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초라한 마음
테네브리스가 황궁을 점령하였던 그날의 참변은, 다행히도 만 하루가 지나기 전에 끝이 났다.
테오도르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테네브리스는 소멸하였다고 한다.
하늘을 뒤덮던 마물 떼도 흩어지고, 황궁 내의 상황도 천천히 안정되었다.
다행히도 나와 셀린느가 사전에 마물들을 처리하였고, 또 테오도르가 늦지 않게 돌아와 수습한 덕에 황궁 밖까지 사고가 번지는 걸 막을 수 있었다.
황궁 정리로 인해 테오도르는 무척 바빠졌다.
테네브리스로 인한 황궁 내의 사망자가 스무 명이 훌쩍 넘었다.
가엾이 죽은 이들의 시신을 거두고, 가족들을 위로하였다.
자세한 전말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번 사고를 마물들의 급작스러운 폭주라 여기었다.
이후, 황제의 직속 휘하에 마물들을 관리하는 직책이 만들어졌다.
4년 전부터 갑작스럽게 범람하였던 마물들은 잠잠해졌고, 사람들은 차츰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시간이 꽤 흘렀다.
그사이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제국 내의 가장 큰 변화는 바로 페르디난트의 실각이었다.
벤야민은 황제를 시해하려 하였다는 죄목과 황궁 마법진을 망가뜨리고 일반인이었던 브리안을 습격하였으며, 또한 어린아이인 에르빈을 해치려 한 죄목으로 재판정에 서야 했다.
그는 자신의 죄를 모두 시인하였고, 사람들은 경악하였다.
동시에 황제가 카타리나와 세기의 사랑을 한 것이 아니라, 페르디난트의 비리를 밝히기 위해 그녀와 계약을 한 것이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황제는 치밀하게도 보좌관에게까지 그 사실을 숨기었는데, 카타리나와 작성했던 계약서를 재판부에 증거 자료로 제출하였다.
그리고 그간 계약에 따라 카타리나가 황제에게 보낸 편지들에, 밝혀지지 않았던 벤야민의 추가 죄증이 드러났다.
이를테면 그가 흑마법을 사용하여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살해했다든가, 하는…….
카타리나 또한 벤야민과 함께 테오도르의 기억을 조작한 정황이 알려지게 되었으나, 지난 참사 때 이미 죽은 그녀는 재판정에 오를 수 없었다.
대신 금지된 술법으로 황제를 시해하려 한 죄로 벤야민과 함께 거리에 효수될 예정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벤야민을 만나러 갔다.
한때 페르디난트의 귀공자로 불리던 남자가, 볼품없이 두 손을 결박당한 채 불려 나왔다.
테오도르와 함께 보았던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를 보았다.
그가 나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루돌프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인 것을 보았다.
나의 탈출을 도와주기 위해 자신의 피와 생명을 바치는 것도 보았다.
모두 나는 알지 못했던 그의 희생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의 희생이 고맙기보다는…… 소름이 돋았다.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마음을 합리화하여 다른 이들을 망설임 없이 해칠 수 있다는 게…….
그리고 그의 그런 살의가 에르빈에게까지 닿았다는 게…….
[벤야민.]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벤야민을 쳐다보며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게 할 말 없어?]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입을 꾸욱 다문 채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
[…….]
한동안 말없이 그를 응시하다가, 그대로 몸을 돌려 나왔다.
그게 바로 어제의 일이었다.
마물들의 폭주로 한바탕 난리가 났던 황궁은 이제 수습이 다 되었다.
밝혀진 몇 가지 사실들에 사람들은 의문을 품었다.
[그럼 카타리나를 사랑해서 그런 게 아니라면, 황제는 왜 미쳐서 전쟁까지 벌인 거지?]
[그 여자랑 손을 잡는 것도 끔찍해했다던데…….]
[역시…… 그냥 원래 조금 미친 사람이라 그랬던 건가.]
테오도르는 내가 부탁했던 것을 들어주었다.
내 이름이 언급되어 내가 피곤해지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나름의 배려를 보여 준 것이다.
그렇게 내가 삐딱하니 턱을 괸 채로 창가에 앉아 생각을 곱씹을 때였다.
“아이참, 삼쪼온……!”
창밖에서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힐긋, 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잔뜩 신이 나서 웃음을 터뜨리는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화사하게 웃고 있는 에른스트가 있었다.
에른스트는 죽지 않고 살았다.
그날, 아이들을 저택 안에 얌전히 집어넣은 뒤 곧바로 황궁으로 다시 달려갔다.
날뛰던 마물들은 모두 정리가 되어 있었고, 아직 채 수습되지 않은 황궁에서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는 에른스트를 발견할 수 있었다.
[테오도르! 에른스트는……!]
[아직 살아 있어.]
에른스트의 머리맡에 서 있던 테오도르가 조금 피곤하지만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죽지 않고 잠들어 있는 거래.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브.]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심장에 검이 관통하는 것을 보았는데…….
[레오브란테의 가호는 본래 순수한 것을 보호하고, 악한 것을 물리치는 힘입니다.]
나의 의문을 풀어준 것은 셀린느였다.
[폐하의 성력이 ‘순수한 영혼’의 상태로 그릇 안에 봉인되어 있었던 에른스트 황자님을 죽이지 못한 것 같아요.]
[아…….]
그가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나는 내내 무섭고 괴롭던 마음이 풀려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을 내보내고 내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말없이 옆을 지켜 주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운 날은 처음이었다.
‘참 다행이야. 에른스트가 죽지 않아서.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볼 수 있어서.’
창밖에 아이들과 놀아 주고 있는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에른스트는, 며칠 전에 다시 눈을 떴다고 한다.
그러고는 아직 병색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굳이 체르니시아를 방문했다.
[에른스트? 너 여긴 어떻게……?]
[에르랑 리아랑 약속했단 말야. 같이 도토리 모으러 가기로.]
[이 계절에 무슨 도토리야! 너 몸도 아직 다 안 나았으면서……!]
[어어?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나 아직 아픈데…….]
사르르 눈웃음을 치며 그렇게 말하는데, 차마 다시 돌아가라고 내쫓을 수도 없었다.
마침 에른스트를 발견한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쪼르르 달려와 그의 양팔에 매달리는 바람에 더욱 그러했다.
[어? 에룬쑤뜨 삼쫀?]
[삼쫀이다! 삼쫀 왜 이렇게 늦게 와써!]
[마쟈! 삼쫀 나빠! 삼쫀이 안 와서 리아랑 에르랑 둘이서 도또리 모았짜나!]
[에르, 리아. 삼촌을 힘들게 하면…….]
[괜찮아, 이보네. 나 그 정도로 아픈 건 아니란 말야.]
그리고 내가 말릴 새도 없이 아이들과 함께 정원으로 나가 버렸다.
‘뭐, 정말 몸이 많이 안 좋은 거라면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겠지만…….’
그렇지만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심장에 검이 찔려 죽어 가던 모습을 보았는데, 어떻게 걱정하지 않겠는가.
‘다행이야. 정말, 정말 다행이야.’
창가에서 몸을 일으키며 다시 한번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에른스트가 죽지 않아서.
내 손으로 그를 해쳐야만 했던 순간의 기억이 아직도 아찔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그 인간 황자가 지금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어. 이 안에서.]
[그냥 죽여 달래. 너를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어렸을 때부터 배워 온 체르니시아의 가르침에 따라 마땅히 그를 베어야 함을 알면서도, 나는 망설였다.
차마 내 손으로 에른스트를 죽일 수 없어서…….
그리고 무엇도 하지 못하고 눈물만 흘리던 나를 대신해 나서 준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이브, 내가 할게.]
[착한 강아지가 되기로 했지만, 딱 한 번만 나쁜 개새끼 할게. 나중에 혼내 줘.]
테오도르는 얼핏 담담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얼굴 위로 떠오른 괴로운 빛깔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모르고 지나치기에는, 내가 그를 너무나 잘 알았다.
[알잖아, 이브. 나는 인성이 못돼 처먹은 놈이라는 거.]
[네 말마따나 난 쓰레기고.]
[쓰레기가 쓰레기 짓 하는 거야. 너는 그냥 나를 욕하면 돼.]
그 순간, 왜 그리도 가슴이 아팠던지.
문득 찌르르- 울려 오는 그때의 감각에, 나는 느리게 숨을 내쉬며 계단을 내려갔다.
