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 물지 않는 착한 강아지
[카, 카타리나 아가씨께서…… 테오도르 황제의 아이와 함께……!]
사용인의 말에 벤야민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일 것이다.
“카타리나, 라고 스스로 주장한다는 여자는 어디에 있지?”
“지금 1층 응접실에…….”
벤야민은 사용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층계를 내려갔다.
나도 그의 뒤를 쫓았다.
1층 응접실 앞에는 사용인들이 안쪽을 힐끔거리며 저들끼리 숙덕거리고 있었다.
그러다 벤야민을 발견하고 재빠르게 삼삼오오 흩어졌다.
벤야민이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서더니,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안에 앉은 여자를 노려보았다.
테이블 앞에는 낯익은 여자가 주인처럼 거만하게 앉아 찻잔을 들고 있었다.
“카타리나.”
“벤야민 님, 안녕하세요.”
여자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화사하게 웃었다.
“여긴 왜 나타난 거지?”
“어머, 오랜만에 뵙는 건데 제 안위가 궁금하진 않으신가요?”
벤야민의 냉랭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차마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방문자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카타리나였다.
4년 전에 실종되었다는 카타리나가, 작은 아이를 안고서 다시 나타났다.
그리고 그 아이는 틀림없이…….
“이것 보세요. 폐하의 아이예요.”
“테오도르 폐하의, 아이라고?”
벤야민의 눈가가 잔뜩 찌푸려졌다.
나는 그들을 따라 카타리나의 옆에 앉아 있는 자그마한 남자아이를 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에 금색 눈동자를 지닌 남자아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보다 조금 더 작았지만 비슷한 또래로 보였다.
게다가…….
‘테오도르랑 닮았네.’
테오도르와 닮은 구석이라곤 전무하다 싶은 에르빈과 오딜리아와 달리, 카타리나가 데려온 아이는 테오도르를 복제해 낸 듯 똑같이 생겼다.
4년 만에 홀연 사라졌다 나타난 그녀가 ‘이 아이는 황제의 핏줄이노라’ 말하여도 누구도 의심하지 못할 정도로.
[넌 내게 늘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인걸.]
문득 내게 애틋한 목소리로 속삭이던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이브, 잠깐만. 그건 오해가…….]
[내 말 좀 한 번만 들어 줘 봐. 사실은…….]
마치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굴더니.
‘그럼 그렇지. 오해는 무슨.’
그 순간 나는 그를 향해 생겼던 미약한 기대가 다시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참 우스운 일이었다.
테오도르가 어떤 남자인지 알면서, 그가 이전처럼 나를 사랑하는 듯이 행동하자 우리 사이에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이라 기대라도 한 건가.
오해 같은 건 없었다.
테오도르는 정말로 카타리나를 사랑했다. 저 아이가 그 증표였다.
애초에 그가 얼마나 헤프고 도덕성 없는 남자인지, 기억을 잃은 그의 옆에서 지켜보지 않았던가.
매일같이 여자를 바꿔 만나고, 카타리나와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에도 내게 치근덕거리며 뻔뻔하게 굴었던 그 모습을 벌써 잊은 것도 아닌데.
‘그때랑 같아. 내가 그의 본모습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번에도 깜빡 속아 넘어갔겠지.’
나는 입술 안쪽 살을 꾸욱 깨물며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때 마침 카타리나가 나를 발견하고서 알은체를 했다.
“저 애는 이브 로웰린 아닌가요? 저 애가 왜 여기에 있죠?”
“상관 마.”
벤야민이 카타리나로부터 나를 향한 시선을 차단하며 딱딱하게 말했다.
“반가워서 그러지요. 안녕, 이브 로웰린.”
“당장 내 저택에서 꺼…….”
그가 카타리나를 향해 험한 말을 쏟아 내려고 할 때였다.
“가, 가주님! 가주님!”
예의 사용인이 또다시 헐레벌떡 숨을 몰아쉬며 달려왔다.
벤야민이 카타리나를 노려본 채로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왜.”
“이, 이번엔, 폐, 폐, 폐, 폐……!”
“폐?”
“폐하께서!”
“뭐?”
그리고 사용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는 어디에 있지?”
몹시 흥분하고 들뜬 듯한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가슴 안에 얇게 서린 무언가가 쨍강- 깨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와 재회했을 땐 아무 말도 못 하더니…….’
카타리나와 다시 만나는 게 이다지도 기쁜 일이라는 듯, 경쾌하고 빠른 발소리가 꼭 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았다.
“하…….”
마침내 응접실 앞에 당도한 테오도르가 짧은 숨을 터뜨리며 멈추어 섰다.
검은 머리칼이 다소 흐트러진 그는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모양이었다.
그가 나를 발견하고 멈칫하더니, 이내 비식 웃으며 카타리나를 보았다.
“정말이군.”
카타리나를 발견한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사르르 휘었다.
“정말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가 돌아왔어.”
그가 반가운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카타리나를 향해.
시공의 공간에서 돌아온 테오도르는 아르민으로부터 브리안을 습격한 자들에 대한 단서를 보고받는 중이었다.
“황궁 마법사들이 마법진을 조사하였는데, 흑마법이 개입한 것 같다고 합니다.”
“흑마법?”
“네. 흑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아 용의자가 좁혀지긴 했는데…….”
순간 테오도르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그렇지만 확증 없이 움직일 순 없었다.
“그래서 신전에 연락을 취하려고 합니다. 신관을 보내 주면 가장 좋겠지만, 흑마법을 감지할 수 있는 수정구라도 보내 준다면…….”
“잠깐.”
테오도르는 미간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흑마법을 감지하는 수정구라면, 내게 하나 있어.”
그는 오래전에 카타리나로부터 받았던 수정구를 떠올렸다.
‘그 망할 여자가 나와 이브를 이간질하려고 한 거였지.’
결과적으로 테오도르는 그 수정구 때문에 이브를 더욱 믿지 못하게 되었지만.
당시 이브가 운반하여 온 수정구는 뚜껑을 열었을 때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보며, 어쩌면 그녀가 흑마법과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하여 더욱 멀리하였다.
‘흑마법으로 나를 현혹시키는 거라고 생각했었지.’
지금에 와서야, 그녀가 차라리 저를 현혹이라도 해 주길 애타게 바라는 심정이 되었지만…….
구석의 서랍 안을 뒤진 테오도르가 작은 나무 함을 하나 꺼냈다.
달칵.
나무 함의 뚜껑을 열자, 새까만 수정구가 모습을 보였다.
“……?”
테오도르는 그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상한 일이다.
흑마법에만 반응한다는 작은 수정구가, 여전히 까맸다.
‘이 방 안에서 흑마법이 자행되기라도 했다는 건가.’
곧바로 생각나는 게 하나 있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책상 위에 놓인 검은 거울을 보았다.
‘테네브리스의 성물……. 그럼 내가 오딜리아와 만난 것도 흑마법 때문에?’
막연히 그럴 것이라 생각하긴 했으나, 정말 흑마법의 힘이란 걸 알고 나니 의문이 더욱 짙어졌다.
‘오딜리아는…… 어떻게 흑마법의 영역에 발을 들인 거지?’
테오도르는 콧잔등을 찌푸리며 생각에 잠겼다.
자신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왜…….
이때였다.
“폐하!”
황궁 바깥의 소식을 전하는 기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왔다.
수정구를 보고 잠잠히 생각에 잠긴 테오도르를 대신해 아르민이 물었다.
“무슨 일이냐?”
“카타리나 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카타리나 양이라면…… 4년 전 사라졌던 그 여자 말이냐?”
“네, 그…… 카타리나 양이 페르디난트 저택에 찾아왔다고……. 폐하의 아이를 데리고…….”
순간 테오도르가 손에 들고 있던 수정구를 툭 떨어뜨렸다.
“뭐?”
돌아보는 테오도르의 눈동자에 위험한 빛깔이 돌았다.
“누가, 돌아왔다고?”
“폐하의 약혼녀셨던 카타리나 양이…….”
“…….”
테오도르는 표정이 사라진 얼굴로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 숨 막힐 것 같은 침묵에 아르민과 기사는 그의 눈치만 힐긋힐긋 살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브를 괴롭혔던 그 여자.”
카타리나의 이름을 느릿하게 곱씹는 그의 입꼬리가 히죽 말려 올라갔다.
“이브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는 기회가 제 발로 찾아왔잖아.”
이윽고 아주 천천히, 그의 얼굴 위로 섬뜩한 미소가 떠올랐다.
* * *
어둑어둑한 감옥 안.
‘이게…… 무슨 일이야?’
카타리나는 갑작스럽게 난입한 테오도르의 병사들에게 붙들려 황궁 지하 감옥에 갇혀 버렸다.
기억을 되찾은 테오도르 황제가 순순히 저를 받아 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한마디 말도 섞어 보지 못한 채 감옥에 가둬 버릴 줄은 몰랐다.
‘젠장, 그 또라이 황제.’
계획에 상당히 큰 차질이 생겨 버렸다.
그러나 다행인 것은 저의 볼품없는 마력으로 만들어 낸 허수아비는 아직 들키지 않았다는 것이다.
4년 전, 벤야민에게 감금당하였던 카타리나는 홀연히 나타난 ‘그분’의 도움으로 저택을 탈출할 수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그분’이 그릇에 매여 있는 동안 그분을 대신해 그분의 부활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물론 그녀가 원해서 자발적으로 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살고 싶어?]
[좋아, 그럼 거래를 하지.]
페르디난트를 빠져나가던 날, 그녀의 영혼 위로 새겨진 그와의 계약이 그녀를 옭아맸다.
‘그분’과의 계약은 한때 그녀가 이브 로웰린을 묶어 두었던 주종 계약보다 훨씬 더 치밀하고 악랄하였다.
‘그분’의 그릇은 과거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순수한 영혼에 ‘그분’의 영혼 조각을 담아 만들어 낸 걸작이었다.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분’의 영혼이 눈을 뜬 이후로는 더 많은 제물이 필요해졌다.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자들의 생명은 ‘그분’의 그릇을 유지하기 위한 좋은 제물이었다.
카타리나는 ‘그분’의 종이 되어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모아야 했다.
매일 밤, ‘그분’의 처소에서 희생된 제물들의 고통스러운 비명 소리가 울려 퍼지고, 죽은 이의 시체가 나왔다.
그러나 당연하게도 ‘그분’은 단순한 그릇의 유지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다.
[더 강하고 완벽한 제물이 필요해. 나를 이 ‘그릇’ 밖으로 깨워 낼.]
그리고 며칠 전, ‘그분’이 카타리나를 불러 언제 들어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기쁘게 말했다.
[드디어 나를 깨울 가장 완벽한 제물을 찾았다.]
카타리나는 ‘그분’의 명령대로, 가짜 아이를 만들어 페르디난트를 찾아갔다.
하필 그곳에 이브 로웰린이 같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곧바로 찾아온 테오도르가 저를 이곳에 가둘 줄은 더 몰랐다.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방문에 놀라긴 했지만, 카타리나는 애써 태연하게 활짝 웃으며 오랜만에 재회한 연인을 연기했다.
[테오!]
본래라면 가짜 아이를 데리고 황궁을 찾아갈 예정이었으나,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자신의 연기를 받아 주길 바랄 뿐이었다.
[너무 보고 싶었어요. 이것 보세요, 나 테오의 아이를…….]
[붙잡아.]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와의 연기를 이어 갈 생각이 전혀 없었다.
카타리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우르르 몰려온 병사들이 그녀를 포박했다.
[테, 테오? 테오, 잠시만 저의 이야기를 먼저…….]
[혀를 뽑아 버리기 전에 내 이름을 감히 그딴 식으로 부르는 건 그만두는 게 좋을 거야.]
테오도르가 무시무시한 얼굴로 카타리나를 노려보며 협박했다.
카타리나는 히끅 숨을 삼키며 몸을 움츠렸다.
그리고 그사이, 황궁 병사들에게 이곳으로 옮겨진 것이다.
암담해진 카타리나가 자신을 가둔 쇠창살을 망연한 얼굴로 쳐다볼 때였다.
차박, 차박, 차박, 차박-
축축한 감옥 안에 섬뜩한 발소리가 울렸다.
정작 발소리의 주인은 몹시 산뜻한 기분이었다.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가둔 옥사의 쇠창살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창살 너머 오들오들 떨고 있는 카타리나를 내려다보며 제 턱 끝을 쓸었다.
“이런, 이런.”
잔뜩 신이 난, 즐거운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이브에게 바칠 나의 선물이, 제 발로 찾아오다니.”
애써 평온한 척해 보려 하여도, 슬금슬금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가릴 수 없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제가 이브에게 저지른 죄악들의 원흉.
물론 기억을 잃은 후 그녀를 냉대했던 것은 저 자신이 짊어져야 할 업보였으나, 그렇다고 하여 저 여자가 저의 이브에게 저지른 짓들이 옅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 기간, 그 빌어먹을 주종 문서를 갖고서 어린 이브를 괴롭힌 여자였다.
다시 만난 그녀의 몸에 있던 수많은 상처들은 모두 저 여자가 만든 것이었다.
제가 기억을 잃은 동안에는 저와 그녀의 사이를 가르기 위해 이간질을 하고, 더욱 악랄하고 교묘한 방법으로 그녀를 괴롭힌 여자였다.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
테오도르는 제가 이브를 끊임없이 의심하도록 만들던 카타리나의 교활한 속삭임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했다.
그리고 부러 이브의 앞에서 자신과의 관계를 과시하며, 그녀를 괴롭힌 것 또한.
[테오, 나 저 머리핀이 갖고 싶어요. 내게 주세요, 네?]
[이브 경이 저를 호위해 주면 좋지 않을까요?]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당신의 약혼녀로서 이브 경을 징벌해도 될까요?]
기억을 잃었을 적의 테오도르는 이브가 자신을 어떤 눈빛으로 바라보는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카타리나의 그러한 말과 행동이 그녀를 더욱 아프게 하리란 것 또한 알았다.
제가 치유한 그녀의 팔에 또다시 상처를 남긴 것도 카타리나 저 여자였으며, 눈 내리는 겨울 그녀를 몇 시간 동안 세워 두어 아프게 한 것도 저 여자였다.
그러니 테오도르에게 카타리나는 죽여 마땅한 여자였으나…….
카타리나를 향한 증오를 불태울수록 으레 함께 타오르는 것은 과거의 자신을 향한 분노였다.
제아무리 이보네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지만, 겨우 저딴 여자의 손을 잡고서 그녀를 상처 준 과거의 제 자신 또한 죽어 마땅한 남자였다.
이브가 저를 믿어 주지 않는 것 또한 당연했다.
그녀는 카타리나와의 관계는 모두 오해라는 저의 말을 믿지 않을뿐더러, 끝까지 들어 주지도 않았다.
[내가 이야기 한 번만 하자고 했을 때, 넌 어떻게 했었어?]
그 냉담한 한마디에 테오도르는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감히 그녀의 앞에서 그 너저분하고 비루한 변명이나마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카타리나가 그렇게 실종된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카타리나가 살아 있었더라면, 그녀를 죽여 그녀와의 관계가 거짓이며 오해였다는 것을 알릴 수 있었을 테니까.
그런데, 그 카타리나가 이렇게 제 발로 돌아오다니!
“네 목을 베어서 이브에게 들고 가면, 내 말을 믿어 줄지도 몰라.”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기뻤다.
테오도르는 창살 너머의 카타리나를 응시하며 희번덕 눈을 빛냈다.
테오도르는 도무지 기쁨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설령 이브가 여전히 저를 믿어 주지 않는다 할지라도, 자신을 그렇게 괴롭힌 여자의 목을 바치면 분명 기뻐할 것이다.
그녀가 아주 조금이나마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면, 테오도르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도,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는 그녀를 위한 저의 제물이 되어야 했다.
테오도르가 가볍게 손끝을 까딱이자, 그 주위로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났다.
와장창!
창살 쪽으로 서서히 옮겨 간 빛무리가 자물쇠를 깨부쉈다.
닫힌 창살이 끼이익- 거친 마찰음을 내며 열렸다.
테오도르는 그 안으로 발을 들였다.
“폐, 폐하……!”
카타리나는 제게 다가오는 테오도르를 피해 허겁지겁 뒤로 물러나며 외쳤다.
“잠, 잠깐만요, 폐하. 저, 저는 폐하의 아이를……!”
“아이?”
“폐, 폐하도 아이가 필요하…… 꺄아악!”
쿠과과과광-!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의 옆으로 떨어진 빛무리가 강한 폭발음을 내었다.
카타리나는 부서진 바닥을 보며 덜덜 떨었다.
“그래, 네가 데려온 내 ‘아이’라는 그것.”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응접실에 얌전히 앉아 있던 그 ‘가짜 아이’를 떠올리며 비죽 웃었다.
검은 머리카락과 황금색 눈동자는 퍽 저와 비슷한 모양으로 흉내를 내고 있었으나…….
흡사 진짜 사람처럼 잘 빚어진 그것에게서 더러운 냄새가 났다.
마치 오래전 저를 떠나기 직전의 이브가 내뿜었던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냄새와 비슷한, 불쾌하고 축축하고 음습한 내음이었다.
카타리나와 당연히 아무런 관계도 없었으니, 그것 또한 제 아이일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저와 비슷한 외양 특징을 지닌 세 살가량의 아이를 물색하여 찾아온 것도 아니었다.
가짜.
그것은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가짜였다.
“항상 궁금했지. 이브가 어떻게 나를 속이고 도망친 건지.”
마침내 그 실마리를 움켜쥔 테오도르가 기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네 덕에 확실히 알게 됐어.”
자박, 자박.
카타리나의 바로 앞까지 걸어간 테오도르가 느릿하게 몸을 숙이며 겁에 질린 그녀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흑마법에 손을 대고 있는 줄은 몰랐는데.”
흠칫.
흑마법, 이라는 말에 카타리나가 눈에 띄게 몸을 움찔거렸다.
“강한 신성력이 있으면, 흑마법의 술식을 찾아낼 수 있다고. 네가 알려 줬었지.”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는 흑마법이 자행된 장소에서 그 술식을 발견할 수 있다.
이것은 과거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과 함께 알려 준 것이었다.
그 때문에 테오도르는 더욱더 그 장소에 집착했었다.
제가 이보네의 종적이 끊긴 그곳에 가기만 하면, 모든 것을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
결과적으로 그것에 집착한 탓에 이브를 잃어야 했지만…….
“페르디난트의 안뜰에서는 그 빌어먹을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4년 전에 모두 불태워 버려서 아무것도 찾을 수 없었지만.”
막상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발을 들였을 때, 불타 없어진 그 공간에서 테오도르는 아무것도 찾지 못했다.
