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테네브리스의 부활
“우윽, 흐윽, 읍, 끕, 어모니이…….”
품에 안긴 에르빈이 내 어깨에 고개를 묻고서 서럽게 울어 댔다.
에르빈의 작은 몸을 꼬옥 끌어안으며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주었다.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여전히 철렁했다.
‘벤야민, 대체 왜…….’
테오도르의 말이 사실이었다.
브리안 오빠를 공격한 것도, 테오도르의 기억을 조작한 것도 모두 그의 짓이었다.
그런 그가 이제는 에르빈까지 위험에 처하게 만들었다.
“어모니이…… 흡, 으읍…….”
“괜찮아, 괜찮아, 에르.”
“그치만, 그치만 베냐민 삼쫀이…… 끄읍, 지지 아조씨가…….”
에르빈은 좀처럼 진정하지 못했다.
벤야민은 아이들이 막 태어나던 때부터 교류를 해 왔던, 아이들에게는 가장 가까운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런 벤야민에게 무서운 일을 당할 뻔했으니, 이렇게 놀라 우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어디로 사라진 거지……?’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밀쳐 낸 동시에 그가 허공 위로 그리던 술식이 두 사람을 덮쳤다.
그리고 두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에르빈을 위험에서 구해 낸 건 참 다행인 일이었으나, 두 사람의 생사를 알 수 없어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게다가…….’
나는 고개를 들어 위를 힐긋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어두워진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달이 태양을 절반쯤 집어삼키고 있었다.
이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기이한 광경에 나뿐만 아니라, 저택의 사람들이 모두들 혼란스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한꺼번에 닥친 일들에 머리가 조금 어지럽다고 느끼던 찰나.
“우, 우흑, 으흑…….”
밑에서 오딜리아의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오딜리아가 내 바지 자락을 붙잡고서 으엉헝 울음을 터뜨렸다.
“어몬니, 흑, 리아, 리아 모리카랑(머리카락)이…….”
“……!”
반짝이는 은색이었던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이 완전한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벤야민의 술식이…… 풀린 건가?’
이전에도 한 번, 아이의 머리칼 끄트머리가 검게 물든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이처럼 완벽하게 검은색으로 변한 것은 처음이었다.
“어몬니, 리아 어케요(어떡해요), 으아앙……!”
“으아앙……!”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동시에 목청 높여 울기 시작했다.
아이들의 울음 속에서 나는 테오도르의 말을 떠올렸다.
[리아가 흑마법을 썼어.]
조금 전 오딜리아가 벤야민에게 소리쳤을 때, 미묘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어쩌면 그게…….’
나는 오딜리아를 향해 무릎을 굽히며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리아, 어머니에겐 솔직하게 말해 줘야 해.”
“모, 모룰요?(뭐를요?)”
아이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자, 오딜리아가 조금 겁먹은 표정을 지었다.
“리아, 혹시…… 흑마법을 썼니?”
“흐, 흑마봅?”
“조금 전에, 벤야민 삼촌에게 소리쳤을 때.”
“모, 몬라요(몰라요)!”
오딜리아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리아는 암것두(아무것도) 몬라요!”
“아무런 느낌도 없었니?”
“구냥, 구냥 손끝에서 찌리찌리한 느낌 나몬서(나면서)…….”
주절주절 설명하던 오딜리아가 이내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말았다.
“으엉헝, 리아 때무네, 끄흑, 흡…… 아조씨랑 베냐민 삼쫀, 리아 때무네 죽은 거예요?”
오딜리아는 혹시나 저 때문에 두 사람이 잘못된 걸까 봐 서럽게 울었다.
“리아, 울지 마, 으아앙…….”
잠시 울음을 그쳤던 에르빈도 오딜리아와 함께 다시 소리 높여 울었다.
“하찌만, 하찌만 리아 때무네…….”
“아니야, 리아. 벤야민 삼촌이 나쁜 짓을 해서 아저씨가 잠깐 혼내 주러 간 거야.”
“저, 정말이요……?”
“그럼. 그러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아이들을 달래 주기 위해 대충 둘러댔다.
그러나 나 또한 생사를 확인하기 힘든 두 사람으로 인해 불안함이 밀려왔다.
테오도르를 원망했지만, 그가 이렇게 휘말려 위험해지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또한 에르빈을 위협한 벤야민에게 느낀 강한 분노와 배신감과는 별개로, 이유를 묻고 싶었다.
‘괜찮을 거야. 둘 다, 이렇게 쉽게 죽을 평범한 사람들은 아니니까.’
이때였다.
“이보네……!”
브리안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창백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게…… 저게 대체 뭐지?”
심상찮은 그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검게 물들어 가는 하늘이 보였다.
처음에는 단순히 조금 전 보았던 하늘이 어두워지는 현상의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아니었다.
“저건…….”
브리안이 가리키는 것들의 정체를 알아본 순간, 가슴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마물…….”
마물이었다.
그것도 그냥 마물이 아니라…….
“마물 떼가…….”
수백, 수천 마리의 마물들이 커다랗고 넓적한 날개를 퍼덕이며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가히 엄청난 수였다.
가호를 끌어내야만 식별 가능한, 평범한 육안으로는 구별하기 힘든 먼 거리에 있음에도 하늘을 어둑어둑하게 물들일 정도로.
그중 일부가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정확히 알브레히트 제국의 수도를 향해.
“젠장.”
나는 욕설을 짓씹으며 벌떡 일어났다.
가뜩이나 마물들을 상대할 3대 가주 중 하나인 벤야민도 없었고, 테오도르 또한 그와 함께 사라진 채였다.
그들 없이 저것들을 처리할 수 있을까?
“브리안 오빠.”
나는 허리에 찬 검을 단단히 쥐고서, 브리안에게 부탁했다.
“셀린느 님에게 연락을 해 줘. 그리고 로라, 에르랑 리아를 부탁해.”
그러자 화들짝 놀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내 양쪽 바지 자락에 매달렸다.
“어모니……!”
“어몬니, 어디 가세요?”
“어모니, 가찌 마세요, 에르랑 리아랑 이써요.”
“흑, 흐윽…… 가찌 마세요, 리아 무서워요.”
“에르도, 끕, 에르도 어모니랑 있꼬 시포요.”
나를 올려다보는 아이들의 눈가가 발갰다.
그렇지만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대로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걱정 마, 에르, 리아. 어머니가 금방 돌아올게.”
나는 아이들의 이마에 각기 입을 맞춰 준 뒤, 검을 잡고 몸을 돌렸다.
일단은 하늘을 뒤덮고 있는 저것들부터 처리해야 했다.
* * *
알브레히트 황궁.
한때 에른스트 2황자였던, 지금은 완연히 다른 존재가 된 남자가 복도를 거닐었다.
발끝까지 길어진 검은 머리카락, 핏빛처럼 붉은 눈동자.
얼핏 에른스트 시절의 이목구비가 남아 있긴 했으나, 에른스트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냉랭한 표정 탓인지 전혀 다른 이처럼 느껴졌다.
차박, 차박.
느리게 황궁을 거니는 그의 주위로 검은 빛으로 만들어 낸 수백 개의 검은 가시들이 피어났다.
“어? 에른스트 황자님?”
“에른스트 황자님이라고?”
“황자님 분위기가 조금…….”
에른스트의 궁전에서 나오는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의아해하며 그에게 다가가고자 하였다.
“황자님 머리카락이 왜…… 꺄아악!”
“으, 으아아아아악!”
그러나 순식간에 날아온 검은 가시들이 몸을 꿰뚫은 탓에, 그들은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쓰러졌다.
죽어 가는 사람들의 처절한 비명 소리가 황궁을 뒤덮었다.
그 아비규환 속에서 테네브리스는 무심하게 걸었다.
그의 발길이 닿는 지면에서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검은 연기들이 꽁꽁 뭉치더니, 자그마한 다람쥐 형상으로 변했다.
“테네브리스 님!”
검은 다람쥐가 테네브리스의 뒤를 쫓으며 경박한 목소리로 외쳤다.
“아이고, 막 깨어나셨으면서 걸음이 왜 이렇게 빠르십니까? 테네브리스 님! 테네브리스 님!”
그러나 테네브리스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소리에도 돌아보지 않고 그저 무심하게 걸을 뿐이었다.
갑작스러운 난리에 이리저리 달아나는 사람들 틈에 카타리나가 있었다.
“허억……! 테네브리스 님!”
부활한 테네브리스를 발견한 카타리나가 그에게 달려와 몸을 엎드렸다.
“이, 이제, 저, 저는 사, 살려…….”
카타리나의 손이 그의 옷자락에 닿는 순간.
푸욱-!
검은 가시가 그대로 카타리나의 몸을 꿰뚫었다.
테네브리스는 짜증스럽게 눈가를 찡그렸다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겼다.
황궁의 기사들과 사용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마침내 테네브리스의 걸음이 닿은 곳은 테오도르의 궁전이었다.
테오도르가 없는 황궁을 점령한 그는 황제의 권좌에 앉아서 따분한 표정을 지었다.
뒤늦게 헉헉거리며 뛰어온 검은 다람쥐 형체의 마물이 그의 앞에서 숨을 골랐다.
“아이고, 헥헥……. 테네브리스 님, 이 제리코 그동안 테네브리스 님께서 다시 깨어나시길 기다리며…….”
“왜 그딴 모양을 하고 있는 거지?”
테네브리스가 불쾌하다는 듯 묻자, 제리코가 탐스러운 꼬리를 흔들며 대답했다.
“이래 봬도 제가 요새 대륙에서 가장 인기 있는 동물로 불리고 있습니다.”
검은 마물 같던 제리코의 몸이 서서히 진짜 다람쥐의 색깔로 변했다.
제리코는 테네브리스가 잠든 사이 자신이 이룩한 업적에 대해 설명하고자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테네브리스는 그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신 그는 다른 것을 물었다.
기나긴 영면 속에서 고독에 질식하여 타락의 존재가 되어 가면서도 잊지 못했던 이름의 주인.
“체르니시아는?”
“네?”
달빛을 받을 때마다 반짝거리던 사랑스러운 은색 머리카락.
사르르 눈웃음을 내지을 때마다 초승달 모양으로 휘던 어여쁜 녹색 눈동자.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는 어디에 있지?”
* * *
한편, 테오도르는 낯선 공간에 홀로 뚝 떨어졌다.
“젠장, 여긴 어디지?”
온통 새하얀 공간 속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또 시공을 넘어온 건가…….”
테오도르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우선 에르빈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에, 무턱대고 빈틈을 노려 벤야민에게 달려들었는데 낯선 곳에 떨어지고 말았다.
에르빈이 벤야민의 손에서 벗어난 것까진 확인하였는데 그 이후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이브가 함께 있으니까, 에르는 무사할 거야.”
테오도르는 부러 스스로에게 장담하듯 중얼거렸다.
이때, 그의 눈에 저 멀리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어? 이브……!”
이브였다.
그런데 이브는 혼자 있지 않았다.
다른 놈이랑 같이 있었다.
“뭐야, 저건?”
테오도르는 불쾌한 듯 눈가를 찡그리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때였다.
짜악-!
이브가 오른손으로 맞은편에 있던 남자의 뺨을 때렸다.
그 바람에 남자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꺾여 돌아갔다.
남자의 얼굴을 알아본 테오도르의 표정이 멍청하게 변해 갔다.
이브에게 얻어맞은 남자는 다름 아닌…….
‘저거, 나잖아?’
테오도르, 자신이었다.
‘뭐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이브에게 얻어맞은 남자를 쳐다보았다.
검은 머리카락, 황금색 눈동자, 조각같이 아름다운 이목구비.
어떻게 보아도, 테오도르 자신이었다.
확신할 수 있었다.
저렇게 완벽하게 잘생긴 남자가 저 외에 또 존재할 리 없었으니까.
‘설마, 또 흑마법 같은 게 날 흉내 낸 건가?’
그런 의심이 불쑥 솟은 순간, 테오도르는 참지 못하고 달려 나갔다.
“저리 비켜!”
이브에게 얻어맞아 흐느끼는 남자를 밀쳐 낸 그가 외쳤다.
“이브! 저건 가짜야! 내가 진짜야!”
그러자 이브가 무서운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이건 또 뭐야?”
그녀의 어여쁜 녹색 눈동자가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흡사 ‘테오도르가 둘이나 있다니! 너무 끔찍해!’ 하는 표정이었다.
이때, 밑에서 훌쩍이는 울음소리가 들렸다.
“흑, 흐윽…….”
조금 전 테오도르에게 밀려난 남자가 바닥에 엎어져 울고 있었다.
“이, 이브, 흐윽…… 끕…….”
남자는 그녀에게 얻어맞은 뺨을 한 손으로 감싸 쥔 채, 고개를 슬쩍 올렸다.
눈물에 젖은 기다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미, 미안해. 난 바퀴벌레야……. 흐읍, 끄윽…….”
남자는 울고 있었다.
다분하게, 그녀를 신경 쓰며, 가장 예쁜 각도로.
“그렇지만 나는, 흑, 세상에서 제일, 제일 잘생긴 바퀴벌레니까, 끄읍, 그러니까 너무 미워하지, 으흑, 미워하지 말아 줘, 이브…….”
‘저 새끼가 미인계를 쓰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얼굴이 단박에 험악해졌다.
“속지 마, 이브! 저 새끼, 지금 아프지도 않으면서 우는 척하는 거야!”
“넌 뭐야?”
테오도르를 발견한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왜 나랑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지? 흑마법이라도 쓴 건가?”
남자는 뻔뻔하게도 테오도르를 가짜로 몰아가려 했다.
테오도르는 그를 가뿐히 무시하며 이브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생각해 봐, 이브. 이렇게 솜털처럼 사랑스러운 손에 맞아서 아파 울 리가 없잖아.”
그러면서 그녀의 손등에 입을 쪽 맞추었다.
그러자 밑에서 울고 있던 남자가 테오도르를 희번덕한 눈으로 노려보며 외쳤다.
“네가 뭘 알아! 그리고 당장 이브의 손에서 더러운 주둥이 치우지 못해?”
“저것 봐, 이브. 저 교활한 놈이 두 눈 부릅뜨고 날 노려보고 있어. 하나도 아프지 않았던 게 뻔해.”
“흐읍, 끅…… 아, 아니야, 이브……. 흐으윽…….”
남자는 테오도르의 지적에 곧바로 ‘끄읍, 흐읍, 흐으윽’ 하며 울어 댔다.
‘찌질하기는.’
테오도르는 속으로 남자를 비웃었다.
아이처럼 질질 짜는 게 아주 꼴사납기 그지없었다.
“솜털……?”
이때, 이브가 테오도르의 손에 붙잡힌 자신의 손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강한 분노와 함께 그의 손을 쳐 냈다.
“지금, 체르니시아의 가주에게 솜털이라 한 건가?”
“어, 이브……?”
순간 그녀의 손바닥에서 녹색 빛무리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짜악-!
그녀가 테오도르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그건 검기가 실린 손바닥이었다.
얻어맞은 뺨은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으윽, 이, 이브…….”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픔을 참으며 이브에게 말했다.
“그래, 차라리 나를 때려. 저건 가짜니까.”
“아니야! 나를 때려! 젠장, 이건 뭐지? 대체 뭔데 나타나서 날 방해하는 거야? 바퀴벌레 같은 자식.”
바닥에 엎어져 흐느끼던 남자가 벌떡 일어나 테오도르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역시, 조금 전까지 그 애처롭던 모습은 이브 앞에서 보인 연기임에 틀림없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을 흉내 낸 가짜를 향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지금 내게 바퀴벌레라고 했나? 이브는 바퀴벌레랑 친구가 되고 싶다 했어.”
“뭐라고……?”
“그러니까 당장 이브 앞에서 꺼져.”
테오도르의 도발에 남자가 이를 바드득 갈았다.
“이 미친 것들…….”
그리고 이브는 두 명의 테오도르를 끔찍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둘 다 내 앞에서 꺼져 버려!”
그녀의 독설에 테오도르와 남자가 동시에 처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잠깐, 이브.”
“꺼지라니…….”
그러나 이브는 매정하게도 몸을 홱 돌리며 반대편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이브……!”
테오도르가 그녀를 붙잡으려고 손을 뻗을 때였다.
사아아-
“어……?”
순식간에 이브의 모습이 사라졌다.
제 멱살을 붙잡고 있던 저와 똑같이 생긴 남자도.
“뭐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끔뻑였다.
“설마, 그 자식이 이브를 데려간 건가.”
그가 흉흉한 기운을 내뿜을 때였다.
퍽!