그때에는 에른스트가 죽을지도 모른단 생각뿐이었는데, 시간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내 눈물의 원인에 그 또한 함께 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를 위해서, 나를 대신해 에른스트를 죽이겠다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자꾸만 생각이 났다.
테네브리스의 소멸과 함께 시공을 건너 과거로 보내지면서, 지나간 시간 속에서 테오도르가 나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그와 함께한 과거는 아름답기까지 했다.
보는 내가, 서글플 정도로.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끊임없이 내게 큰 사랑을 쏟아 주었다.
테오도르가 내게 주는 마음의 크기는 언제나 넘치도록 컸으나, 사실 나도 못지않게 그를 참 많이 좋아했었다.
좋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아주 어렸을 때, 그러니까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왠지 그때도 그를 조금 좋아했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알기에는 너무 어린 나이였지만, 그를 볼 때마다 유독 얼굴 위로 열이 올랐다.
더운 걸 싫어하는데도, 얼굴 위로 홧홧하게 오르는 그 열기가 싫지 않았다.
그와 함께 있는 게 좋았다.
어린 날의 짧고 강렬했던 인연이었다.
이후 내 삶을 뒤흔든 여러 가지 일들로 그를 잊고 지냈지만, 이따금씩은 그 어린 시절을 떠올리고는 했었다.
카타리나의 괴롭힘이 유독 심한 날에는 혼자 꺼내어 보았다가 슬그머니 미소 지으며 다시 집어넣곤 하는, 그런 소중한 기억이었다.
다시 만났을 때, 그는 내게 다시없을 큰 사랑을 알려 주었다.
그런 사랑은 누구에게도 받아 본 적 없었다.
나를 아껴 주었던 가족들도 그만큼이나 나를 사랑해 주지는 않았다.
그 당시의 테오도르는 매일매일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 같았다.
그 시절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그에게 우리는 결코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노라,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래, 용서할게. 그런데 사랑은 못 하겠어.]
너를 용서하겠다고.
그렇지만 사랑은 할 수 없다고.
‘아니. 그 반대야.’
그러나 그 의연한 거절은 그에게 초라함을 들키기 싫었던 나의 방어기제였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테오도르를 여전히 사랑하지만, 용서를 못 하는 거야.’
어른이 되어 다시 만나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단 한 순간도 그를 사랑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심지어는 그가 기억을 잃고 나를 냉대하던 때조차도 그를 사랑했다.
만일 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미련하게 그 옆에 계속 남아 있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는 그 기억이 돌아올 거라고, 기억이 돌아와 내게 미안하다고 사과해 줄 거라고, 그렇게 굳게 믿으며.
[미안해, 이브.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내가, 내가…….]
끝내 기억을 되찾은 테오도르는 내 앞에서 미안하다며 울었다.
차마 삼켜 내지 못한 울음을 끅끅 터뜨리던 그의 잔상이 내 마음속에 남아 지워지지 않았다.
그와 나 사이에 타인의 악의로 비롯된 오해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나도 모르게 그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그런 내 모습 속에서 천천히 깨달았다.
그를 사랑했던 마음이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었구나…….
온전히 도려내지 못했구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 시절로 돌아가는 상상을 하고 마는구나…….
그리고 여전히 그를 향한 마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나를 이처럼 초라하게 만들었다.
더 이상 초라해지고 싶지 않은 나의 마음이 그를 사랑한다고 인정하지 못하게 했다.
그래서 그렇게 말했다.
용서는 하는데, 사랑은 못 하겠다고.
사실은 그 반대면서.
내게 상처 주었던 그를, 용서하지 못하는 거면서.
그를 용서하는 순간, 다시 내가 초라해질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에.
……이처럼 연약한 마음을 세상에 들킬까 두렵고 겁이 났다.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알고 보니 이런 겁쟁이라니.
피식.
괜한 헛웃음이 새 나왔다.
“어머, 가주님. 정원에 나가 보시려고요?”
1층으로 내려오자, 마침 트레이에 딸기 주스를 내오던 로라와 마주쳤다.
“응, 그거 이리 줘. 내가 가져갈게.”
로라에게서 트레이를 건네받고서 정원으로 나갔다.
그러자 풀밭 위에 앉아 있는 에른스트와 그의 몸에 매달린 아이들이 보였다.
“세상에……! 에르, 리아!”
나는 화들짝 놀라 목소리를 높였다.
“에른스트 삼촌 그만 괴롭혀. 삼촌은 아직 몸이 다 낫지 않았단 말야.”
“괴롭히는 거 아녜요!”
“삼쫀이랑 같이 노는 거란 말예요!”
에르와 리아가 억울한 얼굴로 항변했다.
그러자 에른스트가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이보네. 우리는 그냥 같이 노는 거야.”
“……무리하지 마. 걱정된단 말야.”
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트레이 위의 딸기 주스를 발견한 아이들이, 그제야 에른스트의 몸에서 내려와 내 쪽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고마워.”
에른스트가 나를 향해 싱긋, 웃었다.
‘묘하게 분위기가 바뀌었는데…….’
나는 그에게 딸기 주스 한 잔을 내밀었다.
그가 아이들 틈에 섞여서 빨대를 쪽쪽 빨아 먹었다.
천진한 그 모습 위로 문득 나를 좋아해서 미안하다고 울던 그가 생각이 났다.
다시 깨어난 그가 그 이야기를 언급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언급하지 않으며 서로 모른 척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에른스트를 배웅하기 위해 현관으로 나갔을 때였다.
“어어?”
에르빈이 누군가를 가리키며 외쳤다.
“지지 아조씨다!”
절로 그쪽을 향해 시선이 돌아갔다.
테오도르가 와 있었다.
“지지 아조씨 또 왔네?”
“아조씨, 안농!”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를 향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테오도르를 보며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그의 옆에는 검은 말 한 마리가 푸르릉 콧김을 뿜고 있었다.
‘오늘도 말을 타고 온 건가.’
최근 테오도르가 그날 이후로 여러 가지 뒤처리를 하느라 무척 바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와중에도 매일같이 이렇듯 체르니시아 저택을 찾아왔다.
나는 그의 옷차림을 힐긋 훑어보았다.
장식 하나 없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흔한 보석이나 장신구 하나 걸치지 않은 채였다.
얼핏 보면 저택에서 일하는 이들처럼 수수한 차림새였다.
문제는 수수한 옷차림 때문에 잘생긴 얼굴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는 것이었지만…….
평소 나를 만나러 올 때면 항상 신경 쓰지 않은 척하면서도 은근히 공작새처럼 휘황찬란하게 꾸미고 오던 것을 생각하면, 그답지 않은 일이다.
자신의 잘생긴 얼굴을 이용해서라도 내 마음을 돌리려 하던 그가 아닌가.
“안녕, 에르, 리아.”
테오도르는 아이들을 향해 몸을 수그려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는 빙긋 웃으며 자그마한 선물 상자를 건넸다.
“어머니 말씀 잘 들으며 지냈어?”
그는 자신이 왔다는 걸 알리지도 않고 이렇게 밖에서 한참을 기다리다가, 우연히 마주치면 기쁘게 웃으며 편지와 꽃과 선물 등을 건넸다.
오늘 그가 가져온 선물은 커다란 보석이 박힌 장난감 단검이었다.
“우와! 이거 에르랑 리아 주는 거예요?”
“감사함미다!”
어떻게 아이들의 취향을 그렇게 쏙쏙 맞추는지, 아이들은 테오도르가 주는 선물을 신이 나서 받아 갔다.
“테오도르.”
나의 부름에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응, 이브.”
“잠깐 이야기 좀 해.”
나는 그를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따로 불러냈다.
“용서했다고 했잖아.”
“응, 용서를 구하려고 하는 게 아니야.”
“그런데 왜 이렇게 용서를 구하는 죄인처럼 찾아오는데?”
“내가…… 이래야 할 것 같아서.”
테오도르는 내 눈치를 힐끔 살피더니, 머뭇거리며 대답했다.
“너는 나를 용서했어도, 나는 나를 아직 용서 못 해서.”
“…….”
“그래서. 그래서 그래.”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나를 보며, 그가 잠시 말을 골랐다.
그러고는 최대한 내 기분이 상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듯,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네가 그랬잖아. 내 옆에 있으면 초라해지는 것 같다고. 초라해지는 게 싫다고.”
멈칫.