살인 마법의 흔적도, 그리고 그곳에서 자행되었을 다른 흑마법들의 술식 또한…….
“이번에는 내가 잃어야 했던 것들을 모두 찾을 수 있을 것 같아.”
테오도르가 사르륵 두 눈을 휘며 카타리나의 하관을 억세게 움켜쥐었다.
“내내 궁금했는데 말이야.”
“흐윽…….”
고통스러운 신음이 카타리나의 잇새로 흘러나왔으나,
“참 이상하잖아. 내가 기억을 잃기 전에, 그 빌어먹을 저택에서 분명 너를 보았고, 네 목숨을 대가로 거래까지 했었는데.”
테오도르는 오래전, 이브를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올 당시를 이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카타리나는 저로 인해 목이 잘릴 뻔했고, 그 두려움에 결국 주종 문서를 넘기기까지 했다.
“그런데 너는 기억을 잃은 내게 다시 찾아와 혼담을 이야기했지. 대담하게도.”
테오도르는 제게 거래를 하자던 카타리나의 그 미묘한 표정을 떠올렸다.
“마치 내가 그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걸 이미 알고 있는 사람 같았어. 내가 내 손으로 이브를 그곳에서 데려간 걸 네가 모를 리 없는데.”
기억을 되찾은 이후, 미약한 의문이 들었다.
저로 인해 목이 잘릴 뻔했으면서, 무슨 대범함으로 다시 황궁을 찾아와 혼담을 넣은 걸까?
제가 기억을 잃은 사실을 알기라도 한 걸까?
그건 가장 가까이에 있던 아르민과 황실 기사들, 그리고 저를 진찰한 의사를 제외하곤 아무도 모르는 일인데.
그리고 여기까지 생각을 곱씹으면, 으레 따라오는 의문이 하나 더 있었다.
“내 기억에 장난질을 한 것도 너지?”
어쩌면 제 기억을 그렇게 엉망으로 만든 것 또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 교활한 여자의 짓거리가 아닐까.
“네가 이브를 통해서 내게 보낸 까맣게 변한 그 수정구. 사실은 이브가 아니라 나한테 반응했던 거야.”
그 끝에 그가 도달한 것은 단 하나의 결론이었다.
“네놈들이 내 머리통에 그 빌어먹을 흑마법으로 장난질을 쳐 놨으니까.”
씹어 죽여도 시원찮을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제 기억에 몹쓸 짓거리를 벌였다고.
* * *
나는 달리는 마차의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로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아직도 얼떨떨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거지?’
나는 느리게 미간을 찌푸리며 조금 전의 상황을 정리해 나갔다.
내내 차 한잔 마시자는 벤야민의 초대에도 시간을 낼 틈이 없었다.
제국으로 돌아온 직후로 줄곧 바빴기 때문이다.
브리안 오빠가 도와주긴 했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채 덜컥 맡게 된 가주직은 나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나의 체르니시아를 위한 일이었다.
힘들다는 생각보다는 기쁨과 보람이 앞섰다.
어느 정도 주변이 정리되면 벤야민을 찾아가기로 약속했으나 시간이 없었다.
그러다 마침 오늘 함께한 마물 토벌을 마치고, 그를 만나러 간 참이었다.
모처럼 한가하게 차를 홀짝이며 소소한 대화를 이어 가던 중, 카타리나가 찾아왔다.
테오도르를 닮은, 테오도르의 아이와 함께.
그리고 연달아 다급히 찾아온 테오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카타리나를 다시 만나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테오도르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신이 나서 카타리나를 포박했다.
[당장 저 여자를 황궁의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
[네, 폐하.]
황제의 병사들은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카타리나를 어디론가 끌고 갔다.
카타리나의 처절한 비명 소리만이 그 자리에 맴돌았다.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가 떠나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는데, 문득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테오도르가 몹시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이브.]
그는 마치 칭찬해 달라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내게 다가왔다.
[내가 그랬잖아. 저 여자와 난 아무 사이 아니라고, 오해가 있는 거라고.]
[오해가 있었다고?]
나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그를 응시했다.
[응, 다 오해야. 그러니까 내가 저 여자를 잡으러 온 거지. 내 약혼녀 행세를 하며 너를 괴롭힌 못된 여자니까.]
[무슨 소리야. 약혼녀 행세가 아니라, 분명 너는 그 여자를…….]
[아니야. 그거 다 오해고, 거짓이었어. 그게 아니면 내가 왜 저 여자를 감옥에 가두겠어.]
[…….]
나는 아주 잠시 그의 말에 흔들렸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거짓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의 옆에서, 그가 얼마나 사악한 인성을 지닌 남자였는지 똑똑히 보지 않았던가.
내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다시금 표정을 굳힐 때였다.
[아뺘.]
자그마한 아이가 테오도르의 바지 자락을 붙잡으며 흔들었다.
카타리나가 두고 간 아이였다.
[뭐야?]
[아뺘아.]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이 일그러졌으나, 아이는 테오도르의 다리에 와락 매달리며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젠장, 떨어져. 이 징그러운 건 또 뭐야?]
[아뺘아. 아뺘.]
[내가 왜 네놈의…… 잠깐, 이브! 어디 가, 이브? 이브!]
그리고 그 장면을 목도한 나는 냉정하게 돌아섰다.
[이브……!]
뒤에서 나를 부르는 테오도르의 처절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외면했다.
[이브, 지금 가는 거야?]
[응, 다시 연락할게.]
[……그래.]
벤야민 또한 평화롭던 티타임이 망가졌음을 깨닫고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벤야민에게만 인사를 한 채 마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줄곧 지금의 상태였다.
‘오해는 무슨.’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불끈 들어갔다.
‘뭐? 아빠?’
에르빈과 오딜리아에게는 한 번도 허락된 적 없는 그 이름에, 불쾌함이 거세졌다.
테오도르는 어떻게든 카타리나와의 관계를 부정하려고 했으나, 그를 향해 ‘아뺘’ 하고 부르던 그 아기가 두 사람의 관계를 입증하는 명백한 증거였으며…….
‘오해고, 거짓이었다고? 그 여자가 약혼녀 행세를 한 거라고?’
카타리나가 황제의 약혼녀 행세를 하며 기고만장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테오도르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설사 그의 말마따나 카타리나와의 관계가 거짓이었다 하더라도…….
‘그 여자랑 그 짓을 한 거잖아. 더러운 새끼.’
나는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와 입 맞추던 것을 보았다.
그가 그 여자와 그 이상의 짓거릴 하는 건 본 적이 없지만, 그는 카타리나의 것이 분명한 흔적을 달고서 그녀가 제 아이를 가졌음을 내게 말했었다.
다시 만난 그는 카타리나와의 관계가 거짓이라 했다.
어찌나 애절하고 처량 맞게 읍소하던지 아주 잠시 그 말이 정말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뻔했다.
오늘, 카타리나가 그를 닮은 아이를 데리고 나타나지만 않았더라면.
테오도르를 향해 ‘아뺘’ 하고 부르며 매달리던 아이는 누가 봐도 그의 아이였다.
어쩌면 이제 와 변덕이 인 건지도 모른다.
카타리나에게 흥미가 식어서 뒤늦게 내게 이러는 건지도 모르지.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와의 약혼식 직전까지도 내게 몹쓸 추파를 던지던 쓰레기니까,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와, 그럼 이거…… 제 아이를 데리고 나타난 여자를 모른 척하는 거잖아?’
그렇게 생각하니 그가 더더욱 몹쓸 놈처럼 느껴졌다.
내가 카타리나를 싫어하는 마음과는 별개로 말이다.
‘더러운 바람둥이 새끼. 책임감도 없는 역겨운 쓰레기 새끼. 어디서 그런 거짓말로 내 마음을 돌리려고.’
나는 잠시나마 그 괘씸한 쓰레기의 말에 귀를 기울일 뻔하였던 것을 떠올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도착했습니다, 가주님.”
어느덧 저택의 정문을 통과한 마차가 건물 앞에서 멈추었다.
마차에서 내리는데, 이상한 냄새가 났다.
‘음……?’
미묘한 탄 내음이 공기 중에 섞여 있었다.
불길한 느낌에 냄새가 나는 곳을 향해 뛰어가자, 불타 그을린 정원이 나를 반겼다.
“이게 무슨…….”
당혹스러워 가만히 쳐다만 보고 있자, 뒷정리를 하고 있던 브리안이 날 보고 다가왔다.
“왔어, 이보네?”
“대체 무슨 일이야, 오빠?”
“아, 그게…….”
브리안이 조금 수척해진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아이들이 정원에서 놀다가 실수로 불을 낸 모양이야. 다행히 로라가 곧바로 발견해서 큰 사고로 이어지진 않았는데, 아무래도 뒤처리할 게 많아서.”
“에르와 리아가 실수로 불을 냈다고?”
아르벨라에서 지내며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덜컥 이는 걱정과 함께,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아이들만 두고 나가서…….”
에르와 리아는 이제 겨우 세 살이었다.
“네 잘못이 아니니 자책할 필요는 없어. 불의의 사고였으니까. 자책할 시간은 더 없고.”
브리안이 달래 주었으나, 놀란 가슴이 진정되질 않았다.
“리아가 특히 놀란 것 같아. 불길을 진압한 직후에 갑자기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났거든. 그러니 네가 가서 달래 줘야지, 엄마니까.”
“응.”
나는 서둘러 몸을 돌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로라! 아이들은?”
“2층 끝 방에 계셔요.”
로라가 알려 준 대로 2층 끝 방에 도착하자, 살짝 열린 문 틈 너머로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아 어케.(리아 어떡해.)”
“갠차나, 리아.”
“어몬니 이제 리아가 망가뜨린 정원 보구 화나실 거야…….”
“어모니 화 안 나실 거야.”
“에르가 구거 어케 알아!(에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어모니가 화내면 에르가 혼내 주께.”
“우으으…….”
잠잠히 두 아이의 대화를 듣던 나는 참지 못하고 문을 열어젖혔다.
그러자 모아 세운 무릎 위로 고개를 파묻은 채 웅얼거리던 오딜리아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
“어, 어모니, 오셨어요……!”
아무 말도 못 하는 오딜리아를 대신해 에르빈이 인사를 했다.
“에르, 리아.”
차분한 목소리로 부르자, 리아가 움찔 몸을 떨었다.
“리아가 실수로 구런 거예요. 구러니까 화내면 안 돼요.”
에르는 리아를 보호하려는 듯 두 팔을 활짝 벌리며 말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시 보다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괜찮니, 리아? 많이 놀라진 않았어?”
다정한 목소리로 묻자 오딜리아가 힐끔 내 눈치를 보았다.
“어몬니이…… 화 안 났어요?”
“그래.”
피식 웃으며 답하자 오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내 그 커다랗고 올망졸망한 눈동자 위로 그렁그렁한 눈물이 차올랐다.
“정말루요?”
“응.”
“지쨔루요(진짜로요)?”
“그럼.”
“우으…… 우으으…….”
그러자 울먹울먹하던 오딜리아가 으아앙, 울음을 터뜨리며 내게 달려와 안겼다.
“우에엥, 잘몬태써요(잘못했어요), 어몬니이…….”
“괜찮아.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야.”
나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다친 곳은 없는지 다시 한번 세심하게 살폈다.
“리아가 이, 일부러 불낸 거 아니구…… 실수로…… 불 뿜따가…….”
불 뿜는 다람쥐 놀이를 하다가 실수로 정말 불을 내기라도 한 걸까?
‘앞으로는 조심하라고 알려 줘야겠어. 오늘은 일단 달래 준 뒤에.’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아이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어머니는 우리 리아와 에르가 다치지 않은 것만으로도 기뻐.”
“조금 아야 했는데, 에르가 호 해 줬어요.”
오딜리아가 손가락을 꾸물꾸물 내밀며 말했다.
“어몬니도 아야 하면 에르한테 호 해 달라고 하세요. 구럼 한나도 안 아파요.”
“웅웅, 에르가 호 해 줬어! 에르는 의사야!”
옆에서 에르빈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가볍게 웃으며 에르의 머리를 함께 쓰다듬어 주던 나는 그 표정에 멈칫했다.
조금 전에 카타리나를 포박하여 감옥에 보내고서 뿌듯해하던 테오도르의 표정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그 잔상을 지워 내며 에르를 향해 싱긋 웃었다.
“우리 에르가 리아를 지켜 준 거야?”
“웅! 에르가 리아 지켜 준 거예요!”
“우리 에르, 대단하네.”
“에헤헤.”
어느덧 방 안의 분위기가 밝아졌다.
울적한 기운을 떨쳐 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내 옆에서 꼬물거리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에르가 요로케 호오 하몬…….(에르가 이렇게 호오 하면…….)”
리아는 에르의 흉내를 내며 손가락에 호오- 하고 입김을 불었다.
“반짝하몬서(반짝하면서) 아야 한 거 다 나아요!”
아이다운 그 상상력이 귀여워서 나는 박수를 치며 감탄하는 시늉을 했다.
“우와, 신기해라!”
“구니까 어모니도 아야 하면 에르한테 말해 줘야 해요!”
“그래, 그래, 에르. 아픈 게 생기면 꼭 에르에게 부탁할게.”
그 말이 기뻤던지 까르륵거리는 웃음소리가 에르빈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아이들의 수다는 해가 기울 때까지 이어지다가, 로라가 저녁 식사 시간을 알리고서야 아쉽게 끝이 났다.
* * *
꼬박 하룻밤을 새운 심문 끝에 카타리나는 결국 실토했다.
“다, 다 벤야민이 시킨 짓이에요.”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을,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내려다보았다.
“벤야민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저를 죽이겠다고 협박했어요. 그래서, 그래서 저는 어쩔 수 없이…….”
“그러니까.”
질질 이어지는 그녀의 변명을, 테오도르가 나직이 끊어 냈다.
“너랑 벤야민 페르디난트, 둘이서 공모를 해서 내 기억에 손을 댔다?”
“고, 공모가 아니라, 그, 그자가 억지로 시켜서……”
“하하!”
돌연 광포한 웃음소리가 테오도르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하하하, 하하하하하!”
한 손으로 제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리며 미친 자처럼 웃음을 터뜨리던 테오도르가, 일순 뚝- 하고 웃음을 그쳤다.
“내 기억에 그따위 장난질을 하고, 나와 이브를 이간질한 게.”
테오도르는 느리게 손을 아래로 내렸다.
“모두 네놈들 짓이었다고.”
푸석해진 얼굴 위로 흉흉한 안광이 빛났다.
밤을 새웠지만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 또렷하고 날카로웠다.
“젠장. 찢어 죽일 페르디난트. 말려 죽일 페르디난트. 비틀어 죽일 페르디난트. 그 개잡것들이.”
차마 형용하기 어려운 거친 욕설들이 그의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테오도르는 제가 고작 흑마법 따위에 당했다는 게 믿기지가 않았다.
그 씹어 삼켜도 부족할 페르디난트를 멸족시켜 버리고만 싶었다.
죽이고, 죽이고, 죽여도 그간 제가 느껴야 했던 고통을 상쇄시키지 못할 것이다.
당연했다.
그들을 죽인다 한들, 이브의 상처받은 과거는 보상받지 못할 테니까.
“감히 황제의 정신에 손을 댔으니, 명분은 충분할 테지.”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음침한 새끼.
이브를 보는 그 작자의 눈이 수상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가 이브에게 상처를 주면서까지 제게서 떨어뜨리고자 할 줄은 몰랐다.
‘그러고 보니, 이브는 페르디난트에서도 고립된 채 자랐었지. 어쩌면, 그것도…….’
테오도르는 오래전부터 정말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브처럼 예쁘고 사랑스러운 애에게 친구가 벤야민뿐이라는 게.
황궁에서 제 측근 기사로 지낼 적에도, 동료들과 궁정인들의 애정 어린 시선을 담뿍 받던 그녀가 아닌가.
이따금씩 테오도르는 그녀를 향한 시선들에 시샘이 나면서도, 이처럼 사랑스러운 이가 제 연인이라는 사실에 뿌듯할 정도였다.
‘그자가 이브에게 다른 친구가 생기는 걸 막은 거야. 그게 아니라면 설명이 안 돼.’
그녀가 마음을 다치고 상처를 받아도, 제게만 돌아가면 상관없다는 건가?
‘뭐 이런 쓰레기 같은 놈이 다 있어.’
테오도르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음침한 그의 작태에 치를 떨었다.
비록 저 또한 타인에게 한마디 얹을 수 없는 무인성의 쓰레기였으나, 벤야민에 비하면 스스로가 퍽 괜찮은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당장 이브에게 알려 줘야지. 그딴 쓰레기 같은 놈을 친구라고…….’
당장 하루 전만 해도 이브는 그 쓰레기를 친구랍시고 만나러 가지 않았던가.
순진한 이브가 벤야민에게 속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속에서 치솟았다.
“폐, 폐하.”
심상찮은 그 기세에, 그러잖아도 밤새 이어진 심문으로 잔뜩 겁먹은 카타리나가 윗니와 아랫니를 딱딱 부딪치며 애원했다.
“부디 베, 벤야민만 벌하시고, 저는 사, 살, 살, 살려…….”
테오도르는 그런 카타리나를 쓰레기 보듯 경멸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내 기억을 잃게 만든 건 모두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종용한 거고, 넌 잘못이 없다?”
“네, 네, 저는, 저는 억울…….”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카타리나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며 울먹였다.
그녀를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너, 내 약혼녀 행세를 하며 이브를 괴롭혔잖아.”
“그, 그건…… 폐, 폐하와의 거래를 위해…….”
“거래?”
가당치도 않은 소리에 테오도르가 픽, 하고 헛웃음을 터뜨렸다.
“기억을 잃은 나 새끼가 너와 나눈 거래 속에 이브를 괴롭히는 내용은 없었어. 순전히 네 즐거움을 위한 행동들이었지.”
그의 말에 카타리나의 얼굴에서 핏기가 싸악 가셨다.
물론 그가 준 약혼녀의 지위를 이용해 이브를 괴롭히긴 했지만, 그의 눈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교묘하게 이루어졌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테오도르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가엾다는 생각은 당연하게도 들지 않았다.
“그리고 나와 이브의 사이를 이간질하기까지 했잖아?”
“그, 그것도 벤야민이…….”
“네가 나한테 그랬었지. 이브 로웰린은 흑마법과 관련이 있으니 멀리하라고.”
카타리나가 이브를 통해 보낸 수정구는 나무 함을 연 순간부터 새까맸었다.
저 자신이 흑마법에 당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으니, 같은 공간에 있던 이브를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사실 흑마법에 물든 것은 등신 같은 제 기억이었고, 그것을 알지 못한 저는 그 독사처럼 교묘한 이간질에 넘어가 이브를 더욱 멀리했다.