둔탁한 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니, 이번에는 웬 남자가 이브에게 검집으로 두들겨 맞고 있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재빨리 그쪽으로 달려갔다.
그러자 남자를 때리던 이브가 아주 무서운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이 지긋지긋한 테오도르는 또 뭐야?”
쿵-!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지긋지긋해……?”
그가 목소리를 가늘게 떨며 물을 때였다.
“흑, 끄읍, 흡……. 지긋, 지긋하다고, 흑, 읍, 흐윽……. 하지, 마, 이브, 흑, 내가, 으으읍, 내가 미안해, 흐윽…….”
그녀의 발아래에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남자가 흐느끼며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입한 남자를 향해 고개를 내리던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말았다.
눈물에 온통 젖은 서러운 얼굴마저 고대의 남신처럼 잘생긴 저 남자는 틀림없는 자신이었다.
그러나 그 잘생긴 얼굴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는지, 이브에게선 냉랭한 목소리가 돌아왔다.
“질질 짜지 마, 듣기 싫으니까.”
“으으윽, 흑…….”
테오도르와 똑같은 얼굴을 한 남자가 이브의 발치에서 통곡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과 비슷한 상황이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짧은 사이, 그녀와 저를 닮은 남자가 사라졌다.
“대체…… 이게 뭐지?”
테오도르가 멍하니 중얼거릴 때였다.
“뭐긴 뭐야. 이브가 널 때려죽이고 싶어 한단 거지.”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홰액 돌렸다.
그러자 그곳에는 조금 맛이 간 눈을 하고 있는 밀가루 같은 자식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를 발견한 테오도르의 표정 또한 살벌하게 가라앉았다.
저자가 에르빈을 흑마법의 제물로 사용하려고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자, 강한 살의가 치밀어 올랐다.
“네놈이 에르빈을…….”
“아쉽게 됐지. 그 걸리적거리는 애새끼도 치우고, 이브도 가질 수 있었는데.”
벤야민은 무엇이 그리 재미난지 배를 잡으며 키득키득 웃어 댔다.
황제를 향한 공대 따위도 모두 잊은 채였다.
“미친 건가?”
테오도르가 불쾌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러자 벤야민이 두 눈을 번득이며 외쳤다.
“그래! 어떻게 미치지 않을 수 있겠어! 이브가! 10년을 넘게 세상으로부터 숨겨 온 나의 이브가, 기어이 내 손을 벗어나겠다는데!”
“이브를 페르디난트에 가두고 고립시킨 게 너지?”
“고립?”
벤야민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더니, 마른 웃음을 터뜨렸다.
“근사한 표현이군. 세상에서 오직 그녀와 나, 단둘만 남는 거야.”
“에르빈과 이브에게 무슨 짓을 하려고 했지?”
“글쎄. 무슨 짓을 하려고 했을까?”
벤야민이 두 눈을 반달 모양으로 접으며 사르르 웃었다.
“말장난하지 말고 똑바로 말해.”
테오도르는 이를 바드득 갈며 쏘아붙였다.
“너, 에르빈을 제물 삼아서 흑마법을 쓰려 했잖아.”
그러자 벤야민이 미친 자처럼 큭큭댔다.
“그래. 그 애새끼를 제물 삼아서 이브의 정신을 조작하려고 했지. 나만을 보고, 내게만 웃고, 내 품에 안겨서, 사랑을 속삭이게끔. 그렇게 몸과 정신까지 모두 내게 종속되도록.”
“뭐……?”
“완벽하잖아! 그녀의 모든 것이 내 소유가 되는 거야! 이것보다 더 완벽한 형태의 사랑이 어디 있어?”
“미쳤어? 그런 짓을 했다간 에르의 정신이……!”
“파괴되겠지. 그런데 그게 뭐?”
벤야민은 정말로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다는 투로 대꾸했다.
“이 쓰레기 같은 놈.”
테오도르가 경멸의 눈으로 벤야민을 보았다.
진심으로, 벤야민을 죽이고 싶어졌다.
벤야민 또한 같은 눈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네가 할 말인가? 난 그래도 이브를 대놓고 상처 준 적은 없어.”
“뒤에서 음습한 짓거릴 꾸미는 네놈보단 낫지.”
테오도르가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맞받아쳤다.
“글쎄. 이브도 그렇게 생각할까?”
벤야민이 피식 코웃음을 쳤다.
의미심장한 그의 표정에 테오도르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소리지?”
“여긴 이브의 정신 속이고, 이브는 널 싫어해.”
벤야민은 단정적인 어투로 말했다.
“여기가, 이브의 정신 속이라고?”
“그래. 그중에서도 의식의 층인 것 같군.”
테오도르는 고개를 휙휙 돌려 주변을 둘러보았다.
발을 딛고 있는 곳이 이브의 정신 속이라고 생각하자, 이 공간이 갑자기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그럴 때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마지막에 네놈이 달려들지만 않았어도 완벽한 술식을 완성할 수 있었는데!”
벤야민이 원통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 확실한 걸 알게 됐지. 이브는, 널 싫어한다고.”
씩씩거리며 화를 삼켜 낸 벤야민이 턱 끝으로 어딘가를 힐긋 가리켰다.
“저기 봐 봐. 이브가 쓰레기 같은 널 저주하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고개가 그를 향해 돌아갔다.
그러자 그곳에는 이브가 무심한 표정으로 다트를 던지고 있었다.
테오도르의, 초상화에.
\\
“음…….”
테오도르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브가 있었다.
검은 머리, 황금색 눈을 지닌, 어떻게 보아도 테오도르를 흉내 낸 자그마한 헝겊 인형을 바늘로 쿡쿡 찌르고 있는 이브가.
“으음…….”
그것을 발견한 테오도르의 신음 소리가 더욱 깊어졌다.
“게다가 이브는 너를 아주 울보 찔찔이에 형편없는 놈으로 생각하는 것 같군. 참 볼썽사납기도 하지.”
벤야민이 큭큭거리며 비웃었다.
그리고 그의 말마따나…… 이브와 함께 있는 자신은 하나같이 서럽게 흐엉헝 울고 있었다.
“흑, 흐윽…… 이브, 나, 버리지 마…….”
“착한, 바퀴, 끕, 아니, 착한, 개가 될게…….”
“이브, 미, 미안해, 내가, 잘못, 흑…….”
그러니까 저 한심하게 그녀의 발치에서 질질 짜고 있는 것들은 저를 흉내 낸 흑마법 따위가 아니라, 그녀의 의식 속에 있는 자신의 형상들인 것이다.
‘내가 이브 앞에서 울긴 울었는데.’
테오도르는 조금 억울해졌다.
그는 원래 저런 식으로 못나게 우는 남자가 아니었다.
저렇게 우는 건 에른스트 같은 울보들이나 하는 거였다.
그녀의 앞에서 운 건 딱 두 번이었다.
그녀가 너무 좋아서.
그녀에게 미움받는 자신이 싫어서.
살아 있는 그녀를 만난 게 그처럼 벅차서.
그녀에게 용서받지 못할 짓들을 저지른 과거의 자신이 죽도록 미워서.
그럼에도 그녀를 사랑하여서.
그녀를 사랑해서 울었다.
그런데 이브가 자신을 저렇게 기억하고 있다니…….
“이제 확실히 알겠지? 이브가 널 얼마나 싫어하는지.”
어두워진 테오도르의 표정을 보며, 벤야민이 조롱하듯 말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그녀의 의식 속에 발을 들였다가 알게 된 것이라곤, 저를 향한 그녀의 악감정이 얼마나 많은지뿐이었다.
저렇게 잘생긴 얼굴로 예쁘게 우는데도, 그녀는 차갑고 매정했으며 다소 폭력적이기까지 했다.
잠잠히 그 광경을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다시 시선을 들어 벤야민을 보았다.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벤야민이 자신을 도발하고 있었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이내 피식 웃음을 흘렸다.
“네 말대로, 이브는 나를 조금 싫어하나 봐.”
“조금이 아니라 때려죽이고 싶을 만큼 싫어해, 너를.”
벤야민이 태연한 목소리로 테오도르의 말을 정정해 주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그 도발에 넘어가는 대신 여유로운 표정으로 그를 불렀다.
“그런데 벤야민 페르디난트.”
테오도르가 패배자를 내려다보는 승리자의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이브는 네 생각을 아예 안 하는데?”
흠칫.
순간 벤야민의 얼굴 위로 실금 같은 균열이 그어졌다.
“이거 봐, 이브의 정신 속엔 오직 나뿐이잖아? 너는 있지도 않아.”
“이 찢어 죽일 레오브란테!”
그건 벤야민이 이브의 정신 속에 들어오면서부터 내내 외면하던 사실이기도 했다.
도발에 곧바로 걸려든 벤야민이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벤야민은 이곳에서 테오도르를 마주치기 훨씬 전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녀의 아이를 제물 삼아, 그녀의 정신을 조작하여 제게 종속시킬, 그런 파괴적인 생각까지 할 정도로.
퍼억-!
벤야민이 테오도르의 얼굴을 주먹으로 쳤다.
테오도르의 고개가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미미한 분노가 서렸다.
제 몸에 손댈 수 있는 이는 오로지 이브뿐이었다.
밀가루를 빻은 것처럼 생긴 벤야민 페르디난트 따위가 감히 손댈 수 없는 잘생긴 얼굴이었다.
“이 개자식이!”
퍽-!
테오도르가 벤야민의 멱살을 붙잡으며 반격했다.
애석하게도 이 공간에서는 두 사람의 성력과 마력을 사용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은 손과 발을 동원하여 몸으로 치고받고 싸워 댔다.
* * *
쇄애액-!
“끼에에에에엑!”
슈욱-!
“꾸웨에에에에엑!”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체르니시아의 검이 허공을 가를 때마다, 마물들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죽어 갔다.
공중을 날아다니는 마물들과 싸우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녹색 단복을 입은 체르니시아의 기사들이 내 지휘에 맞추어 움직였다.
오랫동안 브리안이 음지에서 훈련시켜 온 기사들은, 나와 함께 합을 맞추는 게 이번이 겨우 두 번째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일사불란했다.
그들이 마물들을 한곳으로 몰아주면, 내가 도약하여 해치웠다.
하늘을 뒤덮은 마물들이 조금씩 흩어졌으나, 여전히 그 수가 너무 많았다.
‘죽여도 죽여도 끝이 없네.’
뺨에 튄 마물의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낼 때였다.
“이보네 님!”
“이보네!”
브리안이 셀린느와 레오브란테의 기사들과 함께 도착했다.
마침 적절히 도착한 브리안에게 기사들의 지휘권을 넘긴 뒤, 셀린느와 함께 마물들을 향해 돌진했다.
혼자였을 땐 조금 벅찼는데, 지원군이 오니 훨씬 더 수월하게 마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수도로 돌격하던 마물들은 주춤하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단 급한 불은 끈 것 같아요.”
간신히 정리된 상황에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황제 폐하와 벤야민 님이 있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요. 두 사람은 어디 있는 거지요?”
셀린느가 둘의 행방을 물었다.
그에 대답할 말을 고르던 때였다.
번쩍-!
어두운 하늘을 뚫고 강한 빛이 번쩍이는가 싶더니, 보다 짙은 어둠이 밀려왔다.
“저곳은…….”
“황궁 쪽이에요!”
셀린느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말했다.
“저쪽에서 강한 흑마력이 느껴져요.”
* * *
황궁은 금세 정리되었다.
황궁의 사용인들은 돌연 나타난 검은 마물들에게 당하였으며, 개중 발 빠른 몇몇은 황궁 밖으로 달아났다.
황궁을 지키던 기사들 또한 황제와 기사단장이 없는 와중에 용기 있게 저항하긴 했으나…….
“이, 이 마, 마, 마, 마물……! 죽어라!”
시종일관 따분한 표정을 하고 있던 테네브리스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황궁 기사 몇을 쳐다보았다.
기사들은 용맹하게 달려들었으나, 바닥에서 치솟은 검은 가시들이 그들의 몸을 꿰뚫었다.
“흐음…….”
테네브리스는 무언가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의 왼손을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테네브리스 님?”
옆에서 제리코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테네브리스의 왼손이 파스스 검은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
제리코는 놀라 펄쩍 뛰었다.
“테네브리스 님, 소, 손이……!”
“아직 힘이 불완전해.”
그러나 정작 테네브리스는 무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곧바로 그의 손이 다시 자라났다.
‘겨우 인간 몇 상대하는 것으로도 이렇게 약해지다니.’
테네브리스는 미간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오랫동안 그의 영혼을 담고 있던 그릇은 너무 약했고, 부활한 몸은 예전과 같지 못했다.
보다 완전해지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다.
테네브리스는 잠시 체르니시아를 닮았던 그 여자아이를 떠올렸다.
‘역시, 그때 조금 더 힘을 흡수했어야 했는데.’
막아선 남자아이로 인해 방해를 받은 탓에 흑마력을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
“제리코.”
테네브리스가 허공을 향해 손을 가볍게 휘둘렀다.
그러자 검은 연기가 울룩불룩 뭉치며, 허공 위로 자그마한 여자아이의 얼굴 형상을 만들었다.
“제물이다. 데려와.”
“네, 테네브리스 님!”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제리코는 곧바로 말을 알아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허공에서 꾸물거리던 검은 연기가 어디론가 이동했다.
제리코는 연기를 쫓아 밖으로 나갔다.
제리코가 떠난 뒤, 혼자 남은 테네브리스는 조금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체르니시아는?]
[네?]
[그녀는 어디에 있지?]
그 물음에 제리코는 예상치 못한 이야기라도 들은 것처럼 두 눈을 끔뻑거렸다.
[테네브리스 님께서 영면에 드신 동안 세 분의 사도님들 모두 소멸했습니다. 체르니시아 님을 포함해서요.]
[소멸……했다고?]
[네, 벌써 수천 년도 더 지났는걸요. 이제는 고대 사도님들의 이름을 딴 가문들만 남았지요.]
[…….]
[그들이 저희를 얼마나 박해했는지, 테네브리스 님께서도 아셔야 하는데!]
이어진 제리코의 설명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제가 잠들어 있던 사이, 체르니시아가 소멸했다.
수천 년 만에 다시 눈뜬 세상은, 그녀가 없는 세상이었다.
* * *
제리코는 검은 연기를 쫓아 체르니시아 저택 앞에 섰다.
검은 연기는 저택 안쪽으로 스르륵 사라졌다.
제리코는 저택의 담을 넘어 살금살금 안쪽으로 걸어갔다.
훌쩍거리는 아이들의 소리가 그의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히잉, 에르, 어몬니 갠찬게찌?”
“나도, 훌쩍, 나도 몬라(몰라).”
“몬루면 어캐!(모르면 어떡해!)”
“리아두 몬루쟈나!(모르잖아!)”
“하찌만…….”
이제 겨우 세 살 남짓, 서로를 꼭 닮은 자그마한 남자아이와 여자아이가 훌쩍이며 대화를 주고받고 있었다.
‘오호라, 테네브리스 님께서 말씀하신 제물이 저 여자아이구나!’
제리코가 오딜리아를 발견하고 기뻐할 때였다.
벌떡-!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에르빈이 코를 킁킁거렸다.
“지지 냄새…….”
그러더니 이내, 정확하게 제리코가 있는 쪽을 돌아보았다.
\\
‘흐익? 들킨 건가?’
당황한 제리코가 멍청하게 굳어 버렸다.
홰액-!
제리코가 자랑스러워하는 탐스러운 꼬리가 에르빈의 손에 붙잡혔다.
꼬리째로 거꾸로 들린 제리코를 쳐다보며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야, 이 지새꾸(쥐새끼)는?”
“이고(이거) 지새꾸 아냐, 에르! 이고 다람찌쟈나!”
어느새 훌쩍임을 그친 오딜리아가 에르빈의 옆에 찰싹 붙어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제리코를 쳐다보았다.
“다랑지? 구롬(그럼) 이고 다랑지 욘싸(용사)야?”
“요기 바 바. 꼬리랑 줄무니. 다람찌야.”
“군데(그런데) 왜 다랑지 욘싸한테서 기분 나뿐 냄새 나지?”
“냄새?”
오딜리아는 제리코를 향해 코를 킁킁거려 보았다.
그러나 오딜리아는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했다.
“암 냄새두 안 나눈데?(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몬라(몰라). 이고 기분 나빠.”
에르빈이 가느스름하게 좁혀 뜬 눈으로 제리코를 빤히 쳐다보았다.
“하찌만 이고 기여운 다람찐데…….”
“리아 냄새 안 나?”
“웅, 안 나.”
두 아이가 대화를 주고받는 사이, 제리코는 도망칠 틈을 노렸다.
