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시간의 거울
[에른스트……!]
[안 돼……!]
감겨 있던 테오도르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두 눈을 가늘게 찌푸리며 청명한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가, 이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이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알브레히트의 황궁, 저의 알현실이었다.
그러나 지금 제가 있는 곳은 처음 보는 장소였다.
푸르른 녹음이 우거진 들판, 지저귀는 새들과 나무 사이로 뛰어다니는 아기 다람쥐들.
“어떻게 된 거지?”
테오도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브는…… 에른스트는…….”
당혹스러운 감정이 물씬 밀려왔다. 이브도, 에른스트도 보이지 않았다.
“이브…… 울고 있었는데…….”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울고 있는 수많은 그녀들을 보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우는 그녀의 모습은 익숙해지지 않았다.
“계속…… 울고 있을까…….”
그녀가 제가 없는 곳에서 또 울고 있을 것 같아서 걱정이 됐다.
“너무 많이 울면, 안 되는데…….”
물론, 이브는 저의 걱정 같은 건 바라지 않겠지만…….
욱신-
서럽게 울던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이 너무 아팠다.
아마 저는 평생을 살아도 그녀의 눈물에 가슴 아파할 것이다.
정작 그녀를 울렸던 주제에 염치없게도 말이다.
테오도르는 이브와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감히 제가 끼어들 수 없는 우정이 있었다.
그것이 질투가 난다기보다는 걱정이 앞서는 걸 보니, 제가 조금 달라진 모양이다.
에른스트는 어떻게 되었을까…….
세상이 뒤흔들리기 전, 마지막으로 본 장면 속에서 에른스트가 자신의 심장에 다시 한번 검을 박아 넣었다.
그리고 곧바로 바닥에 쓰러졌다.
하얗게 탈색되었던 긴 머리카락이 조금씩 줄어들며, 테오도르가 기억하는 본래의 그의 머리 색으로 돌아왔었다.
눈을 감고 있었기에, 눈동자 색도 돌아왔는지는 보지 못했으나…….
아마 앞으로 그 눈꺼풀이 다시 뜨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욱신, 욱신-
[하지만, 에른스트는 네게도 가족이잖아.]
이브의 말마따나.
에른스트 같은 한심한 놈에게 어떤 애정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 애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에른스트는 그의 성력으로 만들어 냈던 그 황금빛 검으로 죽었다.
평소에는 잘만 사용하던 그 성력이, 이상하게 그 순간만큼은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그건 아마도 그 애의 심장에 머물러 있던 테네브리스의 영혼이 엉겨 붙은 탓이리라.
마지막에 흘러나와 주변을 덮던 그 검은 기운, 그것은 분명 소멸 앞에서 발악하던 테네브리스의 영혼이었다.
어찌 되었든 에른스트, 그 눈물 많고 한심한 이복동생을 제 손으로 죽인 거나 마찬가지이다.
한심한 건 에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었다.
“쓰레기도 참, 이런 쓰레기가 없군.”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향해 자조했다.
“이브를 울리기나 하고…….”
어쩌면 저는 이브를 울리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놈인지도 모른다.
‘에른스트 대신 내가 없어졌으면, 이브는 울지 않았을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니, 짙은 자괴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내가 없는 게 이브에게 더 행복한 일 아닐까?’
그것은 그녀의 무의식에서부터 계속 생각하던 것이었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급작스러운 일들에 휘말려 깊게 생각할 틈이 없었지만…….
“젠장.”
갑자기 눈가가 홧홧해졌다.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눈가를 덮으며 흙바닥 위로 풀썩 드러누웠다.
손바닥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렇게 우는 건 한심하고 찌질하지만, 뭐 어때. 이브가 보는 것도 아닌데.’
테오도르가 그렇게 합리화를 하며 소리 없이 얼굴을 적시던 때였다.
“테네브리스, 왜 울고 있어?”
불쑥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그러나 저는 테네브리스가 아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목소리를 무시하며 계속 울었다.
“테네브리스?”
달콤한 목소리는 꼭 제가 좋아하는 이브의 것과 닮았다.
저 목소리가 ‘테오’ 하고 제 이름을 불러 준다면 참 좋을 텐데.
“테네브리스!”
따뜻한 감촉이 그의 손에 닿았다.
가늘고 길쭉한 감촉은 분명 여자의 손인데, 군데군데 굳은살이 느껴졌다.
꼭 이브의 손처럼…….
홱-
두 눈 위로 찰싹 달라붙어 있던 테오도르의 손바닥이 타의에 의해 떼어졌다.
그 순간 시야에 한 여자가 들어왔다.
“어……?”
테오도르의 눈이 놀라 커졌다.
“이브……?”
햇살에 반짝 빛나는 은색의 머리카락.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처음 본 순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겼지?’ 하고 그를 놀라게 하였던 어여쁜 얼굴.
그 얼굴이 저를 걱정스레 쳐다보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여자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갔다.
그의 시선이 자꾸만 여자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브다.
이브를 제가 분간해 내지 못할 리 없었다.
분명 이브였다.
그런데 여자는 이브가 아닌 것처럼 행동했다.
일단 이브라면 제게 보일 리 없는 저 상냥한 미소와 따뜻한 목소리가 그러했고…….
무엇보다 저를 ‘테네브리스’라고 그 재수 없는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도 그녀를 다른 이름으로 불렀다.
체르니시아.
그녀의 가문이자, 동시에 고대 4대 사도 중 하나였던 땅의 인도자의 이름.
“체르니시아 님!”
“테네브리스 님도 함께 계셨군요.”
사람들이 입고 있는 복색이 조금 달랐다.
테오도르는 이런 복색을 역사서에서 본 적이 있었다.
저건 고대의 사도들이 살아가던 시절의 의복이었다.
<고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네 명의 사도가 있었다.
레오브란테(빛), 테네브리스(어둠), 페르디난트(하늘), 그리고 체르니시아(땅).
그들은 신의 경지에 오른 영웅으로서, 브리힘 신의 뜻에 따라 인간들을 보호하며 찬양받았다.>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성물에 대해 조사하면서 오래된 문헌에서 찾은 내용을 떠올렸다.
‘고대의 사도…….’
분명 세상이 뒤흔들리기 직전, 바닥에 떨어져 있던 검은 거울이 반응했다.
‘그럼 또 시공을 넘어온 건가?’
이미 그 거울을 통해 몇 차례 시공을 건너 오딜리아와 마주친 적이 있었지만.
‘어쩌면 시간을 넘어서…… 고대 사도들의 시대까지…….’
테오도르는 이브와 닮은 여자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물론 그가 그 거울을 찾았던 건 시간을 되돌리기 위함이긴 했다.
시간을 돌려서, 죽은 이브를 다시 살리려고…….
이후로 그녀가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잠시 신경을 끄긴 했지만.
아무튼 이렇게 먼 과거까지 올 생각은 없었다.
“왜 그래, 테네브리스?”
여자가 얼빠진 표정을 짓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었다.
테오도르는 여자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나의 체르니시아.]
[보고 싶었어. 줄곧.]
테네브리스는 이브를 그렇게 불렀다.
체르니시아, 라고.
처음에는 모두를 죽일 듯 공격적이던 테네브리스는 돌연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태도를 변화하였다.
“테네브리스? 너 오늘 이상해. 어디 아픈 거야?”
여자가 테오도르의 이마에 손을 댔다.
그 순간 찌릿, 하는 전율이 일었다.
이건, 이브를 볼 때면 느끼는 그 두근거리고 설레는 감정이었다.
“아까 울던 것도 그렇고…….”
“테네브리스 님! 체르니시아 님!”
이때, 사람 하나가 그들에게 뛰어왔다.
“무슨 일이지?”
“아, 아이가…… 아이가 강물에 빠졌는데……! 마, 마물이 있어서……!”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여자가 강물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도 얼결에 함께 뛰었다.
여자가 달리며 머리카락을 한 갈래로 올려 묶었다.
그 바람에 드러난 하이얀 목덜미에 시선을 빼앗겼다.
강가에 도착하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물에 빠진 아이가 허우적거리고 있었으나, 강 하류에 도사리고 있는 커다란 마물 때문에 사람들은 그저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흐르는 물살에 아이의 몸이 점차 아래로 떠밀려 갔다.
“테네브리스, 아이를 부탁해!”
여자는 곧바로 검을 뽑아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테오도르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강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러고는 여자가 마물을 상대하는 사이, 아이를 구해 밖으로 꺼냈다.
사람들이 몰려와 우는 아이에게 따뜻한 담요를 덮어 주었다.
“오, 에릭……! 괜찮니?”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테네브리스 님!”
사람들이 그에게 연신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멍청하니 굳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 탓이다.
붉은 눈동자…….
얼굴의 생김새는 분명 제 것이었는데, 투명한 수면 위에 비친 한 쌍의 눈동자는 루비처럼 붉었다.
‘이게 어떻게…….’
그 와중에 풍기는 차가운 분위기가 미묘하게 ‘그자’를 닮아 있었다.
에른스트의 몸속에서 깨어났던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를.
“테네브리스?”
어느덧 마물을 해치우고 사람들과 짧은 대화를 마친 여자가 그에게로 다가와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왜 가호를 사용하지 않고 직접 물에 들어간 거야?”
“……?”
“몸 쓰는 거, 귀찮다고 싫어하잖아.”
“가호, 라니……?”
성력을 말하는 것인가,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찰나.
“아이참, 정말 오늘 왜 그래, 테네브리스. 네가 부리는 어둠 말이야.”
“…….”
테오도르는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옷이 다 젖어 버렸…….”
“체르니.”
이때, 다정한 목소리 한 자락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레오!”
여자가 활짝 웃으며 남자를 돌아보았다.
테오도르는 여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곳엔 태양을 닮은 황금색 머리카락, 금색 눈동자를 지닌 미형의 남자가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왠지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빛의 길잡이 레오브란테.’
테오도르는 자신의 외가를 잠깐 떠올렸다.
“레오, 이것 봐. 테네브리스가 오늘 조금 이상해.”
“저런, 테네브리스가 꼼짝없이 젖어 버렸네. 무슨 일이야, 이게.”
남자는 상냥한 태도로 여자의 말을 들어 주었다.
여자는 그런 남자를 향해 재잘재잘 이야기했다.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응시하던 중, 문득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
순간 테오도르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저를 보는 남자의 눈에서 미묘한 적대감이 느껴진 탓이다.
‘뭐야.’
테오도르도 남자를 똑같이 노려보았다.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다.
이내 남자가 피식 웃더니, 여자의 귓가에 무언가 속닥속닥 말을 건넸다.
순간 여자가 얼굴을 화끈 붉히며 테오도르를 돌아봤다.
“레오랑 잠시 다녀올 데가 있으니 기다리지 마.”
그리고 두 사람이 자리를 비웠다.
기다리지 말라고 했으나, 달리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따분하게 여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시간이 한참 지나도 여자는 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젖은 옷이 모두 마를 때까지도.
‘뭘 하느라 돌아오지 않는 거지?’
테오도르는 조금 짜증이 나서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향해 걸었다.
그러다 멀리서 두 사람을 발견하고 멈추어 섰다.
남자가 여자에게 꽃을 선물하며 그녀의 환심을 사려는 게 보였다.
‘저 자식이…….’
불쑥 치솟은 불쾌감에 두 사람을 방해하고자 할 때였다.
“어…….”
나직한 탄성이 그의 잇새로 새 나왔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고 있었다.
가슴이 싸하게 내려앉았다.
‘아니야. 저 여자는 이브가 아니야. 이브가 아니잖아.’
테오도르는 애써 부정했다.
‘여긴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온 과거고, 그리고 저 여자는 이브가 아니라…….’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저 여자는 이브였다.
이브를 제가 몰라볼 리가 없었다.
‘이브……. 이브야. 틀림없는 이브야.’
인정한 순간 확신이 크기를 부풀렸다.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는 저 눈앞의 여자는 이브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과거에도 이브가 이보네라는 것을 알았으면서, 그 본능적인 직감을 무시하였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이브가…….’
테오도르는 입 안의 여린 살을 피가 나도록 꾸욱 베어 물었다.
