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미친 황제와 아르벨라의 마녀
테오도르가 서쪽 대륙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직후, 나는 벤야민에게 제국을 떠날 것이라 선언했다.
“테오도르 황제가 없는 지금이 기회야. 지금이 아니면 또 언제 황제가 자리를 비울지 알 수 없잖아.”
“하지만…… 네가 말한 곳은 너무 멀어.”
“그러니까 황제로부터 더 안전하겠지.”
“…….”
벤야민은 내가 그의 저택을 떠나는 것을 반대했지만, 결국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럼 네가 정착할 만한 장소를 내가 물색할게. 페르디난트의 자금이라면 충분히…….”
끝내 내 고집을 꺾지 못한 그는, 어떻게든 다른 방법으로라도 내게 도움을 주고자 하였다.
“괜찮아, 벤야민. 내가 할 수 있어.”
그러나 나는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네가 무슨 수로?’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벤야민을 향해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나, 돈 많아.”
황궁을 떠날 때, 나는 결코 맨몸으로 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연인으로 지냈던 반년.
그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내게 달콤한 사랑의 밀어와 함께 갖은 보물들을 선물하곤 했다.
나는 그중에서 크기가 작고 가벼우며 돈이 될 만한 것들을 미리 챙겼다.
개중에는 알브레히트 황실의 국보급 보물도 있었다.
‘내가 훔치거나 빼앗은 게 아니라 테오도르가 억지로 안겨 준 거니까…….’
황가의 보물을 처분한다는 사실에 아주 살짝 양심의 가책이 느껴지긴 했으나, 아기를 위해 조금 뻔뻔해지기로 했다.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나를 위해 쓰는 게 아니라 아기를 위해 쓰는 거잖아?’
게다가 배 속의 아기는 무려 알브레히트 황가의 핏줄이지 않은가?
내가 아기를 테오도르의 아기로 키울 생각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말이다.
‘그러니까 우리 아기를 위해서 황가의 보물 몇 개 정도 파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지.’
그렇게 스스로와 합의를 보자 조금 불편했던 마음이 평온해졌다.
나는 테오도르의 선물들을 처분하여 새 보금자리의 정착 자금을 마련했다.
칼리고르 왕국에 도착해 제일 먼저 한 것은 저택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내가 원하는 조건은 세 가지였다.
첫째, 사람들의 왕래가 적은 곳에 위치할 것.
둘째, 호수가 보일 것.
셋째, 아기가 뛰어놀 수 있는 넓은 정원이 있을 것.
그리고 오래전 어느 몰락한 귀족이 살았다는 아르벨라 영지의 커다란 저택은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했다.
그렇게 나는 칼리고르 왕국 내륙에 위치한 호수를 품은 작은 영지 아르벨라에 자리를 잡았다.
그곳에서 나는 소수의 사용인들까지 두며, 소소하고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아르벨라는 아주 작은 영지라서, 내가 처음 이곳에 나타났을 때 영지민들은 낯선 이주민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것은 사람들과의 왕래가 아닌 고요한 평화였다.
무뚝뚝한 응대에 차츰 시큰둥한 저택의 여주인에 대한 소문들이 퍼져 나갔다. 그러나, 그럼에도 굴하지 않고 찾아오는 이들이 있었다.
대다수가 저택에 남자가 필요하니 어쩌니 하며 임산부에게 치근덕대는 몰염치한 작자들이었다.
부러 자제하던 검기를 소폭 끌어내 겁을 주고 쫓아내었더니, 괜히 마녀라는 소문만 돌았다.
“저 호수 앞 저택에 마녀가 산다고…….”
“예쁜 얼굴로 사람을 홀려서 잡아먹는다는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무덤가에 가서 시체와 춤을…….”
나에 대한 말도 안 되는 헛소문들에 어이가 없었다.
과거 흉흉한 소문을 몰고 다녔던 테오도르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그렇지만 나는 그러한 소문들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접근하는 사람들을 모두 쫓아내고 나니, 내게 남은 것은 오랫동안 바라던 안온한 삶이었다.
테오도르의 선물을 처분한 돈은 액수가 커서 저택을 구입하고도 풍족한 재산이 남았다.
덕분에 알브레히트와 멀리 떨어진 이곳 아르벨라 영지에서 아이를 낳고 기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아이들을 낳았다.
‘아이’가 아니라 ‘아이들’.
태어난 아기는 쌍둥이였다.
어쩐지.
배 속에 품고 있었을 때부터 유독 태동이 크고, 허리가 아프더라니.
[틀림없어요, 주인님! 배 속의 아기님은 남자아이예요!]
[왜?]
[왜긴요. 저는 이렇게 배 속에서부터 큰 아기는 본 적이 없다고요.]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가진 것을 모두 잃고 호숫가 근처를 돌아다니다가 물에 빠질 뻔한 걸 구해 준 뒤로 얼결에 저택의 사용인이 된 로라가 두 주먹을 움켜쥐며 외쳤다.
로라는 나보다 다섯 살이나 어렸지만, 어릴 적부터 산파였던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임산부를 많이 만나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나처럼 배가 많이 부른 임산부는 처음이라고 매번 신기해했다.
[큰 여자아이일 수도 있잖아?]
[주인님은 여자아이가 더 좋으세요?]
[음…….]
고개를 갸웃하며 태어날 아기를 상상해 보았다.
‘나를 닮았으면 남자아이여도, 여자아이여도 귀여울 것 같아.’
둘 중 하나를 고르기 힘들어 끙끙 앓던 나를 위해 브리힘 신이 축복을 내려 준 걸까.
“세상에, 주인님! 이것 좀 보세요. 아기님들이 너무 예뻐요!”
로라가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나는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아기들은 정말 작아서, 두 아이를 한 팔에 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정말 예뻤다.
‘보통 아기들은 태어나면 쭈글쭈글하고 빨갛다던데…….’
내 아기들이라서 유독 예뻐 보였던 걸까?
태어난 아기들은 처음 본 순간부터 작고, 하얗고, 요정 같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믿기지가 않았다.
이렇게 천사처럼 작고 예쁜 생명들이 내 배에서 나왔다는 게.
“그렇게 보지만 말고 어서 안아 보세요.”
그러다가 로라가 어서 안아 보라고 내게 아기를 안겨 주었을 때.
“아……!”
나는 내 품에 포옥 안기는 그 작고 따스한 온기가 너무 좋아서, 그만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내 울음소리에 아기들이 함께 울어 한바탕 소란스러워졌다.
난장판이 따로 없었으나, 로라는 이해한다는 듯 그저 흐뭇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한참 뒤, 방 안이 조용해지고 나서야 로라가 내게 물었다.
“아기님들의 이름은 생각해 두셨나요?”
“응. 남자아이는 에르빈, 여자아이는 오딜리아야.”
남자아이가 태어날지 여자아이가 태어날지 몰라 이름을 두 개나 준비해 두었는데, 잘한 일이었다.
“어쩜 아기님들이 이렇게 주인님을 닮았지요?”
로라의 말마따나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신기할 정도로 나를 닮았다.
에르빈은 은발에 금안을 지녔고 오딜리아는 흑발에 녹안을 지닌 채로 태어났으나, 그 외에 세세한 이목구비가 모두 나를 닮았다.
유독 촘촘한 속눈썹이라든지, 살짝 처진 눈꼬리라든지, 웃을 때면 볼 윗부분에 옴폭 파이는 사랑스러운 보조개와 통통한 아랫입술 같은 게 내가 기억하는 나의 어린 시절과 똑같았다.
나는 그 사실이 신기하고, 또 기뻤다.
‘테오도르를 닮지 않아 다행이지.’
아이들을 배 속에 품을 적에 제발 아기가 날 닮게 해 달라고 빌었던 나의 소원이 이루어진 건지도 모른다.
‘부디 인성도 나를 닮아야 할 텐데.’
나는 테오도르가 나의 아기들에게 물려준 것이 에르빈의 황금안과 오딜리아의 흑발뿐이기를 애타게 바랐다.
에르빈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문제가 된 건 오딜리아였다.
나는 막 태어난 오딜리아의 검은 머리카락을 보고 한참 동안 고민을 해야 했다.
검은 머리는 아주 희귀했다.
동시에 ‘고대의 어둠’이라 불리는 테네브리스의 상징 색이기도 했다.
알브레히트 제국과 달리 서쪽 대륙에서는 검은색에 대한 경시가 덜하긴 했지만, 그래도 불안했다.
‘테오도르도 검은 머리 때문에 흉흉한 소문들에 휩싸이기도 했었고…….’
나는 테오도르가 1황자 시절 머리 색을 마법으로 감추었던 게 생각이 났다.
며칠 뒤 벤야민이 찾아왔다.
나는 태어난 아기들을 멍하니 쳐다보는 그에게 물었다.
“벤야민, 혹시 너의 술법으로 오딜리아의 머리 색을 감출 수 있을까?”
“그다지 어려운 건 아니야.”
벤야민에게 나와 에르빈의 머리카락을 한 올씩 뽑아 넘겨주었다.
그러자 벤야민은 아주 손쉽게 오딜리아의 흑발을 은발로 바꾸어 주었다.
곱슬곱슬한 은색 머리카락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오딜리아는 꼭 나의 어릴 적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아이들은 쑥쑥 자랐고, 그렇게 내가 테오도르를 떠난 지도 벌써 4년이 지났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어느덧 세 살 생일을 지나, 어엿하게 말도 하고 뜀박질도 하는 훌륭한 어린이가 되었다.
* * *
“이고 지쨔(진짜) 리아 주는 고예요?”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아래에서 들려왔다.
“그럼! 이건 수도에서 들여온 최고급 가죽과 솜으로 만든…….”
보라색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앙증맞은 드래곤 인형을 흔들며 거창하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꺄아! 너무 기여워! 뚜래고(드래곤)!”
오딜리아는 남자의 손에 들린 드래곤 인형을 보며 초록색 두 눈을 반짝였다.
아이가 짧은 다리로 방방 뛸 때마다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카락이 함께 흔들렸다.
“안 대, 리아.”
에르빈이 옆에서 오딜리아의 소매를 붙잡으며 말렸다.
“암꼬나 바두먼 안 대.(아무거나 받으면 안 돼.)”
세 살이 된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자랄수록 점점 더 서로를 닮아 갔다.
본래 리아의 머리카락은 테오도르의 것을 닮은 어두운 흑발이었지만, 벤야민의 술법으로 은색으로 바꾸니 두 아이가 더욱 닮아 보였다.
동성의 쌍둥이도 저렇게 서로 닮기는 힘들 것이라고, 몇 안 되는 사용인들이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하찌만, 리아는 뚜래고 이녕(인형) 갖고 싶은데……!”
오딜리아가 분홍색 드래곤 인형을 애처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심지어 꼬리에 초록색 리본까지 달려 있는 아주 귀여운 드래곤 인형이었다.
“구래도 안 대.”
에르빈이 시큰둥한 눈으로 드래곤 인형을 쳐다보며 단호하게 말하자, 오딜리아가 울상이 되었다.
이에 남자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주섬주섬 무언가를 하나 더 꺼냈다.
“후후, 에르빈을 위한 선물도 여기 있지.”
“……!”
순간 에르빈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남자가 새로 꺼낸 것은 앙증맞은 앞니와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다람쥐 인형이었다.
“이 다람쥐 인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수도에서 유행하는 연극 <다람쥐 용사>에 나오는 주인공 다람쥐 제리코로…….”
게다가 그 다람쥐는 짧은 앞발에 붉은 보석이 박힌 장난감 단검을 들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에르빈이 다람쥐 인형 앞에서 영혼이 빠져나간 얼굴을 했다.
“말도 안 돼.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야…….”
“흥, 펑버만(평범한) 다람찌쟈나. 암꼬나 바두먼 안 된다며.”
“젤리꼬는 펑버만 다랑지 아냐!”
“아니긴. 아주 펑버만데. 뚜래고가 뿌우우 하몬 깨애액 죽을 것초롬 샌견는데.”
오딜리아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자, 에르빈이 발끈했다.
“아냐! 젤리꼬는 다랑지 욘짜라고! 저 두래고가 더 펑범해!”
근래 들어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슬슬 자기주장이 강해진 터였다.
보통은 사이가 아주 좋았지만, 이따금씩 이렇게 말도 안 되는 것으로 툭탁툭탁 다투기도 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건 한 아이를 키우는 것보다 훨씬 힘들다.
그 두 아이가 쌍둥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나는 최근 그 사실을 여실히 깨닫는 중이었다.
“자자, 둘 다 싸우지 말고. 인형이 갖고 싶니?”
남자는 양손에 각기 드래곤 인형과 다람쥐 인형을 흔들며 아이들을 홀려 댔다.
2층 창가에서 그 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헛웃음을 흘리며 창문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아이고, 주인님……! 계단은 장식으로 있는 게 아니래도요!”
4년이나 함께 지냈으면서도 그런 나의 행동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한 로라가 뒤에서 비명을 지르는 게 들렸다.
“데릭, 아이들에게 쓸데없는 선물 같은 거 가져오지 말라고 했잖아.”
푸릇푸릇한 잔디 위로 부드럽게 착지한 뒤, 남자를 째릿 노려보며 말했다.
“오, 이브! 나의 천사님! 오늘은 하늘에서 강림하셨습니까!”
남자는 두 손을 기도하듯 꼬옥 모으며 나를 찬양하기 시작했다.
데릭은 아르벨라 영주의 둘째 아들이었는데, 나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들에도 불구하고 유독 끈질기게 찾아와 구애를 했다.
조금 부유하여 큰 저택에 사용인들까지 거느리고 있다지만, 무려 영주의 아들이 평민 여성에게 구애하는 게 이상하게 느껴질 법도 하였다.
그러나 칼리고르는 너무나 작은 왕국이라서 귀족과 평민의 경계가 모호한 편이다.
차기 국왕이 될 왕국의 왕자마저도 평민 여자와 비밀 교제를 하고 있다고 은연중에 소문이 나도는 판국이니까.
게다가 그중에서도 이곳 아르벨라는 작디작은 시골 영지라서, 더욱 그 구분이 없었다.
“난 천사가 아니라 마녀라니까? 사람들이 하는 말 못 들었어?”
“당신이 마녀라고 해도 상관없어요! 나의 영혼을 바치겠습니다!”
그는 쓸데없이 성실하고 근면해서, 나의 무서운 눈빛에도 굴하지 않고 부지런하게 찾아왔다.
“네 영혼 같은 건 필요 없어.”
재산이라면 모를까, 저놈의 영혼을 가져서 뭐에 쓴단 말인가.
“그럼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보호자는 어떻습니까?”
“내가 보호잔데, 보호자가 왜 또 필요해?”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점점 더 자랄 텐데,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않을까요?”
“딱히?”
“남자 보호자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훨씬 더 많아집니다. 이를테면 함께 다람쥐 용사 놀이를 할 수 있다든지…….”
데릭이 한참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한 이유를 역설할 때였다.
“벌레가 붙어 있네, 이브.”
데릭의 어깨 너머에서 나지막한 목소리 한 자락이 들려왔다.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던 데릭이 소리 없이 나타난 남자를 발견하고는 사색이 되었다.
부스스한 백색의 짧은 머리카락에 푸른 눈동자를 지닌 남자가 무표정한 얼굴로 데릭을 쳐다보고 있었다.
벤야민이었다.
“히익! 이, 이브! 나중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그의 차가운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친 데릭은 화들짝 외치고서는 냅다 줄행랑을 쳤다.
데릭은 이상하게도 벤야민만 보면 유령이라도 본 듯한 얼굴을 하고 달아난다.
벤야민이 딱히 위협적으로 생겼다거나, 험상궂은 외양을 지닌 것도 아닌데 의아한 노릇이다.
“마침 귀찮았는데 고마워.”
나는 벤야민을 향해 싱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나 벤야민은 나를 따라 웃는 대신 미간을 슬쩍 찌푸리며 물었다.
“아직도 저런 놈이 옆에 오도록 내버려 두는 거야?”
“애들한테 잘해. 그리고 내가 마녀여도 상관없대.”
나는 데릭이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며 대답했다.
“저 정도 성실함이면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아버지가 되어도 잘할 것 같아.”
“아이들에게 아버지가 필요해?”
벤야민이 고개를 갸웃하며 두 눈을 끔뻑였다.
“딱히 그런 건 아닌데, 남자 보호자가 있으면 할 수 있는 게 훨씬 많아진대.”
이를테면 다람쥐 용사 놀이라든지…….
“그럼 내가 아버지가 되어 주면 되잖아.”
“넌 안 돼.”
“왜?”
“너는 알브레히트 사람이잖아. 페르디난트의 가주고.”
“그럼 내가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아니면, 그럼 상관없는 거야?”
웃음기 없이 묻는 목소리는 퍽 진지했으며, 나를 쳐다보는 푸른 눈동자는 서늘한 빛깔을 품고 있었다.
