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황제가 이상하다.
그것이 황제의 보좌관 아르민 마이어가 최근 내린 판단이었다.
그의 상관 테오도르는 원래 조금 미친 황제였다.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
-분리수거도 되지 않는 예쁜 쓰레기!
그것이 그를 향한 측근들의 평가였다.
그저 심심하다는 이유로 뜬금없이 패악질을 부리기 일쑤였고, 조금만 수가 틀리면 아랫사람들에게 약간의 관용도 없이 잔혹하게 굴었다.
만일 그가 국정에서 보인 그 유능한 면모들이 아니었더라면, 가히 희대의 폭군으로 역사에 기록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반년 전, 그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하나 더 늘어났다.
-간악한 내숭덩어리 인성 파탄자!
이브 로웰린은 테오도르 황제가 지난여름 갑작스럽게 페르디난트를 방문하더니 데려온 사람이었다.
그때는 정말로 황제가 미쳤다는 소문이 황궁 내에 파다하게 돌았다.
황제는 참 어울리지 않게도 상냥하게 웃고, 다정하게 말했으며, 이따금 귀여운 척도 했다.
이브 로웰린의 앞에서만.
물론 이브 로웰린은 모두가 깜짝 놀라 한 번씩 뒤돌아볼 만큼 눈에 띄게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긴 했다.
-이브 로웰린을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그녀의 동료 기사들 중에서는 이런 말까지 공공연히 나돌 정도였다.
비록 그녀가 매일 같이 황제와 붙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다가갈 수 없었지만, 그녀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테오도르 황제가 누구던가?
그는 결코 눈으로 보이는 아름다움에 현혹될 사람이 아니었다.
왕국 최고의 미녀라는 레이디나 누가 보아도 귀엽고 사랑스러운 아기를 앞에 두고도 심드렁하던 남자였다.
‘변덕이라도 부리는 건가.’
처음에는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
‘어쩌면 새로운 괴롭힘 방법을 찾은 건지도 모르지.’
‘순진한 젊은 기사에게 잘해 주는 척하며 농락하려고.’
‘가엾은 이브 경. 괴롭힘을 당하는 것도 모르고 폐하를 떠받들던데.’
그러나 황제의 변덕은 꽤 오래갔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 세 달, 네 달…….
그렇게 두 계절이 지난 뒤에야 모두가 인정했다.
어쩌면 황제가, 이브 로웰린을 정말로 마음에 들어 해서 곁에 두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녀 덕분에 아르민은 조금 편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측근 호위로 붙어 있는 한, 그 간악한 내숭 덩어리 인성 파탄자가 매우 착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무자비하게 화를 내거나, 험악한 표정과 말투로 다른 이들을 공포에 떨게 하지는 않았다.
물론 그가 상냥하게 웃고 있는 것은 그 나름대로 소름이 끼치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아르민의 평화는 오래가지 않아 끝나고 말았다.
낙마 사고 이후, 테오도르가 또다시 이상해진 것이다.
기억을 잃었다기에 그저 예전으로 돌아간 것인가 생각했는데, 무언가 미묘하게 어긋났다.
이브 로웰린의 존재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이라면, 냉랭하게 쫓아내면 될 텐데 그러지 않았다.
물론 아르민이 그녀를 쫓아내지 말아 달라 수차례 권하고 그녀를 괴롭히지 못하게 훼방하는 중이라지만, 어디 황제가 그런 것에 굴하는 사람이던가.
어찌 됐든 이브 로웰린이 황제에게 특별한 존재인 것은 틀림없었다.
요새는 그를 직접적으로 쫓아내려고 괴롭히지는 않는데, 뭔가 분위기가 아슬아슬했다.
특히나 그 여자. 갑자기 황제의 연인이 된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의 등장 이후로.
두 사람의 약혼식이 보름 뒤에 있었다.
보통 황가에서는 이렇게 빠르게 약혼식을 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아직 약혼식을 치르지 않았는데도, 모두가 그녀를 ‘황제의 약혼녀’라고 부를 정도로 막강한 세력을 키워 가고 있었다.
그 여자가 조금씩 힘을 불려 가는 게 눈에 훤히 보일 텐데도 황제는 그저 내버려 두었다.
정확히는 봐주고 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황제가 사랑에 빠져 미쳐 버린 걸까?
만약 그것이 정말이라면 테오도르는 또라이 황제치고는 생각보다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었다.
아르민은 정말로, 테오도르가 이렇게 정상적인 연애를 할 줄 몰랐다.