느릿하게 입술을 떼어 낸 두 남녀가 서로를 지그시 응시하더니, 이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반달 모양으로 휜 여자의 눈매가 가슴이 아릴 만큼 예뻤다.
남자가 느리게 손을 뻗어 여자의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여자는 남자의 손에 자신의 머리를 맡기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무어라 떠들고 있었다.
오래전…… 이브가 제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브가, 저 남자를…… 좋아해.’
슬쩍 까치발을 들어 올린 여자가 애정을 담뿍 담아 남자의 입가에 장난스럽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다시 멀어지려는 여자의 머리통을 남자가 부드럽게 붙잡아 당겼다.
긴긴 입맞춤이 이어졌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꼬옥 맞물린 두 사람을 보며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브가 제 앞에서 다른 남자와 입을 맞추고 있었다.
비록 저를 모르는 옛 시간대의 그녀이지만…… 그럼에도 가슴이 시리게 아파 왔다.
* * *
얼마 지나지 않아, 테오도르는 몇 가지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곳은 고대 사도들의 시대이며, 제가 고대 4대 사도 중 하나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몸속에 들어왔다는 것.
원리는 알 수 없지만, 어찌 됐든.
그리고 마찬가지로 4대 사도 중 하나인 체르니시아가 이브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
에른스트의 안에 있던 테네브리스 또한 그것을 뒤늦게 알아보아서, 마지막에 돌연 소멸되지 않고자 몸부림을 친 걸 테다.
‘흥, 멍청한 놈. 나는 한눈에 알아봤다고, 이브를.’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를 향해 무의미한 경쟁심을 불태웠다.
그러다 결국 저도, 테네브리스도 그녀의 사랑을 받지 못한 처지라는 걸 깨닫고 울적해졌다.
패자들끼리 경쟁심을 불태워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테오도르는 본래의 시간대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곳의 이브는…… 제가 아닌 다른 남자를 사랑했다.
물론, 본래의 시간대의 이브도 저를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그녀를 보는 게 못 견디게 괴로웠다.
한편으로 이곳은 아직 제가 그녀에게 저지른 잘못들이 일어나지 않은 고대의 시간대라, 그녀는 제게 한결같이 친절하고 상냥했다.
그러나 그것이 오직 친구에게 주는 친절에 그친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
테오도르는 나무 위에 앉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광활한 대지가 그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모두 이브의, 체르니시아의 힘이 뻗은 곳들이었다.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레오브란테로부터 그녀를 빼앗고 싶다는 못난 마음과 함께, 그녀가 관장하는 저 땅을 자신의 어둠으로 덮고 싶다는 욕망이 불쑥불쑥 일었다.
테오도르는 이것이 저의 욕망이 아니라 테네브리스의 욕망이라고 생각했다.
저는 착한 개새낀데, 그런 못된 생각을 할 리가 없잖은가.
그러니 이건 모두 그 개놈의 자식이 품고 있는 추악한 욕망이다.
‘그래, 이건 절대 내 의지가 아닌…….’
뚝-
나뭇가지 하나가 그의 손안에서 부러졌다.
저 아래, 그녀가 레오브란테와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하필이면 테오도르가 올라 있던 나무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다리를 베고 눕는 레오브란테의 모습에 테오도르가 눈에 쌍심지를 켰다.
저 날씬한 다리 위에 못생긴 머리통을 올리다니!
저러다가 이브가 다리에 쥐라도 나면 어떡하려고!
그렇지만 그 장면을 보고 분노를 불태우는 것은 오직 테오도르뿐인 듯했다.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두 사람의 주위로 새가 지저귀고, 나뭇잎이 살랑살랑 춤을 추고, 동물들이 깡충깡충 뛰어다녔다.
세상 만물이 그들의 결합을 축하해 주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저조해진 기분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그녀가 제 다리를 베고 누운 레오브란테의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부드럽게 헤집으며 책을 읽었다.
그 모습이 너무 다정해서 눈물이 났다.
“아얏.”
문득 그녀가 눈을 찡그렸다.
“왜 그래, 체르니?”
“눈에 뭐가 들어갔나 봐.”
“어디 봐 봐.”
몸을 일으켜 앉은 레오브란테가 그녀의 눈에 후, 하고 바람을 불어 주었다.
“아…….”
그녀는 몇 번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활짝 웃었다.
“이제 됐다!”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그런 어여쁜 미소였다.
그리고 그 감상은 그녀의 앞에 마주 선 남자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그녀를 보며 짧은 웃음을 터트린 레오브란테가 그녀의 눈가에 입을 쪽, 하고 맞추었다.
“……!”
순간 테오도르는 눈이 뒤집힐 것 같은 추악한 질투심에 휩싸였다.
쿠과과과과과과광!
저 멀리 산 하나가 날아갔다.
“어?”
두 사람이 놀라 그쪽을 돌아보았다.
“어둠이야…….”
“테네브리스의 기분이 또 안 좋나 보군.”
“요새 계속 그러네…….”
두 사람이 걱정스럽게 주고받는 목소리가 너무 잘 들려서 더 짜증이 났다.
“있지, 체르니. 우리 잠깐…….”
레오브란테가 그녀의 귓가에 뭔가 속닥거리더니, 두 사람은 또 자리를 옮겼다.
뻔하다.
근처에 제가 있는 것 같으니, 다른 곳에서 그 대단한 사랑을 나누려는 거겠지.
“…….”
테오도르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이곳에서 ‘어둠’이라 불리는 검은 기운이 그의 손안에서 맴돌고 있었다.
테오도르가 본래의 육체에서 사용하던 성력과는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느낌의 기운이었다.
이 힘의 양이 엄청나다는 것은 알겠으나, 섬세하게 다루는 게 조금 어려웠다.
아무래도 제가 지금 깃들어 있는 곳이 본래의 제 몸이 아니라 그런 듯했다.
“후…….”
테오도르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돌아갈 방도는 보이지도 않고…….”
그때 그렇게 시공이 뒤흔들린 이후로, 이브는 지금 어떻게 되었을까?
혹 저처럼 다른 시공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건 아닐까?
만약 그런 거라면 큰일이다.
저택에는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있었다.
부디 아이들이 너무 오래 기다리지 않도록, 그녀가 길을 잘 찾아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음?”
문득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그곳에는 푸른 머리카락을 지닌 하늘의 대리인, 페르디난트가 있었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테오도르는 제 안에서 증오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지긋지긋한 페르디난트.
이곳에서마저 저 이름을 들어야 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났다.
레오브란테고, 페르디난트고 다 꼴도 보기 싫었다.
불쾌감을 견디지 못한 테오도르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려던 때였다.
멈칫.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멈추어 두 눈을 찌푸렸다.
‘뭐야, 저 새끼.’
새로운 사실을 알아차린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나랑 똑같은 눈으로 이브를 보고 있잖아.’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벤야민 또한 항상 그런 눈으로 이브를 보았다.
그러다 결국엔 미쳐 버려서, 에르빈을 인질 삼아 이브를 속박하려 했었다.
“아냐, 에르빈은 지금쯤 체르니시아 저택에 안전하게 있을 거고…….”
애써 스스로를 안심시키려던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나직한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에르빈이 보고 싶었다.
살랑살랑 속눈썹을 흔들며 두 눈을 깜빡이던 그 사랑스러운 몸짓이 보고 싶었다.
오딜리아도 보고 싶었다.
배시시 웃으며 주변을 환해지게 하는 오딜리아의 맑은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리고 이브…….
자신을 기억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그 이브가 보고 싶었다.
이브와 같은 영혼을 지닌 그녀의 전생 같은 게 아니라, 저와 같은 시간을 공유하였던 그 이브를…….
제게 쓰레기라며 욕하던 그 차가운 모습마저도 너무 그리워서, 테오도르는 울음을 삼키기 위해 소리 없이 가쁜 숨만 내쉬었다.
이브가, 너무 보고 싶었다…….
* * *
얼마간의 시간이 흘렀을까.
테오도르가 깃들어 있던 육신의 머리카락이 상당히 길어졌을 무렵.
테오도르는, 어쩌면 제가 벌을 받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브의 그 어여쁜 눈동자에서 눈물을 흘리게 한 죄로, 더 이상 본래의 세계로 돌아갈 수 없는 징벌을.
그녀와 같은 얼굴과 그녀와 같은 영혼으로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그녀를, 쓸쓸하고 초라하게 지켜봐야 하는 징벌을.
저와의 옛 기억들을 하나도 갖고 있지 않는 이브의 앞에서, 차마 우리에게 그러한 시간들이 있었노라고 말하지 못하고 홀로 괴로워해야 하는 징벌을.
매일 밤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다시 이브가 있는 세계로 돌아가길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의 바람은 매일 아침 무참히 깨지고 조각나 시간의 흐름 속에 너덜너덜해져 갔다.
어쩌면 영영 이루어지지 않을 바람인지도 모른다.
이브를 영영…… 다시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아니야. 방법이 있을 거야.’
테오도르가 애써 그런 불길한 생각을 떨치던 때였다.
“헉, 헉! 테네브리스 님! 큰일, 큰일 났습니다!”
사색이 되어 그를 찾아온 어린 소년의 외양을 한 마물의 이름은 제리코였다.
제리코는 몸을 부들부들 떨며 외쳤다.
“마물들이, 마물들이 미쳐 날뛰고 있습니다!”
“뭐……?”
마물들은 두 부류로 나뉘었다.
제리코처럼 생각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상급의 마물들과, 욕구에 따라서만 움직이는 하급 마물들.
상급 마물은 인간과 마찬가지로 평범하게 다른 개체들과 조화를 이루며 어울려 살아가며 하급 마물들을 지배했다.
인간들 또한 그들을 적으로 분류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일부 하급 마물들이 통제에서 벗어날 때가 있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도들이 마물들을 해치워 인간들을 보호했다.
그런데 제리코는 지금 그 하급 마물들뿐만 아니라 일부 상급 마물들까지 미쳐 날뛰고 있다고 전하고 있었다.
“대체 왜……?”
“페,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그자가……!”
제리코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그자가 마물들에게 이상한 짓을 했습니다!”
“그자가 왜……?”
떨떠름하게 대꾸하던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문득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제가 이브의 옆에 찰싹 붙어 있는 레오브란테를 보고 온갖 부정적인 감정에 휩싸여 있을 때.
저와 같은 생각을 하는 자의 눈으로 그를 쳐다보던 페르디난트.
“젠장.”
테오도르는 곧바로 제리코와 함께 움직였다.
그리고 레오브란테가 위험에 처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위, 위험합니다, 테네브리스 님!”
기절한 레오브란테를 덮치고 있는 것은 상급 마물 중에서도 가장 악명 높은 마물이었다.
마물은 두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채로 입을 쩌억 벌리고 있었다.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당장, 멈춰.”
테오도르가 스산한 목소리로 위협했으나, 이지를 잃은 마물은 어떤 대화도 통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먹히기 직전의 상태인 레오브란테를 보았다.
처음 본 순간부터 저자가 마음에 안 들었다.
[어리석긴.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난 그 남자를 죽여서라도 내 사랑을 쟁취할 거야.]
한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여겼다.
솔직히 말하자면 테오도르는 지금도, 저자가 없어지길 바랐다.
“젠장. 이 빌어먹을. 처음부터 저 새끼가 마음에 안 들었어.”
테오도르는 거친 욕설을 짓씹으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레오브란테가 죽으면 그녀가 울 것이다.
기실 이곳의 그녀, 체르니시아는 이브와 같은 영혼을 지녔지만 이브와 온전히 같은 존재는 아니었다.
이브와 다른 성장 환경, 이브와 다른 기억을 갖고 있는 존재.
그렇지만 그럼에도 이브의 한 부분이기도 한 존재.
체르니시아가 운다 하여도, 제가 기억하는 시간대의 이브는 그 슬픔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테오도르는 이브의 한 부분인 그녀가 우는 게 싫었다.
언제나 이브를 울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테오도르는, 그녀가 우는 것을 막기 위해 몸을 내던졌다.
테오도르가 지닌 어둠이 레오브란테의 몸을 붙잡아 멀리 피신시켰다.
