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이보네 체르니시아
브리안은 나의 지난 이야기를 들은 직후 몹시 분개하였다.
“그러니까, 테오도르 황제가 아이들의 아버지라고?”
“응.”
“그리고…… 황제와 반년을 함께 보냈는데, 황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고? 아이들의 존재도 모른다고?”
“응.”
믿을 수 없다는 듯, 브리안은 몇 번이고 되물었다. 그러더니,
“……♩♪♪♬♩♩♪♪”
예쁘장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는 험악한 욕설을 쏟아 냈다.
나는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나쁜 말들을 멍하니 경청하다가, 뒤늦게 그를 찰싹찰싹 때리며 아이들 앞에서는 말을 가려 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다행히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옆방에 있었으나, 언어는 언제 습관이 될지 모르니까.
아무튼 한바탕 분노를 가라앉힌 뒤에, 브리안은 진중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네가 원치 않는다면, 누구도 강요할 수 없다고 생각해. 가문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너의 행복을 바라.”
브리안은 그렇게 말하며 내가 결정을 내리기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려 주었다.
어쩌면 체르니시아를 되살릴, 그리고 내가 체르니시아로 돌아갈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나는 무엇도 쉽사리 결정지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한참의 고민 뒤.
“브리안 오빠. 나, 결정했어.”
결심을 마치고 브리안을 불러 말했다.
“오빠는 황제와 함께 제국으로 돌아가. 그리고 황제에게 가문의 복권을 그대로 진행해 달라고 해.”
“하지만 이보네, 그렇게 해 봤자 가문을 오래 유지하기 힘들어. 말했잖아. 셀린느와의 결혼은 차치하고서라도, 난 검기가…….”
브리안은 회의적인 말투로 대답했다.
그의 말이 옳았다.
결국 내가 가지 않으면, 근본적으로는 가문의 부흥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화마에 휩싸여 스러져 가던 나의 체르니시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비겁자처럼 홀로 살아남은 죄로, 나는 루돌프와 카타리나의 학대 속에 자라야 했다.
허리까지 내려오던 반짝이는 은빛 머리카락이 싹둑 잘리던 그때의 감각은 여전히 남아 나를 서럽게 했다.
그날 내가 잃은 것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자랄 머리카락이 아니었다.
낳아 준 어미에게도, 씨를 준 아비에게도 버림받은 가엾은 사생아를 거두어 길러 주었던 나의 체르니시아.
나를 사랑으로 품어 주었던, 내게 사랑을 알려 주었던, 내가 사랑했던, 나의 체르니시아.
그날 내가 잃은 것은, 어린 나를 지탱해 주던 나의 체르니시아였다.
그들이 나를 외면하지 않고 품어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내가 체르니시아를 외면하지 않고 다시 일으킬 것이다.
그것이 나의 결정이었다.
“나도 알아. 그래서 오빠가 먼저 제국으로 가면, 나도 뒤따라갈게.”
“뭐……?”
“임명식 날 황제의 앞에 나가는 건 오빠가 아닌 내가 될 거야. 그렇지만 그 전까지 내 존재를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 줘. 황제에게도.”
그 말에 브리안은 잠시 나를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이유를 설명하지 않아도, 모든 걸 다 안다는 듯이.
“그래. 네 선택 존중해, 이보네.”
나는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될 것이다. 그러려면 나와 테오도르의 만남은 필수 불가결한 요소였다.
3대 가문 중 하나를 이끌어 가는 자리에 올라 황제인 그와 마주치지 않는다는 건 불가능했으니까.
이제 와 그에게 어떤 미련이 남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와 재회를 하게 된다 하더라도, 지금의 상태로는 싫었다.
‘이렇게 도망치다 붙잡힌 꼴로는, 싫어.’
나는 이미 기억을 잃은 그의 옆에서 충분히 많이 비참했었다. 끝내 그의 곁을 떠나는 것을 선택할 만큼이나.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자존심이라 하여도 어쩔 수 없다.
좋지 않게 헤어진 전 연인과의 재회를 볼품없는 모양새로 맞이하고 싶은 이는 누구도 없을 테니까.
나는 어느 정도 그와 대등한 위치에서 그와 대면하길 바랐다.
어차피 에르빈이 검기를 발현한 이상 내 가족의 평화를 지키기 위한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체르니시아는 그중 가장 강하고 단단한 보호막이 되어 줄 것이었다.
브리안을 만나기 이전에 이미 승선 명단에 작은 장난질을 해 둔 터였다.
본래는 테오도르가 나의 행선지를 알지 못하도록 혼선을 준 뒤 오후에 출항하는 다른 배를 타고 대륙을 뜰 생각이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꿔 먹었다.
알브레히트로, 한때 나의 체르니시아의 영광이 깃들었던 그곳으로 돌아가기로.
* * *
테오도르의 제국군이 칼리고르를 완벽하게 떠나고 난 뒤.
나는 시간 차를 두고서 아이들과 함께 알브레히트로 돌아왔다.
브리안의 이름으로 마련된 새 저택에 머물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다.
체르니시아의 생존자와 가문의 복권에 관련한 이야기로 한동안 알브레히트 전체가 떠들썩했다.
그리고 마침내 임명식 당일.
나는 브리안을 대신해 성장을 하고 말에 올랐다.
녹색의 정복을 차려입은 날 보며,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두 눈을 반짝였다.
“우아, 어몬니 에뻐요!”
“에르도 어모니 따라갈래!”
“리아도! 리아도오!”
따라나서고 싶다는 아이들을 두고 오느라 약간의 시간이 지체되었다.
다그닥.
다각.
황제가 하사하였다는 흰색 암말이 나를 태우고 황궁을 향했다.
내가 지나가는 길, 양 갈래로 늘어선 사람들이 꽃을 뿌리고 환호를 했다.
황궁의 정문 앞에 도착하자 지키던 기사들이 문을 열어 주었다.
천천히 황궁의 정문을 통과했다.
나는 오래전에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이곳을 통과하였다가, 결국 내 발로 이곳을 나와야 했다.
휘황찬란한 황제궁 앞에서 말을 멈추었다.
말에서 내리며 4년여 만에 다시 보는 광경을 무심하게 둘러보는 찰나였다.
[아하하.]
문득 듣고 싶지 않은 웃음소리가 환청처럼 떠올랐다.
[아하하, 테오. 그러지 말아요, 사람들이 보잖아요.]
[뭐 어때.]
[하지만 저기 이브 경이…….]
카타리나가 몇 마디 속살거리며 안겨 들면, 테오도르는 무섭게 도끼눈을 뜨고서 내게 윽박지르곤 했다.
[이브 로웰린, 어딜 쳐다보는 거지? 지금 네깟 놈이 내 약혼녀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가?]
[……죄송합니다.]
사과를 하면서도, 나는 측근 호위라는 직책 때문에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시선만 아래로 내려야 했다.
초라한 과거의 잔상은 그렇게 나를 괴롭히다가, 눈을 깜빡인 순간 곧바로 사라졌다.
‘아, 젠장.’
조금 짜증이 났다.
오랜 시간이 지나 이제는 모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이 빌어먹을 황궁에 발을 딛자마자 곧바로 불쾌한 기억들이 물밀듯 밀려왔다.
분명 좋았던 기억도 많았을 텐데, 왜 이다지도 사람의 마음은 간사해서 안 좋은 것들만 먼저 생각나는 걸까.
나는 욱신거리고 너덜너덜해진 감정을 추스르며 걸음을 돌렸다.
긴 회랑을 지나 황제의 알현실이 이어지는 복도에 들어섰다.
지나는 길들마다 곳곳에 과거의 기억이 묻어 있었다.
그를 사랑한다는 사실을 막 깨달았던 첫사랑의 수줍음과,
그와 사랑을 나누며 남몰래 시선을 맞추곤 키득키득 웃던 첫 연애의 설렘과,
나를 잊어버린 그의 뒤에 끈질기게 달라붙으며 외면했던 불안과,
다른 여자와 함께 걸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멍청하니 쳐다보던 설움까지.
하나도 잊히지 않고 되살아나 나의 기억 속을 부유했다.
“…….”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것으로 해묵은 잔상을 털어 냈다.
한번 떨쳐 내고 나니, 잠시간 혼란스러워했던 것이 우스울 정도로 별 볼 것 없는 고작 첫사랑이었다.
황제의 알현실에 도착하자, 상석의 황금 왕좌 위에 삐딱하니 앉아 있는 테오도르가 보였다.
홀로 다른 생각을 하는 건지, 그의 표정은 퍽 감흥 없어 보였다.
그 주위로 익숙한 얼굴들이 보였다.
황제의 바로 아래, 양대 가주의 자리에 앉아 있던 벤야민은 나를 발견하고 놀라 굳어 있었다.
평소 이런 자리에 걸음하지 않는다는 에른스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고 있었다.
나는 울컥 치솟는 감정을 밀어 넣으며 정면을 보았다.
“뭐야?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여자였어?”
“아니, 저 여자는…….”
“체르니시아가의 그 막내딸…….”
“이름이 분명, 이보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으나, 무시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내가 멈추어야 할 곳에 우뚝 섰다.
테오도르가 내 바로 앞에서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에른스트나 다른 이들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나를 담은 황금색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나는 놀라움과 충격이 가득한 그 표정을 무시하며 담담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이브.”
그의 입술이 달싹이며, 속삭이듯 자그마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동시에 내 귀에까지 충분히 들릴 만한 크기의 소리였으나 나는 그것을 무시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그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덥석!
테오도르가 불현듯 내 손목을 붙잡았다.
이에 나는 눈가를 찡그리며 그를 보았다.
아무래도 그는 이브 로웰린과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동일 인물이란 걸 알아챈 모양이다.
욕설이 가득 담긴 편지를 두고 죽음을 위장하여 달아난 나를 죽이겠다거나 그런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부러 눈에 띄는 곳에 두고 갔으니 편지를 발견하지 못했을 린 없고…… 그럼에도 오히려 애틋한 눈빛으로 보는 걸 보니…….
‘기억을 모두 되찾은 모양이야.’
확신에 가까운 생각이었다.
본래 테오도르가 싫어하는 건 ‘이브 로웰린’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아니라.
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눈동자.
저것은 결코 ‘이브 로웰린’에겐 닿지 않을 시선이었다.
오직 ‘이보네’에게만 주었던 눈빛. 그리고 동시에 카타리나에게도 주었던 그런 눈으로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 뭐 해.’
이제 와 그가 기억을 되찾았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더 이상 그의 앞에서 ‘이브’로 설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의 옆에서 ‘이브’로 지냈던 시간은 황궁을 떠나던 그때 모두 묻었다.
그렇기에 나는 확고한 선을 그으며 그를 밀어낼 수 있었다.
“다른 이와 착각을 하셨나 봅니다. 저는 이브가 아니라 이보네 체르니시아입니다.”
미미하게 언짢은 기색과 함께 그의 손을 떨궈 냈다.
강하게 붙잡은 것과 달리 그의 손은 쉽게 떨어졌다.
힘없이 허공으로 밀려난 그의 손을 무심하게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던 때였다.
멈칫.
그의 얼굴 위로 돌연 환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그리고…….
뚝, 뚝-
‘눈물?’
아름다이 접힌 눈꼬리를 타고 투명한 눈물방울이 굵게 아롱져 떨어졌다.
테오도르가 울고 있었다.
“폐, 폐하, 어서 임명식을 이어 가야 합니다.”
옆에서 아르민이 안절부절못하며 테오도르에게 속닥였다.
“폐하? 폐하……?”
“…….”
그러나 테오도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듯, 그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얼굴로 나만 쳐다보았다.
화사하게 웃으며 우는 그 얼굴이 무척이나 기괴하여서, 모여 있던 귀족들이 모두들 숨죽인 채로 시선을 내렸다.
결국 황제의 기행으로 인해 임명식이 잠시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다시 재개된 임명식은 다행히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전대 가주였던 군터 할아버지가 황제 시해 죄로 참수 당하였기에, 나는 군터의 손녀가 아닌 가문에서 퇴출 당한 오스발트의 딸로 이 자리에 서야 했다.
“오스발트의 딸 이보네를 체르니시아의 가주로 임명한다.”
테오도르는 언제 그처럼 괴기하게 울었냐는 듯 단정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옆에서 아르민이 그가 혹여나 또 실수할까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왜 운 거지?’
