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이브 로웰린의 죽음
테오도르 황제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약혼식 당일 아침이었다.
황제의 약혼녀를 호위하기 위한 황궁 기사단이 페르디난트가로 향했다.
그곳에서 기사들은 이날만을 기다린 듯 화려하게 꾸민 카타리나를 황금 마차에 태웠다.
그리고 그들이 약혼식장으로 가는 길에, 돌연 자객들이 난입했다.
“누구냐!”
“젠장, 카타리나 양. 절대 이곳에서 나오지 말고 계십시오.”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챙-!
챙강-!
여기저기서 쇠붙이들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제의 기사들은 자객들에게 맞서 황제의 약혼녀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때, 카타리나의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악!”
소리가 난 곳을 돌아보자, 카타리나가 그새를 참지 못하고 마차 밖으로 기어 나와 자객에게 위협을 받고 있었다.
자객 하나가 카타리나를 향해 검을 높이 들어 올렸다. 모두가 기겁하는 사이, 이브 로웰린이 재빨리 그쪽을 향해 뛰었다.
쇄애액-!
자객의 검이 그대로 이브 로웰린의 몸을 베어 냈다. 이브 로웰린의 몸이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안 돼! 이브 경!”
동료 중 하나가 그쪽으로 뛰어가 그녀를 벤 자객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었다.
이에 놀란 자객들이 우수수 도망쳤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깊은 자상을 입은 이브 로웰린은 동료의 품에 안겨 피를 쿨럭였다.
“콜록, 콜록.”
“이브 경, 괜찮은가? 이브 경……!”
“제 책상 오른편 서랍에 유서가 있습니다. 그걸 꼭…….”
그녀는 마지막 유언과 함께 고개를 떨구었다.
완벽한 죽음이었다.
* * *
테오도르는 약혼식을 위해 아침 일찍 일어나 단장을 했다.
되지도 않는 연극 놀이에 이런 귀찮은 짓거리까지 해야 하는 게 퍽 짜증스러웠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이브 로웰린이 함께 올 것이라 생각하자 평소보다 힘 주어 꾸미게 되었다.
어젯밤 이브에게 얻어맞은 곳이 얼얼했다.
“그 미친 여자,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도망쳤어.”
제 머리통을 깨부수기라도 할 참이었던지, 흰 베개 위에는 옅은 핏자국마저 남아 있었다.
테오도르는 이를 바드득 갈았다.
오늘 약혼식이 끝나기만 하면, 불러서 가만두지 않을 참이다.
“설마 정말로 페르디난트의 사주를 받아 내 목숨을 노린 건 아니겠지…….”
그는 다소 심각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피식-
그녀를 떠올리자 자그마한 웃음이 입가에 흘러나왔다.
어젯밤엔 대체 무슨 조화였던 걸까.
한순간, 그녀만 옆에 있으면 괜찮겠다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아마도…….
사납게 몰아붙이는 저를 향해 흐드러져라 웃던 그 얼굴 때문에.
부드러이 휘던 눈매와 살랑살랑 흔들리던 촘촘한 속눈썹, 입가에 매달린 아름다운 함박웃음…….
그래, 그 예쁜 웃음 때문에 한순간 미쳐 버린 모양이다.
아니, 어쩌면 저는 지금까지도 미쳐 있는 것 같다.
이것 보아라.
지금도 그 여자를 떠올리며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린 채 실실 웃고 있지 않은가.
테오도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며 입가를 더듬었다.
기실, 그는 아침부터 내내 웃고 있었다.
시종들은 그가 오늘의 약혼식으로 인해 기분이 좋아 웃는 것이라 여겼으나, 실상은 이브 로웰린을 떠올리며 웃는 것이었다.
가만히 자신의 입가를 쓸어 보던 그는, 문득 어젯밤 이 입술이 그녀에게 뜨겁게 닿았던 것을 상기했다.
그 순간 가슴이 뜨겁게 들끓었다.
확실했다.
이건 결코 분노나 경멸 같은 부정적인 감정이 아니었다.
여전히 많은 것이 혼란스러웠고, 스스로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테오도르는 어서 빨리 이보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아낸 뒤, 카타리나와의 이 연극을 끝내고 싶었다.
그다음에 모든 것을 결정짓고 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마무리할 것이다.
그러니 그때까지, 절대 그 여자를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 보낼 수 없었다.
어제 그녀의 반응으로 보아,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건 분명 거짓이었다.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제가 입을 맞추자, 제 목에 양팔을 두르며 강하게 입술을 엉켜 오던 그 뜨거운 체온이 아직도 제 살갗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았다.
“분명 나를 좋아하면서 아닌 척하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자 요 며칠 불쾌했던 감정이 싸악 날아가고, 한껏 기분이 고양되었다.
“솔직히, 밀가루 반죽처럼 생긴 벤야민 페르디난트보다는 내가 훨씬 더 낫잖아.”
테오도르는 거울에 비친 잘생긴 자신의 얼굴을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어제 제가 그녀를 향해 웃어 주자, 놀라 굳던 모습이 꼭 토끼 같았다.
아마도 제 웃는 얼굴에 큰 깨달음을 얻은 거겠지. 벤야민 페르디난트 같은 쭉정이를 좋아했던 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었는지.
그리고 그 뒤에 저를 기절시키고 도망친 건…….
“뻔해. 부끄러움을 탄 거겠지.”
하긴, 얼마나 부끄러웠을까. 벌써부터 혼자 미래 계획까지 세우고 있던 걸 저한테 들키지 않았나.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고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아기라니. 참 앙큼하기도 하지.
제 아기를 갖고 싶었던 걸까?
“딸이든 아들이든 그 여자를 닮으면 좋겠군.”
테오도르는 아주 잠시 그녀를 닮을 아기를 떠올려 보았다.
그녀를 닮았다면 딸이든 아들이든 귀여울 것 같으니, 딸과 아들을 모두 낳아도 좋을 것 같았다.
“둘 중 하나를 고르기 어려우니, 쌍둥이를 낳으면 딱 좋겠어.”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그녀의 물음에 잠시간 고민하였으나, 그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곧바로 답이 나온 탓이다.
물론 아기라는 게 황새가 물어다 주어 뿅 하고 생기는 것은 아니니, 갑자기 그녀가 제 아기를 가질 리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만일 그녀가 제 아기를 갖게 된다면, 응당 제 손으로 거두어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나. 그녀도, 그녀의 아기도.
딱히 그녀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서 그런 결정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 여자가 너무 티 나게 자신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이 관대한 알브레히트의 주인께서는 넓은 아량을 베풀어 그녀를 거두어 주겠다는 것이다.
그 여자에게 이 중대한 결심을 이야기하면…… 좋아할까?
“분명 좋아할 거야.”
테오도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스스로를 향해 자답했다.
“나를 그렇게나 좋아하는 여자니까.”
거울을 보며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의 모습이 퍽 미친 사람 같았다.
“폐하, 폐하……!”
테오도르의 혼잣말을 끊어 낸 것은 그를 부르는 다급한 외침이었다.
지금쯤 카타리나를 에스코트하여 약혼식장으로 향했어야 할 기사 중 하나가 그의 방문을 세차게 두들겼다.
“폐하, 이, 이브 경이……!”
“그놈이 왜? 설마 또 사고라도 친 건가?”
테오도르는 쯧, 하고 혀를 찼다.
그러나 속으로는 오늘 같은 날마저 사고를 치고 만 그녀가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아니, 잠깐. 귀엽다니. 내가 미쳤나?’
퍼뜩 인상을 구기려던 테오도르는 여전히 스스로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방어적으로 나오는 자신을 깨달았다.
‘아……. 그래, 맞아. 나는 미쳤었지. 어젯밤부터 지금까지 쭉, 내내 미쳐 있었지. 그 여자 때문에.’
솔직해지자.
[그럼 저는요?]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너는 내게 아무것도 아니노라, 그처럼 당당하게 말한 것과 달리 테오도르는 그 아무것도 아닌 여자에게 미쳐 있었다.
아니, 어떻게 그녀가 제게 아무것도 아닐 수가 있을까.
그녀는 저를 오롯이 미치게 만드는 여자였다.
그녀에게 자꾸만 마음이 끌리고, 그녀에 대한 생각을 계속 하게 되고…….
이따금씩은, 이보네마저…… 제게 가장 소중한 것마저 그녀로 인해 잊어버리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이런 짓도 해요?]
[뭐 어때.]
부러 담담하게 답했으나, 참 발칙한 질문이었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그런 짓도 하냐고?
아니, 누구와도 그런 짓은 해 본 적 없었다. 입맞춤조차 처음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위장 연애를 하기 위해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와 애정 행각을 보이긴 했지만, 그것은 모두 시늉이었다.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보면 그 여자의 머리카락이나 이마 따위에 입 맞추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정말로 입술이 닿은 적은 없었다.
그 여자의 목덜미에 남았던 붉은 흔적 또한 그 미친 여자가 스스로 제 살을 꼬집어 낸 것이었으며, 제 입가며 셔츠 깃 따위에 묻힌 여자의 화장품 흔적 또한 부러 보이기 위해 장난질을 해 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그 여자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는 시늉을 할 때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살이 닿는 게 싫어서 장갑을 벗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하늘 아래 떳떳했다.
이만큼이나 정조 있는 남자가 어디 있는가.
정조란 모름지기 좋아하는 이성과의 관계에서 순결을 지키는 일이라 들었다.
그렇다면 오직 그녀에게만 정조를 지킨 저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 않을까?
이브 로웰린이…… 좋다.
어쩌면 저는 그 여자를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말 많이 좋아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이브 로웰린을 좋아한다.
그녀가 저를 좋아하는 것처럼, 저 또한 그녀를 좋아한다.
아니, 어쩌면 그녀가 저를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그녀를 더 많이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왜냐면 저는 그녀와 달리 정조도 지켰고,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죽이고 싶었으니까.
그래, 그러니까…….
알브레히트의 황제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을 좋아한다.
그녀가 원한다면 제 머리통쯤이야 몇 번이고 깨부수어져도 기꺼울 정도로.
마침내 인정하고 나자 히죽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러나 앞에 선 기사의 표정은 그렇지 못했다.
테오도르는 타인에게 대체로 관심이 없는 편이었지만, 눈치는 좋았다.
“왜 그러지?”
그의 물음에 기사가 울 듯이 일그러진 얼굴로 고했다.
“……죽었습니다.”
기사는 침통한 목소리로 이어 설명했다.
“이브 로웰린 경이…… 자객들의 습격을 받아 그만…….”
“…….”
순간 멍해진 테오도르가 들고 있던 것을 툭 떨어뜨렸다.
그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지금 이게 무슨 소리냐고 물어봐야 하는데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카타리나 양을 향한 습격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브 경은 카타리나 양을 지키려다가…….”
주절주절 설명하는 말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하여 그는 그녀의 죽음을 부정하며 물었다.
“그래서 이브 로웰린은, 지금 어디 있지?”
테오도르는 곧바로 말을 달렸다.
커다란 황금 마차 주변은 자객들의 습격으로 인해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테오……!”
테오도르를 발견한 카타리나가 그에게 뛰어와 안기려 하였으나, 테오도르는 제게 달려드는 카타리나를 냅다 내동댕이쳤다.
“꺄아악!”
졸지에 바닥을 구른 카타리나가 비명을 내질렀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관심은 오직 이브 로웰린뿐이었다.
아직 수습되지 못한 죽은 이의 시신 주위로 애통한 표정을 한 기사들이 쭈욱 둘러싸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의 시신을 허겁지겁 끌어안았다.
“이브 로웰린……?”
식어 버린 몸이 싸늘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자신과 함께 있었던 그녀가 짙은 피 냄새로 뒤덮여 있었다.
그 피 내음이 어찌나 지독한지 아무것도 맡을 수 없었다.
“정말 죽었……다고?”
시체를 보는 건 어릴 적부터 종종 있었던 일이다. 개중 몇몇은 테오도르, 그 자신의 손에 의해 싸늘한 시신이 되었다.
늘 보아 온 것 중 하나였는데, 왜 이렇게 이상한 기분이 드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테오도르는 제 가슴을 가득 메운 이 감정이 무엇을 닮았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오래전, 체르니시아가 멸망하고 이보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꼭 그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더한 절망감이 그를 잠식해 나갔다.
* * *
황제가 이브 로웰린의 시신을 끌어안고서 황궁으로 돌아왔다.
죽은 이의 몸에서 흘러내린 피로 인해 그의 몸이 온통 붉게 물들었다.
“폐하……!”
사용인들은 놀라 경악한 얼굴로 그를 보았으나, 테오도르는 누구도 따라오지 말라 짤막하게 명하고는 침실에 들어가 문을 걸어 잠갔다.
“말도 안 돼. 네가 죽었을 리가 없어.”
그녀의 시신을 침대 위에 정갈하게 올려놓은 테오도르가 나직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피어난 황금색 빛무리가 그녀의 상처를 향해 천천히 번져 나갔다.
“조금만 기다려, 이브 로웰린. 내가 널…… 금방 치료해 줄 테니까…….”
그러나 깊은 자상은 아무리 성력을 쏟아부어도 치유가 되질 않았다.
피는 멈추었으나, 살이 아물지 않아 붉은 속살이 드러난 벌어진 상처가 그대로 남았다.
“어떻게 된 거지. 왜, 왜…….”
그가 오랫동안 단련했던 힘이었다.
본래는 이보네의 상처를 치유해 주기 위해 길렀던 그 성력이, 그녀에게 전혀 들지 않았다.
더 강한 힘을 쏟아부으려 하자, 상흔에서부터 몸이 썩어 가기 시작했다.
“안 돼…….”
놀란 테오도르는 재빨리 그녀의 몸을 얼렸다.
“하…… 왜…….”
그녀의 몸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대체, 왜…….”
이브는 눈을 뜨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감긴 눈꺼풀 위, 그 촘촘한 은색의 속눈썹을 가만히 손으로 매만져 보았다. 차갑고 딱딱했다.
“이브…….”
테오도르는 그 시리도록 차가운 몸을 품에 가득 끌어안고서, 그녀의 가슴팍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브…….”
소리 없는 흐느낌이 공기 중에 부유했다.
* * *
따사로운 아침 햇살이 내리쬐는 테라스에서, 나는 벤야민과 함께 마주 앉아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지금쯤 모든 일이 끝났겠지.’
오늘 아침 카타리나를 호위하는 기사들 틈에 섞인 이브 로웰린은 가짜이다. 벤야민의 술법으로 만든 허수아비이다.
그날, 벤야민이 카타리나와 함께 황궁에 왔을 때, 나는 허수아비와 바꿔치기 당했다.
어제 잠깐 마지막으로 테오도르를 보고 싶어서 허수아비가 카타리나의 호위를 위해 황궁 밖으로 나온 틈을 타, 황궁에 갔다.
다행히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가 정말 빼도 박도 못하는 인간 말종이라는 사실만 알게 되었다.
‘약혼식 하루 전날에 마음에도 없는 여자와 입을 맞추는 남자라니. 끔찍해.’
그가 기억을 잃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지 않았더라면, 나는 그의 본모습도 알지 못한 채로 그의 사랑에 눈이 멀어 좋지 않은 선택을 했을지 모른다.
‘그래도 참 많이 좋아했었는데…….’
그렇지만 지난 반년간 나의 반짝이던 사랑이 퇴색되는 것은 싫었다.
그래서 나는 내 안에서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와 기억을 잃은 개차반 테오도르를 분리하여 생각하기로 했다.
그러자 놀랍게도 마음이 편해졌다.
가만히 그의 체온이 닿았던 입술을 만져 보는데, 이때 갑자기 벤야민이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며 코를 킁킁거렸다.
“너한테서 황제의 냄새가 나.”
“응? 냄새?”
“응, 어젯밤부터…… 굉장히 짙은 냄새가…….”
나는 그를 따라 고개를 숙이고 킁킁거려 보았다. 그러나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테오도르도 그렇고 왜 자꾸 다들 나를 두고 냄새 타령을 하는 거지.’
속으로 꿍얼거릴 때였다.
벤야민이 불현듯 멈칫거리며 손에 쥐고 있던 찻잔을 놓았다.
“왜 그래?”
“그 미친 황제가…….”
벤야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벤야민을 보며 고개를 갸웃하자, 그가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네 시체를 들고 갔어. 황궁으로.”
“뭐?”
나는 입을 쩍 벌렸다.
‘내 시체를 가져갔다고? 대체 왜?’
문득 오래전의 소문이 떠올랐다.
[1황자궁에서는 밤마다 시체가 나온다더라. 테오도르 1황자는 시체를 가지고 노는 고대 어둠의 화신이라더라.]