그리고 그것에 집중해 있는 사이.
끼에에에에엑-!
마물이 포효하며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윽…….”
급히 어둠을 펼쳤으나, 마물은 자신의 몸이 부서지는 것에도 굴하지 않고 달려들었다.
“크윽…….”
끼에에에에에에엑-!
이윽고, 테오도르의 어둠이 마물을 소멸시켰다.
“하…….”
털썩.
무릎이 바닥에 꺾였다.
너덜너덜해진 몸이 볼품없이 쓰러졌다.
“아프잖아…….”
육신을 덮친 고통이 그의 영혼에까지 전해졌다.
차라리 지금 당장 숨이 끊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정도로 아프고 괴로웠다.
“짜증 나, 흐윽…….”
테오도르는 숨을 헐떡이며 자문했다.
이 육신 안에서 죽으면, 내 영혼은 어떻게 되는 거지?
다시 이브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이제껏 느껴 본 적 없는 공포가 그를 덮쳤다.
이브도, 에르빈도, 오딜리아도…….
제가 사랑하는 모든 이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된다는 거니까.
“윽, 흑…….”
그렇게 생각하니 슬퍼서 감정이 북받쳐 올랐다.
하지만 이브는…… 이브라면 내가 없어도 괜찮을 거야.
아니, 어쩌면 내가 없어서 더 좋아할지도 몰라.
나는 늘 그녀를 화나게 하고 울게 만드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차피 어려서, 조금 더 자라면 나를 기억하지 못할 거고.
[에르랑 리아두 데려가.]
[리아가 아조씨 지켜 두리께요. 웅?]
[에르가 아조씨 아야 하몬 다 치료해 주께. 우웅?]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보았던 것은, 그녀의 정신 속에서 나온 직후 체르니시아 저택에서였다.
꽤 많은 시간이 지난 것 같았으나 여전히 선명하기만 한 아이들의 목소리를 떠올리자, 흐릿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그러고 보니 아직 이브에게 에르빈이 성력을 발현시킨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해 주지 못했다.
에르빈의 성력은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제 것과 달리 따뜻하고 사랑스러웠다.
아이가 제게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자 상처가 사라지던 게 생각이 났다.
저는 이브의 손목에 남은 그 작은 상처 하나를 치유해 주고자 긴 세월 연마하였는데, 에르빈은 그토록 쉽게 해냈다.
어쩌면 작은 상처를 없애는 데에 그치지 않고, 아이의 말마따나 아픈 것을 모두 없애는 경지에 이를지도 모른다.
게다가 검기까지 동시에 발현하였으니, 분명 자라 저보다 훨씬 더 뛰어난 어른이 될 것이다.
그리고 오딜리아……. 이브를 그대로 복사해 낸 듯한 사랑스러운 오딜리아.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 그 애의 머리카락이 까맣게 물들어 있던 게 생각이 났다.
기실 그것은 검게 물든 것이 아니라 본연의 색을 찾은 거지만…….
오딜리아가 울지 않고 제 검은 머리를 당당하게 드러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제가 사라지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브가 오딜리아의 검은 머리를 감춘 건 어쩌면…… 저 때문일 테니까.
제가 사라진 세상에서 이브가 오딜리아를 향해 ‘네 머리는 밤하늘처럼 예뻐, 리아.’ 하고 속삭여 주는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아이는 분명 정말이냐 물으며 기뻐할 것이다.
그럼 이브는 상냥하게 두 눈을 휘며 그 검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춰 주겠지.
그 아름다울 모습을 생각하자,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희미한 미소가 테오도르의 입가에 피어났다.
쿨럭.
입술을 타고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테오도르는 제 몸이 서서히 죽어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어른이 된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아이들에게 아버지로 인정받지 못해도 괜찮으니, 영원히 그들과 가족이라는 울타리로 묶이지 못해도 괜찮으니…….
에르와 리아가 자라는 모습을 보고 싶은데…….
이미 저는 틀렸다.
그 모습을 영원히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이브는 이제까지도 혼자서 아이들을 잘 키워 왔으니까…….’
시야가 뿌예졌다.
‘앞으로도 잘 키우겠지.’
에르빈, 오딜리아, 그리고…… 이브.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만이 흐릿한 시야 위로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들이 저의 빈자리 같은 것을 느낄 틈은 없을 것이다. 왜냐면…….
욱신-
가슴이 저몄다.
일전에 그녀의 저택 앞에서 완곡한 축객령에 돌아서야 했을 때 보았던 광경이 떠오른 탓이다.
[삼쫀 쪼아! 삼쫀 집에 가지 말구 리아랑 살아요. 웅?]
[에르도! 에르도 높이 올려 줘!]
까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
그 틈에 어우러진 에르빈과 오딜리아, 그리고 이브와 에른스트.
[애들이 응석받이가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뭐, 못 질 것도 없지.]
떨어진 거리에서 그들을 보며, 그때 이미 한 번 느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의 틈에 제 자리는 없다고.
“울고 있네. 죽지도 않고.”
문득 듣기 싫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두 눈에 힘을 부릅 주었다.
그러자 흐릿한 시야 너머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르디난트가 보였다.
“너…… 왜 이런 짓을…….”
“어라? 아직 말을 할 수 있잖아?”
페르디난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손끝에서 피워 낸 푸른 마기로 테오도르를 공격했다.
쿨럭-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검붉은 피를 토해 냈다.
“짜증 나게.”
그가 짜증스럽게 혀를 차며 중얼거렸다.
“레오브란테, 체르니를 뺏어 간 그 새끼를 죽이려 했는데 네가 모두 망쳤어.”
‘이, 미친…….’
테오도르가 그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자 하였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네가 망쳤으니, 네가 책임지는 걸로 하자.”
‘무슨, 짓을……’
페르디난트가 빙긋 웃는 게 보였다.
차츰 몸에 힘이 빠져 갔다.
눈앞이 가물가물해졌다.
테오도르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툭, 투둑-
테오도르는 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뜨거운 기운에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제가 누군가의 무릎 위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고, 그리고 그 무릎의 주인은 저를 내려다보고…….
‘어…….’
이브가, 체르니시아가 울고 있었다.
“정말이야, 테네브리스? 네가, 네가 마물들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위협한 거야?”
소리 내어 서럽게 엉엉 울고 있었다.
“왜 그랬어? 왜, 왜 그런 짓을…….”
원망하는 걸까.
그래, 그런 걸지도 모른다.
저 때문에 그 남자가 다쳤다고 생각할 테니까.
조금 더 빨랐어야 했는데.
결국, 또 그녀를 울리고 말았다.
“네 영혼을 조각낼 거래. 일곱 갈래로 갈기갈기 찢어 조각낼 거래.”
테오도르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가엾은 테네브리스. 이제 너의 영혼은 죽지도 못해.”
아니, 손을 뻗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나는 싫어. 네가 영원한 안식을 얻지 못하고 조각난 채 세상을 부유하는 걸 두고 볼 수 없어.”
그의 몸은 조금 전부터 조금도 움직이지 못했다, 힘겹게 깜빡이는 눈꺼풀 외에는.
“그래서 너의 ‘진짜’ 영혼을 분리해 낼 거야. 그들이 조각내지 못하게.”
그녀가 젖은 얼굴로 결연하게 말했다.
‘무슨…….’
그 순간 기이한 느낌과 함께 테오도르는 자신이 깃들어 있던 테네브리스의 몸에서 분리되었다.
“사람들은 너를 ‘여덟 번째’라 부르겠지만.”
“……!”
“네가 진짜 조각이야.”
체르니시아는 테네브리스의 몸을 끌어안고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육신을 갖지 못한 영혼 상태의 테오도르를.
“네 육신에 남은 건 사념뿐이니까, 조각난 사념은 절대 너를 이기지 못해.”
‘그게 무슨 소리야?’
테오도르가 입을 벙긋거렸으나, 그의 목소리는 알 수 없는 벽에 부딪혀 나오질 않았다.
당황하여 그녀를 향해 손을 뻗던 그는, 제 손이 그녀의 몸을 투과한 것을 보고 뒤늦게 깨달았다.
제가 있는 차원과 그녀가 머무는 차원은 서로 다른 흐름 속에 있다고.
“잠에 들자. 긴긴 잠에 드는 거야.”
‘잠깐만, 이브! 이브……!’
체르니시아는 사념만이 남았다는 테네브리스의 육신을 가만히 어루만졌다.
“테네브리스…….”
그 남은 사념마저도 애틋하다는 듯이.
“괜찮아. 외롭지 않을 거야. 네가 혼자 깨어나지 않도록, 나도…….”
‘그게 무슨 소리야! 너도, 너도 뭘 어쩌겠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흐릿하게 잦아든 탓에, 뒷말이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이 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브……!’
그녀가 마지막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러니까 나를 꼭 알아봐야 해.”
‘……!’
순간 아득한 감정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처음 보았던 순간을 여전히 기억한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손님들을 처리하느라 기분이 썩 좋지 않았던 평범한 오후였다.
황후궁 후원에서, 한 여자아이를 만났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한순간 숲의 요정이 아닐까, 착각할 정도로 예뻤던 여자아이.
그 얼굴을 본 순간 ‘쿵!’ 하고 일던 가슴의 설렘…….
우연히 만난 그 여자아이를 필연적으로 사랑하게 되었다.
테오도르는 그게 꼭, 운명 같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야 새삼 의문이 든다.
어쩌면 나는, 이브를 사랑하기 위해 태어난 건 아닐까.
무수한 시공을 건너 그녀를 찾아, 그녀를 다시 사랑하기 위해.
그걸 위해 태어난 게 아닐까.
……이후 도착한 사람들이 테네브리스의 사념만 남은 영혼을 조각내었다.
사념만 남은 영혼은 일곱 갈래로 조각이 나고, 그 사이사이 바스러진 영혼의 부스러기가 세상을 부유했다.
저 먼지처럼 하찮게 바스러진 영혼의 부스러기는, 이제는 악으로 규정될 흑마법의 산물에 깃들 것이리라.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자신의 조각이 나뉘어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내 여덟 번째 조각에게 자아를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할 줄은 몰랐지.]
실은 테네브리스가 여덟 번째를 언급하던 때에, 대강 눈치를 챘었다.
차츰 흐릿하게 되살아나는 육신의 기억이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저는 테네브리스의 육신에 들어와 그 몸을 차지한 게 아니었다.
시공을 건너 과거 자신의 몸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그러니까 진짜 테네브리스의 영혼은 바로 자신이었다.
에른스트라는 ‘그릇’을 빌려 그 안에 깃들어 있던 것은 일곱 갈래로 나뉘어 세상 속에 흩어졌던 고대의 사념이었고…….
그걸 눈치채고 있었음에도, 그 사념이 과거 자신의 조각임을 알고 있었음에도 없애야 한다는 생각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러지 않으면…… 결국 그 사특한 마음이 이브를, 에르빈을, 오딜리아를, 이브가 사랑하는 세상을 모두 파괴할 테니까.
“이브가…….”
테오도르는 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해 울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브가, 보고 싶어…….”
그러나 차원의 벽에 부딪힌 목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했다.
후덥지근한 여름날의 공기 속 찌르르르 울리던 풀벌레 소리가 아스라이 흩어져 갔다.
그 푸릇푸릇한 여름을 배경으로 새근새근 잠들어 있던 어린 그녀의 잔상도.
기분이 좋을 때면 까르르 터져 나오던 사랑스러운 웃음소리도.
……모두 함께 흩어졌다.
그러고 나면 종내에 남는 것은 외딴 차원 속에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저 자신이었다.
* * *
차라리 보지 못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된 거야, 체르니?”
언제나 그녀를 향해 다정하게 웃던 남자가 두 눈이 시뻘게져서 따졌다.
“분명 테네브리스의 육신에 남은 건 사념뿐인 영혼이었어!”
테오도르는 차원 너머에 갇힌 채로 체르니시아와 레오브란테의 갈등을 보았다.
“솔직하게 말해. 네가 빼돌린 거 아냐?”
“그렇다면?”
체르니시아는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녀가 본래 저렇게…… 저렇게 상대를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쳐다보며 화를 내는 사람이었나.