그가 갑자기 울었을 때는 나도 조금 놀랐다.
그 기행의 까닭을 알 수 없었지만, 나는 테오도르가 그렇게 예쁘게 우는 남자가 아니라는 걸 이제 안다.
‘악어의 눈물이야.’
보통의 사람들은 슬플 때 운다. 혹은 너무 기쁠 때에도 운다.
그러니까 테오도르가 보통의 사람이었더라면, 나와 다시 만난 게 몹시 기쁘거나 혹은 슬퍼서 운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보통의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우는 척을 한 걸지도 모르지. 아니면 갑자기 눈이 아팠다거나.’
나는 구태여 그가 운 까닭을 알고자 하지 않으려고 생각을 털어 냈다.
그의 눈물이 나 때문이라 생각하면, 괜히 마음이 찝찝하니까.
임명식이 재개된 이후로도 테오도르는 수차례, 나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눈이 마주칠 때면 예쁘게 눈꼬리를 접었다가, 파르르 속눈썹을 흔들었다가, 눈가를 발갛게 물들였다가, 수줍게 눈웃음을 치길 반복했다.
‘가지가지 하네.’
잘생긴 얼굴로 저러는데도 꼴 보기가 싫은 걸 보니, 정말로 그에 대한 미련 한 톨 남기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그 사실에 내심 뿌듯해졌다.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 생각하면서도, 혹시나 다시 보면 흔들릴까 걱정하였던 탓이다.
“황제의 검을 하사하니, 알브레히트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되어 제국을 수호하라.”
두 손으로 그가 건네는 검을 받들었다.
검집에 초록색 보석이 박혀 있는 검은 본래 군터 할아버지가 사용하던 것이었다.
십수 년 전 ‘그 사건’ 이후로 황실이 회수한 것을 다시 돌려받았다.
식이 끝난 뒤, 나는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검을 들고서 밖으로 나왔다.
나를 향한 시선들이 여기저기서 쏟아졌다.
붙잡고 말을 걸고 싶지만 선뜻 다가서지는 못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브!”
이때, 벤야민이 창백한 얼굴로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그가 내 어깨를 양손으로 감싸 쥐며 물었다.
어지간해서는 표정 변화가 없는 벤야민답지 않은 그 얼굴을 보니, 상당히 놀란 모양이다.
“저택도 비어 있고, 그래서 걱정했어. 그런데 네가 왜 여기에…….”
“미안, 벤야민. 나중에 다시 이야기할게.”
그러나 나는 벤야민에게 짧은 인사를 남긴 뒤, 몸을 돌렸다.
지금 당장 찾아야 하는 사람이 따로 있었던 탓이다.
나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황제궁 뒤편으로 이어진 작은 길을 따라 뛰었다.
타닥, 탁, 탁.
길의 끝에 나를 등지고 선 한 남자가 보였다.
“에른스트!”
나의 부름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돌렸다.
상처받은 얼굴을 한 그가 눈가가 붉어진 채로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네가 죽은 줄 알았어.”
표정을 보아하니 알아챘나 보다.
내가 거짓으로 죽음을 위장하고 떠났다는 걸.
그 애와의 마지막 대화가 생각날 듯 말 듯 희미했다.
함께 황궁을 나가자는 그에게, 나는 무어라 말했더라.
[에른스트. 내가 없어도 잘 살아야 해.]
[영영 헤어질 사람처럼 말하지 마.]
아, 그랬지. 그는 알지 못하는 나만의 마지막 인사를 전했었지.
“미안해, 에른스트. 어떻게 된 거냐면…….”
나는 뺨을 긁적이며 그의 얼굴을 살폈다.
“황궁을 떠날 생각이었어. 테오도르가 다시 날 찾을 생각 하지 못하게. 너도 알잖아, 그때 내 상황.”
“…….”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너도 속여야 했어.”
나는 가느다랗게 흔들리는 에른스트의 눈동자를 담담히 응시하며 말했다.
“미안…….”
“넌 정말 나쁜 애야.”
에른스트는 나의 사과를 잘라 내더니, 이내 엉엉 울어 버렸다.
“넌 정말, 흐윽, 흑…… 넌 진짜 세상에서 제일 나쁜 친구야.”
“……너는 여전히 울보네.”
나는 눈물에 젖어 얼굴 위로 달라붙은 그의 화사한 백금발을 가만히 쓸어 넘겨 주며 피식 웃었다.
그러자 에른스트의 울음이 더욱 커졌다.
내 친구는 스무 살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눈물이 많았다.
나는 그의 울음이 잦아들 때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한참 뒤, 간신히 진정한 에른스트가 내게 물었다.
“아이는…… 어떻게 됐어?”
그는 나를 진찰하였던 의사를 제외하고 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애들, 보여 줄까?”
가볍게 툭 묻자, 그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눈가를 찡그리며 반문했다.
“애들?”
* * *
테오도르는 이브와 다시 만나게 되면 하고 싶은 말들이 참 많았다.
거울을 보고 혼자 연습도 많이 했다.
어떤 표정으로, 어떤 목소리로 다시 만난 그녀에게 인사를 할지.
그 덕에 자신을 미친놈 보듯 쳐다보는 린든과 아르민의 시선을 받아야 했지만, 딱히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막상 그녀와 재회한 테오도르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환하게 웃으며 울어 버렸다.
그녀를 다시 만난 게 기뻐서 웃었고, 그녀를 만나지 못한 지난 시간이 슬퍼서 울었다.
참 별로인 재회였다.
칼리고르 왕성에서 우연히 마주쳤던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니, 그때보다 더 볼품없고 못난 모습이었을 터이다.
테오도르의 시선은 임명식이 진행되는 내내 그녀에게서 떠나지 못했다.
아르민이 옆에서 하나하나 돕지 않았더라면 또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럴 순 없었다.
그녀가 고대하던 날을 하마터면 제 손으로 망가뜨릴 뻔하지 않았나.
테오도르는 어서 식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식을 마친 후에 그녀와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눌 이야기가 참 많았다.
우선 자신의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내가 잠시 미쳤다고. 그래서 널 알아보지 못하고, 힘들게 했다고.
미련하고 덜떨어진 놈이, 네가 떠난 이후에야 기억을 되찾았다고.
그리고 사과를 해야 했다.
미안하다고.
용서해 달라고.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그다음에는 지난 4년의 이야기를 나누어야지.
나는 이렇게 살았는데, 너는 어떻게 살았는지.
나는 네가 보고 싶어서 하루도 온전히 숨 쉴 수가 없었는데, 너는 나를 생각한 적 없었는지.
내가 보았던 너를 닮은 아이는 누군지.
그리고 네게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데,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건지…….
그렇게 테오도르가 머릿속으로 그녀와 나눌 대화를 초조하게 곱씹는 사이, 체르니시아의 새 가주를 임명하는 의식이 끝이 났다.
테오도르는 제게 받은 검을 허리에 차고서 당당한 걸음걸이로 뒤돌아 나가는 이보네의 뒷모습을 벅찬 감정으로 가만히 쳐다보았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황가가 박탈한 이름이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잃어버린 이름을 다시 돌려주고 싶었다.
[네가 다시 검을 든다면, 그건 네 이름을 되찾은 뒤에 당당히 세상에 나서는 순간이었으면 좋겠어.]
기억과 함께 잃어버린 약속을, 다시 되찾아 지켜 냈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두 흩어지고, 테오도르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십니까, 폐하?”
옆에서 아르민이 물었으나 그는 대답이 없었다.
다만 조금 전 그녀가 나간 길을 뒤따라 걸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저 멀리 아직 황궁을 벗어나지 않은 그녀가 보였다.
그녀를 발견하고 밝아지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멈칫 굳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씹어 죽일 놈이 그녀를 붙잡았다.
칼리고르 왕국에서 썩 좋지 못한 만남이 있었으나, 테오도르와 벤야민 모두 그 일을 모른 척했다.
알려져 봤자 서로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테오도르는 벤야민이 싫었다.
4년 전에도 그가 싫었고, 지금은 더 싫어졌다.
이브와 공모하여 그녀의 죽음을 위장하고 빼돌린 남자였다.
그리고 제가 모르는 그녀의 4년을 알고 있는 남자였다.
테오도르가 이를 악물며 그쪽으로 다가가려 할 때였다.
‘……?’
이보네가 벤야민을 밀쳐 냈다.
허망하게 밀려난 벤야민을 보며, 테오도르는 속으로 무척 고소해했다.
그 틈을 타 그녀에게 다가가고자 하였는데, 그녀가 곧바로 몸을 돌려 어디론가 뛰어가는 게 보였다.
‘저쪽은…….’
테오도르의 눈가가 가늘게 찌푸려졌다.
‘2황자궁으로 가는 길인데.’
테오도르는 그녀가 사라진 길을 따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서 발견했다.
싱그러운 꽃나무 아래.
서럽게 울고 있는 에른스트와 그를 달래 주는 이브를.
“…….”
이브는 몹시 다정한 손길로 에른스트의 눈물을 닦아 주고, 머리카락을 정돈해 주었다.
그 애틋한 손길을 테오도르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나도, 울었는데…….’
그녀의 죽음으로 슬펐던 건, 저도 마찬가지인데. 그런데 왜 그녀는 에른스트만 달래 주는 걸까.
‘내가 울 땐…… 미친놈 보듯 봤으면서.’
저를 대할 때와 확연히 다른 그녀의 태도가 가슴에 아프게 박혔다.
테오도르는 서걱서걱한 감각을 억누르며 그녀를 눈에 담았다.
이복 아우를 향한 이브의 친절은 단순히 달래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녀는 에른스트를 향해 피식 웃기까지 했다.
“아…….”
야트막하게 앓는 소리가 테오도르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임명식이 진행되는 내내, 테오도르가 단 한 번이라도 보길 소망했던 그 예쁜 웃음이었다.
그녀가 웃는 것을 보자, 눈가가 또다시 뜨거워졌다.
이브는 에른스트가 울음을 그칠 때까지 다정하게 기다려 주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을 한참 동안이나 지켜봐야 했다.
두 사람은 간간이 웃기도 하고,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떠들기도 했다.
테오도르는 차마 그 장면을 깨뜨리지 못하고, 이브의 얼굴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녀의 머리 위에 나뭇잎 하나가 하늘하늘 내려앉았다.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그녀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뗐다.
바스락-
그의 발밑에서 나뭇가지 밟히는 소리가 났다.
그 기척을 느낀 것인지, 내내 에른스트와 대화를 나누던 그녀가 이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 바람에 그녀의 머리 위에 달라붙어 있던 나뭇잎이 아래로 포르르 떨어졌다.
봄의 생명을 닮은 나뭇잎보다 더 푸르른 녹색 눈동자가 테오도르를 향했다.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잠시 홉, 하고 숨을 멈춘 테오도르가 이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브.”
조금 전처럼 볼품없지 않게, 그동안 연습했던 것처럼 근사하고 멋있는 목소리로.
울컥, 목이 멨다.
테오도르를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깔이 머물렀다.
그녀의 입술이 아주 천천히 열렸다.
테오도르는 느리게 달싹이는 그 입술을 바라보았다.
실제로는 1초에서 2초 남짓 되었을까 한 그 짧은 시간이, 테오도르에게는 무척이나 길게 느껴졌다.
그녀가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며 인사했다.
“체르니시아의 가주 이보네가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군더더기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한 동작이었다.
무서우리만치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 음성에, 테오도르의 가슴 위로 선연한 감각이 스쳤다.
그것은 질서 없는 두려움 같기도 했고, 설운 공포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차라리 화가 난 목소리였더라면, 나았을까?
“이브…….”
테오도르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거렸다.
테오도르는 그녀와 다시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할지, 늘 고민했었다.
보고 싶었어.
오랜만이야.
미안해.
할 말이 있어.
사랑해.
네가 없는 동안 죽고 싶었어.
널 다시 봐서 참 기뻐.
사랑해, 사랑해, 이브.
나를 용서해 줘.
네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어…….
그러나 정작 그는 그중 어느 무엇도 꺼내지 못하고, 대신 물었다.
“화났어?”
“……?”
순간 그녀가 미간을 왈칵 찌푸렸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자신을 향한 짜증이 역력하게 느껴지는 그 표정마저 기꺼워서 피시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없다는 듯 찡그려진 그 눈살에마저, 차마 그리워하던 생동감이 느껴져서.