그러나 제 꼬리를 쥐고 있는 에르빈의 손힘이 어찌나 센지, 아무리 바둥거려 보아도 도망칠 수가 없었다.
“가만 이써, 지새꾸.”
“아이참, 에르. 지새꾸 아니구 다람찌라니까.”
“시러, 이고 다랑지 아냐. 다랑지는 지지 냄새 안 나.”
“구롬 다람찌 리아 주면 안 대?”
오딜리아가 귀여운 표정으로 에르빈에게 부탁했다.
“리아는 다람찌가 가꼬(갖고) 시포.”
에르빈은 오딜리아가 그런 표정을 지으면 언제나 꼼짝 못 하곤 했다.
“윽…… 아라써, 리아. 지지 다랑지 리아 가져.”
“와아-!”
오딜리아가 신이 나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며 에르빈에게서 제리코를 건네받았다.
“꺄아, 에르, 이고 바! 다람찌가 너무 기요워!”
오딜리아가 제리코를 가슴에 포옥 안았다.
제리코는 대놓고 제게 불쾌한 기색을 보이던 에르빈에게서 벗어난다는 사실에 한시름을 놓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패착이었다.
“다람찌야, 이름이 모야?”
“…….”
“웅? 다람찌, 말 몬태(못해)?”
“…….”
“에르, 이 다람찌 쫌 이상해.”
제리코가 답이 없자 오딜리아가 에르빈을 향해 말했다.
“왜 말을 몬타지(못하지)? 바보 다람찐가?”
“바, 바보라니! 이 제리코 님을!”
말 못하는 진짜 다람쥐 흉내를 내던 제리코는 바보란 소리에 발끈해서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어어?”
“헙!”
오딜리아의 눈이 솔방울처럼 커졌다.
제리코는 뒤늦게 짧은 두 앞발로 입을 가려 보았으나, 이미 늦었다.
“에르! 방금 바써? 말하눈 다람찌야!”
“수상한 다랑지야. 이거 다랑지 아닌 고 아냐?(이거 다람쥐 아닌 거 아냐?)”
에르빈의 표정은 더욱 험악해졌다.
“지지 냄새 나구, 말도 하구……. 이고 구냥 다랑지 아닌 고 가타.”
“마쟈! 구냥 다람찌 아니구 말하눈 다람찌야!”
오딜리아는 손뼉을 치며 신나 했다.
되도록 조용히 일을 처리할 생각이었던 제리코는 계획이 비틀린 것을 느꼈다.
‘젠장, 정체를 들킨 이상 이 자리에서 해치워야겠군.’
그렇게 생각한 제리코가 마기를 끌어 올렸다.
검은 기운이 그의 주위로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했다.
‘감히 이 제리코 님에게 냄새난다고 한 저 남자아이부터…….’
한데 뭉친 마기가 에르빈을 향해 날아갔다.
“웅? 모야, 이고?(뭐야, 이거?)”
그러나 위협적으로 날아가던 검은 마기는, 에르빈이 손을 뻗은 순간 곧바로 흩어졌다.
“기분 나빠.”
“……!”
제리코는 경악하고 말았다.
비록 귀여운 다람쥐 모양새를 하고 있으나, 그는 테네브리스가 영면에 들던 그 긴 세월을 살아온 마물이었다.
그런데, 고작 세 살배기 남자아이의 앞에서 무력해지다니!
“지지 다랑지. 너 방곰(방금) 이상한 짓 해찌?”
에르빈이 표정을 무섭게 찡그리며 물었다.
제리코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에르, 다람찌한테 나뿌게 말하지 마.”
이때, 오딜리아의 다정한 목소리가 제리코를 구원해 주었다.
“착하게 말해야지. 에르는 착한 아이자나. 그치?”
오딜리아가 제리코의 탐스러운 꼬리를 쓰다듬으며 에르빈을 타일렀다.
“구치만(그렇지만), 방곰 저 다랑지가 수상핸는데…….”
“헤헤, 구로지 말구 다람찌랑 화해 해. 왜냐몬(왜냐면) 다람찌 이제 리아 부하거든.”
오딜리아에게 찰싹 안겨 있던 제리코가 의아한 얼굴로 두 눈을 끔뻑였다.
“……?”
제리코와 눈이 마주친 오딜리아의 입꼬리가 씨익 말려 올라갔다.
“말하눈 다람찌! 너는 이제 리아의 부하야!”
“네, 부, 부하요?”
얼결에 존댓말이 나왔다.
“이고 비밀인데, 리아는 사실 다람찌 욘짜(용사)야. 다람찌 욘짜 젤리꼬야.”
오딜리아는 속닥속닥 귓속말을 했다.
“……!”
흠칫, 제리코의 몸이 굳으며 눈이 땡그래졌다.
“깜짝 놀라찌? 리아는 불도 뿜을 수 있고, 하늘도 날 수 이써. 왜냐몬 다람찌 욘싸 젤리꼬니까.”
최근 아이들에게 유행하는 다람쥐 용사 제리코 이야기는, 그가 만들어 뿌린 것이었다.
긴 시간 테네브리스의 부활을 기다리던 그가 가진 유일한 취미가 바로 갖은 설화들을 만들어 사람들 사이에 전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만든 이야기 속 다람쥐 용사 제리코는 당연히 불도 뿜지 못하고 하늘도 날지 못했다.
왜냐하면, 다람쥐니까.
“욘싼님(용사님)에겐 부하가 필요해. 리아가 특별히 부하 삼아 주께.”
“와아, 리아 부하 생겨써?”
“웅, 요 다람찌가 리아의 부하야!”
졸지에 제리코는 오딜리아의 부하가 되고 말았다.
“다람찌! 저기 가서 도또리 주워 와!”
“네? 도, 도토리요?”
“웅, 도또리. 다람찌가 도또리도 몬라?”
내내 상냥하던 오딜리아의 얼굴이, 조금 전 에르빈의 것처럼 험악해졌다.
“다람찌가 어캐(어떻게) 도또리를 몬룰(모를) 수 이찌?”
오딜리아가 무섭게 제리코를 쳐다보았다.
“이고 다람찌 아닌 고 아냐?”
“에르가 이고 지지 냄새 나구 수상하다 해짜나.”
“아, 아니, 도, 도토리는 아는데…….”
“구롬 빤리(빨리) 주워 와! 빤리, 빤리!”
지금은 도토리를 찾기 힘든 봄이었다.
할 수 없는 것을 시키는 오딜리아로 인해 제리코는 조금 억울해졌으나, 일단 알았다고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흑마력으로 가짜 도토리를 만들어서 저 여자아이를 붙잡아야겠군. 그다음에 테네브리스 님에게 데려가면 완벽한 계획이야.’
제리코는 근처에 있는 나무둥치로 걸어가 도토리를 찾는 척하며 생각했다.
“빤리 몬태?(빨리 못해?)”
“아, 네, 네! 지금 주워 갑니다!”
제리코는 가짜 도토리를 만들어 오딜리아에게 뛰어갔다.
그러다 바닥에 난 커다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데굴, 데굴, 데구루루-
그가 흑마법으로 만들어 낸 가짜 도토리가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리고 이내,
펑-!
도토리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터졌다. 하필이면 이브가 아끼는 꽃나무 앞에서.
“…….”
“…….”
순간 두 아이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어모니가 아끼시는 꼰나무(꽃나무) 망가져써…….”
“저 다람찌 때무네…….”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차가운 시선이 제리코에게로 향했다.
으스스한 시선에 제리코는 몸을 움츠렸다.
살기등등한 기운은 세 살짜리 아이들이 내뿜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흉흉하고 험악했다.
제리코는 이렇게 흉악한 기운을 풍기는 사람을 딱 한 명 알고 있었다.
‘꼭…… 테네브리스 님 같잖아!’
특히나 기분이 안 좋은 듯 한쪽 눈썹을 치켜뜰 때의 표정이 그와 꼭 닮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팔짱을 끼고서 어머니가 아끼는 꽃나무를 망가뜨린 이 무례한 다람쥐를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때였다.
바깥에서 사람들의 도착 소리가 들려왔다.
이보네를 선두로 브리안과 셀린느, 그리고 두 가문의 기사들이 함께였다.
“앗, 어모니 오셔따!”
“어몬니 다뇨셔쪄요(다녀오셨어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곧바로 이보네에게 달려가 안겼다.
“어모니 아야 한 데 엄써요?”
“리아랑 에르가 저택 씩씩하게 잘 지켜써요!”
“에르랑 리아랑 안 울었어요. 울몬(울면), 어모니 속쌍하니까.”
“리아랑 에르랑 착한 아이에요.”
그럴 적에 아이들의 표정과 말투는 조금 전 제리코를 향해 보이던 것과 무척 상반되었다.
이보네의 앞에서 세상 착한 천사처럼 행동하는 아이들의 이중적인 면모에 제리코는 당황했다.
“그래, 어머니가 없어도 씩씩하게 울지 않고, 정말 대단해 우리 에르, 리아.”
이보네가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헤헤 웃음을 터뜨렸다.
무척 사랑스럽고 귀엽고 무해한 웃음이었다.
‘험악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이중인격이잖아?’
그런 그들의 모습에 제리코의 안색이 점점 안 좋아졌다.
이때였다.
“어머, 이건 마물이에요!”
제리코를 발견한 셀린느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
그러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리코에게 돌아갔다.
제리코는 제게 쏟아진 시선들에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마물이라고요? 다람쥐가 아니라?”
“체르니시아 저택에는 다람쥐가 살지 않아, 이보네.”
이보네와 브리안이 각기 한마디씩 던졌다.
“흑마력의 기운이 느껴져요.”
“그럼 죽여야 하나요?”
사람들의 대화 속에서 제리코는 점점 사색이 되어 갔다.
“어몬니, 어몬니.”
위기 속에서 제리코를 구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오딜리아였다.
“이케 기요운데 죽여야 해요?(이렇게 귀여운데 죽여야 해요?)”
오딜리아가 무척 귀엽고 사랑스러운 눈으로 이보네를 쳐다보며 물었다.
“다람찌, 리아 부한데…….”
“하지만 리아, 이 다람쥐는 마물이라잖아. 괜히 옆에 두었다가 위험할 수도 있어.”
“구리고 다람찌, 말도 잘 드러요. 구치, 다람찌?”
제리코는 재빨리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네가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제리코를 들여다볼 때였다.
“이보네 님!”
린든이 심각한 표정으로 찾아왔다.
“린든 경?”
“아, 셀린느 님도 함께 계셨군요. 마침 잘됐습니다.”
“무슨 일이죠? 아니, 그보다 폐하는 찾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린든의 표정이 침통하게 가라앉았다.
“어디서도 폐하를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도 마찬가지고요.”
“신관들은 만나 봤나요? 벤야민이 흑마법의 서를 들고 있었어요. 흑마법에 연관된 게 틀림없어요.”
“네, 일단 최근 제국에 들어온 신관들에게 협조를 구해 둔 터입니다.”
“…….”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그분이 어디 가서 그렇게 쉽게 죽을 분은 아니잖습니까.”
걱정스러운 이보네의 표정에 린든이 서둘러 덧붙였다.
“폐하께서는 이보네 님을 찾으려고 서쪽 대륙에 전쟁까지 일으키신 분입니다. 이렇게 이보네 님이 돌아오셨는데, 억울해서라도 쉽게 죽지는 않으실 겁니다.”
그 말이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는지, 이보네의 표정이 조금 나아졌다.
“그보다…… 지금 황궁이 점령당했습니다.”
“네? 점령당하다니요?”
“지금 황궁이 마물들에게 점령당해…….”
“마물이요?”
그 말에 사람들이 일제히 황궁 쪽 하늘을 돌아보았다.
여전히 불길한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네, 마물이요. 그런데, 그…… 마물들을 이끄는 이가…….”
말을 이어 가던 린든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엿듣고 있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일단 두 가주분들께서 황궁 쪽으로 함께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자세한 설명은 가면서 드리지요.”
“네, 좋아요.”
이보네와 셀린느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네가 제리코를 돌아보며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이 마물은…….”
“어몬니 기여운 다람찌 죽일 거예요?”
오딜리아가 두 눈을 글썽이며 제리코를 품에 꼬옥 안았다.
“에르가 있으니까 갠차나! 다랑지가 리아 개로피려(괴롭히려) 하먼 에르가 혼내 주께요!”
에르빈 또한 두 팔을 휘휘 저으며 오딜리아의 편을 들어 주었다.
“이고 바요!(이거 봐요!)”
에르빈이 제리코의 꼬리를 꽈악 움켜쥐었다.
“꽤애액.”
그러자 제리코가 결코 다람쥐의 비명은 아닌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추욱 늘어졌다.
“구리고 에르는 욘싼님(용사님) 검도 있는걸.”
에르빈이 자신의 단검을 꺼내며 외쳤다.
그러자 그의 검에 녹색빛 검기가 서렸다.
“흠…….”
에르빈이 비록 아직 세 살이긴 하지만, 검기를 발현한 아이는 십수 년을 수련한 숙련된 기사들 스무 명을 합친 것보다도 강한 위력을 지녔다.
게다가 에르빈은 제국에 온 이후로 수련도 열심히 했으니…….
“브리안 오빠, 황궁에는 셀린느 님과 다녀올 테니까 저택을 부탁해. 저 다람쥐도 감시 부탁할게.”
“그래, 이보네. 조심히 다녀와.”
브리안이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벤야민은 피를 쿨럭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마력이 통하지 않는 이보네의 정신 속에서, 벤야민은 그간 전쟁터에서 구른 테오도르를 이길 수 없었다.
“젠장, 테오도, 쿨럭…….”
바닥에 엎어져 있는 벤야민을 보자 테오도르는 속이 시원해졌다.
테오도르는 벤야민의 앞에 쭈그려 앉아 그의 머리통을 툭툭 건드렸다.
“여기서 어떻게 밖으로 나가지?”
“나도 모른다.”
벤야민이 그를 노려보며 대답했다.
“모른다고?”
“네놈이 방해한 탓에 술식이 망가져 버렸으니까.”
“네가 발동시킨 술식이니, 해체하면 되잖아?”
테오도르는 최근 테네브리스와 흑마법에 대해 조사하여 알게 된 것을 떠올리며 물었다.
“……내가 한 게 아니다.”
벤야민은 짓씹듯이 말하며 고개를 홱 돌렸다.
이브의 정신을 조작하고자 하였으나, 마지막에 테오도르 때문에 술식이 흐트러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술식을 발동시켰다.
‘대체 누구지?’
벤야민은 누가 술식을 발동시킨 건지 알 수 없어 고심했다.
[베냐민 삼쫀 나뺘!]
[에르 개로피지 마아아!]
테오도르는 술식이 발동되기 직전, 오딜리아가 나타나 소리치던 것을 떠올렸다.
‘설마…….’
오딜리아는 이전에도 무의식중에 흑마법을 사용한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서 나가는 방법은 하나겠군.’
무의식에 술식을 발동시킨 오딜리아가 술식을 해체할 수 있을 리 없으니, 술식을 발동시킨 흑마력이 시간이 지나 자연적으로 소멸하길 기다려야 했다.
한 가지 걱정되는 게 있다면, 술식이 발동되기 직전에 하늘에 기현상이 일어났다는 건데…….
“아무튼, 재수 없으니까 빨리 이브의 정신 밖으로 꺼져 버려.”
테오도르는 허리를 펴고 일어서며 무섭게 위협했다.
감히 벤야민 따위가 이브의 정신 속에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벤야민을 뒤로하고 걸었다.
술식을 발동시킨 힘이 자연적으로 소멸되길 기다리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다.
걷다 보면 이 공간 밖으로 나가는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보네의 정신 속 이곳저곳에 자신을 미워하는 그녀가 있었다.
그 광경 속에서 하염없이 혼자 걷던 테오도르는 문득 우뚝 멈추어 섰다.
씁쓸한 미소가 그의 입가에 떠올랐다.
[뭐긴 뭐야. 이브가 널 때려죽이고 싶어 한단 거지.]
[여긴 이브의 정신 속이고, 이브는 널 싫어해.]
[덕분에 한 가지 확실한 걸 알게 됐지. 이브는, 널 싫어한다고.]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입에서 그 말을 들었을 때.
아닌 척하였으나, 사실 굉장히…….
‘이브는…….’
가슴이 조이는 듯한 감각과 함께 굉장히 괴로웠다.
‘이브는, 나를 정말로 싫어해.’
우울한 감정이 밀려왔다.
다시 만난 이후로 이브는 늘 자신의 앞에서 미간을 무섭게 찌푸리거나, 냉담하게 무시하거나, 이따금은 화를 냈다.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웃기도 하고 상냥하게 대하기도 했으니, 그녀의 그런 모습은 모두 제게만 보이는 것일 테다.