‘그 소문이 사실이었어?’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아, 나는 팔뚝을 문지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큰일이네.”
“왜, 왜?”
“허수아비의 지속 시간이 다 하면 황제가 눈치를 챌 수도 있어. 그 전에 빨리 그걸 땅에 묻어야 할 텐데…….”
맙소사, 이건 정말 큰일이다.
“지속 시간이 얼마나 되는데?”
“3년.”
그러나 이어 흘러나온 벤야민의 답에 나는 안도했다.
아무리 테오도르가 조금 이상한 사람이라지만, 설마 죽은 이의 시체를 3년 동안이나 들고 있겠는가.
게다가 비록 오늘의 약혼식은 망치고 말았겠지만, 그의 곁에는 카타리나가 있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카타리나의 아기가 태어날 것이다.
그가 내 시체를 3년이나 가지고 있을 일도 없을 터이고, 그 덕에 나의 죽음이 거짓이라는 일이 밝혀지는 일 또한 없을 것이다.
‘그나저나 지금쯤 그 편지를 발견했으려나?’
나는 욕설이 난무하는 나의 유서를 떠올리며 잠잠히 차를 홀짝였다.
* * *
같은 시각.
테오도르는 이브의 숙소에 있던 물건을 모두 자신의 침실로 옮겨 왔다.
그리고 그 물건들 사이에서 이브가 제게 남긴 편지를 찾아냈다.
<안녕히 계세요, 폐하.
폐하의 심기만 어지럽히는 X같은 XX 새끼는 이만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약혼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부디 유병장수하시길.
추신. 그런데 그거 아세요?
네 얼굴이 제일 X같았어, XX XX야.>
특히나 ‘만나서 X같았다’는 부분에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봐서, 감정을 담아 꾹꾹 눌러쓴 게 틀림없다.
그럴 적에 미간을 찌푸리며 입술을 꾸욱 다물고 있었을 그녀를 떠올리자…….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그가 딱딱한 침대에 누워 있는 이브를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렇지, 이브?”
그러나 이브는 반응이 없었다. 그저 싸늘한 낯으로 눈을 감고 있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테오도르는 그런 이브를 향해 물었다.
“아직도 나한테 화가 안 풀린 거야?”
당연하게도 죽은 그녀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었다.
“싫어. 나한테 그딴 표정 짓지 마.”
그가 입술을 잘근 베어 물며 전전긍긍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다 돌연 벌떡 일어난 그가 자신의 서랍을 열어 언젠가 그녀에게서 빼앗아온 머리핀을 꺼냈다.
“화 풀어, 이브. 이거, 다시 돌려줄게.”
그가 입매를 비틀어 올리며 침대를 향해 다가갔다.
“내가 왜 이걸 너한테 줬는지 알 것 같아.”
한쪽 무릎을 침대 위에 걸친 그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기억을 잃기 전의 나도 널 좋아했던 거지? 그렇지?”
생긋 눈꼬리를 휘며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에 분명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틀림없어. 널 보고 반해 버린 거야. 그래서 페르디난트에서 널 데려오고……. 그런데 왜 내게 말 안 했어? 내가 널 좋아했다고…….”
그러다 돌연 드는 생각에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보았다.
“설마, 벤야민 페르디난트 때문이야?”
그 남자를 떠올리는 순간, 거센 분노가 가슴 안에서 들끓었다.
저 모르게 그 남자와 밀회를 갖던 그녀가 생각이 나고, 그 남자의 냄새를 가득 묻히고 돌아오던 그녀가 또 생각이 났다.
“그 밀가루 반죽처럼 생긴 놈 때문에?”
그러나 그는 곧바로 진정했다.
“아니지, 아니야. 너는 날 좋아하잖아. 나도 널 좋아하고.”
그렇게 생각하자 차츰 마음의 평화가 찾아왔다.
“그래, 우리는 서로 좋아했어. 벤야민 페르디난트 따위는 감히 끼어들 생각도 못 할 만큼. 그런데, 왜 너는…… 아…….”
문득 테오도르는 자신이 그녀에게 말할 틈을 주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항상 내게 무언가 말을 걸려고 했었지, 너는. 그게 혹시…….”
일말의 고민 없이 찢어서 버린 그녀의 편지가 생각이 났다. 끝내 불에 태워 재로 만들어 버렸으니, 다시 찾고자 하여도 찾을 수 없는 편지였다.
“내가 왜 그랬지…… 네가 전하려던 말을…… 들었어야 했는데…….”
테오도르는 서글피 중얼거리며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모았다.
그러나 짧아진 그녀의 머리카락은 어떻게 해도 모아지질 않았다.
그 길고 반짝이던 머리카락을 무참히 잘라 낸 것은 바로 이 손이었다.
“…….”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는 테오도르의 얼굴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테오도르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몇 번의 헛손질 끝에 결국 그는 들고 있던 머리핀을 놓치고 말았다.
챙그랑!
바닥으로 떨어져 굴러다니는 머리핀을 보자, 자신의 심장도 저렇게 나락으로 곤두박질쳐서 뒹구는 것 같았다.
이브는 여전히 자신을 보며 웃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침대 시트 위로 고개를 파묻었다.
황제가 며칠째 침실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죽은 이브 로웰린의 주검과 함께.
그가 미쳤다는 소식이 돌았다.
그러나 황제의 기사들은 황제가 미친 것에 대해서는 별생각이 없었다. 원래 황제는 한 번도 정상인 적이 없었으므로.
다만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슬퍼했다.
“이브 경의 시신을 가져와야 합니다.”
“맞아요, 이브 경을 땅에 묻어 줘야 해요.”
“불쌍한 이브 경……. 살아 있을 때도 폐하의 괴롭힘에 시달리더니, 죽어서도…….”
“대체 폐하는 왜 이브 경의 시신을…….”
“오래전에 그런 소문도 있었잖아요? 1황자 전하께서는 밤마다 시체들을 가지고 흑마법을…….”
“하지만 그건 그냥 소문이잖아?”
그들이 복도에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숙덕거리는 사이,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기사들은 고개를 들어 기척의 주인을 보았다. 에른스트 2황자였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에른스트가 걸음을 우뚝 멈추어 그들을 빤히 응시했다. 웃음기 하나 없는 그의 얼굴은 일견 차가웠다.
에른스트 2황자 또한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 조금 이상해졌다.
언제나 황제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용히 없는 듯 살아가던 황자였는데, 최근 들어 그에 관한 흉흉한 소문이 들려왔다.
황자궁의 사용인 몇몇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 나갔다더라. 그리고 모두가 쉬쉬하지만, 사용인의 무고한 죽음에는 다름 아닌 황자의 개입이 있었다.
일전에도 딱 한 번 그런 일이 있었다. 황자의 생모인 마르가라테 황후와 외삼촌인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죽던 날.
자그마한 개미 한 마리도 죽이지 못할 것 같았던 햇살 같은 2황자 전하께서는 그날 황자궁에 피바람을 일으켰다.
사람들은 어머니와 외삼촌을 동시에 잃은 그가 한순간 정신을 놓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번엔 대체 왜…….’
이브 로웰린의 죽음 이후, 그는 매일 같이 이곳에 찾아와 황제를 만나게 해 달라고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만나 주지 않았다. 에른스트뿐만 아니라, 자신을 찾아온 그 모두를.
때문에 그의 보좌관인 아르민만 괴로워했다.
“폐하를 만나러 왔다.”
에른스트가 붉게 충혈된 눈으로 닫힌 문을 노려보며
“죄송합니다, 전하. 폐하께서는 누구도 만나길 거부하고 계십니다.”
“그럼 대체 언제 만날 수 있지?”
“그건 저희도…….”
“…….”
에른스트는 입술을 꾸욱 다물었다.
그가 테오도르의 침실을 한창 노려볼 때였다.
끼이익-
긴 시간 닫혀 있던 문이 돌연 열렸다.
그리고 그 사이로, 테오도르가 길쭉한 다리를 내밀었다.
모두가 숨을 꼴깍 삼켰다.
테오도르는 본 적 없는 인상으로 복도에 나왔다.
“왜 소란스럽지?”
원래도 성격이 나빴는데, 지금은 유독 심하게 나빠 보였다. 분명 입꼬리에 야트막한 미소 비슷한 것을 띠고 있었는데도 그러했다.
괜히 잘못 건드리는 순간 사달이 날 것이라는 걸 모두가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그런데 에른스트 2황자는 그런 테오도르가 무섭지도 않은지, 대뜸 그의 앞으로 걸어가 말했다.
“이브를, 이보네를 돌려줘요.”
천천히 제 아우를 향해 시선을 돌린 테오도르가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뭔 개소리야?”
“당신이 이보네의 시체를 가지고 있잖아.”
테오도르의 두 눈을 가늘게 좁혀졌다.
“이브 로웰린과 이보네는 다른 사람이다.”
“당신만 모르고 있어! 이보네는……!”
“당장, 쫓아내.”
테오도르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에른스트를 쫓아냈다.
“죄송합니다, 황자님.”
기사들이 에른스트의 양팔을 각기 붙들고 끌고 갔다. 에른스트의 강한 저항으로 인해 약간의 소동이 있었으나, 금세 복도는 조용해졌다.
“저 자식 때문에 이브가 깨 버렸잖아.”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소리를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눈가를 찡그렸다.
“폐하…….”
그 고요한 틈을 타 아르민이 테오도르에게 다가왔다.
며칠 만에 보는 황제인지 모르겠다.
이제 정신을 조금 차리신 건가 싶어 그의 몰골을 슬쩍 살피는데, 여전히 상태가 썩 좋지는 않았다.
가령, 눈 밑에 거뭇거뭇한 피부라든가. 혹은 유독 피곤해 보이는 낯빛이라든가.
그러나 그런 것과 달리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저…… 그동안 밀린 정무가…….”
아르민은 용기를 내어 그에게 말을 붙였다.
“가져와.”
“네?”
“가져오라고, 이리로.”
“폐하의 침실로요?”
아르민이 당황하여 되물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일과 휴식의 구분이 철저한 사람이라서, 한 번도 침실로 일을 가져간 적이 없었다.
“그래. 이브랑 같이 볼 거야.”
“……?”
“내가 자리를 비우면 이브가 슬퍼할 테니까.”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활짝 열린 방 안쪽을 쳐다보았다.
“그렇지, 이-브?”
‘이-브’ 하고 부르는 목소리가 꿀처럼 달콤했다.
그 기괴함에 아르민은 오싹한 마음을 감추고 테오도르의 침실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어지간해서는 집무실에서만 테오도르를 만나왔기에, 가장 최근에 이곳에 방문한 건 그가 낙마한 직후였다.
그런데 지금, 그의 침실이 그때와 구조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황제의 것이라기엔 지나치게 낡고 수수한 가구들이 그의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모두 이브 로웰린의 숙소에서 가져온 것들이었다.
그러다 침대 위에 정갈하게 누워 있는 이브의 시신을 발견한 아르민은 ‘헉!’ 하고 놀랐다.
“폐, 폐하……! 이게 어, 어떻게……!”
“성력을 썼어. 지금도 나의 냄새로 물들어 가고 있지.”
테오도르는 퍽 뿌듯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 그런 걸 여쭌 게 아니라…….”
황제가 이브 로웰린의 시신을 침실로 가져갔다는 소문은 알음알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시신을 마치 고귀한 보물이라도 되는 양 침대 위에 눕혀두고 애지중지 다루며 성력까지 쏟아부을 줄은 몰랐다.
무엇보다 테오도르는 외가인 레오브란테에서 받은 그 힘을 퍽 드러내기 싫어했었다.
그리고 항상 말하지 않았던가. 그 힘은, 오직 한 사람을 위해서만 사용될 힘이라고.
“이브 경을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째서 성력까지 사용해 가며…….”
사아악.
표정을 굳힌 테오도르가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아르민을 보며 물었다.
“내가, 이브 로웰린을 싫어한다고?”
“……네. 분명 싫어하지 않으셨습니까. 항상 괴롭혀서 쫓아낼 궁리를 하셨잖아요.”
“내가, 내가 이브 로웰린을 싫어했다고…….”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같은 말을 음산하게 중얼거리더니,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그럴 리가 없잖아? 아르민 마이어, 너도 에른스트에게 개소리가 옮았나?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이렇게 사랑하고 있는데.”
사랑, 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을 적에,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이 변하였다.
아르민은 못 들을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온몸에 털이 쭈뼛 돋았다.
“그렇지, 이브?”
그가 한 번도 지은 적 없는 포근한 눈웃음을 띤 채로 이브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 괴상하고 기이한 모습을 본 아르민은 속으로 생각했다.
‘폐하께서 정말로 미쳐 버리셨구나.’
그러나 아르민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런데 왜? 대체 왜? 이브 경의 죽음이 충격적이었나?’
황제는 그녀의 이름만 들려도 치를 떨며 싫어하지 않았나?
제 곁에서 쫓아내겠다며 박박 벼르며 못되게 괴롭히기까지 했었다.
‘그럼, 이제까지 그렇게 거부해 왔으면서. 사실은 좋아했다고?’
어이가 없어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허…….”
이미 죽은 이의 앞에서 뒤늦게 마음을 깨달았다 한들, 죽은 이는 더 이상 뒤늦은 마음을 알아주지 못할 텐데.
아니, 설사 죽은 이브 로웰린이 그의 마음을 알게 된다 하더라도 문제이다.
내내 줄곧 저를 못살게 괴롭혀온 이가 사실은 저를 좋아하고 있었다?
제가 그녀였더라면 무덤에서도 발딱 일어나 원혼이 되어 이제껏 괴롭힘당해 온 것들을 갚아 줄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는 심지어 무덤이 아닌 테오도르의 침실에 있었으니, 그에게 복수하기 딱 좋은 처지가 아닌가.
‘어쩌면 폐하가 미쳐 버린 건 이브 경의 저주일지도 모르지.’
어둡고 음침한 방 안에 시체와 대화하는 테오도르는, 누가 보아도 저주받기 딱 좋아 보이는 모습이었으니까.
아르민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치우며, 이브 로웰린이 살아생전 사용하던 작은 책상 위에 들고 온 서류를 내려놓았다.
“급한 안건들만 먼저 가져왔습니다. 일단은 그날 갑작스러운 사고로 취소된 폐하의 약혼식을 어떻게 할지가 가장 급한 문제인데…….”
그러고는 그중 맨 위의 것을 들어 설명했다.
“카타리나 양은 그날의 일로 충격을 받아 요양 중이라 하고, 페르디난트를 습격한 암살자들을 지하 고문실에 붙잡아 두었으나 모두 자결하여…….”
“모두, 자결해?”
문득 테오도르가 아르민의 말을 끊어 내며 중얼거렸다.
“네, 애석하게도 배후를 알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그자들의 시신은 지금은 어디 있지?”
아르민은 혹여나 테오도르가 그 시신들까지 이곳으로 데려오고자 할까 봐 걱정이 되었다.
“일단은 폐하께서 나오시면 말씀을 드리려고, 지하에 두었습니다만…….”
“그럼 그곳에 계속 둬. 내가 다시 확인하지.”
그러나 다행히도 테오도르는 그 정도까지 미쳐 버리진 않았나 보다.
“네, 폐하. 그런데 카타리나 양에게 가 보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누구?”
테오도르가 마치 모르던 이의 이름을 듣는 것처럼 두 눈을 깜빡였다.
“폐하의 약혼녀가 되실 분 말입니다.”
아르민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아 내며 대답했다.
“그래도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기를 임신했고…….”
“아, 그래.”
아르민의 설명에 테오도르가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 비식 웃었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카타리나의 이름을 읊조리는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이 났다.
“그 여자 때문에 이브가 다쳤어. 그 여자를 지키려다가…… 이브가…….”
그는 눈앞에 아르민이 있다는 사실을 잊은 사람처럼 연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런데 왜 나의 이브가 그 여자를 지켜야 했을까?”
그러던 중 문득 머릿속에 떠오르는 목소리 한 자락이 있었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바로 자신의 목소리였다.
“아, 그래. 내가…….”
테오도르는 표정을 일그러뜨리며 고통스러운 목소리로 욕설을 내뱉었다.
“빌어먹을 내가 이브에게 명령을 했어. 그 여자를 지키라고.”
그 잔인한 명령에 온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던 그녀가 생각이 났다.
“그때 이브는 몸도 좋지 않았는데.”
심지어 그녀는 그날 제 앞에서 쓰러질 뻔하지 않았던가.
“젠장, 내가. 내가…….”
테오도르는 스스로를 향한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불가합니다. 저는 폐하의 호위입니다.]