여기서 내가 그렇다고 답하면 정말로 가주직을 내던지기라도 할 것만 같은, 꼭 그런 얼굴이었다.
“진지하게 묻지 마.”
나는 그의 말을 장난으로 넘기며 고개를 돌렸다.
“베냐민 삼쫀!(벤야민 삼촌!)”
마침 오딜리아가 드래곤 인형을 들고 벤야민을 향해 쪼르르 달려왔다.
“안녕, 오딜리아.”
벤야민이 인사를 건넸으나, 오딜리아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그의 팔에 매달리며 씩씩댔다.
“삼쫀, 삼쫀! 에르가 자꾸 두래고(드래곤)보다 다람찌가 더 쎄다고 우겨!”
오딜리아는 얼굴이 시뻘게져서 외쳤다.
그러자 느긋하게 뒤따라온 에르빈이 코웃음을 쳤다.
“이 다랑지는 평버만(평범한) 다랑지 아냐.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라고.”
“구래 바짜 다람찌쟈나!(그래 봤자 다람쥐잖아!)”
“다람찌가 아니라 다랑지야. 구리고 젤리꼬는 허접한 두래고 따위 단칼에 베 버리는걸.”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분홍색 드래곤 인형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픽 웃었다.
“뚜, 뚜래고를 베 버려?”
“웅.”
“……!”
오딜리아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동자를 파르르 떨었다.
“구러니까, 구론 펑버만 두래고보다 젤리꼬가 훠씬 강하단 고야.”
“말도 안 대!”
급기야 오딜리아는 벤야민을 돌아보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베냐민 삼쫀! 삼쫀이 말해 쪼! 다람찌는 뚜래고를 이길 수 엄따고!”
“다람쥐는 드래곤을 이길 수 없어, 에르빈.”
벤야민이 에르빈을 향해 진지하게 말했다.
“젤리꼬는 구냥 다랑지 아냐. 다랑지 욘짜야.”
“……?”
벤야민이 멀뚱멀뚱 눈을 끔뻑이며 에르빈의 손에 들린 다람쥐 인형을 보았다.
그러자 에르빈의 눈이 가늘어졌다.
“삼쫀…… 다랑지 욘짜 젤리꼬 몬라(몰라)?”
“…….”
벤야민은 대답하지 못했다.
“구럼 벤냐민 삼쫀은 다랑지 욘짜 놀이도 같이 몬 타네(못 하네).”
에르빈이 은근히 실망한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그걸 보며 생각했다.
역시…… 벤야민은 페르디난트의 가주란 걸 차치하고서라도, 아이들의 보호자가 되어 주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것 같다고.
벤야민에게 흥미가 식은 에르빈은 다람쥐 용사 놀이를 알려 주겠다며 오딜리아를 데리고 방으로 올라갔다.
“다람쥐 용사 제리코도 모르면서 아이들의 아버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제리코는 대체 누구야?”
벤야민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 표정이 어쩐지 우스워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그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자. 오랜만에 왔네. 한 달 만인가?”
“한 달 하고 열흘 만이야.”
벤야민은 때때로 아르벨라를 찾아와 오딜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오딜리아의 머리 색이 그의 술식으로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더 자주 찾아왔으나, 최근 들어 많이 바빠졌다.
4년 전부터 갑자기 세상에 범람한 마물 탓이었다.
“마물은, 아직도 상황이 안 좋아?”
나는 어쩐지 피곤해 보이는 그의 얼굴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으응…….”
그러자 벤야민이 투정을 부리듯 내 어깨 위에 이마를 기대며 대답했다.
“정말 짜증 나. 마물들 때문에 자주 찾아오지도 못하고…….”
페르디난트는 과거 마물로부터 세상을 지켰던 3대 가문 중 하나였다.
벤야민은 그 페르디난트의 수장이기에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바삐 움직여야 했다.
‘원래라면 체르니시아도 함께해야 했겠지만…….’
어느덧 응접실에 도착했다. 테이블 위에는 로라가 세팅한 디저트 트레이와 찻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왠지 씁쓸해지는 기분을 감추려고, 달달한 마카롱을 하나 집어 먹으며 의자에 앉았다.
“너도 조심해, 이브.”
벤야민이 내 맞은편에 앉으며 말했다.
“마물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어.”
“하지만 아직 아르벨라에는 마물들이 나타나지 않았는걸?”
“언제 나타나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응, 뭐…… 조심할게.”
그의 충고를 건성으로 들으며 대답했다.
나는 오랫동안 페르디난트에 지내면서 진명을 꼭꼭 숨겨 왔다.
때문에 벤야민은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도, 검기를 발현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이렇게 걱정하는 거겠지.
‘딱히 마물이 나타난다 해도…… 검으로 때려죽이면 되는 거 아냐?’
마물과 직접 맞닥뜨려 본 적은 없지만, 검기를 발현하지 못한 일반 기사들도 대여섯이 모이면 맞설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라 들었다.
그다지 위협적이진 않을 것 같았다.
하필 마물이 범람한 때와 테오도르가 미쳤다는 4년 전의 시점이 일치했다.
덕분에 알브레히트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는 오래전의 괴소문이 다시금 고개를 쳐들었다.
나는 이 먼 서쪽 대륙까지 흉흉하게 나도는 소문들에 되도록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이를 둘이나 키우는 데에는 체력도 정신력도 많이 소모된다.
테오도르 같은 인간에게 신경을 쏟기에는 나의 아주 작은 시간 하나도 아쉬웠다.
* * *
얼마 뒤.
벤야민이 머무는 내내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데릭은, 그가 사라지기 무섭게 다시 나타났다.
“선물입니다, 이브.”
그의 손에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다람쥐 용사 제리코?”
에르빈이 좋아하는 <다람쥐 용사>의 공연 초대장이 있었다.
“네, 이브. 이번 주말에 아르벨라 시가지에 <다람쥐 용사> 공연 팀이 방문한다고 합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좋아할 거예요.”
“티켓이 네 장이나 있는데?”
“네! 아주 구하기 어려운 초대장을 네 장이나 구해 왔지요.”
“흠…… 네 장이라…….”
나는 네 장의 초대장을 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그럼 나랑 에르빈, 리아…… 그리고 한 장이 남으니까…….”
“네, 셋이서 공연을 보면 한 장이 남지요!”
내게 맞장구치는 데릭의 두 눈이 초롱초롱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향해 씨익 웃으며 말했다.
“로라까지 넷이서 함께 볼 수 있겠어! 고마워, 데릭.”
“아…….”
순간 데릭이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울적한 표정을 지었다.
눈에 띄는 그의 변화에 나는 두 눈을 뾰족하게 치켜떴다.
“왜 울상이야? 이제 와서 티켓이 아까운 건 아니지?”
<다람쥐 용사>는 에르빈이 예전부터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연이었다.
사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줬다가 뺏으려는 데릭의 심보가 고약하여 노려보자,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아휴, 그럴 리가요. 모쪼록 즐거운 나들이 하고 오세요.”
그러나 말과 달리 내 손에 들린 네 장의 초대권을 쳐다보는 데릭의 시선이 몹시 집요하고 애달팠다.
나는 그가 말을 바꾸기 전에 재빨리 초대권을 봉투 안에 다시 집어넣으며 방긋 웃었다.
“그래. 에르빈과 오딜리아도 네게 고마워할 거야. 돌아올 때 네 선물도 사 올게.”
데릭은 기뻐하는 것인지 슬퍼하는 것인지 모를 기이한 표정을 지으며 ‘흐흐흐’ 웃었다.
그리고 그 주 주말. 우리는 모처럼 시가지로 나들이를 나갔다.
작년 가을,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생일 이후로 처음 나가는 시가지 나들이였다.
오랜만에 나들이를 나간다는 소식에 아이들은 잔뜩 신이 난 상태였다.
“리아는 두래고(드래곤) 보고 싶어요!”
“우리가 보러 가는 거 멍총한 두래고 아니고 다랑지 욘짜(용사) 젤리꼬야!”
“뚜래고 멍총이 아니야! 멍총인 에르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마차에 막 올라타면서부터 티격태격 다투기 시작했다.
“리아, 가족에게 그런 나쁜 말은 하면 안 돼.”
“녜. 구론데 에르가 몬저 두래고 멍총하다 했어요.”
오딜리아는 데릭에게 선물받은 핑크색 드래곤 인형을 끌어안으며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렸다.
잔뜩 심통이 난 모습이 꼭 화가 난 아기 다람쥐처럼 사랑스러웠다.
“에르, 리아가 에르가 한 말 때문에 속상한가 봐.”
“리아, 화나써?”
에르빈이 오딜리아에게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사이, 나는 아이들이 멀미하지 않도록 정방향으로 나란히 앉히고 그 맞은편에 로라와 함께 앉았다.
예전에는 마차보다 말을 더 선호했으나, 아이들을 낳은 이후로는 넓고 편안한 마차를 즐겨 탔다.
호수 저택은 아르벨라에서도 가장 한적하고 외진 구석에 있었기 때문에, 시가지까지 나가려면 시간이 조금 걸렸다.
“에르 나빠. 자꾸만 두래고 무시하쟈나. 리아 논니려고(놀리려고) 구러는 고지?”
오딜리아는 드래곤 인형 위로 턱 끝을 파묻고서 에르빈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자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눈치를 보며 안절부절못했다.
“구, 구론 고 아냐.”
“…….”
“구냥 안녀(알려) 주려고…… 젤리꼬가…….”
“…….”
“리아……?”
“…….”
“리아, 화 마니 나써?”
“…….”
오딜리아가 끝끝내 대꾸해 주지 않자, 에르빈은 울상이 되었다.
“미아내, 리아. 화 푸로, 웅?”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팔에 매달려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귀여운 강아지처럼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에르가 다 잘몬태써(잘못했어).”
“…….”
“셰샤(세상)에서 쩰루 강한 고 다랑지 아냐. 두래고야!”
“…….”
“아니, 셰샤에서 쩰루 강한 고 리아야!”
“……셰샤에서 쩰루 강한 게 리아라구?”
그제야 오딜리아가 에르빈의 말에 반응하기 시작했다.
에르빈은 화색이 도는 얼굴로 활짝 웃으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웅, 웅! 리아가 셰샤에서 쩰루 강해! 리아는 힘 숨긴 다랑지…… 아니, 두래고일찌도 몰라!”
얼핏 듣기에 입에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 같았는데, 오딜리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에르빈을 따라 함박웃음을 지었다.
“마쟈! 리아 힘 쑴긴 뚜래고야! 뚜래고 브레쑤(드래곤 브레스)! 뿌우우!”
“멋있어, 리아! 두래고 부레쑤! 뿌우우우우!”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멀미도 하지 않는지 마차 안에서 과격하게 움직였다.
‘뿌우우’ 하는 괴상한 울음소리와 함께 짧은 두 팔로 드래곤의 날갯짓을 하는 것은 덤이었다.
“얌전히 앉아서 가지 않으면 말들이 놀라 길을 헤맬 거고, 그럼 우리는 <다람쥐 용사> 공연에 늦게 될 거야.”
결국 내게 한마디 들은 뒤에야 두 아이는 양손을 꼼지락거리며 얌전히 앉았다.
그 모습을 본 로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쿡쿡 웃었다.
* * *
우리를 태운 마차는 시가지의 광장에서 부드럽게 멈추었다.
활기찬 아르벨라의 시가지가 우리를 반겼다.
가판대에 꽂힌 형형색색의 솜사탕이 아이들의 시선을 앗아 갔다.
“어몬니, 리아는 쏨사따(솜사탕) 먹꼬 싶어요!”
“에르도요, 어모니.”
“그래, 여기서 로라랑 기다리고 있어.”
나는 아이들을 로라에게 맡기고 솜사탕을 사러 다녀왔다.
“평소보다 무장한 기사들이 많네.”
솜사탕이 준비되는 동안 주위를 둘러보며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가판대의 주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휴, 말도 말아요. 얼마 전에 아르벨라 시가지에 마물이 나타나서 진압하느라 애를 먹었대요.”
“마물?”
나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네, 그래도 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아르벨라 기사들만으로는 조금 벅차서 영주님이 용병을 알아보고 계시거든요.”
양손에 초코 맛과 딸기 맛 솜사탕을 각기 받아 들며 돌아섰다.
‘결국 아르벨라까지 마물이 나타났구나.’
얼마 전 벤야민이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호수 저택에도 경비를 강화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저 멀리서 내 양손에 들린 솜사탕을 발견한 에르빈이 두 팔을 붕붕 흔들었다.
나는 아이들을 향해 부드럽게 웃어 주며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때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소리에 고개가 저절로 돌아갔다.
“전쟁을 일으킨 알브레히트의 그 미친 황제가 가는 곳마다 승리를 해 버린다지.”
“케르벨의 국왕도 무릎을 꿇었다고…….”
테오도르의 연승 소식은 이곳 아르벨라까지 하루가 멀다 하고 들려왔다.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던데…….”
“눈이 돌아가서 시체를 안고 지냈대.”
“미친 황제가 고대 어둠의 성물을 모으고 있대.”
“전쟁을 벌인 이유도 고대 어둠의 성물을 강탈하려고…….”
이어진 말들에 귀가 쫑긋 섰다.
‘테오도르가 고대 어둠의 성물을 모으고 있다고?’
고대 어둠의 성물을 모으다니, 너무나 터무니없는 소리에 헛웃음이 피식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테오도르를 무슨 마귀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비록 그는 마귀 같은 인성의 소유자이지만, 정말 마귀는 아니었다.
그러니 어둠의 성물을 모은다는 것도 분명 헛소문일 것이다.
아마도…….
아마도……?
* * *
마치 어둠이 깃든 듯 새카만 머리카락을 지닌 남자가 약탈한 왕좌 위에 앉아 있었다.
남자는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스산한 음성으로 말했다.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내놔.”
그의 발아래에 비굴하게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케르벨 왕국의 국왕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것은 왕국의 국보입니다. 절대 외지인에게 보이면 안 되는…….”
“…….”
위에서 굽어보는 남자의 눈빛이 깊어졌다.
그저 가만히 응시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오싹해지는 시선에 케르벨의 국왕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말했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목에 칼이 들어와도 드릴 수 없습니다.”
잠자코 듣고 있던 테오도르의 눈매가 가느스름하게 좁혀졌다.
“그래?”
붉은 입술로 느슨한 호선을 그린 그가 퍽 관대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네 목을 대신 받아 갈까?”
얼핏 오늘 저녁으로 무얼 먹을까 묻는 듯한 여상한 말씨였다.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허공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뾰족한 검의 형태를 갖추었다.
“히익!”
케르벨의 국왕은 놀라 얼어붙었다.
그는 저 성스럽게 생긴 황금빛의 검이 지난 전쟁 중 얼마나 끔찍한 학살을 벌였는지 알고 있었다.
“사, 살려…… 살려…….”
그러나 살려 달라는 애원에도, 테오도르는 멈추지 않았다.
결국 그의 검이 목을 찌르기 직전에, 케르벨의 국왕이 다급히 외쳤다.
“바, 바치겠습니다! 테네브리스의 관을 바치겠습니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낸 테오도르의 두 눈이 나른하게 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케르벨 국왕의 신하들이 상자 하나를 조심스럽게 가져왔다.
테오도르는 거침없는 손길로 상자의 뚜껑을 열어젖혔다.
그러나 그 안에 든 것을 꺼내 확인한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실망의 기색이 떠올랐다.
이번에도 가짜였다.
4년 전, 서쪽 대륙과 전쟁을 시작한 테오도르는 발길이 닿는 곳들마다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찾아내 강탈하였지만, 모두 가짜였다.
어렵사리 손에 넣은 물건들에서는 아무런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손에 든 가짜 성물을 짜증스럽게 내던졌다.
챙강-!
케르벨 왕국 사람들은 바닥에 볼품없이 나뒹구는 성물을 보며 경악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국보를 이리 다루시면……!”
“왕국의 보물인데……!”
그러나 그들은 이내 무섭게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눈빛에 입을 꾹 다물어야 했다.
* * *
테오도르는 무료하게 혼자 걸었다.
참 싱거운 전쟁이었다.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찾기 위해 시작한 전쟁은 가는 곳마다 그의 승리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사이, 잘생긴 그의 얼굴은 전보다 더욱 흉흉해졌다.
테오도르가 보다 깊고 사나워진 차가운 눈동자로 정면을 응시하던 때였다.
꾸르륵 꾸륵-
기분 나쁜 소리에 테오도르의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그의 뒤편으로 검은 기운이 넘실넘실 일렁였다.
테오도르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순간 그의 황금안에 번뜩이는 광채가 돌았다.
꾸웨에에에엑-!
그를 덮치듯 달려들던 마물들이 그 스산한 황금안과 마주친 순간 놀라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테오도르는 그쪽을 향해 힐긋 턱짓을 했다.
