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자의 인성이 조금 이상하다-7화 (7/14)

07. 체르니시아의 생존자

호수 저택으로 돌아온 직후로 기분이 몹시 저조해졌다.

테오도르를 피해 도망치느라 얼결에 프레데릭 왕자를 저택까지 데리고 왔으나, 약속한 삼십억 골드를 받아 낼 방도가 없어진 것이다.

‘마도사는 그렇게 되었고…….’

나는 잠시간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던 남자를 떠올리다가, 이내 몸을 부르르 떨며 고개를 저었다.

차마 그 남자까지 데리고 도망치지는 못했다.

평범한 상대였다면 모를까, 테오도르를 앞에 두고 그런 한가한 시도를 했다간 나도 분명 같은 꼴이 되어 나뒹굴었을 것이다.

[안녕, 쥐새끼야.]

여전히 인성 더럽고 말버릇 나쁜 건 똑같았다.

‘잡으면 죽여 버릴 기세였지.’

나를 공격하던 그 으스스한 눈빛을 떠올리자 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으으, 생각하지 말자…….’

나는 테오도르에 대한 생각을 잠시 밀어 넣고, 나의 삼십억 골드만을 생각하기로 했다.

프레데릭 또한 자기네 사람들과 연락할 방도를 모른다고 했다.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나는 일단 삼십억 골드를 받아 낼 때까지 그를 호수 저택에 붙잡아 두기로 했다.

일종의 담보인 셈이다.

테오도르와 맞닥뜨리기까지 하며 벌인 일이었는데,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화가 날 것 같았다.

‘그 마도사, 아르벨라 영주의 소개로 날 찾았다고 했었지.’

영주성에는 편지를 보내 둔 참이었다.

혹시 몰라 자세한 내용을 적을 수 없었기에, 일단 답장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래도 오늘이면 테오도르가 떠나니까.’

그나마 그가 곧 떠날 것이라는 사실이 나를 안도하게 해 주었다.

칼리고르 점령을 마지막으로, 알브레히트 제국군이 오늘 서쪽 대륙을 떠날 것이라 들었다.

지난밤 무리하게 왕자를 구출한 것도 그들이 왕자를 데리고 떠나기 전에 일을 진행하고자 하였던 탓이다.

‘제국군이 떠나가고 나면 안전해지겠지.”

그런데 다행이라 여기면서도 묘하게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왜지.’

불쑥 드는 의문을 무시하려던 때였다.

“어모니, 연습 다 했어요.”

에르빈이 나를 향해 쪼르르 다가왔다.

에르빈의 옆구리에는 아기 팔뚝처럼 자그마한 청동검이 들려 있었다.

네다섯 살쯤 되는 아이들이 사용하는 속이 텅 빈 가짜 검이었는데, 에르빈은 아직 세 살이었음에도 무리 없이 검을 들고 휘둘렀다.

“그래, 확인해 볼까?”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일어났다.

그러자 에르빈이 내 앞에서 양손으로 검을 붙잡고서 붕붕 휘둘렀다.

“얍!”

부웅-

“얍얍!”

붕- 붕-

“야아압!”

부우웅-

다소 엉성하지만 알려 준 대로 자세를 잡고 검을 휘두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심장에 해로울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굉장해, 에르. 열심히 연습했구나. 기특해라.”

“헤헤.”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해 주자, 에르빈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접으며 웃었다.

“어몬니! 리아도 연씁 다 했어요!”

에르빈의 머리에서 손을 떼고 소리가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오딜리아가 두 팔을 파닥거리고 있었다.

“리아도 기트캐(기특해) 해 줘요.”

오딜리아는 유아용 가짜 검을 붕붕 휘두르는 에르빈의 옆에서 하늘을 나는 법과 불 뿜는 법을 연습했다. 아주 열심히…….

“보세요. 리아 이러캐(이렇게) 파닥파닥하면…….”

오딜리아가 두 팔을 마치 드래곤의 날개처럼 파닥거리며 깡충 뛰었다.

그러자 오딜리아의 발끝이 아이들의 손 한 뼘만큼 뛰어올랐다가 다시 지면으로 내려앉았다.

“리아, 이만큼 날았어.”

옆에서 에르빈이 손가락을 쫘악 뻗어 한 뼘만큼을 표시하며 말했다.

“웅웅! 리아 날았어!”

그러자 신이 난 오딜리아가 두 팔을 활짝 펴며 방방 뛰었다.

“더 연습하면 이만큼, 요만큼, 요마아아아안큼 나를 거예요.”

그 앙증맞은 모습에 나는 쿡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래, 우리 리아도 참 기특하네.”

머리카락을 슬슬 쓰다듬어 주자, 오딜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두 눈을 접었다.

“헤헤.”

저렇게 웃을 때마다 초승달 모양으로 접히는 눈매를 보면 두 아이가 쌍둥이라는 게 실감이 났다.

“그런데 리아, 불 뿜는 연습은 잘되고 있니?”

오딜리아가 드래곤 브레스를 뿜겠다며 ‘뿌우우-’ 하고 외치던 게 생각이 나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오딜리아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왔다.

“리아, 불 뿌모야는데(뿜어야 하는데) 잘 안 돼요.”

“당연하지, 리아. 어머니는 아직 한 번도 불을 뿜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걸.”

키득키득 웃으며 비죽 튀어나온 오딜리아의 통통한 입술을 꾸욱 눌러 주었다.

그러자 오딜리아는 돌연 두 주먹을 불끈 쥐며 씩씩하게 외쳤다.

“구럼 리아가 채초(최초)의 사람 될 거예요!”

“채초? 채초가 뭐야?”

오딜리아의 입에서 나온 어려운 낱말에 옆에서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에르, 채초 몬라(몰라)?”

“몬라.”

“것도 모루구 애기네.(그것도 모르고 애기네.)”

오딜리아가 턱 끝을 거만하게 젖히며 설명했다.

“채초는…… 다람찌 용싸 같은 거야. 젤리꼬가 쩰루(제일) 먼저 뚜래고 죽였어.”

“우웅?”

“구래서 젤리꼬 채초의 용싸야.”

“구럼 리아가 젤리꼬야?”

“웅! 구런 고야!”

에르빈에게 완벽한 설명을 마친 오딜리아가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동자는 ‘기트캐 또 해 조요.’ 하는 눈이었다.

“우와! 우리 리아, 정말 기특해. 그렇게 어려운 말도 알고.”

나는 아이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어 아이의 바람대로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리아가 ‘꺄아-’ 하며 두 눈을 접었다.

‘아, 행복해.’

사랑스럽게 웃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보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한 행복감이 물씬 차올랐다.

역시 나는 이 평화가 너무나 소중했다.

이 평화를 지켜야만 했다.

“주인님, 영주성에서 편지가 왔어요!”

이때, 로라가 나를 찾는 소리가 건물 안쪽에서 들려왔다.

내가 줄곧 기다리던 소식이기도 했다.

이보네가 잠시 자리를 뜨고 에르빈과 오딜리아, 둘만 남았다.

그러나 두 아이는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도 울지 않았다.

태어나면서부터 노닐었던 호수 저택의 정원은 두 아이들에게 가장 친숙한 놀이 공간이었다.

에르빈은 씩씩하게 다시 검술 연습을 했다.

그리고 오딜리아 또한 씩씩하게 불 뿜는 연습을 했다.

“아이참, 왜 잘 안 되지.”

아무리 ‘뿌우우-’ 하고 불 뿜는 시늉을 해 보아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딜리아가 포기하지 않고 연습을 이어 가던 때였다.

“어어?”

순간 오딜리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그녀의 손끝에서 피어난 자그마한 불꽃이 들고 있던 나뭇잎을 태우다가 금세 사그라들었다.

“에르! 에르!”

오딜리아는 신기해하며 반쯤 탄 나뭇잎을 들고서 에르빈에게 뛰어갔다.

“이거 봐, 에르! 리아가 성공해써!”

“어? 이고 리아가 한 거야?”

“웅웅! 봐 봐. 리아 불 뿜는 거 보여 주께.”

오딜리아는 에르빈에게 보여 주기 위해 다시 한번 불 뿜는 시늉을 했다.

그러나 조금 전의 일은 마치 우연이었던 듯, 아무리 낑낑거려 보아도 아주 작은 불꽃 하나 만들어 낼 수 없었다.

“이상하네. 좀 전에 요기서 뚜래고 부레쓰(드래곤 브레스) 뿌우우 핸눈데…….”

오딜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리아 불 뿜는 거 몬타네(못하네).”

“아냐! 좀 전에 리아가 지쨔루 뿜었어!”

거짓말쟁이가 된 것 같은 기분에 오딜리아는 울상이 되었다.

“지쨘데(진짠데)…….”

오딜리아는 침울해진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그러나 에르빈은 그녀가 정말로 불을 뿜었는지보다는 다른 것에 신경이 쓰였다.

“구론데 리아, 요기 다쳤어?”

오딜리아의 앞에 쭈그려 앉은 에르빈이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그녀의 무릎을 가리키며 물었다.

오딜리아의 무릎에는 작은 상처가 나 있었다.

조금 전 하늘을 날겠다고 껑충껑충 뛰다가 다친 곳이었다.

“웅. 하눌 나는 고 연습하다가.”

“리아, 아푸겠다.”

에르빈이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조심스럽게 물었다.

“에르가 호 해 주까?”

“호?”

“호 하몬 나아. 로라가 안녀 조써.(호 하면 나아. 로라가 알려 줬어.)”

오딜리아는 두 눈을 끔뻑이며 에르빈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승낙의 뜻으로 알아들은 에르빈이 자그마한 입술을 모아 오딜리아의 상처 위로 ‘호-’ 하고 바람을 불었다.

간질간질한 숨결이 오딜리아의 무릎을 스치는가 싶더니, 이내 붉은 상처가 흔적 없이 사라졌다.

“……!”

그것을 본 에르빈이 토끼처럼 깜짝 놀란 얼굴로 고개를 벌떡 들었다.

“리아! 봐써?”

“우아! 에르가 호 해 줘서 리아 다 나았어!”

오딜리아는 꺄아- 하며 에르빈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에르 채고(최고)야! 사랑해, 에르!”

그러고는 에르빈의 뺨에 쪽- 하고 뽀뽀를 해 주었다.

조금 전까지 놀라 눈만 끔뻑이던 에르빈은 금세 배시시 웃으며 입꼬리를 히죽히죽 끌어당겼다.

“헤헤.”

헤실헤실 웃는 에르빈에게 오딜리아가 정원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에르! 우리 인제 조기 가서 놀자!”

“모 하구?”

“다람찌 용싸 놀이 하쟈! 리아가 젤리꼬 할래!”

오딜리아는 신이 나 폴짝폴짝 뛰어갔다.

“에르도 젤리꼬 하고 시픈데!”

그 뒤를 쫓던 에르빈이 무언가 생각난 듯 멈추었다.

“아 마따, 다랑지 용싸 하려면 검 있어야 해.”

에르빈은 두고 온 유아용 검을 챙기러 돌아갔다.

* * *

한편, 에르빈이 돌아간 것을 모르는 오딜리아는 혼자서 정원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문득 아이를 둘러싼 공기가 기이하게 일렁거렸다.

솨아아-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바닥을 내려다보며 폴짝폴짝 뛰던 오딜리아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보았다.

“웅? 나무?”

커다란 나무 하나가 오딜리아의 앞에 있었다.

톡, 데구루루-

나무 아래에 작은 도토리들이 데굴데굴 구르고 있었다.

“도또리!”

그것을 발견한 순간 오딜리아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데릭에게 두런는데, 도또리 1000개 모으면 다랑지 댈 수 이때.]

[안 대. 도또리 주우려면 가을까지 기다료야 해.]

“에르! 에르! 요기 도또리이……!”

오딜리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에르빈을 부르며 뒤를 돌아봤다.

그런데 에르빈이 보이지 않았다.

오딜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발끝에 차이는 도토리를 내려다봤다.

“이상하네. 에르가 도또리 주우려면 갈(가을)까지 기다려야 한다구 했는데……”

어쩌면 에르빈이 잘못 안 건지도 모른다.

“도또리 주워 가면 에르가 조아해.”

오딜리아는 떨어진 도토리를 열심히 주웠다.

에르빈에게 가져다줄 생각이었다.

이걸 보고 좋아할 에르빈을 생각하자, 오딜리아의 기분도 너무너무 좋아졌다.

이제 보니 여기도, 저기도 도토리나무 천지였다.

저택의 정원에 이렇게나 많은 도토리나무가 있었다니, 왜 이제까지 몰랐을까.

신이 나서 도토리를 줍던 오딜리아는 저쪽 나무 아래에 잠들어 있는 테오도르를 발견했다.

“잘샌긴 아조씨?”

나무 기둥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던 테오도르가 슬그머니 미간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아조씨, 안넝.”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의 눈앞으로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당혹감이 떠올랐다.

‘뭐지?’

그는 찬찬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또다시 시공을 건너온 것을 깨달았다.

낯선 장소뿐만 아니라, 살갗에 스치는 쌀쌀한 공기의 흐름마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밤새 감옥에서 그 마도사 놈을 심문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다.

조금 피곤하다고 생각하며 책상 앞에 앉아 잠시 눈을 붙였는데, 그사이에 이곳으로 이동한 모양이다.

“아조씨 얼굴 왜 구래?”

오딜리아가 테오도르의 뺨에 난 상처를 가리키며 물었다.

“아.”

테오도르는 오딜리아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자신의 뺨을 가만히 쓸었다.

이브가 제게 준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다.

검기가 깃든 상처를 없앨 수 있는 것은 오직 성력뿐이었으나, 테오도르는 그녀가 남겨 준 흔적을 없앨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고 호오 하면 엄써져(없어져). 리아가 해 주까?”