“그, 그게…… 그게…….”
카타리나가 앞니를 딱딱 부딪치며 몸을 떨었다.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나의 이브의 몸에 상처를 냈어.”
우드득-
어금니가 거칠게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는 공포에 질린 낯으로 움찔 몸을 떨었다.
“폐, 폐하께서…… 폐하께서도 허락하셨던 거잖아요.”
그 와중에도 애써 잘못을 저만의 것이 아니라 변명하는 게 참 뻔뻔스러웠다.
“그래. 그건 빌어먹을 과거의 나 새끼가 묵인한 거였지.”
테오도르가 순순히 인정하듯 말하자, 움츠러들었던 카타리나의 어깨에 힘이 조금 빠졌다.
그러나 안도도 잠시.
“그런데 그거 말고도, 아주 오랫동안 악의를 담아 이브를 괴롭혔잖아. 그 빌어먹을 주종 문서를 믿고서.”
이어 흘러나온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그녀를 씹어 죽일 듯 매섭게 옭아맸다.
“그걸 어떻……! 아, 아니에요, 저는 억울…….”
콰아앙-!
“아아악!”
카타리나가 무어라 변명을 내뱉으려 하기 무섭게, 그녀의 뺨을 스치며 폭발음이 일어났다.
이미 너덜너덜해져 형체를 알아보기 힘든 그녀의 뒤편 벽면이 한 번 더 무너졌다.
“억울해?”
“아, 아아, 아아아…….”
카타리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도리질을 했다.
“자, 잘못했습니다, 폐하. 잘못, 잘못…….”
바닥에 엎어져 침을 뚝뚝 흘리며 같은 말만 반복하는 카타리나의 위로,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이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고작 저런 여자가 자신의 이브를 그렇게 악랄하게 괴롭혔다는 사실이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나 저 여자가 이브를 괴롭힐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저의 과오였기에, 카타리나를 향한 분노가 거세어질수록 제 자신을 향한 혐오도 함께 커져 갔다.
“살고 싶어?”
“사, 살려…….”
“그럼 내 질문에 똑바로 대답해.”
물론 살려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카타리나를 왜 살려 준단 말인가? 이브를 위해 바칠 선물인데.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이 정도 거짓말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이브가 짐작하는 것과 같이.
“왜 다시 나타났지?”
“……!”
“4년 전에 사라졌다가 어제 갑자기 다시 나타났잖아. 그 사람도 아닌 것을 데리고서.”
추궁하는 목소리에 의문이 가득 담겨 있었다.
벤야민과 공모한 것은 아닌 것 같았다.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본 그 또한 카타리나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듯 보였으니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카타리나를 향해, 테오도르가 달콤한 미소를 보였다.
“솔직하게 답하면 널 살려 줄게. 황제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지.”
“그, 그건…….”
이윽고, 카타리나가 무언가 대답하기 위해 입을 달싹였다.
그리고 그 순간.
“아……!”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아, 아아……!”
그녀의 눈에서 초점이 사라졌다.
허공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테오도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공포에 질려 갔다.
그러다가 그만.
“꺄아아아아아아악!”
카타리나는 고통스러운 비명을 지르며 경련을 일으키다 옆으로 툭 쓰러졌다.
“무슨……?”
당황한 테오도르가 쓰러진 그녀의 몸을 내려다봤다.
‘뭐지? 벤야민의 짓인가?’
잠시 그를 의심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놈의 짓은 아니야.’
테오도르는 주머니에서 수정구를 꺼내 보았다.
수정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흑마법…….”
틀림없는 흑마법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력을 동원하여 흑마법을 감지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위 어디에서도 술식은 발견되지 않았…….
“잠깐.”
그의 성력이 무언가를 감지했다.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불길한 기운이 넘실대는 곳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윽…….”
술식을 찾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집중하였으나, 그럴수록 반동이 일어나 그의 몸에 무리를 주었다. 그러다 결국.
와장창-!
새까맣게 달아오른 수정구가 쨍그랑 깨지며, 그 파편이 그의 손에 깊은 생채기를 냈다.
뚝, 뚝 떨어지는 핏물을 응시하며 테오도르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지, 이건……?”
처음이었다.
저의 성력마저 튕겨 나온 것은.
“누군가…… 저 여자를 이용해서 일을 꾸미고 있어.”
문득 오싹한 기운과 함께 강한 희열감이 차올랐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보다 더한 놈이.”
처음으로 적수를 마주친 듯한 감각에 전신이 짜릿했다.
카타리나가 쓰러진 탓에, 더 이상 심문을 이어 갈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퀴퀴한 지하 감옥에서 나와 걸었다.
밤새 그 여자를 심문하느라 더러워진 옷을 갈아입을 참이었다.
그러다 그는 황제궁의 복도에 얌전히 서서 자신을 기다리는 작은 남자아이를 발견했다.
“아뺘.”
검은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
퍽 그를 흉내 낸 것이 테오도르를 보며 황금색 눈동자를 사르르 휘었다.
동시에 풍기는 역겨운 내음에 테오도르는 얼굴을 왈각 일그러뜨렸다.
“아뺘아.”
그 인간 같지도 않은 것이 테오도르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테오도르는 재빠르게 성력을 운용하여 그것을 허공으로 붕 띄웠다.
그러자 황금색 빛무리에 목덜미가 붙잡혀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그것이 팔과 다리를 축 늘어뜨렸다.
그것에게서 느껴지는 악취는 카타리나의 냄새였다.
과거 이브에게서도, 아니, 이브라고 생각했던 그것에게서도 꼭 이런 비슷한 냄새가 났다.
한 가지 다른 점이라면, 이브를 흉내 낸 그것이 풍기던 것은 카타리나가 아닌 벤야민의 냄새였다는 것이었다.
마치 그자와 한 몸이라도 된 것 같던 그 짙은 냄새에 울컥 화를 토해 냈던 기억이 났다.
그녀가 벤야민의 냄새를 묻힌 게 싫어서.
그녀에게서 벤야민의 냄새가 나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보통 그만큼이나 냄새를 가득 묻히는 방법은…… 그런 것들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아니었다.
그것은 이브가 아니었고, 벤야민이 어둠의 술식으로 만들어 낸 거짓된 생명체라 그의 냄새가 잔뜩 나는 것이었다.
테오도르는 희미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참 다행이지, 이브. 네가 그 개 같은 놈과 아무런 관계가 아니란 걸 알아서.”
힐끗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허공에 늘어진 가짜 아기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얼핏 완벽한 사람을 흉내 내고 있지만, 하나씩 뜯어보면 엉성하고 조악하기 짝이 없었다.
“아뺘, 아뺘아아아.”
할 줄 아는 말도 하나밖에 없었고, 삐걱삐걱 움직이는 팔다리도 어설펐다.
벤야민이 만들었던 가짜 이브가 그녀를 완벽하게 흉내 내던 것과 달랐다.
‘그 여자의 마력이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것만큼 좋지 못해서인가.’
아무튼 이걸 이브에게 가져가서 보여 주면, 조금이나마 제 말을 믿어 줄 것 같았다.
“이브…….”
이브를 떠올리자, 저것이 제게 들러붙던 순간 화나서 몸을 돌려 버리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마지막에 보았던 눈빛이 얼핏 저를 경멸하는 것 같기도 했다.
“많이 화난 것 같았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테오도르의 어깨가 힘이 빠져 축 늘어졌다.
* * *
불타 버린 정원이 완전하게 복구되는 데에는 시간이 조금 걸릴 것이라 했다.
브리안 오빠가 전해 준 말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내 눈치를 보았다.
“앞으로는 불장난을 하면 안 돼.”
“리아, 불짱난(불장난) 한 거 아니라…….”
오딜리아가 왠지 억울한 듯한 목소리로 항변했다.
그러나 내가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한쪽 눈썹을 치켜뜨자,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우웅, 아라써요오…….”
“다람쥐 용사가 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건 안전이야.”
“지쨔 불짱난 아닌데…….”
한바탕 설교를 시작하려 하자, 오딜리아가 다시 한마디 붙였다.
그렇지만 어제처럼 의기소침한 것보다는 고집스러운 지금이 훨씬 나았기에, 나는 다정하게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수리 위로 입을 맞춰 주었다.
“만약 어제 에르와 리아가 조금이라도 다쳤다면, 나는 정말 많이 속상했을 거야.”
“리아가 잘몬태써요…….”
“에르도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동시에 내 품으로 파고들며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애교를 부리는 그 모습이 꼭 새끼 강아지들처럼 귀여웠다.
그러나 잔잔한 나의 평화는 이어진 불청객의 방문으로 인해 어그러지고 말았다.
“가주님! 황제 폐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뭐?”
나는 아이들의 앞에서 찌푸려지는 표정을 차마 감추지도 못한 채 되물었다.
“어디로 모실…….”
“어딜 감히!”
어제 정원에 난 불로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불쾌한 기억이 다시 떠오른 순간, 나는 버럭 소리쳤다.
험악하게 변한 나의 표정에 사용인이 놀란 것이 느껴졌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테오도르 황제는 어디에 있지?”
“아, 그게, 현관 앞에…….”
내가 몇 차례 그를 문전 박대 했던 탓에, 사용인들은 그를 들여보내지 않고 현관 앞에 세워 두었다고 전해 주었다.
나는 사용인이 알려 준 장소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그러자 현관 앞에는 정말로 테오도르가 와 있었다.
어제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본 카타리나의 아이와 함께.
‘뭐지? 나를 놀리기라도 하려는 건가?’
구태여 이곳까지 카타리나의 아이를 데려온 저의를 알 수 없어 무섭게 노려보았다.
“이브……!”
나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었다.
그러나 잘생긴 그의 얼굴은 내게 조금의 감흥도 주질 못했다.
저 얼굴로 다른 여자에게 웃어 주었을 그를 생각하니 오히려 더 불쾌해졌다.
“또, 약속도 없이 찾아오셨군요.”
나는 마땅한 예법마저 잊은 채, 책망하는 말투로 쏘아붙였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웃음을 거두지도, 당황하지도 않으며 방긋 눈을 휘었다.
“오해를 풀러 왔어, 이브. 이것 좀 봐 줘.”
“폐하와는 더 이상 나눌 이야기가 없습…….”
“나는 너 말고 다른 여자랑 나쁜 짓 한 적 없어.”
뻔뻔하게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거짓말을 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내 시선이 더욱 싸늘해졌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꿋꿋하게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그 여자가 헛소리를 한 거야. 이거 봐 봐, 나랑 하나도 안 닮았잖아. 우리 아이들과 달리.”
마지막에 덧붙인 말에 그를 한 번 노려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움직여 테오도르의 옆에 서 있는 카타리나의 아이를 쳐다보았다.
나와 눈이 마주친 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사르르 웃었다.
나란히 선 테오도르와 소름 끼치도록 닮은 눈웃음이었지만…….
‘조금 달라.’
자세히 보니 테오도르와 전혀 닮지 않았다.
황금색 눈동자가 둥글게 휠 때, 그 호선의 크기가 달랐고.
웃을 때 햇살에 반사되는 눈동자의 빛깔이 달랐으며.
또한 비스듬히 올라가는 입꼬리의 각도마저 달랐다.
카타리나의 아이는 얼핏 다른 점을 찾기 어려울 만큼 테오도르를 쏙 닮아 있었지만, 한때 테오도르에 대해서라면 누구보다 잘 알았던 내 눈에는 그 차이가 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곧바로 알아봤단 사실에 더 짜증이 났다.
“……그러네.”
나는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뭐.”
그러고는 존대를 내던지며 맹렬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 당연히 다르겠지. 고작 그런 이유로 뭐가 증명된다고.”
내 배로 낳은 아이인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자세히 관찰하면 나와 다른 부분이 꽤 많았다.
같은 사람이 아니니 다른 건 당연하다.
이런 되지도 않는 이유를 변명이라고 들고 와 내 평화를 깨뜨린 테오도르에게 화가 났다.
그런 나의 기색을 알아차린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대답했다.
“이거, 사람 아니야. 가짜야.”
“……?”
잠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어 그를 쳐다봤다.
그러자 그가 그다지 꺼내고 싶지 않은 이야기란 듯, 마지못해 덧붙였다.
“……네가 나를 떠날 때, 그랬던 것처럼.”
나는 벤야민이 만들었던 허수아비를 떠올리며 작은 탄성을 터뜨렸다.
“아, 허수아비.”
“허수아비?”
테오도르가 처음 듣는 명칭에 내 말을 따라 했다.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테오도르와 그를 본떠 만든 작은 아이를 노려보았다.
정말로 저것이 허수아비라면, 저것을 만든 이는 필히 그 여자일 테다.
‘카타리나, 그 여자라면 충분히 저런 것을 만들 수 있었을 테지.’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아뺘아!”
카타리나의 아이, 아니, 카타리나가 만든 허수아비가 나를 향해 외쳤다.
“아뺘! 아뺘아아아!”
아무래도 할 수 있는 말이 저것뿐인 듯했다.
공연히 머리가 아파 와, 한숨을 포옥 내쉬며 다시 테오도르를 보았다.
“그래, 설사 저것이 가짜라고 해도, 달라지는 게 뭐가 있지?”
“아주 많…….”
“돌아가.”
나는 차갑게 그의 말을 끊어 냈다.
그러자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브, 나 너한테 꼭 해야 하는 말이…….”
“학습 능력이 없는 건가? 말했잖아. 너랑 대화하고 싶지 않다고.”
테오도르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다.
나는 따분한 표정으로 그 얼굴을 보았다.
저 아이가 정말로 그의 아이이든, 카타리나가 만든 가짜이든.
‘그게 뭐 어쨌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는 나와의 사랑을 잊었고, 내 사랑을 경멸하였으며, 내 앞에서 다른 여자를 사랑하노라 당당하게 선언했다.
이제 와 그가 기억을 되찾고 이전과 다른 모습을 보인다 한들, 그 과거가 바뀌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난 테오도르가 더욱 미웠다.
그가 조금만 더 일찍 나를 기억해 줬더라면.
그랬더라면 나의 지난 4년이 조금은 덜 외로웠을 텐데, 하는 나약한 생각이 자꾸만 나의 틈을 비집으려고 해서.
나는 테오도르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마지막 경고야, 테오도르. 한 번만 더 네 멋대로 찾아오면…….”
“왜……!”
순간 그가 버럭 목소리를 높였다.
“가짜라고 했잖아! 왜 내 말을 안 들어 주는 거야?”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어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지금 뭘 잘했다고 화를 내는 거야?”
카타리나가 데려온 아이가 가짜라는 게 밝혀지면, 그걸로 모든 게 다 해결될 거라 생각하기라도 한 걸까?
애초에 그 여자가 저런 것을 만들어 나타날 여지를 제공한 것도 그 아닌가?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꺼져. 너랑 대화를 하느니 바퀴벌레랑 친구가 될 거야.”
바퀴벌레는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것 중 하나였다.
테오도르가 그 잘생긴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기 시작했다.
흡사 나와 친구가 될 바퀴벌레를 모조리 찾아내어 박멸할 듯한 눈빛이었다.
기억을 잃은 그의 곁에서 그가 필요하다면 얼마나 냉혹하고 잔인하며 악랄한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보아 왔었다.
그랬기에 나는 아주 조금 겁을 먹었다.
‘본성을 보이려는 건가?’
여차하면 그를 제지할 요량으로 허리에 찬 검집에 손을 가져다 대는 때였다.
푸욱.
테오도르의 고개가 아래로 꺾이며, 그 주위로 황금색 빛무리가 음울하게 퍼져 나왔다.
‘성력……?’
그의 어깨가 자그맣게 들썩이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위협적으로 번져 나가는 그 기괴한 빛무리에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노려보는 찰나.
“으흑…….”
순간 잘못 들은 것이라 생각했다.
“화낸 거…… 흑, 화낸 거, 아니야…….”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뜨문뜨문 꺼낸 그의 말 속에 섞여 있는 것은 분명 울음이었다.
“테오……도르?”
나는 당황하여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또르르, 후둑-
그의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이 턱 끝에 아롱지는가 싶더니,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렸다.
동시에 그의 주위로 험상궂게 일렁거리던 빛무리는 반짝거리는 금가루가 되어 파스스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바퀴, 벌레랑, 친구, 하지 마, 끕…… 너, 그거, 그거, 흑, 싫어, 하잖아…….”
나는 아주 잠시 내가 본 것을 믿지 못해 두 눈을 끔뻑였다.
온 얼굴을 축축하게 적신 채로, 테오도르가 서럽게 울고 있었다.
“너, 지금 우는 거야?”
세상에! 테오도르가 아이처럼 엉엉 울고 있다니!
“네가, 내 말, 하나도, 안 들어, 주고, 바퀴, 벌레랑…… 으흐윽…….”
‘바퀴벌레’라는 단어에 무슨 마법이라도 걸렸는지, 바퀴벌레 소리가 나올 때마다 그의 눈가에서 닭똥 같은 눈물이 퐁퐁 흘러내렸다.
“그, 그런 걸로 울어?”
졸지에 나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일전에 체르니시아의 가주로서 등장한 나를 보고 소리 없는 눈물을 흘렸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환하게 웃으며 눈물만 흘리던 그때의 그가 미치광이 같았다면, 지금의 그는…… 꼭 부모를 잃은 아이 같았다.
다 큰 성인이 보이기엔 퍽 볼품 없는 모양새였으나, 잘생긴 얼굴로 저러니 그마저도 조각 같아서 보기 나쁘진 않았다.
“나, 나는…….”
서럽게 울던 그가 간신히 울음을 삼켜 내며 나를 쳐다보았다.
촉촉이 젖은 속눈썹과 발간 눈가가 시선을 잡았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 이렇게 조심스러운 사람은 너뿐이라서. 미움받기 싫고 잘 보이고 싶은 사람도 너뿐이라서.”
“…….”
“그런데 내 방식대로 하면 네가 날 더 미워할 것 같고…….”
테오도르는 숨을 헐떡이며 내게 말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이렇게 찾아와서 네가 화를 풀어 주길 기다리는 것밖에…….”
이윽고 그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며, 그가 자신의 왼 가슴을 고통스레 움켜쥐었다.
“미안해, 이브. 내가 다 잘못했어. 그러니까 한 번만 내 이야기 들어 주면 안 돼?”
“…….”
“내가 이런 말 할 자격, 없다는 거, 나도 아는데, 그런데, 그렇지만…….”
“…….”
대답을 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자 그가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이상하게 그가 우는 모습이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우는 모습을 생각나게 했다.
오래전, 내가 그를 떠나던 때에.
나는 생각했었다.
그를 떠나서도 나는 잘 살 것 같다고. 그렇지만 기억을 되찾을 그는 그러지 못할 것 같다고.