“왜……? 아직도 그놈을 좋아하는 거야? 너도 들었잖아, 그놈이 나를 제거하려고……!”
“이제 충분하잖아!”
그녀가 레오브란테의 말을 끊어 내며 소리쳤다.
“테네브리스의 생명을 빌미로 이어진 관계를, 이제 어떻게 이어 가겠다고?”
협박으로 유지한 관계.
두 사람의 관계는 거짓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거대한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그래서, 너는 그동안 한 번도 나를 정말로 사랑한 적이 없었다는 거야?”
“응, 한 번도. 내가 정말 좋아하는 게 누구였는지, 너는 알잖아. 그래서 자꾸만 그 애를 의식해 왔던 거잖아?”
레오브란테는 빛이었고, 테네브리스는 어둠이었다.
어둠은 4대 사도 중 가장 강하다고 알려진 힘이었으나…….
어둠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빛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은 혹시 생길지 모르는 어둠의 폭주를 막기 위한 브리힘 신의 안배였다.
그러니 레오브란테는 테네브리스의 숨통을 쥐고 있는 목줄이자, 유일한 통제자였다.
그 사실을 가장 먼저 알아차린 레오브란테는 그것을 빌미 삼아 체르니시아를 협박하여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니까 제 앞에서 보이던 다정한 모습들마저…… 모두 거짓되고 연출된 것들이었다.
그녀는 테네브리스를, 저를 위해 그 관계를 감내해야 했다.
테오도르는 기억이 시작되는 어린 때부터 자신의 외가가 싫었다.
어미의 가문임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
레오브란테.
그 이름에 거부감이 있었던 건, 어쩌면 이 때문이 아닐까.
한때 온 세상에 위명을 떨치던 사도들 또한 세월이 흘러가며 소멸했다.
가장 먼저 사라진 것은 땅이었고, 그 뒤를 하늘과 빛이 따랐다.
그러나 정작 가장 먼저 세상을 등졌던 땅의 인도자는 소멸이 아닌 순환을 선택했다.
애석하게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한 빛의 길잡이와 하늘의 대리인은 소멸을 통해 안식을 얻었지만.
그렇게 브리힘 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보호하였던 사도들이 모두 떠났다.
다만 사도들이 사라진 세상에는 그들을 기리는 이들이 남았다.
테오도르는 기나긴 흐름 속에서 세상이 변해 가는 것을 외롭게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사도가 떠난 땅에 제국을 세웠다.
고대 알브레히트 황가였다.
“테오도르?”
흠칫.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그리운 목소리였다.
결코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사무치게 사랑하여, 홀로 떨어진 차원 속에서 고독에 질식해 가면서도 오래오래 그리던 목소리였다.
“이브……!”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돌아보자, 그곳에 이브가 있었다.
이브와 같은 영혼을 지녔으나 그녀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지 못하는 그 여자가 아니라.
제가 아는 이브.
제가 기억하는 이브.
언제나 곧고, 선하고, 단단한.
동시에 여리고, 사랑스러워 지켜 주고 싶은.
그래서 자랑스럽고, 이따금씩은 눈물겨운.
제가 사랑하는…… 그 이브였다.
“이브!”
테오도르는 이브를 향해 달려갔다.
그녀와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벅차 왔다.
정말 이브였다.
진짜 이브였다.
멈칫.
반갑게 달려가던 테오도르는 돌연 멈춰 서며 눈치를 살폈다.
당장 달려가 저 품에 안기고 싶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젠장. 몇 번을 생각해도…… 이브가 나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무뎌지지 않아.’
가슴이 시큰시큰 아팠다.
테오도르가 울컥거리는 마음을 삼키며 그녀의 앞에서 절절매고 있을 때.
이브가 먼저 질문을 건네 왔다.
“어떻게 된 거야? 여긴 어디지?”
“아, 여긴…… 고대 알브레히트 황가야.”
“고대?”
그녀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게 번져 나갔다.
“저기 봐 봐. 사람들이 황금 궁전을 짓고 있잖아.”
테오도르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이브의 눈동자가 둥글게 커졌다.
그들이 살던 시대에는 고대의 유적으로 남아 있는 바로 그 황금 궁전을, 고대의 복식을 한 사람들이 짓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조금 전?”
테오도르가 퍼뜩 그녀의 말을 잘라 내며 물었다.
“그래,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네 알현실에서 테네브리스에게 맞서고 있었잖아.”
“잠깐, 이브. 그럼, 그럼 너는 조금 전에 이곳에 도착했다는 거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브가 눈살을 슬쩍 찌푸렸다.
그러더니 이내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조금 전에 테네브리스가 소멸되던 순간 땅의 흔들림을 느꼈어. 그리고 그 소동에 휩쓸려서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눈을 떠 보니 이곳이었고.”
“…….”
“낯선 공간에서 아무도 보이지 않아 당황하던 차에 네가 눈에 띈 거야.”
“아…….”
테오도르의 입술 사이로 나직한 탄식이 터져 나왔다.
‘이브는…… 조금 전에 이곳에 온 거구나.’
시간의 흐름이 뒤틀리며 두 사람 모두 고대로 오게 되었으나, 그 지점이 조금 차이가 난 것이다.
‘다행이야.’
테오도르의 입가에 피시식 힘없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브가 나처럼 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외롭게 혼자 있지 않고, 곧장 나와 마주쳐서 정말 다행이야.’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고대 사도들이 다스리던 세상에서 눈을 떠 이브를 만나기까지, 외딴곳에 홀로 떨어진 그는 너무나 외롭고 쓸쓸하였다.
수십,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누구도 그를 알지 못하는 곳에서 외로이 버텨야 했다.
그리운 이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작은 기약 하나 없이.
저와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이가 단 하나도 없다는 사실이 그처럼 괴로울 줄은 몰랐다.
이브가 그 깊은 고독을 겪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미 여러 번 그녀를 외롭고 쓸쓸하게 만들었는데, 또 그녀가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을 막지 못했더라면 그 무력함에 죽고 싶어졌을 것이다.
“왜 그런 표정이야?”
이브가 수상쩍다는 듯 물었다.
“으, 응……?”
“너, 나한테 뭐 잘못했어?”
“내 표정……?”
테오도르는 자신의 얼굴을 더듬었다.
물론 잘못이야 그간 셀 수 없이 많이 하긴 했는데…….
그 사실을 상기하자, 테오도르는 또다시 울컥해졌다.
“꼭 무슨 잘못 저지른 표정인데…….”
유독 촉촉한 눈을 하고서 눈가를 발그스름 붉힌 테오도르를 보며 이브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보다 우리가 어쩌다 고대에 오게 된 거지? 테네브리스는 확실히 소멸한 게 맞아? 그리고 에른스트는…….”
에른스트의 이름을 언급하는 이브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녀가 부러 나쁜 가정을 피하고자 애써 에른스트의 죽음을 외면하는 중이라는 것을.
테오도르는 양 주먹을 꾸욱 말아 쥐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그 거울 때문인 것 같아.”
“거울……?”
“아, 그게…… 테네브리스의 성물인데…….”
“네가 모으고 있었다는?”
이브가 알은체를 했다.
“어…… 으응……. 알고 있었어……?”
그녀가 자신의 소문에 대해 알고 있었다는 사실에 테오도르가 조금 감동을 받으려는 찰나.
“네가 카타리나의 실종으로 미쳐서 그걸 모은다는 소문은 들었지.”
“뭐? 누구?”
순간 테오도르는 당황하여 물었다.
“카타리나 말이야.”
“무, 무슨 소리야! 내가 왜 그 여자 때문에……!”
버럭 목소리를 높이는 테오도르를, 이브는 뻔뻔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왜 그런 소문이 돌았을지, 정말 이유를 몰라서 그래?”
“…….”
그녀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죄인이 되고 말았다.
황제의 괴팍한 성정을 두려워한 주변 이들이 누구도 소문을 전달해 주지 못했으나, 어째서 그런 소문이 돈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카타리나와 부러 요란한 애정 행각을 보였던 것은, 그녀와의 거래 때문이었다.
당시에는 이보네의 흔적을 찾기 위함이라는 제 나름의 명분으로 인한 행동이었으나…….
도리어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를 주게 되었을 뿐이다.
게다가 그 여자의 실종으로 인해 제가 미쳐 버렸다는, 그런 허튼 소문까지 나도는데도 알지 못하고 바로잡지 못하다니.
이브가 떠난 직후에는 그녀가 죽었다는 생각에 무엇도 깊게 생각지 못했다.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할 정도로, 미쳐 있었으니까.
그저 시간을 돌려 그녀를 살려 내겠다는 집념뿐이었으니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저는 그냥 쓰레기가 아니라 무지하고 무능하기까지 한 최악의 쓰레기다.
그런 저를 이브가 싫어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미안해…….”
테오도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듯 사과했다.
“돌아가면 다시 바로잡을…….”
“그걸 왜 나한테 사과해?”
이브는 사과를 받아 주는 대신,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누구와 무슨 스캔들이 나든, 나랑은 상관없잖아.”
“아…….”
“바로잡든 말든 그건 네 일이니 굳이 신경 쓰지 않겠는데, 혹시나 덧붙이자면 괜히 나를 끌어들이진 마.”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묻기도 전에, 그녀가 곧바로 덧붙였다.
“그러니까, 사실 네가 좋아하는 건 카타리나가 아니라 나였다느니, 뭐 그딴 소문으로 나까지 피곤하게 만들지 말란 소리야.”
“…….”
“이제 와서 그런 식으로 소문이 나 봤자 불쾌하기만 할 것 같거든.”
“…….”
테오도르의 입이 꾹 다물렸다.
이브가 하는 말들이 모두 맞는 말이었다.
때문에 테오도르는 무엇도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속상했다.
‘이브는…… 왜 이렇게 말도 잘하는 거지…….’
이브는 잘하는 게 참 많은데, 심지어 말까지 잘한다.
그녀가 하는 말들은 언제나 구구절절하게 옳은 말들이다.
“그런데 정말로 그 여자 때문에 모은 거 아니야.”
테오도르는 소심하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변명하듯 말했다.
“뭐, 그러겠지.”
이브는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대체 그런 건 왜 모은 거야?”
“시간을…….”
테오도르는 부디 제가 미친놈처럼 느껴지지 않기를…….
아니, 이미 그녀는 저를 미친놈이라 여기고 있었지만…….
그래도 조금만 덜 미친 강아지로 보기를 바라며 간신히 입을 뗐다.
“시간을 돌리려고 했어.”
“뭐?”
예상치 못한 그 답변에 이브가 당혹스러워 두 눈을 끔뻑였다.
가늘게 좁혀 뜬 두 눈이 그가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가늠하고자 했다.
“고대 사도들의 힘을 모으면 가능하다고 해서…….”
“시간을 돌려서 뭘 하려고?”
“그게, 너를…… 너를 알아보지 못한 그 새끼를 죽이고…… 너의 죽음을 막고…… 너한테 사과하려고…….”
“…….”
어렵게 꺼낸 고백에 이브가 정말로 자신을 미친놈 보듯 쳐다봤다.
아주 작게 입술이 달싹였는데, 그 입 모양이 꼭 ‘미친놈……’ 하고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슬퍼졌다.
솔직하게 말했는데도 그녀가 저를 미친놈처럼 보았다.
‘그렇다고 이브에게 거짓말을 할 수도 없잖아…….’
그래도 거짓말쟁이보다는 솔직한 미친놈이 조금이나마 덜 미움받지 않을까, 하고 애써 스스로를 위로했다.
“아무튼 그 거울이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
테오도르는 자신이 몇 차례 거울을 통해 시공을 이동해서 오딜리아와 만난 것과, 마지막에 테네브리스의 검은 기운이 거울에 닿았던 것을 설명했다.
“그럼 우리가 과거로 온 건가…….”
이브는 나직이 중얼거리며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어떻게 돌아가지?”
“나도 잘 모르겠…….”
이때였다.
테오도르의 주머니에서 무언가가 툭, 하고 떨어졌다.
거울이었다, 테네브리스의.
‘뭐야, 이게 왜 여기 있어?’