그러자 사방에서 만들어진 황금색 빛의 검이 달아나는 마물들의 몸을 그대로 뚫어 버렸다.
끼에에에엑-!
듣기 싫은 비명 소리와 함께 검은 피가 터졌다.
테오도르는 마물들의 잔해를 무감각한 시선으로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별 같잖은 것들이 짜증 나게 하네.”
4년 전. 이브의 죽음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에 범람한 마물들은 전쟁을 나선 와중에 깨작깨작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 몇 차례 토벌을 했더니, 이후로는 마물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라도 난 건지 테오도르와 눈만 마주치면 모두 달아나기 바빴다.
덕분에 상반된 두 가지 소문이 테오도르를 휩쌌다.
-마물들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하는 구원자!
손가락을 몇 번 까딱여 마물들을 쓸어버리는 그를 보며 구원자라 반기는 이들이 더러 있었고.
혹은…….
-마물들을 다스리는 고대 어둠의 현신!
마물들이 그를 보면 달아나는 이유가 바로 그가 마물들의 주인이기 때문이라며 숙덕이는 자들 또한 있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온갖 흉흉한 소문들에 휩싸였던 테오도르는 자신을 둘러싼 낭설들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뺨에 튄 검은 피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기분이 저조했다.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금방 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자꾸 실패했다.
이브를 살릴 단서를 찾아 서쪽 대륙을 쑥대밭으로 만들었건만, 막상 마주하면 모두 가짜였다.
그리고 그 가짜를 두고 국보니 뭐니 하며 얼싸안는 멍청이들 때문에 더 짜증이 났다.
“폐하.”
이때 나타난 린든이 테오도르의 앞에 부복했다.
“말씀하신 대로 다음 목적지를 물색해 보았습니다.”
린든은 테오도르를 향해 지도를 내밀었다.
테오도르는 서늘한 시선을 내려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서쪽 대륙의 무수한 나라들 위에 붉은색으로 X 자 표시가 되어 있었다.
이미 테오도르의 군마가 짓밟고 지나간 곳들이었다.
테오도르는 아직 X 자 표시가 되어 있지 않은 작은 나라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칼리고르 왕국?”
“네, 폐하. 그곳 왕의 선조가 오래전에 케르벨 왕국으로부터 받은 보물이 있는데…….”
린든이 칼리고르 왕국에 대해 주절주절 설명을 했다.
어찌나 작은 곳인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보아야 그 위에 적힌 이름이 읽힐 정도였다.
한참 뒤, 테오도르의 입술이 열렸다.
“그래. 다음 목적지는 칼리고르 왕국으로 정한다.”
* * *
극장에서 <다람쥐 용사>를 보고 나오는 길,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무척 흥분해 있었다.
“다랑지가 셰샤(세상)을 구한다!”
“다람찌 용짜(용사) 젤리꼬!”
어느새 오딜리아도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팬이 되어, 에르빈과 한목소리로 외쳤다.
“다랑지가 두래고(드래곤)보다 더 쎄지?”
에르빈은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오딜리아에게 물었다.
“웅웅! 다람찌가 셰샤에서 쩰루 쎄! 리아 두래고 말구 다람찌 할 꼬야!”
까르륵 터져 나오는 오딜리아의 웃음소리에 내 입가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오딜리아의 장래 희망이 드래곤에서 다람쥐로 바뀌겠는데…….’
문득 작은 걱정이 들었다.
지난가을, 벤야민이 선물해 준 동화책에서 드래곤에게 깊은 감명을 받은 오딜리아는 한동안 드래곤이 되고 싶다며 괴이한 소리를 내며 복도를 뛰어다녔다.
무얼 하느냐고 묻자, 천진한 목소리로 드래곤 브레스를 뿜는 중이니 어머니도 어서 피하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에르빈의 장래 희망은…… 드래곤의 친구인 요정 공주였지.’
에르빈은 요정 공주가 되고 싶다며 오딜리아의 원피스를 입고 정원을 누비며 꽃잎을 뜯어 먹었다.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활약상을 떠들며 두 눈을 반짝이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보자, 왠지 불안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렇지만 다람쥐는 드래곤처럼 괴상한 소리도 내지 않고 날갯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드래곤이나 요정 공주보다는 저택이 평화로울 거야.’
오딜리아는 에르빈의 품에 안겨 있는 다람쥐 인형을 쳐다보았다.
부러움이 가득한 시선이 다람쥐 인형에게로 향했다.
“에르, 리아도 젤리꼬 안아 보면 안 대?”
“우우움…….”
“한 번만, 웅?”
에르빈은 눈썹을 찌푸리며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 모습이 귀여워 작게 웃을 때였다.
“어? 호수 저택의 마녀…… 헙!”
지나가던 남자가 나를 보고 손가락질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랐다.
나는 그쪽을 무섭게 노려보았다.
입고 있는 옷을 보니, 아르벨라 영지의 기사인 듯했다.
“방금, 뭐라고 했지?”
“아……!”
남자는 차마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시선을 피하며 얼굴을 붉혔다.
내게 뭐라 하든 상관없었지만,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삿대질을 하는 건 참기 힘들었다.
천사처럼 착한 우리 아이들이 부디 테오도르의 인성을 닮지 않길 바라며 그동안 열심히 교육을 해 왔는데, 저 무례한 짓거리를 보고 배우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않은가.
나는 로라에게 아이들을 맡긴 뒤, 남자의 멱살을 끌고 구석진 곳으로 갔다.
남자가 뒤늦게 사태를 파악하고는 다급히 외쳤다.
“사, 살려 주세요! 말이 헛나왔어요!”
“누가 죽인대?”
“죽일 것처럼 쳐다보고 있잖아요, 지금.”
“입조심해.”
싸늘하게 일갈하자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그보다 너, 아르벨라의 기사야?”
“네, 넵!”
마침 아르벨라의 기사단을 찾아가 알아볼 것이 있었는데, 잘되었다고 생각하며 물었다.
“최근 아르벨라에 마물이 나타났다고 들었는데…….”
이때였다.
쿵-!
아이들을 두고 온 광장 쪽에서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이 들렸다.
“꺄아악!”
“마, 마물이……!”
“다들 도망쳐!”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았다.
‘뭐지?’
그러자 저 멀리, 시커먼 무언가가 보였다.
* * *
이보네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사라진 직후.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로라와 함께 광장에서 이보네를 기다렸다.
“아까 젤리꼬가 두래고 무찌를 때 말야. 지쨔(진짜) 멋있었지?”
“웅웅, 지쨔 멋있어! 리아는 커서 다람찌가 되구 싶어.”
“데릭에게 두런는데(들었는데), 도또리 천 개 모으면 다랑지 될 수 있대.”
“지쨔?”
“웅, 지쨔!”
“구, 구럼 우리 도또리 주우러 가자!”
“안 대. 도또리 주우려면 가을까지 기다려야 해.”
“히잉…….”
오딜리아의 눈꼬리가 축 늘어졌다.
“리아 도또리 주우러 가고 씨뿐데…….”
“리아, 젤리꼬 안아 볼래?”
오딜리아가 울적해하자, 에르빈이 내내 품에 꼬옥 안고 있던 다람쥐 인형을 들어 보였다.
“젤리꼬?”
“웅, 대신 눈물 뚝!”
에르빈은 어머니가 저희를 달랠 때 종종 그러는 것처럼,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웅! 뚝!”
오딜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며 활짝 웃었다.
그러나 막상 오딜리아에게 다람쥐 인형을 건네려는 에르빈의 손이 덜덜 떨렸다.
지금 오딜리아를 달래기 위해 제리코 인형을 건네주면, 분명 돌려받지 못할 것이다.
에르빈은 직감적으로 그것을 알 수 있었다.
에르빈이 다람쥐 인형을 건네주다 말고 굳어 있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에르, 젤리꼬 안 줘?”
“쟈, 쟈깜만…….(자, 잠깐만…….)”
망설이던 에르빈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부우욱-!
그러더니 헝겊으로 만들어진 다람쥐 인형의 앞발에 접착제로 붙어 있는 장난감 단검을 뜯었다.
그러고는 단검을 제가 갖고 인형만 오딜리아에게 건넸다.
“요, 요기…….”
“꺄아! 쩰리꼬 기여워!”
오딜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다람쥐 인형에 제 뺨을 비비적거릴 때였다.
쿵-!
강한 진동 소리에 두 아이는 토끼 눈이 되었다. 요란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로라였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본 로라의 눈동자에 공포가 깃들었다.
“세상에……!”
로라는 바들바들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에르빈 도련님! 오딜리아 아가씨! 어서 도망가야 해요!”
말을 끝맺기도 전에, 로라는 에르빈과 오딜리아의 손을 양손으로 각각 붙잡으며 달리기 시작했다.
“왜, 왜 구래, 로라?”
“돌아보지 말고 뛰어요!”
저 멀리서부터 거대한 마물이 쿵, 쿵 소리를 내며 광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공포스러운 소리에 차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자그마한 입술을 앙다문 채 함께 뛰었다.
그러다가 그만 마물을 피해 달아나는 다른 사람의 몸에 부딪혔다.
“아얏!”
그 바람에 오딜리아가 들고 있던 다람쥐 인형이 바닥에 떨어졌다.
“아, 안 대! 젤리꼬! 에르가 리아 준 곤데!”
오딜리아는 황급히 다람쥐 인형을 주우려고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순간 함께 도망치던 인파에 휩쓸려 로라의 손을 놓치고 말았다.
“로라……!”
오딜리아는 그대로 딱딱한 돌바닥 위에 엎어지고 말았다.
“아으으…….”
무심결에 뒤를 돌아본 오딜리아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커다랗고 흉측하게 생긴 검은 마물이 그녀를 쳐다보며 입을 찢고 있었다. 마치 웃는 것처럼.
“안 대, 리아……!”
“오딜리아 아가씨!”
로라가 발을 동동 구르는 사이, 에르빈이 그녀의 손을 홱 놓았다.
“에르가 리아 지켜 조야 해!”
“에르빈 도련님! 오…… 맙소사, 안 돼요!”
에르빈은 로라가 붙잡을 새도 없이 뛰쳐나갔다.
“이 몬샌기고 멍총한 개물(괴물)!”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앞을 막아서며, 마물을 향해 소리쳤다.
“리아 개로피지(괴롭히지) 마!”
오딜리아를 향해 입꼬리를 찢으며 웃고 있던 마물이 텅 빈 동공을 스르륵 움직여 에르빈을 보았다.
마물의 관심을 돌리는 데에는 성공했으나, 애석하게도 에르빈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손에 들고 있는 거라곤 제리코의 장난감 단검뿐.
그러나 마물과 눈이 마주친 순간 발끝에서부터 번진 공포에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에르빈은 장난감 단검을 손에 쥐고 마물을 향해 겨누었다.
여름의 녹음을 닮은 푸른 빛깔이 장난감 단검을 휩싸며 서서히 번져 나간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에르빈이 장난감 단검을 그대로 내던졌다.
본능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휘이익-!
푸른 검기를 두른 단검이 그대로 마물의 왼편을 살짝 스치며 광장 반대편의 나무에 꽂혔다.
우지끈! 쿵!
나무가 무너졌다. 그 소란에 마물이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았다.
‘모, 모지?’
에르빈은 무너진 나무를 보고 놀랐으나, 마물이 등을 돌린 틈을 타 오딜리아에게 냅다 달려갔다.
‘이러 때가 아냐! 리아 구해야 해!’
에르빈은 겁에 질린 오딜리아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리아! 갠차나?”
“에, 에르으으…….”
“갠차나, 갠차나. 에르가 와써.”
뒤늦게 사태를 파악한 마물은 화가 나서 흉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에르빈은 달달 떠는 오딜리아를 꼬옥 끌어안은 채 마물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정작 오딜리아를 달래는 에르빈의 몸도 떨리고 있었다.
이때였다.
쇄애액-!
끼에에에엑!
허공을 가르는 검의 소리와 함께 마물이 괴성을 지르며 쓰러졌다.
쿵!
순간 작은 정적이 광장 위로 내려앉았다.
“에르! 리아!”
단칼에 마물을 베어 버린 이보네가 창백해진 안색으로 아이들을 살폈다.
“어, 어모니……!”
“어몬니이, 으아앙……!”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이보네에게 달려가 안겼다.
이보네는 아이들을 두 팔로 강하게 끌어안았다.
“괜찮아, 어머니가 여기 있잖아.”
“우, 우우으으으흑…….”
“흐어어어어어엉…….”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이보네의 블라우스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 마물이 죽었다!”
이때 누군가가 외쳤다.
누군가의 외침을 시작으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저 여자가 마물을 죽였어!”
“자, 잠깐, 저 여자 호수 저택의 마녀잖아?”
“예쁜 외모로 사람들을 현혹해서 잡아먹는다는, 그……?”
사람들은 은발에 녹안, 그리고 요정 같은 그녀의 외양을 보며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이보네는 모르고 있었지만, 사실 그녀는 아르벨라 영지의 유명 인사였다.
요정처럼 아름다운 비현실적인 외모로 말이다.
“마녀님이 마물로부터 우리를 보호해 주셨어!”
“마녀님! 아르벨라의 마녀님……!”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달래느라 정신이 없던 이보네는 한참이 지난 뒤에야 그들이 외치는 ‘마녀님’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 * *
알브레히트 황궁의 정무 회의실.
황제가 자리를 비운 곳에는 황제의 보좌관인 아르민 마이어를 비롯하여 각 가문의 대표들이 정례회를 위해 모여 있었다.
테오도르가 막 즉위한 직후 알브레히트의 양대 가문이라 불리는 두 가문, 페르디난트와 레오브란테는 그 힘이 약해졌다.
당시 마르가라테 황후와 가주 루돌프를 동시에 잃은 페르디난트의 젊은 새 가주는 딱히 권력에 관심이 없었고, 레오브란테는 이미 그보다 오래전부터 정계를 떠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4년 전 마물들이 범람한 이후로 양대 가문의 힘이 다시 커지게 되었다.
세상은 과거 마물로부터 사람들을 수호하였던 두 가문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과거 마물로부터 사람들을 지켰던 또 다른 가문, 체르니시아의 복권 문제가 최근 몇 달 사이에 대두되었다.
그 시발점은 레오브란테의 가주 셀린느였다.
[레오브란테는 수년 전 세상에서 지워진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다시 역사서에 기록할 것을 요청합니다.]
지난달 정례회 때 셀린느는 귀족들이 모인 자리에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요구했다.
[지금 같은 시대에 체르니시아의 부활이 필요합니다. 양대 가문이 마물들을 막아 내고는 있으나, 본디 땅의 마물을 물리치는 것은 체르니시아의 일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미 체르니시아는 몰락하여 일족을 찾아볼 수 없지 않은가?]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살아 있습니다.]
셀린느는 몹시 담담한 목소리로 체르니시아의 생존자가 살아 있음을 알렸다.
[오래전 체르니시아 몰락 당시, 저희 레오브란테에서 그의 신병을 맡아 보호해 왔습니다.]
[잠깐, 지금 레오브란테에서 역적의 자손을 보호했다 말하는 것이오?]
[어떻게 그런 엄청난 일을 독단으로 벌인단 말인가!]
거센 항의가 이어졌으나, 셀린느는 흔들리지 않고 이어 말했다.
[테오도르 폐하의 서쪽 대륙 정복이 마무리되어 간다고 하니, 곧 귀환하시면 정식으로 말씀을 드릴 생각입니다. 그 이후의 판결은 폐하께 맡기지요.]
마물들의 범람 이후 가문의 영광을 다시 이끈 젊은 셀린느 레오브란테는 테오도르의 외사촌이기도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뒤늦게 성력을 발현하였다는 그녀는 브리안과 태중 약혼으로 맺어진 관계였다.
‘브리안 체르니시아……. 난리 중 실종되었다더니, 그쪽으로 숨어들었던 건가.’
브리안의 생존 사실은 벤야민에게 퍽 기쁘지 않은 소식이었다.
벤야민은 이보네의 막내 오빠이기도 한 그 남자의 이름을 곱씹으며 눈가를 찡그렸다.
‘이브가 알아선 안 돼.’
제 가족이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브는 틀림없이 그를 만나러 올 것이다.
그리고 복권된 체르니시아 가문의 일원이 되어 이곳에서 살아가겠지.
어쩌면 테오도르 황제와 다시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벤야민은 그녀를 테오도르의 앞으로 다시 데려오고 싶지 않았다.
지난 4년간 그녀는 딱히 테오도르를 그리워한다거나 하는 기색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이따금 황제에 대한 소문이 들려오면 콧잔등을 찌푸리며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제 더 이상 그 남자에게 아무런 마음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었지만…….
어쨌든 테오도르는 그녀의 아이들의 아버지였다.