꾸욱 다물려 있던 내 입술이 미미하게 벌어졌다.
“그런데 그게 아니라는 거 알려 주려고.”
“…….”
“너는 전혀 초라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
“네가 실은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려 주려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유였다.
“내가, 네 앞에서 더 많이 초라해질 테니까…….”
나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고작, 그런 이유로.’
제대로 상대도 해주지 않는데 매일같이 구질구질하게 찾아와 초라하게 나를 기다리겠다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너랑 불행 싸움을 하고 싶은 게 아니야. 누가 더 초라한지 그런 걸 겨뤄서 뭐 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하자 테오도르가 빙긋 웃었다.
“그걸로 네가 조금이나마 알아주면 좋을 것 같아서. 네가 전혀 초라하지 않다는 걸. 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라는 걸.”
“……네가 이러지 않아도 알아. 나 멋있는 사람이란 거.”
괜한 허세를 부리며 대답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스스로의 연약함을 들킬까 두려워했던 주제에, 쓸데없는 만용이었다.
“그래? 정말 다행이다.”
테오도르는 환하게 웃었다.
선량해 보이는 얼굴로 안 하던 짓을 하는 그를 보니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어쩌면 그는, 내가 그를 정말로 용서하지 못했다는 걸 아는 걸까?
“아무튼, 이제 이렇게 찾아오는 거 그만해. 나는 이미 널 용서했고…….”
“널 방해하지 않을게.”
그가 다급하게 나를 붙잡았다.
“귀찮게 하지도 않을 테니까…… 그냥…….”
혹시나 내가 안 된다고 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그 모습을 보자, 솔직히…….
‘조금, 속이 시원한 것 같아.’
나쁜 마음가짐이라는 걸 아는데, 왜 이렇게 통쾌한지.
‘그렇지만 생각해 보면 테오도르가 한 짓에 비해 내 마음이 아주 풀릴 만큼 사과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
오락가락하는 내 마음을 나도 잘 모르겠다.
이성적으로는 그를 돌려보내야 함이 옳음을 알았다.
그는 알브레히트의 황제였고, 근래 그에게 닥친 업무량이 얼마나 많은지 또한 들어 알고 있었다.
요 몇 주 동안 쌓인 업무로 인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다지.
나에게 쏟는 시간만 줄인다면, 테오도르도 훨씬 편해지리라.
게다가 어차피 나는 더 이상 그를 용서하니 마니 하며 감정을 소모할 생각도, 그를 다시 받아 줄 생각도 없었다.
그러니 그가 이렇게 나를 찾아오는 것은 시간 낭비일 뿐이었다.
이미 나는 그에게 그를 용서하겠다는 말로 관계의 끝맺음을 선언하였고, 우리는 이제 타인이 되어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면 될 터였다.
이렇게 그가 날 찾아와 불쌍한 모습을 보여 봤자, 내 기분이 조금 통쾌해진다는 것 빼고는 이득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힘든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
그렇지만 나는 비겁하게도, 그에게 여지를 남기고 말았다.
“고마워, 이브.”
그런 나의 비겁함을 눈치채지 못했을 리 없는데, 테오도르는 내게 고맙다며 부드럽게 웃었다.
“…….”
그 순간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더 이상 그의 이런 모습이 속 시원하지도, 통쾌하지도 않았다.
가슴이 조금 먹먹하고 시큰한 것 같기도 했다.
그것은 조금 전, 차마 에른스트를 죽이지 못하고 울던 나를 대신해 나서 주던 그를 떠올릴 때 느끼던 것과 비슷한 감정이었다.
한순간에 뒤집힌 내 감정을 나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답답하고 짜증이 났다.
“이보네.”
이때, 에른스트가 우리 사이로 불쑥 끼어들었다.
“아, 에른스트. 아직 안 갔어?”
“응, 형님이랑 같이 가려고.”
에른스트는 생긋 웃으며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같이 가요, 형님.”
“…….”
살가운 그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에른스트와 사이가 좋아지나 했더니, 아닌가?’
에른스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는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더니, 막상 깨어난 에른스트와는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않는 듯했다.
“어? 이브, 여기 뭐가 묻었어.”
에른스트가 내 뺨을 스윽 닦아 내며 중얼거렸다.
“아, 그래? 고마워.”
“아 참, 에르랑 리아가 나를 보러 놀러 오고 싶다는데 괜찮아?”
“놀러 오다니? 어디로? 설마 황궁에?
“응.”
“그냥 저택도 아니고 황궁에 아이들이 놀러 가는 건 조금…….”
“뭐 어때. 너도 어렸을 때 많이 놀러 왔잖아.”
“그야, 그건 어른들이…….”
에른스트와 대화를 이어 가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돌렸을 때.
테오도르가 입을 꾹 다문 채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왜 저런 표정이야?’
무척 할 말이 많지만 하지 않겠다는 표정이었다.
* * *
말을 타고 왔던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의 마차를 타고 함께 돌아갔다.
그의 시선이 한동안 창가에서 떠나질 못했다.
더 이상 이브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네가 이러지 않아도 알아. 나 멋있는 사람이란 거.]
그렇게 말할 적에 이브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더 딱딱한 것을 눈치챘다.
이브는 저랑 있던 그 시간 내내 제 옆에서 스스로가 초라하다고 느꼈다 하였다.
그렇다면 저는 그보다는 훨씬 더 긴 시간 동안 그녀의 옆에서 초라함을 보여 주어야 하지 않겠나.
그녀의 머릿속에 정말 초라한 사람이 누구인지 각인될 때까지.
그녀가 아주 작은 불편함도 없이, 웃으며 스스로가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말할 수 있을 때까지.
제가 주었던 상처들이 더 이상 그녀에게 상처가 아닐 때까지.
초라한 테오도르 따위가 준 과거의 상처쯤은 무심하게 흘려보낼 수 있을 때까지.
그를 위해서라면, 아직 이 정도로는 택도 없었다.
[그래. 네 마음대로 해. 힘든 건 너지, 내가 아니니까.]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은근슬쩍 제 시선을 피했다.
눈꺼풀을 두어 번 깜빡이며 눈동자를 굴리는 건, 그녀가 조금 민망할 때 하는 행동이었다.
이브는 아마 그 말을 스스로 비겁하다 여기고 있을 터였다.
아닌데…….
그녀는 비겁한 게 아니라, 상냥한 건데…….
그녀가 정말 비겁한 사람이었더라면, 제가 지닌 죄책감을 어떻게든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용서니, 사랑이니 하는 말로 선을 긋는 것 또한 애초에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는 비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상냥한 사람이었다.
무시해도 그만일 저 같은 걸 온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그리고 동시에 아직 상처가 아물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녀를 흠집 낸 상처들은 모두 테오도르, 과거의 제가 그녀에게 남긴 것들이었다.
마땅히 제가 다시 치유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너는 저렇게 나를 사랑했으면서 왜 내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거야?]
지나간 과거의 흐름을 보며 그녀가 흘리던 눈물을 기억한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는 상처받는 게 나뿐만이 아닐 거야.]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네 기억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려고.]
[낙마하면서 그 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려고.]
그녀가 품고 있는 불신과 두려움을 마주친 순간.
테오도르는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저를 용서했다고 했지만…….
‘이브가 너무 착하고 상냥한 거야. 나 같은 쓰레기를 그렇게 쉽게 용서하면 어떡해.’
감히 제가 바라면 안 되는 용서라는 걸, 알아 버린 탓이다.
하여, 테오도르는 그녀의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더 이상 과거를 떠올려도 아프지 않기를 바랐다.
스스로를 초라하다 여기지 않기를 바랐다.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으로 환하게 웃기를 바랐다.
테오도르가 바라는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봤어요, 형님? 에르랑 리아가 나한테서 안 떨어지려고 하는 거.”
이때, 에른스트가 돌연 시비를 걸어왔다.
“조만간 나를 보러 황궁에 놀러 올 거래요. 형님 말고 나를 보러요.”
“…….”
테오도르의 시선이 천천히 맞은편에 앉은 에른스트에게로 향했다.
“하긴 이보네도 어렸을 때 형님이 아니라 나를 보러 온 거였는데.”
에른스트는 생글생글 웃으며 약을 올렸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적에 에른스트의 눈동자는 선혈처럼 붉게 변해 있었다.
마치, 테네브리스의 것처럼.
“미친놈.”