‘어쩌면 정말로 평생 용서받지 못하는 게 아닐까?’
어렴풋이 들던 생각은 이곳에 와 점차 확신이 되어 갔다.
이곳에서 본 그녀는 제게 한결같이 냉랭하기만 했다.
게다가 그나마 자신 있던 근사한 껍데기마저 그때 그녀의 앞에서 아이처럼 울어 버린 탓인지, 그녀의 의식 속 자신의 겉모습은 찌질하기까지 했다.
한때는 그녀가 살아만 돌아오면 괜찮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미워해도 괜찮으니, 외면해도 괜찮으니, 그러니 살아 있는 그녀를 볼 수만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었을까?
전혀, 괜찮지 않았다.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 자신을 싫어하는 그녀를 보는 게 아주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음울한 얼굴로 걷고, 걷고, 또 걸었다.
그가 지나는 길이 점차 질서 없이 혼란스러워졌다.
반듯하던 길은 구불구불해졌고, 파랗던 하늘은 분홍색이 되었다가, 보라색이 되었다가, 노란색이 되길 반복했다.
‘뭐지?’
테오도르는 작게 인상을 썼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에 벤야민은 그들이 있던 곳을 가리켜 그녀의 정신세계 중에서도 의식의 층이라고 말했었다.
‘그럼 혹시 이곳은…… 의식이 아닌 무의식의 층인가.’
그렇게 걷던 테오도르는 길의 끝에 혼자 서 있는 이브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이브……?”
이제까지 보았던 그녀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테오도르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서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러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모습에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가 울고 있었다. 두 손에 고개를 파묻고서.
“아…….”
자그마한 탄식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브가 왜…… 울고 있지.
서럽게 우는 그녀를 보자, 그저 가만히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멨다.
지금 눈앞에 울고 있는 이브가 그녀가 아닌 그녀의 무의식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럼에도 그녀를 달래 주고 싶어서 손이 뻗어 나갔다.
테오도르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짚을 때였다.
흠칫.
손바닥 아래에서 이는 움직임에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굳었다.
소리 죽여 울던 이브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눈가가 붉었다.
“테오?”
화를 내는 목소리도 아니었으며, 냉담하게 무시하는 목소리 또한 아니었다.
따뜻하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테오도르가 기억하고 있는, 기억 속 이보네의 목소리였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테오도르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테오!”
이브가 활짝 웃으며 그에게 안겨 들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제게 안긴 그녀를 믿을 수가 없어, 멍청하게 그녀의 이름만을 읊었다.
“테오, 나 알아보겠어? 다시 기억하는 거야?”
그 물음에 테오도르는 퍼뜩 정신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제가 사랑하던 달빛을 닮은 은색의 머리카락이 턱선 길이로 짧았다.
그건, 그가 잘라 낸 머리카락이었다.
그깟 머리핀 때문에.
그 적나라한 과오를 발견한 순간, 테오도르의 눈시울이 파르르 떨렸다.
[머리핀을 카타리나 양에게 넘겨.]
[이제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핀은 필요 없겠군.]
후드득- 머리카락이 잘려 나간 순간 그대로 굳어 버리던 그녀의 창백한 안색이 떠올랐다.
바닥에 떨어진 잘린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 서러운 녹색 눈동자도.
“네가 다시 날 기억해 낼 거라 생각했어. 그래서 나, 옆에서 씩씩하게 버텼어. 정말 잘했지?”
“…….”
이브는 헤헤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으나, 테오도르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눈가는 여전히 발갰다.
사르르 접힌 눈꼬리에 매달린 투명한 눈물방울을 닦아 주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눈가를 향해 뻗어 나가려던 손끝은 허공에서 길을 잃고 잘게 떨렸다.
감히 제가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그것은 그의 무의식에 새겨진 강한 속박이었다.
이브, 왜 울었어?
왜 이렇게, 아프게 울고 있어?
소리 없는 물음이 목구멍 안에서 메아리쳤다.
답을 알고 있는 파렴치한 질문은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정말 다행이야, 테오. 네가 기억을 찾아서 너무 기뻐.”
“…….”
“있지, 테오. 나 실은 너무 속상했어.”
“…….”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는 그에게, 이브는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한다.
네가 낙마했다는 소식에 놀라 뛰어갔는데, 나를 전혀 알아보지 못하잖아.
조금 기다리면 괜찮아질 거라 믿고 기다렸는데, 네가 나를 다시 기억해 낼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아서.
나를 보는 네 눈이 이상하게 차가워서.
네가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서. 꼭 나를 싫어하는 것 같아서.
내가 사랑했던 너를, 영영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우리가 사랑했던 순간들을, 모두 잃어버린 것만 같아서.
그래서 너무 속상하고, 한편으론 무서웠어.
네가 없는 곳에서, 조금 울기도 했어.
너무 힘들어서 포기할까 약한 생각도 했는데, 이거 봐. 결국 네가 나를 기억해 냈잖아.
담담하지만 슬픔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이브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그 새하얀 미소에 테오도르는 울컥해졌다.
“……미안해.”
갈라진 목소리가 형편없이 새 나갔다.
“내가, 정말 미안해, 이브.”
“뭐가?”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해서. 바보처럼 잊어버리고, 상처를 주어서. 그리고…….”
테오도르는 몰랐다.
언제나 밝고 씩씩하던 그녀가, 이렇게 숨죽여 서럽게 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는 전혀 몰랐다.
“……널 울게 만들어서.”
테오도르는 제가 그녀를 울렸다는 게 못 견디게 참기 힘들어서, 입 안의 여린 살을 아프게 베어 물었다.
입 안이 터지고 비릿한 피 내음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미안해, 이브. 나 두 번 다신…….”
그가 이를 악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너는 날 기억 못 할 거잖아.”
문득 표정이 사라진 얼굴을 한 이브가 그렇게 말했다.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고 말았다.
“너는 결국 날 기억 못 할 거야. 끝내 내가 지쳐서 네 곁을 떠날 때까지.”
얼핏 원망이 담긴 눈동자가 테오도르를 응시했다.
“나를 또 울게 만들겠지.”
“…….”
“그렇지, 테오?”
테오도르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이니까.
저는, 정말로 그녀를 기억하지 못했으니까.
그녀가 결국 지쳐, 저를 견디지 못하고 떠날 때까지.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하지 마.”
매정한 목소리와 달리, 슬프게 젖은 목소리였다.
“나는 더 이상 네 앞에서 비참해지고 싶지 않아.”
그 마지막 한마디가 귓가에 먹먹하게 울려 퍼졌다.
이브는 그대로 제게서 멀어져 갔다.
남겨진 테오도르는 그녀를 붙잡지 못했다.
차마 붙잡을 수 없었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단단한 외피 속에 싸인 그녀의 무의식은 이처럼 연약하여서.
가냘프고 애처롭고, 이처럼 투명하게 아파 울고 있어서.
제가 그녀에게 남긴 것은 결국 변질된 사랑과 상처와 눈물과 비참함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서.
알브레히트 황제 테오도르가, 이렇게나 끔찍한 남자라는 것을 다시 한번 알게 되어서.
과거의 저를 목 졸라 죽이고픈 충동이, 다시 한번 그를 좀먹기 시작했다.
* * *
“에른스트가 마물이 되었다고요?”
린든이 전해 준 퍽 믿기 힘든 소식에 나는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리며 반문했다.
“그냥 마물이 아니라, 무슨 마물들의 왕 같았습니다. 에른스트 황자님이 손을 한 번씩 휘저을 때마다 여기저기서 마물들이 반응했다니까요.”
“……혹시 잘못 본 건 아니에요? 에른스트를 조금 닮았을 뿐 다른 사람이라든지.”
“아니요, 분명 에른스트 황자님이었습니다.”
린든은 무척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마물이 된 에른스트 황자님이 황궁을 점령했습니다. 지금 황궁은 온통 마물들 천지예요.”
“대체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믿기 힘드신 것 압니다. 그런데 저희 기사단의 힘만으로는 대응이 어렵습니다. 폐하께서도 부재중이시고……. 그래서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으신 가주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린든 경!”
결국 참지 못한 내가 목소리를 높였다.
에른스트, 눈물 많던 그 여린 내 친구가 마물이 되었다고?
그것도, 그냥 마물이 아니라 무슨 마물들의 왕 같은 게 되었다고?
마물들을 다스려서 황궁을 점령했다고?
“저도 믿기 힘든 이야기예요. 일단 에른스트 전하를 만나 봬야겠군요.”
셀린느가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사이, 우리를 태운 말은 착실하게 황궁 앞에 도착했다.
어두운 하늘 아래, 황궁을 에워싼 마물들이 우리를 향해 이를 드러내며 위협했다.
나는 곧바로 검을 들고 그 사이로 뛰어들었고, 셀린느가 내 뒤를 쫓았다.
* * *
테네브리스는 돌아오지 않는 제리코 때문에 조금 짜증이 났다.
‘대체 뭘 하는 거지?’
기다리다 못한 그가 인상을 팍 쓰자, 허공 위로 검은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났다.
검은 연기는 곧바로 제리코의 형상을 만들어 냈다.
검은 다람쥐의 형체를 한 제리코가 인형 원피스를 입은 채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테네브리스는 어이가 없어서 혀를 찼다.
‘왜 저런 추한 꼴로 있는 거야?’
제리코와 함께 있는 아이들은 그가 일전에 본 적이 있는 아이들이었다.
시공의 ‘통로’에서 만난 체르니시아의 아이들.
‘저 애들, 제리코의 힘으로 어떻게 하기 힘든 건가?’
통로를 연 것은 아마 여자아이 쪽일 것이다.
제가 영면에 들기 전의 세상에서도 통로를 열 만큼 뛰어난 마도사는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그 옆에 있는 남자아이 또한, 비록 불완전한 상태였다지만 저를 제압할 만큼 강한 힘을 가진 아이였다.
테네브리스는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이들에게 나이는 중요치 않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직접 나서야 하나, 귀찮게…….”
그가 짜증스럽게 중얼거릴 때였다.
“……!”
돌연 그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멀지 않은 곳에서, 낯익은 기운이 느껴졌다.
“이건…….”
테네브리스는 홀린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눈을 감는 순간에마저도 잊지 못하던 청량한 기운이 폐부 깊이 잠식했다.
그녀다.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의 기운이었다.
벌컥-!
그가 있던 공간의 문이 벌컥 열렸다.
그 사이로 한 여자가 마물들의 피를 가득 뒤집어쓴 채 뛰어 들어왔다.
“에른스트……!”
부드럽게 흩날리는 은색의 머리카락, 싱그러운 봄을 담아낸 초록빛 눈동자.
그녀와 마주친 순간, 테네브리스는 강렬한 충격을 받았다.
쿵. 쾅. 쿵. 쾅-!
가슴이 세차게 뛰어 댔다.
[테네브리스.]
‘아니야, 체르니시아는 소멸했잖아.’
[있지, 나 네게만 알려 주는 건데 말야.]
‘저건 내가 기억하는 체르니시아가 아니야.’
[아하하, 테네브리스. 너 지금 얼굴이 빨개졌잖아. 토마토 같아.]
‘그냥 그녀를 닮은, 인간들의 후손…….’
혼란이 가득 밀려왔다.
그러던 와중, 이보네의 허리춤에 달린 검집의 에메랄드가 검은 연기를 태우기 시작했다.
뒤따라 들이닥친 셀린느의 브로치에서도 같은 반응이 일어났다.
“셀린느 님, 이거…….”
“어둠…… 가장 깊고 위험한 어둠이에요!”
쨍그랑-!
에메랄드와 브로치가 바닥으로 떨어져 깨지며, 그 안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테네브리스의 몸으로 흡수되었다.
느슨하게 걸치고 있던 셔츠 깃 사이로 비치는 살결과, 걷어 올린 소매 아래 팔뚝과, 드러난 목덜미와 관자놀이에 울룩불룩 핏대가 솟아났다.
“젠장, 죽여야 해.”
혼란을 이기지 못한 그의 눈동자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의 주위로 수십 개의 검은 가시들이 피어났다.
“이보네 님!”
그것들이 일제히 이보네를 향해 쏟아지려는 순간이었다.
[안 돼-!]
그의 안에서 들려온 외침에 테네브리스의 몸이 멈칫 굳었다.
[이보네를 해치지 마!]
조금 전보다 강렬한 외침이 이어졌다.
그 순간 검은 가시들이 파스스 흩어졌다.
“이 목소리는…….”
잔뜩 흉흉해진 눈을 한 테네브리스가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내 ‘그릇’을 만드는 데 소모된 하찮은 인간 황자가 아닌가.”
고작 그런 존재가 자신을 방해하였다는 사실이 몹시 불쾌하게 느껴져서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릴 때였다.
“방금 그 말, 무슨 소리야?”
스으윽-
어느 틈에 다가온 것인지 모를 인간 여자가 그의 목덜미를 향해 검을 드리우고 있었다.
이보네가 황궁으로 떠난 뒤.
브리안은 아이들이 놀랐을까 봐 걱정이 되었다.
반나절 사이에 너무 많은 일들이 있었다.
아이들과 오래 알고 지냈다는 벤야민의 배신.
그리고 이어진 테오도르 황제와 벤야민의 실종.
하늘을 뒤덮은 마물들.
점령당한 황궁.
그리고…… 아이들 앞에 나타난 괴상한 다람쥐 마물까지.
브리안은 달콤한 꿀을 탄 딸기 주스를 세 잔 들고서 아이들의 방으로 올라갔다.
혹시 위험한 일이 생길지 모르니 실내에서 놀라고 당부해 둔 터였다.
브리안이 방 앞에 도착하자, 한창 신나게 놀고 있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이제 다람찌 차례야.”
“다랑지 개물(괴물). 네가 술래야!”
아이들은 커다란 카펫 위에 앉아 숨바꼭질을 하는 중이었다.
“아이참, 에르. 다람찌는 개물이 아니라 공주야.”
제리코는 오딜리아의 고집에 못 이겨 인형들이나 입을 것처럼 생긴 빨간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왜냐하면 제리코의 역할이 공주님이었기 때문이다.
‘아이고, 내 나이가 몇인데…….’
제리코는 아이들과 같이 놀아 주는 게 무척 힘들었다.
‘어린 것들이 아주 인성이 노래 가지고, 어른을 공경할 줄 모르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네브리스의 소멸 이전부터 살아온 나이 많은 제리코를 친구처럼 부려 먹었다.
물론 엄밀히 따지자면 친구가 아니라 부하처럼 부림당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제리코는 인정하지 못하고 꿋꿋이 아이들의 친구가 되어 놀아 주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울지 않고 잘 놀고 있네.”
브리안의 목소리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그를 돌아보았다.
“삼쫀!”
“브리앙 삼쫀!”
아이들이 눈을 반짝이며 브리안에게 달려왔다.
“삼쫀 이고 모야? 딸기 쥬쓰야?”
“이고 리아 마셔두 돼?”
마셔도 되냐고 묻는 것과 달리, 이미 아이들의 손에는 유리컵이 하나씩 들려 있었다.
“다람찌도 먹어. 딸기 쥬쓰야.”
“저도 이걸 마셔도 되나요?”
제리코는 브리안의 눈치를 힐끔 살피며 유리컵을 쥐었다.
브리안은 몹시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제리코는 흠칫하면서도 빨대를 쪽쪽 빨았다.
제 흑마력을 상쇄시켜 버린 저 꼬마라면 모를까, 브리안은 그다지 무섭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보네가 보고 싶다고 울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한편 브리안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아이들이 울지 않고 잘 놀아서 안심되었다.
“다람쥐가 수상한 짓을 한 건 아니지?”
“우웅, 아니야, 삼쫀. 다람찌 착해.”
“웅, 웅! 다랑지 착하고 말 잘 들어.”
“리아랑 에르랑 다람찌랑 숨바꼭질하고 있었어.”
“웅, 웅! 샤조케(사이좋게) 놀고 있었어. 구치, 다랑지?”
“네? 네, 네! 사이좋게! 착하게!”
에르빈이 팔꿈치로 툭 건드리자 화들짝 놀라며 대답하는 제리코의 모습은 사이좋게 놀았다기보다는 잔뜩 괴롭힘을 당한 것 같았다.
아무튼 브리안은 아이들의 신경이 다람쥐 마물에게 몰려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되도록 바깥에 나가지 말고 실내에 있어야 해.”
“웅, 삼쫀!”
“에르랑 리아는 삼쫀 말 잘 들어!”