그러잖아도 얼마 전 남자 보호자 운운하던 그녀가 아닌가.
‘또다시 황제에게 이브를 빼앗길 순 없어.’
벤야민은 주먹을 강하게 말아 쥐며 생각했다.
오랫동안 숨겨 온 그녀를 빼앗기는 것은 5년 전의 그때로 충분하다고.
벤야민은 일주일 전, 마지막으로 그녀와 만났던 때를 잠시 떠올려 보았다.
[너도 조심해, 이브. 마물들의 힘이 강해지고 있어.]
[응, 뭐…… 조심할게.]
그녀는 저의 충고를 한 귀로 흘려듣는 것 같았다.
어쩌면 그녀는 마물 따위 검으로 때려눕히면 된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그러나 벤야민이 정말 걱정하는 건 마물이 아니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체르니시아의 어린 검이었던 그녀가 고작 마물들 몇 마리를 상대하지 못할 리 없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건…….
‘혹여나 테오도르 황제와 이브가 만나기라도 하면…….’
벤야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지금 황제가 정복하였다는 케르벨 왕국은 이보네가 머무는 칼리고르 왕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었다.
칼리고르 왕국은 지도에서도 쉽게 찾기 힘들 만큼 작은 나라였고, 그중에서도 아르벨라는 가장 한적한 곳에 있는 시골 영지였다.
그러니 어지간해서는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이 없겠지만…….
‘괜히 마물들을 상대한다고 검기를 사용했다가 소문이 퍼지기라도 하면 곤란해질지도 몰라.’
물론 이브는 눈치가 없는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생각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 생각 없이 검기를 사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멍청한 마물들이 그녀의 아이들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벤야민은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한창 무어라 떠들고 있는 황제의 보좌관을 쳐다보았다.
이때였다.
벌컥, 회의실의 문이 열리며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모였다.
“폐하의 부대에서 연통이 왔습니다!”
황제의 소식을 들고 온 남자의 말에 아르민이 화색을 지으며 물었다.
“오, 곧 귀환하신다던가?”
“아니요, 그게…….”
남자는 잠시 말을 더듬더니, 이어 답했다.
“폐하께서 칼리고르 왕국으로 향하신다고 합니다!”
“뭐?”
“이미 국경을 넘으셨고, 칼리고르의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이라고 합니다!”
케르벨을 정복하면 귀환할 줄 알았더니 그새 또 다른 나라로 향했다는 소식에 아르민은 머리가 아팠으나, 이어 그 수도를 함락하기 직전이라는 소식에 그만 머리를 싸매고 주저앉았다.
“칼리고르? 그건 또 대체 어디야?”
“케르벨 옆에 붙어 있는 그 작은 나라 아닌가?”
“분명 조금 전에 케르벨을 정복하셨다고…….”
“허어…….”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회의장 안을 가득 메웠다.
그 와중 벤야민의 얼굴이 몹시 창백해졌다.
황제의 부재를 견뎌야 하는 아르민보다도 더욱 나쁜 안색이었다.
* * *
간신히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재웠다.
훌쩍훌쩍 울던 아이들은 금세 지쳐 잠들고 말았다.
시가지의 극장에서 <다람쥐 용사>의 공연만 보고 돌아가려던 원래의 계획과 달리, 호텔을 잡아 1박을 하게 되었다.
“정말 큰일 날 뻔했어.”
나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조금 전 광장에서 보았던 장면을 생각하면 아직도 가슴이 선득했다.
영주의 기사와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마물이 나타났고, 광장을 덮쳤다.
마물을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정확히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노리던 마물을 보는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마침 함께 있던 기사의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고서 냅다 광장을 향해 달려가 마물의 몸을 베었다.
다행히 늦지 않게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거…… 분명히 검기였는데.’
나는 협탁 위에 놓인 다람쥐 인형과 장난감 단검을 힐긋 쳐다보았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코를 훌쩍이면서도 다람쥐 인형과 장난감 단검을 챙기는 걸 잊지 않았다.
[젤리꼬……!]
오딜리아는 바닥에 굴러서 꼬질꼬질해진 다람쥐 인형을 꼬옥 끌어안으며 말했다.
[젤리꼬가 에르랑 리아 지켜 조써!]
[마쟈! 젤리꼬가 몬생긴 개물 물리쳐써!]
[젤리꼬는 지쨔 다람찌 욘사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정말로 다람쥐 용사가 그들을 지켜 준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하지만…….’
꼬질꼬질해진 다람쥐 인형과 단검을 응시하는 내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그건 분명 검기였어.’
난리 중에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었다.
나 또한 두 눈으로 정확히 본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직감적으로 검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설마 에르가 검기를 발현한 걸까?’
내가 검기를 발현한 게 세 살이었으니 지금 에르빈의 나이와 딱 일치했다.
아이가 고대 사도의 가호를 발현하였으니 퍽 기뻐해야 마땅한 일이었으나…….
체르니시아의 보호 아래 자랐던 어린 시절의 나와 달리, 에르에게는 마땅히 아이를 보호해 줄 울타리가 빈약했다.
고대 사도의 힘은 마물들이 범람하는 이 세상에서 엄청난 권력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 큰 힘을 감당하기에 에르빈은 아직 어렸다.
누군가는 이용하려 들 것이고, 그것을 막기 위해서는 더 강한 힘을 틀어쥐고 있어야 한다.
아이가 자랄 때까지 내가 옆에서 울타리가 되어 주겠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영원한 울타리는 없다는 사실을, 나는 과거 체르니시아의 몰락과 테오도르의 변심으로 깨달았다.
나는, 그리고 아르벨라 영지의 작은 호수 저택은 에르빈의 힘을 보호하기에 너무 작았다.
‘우선은 저택으로 돌아가서 에르가 검기를 발현한 게 맞는지 다시 확인해 봐야겠어.’
나는 아이들의 잠자리를 한 번 더 살폈다.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려는데, 오딜리아의 까진 무릎이 눈에 들어왔다.
깨끗한 무릎 위에 난 상처를 보자 속이 상했다.
‘흉터가 남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흉터, 하니 문득 예전에 내 손의 흉터를 치료해 주었던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무심결에 손목을 보자 그 후로 새로이 생겨난 상처가 희게 남아 있었다.
카타리나가 남긴 상처였으며, 동시에 테오도르가 묵인한 상처이기도 했다.
내 상처를 지워 주었던 남자는 내게 더 아픈 상처를 새로이 남겨 주었다.
“나쁜 새끼…….”
그때의 기억에 기분이 나빠지려는 찰나였다.
“죄, 죄송해요, 주인님.”
“아니야, 로라의 잘못이 아니잖아.”
나는 로라를 돌아보며 손을 내저었다.
“하지만 방금…….”
로라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목소리로 울먹였다.
그제야 그녀가 방금 내가 중얼거린 혼잣말을 들었다는 걸 깨닫고서, 민망한 마음에 머쓱하니 답했다.
“그건 로라에게 한 말이 아니야. 그리고 로라도 많이 놀랐을 텐데, 오늘은 먼저 쉬어.”
에르빈과 오딜리아, 그리고 로라까지 모두 재우고 나니 혼자 깨어 있는 방 안이 퍽 적적했다.
시간이 늦었으나 잠이 오지 않아 복도로 나왔다.
따뜻한 우유라도 마실 생각으로 층계 아래로 내려가는데, 1층 로비에 웅성웅성 모여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앗, 마녀님이다!”
“어디? 어디?”
“오, 마녀님!”
나를 발견한 사람들이 이쪽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마녀님! 낮에 광장에서 활약하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기사님들 대여섯 명이 겨우 상대하는 마물을 그렇게 손쉽게……!”
“아르벨라를 마물로부터 지켜 주세요!”
“아르벨라의 마녀님!”
떠드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 주자니, 조금 어이가 없었다.
이 사람들이 ‘님’ 자만 붙이면 다인 줄 아나?
“내가 마녀라면서? 마녀가 그런 착한 일을 할 것 같아?”
심드렁한 목소리로 묻자 사람들이 일제히 조용해졌다.
그러더니 이내 서로 눈치를 살피다가 나를 향해 외쳤다.
“하지만 마녀님은 오늘 저희를 구해 주셨잖아요!”
“내가 언제?”
“부끄러워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마녀님. 저희가 다 봤다고요.”
“보긴 뭘…….”
“저희를 위해 마물을 단칼에 썰어 버리시던 그 멋진 모습…….”
“너희를 위한 게 아니…….”
“마녀님이 아니었더라면 분명 큰 피해가 있었을 거예요.”
“…….”
딱히, 사람들을 수호한다느니 그런 거창한 의도는 없었다.
그저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구하기 위해 움직였던 것뿐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내가 무슨 반박을 해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졸지에 나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마녀님은 아르벨라의 수호자입니다!”
“기사님들보다도 더 믿음직스럽다고요!”
사람들은 주먹을 불끈 쥐며 두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마치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이야기를 나누는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보는 것 같았다.
“선물을 받아 주세요, 마녀님.”
사람들이 내게 꽃이며, 빵이 든 바구니 따위를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들긴 했지만 이런다고 내가 저들의 말대로 아르벨라를 수호하는 영웅이 된다느니 하는 일은 결코 없을 터이다.
무엇보다도, 괜히 검기를 쓰는 여자가 아르벨라에 있다는 게 알려져서 좋을 일이 없었다.
이 시골까지 이따금씩 테오도르의 소문이 들려오는 것처럼, 내 소문이 테오도르에게 들리지 않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최대한 자중하며 살아야 한다. 에르빈과 오딜리아를 위해서라도.
“난 아르벨라를 수호한다느니 그런 거 할 생각 없어. 내일 날이 밝으면 바로 호수 저택으로 돌아갈 거야.”
나는 사람들을 향해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아이가 둘이나 되어서 아이들을 돌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고.”
그러자 사람들이 아쉬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하지만 혼자서 세 살 난 아이를 둘이나 키운다는 나의 말에 차마 그들은 붙잡지 못했다.
내게 따라붙는 시선을 무시하며 발길을 돌리려던 순간.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
문득 오래전 군터 할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해 주던 말이 생각이 났다.
군터 할아버지는 어린 내게 알려 주었다.
고대 마물로 뒤덮여 있던 세상을 구했던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리고 그녀의 유지를 이은 우리 가문에 대해.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
오랜만에 생각나는 군터 할아버지의 따스한 목소리에 왠지 울컥해졌다.
오스발트의 사생아였던 나는 약한 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체르니시아의 유지에 기대어 성장할 수 있었다.
나는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이 언제나 자랑스러웠으며, 뛰어난 체르니시아가 되기 위해 정진을 다해 왔었다.
내 눈앞에서 체르니시아가 불타고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목이 떨어지는 것을 목격하기 전까지는.
그렇지만 자랑스러운 나의 체르니시아는 말도 안 되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제는 사라진 이름이 되었다.
언제나 정도를 지키며 약자를 지키고 보호하던 과거의 업적들도 더 이상 기억하는 이가 없었다.
새삼 그 사실이 서러웠다.
‘이제 난 체르니시아도 아닌데, 뭐.’
나는 삐딱한 마음을 품고서 속으로 다짐했다.
마물들이 나타나 아르벨라의 사람들을 위협하든 말든 딱히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내게 중요한 건 사랑스러운 나의 다람쥐 용사 꿈나무들과 호수가 보이는 저택에서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는 거니까.
그러나 바로 이튿날, 나의 다짐은 깨지고 말았다.
* * *
내 손에 들린 검이 허공 위로 긴 궤적을 그리며 움직였다.
쇄애액-!
그럴 때마다 수십 마리의 마물들이 검은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꾸웩!
꾸웨에엑!
끼에에엑!
급기야 몇몇 마물들은 나를 피해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는 달아나는 마물들을 향해 눈을 찡그리며 속으로 구시렁거렸다.
‘젠장! 신경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내가 왜!’
분명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날이 밝으면 아이들과 함께 호수 저택으로 돌아갈 계획이었다.
괜히 따뜻한 물을 가지러 아래로 내려갔다가, 사람들의 숙덕거리는 소리를 들은 것이 화근이었다.
[북문 바깥의 엘로리 숲에 지금 기사님들이 마물을 물리치러 갔는데, 고전하고 있나 봐.]
[마녀님이 도와주시면 좋을 텐데…….]
[하지만 마녀님은 바쁘시니까…….]
[마녀님은 세 살배기 아기가 둘이나 있으시다고…….]
사람들이 은근히 나를 흘깃흘깃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신경 쓰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신경이 쓰였다.
하필이면 그 순간 다시 한번 떠올리고 만 군터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그들을 무시하려는 내 양심을 쿡쿡 찔러 왔다.
[알겠니, 이보네? 약자들을 보호하는 게 체르니시아의 의무란다.]
[네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언제든 잊으면 안 돼.]
결국 나는 검을 들고나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일이 생길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기에 제대로 된 검이 없었다.
어제 마물을 물리친 것도 마침 함께 있던 기사의 것이지,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검기를 발현한 체르니시아에게 도구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제 에르빈이 다람쥐 용사 제리코의 장난감 단검으로 나무를 무너뜨린 것과 같은 이치였다.
나는 1층 로비 벽면에 걸려 있던 투박한 장식용 검을 빌려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줄곧 지금과 같은 상태였다.
꾸웨에에에에에엑-!
꾸웨에에에에에에엑-!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는 마물의 등에 검을 박아 넣었다.
그러자 마물이 앞으로 고꾸라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마물의 위로 뛰어올라 검을 뽑았다.
그리고 이어 달아나는 마물 세 마리를 한 번에 베어 버렸다.
엘로리 숲을 시끄럽게 하던 마물들은 모두 죽은 시체가 되었다.
“와…….”
“굉장해…….”
“멋있어…….”
기사들이 입을 떡 벌리고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마물들의 사체를 발로 툭 차며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때까지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서 있던 기사들을 스쳐 지나갔다.
숲의 입구에서 아르벨라의 영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 마녀님! 마물들로부터 아르벨라를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녀 아니에요.”
째릿 노려보자 영주가 재빨리 정정했다.
“아, 죄송합니다. 다들 당신을 그렇게 부르기에 그 호칭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이브 님.”
영주는 내 이름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럴 만도 했다.
작년 겨울에는 그의 둘째 아들인 데릭이 아르벨라가 떠들썩하도록 요란하게 내게 구애를 하지 않았나.
“이브 님, 제발 도와주십시오. 우리 아르벨라에는 마물들을 진압할 병력이 부족합니다. 이브 님의 도움이 절실합니다.”
“하지만 난 아이들을 키워야 하는걸요.”
분명 저 영주는 데릭과 그의 형제들을 제 손으로 키우지 않은 것이 틀림없다.
그가 육아를 해 봤다면 지금 이 부탁이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하기에 얼마나 염치없고 뻔뻔한 것인지 충분히 알 텐데.
“시가지의 치안은 이제까지처럼 영주성의 기사들이 돌볼 것입니다. 그저 이브 님께서 일주일…… 아니, 보름에 한 번만이라도 마물 토벌에 함께해 주시면…….”
영주의 간절한 목소리를 차마 무시하기가 힘들어 벗어나지 못하고 가만히 서 있던 나는 보름에 한 번이라면 크게 무리가 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수는요?”
“네?”
“설마 맨입으로 받아먹으려 했어요?”
“그, 그 말씀은……! 저희를 도와주시겠다는……!”
영주는 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그렇지만 아주 많은 보수를 줘야 할 거예요.”
“오, 마땅히 합당한 보수를 드려야지요!”
마침 슬슬 돈이 떨어져 가던 중이었다.
아이들을 키우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핑계로 꽤 오랫동안 노동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이참에 용병 일이라도 해 볼까?’
문득 그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물들의 범람 이후로 용병들의 몸값이 많이 올랐으니, 조금만 부지런히 움직이면 적잖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삼십억 골드 정도만 모으면 칼리고르를 벗어나서 케르벨 같은 큰 왕국의 귀족 신분을 살 수 있을 거야. 그럼 에르빈이 정말 검기를 발현했다 하더라도 지켜 줄 수 있는 울타리가 생기는 걸 테고…….’
그러다 나는 그게 터무니없는 생각이라는 것을 깨닫고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큰돈을 고작 용병 일로 어떻게 모은단 말인가.
괜히 모으지도 못할 돈에 욕심을 부렸다가 공연히 나에 대한 소문만 퍼져서 테오도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그것을 떠올린 나는 재빨리 영주에게 조건을 달았다.
“그리고 조건이 있어요. 나에 대한 소문이 아르벨라 바깥으로 번지지 않게 막아 주세요.”
“그럼요, 그럼요!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영주는 기뻐하며 미리 준비하기라도 한 듯이 곧바로 종이와 펜을 꺼내 계약서를 뚝딱 만들어 냈다.
나는 그곳에 서명을 한 뒤 호텔로 돌아왔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기에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잠옷 차림의 에르빈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모니!”