“일부러 남겨 둔 거다.”

“일보로? 이상한 아조씨네.”

오딜리아는 고개를 으쓱했다.

그러더니 자신이 주운 것을 테오도르에게 자랑하듯 보여 주었다.

“이거 바 바. 도또리야.”

“……?”

“도또리 천 개 모으면 다람찌 댈 수 이써.”

“다람쥐가 되고 싶은 건가?”

“웅! 리아는 불도 뿜꼬 하눌도 나는 다람찌야.”

주먹을 불끈 쥐며 외치는 오딜리아가 귀여워,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짧은 웃음을 짓고 말았다.

“제리코는 불을 뿜지 않아.”

“어어? 아조씨 젤리꼬 이제 아라?”

“하늘을 날지도 못하지.”

“마쟈!”

테오도르가 제리코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자, 오딜리아가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구론데 이 도또리는 리아 꺼 아냐. 에르 줄 거야.”

“에르? 그건 누구지?”

낯선 이름에 테오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에르는 리아 가족이야. 리아가 셰샤(세상)에서 쩰루 죠아하는 사람.”

“가족이라고?”

테오도르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되묻는 찰나, 오딜리아는 다시 뽈뽈거리며 도토리를 줍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그런 오딜리아를 유심히 관찰했다.

‘정말, 닮았군.’

그는 힐긋 눈동자를 굴려 오딜리아가 주우려는 도토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치사하게도 오딜리아가 막 주우려는 도토리를 먼저 주워 버렸다.

고개를 들며 두 눈을 끔뻑이는 오딜리아에게, 테오도르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물었다.

“필요해?”

“도또리, 리아가 주우려던 거야.”

“그럼 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해 봐.”

테오도르는 도토리를 두고 거래를 제안했다.

“…….”

오딜리아는 잠시간 말없이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자그맣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어몬니 말씀 맞아. 잘샌긴 아조씨는 지지야.”

“……?”

“어몬니가 구래써. 잘샌긴 아조씨 지지라고.”

“그게 무슨 소리지?”

테오도르를 향한 오딜리아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저리 가, 지지.”

오딜리아는 테오도르에게 손을 휘휘 내저으며 몸을 홱 돌렸다.

그러고는 휙 가 버렸다.

“잠…….”

뒤쪽에서 테오도르가 무언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딜리아는 다시 뒤를 돌아보았으나, 조금 전까지 그 자리에 있던 테오도르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어디 간 고지?”

오딜리아는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해했다.

그러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아차리고 비명을 질렀다.

“도또리!”

분명 조금 전까지 도토리가 아주 많이 있었는데, 짧은 사이 그 많던 도토리가 사라져 있었다.

남은 것은 오딜리아의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몇 개뿐이었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내 오딜리아는 저쪽에서 씩씩거리며 걸어오는 에르빈을 발견하고 방긋 웃었다.

“리아! 어디 갔었어!”

“도또리 주웠어.”

오딜리아가 에르빈에게 도토리를 건네줬다.

“어? 지쨔 도또리네.”

“웅. 이거 봐. 한 개, 두 개, 세 개…… 천 개!”

오딜리아는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턱 끝을 거만하게 치켜들었다.

“이제 에르 다람찌 댈 수 이써.”

“이거 천 개 아냐.”

“구롬 며 깬데?(그럼 몇 갠데?)”

“한 개, 두 개, 세 개…… 욜(열) 깨!”

“욜 깨?”

“웅.”

“구롬 이고 욜 깨야?”

“웅, 욜 깨야.”

오딜리아가 들고 온 도토리는 일곱 개였다.

“구롬 에르 다람지 몬 되네.”

오딜리아는 실망하여 털썩 주저앉았다.

“리아, 속상해?”

에르빈은 오딜리아를 달래 주었다.

“도또리 없어도 갠차나. 리아 있으니까.”

토닥토닥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하는 건 어머니를 따라 한 행동이었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집무실 풍경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이 시공을 건넜다가 돌아온 것을 알게 되었다.

힐긋, 고개를 내리며 주먹 쥔 오른 손을 펼쳤다.

그러자 펼친 손바닥 위에 앙증맞은 도토리 한 개가 있었다.

‘꿈이 아니야.’

그가 앉아 있는 책상 위에는 검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것을 쳐다보며 짧은 심호흡을 했다.

‘또, 만났어.’

벌써 두 번째로 겪는 기이한 현상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서쪽 대륙의 온갖 고서들을 다 뒤져 보았지만, 관련된 이야기는 찾을 수 없었다.

테네브리스의 힘이라 하여도, 왜 하필이면 그 아이를 만난 걸까.

제가 찾는 이브가 아니라.

최근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그를 조급하게 만들었다.

왕자를 데리고 도망친 여자는 정말 나의 이브일까?

그렇다면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죽은 이브의 시체는 어떻게 된 걸까?

만약 그 여자가 정말 나의 이브라면, 어째서 왕자와 함께 달아난 걸까?

그리고 그 여자아이는 대체 뭐지.

자꾸만 내 앞에 나타나는 이브와 닮은 여자아이는 대체…….

테오도르는 궁금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곧 알게 될 테니 조바심을 갖지 않아도 될 터이다.

조바심을 갖지 않아도…….

갖지 않아도…….

않아도…….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손끝으로 책상을 두드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을 때.

‘젠장.’

결국 그는 욕설을 씹어 삼켜야 했다.

미칠 것 같았다.

아니, 이미 미친 것 같았다.

이브와 마주쳤던 그날 밤 이후로 그는 줄곧 이런 상태였다.

잠시도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죽은 이후로 이렇게까지 살아 있는 사람처럼 격한 감정을 느껴 보는 게 처음이라서.

테오도르는 이런 스스로가 낯설면서도 기꺼웠다.

“폐하,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도착했습니다.”

린든의 목소리가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들여.”

곧바로 문이 열리고 한 남자가 그 안으로 들어섰다.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테오도르는 제게 의례적인 인사말을 읊는 남자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곱슬곱슬한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

‘체르니시아는 왜 다 저따구로 생겨 가지고…….’

남자는 이브와 닮았다.

“늦었군.”

테오도르는 언짢은 기색을 내비치며 짤막하게 대꾸했다.

비록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서쪽 대륙까지는 거리가 멀었지만, 마법사들이 있으니 이동이 이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을 터이다.

“죄송합니다, 폐하. 마법진의 오작동으로 인해 시간이 지체되는 사이, 습격이 있었습니다.”

“습격?”

“네, 다행히 그 자리에 함께 있던 레오브란테의 가주가 도움을 주어…….”

테오도르의 얼굴이 싸아악 굳었다.

“감히, 누가.”

표정이 굳은 것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니었다.

린든 또한 심각해진 얼굴로 빠드득 성을 냈다.

“황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를 습격하다니요!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폐하!”

단순한 도적들의 소행이라면 차라리 나았다.

그러나 어느 겁 없는 도적패가 황명을 받고 움직이는 이를 습격한단 말인가.

게다가 마법진이 오작동했다니.

황궁의 마법사들은 이처럼 터무니없는 실수를 할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어쩌면…….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막으려는 무리가 있다.’

테오도르는 그 일말의 가능성을 염두에 둔 채, 린든을 향해 명령했다.

“아르민에게 전달해. 사람을 꾸려 조용히 조사하라고.”

“네, 폐하.”

린든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다.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다시 브리안을 돌아보았다.

“내가 그대를 이곳으로 부른 이유에 대해서는 짐작하고 있겠지.”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논하시겠다고 들었습니다.”

“그래. 기억하나? 십수 년 전, 체르니시아가 몰락하던 때.”

테오도르는 잠시간 오래전 체르니시아가 반역죄로 몰락하던 시기를 떠올렸다.

황제였던 그의 아버지는 몸이 좋지 않아 늘 병석에 누워 있었고, 에른스트의 친모인 마르가라테 황후가 그 옆을 지켰다.

당시 황제의 병문안을 위해 찾아온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돌연 황궁에서 칼부림을 부렸다.

군터는 황제로부터 하사받은 검을 황제의 복부에 쑤셔 박았다.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목격한 이들이 많았고, 군터는 현행범으로 붙잡혀 즉결 처분되었다.

그리고 같은 날, 체르니시아 또한 역사서에서 이름을 지우게 되었다.

검에 찔려 생사를 오락가락하던 황제를 대신해 그것을 지휘한 이는 다름 아닌 마르가라테 황후였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아주 작은 자비도 없이 체르니시아를 몰락시켰다.

오랫동안 제국의 역사 속에서 알브레히트를 받쳐 온 3대 가문 중 하나가 멸문하였으나, 누구도 반박하지 못했다.

그만큼, 군터의 죄목이 명확하였으니까.

“불명예를 지울 방도가 요원하였으나, 4년 전을 기점으로 상황이 바뀌었다.”

그러나 4년 전, 마물들의 범람 이후로 고대의 세 영웅을 그리워하는 이들이 하나둘씩 생겨났다.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함께 대두된 것은 그에 따른 당연한 결과였다.

“시기상으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논하기에 지금이 가장 좋은 때지.”

테오도르가 비스듬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말했다.

잠자코 그의 말을 경청하던 브리안이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하지만 폐하, 저는…… 검기를 발현하지 못했습니다.”

물론 체르니시아는 과거 마물들로부터 대륙을 구한 영웅이었으나, 지금의 사람들이 원하는 건…….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아닌 마물을 물리쳐 줄 영웅입니다.”

그렇기에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체르니시아는 사람들이 원하는 체르니시아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런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빙긋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 이브가, 아니 이보네가 있으니까.”

“네……?”

“살아 있어, 이보네. 내가 봤어.”

“……!”

브리안의 눈이 둥글게 커졌다.

테오도르는 가늘게 떨리는 그의 녹색 눈동자를 지그시 쳐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그대를 이곳까지 불렀다. 이보네를 찾기 위해 그대가 필요하니까.”

* * *

로라는 내게 저택으로 온 편지 한 장을 건네주었다.

발신인에는 아르벨라 영주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내 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마침 조금 뒤에 약속한 마물 토벌의 날이 있으니, 그날 영주성에서 뵙지요.>

나는 영주성에 방문할 날짜를 머릿속으로 계산하며 글을 읽어 내렸다.

그러다 그 아래 이어진 절망적인 내용을 발견하고 멈칫했다.

<알브레히트 제국군이 서쪽 대륙을 떠나는 걸 연기했다고 합니다.

부디 몸을 사려 주시길.>

순간 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테오도르가 안 떠난다고?’

나는 테오도르를 잘 안다.

누구보다 잘 안다고는 못 하겠지만, 대다수의 사람들보다는 잘 안다.

그날, 칼리고르 왕성의 복도에서 나를 보고 멈칫하며 커지던 황금색 눈동자.

분명 알아본 것이다.

로브 아래 숨겨진, 욕설이 난무한 편지를 남기고 도망친 이브 로웰린과 같은 얼굴을.

‘한번 의심이 생겼으니 확인하려 하겠지.’

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질겅질겅 씹으며 표정을 굳혔다.

마침 영주성에서 온 소식이라기에 옆에서 기대에 찬 표정을 하던 프레데릭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왜 그런 표정입니까? 안 좋은 이야기라도 있는 겁니까?”

“황제가 떠나는 걸 미룬대요.”

“……!”

프레데릭이 놀라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낑낑거렸다.

“왜, 왜요? 그 미친 황제가 왜 안 떠난대요?”

“…….”

나는 편지를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테오도르가 갑자기 떠나는 걸 미룬 이유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도망친 왕자를 다시 붙잡아 가려고.

아니면, 나를 알아보고 잡아 죽이려고.

둘 중 어느 것이든 내겐 달갑지 않은 가정이었다.

그가 어떻게든 내 평화를 깨뜨릴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한번 문 것은 놓치지 않는 테오도르의 성격으로 보아,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포기하게 만들어야지.’

죽음까지 위장하여 일군 평화였다.

그가 나의 평화를 망가뜨리도록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다 틀렸습니다. 그 미친 황제가 우릴 잡으려고 안 떠나는 게 틀림없어요.”

프레데릭은 바닥에 주저앉아 절망스럽게 한탄했다.

“아이고, 이제 우리는 어떡합니까.”

“정신 사나우니 조용히 좀 있어요.”

“어떻게 그래요? 우리 모두 죽게 생겼는데?”

“자꾸 시끄럽게 하면 당신 목을 걸고 황제와 거래를 할 겁니다.”

“…….”

사납게 몰아붙이자 그제야 프레데릭이 입을 다물었다.

내가 한참 테오도르로부터 내 평화를 지키기 위해 궁리할 때였다.

“어몬니!”

“어모니이!”

정원에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안으로 들어왔다.

내 얼굴 위로 떠올랐던 심각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게 쪼르르 달려오는 아이들을 향해 팔을 벌렸다.

“에르, 리아. 옷이 엉망이 됐구나.”

여기저기 흙이 묻고 풀물이 든 것을 보니, 신나게 정원을 뒹군 모양이다.

그것이 귀여워 잔잔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물었다.

“정원에서 뭘 하다 온 거야?”

“리아 불 뿜꼬 하눌 날았어요. 지쨔루요.”

“그래?”

나는 쿡쿡 웃으며 오딜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구리고 도또리도 주워 왔어요.”

“도토리?”

고개를 갸웃하는 내게, 오딜리아가 도토리 일곱 개를 보여 주었다.

“어머, 정말 도토리네?”

아직 봄인데 웬 도토리지?

나는 신기한 마음을 감추며 작은 도토리 하나를 집어 보았다.

“이걸루 모꺼리(목걸이) 만들고 싶어요!”