테오도르가 살벌하게 욕을 했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눈꼬리가 더욱 둥글게 휘었다.
“젠장.”
그 웃는 얼굴을 보며 테오도르가 제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원래도 에른스트를 마냥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변해 버린 에른스트는 더 싫었다.
에른스트가 이상해진 것은, 한동안 병석에 누워 있던 그가 다시 깨어난 직후였다.
[폐하, 에른스트 황자님이 깨어나셨다고 합니다!]
[……!]
그 말에 테오도르는 업무를 보다 말고 황자궁으로 찾아갔다.
에른스트의 방 앞에 사용인들이 기쁜 얼굴로 서 있었다.
[에른스트는?]
[2황자 전하께서는 막 깨어나시어 지금 방 안에 계십니다.]
[혼자 있고 싶으시다 하여 자리를 비워 드렸…….]
테오도르는 사용인들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곧바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에른스트가 침대 위에 반듯이 앉은 채로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
그 모습을 보고 테오도르가 멈칫 굳어 있을 때에.
기척을 알아차린 에른스트가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에 에른스트의 백금발이 부드럽게 흩어졌다.
그가 테오도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안녕하세요, 형님.]
나긋한 그 목소리에 무언가 묘한 이질감이 느껴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에게서 그런 이질감을 받은 적이 이전에도 한 번 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직후 미친 자처럼 황궁 안을 헤매며 돌아다닐 적에.
마주쳤던 에른스트에게서 조금 이상한 느낌을 받았었다.
그때에도 에른스트는 이렇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형님.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을 찾고 있다면서요?]
온화한 웃음기마저 머금은 채로.
꼭 지금과 같이.
당시에는 저로 인해 이브가 죽었다는 생각 때문에 다른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실수였다.
아우의 몸에 이상한 것이 깃들었다는 것을 그때 알아봤어야 했는데.
[너…….]
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에른스트를 뜯어보았다.
[아, 이거 참.]
그러자 에른스트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휘며 웃었다.
[이래서 눈치가 빠른 사람은 싫어요.]
순간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테오도르는 곧바로 에른스트에게 달려들었다.
[너, 뭐야!]
[앗, 콜록, 콜록.]
에른스트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다그치자, 그가 기침을 하며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갑자기 붙잡으면 아파요, 형님.]
[허……?]
테오도르는 기가 차서 에른스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겁 많은 고양이 상의 눈꼬리에는 심지어 눈물마저 찔끔 매달려 있었다.
테오도르가 스르륵 손을 놓자, 에른스트가 슬쩍 말아 쥔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키득키득 웃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형님이 아는 ‘그 에른스트’가 맞으니까.]
[내가 아는 ‘그 에른스트’라고?]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돌아오는 말이 가관이었다.
[네, 형님을 죽여 버리고 싶다는 것만 빼면.]
[뭐……?]
[아, 죄송해요, 형님. 다시 눈을 뜬 이후로 자꾸만 감정이 들쭉날쭉해서요.]
에른스트는 당혹스러워하는 테오도르를 앞에 두고 돌연 산뜻하게 웃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눈을 사납게 빛내며 비속어를 내뱉었다.
[그러니까 이만 내 눈앞에서 꺼져.]
[……죽었다 살아나더니, 완전히 미쳐 버렸군.]
셀린느를 불러 에른스트를 살피게 했다.
[정말로, 테네브리스의 사념이 에른스트의 몸에서 사라진 게 맞아?]
[테네브리스의 사념은 확실하게 사라졌어요. 다만…….]
[다만?]
[사념이 흩어지며, 그 부스러기 중 일부가 2황자 전하의 영혼에 튀어 버린 것 같습니다.]
사념의 부스러기니, 영혼에 튀었니, 하는 말들이 알쏭달쏭하게만 들렸다.
테오도르는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알아듣기 쉽게 설명해.]
[그러니까 이분은 에른스트 전하가 맞습니다. 그저 좋지 않은 것에 물들어 인격이 갈라지신 것뿐이에요.]
테네브리스의 사념은 소멸하였으나, 그 부스러기가 영혼에 물든 탓에 에른스트는 이중인격이 되었다.
이브의 앞에서 내내 순한 모습을 보이던 에른스트는 테오도르와 단둘이 남자마자 이상하게 변해 버린 성격을 드러냈다.
‘이런 걸 이브 옆에 두어도 되는 걸까?’
테오도르는 조금 심각해진 얼굴로 고민했다.
그렇다고 단순히 성격이 이상해졌다는 이유로 그를 해치울 수도 없고…….
참 난감했다.
“지금 저한테 욕한 건가요?”
에른스트가 사르르 웃으며 물었다.
“착한 개새끼가 되기는 글렀네요. 이보네가 알면 슬퍼할 거예요.”
협박하듯이 덧붙이는 말에 테오도르의 인내심이 흔들렸다.
“입 닥쳐.”
“와.”
그가 욕을 내뱉자 에른스트가 기뻐하며 탄성을 내질렀다.
“이제 제게는 착한 개새끼 시늉도 안 하는 거예요?”
“너도 마찬가지잖아? 내 앞에서는 그 이상해진 성격을 숨길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형님이 이보네도 아니고, 제가 형님한테 잘 보여서 뭐 해요.”
에른스트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주먹을 불끈 말아 쥐며 인내력을 끌어 올렸다.
‘저놈은 환자다. 저 새끼는 환자다.’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문장을 되새겨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간신히 살려 낸 에른스트를 다시 죽여 버릴 것 같았다.
테오도르는 에른스트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보고 다시 차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생글생글 웃으며 자신을 쳐다보는 에른스트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꿋꿋하게 무시할 때였다.
“그런데, 형님.”
또다시 에른스트가 말을 걸어왔다.
“황궁 내에 소문이 하나 돌던데. 형님이 뭔가를 하려고 한다고.”
그 말에 반응한 테오도르가 다시금 에른스트와 시선을 맞추었다.
“……누가 네게 그 소식을 전해 줬지?”
에른스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물었다.
“그거, 리아 때문에 그러는 거죠?”
* * *
손님들을 모두 돌려보내고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
“있지요, 어머니. 에룬쑤뜨 삼쫀이 놀러 오라 했어요.”
“삼쫀 보러 놀러 가도 돼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에른스트를 보러 놀러 가고 싶다고 조르기 시작했다.
“삼쫀이 꼭 어머니랑 같이 놀러 오라 했어요.”
“웅, 웅! 리아랑 에르는 아가니까요. 어머니가 데려가 줘야 해요!”
평소에는 어엿한 세 살이라 주장하면서, 이럴 때만 저희가 아기라고 한다.
“삼쫀이랑 숨바꼭질할 거야.”
“삼쫀이랑 달리기할 거야.”
“삼쫀네 집에는 커다란 호수도 있대.”
“호수에 오리도 있다고 했어.”
“리아는 오리가 되고 싶어.”
아이들은 에른스트를 만나러 갈 생각에 잔뜩 들떠 있었다.
특히나 알브레히트에 와서는 저택에 호수가 없다고 많이 아쉬워했기에, 황궁에 있을 호수가 기대되는 모양이다.
아이들의 손에는 황궁의 인장이 찍힌 초대장이 들려 있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렇게 공식적인 초대장을 받은 게 처음이었다.
식사를 하는 도중에도 손에서 도무지 떼지를 않았다.
초대장은 번쩍번쩍 금테두리가 둘러 있었고, 앙증맞은 리본도 붙어 있었다.
‘황궁이 어수선한 것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다지만…… 내가 시간을 내기 힘들 것 같은데.’
3대 가주 중 하나였던 페르디난트의 공석으로 인해 나와 셀린느에게 업무가 더욱 과중된 터였다.
그렇지만 저 반짝반짝한 눈빛을 못 본 척할 수도 없고…….
“미안, 어머니는 너무 바빠. 대신 브리안 삼촌한테 부탁하자.”
슬며시 브리안에게 아이들을 떠맡겼다.
그러자 아이들이 침울한 얼굴로 식사하는 브리안을 쳐다보았다.
브리안은 이번 사태로 인해 셀린느와 결혼식이 미뤄져서 슬퍼하고 있었다.
“삼쫀!”
“브리안 삼쫀!”
“삼쫀, 같이 가 줄 거지?”
“리아랑 에르는 아가라서 삼쫀이 필요해.”
브리안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그래.”
그 모습에 괜히 키득키득 웃음이 났다.