문을 열자마자 저 안쪽에 있던 에르빈이 짧은 두 다리로 쪼르르 달려와 내게 포옥 안겼다.
“일찍 일어났네, 에르.”
나는 한 팔로 에르빈을 안아 들며 아이의 뺨에 입을 맞춰 주었다.
“네, 구론데 진쨔 개물(괴물) 때려잡꼬 오신 거예요?
그렇게 묻는 에르빈의 두 눈이 초롱초롱했다.
나를 보며 ‘마녀님’이라 부르던 사람들의 시선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이겠지?
“누가 그래?”
“로라가요! 진쨔 머싯써요, 어모니! 꼭 다랑지 욘짜(용사) 같아요!”
에르빈에게 ‘다람쥐 용사 같다’고 불리는 게 얼마나 큰 칭찬인지 알았기 때문에, 하하 웃고 말았다.
“그런데 리아는 어디 있니?”
“리아…… 어?”
에르빈이 뒤를 돌아보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요기 이썬눈데?(여기 있었는데?)”
* * *
한편, 같은 시각.
이미 칼리고르의 수도를 함락한 테오도르는 칼리고르 왕국의 왕자에게 성물을 강탈하는 중이었다.
그가 케르벨의 옆에 붙어 있는 이 작은 나라의 왕성을 함락하는 데에 불과 사흘도 걸리지 않았다.
“그것은 선조들의…… 크윽…….”
“그러기에 빨리 내놨으면 좋잖아.”
테오도르는 자신의 앞에 꿇린 칼리고르의 젊은 왕자를 거만하게 내려다보며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그의 손에는 ‘시간의 거울’이라 불리는, 퍽 평범한 이름과 달리 상당히 기괴한 외형을 지닌 강탈한 성물이 들려 있었다.
‘저주 의식에나 쓸 법하게 생겼군.’
테오도르는 반투명한 검은 유리판을 지닌 거울 위로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이게 정말 성물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이번에도 가짠가?’
검은 거울에서 특별한 기운 같은 건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였다.
얼핏 거울의 유리판 위로 이보네의 얼굴이 스쳤다.
‘이브……!’
테오도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거울 위로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이었다.
슈우욱-!
그의 몸이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털썩!
거울 속으로 빨려 들어간 테오도르는 폭신한 풀밭 위로 떨어졌다.
애석하게도 통증은 없었다.
‘뭐지?’
풀밭 위에 드러누운 테오도르가 깨끗한 하늘을 올려다볼 때였다.
“잘샌긴 아조씨, 안넝.”
조금 전 거울 위로 얼핏 스쳤던 얼굴이 그의 앞에 휙 들이밀어졌다.
흰 피부, 곱슬거리는 은색 머리, 촘촘한 속눈썹 아래 반짝 빛나는 녹색 눈동자.
얼핏 사람이 아닌 것만 같은 요정처럼 사랑스러운 얼굴을 한…….
“아조씨는 누구야?”
……아주 자그마한 여자아이가.
‘이브……?’
테오도르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여자아이를 멍하니 올려다보며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아주 잠시, 이번에야말로 시간을 되돌려 과거로 온 것에 성공한 게 아닌가 생각했다.
눈앞의 작은 여자아이는 꼭 어린 날의 이보네를 보는 것처럼 그녀와 닮았으니까.
만약 정말 과거로 온 것이라면 조금 심각한 일이다.
눈앞에 보이는 여자아이는 대강 보기에도 서너 살가량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는 칼리고르를 함락한 20대 중후반의 모습 그대로이고…….
이렇게까지 먼 과거로 와서야, 아무것도 할 수 없지 않은가.
이때였다.
“아조씨 말 몬태(못해)?”
여자아이가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며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이맛살 위로 자그마한 실금이 그어졌다.
‘이브가…… 아니야.’
비록 서너 살 무렵의 이보네를 본 적은 없지만, 그녀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아이는 그녀를 복제한 것처럼 닮았지만, 고개를 기울일 때 깜빡이는 눈의 각도가 그녀와 미묘하게 달랐다.
또한 얼굴에 난 솜털의 수가 그녀와 달랐으며, 결정적으로 숨을 쉴 때 코와 입가의 움직임이 그녀와 달랐다.
‘그럼 이 아이는 누구지.’
테오도르가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아이를 응시했다.
그녀에 대한 것이라면 세상 누구보다 자신 있는 저마저 깜빡 헷갈릴 만큼, 이보네와 닮은 여자아이였다.
“아조씨?”
‘아, 설마……!’
순간 테오도르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미래로 온 건가?”
내내 말이 없던 그의 입술 사이로 듣기 좋은 굵고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두 눈이 땡그래진 오딜리아가 박수를 치며 신기해했다.
“어? 아조씨 말할 줄 알아?”
“그녀를 되찾는 데 성공한 내가, 그녀와 나의 아이를…….”
“아이참, 무슨 말 하는 고야?”
영 알 수 없는 소리만 해 대는 테오도르로 인해 오딜리아는 불쑥 심통이 났다.
오딜리아는 양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테오도르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테오도르는 찬찬히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두근, 두근-!
아이를 샅샅이 훑어보는 그의 가슴이 두근거리며 뛰어 대기 시작했다.
물론 테오도르와 여자아이는 외관상 닮은 부분이 전혀 없었다.
속눈썹 한 올만큼도 닮지 않았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언제나 생각했다.
그녀가 만약 아이를 낳게 된다면, 분명 태어날 아기는 그녀를 닮았을 거라고.
그리고 그녀의 아기의 아버지가 될 남자는 오직 저뿐이라고.
“네 어머니는 어디 있지?”
테오도르는 대뜸 물었다.
“우리 어몬니 왜?”
“내가 네 아버지니까.”
테오도르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웃고 있는 테오도르의 얼굴은 무표정한 얼굴보다 훨씬 더 잘생겼다.
오딜리아는 그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고는 한참 뒤에 물었다.
“아조씨 다람찌 욘싸(용사) 젤리꼬 알아?”
“……?”
“젤리꼬 모루네(모르네). 아조씨 리아 아빠 아냐.”
오딜리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말했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아니야?”
“젤리꼬 모루눈(모르는) 아조씨 리아 아빠 아냐.”
“그럼 네 아빠는 누군데?”
“우움…….”
오딜리아는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한참 뜸을 들이더니, 이내 천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리아 아빠는 데릭이야!”
“데릭……?”
순간 테오도르의 눈동자 위로 번뜩이는 광채가 서렸다.
“데릭이 젤리꼬 초대짱 줬어. 리아랑 에르랑 어몬니랑 로라랑 젤리꼬 봤어.”
“데릭, 데릭이라고…….”
“웅웅, 데릭! 구리고 데릭은 리아한테 뚜래고 이녕(드래곤 인형) 줬어.”
“데릭…….”
“구론데 리아는 이제 뚜래고 안 할 꼬야. 다람찌 할 꼬야.”
“데릭…… 데릭이라…….”
테오도르는 그 이름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이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읊조렸다.
“구리고 젤리꼬는 다람찌야. 셰샤(세상)에서 쩰루 쎈 다람찌! 젤리꼬가 뚜래고 이겨.”
“데릭…….”
“구리고 젤리꼬는 개물(괴물)도…….”
“그래서.”
한참 동안 데릭의 이름만 중얼거리던 테오도르가 오딜리아의 말을 끊으며 싱긋 웃었다.
“그럼 네 어머니는 이름이 뭔데?”
“웅?”
한참 동안 제리코에 대해 떠들던 오딜리아가 두 눈을 토끼처럼 땡그랗게 떴다.
그러더니 테오도르를 따라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안 대. 어몬니가 모루눈 사람한테 알려 주지 말랬어.”
“괜찮아. 난 나쁜 사람이 아니니까.”
테오도르가 천사처럼 선량한 얼굴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만일 린든이나 아르민이 보았더라면 우리 폐하가 드디어 미치신 거라고 절망스러워했을, 그런 얼굴이었다.
“나뿐 사람 아냐?”
“응.”
오딜리아는 상냥하게 웃고 있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나뿐 사람 아닌데 젤리꼬 왜 몬라(몰라)?”
“……?”
“나뿐 사람 가튼데……. 젤리꼬도 모루고…….”
테오도르는 대체 그놈의 ‘젤리꼬’가 무엇인지 몰라 입을 다물며 눈가를 찡그렸다.
순식간에 인상이 사나워진 테오도르를 향해 오딜리아가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몰아붙였다.
“아조씨 악당 아냐? 이고 바, 머리카랑(머리카락)도 새까매. 젤리꼬 개로핀(괴롭힌) 개물도 까매써.”
테오도르의 검은 머리카락이 뒤늦게 눈에 들어왔다.
오딜리아가 사는 아르벨라에서는 제국에서처럼 검은색이 불길한 색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니었으나, 몹시 희귀한 색이었다.
‘리아두 사실 까만 머린데…….’
오딜리아는 자신의 은색 머리카락을 손가락에 돌돌 감으며 생각했다.
‘리아는 까만 머리 숨겨야 하는데, 아조씨는 왜 안 숨기지.’
오딜리아는 자신의 머리 색이 원래 검은색이란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와 벤야민 삼촌이 이야기하는 것을 몰래 엿들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리아의 검은 머리를 다른 사람에게 들키면 안 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것을 엿들은 오딜리아는 무척 속상하고, 또 두려웠다.
‘에르는 어몬니처럼 빤짝빤짝한데 리아만 까매.’
그런데 눈앞의 이 낯선 아저씨는 검은 머리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오딜리아는 그 사실이 무척 신기하게 여겨졌다.
“아조씨 머리카랑 만져 봐도 돼?”
“방금은 괴물 같다며.”
오딜리아를 회유하는 데 실패한 테오도르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한 번만, 웅?”
“괴물의 머리는 만져서 뭐 하게.”
“아냐, 아조씨 개물 아냐.”
오딜리아가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대답했으나, 테오도르는 무심히 아이를 밀어냈다.
“저리 가. 난 괴물이니까.”
본래 그는 아이들에게 상냥한 성격이 아니었다.
잠시나마 오딜리아에게 상냥하게 굴었던 것은 혹 아이가 이브와 관련 있는 게 아닐까 하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데릭이라고 했다.
나의 이브가 이름부터 구린 작자와 연관이 있을 리 없으니, 저 아이는 분명 이브와 아무런 관련도 없는 아이일 것이다.
“아조씨? 아조씨, 화나써?”
오딜리아는 싸늘한 그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물러서지 않으며 물었다.
이에 테오도르가 얼굴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리며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찮게 굴면 잡아먹을 거야.”
그러자 오딜리아의 눈이 땡그래졌다.
테오도르는 이번에야말로 이보네를 닮은 저 귀찮은 아이가 물러날 거라고 여겼다.
그러나 아이는 그의 예상을 깨뜨리며 두 팔을 붕붕 내저었다.
“아조씨 개물 아냐! 아조씨 머리카랑 밤하눌처럼 에뻐!”
“당장 꺼…… 뭐?”
아이에게 나쁜 말을 내뱉으려던 그는 순간 멈칫하고 말았다.
[끔찍하지 않아요.]
오래전, 제가 사랑했던 작은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생각난 탓이다.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오딜리아는 멍하니 굳어 버린 테오도르의 머리카락을 쭉쭉 잡아당겼다.
“아조씨 머리카랑 에뻐. 밤하눌이야.”
“…….”
“구론데 요기 어디야?”
“…….”
“리아는 에르랑 어몬니 기다리고 이썬는데……. 아조씨 또 말 몬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오딜리아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가슴이 이유 없이 울컥거렸다.
“……너.”
테오도르가 목이 멘 소리로 오딜리아를 부를 때였다.
“어어? 아조씨 리아 몸 이상해.”
오딜리아의 몸이 투명해져 가고 있었다.
오딜리아는 두 눈을 끔뻑이며 차츰 희미해져 가는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잠깐!”
당황한 테오도르가 아이를 붙잡으려고 팔을 뻗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아이의 몸을 그대로 투과했다.
이윽고 오딜리아가 사라지며, 동시에 테오도르의 몸도 거울 밖으로 튕겨 나왔다.
“헉……!”
테오도르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가 있는 곳은 오늘 아침에 점령한 칼리고르 왕국의 궁전이었고, 그가 앉아 있는 곳은 칼리고르 국왕의 왕좌였다.
‘방금 그건…… 뭐지?’
테오도르는 조금 전 겪은 기이한 현상에 미간을 찌푸렸다.
‘이브가 너무 그리워서 꿈이라도 꾼 건가?’
그가 생각을 더듬을 때였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마침 문을 열고 들어온 린든이 그를 발견하고는 호들갑을 떨며 다가왔다.
“무슨 일이 있었지?”
“갑자기 한순간 사라지셨습니다. 대체 어딜 다녀오신 겁니까?”
“…….”
“큰일 났습니다. 칼리고르 사람들이 폐하를 정말로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린든이 그가 없던 사이의 일들에 대해 주절주절 늘어놓았으나, 테오도르는 그것을 흘려들었다.
자신이 조금 전 겪은 것을 이해할 수가 없어 머리가 아팠다.
그러다 테오도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거울을 발견했다.
허리를 숙여 그것을 줍자, 검은 유리판에는 그의 얼굴만이 비칠 뿐이었다. 마치 평범한 거울처럼.
“린든.”
한참 거울을 노려보던 테오도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린든을 불렀다.
“젤리꼬에 대해 조사해 와라.”
“네?”
“젤리꼬 말이다.”
“……?”
어리둥절해하는 린든을 향해 테오도르가 험악한 얼굴로 물었다.
“다람쥐 용사 젤리꼬를 모르나?”
“리아 오디 가찌?”
에르빈은 내 품에서 쏘옥 빠져나와 방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에르빈이 이불 안과 침대 밑을 살피던 중, 벽장문이 끼이익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오딜리아가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어? 도라완네(돌아왔네).”
“리아!”
그 소리에 에르빈이 벽장 쪽으로 오도도 달려가 오딜리아를 포옥 끌어안았다.
“왜 요기 숨어써?”
“어몬니다!”
나를 발견한 오딜리아가 활짝 웃으며 내게 뛰어왔다.
“리아, 숨바꼭질을 하고 있었니?”
“숨바꼭찌? 구게 모에요?”
어려운 낱말에 오딜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어느새 옆으로 다가온 에르빈이 의젓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나 숨바꼭찌 알아. 숨는 거야.”
“에르는 어떠케 아라?”
“동화책에서 봤어.”
“우웅.”
오딜리아는 에르빈을 향해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나를 향해 두 팔을 붕붕 흔들며 이야기했다.
“어몬니, 리아가 옴총(엄청) 잘샌긴 아조씨 바써요.”
“잘생긴 아저씨?”
“녜, 잘샌긴 아조씨 조기 안에 이써요.”
오딜리아가 방금 전 나온 벽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벽장은 작은 아이의 몸이 겨우 들어갈 만큼 작았다.
아무래도 오딜리아가 상상 속에서 무언가를 보았나 보다. 아이들은 가끔 이럴 때가 있었다.
“지쨔(진짜) 잘샌겨써요. 구론데 아조씨는 젤리꼬를 몬라요. 구래서 리아가 안녀(알려) 주러고…….”
“리아, 이거 바 바. 창문에서 나문닙(나뭇잎) 주워써.”
옆에서 에르빈이 오딜리아의 관심을 돌리려고 나뭇잎을 흔들었다.
그러나 오딜리아는 ‘잘생긴 아저씨’에 대해 설명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아조씨 머리카랑이…….”
“리아, 에르 머리카랑 바 바. 반짝반짝해.”
“아이참, 조리 가, 에르. 리아랑 어몬니랑 대화 중이쟈나.”
“시러. 에르도 리아랑 놀 꺼야.”
에르빈과 오딜리아는 조막만 한 손으로 서로를 붙잡고 밀치며 툭탁거리기 시작했다.
호수 저택에서도 늘 보아 온 일상적인 모습이라 나는 피식 웃고 말았다.
“어몬니한테 잘샌긴 아조씨 이야기해야 해. 방해하찌 마!”
오딜리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에르빈에게 쏘아붙였다.
잠자코 지켜보던 나는 짐짓 진지한 목소리로 당부했다.
“리아, 남자를 얼굴만 보고 판단하면 안 돼.”
“우웅? 구로치만 그 아조씨는 지쨔 잘샌견는데……. 천사 가타써요.”
“잘생긴 남자일수록 속은 쓰레기일 수 있단다.”
“쑤레기? 지지?”
“그래, 지지.”
“우웅, 잘샌긴 아조씨는 지지구나.”
오딜리아가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지만 너무 못생긴 남자도 안 돼.”
“데릭이나 베냐민 삼쫀처럼요?”
“그래, 데릭이나 벤야민 같은…….”