“좋은 생각이네. 로라,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 수 있게 준비해 줄래?”

나란히 도토리 목걸이를 하고 있을 두 아이를 떠올리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다음 마물 토벌일까지 남은 날짜를 머릿속으로 헤아리며, 아이들과 함께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었다.

“이고(이거)는 리아 꺼, 이고는 에르 꺼, 구리고 이고는 어몬니 꺼고…….”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신이 나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아이들을 향한 프레데릭의 시선이 느껴졌다.

힐긋 쳐다보자 그가 변명하듯 두 손을 내저었다.

“나, 나쁜 뜻이 있어 쳐다본 게 아닙니다. 그, 그냥 아이들이 귀여워서…….”

그는 굳이 묻지 않았는데도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저도 곧 아버지가 되거든요.”

그럴 적에 그의 얼굴 위로 수줍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왕자님의 비공식적인 연인이신 루이젤 양께서 임신을…….]

나는 마도사가 한 말을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궁정 마도사라는 그 남자에게 들었어요. 연인분께서 임신 중이라고.”

“원래라면 지금쯤 루이젤의 임신 사실을 공표하고 결혼식을 올렸을 겁니다.”

프레데릭의 얼굴이 곧바로 침울하게 가라앉았다.

“아기를 위해 준비한 선물도 받아 보지 못했네요. 지금쯤 완성이 되었을 텐데…….”

프레데릭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맞은편에서 고사리 같은 손으로 쪼물쪼물 도토리 목걸이를 만들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아조씨. 밀까루 아조씨. 슬포?”

“아조씨 도또리 줄까?”

“아, 고맙구나.”

프레데릭은 서둘러 표정을 추스르며 아이들이 건네주는 도토리 목걸이를 받았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듯 물었다.

“그런데 왜 밀가루 아저씨라 부르는 거니?”

“구건 아조씨가…… 우웁? 엄몸닝?”

활짝 웃으며 설명하려는 에르빈의 입을 덥석 막았다.

나를 부르는 에르빈의 발음이 손바닥에 짓눌려 뭉개졌다.

“……?”

“아, 하하…….”

프레데릭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으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상황을 무마했다.

“에르, 리아. 잠시 어머니를 따라올래?”

모두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와중, 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작은 방으로 끌고 갔다.

조금 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다시는 사람을 보고 밀가루라는 표현을 쓰지 않겠다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약속했다.

* * *

테오도르는 브리안과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눈 뒤 그를 내보냈다.

요 며칠 쌓인 옅은 피로감이 밀려와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를 때였다.

똑똑.

작은 노크 소리와 함께 한 남자가 안으로 들어섰다.

칼리고르 국왕과 함께 도망친 시종장을 대신해 왕궁을 살피는 시종이었다.

“무슨 일이지?”

“아, 저어…… 폐하.”

난처한 얼굴을 한 남자가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긋 살피며 아뢰었다.

“그…… 왕궁으로 물건이 도착하고 있어서…….”

“물건?”

테오도르가 고개를 까딱이자, 시종들이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형형색색의 아기 옷과 앙증맞은 아기 신발, 폭신하고 귀여운 인형, 임산부에게 좋은 찻잎 따위가 그 안에 가득 실려 있었다.

“이게 무엇이냐?”

“……프레데릭 왕자님의 이름으로 온 물건들입니다.”

“프레데릭 왕자?”

그 이름을 떠올리자마자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불쾌한 빛깔이 떠올랐다.

“왕자님께서 계실 적에 주문하신 물건이 이제 도착한 모양입니다. 어떻게 처리할지…….”

“왕궁에는 아기가 없는 것으로 아는데.”

테오도르가 아기 신발 하나를 집어 들며 인상을 찌푸렸다.

“아, 그게 왕궁 내에 암암리에 떠도는 소문이나…….”

“소문?”

“프레데릭 왕자님께서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던 아가씨가 있는데, 최근 그 아가씨께서 임신을…….”

“…….”

“그래서 국왕 전하께서도 결국 결혼을 허가하셨다고…….”

테오도르의 얼굴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여, 연인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어떻게 처리할까요?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들이라 저희가 함부로 버릴 수 없어 여쭙…… 흐익!”

화르르-

테오도르의 손끝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이내 새빨간 화염으로 변해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아기 신발을 흔적도 없이 태워 버렸다.

소리 없는 분노를 목도한 이들이 모두 그 자리에 뻣뻣하게 얼어붙고 말았다.

스르륵-

테오도르는 느리게 눈동자를 굴려 트레이 위에 담겨 있는 물건들을 쳐다보았다.

“설마, 그럴 리가 없지. 안 그래?”

“히끅.”

“뭐야. 왜 대답이 없어?”

“네, 넵, 넵!”

시종은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폐, 폐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일단은 황제의 비위를 맞출 심산으로 무조건 동의했다.

그제야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만족스러운 듯 히죽 말려 올라갔다.

* * *

얼마 뒤.

아르벨라의 영주와 약속한 마물 토벌의 날이 다가왔다.

나는 약속된 날짜보다 하루 일찍 영주성을 찾아갔다.

“어서 오십시오, 이브 님.”

내가 온다는 소식에 영주가 친히 성문 앞으로 마중을 나왔다.

그의 옆에는 영주의 둘째 아들 데릭이 나를 향해 손을 마구 흔들고 있었다.

나는 데릭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서 영주의 안내를 받으며 성 안쪽으로 들어갔다.

“이브 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영주는 긴 복도를 함께 걸으며 내게 작은 목소리로 속닥였다.

아르벨라 영주성 안쪽, 가장 깊고 은밀한 공간에 도착하자 그곳에 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칼리고르의 국왕 전하이십니다.”

테오도르를 피해 왕성을 버리고 도망쳤다는 칼리고르의 국왕과 그를 따르는 이들이었다.

“오오, 그 소문의 마녀로군! 그런데 프레데릭은 어디에 있지?”

국왕이 내 뒤를 살피며 물었다.

내가 프레데릭과 함께 올 줄 알았나 보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랑 계약한 내용이에요.”

나는 대뜸 마도사와 작성한 계약서를 내밀었다.

“프레데릭 왕자의 신병은 지금 제가 보호하고 있습니다. 약속대로 삼십억 골드를 지불하시면 왕자의 신병을 드리지요.”

“사, 삼십억 골드?”

칼리고르 국왕은 계약서에 적힌 금액을 보며 눈에 띄게 당황했다.

“삼십억 골드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와 맞먹은 규모가 아닌가?”

“그렇죠.”

“금액이 조금 과, 과한 것 같은데…….”

“그래서, 못 주겠다는 건가요?”

잠자코 대답하던 내 눈썹이 삐뚜름히 치켜 올라갔다.

“십억 골드 정도로 하면 어떤가?”

“…….”

나는 말없이 국왕을 응시하다가, 계약서를 다시 집어 들었다.

“아쉽지만 계약은 결렬이군요.”

그러고는 홱 돌아섰다.

“자, 잠깐!”

그러자 국왕이 나를 붙잡는 소리가 들렸다.

“아, 알았네. 이십억 골드…… 그래, 제기랄, 삼십억 골드를 내어 주지.”

그제야 나는 빙긋 웃으며 국왕을 돌아볼 수 있었다.

“좋아요.”

국왕의 신하들이 나를 보며 치를 떠는 게 보였다.

욕심 많은 여자라 욕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내 평화를 깨뜨리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맺은 계약인데, 단 1골드도 양보할 수 없었다.

“이, 이 보석은 아리스베의 왕녀셨던 내 모친이 칼리고르 왕가로 시집올 때 가져온 지참금으로…….”

척 보기에도 값비싼 보석들과 패물들이 담긴 주머니를 내미는 국왕의 손이 덜덜 떨렸다.

“이것들을 모두 팔면 삼십억 골드는 족히 될 걸세.”

“방금 주신 것들이 정말로 삼십억 골드의 값어치가 되는지 확인하는 게 먼저예요. 그전에는 프레데릭 왕자의 신병을 넘길 수 없어요.”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하자, 국왕의 사람들이 나를 향해 무례하다며 발끈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나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왕성을 버리고 도망쳐 놓고서, 이제 와 왕 대접은 무슨.’

코웃음이 나오려는 걸 삼키며 물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거예요?”

“아니, 그게 아니라…….”

국왕의 일행들은 곧바로 꼬리를 내렸다.

혹여나 내 심기가 뒤틀려 저희 왕자에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나는 국왕으로부터 받은 보석 주머니를 품에 챙기고 일어났다.

그대로 자리를 떠나려다가 불쑥 생긴 궁금증에 물었다.

“그런데 테오도르 황제는 왜 떠나는 걸 미룬 거죠?”

그리고 돌아온 답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종류의 것이었다.

영주성을 나서는 내 걸음걸이가 평소와 달리 늘어졌다.

나는 조금 전 영주성 안에서 들은 이야기를 떠올리며 콧잔등을 찌푸렸다.

[황제가 이곳에서 무슨 사람을 찾았다더군요. 체르니시안가 뭔가 하는, 아무튼 대단한 가문의 생존자를요.]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었다.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찾았다고?

하필 이 시점에, 이곳에서? 이렇게 갑자기?

[그래서 그자를 내세워 그 가문을 복권할 거라고…….]

[그와 관련하여 준비할 것들이 있어 곧바로 돌아가지 않는다고…….]

게다가 뜬금없이 가문의 복권이라니.

나는 당연히 믿지 않고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무시했다.

아니, 무시하려고 했다.

[그 생존자의 이름이 뭔데요?]

그러나 나는 구질구질하게 묻고 말았다.

묻지 말았어야 했다.

말도 안 되는 뜬소문이라고 무시했어야 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 라고 한답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 이후로 줄곧 지금의 상태였다.

브리안.

짓궂은 나의 막내 오빠.

그는 툭하면 ‘테오도르 1황자에게 시집보낸다’며 나를 놀렸고, 그럴 때면 나는 엉엉 울며 리하르트 오라버니에게 브리안의 괴롭힘을 일러바치곤 했다.

십수 년 전 가문이 그렇게 몰락한 뒤로는 두 번 다시 부르지 못한 이름이었으며, 그 짓궂은 괴롭힘마저 그리워 소리 죽여 울어야 했다.

‘정말 브리안일까?’

나는 잠시 마음속에 피어오른 의문에 희망을 걸었다가, 이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브리안일 리가 없어.’

하지만 그 헛소문일 게 틀림없는 말에 자꾸 신경이 쓰였다.

살짝, 아주 살짝 신경이 쓰였다.

“이브! 아버지와는 이야기를 잘 끝냈나요?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밖으로 나오자마자 데릭과 마주쳤다.

“날 기다린 거야?”

“네, 이브. 다람쥐 용사 공연은 잘 보셨나요? 아이들이 좋아했지요?”

데릭이 쑥스럽게 웃으며 내게 조잘조잘 말을 걸어 댔다.

잠시 그를 쳐다보던 나는 길어지는 그의 말을 끊으며 물었다.

“잘됐어, 데릭. 마침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거든.”

“네? 제게요?”

내가 부탁할 것이 있다고 하자, 데릭이 눈에 띄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매번 필요한 게 없냐고 찾아오는 그에게 그런 건 없다고 매정하게 잘라 냈기 때문이다.

“당신에게 도움이 되는 건 제 기쁨입니다! 무엇이든 말씀하세요!”

“있지 말이야…….”

나는 데릭의 귀를 잡아당겨 속닥속닥 귓속말을 했다.

그러자 그는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듯 빙긋 웃으며 답했다.

“얼마든지요.”

그리고 며칠 뒤, 아르벨라를 넘어 칼리고르 왕국 전역에 소문이 퍼졌다.

호수 저택의 마녀가 검 한 자루로 아르벨라 일대의 마물들을 모두 초토화시켰다고.

아예 씨를 말리고 박멸하여, 작은 흔적 하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고.

소문은 빠르게 번져 나갔다.

이 속도라면 얼마 지나지 않아 칼리고르 왕성에 있는 테오도르의 귀에까지 들릴 것이다.

* * *

“왜 이브가 안 오지.”

테오도르는 삐딱하니 팔짱을 낀 채 중얼거렸다.

“분명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보기 위해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의 잘생긴 미간 위로 주름이 졌다.

본래의 그였더라면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광장에 거꾸로 묶어 전시하듯 세워 두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나타나길 기다렸다가 군사들을 풀어 덮쳤겠지.

그렇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녀와 저의 마지막이, 그녀에겐 퍽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았을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그녀가 겁먹지 않도록, 좋게 좋게 소문을 퍼뜨렸다.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찾아 극진히 대접하고 있으며, 곧 그의 가문을 복권할 것이라고.

그건 본래 그가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과는 사뭇 달랐다.

생전 사용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녀를 회유해 보고자 한 것이 문제였을까.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갔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슬슬 인내심에 한계가 오려고 했다.

“제가 뭐랬습니까. 그 여자는 이브 님이 아니라니까요.”

옆에서 린든이 며칠 전에 비해 훨씬 더 당당해진 말투로 자신의 의견을 개진했다.

“정말로 이브 님이었더라면 진즉에 제 가족을 찾겠다고 나타나셨겠지요. 그런데 너무 잠잠하지 않습니까.”

“…….”

제가 틀렸다고 하는 린든의 말에 테오도르는 기분이 몹시 언짢아졌다.

그러나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러니 폐하, 이제 그만 쓸데없는 일에 힘 빼지 마시고 알브레히트로 귀환을…….”

“하루만 더.”

테오도르가 내내 꾹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하루만 더 기다리겠다.”

“그럼 하루 뒤에도 이브 님이 안 나타나면 그냥 귀환하는 거지요?”

“……하루 뒤에도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다면.”