이브는 처음부터 그 여자의 호위를 하기 싫다고 했었다. 그 말에 제가 무어라 답했던가.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
상처받은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던가.
그러고는 상처받은 그녀를 내버려 두고, 제 팔에 매달리는 카타리나와 함께 다정한 연인처럼 산책을 하러 나갔다.
그 뒤로 끈덕지게 따라붙는 그녀의 눈길을 무시한 채.
모두, 제가 벌인 짓이었다.
“이브는 나와 함께 있고 싶다 했는데, 내가 그 여자한테 보낸 거야.”
그녀의 죽음에 과거의 자신이 기여했다는 것을 깨달은 테오도르는 살짝 맛이 간 눈동자로 거울 속의 자신을 노려보며, 흉흉한 목소리로 지껄였다.
“이브를 그 여자한테 보낸 과거의 나 새끼를 죽여 버려야 해.”
아르민은 테오도르가 시간을 돌릴 수 없음에 감사해야 했다.
만약 그게 가능했더라면, 그는 당장 과거의 자신을 찾아가 뱃가죽에 칼을 찔러 넣었을 것이다.
거울 속 자신을 노려보는 테오도르는 그만큼이나 스산하고 오싹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폐하, 지, 진정하십시오. 시간을 돌리는 건 불가능하고…… 일단은 해결해야 할 일들부터 먼저…….”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눈동자를 스르륵 굴렸다.
그래, 과거의 자신을 죽이는 건 불가능하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현재의 자신을 죽일 순 없었다.
‘내가 없으면…… 이브는…….’
테오도르는 침대 위의 이브의 시체를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지금도 간신히 저의 성력으로 살아 있을 때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다.
저 사랑스러운 몸이 썩어 땅에 파묻힐 것을 생각하니, 제 심장을 조각내 버리고만 싶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내가 흑마법에라도 걸린 게 아닐까?’
테오도르는 저처럼 사랑스러운 그녀를 박대하였던 과거의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문득 그는 그녀에 대해 안 좋은 말들을 끊임없이 속삭였던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그래, 카타리나, 그 교활한 여자가 나와 이브의 사이를 이간질한 거야.’
그러나 그 생각은 곧바로 무너졌다.
‘아니, 무슨 추한 생각이야? 이브를 의심하고 경계한 건 나잖아. 그 여자를 호위하기 싫다고 했는데도 부득불 보낸 건 나잖아. 그 여자는 부추기기만 했을 뿐이고.’
제가 어디 다른 이들의 말에 휘둘리는 사람이었던가. 그 모든 업보는 스스로가 쌓아 올린 죄악의 탑이었다.
“하하!”
돌연 그의 잇새로 차가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래, 모두 내가 벌인 짓이야. 내가 널 죽인 거야, 이브.”
그 와중에도 그녀를 향한 눈동자는 애틋하기만 했다.
“그래서 날 안 쳐다봐 주는 거로군. 그래서 내게 눈을 떠 주지 않는 거야.”
“폐, 폐하……?”
아르민은 혼잣말을 하는 테오도르를 기괴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저…… 폐하, 일단 카타리나 양을…….”
“당연히 만나러 가야지. 나의 아기를 밴 사랑스러운 약혼녀가 아니신가.”
테오도르는 무섭게 웃으며 답했다.
그 눈빛에 도는 명명한 살의 때문에 아르민은 몹시 불안해졌다.
이러다 꼭 그가 큰 사고라도 칠 것 같아서…….
“다음으로 에른스트 전하의 거취 문제를 정해야 합니다.”
원래 에른스트 2황자는 테오도르의 약혼식 직후 황궁을 나가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약혼식이 파토가 난 이후 그의 거취가 몹시 애매해졌다.
“에른스트?”
테오도르는 조금 전 저를 찾아와 따지던 에른스트를 떠올렸다.
뜬금없이 이보네를 찾던 그 멍청한 새끼.
이브와 이보네는 다른 사람인데…….
그런 것도 구분할 줄 모르면서, 감히 그딴 눈으로…… 그딴 목소리로…….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에게 화가 치솟았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아니, 정말 다른 사람일까?’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함께 떠올린 순간, 돌연 강한 두통이 일었다.
“윽…….”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어지간한 고통에는 반응하지 않는 테오도르가 아파하는 모습에 아르민이 놀라 그를 부축했다.
“폐하! 괜찮으십……! 의사를……!”
“아냐. 부르지 마.”
낙마 이후 기억을 되짚으려 할 때마다 느껴지던 두통과 같은 것이었다.
이브와 함께 있을 때마다 느껴지던 두통이기도 했다.
이 두통 때문에, 테오도르는 그녀를 더욱 거부해 왔다. 그녀를 볼 때마다 머리가 아파서, 괜한 짜증을 내고 성질을 부렸다.
그런데 이제는…… 머리가 반으로 쪼개질 것 같은 이 두통으로 인해, 꼭 그녀가 옆에 있는 것 같았다.
“괜찮아.”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만연한 환희가 떠올랐다. 그가 황홀하다는 듯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이건…… 이브가 내게 돌아온 거야.”
그는 그 고통마저 기꺼워 기쁘게 눈매를 휘었다. 어찌나 활짝 웃던지, 그 눈꼬리 끝에 작은 눈물방울마저 매달려 있었다.
그런 테오도르를 보며, 아르민은 탄식을 터뜨렸다.
폐하께서…… 정말로 미치셨다…….
* * *
카타리나는 약혼식 당일에 일어난 갑작스러운 사고로 졸지에 모든 걸 잃었다.
황제의 약혼녀가 되는 절호의 순간이었는데, 그 대단한 기회를 놓친 것이다.
난입한 자객들은 자신을 노렸다. 하지만 이상했다.
‘대체 왜 나를 노린 거지? 페르디난트의 세력을 견제하는 이들의 짓인가?’
아무튼 그 와중 이보네가 죽었다.
하필이면 자신을 구하려다가 죽은 게 찝찝하긴 하였으나, 그 여자가 죽은 건 잘된 일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언제든 테오도르를 흔들 수 있는 여자니까.
그런데 문제는 그다음부터였다.
벤야민은 놀란 카타리나를 진정시키겠다는 이유로 요양을 빙자한 감금을 했다.
그것도, 저택의 가장 후미진 곳. 이 낡은 건물에, 마치 죄인을 다루듯.
‘이게 어떻게 요양이야? 감금이지!’
카타리나는 씩씩거리면서도 테오도르가 자신을 찾아오길 기다렸다.
황제는 이보네 체르니시아의 흔적을 찾기 위해서라도, 분명 저를 찾으러 올 것이다.
그렇게 믿고 기다렸으나 생각보다 그의 방문이 늦어지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지?”
카타리나는 괜히 불안해졌다.
“설마, 이제 와 그 여자를 포기하려고?”
그러나 카타리나는 곧바로 불안감을 지워 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향한 테오도르의 집착을 익히 옆에서 보아 오지 않았던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황제가 찾아와서 나를 꺼내 줄 거야.”
카타리나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자위했다. 테오도르의 방문이 부디 너무 늦지 않기만을 바라며.
작금의 제 처지가 말도 아니었다.
옷도 제대로 된 것을 못 입었고, 이 낡은 방은 난방도 되지 않아 대낮에도 으슬으슬 한기가 돌았다.
식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으며, 관리가 안 된 손톱은 거칠었다.
“내가 어떻게 얻은 기회였는데…….”
까득, 까드득…….
카타리나는 손톱을 잘근잘근 깨물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반년 전, 이브 로웰린의 주종 문서를 테오도르 황제에게 빼앗긴 이후.
벤야민이 그간 방자하게 구는 자신을 내버려 둔 게 그 주종 문서 때문이라는 것을 알기는 했으나, 그것을 잃자 박해하는 수준으로 자신을 멸시하고 구박하였다.
카타리나는 저를 핍박하는 벤야민에게 공포를 느끼며 달달 떨었다.
[이제 가치를 다했으니 너를 살려 둘 필요는 없겠지.]
[가, 가치를 증명해 보일게요……!]
카타리나는 살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 했다.
[어떻게? 테오도르 황제는 너를 더 이상 만날 생각도 없는데?]
[분명 바, 방법이 틀림없이 있을…….]
[그래. 네 말이 맞아. 한 가지, 방법이 있긴 하지.]
벤야민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테오도르 황제가 돌변한 지점. 그 이후의 시간을 없애는 거야.]
시간을 없애는 게 가능할 리 없다. 대신 흑마법으로 기억을 없애는 것은 가능했다.
고난이도의 술식인 만큼 페르디난트의 피를 필요로 했으며, 술식이 깨지기라도 하는 날에는 시전자에게 큰 무리가 갈 터였다.
벤야민은 언젠가 술식이 깨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이미 한 번, 죽은 루돌프의 술식을 깨뜨렸으니까.
그래서 그는 카타리나에게 흑마법의 서를 건네며 테오도르 황제의 시간을 없애라 종용했다.
카타리나는 울며 자신의 피로 술식을 그렸다.
얼마 뒤, 테오도르 황제의 낙마 소식이 들려왔다.
그리고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정말로 기억을 깨끗이 잃은 사람처럼 행동했다.
성공적이었다.
결렬되었던 혼담이 다시 이어졌으며, 페르디난트를 두고서 황제와 거래를 하게 되었다.
모든 것이 순탄하게 흘러갔다.
이브 로웰린이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 건 그 과정의 부산물이었다.
그것 외에도 카타리나는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가령……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인 게 다름 아닌 벤야민의 소행이라든지…….
“벤야민…….”
카타리나는 까득, 까득 손톱을 깨물며 그 위험한 남자를 생각했다.
그 남자의 스산한 미소를 떠올리자, 오싹한 한기가 폐부 안 깊은 곳으로 밀려왔다.
* * *
황궁을 떠나 페르디난트 저택에 머물며, 나는 퍽 오랜만에 근사한 호사를 누렸다.
가주와 같은 층에 있는 가장 좋은 방에, 옷장을 가득 채운 좋은 옷과 끊임없이 제공되는 맛있는 음식들…….
내가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로서 이곳에 머물 때는 한 번도 누린 적 없던 것들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그럼에도 이 공간이 싫었다.
“어때, 이브?”
둥그런 테이블 하나를 사이에 두고서, 벤야민이 내게 물었다.
“생활에 불편함은 없어?”
“전혀. 너무 좋은 호사라 과분할 정도야.”
“다행이네.”
그가 생긋 웃으며 뿌듯하게 말했다.
“사용인들을 닦달한 보람이 있어. 널 모시는데 조금의 실수도 있어선 안 된다고 말했거든.”
나는 그런 그에게 고마우면서도 조금 부담스러웠다.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 주지 않아도 돼. 조금 잠잠해지면 외국으로 떠날 거니까.”
그 말에 벤야민이 멈칫했다.
“떠난다고?”
“응, 일단은 외국으로 떠났다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설명하며 앞에 놓인 푸딩을 한 스푼 떠 올릴 때였다.
“욱…….”
문득 밀려오는 구토감에 스푼을 놓고 헛구역질을 했다. 놀란 벤야민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이브? 괜찮아? 당장 의사를……!”
“괜찮아, 벤야민.”
나는 곧바로 뛰쳐나가 의사를 데려오려는 그의 팔을 붙잡으며 설명했다.
“그냥 입덧을 하는 거야.”
“입덧……?”
벤야민은 아주 생소한 단어를 듣는 것처럼 내 말을 한 번 따라 하더니, 이내 그 단어의 의미를 깨닫고 표정이 굳었다.
“너 설마…….”
그가 시선을 내려 아직은 납작한 내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누구의……? 설마, 테오도르 황제의?”
“아니, 내 아이야.”
“…….”
언제나 무감하던 벤야민의 표정이 아주 괴이하게 뒤틀렸다.
“벤야민?”
처음 보는 그 표정에 벤야민을 부르자, 그가 조금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는 왜…… 이렇게 태평하지?”
“태평하면 안 되는 이유도 없잖아.”
나는 소심하게 항변했다.
“나에게도 드디어 가족이 생긴 거야.”
“…….”
이에 벤야민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내 눈을 똑바로 마주 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나도 네 가족을 지키는 걸 도울게.”
“응?”
“아이가 태어나 무사히 자라도록 페르디난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게. 그러니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이곳에 더 머물러.”
페르디난트의 모든 것이라니……. 고맙지만 과한 호의였다.
“굳이 그렇게까진…….”
“난 친구잖아. 너의, 하나뿐인.”
그러나 벤야민은 애초에 내 거절은 생각지 않았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에게는 벤야민 말고도 친구가 더 있었지만, 벤야민은 어릴 때부터 ‘하나뿐인 친구’라는 것에 굉장히 집착하곤 했다.
그래서 나는 그의 표현을 정정하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 공간이 좋아지지는 않았다. 페르디난트 저택의 모든 곳에 나의 암울한 과거가 깃들어 있었다.
“그렇지만 난 여기가 싫어.”
“그럼 저택을 옮겨 버릴까?”
“저택을 옮기다니? 무슨 소리야?”
“남쪽에 섬이 하나 있어. 그곳으로 같이…….”
벤야민이 나긋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 갈 때였다.
“가주님, 테오도르 황제가 찾아왔습니다.”
예고 없는 테오도르의 방문 소식이 들려왔다.
* * *
이보네가 몸을 숨긴 사이, 벤야민이 그를 맞이하러 갔다.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벤야민은 약속 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향해 떨떠름하게 물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상심에 빠진 약혼녀를 만나러 왔지.”
테오도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젖히며 대답했다.
그러나 그 말과 달리 정작 그의 모습은 약혼녀를 만나러 온 모습이라기보다는 마치 도살자와 같은 행색이었다.
“카타리나는 몸이 좋지 않아 만날 수 없습니다.”
“상관없어. 몸이 안 좋은 건 내가 아니라 그 여자잖아?”
벤야민의 둘러대는 말에 테오도르가 진심으로 그게 어째서 이유가 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반적으로 병문안을 올 때는 환자의 상태를 먼저 살피는 법입니다만.”
“그래서, 만날 수 없다는 건가?”
테오도르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상대방이 아프든 말든 제 알 바가 아니라는 듯 상식적이지 못한 그의 반응에 벤야민은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 카타리나의 몸이 조금 더 나아지면 다시 모시도록 하지요.”
“…….”
테오도르는 들리지 않는 소리로 욕설임에 분명한 말들을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벤야민은 애써 그것을 못 들은 척 슬쩍 화제를 바꾸었다.
“이브 로웰린의 시신을 가져가셨다고 들었습니다. 이브 로웰린은 본래 페르디난트의 기사. 그녀의 시신을 돌려주십시오. 페르디난트에서 수습하겠습니다.”
벤야민의 담담한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대뜸 표정을 굳혔다.
“이브가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였어.”
그러고는 집착이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로 선언하듯 말했다.
“이브 로웰린의 모든 게 다 내 거야. 썩어 가는 살 한 점, 말라비틀어진 핏방울 하나까지도 다 내 거야.”
“…….”
“그러니 너 따위에게 그녀를 돌려줄 일은 없어.”
“……네, 그러십시오.”
벤야민은 순순하게 대답했다. 그 태도에 테오도르가 한쪽 눈썹을 치켜떴다.
“그러라고?”
벤야민을 응시하는 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이 자식도 에른스트와 똑같았다. 겨우 그 정도뿐인 마음으로, 이브를…….
“그렇지만 폐하께서도 분명 느끼셨을 텐데요.”
이때, 벤야민이 도발하듯 말했다.
“그녀에게 남은, 제 흔적을.”
테오도르가 약혼식 이틀 전날부터 곁에 두었을 그녀의 허수아비는 자신의 마력을 쏟아부어 만든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자신의 향으로 가득했을 터이다. 마치 저와 한 몸이라도 된 것 같았겠지.
그걸 보고 과연 저 의심 많은 황제가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을까?
“궁금하지는 않나요? 그녀에게서 왜, 그렇게까지 제 향이 묻어났을지.”
벤야민은 사르르 웃으며 물었다.
이브가 테오도르의 아기를 가졌단 말을 들었을 때 자신이 느꼈던 비참함을 테오도르 또한 느끼기를 바랐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전혀 도발 당하지 않은 표정으로 삐뚤게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딱히.”
그가 얼핏 경쾌하다시피 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이제 네 흔적은 내가 모두 덮어 버렸거든.”
“……?”
“이브에게선 매일 내 냄새가 풍겨.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부터 캄캄한 밤이 될 때까지 그녀와 난 늘 함께하지.”
테오도르는 히죽 웃으며 이브와의 일상을 설명했다. 그럴 적에 그의 표정이 퍽 즐겁게 느껴졌다.