무심결에 맞장구를 치던 나는 멈칫하며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 모두 못생겼다는 말과는 거리가 멀었다.
벤야민은 말할 것도 없고, 데릭 또한 아르벨라 영지 내에서 잘생긴 얼굴로 인기가 좋았으니까.
“데릭이나 벤야민 정도면 못생기지 않았지.”
“하찌만 밀까루 반죽 빠은 거초롬 생견눈데요?”
밀가루 반죽을 빻은 것처럼 생겼다니!
그것은 꼭 테오도르나 쓸 법한 나쁜 말이었다.
언제나 아이들이 테오도르의 인성을 닮지 않도록 노심초사 교육해 왔던 나는 화들짝 놀라 외쳤다.
“세상에, 리아! 그런 나쁜 말은 어디서 배운 거지?”
“이고 나쁜 말예요?”
나의 외침에 놀란 리아가 두 눈을 끔뻑이더니 이내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리아 나쁜 말 쓰는 나쁜 아이야…….”
울적하게 중얼거리는 리아의 모습에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리아! 리아는 나쁘지 않아! 나쁜 건 데릭과 벤야민이지. 밀가루 반죽처럼 생겨서는.”
나는 두 사람에게 미안한 마음을 속으로 감추어야 했다.
본래라면 잘못된 일에는 따끔하게 혼을 냈겠지만, 아이가 마물과 마주치고 충격을 받았다가 회복된 지 만 하루도 지나지 않았으니까.
“헤헤, 그러쵸?”
그제야 리아가 배시시 웃으며 다시 씩씩해졌다.
그나저나 리아의 심미안이 조금 까다로운 것 같아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데릭과 벤야민이 별로면 우리 리아에게 잘생긴 사람은 누구야?”
“우움…….”
고민하던 오딜리아가 옆을 돌아보더니, 에르빈을 꼬옥 끌어안으며 외쳤다.
“에르! 에르가 쩰루 잘샌겨써! 에르가 쩰루 조아!”
“어어……?”
그러자 에르빈의 얼굴이 펑 붉어졌다.
“에르가 채고(최고)야! 그리고 어제 개물(괴물) 나타났을 때도 에르가 리아 지켜 줬어!”
“그거 에르가 한 거 아니고 다랑지 욘짜(용사)가 한 건데…….”
“아니이. 그 전에 에르가 개물한테 화내 줬잖아. 에르는 셰샤(세상)에서 쩰루 머시꼬 잘샌기고, 또 쩰루 조아!”
나는 조금 전보다 더 심각해진 표정으로 아이들을 쳐다보았다.
똑 닮은 두 얼굴을 한 두 아이가 사이좋게 붙어 있는 게 참 보기 좋지만…….
‘리아에게 나르시시즘이 있는 건 아닐까.’
그 잘생긴 벤야민과 데릭도 밀가루를 빻은 것처럼 생겼다고 하더니, 잘생겼다고 지목한 게 자신과 똑같이 생긴 에르빈이라니.
‘눈이 너무 낮은 것보단 낫겠지만, 너무 높은 것도 걱정되는걸.’
그렇게 내가 리아의 높은 심미안에 걱정스러워할 때였다.
“어? 리아, 머리카랑 왜 까매?”
“우웅?”
에르빈의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내 눈이 조금 전 리아가 나쁜 말을 했을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커졌다.
오딜리아의 머리카락 끄트머리가 검게 물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리아!”
나는 다급히 리아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구, 구게……”
나의 물음에 리아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이내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리아도 몬라요. 잘몬태써요, 어몬니. 리아, 리아 머리카랑이…….”
뒤늦게 자신의 머리카락이 검어진 것을 알아챈 리아는 잔뜩 겁먹어 말을 더듬었다.
“널 혼내는 게 아니야, 리아.”
나는 울먹이는 리아를 안아 주며 등을 토닥였다.
“구, 구치만…….”
“리아 울디 마. 에르가 어모니 혼내 주까?”
옆에서 에르빈도 리아를 함께 달랬다.
그 내용이 조금 이상하긴 한데…….
어쨌든 나와 에르빈이 함께 달래자 오딜리아는 금세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는 에르빈에게 말했다.
“어몬니를 혼내다니. 에르는 나쁜 아이야. 조리 가.”
“우에엥…….”
리아가 울음을 그치고 나니, 이번에는 에르가 훌쩍이기 시작했다.
역시 쌍둥이를 키우는 건 참 고되다.
* * *
호수 저택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
리아의 머리카락은 아기 손가락 한 뼘만큼 짧아졌다.
검게 물든 끝부분을 잘라 낸 탓이다.
그래도 다시 깨끗한 은발로 돌아와, 리아는 기분이 좋아진 것 같았다.
“이찌 에르, 다람찌 용짜 말야.”
리아가 에르의 소매를 꾹꾹 잡아당기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에르가 짐짓 진중한 표정으로 리아를 돌아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다랑찌 아냐. 다랑지야.”
“웅웅, 구로니까 다람찌!”
“다랑찌 아니구 다! 랑! 지!”
“다! 람! 찌!”
리아는 대체 둘이 뭐가 다른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에르를 보았고, 에르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아이참, 리아는 다랑지를 자꼬 다랑찌라고 불러.”
“다람찌라고 해짜나!”
결국 리아가 벌컥 성질을 냈다.
“구니까 다랑찌가 아니라 다랑지라니까!”
에르 또한 지지 않고 함께 목소리를 높였다.
그 모습에 옆에서 로라가 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도련님과 아가씨는 참 씩씩하시네요. 어제 그런 일이 있어서 놀랐을 법도 한데.”
“그러게 말이야. 다행이지.”
아이들이 겁을 먹고 움츠러드는 것보단 조금 시끄러운 게 훨씬 나았다.
한참 리아와 툭탁거리던 에르가 자리에서 일어나 내 옆으로 왔다.
“어모니, 에르도 개물 때려잡꼬 시포요(싶어요).”
그러고는 내 무릎에 고개를 파묻으며 애교 섞인 말투로 말했다.
“에르가 개물도 때려잡꼬, 리아랑 어모니도 지킬 고야. 로라도 지킬 고야. 에르도 이제 어여탄(어엿한) 세 살이란 말야.”
“어머, 에르가 리아랑 어머니를 지켜 주는 거야?”
에르의 발상이 귀여워 아이의 은색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자 에르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말아 쥐었다.
“네! 에르가 지켜 드릴 꺼에요! 에르도 어모니한테 검 붕붕 배울래요!”
“흐음…….”
나는 에르의 얼굴을 보며 잠시 고민했다.
본래 체르니시아는 검기의 유무와 별개로 태어나면서부터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검을 잡고 휘둘렀다.
비록 나의 체르니시아는 더 이상 세상에 없지만, 내가 체르니시아로부터 배웠던 모든 것들을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강요하지는 않을 거야.’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에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에르. 저택에 돌아가면 어머니랑 공부를 시작하자.”
“우아! 에르 개물 때려잡는 거 배워요?”
우리의 대화를 들은 리아가 손뼉을 치며 신나 했다.
“리아도! 리아도 배우고 시포요!”
“리아도 에르와 함께 검을 배울래?”
“아아니, 리아는 검 말구 하눌 나는 거랑 불 뿜는 거 배우고 씨포요!”
“어……?”
순간 나는 당황해 말을 잊고 말았다.
옆에서 로라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리아 구냥 다람찌 아냐! 하늘 날고 불 뿜는 다람찌야! 리아 특펴란(특별한) 다람찌야!”
하지만 그건 이미 다람쥐가 아닌 것 같은데…….
“우아! 리아 머시써!”
에르는 자신이 검을 배울 수 있게 되었을 때보다 더욱 신나 했다.
“구롬 에르가 개물 때려잡으면 리아가 불 뿜어서 통구이로 만두러 버리자.”
“웅웅! 리아가 불 뿜어서 나뿐 개물들 통구이 만둘 꼬야!”
에르를 돌아보며 씩씩하게 외친 리아가 나를 향해 두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물었다.
“어몬니, 리아도 갈쳐(가르쳐) 주실 꺼지요? 하눌 나는 거랑 불 뿜는 거요!”
“……그래, 리아.”
나는 차마 아이들의 동심을 깨뜨릴 수 없어서 떨떠름히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그걸 할 수 있는 선생님을 찾아볼게.”
“어몬니가 안 갈쳐 주세요?”
“으응……. 어머니는 불을 못 뿜어…….”
“……!”
“……!”
에르와 리아는 놀라 두 눈을 토끼처럼 떴다.
“하늘을 나는 것도 못해.”
“……!”
“……!”
쐐기를 박듯 말하자, 이번에는 아이들의 입이 턱 벌어졌다.
“말도 안 대. 어모니가 몬 타는(못 하는) 게 이써…….”
충격에 휩싸인 에르빈의 목소리가 마차 안을 맴돌았다.
쉬지 않고 전쟁을 일으키던 황제가 돌연 출전을 멈추었다.
근 4년 만에 처음이었다. 황제가 전장을 누비지 않고 건물 안에 틀어박힌 것은.
서쪽 대륙의 작은 왕국 칼리고르를 정복한 테오도르는 왕국의 고서들이 모인 서고에 틀어박혀 아침부터 밤까지 나오지 않았다.
무언가를 연구하는 듯 열중하고 있는 그의 앞에는 얼마 전 칼리고르의 왕자로부터 강탈한 검은 거울이 놓여 있었다.
탁-
테오도르는 읽고 있던 마지막 서책을 소리 나게 덮었다.
뻑뻑한 눈가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자 창밖으로 어두워진 밤하늘이 보였다.
밤하늘을 보며, 테오도르는 두 개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아조씨 머리카랑 에뻐. 밤하눌이야.]
참 기이한 일이다.
이제까지 만난 이들 중 제 머리카락을 두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딱 둘뿐이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그 여자아이는 대체 뭐지.’
시공을 초월한 듯한 공간 속에서 이브와 닮은 작은 여자아이를 만났다.
갑작스럽던 아이와의 만남은, 마찬가지로 갑작스럽게 끝이 났다.
그 이후로 여러 번 거울을 들여다보았으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브를 닮았던 그 작은 여자아이도 다시 만날 수 없었다.
“…….”
인상을 찌푸린 테오도르가 검은 거울을 들고서 서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에 서 있던 린든이 그런 테오도르의 뒤를 따랐다.
테오도르가 향한 곳은 칼리고르의 왕자 프레데릭이 갇혀 있는 방이었다.
진흙을 빻아 만든 것처럼 생긴 칼리고르의 왕자는 미리 왕성을 빠져나간 칼리고르의 국왕이 다시 병사들을 이끌고 돌아올 때를 대비하여 붙잡아 둔 인질이었다.
“흐익!”
테오도르의 등장에 방 안에 갇혀 있던 프레데릭이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츠렸다.
테오도르는 프레데릭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러고는 프레데릭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
“…….”
두 사람 사이에 으스스한 침묵이 돌았다.
테오도르는 그저 말없이 프레데릭을 응시했고, 프레데릭은 테오도르의 시선을 피해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여전히.”
천천히, 테오도르의 입술이 열렸다.
“이것에 대해 생각나는 게 없나.”
테오도르가 들고 있던 거울을 탁탁 흔들며 물었다.
그것이 마치 대답하지 않으면 거울로 때려 죽이겠다는 위협처럼 보여서, 프레데릭은 ‘힉!’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죄, 죄송합니다, 폐하. 그, 그런데 저는 정말 아는 게 없어요.”
급기야 프레데릭이 훌쩍이며 대답했다.
그는 날마다 같은 시간에 찾아와 같은 것을 물어보는 테오도르 때문에 괴로웠다.
“……정말 쓸모없는 놈이군.”
“죄송, 죄송, 흐윽…….”
프레데릭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놈의 이름이 프레데릭이었나.’
왠지 불쾌한 이름이었다.
보면 볼수록 기분이 나빠서 테오도르는 고개를 돌렸다.
“린든.”
“네, 폐하.”
“사흘 뒤, 알브레히트로 돌아갈 것이다. 환궁 준비를 하라.”
“폐하!”
린든이 기뻐하며 그를 쳐다보았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지금 바로 사람들에게 알릴까요?”
“…….”
테오도르는 대답 대신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였다.
그는 조금 전에 막 칼리고르의 서고를 뒤져 찾아낸 고대 성물과 관련된 마지막 문헌을 딱 스무 번째로 정독한 참이었다.
이제 이곳에서 더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제국으로 돌아가 다시 연구를 재개하는 편이 더 나을 테다. 그곳엔 아직 확인하지 못한 고대의 기록서가 보관되어 있을 테니까.
그리고 황궁으로 돌아가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이브, 그녀를 되찾을 방법을.
“4년 만이야, 이브.”
테오도르는 들고 있던 검은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추며 느른한 미소를 지었다.
“4년 만에 널 되찾을 실마리를 찾게 된 거야.”
진흙을 빻은 것처럼 생긴 프레데릭을 보다가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니 마음이 한결 나아졌다.
“이제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조금만 더 기다려.”
그의 맞은편에 죄인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앉아 있던 프레데릭은 테오도르의 웃는 얼굴을 처음 보고 한순간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을 붙였다.
“저, 폐하…….”
왠지 황제의 기분이 좋아 보였다. 지금이 기회일지 모른다.
“그럼 저는 이만 풀어 주시면…….”
“…….”
그러나 호기롭게 말을 붙인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눈빛이었다.
“죄, 죄송합니다!”
프레데릭은 곧바로 입을 꾹 다물며 고개를 숙였다.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도르는 침실로 향했다.
왕성을 버리고 도망친 칼리고르 국왕이 사용하였던 침실은 알브레히트 황궁에 있는 것에 비하면 한참이나 작고 소박한 규모였다.
이제 이 침실에서 자는 것도 내일모레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
“아, 참. 폐하!”
사람들에게 환궁 소식을 알리고 돌아온 린든이 싱글벙글 미소를 띠며 그를 불렀다.
“말씀하신 것을 구해 왔습니다.”
린든이 다람쥐 인형을 테오도르에게 내밀었다.
“……?”
테오도르가 가늘게 뜬 눈으로 그것을 쳐다보자, 부연 설명이 이어졌다.
“다람쥐 용사 제리코입니다.”
다갈색 털을 지닌 다람쥐 인형은 그의 손바닥만큼이나 작고 하찮았다.
“별 볼 것 없게 생겼군.”
테오도르는 제리코를 보며 무심하게 평했다.
다람쥐의 이름은 ‘젤리꼬’가 아니라 ‘제리코’였다.
테오도르는 아이들이 다람쥐 용사를 좋아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드래곤도 아니고, 하찮은 다람쥐 같은 걸…….”
“아이고, 폐하. 요즘 거리에 나가서 그런 말 함부로 했다간 온 대륙의 어린이들에게 돌을 맞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이 다람쥐가 등장하는 연극이 올봄에 시작했다고…….”
테오도르는 기억을 더듬으며 중얼거렸다.
이브와 닮은 그 여자아이는 이 다람쥐를 알고 있었다.
[젤리꼬는 다람찌야. 셰샤에서 젤루 쎈 다람찌! 젤리꼬가 뚜래고 이겨.]
아이가 이 다람쥐를 안다는 건…… 제가 과거로 시간을 거슬러 간 것은 아니라는 터였다.
시간을 역행하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제가 만난 여자아이의 정체가 궁금했다.
이브는 분명 4년 전에 죽었는데, 이브와 닮은 그 여자아이는 대체 누구인지.
‘어쩌면, 아주 어쩌면.’
테오도르는 아이를 처음 본 순간 떠올렸던 가설을 다시 한번 곱씹었다.
조금 전 살폈던 칼리고르 왕국의 문헌 속에 그 저주받은 것처럼 생긴 검은 거울을 통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단서가 담겨 있었다.
어쩌면 저는 끝내 과거로 역행하여 이브를 만나 그녀를 살린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곳에서 이브와 자신의 아이를…….
[리아 아뺘는 데릭이야!]
그러나 곧바로 생각난 그 목소리에 두근거리던 기분이 파스스 흩어졌다.
딱, 딱, 따악…….
테오도르의 손끝이 불규칙적인 간격으로 책상 위를 두드렸다.
‘그 아이가 이브와 관련이 있든 없든,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설사 그 아이가 이브와 아주 작은 접점 하나 없는 아이라 하더라도, 당장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내 기분이 이렇게 더럽다는 것만이 중요하지.’
테오도르는 치미는 불쾌감에 파스스 웃으며 린든을 불렀다.
“린든.”
“네, 폐하.”
“이 대륙에 데릭이란 이름을 가진 자가 얼마나 될까?”
“네?”
“셀 수 없이 많겠지? 아주 흔한 이름이니까.”
“네, 그렇지요……?”
뜬금없는 테오도르의 말에 린든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대답했다.