황제의 호위단장인 린든 경은 테오도르를 가장 오랫동안 모셔 온 사람이다.
그가 황제가 된 직후 보좌관이 된 아르민과 달리, 린든은 그가 힘없는 1황자 시절부터 그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린든은 테오도르의 가장 은밀한 비밀까지도 몇 가지 알고 있었다.
그런 린든이 말해 주었다.
어렸을 적 테오도르 황제가 좋아하던 여자아이를 에른스트 2황자로부터 독점하기 위해 어떤 말도 안 되는 짓들을 벌였는지.
예를 들어, 배탈이 나는 약을 2황자의 우유에 슬쩍 뿌린다든가.(물론 이것을 행한 것은 린든이었다.)
또는, 거짓으로 황제의 부름이 있다며 멀리 보내 버린다든가.(이것 또한 린든이 행해야 했다.)
어떤 때는 그 시절 막 연마하던 신성력으로 잠을 재워 버린다든가.(이것이 유일하게 린든이 행하지 않은 것이었다.)
[굳이 그렇게까지 하셔야겠습니까?]
그때마다 린든은 테오도르에게 물었다. 그럼 어린 망나니 폭군은 싸늘하게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네가 대신 당할래? 원한다면 영원히 잠재워 줄 수도 있어.]
그랬던 테오도르가 그 여자아이를 영영 잃게 되었을 때.
그는 정말로 미쳐 버렸다고 한다.
그저 전해 들은 것을 떠올리는 만으로도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떨려서, 아르민이 고개를 홱홱 저으며 두려움을 떨칠 때였다.
“마이어 공! 일전에 부탁하신 내용을 조사해 왔습니다!”
“조사……?”
“체르니시아의 생존자의 향방을 조사해 오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아, 그거.”
아르민은 부관이 건넨 조사 보고서의 첫 페이지를 스윽 넘겼다.
‘……그러고 보니 낙마 이후로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는 말이 쏙 들어갔네.’
테오도르는 한동안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계획하고 있었다.
비록 그 일이 쉽지는 않았으나, 아르민 또한 그를 돕기 위해 따로 부관을 시켜 체르니시아의 생존자가 있는지 찾는 중이었다.
군터의 후처였던 그랜시는 그 친정 가문의 구명 요청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체르니시아의 성을 버리는 조건으로.
그리고 그녀는 그녀의 의사와 상관없이 살아남아야 했다.
“여전히 재취는 하지 않았고 친정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는데, 병이 깊어져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합니다.”
“저런, 안됐군.”
아르민은 감흥 없이 대꾸하며 다음 페이지를 넘겼다.
“넷째 브리안과 다섯째 이보네는 여전히 행방이 묘연합니다.”
그 난리 속에서 브리안과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시체조차 발견되지 않고 홀연히 증발하였다.
대충 보고서를 훑어본 아르민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 *
울적하던 나를 달래 준 것은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의 시종이 짧아진 머리카락을 예쁘게 다듬어 주었다.
“됐다, 이브. 단발도 예쁜데.”
그가 거울을 보여 주며 해맑게 웃었지만, 거울 속 짧아진 머리를 보는 내 얼굴은 웃지 못했다.
머리를 기른 건 순전히 테오도르의 권유 때문이었다.
[머리를 길러 보는 건 어때?]
그렇게 말하며 내 짧은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던 그가 생각이 나서 가슴이 욱신거렸다.
머리를 자르자 드러난 목덜미에는 희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그동안 머리카락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그 상처는 그가 기억을 잃고 깨어난 그날, 내게 남긴 것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형님이 심술을 부린 거야?”
심술…….
그걸 심술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나는 내 머리카락을 마구잡이로 베어 내던 테오도르와 그것을 보며 즐거워하던 카타리나를 떠올렸다.
“……재수 없어.”
카타리나도 재수 없고, 테오도르도 재수 없었다.
“이, 이브?”
내 욕설에 에른스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돌아봤다.
“왜?”
“너 원래 이런 말 안 썼잖아.”
“그건 10년 전이고.”
나는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10년 전, 체르니시아의 딸이었던 나는 이런 거친 비속어를 몰랐다.
그러나 페르디난트에서 견습 기사들 틈에서 자라며 조금 거친 사람이 되었다.
테오도르가 내게 나쁜 말을 할 때마다 맞받아치지 않는 건, 그가 환자라는 것을 꾸준히 상기하며 참아 주는 거였다.
……물론 황제인 그의 권력이 무서워 비굴하게 참는 것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가 없는 자리에서 이 정도 욕은 해도 되지 않나.