단조롭게 흘러나온 나직한 저음이 여상한 투로 말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광장에 거꾸로 매달아 묶을 것이다.”

“네?”

린든이 그건 또 무슨 해괴한 소리냐는 듯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흡사 세상 몹쓸 악한을 보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테오도르는 개의치 않으며 픽 웃었다.

“회유가 안 되면 그다음 방법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겠나.”

“…….”

할 말을 잃은 린든이 속으로 브리안을 향해 애도를 보냈다.

다른 이가 저리 말했더라면 짓궂은 농담이라 생각하며 넘겼을 것이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입에서 나오니 전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린든은 할 일이나 하자는 심정으로 들고 온 종잇장을 주섬주섬 펼쳤다.

“오늘도 칼리고르는 평화롭습니다. 여전히 국왕의 일당은 흔적을 찾기가 어렵고…….”

그가 펼친 보고문에는 점령지의 안팎으로 일어난 대소사가 간략히 적혀 있었다.

“칼리고르 북부 지방에서는 이른 봄에 우박이 내렸다고…….”

“그래.”

테오도르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린든 또한 그가 자신의 보고를 성심껏 들을 것이라 기대하지 않았던 듯, 대강 읽어 내렸다.

“그리고 아르벨라라는 지역에 마물을 때려잡는 마녀가 나타났다더군요.”

멈칫.

내내 린든의 보고를 흘려듣던 테오도르가 문득 반응하며 물었다.

“마물을 때려잡는…… 마녀라고?”

“네, 검 한 자루로 일대의 마물들을 박멸했다는데, 그 마녀가 엄청난 미인이라고 합니다. 은발에 녹안을 지닌…… 폐하?”

벌떡-!

테오도르가 돌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폐하, 폐하?”

린든은 대뜸 바깥으로 향하는 테오도르의 뒤를 쫓으며 숨을 헉헉댔다.

“폐하? 어딜 가십니까?”

어쩜 기사단장인 저보다도 체력이 좋은지, 테오도르는 뛰다시피 빠른 걸음으로 걸으면서도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폐하, 행선지는 말씀을 해 주셔야지요. 폐하?”

마구간 앞에서 걸음을 멈춘 테오도르가 말 위에 올라타며 말했다.

“이브다.”

“네?”

“그 여자가 이브야. 틀림없어.”

검으로 마물을 때려잡는 여자라니.

그런 멋있는 여자가 이브 외에 또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두근, 두근, 쿵, 쿵-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여자의 소재지가 어디라고?”

“네? 아, 네……. 아르벨라 영지의 호수가 보이는 저택에 살아서, 사람들이 모두 호수 저택의 마녀라 부른다고…… 폐하!”

테오도르는 린든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낯선 땅에서 길은 알고 달리는 거냐고, 뒤에서 린든의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칼리고르 왕국을 침공하기 직전에 지도를 살피며 대강의 지형들은 모두 머릿속에 담아 둔 터였다.

테오도르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렸다.

뒤늦게 호위단원들과 함께 쫓아가는 린든은 차마 따라잡지 못할 빠른 속도였다.

아르벨라 영지는 지도에서 보았던 것처럼 아주 작은 곳이었다.

이미 그곳의 유명 인사가 된 그녀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마물을 때려잡는 여자는 어디에 있지?”

위협적인 한마디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녀가 있는 곳을 알려 주었다.

테오도르는 사람들이 알려 준 호숫가의 저택을 찾아갔다.

굳게 닫힌 저택의 정문을 쳐다보는 그의 얼굴 위로 벅찬 희열감이 떠올랐다.

‘이브가, 이곳에…….’

어느덧 말에서 내린 그가 저택을 향해 걸었다.

자박, 자박, 자박-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쿵쿵거리는 가슴의 울림이 더욱 거세졌다.

마침내 정문 앞에 선 그가 문손잡이를 잡고 가만히 밀어 보았다.

끼이익-

잠금장치를 하지 않은 것인지, 닫혀 있던 문은 손쉽게 열렸다.

“…….”

쉽게 열리는 문고리를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눈이 동그랗게 커지는가 싶더니, 이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이렇게 위험하게, 문단속도 제대로 하지 않고…….

누가, 나쁜 마음이라도 품고 찾아오면 어떡하려고…….

꾸우욱-

테오도르는 괜히 아랫입술을 잘근 베어 물었다.

쉽게 열린 문이 마음에 들지 않은 탓이다.

그녀에게 가장 달갑지 않은 불청객이 바로 자신일 거라는 생각은 티끌만큼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열린 문을 더욱 거세게 젖히며, 호수를 품은 고저택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디뎠다.

그리고 그 안에 펼쳐진 풍경에 테오도르는 잠시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

그를 맞이한 것은, 텅 빈 저택이었다.

칼리고르의 수도에서부터 말을 달려온 작은 영지의 작은 저택은, 급하게 이사라도 간 듯한 모양새였다.

빈 저택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매가 사늘하게 내려앉았다.

짧은 침묵 끝에,

“……하!”

차가운 바람을 닮은 웃음소리가 그의 입술을 비집고 터져 나왔다.

“하하! 하하하하하!”

광포한 웃음소리가 높다랗게 울려 퍼졌다.

그렇게 웃는 테오도르는 진심으로 기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말이다.

“이브야. 역시, 그녀가 살아 있었어!”

배를 잡고 큭큭거리던 그가 웃음을 멈추고 숨을 몰아쉬었다.

“네가 아니라면 날 이렇게 엿 먹이고 도망칠 수 있을 리 없잖아. 그렇지, 이브?”

세상을 쪼갤 듯 첨예한 눈빛과 달리 ‘그렇지, 이-브?’ 하고 그녀의 이름을 속삭이는 목소리만이 그처럼 달콤하였다.

“그러니까 이건, 네가 살아 있는 증거야.”

빈 저택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목울대가 자그맣게 일렁거렸다.

이때였다.

사박-

뒤편에서 들려오는 인기척에 테오도르가 뒤를 홰액 돌아보았다.

순간 기척의 주인을 알아본 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브리안을 습격한 이는 다름 아닌 벤야민이었다.

그는 황제가 칼리고르로 향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직후부터 마음이 몹시 불안해졌다.

칼리고르는 이브가 머무르는 곳이기도 했으니까.

그러다 황제가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불러들였다는 소식에 급기야 눈이 돌아 버리고 말았다.

황제가 그를 부르는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브리안을 이용해 이브를 찾으려는 게 아닌가.

‘어쩌면 이미 마주쳤을지도 모르지. 의심 많은 황제가 이유 없이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불러들이진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니, 불안한 마음이 한껏 증폭되었다.

체르니시아의 복권이 멀지 않았다고, 벌써 제국 안팎으로 이야기가 돌았다.

혹 두 사람이 아직 마주치기 전이라 하더라도, 이브가 이 소식을 접한다면…….

‘안 돼.’

벤야민은 입술을 짓씹으며 생각했다.

그녀를 또다시 테오도르에게 빼앗길 아주 작은 가능성 하나 남겨 두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는 브리안을 제거하고자 했다. 그 남자가 이브를 꾀어낼 미끼가 되지 않도록.

브리안이 이동 마법을 이용한다는 소식을 접한 벤야민은 마법진에 소소한 장난을 해 두었다.

황명을 받든 브리안의 일행이 마법진이 작동하지 않아 당황하는 사이 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그와 함께 있던 레오브란테의 가주 또한 굉장한 실력자였으나, 브리안 체르니시아 그 자체가 벤야민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뛰어난 검술을 구사하였다.

과연, 체르니시아라.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라 가볍게 생각한 것이 실수였다.

벤야민은 주먹을 아프게 말아 쥐었다.

브리안이 알브레히트를 떠나기 전에 죽여 버렸어야 했는데, 이제 그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이브의 귀에 들어가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더 이상 막을 수 있는 방도가 없었다.

초조한 마음에 사흘 밤낮으로 자지 못하고 손톱만 까득, 까드득- 깨물었다.

그러다 더 이상 깨물 손톱도 남아나지 않았을 때, 벤야민은 호수 저택으로 이동했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를 강제로 납치라도 하여서 세상으로부터 숨길 작정이었다.

한순간 눈에 뵈는 게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막상 그가 호수 저택에 도착하였을 때.

이브는 그곳에 없었다.

이브뿐만 아니라 그녀의 두 아이와 몇 안 되는 사용인들도.

벤야민은 휑한 저택을 둘러보았다.

급하게 짐을 챙겨 사라진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브가…… 사라졌어.’

그리고 그곳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하! 하하!”

미친 자처럼 웃고 있는 테오도르를 발견했다.

“아하하하하하하하!”

텅 빈 저택을 앞에 두고서,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 그 모습이 썩 기괴하였다.

‘뭐야.’

벤야민은 테오도르를 이해하기 힘들 때가 많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정도가 유독 극심했다.

‘미친 건가?’

급하게 사라진 듯 휑하게 비어 버린 호수 저택.

그리고 그 앞에서 기쁜 듯이 눈가를 붉히며 광기 서린 웃음을 터뜨리는 테오도르.

황제가 미쳤다는 이야기는 대륙 내에 자자하게 퍼졌으나, 미친 황제를 직접 대면하는 것은 4년 전 이후로 처음이었다.

‘미친개는 피해야지.’

벤야민은 테오도르와 마주치지 않고자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가 최대한 소리를 죽여 자리를 뜨려는 때였다.

홰액-!

그 작은 기척을 기민하게 알아챈 테오도르가 곧바로 벤야민을 돌아보며 매서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벤야민은 놀란 마음을 감추며 무심한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 윽!”

그러나 그 인사가 채 끝나기도 전에 테오도르의 손이 벤야민의 멱살을 우악스럽게 낚아챘다.

“너지?”

순식간에 코끝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로 다가온 테오도르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쏘아붙였다.

“무슨 말씀입니까.”

“나의 이브와 작당해서 못된 장난질을 친 게, 너 맞잖아.”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쳇.’

벤야민은 속으로 못마땅한 기색을 숨겨야 했다.

쓸데없이 눈치가 빠른 저 미친 황제가 대강의 상황을 알아챈 게 틀림없다.

‘어떻게 안 거지? 설마, 정말로 이브와 마주치기라도 한 건가.’

그러나 이러한 궁금증을 입 밖으로 꺼낼 순 없었다.

벤야민은 시치미 뚝 떼며 대꾸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이브라면 4년 전 죽은 가엾은 이브 로웰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브는 죽었잖아요. 당신의 약혼녀를 지키느라.”

부러 그의 상처를 긁으며 대답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런 식으로 나올 줄 알았다는 듯 두 눈을 활짝 접으며 웃었다.

“이브는, 또 어디에 숨겼지?”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방에서 황금색 빛무리가 피어났다.

빛무리는 서서히 수십 개의 단검의 형태로 변해 가며 벤야민을 겨누었다.

“…….”

벤야민은 소리 없이 숨을 삼켰다.

눈앞에 빙긋 웃고 있는 남자에게서, 죽일 듯한 살기가 번져 나오고 있었다.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감각에, 목 뒷덜미 위로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알브레히트의 주인이라 하여도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이렇게 함부로 공격할 순 없습니다.”

“뭐 어때.”

테오도르는 비식 웃으며 상냥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여기엔 너랑 나 둘밖에 없고.”

“…….”

“널 죽여 없애 버리면, 내가 무슨 짓을 벌였는지 아무도 모를 텐데.”

슈욱!

슉!

슉!

슉!

테오도르가 만들어 낸 수십 개의 빛의 단검들이 벤야민을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벤야민은 그 즉시 아까부터 머릿속으로 외우던 술식을 손끝으로 그려 냈다.

작은 파공음이 터지며 테오도르의 몸이 밀려났다.

“크윽…….”

뒤쪽으로 밀려난 테오도르가 눈가를 찌푸리며 이를 악물고 버텼다.

마찬가지로 반동으로 밀려난 벤야민의 몸이 바닥 위로 나뒹굴었다.

그것을 발견한 테오도르가 재빨리 그를 향해 공격을 이어 갔다.

슈욱- 쿵!

슈욱- 쾅!

슈욱- 쿠구궁!

벤야민을 향해 날아든 단검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폭발했다.

벤야민은 바닥을 한 바퀴 빙그르르 돌아, 간신히 테오도르의 공격을 피해 도망쳤다.

‘젠장. 전장에서 구르더니 더 난폭해졌잖아.’

4년 전과 달리 테오도르는 더 이상 자신의 힘을 숨기지도 않았고, 상식적인 대화가 통하지도 않았다.

‘마물들도 테오도르 황제를 피해 달아난다더니…….’

다시 한번 테오도르의 공격이 벤야민을 스쳐 지나갔다.

슈우욱- 콰앙!

그 바람에 벤야민의 오른쪽 어깨가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윽…….”

정말로 죽일 기세로 쏟아지는 무자비한 공격을 피해, 벤야민은 재빨리 이동 마법을 펼쳤다.

이윽고 벤야민의 몸이 사라졌다.

테오도르는 서늘한 눈으로 벤야민이 도망친 자리를 쳐다보았다.

그가 달아난 자리에 남은 것은 찢어진 어깨에서 뚝뚝 떨어진 붉은 선혈뿐이었다.

“쳇.”

테오도르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냥 죽어 버렸으면 좋았을 텐데.”

이곳에 나타난 그를 보며, 테오도르는 더욱 확신했다.

이브는 살아 있다.

그리고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그녀와 함께 수상한 작당질을 벌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작자가 뜬금없이 이 먼 서쪽 대륙에 나타날 이유가 없지 않나.

“죽음을 둔갑하기라도 한 건가.”