아이들은 무척 믿음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마음이 놓인 브리안은 까르륵거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를 뒤로하고 자리를 떴다.
그러나 브리안의 시선이 사라지자마자, 아이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이제 삼쫀 내려가써.”
복도를 확인한 에르빈이 방문을 닫았다.
오딜리아가 에르빈의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말했다.
“에르, 아까 들었지? 지지 아조씨가 흑마봅(흑마법)에 당했대.”
“웅웅, 들었어. 구리구 어모니가 술씨(술식)라는 말 썼어.”
“전에 지지 아조씨도 리아한테 술씨라는 말 해짜나!”
아이들은 어른들의 대화 사이에 들리던 ‘흑마법’과 ‘술식’이라는 단어에 골몰했다.
둘 다 아이들에게 생소한 낱말이었다.
“지지 아조씨…… 에르 구해 조써…….”
에르빈은 벤야민에게 붙잡힌 자신을 구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달려들던 테오도르를 떠올렸다.
테오도르는 굉장히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 얼굴을 떠올리니 기분이 자꾸만 이상해졌다.
“지지 아조씨 때문에 기분이 이상해. 아조씨 너무 시른데. 너무 시러서 가슴이 두근두근해.”
그 아저씨는 분명 어머니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드는 나쁜 아저씬데.
그 아저씨 때문에 어머니가 화나고 슬퍼했는데.
그런데 왜 나는 이런 기분이 드는 거지?
그 아저씨가 너무 싫어서 이러는 걸까?
“리아도 구래, 에르. 리아도 아조씨 보먼 가슴이 막 콩딱콩딱해.”
오딜리아의 말에 에르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지쨔?(진짜?)”
“웅, 지쨔!”
에르빈은 자신만 그런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조금 안심이 되었다.
“이고 그 아조씨 너무 시러서 그런 걸까?”
“에르는 아조씨 시러?”
“웅, 아조씨 때문에 어모니 기분 안 죠아짜나.”
“마쟈. 구래서 리아랑 에르랑 함종(함정)도 만드러짜나.”
“마쟈. 구론데 아조씨 안 나타나써. 에르랑 리아랑 힘들게 함종 만드런는데…….”
“구로니까 더 혼내 조야 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서로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론데 흥마봅이 몰까?”
“뚜래고가 마봅(마법) 부리자나. 그거랑 가튼 고 아냐?”
“구롬 불 뿜는 건가?”
“리아 찌리찌리한 느낌 났는데.”
“찌리찌리한 게 흑마봅이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흑마법이 무엇인지 열심히 토의했다.
그러나 둘이서 아무리 이야기를 나누어 보아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헹, 흑마법도 모르는 무식한 어린애들이었군.’
제리코는 딸기 주스를 호록호록 마시며 아이들을 속으로 비웃었다.
“다람찌, 너 흑마봅이 몬지 아라?”
아이들이 제리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네, 네? 제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제리코는 시치미를 떼며, 빨대를 쪽쪽 빨았다.
“다람찌가 흑마봅도 모르구…….”
“거봐, 에르가 구래짜나. 이거 다랑지 아닌 거 같다고.”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아니 무슨 다람쥐가 만능인가. 불도 뿜고 하늘도 날고 흑마법도 부리게?’
제리코는 어이가 없어서 항의했다. 속으로만.
“우음……. 아까 이케 하몬…… 아……!”
이때, 오딜리아의 손끝에서 흑마법의 술식이 그려졌다.
“어어?”
“왜 구래, 리아?”
“에르, 이고 몬루게써?(모르겠어?)”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손끝을 쳐다보았으나, 그저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다.
“요기 찌리찌리한데…….”
펑!
순간 아이들의 시선이 반대편으로 향했다.
제리코의 꼬리가 두 개가 되어 있었다.
“꼬, 꼬, 꼬, 꼬리가……!”
제리코는 경악한 얼굴로 탐스러운 두 개의 꼬리를 끌어안았다.
이래서야 어떻게 보아도 귀여운 다람쥐가 아닌 ‘괴물 다람쥐’ 같지 않은가?
“리아, 마봅 부린 고야?”
“다람찌 꼬리가 두 개야!”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제리코의 꼬리를 구경했다.
“젠장, 내 꼬리가 왜!”
수천 년을 살아온 마물 제리코는 자신의 형체를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었다.
지금 그가 지닌 귀여운 다람쥐 형체 또한 그가 만들어 낸 것이었다.
그러니 당연히 그의 의지에 따라 갑작스럽게 궁둥이에서 돋아난 이 꼬리는 없어져야 마땅했으나…….
“왜 안 없어지는 거야? 이 망할 흑마법이……!”
제리코가 아무리 성질을 박박 내며 꼬리를 없애려 해 보아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흑마봅?”
“이게 흑마봅이야?”
그사이 제리코에게 다가온 아이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헙…….”
제리코는 뒤늦게 자신의 입을 막았다.
그러나 이미 아이들은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흑마법’이라는 단어를 듣고 난 뒤였다.
“방금 다람찌가 흑마봅이라고 해써.”
“흑마봅 알려 조, 다랑지. 목숨깝(목숨값) 해야지.”
“구래, 다람찌. 목숨깝 해야지.”
“나, 나, 난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제리코는 되도록 저 아이들의 일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남자아이만 수상한 힘을 쓰는 줄 알았더니, 여자아이마저 만만찮은 힘을 갖고 있었다.
어쩐지 테네브리스가 직접 데려오라 할 때부터 수상쩍더라니.
“리아가 꼬리도 만두러 줘짜나. 구론데 다랑지는 치사하게 것두 안 알려 조?”
“마자! 리아가 꼬리도 만두러 줬는데!”
“다랑지 목숨깝도 못하구 꼬리깝도 못해.
“다람찌 꼬리 짤라 버려야 해!”
아이들이 제리코를 탈탈 털며 외쳤다.
그러다 돌연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하며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랑지, 설마 꼬리가 짤리는 게 취미야?”
“아, 아니, 누가 꼬리 잘리는 취미를……!”
제리코는 당황스러우면서도 아이들이 정말로 그 말을 실천할까 봐 걱정이 되어, 꼬리를 뒤로 숨겼다.
탐스러운 두 개의 꼬리가 그의 작은 몸 뒤편에서 살랑살랑 흔들렸다.
“구롬 빤리 안녀 조. 꼬리 짠리기 시루몬.(그럼 빨리 알려 줘. 꼬리 잘리기 싫으면.)”
“네, 네, 그럽지요.”
결국 제리코는 울먹울먹하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러니까 흑마법이 뭐고, 술식이 뭐냐면…….”
제리코의 설명에 아이들이 귀를 쫑긋하며 기울였다.
과거 테네브리스를 모시던 다른 뛰어난 마물들과 달리 허술한 성격의 제리코가 수천 년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한 가지 덕분이었다.
빠른 굴복.
그것이 제리코의 특기이자 가느다란 목숨을 길게 유지할 수 있던 비기였다.
테오도르는 넋이 나간 얼굴로 이브의 무의식을 헤맸다.
그녀의 무의식 속에는 참 많은 이브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많은 이브들은 테오도르가 알지 못한 그녀의 모습들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들을 잃고 우는 이브.
싹둑 잘린 머리카락을 멍하니 쳐다보는 이브.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학대를 당하며 자라는 이브.
기억을 잃고 미친 짓들을 일삼는 저의 뒷모습을 같은 자리에서 하염없이 바라보는 이브…….
테오도르는 차마 다가가지 못하고 망연히 그들을 바라보았다.
훌쩍, 훌쩍.
가느다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작은 여자아이가 세워 앉은 무릎 위로 고개를 묻고서 울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단박에 아이를 알아봤다.
오딜리아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닮았으나, 테오도르는 그게 오딜리아가 아닌 이브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린 이브가 울고 있었다. 서럽게.
그 모습을 잠잠히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목울대가 아프게 일렁였다.
달래 주고 싶었다.
왜 우는 건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조금 전 알게 된 사실이, 그에겐 감히 그녀의 눈물을 닦아 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나는 자격이 없어.
그러니까 그냥 지나쳐야 해.
저 많은 이브들을 그냥 쳐다만 보았던 것처럼…….
“이브…….”
그러나 그는 결국 지나치지 못하고 울고 있는 어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훌쩍훌쩍, 울고 있던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
테오도르는 말없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테오도르의 기억 속 이브는 언제나 밝고 단단한 여자였다.
황후궁의 뒤뜰에서 처음 마주쳤던 아주 어렸을 때에도.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다시 만났던 때에도.
황궁에서 함께 사랑을 나누었던 때에도.
그리고 저를 미워하는 지금에마저도.
그녀의 그 밝고 건강한 모든 모습들을 사랑했다.
그 이면에 이처럼 연약하게, 구슬프게, 서럽게 울고 있는 그녀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녀의 무의식에 발을 딛고 나서야 그녀의 상처들을 여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런 스스로의 무지가 너무나 끔찍했다.
“왜, 우는 거야……?”
그 짧은 한마디를 꺼내는 데에도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엄마가 나를 이상한 아저씨한테 버렸어. 그 아저씨가 내 아빠래. 그런데 아빠는 나를 싫어해.”
“……그럴 리가. 너를 싫어할 리 없어.”
“왜?”
“왜냐니. 너는 이렇게…… 이렇게 예쁘고 사랑스러운데.”
“거짓말. 아빠는 내가 말을 걸려고 하면 화를 내고 인사도 안 받아 주는걸.”
“그건 네 아빠가 멍청해서 그래.”
그 말에 이브가 그를 빤히 쳐다보더니,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너도 그럴 거잖아, 테오.”
“…….”
“내 엄마처럼 나를 버리고, 내 아빠처럼 나를 미워하고 상처 줄 거잖아.”
“아니야, 난…….”
순식간에 이브가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에 주저앉았다.
오른손을 들어 거칠게 마른세수를 했다.
괴로웠다.
차라리…… 의식의 층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그녀가 자신을 때리고 욕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이곳의 이브들은 그마저도 하지 않았다.
그래, 이브는 원래 그런 성격이었다.
자신이 그렇게 상처 주었는데도, 그처럼 상냥한 편지를 남기고 떠났었지.
제가 이브였더라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대체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테오도르는 바닥에 엎드려 흐느끼듯 몸을 말았다.
그러나 차마 울 수 없었다.
[뭘 잘했다고 울먹여? 네가 울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그녀는 말했다.
제게는 울 자격도 없다고.
테오도르는 울지 않기 위해 어금니를 악물었다.
“윽…… 흡…….”
목구멍을 치밀고 올라오는 울음을 연신 삼켜 낸 탓에, 후두가 찢어질 듯 아팠다.
“으윽…….”
같은 자리에서 소리 없이 헐떡이던 테오도르는 차츰 정신이 혼미해져 가는 것을 느꼈다.
일순 어지럼증이 핑- 하고 도는 순간이었다.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되는가 싶더니,
“어……?”
귀여운 목소리가 들렸다.
* * *
“아조씨?”
“지지 아조씨다!”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목소리였다.
벌떡!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이브를 닮아 사랑스러운 두 아이가 테오도르의 앞에 서 있었다.
“아…… 여긴…….”
테오도르는 몽롱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록달록한 색상의 커튼과 침대. 여기저기 늘어진 귀여운 인형들.
아이들의 방인 것 같았다.
“리아 성공해써! 리아가 술씨(술식) 풀었어!”
오딜리아가 손뼉을 치며 기뻐했다.
그 말에 테오도르의 눈이 조금 커졌다.
“술식? 설마, 술식을 직접 해체한 건가?”
“웅! 리아가 술씨 푼 고야!”
“……굉장하군.”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놀라 감탄했다.
오딜리아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술식을, 그리고 흑마법을 발동하는 것만으로도 대단했는데, 그 술식을 스스로 해체하다니.
“으윽…….”
그의 아래에서 괴로운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힐긋 고개를 내리자, 벤야민이 제 밑에 깔려 있었다.
슬쩍 보기에도 상태가 굉장히 좋지 못했다.
테오도르에게 얻어맞은 탓이다.
“베냐민 삼쫀 주거써.”
“어몬니 말씀 마쟈써. 정말루 아조씨가 삼쫀 혼내 주러 가떤 고야.”
“아조씨가 삼쫀 죽인 거야?”
“아직 살아 있다.”
테오도르는 벤야민의 위에서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곧 죽겠지.”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빛무리가 밧줄 형태로 변하더니 벤야민을 결박했다.
“우와, 아조씨 모 한 고야?”
“아조씨, 손에서 반짝해써!”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신기해하며 테오도르와 벤야민을 번갈아 보았다.
“그보다…….”
테오도르는 창가로 걸어가 커튼을 걷었다.
그러자, 컴컴한 하늘이 보였다.
그가 이브의 정신 속으로 들어가기 직전에 보았던 것과 같았다.
아니, 상황은 조금 더 안 좋아 보였다.
“어떻게 된 거지…….”
그가 이를 악물며 중얼거릴 때였다.
“아조씨, 아조씨, 지지 아조씨.”
“어몬니 어딘눈지(어디 있는지) 궁금하지?”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브는 어디에 있지?”
“어모니 황궁 갔어. 황궁에 개물들 있대.”
“괴물?”
“웅! 개물!”
“어몬니는 개물 때러잡는 마뇬님(마녀님)이니까!”
“어모니는 셰샤(세상)에서 쩰루 멋진 마뇬님이야!”
아이들은 그 사실을 몹시 자랑스러워하며 말했다.
“……이브는 마녀가 아니야.”
“우웅?”
“모야, 아조씨. 우리 어모니가 멋있지 안타눈 고야?”
“그런 게 아니라…….”
에르빈이 테오도르를 향해 살벌한 눈빛을 보냈다.
테오도르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몰라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아조씨가 어몬니 나쁘게 말한 고야?”
오딜리아도 에르빈 못지않게 흉흉한 눈빛으로 테오도르를 째릿 노려보았다.
“그럴 리가. 내가 이브에게 나쁜 말을 할 리 없잖아.”
“구롬 몬데?”
“이브는, 마녀님보다는…….”
아이들의 강렬한 시선 속에서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공주님이라든가, 여왕님이라든가…….”
“공주님?”
“여왕님?”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눈동자가 땡그랗게 커졌다.
“천사님이라든가, 아니면 여신님이라든가…….”
“멋있짜나!”
“마쟈! 우리 어몬니는 여왕님이야!”
이내 두 아이가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며 활짝 웃었다.
“여왕님보다 공주님이 더 조은 거 아냐?”
“아이참, 에르. 어몬니가 여왕님 해야 에르도 왕자님 하지.”
“우와! 구럼 어모니는 여왕님이구, 에르는 왕자님이구, 리아는 공주님 하는 고야?”
“아아니, 리아는 용싸님이야! 리아는 다람찌 용싸자나.”
“아 참, 구로치.”
구석에서 그 대화를 잠자코 듣던 제리코만이 좋지 못한 안색으로 혀를 내둘렀다.
‘세상에……. 무슨 천 년 전 사람들도 쓰지 않을 닭살스러운 표현을…….’
공주님이니, 여왕님이니…….
위대한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이야기를 창조한 그의 기준에 한참이나 미달되는 표현이었다.
“그래서, 우리 여신님이 황궁에 계신다고?”
“웅! 기사님들이랑 갔어.”
“개물 때려자부러 갔어.”
“그래.”
테오도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조씨, 오디 가?”
“구하러 가야지, 우리 여신님.”
“아조씨가 어모니를?”
아이들은 조금 믿음직스럽지 못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봤다.
그간 아이들이 본 테오도르는 어머니의 앞에서 새끼 양처럼 약해 보였기 때문이다.
“어모니가 콩 하구 때리몬 깨애액 죽을 꺼 같은데…….”
“어몬니가 ‘조리 가, 지지!’ 하고 화내몬 뿌에엥 울 꺼 같은데…….”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품평하듯 테오도르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정정하지. 우리 여신님께 작은 도움이나마 되어 드리러 갈게.”
테오도르는 빠르게 말을 바꿨다.
그러나 그를 향한 의심의 시선은 가시질 않았다.
“우으음……. 아조씨 몬 믿겠어.”
“웅웅, 아조씨는 너무 약해서 안 돼.”
“에르가 같이 가서 지켜 조야게써.”
“리아도 같이 가서 지켜 조야게써.”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뭐?”
“에르랑 리아두 데려가.”
“안 돼. 위험해.”
“리아가 아조씨 지켜 두리께요. 웅?”
오딜리아가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속눈썹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에르가 아조씨 아야 하몬 다 치료해 주께. 우웅?”
에르빈이 테오도르의 팔에 매달려 머리통을 비비적거렸다.