“어쩌면 데릭은 이름이 아니라 애칭일 수도 있어. 그렇게 생각하면 이 대륙의 ‘데릭’은 더욱 많아지겠지.”
느슨하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 사이로 ‘후후후’ 하는 음산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테오도르는 몹시 악한 생각을 하고 있는 자의 표정을 짓고 있었다.
‘히익……!’
린든은 히죽 웃고 있는 테오도르와 최대한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시선을 회피해야 했다.
* * *
호수 저택으로 돌아오고 사흘째 되는 날이었다.
아이들이 낮잠을 자는 사이, 손님이 찾아왔다.
“마물을 때려잡는 여자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찾아온 남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로브를 뒤집어쓴 게 영 수상쩍은 몰골이었다.
“그런 사람 없어요.”
쾅.
문을 닫았다.
“자, 잠시만요! 아르벨라 영주로부터 소개를 받고 왔습니다! 제발, 제발 열어 주십시오!”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도, 도와주시면 합당한 보상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합당한 보상이라고?”
다시 문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설명했다.
“마물들도 때려잡는 당신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겁니다. 저희가 드리는 의뢰는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거든요.”
“사람?”
마물이 아닌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라니, 검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남자의 제안에 솔깃해졌으나…….
“삼억 골드를 드리지요.”
“삼억 골드?”
“네, 이 돈이면…….”
“안 해요.”
그가 제안한 엄청난 액수에 나는 두 번 고민하지 않고 거절했다.
쾅.
다시 한번 문이 닫혔다.
“잠시만요, 마녀님! 마녀님!”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애타게 나를 불렀으나, 나는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보, 보상이 부족하시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워, 원하시는 만큼 더 드리겠습니다.”
흥, 나는 그 소릴 들으며 콧방귀를 뀌었다.
마물 한 마리의 목에 걸린 현상금이 십만 골드이다.
그런데, 삼억 골드라니.
척 보기에도 위험한 일이 아닌가.
“제발 부탁입니다.”
굳이 위험에 발을 들일 필요는…….
“오억 골드, 아, 아니, 십억 골드를 드리겠습니다!”
십억 골드라고?
“…….”
나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서 있다가 다시 문을 열었다.
“위험한 거 아니에요?”
“위, 위험한 건 맞지만…….”
“그래서, 무슨 일인데요?”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생각으로 삐딱하게 팔짱을 끼고서 남자를 쳐다보았다.
“위험한 건 맞지만 마물들을 때려잡는 마녀님께는 재채기가 나올 만큼 쉬운 일입니다. 그러니까 테오도르 황제에게 붙잡힌 저희 왕자님을…….”
쾅-!
세 번째로 문이 닫혔다.
“잠깐만요, 마녀님? 마녀님? 잠시만 문을…….”
밖에서 남자가 쿵쿵 문을 두드리며 나를 찾았다.
흥, 내가 열어 줄까 보냐.
나는 씨근덕거리며 닫힌 문을 노려보았다.
‘그러니까 지금, 나더러 테오도르에게 붙잡힌 칼리고르의 왕자를 구출해 달라고?’
테오도르가 얼마 전 칼리고르 왕궁을 함락했다는 소식은 이곳 아르벨라까지도 전해졌다.
다행히 아르벨라는 수도와 거리가 먼 시골이라, 여기까지 전쟁의 여파가 밀려오지는 않았다.
알브레히트 제국군은 서쪽 대륙을 상대로 전쟁을 벌였으나, 그들의 군마가 밟는 곳은 오직 왕족들이 머무는 성채뿐이었다.
오랜 전쟁 중에도 민가를 불태운다든지, 약탈을 한다든지 하는 일은 없었다.
일반적인 전쟁과 달리 평민들의 삶에 피해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 왕족과 귀족들을 제외하고는 그를 비난하는 이들이 없었다.
다만 미친놈이라고 수군댔을 뿐.
아무튼 이 시골 영지에 숨어든 내가 그와 엮일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마음을 놓고 있었다.
‘내가 어떤 마음으로 그곳을 떠나왔는데.’
나는 테오도르와 어떤 방식으로든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알브레히트 황궁을 떠나던 그 순간부터, 그는 내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 잊었다고 여겼음에도 이따금 가슴이 욱신거리며 생각날 때가 있었다.
그가 그리워서 그런 건 아니다.
그를 그리워하기엔 그가 내게 준 상처가 너무나 지독했다.
그가 에르와 리아의 아빠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모르게 떠올리는 것이다.
얼마 전 오딜리아가 그런 말을 했다.
[이찌요, 어몬니. 잘샌긴 아조씨가 리아 아뺘래요. 구론데 젤리꼬 모르는 아조씨 리아 아뺘 아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어쩌면 리아가 아빠의 빈자리를 그리워해서 상상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와 리아는 한 번도 내게 아빠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고, 나는 아빠 없이 아이들을 잘 키웠다고 자부했다.
그렇지만 이상하게 그날 오딜리아의 말이 가슴에 가시가 박힌 것처럼 따끔따끔 아팠다.
다행히 그 이후로 오딜리아는 ‘잘생긴 아저씨’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심미안 높은 리아의 상상 속 그 ‘잘생긴 아저씨’가 대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하긴 했다.
‘애들 아빠가 잘생기긴 했지.’
나는 잠시 테오도르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워 냈다.
“제발 부탁입니다, 마녀님. 한 번만, 딱 한 번만 도와주세요.”
나는 아직도 가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남자의 끈질긴 노력에 혀를 찼다.
“그 미친 황제를 내가 어떻게 이겨요? 황제가 미친놈이란 거 못 들었어요?”
퉁명스럽게 대꾸하자 급기야 문밖의 남자가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흑흑, 테오도르 황제가 우리 왕자님을 제국으로 데려가려고 한답니다. 방금 말씀하셨듯 그 황제가 얼마나 미친놈인지 마녀님께서도 알지 않습니까.”
“그래서요?”
“우리 왕자님 이제 그 미친 황제에게 온갖 괴상한 실험을 당하다 죽을지도 모릅니다. 흐윽, 흑…….”
“참 안타깝네요.”
이렇게 대꾸하니 내가 꼭 테오도르처럼 인성 파탄 난 사람 같지만…….
‘어쩔 수 없어.’
내게는 왕자의 목숨보다도 에르와 리아의 평화가 더 소중했다.
‘내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우리 애들은 어떡해.’
우리 아기들은 이제 겨우 세 살이다.
엉성한 발음으로 다람쥐와 드래곤이 되고 싶어 하는, 아직 보호가 필요한 작은 아기들이란 말이다.
‘나는 에르와 리아의 유일한 보호자야. 그러니까 아기들이 소중한 만큼, 내 몸도 소중히 여겨야 해.’
누군가 냉정하다고 손가락질한다 하여도,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었다.
내가 그렇게 꿈쩍 않고 있자, 남자가 비장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 배 속에 아기가 있습니다!”
“당신이요?”
두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혀 뜨며 남자를 훑어보자, 남자가 두 손을 휘휘 내저으며 펄쩍 뛰었다.
“아, 아니요. 제가 아니라 왕자님의 비공식적인 연인이신 루이젤 양께서 임신을…….”
“축하드릴 일이군요.”
“그러니 인정을 베풀어 한 번만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아버지 없이 태어날 아기님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멈칫.
나는 기분이 나빠져서 부러 더 차가운 목소리로 바깥을 향해 쏘아붙였다.
“아버지가 없다고 모두가 불쌍한 건 아니에요.”
불쌍하다니.
그런 동정은 아버지 없이 태어난 모든 아기들에 대한 모독이다.
나는 친부의 존재를 모른 채 태어났고, 후에 생모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지만 스스로를 불쌍하다 여긴 적 없었다.
‘차라리 처음부터 없던 게 나았던 사람들이었으니까.’
그랬기 때문에 테오도르를 떠나는 데에 더욱 확고한 결심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런 아버지는, 소중한 내 아기들에게 없느니만 못한 존재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만…….’
만약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지 않았다면.
그가 내가 알던 선량하고 올바르며, 온전한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남자였더라면.
그래서 에르와 리아도 아버지를 갖고 태어났다면.
‘그랬다면 아주 조금은 더 행복했을지도 모르지.’
문득 장면 하나가 눈앞에 스쳐 지나갔다.
[테오!]
[저런, 조심히 와야지, 나의 피앙세. 그러다 배 속의 아기가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하지만 우리 아기가 어서 빨리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는걸요.]
카타리나의 아랫배를 향해 “안녕, 아기야.” 하고 나긋하게 인사를 건네던 테오도르의 목소리와 그 다정한 미소가 생각이 났다.
나는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우리 아기들이 불행한 건 아니야.’
나는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
굳게 입술을 다문 채로 문을 노려보았다.
눈물과 인정에 호소하는데도 내가 반응이 없자 결국 남자가 새로운 협상 조건을 내밀었다.
“사, 삼십억 골드!”
“……?”
“이 돈이면 어지간한 영지 하나와 맞먹는 규모입니다!”
“삼십억 골드를 주겠다고?”
“네, 그러니…….”
그 이후의 이야기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삼십억 골드라니.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그 돈이면…….
‘케르벨 같은 큰 왕국에서 귀족 신분을 살 수 있어.’
저택에 돌아온 이튿날, 에르빈이 검기를 발현한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더욱 생각이 많아졌다.
우선은 에르빈에게 검을 가르쳐 주면서도, 그 힘을 최대한 감출 방도를 모색했다.
그러나 동시에 과연 에르빈이 어른이 될 때까지 감출 수 있을지 걱정이 깊어졌다.
아직 어린 세 살짜리 평민 신분의 남자아이가 갖고 있기엔 너무나 큰 힘이었으니까.
나쁜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이들을 나 혼자만의 힘으로 온전히 쳐 낼 수 있을지 미지수였다.
‘새 신분을 사서 천천히 힘을 기르면 돼. 그것만으로도 어중간한 이들이 나쁜 마음을 품고 다가오는 걸 막을 수 있을 거야.’
물론 그 또한 쉬운 길은 아닐 것이다.
체르니시아만큼 단단한 울타리를 만들 자신은 없었다.
그렇지만 남자가 말한 삼십억 골드는 아이들을 위해 적당히 커다랗고 적당히 단단한 울타리를 만드는 기틀이 되어 줄 것이다.
끼이익-
문을 열자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드디어 제안을 수락할 생각이 드신 겁니까!”
“그런데, 삼십억 골드를 마련할 수는 있고?”
칼리고르는 아주 작은 왕국이지 않은가.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남자를 쳐다보며 물었다.
“국왕 전하께서 왕성을 버리고 도망치셨을 때, 보물을 가득 챙기셨습니다.”
“…….”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하는 남자의 말에 나는 흡사 벌레를 보는 듯한 시선으로 그를 보았다.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어차피 황제가 노리는 건 왕족들뿐이고, 우리 전하께서도 살아남으셔야 하니…….”
나는 남자가 하는 말을 흘려들으며 생각에 잠겼다.
‘내가 테오도르를 이길 수 있을까?’
그와 겨뤄 본 적이 없으니 알 수 없었다.
‘일단은 최대한 마주치지 않는 게 좋겠지.’
나는 캄캄한 밤이 되길 기다렸다가 남자와 함께 움직였다.
* * *
내게 왕자의 구출을 의뢰한 남자는 칼리고르 왕국의 궁정 마도사라고 했다.
마도사를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그들의 근원이 되는 테네브리스의 힘은 제국에서는 금지된 힘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제국에서 ‘흑마법’이라고 부르는 바로 그 힘 말이다.
고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네 명의 사도가 지닌 힘은 모두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강한 검기를 발현한 자는 마찬가지로 연마 끝에 강한 흑마법 또한 사용할 수 있었다.
물론 이론상으로 그렇다는 것이지, 아직까지 두 가지 이상의 힘을 사용한 사람은 없었다.
그런 자가 있었더라면 진즉 역사서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테네브리스를 ‘악’으로 규정한 제국과 달리, 서쪽 대륙에서는 테네브리스의 유지를 이어받은 이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마도사면, 흑마법 같은 걸 써서 왕자를 구출하면 되는 거 아니야?”
“아휴, 혹여나 흑마법을 사용했다가 제국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 납니다.”
“왕자를 구하는 일이잖아.”
“흑마법을 사용한 걸 들키게 되면 지도 위에서 나라 이름이 지워질지도 몰라요. 그럴 바에야 차라리 왕자님을 포기하는 쪽을…….”
그렇지만 제국에서 금지한 힘을 당당하게 시전할 자신은 없었기에, ‘마도사’라는 이름의 명맥만 유지할 뿐.
정작 그들이 사용하는 힘은 페르디난트의 술법과 동일했다.
‘결국엔 마도사가 아니라 마법사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의 술법으로 우리는 곧바로 수도의 왕성 앞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벤야민이 비슷한 술법을 쓰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에 특별히 놀라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마도사는 그것을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역시 마녀님이십니다. 순간 이동을 하는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으시고…….”
마도사가 수풀가에 숨으며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거기서 뭐 해? 안 들어갈 거야?”
“저는 여기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같이 들어가는 거 아니었어?”
“괜히 들어갔다가 황제와 마주치기라도 하면 어떡합니까?”
“그럼 나는?”
“그래서 마녀님은 위험수당으로 삼십억 골드를 받잖아요.”
뺀질뺀질하게 받아치는 게 영 얄미웠다.
그러나 그의 말마따나 왕자를 빼내는 건 내 몫이었다.
그에게서 건네받은 로브 하나로 몸을 가린 나는 군말 않고 왕궁 안으로 혼자 잠입했다.
왕자가 갇혀 있다는 본성의 2층 복도로 향하자, 병사들이 늦은 시간에 잠도 자지 않고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쓸데없이 부지런하네.’
나는 혀를 쯧 찼다.
저들을 상대하는 데 굳이 검기를 끌어낼 필요도 없을 성싶었다.
기척을 숨기고 살금살금 다가가 손날로 목덜미를 내리쳐 기절을 시켰다.
지키던 이들을 가볍게 제압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태평하게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왕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일어나지 않기에, 뺨을 찰싹찰싹 때려서 깨웠다.
“누, 누구…….”
“쉿.”
나는 재빨리 왕자의 입을 손바닥으로 틀어막으며 바깥의 경계를 살폈다.
“당신네 궁정 마도사란 남자가 보냈어요. 시간이 없으니 조용히 따라와요.”
왕자는 내게 입이 틀어막힌 채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왕자를 데리고 복도로 나왔다.
언제 어디서 적이 나타날지 몰랐다.
나는 검을 뽑아 은은한 녹색의 검기를 두른 채로 조용히 움직였다.
들어온 길을 따라 다시 나가려 했더니, 기사들이 돌아다니는 게 보였다.
“다른 나가는 길 알아요?”
“네, 네!”
“쉿, 목소리 낮춰요.”
“네…….”
왕자는 의기소침해져서 나가는 길을 안내했다.
그렇게 우리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어둠 속에서 움직일 때였다.
사박, 사박-
지이이이이이직-
맞은편 모퉁이에서 누군가의 발소리와 함께 무언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젠장. 순찰을 도는 기산가.’
나는 왕자를 내 뒤로 숨긴 채 정면을 향해 검을 겨누었다.
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긴장이 되었다.
‘괜찮아. 모습을 드러내면 그 순간 바로 때려눕히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꽈악 주었다.
복도에 걸린 등불에 다가오는 상대의 그림자가 벽면 위로 일렁거렸다.
사박.
사박.
지이이이익.
사박.
사박.
지이이이이익.
사박.
사박.
사박-
마침내 상대가 모퉁이를 돌았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큰 키와 어둠 속에 아른거리는 형체만으로도 느껴지는 흉흉한 분위기였다.
그의 오른손에는 찰랑이는 위스키병이 들려 있었고, 왼손에는…….
흠칫.
상대의 왼손에 들린 것은 다름 아닌 나와 함께 이곳까지 왔던 마도사의 머리채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짧은 사이 마도사는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나를 놀라게 한 것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마치 밤하늘을 생각나게 하는 칠흑처럼 새카만 머리카락과 느슨하게 휜 황금색 눈동자.
“웬 쥐새끼가 숨어들었나 했더니.”
한때 나를 설레게 하였던 그 낮고 고혹적인 목소리. 그리고…….
촤르륵-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비뚜름히 기울었다.
술병 입구에서 콸콸콸 쏟아진 액체가 피투성이가 된 마도사의 머리를 적셨다.
“끄흐으으으윽!”
처절한 비명 소리가 고통스럽게 울려 퍼졌다.
마지막 한 방울의 액체마저 모두 쏟아 낸 뒤에야,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병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쨍그랑-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유리가 부서졌다.
흡족한 표정으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느른하게 턱 끝을 젖힌 그가 나를 향해 사르르 웃으며 인사했다.
“안녕, 쥐새끼야.”
몹시 상냥하고 나긋한 음색으로.