“식사를 할 때에도, 정무를 볼 때에도, 잠을 잘 때에도…… 우리는 언제나 함께야.”
“그녀와…… 매일…… 그렇게 지내고 있다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녀에게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마. 한 번만 더 내게 그녀를 내놓으라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
“제가 말씀드린 건 그녀가 아니라 그녀의 시신을…….”
“그럼 카타리나 양은 다음에 만나러 오지.”
테오도르는 자신의 할 말만 남기고 웃으며 자리를 떴다.
벤야민은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테오도르 황제가 조금, 아니 상당히 미친 것 같았다.
* * *
한편, 페르디난트를 나선 테오도르는 조금 걷다가 우뚝 멈추어 섰다.
그래, 벤야민에게 말한 것처럼 저는 매일같이 이브와 소소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행복한가?
이브는 아직도 제게 화가 많이 난 것 같았다. 여전히 저를 향해 눈을 떠 주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표정이 고통스레 일그러졌다. 근원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와 그의 심장을 세차게 흔들었다.
이래서 그녀와 떨어져 있으면 안 된다. 자꾸 이렇듯 딴생각들이 드니까.
“이브, 이브가 필요해…….”
그가 횡설수설 중얼거리며 생각했다.
“보고 싶어, 이브…….”
테오도르는 곧바로 말에 올라탔다.
황궁에 도착한 그는 헐레벌떡 이브가 있을 곳을 향해 달려갔다.
“이브……!”
벌컥, 침실 문을 열자 아침에 나설 때와 마찬가지로 침대 위에 고요히 누워 있는 이브의 모습이 보았다.
“아…….”
그제야 거칠게 뛰던 그의 심박이 차츰 평온해졌다.
“내가 왔어, 이브.”
테오도르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가 누워 있는 침대 위에 걸터앉았다.
“아직도 자고 있군…….”
그의 손바닥 사이로 푸석해진 은색 머리카락이 사르르 흩어졌다.
“미안해. 너를 두고 가기 싫었는데, 그런데 그 여자를 만나야 해서…….”
그녀의 앞에서 카타리나를 입에 담는 순간, 울컥한 감정이 치솟았다.
자신의 또 다른 과오가 생각난 탓이다.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지.]
[그럼 저는요?]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주지 않은 것, 그리고 카타리나를 사랑한다고 말한 것.
그 모든 게 너무나 후회가 되었다.
다르게 말했다면 어땠을까.
그 여자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건…… 아무래도 너인 것 같다고.
널 사랑한다고.
“테오도르 이 X같은 새끼. 네가 이브 대신 죽었어야 했어.”
테오도르는 자기 자신을 향해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다 곧바로 애달픈 음색으로 그녀를 향해 속삭였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이브. 그렇지만 네가 다시 눈을 뜨면…… 그때는 꼭 말해 줄게, 널 사랑한다고.”
죽은 사람을 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니 이미 죽은 이의 눈이 다시 뜨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고대의 4대 사도의 힘을 모으면…….
“시간을 거슬러서, 너에게 갈 거야.”
테오도르가 생긋 눈매를 휘었다.
시간을 거스르는 것은 가능했다. 힘들고 어렵지만, 분명 가능한 방법이었다.
고대, 브리힘 신의 가호를 받은 네 명의 사도가 있었다.
빛의 길잡이, 레오브란테.
하늘의 대리인, 페르디난트.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리고…… 본디 네 명의 사도 중 가장 강했으나 기나긴 시간 속에 악으로 규정되어 ‘고대의 어둠’으로 불리는, 조각난 네 번째 사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테오도르는 이브를 위해 그들의 힘을 모을 생각이었다.
그러나 앞의 세 사도와 달리, 마지막 사도인 테네브리스는 명맥이 끊긴 지 오래라 그 흔적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테네브리스의 흔적이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가장 지독하고 음습한 흑마법이 페르디난트의 안뜰에서 시현되었어요.]
페르디난트의 안뜰.
카타리나는 그곳에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다고 했다. 아마도 흑마법의 재료가 되었을 무언가가,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모든 흑마법의 부산물들이 그러하듯, 그것은 필히 테네브리스의 영혼을 담고 있겠지.
이 정보를 제게 흘린 게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유일한 쓸모일지도 모른다.
어느 순간, 그의 목적은 이보네의 마지막 종적을 찾는 것에서 이브를 만나러 가는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가면 제일 먼저 그 멍청한 과거의 나 새끼를 죽이고, 너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할 테야.”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계획을 속삭이는 그의 얼굴 위로 다정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런데…….”
그러나 그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그곳에서도 네가 나를 보지 않으면 어쩌지?”
불안이 다시금 그의 가슴을 야금야금 잠식해 나갔다.
“그땐 정말 어쩌지…….”
테오도르는 여전히 자신을 외면하는 죽은 이브의 머리맡에서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갑작스러운 테오도르의 방문 소식에 나는 쥐 죽은 듯 조용히 방 안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벤야민이 다소 피곤한 얼굴로 돌아왔다.
“폐하는?”
“돌아갔어.”
“무슨 일로 온 거야?”
숨을 꼴깍 삼키며 묻자, 벤야민이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병문안을 왔대. 카타리나가 이번 일로 상심이 커서 앓아누웠다고 전했거든. 황제가 걱정이 많이 됐나 봐. 연락도 없이 찾아올 만큼.”
“카타리나는 멀쩡하잖아? 내 허수아비가 대신 칼에 맞아 죽은 거 아냐?”
“응. 그래도 걱정되는 마음은 어쩔 수 없겠지. 사랑하는 여자가 아프다고 하니.”
“…….”
그의 방문 이유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지만, 나는 괜히 씁쓸해졌다.
카타리나를 사랑하냐는 나의 물음에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하던 테오도르가 생각이 났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죽었는데…….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하긴, 나 따위가 뭐라고.
내 죽음에 대한 애도까지 바라는 건 사치였다. 나는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여자였으니까.
아마도 두 사람의 약혼식은 곧 재개되겠지.
“이브, 아까 나누던 이야기 말이야.”
벤야민이 내 손등을 툭툭 건드렸다.
“저택을 옮길게. 그러니 내가 너와 네 아기를 도울 수 있도록 허락해 줘.”
그가 테오도르의 방문 직전까지 나누었던 이야기를 다시금 꺼냈다.
“하지만 벤야민, 이제껏 쌓아 온 기반이 모두 여기 있는데 그걸 버리고 저택을 옮긴다니. 그건 말도 안 돼.”
페르디난트는 대대로 알브레히트를 받쳐 온 주요 가문이었고, 그 기반이 모두 이곳 알브레히트의 수도에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모두 버리고 저택을 옮기다니.
그것도 나를 돕겠다는 그 소소한 이유 하나로.
제아무리 벤야민이 사춘기 소년처럼 우정 놀음에 심취해 있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너를 위해서라면, 난 상관없어.”
“하지만 이건 아닌 것 같아.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게도 부담스러운 일이고.”
“…….”
내 말에 잠시 멈칫하며 생각에 잠기던 벤야민이 이내 다시 입을 뗐다.
“그럼…… 저택을 네가 좋아할 수 있도록 바꿀게.”
“바꾼다고 해 봤자…….”
“잠시만 휴양을 즐기다 와, 이브.”
그가 생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네가 돌아올 때엔, 완벽하게 다른 공간이 되어 있을 테니까.”
* * *
한편, 낡은 방에 감금된 카타리나는 시간이 흘러도 오지 않는 테오도르로 인해 하루하루 살이 깎여 나가는 것만 같았다.
‘왜 오지 않는 거지? 왜? 진작 왔어야 할 때가 지났잖아?’
그사이 부피를 키운 불안에 어느덧 너덜너덜해진 손톱을 잘근 깨물며 눈동자를 쉴 틈 없이 굴렸다.
‘테오도르 황제가 이제 와서 그 여자를 포기했을 리가 없어. 설령 그렇다 한들, 망쳐 버린 약혼식에 대해 이렇다 할 말 한마디 없는 건…….’
그러다 문득 카타리나는 벼락같은 깨달음을 얻었다.
‘벤야민!’
그래, 그 남자밖에 없었다. 이 예상 밖의 변수의 배후는.
‘그자가 막고 있는 거구나! 테오도르 황제가 내게 오지 못하도록!’
애초에 그가 자신을 테오도르 황제의 옆으로 밀어 넣은 것은, 모두 이브 로웰린을 다시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그의 계획과 달리 이브 로웰린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죽고 말았고…….
‘설마, 그 여자의 죽음이 나 때문이라 생각하고 복수라도 하려는 걸까?’
만일 정말 그런 거라면 퍽 억울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 여자의 죽음은 정말로 자신 또한 예상하지 못한 사고였기 때문이다.
‘잠깐, 아니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정말로 복수를 할 생각이라면…….’
카타리나는 벤야민의 잔혹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그자가 정말로 제게 복수를 하려는 거라면 이렇게 저를 얌전히 가두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문득 섬뜩한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다른 방법으로 나를 죽일 생각인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자 이루 말할 수 없는 공포심과 두려움이 차올랐다.
“안 돼! 이렇게 죽을 순 없어!”
카타리나는 자신이 지닌 마력을 동원하여 탈출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마력은 벤야민이 쳐 놓은 결계에 부딪쳐 그대로 튕겨 나오고 말았다.
“젠장! 젠장!”
카타리나는 입술 사이로 흐르는 핏줄기를 닦아 내며 거친 욕설을 터뜨렸다.
그녀의 힘으로는 벤야민의 결계를 깨뜨릴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주님 옆에 있던 그 여자 말이야…….”
이때, 밖에서 청소를 하는 하인들의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카타리나는 문 쪽에 바짝 붙어 귀를 기울였다.
“맞지? 분명 이브 로웰린이지?”
“맞아, 분명 이브 로웰린이었어. 그런데 이브 로웰린이 여자라는 걸 왜 이제까지 몰랐지? 어떻게 봐도 여자인데……. 꼭 마법에라도 홀린 것처럼…….”
익숙한 이름이 들려오자 카타리나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뭐? 이브 로웰린이 돌아왔다고? 죽은 게 아니었어?’
말도 안 된다.
이브 로웰린은 분명 제가 보는 앞에서 칼에 베여 피를 흘리고 죽었다.
‘그럼 그때 내가 본 그건……!’
테오도르 황제가 그 여자의 시체까지 가져가 버리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다시……?
‘흑마법을 썼구나!’
카타리나는 이 모든 것이 벤야민과 그 여자가 합작하여 벌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여자가 테오도르의 곁을 떠나기를 바랐으나, 이렇게 벤야민의 손에 쥐여 줄 계획은 없었다.
‘어떡하지. 벤야민은 이제 원하는 것을 모두 손에 넣었으니, 굳이 나를 살려 둘 생각이 없을 거야.’
벤야민은 오래전부터 저를 죽이고 싶어 했으니, 이대로 있다간 소리 소문 없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럴 순 없었다. 생명을 걸어가면서 흑마법까지 손에 댔는데, 이렇게 비참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이브 로웰린, 그 여자가 문제다.
항상 그 여자가 제게 방해가 되고 있다.
그 여자만 아니었더라면 자신은 무리 없이 페르디난트의 사람으로 고귀하게 자라서 대륙에서 가장 근사한 남자의 옆자리에 앉아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이브 로웰린…… 이보네 체르니시아…… 그 여자 때문에…….’
카타리나가 바드득, 이를 갈 때였다.
“그런데, 이브 로웰린 말이야……. 의사가 드나들던데, 임신을 한 것 같다고…….”
들려온 소문 한 자락에 그녀의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 * *
황궁으로 돌아온 테오도르는 계속해서 페르디난트를 주시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일주일이 지나가는데도 페르디난트에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페르디난트에서는 아직도 소식이 없나?”
“그…… 아무래도 카타리나 양의 충격이 컸을 테니, 조금 더 기다려 보심이…….”
짜증스러운 테오도르의 물음에 아르민은 진땀을 빼며 대답했다.
“설마, 일부러 내게 감추는 건가.”
테오도르는 그날 자신을 도발하던 벤야민을 떠올리며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카타리나의 상태를 알아보기 위해 보낸 자들이 모두 벤야민에 의해 페르디난트의 정문을 넘어서지 못하고 돌아왔다.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언제나 속을 알 수 없는 작자였다. 무언가 숨기는 게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의사를 보내. 아픈 약혼녀를 위해서라고 하면 돌려보내진 않겠지.”
“네, 폐하.”
얼마 지나지 않아 황궁에 떠들썩한 소문이 났다. 황제께서 약혼녀의 병환에 상심하여 친히 황궁의 의사를 보냈노라고.
그리하면 벤야민이 거부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에 테오도르가 일부러 낸 소문이었다.
그러나 소문을 들은 에른스트가 찾아와 따지는 것은 그의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이보네가 아플 땐 내버려 뒀으면서, 그 여자를 위해서는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시나 봐요.”
에른스트가 원망스러운 눈으로 테오도르를 쳐다보며 말했다.
“에른스트.”
테오도르는 감히 주제를 모르고 저를 찾아와 따지는 이복 아우를 보며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비꼬는 화법은 어디서 배운 거지?”
그가 퍽 기가 차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형님에게 소중한 건 그 여자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이보네는 돌려줘요.”
에른스트는 재차 이브의 시신을 돌려 달라 청하였다. 그 애를 묻어 주어야 한다고, 이제 그만 그 애에게 안식을 달라고.
테오도르는 여전히 이브와 이보네를 구분 짓지 못하는 에른스트를 향해 혀를 쯧 찰 뿐이었다.
“그보다, 네 궁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던데.”
그가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돌리자, 에른스트가 멈칫하며 표정을 굳혔다.
그래, 맞다. 그런 일이 있었다.
이성을 잃은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주위가 온통 피 웅덩이였다.
더욱 끔찍한 사실은…… 대체 무슨 일이 있던 건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의 눈치를 힐끔힐끔 살피며 시선을 피하는 황자궁의 사용인들에게서 두려운 기색이 물씬 풍기었다.
하여 누구도 말해 주지 않았으나 에른스트는 짐작할 수 있었다.
어쩌면…… 그 끔찍한 일을 벌인 게…….
“…….”
그날을 떠올리자 창백해진 얼굴 위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었다.
그런 에른스트를 향해 테오도르가 툭 내뱉었다.
“조심해라, 에른스트. 나야 원래 인성이 개차반이지만, 넌 아니잖아? 나중에 이브가 돌아오면 널 보고 실망할걸?”
에른스트는 테오도르의 말이 아주 이상하게 들렸다.
“……이브는 죽었는데 어떻게 돌아와요?”
그의 물음에 테오도르가 반 박자 느리게 탄성을 터뜨렸다.
“……맞아. 이브는 돌아오지 않지.”
테오도르는 마치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달은 사람처럼 읊조렸다.
“그래, 이브는 돌아오지 않아. 그러니 내가 갈 거야, 이브에게.”
알 수 없는 그의 중얼거림에 에른스트가 미간을 슬그머니 좁혔다.
“그리고 내가 카타리나 양에게 의사를 보내든 말든.”
그러나 테오도르의 생각을 파헤칠 틈도 없이, 이어진 그의 말에 에른스트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 여자는 내 아이를 가지고 있는데, 신경 쓰는 게 당연하지.”
에른스트는 불쑥, 화가 났다.
이브가 그렇게 된 이후로 줄곧 테오도르에게 화가 났지만, 이 순간만큼은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상대가 언제나 두려워했던 이복형제였다는 것을 잊을 정도로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툭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이브가 죽기 전에 아이를 가지고 있었단 건 알아요?”
이번에는 테오도르가 멈칫했다.
“…….”
순간 방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죽기 직전의 그녀가 아이를 가지고 있었다고?’
알 수 없는, 몹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거짓말 치지 마.”
“의사를 데려올까요?”
그렇게 되묻는 에른스트의 목소리는 퍽이나 진지했다. 거짓 따위는 한 올도 없다는 듯 담백하기까지 했다.
“그 애가 임신을 했단 걸 진찰한 의사가 있어요.”
“…….”
“형님의 약혼녀가 임신을 했다고 황궁 내에 파다하게 소문이 퍼지던 그날, 그보다 몇 시간 전에 몸이 안 좋은 이브를 진찰하려고 의사를 불렀다가 알게 됐거든요.”
그날……이라면…….
그녀가 죽기 불과 사흘 전이 아닌가.
순간 머릿속에 스치는 목소리 한 자락이 있었다.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고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이브는…… 그렇게 말했다.
간절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며…….
‘설마,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물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글쎄요. 누구였을까요.”
그러나 에른스트는 대답해 주지 않았다.