테오도르는 당황해 하며 그것을 주워 들었다.
“이게 그 거울이야?”
“응, 그렇지만 사용법은……. 어?”
그리고 거울 위의 검은 유리판에 자신의 얼굴을 비춘 순간.
테오도르는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그 거울을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고대의 알브레히트가 멸망하고, 수많은 나라가 새로이 등장했다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길 반복했다.
놀란 이브는 테오도르의 팔을 붙잡은 채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녀의 두 눈이 조금 떨리고 있었으나, 그녀는 꼿꼿하게 선 채로 수많은 역사가 흘러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테오도르!”
그러다 이브가 문득 외쳤다.
테오도르는 그들이 현 알브레히트 제국이 세워진 시기에 도착한 것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의 복색이 저희가 기억하는 것과 비슷했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시간의 속도를 줄였다.
그리고 발견했다.
헤르멜린다 황후, 테오도르의 친모이기도 한 여자를.
테오도르는 신기한 듯 여자를 쳐다보았다.
기억에 없는 어머니였다.
자신을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어머니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던 것은, 어릴 적 보았던 초상화 덕이었다.
테오도르가 여자에게서 눈을 못 떼고 있자, 이브가 물었다.
“아는 사람이야?”
“어…… 내 어머니…….”
그의 답에 이브는 짤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헤르멜린다 황후는 부푼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동화책을 읽어 주고 있었다.
“그래서 용맹한 드래곤은…… 쿨럭, 쿨럭.”
헤르멜린다는 동화를 읽다 말고 잔기침을 했다.
“젠장. 레오브란테에서는 아직 소식이 없는 거야?”
그녀는 우아하게 읽던 동화책을 집어치우고는, 사나운 목소리로 시녀에게 물었다.
“죄,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
시녀는 절절매며 답했다.
“그 망할 늙은이. 사람 하나 보내서 성력 좀 써 주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헤르멜린다는 험악한 욕설을 내뱉었다.
테오도르의 안 좋은 인성은 그녀를 닮은 것 같았다.
얼마 뒤 의사가 찾아왔다.
“아직 신성력을 나눠 줄 사람은 못 찾은 겁니까?”
그녀의 오래된 지병은 의학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했다.
아주 강한 신성력을 지닌 자들 중에서는 그 힘을 운용해 병을 낫게 하기도 했다.
하여 황제가 나서서 신전에 친히 부탁하기까지 했으나, 누구도 그녀에게 신성력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
레오브란테의 압박이 있었기 때문이다.
“황후 폐하, 감히 아뢰옵건대, 아기님을 포기하시는 게…….”
순간 헤르멜린다가 두 눈을 무섭게 희번덕거리며 의사를 위협했다.
“한 번만 더 네 입에서 포기라는 말이 나오면, 그때는 네 목숨을 포기하고 싶다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흐억……! 죄, 죄송합니다, 폐하.”
헤르멜린다의 고집에 의사는 결국 두 손 두 발을 들고 말았다.
결국, 헤르멜린다는 테오도르를 낳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아직 어미의 죽음을 알지 못하는 어린 황자만이 빈 황후궁에 남아 울음을 터뜨렸다.
“…….”
테오도르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장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이브는 그런 테오도르를 힐끔 쳐다보더니,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아…….”
순간 테오도르가 당황하여 탄성을 터뜨렸다.
“이브, 왜…….”
“말했잖아. 나는 너랑 다르다고.”
이브는 테오도르를 돌아보지 않고 정면만 묵묵히 응시한 채로 대답했다.
“위로가 필요한 사람을 그냥 지나치는 거 못해.”
“아, 이브…….”
“감동받지 마. 네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어도 똑같이 행동했을 거니까.”
“응, 응.”
테오도르는 두 뺨 위로 홍조를 띤 채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이브는 그의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는 것을 알았지만, 모른 척해 주었다.
시간이 조금 더 지났다.
테오도르는 걷고 뛰고 말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그는 황제로부터 선물받은 커다란 드래곤 인형을 들고서 황궁을 뛰어다녔다.
“아이고, 황자 전하. 조금만 천천히……!”
“어쩔 수 없어. 나는 뚜래고니까. 뚜래고가 천천히 나는 거 봤어?”
“하지만 지금 전하는 나는 게 아니라 달리고 있는 거잖아요?”
“너, 두래고 부레쓰를 맞고 싶은 건가?”
어린 테오도르는 짐짓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드래곤 흉내를 냈다.
테오도르는 조금 창피해져서 이브의 눈치를 살폈다.
그 장면을 쳐다보는 이브의 표정은 조금 심각했다.
“말도 안 돼……. 닮았을 리가…….”
그녀가 자그맣게 혼잣말로 중얼거렸으나, 테오도르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가 그녀와 맞잡은 손을 힐긋 쳐다보았다.
두근, 두근-
가슴이 뛰었다.
저를 잡은 그녀의 손은 참 단단했다.
어렸을 적에 저를 잡아 주던 그 손이었다.
검을 잡은 탓에 굳은살이 박여 조금은 거칠고, 그렇지만 제 손에 쏘옥 들어서는 작고 귀여운 그 손이었다.
테오도르는 차마 제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줘도 되는지 알 수 없어서 그저 손에 힘을 뺀 채 약하게 떨고만 있었다.
손에 점점 땀이 차는 것 같았다.
‘이브가 불쾌하다고 손을 떼 버리면 어떡하지.’
그는 아주 조금씩, 그녀가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미하게 성력을 개방하여 땀을 식혀 맞잡은 손에 쾌적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했다.
가슴이 뜨겁게 술렁거리던 때였다.
“아.”
이브가 손에 힘을 불끈 쥐며 탄성을 터뜨렸다.
그녀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어느덧 시간이 또 많이 흘러 있었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루돌프와 작당하여 에른스트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이 펼쳐지는 중이었다.
“젠장, 에른스트를…….”
마르가라테 황후의 배는 아직 임신한 태도 나지 않을 만큼 납작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배 속에 든 작은 생명을 제물로 바치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테오도르의 손을 놓은 이브가 당장 검을 들고 뛰어나갈 태세를 취할 적이었다.
“안 돼, 이브!”
테오도르가 그녀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가 화들짝 놀라며 조심스럽게 놓았다.
“왜 안 되는데?”
이브는 그가 제 손을 잡은 것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어째서 안 되는지를 물었다.
“이쪽이랑 저쪽은 차원이 막혀 있어서 접근하기 힘들기도 하고…….”
“네가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찾은 건, 과거를 바꾸기 위해서라며. 아주 방법이 없는 건 아닐 거 아냐.”
“그렇긴 한데…….”
테오도르는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지 잠시 망설였다.
그러다 이내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과거를 건드리면 미래가 어떻게 바뀔지 몰라. 그러니까…… 잘못 건드렸다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그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는데도, 이브는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테오도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알아채 버린 탓이다.
그들이 건드리게 될 과거는 어떤 방식으로든 미래에 영향을 줄 것이다.
그리고 미래가 바뀌게 되면…… 아직 태어나지 않은 생명들의 운명이 뒤틀릴 것이다.
어쩌면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없는 미래가 펼쳐질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니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반복하고 싶지 않은 괴로운 과거가 이렇게나 많은데도 불구하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가정만큼 괴로운 것은 없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행복이었으니까.
“…….”
이브가 망연자실 서 있는 사이,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황궁에 찾아온 어린 이브가 에른스트와 함께 황후궁 후원을 뛰놀았다.
그리고 어느 여름날.
커다란 나무 위에서, 이브는 테오도르와 만났다.
“아……! 이브! 너랑 내가……!”
이에 감격한 테오도르가 잠시 주제를 잊고 반색할 때였다.
“내 머리 위에 저런 시체 같은 사람들을 숨겨 두고 있던 거야?”
이브가 질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 아니, 저 사람들이 아까 나를 죽이려고…….”
테오도르는 조금 억울한 목소리로 항변하였으나, 이브는 그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뿐이었다.
어린 테오도르와 어린 이브의 사이좋던 순간들이 지나갔다.
테오도르는 그 장면을 다시 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기뻤는데, 이브는 그저 무표정하였다.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느라, 테오도르는 저 그리운 장면들을 보고도 기쁜 내색을 감히 할 수 없었다.
그러다가 체르니시아가 몰락하는 순간이 닥칠 적에,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린 이브가 불타는 체르니시아 저택 앞에서 울부짖고 있었다.
“…….”
테오도르는 이브의 눈치를 힐끔 보다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자 그녀가 두 눈을 찌푸리며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마치 ‘뭐냐?’ 하고 묻는 듯한 표정에 테오도르는 재빨리 그 손을 놓았다.
“아, 미, 미안. 실수로…….”
사실은 저도 그녀를 위로해 주고 싶었던 건데…….
왜 저는 위로에도 소질이 없어서…….
‘아니지. 소질이 아니라 자격이 없는 거지.’
테오도르는 곧바로 생각을 정정했다.
마르가라테 황후의 사람들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잘랐다.
잘린 머리카락을 쳐다보는 그 허망한 표정은 테오도르에게도 낯설지 않은 것이었다.
그녀가 언제 또 저러한 표정을 지었는지 기억한다.
테오도르는 제게 그녀를 위로할 자격이 없음을 다시 한번 여실히 깨달았다.
저는 왜 그런 자격을 박탈당해서, 그녀에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에마저 아무것도 못 하고 무능하기만 할까.
테오도르가 자책하는 동안에도 시간은 빠른 속도로 흘러갔다.
그러다가 그들이 다시 재회했다.
“나는 종종 그대 생각을 하거든. 예쁜 걸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페르디난트의 망령은 모두 지워 냈으니, 이제 너를 사랑해도 될까? 너도 나를 사랑해 줄래?”
“사랑해, 이브.”
테오도르는 끝없이 달콤한 사랑의 밀어들을 속삭였다.
그랬던 그가 한순간의 낙마로 기억을 잃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녀를 알아보지 못했다.
“아르민, 네가 대답해. 이건 뭐지?”
“당장, 꺼져.”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채, 그녀의 목덜미에 검을 들이밀며 위협했다.
심지어는 부러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 하하 호호 웃으며 놀기까지 했다.
그녀가 저를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 그녀에게 보이기 위해 자행한 일들이었다.
“……나를 상처 주려고, 일부러 그랬던 거네.”
“이브, 난…….”
“차라리 네가 그냥 여자를 밝히는 난봉꾼이었으면, 기분이 덜 나빴을까?”
“…….”
테오도르는 무엇도 답할 수 없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돌았으나,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는 과거의 테오도르는 끝없이 그녀를 향해 모진 말들을 내뱉었다.
내내 그 장면을 묵묵히 쳐다보던 이브가 느리게 입을 뗐다.
“테오, 난 네가 싫어.”
“이브……?”
갑작스러운 그녀의 선언에 테오도르가 그녀를 돌아봤다.
“네가 정말 싫어.”
하나도 상처받지 않은 듯 담담한 목소리와 달리, 그녀의 얼굴은 상처받은 이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너는 내게 사랑을 알려 주고, 또 가장 비참한 여자로 만들었어.”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다른 여자와 살갑게 팔짱을 끼고 걸어가는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그녀가 있었다.
저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는…… 누구보다 테오도르 자신이 잘 알았다.
그녀는 모르는 고대 사도들의 시간 속에서, 매일같이 그녀가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으니까.
심장을 도려내고 싶을 정도로 끔찍하였던 그 고통을, 제가 그녀에게 주었다.
“너랑 있으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초라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아니야, 이브.
너는 초라하지 않아.
너는 누구보다 빛나는 사람이야.
꺼내지 못한 소리가 목구멍 안쪽에서 소란스럽게 맴돌았다.
“난 더 이상 네 앞에서 초라해지고 싶지 않아.”
순간 테오도르는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보았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나는 더 이상 네 앞에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무의식 속 그녀가 제게 건네었던 슬프게 젖은 그 한마디가 눈앞의 그녀가 제게 건네는 이 담담한 한마디와 겹쳐 들렸다.
이브는 제게 있어 태양처럼 빛나는 존재였다.