“윽…….”
그런 두 아이들이 너무 귀여웠지만…….
“그렇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테오도르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자신을 향해 빵빵하게 양 볼을 부풀린 두 아이를 뒤로하고 방을 나섰다.
“에른스트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테네브리스는 제 목덜미에 검을 겨눈 채로 무섭게 몰아붙이는 여자를 힐긋 응시했다.
제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이만큼이나 거리를 좁힐 정도로 가볍고 빠른 몸놀림을 지닌 여자였다.
“고작 인간 여자 따위가, 내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테네브리스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그러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평범한 인간 여자가 아니었다.
저를 향해 겨눈 그녀의 검 주위로 녹색 검기가 일렁거렸다.
아직 제 몸은 완전하지 않았다.
과거 저를 봉인시킨 그 빌어먹을 것들이 제 영혼을 여덟 갈래로 갈기갈기 조각내어 세상에 뿌린 탓에.
‘여덟 번째는 어디로 갔는지도 알 수 없고.’
오래전, 테네브리스가 영면에 든 직후.
그의 영혼은 여덟 갈래로 쪼개어졌다.
알브레히트 황가와 3대 가문은 테네브리스의 네 개의 조각을 나누어 가졌다.
남은 세 개의 조각은 테네브리스를 모시던 서쪽 땅의 마도사들이 훔쳐 내었다.
이미 ‘그릇’ 안에 테네브리스의 영혼을 담을 때, 그것들 중 세 개의 조각이 사용되었다.
그리고 조금 전 이곳에 막 도착한 두 가문의 가주들에게서 두 개의 조각을 발견했다.
남은 두 개의 조각 또한 멀지 않은 곳에서 기운이 느껴지고 있으니, 머지않아 찾게 될 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행방이 묘연하여 문헌에 기록되지 못한 여덟 번째 조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여덟 번째를 찾지 못한다면, 다른 일곱 조각은 쓸모가 없었다.
저의 ‘진짜 영혼’과 과거 제가 지녔던 모든 힘이 그곳에 담겨 있으니까.
거꾸로 말해 여덟 번째 조각만 찾는다면, 나머지 조각들이 모두 파괴된다 하더라도…….
‘여덟 번째를 분리해서 숨긴 건 체르니시아의 선택이었지.’
체르니시아는 테네브리스가 영면에 들기 직전, 그의 여덟 번째 조각을 분리해 다른 차원의 시공으로 보냈다.
‘내가 다시 부활하지 못하도록, 긴 시간 속에 영원히 잠들어 깨어나지 못하도록 그런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기분 나쁘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어서 말해. 너, 에른스트를…….”
여자의 검날이 테네브리스의 살갗 위로 바짝 붙었다.
테네브리스는 이를 악문 채로 여자를 노려보았다.
아직 완전하지 못한 저는 저 여자를 이기지 못한다.
‘젠장…….’
테네브리스는 짜증이 났다. 고작 인간 여자 앞에서 힘을 못 쓰고 대치 중이라는 게.
하필이면 그 여자가 제가 기억하는 체르니시아와 닮아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그가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고 험악한 눈으로 여자를 노려보고만 있을 때였다.
‘어라……?’
여자의 눈동자 속에 옅은 동요가 엿보였다.
‘이거, 어쩌면…….’
순간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휘었다.
갑작스러운 그의 태세 전환에 여자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 순간이었다.
사르륵-
발끝까지 자라나 있던 테네브리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서서히 짧아지며 화사한 백금발로 변해 갔다.
멈칫.
여자의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왜, 날 해치려고?”
테네브리스가 미미한 웃음기가 담긴 목소리로 물었다.
순식간에 그의 모습이 생전 그를 담고 있던 ‘그릇’의 것과 같아졌다.
온화하고 상냥한 미소를 띤, 황궁의 모든 사용인들에게 사랑받았던 에른스트 2황자의 얼굴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오직 하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그 붉은 눈동자만이 본래의 에른스트와 달랐다.
“나를 죽일 거야, 이보네?”
테네브리스가 사근사근한 말씨로 물었다.
핏빛처럼 새빨간 눈동자가 둥글게 휘었다.
“……!”
여자가 당황해하는 게 느껴졌다.
그 모습을 보며 테네브리스는 속으로 비웃었다.
‘나를 죽이지도 못할 여자가 허세를 부린 거였군.’
조금 전 저를 향한 옅은 동요를 품고 있는 여자의 눈동자를 보며, 자신을 공격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막 그 생각은 확신이 되었다.
‘그 인간 황자랑 친구였었지.’
쓸데없이 유약해서 툭하면 눈물을 흘리던, 저를 담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던 하찮은 인간 황자.
테네브리스는 자신의 영혼이 막 ‘그릇’ 안에 움트던 순간을 떠올렸다.
고목이 자라던 페르디난트의 안뜰은 과거 테네브리스가 봉인당한 장소였다.
승리를 기념하여, 페르디난트의 후손들은 경사가 있을 때 그곳에서 축복을 했다.
그 전통이 조금씩 변화하여 임신한 부부가 그곳에 와 축복을 비는 관습이 자리 잡았다.
긴 영면 속에 고요히 눈 감고 있던 테네브리스는, 어느 날 어떤 예고도 없이 문득 눈을 떴다.
그 또한 이유를 알 수 없을 만큼 갑작스러운 기상이었다.
그러나 그를 담을 ‘그릇’이 없던 탓에 테네브리스는 형체 없이 세상을 부유해야 했다.
강한 힘을 좇아 그를 깨우고자 하는 이들은 수천 년에 걸쳐 주욱 있어 왔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 또한 그들 중 하나였다.
황제의 아이를 임신한 마르가라테는 페르디난트의 오랜 관습에 따라 축복을 위해 고목 앞에 섰다.
그곳에서 그녀는 자신의 배 속에 잉태된 가장 순수한 어린 영혼을 재료로 바쳐 ‘그릇’을 만들었다.
그때 희생된 에른스트의 진짜 영혼은 수년간 테네브리스의 양분이 되어 서서히 말라 갔다.
그리고 그들은 그간 찾아낸 세 개의 영혼 조각을 ‘그릇’ 안에 담았다.
그러나 그것으로 테네브리스가 완전히 깨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를 유지하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고, 마르가라테는 제물을 유지하기 위해 가호를 받은 자들의 생명을 바쳤다.
매일 밤, 황궁에서 시체가 나왔다.
테네브리스의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바쳐진 제물들이었다.
차츰 황궁 내에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어느 순간 사람들은 검은 머리를 타고난 테오도르 1황자를 소문 속 주인공으로 지목했다.
물론 여기에는 마르가라테의 뒷공작이 있었다.
마르가라테는 ‘보호’라는 이름으로 에른스트 2황자를 꼭꼭 감추어 사람들 앞에 내보이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그를 차대 황제로 옹립하고자 루돌프와 함께 힘을 썼다.
대륙을 호령하는 제국 알브레히트.
장차 그것을 통째로 테네브리스에게 바치기 위해.
테네브리스는 에른스트라는 ‘그릇’ 속에서 조금씩 힘을 키워 갔다.
과거, 세상을 창조하였던 브리힘 신은 자신을 모시는 네 명의 종을 두었다.
빛의 길잡이, 레오브란테.
하늘의 대리인, 페르디난트.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그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브리힘 신의 섭리를 펼치며, 여러 신도들을 거느렸다.
그리고 그들의 힘은 그 명성에 비례했으니, 그들을 좇는 자들이 많을수록 그 세력도 더욱 커졌다.
그러나 현세대에 악으로 규정되어 ‘고대의 어둠’이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이름을 당당하게 내세우는 자는 없었기에.
음지에서 자행되는 흑마법은 그를 깨우기에 너무나 미약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가 흑마법을 발동시키기는 하였으나, 테네브리스에게는 부족한 수준이었다.
위기의 순간 또한 있었다.
군터 체르니시아, 그와 마주친 순간 그의 검집에 박혀 있던 푸른 에메랄드가 제게 반응했으니까.
본래 제 영혼의 조각이기도 하였던 그 보석을 그들이 나누어 가진 건, 혹시나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낼지 모르는 저를 감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당신, 정체가 무엇입니까!]
[왜, 왜 그러는 거야……?]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나, 나는 2황자 에른스트…….]
이 비루한 몸뚱이는 울먹이는 것 외에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내버려 두면 애써 자리 잡은 ‘그릇’이 이대로 부서질 판국이라, 테네브리스는 직접 움직이는 것을 택했다.
그가 그려 낸 술식에 걸려든 군터는 황제를 자신으로 착각했고, 끝내 황제의 몸에 검을 쑤셔 박았다.
그 순간 뒤늦게 술식이 해제되며 정신을 차렸으나, 이미 그가 황제를 시해하려 한 정황을 모두가 보고 난 뒤였다.
그 여파로 테네브리스는 한동안 힘을 잃고 ‘그릇’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툭하면 눈물을 흘리는 유약한 어린 황자의 영혼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단하였다.
이보네, 그러니까 지금 제 목에 검을 들이밀고 있는 저 여자를 향한 기다림이 그의 영혼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이어진 루돌프와 마르가라테의 죽음으로 인해 그 영혼이 동요하지 않았더라면, 테네브리스의 영혼은 볼품없게도 하찮은 ‘그릇’ 따위에게 먹혔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이보네의 죽음으로 ‘그릇’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벤야민의 흑마법이 테네브리스를 다시 깨웠다. 물론 벤야민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후로 테네브리스는 완벽한 부활을 위해 움직였고…….
테네브리스가 한참 그러한 과거를 되짚고 있을 때였다.
“그래.”
돌연 눈앞에서 들려온 단호한 목소리가 그의 생각을 멈추게 했다.
테네브리스는 멈칫하며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가 언제 동요했냐는 듯 곧은 눈으로 그를 응시하며 검날을 세웠다.
“필요하다면 너를 죽일 거야, 얼마든지.”
“윽…….”
검날이 닿는 자리의 살갗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새 나왔다.
검을 쥔 손에 힘이 꾸욱 들어갔다.
나는 내 눈앞에 있는 에른스트…… 아니, 에른스트의 모습을 하고 있는 알 수 없는 존재를 노려보았다.
‘에른스트가 아니야.’
핏빛처럼 선명한 붉은 눈동자를 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를 죽일 거야, 이보네?]
에른스트와 닮은 얼굴로 그렇게 말했던 순간에 조금 흔들리긴 했으나, 이자는 결코 에른스트가 아니었다.
에른스트라면 절대 지을 리 없는 표정과 목소리.
조금 전, 나와 셀린느를 공격하기 위해 곳곳에서 우수수 피어난 수십 개의 검은 가시들.
그리고 사람이라면 마땅히 피를 흘려야 하는데, 검날에 찢긴 살갗에 새 나오는 것은 붉은 피가 아닌 검은 연기였다.
‘그럼 대체 뭐지?’
마물이라기에는 훨씬 더 고등한 생명체 같았다.
[어둠…… 가장 깊고 위험한 어둠이에요!]
셀린느는 그를 가리켜 가장 깊고 위험한 어둠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혹 이 남자가…….
“고대의, 어둠?”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도 모르게 남자를 보며 그렇게 읊조렸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얼굴을 한 남자가 비릿한 웃음을 내지었다.
그 순간 그가 에른스트와 다른 존재라는 게 강하게 느껴졌다.
“고대의, 어둠이라.”
키득키득.
남자의 잇새로 조소가 터져 나왔다.
“그래, 이 세대의 사람들은 날 두고 그렇게 부른다지.”
“……!”
순순히 인정하는 말에 나는 멈칫하며 그를 보았다.
“나의 진명은 테네브리스.”
나른하게 입매를 비틀어 올린 남자가 나긋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순간 발을 딛고 서 있는 땅 위로 미세한 흔들림이 느껴졌다.
“브리힘 신의 가장 뛰어난 종이자 어둠을 다스리는 집행관.”
남자의 주위로 피어난 검은 기운들이 일렁거리며 주변을 새까맣게 물들였다.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쳐다볼 수 없는…… 윽…….”
그러나 내가 검날을 세우는 순간 남자의 여유가 곧바로 깨졌다.
“당장 저거 치워.”
나는 검을 고쳐 잡으며 금방이라도 그의 목을 베어 낼 듯 무섭게 위협했다.
“젠장.”
남자가 욕설을 내뱉으며 검은 기운을 없앴다.
‘말도 안 돼. 테네브리스라면 악으로 규정된 고대 사도 중 하나잖아. 고대의 사도가 어떻게…….’
나를 노려보고 있는 차가운 붉은 눈동자를 가만히 쳐다보며 생각할 때였다.
“이보네…….”
갑자기 그가 서글픈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그가 울먹울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에른스트의 얼굴이었다.
“이보네, 나 아파…….”
에른스트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의 목에 겨눠진 검날을 맨손으로 쥐었다.
“이보네, 이거 치워 줘. 무서워.”
그의 손바닥이 찢어지며 그 사이로 검은 기운이 새 나왔다.
‘흔들리면 안 돼. 저건 사람이 아니야.’
나는 피 대신 흐르는 검은 기운을 쳐다보며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었다.
“나, 나란 말야, 에른스트.”
그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인 채로 훌쩍훌쩍 울었다.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너, 에른스트의 흉내를 내는 건 당장 그만…….”
“왜? 내가 테오도르 형님보다 못나서 그래?”
그의 입에서 테오도르의 이름이 나온 순간 나도 모르게 멈칫했다.
“그래서 날 속이고 사라졌던 거야?”
서러운 목소리로 에른스트가, 아니, 에른스트를 흉내 내고 있는 고대의 어둠이 물었다.
“허튼소리 말고…….”
“좋아해.”
이어진 그의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널 좋아했던 거, 너도 알고 있잖아.”
“……!”
순간 당황하여 사고가 정지되었다.
“하지만 너는 그걸 어린 날의 지나가는 감정이라 생각했지.”
“무슨…….”
“테오도르 형님만 널 좋아한 게 아니야. 나도 널 좋아했어.”
남자는 마치 자신이 정말 에른스트라도 된 것처럼 울며 고백했다.
“좋아해, 이보네.”
“…….”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쭈욱-.”
내가 굳어 있는 사이 그의 주위로 검은 기운들이 다시 피어났다.
그것들이 검은 가시의 형태로 변해 가는 무렵이었다.
쿠과과과과과과과광-!
요란한 굉음과 함께 주위가 흔들렸다.
“에른스트, 이 미친 새끼! 어디서 이브에게 개수작질이야!”
퍼억-!
별안간 뒤쪽에서 뛰어 들어온 남자가 테네브리스의 멱살을 움켜잡고 밀어 넘어뜨렸다.
검은 뒤통수만으로도 잘생긴 저 남자는…….
“테오도르?”
테네브리스의 위에 올라타 그를 제압한 남자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폐하!”
“폐하, 어딜 가셨다가 이제 나타나신……!”
바깥에서 마물들을 막던 린든과 기사들도 뒤따라 들어섰다.
“젠장, 이건 또 뭐……. 레오브란테?”
테오도르의 아래에 깔린 테네브리스가 그의 황금색 눈동자를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흉악한 기운을 가진 레오브란테가 있다고?”
테네브리스는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느새 그가 풍기던 검은 기운들이 모두 사라져 있었다.
테오도르가 등장한 순간부터.
“테오도르? 어떻게 된 거야?”
“구하러 왔어, 여신님.”
그가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 말에 소름이 돋았다.
“미쳤어? 그런 말은 어디서 배운 거야?”
경악하여 되묻자, 그는 더욱 짙게 웃었다.
“별론가? 그럼 정정할게. 테오가 도우러 왔어요, 주인님.”
그러고는 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나긋나긋하게 속삭였다.
“테오는 착한 개새끼니까.”
나뿐만이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끔찍하단 표정을 지었다.
심지어는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테네브리스마저.
“미친 인간인가…….”
“형님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에른스트.”
테오도르가 곧바로 고개를 홱 돌려 테네브리스를 내려다보았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 황궁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던데.”
그가 비식 웃으며 사납게 물었다.
“에른스트, 네 짓인가?”
“테오도르! 네 아래에 있는 거, 에른스트가 아니야. 에른스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다른 존재야.”
“다른 존재?”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붉은 눈동자를 빤히 쳐다보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설마, 테네브리스?”
“나를 바로 알아보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에른스트를 흉내 낸 밝은 백금발이 새까맣게 물들며 길어졌다.
분명 에른스트의 이목구비가 남아 있었으나, 그 소름 끼치도록 차가운 분위기 때문인지 전혀 다른 사람처럼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그런 테네브리스를 내려다보며 으르렁거렸다.