기억을 되찾을 그에게 내 존재가 ‘혼란’ 그 외에는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알았다.
그건 내가 그를 떠나기로 결심한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기억을 잃어버리기 전 내가 사랑했던 남자가 안타까워서, 나는 조금 울었다.
그때는 내가 그의 앞에서 울었는데, 이제는 그가 내 앞에서 울고 있다.
차라리 날 다시 기억하지나 말지.
그럼 서로 미워하며 원수처럼 지낼 수 있었을 텐데.
그를 미워하는 나를, 그가 홀로 사랑하는 일은 없었을 텐데.
과거, 하루아침에 사랑을 잃어버린 내가 그를 홀로 사랑하면서 느꼈던 그 외로움과 서러움을 그에게 돌려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는데.
“테오도르.”
나는 팔짱을 끼며 그를 불렀다.
그가 히끅히끅 울며 나를 쳐다봤다.
“내가 예전에 네 앞에서 울었을 때, 네가 내게 그랬잖아.”
나는 그런 테오도르를 향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라고. 듣기 싫다고.”
[왜 울고 있지?]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어. 듣기 싫으니까.]
그날 그가 내게 날린 독설은 그다지 내게 큰 타격을 주지 못했었다.
당시의 나는 이미 그를 향한 모든 마음을 놓아 버린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무심하게 꺼낼 수 있는 과거였으나, 테오도르에겐 그렇지 않았나 보다.
그가 더욱 목 놓아 울기 시작했다.
“내가 그땐 미쳐서…….”
급기야 테오도르는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드문드문 숨 쉬기가 힘든지 가쁘게 호흡을 내쉬면서도, 우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저러다 울다 죽은 최초의 황제로 역사서에 실리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될 정도였다.
다람쥐 용사가 사실 악당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저렇게 울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너와 달리 인성이 바른 사람이라 우는 사람에게 그딴 식으로 말하지 않아.”
나는 선심을 쓰듯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 한번 말해 봐. 특별히 들어 줄게.”
순간 테오도르가 우는 것을 멈추고 나를 쳐다보았다.
동그랗게 커진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
그가 몹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이 퍽 청초했다.
“대신 이야기를 들어 주면 울음을 그쳐야 해.”
그러자 테오도르는 입술을 꾸욱 앙다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나는 그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조금 기다려 주었다.
조금 뒤, 어느 정도 진정이 된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일단 나는 그 여자와 그런 관계가 아니야. 다 거짓이었어. 너를 찾으려고 그 여자랑 거래를 했던 거야.”
테오도르는 퍽 진중하고 신실한 목소리로 말했다. 축축하게 젖은 눈가 때문인지 괜히 더 진실되게 들렸다.
“거짓이라고?”
“응, 그리고 그 여자의 임신도. 페르디난트에 잠입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지어낸 거짓말이야. 너도 기억하잖아, 내가 페르디난트에서 네 마지막 족적을 찾고 있었던 거…….”
“그 말을 믿으라고?”
조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네가 그 여자와 얼마나 떠들썩하고 요란한 사랑을 했는지, 내가 다 보았는데?”
뾰족한 반문에 테오도르가 입술을 꾸욱 깨물며 두 눈을 내려뜨렸다.
일견 상처받은 표정이었다.
내게 상처를 준 건 저면서, 왜 제가 더 상처받은 표정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잠시 말이 없더니, 내 눈치를 힐긋 보며 이어 말했다.
“……그리고, 내 기억도.”
“……?”
“낙마를 하면서 잃어버렸다던 내 기억, 그게 아니었어. 나는 그 같잖은 사고로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페르디난트의 그 죽일 것들이 공모해서 내 기억을 잃어버리게 만든 거였어.”
공모?
기억을 잃게 만든 거라고?
예상하지 못한 말들에 나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그에게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처음부터 이상했어. 내가 기억을 잃고 얼마 되지 않아 페르디난트는 기다렸다는 듯 혼담을 넣어 왔지. 마지막 만남을 생각하면 퍽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는데.”
“……!”
“그런데 너도, 나도 이상한 걸 못 느꼈잖아.”
테오도르의 설명을 들은 순간, 한 번도 이상하다 여기지 못했던 것들이 모두 기이하게 여겨졌다.
마치 두 눈을 가리던 장막이 깨진 것처럼.
“뭐야, 대체, 왜.”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말을 더듬었다.
어째서,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못한 거지?
분명 나를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갔던 날,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목에 검을 들이밀며 위협을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나타난 카타리나는 테오도르를 전혀 두려워하는 기색 없었다.
오히려 벤야민과 함께 황궁에 찾아와 당당하게 혼담을 제의하였고…….
“술식이야. 네가 그 어설픈 남장을 했을 때, 누구도 이상함을 감지하지 못하고 네가 남자라 믿었던 것처럼.”
“술식……?”
내 남장에 술식이 간섭했다는 것도 놀라웠으나, 그보다 더한 충격으로 인해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리고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그들의 이름을 읊조리는 순간, 내내 청초하게 젖어 있던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음산한 기운이 떠올랐다.
“그자들이 한 짓이야. 너랑 나를 갈라놓으려고, 흑마법으로…….”
철렁-
심장이 선득하게 내려앉았다.
“…….”
테오도르를 응시하는 내 눈동자가 가늘게 흔들렸다.
‘말도 안 돼.’
오직 한 가지 외침만이 머릿속에서 가득 메아리쳤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소리는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그 여자가 다 실토했어.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도 병사들을 보냈고.”
“…….”
힘들게 대화의 기회를 얻어 낸 그가 근거 없이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쉽게 믿기도 어려웠다.
금지된 흑마법까지 써서 나와 테오도르를 갈라놓으려 했다고?
카타리나는 그렇다 쳐도, 벤야민이 왜?
“벤야민은…….”
“그리고 기회가 없어 미처 말 못 했는데, 브리안을 칼리고르로 소환했을 때 누군가 이동 마법진에 손을 써 두고 그를 습격했어.”
테오도르가 재빠르게 내가 모르던 사실 하나를 더 알렸다.
“황궁 마법진은…… 그렇게 쉽게 장난질을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
“응. 그래서 조사 중이야. 가장 유력한 범인으로 떠오르는 사람이…….”
테오도르의 뒷말이 먹먹하게 귓가에 아스러졌다.
나는 원망스러운 눈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았다.
그는 나를 끔찍했던 페르디난트에서 꺼내 주고, 내게 사랑을 알려 주었던 남자였다.
그와 함께 지낸 반년은 내 인생에서 가장 빛나고 행복한 날들이었다.
그랬기에 그가 기억을 잃었을 때, 더욱 짙은 참담함이 나를 아프게 했다.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차렸을 거야.]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를, 조금 원망했었다.
아니, 조금 원망했다는 것은 애써 무던한 척하려는 나의 허세이다.
많이, 정말 많이 그를 미워하고 원망했었다.
나 또한 한때 그를 참 많이 사랑했었기에, 그를 사랑했던 만큼 더욱 그를 원망했다.
그리고 그 뾰족한 원망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닿지 못하고 내게 되돌아와 나를 아프게 할퀴었다.
그 속에서 너덜너덜 찢기고 넝마가 된 내 사랑을, 나는 끝내 모두 버리고 떠났다.
첫사랑의 말로는 그처럼 비참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모두 누군가의 악의로 인한 일이었다고?
하필이면 내가 오랫동안 친구라고 믿었던 벤야민이 이 일에 개입했다고?
그리고 그가, 어쩌면 내 오빠까지도 죽이려 했다고?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개소리다.
나는 나를 한때 세상에서 가장 빛나게 해 주었다가,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여자로 만들었던, 한때 내가 사랑했던 남자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테오도르는 나와 그 사이에 있던 불편한 과거가 모두 타인의 악의와 기만으로 인해 벌어진 것이라 말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그러나 만일 이 말마저 거짓이라면, 테오도르는 정말 잔인한 사람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이 거짓이길 바랄 수도, 진실이길 바랄 수도 없어 망연해졌다.
“당장 믿기 힘든 거 알아. 그렇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밝혀질 일들을 거짓으로 꾸며 낸 건 아니야.”
“…….”
나는 테오도르를 빤히 응시했다.
그의 말마따나, 흑마법에 손을 대어 황제의 기억을 조작하고 황궁 마법진을 고장 내고 브리안을 습격한 게 모두 벤야민의 짓이라면…….
‘흑마법. 황제 시해. 황궁 마법진 조작. 민간인 습격…….’
앞의 두 개만으로도 제국에서 가장 중죄로 다루는 것들이었다.
내가 믿든 믿지 않든,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 앞에 낱낱이 밝혀질 것이리라.
“하…….”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머리가 아팠다.
나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꾹꾹 누르며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래. 무슨 말인지 알겠어. 이 말을 하려고 계속 찾아왔던 건가?”
이제 할 말이 끝났으면 썩 물러가라는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잠깐, 이브. 나 너한테 아직…….”
그런 내 기색을 기민하게 알아차린 그가 다급한 표정으로 나를 붙잡더니, 대놓고 내 눈치를 살폈다.
하고픈 말을 섣불리 꺼내지 못하고 달싹거리는 그의 입술이 눈물에 젖어 유독 붉고 촉촉했다.
“빨리 말하고 끄…… 사라져.”
“정말 말해도 돼?”
조금 전까지 잘만 말하더니, 갑작스럽게 조심스러워진 게 썩 수상했다.
“그럼 그냥 돌아가든가.”
내가 이대로 돌아설 것처럼 퉁명스럽게 대꾸할 때였다.
“사랑해, 이브.”
그가 불쑥 고백을 해 왔다.
“……?”
갑작스러운 그의 고백에 내 얼굴이 있는 대로 찌푸려졌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야?’
가만히 응시하자 조각처럼 아름다운 얼굴이 또다시 처연하게 젖어 들었다.
“날 버리지 마. 네가 없으면 난…….”
두 눈을 내리깔며 속눈썹을 파르르 떨던 그가, 가냘픈 목소리로 물었다.
“날 버릴 거야?”
서글피 젖은 얼굴을 끔뻑끔뻑 쳐다보던 나는 이내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테오도르는 이미 한 번 눈물로 원하는 바를 조금이나마 이루어 냈다.
또한 테오도르는 자신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그리고 그 잘생긴 얼굴이 얼마나 강한 파급력을 가지고 있는지 잘 아는 남자였다.
그러니까 지금, 그는 그 잘생긴 얼굴과 눈물을 이용해서…….
‘미인계에, 눈물 작전을 쓰고 있잖아?’
다분히 의도적인 저 얼굴 각도와 표정을 본 순간, 알아챌 수 있었다.
비록 저 눈물이 억지로 짜낸 것은 아닐지라도, 테오도르는 자신의 눈물마저 이용할 수 있는 남자니까.
그리고 그것을 알아챈 순간, 나의 표정은 더욱 냉담해졌다.
“버리다니. 네가 언제부터 내 것이었다고.”
이야기를 들어 준다고 했지, 고백을 들어 줄 생각은 없었다.
싸늘한 목소리로 받아치자, 그가 정말로 눈물을 터뜨릴 것처럼 그렁그렁한 표정을 지었다.
“나, 너의 테오잖아.”
“카타리나의 테오겠지.”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의 얼굴로 무심히 대꾸했다.
아직도 그를 향해 ‘테오’ 하고 부르며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던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잊히지 않았다.
그런데 어딜 감히 내 앞에서 ‘너의 테오’ 운운한단 말인가.
“……내가 기억을 잃고 너를 몰라봐서, 그래서 그래? 내가 바보처럼 그깟 흑마법 따위에 당해 가지고…….”
테오도르는 자신이 기억을 잃은 것이 우리의 관계를 어긋나게 한 모든 원흉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것 또한 내가 받은 상처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했다.
하지만…… 우리 사이의 문제는 단지 그뿐만이 아니었다.
“네가 사랑하는 건 내가 아니야. 어린 날의 기억일 뿐이지.”
나는 다시 만난 이후로 줄곧 내게 애틋한 시선을 보내는 그를 보며 생각하였던 것을 입 밖으로 꺼내었다.
“궤변이야, 이브! 내가 사랑한 건 오래전에도, 그리고 지금도……!”
“그래, 오래전에. 너는 ‘이보네’를 사랑해서 10년이 넘도록 나를 찾아 헤맸다고 했었지?”
“맞아, 나는……!”
“네가 사랑한 건 ‘이보네’인 나였어. ‘이브’가 아니라.”
그를 향해 쐐기를 박듯 말했다.
“무슨 소리야? ‘이보네’도 ‘이브’도 모두 너잖아.”
테오도르는 곧바로 반박하였으나,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차린 듯한, 조금은 겁에 질린 목소리였다.
“네가 ‘이브’를 ‘이보네’만큼 사랑해 주었더라면, 우리 사이에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이브, 그건…….”
“너는 ‘이브’를 싫어했잖아. 무시하고 경멸했잖아.”
“…….”
말문이 막힌 테오도르가 멍청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 말대로 네가 사랑한 ‘이보네’도 네가 싫어한 ‘이브’도 모두 나야. 그리고 ‘이브’는 더 이상 네 사랑을 믿지 못하겠대.”
이미 우리 사이에 신뢰는 형체 없이 무너진 채였다.
그리고 그 단단하던 사랑과 신뢰를 무너뜨린 것은 모두 테오도르였다.
“……아니야.”
그가 입술을 파르르 떨며 부정했다.
“아니야, 이브. 나는, 나는 널 싫어한 게 아니라…….”
“싫어한 게 아니면? 설마 좋아했다고 말하려는 거야?”
“…….”
비꼬듯 흘러나온 내 말에 테오도르가 정곡을 찔린 표정을 지었다.
“허…….”
나는 기가 막혀 헛웃음을 흘렸다.
“날 그렇게 대해 놓고서, 이제 와 날 좋아했다고?”
“…….”
“네 입으로 그랬잖아. 나는 네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라고.”
“…….”
“더럽고, 추악하다며? 내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깝다며 나를 경멸했잖아?”
내 입으로 묻어 두었던 과거를 꺼내자니, 기분이 더러워졌다.
“그게 아니야, 이브…….”
얼굴이 하얗게 질린 테오도르가 고개를 잘게 흔들며 변명했다.
“네가 좋아서, 네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네가 좋아서 그랬어, 네가 너무, 너무 좋아서…….”
“세상에 어떤 미친놈이 좋아하는 여자한테 그딴 식으로 망발을 해?”
“그건…….”
“이보네한테는 안 그랬잖아.”
테오도르는 이보네에게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밀어를 속삭이며, 좋은 모습만 보여 주었다.
그게 테오도르의 사랑이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와, 이브를 사랑했다는 테오도르의 말을 더욱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정말로 네가 좋아서 그랬어. 기억을 잃은 뒤에도, 널 보면서 자꾸 마음이 끌리고 흔들려서.”
그러나 테오도르는 끈기 있게 항변을 이어 갔다.
“이보네를 흉내 낸 여자라 생각했던 네게 흔들리는 게, 이보네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그래서 더 못되게 굴고 상처를 줬어.”
“상처를 준 건 알긴 하나 보네?”
“…….”
콧방귀를 뀌며 대꾸하자 다시 그가 입을 다물었다.
그가 내게 준 상처가 어디 보통 상처였던가?
“이브, 내가 미안…….”
“뭘 잘했다고 울먹여? 네가 울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또다시 울먹이려는 그를 향해 싸늘하게 일갈했다.
그러자 그가 울컥거리는 감정을 참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저 잘생긴 얼굴로 상처받은 눈을 하고 있으니, 아주 살짝 동정심이 일려고 하였으나…….
[머리핀을 카타리나 양에게 넘겨.]
[이제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핀은 필요 없겠군.]
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하였으면서 그 여자를 위해 내 머리를 자른 테오도르.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찾기 전까지는 검을 들지 말라 했으면서, 카타리나의 호위를 맡으라던 테오도르.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이브 로웰린의 징계는 그대에게 모두 일임하지.]
내 상처를 모두 치료해 주겠다면서, 같은 자리에 카타리나가 상처를 남기는 걸 묵인한 테오도르.
그리고,
[테오……. 나, 너무…… 아파……. 너무, 너무 아파서…… 그래서…….]
[폐하, 카타리나 양이 방문했습니다.]
[아…….]
아파 우는 나를 두고 카타리나의 방문 소식에 화색이 되어 멀어지던 테오도르와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혼절하고 만 나.
그것들을 떠올린 순간, 고개를 들던 동정심은 곧바로 다시 꺾이고 말았다.
카타리나와 정말 연애를 했든, 가짜 연애를 했든.
세상에 어떤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고 행동한단 말인가?
인성의 한 부분이 고장 난 사람이 아니고서야.
“아.”
나는 문득 그를 믿을 수 없는 또 하나의 이유를 떠올리며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너, 아주 쓰레기 같은 인성을 내 앞에서 숨기느라 애썼던데.”
이브에게 들키고 말았다.
사실은 제가 전혀 다정하지도, 착하지도 않은 사람이라는 걸.
아주 어렸을 때, 그녀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 꼭꼭 숨기고 감추어 왔던 것을 모두 들키고 말았다.
그녀를 잃어버린 이후, 잠시 외면하고 있던 사실을 그녀가 언급한 순간.
테오도르는 온몸에 핏기가 사아악- 가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사람이 기억을 잃었다고 해서 그렇게 서슴없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아.”
“…….”
“기억을 잃지 않았더라면, 나는 네가 어떤 사람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을 테지.”
저를 쳐다보는 이브의 눈동자는 냉담하기 그지없었고, 저의 잘못을 하나씩 지적하는 조곤조곤한 목소리는 저를 향한 아주 작은 감정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완연히 타인을 대하는 듯한 그녀의 차가운 태도에 심장이 아프게 조여 왔다.
이브는, 이브는 언제나 한결같았다.
밝고, 선하고, 단단한 사람.
약자를 보호하는 체르니시아의 긍지를 누구보다 자랑스러워하던 사람.
저처럼 어둡고 포악한 이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밝고 환한 사람이라, 그 빛에 기대어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숨기고 포장하였다.
그녀가 저를 좋은 사람으로 알도록.
저의 좋은 모습만 보임으로써, 감히 그 애정을 한 자락이나마 훔쳐낼 수 있도록.
그러나 그 부단한 노력을 모두 망쳐 버렸다.
기억을 잃고 그녀를 몰라본 어리석은 제가 제 손으로 모두 망쳤다.
‘내가 다 망쳤어…….’
테오도르는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 만 자신의 손바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어 들려오는 그녀의 질책에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체르니시아는 쓰레기를 버리라 가르쳐. 알브레히트는 달라?”
“…….”
대답,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그녀를 붙잡아야 하는데.