테오도르는 그녀가 정말로 살아 돌아왔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
그것이 믿기지가 않아 지금도 꿈을 꾸는 건가 싶었다.
그녀가 슬쩍 찡그린 눈으로 자신을 가만히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폐하.”
이내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릴 적에 에른스트 황자 전하를 만나러 황궁에 들렀다가 폐하를 뵌 적이 있었지요.”
퍽 무심한 목소리로, 언뜻 사늘한 눈빛으로.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어 기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브는 전혀 기쁘지 않은 사람 같았다.
“어…….”
테오도르를 보는 이브의 얼굴에는 어떤 그리움, 반가움, 애틋함도 없었다.
또한 으레 예상하였던 분노와 서운함과 원망도 없었다.
긍정적인 감정뿐만 아니라 부정적인 것마저도 모두 거세한 듯한 그 얼굴에 남은 것은 이렇게 붙잡은 데에 대한 옅은 짜증과 귀찮음뿐.
두근, 두근, 쿵, 쿵, 쿵…….
이에 테오도르는 아까부터 불안하게 뛰던 심박 소리가 증폭되는 것 같았다.
“이브, 나랑 이야기를…….”
이때, 그녀가 그의 말허리를 잘라 내며 물었다.
“이브가 누구지요?”
쿠웅-!
테오도르는 순간 심장이 아래로 강하게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브가…… 누구냐니?
“조금 전부터 계속 저를 다른 이와 착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저는 체르니시아의 이보네입니다.”
“…….”
“오래전에도, 그리고 조금 전에도 그리 소개를 드렸던 기억이 납니다만.”
테오도르는 정신이 멍해졌다.
‘이브’가 누구냐고 묻는 그녀의 모습에 입 안이 바짝 말라 왔다.
다시 만나면 어쩌면 그녀는 화를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제가 기억을 잃고 저지른 짓들이…… 그녀를 많이 아프게 했을 테니까.
그러나 그녀가 이브라는 이름마저 부정할 줄은 몰랐다.
그 이름은…… 저와 함께 지낸 반년간의 시간이 담긴 이름 아닌가.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다면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잠깐, 이…….”
“오랜만에 다시 만난 소중한 친구와 회포를 풀 계획이라서요.”
이브는 에른스트를 힐긋 눈짓하며 느슨하게 입꼬리를 말았다.
그러고는 테오도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에른스트와 휙 가 버렸다.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의 잇새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와 함께 걸어가는 이브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에른스트가 중간에서 눈치를 보듯 힐끔힐끔 뒤를 돌아 저를 보다가 그녀에게 어깨를 찰싹 얻어맞는 게 보였다.
에른스트는 머리를 긁적이며 그녀를 향해 어색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 또한 에른스트를 향해 빙긋이 웃어 주었다.
이윽고 에른스트가 그녀에게 에스코트하듯 팔을 내밀었다.
이브는 에른스트의 팔 위로 우아하게 손을 얹었다.
테오도르는 그 살갑게 맞닿은 팔을 보며, 자신의 팔을 괜히 한 번 만져 보았다.
썰렁한 느낌과 함께 가슴 위로 시큰한 바람이 불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슬쩍 내려 자신의 빈 팔을 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걸어가는 두 사람의 모습이 망막에 맺혔다.
그녀와 언제나 함께였던 그 반년, 그녀의 정체를 숨겨야 했기에 한 번도 저리 다정하게 에스코트해 준 적이 없었다.
다만 기억을 잃은 뒤, 그녀의 앞에서 다른 여자들과 저처럼 다정한 연출을 하였던 것만이 생각났다.
그리고 저의 명목상 측근 호위였던 그녀는 늘 그런 제 모습을 뒤에서 지켜봐야 했다는 것도.
피시식.
헛헛한 웃음이 그의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러니 꼭 벌을 받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저 멀리 그녀의 차가운 뒷모습은 차츰 작아지더니, 이내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이후로도 한참 동안이나 같은 자리에 서 있던 테오도르는 제게만 서릿발 같던 그녀의 태도를 떠올리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차갑네…….”
만개한 꽃나무는 봄이 물씬 왔음을 알려 주었는데도, 여전히 그의 주변을 에워싼 공기만이 한겨울처럼 차가웠다.
* * *
햇살 좋은 오후, 체르니시아 저택.
에른스트가 놀러 왔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발견한 에른스트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이보네, 이, 이 애들이…….”
그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울먹울먹한 눈망울로 아이들을 보았다.
브리안 오빠도 내 아이들을 보고 그런 반응까지는 아니었다.
“왜 울어?”
“아, 안 울었어.”
에른스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울지 않았다는 그 말과 달리, 그의 눈시울은 이미 토마토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울지 마. 애쁜 아조씨.”
오딜리아가 까치발을 들고서 에른스트의 눈가를 소매로 닦아 주었다.
그러자 에르빈이 그 옆에서 고개를 비죽 내밀며 물었다.
“리아, 아조씨 애뻐?”
“웅, 애뻐.”
“에르보다 애뻐?”
“웅.”
“…….”
에르빈은 그 뒤로 말이 없어지더니,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채로 에른스트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에른스트는 아이들의 관심이 제게로 모아지자, 고장 난 장난감처럼 버벅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아조씨 머리카랑 반짝반짝 햅쌀(햇살) 가태.”
오딜리아가 에른스트의 등에 매달려 그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흥, 햅쌀은 무슨.”
에르빈은 헹, 하고 코웃음을 쳤다. 그러며 거만하게 턱 끝을 젖혔다.
“에르 머리카랑이 더 반짝반짝 애뻐.”
“우웅, 아냐. 아조씨 머리카랑이 더 애뻐.”
그러나 오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에른스트에게 찰싹 달라붙었다.
결국 심통이 난 에르빈이 씩씩 화를 내며 몸을 홱 돌렸다.
어서 달래 달라는 나름의 신호였지만, 이미 모든 관심이 에른스트에게 향한 오딜리아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아조씨, 우리 나가서 놀쟈.”
오딜리아가 에른스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바깥으로 이끌었다.
에른스트는 차마 그런 오딜리아의 요청을 쳐 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으며 끌려 나갔다.
이윽고 열린 창밖으로 까르르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우이잉…….”
에르빈은 잔뜩 속이 상한 얼굴로 내 품에 파고들며 물었다.
“어모니, 어모니도 에르보다 아조씨가 더 애뻐요?”
울먹울먹한 눈동자가 내게 향했다.
자칫 잘못 대답했다간 금방에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그런 귀엽고 사랑스러운 눈망울이었다.
“아냐, 에르. 우리 에르가 훨씬 더 예쁘지.”
아픈 심장을 부여잡으며 대답하자, 아이는 금세 화색이 되었다.
“그쵸? 에르가 아조씨보다 더 애쁘조?”
“그럼. 우리 에르가 세상에서 제일 예쁘지.”
아이를 달래 주며 속삭이자 에르빈이 아주 중요한 사실을 알려 주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아냐. 셰샤(세상)에서 쩰루(제일) 애뿐 건 에르 아니구 리아야.”
제법 진지하게 반박하는 목소리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에르는 리아가 그렇게 좋아?”
“녜, 구론데 리아는 에르보다 아조씨 더 조아해요.”
에르빈은 심통이 난 표정으로 내 가슴팍에 고개를 푸욱 파묻었다.
나는 쿡쿡 웃으며 에르빈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달래 주는 손길에 기분이 좋은 듯, 에르빈이 고개를 비비적거렸다.
시끄럽던 주위가 한순간에 조용해진 탓일까. 쓸데없는 상념이 툭 튀어나왔다.
임명식 날 테오도르와의 재회에 걱정하였으나, 다행히도 별일은 없었다.
돌연 울음을 터뜨리던 그의 기행과 묘하게 질척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찾아왔던 것 외에는.
‘왜 그런담.’
아주 잠시 그의 태도에 대한 고찰에 빠졌다.
일단 그는 이브와 이보네가 동일 인물이란 것을 정확하게 인지한 상태였고, 나와 무언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좋지 않게 헤어진 전 연인과 구태여 다시 만나 대화를 나누어 좋을 게 없었다. 설사 그가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하더라도.
‘그런다고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와 그 짓을 했던 게 사라지는 건 아니지.’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는 나를 두고 카타리나와 천년의 사랑을 나누었다.
그 여자와 세상이 모두 알도록 떠들썩한 사랑을 나누고, 그 여자와 약혼을 추진하였다.
심지어 그 여자는 테오도르의 아이를 갖기까지 했었다.
주먹을 꾸욱 말아 쥐자 손등 위로 핏줄이 툭 불거졌다.
‘게다가…… 엄청난 쓰레기였잖아.’
뿐만 아니라 난 이미 그 인성의 끝을 보았다.
또 그가 연인에게 얼마나 지조 없는 남자인지도.
그는 임신한 약혼녀를 두고 또 다른 여자에게 추파를 던질 만큼 구제할 수 없는 난잡한 쓰레기였다.
심지어 나를 사랑하지도 않는다면서 그런 짓을 했다.
물론 세상에는 그런 쓰레기 같은 남자가 참 많다는 것을,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로 남자들 틈에 섞여 살며 알고 있었으나.
‘하필이면 테오도르가 그런 부류일 거라곤 생각 못 했지.’
그렇게 생각하자면, 그가 기억을 잃은 것은 내게 정말 천운이었다.
그가 쏟아 내는 달콤한 밀어만 믿고 그와 결혼하여 황궁에 눌러살다가, 그가 다른 여자들과 노닥거리는 꼴을 보며 매일매일 손수건을 적시는 나날을 보내야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삶을 살 바에야, 지금이 나아.’
나는 정원 가득 울려 퍼지는 오딜리아의 웃음소리와 내 품 안으로 파고드는 에르빈의 온기를 느끼며 생각했다.
알브레히트 황제의 집무실.
테오도르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 앉아 제 앞에 선 남자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일인지, 그대는 알겠지.”
“무엇을 말입니까, 폐하?”
“분명 그녀가 그대를 기절시킨 뒤 사라졌다고 하지 않았나? 브리안 체르니시아.”
이브를 대하던 때와는 달리, 음산하고 고압적인 목소리였다.
“그대는 내게 그녀가 이미 서쪽 대륙을 떠난 것처럼 말했어. 다시 말해 그대는 황제를 속인 불경을 저지른 거야.”
얼핏 화를 참는 것 같은 음성이기도 했다.
그러나 브리안은 겁먹는 대신, 묘하게 적대감이 담긴 시선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맞받아쳤다.
“저도 모릅니다.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나 보지요.”
“허?”
그 당돌한 대답에 테오도르는 헛웃음을 쳤다.
과연 남매라 그런지, 그녀와 참 닮았다.
제가 기억을 잃었을 적에, 그녀도 이처럼 제게 당돌했었다.
그러고 보니 떠날 때도 제 뒤통수를 깨부수고 떠났었지.
그 기억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워서,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느슨히 말려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다시 굳혔다.
“……그래. 그러니까 그대는 모르는 일이라고.”
테오도르는 가늘게 좁혀 뜬 눈으로 브리안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네, 폐하.”
브리안은 뻔뻔하게 대답했다.
당연하게도 테오도르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다만 그는 브리안을 더 추궁하는 대신, 보다 더 뻔뻔한 작태로 몸을 일으켰다.
“앞장서.”
“……?”
“그대의 저택으로 갈 것이다.”
“네?”
브리안이 두 눈을 끔뻑이며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제 저택엔 무슨 일로 행차하신다는 겁니까?”
“내가 내린 선물이 멀쩡한지 확인하러 가야지.”
지금의 저택은 새 가주의 임명식 직전 테오도르가 새로이 하사한 것이었다.
오래전의 체르니시아 저택은 불에 타 재가 되어 내려앉았기 때문에 마땅히 새 저택이 필요했던 탓이다.
“저택은 몹시 튼튼하고 아름답습니다. 폐하의 은총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니야. 내 눈으로 직접 보아야겠어.”
테오도르가 짐짓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혹시나 마감이 부실하여 저택이 주저앉기라도 하면, 내 마음이 찢어질 테니까.”
“그런 일은 결코 없을…….”
“황명이다.”
“…….”
누가 들어도 저택에 방문하려는 뻔뻔한 핑계임에 틀림없었으나, 브리안은 마지못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영 내키지 않았지만 황제의 명령을 거역할 순 없는 노릇이니.