그런 그녀가 제 앞에만 있으면 초라해진다고 한다.
그녀를 초라하게 만드는 이가 바로 자신이라고 한다.
그런 그녀의 말이…… 테오도르는 너무나 슬펐다.
그러나 저 과거 속의 미련한 테오도르는, 테오도르의 슬픔을 알아주지 않았다.
이 와중에도 끊임없이 저의 잘못이 재현되고 있었다.
“페르디난트가의 혼담, 받아들이지.”
테오도르는 과거의 제가 꺼낸 말에 참담하게 가라앉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그녀가 상처받는 것을 과거에도 모르지 않았다.
다만, 알고 있었으면서도…….
끊임없이 그녀에게 향하려는 제 마음을 무시하였다.
부러 더 그녀를 맹렬히 의심하였다.
그 와중 저로 인해 상처받는 그녀의 모습에 저를 향한 그녀의 마음을 확인하며 미미한 포만감마저 느꼈다.
참, 역겹게도 말이다.
“첫눈에 반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군. 내 시간이 둘로 나뉘는 것 같아. 카타리나를 알기 전의 시간과 알고 난 후의 시간.”
저딴 소리나 지껄이며 은근슬쩍 그녀의 반응을 살피기까지 했다.
테오도르는 다소 창백해진 안색으로 이브를 돌아보았다.
“이브, 저건…….”
부디 그녀가 알아주길 바랐다.
카타리나와 저는 정말로 오직 각자의 이득을 위한 거래뿐인 관계였다는 걸.
“저기, 저길 봐. 다정한 흉내를 내고 있지만, 실은…….”
“응, 내 눈에도 보이는 것 같아. 네가 저 여자랑 입 맞추는 척만 하고 있는 거.”
이브는 내리는 눈을 맞으며 입 맞추는 시늉을 하고 있는 테오도르와 카타리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이브…….”
테오도르는 그녀가 오해를 풀어 주는 걸까, 하고 내심 기대하는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그러나…….
“그런데 그런다고 해서 내가 받은 상처가 없어지는 건 아니잖아.”
이브는 무심한 어조로 대꾸했다.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 받아들이고 용서하는 건 못 하겠어.”
“…….”
테오도르는 침울하게 표정을 가라앉혔다.
이 순간 눈물이 나려는 건,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해 슬퍼하는 게 아니었다.
물론 그 또한 슬프지만, 그보다는…….
그녀는 일견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테오도르는 이미 그녀의 무의식 속에서 울던 그녀를 보았다.
그녀가 저로 인해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얼마나 아파했는지 알고 있었다.
지금도 저 장면을 보고 있을 그녀가, 마냥 아무렇지 않지 않을 것이란 것을 알아서.
그래서 테오도르는 가슴이 에일 듯 아팠다.
조금 전만 해도, 제가 싫다고 선언할 적에 그녀는 아픈 표정을 채 숨기지 못하고 드러냈지 않았나.
“테오, 내가 당신의 약혼녀로서 이브 경을 징벌해도 될까요?”
들려오는 카타리나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러도록 해.”
저 미친놈이……!
“감사해요, 테오.”
카타리나는 까르르 웃으며 테오도르의 뺨에 입 맞추는 시늉을 했다.
부러 그녀가 보일 각도에서 그런 연출을 한 것은, 모두 저 망할 여자의 계획된 짓거리일 터다.
그리고 테오도르가 나간 뒤.
“아……!”
카타리나의 일방적인 폭력이 이어졌다.
테오도르는 차마 그것을 지켜볼 수 없어 두 눈을 꾸욱 내리감았다.
다른 사람의 입으로 전해 들은 것과 제 눈으로 직접 본 것 사이의 그 크나큰 격차가 그의 심장을 아프게 쥐어짰다.
“이브, 미안해…….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
테오도르는 꼭 우는 사람의 것처럼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중얼거렸다.
“…….”
이브는 답하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팔짱을 끼고서, 흘러가는 시간을 감상할 뿐이었다.
이후 폭언을 쏟아 내는 자신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그만 두 귀를 잘라 내고만 싶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실행으로 옮기지 못할 바람이었고, 테오도르는 고스란히 저의 과오를 들어야 했다.
“팔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아니야.
“내가 내 주변에서 꺼지라고 했는데, 꺼지지 않고 맴돈 건 너잖아?”
그만해.
“여자인 걸 숨기고서 내 옆을 맴돌았던 게, 이런 걸 바란 것이었나?”
제발 좀 닥쳐.
“황제의 정부라도 되고 싶었나 보지? 주제에 감히 황후 자리를 바란 것은 아닐 테고.”
그만하라고!
“하지만 어떡하지. 네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까워서.”
제발……!
“더럽고, 추악해.”
제바알……!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시간은 아주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있었는데, 이상하게도 제가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장면들만이 가슴에 콕콕 날아와 날카롭게 박히었다.
“이, 이브…….”
“…….”
“내가…….”
“…….”
사과를 해야 했다.
물론 그녀는 저를 용서할 수 없다 하였지만, 그럼에도 사과를 해야 했다.
그러나 저 찢어 죽일 과거의 자신은, 그녀에게 사과를 할 아주 작은 틈새마저 주지 않았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그 말에 바깥으로 뛰어나간 그녀가 커다란 나무 앞에서 헛구역질을 했다.
오래전 그녀와 저의 추억이 담겨 있던 약속의 나무였다.
테오도르, 저 미친 새끼.
이브에게 저딴 짓거리를 저질러 놓고서, 주제도 모르고 그녀의 앞에 다시 얼굴을 내비쳤다.
버리지 말아 달라며 울고 매달렸다.
어떻게 그렇게 염치없고 뻔뻔할 수가 있었지?
기억을 잃은 과거의 제 자신만 개새끼인 줄 알았는데, 기억을 되찾은 후의 자신 또한 별다를 바가 없었다.
이러니…… 그녀도 저를 볼 때면 불쾌해하는 거지.
어느덧 그녀가 저를 떠나던 그 전날 밤이 닥쳤다.
격렬하게 입을 맞추는 저와 그녀의 모습에, 내내 심드렁한 표정을 고수하던 이브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얼굴을 굳혔다.
“이브……?”
테오도르는 그녀가 왜 그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혹 저와 입을 맞추는 장면이 역겨워서 그런 걸까…….
그래, 그런 건지도 모른다…….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이때,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를 쫑긋하게 했다.
‘어……?’
이다음에 저는 분명히…….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과거의 테오도르가 웃으며 답했다.
“……!”
순간 테오도르의 두 눈이 화들짝 커졌다.
“아니, 잠깐, 나는…….”
테오도르는 다급히 이브를 돌아보았다.
자신의 말이 그렇게 들릴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차린 것이다.
“이브, 나는…… 나는 절대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라…….”
테오도르는 허겁지겁 이브의 소매를 붙잡고 변명했다.
“그런 게, 그런 게 아니야. 내가 널, 네 아이를…… 내가, 내가 에르와 리아에게 그런 말을 할 리가…….”
횡설수설하는 테오도르를, 이브는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로 그런 뜻이 아니라, 나는, 너를, 널, 널, 너를…….”
“테오도르.”
그녀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테오도르의 말을 끊어 냈다.
“나는, 너를 잘 모르겠어.”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너를 세상에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는데, 기억을 잃은 너는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었어.”
“…….”
“너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잔인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고, 실제로도 내게 잔인했고…….”
그녀가 제 감정을 먼저 이야기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테오도르는 아주 작은 숨소리 하나 새 나오지 않도록 두 입을 꾹 다문 채로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나는 네가 정말로 내 아기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
이제까지 테오도르는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찼기에, 그녀가 제 곁을 떠난 이유를 깊게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다만 막연히 생각했다.
이브는 제가 싫어서 떠난 거라고.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한 제게 지쳐서, 실망해서, 화가 나서, 그래서 떠난 거라고.
그러나 아니었다.
그녀는 지키기 위해 떠난 것이다.
저로부터, 아기를 지키기 위해.
제가, 아기를 해치지 못하게.
욱신-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얼굴이 눈앞을 스쳐 갔다.
그녀가 건넨 말들이 고스란히 제게 상처가 되었으나, 테오도르는 감히 제가 상처를 받을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았다.
“저 땐, 너한테서 내 아기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 네 기억이 돌아오는 걸 기다리려고 했었는데, 변해 버린 너보다는 내 아기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거든.”
“이브, 난…….”
“비록 변질된 추억이지만, 한때 너를 사랑하고 네게 사랑받았던 그 시간들의 결실이니까.”
간신히 다시 입을 뗐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곧바로 이어진 탓에 테오도르는 다시 입을 닫아야 했다.
“비록 너는 이렇게 변해 버렸지만, 변하지 않을 것처럼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다는 증명이기도 했으니까.”
이브는…… 비록 저를 미워하고 있었지만.
저로 인해 저만큼이나 상처받고 아파했지만.
“그 아기는, 내가 기억 속 사랑했던 남자와의 아기니까.”
그럼에도 자신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동시에 완벽하게 구분 짓고 있었다.
“내가 사랑했던 남자는 네 기억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 사랑의 흔적이 내게 찾아온 거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과, 기억을 잃고 난 후의 자신을.
“그런데, 저게 오해였다니.”
이브는 피식- 하고 헛헛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한 게 모두 자신의 업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를 따라 헛웃음을 흘릴 수조차 없었다.
“……거둔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브의 표정이 경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감정에 취한 테오도르는 그녀의 두려움을 알아보지 못한 채 바보같이 웃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는 해도 되는 행동과 하면 안 되는 행동이 있어요.”
“나한텐 그런 거 없어. 그러니까 괜한 걱정 집어치우고…….”
심지어 그는 뿌듯해하는 중이었다.
테오도르는 누구보다 저 새끼의 심정을 잘 알 수 있었다.
왜냐면 저건 과거의 자신이니까…….
이브를 경악하게 만든 주제에, 거둔다는 그 말을 나름 고백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녀가, 그 말에 설렐 것이라 생각하며.
“……저 미친 새끼.”
테오도르는 과거의 자신을 보며 욕을 짓씹었다.
퍽!
이브가 베개에 검기를 실어 테오도르를 기절시켰다.
그리고 재빠르게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돌연 허리춤의 검집을 뽑아 들고 기절한 자신을 향해 달려들었다.
“테오도르?”
“저 미친 새끼, 머리통을 부숴 버려야 해!”
“뭐, 뭐?”
이브가 당황하여 그를 붙잡으려 했으나, 테오도르가 그에게 달려들어 두들겨 패는 게 더 빨랐다.
“뭐 하는 거야?”
“어떻게……!”
테오도르가 왈칵 울음기가 묻어난 목소리로 이브에게 물었다.
“어떻게 그렇게 착하게 솜 베개로 머리를 때리고 갈 수가 있어?”
“그거 나름 검기를 실어서…….”
“나는 이 새끼가 이렇게 숨 쉬고 살아가는 꼴을 못 보겠어.”
테오도르는 손에 든 검집으로 자신의 뒤통수를 깨부술 기세로 내리쳤다.
당연하게도,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였기에 그의 구타는 효력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퍽!
둔탁한 소리가 났다.
기절한 테오도르의 뒤통수에서.
“…….”
“…….”
테오도르와 이브는 베개 위에 점점이 흩뿌려진 핏방울을 쳐다보았다.
“미쳤어? 피가 나잖아!”
먼저 외친 것은 이브였다.
“……저 새끼가 맞을 짓을 했잖아.”
그러나 테오도르는 씨근덕거리며 아주 꼴좋다는 듯 기절한 자신을 향해 코웃음을 쳤다.
“네가 너무 착한 거야. 가슴에 칼을 꽂아 버렸어야지.”
“…….”
그러자 이브가 두 눈을 가늘게 뜨고서 테오도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래, 알겠어. 앞으로는 네가 나를 화나게 하면 칼부터 뽑을게.”
“아니, 나를 죽이라는 건 아니고…… 저 새끼를…….”
“저게 너잖아?”
“…….”
내내 씩씩거리던 테오도르가 그 말에 멈칫했다.
“너랑 분리해서 생각하지 마.”
“……미안해, 이브.”