“다행이야, 브리안 오빠가 있어서.”
“그러게. 내가 없었으면 어쩔 뻔했어.”
브리안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내 말을 받아쳤다.
그간 브리안이 체르니시아 저택의 안살림을 도와준 덕분에, 나도 한결 수월하게 가주직을 수행할 수 있었다.
“오빠가 결혼해 버리면, 그땐 어떡하지.”
그렇지만 그가 셀린느와 결혼을 하고 나면, 가문의 안살림을 도맡아 줄 다른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너도 결혼을 하는 건 어때?”
브리안이 지나가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결혼? 누구랑?”
“뭐, 누구든. 네 마음에 차는 남자가 있다면…….”
“됐어.”
나는 피식 웃으며 답했다.
“딱히 생각 없어.”
오래전에는 누군가의 손을 잡고 예식장에 들어서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본 때도 있었지만…….
[응. 네 가문을 복권시킬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너를 나의 부인으로 맞이할게.]
내 손에 입을 맞추며 그렇게 속닥거리던 남자는, 이제 없으니까…….
나는 결혼을 하고 싶어서 그와 사랑했던 게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기에 그와 예식을 올리는 내 모습을 상상했었다.
만약 그가 아니었더라면, 평생 결혼이란 거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굳이 결혼을 위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그냥, 지금이 좋았다.
‘또다시 그만큼이나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도 없고.’
괜히 쓴웃음이 나와 물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왜? 설마, 그…….”
브리안이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 할 때였다.
초롱초롱한 시선에 브리안과 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 틈에 식사를 멈추고 귀를 쫑긋하며 나와 브리안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보였다.
“…….”
“…….”
브리안과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른 오전.
황궁에 가기 위해 일찍부터 준비했다.
얼마 전, 알브레히트 제국 내의 대귀족 가문들을 모두 소집하는 황명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지.’
테오도르는 회의 당일까지도 그 이유를 비밀에 부쳤다.
자못 궁금하였으나, 조금 뒤에 회의가 시작되면 알게 될 터였다.
“어머니 예뻐.”
“세상에서 쩰루 예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녹색 정복을 갖춰 입은 나를 보며 두 눈을 반짝였다.
“아이, 고마워라.”
나는 자그맣게 웃으며 아이들의 뺨에 뽀뽀를 해 주었다.
“있지요, 어머니. 에르는 꿈이 바꼈어요.”
“으응?”
“에르는 다람쥐 용사 말구 커서 어머니가 될 거예요!”
에르빈이 두 주먹을 불끈 말아 쥐고 외쳤다.
그러자 옆에 있던 오딜리아의 두 눈이 땡그랗게 커졌다.
“안 대!”
오딜리아는 그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안 대, 안 대! 절대 안 대!”
“안 대?”
“에르는 남잔데 어케 어머니가 돼!”
“왜 안 대?”
“구니까…… 구니까…… 구냥 안 대! 절대 안 대!”
오딜리아는 이유를 묻는 에르빈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그저 소리를 버럭 질렀다.
“리아 질뚜해?”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질뚜?”
“리아 질뚜하네. 내가 어머니 될까 봐 질뚜하네.”
“아냐! 질뚜 아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툭탁툭탁 싸우기 시작했다.
최근 들어 아이들은 말을 더 잘하게 되었는데, 그와 비례되게 말싸움도 더 잘하게 되었다.
“에르, 리아.”
잠시간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내가 잠잠히 아이들을 불렀다.
“오늘 에른스트 삼촌을 만나러 가는 날이라고 했지? 자꾸 그렇게 싸우면, 둘 다 삼촌을 만나러 못 갈 거야.”
“……!”
“……!”
그 말에 놀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양손으로 입가를 ‘합’ 가리며 내 눈치를 슬금슬금 보았다.
“아, 안 싸웠어요.”
“리아랑 에르랑 사이좋아요.”
곧바로 얌전해진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귀여워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어머니 일하러 다녀올 테니까, 싸우지 말고 잘 놀아야 해. 브리안 삼촌 말씀도 잘 듣고.”
머리를 쓰윽쓰윽 쓰다듬어 주자, 아이들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네, 네! 말씀 잘 들을 거예요!”
“리아랑 에르는 사이좋은 남매예요!”
의젓하게 외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어쩐지 든든했다.
아이들을 뒤로하고 현관으로 나왔다.
그러자 그곳에 못 보던 것이 있었다.
“웬 마차지?”
“황궁에서 보내 준 마차입니다, 가주님.”
“황궁에서?”
나는 떨떠름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마침 오늘은 가문의 마차 대신 말을 탈 생각이었다.
아이들이 에른스트를 만나러 황궁에 놀러 가는 날과 겹쳤던 탓이다.
본래 체르니시아에는 마차가 여러 대 있었다.
그러나 지난번 황궁에서의 참사 이후, 사망한 피해자들의 시신을 가족들의 품으로 돌려보내 주기 위해 가문의 마차를 한 대만 남기고 모두 지원한 터였다.
수레를 사용하여도 될 일이었으나, 구태여 레오브란테와 함께 나서서 마차를 지원했다.
가호의 힘을 발현한 자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이들을 보호하지 못해 일어난 참사였으니까.
수레가 아닌 마차를 사용함으로써 가엾이 죽어 간 이들에게 예우를 다하기 위함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군터 할아버지로부터 교육받았다.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의 유지를 이어 받은 우리 가문의 가풍에 대해.
가호의 힘은 군림이 아닌 보호를 위해서만 사용하여라.
지배하는 자가 아닌 인도하는 자로서, 위로는 나라를 받치고 아래로는 제국민을 이끌어라.
교만한 마음을 버리되, 마땅한 도덕적 의무를 다하여 약한 이를 보호하라.
3대 가문의 가풍에 따라 셀린느와 함께 먼저 솔선수범을 보이자, 그 아래의 귀족들도 뜻에 따랐다.
그래서 저택에 마차가 한 대밖에 남지 않았다.
황실에서도 테오도르와 에른스트의 마차를 제외하고는 모두 지원했다고 들었는데…….
‘테오도르의 마차네.’
사용인 하나 없이 달랑 마부 한 명만 조용히 딸려 보내다니.
언제나 선물을 바리바리 싸들고 찾아오는 테오도르답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심코 마차 위로 올라타려던 때였다.
‘응?’
순간 내가 잘못 본 건가 싶어 두 눈을 끔뻑여 보았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감았다 떠 보아도…….
‘테오도르……?’
어쩐지, 마부석에 망토를 눌러쓰고 앉아 있는 남자의 실루엣이 묘하게 잘생겼다 싶더라니.
물끄러미 쳐다보는데도 테오도르는 내 쪽을 돌아보지 않고, 고개를 푹 수그렸다.
나름 정체를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잠시 그를 불러 세워 뭐 하는 짓이냐고 물어보려다가, 모른 척하고 그냥 올라탔다.
‘사람을 보내면 될 걸, 왜 직접 와서 이런 고생을 한담.’
테오도르가 모는 마차는 승차감이 아주 훌륭했다.
덕분에 나는 직접 말을 모는 수고로움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테오도르가 잘 이해 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이런 노동이 기꺼운 걸까?
어느덧 마차는 황궁에 도착했다.
부드럽게 굴러가던 마차 바퀴가 서서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테오도르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그러고는 마차 앞에 다소곳이 서서 내가 내리길 기다렸다.
“대체 왜 이런 괴상한 짓을 하는 거야?”
“……오늘 에르랑 리아가 황궁에 놀러 오는 날이라며. 그럼 마차가 부족할 거 아냐.”
물끄러미 쳐다보며 묻자 그가 주섬주섬 변명을 했다.
“괜히 사람을 보냈다가, 네가 내가 보낸 마차는 싫다고 하면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돌아올 것 같아서……. 그럴 바에는 내가 직접 가는 게 널 설득하기도 좋을 것 같고…….”
“그럼 왜 그렇게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던 건데?”
“그게…… 네가…… 나를 보고 마차를 타기 싫다고 할까 봐…….”
테오도르는 점점 작아지는 목소리로 자신 없게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야, 당연히……”
그가 아주 잠시 괴로운 듯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아무렇지 않다는 듯 표정을 폈다.
“네가 날 싫어하니까.”
얼핏 담담한 듯 말하고 있었지만, 그 목소리 끝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그 태도에 괜한 한숨이 새 나왔다.