내가 그를 사랑한다고 해서, 인성을 상실한 듯한 그의 행동들까지 사랑하는 건 아니니까.
“이보네…….”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에른스트가 두 눈을 글썽이며 나를 보았다.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나가?”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으며 설명했다.
“응. 이제 곧 있으면 테오도르 형님의 약혼식도 있으니까. 나도 슬슬 황궁을 떠나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테오도르가 황제가 된 뒤에도 에른스트는 황궁에 남을 수 있었다.
후사 없는 젊은 황제가 국혼마저 거부하는 바람에 만일을 대비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제 곧 있으면 황제는 약혼을 할 테고, 약혼을 한 뒤엔 1년 안으로 결혼식을 올리는 게 알브레히트 황가의 관례였으니 황제의 허가만 떨어지면 에른스트는 황궁을 떠날 수 있었다.
“음…….”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테오도르는 내가 내 발로 떠나길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원대로 해 주기에는 그가 잃어버린 기억 속 테오도르에게 너무나 미안했다.
하여 오기로 버티고 있었으나, 나도 슬슬 힘들어지던 참이다.
이따금 나도 울컥하고 감정이 치솟을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렇다.
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했으면서, 이미 내게 선물한 것을 그 여자에게 주겠다고 강탈하기 위해 내 머리카락을 베어 낸 그를 생각하면 자꾸만 속이 쓰렸다.
어쩌면 나는 울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우는 순간 카타리나에게 지는 것만 같아 울지 않고 이렇게 뒤에서 그의 욕이나 하고 있지만.
“그리고 이브, 실은…….”
이때 에른스트가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얼마 전에 이상한 편지를 받았어.”
“편지?”
나는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에른스트가 다른 이들과 무슨 편지를 주고받는지는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브. 이건 반드시 너만 알고 있어야 해. 있잖아, 내가 어떤 편지를 받았는데, 그 내용이…….”
그러나 이어진 말에 나는 두 눈을 번뜩 뜰 수밖에 없었다.
“뭐?”
순간 내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네게 편지를 보낸 사람이, 자기가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라 했다고?”
* * *
나는 에른스트가 해 준 말을 한참 동안 곱씹었다.
[응. 조금 수상하잖아. 너는 이렇게 내 앞에 있는데, 자기가 생존자래. 그래서 내가 그 사기꾼의 편지를 그냥 찢어 버렸지.]
자랑하듯 가슴을 내밀며 뿌듯하게 말하는 에른스트의 모습에 나는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얼얼해졌다.
[이 바보! 그걸 그냥 찢어 버리면 어떡해!]
[이, 이브……?]
거칠게 그의 어깨를 움켜쥐며 흔들자 그가 화들짝 놀라 했다.
[아, 미안.]
오랫동안 기사들과 생활했던 나는 잠시 그가 황궁에서 자란 귀한 황자님이라는 사실을 잠시 잊었다.
[편지를 보내 준 사람한테 다시 연락을 취할 순 없어?]
[응……. 대신 그쪽에서 다시 연락을 취하겠다는 내용이 편지 말미에 있었어.]
대체 누가 보낸 걸까. 그다음이 언제일까.
한참 에른스트의 편지와 관련된 것을 생각하고 있을 때였다.
“다음 달에 사냥 대회가 있잖아요?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그때가 되면 약혼식이 끝난 뒤니, 정당하게 테오의 약혼녀로서.”
“사냥 대회에? 위험할 것 같은데.”
“그럼 이브 경이 저를 호위해 주면 좋지 않을까요?”
“음…….”
“그날 하루만이라도요, 네?”
“…….”
“괜찮지, 이브 경?”
“…….”
“이브 경?”
나를 부르는 날카로운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느리게 고개를 돌렸다.
“어머나, 이브 경! 지금 내 말이 안 들리니?”
“방금 무슨 이야기를…….”
어리바리하게 서 있는 내게 그녀가 두 눈을 뾰족하게 치켜뜨며 다시 말했다.
“다음 달 사냥 대회 때 나를 호위하라고.”
그러니까 카타리나는 지금 나를 콕 지목해서 호위를 해 달라 하는 것이었다.
“불가합니다. 저는 폐하의 호위입니다.”
나는 정말로 카타리나를 호위하기 싫었다.
어렸을 때,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내 목줄을 그녀의 손에 쥐여 주었던 시절.
그때 그녀가 날 괴롭혔던 일들이 하나씩 생각이 났다.