테오도르는 제 겉옷에 묻은 흙먼지를 털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단순히 죽음을 둔갑했다기엔, 제가 끌어안고 돌아온 것은 분명한 죽은 이의 시신이었다.

“아, 혹시.”

퍼뜩, 그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죽은 그녀에게서 느껴지던 유독 강한 페르디난트의 냄새.

어쩌면 그가 죽은 그녀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가 아닌 다른 것이었는지도.

“설마.”

테오도르는 고대 문헌 속에서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찾으며 이와 비슷한 것에 대해 본 적이 있었다.

“흑마법에라도 손을 댄 건가.”

주인 없는 핏자국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 위로 스산한 기운이 머물렀다.

* * *

데릭의 도움으로 퍼뜨린 소문은 테오도르를 호수 저택으로 유인해 줄 것이다.

그사이, 나는 아르벨라를 훌쩍 떠났다.

항상 생각했었다.

언젠가 아르벨라의 호수 저택에서 쌓아 온 나의 평화가 흔들리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혹시나 그런 날이 왔을 때 당황하지 않도록 항상 생각하고 대비를 해 왔다.

그 덕에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하고, 아르벨라를 떠날 수 있었다.

‘벤야민에겐 미안하게 됐지만.’

말도 없이 사라져서 놀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위한 편지 같은 건 남길 수가 없었다. 혹시나 테오도르가 알아보기라도 하면 안 되니까.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로라와 함께 호텔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저택을 정리하며 몇 안 되는 사용인들에게 두둑한 퇴직금을 쥐여 주며 미리 내보냈으나, 로라만큼은 한사코 나를 따라오겠다고 주장했다.

[세상에 매정하시기도 하지! 이렇게 저를 버리고 칼리고르를 떠나시려고요?]

[하지만, 너는 원래 칼리고르 사람이고…….]

[저는 어차피 남은 가족도, 연고도 없는걸요! 게다가 주인님 혼자서 도련님과 아가씨를 보살피는 건, 두 분 아기님들께 너무 가혹한 일이에요!]

[나한테 가혹한 일이 아니라?]

내심 그간 정이 많이 들었던 로라와 헤어지기 싫었던 나는, 그녀의 강경한 주장에 져 주는 척을 하며 함께 떠나기로 했다.

나는 아이들을 로라에게 맡기고서, 칼리고르 왕국을 떠나기 위해 준비 중이었다.

프레데릭의 신병을 넘기고 새로운 정착 자금도 챙겼겠다, 이주할 곳도 이미 알아보았다.

이번에는 배를 타고 테오도르의 소식이 아예 전해져 오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떠나 버릴 생각이다.

배를 타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항구가 있는 수도까지 와야 했다.

테오도르가 수도를 비우고 아르벨라 쪽으로 향했다는 소식까지 접한 뒤에야 움직일 수 있었다.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뜨는 것이 나의 목표였다.

철그렁거리는 쇳소리와 함께 알브레히트 제국군의 복색을 갖춘 기사들이 맞은편에서 지나가는 게 보였다.

나는 공연히 쓰고 있던 모자의 챙을 눌러 얼굴을 가렸다.

그들이 지나가길 기다리던 찰나.

‘어?’

문득 저 멀리 지나가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내 눈동자가 화들짝 커졌다.

내가 익히 잘 알고, 또 그리워하던 얼굴이었다.

‘브리안……?’

곱슬기가 도는 짧은 은색 머리카락.

여름을 담은 듯 싱그러운 빛깔의 개구진 녹색 눈동자.

브리안이었다.

터울이 얼마 안 되는 남매였던 브리안 오빠와 나는, 사실 어머니가 다른 이복 남매이다.

그럼에도 꼭 닮은 우리의 얼굴은 친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말도 안 돼. 정말 브리안이야.’

[황제가 이곳에서 무슨 사람을 찾았다더군요. 체르니시안가 뭔가 하는, 아무튼 대단한 가문의 생존자를요.]

[그 생존자의 이름이 뭔데요?]

[브리안 체르니시아, 라고 한답니다.]

뒤늦게 그것이 뜬소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게 사실이었어.’

브리안은 알브레히트 제국군의 엄호를 받으며 움직이고 있었다.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것이 보였으나, 거리가 있어서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거지? 브리안이 왜 이곳에…….’

나는 홀린 듯이 브리안을 향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도 모르게 그의 뒤를 쫓고 있었다.

그러다 브리안이 일행들과 멀어져 홀로 인적 드문 골목길에 들어섰을 때.

나는 잽싸게 그 뒤를 후다닥 따라 들어갔다.

기척을 느낀 브리안이 무심결에 나를 돌아보았다.

“어……?”

눈이 마주치고, 브리안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ㅂ……!”

그리고 나는 그대로 그를 덮치며 그의 뒷목을 손날로 내리쳤다.

퍼억-!

기절한 브리안의 몸이 바닥으로 축 늘어졌다.

나는 쪼그려 앉아 그를 살폈다.

‘진짜 브리안이야.’

정말로, 내가 기억하는 그 브리안이 맞았다.

흑마법이라거나 이상한 장난질이 아닌, 진짜 살아 있는 브리안이었다.

‘브리안이 어떻게…….’

그러나 생각을 이어 갈 틈이 없었다.

바로 이 골목 바깥에 조금 전까지 브리안을 호위하던 알브레히트 제국군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 나의 행색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썩 수상쩍었다.

‘사람들의 눈이 모이기 전에 일단 자리를 옮겨야 해.’

그렇게 나는 의도치 않게 브리안을 납치해 버렸다.

* * *

막상 자리를 옮기려 하자, 낯선 칼리고르의 수도에서 마땅한 장소가 없었다.

로라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호텔 방 외에는…….

“어머, 주인님! 서, 설마, 사, 사, 사람을 죽……!”

로라가 내 등에 실려 온 브리안을 보고 기겁을 했다.

“죽인 거 아냐. 기절시킨 거야.”

“휴, 다행이에요. 저는 주인님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신 줄 알고 깜짝 놀랐지 뭐예요.”

로라는 나를 도와 브리안을 침대 위로 눕혔다.

“그럼 기절을 시켜 납치를 해 온 건가요?”

“납치라니. 그냥 의식 불명 상태로 만들어서 데려온 거라고.”

“그게 납치잖아요.”

“…….”

쓸데없이 예리한 로라의 지적에 마땅히 답할 거리가 없어 입을 다물었다.

인형을 가지고 놀던 에르빈이 침대맡으로 쪼르르 다가왔다.

“어모니, 이 아조씨 누구야요?”

“삼촌이야.”

“삼쫀?”

에르빈이 고개를 갸웃했다.

“구럼 어모니가 삼쫀 죽인 거예요?”

“죽인 게 아니라 기절시켜서 납치를 해 온 거래요, 에르빈 도련님.”

“납찌(납치)?”

“리아, 납찌 알아!”

에르빈이 이쪽으로 온 사이 혼자서 인형들을 독차지하던 오딜리아가 활짝 웃으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다람찌 용짜에서 뚜래고(드래곤)가 곤준님(공주님) 데꼬가자나! 구게 납찌야!”

“우웅? 구럼 삼쫀이 어모니 부인이야?”

“아냐. 어모니 아조씨랑 결혼 몬 태. 납찌는 나쁜 거라서 젤리꼬가 이 아조씨 구하러 올 꺼야.”

“구럼 삼쫀이랑 젤리꼬 결혼해?”

“아아니, 젤리꼬는 곤준님이랑 결혼해짜나.”

“곤주하고도 결혼하고 삼쫀하고도 결혼하몬 되지.”

에르빈이 두 눈을 끔뻑이며 말하자, 오딜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손가락을 까딱까딱 저었다.

“안 대, 안 대. 그건 지지(쓰레기)야, 지지.”

“왜 안 대? 에르는 어모니하고도 결혼하고, 리아하고도 결혼하고, 로라하고도 결혼할 건데.”

에르빈이 여전히 오딜리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어리둥절한 사이, 오딜리아의 관심은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브리안에게로 옮겨 갔다.

“우아, 신기해. 아조씨 머리카랑 어몬니랑 또까타(똑같아)!”

“아조씨 아니야, 리아. 삼쫀이야. 어모니가 삼쫀이래써.”

“구리고 아조씨 머리카랑 에르랑도 또까타!”

“아이참, 아조씨가 아니라 삼쫀이라니까.”

옹기종기 머리를 맞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툭탁거리는 와중에도 브리안을 향해 눈을 떼지 못했다.

나와 닮은 브리안이 신기한 모양이다.

“어? 아조씨 눈 깜빡해써!”

이때, 오딜리아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처럼 외쳤다.

“지쨔(진짜)! 삼쫀 눈 움직여!”

에르빈 또한 오딜리아와 마찬가지로 흥분하여 소리쳤다.

이윽고 브리안이 슬며시 눈을 떴다.

“어…….”

멍하니 두 눈을 깜빡이던 그는 이내 화들짝 놀라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 이보네!”

브리안은 침대맡에 서 있는 오딜리아를 보며 외쳤다.

그러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 이본네 아닌데. 나 이름 리안데.”

“아…….”

뒤늦게 정신을 차린 듯, 브리안이 멍청한 탄성을 터뜨렸다.

“이본네가 누구야?”

에르빈이 고개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흐익?”

당황한 브리안은 똑같이 생긴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멀찍이서 그 모습을 한심하게 지켜보다가 그를 불렀다.

“안녕, 브리안 오빠.”

“……!”

브리안이 내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나를 발견한 그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이, 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는 그를 향해 입꼬리를 느슨하게 말아 올렸다.

“이보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그가 내게 뛰어왔다.

그러고는 두 팔을 벌려, 덥석! 나를 끌어안았다.

“정말, 정말 살아 있었어! 황제의 말이 맞았어. 네가, 살아 있었어……!”

“자, 잠깐, 읍…….”

어찌나 격하게 끌어안던지, 숨을 쉬기 불편할 정도였다.

콜록대며 브리안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자, 지켜보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오도도 뛰어와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비켜, 이 악땅! 우리 어몬니 개로피지(괴롭히지) 마!”

“어모니가 아야 하잖아!”

씩씩거리며 무섭게 위협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 덕분에, 나는 간신히 브리안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참 든든하기도 하지.

“어모니!”

“어몬니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그 틈을 타 내게 쪼르르 안겼다.

“이보네, 이 아이들은…….”

브리안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와 아이들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내 아이들이야.”

“……?”

“내 배로 낳은 내 아이들. 오빠한텐 조카들이 되는 거고.”

“……!”

내 말을 이해한 브리안의 얼굴 위로 점착 경악의 빛깔이 떠올랐다.

“대체, 누구의……!”

“그보다.”

그는 궁금한 게 몹시 많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의문을 슬며시 옆으로 치우며 물었다.

“우리 나눌 이야기가 많을 것 같은데. 방을 옮길래?”

“……그래.”

브리안은 멍청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테오도르는 한동안 호수 저택에 홀로 남아 이브의 흔적을 더듬었다.

집주인이 급하게 떠난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러운 저택에는 그녀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이를테면 저택 내부에서 발견된, 그녀의 체구에 꼭 맞을 것 같은 미처 챙기지 못한 의복이라든가.

그녀가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침대 위에서 발견한 은사 같은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라든가.

혹은 지금 그가 올라 있는,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커다란 나무라든가.

[있지, 테오도르. 다음엔 네가 체르니시아에 놀러 올래? 언니들에게 네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알려 줄 거야!]

오래전, 어린 날의 그녀가 황궁에 한 달여간 머물다 간 적이 있었다.

황궁을 떠나기 직전, 어린 이보네는 체르니시아 저택으로 그를 초대하겠다며 종달새처럼 사랑스러운 목소리로 재잘재잘 떠들었다.

[체르니시아 저택에는 커다란 호수가 있어.]

[호수?]

[응응! 호수 앞에 있는 나무 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면 오리도 볼 수 있고 물고기도 볼 수 있어!]

이보네는 손뼉을 치며 다소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체르니시아 저택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보네는 그 어느 때보다도 즐거워 보였다.

테오도르는 그것만으로도 그녀가 체르니시아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아주 커다란 황금색 물고기가 있는데, 꼭 네 눈동자처럼 예뻐. 그래서 돌아가면 그 물고기한테 테오라고 이름 붙여 줄 거야.]

[내가 물고기가 되는 거야?]

고개를 갸웃하는 테오도르를 향해 이보네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이, 그게 아니라…….]

그러더니 이내 두 눈을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으며 말했다.

[가장 크고 예쁜 물고기란 말야. 꼭 너처럼.]

그 말에 테오도르는 잠시간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쳐다보았다.

배시시 웃는 그 예쁜 얼굴에 한순간 홀려 버렸던 것 같기도 했다.

이윽고 정신을 차린 테오도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좋아. 꼭 초대장을 보내 줘, 이보네.]

그리고 그것은 끝내 지켜지지 못한 약속이 되고 말았다.

“여기도, 호수가 보이네.”

테오도르는 그 시절보다 훨씬 더 크고 굵어진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여 보았다.

제게 얽히던 자그마한 손가락의 온기가 유독 그리워, 가슴 위로 시큰한 바람이 불었다.

아르벨라의 마녀가 머물렀다는 호수 저택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그 나무 위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면, 가까이 펼쳐진 호숫가에 오리도 보이고 물고기도 보였다.

테오도르는 황금색 물고기를 찾으려고 눈에 힘을 주었으나, 보이지 않았다.

“왜 황금색 물고기는 없지.”

테오도르는 음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수년 전, 이곳에 막 정착한 이보네가 황금색 물고기를 발견하자마자 작살로 낚아 로라와 함께 구워 먹었다는 사실은 영영 알지 못할 것이다.

“폐하!”