“말했잖아. 널 용서했다고. 그런데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
테오도르는 내 물음에 대답하지 못했다.
더 캐물으면 울 것 같았다.
회의 시간까지 20분도 남지 않았는데, 황제를 울릴 순 없었다.
‘초라해지겠다더니.’
테오도르는 정말로 초라한 모습을 유지했다.
참, 꿋꿋하게도.
‘그렇지만 황궁 사용인들이 보는 데서까지 이럴 줄은 몰랐는데.’
이곳은 체르니시아 저택이 아닌 황궁이었다.
어느 곳보다도 황제로서의 위엄이 가장 필요한 곳이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사용인들의 눈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내 앞에서 고개를 푹 숙그렸다.
꼭…… 주인에게 혼나는 강아지처럼.
“그래, 알겠어.”
굳이 너를 싫어하지 않는다는 위로의 말 따위를 건네지는 않았다.
이만 회의장으로 가 보겠다고 말하려 할 때였다.
테오도르의 손끝이 움찔움찔 떨리고 있었다.
나는 곧바로 그가 왜 그러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에스코트……를 하고 싶은가 보네.’
그러나 테오도르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손끝을 꾸욱 말아 쥐며 등 뒤로 숨겼다.
“그럼 회의장에서 봐, 이브.”
그는 빠르게 내게서 돌아섰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나도 걸음을 돌려 회의장으로 향했다.
* * *
황궁 본성을 향해 걷던 테오도르는, 제가 이브의 시야 밖으로 벗어난 걸 깨닫고 우뚝 멈추어 섰다.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왼 가슴 위로 손을 얹었다.
심장이 아프게 뛰고 있었다.
이브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제 입으로 언급해야만 하는 때가 종종 있었다.
그럴 때마다 너무 괴로웠다.
‘어쩌면 나는 평생 무뎌지지 못할 거야.’
죽는 날까지 이 격통에 몸부림치는 것이 그녀가 제게 주는 벌이라면, 달게 받아야 옳았으나…….
‘왜 날이 갈수록 더 아프지…….’
고통은 무뎌지는 대신, 시간이 흐를수록 보다 날카롭게 날을 세워 그를 찔러 댔다.
테오도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방으로 올라간 그는 깔끔하게 의복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회의장으로 나아갔다.
제국 내의 주요 귀족가에 모두 소집 명령을 내린 터였다.
이미 모두들 도착하여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대들도 알다시피, 페르디난트의 일로 간신히 맞추었던 3대 가문의 균형이 다시 흔들리게 되었다.”
상석의 황금 의자에 앉은 테오도르는 곧바로 본론을 꺼냈다.
“그래서 나는 새로이 힘의 균형을 맞추고자 한다.”
그의 선언에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폐하,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역사서에서 지우기로 하지 않으셨습니까?”
“혹 다시 페르디난트를 중용하시려는 건…….”
“페르디난트가 아니다.”
걱정스럽게 묻는 귀족들의 말을, 테오도르가 단호한 목소리로 끊어 냈다.
“그간 잊혀졌던 브리힘 신의 네 번째 가호가 있지 않나.”
“……!”
순간 사람들의 얼굴 위로 일제히 ‘설마’ 하는 표정이 떠올랐다.
“테네브리스의, 어둠 말이다.”
“폐, 폐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잘 이해가…….”
나이든 귀족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물었다.
테오도르는 여상한 표정으로 그를 보며 대답했다.
“테네브리스의 가호를 가진 이들이 여전히 제국에 존재한다.”
“그, 그러니까, 설마…… 설마 지금 흑마법을 말씀하신…….”
“흑마법?”
테오도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자 조금 전 소심하게 입을 열었던 나이 든 귀족이 ‘히익’ 하고 괴상한 숨 소리를 내었다.
“본래 테네브리스의 가호는 ‘흑마법’이 아닌 ‘어둠’이라는 이름을 지녔지.”
테오도르는 그를 힐긋 쳐다보더니, 좌중을 둘러보며 말했다.
“마땅히 관리해야 할 가호의 힘을 악으로 규정하여 배척한 탓에 벤야민 페르디난트 같은 자들이 흑마법을 악용한 것이 아닌가.”
잠시간 말을 멈춘 그가, 조금 더 묵직하고 힘 있는 목소리로 선언했다.
“하여, 나는 이날 이후로 브리힘 신의 네 번째 가호인 어둠을 공인할 것이다.”
“……!”
“……!”
순식간에 회의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짙은 공포와 거부감이 사람들의 얼굴에 떠올랐다.
이보네는 말없이 입술을 꾸욱 깨문 채로 사람들을 응시했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알브레히트에서 나고 자란 이라면, 어렸을 때부터 어둠에 대한 공포를 학습하게 되니까.
어렸을 때의 그녀 또한 검은 머리를 지녔다는 테오도르 1황자의 소문을 접하고 두려워하였었다.
그를 실제로 만나 본 뒤에, 생각을 바꾸긴 했으나…….
테오도르가 황제가 된 지 10여 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으스스한 수식어들이 그의 뒤를 따랐다.
물론 테오도르의 몹쓸 인성도 한몫하였으나, 그보다도 그가 지닌 검은 머리카락 탓이 컸다.
검은색은, ‘어둠’의 색이었으니까.
현세에 악이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색이었으니까.
가뜩이나 테오도르는 검은색을 타고났었고, 수년 전에는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모은다며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그랬던 그가 이제는 공식 석상에서 테네브리스의 어둠을 공인하겠다고 하였으니, 모두가 두려워할 만했다.
그러나 이보네가 아프도록 입술을 꾸욱 깨문 것은 다른 이들처럼 어둠이 두려운 탓이 아니었다.
‘설마, 리아 때문인가?’
테오도르가 처음 이 자리에서 어둠을 언급했을 때, 머릿속에 퍼뜩 스친 생각 때문이었다.
오딜리아는 흑마법을 무의식중에 몇 번이나 사용했다고 들었다.
아직 어려 가호를 다루기 힘든 데다가, 그것을 운용하는 방법을 가르쳐 줄 이도 없었다.
이보네 또한 서쪽 대륙 암암리에 존재하는 마도사를 찾아 리아의 교육을 부탁하는 것 외에는 마땅한 해결책을 찾지 못하던 중이었다.
사실 이마저도 제국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비난을 받을 일이라, 조심스러웠다.
그런데 마침, 테오도르가 시의적절하게 어둠을 공인하겠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로 인해 그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없을 텐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에게 지워진 악명만을 더할 일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보네가 이런저런 생각들로 심란해하고 있을 적에, 테오도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둠을 발현한 이들에게 ‘어둠술사’라는 이름을 내리고, 테네브리스의 가호를 관장할 새 가문을 세워 다시금 3대 가문이 균형을 맞추게 할 것이다.”
“하, 하지만…….”
이때 젊은 귀족 하나가 용기 있게 나섰다.
“3대 가문의 균형을 맞추기 위함이라는 폐하의 말씀은 무척 좋다고 생각됩니다. 그런데…….”
“그런데?”
테오도르가 몹시 상냥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러나 그 온화한 태도에 말을 꺼낸 젊은 귀족의 얼굴이 새하얘졌다.
“흐, 흐어억!”
“…….”
최근 테오도르는 착해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었는데, 다들 이런 반응이었다.
조금 짜증이 나서, 눈썹이 꿈틀꿈틀 치솟으려 했다.
‘안 돼. 이브가 보고 있어. 짜증 내지 말고, 착하게 굴어야 해.’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짜증을 잘 참아 냈다.
얼핏 언짢은 기색이 스친 듯하였으나 황제가 잠자코 말을 들어 주겠다는 태도를 보이자, 용기 있는 귀족들이 한 마디씩 얹기 시작했다.
“그…… 그간 알브레히트를 받쳤던 3대 가문의 지위는 그저 단순히 가호의 힘만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폐하. 제국을 받치고 귀족들을 이끄는 3대 가문의 가주가 되려면 그만큼의 역량과, 모두가 인정할 만큼의 수준이 되어야…….”
“자칫 잘못하였다간 또다시 페르디난트의 폐단을 잇는 꼴이…….”
너도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비싯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내가 그에 마땅한 이를 찾아온다면, 그럼 그때는 다들 내 말에 따라 그자를 인정할 것인가?”
“네, 네……?”
“네, 넵……!”