지난번에 나더러 테오의 곁을 떠나라고 한 것도 그렇고, 결코 좋은 심산으로 내게 호위를 맡아 달라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네 상관은 테오잖아? 테오가 분명 허락해 줄 거야. 그렇지요, 테오?”
“그날 하루뿐이라면 어려운 부탁도 아니지. 카타리나 양을 호위해라, 이브 로웰린.”
그녀의 칭얼거림에 테오도르가 나를 보며 눈매를 굳혔다.
“저는 폐하를 호위하기로 계약되어 있습니다. 아르민 마이어 공과 분명 그렇게 계약했어요.”
“카타리나 양은 나의 약혼녀이니 나와 마찬가지라고 생각하면 돼.”
“하지만……!”
“딱히 하는 일도 없지 않나.”
“…….”
물론 그동안 내가 나태한 측근 호위였던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찾기 전까지는 내게 검을 들지 말라 했으면서…….
나는 황제의 측근 호위였으나, 검을 들지 않았다.
[네게 지켜지고자 널 데려온 게 아니야. 네가 다시 검을 든다면, 그건 네 이름을 되찾은 뒤에 당당히 세상에 나서는 순간이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그럼 네 호위는 어떡해? 내가 싫으면 다른 사람이라도 들여야 하는 거 아냐?]
[착한 이브, 날 걱정해 주는 거야? 측근 호위는 황실 예법 때문에 의무적으로 두는 것이지, 어차피 난 호위가 없어도 상관없으니까 괜찮아.]
그렇게 말했으면서 이제 와 카타리나를 위해 다시 검을 들라 말하다니.
이건 너무…… 내게 잔인하잖아.
“황명에 불복하는 건가?”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물자, 그가 재차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결국 물러난 나의 대답에 카타리나가 박수를 치며 기뻐했다.
“고마워요, 테오.”
카타리나는 테오도르의 팔에 팔짱을 끼며 까르륵 웃었다.
“산책하러 가지 않을래요? 테오가 일하는 걸 구경만 하려니 심심해요.”
“그래, 일어나지.”
테오도르는 일하던 것을 멈추고 일어났다.
하필이면 문가에 서 있던 나는 그가 카타리나와 다정하게 내 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을 그대로 지켜보아야 했다.
불과 조금 전까지 내게 강압적으로 명령하던 그는, 내가 그곳에 서 있는 게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 아주 작은 시선 하나도 내게 주지 않았다.
나는 그를 따르는 시종들과 기사들 틈에 섞여 두 사람의 뒤를 멀찍이 뒤따랐다.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떨어진 거리에서 그 뒤를 따르자니, 새삼 나의 처지가 실감되었다.
산책을 하던 두 사람은, 앙상한 나뭇가지에 피어난 잎사귀를 발견하고 신기해했다.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귓가에 초록 잎사귀를 뜯어 꽂아 주었다.
문득 저 장면이 익숙하다 생각할 무렵, 하늘에서 하나둘 눈송이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치 꽃비가 내리는 것처럼 흩날리는 눈송이 사이에서,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아…….”
“괜찮아, 이브 경? 어디 아픈 건 아니야?”
나도 모르게 작게 앓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동료 기사의 물음에 나는 그저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
“그나저나 저 인성 파탄 나신 우리 폐하께서도 연애를 하는데,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혼자 쓸쓸히 늙어야 하는지…….”
“하하, 에반 경, 그대의 얼굴과 폐하의 얼굴을 비교해 봐. 그런 말이 나오는지.”
“뭐야? 그럼 자네가 역으로 생각해 봐, 베니안. 자네가 여자라면 폐하와 연애를 할래, 아니면 나랑 살래?”
“오…… 둘 다 끔찍한데…….”
“그래도 심성 고운 내가 더 낫지 않나?”
“그대는 심성만 곱잖아. 심성만.”
“뭐, 이 자식! 말 다 했어?”
“아이고, 이제 보니 에반 경은 심성도 그닥…….”
동료들의 소소한 잡담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나는 내리는 눈송이를 향해 손바닥을 뻗었다.
그거 알아, 테오?
너는 내게 사랑을 속삭이던 시절, 한 번도 나를 사람들 앞에 드러내지 않았어.
항상 감추고 숨기었지.
하지만 그 시절 나는 네 그림자 속에서도 눈물 나게 행복했어.
왜냐면, 너는 언제나 네가 줄 수 있는 모든 사랑을 내게 쏟아 주었으니까.
미처 몰랐지.
네가 이렇게 온 세상이 떠들썩하게 사랑할 수 있는 남자라는 걸.