에른스트가 나가고 난 뒤, 혼자 남은 테오도르는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쿵……!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침실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곳에서 여전히 저를 쳐다봐 주지 않는 이브의 차가운 몸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브, 이브…….”
그녀의 납작하기만 한 아랫배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손에서 황금빛 빛무리가 흘러나오며 그녀의 아랫배 위로 스며들었다.
“이브, 아니지? 이브……. 제발…….”
그가 간절히 중얼거리며 성력을 퍼부었다.
그러나 아무리 성력을 퍼부어도 그녀의 아랫배에서는 아주 작은 기운 하나 느껴지지 않았다.
생명체가 자리 잡았다면 응당 느껴졌어야 할 그 무엇도 느껴지지가 않았다.
“그래, 그 새끼가 거짓말을 한 거야.”
테오도르는 에른스트를 향한 욕을 짓씹었다. 그러나 여전히 세차게 뛰어 대는 가슴은 멈추질 않았다.
차츰 알 수 없는 두려움에 잠겨 갔다.
“아니야. 아닐 거야.”
만약 에른스트의 말이 정말이라면, 참 끔찍한 일이지 않나.
사랑하는 남자의 임신한 약혼녀를 호위하기 위해 아이를 밴 몸으로 죽었다?
물론 자신은 카타리나를 사랑하지도 않았고, 그 여자는 저의 진짜 약혼녀도 아니었으며, 더더구나 자신의 아이를 임신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죽어 가는 이브는 그렇게 알고 있었을 거 아냐…….’
테오도르는 살갗을 타고 기어오르는 그 끔찍함을 떨치기 위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두려움이 사라지지 않아서 그는 울 듯이 흐느끼며 이브에게 애원했다.
“아니지, 이브?”
“…….”
“아니라고 말해 줘. 네 입으로 말해 줘.”
“…….”
“에른스트, 저 개 같은 놈이 헛소리를 지껄인 거라고 말해 줘.”
“…….”
“그 개 같은 새끼가 널 이보네와 헷갈리더니, 이제 정말 미쳐 버린 거라고. 그렇게 말해 줘.”
끝내 미쳐 버린 건 에른스트가 아니라 자신이란 걸 인지하지 못한 테오도르는, 그렇게 이브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며 끝없는 절망 속으로 침잠했다.
“왜, 대답이 없어?”
“…….”
“이브…….”
“…….”
“이브…… 이브…….”
* * *
황제가 미쳤다. 그런데 성격은 여전히 나쁘다. 그리고 그 나쁜 성격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전혀 없었다.
결국 대표로 나선 것은 아르민이었다.
“폐하, 이브 로웰린 경은 죽었습니다.”
아르민이 생명을 담보로 건넨 그 말에 테오도르가 무서운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나도 알아.”
“네?”
순순한 인정에 오히려 당황한 것은 아르민이었다.
“저, 폐하. 그럼…….”
“내가 살릴 거야.”
……황제는 정말로 미쳤다. 죽은 사람을 살리겠다니, 그건 불가능의 영역이었다.
그렇지만 아르민은 그것을 지적하는 대신, 다른 용건을 꺼내었다.
“……좋습니다. 그럼 침실에 두고 계신 이브 경의 시신이라도 묻어 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사람들이 황제가 미쳤다고 숙덕거리는 원인 중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다름 아닌 그가 하루 종일 껴안고 있는 그 시신 때문이었다.
그러나 말을 꺼내자마자 테오도르가 불같이 화를 냈다.
“지금…… 이브를 묻으라는 건가? 차갑고 캄캄한 땅속에 묻어 버리라고?”
“아니요, 폐하. 그게 아니라…….”
“이브를 혼자 외롭게 그곳에 묻을 순 없어.”
테오도르는 단정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대신 묻히고 싶은 게 아니라면, 두 번 다시 그런 말은 꺼내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죽은 이의 시신을 산 사람인 것처럼 구는 테오도르의 집착에 아르민은 뼛속까지 오싹한 한기가 돌았다.
그리고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이브 로웰린의 시신이 전혀 썩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마치, 산 사람의 육신처럼…….
그렇지만 아르민은 죽은 이브 로웰린을 대신해서 땅에 묻히고픈 생각이 전혀 없었기에, 두 번 다시 같은 이야기를 꺼내지 못했다.
이러다 황제가 정말로 무슨 짓이라도 벌일 참인가, 싶어 걱정이 밀려오던 때였다.
어느 날 갑자기 이브 로웰린의 시체가 사라졌다.
황제가 페르디난트를 방문한 날이었다.
* * *
벤야민은 테오도르가 가져간 이보네의 허수아비를 없애기 위해 테오도르를 황궁 밖으로 불러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이보네를 저택 밖으로 내보내야 했다.
황제는 쓸데없이 감이 좋은 사람이니까, 괜히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다가 그녀가 살아 있는 게 들키기라도 하면 굉장히 곤란해질 터였다.
‘게다가 그때 황제가 보인 건…… 틀림없는 집착이었어. 이브를 향한.’
분명한, 애정에서 기인한 집착이었다.
혹은 사랑이란 감정과 닮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황제는 반년의 기억을 잃은 채로도, 여전히 그녀를 좋아하고 집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아둔한 집착도 끊어 줄 때가 되었지.’
벤야민은 남쪽에 있는 페르디난트 소유의 섬에 이보네를 맞이할 준비를 완성했다.
그리고 그곳으로 그녀를 데려갔다.
“여기서 조금만 쉬고 있어. 테오도르 황제가 널 잊을 때쯤 다시 데려올 테니까.”
바다 위에 있는 으리으리한 별장은, 어지간해서는 누구도 찾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고마워, 벤야민.”
이보네가 자신을 위해 정돈된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친구 사이에, 이 정도야.”
벤야민은 그녀를 향해 부드럽게 웃었다.
그러곤 그녀의 손을 붙잡아 에스코트하며 섬 곳곳을 안내해 주었다.
[그렇다면 나도 네 가족을 지키는 걸 도울게.]
[아이가 태어나 무사히 자라도록 페르디난트의 모든 것을 쏟아부을게.]
다행히도 이보네는 아이를 낳고 자랄 때까지 도와주겠다는 자신의 말을 수락했다.
그녀로서도 선택지가 없었겠지만, 퍽 잘된 일이었다.
힐끔, 쳐다본 그녀의 아랫배는 이제 자세히 관찰하면 아이를 뱄다는 게 조금 티가 날 정도였다.
‘테오도르 황제의 아이…….’
벤야민은 주먹을 꽈악 말아 쥐며 입 안의 여린 살을 짓씹었다.
10년이 넘게 이브의 곁을 지켰다.
그리고 그녀를 잠시 빼앗긴 여섯 달.
‘어떻게 그 여섯 달 사이에…….’
고작 그 여섯 달 사이에 그녀를 차지해 버린 그 남자를 찢어 죽이고 싶었다.
벤야민은 제가 느낀 비참함을 테오도르에게 돌려주고 싶었으나, 몇 마디 말로는 그 또라이를 낙심시키지 못한다는 것만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벤야민은 오래전부터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가장 큰 타격을 받을지 누구보다 잘 아는 남자였다.
“편하게 쉬고 있어. 분명 얼마 안 걸릴 거야.”
벤야민은 그렇게 이브를 섬에 남겨 두고 수도의 저택으로 돌아왔다.
‘테오도르 황제가 페르디난트에 방문하는 목적이, 비단 카타리나를 만나기 위해서가 아닐 텐데.’
벤야민은 두 사람이 무언가 작당을 꾸미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다.
멍청한 테오도르.
이브 로웰린이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제 목적을 위해 카타리나와 손을 잡았겠지.
그게 그녀에게 얼마나 큰 상처와 불신을 남기게 되었을지는 알지도 못하고.
벤야민은 테오도르를 향해 속으로 코웃음을 치며 편지를 써 내리기 시작했다.
* * *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편지를 보내 왔다.
<카타리나가 어느 정도 회복을 했습니다.
병문안을 와 주신다면, 카타리나뿐만 아니라 페르디난트에게도 크나큰 영광이 될 것입니다.
부디 페르디난트를 찾아와 힘을 주시길.
-페르디난트의 벤야민이.>
테오도르는 곧바로 페르디난트를 찾아갈 채비를 했다.
오늘에야말로 카타리나를 만나 그 빌어먹을 흑마법의 장소에 발을 디딜 것이다.
“다녀올게, 이브.”
테오도르는 다정하게 웃으며 이브를 돌아보았다.
“그런 얼굴 하지 마. 그 여자가 좋아서 가는 게 아니야.”
그러나 자신을 향한 싸늘한 낯빛에, 그녀를 설득하는 그의 목소리가 점점 힘이 빠져갔다.
“확인하러 가는 거야. 그리고…… 너를 살리러 가는 거야.”
저의 진실 어린 애틋한 호소에서 그녀는 차갑기만 했다.
“정말이야, 나를 믿어 줘.”
테오도르는 여전히 그때에서 전혀 자라지 않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래, 그녀가 자신을 믿지 못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보란 듯이 그녀의 앞에서 그 여자와 입 맞추는 시늉까지 하지 않았었나.
그러니 이건 모두 제가 심어 준 불신이었다.
[싫어, 가지 마.]
분명 들릴 리 없는 목소리였다.
그러나 왠지 가지 말라는 그녀의 소리가 질척하게 따라붙는 것만 같았다.
“미안해……. 다녀올게.”
테오도르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몸을 돌렸다.
* * *
한편 카타리나는 테오도르의 방문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분명히 이브 로웰린이 저택에 있을 거라 확신했는데, 막상 감금에서 풀려나자 그녀의 모습은 머리카락 한 올 찾을 수 없었다.
‘벤야민이 절대 좋은 의도로 날 풀어 주진 않았을 텐데…….’
카타리나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생각했다.
[판을 다 깔아 줬더니 결국 황제의 마음을 얻어 내는 것조차 하지 못하다니.]
그 낡은 방에서 저를 꺼내며, 경멸하듯 쳐다보던 벤야민의 눈길이 아직도 선연했다.
[오늘 테오도르 황제가 찾아올 것이다. 약혼식 당일에 있었던 참사로 놀라 병석에 드러누운 약혼녀를 위로하기 위해 방문할 예정이지. 혹시 모르지 않아? 네가 황제의 마음을 잘 붙들면, 너를 데리고 이곳을 나가 줄지도.]
아무튼 자신이 살 길은 테오도르를 붙잡는 것뿐이었다.
그러지 않으면 다시 그 낡은 방에 감금될 터였다.
“폐하, 벤야민이 저를 가뒀어요. 폐하와 만나지 못하게 했다고요.”
카타리나는 테오도르를 보자마자 다급히 벤야민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벤야민이 카타리나에게 무슨 짓을 하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었다.
“지난번 네가 말한 그 신목은 어디에 있지?”
“말씀드렸잖아요. 거긴 가주의 허락이 있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고.”
지금 중요한 건 그 신목이 아니었다. 벤야민이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고 있었다.
그런데 테오도르가 신목 이야기만 꺼내자, 카타리나는 조금 짜증이 났다. 그와의 약혼을 위장하기 위해 스스로 내세운 미끼임에도 불구하고.
“벤야민이 무언가 엄청난 짓을 벌이려는 것 같아요.”
“벤야민 페르디난트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저도 몰라요. 아침부터 보이지 않았어요.”
벤야민은 카타리나를 낡은 방에서 꺼낸 뒤 사라졌다.
그래서 카타리나는 벤야민도, 이브 로웰린도 흔적 하나 찾을 수 없었다.
“폐하를 이곳에 묶어두고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기약 없이 미뤄진 약혼식을 어서 빨리 재개해야 해요. 그래야 제가 벤야민을 견제할 수…….”
“아, 그래. 약혼.”
테오도르가 뒤늦게 생각이 났다는 듯 카타리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네가 내 약혼녀 행세를 하며 이브를 괴롭혔어. 그렇지?”
카타리나를 쳐다보는 황금빛 눈동자에 차가운 살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너 따위가, 감히 나의 이브를…….”
살갗을 꿰뚫을 듯한 그 오싹한 살기에 카타리나는 몸을 움츠렸다.
벤야민과 이브 로웰린이 꾸미고 있는 작당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그런 그의 반응에 차마 그 여자가 살아 있음을 알릴 수가 없었다.
“이, 이브 로웰린 그 여자가……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닮은 얼굴로 폐하를 현혹하려고 해서…….”
“현혹이라니!”
테오도르의 잇새로 마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브가, 날 현혹했다고?
정말이라면, 너무 귀엽지 않은가.
그렇게 어리숙한 현혹이라니.
“널 살리고 죽이는 건 이브가 돌아오면 결정할 거야.”
테오도르가 느른한 입매를 당기며 말했다.
‘무슨 소리지? 설마 그 여자가 살아 있다는 걸 아는 건가?’
카타리나는 도무지 테오도르의 속을 알 수가 없어서 불안해졌다.
“그 X같은 거짓 약혼은 파기야. 당장 그 신목 앞으로 나를 안내해.”
테오도르의 으름장에 카타리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 안뜰로 그를 안내했다.
“저 안쪽이에요.”
카타리나가 저택 안뜰에서도 가장 깊은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검은 껍질을 지닌 커다란 고목이 기괴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것을 본 테오도르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저런 기괴한 것에 축복을 빈다고?”
“네, 오래전부터 페르디난트에 축복을 내리는 신목이에요.”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고목의 모양새는 축복이 아니라 저주를 비는 게 더 알맞을 만치 흉흉했다.
‘설마, 저게…….’
문득 테오도르는 작은 확신이 심중에 움트는 것을 느꼈다.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자리한 저 기괴한 것이 어쩌면 고대 어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고.
그런 확신을 느낀 순간, 테오도르는 그쪽으로 한 발짝 걸음을 내디뎠다.
“조심하세요, 폐하!”
그러나 그 순간, 강한 금제에 의해 그의 몸이 튕겨 나갔다.
“젠장.”
테오도르는 나직한 욕설을 짓씹으며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황금빛 빛무리가 검은 결계와 맞부딪쳤다.
“……!”
카타리나는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테오도르 황제가 성력을 사용할 수 있었다니.’
페르디난트의 선대로부터 내려온 결계를 버티는, 그만큼이나 강한 신성력이었다.
두 개의 힘이 허공에서 맞부딪치며 소용돌이쳤다.
“그, 그만하세요! 그러다가 벤야민이 알게 될 거예요!”
“상관없어.”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외침을 무시하며 성력을 쏟아부었다.
더 이상 그는 눈에 보이는 게 없었다.
평화로운 방법을 쓸 생각 또한 없었다.
원래도 그가 평화주의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그러나 성력은 이내 튕겨 나와 테오도르의 몸에 타격을 주었다.
“크윽…….”
테오도르는 입술을 타고 흘러내리는 핏줄기를 손등으로 무심하게 닦으며, 고목을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다시 그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러다 죽겠어요!”
카타리나의 외마디 외침이 들려왔다.
테오도르는 그제야 자신의 몸 상태를 돌아보았다.
손끝이 갈라지고, 살갗이 헤져 있었다.
성력을 쏟아붓는 것만으로는 이 결계를 깰 수가 없었다.
“결국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만나 담판을 지어야만 하는가…….”
테오도르는 소득 없이 돌아서야 했다.
* * *
그리고 테오도르가 황궁으로 돌아왔을 때, 이브의 시체가 사라졌다.
“이브? 이브, 어디 갔지?”
황궁이 발칵 뒤집혔다.
테오도르는 사라진 이브를 찾아 눈 속을 뛰어다니며 온 황궁을 뒤집고 다녔다.
“이브, 대체 어디에…….”
그러나 어디에도 이브는 보이지 않았다.
“이브가 날 떠났어.”
털썩, 눈밭 위에 주저앉은 테오도르가 허공을 멍하니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왜 떠난 거지?”
황궁을 나서기 직전, 서늘하던 그녀의 낯빛이 생각이 났다. 동시에…… 들릴 리 없던 그녀의 저를 붙잡는 소리도.
“내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를 만나러 가서?”
테오도르는 그녀가 살아 있을 때도, 그녀를 두고 카타리나에게 향한 적이 많았다.
그때마다 그녀는 상처받은 눈으로 저의 뒷모습을 끈덕지게 쳐다보곤 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그 시선을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쩌면 더 이상 저를 애틋한 눈으로 보아 주지 않는 그녀가, 이제는 저에게 영영 실망을 하여 떠나 버린 건지도 모른다.
“안 돼, 안 돼, 이브…….”
무너진 테오도르가 양 손바닥 위로 고개를 파묻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정말 아니야, 난 정말…… 널 두고 그 여자에게 가려고 했던 게…….”