“그, 그렇습니다!”
마땅히 부정할 명분이 없는 질문이었기에, 귀족들은 설마 그런 이가 있겠는가 싶어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렇다면 새 가문을 세우는 이야기는 조금 뒤로 미루지. 다만 이 자리에서 제국의 첫 번째 어둠술사를 공증할 것이다.”
테오도르는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나른하게 젖혔다.
“……?”
“……?”
“……?”
아직 어둠술사를 공인하기로 완전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황제의 공표에 모두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때였다.
테오도르가 문득 오른손을 허공으로 들어 올렸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손끝을 움직였다.
그 난데없는 손짓에 모두가 의아해할 찰나.
우아하게 허공을 가르며 움직이던 손끝에서 검은 기운이 슬금슬금 피어나기 시작했다.
“이, 이건……!”
“설마, 어, 어둠……?”
테오도르의 손끝에서 피어난 어둠이 회의장을 덮쳤다.
찰랑, 물소리와 함께 닫힌 창문 바깥으로 물이 차올랐다.
사람들은 놀라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이, 이게 어떻게 된……!”
황금빛 비늘을 지닌 물고기 한 마리가 창밖으로 유유히 헤엄치고 있었다.
“폐, 폐하께서 하신 겁니까?”
“서, 설마, 이곳은 화, 황궁 호수……!”
오래전, 막 황제가 된 테오도르가 제국 내의 황금색 비늘을 지닌 물고기를 모두 포획하여 황궁 호수에 방생한 것은 유명한 일화 중 하나였다.
“그래.”
테오도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황궁 호수의 밑바닥이다.”
테네브리스의 몸에서 깨어났다가 돌아온 이후, 어둠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테네브리스의 진짜 조각은 바로 자신이니, 이 가호는 본디 그의 힘이기도 했다.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온 뒤에도 힘은 사라지지 않고, 점점 더 그의 육신에 체화되었다.
테네브리스의 어둠은 페르디난트의 술법과 본질적으로 같으면서도 조금 달랐다.
초자연적인 것들을 다루는 데 특화되어 있었다.
이를테면, 보다 고차원적으로 사람의 정신에 접근한다든지.
혹은, 시간의 흐름에 관여한다든지.
벤야민 같은 경우는 본래 어둠을 다스릴 수 없었기에, 다른 이들을 제물로 바쳐야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나 오딜리아처럼 처음부터 어둠을 타고 난 이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세상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힘을 운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쯤 하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였는지, 테오도르가 다시금 어둠을 거두었다.
그러자 창밖으로 보이는 물살이 사라지며, 회의장은 다시 본래의 위치로 돌아왔다.
나이 든 심약한 귀족 하나는 그만 졸도해 버리고 말았다.
스스로 제국의 첫 번째 어둠술사가 된 테오도르를 향해 두려움과 꺼리는 마음이 뒤섞인 시선이 이어졌다.
결코 유쾌하다고는 할 수 없는, 불건한 시선이었다.
* * *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태운 마차가 2황자궁 앞에서 멈추었다.
아이들은 브리안이 먼저 내리기도 전에 마차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삼쫀 집 엄청 죠아!”
“우리 집보다 죠아!”
“엄청 커!”
“사람도 많아!”
마침 마차가 정문을 통과했다는 소식에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에른스트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들을 맞이했다.
“어서 와, 에르, 리아.”
“에룬쑤뜨 삼쫀이다!”
“삼쪼온!”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에른스트에게 쪼르르 달려가 안겼다.
처음 에른스트를 견제하였던 에르빈도 이제는 그의 품에 덥석덥석 안기곤 했다.
에른스트는 시종을 시켜 브리안을 휴게실로 안내한 뒤, 아이들과 함께 호숫가로 향했다.
“있지요, 삼쫀! 리아는 잉어를 잡꼬 시퍼!”
“에르는 물꼬기 잡아서 어머니한테 선물할 거야!”
아이들은 호수에서 잉어를 잡고 싶다며 재잘거렸다.
이에 에른스트가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호숫물이 깊어서 들어가는 건 안 돼.”
그러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세상이 무너진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럼 리아 잉어 못 잡아?”
“어머니 선물은?”
에른스트가 피식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 대신 이다음에 꼭 같이 물고기 잡으러 가자.”
다정한 다독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은 토라져서 양 볼이 빵빵해졌다.
어느덧 호숫가에 도착하자, 시종들이 돗자리를 펴고 달콤한 디저트를 가져다주었다.
“우웅? 저고 모야? 쿠키야?”
알록달록한 마카롱을 보며 에르빈이 관심을 보였다.
“아, 이건 마카롱이야. 먹어 볼래?”
“마까롱!”
그리고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문 순간, 아이들은 토라졌던 기분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마까롱 맛있어!”
“이고, 어머니 선물할래!”
단풍잎처럼 조막만 한 손으로 마카롱을 만지작거리며 신나 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에른스트가 키득키득 웃었다.
“이보네도 어렸을 때 좋아했는데, 닮았네.”
에른스트는 아이들에게 제 몫까지 건네주었다.
“많이 먹어.”
“삼쫀 최고야!”
“삼쫀 최고 최고!”
아이들은 에른스트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재잘재잘 떠들었다.
“있지, 삼쫀. 어쩌면 어머니가 이제 결혼을 할지도 몰라.”
“정말?”
“웅웅! 에르가 다 들었어! 브리앙 삼쫀이랑 어머니랑 이야기하는 거!”
“마쟈! 리아도 들었어!”
“이보네가, 결혼을…….”
에른스트가 멍한 얼굴로 읊조릴 때였다.
“구럼 이제 에르랑 리아두 아빠 생기는 걸까?”
아이들의 두 뺨이 발그레 물들었다.
그것을 발견한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아빠가 갖고 싶어?”
“웅!”
“왜?”
아이들은 한 번도 아빠가 없다는 결핍을 내비친 적이 없었기에, 에른스트는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였다.
단순히 놀아 주는 사람이 필요한 거라면 굳이 아빠가 없더라도 제가 있고…….
남자 어른이 필요한 거라면 브리안도 있고…….
“아빠가 있으면 어머니도 짝꿍이 생기잖아!”
“……?”
“에르랑 리아는 짝꿍이 있는데, 어머니는 혼자야.”
“마쟈. 혼자서는 소꿈놀이도 못 한단 말야.”
“숨바꼭질도 못 해.”
“웅웅!”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주거니 받거니 하며, 아빠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했다.
잠자코 듣던 에른스트가 빙긋 웃었다.
“착하네, 에르, 리아. 어머니가 외로울까 봐 걱정했구나?”
칭찬을 받은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왜 저 사람들이 삼쫀을 전하라고 불러?”
“어, 그건…….”
에른스트는 뺨을 긁적이며 최대한 쉬운 말로 설명하고자 했다.
“내가 황제의 동생이니까?”
“황제?”
처음 듣는 단어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들이 나고 자랐던 칼리고르에는 황제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에르빈이 벌떡 일어났다.
“나, 황제 알아! 황제는 왕 같은 거야!”
에르빈은 해맑은 표정으로 활짝 웃으며 외쳤다.
“그리고 황제는 미친 사람이야!”
“으, 응……?”
에른스트가 조금 당황한 목소리를 내었다.
“에르가 다 들었어! 예전에 밀까루 아조씨가 알려 줬어.”
에르빈은 이전에 호수 저택에서 이보네와 프레데릭이 나누던 대화를 떠올린 참이었다.
“황제는 미친 사람이고, 쓰레기고, 지지고, 다랑지 용사를 죠아해!”
느리게 두 눈을 깜빡이던 에른스트가, 이내 박수를 쳤다.
“우와, 에르 진짜 똑똑하네? 그런 것도 알고?”
에르빈은 우쭐한 표정으로 턱 끝을 치켜들었다.
“지지? 지지 아조씨 같은 거야?”
에르빈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오딜리아만이 여전히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채로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
“웅웅. 황제는 지지 아조씨 같은 거야.”
“그럼 지지 아조씨가 황제야?”
아이들의 대화는 보통 엉뚱한 흐름으로 흘러가기 일쑤였는데, 오늘따라 진실에 근접해 가고 있었다.
* * *
회의가 끝난 뒤.
황제가 회의장을 떴음에도, 귀족들은 곧바로 자리를 뜨지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 숙덕였다.
잠자코 그 모습을 지켜보는 내 마음 속에 불안한 감정이 깃들었다.