‘오늘은 손님이 올 거라고 그랬었는데.’
브리안은 아침에 저택을 나설 적에 배웅하던 이보네의 말을 떠올렸다.
‘뭐…… 손님이 있다고 황제가 물러설 것 같지도 않고.’
테오도르는 이미 집무실 바깥을 향하고 있었다.
브리안은 미적미적한 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
황제궁 바깥에는 브리안이 아침에 타고 온 체르니시아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서 있었다.
테오도르는 주인에게 묻지도 않고 냉큼 그 위로 올라탔다.
그렇게 브리안은 반쯤 억지로 테오도르와 함께 저택으로 귀가해야 했다.
‘이거, 이보네에게 한 소리 듣겠는데.’
브리안은 벌써부터 저를 향해 무섭게 인상을 쓸 이보네의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반응을 차치하고서라도, 브리안은 테오도르가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뿐만 아니라 세상의 어떤 오빠도 자신의 여동생에게 그런 짓거리를 한 남자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보이지 못할 것이다.
만일 눈앞의 남자가 황제만 아니었더라면, 브리안은 진즉 칼부림을 일으켰을 것이다.
막 그녀로부터 그간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을 때, 브리안은 몹시 화가 나서 당장에라도 황제에게 뛰어갈 기세로 날뛰었다.
[진정해, 오빠. 목숨은 소중히 여겨야지.]
그러나 이보네의 침착한 목소리가 그를 말렸다.
[하지만, 이보네……! 그 자식을 죽이지 않으면, 도무지 발 뻗고 못 자겠어!]
[오빠 실력으로는 황제를 못 죽여. 그리고 죽일 수 있다 하더라도 문제야. 그건 진짜 역모죄라고. 가까스로 일으킬 기미가 생긴 가문을 완벽하게 멸문시킬 생각이야?]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따져 묻는 말들이 하나같이 반박할 여지가 없어서, 브리안은 씩씩거리며 화를 삼켜야 했다.
테오도르와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내내 브리안은 굳은 표정을 고수했다.
테오도르 또한 굳이 그와 더 대화를 할 생각은 없었던지 입을 꾹 다물었기에, 마차 안에는 침묵이 맴돌았다.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체르니시아 저택에 당도했다.
마차는 저택의 정문을 통과하여 안쪽으로 들어섰다.
마침내 마차가 멈추고, 테오도르가 막 마차 아래로 발을 디딜 때였다.
까르륵-
어린아이의 웃음소리가 멀지 않은 곳에서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멈칫하고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아…….”
그의 잇새로 작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공놀이를 하며 정원 위를 깡총깡총 뛰어다니고 있었다.
아이가 들고 있던 공이 데굴데굴 굴러와 테오도르의 앞에 멈추었다.
여자아이는 쪼르르 달려와 공을 주웠다.
“읏샤! 리아가 공 주웠어!”
“…….”
“우웅?”
양손으로 공을 주운 아이가 고개를 들었다.
그러고는 제 앞에 선 커다란 인영을 보며 두 눈을 똥그랗게 떴다.
“어? 잘샌긴 아조씨다!”
오딜리아가 테오도르를 알아보고 외쳤다.
“…….”
테오도르는 숨을 홉 참은 채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조씨 요기 어케(어떻게) 온 거야?”
“…….”
무언가 말을 꺼내야 하는데, 이상하게 목이 멨다.
“아, 형님.”
오딜리아와 정원에서 공놀이를 함께 하던 에른스트가 뒤늦게 허둥지둥 뛰어왔다.
“여긴 어떻게…….”
오딜리아를 뒤로 슬쩍 숨기며 테오도르를 힐긋 쳐다보는 에른스트의 눈동자에 묘한 경계심이 어려 있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시선은 에른스트가 아닌 오딜리아에게 붙박인 듯 꽂혀 움직이지 않았다.
“너, 정말로 이브의…….”
가까스로 그의 입 밖으로 새어 나온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져 있었다.
“아조씨, 리아 보러 온 거야?”
오딜리아는 에른스트의 뒤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서 물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 듯한 두 사람의 모습에 에른스트가 혼란스러운 표정을 짓는 찰나.
차박, 차박-
단정한 발소리와 함께 저택의 주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황궁에 다녀온다더니, 연락도 없이 손님을 모셔 왔나 보네.”
곱슬곱슬한 은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서, 편안한 흰색 셔츠에 검은 팬츠를 입은 여자는 새로이 체르니시아의 주인이 된 이보네였다.
“브리안 오빠.”
이보네가 마차를 정리하고 이쪽으로 걸어오는 브리안을 책망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아니, 그게 폐하께서…… 친히 하사하신 저택을 살펴보신다기에.”
브리안이 억울한 표정으로 우물우물 항변했다.
싸늘한 시선이 브리안을 떠나 테오도르에게 정착했다.
테오도르가 억지를 부렸다면 누구도 막지 못했을 테니, 브리안을 탓할 것은 없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이보네는 못마땅한 목소리로 테오도르를 향해 인사했다.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우뚝 굳어 버렸다.
단순히 편한 차림새를 한 그녀가 너무 예뻐서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의 품에 안긴 작은 남자아이를 발견한 탓이다.
그녀에게 착 달라붙은 아이는 그녀를 닮은 은색 머리카락을 지녔다.
[아, 아이가 둘이 있었습니다.]
[둘……?]
[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이렇게 둘…….]
칼리고르의 왕자는 그녀에게 아이가 둘이 있었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에 테오도르는 더 자세히 묻는 것을 포기하였다.
설령 제가 본 여자아이가 저와의 관계로 태어난 아이라 할지라도 다른 아이가 하나 더 있다는 건, 그녀에게 제가 아닌 다른 남자가 또 있었다는 것을 반증할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막상 그녀가 안고 있는 남자아이는…… 아래에서 두 눈을 땡그랗게 뜨고 있는 여자아이와 같은 나이대였다.
이건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경우의 수였다.
“……이럴 줄 알았어.”
테오도르는 그녀의 품에 안긴 아이를 보며 멍하니 읊조렸다.
“내가, 내가 정말 이럴 줄 알았어…….”
느닷없이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웅얼거리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이보네가 인상을 작게 썼다.
야트막하게 입술을 달싹이며 속삭이는 소리는 무척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았다.
“폐하?”
이보네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그를 부르던 때에, 테오도르가 희열에 찬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나는 항상 쌍둥이를 낳고 싶었어.”
“……?”
난데없는 그의 자식 계획에 이보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너를 닮는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모두 사랑스러울 것 같다고 생각했지.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어려우니까 쌍둥이를 낳으면 딱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했었어.”
속사포처럼 쏟아 낸 말을 이보네가 이해하기까지, 약간의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런데, 역시……!”
테오도르는 그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이 두 눈을 접으며 외쳤다.
“역시 우리 아기들은 너를 닮을 줄 알았어!”
우리, 아기들?
뒤늦게 그가 말하는 바를 알아들은 이보네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이브! 우리 아기들이야! 그렇지? 우리 아기들이 맞지?”
테오도르는 막무가내로 기쁨의 탄성을 터뜨렸다.
심지어 그 눈꼬리에 그렁그렁한 눈물방울마저 어울리지 않게 매달려 있었다.
그런 테오도르를 향해, 이보네는 서늘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이게 무슨 개…… 헛소립니까?”
금방이라도 상대를 베어 낼 듯한, 첨예하고 날카로운 음성이었다.
멋대로 저택에 난입한 테오도르는 별안간 화사한 웃음을 터뜨리며 외쳤다.
“이브! 우리 아기들이야! 그렇지? 우리 아기들이 맞지?”
확신에 가까운 그 목소리에 나는 순간 가슴이 철렁해졌다.
“이게 무슨 개…… 헛소립니까?”
당장 욕설을 퍼붓고 싶은 충동이 밀려왔으나, 인내심 있게 꾹 눌러 참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같은 자리에 있었다.
아이들에게 비속어를 들려줄 순 없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애틋함이 가득 담긴 눈으로 오딜리아와 에르빈을 차례로 보며 말했다.
“이거 봐, 아기들이 너를 닮았고, 나를 닮았어.”
아니, 에르빈은 내내 내 어깨 위로 고개를 파묻고 있어서 얼굴이 보이지도 않을 텐데 뭐가 닮았다는 거야?
게다가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와 닮은 부분이 정말 단 한 군데도 없었다.
오딜리아가 테오도르로부터 유일하게 물려받은 검은 머리카락은 벤야민의 술법으로 밝은 은발이 되어 있으니까.
애초에 두 아이는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그대로 연상시킬 만큼, 오직 나만을 쏘옥 빼닮았다.
“이상한 억지를 부리시는군요.”
나는 테오도르의 헛소리에 일일이 반박해야 하는 상황에 조금 짜증이 나서 인상을 찌푸렸다.
어째서 과거 아르민 공이 ‘황제만 아니었으면…….’ 하는 말을 매번 소리 죽여 삼켰는지 알 것 같았다.
“제 아이들이 왜 폐하를 닮습니까?”
“아니야, 이것 봐. 저 아이, 이렇게 고개를 기울일 때 깜빡이는 눈의 각도가 나랑 닮았어.”
“…….”
“그리고 네가 안고 있는 아이, 귓불에 난 솜털이 내 어렸을 때랑 닮았잖아.”
테오도르가 오딜리아의 눈가와 에르빈의 귓불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랑 나를 섞어서 만들어진 것 같아……. 너무, 너무 사랑스러워.”
“…….”
나는 아주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정말인가?’
한 번도 아이들이 테오도르를 닮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한 번 듣고 나니 괜히 ‘그런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모니, 저 아조씨 누구예요?”
이때, 내내 내 어깨 위로 고개를 푹 파묻고 있던 에르빈이 테오도르를 힐긋 쳐다보더니 내게 물었다.
“저 아조씨도 어모니 친구예요?”
“아니야.”
친구라니. 끔찍한 소리.
나는 좋지 않게 헤어진 전 애인과 구질구질했던 과거를 잊고 친구로 지낼 만큼 속 시원한 성격은 결코 되지 못했다.
오히려 두고두고 욕을 하며 저주하는 쪽에 가까웠다.
아무래도 테오도르를 향한 아이들의 관심이 커지기 전에 쫓아 보내야 할 성싶었다.
내가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빈을 품에서 떼어 내 아래로 내려놓을 때였다.
“……!”
테오도르가 에르빈의 얼굴을 응시한 채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뭐지? 에르빈의 금안을 보고 놀란 건가?’
에르빈의 눈동자가 테오도르의 것을 닮긴 했으나, 그만큼 희귀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나는 괜히 마음이 조급해지려는 것 같아 그의 앞을 막아섰다.
“저택을 살펴보고자 납시셨다고요?”
“…….”
“폐하?”
“……아!”
무언가에 홀린 듯이 멍하게 있던 테오도르가 퍼뜩 정신을 차린 듯 탄성을 터뜨렸다.
“으응…….”
멍청하니 말끝을 흐리는 게 영 미심쩍었다.
‘무슨 생각을 했기에 저런 표정이지?’
그러다 나는 몹시 눈에 띄게 어쩔 줄 몰라 하며 테오도르의 눈치를 흘깃흘깃 살피는 브리안과 에른스트를 발견했다.
두 사람은 아이들의 친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저처럼 더 황망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겠지만, 저렇게 티 나게 굴다가는 테오도르가 이상함을 감지할지도 모른다.
“이쪽으로 따라오시지요.”
나는 일단 테오도르를 데리고 이 자리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그에게 권유했다.
“으, 응……!”
테오도르는 환하게 웃으며 내 옆에 쪼르르 붙었다.
나는 그를 저택 안쪽으로 안내했다.
그 와중에도 계속 뒤를 힐끔힐끔 보며 아이들의 얼굴을 훔쳐보는 그의 작태가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남의 아이들은 왜 훔쳐보는 거야?’
당장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참고 있던 도중, 그가 입을 열었다.
“너랑, 정말 똑같이 생겼어.”
감격받아 퍽 들뜬 목소리가 내 신경을 거슬렀다.
“이브, 나는 아기를 낳으면…….”
“죄송합니다, 폐하.”
그가 하는 헛소리를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서, 나는 냉랭한 말투로 그의 말을 끊어 냈다.
“약속 없이 찾아오셔서, 직접 맞이해 드릴 준비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 괜찮…….”