아래에서 그를 찾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린든을 비롯한 황제의 호위단원들이 뒤늦게 그를 찾아 호수 저택에 당도했다.

테오도르는 무심한 눈빛으로 그들을 힐긋 내려다보았다.

“늦었군.”

그러더니 다시 시선을 들었다.

그는 아까부터 손에 쥐고 굴리던 작은 열매를 쳐다보았다.

갈색의 작고 단단한 열매는 다름 아닌 도토리였다.

이 계절에는 결코 날 리 없는.

그러나, 그가 불과 며칠 전에 보았던.

조금 전 이 저택에서 그가 주운 것이었다.

도토리 열매에는 작은 구멍을 통해 실 한 가닥이 꿰여 있었다.

마치, 어린아이들이나 만들 법한 목걸이 모양으로.

[이거 바 바. 도또리야.]

제게 도토리를 보이며 종알거리던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생각난 순간, 그의 마음속에 확신이 피어났다.

“이곳에 이브가 있었어.”

테오도르는 속삭이듯 읊조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리고 그 아이도.”

이브와 함께 있었을, 그 아이는 누굴까.

[이브가 죽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단 건 알아요?]

일순 테오도르의 잘생긴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에른스트는 심약한 겁쟁이였지만, 거짓말을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걸 알기 때문에, 테오도르는 그 말을 온전히 외면할 수 없었다.

이따금씩 생각이 날 때면 목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따끔따끔 거슬렸다.

정말로, 이브가 아이를 가졌던 걸까?

그리고…… 이곳에서 아이를 낳고 길렀던 걸까?

어쩌면 제가 보았던 그 작은 여자아이가, 그녀의…….

‘그래서, 자꾸 내 앞에 나타나는 건가? 이브의 아이라서?’

나름 합리적인 추론이었다.

그런데, 만약 정말로 그런 거라면…….

‘아이의 아버지는 누구지?’

으레 뒤따를 수밖에 없는 질문이 그를 더욱 아프게 괴롭혔다.

에른스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브가 아이를 가진 건 4년 전 겨울이다.

그리고 열 달을 그녀의 배 속에서 버티다가 태어났을 아이는, 지금쯤 세 살가량이 되었을 테지.

테오도르는 이브를 꼭 닮았던 오딜리아를 떠올려 보았다.

‘말을 꽤 잘했는데.’

테오도르는 평소 아이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몇 번 마주친 것으로는 이브를 닮은 그 작은 아이의 나이 따위를 추정하기 어려웠다.

‘그만하면 세 살 정도 된 건가.’

그러니 혼자 고민하여도 답이 나올 리 없는 자문이었다.

에른스트의 말이 정말이라면…….

‘내 아이인 걸까.’

어쩌면 나와 이브의 아이일지도 모른다, 라고 생각하니 한순간 가슴이 벅차오르다가 곧바로 바람 빠진 공처럼 음울하게 늘어졌다.

[리아 아빠는 데릭이야!]

아이는 유독 또박또박한 말씨로 그렇게 말했다.

그 천진한 목소리가 떠오르자, 테오도르는 급격히 파괴적인 기분이 들었다.

또한 동시에 감히 제게 음울해할 자격이나 있는 것인지 반문하게 되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녀의 아이가 제 아이이든, 다른 남자의 아이이든, 테오도르는 그 어느 것도 기뻐할 수 없는 처지였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그 말에 새하얘지던 안색은 제 안의 깊은 후회로 남아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이다.

그녀를 상처 주기 위해 지어낸 말은 아니었다.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를 위해 자행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상처받을 것을 알면서 꺼낸 말이란 데에는 아주 작은 반박의 여지도 없었다.

더군다나 에른스트는 제가 이브에게 카타리나의 거짓 임신을 알렸던 그날에 의사로부터 진단을 받았다고 말하였다.

그러니까 그녀는 아이를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직후에 제게 그 잔인한 거짓을 통고받은 것이다.

그것을 떠올릴 때면 하루에도 몇 번씩 과거의 자신을 찢어 죽이고픈 충동이 들었다.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옆에서 버티면서, 이브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다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저를 보며, 이브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기억을 잃은 사이 저지른 짓거리들이 역겨워 밤중에 뛰쳐나가 토악질을 하길 수차례.

그 끝에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해치며 울부짖었다.

비록 카타리나와의 관계 어디에도 진실은 없었을지라도, 모두 제가 저지른 과오였다.

[아이의, 아버지는……?]

[글쎄요. 누구였을까요.]

제게 화풀이를 하듯 그녀의 임신 사실을 알리던 에른스트는, 끝내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알려 주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그것이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기에 말 못 하는 것이라 애써 생각했다.

이제 와 그녀에게 아이가 있을지도 모른단 확신이 드니, 무엇을 바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그녀가 제 아이를 가졌다고 생각하면…… 기쁨보다도 슬픔과 괴로움이 더욱 짙어졌다.

‘아직은 성급한 생각이야.’

테오도르는 최대한 아이와 관련된 생각들을 밀어 넣으며 느리게 심호흡을 했다.

아이가 그녀와 관계있다는 확신은 있지만, 정작 어떤 관계로 엮인 것인지는 모르는 일이다.

얼마 전 보았던 브리안 체르니시아만 하여도 그녀와 참 닮지 않았나.

체르니시아는 모두 그따위로 예쁘게 생겼으니, 어쩌면 그녀와 혈연으로 맺어진 먼 친척 아이를 거둔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에른스트는 그 당시 조금 미쳐 있었으니까, 헛소리를 한 걸 수도 있다.

‘그만 생각해.’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자, 차츰 마음이 평온해져 갔다.

어느덧 감정을 잠재운 그가 느른한 미소를 띤 채로 그녀의 흔적이 머문 저택을 둘러보았다.

그가 멀쩡함을 확인한 기사들이 쉴 틈 없이 달려오느라 지친 말을 묶어 두고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잠시 그들을 쳐다보던 테오도르의 눈매가 뾰족해졌다.

“너희.”

“부르셨습니까, 폐하.”

“뭔데 이브의 공간에 멋대로.”

“네?”

테오도르는 정작 그 자신 또한 초대받은 적 없는 손님이란 사실을 잊어버린 채, 괜한 분노를 태웠다.

“당장 대문 밖으로 꺼져.”

사나운 일갈에 기사들은 영문 모른 채 저택 밖으로 쫓겨났다. 괴팍한 상관을 향한 욕설을 속으로 구시렁거리며.

다시금 조용해진 저택을, 테오도르는 흐뭇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이곳에서 발견한 도토리 한 알이 들려 있었다.

무심히 손으로 도토리를 굴리며 저택의 정원을 걷던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며 눈가를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럼 데릭은 누구지?’

생각하지 않으려 하여도 불현듯 떠오르는 불쾌한 의혹이 그의 기분을 몹시 저조하게 만들었다.

데릭은 누구고, 또 아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한다던 에른가 뭔가 하는 놈은 또 누구며…….

테오도르의 잘생긴 얼굴이 수심에 젖었다.

그가 저택 뒤뜰의 모퉁이를 막 돌 무렵이었다.

바스락-

멀리서 사람의 인영 하나가 후다닥 도망치는 게 보였다.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그 즉시 가늘어졌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손바닥 위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곧바로 단검의 형상을 갖추며 달아나는 인영을 향해 쏜살같이 날아갔다.

퍼억! 쿠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인영이 거꾸러졌다.

테오도르는 느릿한 걸음걸이로 그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자박.

자박.

자박.

우뚝.

걸음을 멈추어 선 테오도르가 천천히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건장한 체구의 남자가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성력으로 만들어 낸 단검이 남자의 옷자락을 흙바닥 위로 박아 넣었다.

덕분에 남자는 도망가지도 못하고 흙바닥 위에서 허우적거렸다.

테오도르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뜻하지 않게 ‘데릭’을 발견했다.

“여기서 다시 만나네, 쥐새끼.”

이브와 함께 달아났던 프레데릭 왕자였다.

그의 애칭이 ‘데릭’이라는 것쯤은 진작에 파악한 터였다.

[여, 연인입니다!]

저 오물같이 생긴 놈이 정말로 이브의 연인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찌 됐든 ‘데릭 후보 1순위’가 아닌가.

이브를 닮은 아이의 아빠일지 모르고, 또 이브의 연인일지도 모르는 남자…….

순간, 테오도르의 입가에 머물러 있던 서늘한 미소가 소리 없이 사라졌다.

“이 쥐 같은 새끼야.”

미묘하게 욕설처럼 들리는 음성에 프레데릭은 ‘히익!’ 숨을 삼키며 덜덜 떨었다.

* * *

브리안과 나는 옆방으로 자리를 옮겨, 지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셀린느의 도움으로 몸을 피할 수 있었어.”

셀린느라면 나도 기억하는 이름이었다.

셀린느 레오브란테.

브리안의 약혼녀였던 여자.

내가 에른스트의 도움으로 페르디난트에 숨어 살아남았던 것처럼, 브리안은 그녀 덕분에 레오브란테에 몸을 의탁하였다고 했다.

그곳에서 쭉 숨죽여 지내다가, 몇 해 전 체르니시아의 복권과 관련하여 이야기가 오가는 것을 알게 되며 나를 찾아 움직였다고.

그것은 아마,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기 전 나와 사이가 좋았던 때를 일컫는 것을 테다.

당시의 테오도르는 어떻게든 내 가문을 다시 일으켜 주고자 홀로 괴롭게 싸웠었지…….

“어쩌면 네가 살아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다른 가족들은…….”

브리안은 잠시 말끝을 흐렸다.

굳이 말을 잇지 않아도 뒷말을 알 것만 같아, 내 얼굴도 덩달아 흐려졌다.

“아무튼 너를 찾으려고 했는데, 잘 안 됐어. 에른스트 황자에게도 연락을 보냈는데…….”

“그럼 4년 전에 에른스트에게 편지를 보낸 게 브리안 오빠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아니, 그게…….”

나는 에른스트에게 도착했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의 편지를 떠올렸다.

그 이후 갑작스럽게 알게 된 임신 사실에 황궁을 급히 떠나면서 잠시 잊고 있었는데, 그게 브리안이 보낸 것이었다니…….

“일단 오빠 이야기를 계속해 봐.”

“원래는 황제의 약혼식을 틈타 에른스트 황자에게 한 번 더 접근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약혼식이 연기되면서 실패했어.”

“…….”

내 입술이 가만히 다물렸다.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약혼식을 망가뜨린 것은 나였다.

만일 약혼식이 그대로 진행되었더라면…… 조금 더 일찍 브리안을 만날 수 있었을까?

“그러다 황제 폐하의 호위 기사단장인 린든 경을 만났고.”

“아, 린든 경…….”

“폐하께서 은밀히 명을 내리셨대.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찾아오라고.”

“…….”

나의 입술이 다시 한번 다물렸다.

기억한다.

린든 경은 나와 테오도르의 관계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테오도르가 낙마 후 기억을 잃은 당시 그의 곁에 없었다.

사람들에게는 비밀리에 황명을 수행하러 떠났다고 알려져 있었다.

언제나 황제의 곁을 떠나지 않던 수석 호위 기사의 부재에 사람들은 자못 궁금해하곤 했었다.

수개월이 지나도 그가 다시 나타나지 않자, 황제의 명을 수행하다 비명횡사했다는 그런 흉흉한 소문마저 돌았었다.

역사 속에서 황제의 측근이 황명을 수행하다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하였기에, 나와 동료 기사들은 모두 암묵적으로 그 소문을 기정사실이라 믿었다.

차마 누구도 입 밖으로 먼저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테오도르는…… 내 가족을 찾아 주려 했었구나.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린든 경만 그의 곁에 있었더라면,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믿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마지막까지 나를 위해 주었다는 걸 고마워해야 할지, 그 결과 벌어진 일들에 원망해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그러다 세상이 뒤숭숭해지면서 잠시 그 이야기가 쏙 들어갔는데, 며칠 전에 폐하께서 날 이곳으로 불러 약속하셨어.”

“…….”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고.”

브리안은 말했다. 황제가 정말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추진 중이라고.

“그리고 체르니시아를 위해 네가 필요해, 이보네.”

“내가?”

“네가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되어 주어야 해.”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내가…… 가주가 돼야 한다고?”

되묻는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본래 군터 할아버지의 뒤를 이을 체르니시아의 차대 가주는 리하르트 오라버니였다.

그러나 십수 년 전 나의 체르니시아가 시뻘건 화마에 삼켜지던 날, 리하르트 오라버니는 내가 보는 앞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지금,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나와 브리안뿐이었다.

나와 브리안 중 한 명이 체르니시아를 이끌어야 한다면, 그것은 응당 브리안의 몫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리안은 그것이 나의 몫이라 주장한다.

“오빠는?”

“난…… 음…….”

내 물음에 그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살짝 붉히며 대답했다.

“올해가 가기 전에 셀린느와 식을 올리기로 했어. 그런데 지금 셀린느가 레오브란테의 가주거든.”

“아…….”

나는 앓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긍했다.

셀린느와 결혼을 하면, 브리안은 레오브란테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럼 남은 체르니시아의 사람은 오직 나뿐이다.

“게다가 검기도 발현하지 못한 체르니시아의 주인이라니, 그건 말도 안 되잖아.”

“…….”

그 또한 옳은 말이었다.

단순히 체르니시아의 전통 때문이 아니다.

체르니시아의 억울함이 밝혀지지 않은 지금, 가문의 복권을 위한 가장 합당한 명분은 바로 ‘검기’일 테니.

정확히는 ‘마물을 물리치는 힘’을 향한 사람들의 갈망을 이용하려는 심산이겠지.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건 단순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아닌 마물을 물리쳐 줄 영웅이야.”