그러다 문득 그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하나 생겼다.
“그런데, 넌…… 어디로 떠난 걸까?”
이브가 절 두고 떠났을 만한 곳은 몇 되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단박에 깨달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자식이로군.”
그날, 그녀에게서 풍기던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냄새가 스멀스멀 공기 중에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그 불쾌한 감각에 테오도르는 이를 악물며 몸을 일으켰다.
희번덕 치켜뜬 두 눈에서 형형한 안광이 빛났다.
* * *
벤야민은 반쯤 맛이 간 눈으로 다시 찾아온 테오도르를 반겼다.
“다시 오셨군요, 폐하.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그 나른한 얼굴 위로 일견 즐거워 보이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네가, 이브를 데려갔지?”
테오도르가 한 음절씩 내뱉을 때마다 죽일 듯한 살기가 벤야민의 살갗을 찔렀다.
벤야민은 마침내 제가 느낀 상실의 아주 작은 조각이나마 그에게 되돌려주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을 만큼 기뻤다.
“카타리나의 병문안을 오셨던 분께서 페르디난트의 금제가 걸린 구역엔 왜 들어가려고 하셨나요?”
“이브를 내놔.”
“설마, 처음부터 카타리나가 아닌 그곳이 목적이었나요?”
어느덧 가면을 내던진 두 사람은 서로 본색을 감추지 않으며 으르렁거렸다.
“당연한 소릴.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따위, 아프든 말든 내가 알 반가.”
“가엾은 카타리나. 오랫동안 당신의 황후가 되길 바랐는데…….”
벤야민은 자못 안타깝다는 듯 중얼거렸다.
“쓸모를 다했으니, 이제 그 여자도 폐기해야 하겠네요.”
그가 여상하게 웃으며 끔찍한 내용을 입에 담았다.
그러나 카타리나가 어찌 되든, 테오도르에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브는, 어디 있지?”
주위를 휙휙 둘러보나, 어디에서도 그녀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궁금합니까?”
벤야민은 생긋 웃으며 저택 안쪽을 향해 힐끗 턱짓을 했다.
“따라오시지요. 당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는 이브도, 카타리나와 거짓 약혼을 해 가면서까지 발을 들이고자 하였던 페르디난트의 안뜰도 모두 보여 드릴 테니.”
선뜻 안내하는 모양새가 수상쩍어, 테오도르는 불안한 마음을 삼켜야 했다.
차박, 차박.
자박, 자박.
유난히도 적막한 저택 안, 두 사람의 발소리만이 질척하게 울렸다.
그러다 오늘 오전 자신이 걸음 하려다 실패한 그 공간에 들어선 순간.
테오도르는 멈칫 그 자리에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지금, 저게…….”
가슴 위로 선득한 두려움이 차올랐다.
벤야민이 천천히 그를 돌아보았다.
“모두 태워 버렸답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린 검은 연기가 마지막 기력을 다하며 쇠하고 있었다.
“뭐……?”
“태웠다고요. 이브의 시신도, 당신이 궁금해하던 안뜰의 고목도.”
“네가 뭔데!”
테오도르가 벤야민의 멱살을 움켜쥐며 외쳤다.
“네가 뭔데 이브를 태워?”
“죽었는데 죽지도 못하고 당신에게 붙잡혀 있는 게 마음이 아파 그랬습니다.”
벤야민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당신은 그녀가 살아 있었을 때도, 그녀를 힘들게 하지 않았습니까?”
움찔.
벤야민의 멱살을 움켜쥔 테오도르의 손이 움찔거렸다. 그것을 느낀 벤야민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이브는 죽기 직전까지도 당신 때문에 힘들었어요. 그래서 날 찾아와 말했죠. 당신 곁을 떠나고 싶으니, 도와 달라고.”
“……이브는, 그래서 어디 있어?”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말에 휘둘리는 대신 이브를 찾고자 했다.
“그녀는 당신과 함께 있기 싫어한다니까요? 찾아서 뭐 하게요?”
“개자식.”
테오도르의 주먹이 벤야민의 얼굴을 후려쳤다.
“뼛가루라도 내놔. 어딘가에 있을 거 아냐!”
벤야민은 불긋해진 뺨을 감싸 쥐며 웃음을 터뜨렸다.
“재가 되어 페르디난트의 안뜰에 내려앉았겠지요.”
테오도르는 벤야민을 치워 내고 시꺼먼 재만 남은 안뜰을 향해 뛰어들었다.
사그라진 불씨 주위로 쌓인 잿더미 위에 엎어져 네 발로 기며, 그녀의 흔적을 쫓았다.
옷이 마른 흙과 검은 재로 더럽혀졌다.
그러나 어디에서도 그녀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브, 안 돼……. 이브…….”
테오도르는 흙과 재를 두 손 가득 퍼다 쥐며 흐느꼈다.
손가락 사이로 사르르 흩어지는 잿가루가 허망하였다.
벤야민은 그런 테오도르를 벌레 보듯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이후로 꽤 많은 시간이 지나 린든이 돌아왔다.
“수석 호위 기사, 린든. 폐하의 명을 수행하고 귀환하였습니다.”
곧바로 황제를 찾아간 그는 어두컴컴한 침실 안쪽, 빈 침대 끄트머리에 홀로 앉아 있는 테오도르를 발견할 수 있었다.
“폐하……?”
린든이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다.
그러자 내내 말이 없던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삭막한 황금색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린든은 흠칫 몸을 떨었다.
아르민으로부터 황제가 이상해졌다는 말은 들었으나…….
‘이건 단순히 이상해진 게 아니라…….’
꿀꺽.
차마 밖으로 터뜨리지 못한 숨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테오도르는 그저 그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기만 할 뿐이었다.
린든은 질식할 것만 같은 그 시선 속에서 울고 싶어졌다.
‘더 무서워졌잖아. 이래서야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는 과거의 헛소문만 더 부추기겠어.’
그만큼이나 오싹하고 두려운 몰골을 하고 있었다, 근 두 달여 만에 다시 만난 황제는.
“저……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찾았습니다.”
내내 잠잠히 다물려 있던 테오도르의 입술이 처음으로 열렸다.
“체르니시아의…… 생존자……?”
그 사이로 흘러나온 목소리는 마치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은 자의 것처럼 꺼칠꺼칠하기만 했다.
그리고 다음 순간, 놀랍게도 그의 입매가 느슨하게 풀리었다.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라……. 내가 그자를 찾아오라 네게 명한 건가?”
“네? 네, 폐하! 그……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위해 준비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기억을 잃기 전의 내가, 퍽 귀여운 짓거릴 하고 있었군.”
테오도르가 관심을 보이자, 린든이 용기를 내어 말을 붙였다.
“브리안 체르니시아가 살아 있었습니다.”
“아, 그래…….”
그러나 테오도르는 무덤덤하게 대꾸하며 다시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브리안 체르니시아…….
이보네의 막내 오라비였지, 아마.
그러나 마땅히 반가워야 할 그 이름에도, 테오도르는 큰 감흥이 일지 않았다.
이브를 잃은 이후로는 모든 것이 이러했다.
체르니시아의 복권, 이보네의 종적…….
그것들이야말로 제 일생의 목표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러함에도…… 모든 것이 무감했다.
이때, 린든이 그의 눈치를 살피며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어서 이보네 님께 이 기쁜 사실을 알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
테오도르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지금 이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지?
테오도르는 아주 잠시 자신이 무언가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이보네 님은 어디 계십니까? 항상 같이 계셨으면서…….”
그러나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린든은 분명, 제게 ‘이보네’를 찾고 있었다.
“왜 이보네를 이곳에서 찾는 거지?”
“네? 아니, 그게…… 무슨…….”
린든은 저보다 더 당혹스러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 페르디난트에서 이보네 님을 찾아 데려오신 이후에, 이보네 님을 위해 체르니시아의 다른 생존자를 제게 찾아오라 하셨잖습니까.”
“이보네를……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고?”
“네, 지난여름에…… 폐하께서 친히…….”
“……!”
테오도르가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린든을 보았다.
내가, 이보네를 데려왔다고?
아니, 아니다.
지난여름, 제가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온 건…… 이브였다.
그래, 린든이 무언가 잘못 알고 있는 게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다시금 마음이 평안해졌다.
“무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데려온 건 이보네가 아니야. 이브였어.”
“네……?”
이번에는 린든이 잠시간 두 눈을 끔뻑이며 멍청한 표정을 지었다.
“이보네 님의 가명이…… 이브 로웰린이지 않습니까?”
“뭐……?”
얼마 전, 에른스트가 테오도르를 찾아와 제게 이보네를 내어 달라 했다.
테오도르는 이브와 이보네도 구분하지 못하는 그 한심한 이복형제를 쫓아 버렸다.
그런데 린든이 에른스트와 같은 말을 한다.
이브가 이보네라고…….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문득 엄습하는 불길한 예감을 부정하며 목소리를 높이려던 순간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
돌연 희미한 잔상과 함께 꼭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이브가 저를 향해 무어라 말하고 있었다.
무척이나 애달프고 서러운 표정으로…….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
지끈-!
강한 두통이 그의 머리를 옥죄었다.
[내가…….]
“윽…….”
이제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강한 통증에,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며 바닥으로 엎어졌다.
[내가 이보네예요…….]
“크으윽…….”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
“폐하! 폐하……! 의사를……!”
호들갑스러운 린든의 목소리가 아스라이 멀어져 갔다.
[어떡하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아르민, 네가 대답해. 이건 뭐지?]
[페르디난트의 망령은 모두 지워 냈으니, 이제 너를 사랑해도 될까?]
[황제의 정부라도 되고 싶었나 보지? 주제에 감히 황후 자리를 바란 것은 아닐 테고.]
[너도 나를 사랑해 줄래?]
[네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까워서.]
[사랑해, 이브.]
[더럽고 추악해.]
[이-브.]
기억 잃기 전과 잃은 후의 기억들이 난잡하게 섞여 떠올랐다.
쏟아지는 기억의 파랑에서 그를 건져 낸 것은 열린 창을 타고 들어오는 작은 종소리였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시계 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 순간 눈앞에 펼쳐진 것은…….
머리 위에서 하늘하늘 떨어져 내린 초록 이파리 하나와…….
[안녕. 이름이 뭐야?]
푸르른 녹음 사이 자신을 발견하고 놀라 토끼처럼 두 눈을 휘둥그레 뜬 어여쁜 이보네.
그리고……
[……이브 로웰린입니다.]
홀린 듯이 저를 쳐다보며 속삭이는, 사랑스러운 목소리.
그녀와 저의 재회였다.
그래, 우리는 다시 만났었다.
지난여름, 페르디난트 저택의 어느 나무 위에서. 오후 두 시, 그 약속의 시간에.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사실은 조금 더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날 보는 네 눈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사랑해, 이브.]
술식이 깨지며, 기억이 살아났다.
잃어버린 반년의 기억이.
* * *
10여 년 전.
체르니시아가 반역에 휩쓸려 몰락하고, 그 막내딸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어린 테오도르는 괴로움을 이기지 못해 미쳐 버렸다.
그리고 그때에 이어 두 번째로 접하는 그녀의 죽음이 그를 완벽히 미쳐 버리게 만들었다.
과거와 지금에 다른 점이 있다면…….
어쩌면 그녀가 어딘가에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희망이나마 있었던 그때와 달리, 이제는 아주 작은 희망조차 보이질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브…….”
테오도르는 눈물 젖은 예쁜 얼굴로 그녀를 불렀다.
“이보네…….”
그러나 그 부름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이제 이곳에 없었다.
“보고 싶어, 이브……. 이브…… 이보네…….”
제가, 제 손으로 떠나보내지 않았던가.
생각해 보면 제가 낙마를 하고 기억을 잃은 직후, 이보네는 늘 저를 보며 무언가 대화를 하고 싶어 했다.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주위를 물려 주신다면…….]
하지만 그녀의 간절한 대화 요구를 거부해 온 것은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 그녀는 더 이상 제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지치고 무감각한 눈으로 저를 스윽 쳐다보고 말 뿐이었다.
저를 담으며 반짝이던 애정의 빛깔이 사라진 그 눈동자를 보며, 괜히 화를 냈었다.
게다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제가 이보네를 찾겠다며 손을 잡았던 그 여자는…….
[너구나.]
이보네를 학대한 주체였다. 다시 만난 이보네의 새하얀 팔뚝 안쪽 곳곳에 남아 있던 분명한 학대의 흔적들.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본 순간 그 악랄한 짓거리의 원흉이 그 여자란 것을 알아보았다.
하여 그 여자를 위협하고 이보네를 구출해 냈다.
그랬는데, 그래 놓고서, 이보네의 앞에서 그 여자와…….
‘내가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여자와 벌인 짓거리들을 떠올리자 눈앞이 새하얗게 점멸했다.
그 여자를 사랑한다고 거짓 놀음을 벌인 것은 약한 축에 속했다. 그 또한 그녀에게 크나큰 상처였음을 알지만, 그보다 더한 과오들이 줄지어 생각이 났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제가 사랑하였던 어린 날의 소녀는 퍽 불우한 어린 시절의 기억을 감추고 있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그녀의 어린 날의 상처들을 치유해 주길 소망해 왔다.
하여, 다시 만난 그녀의 손목에 남은 상흔을 지워 주었으면서 그 팔뚝에 그 여자가 다시 상처를 남기는 것을 묵과했다.
이보네에게 그 짧은 머리카락이 어떤 과거의 상처인지 알기에 다시 길러 보자 설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그 여자의 앞에서 잘라 냈다.
그 여자에게 주겠다며, 그녀에게 한 번 주었던 제 사랑의 징표를 빼앗으며.
더 이상 체르니시아로 살아가지 못하는 그녀를 위해 가문의 복권을 약속했다. 그리고 그녀가 다시 검을 들게 될 날은, 온전한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되찾은 뒤일 거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이보네…… 이브는 그 여자를 위해 다시 검을 들어야 했고, 그 여자를 지키려다가 암살자의 칼에 맞아 죽고 말았다.
죽기 전날 밤에도 보았던 그 미묘한 태도가 생각이 났다.
[안 돼요. 폐하는…… 내일 카타리나 양과 약혼을 하잖아요.]
그렇게 말할 적에 저를 보던 그녀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었더라.
[저는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하룻밤 여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왜냐하면 그때의 저는…….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그녀의 목소리에 전혀 귀를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그녀가 어떤 눈으로 저를 보는지,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으니까.
오직, 그 순간 제 안을 가득 채운 열망에만 몰두하는 중이었으니까.
“하, 하하!”
테오도르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하하하!”
황제의 그 광기 서린 웃음소리에 모두가 황망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죽였어.”
그러나 테오도르는 제 주변의 이들이 어떤 얼굴로 저를 보든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듯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이보네를 죽인 거야.”
가슴이 쥐어뜯기듯 아파 왔다. 테오도르는 괴로움에 몸부림을 치면서도 읊조림을 멈추지 않았다.
“내가 이보네를 죽이고, 이브도 죽였어.”
오직 그 하나의 명제만이 세상의 오롯한 진실이라는 듯, 그는 하염없이 그 말만을 읊조렸다.
“내가, 내가 그녀를 죽였어.”
그러다 문득 시계를 보았다.
어느덧 시곗바늘이 오후 두 시를 지나 있었다.
“안 돼, 두 시가…….”
그녀와 만나기로 했던 시각이 지나 있었다.
“두 시가 지났어. 늦으면 안 돼. 이브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벌떡 일어난 그가 헐레벌떡 뛰쳐나갔다. 이제는 10년도 더 된 오랜 약속의 장소를 향해.
기실, 그는 이보네를 잃어버렸던 지난 10년 동안 매일같이 같은 시각 같은 장소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지난여름 다시 그녀를 되찾은 이후로는 발길을 뚝 끊었던 곳이기도 했다.
다시 생각해 보면, 참 이상하지.
기억을 잃은 직후에는 어째서 그곳에 다시 찾아갈 생각을 못 했을까?
10여 년간의 습관이 반년 사이 뚝 끊겼는데, 어째서 그게 이상하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걸까?
“하, 하아…….”
테오도르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약속의 나무를 쳐다보았다.
[안녕.]
[아, 안녕……!]
새빨개진 얼굴로 말을 더듬으며 인사하는 어여쁜 어린 이보네의 잔상이 흐릿하게 눈앞을 스쳐 갔다.
수십 번을 곱씹어도 어여쁜 그 잔상을 담고서, 테오도르의 두 눈이 서럽게 휘었다.
“안녕……. 안녕, 이보네…….”