“폐하께서도 보셨다시피, 2황자 전하를 접대하던 중이라서요. 사람을 붙여 드릴 테니, 천천히 저택을 둘러보다 가시지요.”
나는 그에게서 몸을 홱 돌리고서 저택의 집사를 불렀다.
“잠깐, 이…….”
나를 붙잡는 목소리와 함께 내 뒤로 질척하게 따라붙는 처량 맞은 그의 시선이 느껴졌으나, 모른 체하며 집사에게 지시를 내렸다.
“폐하께서는 몹시 바쁘신 분이니 최대한 간결하고 신속하게 저택을 안내해 드린 뒤 정문까지 배웅해 드리거라.”
“네, 가주님.”
브리안이 고용한 저택의 젊은 집사는 절도 있는 동작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내 앞에 섰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나는 축객령이나 다름없는 인사를 남기고서 쌩하니 걸음을 돌렸다.
황제를 대하기에는 다소 불손한 태도였으나, 그 또한 언질 없이 저택을 찾아온 무례를 범했으니 내게 무어라 하지 못할 터였다.
정원으로 돌아오자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내게 몰려들었다.
“어몬니, 잘샌긴 아조씨 갔어요?”
“그 아조씨 누구예요?”
테오도르에게 관심을 보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에게 나는 가볍게 대꾸해 주었다.
“지지야.”
“지지?”
“응, 지지. 더러운 거야.”
“우웅, 지지.”
“지지는 더러워요.”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똑똑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은 거 맞지, 이보네?”
“이보네…….”
브리안과 에른스트도 불안한 눈동자로 나를 보며 한마디씩 던졌다.
“괜찮아.”
나는 그들의 걱정을 단칼에 차단하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행동했다.
그러나 사실 나 또한 누구보다 놀란 터였다.
테오도르의 꿍꿍이를 알 수 없어 심란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제 자식이란 걸 그가 정말로 알아본 걸까 봐…….
‘하지만 내가 아니라면 아닌 거지. 어떻게 알겠어.’
딱히 친자를 감별할 수 있는 방법 같은 것도 없으니, 걱정하는 일은 생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홀로 고개를 주억였다.
* * *
쫓겨나다시피 체르니시아 저택을 나서며, 테오도르는 조금 속상해졌다.
그녀에게 하고픈 말이 많았고, 또 궁금한 것도 많았다.
그러나 이브는 좀처럼 제게 대화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저와의 재회를 반가워하기는커녕, 불쑥 찾아온 저를 불청객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하지만, 내 이야기 한 번쯤은 들어 줄 수 있잖아.’
감히 그녀에게 옅은 원망마저 피어났다.
‘아니야, 테오도르. 살아 있는 그녀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것만으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잖아.’
테오도르는 그 뻔뻔한 원망을 꾸욱 억눌렀다.
그녀가 저를 미워하고 욕해도 좋다고 생각했었다.
냉대하고 외면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그저 그녀가 살아 숨 쉬는 모습만 볼 수 있으면 된다고.
그래, 분명 그렇게 여기지 않았던가.
‘그래. 괜찮아. 그러니까…… 그러니까 나는…… 괜찮…….’
그가 간신히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에룽쑨뜨(에른스트) 삼쫀 쪼아! 삼쫀 집에 가지 말구 리아랑 살아요. 웅?”
까르륵거리는 아이의 웃음소리가 울타리 너머로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린 테오도르는, 정원에서 사이좋게 놀고 있는 에른스트와 오딜리아를 발견했다.
“…….”
욱신-
에른스트가 아이를 머리 위로 높이 들어 올려 주는 모습을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아프고 눈가가 뜨거워졌다.
“에르도! 에르도 높이 올려 줘!”
에르빈이 에른스트의 바지 자락을 잡아당기며 칭얼거렸다.
멀찍이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이보네가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며 에른스트에게 다가갔다.
“에르, 리아. 삼촌을 괴롭히면 안 돼.”
“괜찮아, 이보네.”
“그렇게 응석을 다 받아 주다간, 에르와 리아가 너처럼 울보가 되어 버릴지도 몰라.”
하필이면 테오도르가 서 있는 곳에서 그들의 대화가 너무나 잘 들렸다.
“아직 어린데, 뭐 어때.”
“애들이 응석받이가 되면 네가 책임질 거야?”
“뭐, 못 질 것도 없지.”
두 사람은 아이들의 양육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이좋게 대화하는 그 모습에 배알이 꼴렸다.
‘나도 놀아 주고 책임져 줄 수 있는데…….’
“에룽쑹뚜 삼쫀 체고(최고)야!”
오딜리아가 양팔로 에른스트의 목을 끌어안으며 그의 뺨에 입을 맞추는 게 보였다.
당황한 에른스트가 멍청한 표정을 짓자, 이보네가 소리 내어 웃었다.
욱신- 욱신-
가슴이 조금 전보다 더 시큰하게 아파 왔다.
‘왜, 왜 나는 안 되는 거야?’
뾰족하게 튀어나온 의문은 다시 그에게로 돌아와 가시처럼 박혔다.
그 따끔한 통증에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었다.
애써 괜찮다고 자위하였으나, 괜찮지 않았다.
전혀, 아주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저 덜떨어진 에른스트는 끼어들 수 있는 저 장면 속에 정작 제 자리는 없다는 사실이, 이다지도 그를 괴롭게 했다.
테오도르는 주먹을 아프도록 꾸욱 말아 쥐었다.
느슨하게 웃고 있는 이브의 얼굴은 너무나 예뻐서, 이 먼 거리에서도 눈에 박혔다.
한때 저 예쁜 얼굴 위로 빈틈없이 입을 맞추며 사랑을 나누었던 때가 있었는데…….
‘오해를…….’
테오도르는 제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조금 전 제게 냉랭하게 홱 돌아서던 그녀를 생각했다.
‘오해를 풀면…….’
목울대가 아프게 일렁거렸다.
‘그래, 오해를 풀면 될 거야. 그럼 이브도 내게 화를 풀고 용서해 줄 거야. 지금은 우리 사이의 오해가 깊으니까…….’
비록 그녀가 지금은 저와의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으나, 다시 모습을 드러낸 이상 언제고 오해를 풀 기회는 충분하리라.
테오도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조급함을 가라앉혔다.
\\
사실은 말이야, 이브.
내가 잠시 미쳐서 널 기억하지 못했어.
너를 기억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네가 너무 좋아서, 너를 두고 너와 닮은 여자에게 끌리는 내 자신이 싫어서.
그래서 네게 매몰차게 굴었어.
그 여자와는 아무런 관계도 아니야.
그러니까 기억을 잃기 전에도, 잃은 뒤에도, 내가 사랑한 건…….
오직 너뿐이었어.
미안해, 이브.
너를 알아보지 못해서.
너를 아프게 해서.
네게 상처를 주어서.
내가 다, 미안해.
그러니 제발 한 번만…… 내 이야기를 들어 주면 안 될까?
\\
“이브…….”
테오도르는 한동안 같은 자리에서 그들을 지켜보았다.
날이 저물어 그들이 실내로 사라지고 나서도, 쭈욱.
\\
에른스트는 이후로도 이따금씩 이보네를 만나러 갔다.
막상 저택을 방문하면 이보네는 바빠서 만나기 힘들어 대신 아이들과 놀아 주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는 그것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늘도 체르니시아 저택을 방문할 예정인 에른스트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선물을 들고서 마차로 향했다.
‘……따갑네.’
에른스트는 멀지 않은 곳에서 느껴지는 흉흉한 시선에, 머쓱한 표정으로 뺨을 긁적였다.
테오도르가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애써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며 마차에 오르려 할 때였다.
“네가 뭔데 내 아이들을 책임진다는 거지?”
“네, 네?”
갑작스럽게 다가온 테오도르가 그에게 시비를 걸며 쏘아붙였다.
에른스트는 긴장으로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숨을 꼴깍 삼켰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테오도르를 무서워했던지라,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에른스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이딴 게 뭐가 예쁘다고…….”
“네, 네……?”
“네가 준비한 그깟 사자보다는 이걸 더 좋아할 것이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에른스트를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불쑥 다람쥐 인형을 내밀었다.
검은 줄무늬가 있는 갈색 털에, 빨간색 원피스를 입고 머리에는 리본을 단 귀여운 다람쥐 인형이었다.
당장 건네받지 않으면 죽일 것처럼 노려보는 시선에, 에른스트는 허겁지겁 다람쥐 인형을 받아 챙겼다.
테오도르는 두 눈을 부릅뜨며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려 사라졌다.
“휴우…….”
테오도르가 내뿜는 살기에 하마터면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에른스트는 놀란 가슴을 쓸며 마차에 올라탔다.
최근 며칠 테오도르가 이브를 만나러 찾아갔으나 문전 박대 당한 것을 그녀의 옆에서 몇 차례 목격한 탓일까.
에른스트는 제가 그를 쫓아낸 것도 아닌데 괜히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그보다 왜 그렇게 얌전히 찾아갔다 얌전히 쫓겨나는 거지?’
이보네가 사라지고 미친 자처럼 굴던 테오도르는, 막상 그녀가 돌아오자 평범한 옛 애인처럼 굴었다.
그녀가 대화를 하기 싫다고 거부하자, 조용히 입을 다물며 애처로운 표정을 짓고.
그녀가 꼴도 보기 싫다고 하자, 조용히 사라져 몰래 훔쳐보기만 하고.
그녀가 그마저도 재수 없다며 소금을 뿌리자, 얌전히 서서 소금을 맞더니 그녀가 사라진 뒤에 흙바닥 위의 소금을 한 알 한 알 골라내었다.
‘본래 형님의 성격대로라면 왜 내 말을 들어 주지 않냐고 화를 내야 하잖아? 지금쯤 이보네를 납치했어야 정상 아니야?’
조금 수상했다.
적어도 에른스트가 아는 테오도르는 그렇게 얌전한 남자가 아니었다.
뒤늦게 참회하여 착해진 것은 아닐 테고…….
‘설마 내숭을 부리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소름이 돋아서, 에른스트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느새 그를 태운 마차가 저택에 도착했다.
정원에서 뛰놀던 아이들이 그를 향해 오도도 뛰어왔다.
“삼쫀!”
껑충껑충 뛰어온 오딜리아가 에른스트의 품에 폴짝 안겨 들었다.
“삼쫀, 그거 모야?”
“아, 이건 사자 인형인데…….”
“아아니, 그거 말구, 저거!”
오딜리아는 에른스트의 손에 들린 사자 인형에는 관심도 주지 않으며, 마차 좌석 위에 얌전히 놓인 다람쥐 인형을 가리켰다.
“곤준님(공주님)! 저거 다랑지 곤준님이야!”
어느덧 달려온 에르빈이 빨간 원피스를 입은 다람쥐 인형을 가리키며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곤준님이랑 젤리꼬랑 결혼해!”
“……공주님? 젤리꼬?”
에른스트는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참, 삼쫀 젤리꼬 모루눈구나.”
“흥, 젤리꼬도 모루구 나쁜 사람 아냐?”
“아냐! 모룰 수도 있지!”
“젤리꼬 모루먼 나쁜 사람이잖아.”
“에룽쑨뚜 삼쫀은 애뻐. 애쁜 사람은 나쁜 사람 아냐.”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고 에른스트를 빤히 응시하는 에르빈을 향해, 오딜리아가 두 팔을 파닥파닥 흔들며 변호했다.
“삼쫀, 리아가 젤리꼬 안녀 주까(알려 줄까)? 젤리꼬는 다람찌 욘싼데…….”
오딜리아는 친절하게 제리코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구래서 젤리꼬랑 곤준님이랑 결혼해!”
“와아, 그렇구나.”
에른스트가 다정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자 오딜리아는 더욱 신이 났다.
“구리고 리아도 삼쫀이랑 결혼할 꼬야!”
오딜리아가 에른스트의 품 안으로 파고들며 활짝 웃었다.
“뭐?”
이에 울컥 반응한 것은 다름 아닌 에르빈이었다.
“안 돼! 시러!”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팔을 잡아당기며 에른스트로부터 떼어 놓으려 했다.
“리아는 에르랑 겨론하기로 해짜나!”
“하찌만 삼쫀이 에르보다 더 애뿐걸.”
그러나 오딜리아는 에른스트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며 비죽 혀를 내밀었다.