그는 다시금 침울해져서 어깨를 축 내려뜨렸다.
이후, 이브가 떠난 뒤 미쳐 버린 테오도르의 모습이 펼쳐졌다.
내내 미친 것 같았지만, 이때야말로 그는 정말 미친 자의 꼴을 하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혹시나 이브가 저 모습을 보고 자신에게 정이 더 떨어질까 봐 전전긍긍했다.
다행히도 이브는 이미 그가 미친놈이라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그로 인해 정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았으나…….
다만, 그녀는 잠잠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 광경을 보며 중얼거렸다.
“참 말도 안 돼.”
“이브……?”
“네가 날 저렇게 사랑했고, 나도 널 정말 사랑했고, 우리가 정말 많이 서로를 사랑했는데.”
이브가 천천히 시선을 돌려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작은 오해로 인해 이렇게 틀어져야 했다는 게…….”
그리고 그에게 물었다.
“너는 저렇게 나를 사랑했으면서 왜 내게 그렇게 상처를 주었던 거야?”
“아…….”
그녀의 표정을 본 순간 테오도르는 입술을 작게 벌리며 앓는 듯한 신음을 흘렸다.
이브의 얼굴 위로 슬픔의 빛깔이 떠올라 있었다.
이브가…… 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너랑 지내면서 참 예쁘고 반짝거리고 좋은 순간들이 많았는데, 그게 모두 아픈 기억으로 변질되었다는 게…….”
“…….”
“더 이상 너와 사랑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웃을 수 없다는 게…… 나는 참 이해가 안 가.”
이브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녀의 의문이 테오도르의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왜 나는 그녀를 그렇게 상처 주었던 걸까.
테오도르 또한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동시에 슬펐다.
그녀가 저와의 과거를 여전히 아름다운 것으로 기억하고 있고, 또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시절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그러니까 이 모든 게 저의 잘못으로 비롯되었다는 사실이…….
“미안해, 이브…….”
“…….”
그 사과에 이브가 테오도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내가 정말 미안해…….”
테오도르의 얼굴을 담던 녹색 눈동자가 조금씩 뜨겁게 젖어 가는가 싶더니.
주르륵-
고운 뺨을 타고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
테오도르는 충격받은 얼굴로 그녀의 눈물을 보았다.
무의식에서 그렇게 서럽게 울면서도, 제 앞에서는 한순간도 울지 않던 그녀가 아닌가.
에른스트의 희생을 막지 못했던 그때를 제외하곤.
그런 그녀가…… 눈물을…….
다른 이도 아니고 저 때문에…….
“이, 이브…….”
“아.”
이브는 화급히 손등으로 자신의 눈가를 닦아 냈다.
그녀 자신도 스스로가 울 줄은 몰랐던지, 당황한 기색이었다.
“미안, 내가 미안, 정말 미안…… 미안해, 이브. 내가, 윽, 으흐윽…….”
결국 테오도르는 그녀의 앞에서 울면 안 된다는 다짐을 어기고, 울어 버리고 말았다.
후드득, 후득-
뜨겁게 달아오른 눈가를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그의 얼굴을 적셨다.
그녀가 제게 울 자격도 없다고 했는데, 감히 그녀의 앞에서 울어서는 안 되는데.
그런데 터져 나온 울음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브, 내가, 내가 앞으로 잘할 테니까…….”
서럽게 우는 테오도르를, 이브는 슬픈 눈으로 쳐다보았다.
“안 돼.”
그러더니 이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정말로 사랑했다는 걸 알겠어. 그렇지만, 그래도 너랑 나는 이제 안 돼.”
아주 작은 틈새 하나 없는, 그런 단단하고 두꺼운 벽과 같은 목소리였다.
“이미 신뢰가 깨어졌잖아.”
신뢰.
그 단단한 목소리가 이제는 두 사람 사이에 더 이상 믿음이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널 믿을 수 있겠어? 네가 또다시 기억을 잃으면?”
“아, 아니야. 다시는 절대…….”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 바람에 또다시 후드득- 하고 눈물이 터졌다.
그렇지만 이브는 아주 작은 흔들림도 없는 곧은 시선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또 그런 일이 반복되면, 이제는 상처받는 게 나뿐만이 아닐 거야.”
이제는 더 이상 둘만의 관계가 아니었다.
그들의 사이에는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있었다.
“너를 믿었다가 네가 또 변하면, 그때는 에르랑 리아도 같이 상처받을 거야. 그리고 나는 그거 절대 못 참아.”
차라리 저 혼자였더라면, 그 불안을 감수하고 다시 한번 그의 마음을 받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의 말마따나, 또다시 기억을 잃고 제게 미친 짓을 해 버리면 그때는 정말 가슴에 칼이라도 꽂아 버릴 각오로.
눈앞에 펼쳐진 과거의 시간들 속에서, 그가 저를 정말로 많이 사랑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게 누군가의 악의가 빚어낸 안타까운 사고에서 시작된 일이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다.
아주 작은 억울함마저 피어났다.
그가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벤야민의 악의가 그에게 닿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런 아픈 과거는 없었을 텐데.
혼자 속상해서 훌쩍이는 일도 없었을 텐데.
외롭게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일도 없었을 텐데.
에르와 리아에게도 조금 더 안정적인 가정을 만들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만, 그것은 모두 소용없는 가정일 뿐이었다.
시작은 타인의 악의였지만, 결국 제게 상처를 준 이는 테오도르였다.
중간에 어떤 이간질과 오해가 있었다 한들, 제게 직접적인 상처를 준 것은 모두 그의 말과 행동이었다.
“네가 나한테 그랬던 것처럼 에르랑 리아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겠어?”
“이브, 나는…… 나는…….”
그녀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절망스러운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제 자신이 이처럼 언변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테오도르는 처음 알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재고의 여지 없는 목소리로 제게 물었다.
네가 에르랑 리아에게 상처 주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내가 믿겠냐고.
아니야.
정말 아니야, 이브.
내가 어떻게…… 내가 어떻게 에르와 리아에게 그래.
정말, 정말 아니야…….
테오도르는 변명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이미 한 번 저지른 일들이 있었기에, 그 말이 어떤 변호도 되지 못할 것을 알았다.
이제는 무슨 말로도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내가, 내가 착해지면…….”
“네가 착해지는 것도 결국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뿐이잖아.”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는 그냥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네 기억이 없어지면서 함께 사라진 거라고 생각하려고.”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까지와 달리 따뜻하고 상냥했다.
마치 기억을 잃기 전의 그를 대하듯.
그래서 테오도르는 더 가슴이 아팠다.
차라리…… 차갑게 제게 쏘아붙였더라면…….
“낙마하면서 그 사고로 세상을 떴다고 생각하려고.”
그녀의 사랑은 이제 그녀의 안에서 죽은 사랑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해도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미안해, 이브. 내가, 내가 정말 미안해…….”
절망이 그를 덮쳤다.
“내가, 내가…….”
“그래, 용서할게.”
피식, 쓸쓸하게 웃으며 이브가 말했다.
“이브……?”
놀란 테오도르가 헐떡이던 숨을 가다듬는 찰나.
“그런데 사랑은 못 하겠어.”
그녀는 조금은 서글픈 목소리로 덧붙였다.
용서는 해도, 사랑은 할 수 없다고.
“나도 알아. 그런 사고가 일어난다는 게 얼마나 희박한 일인지.”
“…….”
“평생에 한 번 있기도 어려운 사고니까. 그래, 아마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
“…….”
“그런데 나는 여전히 무서워. 기억을 잃은 뒤에 네가 나한테 보였던 그 차가운 눈빛과 낯선 목소리가 쉽게 잊히지 않아.”
“…….”
“어쩌면 너를 볼 때마다 계속 그 순간을 다시 떠올릴지도 몰라.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사고를 걱정하며 내 감정을 불필요하게 소모하겠지.”
그녀의 말투는 꼭 상대를 설득하듯이 조곤조곤했다.
“그러니까, 우린 안 돼.”
테오도르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망연자실 그녀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울지 마.”
“미, 미안…….”
그녀의 말에 테오도르가 퍼뜩 사과하며 손등으로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이브가 그 모습을 잠잠히 응시하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서 그런 게 아니야.”
“어, 어……?”
“네가 우는 게 조금 속상해서 그래.”
“…….”
“너를 정말 많이 미워했는데, 평생 용서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
“나는 그게 조금 어려워.”
누군가를 평생토록 미워하고 저주한다는 게, 생각보다 더 많이 어려운 일이라는 걸 알았다.
그 누군가가 제게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알아서, 더욱 그러했다.
“미안…….”
테오도르는 울음을 참아 보고자, 아랫입술을 꾸욱 베어 물었다.
이브는 왜 이렇게 착하고 상냥한 거지.
저조차도 용서하기 힘든 제 자신을, 이렇게 용서하고…….
[그래, 용서할게. 그런데 사랑은 못 하겠어.]
조금 전 그녀의 목소리가 떠오르는 동시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가슴이 찢겼다.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할 수 없다는, 더 이상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게 이렇게나 고통스러웠다.
이미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재회한 이후로 쭉 알고 있었음에도, 날카로운 고통은 조금도 무뎌지지가 않았다.
그리고 그러한 사실을 느낄 때마다 함께 떠오르는 깨달음이 한 가지 있었다.
저를 사랑하지 않는 그녀를 보는 게 이렇게나 아프고 괴로운데…….
그녀는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자신을 보며 무뎌질 때까지, 얼마나 더 많이 아팠을까…….
그런 생각이 들 때면, 테오도르는 더더욱 마음이 아파 왔다.
차마 그녀의 앞에서 울 염치가 없다는 사실에, 애써 울음을 참고자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그럼에도 차마 막지 못하고 새어 나온 울음소리가 애처로이 흘러나왔다.
이브는 서럽게 우는 테오도르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테오도르 또한 벤야민과 카타리나에 의한 피해자라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는 저를 아프게 한 사람이라서.
난도질당한 저의 마음은 온전히 그를 받아들이기에는 너무나 너절하게 닳아 버린 탓에.
그래서 울고 있는 그를 달래 줄 수가 없었다.
“…….”
이브는 어깨를 들썩이는 테오도르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히끅, 히끅 울음소리가 간간이 들렸다가 조금씩 잦아들었다.
시간은 점점 더 지나 이브가 아르벨라에 자리 잡은 시기까지 흘러갔다.
‘그래도…… 이브가 힘들지 않게 생활해서 다행이야.’
테오도르는 빨개진 코를 훌쩍이며 그렇게 안심했다.
그러다 이브가 산통으로 괴로워하는 모습에는 눈물마저 쏙 들어가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이, 이브…….”
그녀가 아파하고 있었다.
“어, 어떡해, 네, 네가…….”
안절부절못하는 그에게 이브가 한마디 했다.
“테오도르, 정신 사나워.”
“미, 미안…….”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응애응애- 하는 귀여운 울음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아…….”
아기들을 품에 끌어안고 울음을 터뜨리는 이브의 모습에 테오도르가 짧은 탄성을 터뜨렸다.
“에르와 리아야…….”
테오도르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자신이 모르는 에르와 리아의 아기 시절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게. 에르와 리아야.”
이브 또한 부드러운 시선으로 그 광경을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가 벤야민을 불러 오딜리아의 머리 색을 숨겼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녀가 리아의 머리 색을 숨긴 이유가, 저를 닮은 검은 머리가 꼴 보기 싫었던 게 아니라…….
‘내 아이란 걸 들킬까 봐 그랬던 거구나.’
그녀는 제가 아기를 해칠까 봐 걱정하여 저를 떠났었으니까…….
미련한 제가, 그녀가 오해하도록 그런 말을 흘리는 바람에…….
[하찌만…… 하찌만……! 어몬니는 리아 머리카락 새까만 거 시러하신단 말야!]
그렇게 외치며 울먹이던 오딜리아가 생각이 났다.
“이브.”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리아가, 네가 자신의 검은 머리를 싫어한다고 생각해.”
“뭐……?”
“실은 지난번에 리아의 머리카락을 잘랐던 거…… 리아가 어머니가 알면 안 된다고 울어서…….”