그러나 그가 입을 여는 순간 그녀의 잔상은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추었다.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떠올라 있던 그 몽글한 미소 또한 파스스 소리 없이 사라졌다.
너무 늦었다.
그녀는 이곳에 없었다.
제가 늦어 버려서, 너무 늦어 버려서 이제 더 이상 이곳에 없는 것이다.
“이보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테오도르는 그녀를 찾아 불렀다.
“이보네…….”
감히 제가 담아도 될까, 싶을 만큼 사랑스러운 그 이름을 입에 담는 순간.
목이 콱 막혀 왔다.
아프도록 목이 멨다.
그 목 맺힌 목소리로 테오도르는 하염없이 끝내 닿지 못할 소리를 짜내었다.
“보고 싶었어. 네가, 네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파르르 떨며 뻗어 나간 손끝이 까칠한 나무 기둥을 더듬었다.
“미안해…….”
이미 늦은 사과는 죽은 그녀에게 무엇도 될 수 없음을 알기에.
하여 더욱 처절한 슬픔이 그의 안에서 아우성쳤다.
“미안해, 정말…… 정말 미안해…….”
주인 잃은 사과가 허망하게 주위를 맴돌다가 덧없이 흩어졌다.
마치, 검은 재가 되어 버린 되살릴 수 없는 그의 사랑처럼.
“이브…….”
툭-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한 방울이 아래로 떨어졌다.
이윽고, 한 방울의 눈물은 두 방울, 세 방울…… 점차 셀 수 없이 많은 양이 되어 바닥을 적셨다.
이보네를, 그리고 이브를 잃은 그의 세상이 온통 축축하게 내려앉았다.
무너진 세계 속에서 테오도르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머물렀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찬란한 금빛 태양이 저물고, 그녀를 닮은 창백한 은색의 달이 떠오를 때까지. 쭉 같은 자리에서.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의 고개가 삐걱거리며 움직였다.
빛을 잃은 황금색 눈동자에 불현듯 작은 종잇조각 하나가 들어왔다.
테오도르는 천천히 손을 뻗어 종잇조각을 쥐었다.
누군가 고이 접어 숨겨 둔 하얀 종이를 펼치자, 눈물이 나도록 사랑스러운 서체로 적힌 글자들이 빼곡히 그를 반겼다.
<어쩌면 기억을 되찾았을지도 모르는, 어린 날의 비밀 친구에게>
이보네의…… 편지였다.
<안녕, 테오.
네가 이 편지를 발견했다는 건, 나를 기억하러 이곳에 왔다는 거겠지.
내가 더 이상 네게 아픈 기억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좋을까?
있지, 테오. 나는 네게 고마운 게 참 많아.
나를 잊지 않아 줘서, 모두가 죽었다고 생각한 나를 홀로 외롭게 기억해 줘서, 고마워.
나를 다시 찾아 줘서,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사랑을 내게 줘서 정말 고마워.
이제는 내가 우리의 시간을 기억할게.
그러니까 혹시 네가 기억을 되찾았더라도 너무 괴로워하지는 않았으면 좋겠어.
네가 없어도 나는 잘 살 거거든.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나의 테오.
-너를 참 많이 사랑했던, 이보네가.>
* * *
테오도르의 기억을 가리던 술식이 깨졌다.
“크윽…… 젠장, 젠장……!”
그와 동시에 카타리나의 몸에 반작용이 찾아왔다.
“다 실패했어! 이게 다 이브 로웰린, 그 여자 때문, 쿨럭…… 처음부터 제거했어야…… 쿨럭, 커헉, 크윽…….”
차가운 바닥에 엎어진 카타리나는 피를 토하며 이브 로웰린을 저주했다.
[이제 가치를 다했으니 너를 살려 둘 필요는 없겠지.]
그 언젠가 벤야민이 했던 말이 생각이 났다.
벤야민이 그동안 저를 살려 둔 건 이브 로웰린을 곁에 붙들기 위함이었고, 그는 이제 그 뜻을 이뤘다.
그 여자의 환심을 사기 위해 눈이 반쯤 돌아 있는 작자이니, 그 잔인하고 악랄한 마법사는 거리낌 없이 저를 죽이고자 할 것이다.
그리고 벤야민으로부터 유일하게 저를 지켜 줄 힘을 가지고 있는 테오도르 황제는 더 이상 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 또한 벤야민이 저를 죽이든 말든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제가 기억을 잃게 만든 것을 알아차리고서 저를 죽이겠다 길길이 날뛰지만 않으면 다행이었다.
벤야민이 그 여자에게 반쯤 돌아 있다면 테오도르 황제는 완벽하게 한 바퀴 돈 자니까.
“젠장, 이렇게…… 이렇게 죽을 수는……! 쿨럭…….”
이러나저러나 죽을 운명이 된 카타리나가 절망에 휩싸여 울부짖을 때였다.
차박, 차박…….
이곳에서 들릴 리 없는 나붓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카타리나의 앞에서 멈추었다.
흰 바지 밑단과 광이 나는 구두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카타리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테오도르 황제……?’
순간 테오도르인가 싶었다.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검은 머리를 가진 이는 테오도르 황제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어른거리는 시야에 들어온 남자의 얼굴은 자세히 보니 테오도르와 확연히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알았다.
“당신이…… 왜, 어떻게 이곳에……?”
무료한 시선으로 낡은 방 안을 둘러보던 남자가, 힐긋 시선을 내려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그러고는 둥글게 눈을 휘며 물었다.
“날 부른 게 너야?”
흠칫.
목소리를 듣게 된 순간, 카타리나는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기억하는 황궁의 그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소름 끼치도록 낮고 고독한 미성.
이건…… 사람이 아니다.
이렇게 위험하고 아름다운 존재를, 카타리나는 오랜 문헌에서 본 적이 있었다.
알브레히트 제국에서는 오랫동안 금기시되어 온 존재.
짙은 심연처럼 검은 머리카락에 흐르는 선혈처럼 붉은 눈을 한 고대의 사도.
어둠의 집행관, 테네브리스.
“……!”
남자의 존재를 깨달은 카타리나는 온몸에 소름이 쫘악 돋았다.
“너한테서 흑마법의 기운이 느껴지는데.”
남자는 카타리나의 속을 꿰뚫을 듯 첨예한 눈동자로 그녀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숨을 삼키는 소리마저 내지 못하고 그대로 굳었다.
“이 결계를 만든 것도 너야?”
카타리나는 단박에 고개를 내저었다.
“흐음. 그러게, 너는…… 나를 부활시키기엔 부족해.”
남자는 카타리나의 마력이 썩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질도, 양도 한참 부족했다.
“베,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자가……!”
카타리나가 벤야민의 이름을 언급하던 때였다.
“……페르디난트?”
내내 나른하던 남자의 기운이 순식간에 날카롭게 일렁거렸다.
“그 빌어먹을 새끼의 후손이라고?”
“허억……!
남자의 붉은 눈동자에 기이한 광채가 서렸다.
그 아름다움마저 모두 가릴 만큼 으스스한 눈빛에, 카타리나는 공포에 질려 달달 떨었다.
“페르디난트, 페르디난트…….”
한참 동안 자신의 분노에 잠식되어 있던 남자가 문득 카타리나를 돌아봤다.
살기등등한 그 시선에 카타리나가 히끅 놀라 몸을 움츠렸다.
“너, 살고 싶어?”
목소리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꼭 이런 음산한 음색일 것만 같았다.
“……네, 네!”
카타리나는 죽고 싶지 않았기에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좋아, 그럼 거래를 하지.”
남자가 느른한 웃음기를 머금으며 카타리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마침 적당한 팔다리가 되어 줄 인간이 필요했다. 아직 그를 담고 있는 그릇은 너무나 불안정했으니까.
남자의 손가락이 카타리나의 이마 위로 닿은 순간.
“흐윽…….”
그의 손가락 끝에서 피어난 검은 연기가 일렁거리며 카타리나의 몸을 삼켰다.
“아아아아아아악!”
카타리나는 고통스럽게 비명을 지르다가 힘없이 툭 쓰러졌다.
남자는 그 모습을 무감각한 시선으로 지켜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밖으로 나와 어둠 속을 걷는 남자의 기분이 썩 저조했다.
“페르디난트, 라…….”
하필이면 깨어나자마자 듣는 게 그 이름이라니.
남자는 과거 자신의 곁에 있었던 동료들의 이름을 하나씩 곱씹어 보았다.
페르디난트.
레오브란테.
그리고…… 체르니시아.
“체르니시아…….”
오랜만에 읊조리는 이름자였다.
문득 그녀의 잔상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달빛을 담아낸 길고 곱슬곱슬한 은색의 머리카락과 대지를 닮은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
땅의 인도자, 체르니시아.
그녀가 웃을 때면 온 대지가 싱그러운 녹색 빛깔로 물들곤 했다.
“…….”
망연한 그리움이 밀려오는 순간, 남자는 곧바로 눈앞의 잔상을 지워 냈다.
붉은 눈동자가 다시금 무감하게 가라앉았다.
* * *
한편, 이보네는 남쪽의 어느 섬에서 아주 평화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완벽했다.
따뜻한 날씨, 상냥한 사용인들, 맛있는 음식과 아름다운 풍경.
그녀의 삶에 누려 본 적 없는 호사였다.
배가 슬슬 불러 온 탓에 그녀의 취미인 나무 위에 올라가 낮잠 자기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 외에 모든 것들을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이보네는 페르디난트 소유의 따뜻한 휴양지에서 태교 여행을 하고 몇 달 만에 돌아왔다.
벤야민은 수도로 돌아온 이보네를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그사이, 저택이 완전히 뒤바뀌어 있었다.
사용인들은 벤야민이 어느 날 데려온 임신한 여자를 보며 숙덕거렸다.
이보네가 없는 사이 사용인을 모두 갈아 치웠던 까닭에 누구도 그녀를 알지 못했다.
여자는 한번 보면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예쁜 미인이었으며, 화려한 드레스 장식으로도 감출 수 없는 부푼 아랫배는 누가 보아도 임신을 한 상태였다.
‘설마 가주님의…….’
‘하지만 출신도 불분명한데…….’
사람들은 낯선 여자를 보며 벤야민의 애인이라 의심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보네와 함께 있는 벤야민의 표정이 아주 꿀이 떨어질 것처럼 달콤하기 그지없었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그런 눈빛이었다.
“어서 와, 이브.”
벤야민이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며 생긋 웃었다.
나는 그의 손바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런 식의 에스코트는 카타리나 같은 여자들이나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앞에서 그 여자를 향해 다정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던 테오도르의 잔상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테오……!]
[저런, 피앙세. 조심해. 그렇게 뛰다가 넘어지겠어.]
[하지만 테오가 너무 보고 싶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내 약혼녀 될 아가씨는 어쩌면 이리도 사랑스러운 말만 골라서 하는지.]
[아이참, 테오. 사람들이 듣는데…….]
[부끄러워할 것 없어. 손을 잡아. 에스코트하지.]
테오도르는 카타리나가 사랑스러워 못 견디겠다는 듯 웃으며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곤 했었다.
그럴 때면 카타리나는 수줍게 웃으며 한때 나를 붙잡아 주던 그 단단한 손바닥 위에 손을 겹쳤고.
테오도르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며 이따금 그 잘 관리된 머릿결에 입을 맞추기도 하였다.
마치 모두에게 보란 듯 떠들썩한 그 애정 표현에, 나는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돌을 맞은 기분이 들 때가 많았다.
‘젠장.’
남쪽의 섬에서 휴양을 하며 다 잊은 줄 알았는데, 수도로 돌아오자마자 기가 막히게 다시 그가 준 상처들이 생각이 났다.
이래서, 이곳에 오기 싫었는데.
“이브?”
딱딱하게 굳은 내 얼굴에 벤야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혹시 몸이 불편한 건…….”
“아니야, 벤야민. 고마워.”
나는 재빨리 표정을 풀며 그의 손바닥 위로 살포시 손을 얹었다.
그러자 그가 힘주어 내 손을 붙잡는 게 느껴졌다.
나는 벤야민을 따라 느리게 걸음을 옮겼다.
“어때, 이브?”
벤야민이 다소 들뜬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너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뜯어고쳤어. 이제 완전히 새 저택이라 생각해도 좋아.”
나는 바뀐 저택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의 말마따나 건물 입구부터 시작하여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오래전 가문의 몰락으로 숨어들었던 어린 체르니시아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바뀐 저택이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어.”
벤야민은 마치 칭찬을 바라는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낯설지? 하나씩 안내를 해 줄까?”
“아니야. 천천히 혼자 둘러볼게.”
어쩐지 부담스러운 그 호의에 나는 부드럽게 잘라 말했다.
그러나 그는 서운하다거나 실망한 기색 없이 빙긋 웃으며 물러났다.
“그래. 그럼 적당히 둘러보고 와.”
벤야민의 손바닥이 내 머리를 스윽 쓰다듬으며 물러났다.
나는 그가 이렇게 신나 하는 것을 처음 보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저택을 둘러보는데, 멀리서 숙덕거리는 사용인들의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제 페르디난트에도 여주인이 생기는 건가?”
“카타리나 님은 성격이 아주 못돼서 예전에 일하던 사용인들이 정말 고생했다는데…….”
“새 여주인은 부디 상냥하신 분이셨으면 좋겠다.”
“너 새 여주인의 얼굴 못 봤어? 그렇게 요정처럼 예쁜 사람이 악독하게 우리를 괴롭힐 리 없잖아.”
그들이 주고받는 소리에 나는 고개가 절로 갸웃해졌다.
오랫동안 여주인이 없던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여주인 노릇을 해 온 것은 카타리나였다.
그런데 ‘새 여주인’이라니.
설마…… 벤야민에게 연인이라도 생긴 걸까?
‘하긴. 벤야민도 충분히 그럴 나이가 지났지.’
이때, 이어 들려오는 소리가 내 귀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카타리나 님 말이야. 한때는 황제의 약혼녀였다는데…… 정말 안타깝게 됐지?”
“테오도르 황제도 약혼녀의 실종으로 미쳐 버렸다며.”
이게 무슨 소리지?
카타리나가 사라지고, 테오도르가 미쳐 버렸다고?
* * *
저택을 한 바퀴 둘러본 뒤, 벤야민과 함께 식사를 하던 중 불쑥 물었다.
“황제가 미쳤다며?”
“응?”
그 말에 벤야민이 식기를 움직이던 걸 멈추고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별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 단조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래. 아주 미쳐서 사람 행세를 못 한대.”
“……큰일이네.”
나도 그를 따라 무심하게 대꾸했다.
벤야민의 말에는 약간의 어폐가 있었다.
테오도르는 원래부터 사람이 아니라 개차반이었으니, 그가 사람 행세를 못 하는 것과 미쳐 버린 것에는 연관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의 오류를 굳이 지적해 주지 않았다.
그러다 조금 뒤,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다시 물었다.
“카타리나는? 정말 실종된 거야?”
벤야민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응. 네가 남쪽으로 떠난 뒤에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하지만 카타리나는…… 황제의 아이를 갖고 있었잖아.”
“맞아. 덕분에 약혼식도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되어서 참 난감하게 됐지.”
기분이 이상했다.
카타리나는 오래전부터 나를 괴롭힌 여자였다.
그리고…… 내 남자의 사랑을 가진 여자였고, 동시에 내 남자의 아이를 잉태하여 내 아이가 누릴 수 있었을 무수한 것들을 앗아 간 여자였다.
나는 나를 그렇게 괴롭히고 아프게 한 여자의 실종에 안타까워할 만큼 착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그 여자가 내 몸에 남긴 상처만 십수 개였다.
하나, 그렇다 하여 그 여자의 실종이 기쁘거나 통쾌한 것 또한 아니었다.
떨떠름하고 꺼림칙한 마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리고 카타리나의 실종에 테오도르가 미쳐 버렸다는 소식은, 기분이 좋지 않은 것을 넘어 불쾌하기까지 했다.
나와의 소중했던 기억을 모두 잃어버린 남자가, 이제는 다른 여자를 잃고 괴로워한다는 게 퍽이나…….
퍽이나 나를 울적하고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스치는 인연조차 되지 못하고 잊혀졌으나, 카타리나는 이후로 영원토록 그에게 잊지 못할 인연이 되어 그의 기억을 지배할 터이다.
이를 깨달은 순간 느끼고 만 그 섧고도 큰 감정이 숨통을 가로막고 혈관을 옥죄었다.
참 아프게도…….
벤야민은 더 이상 이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나는 앞으로의 계획을 이야기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나는 서쪽 대륙의 칼리고르 왕국으로 갈 거야.”
“칼리고르 왕국?”