그리고 브리안은 그런 나의 짐작에 쐐기를 박듯, 또박또박한 음성으로 다시 한번 일깨워 주었다.

“그런데 검기도 발현하지 못한 내가 체르니시아의 주인이 될 순 없잖아.”

“…….”

나는 한동안 말이 없어졌다.

이런 내 반응을 의아하게 여긴 브리안이 조심스럽게 나를 불렀다.

“이보네……?”

“불가해.”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답했다.

“불가하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도 봤다시피, 난 아이들도 있고…….”

“그건 전혀 문제 되지 않아.”

“…….”

브리안의 말이 옳았다.

내게 아이가 있는 것은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말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아빠가 테오도르인걸.’

체르니시아의 가주가 된다는 건, 어떻게든 다시 테오도르와 얼굴을 맞대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을 뜻했다.

‘황제가 미쳐 버렸다고 했었지.’

잠깐 마주쳤을 때, 테오도르는 실제로 눈이 반쯤 돌아가 있었다.

[안녕, 쥐새끼야.]

나는 그렇게 나긋한 목소리로 사르르 웃으며 살기를 뿜어 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어린 황자 시절부터 흉흉한 소문을 잔뜩 몰고 다니던 남자였지만, 그렇게 회까닥 돌아 버린 눈을 하고 있는 것 또한 처음 보았고.

가뜩이나 그는 잡으면 죽여 버릴 기세로 나를 공격했었다.

그런 그가 나를, 욕설 가득한 편지를 남기고 그의 약혼식마저 망가뜨린 채 달아난 이브 로웰린을 발견하게 된다면.

그리고 그 이브 로웰린에게 자신의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나는 아직도 그와 나누었던 마지막 대화가 잊히지 않았다.

내가 일말의 미련도 없이 그를 떠나게 하였던 바로 그 대화.

‘카타리나를 잃고 미쳐 버렸다는 그놈이 내 아기들을 해칠지도 몰라. 혹은 후사가 없으니, 옳다구나 하고 황궁으로 빼앗아 갈지도 모르지.’

내가 다시 그의 앞에 나타난다면, 아이들의 친부가 누구인지 들키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까?

다행히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모두 나를 닮아서, 외양만으로는 테오도르의 아이란 걸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나…….

‘린든 경이 돌아왔으니, 내가 이보네란 것을 알게 되었을까? 아니면…… 여전히 기억을 떠올릴 때마다 머리가 아파서 날 기억하지 못할까.’

나는 이제 와 차라리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길 바랐다.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을 이보네와 닮은, 그러나 전혀 다른 사람으로 여겼으니까.

차라리 그가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적당히 모른 척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브리안이 나의 믿음을 저버리며 말했다.

“그리고 폐하께서도 네가 여기 있는 걸 알아.”

“뭐?”

순간 나는 화들짝 놀라 반문했다.

“황제가 나를, 그러니까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응. 그래서 날 이곳으로 부른 거라 했어. 널 찾으려고.”

머릿속이 더욱 복잡해졌다.

테오도르가 그날 내 얼굴을, 그러니까 이브 로웰린의 얼굴을 보았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왜 날 이브 로웰린이 아니라 이보네라고 생각한 거지? 역시 둘이 동일 인물이란 걸 알아차린 걸까?’

테오도르의 곁에는 이제 린든 경이 있으니, 그가 말해 주었을 수도 있고…….

혹은 벼락처럼 과거의 기억을 되찾은 걸 수도 있고…….

‘아니야. 아직 모르는 일이야.’

그러나 나는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과거에도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인가 기대하였다가, 그것이 아님을 알고 실망한 적이 한두 번이었던가.

‘어쩌면 내가 검기를 사용했으니까, 그걸 알아본 것일 수도 있어.’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검기를 발현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였지만, 테오도르는 황자였으니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혼자 추측해 봐야 소용이 없는 일이다.

결국 테오도르를 직접 마주치기 전까진 무엇도 확신할 수 없었다.

“이보네, 지금이 가문을 다시 일으킬 유일한 기회일지도 몰라.”

“하아……. 그래, 이 시기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다시 체르니시아를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

“혹시 내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거야?”

“음…….”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자 브리안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계속 내 이야기만 했지. 이제 네 이야기를 해 봐.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그리고 그 아이들은 어떻게 된 건지.”

“그게…….”

나는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나의 지난 이야기를 꺼냈다.

* * *

“그러니까.”

나지막이 내리깔린 음산한 목소리가 비틀린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너는 그 여자와 아무런 사이도 아니다?”

말끝을 뾰족하게 올리는 순간, 남자의 황금색 눈동자 위로 희번덕한 광채가 번뜩였다.

흡사, 사람을 눈빛으로 질식시킬 수 있는 마귀가 존재한다면 저런 눈동자를 지니지 않았을까, 싶은 그런 눈이었다.

나무 위에 거꾸로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프레데릭이 훌쩍훌쩍 울며 대답했다.

“네, 네! 정말,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닙니…….”

“거짓말 치지 마.”

테오도르는 사정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네 부하 놈이 다 실토했어. 두 사람이…….”

이를 악물고 흘려보낸 목소리는 쥐어짜 낸 것처럼 볼품없었다.

“연인 사이라며.”

“저, 정말, 정말 아닙니다. 억울합, 흐윽…….”

프레데릭은 이 자리에 없는 로덴을 원망했다.

대체 그는 왜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해서 저를 이리 고통스럽게 만든 건지.

“그럼, 그건 뭐지? 네 이름으로 주문한, 아기 옷들.”

프레데릭의 이름으로 끊임없이 들어오던 물건들을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두 눈에 힘이 부릅 들어갔다.

아기 옷과 아기 신발, 아기들이 좋아할 법한 귀여운 인형과 임부에게 좋은 찻잎들…….

[프레데릭 왕자님께서 몇 년 전부터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몰래 만나던 아가씨가 있는데, 최근 그 아가씨께서 임신을…….]

[여, 연인입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리아 아뺘는 데릭이야!]

순간 테오도르의 안에서 무언가가 뚝, 하고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끊어진 무언가는 아마도 그를 지탱하던 인내심, 내지는 이성일 것이다.

“네가, ‘데릭’이지?”

묻는 목소리에 살의와 광기가 실려 있었다.

“네가 ‘데릭’이고, 나의 이브를…… 감히, 나의 이브를…….”

테오도르는 당장 눈앞의 이 ‘데릭’을 갈기갈기 찢어 죽이고 싶었다.

그녀의 연인이 ‘데릭’이라면, 그리고 그녀의 아이의 아버지가 ‘데릭’이라면.

이 ‘데릭’이란 놈을 죽여 없앤 뒤 제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될 일이 아닌가.

그녀의 연인이란 자리도.

그녀의 아이의 아버지란 자리도.

“그, 그건 제 정혼녀가 아이를 가져서, 커, 흑……!”

“그러니까, 쥐같이 생긴 네놈이 내 이브를 임신시켰다는 거 아냐?”

“네, 네?”

프레데릭은 화들짝 놀라며 두 손을 내젓고자 하였다.

그러나 밧줄로 꽁꽁 묶인 탓에 여의치 않았다.

“이, 이브라니요? 저는 그런 사람 모릅니다!”

“감히, 누굴 속이려고.”

프레데릭의 말을 혼자 살아남으려는 핑계라 여긴 테오도르가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어찌나 확신하는 목소리로 협박을 하는지, 프레데릭은 하마터면 제가 정말로 이브라는 여자에게 저도 모르는 사이 실수를 한 것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어, 억울…….”

“억울?”

그러잖아도 사납던 테오도르의 눈매가 더욱 날카롭게 변모했다.

테오도르는 세상에 몹쓸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프레데릭을 쳐다보았다.

그 자신이 타인의 인성 운운할 만큼 썩 좋은 인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러나 가만 보니 저 프레데릭이란 놈은 저보다 더한 놈인 것 같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저 오물 같은 얼굴로 그녀를 홀려 놓고서…….

임신한 그녀에게 위험한 일까지 시키더니…….

이제 와 혼자 살겠다고 그녀를 모른 척하기까지 해?

“완전 쓰레기잖아, 이거.”

“흑, 흐윽…… 저, 정말입니다. 그런 여자 정말로 모릅, 모릅, 흐윽…….”

테오도르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표정으로 삐딱하니 팔짱을 꼈다.

“그럼, 이 집엔 왜 나타난 건데?”

“네, 네?”

“이브와 정말 모르는 사이라면, 이 집엔 왜 나타나고, 왜 그녀와 함께 도망쳤는데?”

“그, 그 여자의 이름이…… 이브였습니까?”

프레데릭이 코를 훌쩍이며 물었다.

꽤나 신명 나는 연기라고 생각하며, 테오도르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떴다.

그 명백한 의혹의 눈초리에 프레데릭은 흐엉엉 울며 항변했다.

“그, 그 여자에게 저는 그냥 삼십억 골드였습니다. 그날 칼리고르 왕성에서 처음 본 여자였어요. 이름도 이제 알았다고요.”

“삼십억, 골드?”

테오도르는 눈가를 찡그리며 반문했다.

* * *

다시 수도로 돌아가는 길.

테오도르의 기분은 한결 좋아져 있었다.

프레데릭을 괴롭히고 심문한 끝에 이브에 대한 것들을 탈탈 털어 알아낸 터였다.

일단 이브는 그 오물 같은 놈과 연인이 아니었으며, 왕자에겐 다른 연인이 따로 있었다.

마도사가 어째서 거짓말을 한 건진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오해가 있었다.

그리고 이브가 그날 제 앞에 나타난 건…….

[아, 아버지로부터 의뢰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삼십억 골드를 대가로 저를 왕성에서 탈출시키기로…….]

도망친 칼리고르 국왕의 의뢰 때문이었다.

미꾸라지처럼 도망치는 것을 구태여 쫓는 것마저 귀찮아서 내버려 두었는데, 생각보다 쓸모 있는 짓거리를 했다.

‘돈이 필요했나. 고작 삼십억 골드에 위험을 감수할 만큼.’

왕자가 이브와 함께 있던 건 아주 짧은 며칠뿐.

이브는 삼십억 골드를 받아 낸 뒤, 갑자기 저택을 정리하고 떠날 준비를 했다고 한다.

[그 뒤로 저도 저택 밖으로 내보내져서, 이후의 일은 잘 모릅니다.]

[그럼 여긴 왜 다시 기어들어 온 거지?]

[아, 그게 두고 온 게 있어서…….]

프레데릭은 두고 온 것이 생각나 호수 저택을 다시 찾았다가 이 사달이 났다고 했다.

[두고 간 것?]

[아, 저…… 그…… 손에 쥐고 계신…….]

테오도르의 목에는 어리숙한 칼리고르의 왕자가 두고 간 것이라는 자그마한 도토리 목걸이가 어울리지 않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테오도르는 그가 두고 간 것이 이 도토리 목걸이란 것을 알고 곧바로 강탈했다.

이 목걸이는 덜떨어진 칼리고르 왕자의 태어날 아기를 위해 그녀의 아이들이 만들어 준 것이라 했다.

그래, 아이들.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아이가 둘이었다고…….’

이브가 그 쥐 같은 놈과 아무런 접점이 없다는 데에 기분이 나아졌으나, 이어 떠오른 사실이 테오도르를 조금 울적하게 만들었다.

프레데릭이 이곳에서 만난 아이는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둘이라고 했다.

테오도르는 차마 왕자에게 남자아이가 몇 살 정도 되었느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어찌 되었든 그녀에게 아이가 둘이나 있다는 건…….

‘젠장.’

만에 하나 그 여자아이가 자신과의 아이라 하더라도, 이브가 또 다른 남자와 아이를 가졌다는 거니까.

‘상관없어.’

테오도르는 치미는 욕지거리를 짓씹으며 생각했다.

그래, 상관없었다.

그녀의 아이라면 응당 그녀를 닮았을 것이니, 그녀를 닮은 사랑스러운 생명체가 하나 더 생기는 것뿐이리라.

그러니까 이렇게 불쾌한 감정도, 정체 모를 아이의 아버지를 향한 분노와 살의도, 모두 불필요한 것들이다.

왕자를 털어 알아낸 것에 따르면, 그녀에게 다른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왕자가 이브와 함께 있던 시간은 매우 짧았으니 미처 알아내지 못한 것인지도 모르나, 그 또한 상관없었다.

‘눈에 띄면 죽여 버리면 그뿐.’

테오도르는 그렇게 생각하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조금만 잘못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균열이 깨질 듯한 아슬아슬한 그 분위기에, 그를 따르는 기사들은 죽을 맛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의 일행이 칼리고르 왕성에 당도하였을 때.

성 안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내가 없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인상을 찌푸리며 묻자, 기사 하나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대답했다.

“브,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

“사라졌습니다.”

멈칫.

테오도르의 얼굴이 성 안 분위기 못지않게 흉흉해졌다.

“당장, 사람을 풀어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찾아.”

* * *

나는 창가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았다.

황제의 기사들이 거리 곳곳을 부산스럽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브리안을 찾고 있는 모양이군.’

예상치 못한 브리안과의 만남 때문에 칼리고르를 벗어날 때를 놓쳐 버리고 말았다.

지금쯤 테오도르가 돌아왔을 테니, 항구는 이미 봉쇄되었으리라.

나는 차츰 생각이 깊어졌다.

사랑하는 나의 체르니시아, 그리고 기어이 나의 평화를 깨뜨릴 테오도르.

무엇도 쉽게 결정짓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한편 홀로 근심이 깊어 가는 나와 달리, 아이들은 브리안에게 매달려 신나게 재잘거리는 중이었다.

“구니까 삼쫀은 어몬니의 오빠인 거야?”

오딜리아가 브리안의 왼쪽 팔에 매달려 물었다.