“부활했으면 곱게 있을 것이지, 감히 내 얼굴도 아니고 에른스트 따위의 얼굴로 나의 이브에게 수작질을 부려?”
“저자가 황궁의 사람들을 죽이고 마물들까지 불러일으켰습니다!”
린든의 보고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어디 있다가 이제 나타난 건진 모르겠지만, 내가 이곳까지 오면서 본 것처럼 그 또한 보았을 것이다.
고작 반나절 사이에 사람들이 죽어 나가고 마물들로 뒤덮인 황궁의 모습을.
순간 테오도르의 주변 공기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그의 주위로 수십 개의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나더니 일제히 단검의 모양을 띠었다.
‘어……?’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무심결에 의문이 하나 들었다.
‘이제 보니…….’
아까는 생각지 못했는데, 조금 전 테네브리스가 수십 개의 검은 가시를 피워 내던 모습과 조금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이놈을 죽이면 되는 건가.”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를 향해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등장 이후로 아주 작은 힘도 쓰지 못하던 테네브리스가 두 눈을 둥글게 휘며 웃었다.
“나를 죽이면, 저 여자가 아끼는 그 인간 황자가 죽을걸?”
“뭐?”
“그 황자는 나를 유지하는 ‘그릇’이었으니까.”
순간, 아까 그가 혼잣말로 중얼거리던 게 생각이 났다.
[내 그릇을 만드는 데 소모된 하찮은 인간 황자가 아닌가.]
테네브리스는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그릇’을 만드는 데에, 인간 황자가 소모되었다고.
그리고 그가 말하는 인간 황자는 틀림없이 에른스트일 것이다.
나는 참지 못하고 검을 쥐고서 다가갔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의 아래 깔린 테네브리스를 향해 검 끝을 겨누었다.
“말해, 에른스트를 어떻게 한 거야? ‘그릇’이니 뭐니, 그건 무슨 소리지?”
녹색 검기를 두른 검 끝이 테네브리스의 가슴을 금방이라도 찌를 듯 위협했다.
황궁의 기사들은 에른스트가 마물이 되었다고 그랬다.
에른스트가 마물이 되어, 황궁을 점령했다고.
그리고 눈앞에 있는 이 모든 일의 원흉은 에른스트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순히 얼굴만 흉내 낸 게 아니었다.
나를 향해 울먹이던 표정, 목소리, 에른스트 본인이 아니라면 꺼낼 수 없던 말들…….
“말 그대로. 이 몸은 나를 깨우려던 이들이 내 영혼을 담기 위해 만든 ‘그릇’이다. 이 육신 안에 있던 본래의 순수한 영혼은 어미의 배 속에 잉태되었을 때부터 나를 위해 바쳐졌지.”
“뭐……?”
아주 잠시, 그 말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 말을 이해하기 위해 곱씹을 때였다.
“젠장. 그러니까 사랑스러운 내 이복동생이, 사실은 고대의 어둠을 깨우기 위한 ‘그릇’이었다는 거잖아?”
테오도르가 아주 잘 아는 이야기를 하듯 이를 바드득 갈며 말했다.
“호오, ‘그릇’에 대해 아나 보네, 인간?”
테네브리스가 흥미롭다는 얼굴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순수한 영혼이라는 게 설마…….”
“세상의 빛을 만나지 못해 때 묻지 않은 배 속의 영혼 말이야.”
테네브리스는 키득키득 웃으며 설명했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완벽하게 구겨져다.
“마르가라테…… 그 미친 여자가 그딴 짓을 벌인 건가. 하, 아버지도 불쌍하시지. 인간도 아닌 것을 황궁에서 기르고 있었군.”
“맞아, 그 비루한 인간 황자의 영혼은 나의 양분이 되어 말라비틀어졌지. 내가 완전히 부활하는 날, 완벽하게 소멸할 거야.”
그들의 대화를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 지금 이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 마르가라테가 배 속에 있던 에른스트를 제물로 바쳐 저자를 깨울 ‘그릇’을 만든 거야.”
“배 속에 있던……?”
“그래. 그러니까 태어나기 전부터 이미 에른스트는 인간이 아니라 저것의 ‘그릇’이었다고.”
“……!”
나는 충격받은 얼굴로 테네브리스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그 얼굴 위로 얼핏 남아 있는 에른스트의 이목구비를 좇았다.
어지간한 남자들은 다 밀가루라던 눈 높은 오딜리아가 유독 예쁘다며 좋아했던, 겁 많은 고양이 상의 얼굴…….
“그럼 저자를 죽이면…….”
“에른스트도 죽는 거지.”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며 대답했다.
검을 쥔 내 손이 처음으로 흔들렸다.
에른스트가…… 죽는다고?
[이보네!]
[그럼 술래는 내가 할래!]
[이, 이보네에…… 흐아아아아앙.]
[이보네! 내가 꼭 다시 너를 데리러 올게! 체르니시아의 억울함도 풀어 주고, 너의 가족들 모두 찾아서 데리러 올 거야!]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약속을…… 너와 약속을…….]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뭐, 못 질 것도 없지.]
나의 착하고 눈물 많은 친구의 목소리가 귓가에 메아리쳤다.
‘하지만 죽이지 않으면…….’
빛을 잃은 태양과 어두워진 세상, 하늘과 땅을 뒤덮은 마물들, 그리고 이곳에 오면서 보았던 죽은 사람들.
짧은 반나절 사이에도 막심한 피해가 일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를 죽이지 않으면 세상은 더 큰 피해를 볼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는 체르니시아의 가주로서 그를 없애야 할 의무가 있었다.
‘에른스트…….’
울컥, 밀려오는 감정에 목구멍이 따끔따끔 아파 왔다.
나의 친구는 어머니의 배 속에서 태어나기도 전부터 이미 고대의 어둠을 깨우기 위한 ‘그릇’이 되기 위해 희생되어 왔다고 했다.
에른스트를 희생시킨 이는 다름 아닌 그의 생모였던 마르가라테 황후…….
그녀의 의지로 인해 에른스트는 세상을 위협하는 존재로 태어나 길러져야 했다. 그 스스로도 사실을 모른 채로.
알게 된 사실이 나의 친구에게 너무나 잔인했다.
그리고, 또한 내게도.
[고대의 어둠을 물리치고 마물로 뒤덮여 있던 세상을 구한 세 명의 사도 중 하나가 바로 체르니시아야. 우리는 그녀의 유지를 이어받았고.]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
‘하지만 내가 어떻게 에른스트를 없애?’
생각만으로 몸이 후들후들 떨려 왔다.
‘에른스트는…… 에른스트잖아. 무엇으로 태어났든, 에른스트잖아. 그런데 내가 어떻게 에른스트를…….’
끔찍했다.
도무지 머릿속이 진정되질 않았다.
짧은 심호흡을 하고서 다시 테네브리스를 보았다.
에른스트의 흉내를 내는 건 완전히 포기한 듯, 그는 차갑고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쥐고 있는 검 끝이 그의 심장을 노리고 있음에도.
“정말 나를 죽이려고?”
테네브리스는 비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 황자님만 불쌍하게 됐네. 좋아하는 여자애도 형님에게 두 번이나 빼앗겼는데, 이제는 그 여자애의 손에 죽는 거잖아.”
“닥쳐.”
킥킥거리며 말하는 그 모습에 화가 났다.
“에른스트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모른 척하고 싶나 보군. 하지만 정말이다. 내가 몸 담고 있는 ‘그릇’의 감정도 모를까 봐.”
“…….”
“이 황자님은 널 좋아했어. 어렸을 때도, 다시 만난 뒤에도, 그리고 지금도.”
말문이 턱 막혔다.
어린 날의 소꿉친구였던 에른스트.
그가 어렸을 때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피했던 걸 알고 있다.
언니들에게 종종 눈치가 없다는 소리를 듣던 나마저도 알아챌 만큼, 티가 나게 나를 좋아했었다.
하지만 다시 만난 에른스트는 한 번도 내 앞에서 그런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재미있는 거 알려 줄까?”
테네브리스는 남 이야기를 하듯 즐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그 인간 황자의 영혼은 죽지 않았어. 내가 완벽하게 부활할 때까지 사용될 나의 양분이니까. 생명력을 잃고 말라 갈 뿐이지, 죽지 못하거든.”
일순 그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그런데 그 인간 황자가 지금 이 대화를 모두 듣고 있어. 이 안에서.”
“……!”
“부끄러운가 봐. 내가, 자신의 비밀을 말해서.”
테네브리스가 눈꼬리를 가늘게 휘며 말했다.
“그냥 죽여 달래. 널 괴롭게 하고 싶지 않다고.”
저 말을 모두 믿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저 말이 정말이든 아니든…….
욱신-
마음이 아팠다.
나도 모르게 소리 없는 눈물을 흘릴 정도로.
주륵, 뺨을 타고 내려온 눈물이 턱 끝에 아롱져 아래로 떨어졌다.
그것을 본 테네브리스의 얼굴 위로 더욱 짙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러니 네 손으로 직접 이 가엾은 황자님의 소원을 들어주는…… 윽…….”
퍽-!
큭큭거리며 웃던 테네브리스의 얼굴을, 테오도르가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브가 닥치라잖아.”
“인간 황제 따위가……!”
퍼억-!
으르렁거리는 테네브리스의 반대편 얼굴을, 테오도르가 다시 한번 내리쳤다.
“이브, 내가 할게.”
허공 위로 둥둥 떠다니던 황금빛 단검들이 하나로 뭉치는가 싶더니 길쭉한 장검이 되었다.
테오도르가 성력으로 만들어 낸 황금빛 검을 손에 쥐었다.
“테오도르……?”
“착한 강아지가 되기로 했지만, 딱 한 번만 나쁜 개새끼 할게. 나중에 혼내 줘.”
“하지만……!”
담담한 목소리로 말한 것과 달리 테오도르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차라리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에른스트는 네게도 가족이잖아.”
“…….”
그 말에 테오도르가 잠시 침묵했다.
“알잖아, 이브. 나는 인성이 못돼 처먹은 놈이라는 거.”
그러더니 이내 나를 안심시키듯 말했다.
“네 말마따나 난 쓰레기고.”
“…….”
“쓰레기가 쓰레기 짓 하는 거야. 너는 그냥 나를 욕하면 돼.”
후득, 후드득-
그 말에 안심이 되기는커녕, 눈물만 더 거세졌다.
에른스트가, 이제는 내 유일한 친구인 그 애가 죽어야만 한다는 사실이 너무 잔인했다.
* * *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며 가 버린 테오도르 때문에 잔뜩 토라져 있었다.
어찌나 토라졌는지, 다람쥐처럼 빵빵한 양 볼이 제리코의 것보다 더욱 부풀었다.
“지지 아조씨 믿으면 안 됐어.”
“함종(함정)을 더 크게 파서 혼내 조야 해.”
테오도르는 벤야민의 신병을 브리안에게 넘기고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어케 그럴 수가 있지. 리아가 기엽게 눈 깜빡핸눈데.”
오딜리아는 제가 두 눈을 앙증맞게 깜빡이며 부탁했는데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이보네 제외하고 처음 보았다.
“어케 그럴 수가 있지. 에르가 기엽게 머리 비비 핸눈데.”
에르빈 또한 제가 팔에 매달려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부렸는데 들어주지 않는 사람은 이보네를 제외하고 처음 보았다.
“다람찌, 넌 이게 말이 된다구 생각해?”
“네, 말도…… 안 되지요.”
제리코는 해탈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 제리코는 창가에 매달려 어둑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론데 리아, 저 하늘 말이야. 리아 모리카락 같아.”
“지굼 리아 논리눈 고야?(지금 리아 놀리는 거야?)”
그러잖아도 테오도르로 인해 토라져 있던 오딜리아가 두 눈을 뾰족하게 치켜떴다.
“웅? 아아니, 구게 아니라…….”
“리아 모리카랑 깜타구(까맣다고) 논리눈 고네!”
“아니, 구고 아닌데…….”
“흥!”
오딜리아는 제리코를 꼬옥 끌어안은 채로 몸을 홱 돌렸다.
“리아, 지쨔 아냐!”
울상이 된 에르빈의 외침에 오딜리아의 품에 안긴 제리코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에휴, 나는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테네브리스 님은 지금쯤 날 찾고 계시려나.’
* * *
‘아주 눈물겨운 사랑이군.’
테네브리스는 이보네와 테오도르를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짜증 나게…….’
기분이 썩 불쾌했다.
테오도르가 등장한 이후로 힘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레오브란테는 빛이고 테네브리스 자신은 어둠이었으니, 불완전한 어둠은 빛 앞에서 힘을 잃는 게 마땅한 이치이긴 했으나…….
‘이유를 알 수 없군.’
단순히 테오도르가 지닌 성력 때문이라기에는, 먼저 들이닥쳤던 셀린느의 성력과 부딪쳤을 때는 없던 일이라 조금 이상했다.
그러나 테네브리스는 그 까닭을 찾길 포기했다.
이미 이 세계에 흥미가 식은 탓이다.
어차피 체르니시아도 없는 세상이었다.
그저 이 기회에 완벽하게 소멸해 버렸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체르니시아, 그녀가 소멸한 것처럼.
‘애초에 소멸하지 못하고 영혼이 조각나게 된 건 그들의 징벌이었지.’
테네브리스는 시큰둥한 얼굴로 테오도르를 도발했다.
“왜, 못 죽이겠어?”
“그럴 리가.”
테오도르가 어금니를 악문 채로 테네브리스의 멱살을 붙잡아 일으켰다.
툭.
거친 움직임에 테오도르의 주머니 안에 있던 검은 거울이 툭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저건……?’
순간 테네브리스의 눈가가 찌푸려졌다.
그의 영혼 조각을 봉인한 성물 중 하나였다.
마땅히 그에게 반응해야 할 거울이 반응하지 않고 있었다.
‘음……?’
테네브리스는 멍하니 그 거울을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검은 거울에 비치는 테오도르의 모습을.
“어째서…….”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아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어째서, 저 남자의 등장 이후로 제 힘을 꺼낼 수 없었는지.
“하…….”
그러나 이내 그는 버석한 웃음을 흘렸다.
이제 와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다.
테네브리스가 그렇게 생각하며 다가올 자신의 소멸을 기다리던 때였다.
“테오도르…….”
이보네가 테오도르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순간 테네브리스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물러나, 이브.”
“하지만…….”
“어서.”
두 사람이 무어라 대화를 주고받았지만, 테네브리스는 그 어느 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릿속이 새하얘짐과 동시에 심장이 거센 울림을 내며 내려앉았다.
쿵-!
거울에 비친 여자의 모습은…….
‘체르니시아……!’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저 여자가 이곳에 발을 들인 순간, 문득 느껴지던 그녀의 기운.
‘하지만 분명 소멸했다고……!’
그러나 부정할 수 없는 그녀의 영혼이었다.
눈 감는 순간에마저도 잊지 못했던 나의 체르니시아.
눈앞의 여자는, 분명 그녀였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테네브리스는 테오도르에게 달려들었다.
퍼억-!
갑작스러운 반격에 테오도르의 몸이 밀려나며 바닥에 부딪혔다.
그 바람에 그가 쥐고 있던 황금빛 검이 빛 가루가 되어 스르륵 흩어졌다.
“뭐야, 윽…….”
테오도르의 위로 올라탄 테네브리스가 한 손으로 그의 목을 덥석 붙잡았다.
“큭…….”
미미하게 전해지는 고통에 테오도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이제까지는 본힘을 꺼내지 않았던 건지, 숨통이 조일 듯 강한 악력이었다.
“테오도르!”
“폐하!”
“폐하!”
이보네를 비롯한 안의 사람들이 놀라 재빨리 검을 고쳐 잡았다.
그러나 테네브리스가 테오도르의 숨통을 조이는 게 더 빨랐다.
“멈춰.”
그가 사람들을 향해 경고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길쭉하게 자라난 테네브리스의 손톱이 테오도르의 살갗을 뾰족하게 찔러 댔다, 마치 흉기처럼.
테오도르의 목덜미에서 발간 핏물이 흘렀다.
“……!”
“……!”
고통스럽게 신음을 삼키는 그의 모습에 모두가 그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했다.
피식.
테네브리스의 잇새로 짧은 조소가 흘러나왔다.
비록 테오도르의 등장 이후로 브리힘 신의 가호를 쓰지 못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간들에게 쉽게 당할 만큼 무능하지는 않았다.
그저, 그렇게까지 하여 이 세상을 살아갈 의지가 없었을 뿐.
‘갑자기 왜……!’
이보네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테네브리스를 노려보았다.