“그러니 괜한 힘 빼지 말고 돌아가.”
“…….”
마른 입술이 몇 번이나 달싹였으나, 끝내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 안을 맴돌던 수많은 변명들이 소리가 되지 못하고 다시금 목구멍 안으로 삼켜졌다.
어떤 말을 꺼내도, 그녀에게는 비겁하고 못난 변명일 뿐이리라.
소리가 되지 못한 그 수많은 변명들은 가쁜 숨이 되어 거칠게 그의 목구멍을 긁어댔다.
테오도르는 차마 울지도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그럴 적에 그의 눈은 아프도록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퍽 볼썽사나우면서도 가엾은 몰골일 것이다.
그러나 이브는 그런 제 모습을 물끄러미 응시하더니 이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 돼. 붙잡아야 해.’
지금 그녀를 놓치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라.”
그 순간 간신히 끌어 올린 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한 번 거둔 것은 절대 버리지 않는 거라 배웠어, 나는.”
테오도르는 제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도 알지 못한 채 나오는 대로 지껄였다.
“이브. 너의 테오는 네게 애정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배를 뒤집어 까고 재롱을 부리는 착한 개새끼가 될 수 있어.”
그러나 그것은 곧 그의 본심이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스스로가 착하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지만.
이미 아주 어릴 적부터 그 손에 묻힌 피가 너무나 많은 저는 결코 그녀와 같은 선한 사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라면…… 착해질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착한 개새끼가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날 버리지 마.”
그녀가 저를 버린다고 생각하니 울컥, 울음이 나오려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울지 않았다.
[뭘 잘했다고 울먹여? 네가 울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제가 울면…… 그녀가 싫어하니까.
우는 순간 저를 두고 가 버릴 것이다.
“유감이네. 못된 강아지는 주인을 무는 법이라.”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든 울지 않으려는 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착해지겠다는 외침에도 불구하고 그저 단호했다.
그녀는 저를 원치 않았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오직 하나, 이 자리에서 제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머릿속이 새하얗게 점멸되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이브를 붙잡을 수 있지?
어떻게 해야 이브와 조금이라도 더…….
덥석-!
그녀의 손을 붙잡은 것은 머리보다 몸이 먼저 나간 행동이었다.
“……내가 착해진다잖아.”
이브에게 보여 주어야 했다.
제가 착해질 수 있다는 걸.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온순하고 예쁜 개새끼가 될 수 있다는 걸.
“내가 못된 개새끼라서 또다시 너를 물까 봐 걱정된다면, 물지 않는 착한 개새끼가 될게, 응?”
나는 개야.
나는 개새끼야.
나는 세상에서 제일 예쁘고 착하고 온순하고 귀여운 이브의 개새끼야.
개새끼는 마땅히 주인의 앞에서 재롱을 떨고 애교를 부려야지.
사랑받기 위해 있는 힘껏 몸부림을 쳐야지.
버림받지 않으려면 울고 질질 짤 게 아니라 예쁜 모습으로 예쁜 짓을 해야지.
테오도르는 그렇게 자기 세뇌를 하며 이브의 손등 위에 뺨을 비비적거렸다.
“주인님.”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는 저를 이브가 미친놈 보듯 보았으나, 진정한 개새끼라면 주인의 그런 시선마저 황홀해 마지않아야 하는 법이다.
테오도르는 두 뺨을 슬쩍 붉히며 생긋 웃었다.
“이브, 나의 주인님. 테오를 버리지 말아 주세요. 네?”
황제로서의 체면 같은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는 듯.
그래, 나는 이브의 개니까.
* * *
한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가 데려온 카타리나의 허수아비에게 한껏 관심을 부풀리는 중이었다.
사용인이 가져온 소식에 험악한 표정으로 뛰쳐나간 어머니의 뒤를 몰래 쫓았다.
밖으로 나오니 현관 앞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와 잘생긴 아저씨, 그리고 처음 보는 남자아이가 있었다.
“저고 모지?”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닮은 남자아이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기분 나뿐 냄새 나.”
그러자 에르빈이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오딜리아를 따라 인상을 찌푸렸다.
“냄새?”
오딜리아는 코를 킁킁거려 보았으나, 어떤 냄새도 맡을 수 없었다.
“암 냄새두 안 난데.(아무 냄새도 안 나는데.)”
“더러운 냄새 나. 지지 냄새.”
에르빈이 손을 휘휘 저으며 ‘우웩’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오딜리아는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잘샌긴 아조씨랑 똑같이 생겼어.”
처음 보는 남자아이는, 멀리서 훔쳐보기에도 테오도르와 썩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테오도르처럼 검은 머리카락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고 있었다.
“리아는…… 숨겨야 하는데…….”
오딜리아는 괜히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는 테오도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 옆에 가만히 서 있는 테오도르를 닮은 작은 남자아이를 째릿 노려보았다.
[내가 네 아버지니까.]
[우리가 가족이라는 증거.]
자꾸만 제게 아버지니 가족이니 하던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생각이 났다.
괜한 배신감이 밀려왔다.
“잘샌긴 아조씨는 거진말쟁이 지지야. 어몬니 말씀 맞아.”
불퉁한 목소리가 오딜리아의 입술과 함께 삐죽 튀어나왔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각각 다른 이유로 숨어서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노려보았다.
테오도르와 이보네가 이야기를 하는 도중, 허수아비는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다가 슬쩍 자리를 옮겼다.
허수아비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수풀 사이를 헤치고 돌아다녔다.
오직 하나의 목적만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 목적을 위해 움직이는 허수아비의 걸음이 차츰 빨라지던 때였다.
문득 그 앞에 스산한 그림자가 어렸다.
허수아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안넝, 지새꾸(쥐새끼).”
“이 지 가튼 새꾸야.(이 쥐 같은 새끼야.)”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두 눈을 음산하게 빛내며 허수아비를 내려다보았다.
허수아비는 그 기운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아, 아뺘아…….”
탄생한 목적을 생각하자면 결코 뒷걸음치지 말아야 하는 자리이나, 겁을 먹고 말았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그만큼이나 허수아비를 내려다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눈빛이 험악하고 흉흉했다. 세 살 난 아이들의 것이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그런 두 아이가 내뿜는 으스스한 살기는 테오도르가 불쾌할 때 풍기는 기운과 조금 닮았다.
“이 지새꾸 때문에 어모니 기분 나빠졌어.”
“구리구 리아 기분도 나빠졌어.”
“지새꾸한테 지지 냄새 나. 에르도 기분 나빠.”
“마쟈, 혼내 조야 해.”
두 아이가 주고받는 말에 허수아비는 오싹한 몸을 움츠렸다.
이때, 허수아비의 안에서 섬뜩한 목소리 한 자락이 울렸다.
<제물…… 나를 깨울…….>
순간 허수아비의 두 눈이 붉게 빛났다.
움츠리고 있던 허수아비가 별안간 아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개처럼 구는 건 그만둬, 징그러우니까!”
테오도르의 손을 떨쳐내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둥글게 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네, 주인님.”
“미쳤어? 내가 왜 네 주인님이야?”
“그야 주인님께서…….”
“존댓말도 때려치워.”
“응, 이브.”
테오도르는 순순히 강아지 행세를 그만두었다.
“그런데, 이브…….”
그가 내 눈치를 힐끔 보며 또다시 입을 열었다.
울 자격도 없는 게 울지 말라고 몇 마디 했더니, 더 이상 울지 않는 것은 좋았으나…….
“에르빈과 오딜리아, 내 아이들이지?”
그 대신 작전을 바꾸기라도 한 건지, 이 미친 자가 미친 소리를 끝없이 하고 있다.
“개소리하지 마.”
“맞잖아, 내 아이.”
“왜 네 아이라고 생각해?”
“그야…….”
테오도르가 돌연 수줍은 듯 두 뺨을 붉혔다.
“부끄러워, 이브. 그걸, 내 입으로 말하라니, 그것도 이렇게 밝은 대낮에 바깥에서.”
“…….”
“하긴, 너는 원래도 대담했지. 나, 이제는 하나도 빠짐없이 다 기억해. 우리가 황제궁 뒤편의 정원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투명하게 내비쳐서 두고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나도 모르게 말이 나간 것은.
“내가 침대에 끌어들인 남자가 너뿐일 거라 여기는 거야?”
순간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나를 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거짓말 아니야.”
당연하게도 나와 한 침대를 데운 남자는 테오도르뿐이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속으로 흥, 하고 코웃음을 쳤다.
원래 사람은 나쁜 건 빨리 배우는 법이다.
이제 나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거짓말하는 것도 잘할 수 있다.
테오도르가 그러는 것처럼.
“그럴 리가…….”
아주 천천히,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져 갔다.
감정이 싸악 가신 듯한 그의 표정이 다소 으스스하게 느껴지려는 찰나.
“이건…….”
그가 사납게 으르릉거리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
단순히 나의 도발에 그러는 게 아닌 것 같았다.
“젠장, 흑마법.”
그가 나직한 욕설을 내뱉으며 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그 가짜 새끼가, 어디로…….”
그제야 나는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 있었던 카타리나의 허수아비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렸다.
“그냥 길을 잃은 거겠지. 사용인들에게 찾으라고 이를게.”
“흑마법이 느껴졌어.”
“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어디 있지?”
테오도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묻자, 나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저택 안에…….”
“저쪽이야.”
그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어디론가 뛰어가기 시작했다.
* * *
테오도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찾아 뛰어다녔다.
분명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 가짜 새끼의 짓인가.’
만일 그것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움직인다면, 분명 좋은 방향은 아닐 것이다.
테오도르는 바드득 어금니를 짓씹다가, 문득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허수아비도 흑마법을 쓸 수 있는 건가?’
본디 가호의 힘은 브리힘 신의 영광이 닿은 자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그건 인간도 아니고, 그런 걸 쓸 수 있을 리가…….
‘젠장. 모르겠어.’
마음이 조급해서 그런지 자꾸만 생각이 엉켰다.
테오도르는 일단 뛰었다.
그런 것을 일일이 따질 여력이 되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주 만에 하나라도 아이들에게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잘샌긴 아조씨, 안넝.]
[어모니, 저 아조씨 누구야요?]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천진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그 사랑스러운 목소리에 변고라도 생긴다면.
“안 돼.”
테오도르는 그 가짜를 들고 이곳까지 찾아온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마침내 그가 흑마법의 흔적을 좇아 수풀 앞에서 멈추었다.
“허억, 헉…….”
거칠어진 숨을 고르고 있노라니, 훌쩍이는 아이의 소리가 수풀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딜리아의 목소리였다.
테오도르는 덜컥 겁이 나 거칠게 수풀을 헤치며 안쪽으로 들어갔다.
“어? 아조씨?”
그러자 오딜리아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테오도르를 돌아보았다.
“괜찮……!”
괜찮냐고 물어보려던 테오도르는 오딜리아가 아주 멀쩡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오딜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에르빈 또한 오딜리아의 옆에 멀쩡하게 서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허수아비가 아이들의 앞에 힘없이 주검처럼 쓰러져 있었다.
“이게, 어떻게…….”
“리아가 혼내 조써.”
멍청하니 중얼거리는 테오도르에게 오딜리아가 설명했다.
“혼을 내 줘?”
“웅, 지새꾸 드럽꼬 냄새나서 기분 나빠. 구래서 리아랑 에르랑 혼내 줬어.”
그렇게 말하는 오딜리아는 무척 뿌듯하고 자랑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리아, 저 아조씨랑 친구야?”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자, 에르빈이 경계하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돌연 심장을 움켜쥐었다.
‘윽…….’
이브를 똑 닮은 자그마한 아이들이 나란히 자신을 올려다보는 광경이라니.
‘심장이 아프군.’
테오도르는 아이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에르빈에게서 익숙한, 그가 사랑하는 기운이 느껴졌다.
‘이브의 기운과 비슷해.’
에르빈의 손끝에서 찰랑거리는 녹색 검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오딜리아에게로 향했다.
‘이쪽은…… 내가 잘못 느낀 게 아니라면…….’
테오도르는 짐짓 심각해져서, 무릎을 꺾어 앉았다.
오딜리아와 눈높이를 맞춘 그가 오딜리아의 손끝을 붙잡았다.
흑마법의 술식이 그곳에 있었다.
“이건, 어떻게 한 거지?”
“웅?”
“이 술식…….”
술식이라기엔 퍽 엉성한 모양이긴 했다.
소용돌이치는 동그라미 모양과 삐뚤어진 별 모양은 얼핏 아이가 흙바닥에 죽죽 긋던 낙서에서 본 것 같기도 했다.
“술씨(술식)? 술씨가 모야?”
오딜리아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흑마법이니, 술식이니 하는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무의식중에 그려 냈다는 건가.’
테오도르는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아조씨, 리아 손 맘대로 잡지 마!”
옆에서 에르빈이 바득바득 화를 내고 있었기에, 그는 일단 오딜리아의 손을 놓았다.
그러고는 말을 슥 돌리며 물었다.
“그런데 왜 울고 있었지?”
“아, 구게…….”
곧바로 침울해진 오딜리아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훌쩍였다.
“리아 머리카랑이…….”
“머리카락이, 왜.”
“리아 머리카랑이 까매져서…….”
“아…….”
오딜리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아이들의 안전에만 집중하여 살피던 테오도르는 뒤늦게 그것을 알아차렸다.
“어몬니가 리아 말썬재미(말썽쟁이)라고 생각하실 거야.”
“아냐, 리아. 울지 마.”
옆에서 에르빈이 훌쩍이는 오딜리아를 달래 주며 말했다.
“리아 머리카락 밤하눌처럼 애뿌단 말야.”
“그래, 에르빈의 말이 맞아.”
그것을 잠잠히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이내 맞장구를 쳤다.
“네 머리카락은 밤하늘처럼 예쁘니까 속상해할 필요 없어.”
“하찌만…… 하찌만……!”
울먹이던 오딜리아가 빼액 소리를 질렀다.
“어몬니는 리아 머리카락 새까만 거 시러하신단 말야!”
“싫어한다고?”
“리아, 울지 마. 울지 마.”
에르빈은 안절부절못하며 오딜리아의 눈가를 소매로 박박 닦아 주었다.
테오도르는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왜…… 싫어하지?”
설마, 내 머리가 검은색이라서?
예전에는 검은 머리가 밤하늘처럼 예쁘다고 그랬잖아.
이제는 꼴도 보기 싫어진 건가?
그래서, 아이가 이렇게 울며 걱정할 만큼?
온갖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쳤다.
“몬라(몰라). 감춰야 한댔어. 어몬니랑 베냐민 삼쫀 이야기하는 거 리아가 다 들었어.”
“아냐, 리아. 쩌번에 어모니가 갠찬타구 했잖아.”
“하찌만…….”
오딜리아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다가, 테오도르를 힐긋 쳐다보았다.
“있쬬, 아조씨. 아조씨가 리아 머리카락 바꼬 주면 안 돼요?”
오딜리아가 공손한 목소리로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안 돼. 나는 그런 능력 없어.”
“베냐민 삼쫀은 해 주는데…….”
그러나 테오도르가 고개를 젓자, 아이는 곧바로 공손한 가면을 벗고서 투덜거렸다.
벤야민과 비교하는 말에 테오도르의 눈썹이 삐뚜름히 치솟았다.
“대신 다른 방법으로 너를 도울 순 있지.”
“따룬 방봅?(다른 방법?)”
오딜리아가 두 눈을 끔뻑였다.
* * *
테오도르는 무려 체르니시아의 가주인 나마저 쫓기 힘들 정도로 빨랐다.
‘전장에서 오랜 기간 굴렀다더니.’
테오도르와 흩어져 아이들을 찾던 나는, 수풀 너머에서 들려오는 도란도란한 말소리에 멈칫했다.
수풀을 헤집고 안쪽으로 발을 들이자, 테오도르가 아이들과 함께 있었다.
그가 나보다 먼저 아이들을 찾은 모양이다.
“이브!”
그는 헐레벌떡 뛰어가던 것치고는 평이한 얼굴로 나를 돌아봤다.
“어모니!”
“어몬니이!”
그 옆에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함께 나를 돌아봤다.
아이들은 평소와 다름없이 멀쩡한 모습이었다.
“내가 착각한 건가 봐. 아무 일도 없었어.”
테오도르가 태연히 설명했다.
나는 시선을 천천히 옆으로 옮겨, 볼품없이 픽 쓰러져 있는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가리켰다.
“그럼 왜 저건 저렇게 엎어져 있지?”
“몰라. 저걸 운용하던 자의 마력이 다했나 보지.”
테오도르는 어깨를 으쓱하며 답했다.
수상했다.
그러다 나는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을 보고 미묘한 이질감을 느끼다가 놀라 물었다.
“리아, 머리카락이 짧아졌잖아?”
오딜리아의 머리카락이 또 한 뼘 정도 잘려 있었다.
“녜, 구게…….”
오딜리아는 두 눈을 데구루루 굴리다가 테오도르를 힐끗 쳐다보았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잘랐어.”
“뭐?”
순간 나는 기가 차서 되물었다.
“자른 게 더 예쁘잖아.”
“아이 머리카락을 부모에게 말도 안 하고 멋대로 자르면 어떡해?”
어이가 없어서 쏘아붙이자, 그는 더욱 뻔뻔한 얼굴로 대꾸했다.
“나도 부모야.”
“헛소리하지 말고 당장 끄……즈 브르.”
욕설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으나, 차마 아이들 앞에서 험한 말을 내뱉을 수 없어 어금니를 악물어야 했다.
* * *
‘끄즈 브르, 라니. 어쩜 욕을 하는 것도 이렇게 사랑스럽지.’
테오도르는 그녀를 떠올리며 변태처럼 혼자 히죽 웃었다.
[이제 이만 돌아가. 네가 말한 대로 이야기를 들어 줬으니까, 앞으론 찾아오지 마.]
[하지만, 아직…….]
[이야기만 들어 달라며? 그런데 이제는 용서도 해 달라고? 인성만 없는 줄 알았더니 염치도 없나 보지?]
이브는 냉담한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쫓아냈다.
만일 아이들이 옆에 없었더라면, 험한 욕설과 함께 저를 두들겨 패기라도 할 눈빛이었다.
아직 그녀에게 할 말이 많이 남았다.
용서를 받지도 못했다.
어쩌면 평생토록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욱신- 하고 아파 왔으나, 테오도르는 일단 물러나는 쪽을 선택했다.
‘이브가 오해를 풀어 줄까.’
오해가 풀리고 나면, 조금은 저를 용서해 주지 않을까. 그 작은 희망에 기대어.
이브는 당장 제 말을 믿지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차 제 말을 믿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페르디난트 저택으로 병사들을 보내고, 대신전에 신관을 보내 달라 요청했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찾아가서 찢어 죽이고 싶은데.’