“아냐! 에르가 더 애뻐! 어모니가 에르 더 애뿌다고 하서써!”
“에르 멍총이, 그거 어몬니가 고진말(거짓말)하신 거야. 안 구럼 에르가 우니까.”
“……!”
“이고 봐 봐. 지굼도 애기초롬(애기처럼) 떼쓰고 있짜나? 구니까 오몬니도 에르가 더 애뿌다고 고진말하셔찌. 에휴.”
오딜리아는 에르빈을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잠시간 충격받아 굳어 있던 에르빈은 약이 바짝 올라 에른스트를 노려보며 씩씩거렸다.
“삼쫀 나빠! 에르한테 리아 뺏어 가지 마! 리아는 에르랑 결혼할 거야!”
“아, 하하…… 그래, 에르. 그렇게 하자.”
에른스트가 난처하게 웃으며 에른스트를 달래고자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오딜리아가 두 눈을 뾰족하게 뜨고 에른스트를 쳐다보았다.
“그걸 왜 삼쫀이랑 에르가 결정해!”
“헹! 삼쫀 에르 편이야.”
“아냐! 삼쫀은 리아 편이란 말야! 삼쫀 뺏어 가지 마!”
어느새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에른스트를 내버려 두고 둘이서 툭탁툭탁 싸우기 시작했다.
그런 두 아이의 모습에 에른스트는 자그마한 미소를 내지었다.
‘둘 다 정말 이보네와 닮았네. 귀여워.’
이보네를 그대로 복제한 듯한 작은 두 아이가 다투는 모습은 그저 귀엽기만 했다.
‘나도 어렸을 때 이보네와 저랬었나.’
에른스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았다.
어렸을 때, 사람들은 그를 황궁의 부족함 없는 황자님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실상 에른스트는 늘 외로웠다.
어머니는 자신을 애지중지 아끼는 것 같으면서도, 이따금씩 타인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아버지는 오랜 병석에 누워 계셔 자주 만나지 못했고, 이복 형님이었던 테오도르는 너무 무서웠다.
그래서 이보네와 처음 친구가 되었을 때, 그 애에게 더 의지했는지 모르겠다.
[안녕, 나는 이보네야. 이보네 체르니시아.]
살랑살랑 불어보는 봄바람에 달빛처럼 아름다운 은색 머리카락을 흩날리며 활짝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이보네는, 동화책에 나오는 공주님처럼 예뻤다.
홀린 듯 그녀를 쳐다보던 에른스트는 황자로서의 위엄도 잊고 얼굴을 붉히며 말을 더듬었다.
[나, 나는 에른스트야.]
그 모습에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흐뭇한 웃음을 터뜨렸다.
지금에서야 어린 황자가 귀여워 보인 반응이란 것을 알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 부끄러워 쥐구멍에 숨고만 싶었다.
[황자님은 이보네 아가씨가 그렇게 좋아요?]
[응, 너무 좋아! 이보네는 예쁘고, 착하고, 똑똑하고, 달리기도 잘하고…… 게다가 나무도 잘 타!]
이보네가 좋은 이유는 수도 없이 많았다.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알았다.
그런 이유들이 아니더라도,
이보네가 예쁘지 않고, 착하지 않고, 똑똑하지 않고, 달리기를 못하더라도, 나무 위에서 맨날 미끄러지더라도,
그래도 저는 이보네를 좋아했을 거라고.
[다행이네요. 두 분의 사이가 좋으셔서. 장차 알브레히트 황실의 앞날이 밝겠어요.]
[응? 황실의 앞날?]
어려운 말을 하는 사용인을 탈탈 털어 캐물은 결과, 에른스트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그러니까, 이, 이보네랑 나랑 커서 결혼을 하는 거야?]
결혼이라니. 그런 건 동화책에서만 보았다.
그가 읽던 동화책의 끝에는 항상 악당을 무찌른 용사님이 공주님과 뽀뽀를 하며 결혼식을 올렸다.
물론 자신은 용사님이 아니었고, 이보네도 공주님이 아니었지만…….
[어, 어떡해, 너무 좋아!]
에른스트는 두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폴짝폴짝 뛰었다.
그 모습에 하하 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너무 기쁜 나머지 쥐구멍에 숨고 싶은 생각도 더는 들지 않았다.
[그런데 이보네도 기뻐할까? 이보네가 싫어하면 어쩌지?]
[이보네 아가씨도 분명 좋아하실 거예요!]
황궁 사용인들의 응원 속에서, 에른스트는 커서 이보네와 결혼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다 어느 날.
이보네가 황후궁에 한 달간 머물다 갔던 그 여름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군터 체르니시아, 이보네의 할아버지이기도 한 그 남자와 우연히 맞닥뜨렸을 때.
이보네와 똑같은 은색 머리에 녹색 눈동자를 지닌 그 남자를 향해 에른스트는 예쁘게 웃으며 인사를 했다.
[안녕, 나는 2황자 에른스…….]
군터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에른스트에게 반응한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확히는 그 검의 손잡이에 박혀 있던 푸른 보석이 검은색으로 일렁거렸다.
표정이 사아악 굳은 군터가 검을 뽑아 에른스트를 겨누었다.
[당신, 정체가 무엇입니까!]
[왜, 왜 그러는 거야……?]
[당장 정체를 밝히지 않으면……!]
[나, 나는 2황자 에른스트…….]
울먹이며 왜 그러냐고 물을 적에 에른스트는 검은 연기에 휩싸여 그대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렇게 에른스트가 잠시 혼절하였다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황궁이 발칵 뒤집혀 있었다.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황제를 시해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황제가 병상에 누워 있는 동안, 황궁의 지휘권은 어머니 마르가라테 황후에게 돌아갔다.
[어쩔 수 없지요. 체르니시아를 멸살해야 해요.]
[안 돼요! 어머니, 제발…….]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답니다, 황자. 군터는 폐하를 시해하려고 했고, 황자도 해치려 했어요.]
마르가라테 황후는 아들의 애원에도 차갑게 잘라 말했다.
[그, 그럼 이보네라도, 이보네를 살려 주세요……!]
에른스트는 이보네를 살려 달라며 울며 부탁했다.
덕분에 이보네를 살릴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꽤 오랫동안 그녀를 만나지 못했다.
커서 그녀의 짝이 될 거라는 어린 날의 꿈도 함께 흩어졌다.
이보네는 그 어린 날의 어른들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을까?
에른스트가 밀어 두었던 옛 기억에서 깨어날 무렵이었다.
‘어…… 손님?’
저 멀리 손님이 도착했다.
페르디난트, 어머니의 가문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에서 한 남자가 내렸다.
겨울날 내리는 첫눈처럼 새하얀 백발에 나른한 표정을 지닌 미남자는 페르디난트의 가주 벤야민이었다.
에른스트와는 사촌지간이기도 하였으나, 어릴 적부터 딱히 교류가 없어 어색한 사이이기도 했다.
마차에서 내린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두 남자는 멀뚱멀뚱 서로 쳐다보았다.
벤야민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해 갔다.
‘왜 저런 표정으로 쳐다보는 거지?’
뜻 모를 그 표정에 에른스트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벤야민은 짤막하게 고개를 까닥이고는 몸을 돌렸다.
기이한 기분에 휩싸인 에른스트는 벤야민이 이보네가 있을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것을 잠잠히 지켜보았다.
“삼쫀, 삼쫀 뭐 해?”
“삼쫀, 우리 다랑지 용사 놀이 하자.”
어느덧 사이가 좋아진 아이들이 다시 그에게로 몰려들었다.
“리아가 다람찌 용싸 할 꺼야!”
“에르는 공준님 할 거야! 삼쫀은 두래고(드래곤)야!”
“쪼아! 다람찌 용싸는 뚜래고랑 결혼해!”
“아니야, 다랑지 욘싸는 공준님이랑 결혼해야지!”
“하찌만 이고 봐 봐. 뚜래고가 공준님보다 더 이쁜걸? 그쵸, 삼쫀?”
에른스트는 행복한 시달림 속에서 조금 전의 기이한 기분은 지워 내고 빙긋 웃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3대 가문에게 마물 토벌령이 하달되었다.
체르니시아도 당연 예외는 아니었다.
애당초 체르니시아가 복권할 수 있었던 계기가 범람한 마물들 때문이었기에, 나는 가주로서의 임무를 다하기 위해 토벌에 임해야 했다.
수도 북쪽에 위치한 리펠 숲 앞에 토벌을 위한 인원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이브.”
말 위에 올라타 있던 벤야민이 나를 보고 다가왔다.
얼마 전, 체르니시아 저택을 방문한 벤야민이 내게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이브?]
[미안해, 벤야민. 그동안 네게 숨겼어. 사실 난 체르니시아의…….]
[그걸 묻는 게 아니잖아!]
벤야민은 내가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보다, 내가 알브레히트로 돌아왔다는 사실에 더욱 예민하게 반응했다.
[왜 돌아온 거야?]
[어쩔 수 없었어. 이미 황제에게 들켰으니까.]
[그럼 도망을 갔어야지!]
벤야민이 그렇게 흥분한 것은 처음 보았다.
[말했잖아. 체르니시아가 내 이름이라고. 가족을 다시 만나고 가문을 복권할 기회인데, 놓칠 수 없었어.]
[하지만……!]
[충분히 많이 생각하고 내린 결정이야.]
이에 한참을 말이 없던 벤야민이 어둑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에르와 리아가 왜?]
[그 애들의 친부가…….]
[에르와 리아는 체르니시아의 아이야.]
딱 잘라 말하자, 벤야민 또한 더는 말을 보태지 않았다.
아무튼 그때 이후로 처음 보는 벤야민이었다.
벤야민은 챙이 없는 푸른 베레모와 페르디난트의 문양이 그려진 청색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격식 있게 갖춰 입은 그의 모습은 처음이라 다소 생경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또한 마찬가지였는지, 체르니시아의 정복을 차려입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젠 정말…… 빼도 박도 못하겠네.”
“응?”
“그냥, 누가 봐도 체르니시아라고.”
뜻 모를 벤야민의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칭찬으로 받아들일게.”
벤야민과 소소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노라니, 멀찍이서 나를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셀린느 레오브란테였다.
나는 브리안 오빠의 약혼녀인 그 여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셀린느가 아니었더라면 브리안은 살아남지 못했을 테고, 체르니시아가 이렇게 다시 일어나는 것도 불가했겠지.
설사 가능했다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셀린느 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 가주로서 마땅히 해야 할 감사 인사를 표했다.
“브리안 오빠에게 셀린느 님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브리안 오빠를 보호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이보네 님.”
그러자 그녀가 온화하게 웃으며 화답했다.
셀린느는 테오도르처럼 금색 눈동자를 지녔다. 에르빈의 눈동자와도 닮았다.
“그나저나 이보네 님은 브리안과 정말 닮았군요.”
셀린느가 신기해하며 건넨 말에 나는 짧게 웃으며 대꾸했다.
“어렸을 때도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아주 오래전에는 브리안과 닮았다는 말이 치가 떨리게 싫었던 적이 있었다.
이건 나뿐만 아니라 누구나 비슷한 반응이었을 것이다.
짓궂은 남혈육과 닮았다는 말에 기뻐할 여동생은 세상 어디에도 없을 테니까.
숲의 입구에는 기사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나 마물을 토벌하는 것은 결국 3대 가문의 가주들의 몫이 될 터였다.
장갑을 바로 끼고 허리에 찬 검을 한 번 더 들여다볼 때였다.
웅성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멀리서 요란하게 등장하는 한 남자가 보였다.
차츰 가까워지는 인영에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공작새처럼 휘황찬란하게 단장한 테오도르가 검은 말을 타고서 친히 이곳에 나타났다.
‘뭐야? 오늘 테오도르가 온다는 말은 없었잖아.’
나는 당황하여 벤야민과 셀린느를 쳐다보았다.
그들 또한 테오도르의 행차를 듣지 못했는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황제로서 마땅히 제국민의 안녕을 지키기 위해 왔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테오도르는 거만하게 턱 끝을 치켜들며 말했다.
유독 화려하게 치장을 한 탓에 그렇지 않아도 잘생긴 얼굴이 번쩍번쩍했다.
‘언제부터 그렇게 성군이었다고.’
황당하다는 듯한 시선이 테오도르에게 모였다.
아마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중일 것이다.
“2인 1조로 움직이는 게 좋겠군.”