‘테오도르가 흑마법을, 아니, 어둠을 사용할 수 있었다니.’
테네브리스와 맞서던 때까지만 하여도, 그 힘을 꺼낸 적 없던 그였다.
언제부터 그런 힘을 사용하게 된 걸까?
‘그럼 그 거울을 이용해 시간을 움직인 것도…….’
한참 홀로 생각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반발이 거셀 거예요. 고대 이후로 수천 년간 금지되어 온 이름이니까.”
“아, 셀린느 님.”
불안함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셀린느가 어두운 얼굴로 내게 다가왔다.
“벌써부터 귀족들 사이의 반응이 좋지 않아요.”
“황제가 어둠술사라는데, 뭐 차차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될지도 모르죠.”
애써 낙관적인 목소리로 말하고자 하였으나, 그렇게 말하는 내 말끝도 살풋 떨리고 있었다.
“이보네 님의 말씀이 옳아요. 어찌 됐든 힘의 균형이 맞춰지는 건 좋은 거니까요. 괜한 기우였으면 좋겠네요.”
“셀린느 님은 괜찮은가요? 폐하께서 어둠을 공인하시겠다고 한 거요.”
“어차피 앞으로 마물들과 공존하기 위해서라도 좋은 방도라고 생각해요. 어둠에 복종하는 족속들이니까.”
황제가 떠난 회의장을 정리하고 있는 소년을 힐끗 쳐다보며, 셀린느가 말했다.
테오도르로부터 마물들을 관리하는 직책을 부여받은 앳된 외양의 소년이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데려온 낯선 소년을 보며 반신반의하였으나, 이내 소년이 마물들을 통제하는 모습을 보고 안심하였다.
테오도르가 두고 간 서류들을 정리하던 소년은 나와 눈이 슬쩍 마주쳤다가 화들짝 놀라며 내 시선을 피해 밖으로 나갔다.
‘음?’
대놓고 도망치는 모습에 기분이 묘하게 불쾌해졌다.
‘그런데, 테오도르가 말한 적당한 이는 대체 누구지?’
테오도르는 적당한 이를 내세워 테네브리스의 의지를 잇는 새 가문을 세울 것이라 했다.
황제인 테오도르가 동시에 한 가문의 수장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이를 세워야 할 것이다.
이런저런 복잡한 마음을 누르고서, 본성을 나와 2황자궁으로 향했다.
저 멀리 2황자궁 앞에 체르니시아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가 서 있는 게 보였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나를 보고 신나서 달려왔다.
“어머니!”
“어머니이!”
얼마나 신나게 논 건지, 예쁘게 차려입은 옷들이 난리가 나 있었다.
“어머니, 이거 선물이에요!”
에르빈이 내게 자그마한 마카롱 하나를 건넸다.
손에 계속 쥐고 있었는지, 겉이 녹아서 꼬깃꼬깃했다.
“마카롱이네?”
“새 마카롱을 포장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럼 그건 제 선물이 아니라 삼촌이 주는 선물 아니냐고 그러잖아.”
뒤따라 나온 에른스트가 난감한 듯 눈썹을 늘어뜨린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고집이 엄청 세더라. 너랑 닮았어, 이보네.”
“에르랑 리아가 나를 좀 닮았지.”
나는 피식 웃으며 꼬질꼬질한 마카롱을 한 입 베어 먹었다.
“아이, 맛있다.”
다소 과장된 목소리로 감탄하자, 에르빈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갸르릉거렸다.
* * *
어두컴컴한 밤이었다.
황제의 침실에 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 으아아아아악!”
테오도르는 무감각한 시선으로 제 발치에 죽어 가는 암살자를 내려다보았다.
“쯧, 피 냄새가 진동해서 와 봤더니.”
문득 창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열린 창을 타고, 에른스트가 테오도르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 멍청한 것들은 지치지도 않고 사람을 보내 오네요.”
에른스트가 바닥에 죽어 가는 암살자의 머리통을 발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벌써 사흘째였다.
테오도르의 침실에 끊이지 않고 밤 손님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몸도 성할 날이 없었다.
“괜찮아요, 형님? 거기, 피가 나는데.”
에른스트가 테오도르의 복부에 난 자상을 힐긋 쳐다보며 물었다.
얼핏 스쳐 보기에도 상당히 깊은 상처였으나, 테오도르는 신음 한 번 흘리지 않았다.
괜찮았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살아 있을 적에는 암살자를 맞이하는 게 매일 밤의 일상이었으니까.
“그러기에 저를 앞세워도 된다니까.”
에른스트가 아직 죽지 않은 암살자의 머리를 한 번 더 발로 걷어차며 말했다.
애초에, 테오도르가 공식 석상에서 어둠을 공인하겠다고 하였을 때부터 예측된 일이었다.
이제 몇몇 이들은 오랜 시간 사람들의 머릿속에 악으로 뿌리 박혀 있는 어둠과 테오도르를 동일시하는 중일 테니.
얼마 전, 에른스트는 체르니시아 저택에서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테오도르에게 제안했다.
[반발하는 이들이 만만치 않을 텐데, 방패가 필요하겠네요.]
악과 동일시될 그 역할을, 제가 맡겠다고.
[그 역할, 내가 맡을게요.]
테네브리스의 사념 부스러기가 튀어 있는 에른스트 또한 어둠을 운용할 수 있었다.
아주 손쉽게 말이다.
당연했다.
에른스트의 육신은 어미의 몸 밖으로 날 때부터 테네브리스의 그릇으로 키워졌고, 오랫동안 어둠에 동화된 몸이었다.
루돌프의 술식이 남아 있던 이보네가 황궁에 다시 나타났을 때, 곧바로 알아볼 수 있던 것 또한 그 덕이었다.
고작 술법을 이용한 눈속임 따위가 오랜 시간 어둠에 동화되어 있던 에른스트를 속일 순 없었으니까.
[아니, 됐어.]
그러나 테오도르는 곧바로 에른스트의 제안을 거절했다.
[내가 해.]
그는 스스로 어둠에 강하게 반발하는 이들에게 관심을 끌고 분란을 일으켜 노려지길 선택했다.
공식 석상에서 자신이 어둠술사임을 밝힌 테오도르는 사람을 시켜 소문을 냈다.
‘어둠을 받아들인 이후, 백전 무패였던 황제가 급격히 쇠약해졌다더라!’
소문을 들은 이들이 매일 밤 제게 암살자를 보내 왔다.
테오도르는 부러 그들의 습격에 살을 내어주며, 몇몇을 살려 보냈다.
그래야 살아남은 이들이 저희 무리로 돌아가, 테오도르 황제가 쇠약해졌다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알릴 테니까.
오늘은 한 놈을 살리고, 한 놈을 남겼다.
테오도르는 검을 들어 죽어 가는 암살자의 숨통을 끊었다.
당연하게도, 암살자를 죽이는 데에 망설임은 전혀 없었다.
꼬리를 잡기 위해 며칠 전 저를 습격하였던 암살자 하나만 따로이 살려 둔 터였다.
“와, 재판도 없이 그냥 죽이는 거예요? 착해진다면서요?”
“살려 두면 장차 리아에게도 위협을 가할 놈들이다. 뿌리 뽑아야 해.”
“오.”
에른스트가 휘파람을 불었다.
“대단한 부성애네요.”
그가 키득거리며 물었다.
“앞으로 수년간은 같은 일이 반복될 텐데, 괜찮겠어요? 어쩌면 수년이 아니라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르는데.”
에른스트가 난장판이 된 테오도르의 침실에서 용케도 붕대를 찾아냈다.
테오도르는 어지러운 침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피에 젖은 셔츠를 벗어내자, 보기만 해도 아픈 자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필이면 어제 베인 곳을 오늘 다시 베였다.
“그 작자들을 뿌리 뽑기 전에, 형님의 몸통 한 부분이 날아가게 생겼어요.”
“물론, 괜찮아.”
테오도르는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환부에 미지근한 물을 뿌렸다.
그의 성력으로 이렇게 큰 상처를 치료하는 것은 불가했기에, 대강의 처치만을 한 뒤 지혈을 위해 붕대를 감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걸리는 걸 내버려 둘 순 없지.”
지이익-
테오도르가 붕대의 끝을 이빨로 뜯어내며 덧붙였다.
“리아가 성인이 되기 전에, 끝낼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