……변함없는 몹쓸 인성을 지닌 그는, 꿈에서도 저주하던 나의 테오도르였다.
테오도르는 한쪽 입꼬리를 비릿하게 끌어당기며 노래하듯 중얼거렸다.
“쥐새끼가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그가 흥얼거리며 한 발짝씩 다가올 때마다, 그의 손에 붙잡힌 마도사의 머리채가 이리저리 뒤흔들렸다.
아까부터 들리던 바닥에 무언가 끌리는 기분 나쁜 소리의 정체가 그였나 보다.
나는 경악을 삼키며 손에 쥔 검에 힘을 바짝 주었다.
“…….”
긴장으로 땀이 차 손이 미끌거렸다.
‘하필이면.’
어쩌면 그와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고 막연한 불안감을 안고 수락한 일이었으나, 이렇게 정말로 그와 맞닥뜨릴 줄은 몰랐다.
어쩐지, 일렁이는 그림자가 유독 잘생겼더라니.
‘그래도 아직 나를 못 알아봤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뒤집어쓴 로브 탓에 테오도르는 나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곳에서 시간을 낭비하다간 언제 들킬지 모른다.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선 그가 손에 쥔 것을 내던졌다.
홰액-
너덜너덜해진 마도사의 몸이 우리 앞에 나뒹굴었다.
“흐이익! 로, 로덴!”
내 뒤에 숨어 있던 왕자가 화들짝 놀라며 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 그 순간, 사방에서 생겨난 황금색 빛무리가 단검의 형체를 띠며 우리를 겨누었다.
“야밤에 쥐새끼 사냥이라니. 볼품없게.”
그가 무심하게 중얼거리며 우리를 향해 턱짓을 했다.
그러자 그가 성력으로 만들어 낸 단검들이 우리를 향해 일제히 날아들었다.
슈욱-!
슈욱-!
슈우욱-!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렀다.
쇄애액-!
내 검에 베인 단검들이 그대로 빛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나의 반격에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뭐지?”
그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그건…….”
그러나 나는 그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검을 한 번 더 휘둘렀다.
와장창-!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왕자가 알려 준 출구로 향하려면 테오도르를 지나쳐야 했으나, 지금 상황에선 불가했다.
그렇다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바로 방금 내가 깨부순 유리창.
나는 왕자의 손목을 움켜쥔 채 깨진 창을 향해 뛰었다.
“멈춰.”
홰액-!
테오도르가 곧바로 나를 막아섰다.
어느덧 황금색 빛무리는 길쭉한 검이 되어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그가 내게 검을 겨누며 무어라 말을 했다.
“너, 방금 보인 그 힘…….”
그리고 그 찰나, 나는 재빨리 검을 휘둘러 그의 검을 튕겨 냈다.
쿠과과과광!
검과 검이 부딪치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맞닿은 쇠붙이 주위로 각기 일렁거리는 황금색과 초록색 빛무리가 충돌하고 있었다.
쉽사리 밀려나지 않아 이를 악물던 그때.
깨진 창을 타고 바람이 불어왔다.
펄럭-
뒤집어쓴 로브가 작게 펄럭이던 그 순간.
“……!”
테오도르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흔들리는 동공 속에 내 얼굴이 맺혔다.
그가 놀라 굳어 있는 사이, 나는 그의 검을 강하게 밀어냈다.
털썩-!
그 바람에 테오도르의 몸이 저 멀리 밀려났다.
“아래로 뛰어요!”
“여, 여기서 어떻게…….”
“잔말 말고 뛰어내려!”
그리고 나는 테오도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사이, 머뭇거리는 왕자를 2층 창문 아래로 던지고 나도 함께 뛰어내렸다.
‘젠장, 알아본 건가?’
풀밭에 엎어져 아프다고 징징거리는 왕자를 일으켜 달렸다.
조금 전 나를 보고 멈칫 굳어 버리던 테오도르의 얼굴이 좀처럼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었으나, 그것에 매몰될 틈은 없었다.
일단은 뛰어야 했다.
* * *
“이브야…….”
테오도르는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분명 이브였어…….”
제국으로 귀환하기 직전 날 밤이었다.
테오도르는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 밤하늘을 힐긋 바라보며 술병을 기울이던 중이었다.
술을 마실 때면 늘 그렇듯 그녀를 생각하며.
그러다 성문 앞에서 어슬렁거리는 쥐새끼를 발견했다.
몇 번 쥐어팬 끝에 쥐새끼가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라는 것을 알아챘다.
하필이면 그녀를 추억하던 시간을 방해받은 탓에 기분이 더욱 불쾌해졌다.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가 여기까지 찾아온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테오도르는 곧바로 피투성이가 된 마도사의 머리채를 끌고서 왕자가 갇혀 있는 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복도 모퉁이에서 마주친 것이다.
이브를…….
갑작스러운 소란에 늦은 시각 깨어난 사람들이 복도를 치우고 정리하는 와중에도, 테오도르는 같은 자리에 붙박여 같은 곳만을 쳐다보았다.
“이브가…… 나를…….”
“폐하, 혹 잘못 보신 것은 아닐까요?”
조심스럽게 끼어드는 린든의 목소리에 테오도르가 말없이 그를 돌아보았다.
“…….”
“수, 술을 드시지 않으셨습니까아아…….”
노려보는 게 아니라 그냥 쳐다보는 건데도 그 시선이 왠지 무서워서, 린든은 말끝을 흐렸다.
그러나 실상 이 자리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그는 느리게 손을 뻗어 자신의 뺨을 매만졌다.
조금 전 그녀의 공격에 밀려나던 때에, 그녀가 들고 있던 검날이 스쳐 간 자리였다.
그곳에서 핏물이 배어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검기를 쓰는 사람이 이브 말고 있을 리가 없잖아.”
제 성력을 맞받아친 그 힘은 분명 검기였다.
그리고 그런 힘을 쓸 수 있는 건…… 오직 그녀뿐이었다.
스윽-
테오도르는 아주 천천히 손을 뗐다.
손끝에 아주 작은 핏물이 묻어나 있었다.
그것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깊어졌다.
테오도르는 그 손끝을 자신의 앞으로 가져와 폐부 깊숙이 향을 음미했다.
비릿한 혈 향 속, 오랫동안 그리워하던 그녀의 향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그래, 이건 틀림없이…… 나의 이브의 향이야.”
비죽 튀어나온 붉은 혀끝이 얇은 핏물을 핥아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에게서 뜨거운 희열이 감도는 앓는 소리가 잇새로 터져 나왔다.
“아아, 이브…….”
미치광이 같은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린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에 반박할 수도 없지 않은가.’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로 4년이나 지났지만, 황제는 그녀의 시체를 안고 살아가던 그때와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이따금은 밤중에 홀로 거닐며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중얼거리기도 했다.
그걸 지켜볼 때면, 린든은 황제가 유령이라도 보는 건가 싶어 오싹할 때가 많았다.
하지만 역시 가장 소름이 끼치는 건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의 성물을 모은다는 것이었다.
‘뭐, 이곳에서는 성물이라고 부른다지만…….’
제국에서는 그것을 흉물이라고 불렀다.
과거 세상을 위협했던 고대 어둠이 남긴 흔적이니까.
최근에는 칼리고르에서 강탈한 그 저주 의식에나 쓰일 법하게 생긴 검은 거울을 한시도 옆에서 떼 놓지 않더니, 급기야 품에 끌어안고 잠들기까지 했다.
‘미친 게 맞지. 확실히 미치셨지.’
린든은 속으로 한숨을 푹푹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 * *
빌빌거리는 왕자 놈을 데리고 저택으로 돌아왔을 땐 이미 날이 밝은 뒤였다.
“어몬니!”
“어모니!”
마침 이른 시각에 일어나 있던 에르빈과 오딜리아가 나를 향해 뛰어왔다.
“이 아조씨는 누구예요?”
“인사해, 얘들아. 손님이야.”
아이들은 내 뒤를 따라 들어온 프레데릭 왕자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끔뻑였다.
“또 밀까루네…….”
“웅, 밀까루야…….”
미묘하게 실망한 듯한 목소리였다.
“미, 밀가루?”
프레데릭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밀가루’라는 말이 ‘밀가루 반죽을 빻은 것처럼 생겼다’는 뜻이란 걸 아는 나는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모른 척했다.
“하지만 어모니가 밀까루 낫다고 해써. 잘샌긴 거보다.”
“마쟈.”
에르빈의 말에 오딜리아가 동조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조씨 젤리꼬 알아?”
“다람쥐 용사 제리코 말이니?”
프레데릭이 제리코를 정확하게 알자,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아조씨 젤리꼬 알아!”
“아조씨 차칸(착한) 편이야!”
나도 신기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제리코를 아는군요?”
그러자 프레데릭이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아, 네, 그…… 이건 비밀인데 미친 황제가 그 다람쥐를 열성적으로 좋아합니다.”
테오도르가 제리코를 열성적으로 좋아한다고?
“칼리고르에 온 이후로 매일같이 그 다람쥐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다람쥐 인형을 모으고…….”
나는 갑자기 제리코를 향해 없던 반감이 생겼다.
당장 집 안의 모든 제리코 인형과 제리코 동화책을 불태우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하지만 아이들의 동심을 위해 참기로 했다.
“미친 황제가 누구야?”
이때, 에르빈이 관심을 보이며 물었다.
“지지야. 우리 에르는 그런 지지 몰라도 돼.”
나는 재빨리 에르빈의 관심을 차단했다.
“우웅. 지지구나.”
에르빈은 성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붙잡힌 칼리고르의 궁정 마도사 로덴은 감옥에 갇혀 심문을 당했다.
“함께 도망친 여자는, 어디에 있지?”
“모, 모릅…… 끄흑…….”
“말해. 네 주인과 함께 사라졌는데, 모를 리가 없잖아.”
그리고 그를 심문하는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저, 정말 모릅니다. 제발 우리 와, 왕자님을, 제발, 놓아, 흑…….”
“여자가 어디에 있는지 말하면.”
여자의 소재를 알릴 때까지, 황제는 결코 그만두지 않을 성싶었다.
저 이글이글한 눈빛을 보건대, 어떻게든 저희 왕자와 그 여자를 찾아내고 말리라.
찾아내면 두 사람 다 찢어 죽이고, 태워 죽이고, 때려죽일 것 같은 눈이었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볼까.”
테오도르가 느긋하게 팔짱을 끼며 물었다.
“그 여자와 네 주인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 말해.”
“흡, 그것도 모, 모릅…….”
차마 왕자의 탈출을 위해 돈을 주기로 하고 일시적으로 고용한 여자라고 말할 수 없었다.
자칫 잘못 말했다가 국왕 폐하의 위치까지 발각되면 큰일이니까.
“당장 말하지 않으면…….”
“여, 연인입니다!”
으스스한 위협에 로덴은 대뜸 거짓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우리 왕자님의 연인이십니다. 왕자님께서는 그, 그저 연인과 사랑의 도피를 하신 것이니 부디 가엾게 여기시어…….”
그 거짓말이 자신의 왕자에게 얼마나 큰 시련이 되어 닥칠지도 모르고…….
“…….”
“…….”
차가운 침묵이 감옥 안을 맴돌았다.
탁.
탁.
탁.
탁.
구두 굽이 바닥을 두드리며 규칙적인 마찰음을 냈다.
로덴은 그것이 꼭 자신의 남은 생명을 알리는 경고음인 것만 같아서 덜덜 몸을 떨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연인, 이라고?”
테오도르의 입술이 열리는가 싶더니, 돌연 웃음소리가 감옥 안을 울렸다.
“하하하!”
객관적으로 보아도, 주관적으로 보아도 결코 웃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공포스러운 웃음소리는 터져 나오던 때와 마찬가지로 난데없이 뚝 끊겼다.
“대체, 언제부터.”
회까닥 돌아 버린 눈을 한 테오도르가 누구 하나 찢어 죽일 듯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의 이브의 취향이 그따구로 변한 거지?”
심문을 마치고 나서는 테오도르의 얼굴은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문득 걸음을 멈추어 선 그가 무감정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연인……. 연인이라고…….”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치미는 분노를 삼켰다.
인정할 수 없었다.
칼리고르의 왕자는 밀가루를 빻아 반죽한 것처럼 생긴 벤야민보다도 별로였다.
불과 얼마 전까지는 그를 진흙을 빻아 만든 것처럼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조금 전 고문받던 남자의 실토를 들은 뒤 생각이 변했다.
칼리고르 왕자는 진흙이 아니라 오물을 반죽해서 만든 것처럼 못생겼다.
그렇게 못생긴 오물 같은 남자가 이브의 연인일 리가 없다.
“그래, 그럴 리가 없지.”
그자가 무언가 잘못 알고 나불거린 것일 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주억이며 자신의 뺨에 남은 상처를 매만졌다.
그녀가 남기고 간 상처는 실금처럼 얇아서, 금세 피가 멎어 버리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그 사실이 너무나 아쉬웠다.
“마도사의 처분은 네가 맡아라, 린든.”
테오도르가 뒤따르던 린든에게 명령했다.
이제 더 이상 그 마도사에게서 빼낼 정보는 없을 것 같았다.
“저, 폐하, 정말로 그 여자가 이브 님이라고 생각하시는 건…….”
이때, 린든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이브 님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린든은 지난밤부터 내내 아뢰던 같은 말을, 다시 한번 반복했다.
“이브 님은 이미 한 번……. 이성적으로 생각하십시오, 제발. 어쩌면 누군가 못된 술수를 부려 폐하를 음해하려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
“차라리 제게 명을 내려 주시면, 칼리고르 왕자를 비롯하여 그 수상한 작자들을…….”
“…….”
테오도르는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이곳에 온 뒤로 이상한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그녀를 닮은 아이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그 하찮게 생긴 다람쥐를 조사하며, 아이가 과거도 미래도 아닌 같은 시간대를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제 눈앞에 나타난 그녀와 닮은 여자.
아니, 그걸 닮았다고 말할 수 있나.
완벽하게 같았다.
노려보는 눈동자도, 어여쁜 숨소리도, 사랑스러운 움직임도.
모두 제가 기억하는 그녀였다.
이브는 죽었다. 시체까지 확인했다.
그런데 그녀와 꼭 닮은, 그녀라고밖에는 생각할 수 없는 여자가 나타났다.
혹시 모르지.
린든의 말처럼 누군가가 나를 현혹하려고 흑마법이라도…….
거기까지 생각하던 테오도르는 이내 이를 악물었다.
과거에도 그런 식으로 그녀에게 끌리는 자신의 마음을 수상하게 여겨 그녀를 의심하고 밀어냈다.
그 결과 그녀를 이미 한 번 영영 잃고 말았다.
그녀를 알아보지 못한 그 덜떨어진 과거의 나 새끼가 벌인 실수를 반복할 수는 없었다.
“흑마법이라도 좋아.”
그래서 테오도르는 이성이 아닌 자신의 감각을 믿기로 했다.
“기꺼울 정도야.”
지난밤부터 그의 감각이 계속해서 외치고 있었다.
“내가 본 건 분명 살아 있는 이브였어.”
그녀라고.
그녀가 살아 있다고.
그러니 어서 그녀를 되찾아야 한다고.
쿵, 쿵, 쿵, 쿵-!
인정의 매듭을 짓는 순간, 심장의 울림이 거세졌다.
테오도르는 살갗을 뚫고 뛰쳐나올 것만 같은 심박을 느끼며 읊조렸다.
“제국으로 귀환은 보류다.”
“폐하……!”
린든의 얼굴이 끔찍한 소리를 들은 사람의 것처럼 변했다.
“내가 없는 사이, 브리안 체르니시아의 생존 사실이 알려졌다지?”
테오도르는 얼마 전 아르민으로부터 전해진 보고를 떠올리며 물었다.
그가 황궁을 비운 지난 4년 동안 아르민이 알브레히트의 내정을 살폈다.
그러나 실상 제국의 내정을 움직이는 이는 이 멀리 떨어진 거리에 있는 테오도르였다.
아르민이 제국 내의 상황과 정례 회의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보고하면, 테오도르가 그걸 바탕으로 의사를 결정하여 통보하는 식이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를, 이곳으로 불러.”
“네? 갑자기 그는 왜……. 폐하? 폐하?”
테오도르는 제 할 말만 내뱉고는 길쭉한 다리를 뻗어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갔다.
어느새 깨끗하게 치워진 창가에는 아직 새 유리가 들어오지 않아 바람이 훙훙 통했다.
‘정말 그 여자가 이브라면.’
테오도르는 두 손으로 창틀을 짚었다.
자신의 감각이 이번에도 그녀를 알아보고 반응하는 것이라면.
‘나를 피해 숨어 버린 이브를 다시 찾을 방법은.’
그녀를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황금색 눈동자가 위험하게 빛났다.
‘오직 하나이지 않겠나.’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