귀찮은 절차를 무릅쓰는 것은, 그의 죄목을 낱낱이 밝히기 위함이었다.
벤야민은 머지않아 재판정에 오를 것이다.
제 기억에 손을 댄 게 밝혀진다면, 이브도 제 말을 믿어 주겠지.
그리고 브리안을 공격한 사실마저 밝혀지면, 그 음침한 페르디난트의 놈은 두 번 다시 이브의 옆에서 친구 행세를 하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이참에 그녀의 옆에서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는데.’
테오도르는 축 늘어진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기사들에게 맡겼다.
저를 본떠 만든 것이 불쾌해서 쳐다보기도 싫었다.
테오도르는 부러 말과 마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 정문까지 나갔다.
그녀의 흔적이 머무른 공기를 조금 더 맡고 싶었던 탓이다.
“아조씨.”
이때, 자그마한 목소리가 테오도르를 붙잡았다.
“아조씨, 지지 아조씨.”
힐긋 돌아보자 에르빈이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지지 아저씨? 나를 말하는 건가?”
“리아 도와줘서 고마워요.”
“딱히.”
테오도르는 뿌듯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누르며 대답했다.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어.”
“에르가 보답하께!”
“보답?”
에르빈이 테오도르의 소매를 쭉쭉 잡아당겼다.
몸을 낮추라는 그 신호에 테오도르는 영문을 모른 채로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에르빈이 까치발을 들어 그의 뺨에 호- 하고 입김을 불어 주었다.
“어……?”
순간 테오도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몸을 슬쩍 뗀 에르빈이 배시시 웃으며 테오도르를 보았다.
“방금, 이건.”
“에르는 의사야! 에르가 호 하면 아야 한 거 다 나아!”
테오도르는 아이의 입김이 닿았던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그 자리는 칼리고르 왕성에서 마주쳤던 이브가 제게 남긴 상처가 머물던 곳이었다.
그녀의 종적을 알지 못하여 괴로워할 적에, 그녀의 작은 흔적이나마 아쉬워 일부러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둔 상흔이기도 했다.
검기가 깃든 상흔이기에 오로지 성력으로만 치료가 가능한 것이었는데…….
“상처가…….”
테오도르는 에르빈을 빤히 쳐다보았다.
자신과 똑같은 황금색 눈동자.
저것은…… 레오브란테의 색이었다.
‘검기뿐만 아니라, 성력도 갖고 있는 건가? 두 가지 가호를 동시에 발현했다고? 가능한 일인가?’
이론적으로 불가하지 않다고 들었으나, 실제로 그것을 행한 자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에르빈은 이제 겨우 세 살인데…….
‘어쩌면 이브와 나의 아기들은, 천재가 아닐까?’
검기와 성력을 동시에 발현한 에르빈.
그리고, 비록 제국에서는 금지된 힘이지만 본능적으로 흑마법의 술식을 그리던 오딜리아.
테오도르는 그녀와 제 아이들의 비범함에 가슴이 벅차는 것을 느꼈다.
“구치만 나 아조씨 시러.”
이때, 에르빈이 불쑥 말했다.
“아조씨 때무네 어모니 기분 안 조아.”
미간을 가득 모으며 눈썹을 치켜뜬 에르빈의 표정이 이브의 것과 닮아 있었다.
“구니까 이제 에르 집에 오지 마.”
에르빈은 조금 전 살갑게 치료를 해 주던 때와 달리, 냉담하게 테오도르의 몸을 정문 바깥으로 밀어냈다.
“안녕, 아조씨.”
그러고는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
테오도르는 멍하니 쫓겨나며 조금 전 에르빈의 입김이 닿았던 뺨을 매만졌다.
* * *
황제의 병사들이 페르디난트 저택에 들이닥쳤다.
“페르디난트의 가주 벤야민은 황궁 마법진을 망가뜨리고,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습격하였으며, 금지된 술법으로 황제 폐하의 기억에 손을 댄 시해범으로 지목되었기에 황궁으로 연행한다.”
병사들을 이끌고 온 황제의 수석 호위 기사인 린든이 말 위에서 엄숙한 목소리로 선고했다.
“증거, 있습니까?”
그러나 벤야민은 도리어 뻔뻔한 목소리로 느긋하게 물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자백이 있었다.”
“4년 전에 사라졌다가 나타난 여자의 말만 믿고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잡아가겠다고?”
피식.
비릿한 비웃음이 벤야민의 입가에 걸렸다.
“명확한 증거 없이 3대 가문의 가주를 겁박하는 것은 황권의 남용입니다.”
어차피 신전에서 신관이 찾아와 조사를 하다 보면 그가 정말로 흑마법을 사용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그럼에도 그가 이처럼 당당하게 나오자 린든은 조금 헷갈려졌다.
그러나 태연한 겉과 달리, 벤야민의 속은 타들어 갈 듯 초조했다.
황제가 이렇게 나왔다는 건, 분명 머지않아 이브의 귀에도 들어갈 것이라는 뜻이니까.
제가 황제의 기억을 조작하는 데 개입하고, 그녀의 남매를 습격했던 것까지, 모두.
* * *
황궁에 돌아온 테오도르는 벤야민이 순순히 잡혀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워낙 완강하게 나온지라…….”
마차에서 내림과 동시에 황제궁 정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린든이 그에게 주섬주섬 변명했다.
“그래.”
테오도르는 무신경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걸음을 옮겼다.
한마디 할 거라 생각했던 그가 가만히 고개만 끄덕이자, 린든은 도리어 놀라 두 눈을 끔뻑였다.
기실 테오도르는 아까부터 제 한쪽 뺨에 닿았던 자그마한 온기에 온통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다.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에르빈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만져 보았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말려 올라갔다.
에르빈이 제가 싫다며 앞으로 찾아오지 말라 한 것은 이미 새까맣게 잊은 터였다.
미친 자처럼 히죽히죽 웃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린든은 공연히 기분이 찜찜해졌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이보네 님은 잘 만나셨…….”
린든이 그 부담스러운 웃음을 그만 보고 싶어서 말을 돌리려 할 때였다.
“형님.”
불쑥, 반갑지 않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테오도르는 겁 없이 자신을 부른 이를 돌아보았다.
“……에른스트.”
그 얼굴을 보자 조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나빠졌다.
테오도르는 아주 오래전부터 이복 아우를 몹시 싫어했으니까.
“형님의 전 약혼녀가 형님의 아이를 데리고 돌아왔다고 들었습니다. 정말입니까?”
“네가 내 일엔 무슨 상관이야?”
테오도르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저의 전 약혼녀도 아니고 그녀가 데려온 아이 또한 당연히 제 아이가 아니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이브도 아니고 에른스트 따위에게 그런 것들을 친절하게 설명하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큼도 없었다.
“확실하게 하세요. 이보네를 상처 주지 말고요.”
에른스트가 테오도르를 향해 힘주어 말했다.
이에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래서였다.
테오도르는 이래서, 에른스트가 싫었다.
“마치, 네가 이브의 뭐라도 되는 것처럼 말하네.”
그때도 그랬었지.
그녀가 죽은 줄 알았을 때, 저를 찾아와 꼭 뭐라도 되는 것처럼 시비를 걸어왔지.
“저는 그 애의 친구예요.”
“친구는 무슨.”
테오도르는 짧은 코웃음을 쳤다.
“누가 친구를 그딴 눈으로 쳐다봐?”
그 말에 에른스트가 두 눈을 가늘게 떨었다.
“그, 그게 무슨…….”
“너, 좋아하잖아, 이브를.”
“……!”
에른스트의 표정이 뻣뻣하게 굳는가 싶더니, 이내 화르르 달아올랐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어이가 없었다.
설마 정말로 제가 모를 거라 생각했나.
아주 어릴 때부터 좋아 죽겠다는 눈으로 이브를 쳐다봐 놓고서.
오죽하면 눈치 없는 이브도 그걸 알아채지 않았었나.
“감히, 주제도 모르고.”
테오도르는 혀를 쯧쯧 차며 중얼거렸다.
그러나 이 정도로 위협을 하면 물러나야 할 그의 이복 아우는, 오늘따라 유난히 끈질기게 버티며 저를 도발했다.
“……주제를 모르는 건 형님이에요.”
“허?”
테오도르가 험악한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노려보았다.
“이보네는 형님처럼 나, 나쁘고 못된 사람이 넘볼 수 있는 애가 아니에요.”
“어디, 계속 말해 봐.”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 테오도르가 입꼬리를 삐뚜름히 끌어당기며 턱짓을 했다.
그 시선에 에른스트는 움찔하였으나,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형님이랑 형님의 약혼녀 때문에 이보네가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그 애의 머리카락을 자른 것도, 형님 약혼녀가 그 애의 몸에 폭력을 가하는 걸 묵인한 것도, 다 형님이잖아요.”
에른스트가 테오도르의 과오를 하나씩 꼽을 때마다, 그러잖아도 험상궂던 테오도르의 표정이 더욱 무섭게 변해 갔다.
“또다시 그 애를 상처 주지 말고, 그냥 그 애를 내버려 두세요.”
아무래도 지난번, 제가 체르니시아 저택을 방문한 것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게다가 이제 형님의 전 약혼녀도 돌아왔잖아요. 형님의 아이랑 같이.”
“…….”
테오도르는 기분 나쁘게 생긴 에른스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에른스트는 카타리나가 돌아왔다는 소식만 듣고, 그녀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소식이 느리군.’
마르가라테 황후의 죽음 이후 에른스트는 줄곧 끈 떨어진 신세였다.
후계가 없는 황제 때문에 황궁에 명목상 남아 황족의 의무를 다하는 것뿐.
고작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존재가 제게 두 눈을 부릅뜨고서 따지는 게 그저 우스웠다.
“그래서, 지금 나한테 그걸 따지러 온 건가?”
“네, 따지러 왔어요. 이제 이브는 편하게 살도록 내버려 두라고…….”
마침 그때, 테오도르의 뒤편으로 기사들이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옮기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저도 모르게 그쪽으로 시선을 빼앗겼다.
‘뭐지?’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만큼 생소한 광경이긴 했다.
황궁에서는 보기 힘든 어린 남자아이가 기절한 채로 기사의 어깨에 들려 가고 있었으니까.
심지어 아이는 황제를 쏘옥 빼어 닮아 있었다.
“설마, 저 아이가…….”
에른스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그가 테오도르를 쓰레기 보듯 돌아봤다.
“……?”
테오도르는 이게 또 왜 날 저런 눈으로 쳐다보냐 싶어 뒤를 돌아보았다가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를 발견했다.
‘저걸 발견한 거군.’
아이들을 공격했다기에 감옥에 박아 두고 조사를 할 생각이었다.
[우리가 몬조 때린 고 아냐. 갑짜기 요게 리아 공격해써. 구래서 혼내 준 고야.]
[마쟈, 마쟈. 에르랑 리아 나쁀 아이들 아냐. 차카게 대해 주러고 핸눈데 조게 리아한테 막 난라와서…….]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저것이 갑자기 그들에게 달려들었다고 했다.
다행히 별 탈 없이 제압한 것 같았지만, 수상한 걸 내버려 둘 순 없었다.
테오도르는 쥐 죽은 듯 기절한 그것을 그대로 황궁으로 가져왔다.
“형님의 전 약혼녀가 데려왔다는 아이가 저 아이인가요?”
“뭐, 그렇지.”
“그런데 왜…… 꼭 고문이라도 할 것처럼…….”
“맞게 봤네. 고문할 거야.”
“……!”
비록 겉 외양은 저를 본떠 만든 어린 남자아이지만, 사람이 아니란 걸 알아서 꺼림칙한 건 없었다.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아무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왜? 조금 전에는 확실히 하라면서? 그래서 확실히 하려고 그 여자를 감옥에 가두고 저것을 고문하려는데, 왜. 문제 있어?”
“사람이 어떻게……!”
“뭐. 너도 저 꼴로 만들어 줘?”
테오도르는 험악한 목소리로 협박하듯 말했다.
“혀, 형님의 아이잖아요!”
“아니야.”
“형님이랑 똑같이 생겼는데…….”
“그렇게 가엾으면 네가 삼촌이니까 데려가서 돌보든가.”
“네?”
“너 원래 그런 거 잘하잖아. 내 아이들이랑 놀아 주는 거. 삼촌으로서.”
테오도르가 코웃음을 치며 에른스트를 비웃을 때였다.
기사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허수아비가 돌연 눈을 떴다.
“어……?”
그것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에른스트였다.
황금색 눈동자가 에른스트와 마주치는 순간 붉게 물드는가 싶더니.
“아뺘아!”
허수아비가 돌연 까르륵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내…….
쿠과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광풍이 몰아쳤다.
“뭐야.”
간신히 폭발의 피해에서 벗어난 테오도르가 이를 악물고 광풍이 잦아들길 기다렸다.
“괜찮으십니까, 폐하.”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뒤늦게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이래서야 어떻게 저를 지킨단 말인가, 쯧.
테오도르는 혀를 한 번 찼다.
이때였다.
“황자 전하!”
반대편에서 누군가의 외침이 들려왔다.
“황자 전하, 눈을……!”
소란에 휘말린 에른스트가 피를 흘린 채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이 모든 일의 원흉인 카타리나의 허수아비는 본래의 목적이 그것이었던 듯,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다만 그 자리에 허수아비가 입고 있던 의복이 누더기가 되어 굴러다녔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젠장. 대체 뭐야.”
테오도르는 곧바로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카타리나는 감옥에서 밤새 심문을 당하던 끝에, 괴상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었다.
아직 그녀는 죽어선 안 되었기에, 테오도르는 그녀를 치료하라 사람을 붙여 둔 터였다.
벌컥, 문을 열자 침대 위에 앉아 있던 카타리나가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몸을 오돌돌 떨었다.
테오도르는 성큼성큼 걸어가 카타리나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네가 만든 게 갑자기 폭발하면서 사람이 다쳤어.”
그러고는 무섭게 윽박질렀다.
“너, 그걸로 무슨 짓을 하려고 했던 거지?”
그것이 황궁에서 터져서 다행이지, 만약 아이들과 있었을 때 조금 전과 같은 일이 발생했더라면…….
오싹, 온몸의 털이 쭈뼛 섰다.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 아니에요. 저는, 저는 아무 짓도…….”
“똑바로 대답해!”
“흐, 흑마력에 반응하도록 만들어진…….”
“흑마력?”
예상치 못한 단어에 테오도르가 눈가를 찡그렸다.
‘조금 전 그 자리에 흑마력이 있었나? 설마 나한테?’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라고는 저와 에른스트, 그리고 오랫동안 저를 따라다니던 기사들뿐이었다.
비록 테오도르 그 자신이 검은 머리카락으로 인해 어렸을 때부터 고대 어둠의 현신이 아니냐는 우스갯소리를 듣긴 했으나…….
‘잠깐.’
테오도르는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체르니시아 저택에서 보았던 오딜리아의 술식이 생각난 것이다.
다행히도 아이들에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어쩌면 아이들이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순간 식은땀 한 줄기가 그의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런 걸 만든 거지?”
묻는 목소리가 사나웠다.
“너, 대답하지 않으면…….”
그러나 서늘한 위협에도 카타리나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두 눈만 질끈 감을 뿐이었다.
“…….”
“…….”
잠시간 짧은 침묵이 흘렀다.
테오도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에게 말을 할 수 없는 금제가 걸려 있었다.
그것도, 저의 신성력으로도 감히 어찌할 도리가 없는 아주 강력한 금제가.
불현듯 선득한 공포가 일었다.
테오도르가 찾아와 울고 난리를 부린 이후, 나는 시간이 날 때마다 그와 나눈 대화를 하나씩 곱씹었다.
[다 거짓이었어. 너를 찾으려고 그 여자랑 거래를 했던 거야.]
[그리고 그 여자의 임신도. 페르디난트에 잠입하려고 어쩔 수 없이 지어낸 거짓말이야.]
그는 나를 아프게 했던 모든 것들이 거짓이라고 했다.
설움을 꾹꾹 누르며 참고 버텨야 했던 그 시간들 속에서 내가 보았던 것들이 모두 거짓이라 했다.
그의 말마따나 나를 상처 주었던 것들이 거짓이라 해도 화가 나고, 거짓이 아니라 해도 화가 났다.
테오도르가 남기고 간 말들이 무던했던 나의 감정에 파문을 일으켰다.
마치, 평온한 수면 위로 던져진 돌멩이처럼.
[나는 그 같잖은 사고로 널 잊어버린 게 아니야.]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리고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그자들이 한 짓이야. 너랑 나를 갈라놓으려고, 흑마법으로…….]
대화를 곱씹을수록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어몬니 기분 안 조아요?”
“어모니, 에르가 뽀뽀해 줄까요?”
그런 내 상태를 눈치 빠르게 알아챈 오딜리아와 에르빈이 양팔에 매달리며 귀엽게 애교를 부렸다.
내 손에 뺨을 비비적거리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니, 그 위로 착한 개새끼가 되겠다던 테오도르의 잔상이 떠올랐다.
아이들은 나를 닮았으면서, 동시에 테오도르를 닮았다.
언제나 부정하고 싶었으나, 이따금씩 이렇게 그와 비슷한 부분들을 발견할 때면 멈칫하고 만다.
“고마워, 에르.”
에르빈이 내 오른뺨에 쪽- 하고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오딜리아가 참지 못하고 방방 뛰었다.
“리아두! 리아두 어몬니 뽀뽀해 드릴 거예요!”
오딜리아가 내 왼뺨에 쪽, 쪼옥- 하고 두 번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고는 에르빈을 향해 턱 끝을 치켜들며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이에 잔뜩 샘이 난 에르빈이 씩씩 화를 냈다.
그 천진하고 개구진 모습들에 나는 그만 근심을 내려 두고 작은 웃음을 터뜨릴 수 있었다.
* * *
“있찌, 에르. 어몬니 기분 안 조으신 거 같지?”
오딜리아가 저 멀리 브리안 삼촌과 나란히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어머니의 표정을 힐끔 쳐다보며 에르빈에게 말했다.
“웅, 아무래도 그 아조씨 때문인 거 같아.”
에르빈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상을 찌푸렸다.
“우리가 아조씨 혼내 주자!”
“나쁜 아조씨, 다시 나따나기만 해 바!”
비록 그 아저씨는 리아를 도와주었지만, 그래도 어머니의 기분을 안 좋게 만든 나쁜 사람이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혼내 주기 위해 잔뜩 별렀다.
그러나 매일같이 찾아와 어머니를 기분 나쁘게 만들던 테오도르의 방문이 며칠 새 뚝 끊겼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무섭게 쫓아 버렸기 때문인 것 같았다.