테오도르는 멋대로 벤야민과 셀린느를 한 조로 몰고, 나와 자신을 한 조로 묶었다.
황제가 그렇게 하라는데 감히 나서서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체르니시아의 가주로 서기로 결심한 이상 그와 공적으로 부딪치는 건 막을 수 없다는 것을 각오했기에, 나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테오도르와 말 머리를 나란히 하고서 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다지 걱정되지는 않았다. 아르벨라에서 이미 한 번 마물들을 상대해 본 적이 있었으니까.
“이브.”
“…….”
테오도르가 내게 말을 붙여 왔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홰액!
그러나 나는 그의 부름을 무시하고 말의 고삐를 당겼다.
“단단히, 화가 났네…….”
그가 피식 웃으며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오도르는 내가 제게 화가 난 거라고 믿고 싶은 듯했다.
정작 나는 그에게 쏟는 감정이라면 이제 화를 내는 것조차도 아까운데.
“이브, 내 이야기를 한 번만…….”
뒤늦게 그가 나를 쫓아오며 말하던 때였다.
꾸에엑-?
반대편 수풀 너머에서 마물 한 마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곧바로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잠깐, 위험……!”
그러고는 테오도르가 나를 붙잡을 새도 없이, 허공으로 도약하며 마물에게 달려들었다.
푸욱-!
푸른 검기를 두른 검 끝이 마물의 몸을 꿰뚫었다.
꾸웨에에에에에엑!
마물은 듣기 싫은 비명을 내지르며 죽어 갔다.
그 소리에 숲의 소란을 알아챈 마물의 동료들이 하나, 둘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칫.’
나는 마물의 몸에 박아 넣었던 검을 뽑아내며, 몰려드는 마물들을 향해 검을 고쳐 잡았다.
이때였다.
후우웅-
갑자기 사방에서 황금색 빛무리가 여기저기 피어나더니, 서서히 단검의 형태로 변모해 갔다.
숲을 에워싼 여러 개의 빛의 검이 날카롭게 번뜩이며 마물들을 모조리 죽여 버릴 기세로 날아들었다.
쿠과과과과과과광-!
무시무시한 굉음과 함께 돌풍이 불었다.
내 몸마저 휩쓸릴 것 같은 기세에, 나는 흙바닥 위로 검을 박으며 간신히 버텼다.
“이브!”
테오도르가 뒤편에서 나를 끌어안으며 붙잡았다.
“괜찮아?”
창백한 얼굴을 한 테오도르가 내게 물었다.
나는 곧바로 그의 손을 쳐 냈다.
“사사로운 접촉은 불편합니다, 폐하.”
“아…….”
그의 손이 힘없이 떨어져 나갔다.
나는 가만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의 공격에 휩쓸린 마물들의 시체가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바닥이 갈라지고 숲이 파괴되어 있었다.
그 놀라운 위력에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새삼 칼리고르 왕성에서 마주쳤을 때, 그가 봐준 것이란 걸 깨달았다.
“미안해, 이브.”
테오도르가 조심스럽게 다시 내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저 미친 것들이 연약한 널…….”
“연약하다니요.”
나는 우물우물 변명하는 테오도르의 말을 끊으며 차갑게 대꾸했다.
“실례되는 말씀을. 저는 폐하께서 친히 임명한 알브레히트의 가장 날카로운 검이 아닙니까.”
“으응, 맞아.”
테오도르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느슨하게 눈매를 휘며 웃었다.
“하지만 넌 내게 늘 지켜 주고 싶은 사람인걸.”
“퍽이나요.”
그 애틋한 속삭임에 나는 헛웃음을 흘렸다.
“폐하께서 지키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잖아요.”
“……?”
“수년 전 페르디난트가의 약혼녀와 혼전 임신까지 했다고 알고 있는데.”
“어……?”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싸아악 가셨다.
“폐하께서 줄곧 제게 부르시던 이름, 이브. 그 사람이 궁금해서 나름의 조사를 해 봤는데요.”
나는 부러 나와 이브를 분리하며 말했다.
내가 이브 로웰린과 동일 인물이라는 걸 나도 알고 테오도르도 알기에, 이것은 그저 고약한 말장난이었다.
“폐하의 명으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그 여자를 지키려다 죽었다면서요. 폐하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폐하의 약혼녀요.”
“…….”
내가 카타리나의 이름을 직접적으로 언급할 줄은 몰랐던지, 테오도르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입술만 달싹였다.
“이브라는 그 사람, 폐하의 측근 호위였다면서. 측근 호위까지 내어 주어 지켜 주고 싶을 만큼 폐하께 소중했던 사람은 따로 있지 않나요?”
“이브, 잠깐만.”
그가 다소 창백한 표정으로 내 말을 끊으며 변명을 하려고 했다.
“그건 오해가…….”
“그러니 저는 지켜 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나는 내가 할 말만 마친 후 곧바로 몸을 돌렸다.
숲에 남은 마물들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변을 살필 때였다.
“이브, 이브.”
테오도르가 내 뒤에 따라붙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내 말 좀 한 번만 들어 줘 봐. 사실은…….”
순간 그를 향해 불퉁한 마음이 치솟았다.
과거, 기억을 잃었던 그에게 내가 잠시만 대화를 하자고, 조금만 시간을 내어 달라 했을 때.
그는 어떻게 행동했었나.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위를 물려 주신다면…….]
[당장, 나가!]
화를 내며 쫓아냈다.
[폐하.]
[어디서 개가 짖는군. 개 소리가 들리지 않나, 아르민?]
[폐…….]
[정무 회의 시간이군. 가지.]
무시하고 외면했다.
[폐하, 제가 드릴 게 있습니다.]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따위를.]
심지어는 내가 꾹꾹 눌러쓴 편지를 찢고 태워 버렸다. 내 눈앞에서.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마다 그 빌어먹을 두통이 밀려오는 것은 차치하고서라도, 그는 내 말을 전혀 들어 주지 않고 모든 대화를 단절했다.
그런데 왜 나는, 그의 변명을 들어 줘야 하는 거지?
설사 우리 사이에 어떤 오해가 있다 할지라도, 내가 왜 그걸 풀어야 하는 거야?
애초에 나와의 관계를 파탄 낸 것은 그가 아닌가?
“네가 잘못 알고 있는 게 있…….”
나는 주절주절 변명하려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내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싸늘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테오도르.”
“……!”
내내 폐하라 칭하며 모른 척하던 내가 이름을 부르자, 그가 퍽 놀란 표정으로 굳었다.
“내가 이야기 한 번만 하자고 했을 때.”
그때를 떠올리며 차갑게 물었다.
“넌 어떻게 했었어?”
순간 테오도르가 말을 잃고 멍한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
나는 그를 향해 피식, 차가운 조소를 터뜨렸다.
“사적인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습니다. 이곳엔 더 이상 마물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군요. 먼저 이동하겠습니다, 폐하.”
나는 그를 두고서 홀로 자리를 벗어났다.
그는 떠나는 나를 붙잡지 못했다.
숲 가장자리로 말을 몰던 나는 셀린느와 벤야민을 발견했다.
“이쪽 상황은 어때요?”
“딱히 우리가 할 것도 없겠어요. 폐하의 성력이 여기까지 미쳐서…….”
셀린느가 갈라진 바닥과 나뒹구는 마물들의 사체를 힐긋 가리키며 말했다
“이렇게 공격적인 성력은 처음이에요. 이게 어떻게 신성력이라고 불릴 수 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요?”
“신성력은 본래 사람을 치유하는 힘이에요. 마물을 죽일 수 있는 것도, 그것들이 사람을 해치는 신성하지 못한 존재이기 때문이지요.”
셀린느가 빛으로 만들어진 긴 창을 내게 보이더니, 마물의 사체를 향해 던졌다.
그녀의 창이 마물의 사체를 통과하고 땅에 박혔다.
검은 사체는 흔적도 없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보세요.”
셀린느는 창을 다시 뽑으며 설명했다.
“멀쩡하죠?”
그녀의 창이 박혀 있던 흙바닥에는 작은 자국 하나 남지 않아 있었다.
“어떻게……?”
“치유의 힘이니까요.”
“아…….”
나는 나직이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 전 숲 안쪽에서 보았던 테오도르의 공격에 갈라졌던 대지를 떠올렸다.
그가 보인 파괴적인 기술들은…… 어떻게 보아도 생명을 치유하는 힘은 아닌 것처럼 보였다.
“성력도 주인을 닮아 괴팍한 거 같지요? 솔직히 폐하와 ‘치유’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잖아요.”
셀린느가 목소리를 슬쩍 낮추며 우리에게 동의를 구했다.
나와 벤야민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푸릇한 녹음으로 물든 정원.
세 살에서 네 살가량의 아주 자그마한 아이 둘.
[이고 바, 에르! 리아가 또 불 뿜어써!]
아이의 자그마한 손끝 위로 화르르 불꽃이 피어났다.
[우아, 리아 멋있어!]
옆에서 다른 아이가 엄지를 치켜들며 외쳤다.
까르륵,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번뜩!
고요히 감겨 있던 눈꺼풀이 들렸다.
선혈처럼 붉은 눈동자에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비쳤다.
[어, 어어어? 에르, 부, 불이……!]
돌연 여자아이의 손끝에 피어나 있던 불꽃이 보다 거세게 피어오르는가 싶더니, 선연한 붉은빛이 온 세상을 뒤덮었다.
[리아! 위험해!]
[으아앙, 에르……!]
놀란 아이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번져 나가는 순간.
‘찾았다.’
남자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나의 제물.’
저 여자아이가, 저를 깨울 제물이 될 것이라는 걸.
짙은 희열감이 남자의 얼굴 위로 번져 나갔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테오도르는 뻐근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하…….”
괴로운 숨이 잇새로 터져 나왔다.
돌아온 이브는 조금도 제 이야기를 들어 주지 않으려 했다.
매번 찾아갈 때마다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며 박대를 하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저택에 있는 걸 뻔히 아는데도 없는 척을 하기 시작했다.
울컥 문을 깨부수고 쳐들어가 그녀에게 내 말 좀 들어 달라 외치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테오도르는 대단한 인내심을 발휘하여 참아 냈다.
그렇게 했다간…… 가뜩이나 그녀에게 미움받는 중인데, 그녀가 저를 더 싫어하게 될지도 모른다.
평생 타인에게 미움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던 테오도르답지 않은 굉장한 인내였다.
얼핏 정상적으로 보이는 외견과 달리, 그가 반쯤 미쳐 있다는 사실은 측근인 아르민과 린든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래도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보네 님을 다시 만나기 전까진 한 바퀴 돌아 계셨는데, 지금은 반 바퀴만 돌아 계시지 않습니까? 아, 우리 폐하 말입니다.]
테오도르의 두 측근은 종종 그런 대화를 나누었으나, 테오도르는 그들의 불경함을 벌할 정신마저 없었다.
온 정신이 어떻게 해야 이브에게 해명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곰곰이 고민하던 테오도르는 불필요한 마물 토벌령을 내렸다.
조금도 제게 얼굴을 보여 주지 않는 그녀를 저택 밖으로 끌어내려는 나름의 계책이었다.
이번 토벌을 빌미 삼아 어떻게든 그녀와 대화를 하고자 했다.
카타리나와의 일들이 모두 거짓이고 잘못된 오해라는 것을 해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부러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휘황찬란하게 단장을 하고서 나타났다.
오래전의 이브는…… 제 잘생긴 얼굴을 참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러나 그녀가 차가운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을 때.
[내가 이야기 한 번만 하자고 했을 때. 넌 어떻게 했었어?]
테오도르는 제게 해명의 자격조차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최악이네…….”
마땅히 탓할 상대 또한 없었다.
모든 일을 자초한 건 저 자신이었으니까.
“넌 정말 최악인 새끼야, 테오도르.”
거칠어진 손바닥으로 마른세수를 하던 그의 눈에 문득 책상 위에 올려 둔 검은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새카만 유리판에 비친 제 얼굴이 꼴도 보기 싫다고 느껴졌다.
더 이상 이브에게 사랑받지도 못하는 이 얼굴 따위, 치워 버리고 싶다고 느낀 순간.
오딜리아의 얼굴이 그 위로 슬쩍 겹쳐 떠올랐다.
“아, 오딜리아……!”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거울 위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손끝이 거울 위로 닿는 동시에, 그의 몸이 스르륵 사라졌다.
