멀쩡하게 나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그러게. 정말, 정말 대단하네.”
멍하니 대답하자, 그때까지도 테오도르의 뒤편에 숨어 있던 에르빈이 우쭐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손짓했다.
“그렇지만, 에르, 리아. 아저씨를 괴롭히지 말고 이쪽으로…….”
“괜찮아. 이제 아프지도 않고 아이들이랑 더 놀아도 돼.”
“마쟈요!”
“마쟈!”
테오도르의 말에 아이들이 잽싸게 맞장구를 쳤다.
그 모습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간식이라도 가져다줄까?”
“네! 리아는 딸기 주스가 먹고 싶어요!”
“에르는 딸기 맛 마까롱이요!”
아이들이 활짝 웃으며 먹고 싶은 것들을 이야기했다.
나와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시선이 테오도르에게로 향했다.
“으, 응……?”
가만히 앉아 있던 그가 갑작스럽게 제게 시선이 모이자 당황해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너도 먹고 싶은 걸 말해야지.”
“아조씨도 빨리 말해!”
“아조씨는 먹고 싶은 거 없어?”
한마디씩 던지자, 그가 두 뺨을 슬쩍 붉히며 나직한 탄성을 터뜨렸다.
“아…… 나는…….”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접으며 포스스 웃었다.
“시원한 딸기 셔벗 부탁해도 될까?”
오랜만에 보는 그 웃는 얼굴에, 내 입가에도 야트막한 미소가 슬그머니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