이브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리아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덜컥, 마음이 안 좋아졌다.
처음 리아의 머리카락이 검게 물들었을 때, 너무 놀라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아이를 다그쳤던 게 생각이 났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리아는 저보다 더 많이 놀랐을 텐데…….
어른인 제가 놀라 하는 모습에, 아이는 얼마나 더 많이 놀랐을까…….
“내 실수야.”
이브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이들의 눈물 앞에서도 엄격하게 훈육하던 때가 종종 있었지만, 그러고 나면 늘 마음이 아파서 혼자 훌쩍일 때가 있었다.
그 작은 몸에서 눈물을 뽑아낼 데가 어디 있다고…….
아이들이 우는 것을 볼 때면 늘 마음이 아팠다.
“가서 달래 주면 되잖아.”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위로했다.
그렇지만 그 또한 마음이 좋지 않았다.
오딜리아가 그걸 감춰야 했던 건…… 저 때문이니까.
‘나 때문이야. 나 때문에 리아가 운 거야.’
결국 모든 죄는 다 저의 몫이었다.
‘이브가 슬퍼하는 것도, 리아가 운 것도…… 다 나 때문이야.’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용서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단 희망이 아주 작은 점처럼 작아져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나는 정말…… 개만도 못한 새끼야.’
그사이, 어느덧 시간의 끝에 다다랐다.
* * *
한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에게 잔뜩 토라져서 함정을 더 깊게 파는 중이었다.
“나쁜 아조씨!”
“아조씨 혼내 조야 해!”
“다랑지, 너도 함종 같이 만두러.”
에르빈과 오딜리아와 제리코는 셋이서 사이좋게 함정을 팠다.
더 많이, 더 깊게.
‘대체 이딴 허술한 함정에 누가 걸린다는 거지.’
제리코는 속으로 툴툴거리면서도, 열심히 몸을 움직여 밤송이들을 주워 왔다.
왜냐하면…….
‘그나저나 통로를 열 수 있었다니. 정말 보통 여자애가 아니었어.’
그의 시선이 오딜리아에게 닿았다.
작고 귀여운 외양과 달리, 굉장한 힘을 갖고 있었다.
괜히 심기를 거슬렀다가 꼬리가 세 개가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던 중, 오딜리아가 울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찌, 에르. 우리가 나뿌게 함종 파서 아조씨가 그냥 가 버린 거 아냐?”
“우, 웅……?”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던 에르빈이 그 말에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상했다.
처음 마주칠 때부터 저만 보면 멍청한 표정으로 두 뺨을 발그레 붉히던 테오도르가, 저의 애교에도 굴하지 않고 그냥 가 버렸다.
“구롬 어떡하지…….”
에르빈이 오딜리아를 따라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아조씨 이제 에르 안 죠아해…….”
아이들은 눈치가 빨라서 누가 자신을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기가 막히게 구분하곤 했다.
테오도르는 분명 저희를 좋아했다.
그런데 어쩌면 이제는 저희를 좋아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아조씨가 리아랑 에르가 나뿌게 함종 판 거 다 알아 버린 고야.”
아이들은 울적해져서 함정을 파던 것도 그만두고 땅바닥에 낙서를 했다.
그때였다.
저쪽에서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어어……?”
아이들은 화들짝 놀라며 나무 뒤에 몸을 숨겼다.
제리코도 아이들을 따라 함께 몸을 숨겼다.
“누구지? 지지 아조씬가?”
“쉿, 에르! 아조씨가 우리 목소리 들으면 어케!”
“합……!”
에르빈은 재빨리 양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그러고는 숨을 홉 참으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귀를 쫑긋 세웠다.
* * *
테오도르와 이보네는 시공의 끝에 다다라 ‘통로’에 들어섰다.
테네브리스의 기억과 동화된 이제는,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이 공간은 ‘통로’였다.
“통로를 지나면 원래 있던 차원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야.”
테오도르는 이브에게 설명했다.
묵묵히 그 설명을 들으며 걷던 이브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근데, 저건 뭐야?”
그녀의 손끝이 가리키는 곳에 이상한 것이 있었다.
“음……?”
지난번에는 없던 수상하고 어설픈 함정들이었다.
의아한 얼굴로 그것을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저 멀리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자그마한 인영들을 발견했다.
작은 아이 둘과 다람쥐 한 마리였다.
“구론데 리아, 아조씨가 함종 걸려서 아야 하면 어케?”
“아야 하고 울면 그때 나타나서 혼내 조야지. 왜 우리 오몬니 화나게 만드냐구.”
“아조씨가 아야 하고 안 울면 어케?”
자그맣게 속닥거리는 소리가 이곳까지 다 들렸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이 수상하고 어설픈 함정들은…….
‘나를 노리고 만든 건가?’
테오도르는 짐짓 심각한 표정이 되어 아이들이 만든 귀여운 함정을 쳐다보았다.
누구도 당하지 않을 만큼 야트막한 크기에 뾰족뾰족한 밤송이가 노골적으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여기저기서 따가운 밤송이와 나뭇가지를 주워 왔을 아이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함정이었다.
‘내가 함정에 걸리지 않으면…… 에르와 리아가 실망할 거야.’
테오도르는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설마 이거 에르랑 리아가…….”
“쉿.”
황당한 표정을 짓는 이브를 돌아보며, 테오도르가 제 입술 위로 손가락을 얹어 소리를 낮추라는 신호를 주었다.
“……?”
이에 이브가 의아해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는 부러 바스락거리는 발소리를 내었다.
저 나무 뒤에 숨어 있는 인영들이 바짝 굳으며 긴장하는 게 보였다.
테오도르의 입가에 미미한 미소가 어리었다.
그는 아이들이 만든 자그마한 함정을 힐긋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쪽 발을 들어 함정을 코옥 밟았다.
듬성듬성 덮여 있던 나뭇잎 아래로 발이 쑥 빠졌다.
“으윽…….”
괴로운 신음을 덧붙이는 것은 덤이었다.
“누가 이런 함정을…….”
테오도르는 함정 속에서 발을 휘휘 저으며, 더 많은 밤송이가 신발에 달라붙도록 하였다.
“어? 방금 지지 아조씨 소리 들려써!”
“아조씨 함종 걸린 거야?”
아이들은 나무 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어?”
아이들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어모니!”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어 팔짱을 끼고 그 광경을 지켜보는 이보네를 발견한 것이다.
“어모니이! 보고 싶었어요!”
“어몬니 갠차나요?”
“어모니 개물 다 죽였어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보네를 향해 오도도 뛰어왔다.
이보네가 아이들을 한 명씩 안아 주며 뺨에 입을 맞추었다.
“에르, 리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기쁜지, 그녀의 두 팔에 매달려 재잘재잘 떠들었다.
테오도르는 오른발에 밤송이가 붙은 채로 멀찍이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태어나 자라는 모습을 모두 지켜본 탓일까.
유독 더 가슴이 뭉클하고 애틋한 기분이 들었다.
“둘 다 여기서 뭘 하고 있었던 거야?”
“어모니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저씨를 괴롭히려고 무서운 함정을 파 둔 건 아니고?”
“녜, 녜……?”
순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뜨끔 놀란 표정을 지었다.
“구, 구게 아니라…….”
“에, 에르랑 리아는…….”
아이들은 ‘어모니가 그걸 어케 알았찌?’ 하는 표정으로 눈동자를 데룩데룩 굴렸다.
머뭇거리는 아이들을 향해 이브가 짐짓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사람을 괴롭히는 건 나쁜 짓이야.”
“아, 아조씨가 어몬니 화나게 만드러서…….”
“구래서 에르랑 리아는 어모니 복수 해 주려고…….”
더듬더듬 변명하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에르, 검을 배울 때 어머니와 약속했지? 체르니시아의 가호는 사람들을 돕는 데 사용하는 거라고.”
“자, 잘몬해써요, 어모니…….”
에르빈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에르를 데리고 온 건, 리아가 한 거니? 함정을 만든 거 리아의 생각인 것 같은데, 맞지?”
“리, 리아도 잘몬해써요, 어몬니…….”
오딜리아의 얼굴도 울상이 되었다.
“으힉, 자, 잘못했습니다…….”
오딜리아의 등에 매달려 있던 제리코도 덩달아 기가 죽었다.
“내가 아닌 아저씨에게 사과해야지.”
이브가 뒤편에 서 있는 테오도르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이들은 침울해진 얼굴로 테오도르에게 다가갔다.
“어……? 나, 난 괜찮아.”
테오도르가 재빨리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다.
“테오도르.”
그러자 이번에는 이브의 엄한 목소리가 그에게 향했다.
“잘못을 감싸 주는 건 교육에 전혀 도움이 안 돼.”
“아…….”
안타깝게도 자존감이 한없이 낮아진 테오도르의 귀에는 ‘도움이 안 돼’라는 말만 박혔다.
테오도르의 얼굴 또한 침울해졌다.
“잘몬해씀미다, 아조씨.”
“리아랑 에르가 잘몬해써요.”
“밤송이 때문에 아푸지요? 리아가 밤송이 떼 드릴게요.”
“에르가 아푸지 말라고 치료해 드릴게요.”
아이들은 테오도르의 신발에 붙어 있는 밤송이를 떼어 주고, 호- 하고 아프지 말라고 입김도 불어 주었다.
테오도르는 아이들이 하는 양을 멍하니 지켜보았다.
그럴 적에 그의 얼굴은 조금 전의 침울함을 잊고 불그스름하게 물들어 있었다.
제 신발을 털어 주는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두 손이 너무 앙증맞고 사랑스러웠다.
아이들은 테오도르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다시 이브에게 달려갔다.
“어모니, 아조씨한테 잘몬해씀미다 했어요.”
“이제 리아랑 에르랑 나쁜 어린이 안 할 거예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양손을 배꼽 위로 모으고서 이브의 눈치를 힐끔 봤다.
그러자 이브가 아이들을 향해 몸을 숙여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러고는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잘했어, 에르, 리아. 앞으로는 화나고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해서는 안 돼. 알겠지?”
“녜, 녜……! 이제 안 구러 꼬에요!”
“리아랑 에르랑 이제 착한 어린이에요!”
그녀의 목소리가 누그러진 것을 알아차린 아이들이 재빨리 그 품에 안기며 머리를 비비적거렸다.
“어몬니, 리아랑 같이 나가요. 리아가 나가는 길 알아요.”
“웅, 웅! 리아는 마봅사예요!”
“어머, 정말?”
“어모니, 이고 비밀인데…… 리아가 두래고보다 더 머싯써요!”
에르빈이 비밀이라며 이브의 귀에 속닥거린 말에 오딜리아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금세 기운을 차린 아이들의 모습에 이브가 짧은 웃음을 흘렸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테오도르를 힐긋 돌아보았다.
“아이들을 데려다준 뒤에 황궁으로 바로 갈게.”
“어, 응…….”
테오도르는 멀거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모니 또 황궁 가야 해요?”
“히잉……. 리아는 어몬니랑 같이 있고 싶은데…….”
아이들은 이브의 양팔에 매달려서 그녀와 함께 떠났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혼자 멀뚱히 서 있는 테오도르가 신경이 쓰였다.
‘에르랑 리아가 아조씨를 너무 아푸게 했나?’
‘아조씨, 함종 걸려서 속상한 거 같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브의 팔을 붙잡고 걸음을 옮기면서도, 연신 뒤를 힐끔힐끔 돌아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친 순간.
테오도르가 희미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 * *
“나, 나는……! 나는……! 나도 데려가……!”
덩그러니 남겨진 제리코가 자신을 두고 떠나는 아이들을 향해 외쳤다.
“망할 꼬맹이들! 이 배은망덕한 것들! 그간 놀아 주고 돌봐 줬더니, 은혜를 모르고 이 제리코 님을 버리고 가다니!”
이보네가 나타나자마자 그녀에게 정신이 팔린 아이들이 그를 남겨 두고 가 버린 것이다.
그가 씩씩거리며 외치던 때였다.
“으, 으익……?”
덜렁- 그의 꼬리가 높이 들렸다.
“……”
테오도르가 수상하게 생긴 다람쥐를 빤히 쳐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