조금 뒤.
집무실 구석에 놓인 서랍장 안, 오랫동안 들여다보지 않아 먼지 쌓인 나무 상자 속.
그 안에 있던 작은 수정구가 짤랑짤랑 소리를 내며 새까맣게 변했다.
[흑마법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오래전 카타리나가 이브를 통해 그에게 전달했던, 바로 그 수정구였다.
그러나 이미 거울을 통해 시공의 공간으로 넘어간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 * *
테오도르는 오딜리아를 향해 인사했다.
“안녕.”
쭈그려 앉아 흙바닥 위로 낙서를 하던 오딜리아가 힐끔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이브의 것과 꼭 닮은 그 싱그러운 녹안 위로 테오도르의 얼굴이 비쳤다.
처음 체르니시아 저택에 방문하였다가 쫓겨나다시피 나온 직후, 테오도르는 아르민에게 그녀의 아이들에 대해 조사하라 시켰다.
에르빈 체르니시아.
그리고 오딜리아 체르니시아.
그녀의 성을 물려받은 그녀의 아이들은 서너 살가량의 나이로 추정된다고 했다.
‘어쩌면.’
그녀는 아니라고 했지만, 테오도르는 확신했다.
그녀를 닮은 그녀의 아이들이, 제 아이가 아닐 리 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니 아이가 훨씬 더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두근, 두근, 쿵, 쿵, 쿵-!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테오도르는 자신보다 한참이나 작은 아이를 애틋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아이는 제가 먼저 인사를 건넸음에도, ‘잘샌긴 아조씨, 안넝?’ 하고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두 눈만 끔뻑거렸다.
이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갸웃하며 아이를 불렀다.
“리아?”
그 순간 내내 테오도르를 올려다보던 아이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조리 가, 지지야!”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에게 손을 휘휘 저으며 무서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기 드래곤처럼 험상궂게 올라간 눈꼬리와 다람쥐 용사처럼 앙다문 역삼각형 형태의 입매가 귀엽기 그지없었다.
“잘샌긴 아조씨 지지. 드러워.”
“지지?”
“웅, 지지. 쓰레기. 드러워요.”
“…….”
테오도르는 잠시 침묵하더니, 천천히 몸을 쭈그려 아이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그런 나쁜 말은 누가 알려 줬지?”
“이거 나뿐 말이야?”
오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럴 적에 오딜리아의 고개 각도는 조금 전 테오도르가 고개를 갸웃했을 때와 한 치의 차이도 없이 일치했다.
비록 두 사람은 인지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어몬니가 알려 준 건데…….”
“네 어머니? 이브?”
“어몬니가 아조씨 지지랬어. 아조씨 드럽댔어.”
“아……!”
나직한 탄성과 함께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기쁜 기색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브가 내 이야기를 했다고?”
“웅, 드럽고 지지라고 했어.”
“이브가…… 날 계속 생각하고 있었어.”
황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테오도르를, 오딜리아는 이상한 사람 보듯 보았다.
“……아조씨 쫌 이상한 사람 같아.”
“이브가, 날 계속…….”
오딜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쨔 이상한 사람이야…….”
테오도르는 한참 동안 자신의 감정에 취해 있었다.
오딜리아는 그를 내버려 두고서 흙바닥 위에 나뭇가지로 그림을 죽죽 그렸다.
커다란 동그라미 밑에 팔다리처럼 생긴 것이 달려 있었다.
“이건 누구지?”
어느새 오딜리아의 옆에 나란히 앉은 테오도르가 아이의 낙서를 가리키며 물었다.
“이고 어몬니, 에르, 리아야.”
오딜리아는 커다란 동그라미 세 개를 하나씩 짚으며 말했다.
그 옆에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네모난 무언가가 하나 더 그려져 있었다.
테오도르가 이번엔 네모난 것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이건? 난가?”
“……?”
오딜리아는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한 눈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거 다람찌 욘싼데…….”
“흠?”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자세히 보니 네모난 형체 뒤로 구불구불한 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것이 다람쥐의 꼬리인가 보다.
피식.
테오도르는 짧게 웃으며 다리를 쭉 펴고 앉았다.
그렇게 앉으면 바지가 더러워질 테지만,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대신 이제는 익숙해진 공간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한동안 바빠서 거울에 대해 조사하지 못했군.’
본래 황궁으로 돌아오면 제일 먼저 그 수상쩍은 검은 거울에 대해 알아보려고 했었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이브가 제 앞에 나타나며 온 정신을 빼앗기는 바람에, 거울에 대한 조사를 잠시 멈춘 터였다.
테오도르는 오딜리아를 힐끔 쳐다보았다.
저를 이 공간으로 끌어들인 매개는 그 저주받은 흉물처럼 생긴 검은 거울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오딜리아는 어떻게 된 거지?
“넌 어쩌다 이곳에 오게 된 거지?”
“몬라(몰라). 리아 에르랑 다람찌 연습하고 있었는데 여기로 왔어.”
“다람쥐 연습?”
“웅, 리아는 불 뿜는 다람찌니까.”
“그렇군.”
테오도르는 직전에 오딜리아와 이곳에서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오딜리아는 스스로가 불도 뿜고 하늘도 나는 다람쥐라고 했었다.
“구론데 리아가 실수로 정원을 태워 버려써.”
‘불장난이라도 한 건가?’
테오도르가 그 말뜻을 이해하려고 콧잔등을 찌푸리는 찰나, 오딜리아가 침울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어몬니가 오시면 화내실 거야. 리아가 정원 망가뜨려서.”
“오시면? 이브가 저택에 돌아오지 않았나?”
마물 토벌은 한참 전에 끝마쳤다. 지금쯤이면 저택에 돌아가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어몬니 개물(괴물) 때려잡꾸 친구 만나러 가셨어.”
“친구……?”
이브에게는 친구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몇 안 되는 친구들은 모두 그가 죽이고 싶은 자들이었다.
“웅, 삼쫀. 베냐민 삼쫀.”
그 이름을 듣는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자가 왜 네 삼촌이지?”
테오도르가 따지듯이 묻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삼쫀 맞눈데?”
오딜리아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설명했다.
“리아 삼쫀 세 명 있어. 베냐민 삼쫀, 에룽쑤뚜 삼쫀, 브리앙 삼쫀.”
“삼촌은 네 부모의 형제들에게나 쓰는 말이야. 에른스트와 브리안은 삼촌이라 불러도 좋지만, 벤야민 그자는 그냥 아저씨라고 불러.”
“우웅? 베냐민 아조씨?”
“……아니. 아저씨라는 칭호도 아깝군. 그냥 부르지 마.”
“구롬 베냐민 삼쫀이랑 말하구 싶을 땐 어캐(어떡해)?”
“그놈이랑 말을 섞을 이유가 뭐지?”
“리아는 베냐민 삼쫀 조은데…….”
오딜리아가 입술을 삐죽였다. 이에 테오도르가 피식 웃으며 물었다.
“그럼, 나는?”
“아조씨? 으음…….”
한참 고민하던 오딜리아는 이내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아조씨는 잘샌겨써. 구래서 조아. 어몬니가 잘샌긴 아조씨 지지라구 했는데. 구래도 조아. 지지지만 리아가 조아해 주께.”
“…….”
두 눈을 사르르 휘며 웃는 오딜리아는 그가 기억하는 이브의 웃는 얼굴과 참 많이 닮아 있었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오딜리아의 웃는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는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럼, 나도 그려 줘.”
“웅?”
“그림. 여기에.”
테오도르가 낙서가 죽죽 그려진 흙바닥을 툭툭 치며 말했다.
“구래!”
오딜리아는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그마한 손이 꾸물꾸물 움직이며 흙바닥 위로 그림을 그렸다.
유독 큰 동그라미 밑에 팔과 다리처럼 생긴 것을 죽죽 그렸다.
“요기! 리아가 그렸어! 지지 아조씨!”
그 옆에서 턱을 괸 채 잠잠히 지켜보던 테오도르가 굴러다니는 나뭇가지 하나를 들었다.
그러고는 오딜리아가 그린 자신과 이보네, 오딜리아, 에르빈을 커다란 하트 모양으로 묶었다.
“흠, 이렇게 하니 한결 보기 좋군.”
“이게 뭐야?”
“우리가 가족이라는 증거.”
“가족?”
오딜리아는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고개를 갸웃했다.
“지지 아조씨 왜 리아랑 가족이야?”
그러나 테오도르는 자세한 설명 대신 그저 흐뭇하게 웃을 뿐이었다.
* * *
페르디난트 저택에는 모처럼 손님이 찾아왔다.
3대 가문의 새 가주가 되었다는 여자, 이보네 체르니시아였다.
‘어머, 저 여자는……!’
몇몇 눈썰미 좋은 사용인들은 그녀가 4년 전 벤야민이 데려왔던 손님과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러니까 만삭인 채로 페르디난트 저택에 돌아와 모두를 놀라게 하였다가, 얼마 뒤 다시 저택을 떠났던 그 의문의 여인 말이다.
‘세상에, 그때 그 여자가 체르니시아의…….’
‘그럼 체르니시아의 가주와 우리 주인님이…….’
사용인들은 저희끼리 이보네와 벤야민의 관계를 추측하며 숙덕거렸다.
한편 벤야민은 그런 사용인들을 단속할 생각도 하지 못할 만큼 마음이 조급하다.
이브가 돌아와 버렸다.
빼도 박도 못하게 알브레히트로,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되어.
그녀가 저와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은 기쁜 일이었으나, 그녀가 본래의 이름을 되찾은 것은 그가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벤야민은 그녀가 제게 의지하길 바랐다.
그래서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키고 제가 쌓아 올린 성탑 안에 가두고자 하였으나, 그녀를 제게서 앗아 간 황제 때문에 모두 망가지고 말았다.
간신히 황제와 그녀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들었지만 그녀는 이제 자신의 이름을 되찾았으며, 그녀의 주위에는 제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생겼다.
벤야민은 그 사실이 끔찍하리만치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를 가장 불안하게 만드는 건…….
‘테오도르 황제.’
그 남자가 쌍둥이의 생부라는 사실이었다.
카타리나, 그 멍청한 여자의 술식이 깨지면서 황제의 기억이 모두 돌아와 버렸다.
그리고 아마 지금쯤 황제는 이브의 두 아이들의 존재에 대해서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 아이라는 걸 알아봤을까?’
이브는 아이들을 체르니시아의 아이로 키우겠다고 했다.
그러나 황제가 조금만 생각을 더듬으면, 제 아이일 가능성을 발견할 것이다.
물론 이브가 황제를 맹렬히 거부하고 있으니 쉽게 어쩌지 못하겠지만…….
‘황제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잖아.’
벤야민은 그간 제가 보아 온 황제의 기행을 떠올리며 입 안의 여린 살을 꾸욱 깨물었다.
그간 황제가 벌인 정상적이지 않은 일들이 하나씩 생각이 났다.
5년 전 이브를 제게서 뺏어 가기 위해 카타리나의 목에 칼을 들이밀어 협박했던 것.
이브가 죽은 뒤 저택에 난입해서 저질렀던 미친 짓들.
그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이번에도 그러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는데.’
그러나 그의 불안과 달리, 정작 이브는 태평한 표정으로 차를 홀짝이고 있었다.
벤야민을 그녀를 가만히 보다가 불쑥 말했다.
“나, 이제 알아. 다람쥐 용사 젤리코.”
“젤리코가 아니라 제리코야.”
이브는 여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무튼.”
벤야민이 막 이제 나도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자격이 생긴 게 아니냐고 물으려던 때였다.
“가주님! 가주님!”
저택의 하인 하나가 헐레벌떡 벤야민에게 뛰어와 외쳤다.
“카, 카타리나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4년 전에 실종되셨다는 카타리나 아가씨 말입니다! 본인이 카타리나 아가씨라고 주장하는 여자가 저택을 찾아왔습니다!”
“그게 무슨…….”
갑작스러운 소식에 벤야민은 허락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온 하인을 탓할 생각도 못 한 채 멍하니 되물었다.
그러나 하인이 들고 온 놀라운 소식은 그뿐이 아니었다.
“그, 그리고……! 그리고……!”
하인은 숨이 넘어갈 듯한 목소리로 쩌렁쩌렁 소리쳤다.
“테오도르 황제의 아이와 함께 돌아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