“근데 오늘은 아조씨 왜 안 오지? 에르가 혼내 조야 하는데.”
“있찌, 있찌, 에르. 리아가 그 아조씨 만나는 방봅(방법) 알아!”
“웅? 어케?(어떻게)?”
“리아도 잘은 모르겐눈데…….”
오딜리아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며 쥐었다 폈다 반복했다.
분명 이렇게 힘을 주면, 신기한 느낌이 들면서…….
“어, 어어……!”
손끝에서 느껴지는 기묘한 기운에 오딜리아가 두 눈을 땡그랗게 뜨며 에르빈을 쳐다보았다.
“왜 구래, 리아?”
“에르! 리아 손 잡아!”
“우, 웅?”
에르빈이 얼떨결에 오딜리아의 손을 붙잡는 순간이었다.
조금 전까지 정원에서 노닥거리던 두 아이의 몸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 * *
한동안 테오도르는 황실 서고에 박혀서 고대 문헌을 조사하는 일에 몰두했다.
제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가 저를, 이브를, 그리고 저와 이브의 아이들을 노리고 있었다.
촤륵.
촤륵, 촤륵, 촤륵.
두꺼운 문헌의 페이지를 넘기는 손이 점차 빨라졌다.
<고대 4대 사도 중 하나였던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는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끝내 패하였다.
테네브리스의 영혼은 일곱 가지로 갈기갈기 조각나 봉인되었다.
그중 네 개는 알브레히트 황실과 3대 가문에, 남은 세 개는 서쪽 대륙의 세 왕국으로 흩어졌다.
그리고 기록되지 않은 여덟 번째 영혼 조각이…….>
그 뒤는 글자가 지워져 있었다.
“뭐야.”
테오도르는 한쪽 눈썹을 치켜뜨며, 짜증스럽게 페이지를 휙휙 넘겼다.
그러다가 그가 궁금해하던 것을 찾았다.
그가 펼친 페이지에는 저주 의식에나 쓰일 법하게 생긴 흉물스러운 검은 거울이 그려져 있었다.
<테네브리스의 거울, 또는 시간의 거울이라고도 불린다.>
저와 오딜리아를 만나게 했던 바로 그 거울이었다.
<조각난 테네브리스의 영혼이 봉인된 성물 중 하나로 추정된다.>
“…….”
테오도르는 잠시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뜬 채로 들고 있던 책을 노려보았다.
“설마, 이게 끝?”
정보가 너무 빈약해서 울컥 화가 났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곧바로 책을 덮지 않고 인내심 있게 페이지를 넘기며 더 읽어 보았다.
그러나 서책에 담긴 것은 고대의 어둠을 깨우는 방법이라느니 하는 하등 쓸데없는 내용들뿐이었다.
그가 짜증을 내며 이대로 책을 덮으려던 때였다.
<테네브리스의 부활을 위해 ‘영혼’을 모을 ‘그릇’이 필요하다.>
무심코 펼쳐진 페이지의 문장이 그의 시선을 당겼다.
<그리고 ‘그릇’ 안에 담긴 ‘영혼’을 깨우기 위해서는…….>
“……강한 흑마력을 필요로 한다.”
서책 위에 적힌 다음 문장을 읊조리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나직이 내리깔렸다.
* * *
에르빈은 처음 발을 디디는 낯선 공간을 두리번두리번 둘러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 저택의 정원에서 오딜리아와 함께 어떻게 그 아저씨를 혼내 줄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상한 공간에 오게 되었다.
“지짜루(진짜로) 요기 있으면 그 아조씨 나타나?”
“웅웅, 지쨔루!”
에르빈이 쉽게 믿지 못하고 재차 물을 때마다, 오딜리아는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까지 늘 제 의지와 상관없이 이 이상한 공간으로 끌려오곤 했는데, 처음으로 제 의지로 이곳에 오게 된 게 퍽 뿌듯하였다.
“지짜, 지짜루 그 지지 아조씨 오는 거지?”
“웅! 구니까 우리 빤리 함종(함정) 만들자.”
“구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를 괴롭힐 함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단풍잎처럼 자그마한 손으로 작은 구멍을 팠다.
“이케 한 담에…….(이렇게 한 다음에…….)”
그리고 그 안에 뾰족뾰족 가시가 돋아난 밤송이를 마구마구 파묻었다.
“아조씨 나타나몬 신발 벗고 요기로 지나가라고 하는 거야.”
오딜리아가 에르빈에게 계획을 설명했다.
“구롬 아조씨 발 아야 해. 아야 하고 아조씨 울면 리아랑 에르가 혼내 주면 돼.”
“웅웅! 아조씨 울어도 호오 안 해 줄 고야!”
“어모니 기분 조아지면 그때 호오 해 주자.”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가 아프다고 잉잉 울어도 도와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구론데 아조씨가 신발 벗기 싫다구 하몬 어캐?”
“우으음…… 구롬 리아가 아조씨 신발에 지지 묻치께!”
에르빈의 돌발질문에 잠시 고민하던 오딜리아는 이내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방긋 웃으며 말했다.
“구롬 아조씨가 ‘에구 드러워’ 하몬서 신발 벗을 거야.”
“와아! 리아, 똑똑해!”
에르빈은 오딜리아의 의견에 물개 박수를 치며 동의했다.
이때였다.
자박-
맞은편에서 웬 발소리가 들려왔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테오도르 대신, 테오도르와 비슷한 느낌을 지녔으나 조금 다른 남자를 발견했다.
“체르니시아의 아이로군.”
남자의 붉은 눈동자가 아이들에게 향했다.
“아조씨는 누구야?”
“뭘 하고 있지?”
남자는 아이들의 물음에 답하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함종 만들었어.”
“지지 아조씨 혼내 줘야 해.”
“지지 아조씨가 어모니 개로펴써(괴롭혔어).”
“리아랑 에르는 어몬니 복수해 주는 거야.”
순진한 아이들은 남자가 묻는 것에 순순히 대답했다.
이에 남자가 아이들이 만든 작은 함정을 쳐다보았다.
“저런 것으로는 토끼 한 마리도 못 잡을 것이다.”
“우웅? 앗 따가 밤송이가 일케 마눈데?(따가운 밤송이가 이렇게 많은데?)”
“함정을 더 깊이 파는 게 좋겠군.”
“어케?(어떻게?)”
“도구를 쓰면 되지.”
“도구?”
“체르니시아의 아이가 검기도 쓰지 못하나?”
고개를 갸웃하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남자의 조언을 받아 함정을 다시 만들기 시작했다.
에르빈이 나뭇가지로 바닥을 내리치자, 녹빛의 검기가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우와, 에르 체고(최고)야!”
오딜리아는 자신의 허리까지 오는 구멍을 보며 신기해했다.
두 아이는 뾰족뾰족한 밤송이를 더 많이 주워 와 함정을 가득 채우고, 넓적한 나뭇잎으로 그 위를 덮었다.
남자는 나뭇잎 사이로 뻔히 보이는 밤송이를 힐긋 쳐다보았다.
정상적인 시력을 가진 자라면 결코 저런 조잡한 함정에 걸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으나, 그 이상 말을 보태진 않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함정 근처에 있는 나무 기둥 뒤에 숨어서 테오도르를 기다렸다.
“구론데 리아, 아조씨 언제 와?”
“웅, 요기 기다리몬 와.”
“구니까 언제?”
“우웅, 쫌만 있으몬…….”
그러나 막상 테오도르가 나타나질 않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하품을 하며 기다리다가 이내 머리를 맞대고 새근새근 잠들었다.
스르륵-
남자가 잠든 아이들 앞에 섰다.
무기질적인 시선이 오딜리아에게 닿았다.
“확실해. 내가 잘못 보지 않았어.”
남자가 오딜리아를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나를 위한, 가장 완벽한 제물이야.”
이윽고 오딜리아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일렁거리며 흘러나오더니, 남자의 손끝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검은 마력. 그것도, 이제껏 제게 바쳐진 그 비루한 마력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양질의 흑마력이었다.
남자가 잔뜩 심취한 표정으로 오딜리아의 흑마력을 흡수하던 때였다.
찌릿거리는 기운과 함께 그의 몸이 뒤로 밀려났다.
“아조씨 모야?”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에르빈이 그를 노려보았다.
“리아한테 머 한 고야?”
남자는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에르빈의 손끝에서 황금빛 빛무리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레오브란테?”
그것의 정체를 알아차린 남자의 표정이 설핏 찌푸려졌다.
“거슬리게 됐군.”
본디 남자는 이런 작은 아이는 쉽게 제압할 만큼의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아직 완전히 부활하지 못한 탓에 여의치 않았다.
“뭐, 이 정도로도 충분해.”
남자는 흡수한 흑마력이 몸속에서 일렁이는 것을 느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향해 붉은 눈동자를 번득였다.
순식간에 두 아이의 몸이 시공의 바깥으로 튕겨 나갔다.
“아유, 두 분 여기 계셨군요! 옷이 엉망이잖아요?”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자 로라가 말썽꾸러기 보듯 하는 시선으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로라?”
“대체 어디 숨어 계셨던 거예요? 한참 찾았다고요.”
“에르랑 리아는 나쁜 아조씨 혼내 주려고 구론 고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조금 억울해져서 항변하였으나, 애석하게도 로라는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네, 네. 어서 들어가 씻어요. 벌써 점심 식사 시간이라고요.”
두 아이의 입술이 불룩 튀어나왔다.
아이들의 단순한 머릿속에는 조금 전 이상한 아저씨의 존재가 깨끗이 잊힌 뒤였다.
* * *
며칠 전, 테오도르의 병사들이 다녀간 뒤로 한껏 치솟은 벤야민의 불안감이 극에 달해 갔다.
그는 그날 곧바로 이브에게 간단한 안부 편지를 보냈으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도 답장이 오지 않았다.
‘설마, 이미 황제가 그녀에게 이상한 소리를 지껄인 건가?’
기다리다 못한 벤야민은 직접 그녀를 찾아갔다.
‘일단 그녀를 찾아가서…… 그런데, 그녀를 찾아가 무슨 말을 하면 좋지?’
덜컹덜컹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벤야민은 고요히 생각에 잠겼다.
오래전,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를 죽인 것은 다름 아닌 어린 날의 벤야민이었다.
페르디난트의 후계자였던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두 사람이 하는 일을 대강 알고 있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의 부활-!
그것을 위해 그들은 테네브리스의 영혼을 부활시킬 ‘그릇’을 만들고, ‘그릇’을 유지하기 위해 제물을 모아 바쳤다.
제물로 쓰일 만한 가장 좋은 사냥감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어린 생명들이었다.
사도의 힘을 깨운 열 살이 채 되지 않은 어린아이들이 테네브리스를 부활하기 위한 희생양이 되었다.
사람들은 레오브란테 가문에서 신성력을 발현하는 아이가 나오지 않은 것을 그저 힘이 끊긴 것이라 생각하였으나…….
‘그 또한 모두 그들의 짓이었지.’
벤야민은 그들이 꼭꼭 숨기어 애지중지 보호하는 그 대단하신 ‘그릇’을 알지 못했다.
루돌프는 그에게 나중에 너도 크면 ‘그릇’을 만날 수 있을 거라 했지만, 딱히 관심은 없었다.
아마 평생토록 흑마법이니, 뭐니 하는 것에 관심 두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에 나타난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 이브 로웰린.
그 아이를 그들이 해치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열 살이 되지 않은 체르니시아의 가호를 받은 아이.
‘그릇’의 제물이 되기에 딱 좋은 조건이었다.
벤야민은 그 예쁜 아이가 다치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래서 두 사람을 죽였다.
살인 마법은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질 낮은 것으로 분류되는 것이었다.
으레 따라오는 반작용 또한 거셌다.
벤야민은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생과 사를 오가야 했다.
볼썽사나운 모습을 그녀에게 보여 줄 순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곳에 숨어 피를 토하며 그 시간을 버텨야 했다.
그리고 그는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었다.
가주가 되어 돌아온 저를 보고,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던 그녀의 얼굴은 십수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잊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웠다.
[베, 벤야민? 아니, 가주님……이라고 불러야 하나요?]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둥지둥하는 그녀를 보며, 벤야민은 처음으로 뜨거운 충만감을 느꼈다.
제가, 그녀를 지켰다.
그 사실이 그를 달아오르게 했다.
한번 맛본 충만감은 쉽게 중독되어 그를 물들여 갔다.
벤야민은 영원토록 그녀를 지키는 단단한 벽이 되고자 하였다.
그래서 더럽고 지저분한 것들이 그녀의 주위에 엉겨들지 못하도록 막아 냈다.
그럴 때마다 뿌듯함은 날로 커져만 갔다.
그러나 이후로 그녀를 소유하려던 그의 계획은, 테오도르 황제의 방해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남자가 제게서 이브를 앗아 갔을 때.
벤야민은 그녀를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흑마법에 손을 댔다.
죽은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는 그 힘을 굉장히 신봉하였으나, 벤야민에게는 되도록 쓰고 싶지 않은 힘이었다.
강한 힘이지만, 그만큼 반작용도 강했으니까.
그래서 처음에는 카타리나에게 그 힘을 써 보라 종용했다.
카타리나는 테오도르 황제의 기억에 손을 대는 데 성공했으나, 그 이상은 해내지 못했다.
마력이 빈약한 탓이다.
황제의 정신까지 뒤집어 놓았으면 좋았을 텐데, 쯧.
결국 테오도르는 기억을 잃은 채로도 끝내 그녀를 놓지 않으려 했고, 벤야민은 스스로 나서서 그녀를 위해 허수아비를 만들었다.
무생물을 생물처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어렵지 않게 해냈다.
그녀를 위한 일이었으니까.
마차가 멈춤과 동시에 벤야민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힐긋 차창을 내다본 그는 아직 마차가 체르니시아의 정문을 통과하지 못했음을 알아차렸다.
굳게 닫혀 있던 문이 방문객을 알아보고 슬며시 열리더니, 저택의 사용인이 나와 그에게 인사했다.
“죄송합니다, 벤야민 님. 가주님께서 당분간 손님을 받지 않겠다고 하셨습니다.”
“벤야민이 왔다고 전했는데도?”
“죄송합니다.”
사용인은 허리를 숙여 다시 한번 그에게 인사했다.
명백한, 거부였다.
그 순간 벤야민은 자신의 안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 * *
벤야민이 찾아왔다.
그러나 그러잖아도 테오도르 때문에 심란했던 나는 아직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저, 가주님, 벤야민 님이 아직 저택 앞을 떠나지 않고 계신답니다.”
저택의 사용인이 안절부절못하며 내게 말했다.
“시간이 많이 지났는데…….”
“그냥 무시해.”
나는 냉담하게 대꾸했다.
벤야민은 오랫동안 나를 지탱해 주던 친구였다. 그러니 그의 이야기를 들어 주는 것이 옳았다.
테오도르의 말이 정말인지, 그럼 왜 그런 짓을 한 건지, 혹은 어떤 오해가 있는 건지.
그렇지만 애석하게도 지금의 나는 그를 만날 기력이 없었다.
하필이면 바로 어제 저택을 찾아온 셀린느로부터, 벤야민이 브리안 오빠를 습격한 범인이라는 확증을 전해 들은 탓인지도 모른다.
[어제 황궁 마법진을 조사하러 신관이 다녀갔는데, 흑마법의 술식은 발견되지 않았어요]
[그럼 벤야민의 짓이 아닌 거네요?]
[술식은 발견하지 못했는데, 수정구가 반응했지요. 흑마법을 감지하는, 감지석으로 만든 수정구요.]
그러니까, 누군가 브리안 오빠를 해치기 위해 분명한 흑마법을 자행했다.
대신전의 신관은 어지간한 사람들은 따라잡기 힘들 만큼 강한 성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런 대단한 신관이 찾아내지 못할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자가 브리안 오빠를 해치고자 한 것이다.
그리고 대신전의 신관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자라면…… 다섯 손가락도 되지 않는다.
[폐하께서는 당시 서쪽 대륙에 계셨고, 저는 브리안과 함께 있었어요. 그리고 이보네 님까지 용의선상에서 제외하고 나면…….]
[남은 사람은…… 한 명뿐이네요.]
나는 참담한 목소리로 셀린느의 말을 이어받았다.
[가장 확실하게 알아보는 방법이 하나 더 있기는 해요. 폐하께서는 대신전의 신관보다도 강한 성력을 지니셨으니까, 직접 술식을 찾아내실 수도 있겠지요. 신관의 증언이 아니면 공신력은 얻지 못하겠지만요.]
[…….]
굳이 그럴 필요는 없었다. 이미 답은 나왔으니까.
벤야민이 대체 왜, 하고 의문을 갖는 것마저도 머리가 아팠다.
“어몬니, 왜 베냐민 삼쫀 못 오게 해요?”
“어모니, 베냐민 삼쫀이랑 싸웠어요?”
내심 벤야민의 방문을 기다렸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물었다.
“싸우는 건 나쁜 건데…….”
“어몬니 나쁜 아이야?”
“바보야. 어모니는 아이 아냐. 어른이야.”
“리아 바보 아냐!”
아이들은 씩씩거리며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 모습을 잠잠히 지켜보다가 한마디 던졌다.
“에르, 리아. 지금 싸우는 거니?”
“아, 아니요.”
아이들은 혹여나 혼날세라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 앉아 언제 다퉜냐는 듯 방긋방긋 웃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내 나는 머리 아픈 생각은 모두 떨치고, 아이들과 손을 잡고 저녁 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
체르니시아 저택의 정문 앞에서, 벤야민은 한참을 기다렸다.
그러나 굳게 닫힌 문은 끝내 열리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을 무렵, 벤야민은 그녀가 제게서 마음의 문을 닫았음을 마침내 인정해야 했다.
“이브…….”
벤야민은 굳게 닫힌 문을 쳐다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느릿하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어둠 위로 흩뿌려졌다.
* * *
황제는 밤이 깊었는데도 황실 서고에 붙박여 나오질 않았다.
그가 앉아 있는 테이블 앞에 책이 여러 권 쌓여 있었다.
개중 일부는 금지된 도서들이었다.
갑작스럽게 무언가에 홀린 듯이 서고를 뒤지기 시작한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와 조금이라도 관련된 책들을 모조리 꺼내 읽는 중이었다.
“테네브리스는 체르니시아가 관장하는 땅을 자신의 어둠으로 뒤덮고 싶다는 욕망에 빠졌으며…… 조각난 영혼을 모아 영면에 들게 하였으니…… 끝내 소멸하지 못한 조각이…….”
미친 듯이 책의 내용을 읊조리며, 휘리리릭 책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에 궁정의 사용인들이 불안한 시선으로 힐끗거렸다.