“에르도 리아의 오뺘야!”

에르빈은 브리안의 오른쪽 팔에 매달려 외쳤다.

“아냐! 에르 리아 오뺘 아냐!”

“왜 아냐?”

“리아 셰 살. 에르도 셰 살. 구니까 에르는 리아 오빠 아냐!”

“에르 리아 오뺘 하고 시푼데…….”

“왜?”

“구롬 에르가 리아 지켜 줄 수 이짜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브리안을 가운데 두고서 주거니 받거니 대화를 했다.

잠자코 그 대화를 듣던 브리안이 하하 웃으며 에르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멋진 생각이네, 에르빈.”

“헤헤.”

브리안의 칭찬에 에르빈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리아두, 리아두 멋찐 리아네 해 줘요!”

그것을 본 오딜리아가 두 팔을 뻗으며 제 머리도 쓰다듬어 달라 동동거렸다.

“으응, 리아도 멋있어.”

“헤헤헤.”

이번에는 오딜리아가 조금 전 에르빈과 꼭 같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었다.

잠잠히 그 모습을 지켜보자니, 자못 심각하게 굳어 있던 내 얼굴 위로 잔잔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내게 가장 소중한 건 에르와 리아지.’

나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뒤, 브리안을 불렀다.

“브리안 오빠.”

나직한 부름에 내내 아이들과 함께 놀던 브리안이 이쪽을 돌아봤다.

“나, 결정했어.”

브리안은 제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간신히 로라에게 맡기고서,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그에게 내내 생각한 것을 이야기했다.

나와 닮은 브리안의 녹색 눈동자가 차츰 깊어졌다.

“그래.”

브리안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선택 존중해, 이보네.”

* * *

브리안이 테오도르의 기사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해가 한참 저문 뒤였다.

그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에, 테오도르는 헐레벌떡 뛰어왔다.

“브리안 체르니시아.”

“폐하.”

“어떻게 된 거지?”

브리안의 양어깨를 붙잡으며 묻는 목소리가 퍽 조급해 보였다.

“오전에 거리를 걷던 중, 이보네를 만났습니다.”

“……!”

“폐하의 말씀과 같이 정말로 이보네가 이곳에 있었습니다.”

“이브는, 이보네는 어디에 있지?”

브리안의 어깨를 움켜쥔 테오도르의 양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이보네는…….”

브리안은 말을 하다 말고 가만히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를 응시하는 브리안의 시선이 묘하게 적대적이었다.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한 시선이었으나, 이브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이야기에 테오도르는 미처 그 시선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함께 폐하를 뵈러 가자고 했지만, 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며 단호하게 말하더니 저를 기절시키고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정신을 차려 보니 저는 인적 드문 골목에 잠들어 있었고……. 말하는 것이나 행색으로 보아, 저를 기절시키고 시간을 번 뒤에 서쪽 대륙을 완전히 떠나려는 것 같았습니다.”

“…….”

“그게 오전의 일이었으니, 지금쯤 이곳을 완벽히 떠났을 겁니다.”

테오도르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오전이면, 제가 그녀를 찾아 아르벨라 영지로 향한 때였다.

그녀의 흔적을 찾고서, 앙큼하게도 저를 엿 먹인 그녀를 생각하며 기쁨에 젖어 있던 때이기도 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확신을 얻은 뒤로 붕 떠 있던 기분이 아래로 추락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이곳에 있는데, 그녀가 제 형제를 외면하고 떠났다고?

어쩌면 그녀는, 제 가문을 저버리고 가족을 외면할 만큼이나 저를 다시 만나기 싫었던 걸까?

테오도르는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었다.

꾸욱-

뭉툭한 손톱 끝이 살갗을 아프게 찔렀다.

그녀가 자신의 체르니시아를 얼마나 사랑하였는지는, 누구보다 테오도르 그 자신이 가장 잘 알았다.

아주 어렸던 시절에도, 그리고 다시 만난 이후에도 제 가문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늘 두 눈을 반짝이고 그리워하던 그녀였다.

그것을 잘 알기 때문에 브리안을 이용하고자 이곳으로 불러들이기까지 한 게 아닌가.

‘아니, 지금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

테오도르는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제가 수도를 비웠다 하여 그렇게 쉽게 떠날 수 있었을 리 없다.

곳곳에 제국군이 깔려 있지 않은가.

“린든, 항구로 사람을 보내, 오늘 떠난 선박의 승선 명단을 조사하거라.”

“네, 폐하.”

테오도르는 그녀의 흔적에 취해 조금 더 일찍 오지 못한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그녀를 마주친 곳이 어디지?”

테오도르는 브리안이 알려 준 장소를 향해 뛰쳐나갔다.

후미진 골목을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그를 향해 이곳저곳에서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다.

그의 외모는 어디서나 눈에 띄었다.

흉흉한 소문의 검은 머리카락으로도 가려지지 않는 잘생긴 얼굴과 척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의복이 그가 누구인지 알려 주었다.

사람들은 황제가 찾는 이가 누구인지 궁금하였으나, 최대한 신경 쓰지 않고자 애를 썼다.

공연히 저 미친 황제와 눈이 마주치기라도 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그 잘생긴 얼굴에 자꾸만 눈이 가려는 것은 막을 도리가 없었다.

평소라면 그런 사람들에게 패악을 부렸을 터지만, 제게 향한 시선마저 알지 못한 채 이브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이브를 찾지 못했다.

툭, 투둑.

문득 차가운 것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른 봄, 비가 한두 방울씩 내리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우왕좌왕하며 비를 피해 흩어졌다.

썰렁한 거리에 남은 것은 테오도르와 그를 따르는 기사들뿐.

“폐하.”

마찬가지로 비를 맞으며 다가오는 린든의 얼굴이 다소 창백했다.

“저…… 이것을…….”

린든은 테오도르가 지시한 오늘 출항한 선박들의 승선 명단 중 하나를 건넸다.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11:47 이브 로웰린 외 3인 탑승 확인.>

……이브의 이름이 그곳에 있었다.

“정오에 출발한 선박이라 합니다.”

“행선지는?”

“중간 정박지가 많아 특정하기 어렵습니다.”

린든은 이브를 태운 선박이 여러 대륙을 돌고 돌아 1년 뒤에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라 설명했다.

“…….”

잠자코 그의 설명을 듣던 테오도르가 손에 쥔 종잇장을 와락 구겼다.

‘어쨌든, 이브가 그 정박지 중 한 곳으로 향한다는 거잖아.’

그녀가 죽었다고 믿었던 지난 4년여의 고통에 비하면, 괜찮았다.

훨씬 견딜 만했다.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추적추적 내리는 봄비가 테오도르를 적셨다.

“폐하, 이제 어떻게 하실 겁니까?”

린든이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는 걱정이 가득했다.

혹시나 테오도르가 환궁을 하지 않고 또다시 그녀를 쫓겠다고 그럴까 봐.

이미 그녀는 드넓은 망망대해를 항해하고 있지 않나.

테오도르가 제아무리 막강한 힘을 가졌다 하더라도, 바다 위의 그녀를 쫓는 것은 불가했다.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지극히 상식적인 명령을 내렸다.

“환궁을, 준비하라.”

“폐하……!”

그에 린든의 얼굴이 단번에 밝아졌다.

“당장 전군에 알리겠습니다!”

이윽고 환궁 명령이 전군에 전달되었다.

테오도르는 바삐 움직이는 군사들을 보며, 천천히 걸음을 돌렸다.

비록 시간을 거슬러 그녀를 되찾진 못했지만.

‘그렇지만…… 네가 살아 있었어.’

살아 숨 쉬는 그녀를 이곳에서 발견했다.

‘그리고 나는 널 반드시 다시 찾을 수 있을 거야.’

그러니, 테오도르는 반드시 그녀를 다시 찾아낼 것이다.

수년 전, 모두가 죽었다고 입을 모아 말하던 체르니시아의 막내딸을 페르디난트에서 찾아 데려왔던 것처럼.

테오도르는 그 한 가지 희망에 기대어 제국으로 돌아가는 것을 택했다.

* * *

알브레히트 황제 테오도르는 4년여에 걸친 정복 전쟁을 마치고 본국으로 귀환했다.

마법진을 이용하면 곧바로 환궁할 수 있었으나, 전승을 기념하는 행렬을 위해 구태여 몇 날 며칠 말을 타고 이동해야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귀찮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는 그저 멍한 상태였으며,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오로지 하나였다.

이브.

살아 있는 이브.

마물을 때려잡는 이브.

자신을 보고 달아난 이브.

호수 저택의 이브.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버린 이브.

체르니시아를 외면하고 떠난 이브.

이브.

이브.

이브…….

그렇게 테오도르는 스스로가 무슨 정신인지도 모른 채 돌아왔다.

거리에 쏟아져 나온 알브레히트 제국민들은 귀환한 황제를 무척 반겼다.

비록 오래전부터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니던 황제이지만 어찌 되었든 정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무수한 마물들도 토벌하였으니 그야말로 현세대의 영웅이었다.

거리의 사람들이 그를 향해 꽃을 뿌리고 환호를 보냈다.

응당 그 귀환 행렬의 주인공이어야 할 테오도르는 무감각한 눈으로 그 광경을 스윽 훑어보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최근의 그는 눈을 뜨고 지내는 시간보다 감고 지내는 시간이 더 많았다.

이렇게 눈을 감고 있으면 감은 시야 위로 그녀가 떠오르곤 했으니까.

황궁으로 돌아온 테오도르가 제일 먼저 한 것은 체르니시아의 복권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 올리는 것이었다.

이브는 데려오지 못했으나, 브리안이 이곳에 있었다.

비록 그는 검기를 발현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체르니시아였다.

본디 땅의 마물을 물리치는 게 그들의 역할이었기에, 마물들의 범람으로 혼란스러워진 제국에는 체르니시아라는 이름만으로도 정국을 안정되게 해 줄 것이다.

게다가 아직 모르는 일이다.

셀린느 레오브란테가 성년이 지난 이후에 신성력을 발현했던 것처럼, 브리안 또한 뒤늦게 검기를 보일지 누가 아나.

그의 피를 타고 이어질 혈족 중 누군가 장차 검기를 발현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무시할 수 없었다.

때문에 사람들은 벌써부터 기대감에 술렁거렸다.

그리고 오늘이 바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위한 새 가주 임명식이 있는 날이다.

새 가주의 임명식은 황궁에서 이루어진다.

황궁 내부까지 들어오지 못하는 제국민들이, 새벽부터 황궁의 정문 앞에 양옆으로 길게 줄지어 서서 새 가주의 입장을 기다린다는 소식이 황궁 안 테오도르에게까지 전해졌다.

“제국민들의 기대가 하늘을 찌를 정도라고…….”

“그래.”

테오도르는 삐딱하니 턱을 괸 채 아르민의 보고를 건성으로 흘려들었다.

체르니시아의 복권은 그가 황제가 된 직후로 오랫동안 준비해 온 일이었다.

그러나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감흥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 그녀가 이 자리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폐하께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그 말을 하며 수줍게 얼굴을 붉히던 이브가 생각이 났다.

그녀는 언제나 체르니시아의 무고함이 밝혀지고 가문이 복권되기를 고대하였다.

[응. 네 가문을 복권시킬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너를 나의 부인으로 맞이할게.]

그렇게 말해 놓고서.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줘.]

정작 그녀의 바람을 이루어 주지 못한 채로, 모자란 놈처럼 기억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후, 그녀는 제 곁을 떠났지.

아니, 제가 그녀를 제게서 떠나게 만든 거였다.

“폐하, 체르니시아의 새 가주가 입장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아르민이 그의 상념을 깨뜨렸다.

테오도르는 어느 순간 제가 또 이브를 떠올리고 있었단 것을 깨달았다.

피식-

그의 잇새로 야트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조금만 마음을 놓고 있으면, 머릿속이 온통 그녀로 차오르곤 했다.

이따금씩은 일상생활에 지장이 갈 정도였으나, 테오도르는 그런 자신의 상태가 싫지 않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언젠가 돌아올 그녀를 위한 중차대한 일을 진행하는 중이다.

이 순간에 집중해야 했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저 멀리서부터 체르니시아의 새 가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새 가주는 체르니시아를 상징하는 녹색 정복을 입고 있었다.

검을 주로 사용하기 때문에 팔의 움직임을 방해하지 않도록 고안된 짧은 기장의 제복은 과거 체르니시아의 사람들이 격식을 차려 입던 복색이기도 했다.

화려한 꽃과 깃털, 금줄로 장식된 녹색 모자와 오직 가주만이 두를 수 있는 펄럭이는 긴 망토.

“…….”

잠잠히 그것을 응시하던 테오도르의 눈이 가늘어졌다.

뭐지?

잘못 본 건가?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이브와 상당히 닮았단 것은 이미 보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여자였던가?

테오도르는 자신을 향해 당당하고 우아한 걸음걸이로 다가오는 체르니시아의 새 가주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는 마지막에 보았던 것과 달리 긴 머리를 한 갈래로 묶고 있었고, 잘록한 허리선은 멀리서 보기에도 분명한 여성의 실루엣이었다.

이상함을 느낀 것은 테오도르뿐만이 아닌지, 그의 주위로 술렁거리는 소리가 번져 나갔다.

점차 가까워질수록, 이 기이하면서도 선득한 감각이 그를 차갑게 일깨웠다.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굳은 채로 의자 손잡이를 꽈악 움켜쥐었다.

“말도…… 안 돼.”

그의 목울대가 작게 일렁거렸다.

마침내 테오도르의 앞에 도착한 체르니시아의 새 가주가 그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이브가…… 저를 찾아왔다.

[D-e-o-s-c-u-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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