조금 전까지 어서 자신을 죽이라며 삶을 포기한 듯 보이던 태도와 상반된 모습이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이보네는 숨을 삼키며 테네브리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여차하면, 테오도르가 조금 다치는 것을 감수하고서라도 그를 제압해야만 한다.
그러한 생각에 그녀의 신경이 한껏 예민해져 있을 때였다.
테네브리스가 왼손으로 테오도르의 숨통을 옥죈 채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느긋하게 그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내렸다.
“이, 이 미친 새끼, 무슨 짓을…….”
테오도르는 끔찍하단 얼굴로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목에 박힌 손톱이 더욱 아프게 그를 옥죄었다.
테오도르의 가슴 부근을 더듬던 테네브리스가 어느 지점에서 멈칫했다.
“이곳이군.”
이윽고 테네브리스의 입술이 부드럽게 휘었다.
“무슨…… 윽…….”
세워진 뾰족한 손톱 끝이 테오도르의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검은 기운이 흘러나왔다.
“뭐, 뭐야?”
테오도르는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심장 부근에서 흘러나온 검은 기운이 테네브리스에게로 흡수되어 갔다.
새 힘을 흡수한 테네브리스는 몹시 산뜻한 표정으로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내 여덟 번째 조각에게 자아를 주어 다시 태어나게 할 줄은 몰랐지.”
“뭐……?”
“나의 체르니시아는 이렇게나 귀여운 일을 꾸미고 있었는데.”
순간, 거센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윽……!”
버티기 힘든 강한 돌풍에 사람들의 몸이 밖으로 날아갔다.
이보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검 끝을 바닥에 박아 넣어 간신히 버티고 있던 그녀의 몸이 다른 이들과 함께 날아가려는 찰나.
휘이익-
길쭉한 고리 형태로 뻗어 나온 검은 기운이 그녀의 몸을 칭칭 감아 붙잡았다.
그리고 동시에,
쾅!
거친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다.
닫힌 알현실 안에 남은 것은 테오도르와 이보네, 그리고 테네브리스뿐이었다.
테네브리스는 나른하게 몸을 일으켰다.
내내 그의 아래에 깔려 있던 테오도르의 몸은 이보네와 마찬가지로 검은 기운으로 칭칭 묶여 움직일 수가 없었다.
테네브리스는 검은 기운이 끝없이 새 나오고 있는 테오도르의 가슴팍을 발로 꾸욱 밟았다.
“윽…….”
테오도르가 거칠게 저항하였으나, 검은 기운으로 꽁꽁 묶인 그의 몸은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테네브리스는 그런 테오도르를 벌레 보듯 쳐다보더니, 이보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거지, 테네브리스?”
“…….”
사납게 외치는 그녀를 향해 길고 애달픈 시선이 이어졌다.
자박, 자박.
그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보네의 앞에 섰다.
“……나의 체르니시아.”
“뭐, 뭐야?”
조금 전까지 그녀를 죽이고자 하였던 남자가, 무척 애틋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순식간에 달라진 그의 분위기에 이보네는 당황했다.
“보고 싶었어. 줄곧.”
테네브리스가 그녀를 향해 눈꼬리를 생긋 접었다.
느릿하게 뻗어 나온 그의 손끝이 그녀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살랑거리는 그 은빛 머리카락의 감촉에 테네브리스가 환하게 웃었다.
“이 개자식, 이브한테서 당장 떨어…… 으윽!”
그것을 본 테오도르가 버럭 소리쳤으나, 곧바로 검은 기운에 제압당하고 말았다.
테네브리스의 손끝이 이보네의 뺨에 슬쩍 닿은 순간이었다.
“치워!”
오싹 소름이 돋은 이보네가 고개를 홰액 돌리며 외쳤다.
멈칫.
테네브리스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나를 거부하지 마.”
그가 으르렁거리며 이보네를 붙잡았다.
그러나 잔뜩 화를 내는 것과 달리, 이보네의 양어깨를 그러쥐는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기만 했다.
“긴 잠에 들라며. 네 말대로 자고 일어났잖아. 그런데 네가 날 못 알아보면 안 되지.”
얼핏 화를 내는 그 목소리는 호소하는 것 같기도 했다.
“무슨 소릴 하는 거야?”
그러나 이보네에겐 모두 영문 모를 소리일 뿐이었다.
“나야, 체르니. 너를 다시 만나려고, 난…….”
이보네는 당혹스러운 마음을 속으로 삼켜 냈다.
테네브리스가 다른 누군가와 저를 헷갈리는 것 같았으나, 당장 저를 공격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때 그녀의 시야에 꿈틀거리며 움직이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테오도르가 간신히 테네브리스의 힘을 끊어 내고 있었다.
이보네는 테오도르를 위해 시간을 벌고자 부러 그에게 질문을 했다.
“체르니? 그게 뭐지?”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건가.”
테네브리스는 씁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괜찮아. 내가 다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가 이보네의 녹색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오래전 저 눈동자가 저를 담으며 부드럽게 휘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 눈앞의 녹색 눈동자는 타인을 보듯 냉담하기만 하였다.
그 사실이 어쩐지 서글퍼서, 테네브리스가 입 안의 여린 살을 꾸우욱 깨물 때였다.
불현듯 느껴지는 기척에 테네브리스는 몸을 홱 돌렸다.
“이 빌어먹을 레오브란테!”
어느새 제 힘을 완벽하게 끊어 내고 일어난 테오도르가 제게 돌진하고 있었다.
“테네브리스!”
그의 손에 성력으로 만들어 낸 황금빛 검이 쥐여 있었다.
테네브리스는 재빨리 자신의 어둠을 끌어냈다.
쿠과과과과과과과광-!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바닥이 갈라지며, 뭉게뭉게 연기가 피어났다.
연기 사이로, 두 사람이 각기 황금색과 검은색의 장검을 맞대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얼핏 우열을 가릴 수 없는 막상막하의 실력이었으나, 미미하게 테네브리스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당연했다. 저는 고대의 사도, 하찮은 인간 따위가 감히 제게…….
“……!”
돌연 테네브리스의 움직임이 멎었다.
“이, 이이익. 젠장……!”
에른스트의 영혼이 사력을 다해 테네브리스를 방해하고 있었다.
“이, 버러지 같은, 인간 황자가…….”
파스스-
테네브리스의 손에 들려 있던 검은 장검이 먼지처럼 흩어졌다.
갑작스러운 그의 반응에 테오도르가 잠시 멈칫해 있는 사이.
테네브리스는 고장 난 마리오네트처럼 삐걱거리며 테오도르의 검날을 붙잡았다.
“에른스트……!”
이보네가 소리 높여 외쳤다.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자 몸부림을 쳐 보았으나, 검은 기운이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아, 안 돼. 이렇게, 큭, 소멸할 순……!”
테네브리스는 다급히 소리치며 자신의 모든 힘을 끌어 올리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황금빛 검날을 붙잡은 두 팔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이윽고,
푹-!
황금 빛무리로 만들어 낸 길쭉한 검이 테네브리스의 심장을 관통했다.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테네브리스의 절규가 이어졌다.
이보네도, 테오도르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심장에 검을 찔러 박아 스스로를 죽인 이는…… 테네브리스가 아니라 에른스트라는 걸.
“안 돼, 안, 아, 아…….”
테네브리스의 검은 머리카락이 새하얗게 탈색되어 갔다.
가슴에 검이 꽂힌 채로 비틀거리던 그가 바닥으로 털썩, 무릎을 꺾으며 주저앉았다.
검이 꽂힌 가슴팍 위로 검은 기운 대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어느 틈에 자신을 속박하던 검은 기운에서 풀려난 이보네는 재빨리 그에게 달려갔다.
“에른……!”
“오지 마!”
소리치는 목소리는 에른스트의 것이었다.
그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이보네, 나……”
발갛게 물든 눈가 위로 눈물이 번져 나갔다.
후드득, 후득.
에른스트는 기억 속의 한결같이 눈물이 많던 그 모습으로 울었다.
“미안,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연신 미안하다며 서럽게 우는 그 모습에, 이보네는 울컥 목이 멨다.
“뭐가 미안해.”
그렇게 묻는 이보네의 목소리는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내가, 내가…….”
에른스트는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진실을 깨달은 자처럼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어 말했다.
“나 때문에 네 가족들이 죽은 거잖아. 그리고 나 때문에 사람들이…… 마물이…….”
창백하게 변색되어 달싹이는 입술이 붉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그게 왜 너 때문이야!”
이보네가 그의 말을 끊으며 버럭 화를 냈다.
화가 났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모두 제 잘못이라며 우는 친구의 모습에 화가 났다.
이보네는 화가 나서 울었다.
에른스트의 몸을 관통하고 있는 저 길쭉한 빛의 검이 너무 아파 보였다.
심장을 관통당한 채로 대화를 이어 가는 그 모습에 이보네는 다시 한번 그가 정말로 사람이 아닌 다른 존재였다는 것을 실감했다.
에른스트를 이렇게 만들어 버린 마르가라테 황후가 원망스러웠다.
“그거 뽑고 지혈부터 하자, 에른스트. 너 지금 피가 너무 많이…….”
이보네는 후들후들 떨리는 목소리로 에른스트를 설득했다.
이미 상처가 너무 깊어서, 그렇게 한들 그가 살 수 있을지 미지수였으나.
그럼에도 에른스트가 저렇게 아픈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싫었다.
“안 돼.”
그러나 에른스트는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에른스트!”
“나, 나는, 이대로…… 이대로 소멸될 거야. 그거랑 같이.”
“젠장. 에른스트, 이브의 말대로 일단 치료부터 해.”
테오도르가 나직한 욕설과 함께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에른스트의 가슴에 박힌 검은 그의 성력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레오브란테의 성력은 본디 악한 것을 물리치고 선한 것을 보호하는 힘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고대의 어둠을 담고 있던 ‘그릇’인 에른스트의 몸은…… 성력에 의해 저 안에서부터 부서지고 있을 터였다.
성력은 그를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있을 테니까.
테오도르는 당장 성력을 거두어 더 이상 에른스트의 몸을 해치지 못하게끔 하고 싶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에른스트의 심장에 깃든 무언가가 제 성력에 엉겨 붙어, 가호의 운용을 방해하고 있었다.
“치료만 무사히 마치면 네가 벌인 일들, 눈감아 줄 테니까…….”
“테오도르 형님.”
에른스트가 테오도르와 마주 보았다.
언제나 제 이복형제를 두려워하여 숨어 다니던 그가 처음으로 테오도르와 온전히 시선을 맞추며 웃었다.
“저, 저를 완벽하게, 완벽하게 죽여 주세요.”
짧은 한마디를 완성하는 것도 몹시 버거워 보였다.
“지, 지금도, 그게 아직 죽지 않고 제 안에서 시끄럽게…….”
잠시 말을 멈춘 에른스트가 인상을 찌푸리며 피에 젖은 자신의 앞섶을 내려다보았다.
“제가 이보네를 해치지 않게, 사람들을 해치지 않게…….”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어 보다 결연한 목소리로, 그러나 울음기가 가득 묻어난 목소리로 부탁했다.
“세상을 위협하지 않게…… 저를 죽여 주세요.”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새하얗게 웃으며.
“미친 소리 하지 마!”
테오도르가 무서운 얼굴로 화를 냈다.
“빨리요. 간신히 누르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나 에른스트는 그 얼굴에 겁먹는 대신 간절하게 애원했다.
“빨리 저를 죽이지 않으면, 이보네가, 사람들이, 위험해질지도 몰라요.”
“…….”
“형님도 봤잖아요. 제가 무슨 미친 짓을 벌였는지.”
“그게 네가 한 게 아니라는 것쯤은 알고 있어.”
테오도르는 그 요구를 묵살하며 받아쳤다.
“개미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찔찔한 울보 같은 네가 그런 짓을 벌였을 리 없잖아.”
“저를 싫어했잖아요!”
테오도르가 좀처럼 제 부탁을 들어주지 않자, 에른스트가 목소리를 높였다.
“저를, 항상 싫어했잖아요…….”
테오도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에른스트를 노려보았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미워하고 싫어하였지만, 동시에 세상에 남은 유일한 혈육이기도 한 이복 아우를.
“그래, 네가 싫어. 지금도 미칠 듯이 싫어.”
테오도르는 싸늘한 목소리로 일갈했다.
조금 짜증이 났다.
너를 싫어한 게 아니라고.
아니, 조금 미워한 건 맞는데, 그렇지만 네가 죽기를 바라는 건 아니라고.
죽어 가는 동생에게 마지막으로 이렇게 다정하게 다독여 주는 말 같은 거, 할 수 있는 성격이라면 좋았을 텐데.
“이브 앞에서 죽니 사니 그런 모습 보이지 말고, 죽을 거면 안 보이는 곳에서 혼자 죽어. 이딴 식으로는 절대 못 죽어.”
잇새로 흘러나온 험한 말 속에 언뜻 에른스트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에른스트의 눈꼬리가 서글피 휘었다.
“맞아. 이런 식으로 죽으면 평생 널 원망할 거야.”
이보네가 테오도르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에른스트는 이보네를 돌아봤다.
잠시간 말이 없던 에른스트가 흐릿하게 웃으며 말했다.
“……꼭 그래야 해.”
“뭐?”
웃을 상황이 아닌데 미소 짓는 그를 보며 이보네가 두 눈에 힘을 부릅 주었다.
“나를 미워하고 원망해야 해, 이보네.”
“정말로 널 원망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리고, 미안해.”
에른스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너를 좋아해서, 미안해.”
이어진 그 말에 이보네는 숨을 홉 삼켰다.
“네 가족들을 그렇게 만들고, 너를 불행하게 만든 주제에 너를 좋아해서…… 그래서 미안해.”
“…….”
“다시 만났을 때는 너를 좋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런데도 좋아해 버려서 미안해.”
“…….”
“내가 널 좋아해서, 내가 널 좋아한다는 사실을 결국 너에게 들켜서, 그래서, 그래서 너무, 흑, 윽, 흐읍…….”
애써 담담한 목소리를 흉내 내려던 에른스트는 결국 아이처럼 엉엉 울고 말았다.
“흐윽, 윽, 끕, 미, 미안, 미안해……. 흐엉엉…….”
“…….”
이보네는 가슴이 먹먹해서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에른스트.
십수 년 전 화마에서 저를 살려 페르디난트에 밀어 넣은 그는 끝내 다시 찾으러 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로 인해 에른스트가 제게 죄책감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금 더 어렸을 때는 그를 조금은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가 저를 데리러 오지 못한 이유를 알아서,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고 그 철없는 원망을 지워 냈다.
그런데 에른스트에게는 그것이 이렇게나 큰 죄의식으로 자리 잡고 있어서…….
이보네는 마음이 아팠다.
그래서, 감추었던 거구나.
이렇게 펑펑 울 만큼 나를 좋아한 너는, 그 마음을 감추고 내 옆에 있었던 거구나.
그 마음을 갖고서, 내가 테오도르를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고 결국 떠나던 모습들을 모두 지켜본 거구나.
사랑하는 사람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보며 웃어 주는 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그래서 더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이보네는 자신을 좋아해서 미안하다는 에른스트를 서글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바본가? 그게 왜 미안할 일이야.”
그 분위기를 깨며, 테오도르가 울고 있는 에른스트에게 한마디 던졌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이브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
“그렇, 흑…… 그렇네요. 형님의 말씀이, 흐윽…… 맞아요…….”
에른스트는 코끝을 훌쩍이면서도,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는 제 심장에 꽂힌 검날을 양손으로 붙잡았다.
그 순간 테오도르가 다급한 표정이 되어 그를 말렸다.
“너, 일단은, 그 손부터 내려놓고……!”
“형님도, 이보네도 저를 죽이지 못하겠다면…….”
조금 전부터 검이 박혀 있는 그의 심장 주위로 불길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새 나오고 있었다.
“죄송해요, 이제 진짜 한계예요.”
에른스트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제 심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았다.
“에른스트……!”
그가 뽑아낸 검으로 자신의 심장을 다시 겨누었다.
에른스트는 아주 빠르고, 깊게, 이번에야말로 그 불길한 존재와 함께 스스로를 완벽히 소멸시키겠다는 듯, 강하게 박아 넣었다.
새 나온 억눌린 검은 기운이 테오도르의 성력으로 만들어 낸 황금빛 검과 부딪치며 폭발했다.
“안 돼……!”
쿠과과과과광-!
흩어진 검은 기운의 파편이 바닥에 굴러다니던 테네브리스의 거울에 닿았다.
거울이 부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대지가 뒤흔들리며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곳에서 피어난 검은 안개가 공간을 덮치며, 세상이 뒤흔들리고 시공이 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