얼핏 황제가 중얼거리는 말들 속에 ‘어둠’이니, ‘부활’이니 하는 것들이 들어 있었다.
미쳐 버린 황제가 이제는 정말로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에 모두가 오싹한 마음을 감춰야 했다.
“폐하께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이제 황궁이 조금 안정되나 싶었는데…….”
“잠깐 저러다 마시는 거겠지요? 정말로 고대의 어둠을…… 에이, 그런 건 아니겠지요?”
“모르는 일이지. 서쪽 대륙에서도 고대의 어둠의 흔적을 찾으셨다고 들었는데…….”
“얼마 전에 황궁에서 난 사고도 그렇고, 왜 이렇게 뒤숭숭한지…….”
“그나저나 에른스트 황자님은 아직도 깨어나질 못했다며?”
마침 에른스트의 약을 받아 가던 2황자궁의 시종이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그래도 의사 말이 체온도 맥박도 모두 정상이래요. 어서 깨어나길 바라야지요.”
황자궁의 시종은 다른 사용인들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눈 뒤에 황자의 침실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있는 에른스트가 보였다.
그가 아직 일어나 스스로 약을 먹지 못하기에, 시종은 에른스트의 머리를 세우고 숟가락으로 약을 그의 입술 안쪽으로 흘려보냈다.
이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준 뒤 빈 약그릇을 챙겨 방문을 닫고 나갔다.
한동안 방 안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꿈틀.
내내 미동 없이 누워 있던 에른스트의 손끝이 자그맣게 움찔거렸다.
* * *
새가 지저귀는 소리에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
커다란 창을 타고 들어오는 햇살이 어느새 날이 밝았음을 알려 주었다.
탁.
그가 소리 나게 서책을 덮었다.
밤이 새도록 책을 읽은 탓에 눈이 발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탁, 탁, 탁, 탁-
그의 손끝이 연신 두꺼운 책 표지를 두드려 댔다.
“‘그릇’을 만들려면 순수한 영혼과 테네브리스의 영혼 조각이 필요하다고…….”
힐끗 시선을 내린 그가 흰 종이 위에 자신이 정리한 것들을 내려다보았다.
<영혼 조각이 일곱 가지(또는 여덟 가지) 존재함.
1. 알브레히트 황가 - 황후의 목걸이
2. 체르니시아 - 검집의 에메랄드
3. 페르디난트 - ???
4. 레오브란테 - ???
5~7. 서쪽 대륙 - 케르벨의 왕관, 칼리고르의 거울, 아리스베의 반지>
그가 문헌들을 살피며 테네브리스의 조각난 영혼이 담겨 있을 것으로 대강 추정되는 것들을 적어 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분명 가짜였는데…….”
테오도르는 케르벨 왕국에서 보았던 테네브리스의 관을 떠올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면 누군가가 오래전에 가짜와 바꿔치기한 건지도 모른다.
만일 그렇다면, 진짜는 어디에 있는 거지?
탁, 탁, 탁- 탁, 탁, 탁-
책 표지를 두드리는 손끝의 움직임이 보다 빨라졌다.
“영혼을 깨우려면 ‘그릇’은 이미 준비되었을 테고…… 어쩌면, 이미…….”
거기까지 중얼거리던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자신의 서체를 노려보았다.
이것 참, 몹시 터무니없는 생각 같았으나…….
벌떡!
테오도르는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카타리나를 찾아갔다.
그리고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테네브리스를 부활시키려고 했나?”
“……!”
카타리나는 두 눈이 동그랗게 커져서 아무 말도 못 하고 굳어 버렸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가슴이 선득해졌다.
“확실하군.”
대답을 못 하는 걸 보니 확실했다. 아니라면, 아니라고 할 테니.
‘젠장. 대체 누가?’
그러나 이것은 카타리나가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다만, 이 자리에서 테오도르 그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은…….
‘오딜리아가 위험해.’
정말로 테네브리스의 부활을 준비하는 무리가 있다면, 오딜리아가 위험하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테오도르는 체르니시아를 향해 말을 달렸다.
* * *
이른 시각 테오도르가 찾아왔다.
“저, 가주님…… 손님이…….”
아직 아침 식사도 하지 않은 시각이었다. 손님이 찾아올 시간은 더더욱 아니었다.
“손님?”
“폐하께서…….”
의아해하며 묻자, 사용인이 내 눈치를 힐긋 보며 대답했다.
어제 벤야민을 그리 보냈던 것처럼 황제에게도 문전 박대를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저, 황제 폐하께 돌아가시라고 하는 건…… 제가 직접 하기엔…….”
나는 한숨을 내쉬며 얇은 카디건을 걸쳤다.
“그래, 내가 나가지.”
바깥을 향해 내딛는 발걸음에 은은한 분노가 서렸다.
나는 당연하게도 테오도르가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러 왔을 거라 생각했다.
너는 정말 이기적이고, 말이 안 통하고, 변하질 않는다고.
이렇게 기별 없이 찾아오지 말라 하지 않았냐고.
불쑥 찾아온 네 이야기를 들어 준 건 그날로 족하지 않냐고.
억지로 용서를 받아 내야만 직성이 풀리겠냐고.
그런 주제에 네가 무슨 착한 강아지가 되겠다고 장담한 거냐고.
너는 구제 불능한 놈이라고.
네가 착한 개새끼가 되길 기대하느니, 바퀴벌레랑 세상에서 가장 친한 친구가 될 거라고.
만나면 그렇게 대뜸 쏘아붙이고자 작정을 하였다.
“이브.”
그러나 막상 마주한 테오도르의 표정이 심상찮았던 탓에, 나는 하려던 말들을 밀어 넣고 그를 쳐다보았다.
다급히 말을 타고 온 것인지 머리카락은 흐트러져 있었고, 안색이 창백했다.
“무슨 일이지?”
“리아는, 리아는 어디 있지?”
그가 평소의 여유가 사라진 얼굴로 내 어깨 너머를 두리번거렸다.
“갑자기 리아는 왜…….”
그러고는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열린 대문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어안이 벙벙하여 쳐다보던 나는 그가 의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았단 것을 깨달았다.
평소 나를 만나러 올 때면, 아닌 척하면서도 은근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을 주던 것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 그가 신고 있는 신발은 외출용도 아니었다.
“뭐야?”
나는 의아한 마음을 품고서 그의 뒤를 따랐다.
“리아! 리아!”
그의 외침에 이른 시각부터 정원에서 놀던 오딜리아가 폴짝 뛰어나왔다.
“어? 아조씨?”
“아…….”
오딜리아를 발견한 테오도르가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이내 바닥에 무릎을 털썩 부딪치며 주저앉았다.
“다행이야…….”
안도한 듯한 그 목소리에 의아함이 더욱 거세어졌다.
뭐지? 혼자 악몽이라도 꾼 건가?
“대체 왜 그래?”
조심스럽게 다가간 내가 그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그러자 그가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잠시, 이야기 좀 해, 이브.”
“…….”
“널 귀찮게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을게.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아이들의 안전이랑 관련된 거야. 네가 싫어하는 이야기 꺼내지 않을 테니까…….”
혹여나 내가 또다시 대화를 거부할까 봐, 그가 재빠르게 덧붙였다.
“그래.”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린든, 아이들을 안전하게 보호해.”
테오도르가 어느새 뒤따라온 자신의 기사들에게 명령했다.
“네, 폐하.”
황제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보았다.
황명이 있긴 했으나 내가 저택의 주인이었기에, 나의 허락을 구하려는 것이다.
“저택이 위험하다는 거야?”
“일단, 내 말에 따라 줘.”
나는 마음이 찝찝해졌으나, 그의 기사들에게 아이들의 호위를 맡겼다.
* * *
“그러니까,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는 무리가 있고.”
“응.”
“그래서 리아가 위험하다고?”
“응.”
터무니없는 소리에 어이가 없어 한쪽 눈썹을 치켜떴으나, 테오도르는 퍽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잠깐만, 나 지금 전혀 이해가 안 되는데.”
“고대의 어둠을 부활시키려면 강한 흑마력이 필요해. 그런데 리아가 그 조건에 부합해.”
“리아가……?”
“리아가 흑마법을 썼어.”
테오도르는 쉬이 믿지 못하는 내게 이제껏 제가 본 것들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테네브리스의 유물을 통해 리아와 세 차례 시공을 초월한 공간에서 만난 것.
그가 가장 마지막에 저택에 방문했던 날 리아의 손끝에서 찾은 흑마법의 술식.
그리고 그 끝이 검게 물들던 오딜리아의 머리카락.
“그래서, 이브. 리아의 안전이 확보될 때까지만이라도 황궁에…….”
테오도르가 내 눈치를 힐끔 살피며 말을 이어 갈 때였다.
“꺄아악!”
“안 돼!”
“에르! 리아!”
바깥에서 난데없는 비명과 고함이 들려왔다.
\\
고대 4대 사도 중 가장 강한 힘을 가졌다는 테네브리스.
그의 흑마법은 때때로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이따금씩 어떤 자들에게는 세상의 이치를 거스르고서라도 염원하는 것들이 있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가 원하던 강한 힘이 그러했고, 테오도르가 바라던 죽은 이를 되살리기 위한 시간의 역행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녀의 정신을 헤집어서라도 제 곁에 두고자 하는 벤야민의 소망이 그러했다.
“이브.”
고함 소리에 바깥으로 뛰쳐나온 이보네와 테오도르를, 의외의 인물이 맞이했다.
“벤야민? 너…….”
“왜 황제와 같이 나오는 거지? 이 시간에, 그런 차림으로?”
허공 위에 떠 있던 벤야민이 두 사람을 맹렬한 기세로 노려보았다.
하필이면 테오도르가 황궁에서부터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흐트러진 차림으로 찾아온 탓에, 그가 무언가 오해를 한 듯싶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해명할 정신은 없었다.
“에르빈!”
이보네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린든을 비롯한 황궁과 체르니시아의 기사들.
그리고…… 벤야민에게 붙잡힌 에르빈.
“우, 우으으…… 어모니이…….”
울먹울먹한 목소리와 함께 잔뜩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빈이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너, 이게 무슨 짓이야!”
에르빈을 붙잡고 있지 않은 벤야민의 반대편 손에 펄럭거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얼핏 마법 스크롤과 비슷하게 생긴 그것은 ‘흑마법의 서’였다.
오랫동안 루돌프가 모아 온 것들이었다.
단연 눈길 한번 주지 않던 것들이라, 벤야민은 제가 이것을 필요로 하는 날들이 올 줄은 몰랐다.
본디 흑마법을 다루는 것은 그에게 부여된 능력 밖의 일이어서, 페르디난트의 술식을 그릴 때와 달리 재료가 필요했다.
루돌프와 마르가라테를 죽일 당시에는 그들이 ‘그릇’을 유지할 제물로 모아 온 아이들의 생명을 희생했다.
테오도르의 기억을 지우던 때에는 카타리나의 피와 정신력을 재료로 썼다.
사람처럼 말하고 움직이는 허수아비를 만들 적에는 기꺼이 자신의 피와 3년의 생명을 바쳤다.
그리고 이번에 벤야민이 행하려는 술법은 이제껏 해 온 어느 것보다도 강력하고 위험한 것이었다.
그만큼 더 강한 반작용이 일어날지도 모르나, 그가 무엇보다 염원하는 것이기도 했다.
정신 조작.
아주 오랫동안 그녀의 옆을 지켜 왔지만, 그녀는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았다.
하여 벤야민은 그녀의 기억을 조작하고 정신을 헤집어 제 곁에 둘 생각이었다.
분명 어여쁠 것이다.
저를 보고 웃고, 안기며, 사랑을 속삭일 그녀는.
설사 그것이 거짓된 마음이라 할지라도, 벤야민은 그녀를 온전히 소유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위험한 어둠의 술법은 하나의 인격을 파괴할 만큼의 정신력을 필요로 했다.
벤야민은 제 생명을 바칠지언정, 제 정신을 파괴할 순 없었다.
파괴된 정신으로는 그녀의 무엇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그래서 이번에는 그녀의 아이를 재료로 사용할 참이다.
에르빈 체르니시아.
이 작은 남자아이가 검기를 발현하였다는 이야기를, 얼마 전에 그녀로부터 들은 것은 참 적절한 행운이 아닐 수 없었다.
“조금만 기다려, 이브. 금방 끝날 거야.”
“당장 에르를 내려놔!”
이보네가 검을 뽑아 들며 그에게 달려들고자 했다.
“조심해, 이브.”
그 순간 에르빈의 목덜미를 붙잡은 벤야민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사랑스러운 너의 에르가 다치기라도 하면 안 되잖아.”
이보네는 멈칫하며 그 자리에 굳었다.
에르빈의 머리 위에 벤야민이 남긴 것으로 보이는 술식이 빛나고 있었다.
“뭐야, 그 술식.”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글쎄. 궁금하면 나를 더 도발해 보세요, 폐하.”
벤야민이 비죽 입꼬리를 말며 키득거렸다.
“혹시 모르지요. 모두가 재미난 광경을 보게 될 수도.”
“…….”
테오도르는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술식의 정체를 알지 못하니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벤야민, 너, 대체 왜…….”
이보네가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브리안 오빠를 공격하고, 테오도르의 기억을 잃게 만든 것도 모두 정말 네 짓인 거야?”
묻는 것이 우스울 정도로, 너무나 명확한 답이 정해져 있는 질문이었다.
이보네의 얼굴 위로 짙은 배신감이 떠올랐다.
그것을 발견한 벤야민이 제 얼굴을 사정없이 일그러뜨렸다.
정작 제 마음을 배신한 것은 그녀이면서, 어째서 그녀가 배신당한 표정으로 저를 보는지 벤야민은 알 수 없었다.
“……괜찮아. 이제 곧 내 마음이 네 것이 되고, 네 마음은 내 것이 될 테니까.”
벤야민은 허공 위로 어둠의 술식을 죽죽 그려 나갔다.
그에게 붙잡힌 에르빈이 벗어나고자 버둥거렸으나, 그럴수록 에르빈을 붙든 그의 손에 힘이 거세어졌다.
‘에르를, 제물로 사용하려는 거야.’
간밤에 테네브리스와 관련된 것들이라면 하나도 빠짐없이 정독하였던 테오도르는, 금세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아직 상대가 그리는 술식의 종류를 알지 못해, 에르빈의 무엇을 대가로 치르려는지 또한 알 수 없었다.
‘일단, 무조건 막아야 해.’
테오도르가 벤야민의 빈틈을 노리기 위해 그를 주시하던 때였다.
“베냐민 삼쫀 나뺘!”
어디 있었는지 모를 오딜리아가 튀어나와 벤야민을 향해 소리쳤다.
“에르 개로피지 마아아!”
눈물로 얼굴이 범벅이 된 오딜리아가 있는 힘, 없는 힘 다 끌어내어 외치던 그 순간이었다.
쿠구구구구구궁-!
강한 진동과 함께 세상이 흔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밝은 하늘 위로 그림자가 졌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해를 잡아먹고 있었다.
“이, 이게 무슨…….”
모두가, 심지어는 벤야민마저도 그 기이한 현상에 놀라 당황하는 사이.
“벤야민 페르디난트!”
테오도르가 벤야민을 향해 뛰어들었다.
툭-
그 바람에 벤야민은 붙잡고 있던 아이를 놓쳤다.
추락하는 아이의 몸을 이보네가 잽싸게 도약하며 붙잡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허공에 그려진 술식이 테오도르와 벤야민을 한꺼번에 덮쳤다.
이윽고 두 사람이 사라졌다.
* * *
[테네브리스.]
여름날의 풀 내음처럼 싱그러운 목소리였다.
[또 늦잠이야? 어서 일어나. 이러다 베짱이가 되겠어.]
꿀에 적신 듯 달콤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왜 그랬어? 왜, 왜 그런 짓을…….]
오래오래 사랑하여 잊지 못할 목소리였다.
[가엾은 테네브리스. 이제 너의 영혼은 죽지도 못해.]
오롯이 저를 위해 울어 주는 목소리였다.
[잠에 들자. 긴긴 잠에 드는 거야.]
축축하고 서러운 자장노래를 들으며, 영면에 들었다.
[테네브리스…….]
그리고 이제 다시 깨어날 시간이었다.
* * *
번쩍!
내내 잠들어 있던 에른스트의 눈꺼풀이 고요히 뜨였다.
스르륵-
에른스트는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어? 황자 전하! 일어나셨습니까!”
마침 침구를 갈러 들어온 시종이 깨어난 그를 보며 밝은 표정으로 인사했다.
“몸은 괜찮으세요? 하도 일어나시지 않아 걱정했습니다.”
“…….”
괴팍한 성정의 테오도르와 달리, 에른스트는 황궁의 사용인들에게도 상냥한 편이었다.
그런 그가 평소와 달리 무심한 얼굴로 가만히 앉아만 있는 것이 조금 이상했으나, 시종은 그가 사고를 당했다가 막 일어나서 그런 것이라 여겼다.
“황자 전하께서 일어나시지 않아 걱정하던 이들이 많았는데, 정말 다행입니다. 어서 빨리 이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알려야겠어요.”
“…….”
에른스트는 재잘재잘 떠드는 시종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휴, 수척해지셨어요. 앗, 잠시만요, 전하. 여기 뭐가 묻었…….”
그러다 시종이 그의 옷에 달라붙은 실밥을 발견하고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쇄애액-!
검은 창살이 시종의 몸을 꿰뚫었다.
꺽, 꺽…….
숨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시종의 몸이 털썩 쓰러졌다.
에른스트는 죽어 가는 시종을 경멸하는 듯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러운 인간이, 어딜 감히.”
꺼억, 꺽…….
이윽고 시종이 툭, 숨을 꺼뜨렸다.
동시에 시종의 몸을 꿰뚫던 검은 창살이 파스스 공기 중으로 스며들었다.
무감각한 시선으로 그 일련의 장면을 쳐다보던 에른스트의 눈동자가 붉게 빛났다.
밝은 백금색의 머리카락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그러며 동시에 자라난 머리카락은 그의 발끝에 닿을 정도로 길어졌다.
남자는 에른스트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그는 더 이상 에른스트가 아니었다.
느리게 몸을 돌린 그가 창밖을 보았다.
태양이 달에 가려지고 있었다.
차츰 태양빛을 잃으며 세상이 어두워졌다.
차박, 차박-
창가를 향해 걸어간 테네브리스가 손끝을 뻗어 유리창을 밀어뜨렸다.
창이 열리고, 바깥의 공기가 안쪽으로 후욱 들어왔다.
폐부를 잠식하는 익숙한 내음에 그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건 어둠의 내음이었다.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마물들이 그의 부름에 하나씩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대에 봉인되었던 네 번째 사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그가 부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