순간 벤야민이 들고 있던 포크를 아래로 뚝 떨어뜨렸다.
작은 쇳소리가 바닥에 부딪쳤다.
“응, 호수가 있는 작은 마을을 찾아볼 생각이야. 난 예전부터 호숫가에 살고 싶었거든.”
“왜……? 저택이 마음에 안 들어?”
창백해진 안색을 한 벤야민이 딱딱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저택에 오자마자 떠나겠다고 하니 속상한 것이리라.
그의 말마따나 저택은 완벽하게 다른 공간이 된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역시 나는 이곳을 좋아하기 힘들 것 같아. 미안해, 벤야민.”
아무리 겉을 뒤집어 싼 껍데기를 바꾸었다 하더라도, 이곳은 여전히 내게 편안한 공간이 될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에서는 숨만 쉬어도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이야기가 들려온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는 내 숨을 아프게 한다.
좋은 소식이든, 나쁜 소식이든.
내가 이제 더 이상 그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한 것과 별개로.
“…….”
나와 벤야민 사이에 작은 침묵이 흘렀다.
한참 뒤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렇지만 섣불리 움직이면 황제가 눈치챌 거야. 네가 황제를 속였다는 걸.”
움찔.
벤야민의 지적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는 모르고 있지만, 나는 테오도르를 속였을 뿐만 아니라 험한 욕설까지 남기고 튀었다.
내가 사실은 살아 있고, 죽은 척 그를 속였다는 걸 테오도르가 알게 된다면…….
‘안 돼. 분명 나를 죽이려 들 거야.’
끔찍한 가정에 나는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렇지만 벤야민, 네 힘이면 황제가 알지 못하게 제국을 떠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간절한 희망을 담고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벤야민의 표정이 몹시 어두워졌다.
“실은 네가 없는 사이 황제가 찾아왔었는데…….”
벤야민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몰랐는데, 황제가 성력을 쓰더라. 나도 감당하기 힘들 만큼 강한 성력이었어.”
“…….”
“그리고 지금 황제는 안 그래도 카타리나가 사라진 일로 머리가 반쯤 돌아 있는데, 만약에 네가 발견되기라도 하면…….”
가뜩이나 그 인성 나쁜 테오도르가 마침 미쳐 있는 상태라니, 나를 발견하면 죽여도 곱게 죽이진 않을 것이리라.
선연한 공포에 몸이 부르르 떨려 왔다.
‘찢어 죽이든가…… 태워 죽이든가…… 말려 죽이든가……. 어쩌면 세 가지를 동시에…….’
식은땀 한 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당장 움직이는 건 위험해. 게다가 넌 홑몸도 아니잖아.”
“으응…….”
“그러니까 서쪽 대륙으로 가겠다느니 그런 소리는 하지 말고 당분간 태교에 집중하자, 이브.”
결국 알브레히트 제국을 벗어나려는 나의 계획은 잠정적으로 미뤄졌다.
* * *
항간에 흉흉하게 나도는 소문과 같이 알브레히트의 황제 테오도르는 완벽하게 미쳐 있었다.
매일 밤, 그는 죽은 자의 소리를 들으며 괴로워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
테오도르는 그 목소리가 언제인지 기억했다.
처음 희미하게 떠올랐던 기억은 점차 또렷해져서, 그를 미치게 했다.
그녀에게 사랑한다 말해 주지 못한 게 가장 후회가 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알아보지 못한 제 자신이 가장 후회스럽고, 또 저주스러웠다.
[폐, 폐하의 두통이 너무 극심하셔서 이브 경에게 제가 따로 부탁을……. 죄, 죄송합니다, 폐하! 죽여 주십시오!]
테오도르는 자신의 잘못이다 고하는 의사에게 아무런 질책도 할 수 없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제 잘못이다.
그깟 두통 때문에 쓰러져 그녀의 말을 듣지 못하다니.
“머리통이 터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 자리에서 그녀의 말을 끝까지 들었어야지.”
테오도르는 입술을 짓씹으며 중얼거렸다.
왜 하필 그녀를 잊어버렸을까.
다른 건 다 잊어도, 그녀만은 잊지 말았어야 했는데.
“차라리 숨 쉬는 법을 잊어버리지 그랬어, 멍청한 새끼.”
과거의 자신을 향한 참을 수 없는 분노에 그는 손을 들어 자신의 목을 졸랐다.
그녀를 잊어버린 주제에 이렇게 살아 숨을 쉬고 있는 제 자신이 경멸스러웠다.
그러나 미련한 몸뚱어리는 그 와중에도 어떻게든 숨 쉴 구멍을 찾아 숨을 터뜨리고 만다.
결국 손이 풀린 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이마를 부딪치며 엎어졌다.
주르륵-
그 바람에 찢긴 이마에서 발간 핏물이 흘러내렸다.
“젠장, 이브…….”
테오도르는 헐떡거리며 충혈된 눈동자를 들었다.
성력을 담아 영구 보존을 한 작은 종잇장이 눈에 들어왔다.
이보네가 남긴 마지막 편지였다.
“이브, 이브…….”
테오도르는 허겁지겁 손을 뻗어 그녀의 편지를 쥐었다.
그 편지에, 이보네는 끝끝내 자신이 이브라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것이 저를 위한 배려임을 모를 수가 없었다.
착한 이브는 걱정한 거겠지.
혹시나, 아주 혹시나 기억을 되찾지 못한 채로 제가 그 편지를 발견할까 봐.
그래서, 그 편지에 적힌 잃어버린 과거 이야기에 또다시 모자란 새끼처럼 정신을 잃을까 봐.
“이브…….”
굵은 눈물과 이마에서부터 흘러내려 온 핏물이 작은 종잇장 위로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어느 것도 성력으로 영구 보존된 그녀의 편지를 더럽힐 수 없었다.
그것이 그가 유일하게 잘한 일이었다.
그렇게 그녀의 편지를 읽고, 읽고, 또 읽다가 날이 밝으면 그는 언제 그랬냐는 듯 멀끔한 자태로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의 세계에서 그녀가 사라진 이후로, 세상 모든 것들이 무료해졌다.
이따금은 일을 하다가도 의문이 들 때가 많았다.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 거지?’
그러다 문득 벼락과 같은 깨달음이 찾아올 때면, 그는 스산한 비소를 입가에 띠며 히죽 웃었다.
‘아, 그래, 맞아. 이브, 나의 이브를 다시 만나기 위해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이후, 테오도르는 더 이상 페르디난트를 찾지 않았다.
그가 카타리나와 거래를 하고 페르디난트를 찾아가려 했던 것은 모두 이보네를 찾기 위해서였으며, 이브를 되살리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제 이보네와 이브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고, 더 이상 페르디난트에는 이브를 되살릴 고대 어둠의 흔적이 없었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 빌어먹을 작자가 이브의 시체와 함께 그 고목까지 불태워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방법이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최근 그는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고대의 어둠,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알브레히트 제국에서는 금기시되어 온 이름이지만, 저 멀리 서쪽 대륙이라면 상황이 조금 다르다.
“아르민.”
테오도르는 손에 쥔 만년필을 내려놓으며 아르민을 불렀다.
마침 오늘 보고할 문건들을 한가득 들고 들어오던 아르민이 쭈뼛 얼어붙으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네, 폐하.”
아르민은 테오도르의 이마에 난 상처를 힐긋 훔쳐보았다.
물론 저 인간이 아닌 것 같은 잘생긴 외모는 여전히 굉장했지만, 최근 들어 황제의 얼굴은 다른 의미로 굉장했다.
누구든 눈앞에서 거슬리기만 하면 눈빛으로 찢어 죽여 버릴 것만 같은 흉흉한 광채가 도는 황금안.
그리고 그 눈 아래 피부는 다소 거뭇거뭇하여 흉포한 기운을 더욱 짙게 만들어 주었고.
매일 밤 무슨 광포한 짓들을 벌이는지, 그의 살갗을 새롭게 장식하는 상흔들하며…….
게다가 무엇보다 무서운 건 바로 저 지독히도 낮고 으스스한 목소리……!
황제는 더 이상 예전처럼 험악한 비속어를 사용하지도, 웃으며 상대를 비꼬지도 않았다.
그저 아주 가끔씩, 정말 딱 필요할 때만 입을 열어 짤막한 몇 마디를 꺼내곤 말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한 번씩 입을 열 때마다 흘러나오는 그 목소리가 무척이나 음산하고 오싹하여 아르민은 몸을 떨어야 했다.
“케르벨 왕국에서, 답신은.”
제대로 된 문장이라고도 할 수 없는 짤막한 어절들에도 아르민은 곧바로 그의 말뜻을 알아들었다.
“아, 그러잖아도 오늘 아침에 막 답신이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그…….”
그러나 아르민의 목소리는 점차 흐릿하게 잦아들었다.
이에 내내 책상 위의 서류를 응시하던 테오도르가 그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서늘한 그 시선에 닿은 순간 아르민이 ‘히이익’ 소리를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불가, 불가하다고…….”
“불가하다?”
테오도르는 최근 서쪽 대륙의 강자인 케르벨 왕국에 다소 무리한 요구를 했다.
왕국의 국보인 테네브리스의 관을 내놓으라고.
그리고 당연하게도 케르벨 왕국에서는 거절을 해 왔다.
“네, 그, 어떤 막대한 보상을 준다 해도 불가하다고…….”
아르민이 테오도르의 눈치를 힐긋 살피며 그들을 대신해 변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다, 당연한 반응이지 않습니까! 무, 무려 왕국의 시조 왕이 남긴 국보인데…….”
피식.
그러나 테오도르의 잇새로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오는 순간 아르민은 얼어붙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마치, 그들의 거절을 기다린 사람처럼 비뚜름히 웃고 있었다.
“참 안타깝군.”
“폐하?”
“되도록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었는데.”
“평화롭게……? 그, 그게 무슨 뜻이온지…….”
“그쪽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내어 주지 않으니…….”
아르민은 덜컥 불안한 마음이 피어났다.
그리고 그의 그런 불안에 쐐기를 박듯, 테오도르가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전쟁이라도 벌여야지 않겠나.”
잘못 본 게 아니었다!
테오도르는 지금 그들의 거절을 기뻐하고 있었다!
아르민의 단정한 얼굴은 삽시간에 사색이 되어 버렸다.
“네, 네? 폐, 폐하! 자, 잠시만, 잠시만 제가 무언가 잘못 들은 것 같은……!”
“그쪽 왕한테 다시 편지를 보내.”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얼굴 위에 웃음기를 싸악 지우며 말했다.
“알브레히트는 대륙의 평화를 원한다고.”
그렇게 말하는 테오도르는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평화의 파괴자 같았다.
그러나 아르민은 차마 그의 말에 반박하지 못하고 울상이 되어 고개를 푹 수그렸다.
“네, 폐하……. 알겠습니다…….”
설마, 정말로 전쟁을 일으키는 건 아니겠지…….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언제나 ‘설마’ 하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상관이질 않나.
한숨이 푹푹 새 나왔다.
보조 책상 위의 서류를 하나씩 정리하던 아르민이 문득 생각난 듯 물었다.
“아 참, 폐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만나 보지 않을 겁니까?”
“…….”
순간 아르민은 이 방에 발을 들인 이후 처음으로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본 것 같다고 여겼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던 듯, 테오도르는 어느새 평소와 다름없이 완벽한 자태로 처리할 서류들을 살폈다.
사락, 사라락-
종잇장 넘어가는 소리만이 고요한 집무실의 적막을 드문드문 깨뜨렸다.
“폐하……?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는…….”
“미룬다.”
아르민이 재차 묻자, 그제야 테오도르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선은 여전히 서류 위에 고정한 채로.
“네, 알겠습니다.”
아르민은 몇 가지 보고를 더 하고서 집무실을 나갔다.
달칵.
마침내 혼자 남은 테오도르는 아르민이 옆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무심하게 서류철을 넘기다가 불현듯 들고 있던 만년필을 손에서 놓쳤다.
툭, 데구루루-
“…….”
테오도르는 한참 동안 말없이 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 바닥에 떨어진 것을 주웠다.
나릿한 숨결이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살아 있는 그녀의 가족.
이전이라면 제일 먼저 불러들였을 터이지만…….
“나중에, 조금 더 나중에…….”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아직은 그녀의 가족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너를 찾을 방도를 손에 넣은 그 뒤에…….”
* * *
해가 저물고 밤이 되면, 그녀의 목소리는 어김없이 사방에서 밀려와 그를 잠 못 들게 만들었다.
[조금 많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러운 감정은 아니었어요.]
[당신의 경멸이 서러울 만큼,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폐하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저를 사랑했다고 고백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이다지도 냉랭하여서, 아주 작은 애정 한 톨 찾을 수 없었다.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차가운 목소리마저 기꺼워서, 흐리게 웃으며 밤의 황궁을 걸어 다녔다.
[저는 폐하 안 좋아합니다.]
“하지만 나는 널 좋아하는데.”
[저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상관없어. 내가 널 좋아하니까.”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미안해. 내가 아무리 X같아도 한 번만 봐줘. 네 말대로 나는 X같은 새끼라서 네가 싫다 해도 널 다시 만나러 갈 거야.”
[부디 유병장수하시길.]
“그럴게. 네 말대로 오래오래 살 테니까, 너의 X같은 테오도르가 어떤 꼴로 살아가는지 봐 줘. 이브…….”
중얼중얼 혼잣말을 읊조리며 어둠 속을 헤매는 모양새가 퍽 괴기스러웠다.
하여 황궁의 사용인들은 일찌감치 황제의 주위를 피해 있는 터였다.
공연히 미친 황제의 눈에 띄었다가 무슨 사달이 날지 몰랐으니까.
“안녕하세요, 형님.”
문득 부드러운 목소리 한 자락이 테오도르의 평온한 고요를 깨뜨렸다.
고개를 들자 달빛을 받아 화사한 백금발을 불어오는 실바람에 흩트린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였다.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을 찾고 있다면서요?”
에른스트는 온화한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물었다.
그런 에른스트의 분위기가 평소와 조금 달랐다.
그러고 보니 이브가 죽은 이후로 그가 조금 달라졌다.
테오도르는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이내 신경을 껐다.
에른스트 따위에게 신경을 쏟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시간이었다.
테오도르의 밤은 온전히 그녀의 소리로만 가득 찬 시간이었기에.
스윽-
테오도르는 대꾸 없이 그대로 에른스트의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에른스트는 그를 붙잡는 대신 여전히 웃음기를 머금은 채로 테오도르의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차박, 차박, 차박, 차박-
어느덧 테오도르의 걸음이 닿은 곳은 어린 날 이보네와 함께 노닐었던 약속의 나무 앞이었다.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
어린 시절을 떠올리는 테오도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브, 나는 너를 살릴 거야.”
그가 꺼칠꺼칠한 나뭇결을 사랑스럽다는 듯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어떻게든 방법을 찾을 거야.”
고대의 어둠이 남긴 성물은 흑마법의 산물이기도 했다.
‘브리힘 신의 가호’라고도 일컬어지는 고대의 사도들이 남긴 네 가지 힘.
그것들은 모두 같은 근원에서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마법과 흑마법은 본디 같은 원리를 지녔다.
한 가지 다른 것이라면, 페르디난트의 술법과 달리 테네브리스의 흑마법은 세상의 섭리를 어긴다는 것.
참 우스운 소리다.
그 섭리라는 것도 결국, 테네브리스의 패배로 인해 정해진 질서이니.
“조금만 기다려, 이브. 세상의 섭리를 거슬러서라도, 너를 살리러 갈 테니까.”
테오도르는 아무도 없는 나뭇가지 위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나를 미워하고 욕해도 좋아. 냉대하고 외면해도 좋아. 그러니까…… 네가 숨 쉬는 모습만 볼 수 있도록 허락해 줘.”
최근 테오도르가 테네브리스의 흔적을 좇는다는 소문이 암암리에 퍼지고 있었다.
덕분에 아주 과거에 나돌았던, 황제가 고대 어둠의 현신이라는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지고 있었으나 테오도르는 그저 코웃음만 칠 뿐이었다.
아주 어렸던 때부터도 그딴 것에 신경 쓰는 성격은 아니었다.
“보고 싶어, 나의 이-브.”
축축한 목소리가 애정을 담뿍 담은 채 허공으로 흩뿌려졌다.
* * *
일주일 뒤.
테오도르는 서쪽 대륙을 향해 전쟁을 일으켰다.
약혼녀를 잃고 미쳐 버린 황제가 결국 전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온 대륙을 휩쓸었다.
그리고 그때까지 페르디난트 저택에서 숨죽이고 있던 나는 그 기회를 틈타 외국으로 몸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