그때는 너무 행복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는데, 이제는 너무 속상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아.
조금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저 여자가 조금 부러워. 아니, 많이 부러워.
모두의 앞에서 당당히 너의 연인이 된 저 여자가, 미치도록 부러워.
손바닥 위에 떨어진 눈송이가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풀벌레 소리가 찌르르르- 울리던 늦여름의 어느 날, 그는 내게 말했다.
[빨리 겨울이 왔으면 좋겠어, 이브. 너는 여름을 싫어하니까.]
[내가 여름을 싫어한다고?]
내가 여름을 싫어했나, 고개를 갸웃하며 한참을 생각해 보았으나 나는 여름을 싫어하지 않았다.
[아니야, 테오. 나, 여름 좋아해.]
[더운 거 싫어하잖아.]
[하지만 너를 만난 계절인걸.]
[어……. 그런 걸 생각하고 있었어? 감동인데.]
내 말에 그가 예쁘게 눈가를 휘며 속삭였다.
[그럼 이브. 나도 여름이 제일 좋아. 하지만 가을도, 겨울도, 봄도 모두 좋아하고 싶어. 내가 나의 모든 계절을 좋아할 수 있도록, 네가 항상 함께해 줄래?]
[그게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야?]
[사랑해, 이브.]
이따금씩 테오도르는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찾기 위해 태어난 사람 같았다.
세상 만물이 그에겐 나를 사랑하는 이유가 되곤 했다.
그렇게 말하며 내게 깊은 입맞춤을 남기던 테오도르는 이제 없었다.
다만, 저 멀리서 다른 여자의 두 뺨을 두꺼운 손으로 감싸 쥐며 입 맞추는 그가 있었다.
나는 이제 겨울이 싫어질 것 같았다.
이미, 겨울이 싫었다.
“젠장, 이제 떨어져.”
테오도르의 잇새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여자의 얼굴을 두꺼운 팔로 가리며 입 맞추는 시늉을 하던 테오도르는, 따르던 이들이 깊은 애정 행각에 하나둘씩 눈치를 보며 사라진 뒤에야 카타리나를 밀어냈다.
“방금 이브 로웰린을 보고 있었지요? 왜 그렇게 그 여자에게 신경 쓰세요?”
“네가 상관할 일 아니잖아. 너는 네 할 일만 하면 돼.”
“물론, 폐하께서 바라시는 이의 흔적을 찾아 물심으로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그저 걱정이 되어서요. 폐하께서 혹시나 잊으셨을까 봐. 그 애는 벤야민이 심어 둔 아이인데.”
이브 로웰린이 얼마나 수상한지는 테오도르 자신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리고 그녀를 눈앞에서 치우고 싶어 하면서도 치우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은 그녀보다 더욱 수상하다는 사실도.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남겨 두고 혼자 방으로 돌아왔다.
방 안에 있던 이들을 모두 물린 뒤에 가만히 서랍을 열어 보았다.
그날 이브 로웰린으로부터 빼앗아 온 어머니의 유품이 그곳에 있었다.
붉은 보석으로 세공된 자그마한 머리핀은,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황가에 시집올 적에 사용하신 물건이라 했다.
마땅히 제 반려가 될 여자에게 주고자 오래도록 간직해 온 물건이기도 했다.
[이거, 정말 저 주실 건가요?]
[미친 건가? 꺼져.]
뒤따라 나온 카타리나가 그것에 욕심을 보였으나, 테오도르는 단칼에 그녀를 쳐냈다.
카타리나는 쉽게 포기했다.
애초에 머리 장식이 탐났던 게 아니라, 그저 이브를 괴롭히고 싶었던 것이기 때문이리라.
같은 시각, 여전히 눈발이 흩날리는 정원에 서 있던 카타리나는 고요히 가라앉은 얼굴로 마차를 찾아갔다.
카타리나는 눈치가 빨랐다.
이브 로웰린을 신경 쓰는 황제에게 그저 그 애를 싫어하는 게 아닌 다른 미묘한 감정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두 사람이 어떤 감정을 서로 나누든 그녀와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아직 벤야민을 밀어낼 힘도 갖추지 못했는데 이 때문에 자신의 계획이 어그러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브 로웰린…… 대체 뭐지?”
이브 로웰린에게 무언가 있다.
카타리나의 직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그녀가 테오도르 황제와 벤야민의 약점을 모두 움켜쥘 수 있는 열쇠일지도.
이브 로웰린에게, 확실히 무언가 있다.
* * *
이튿날, 사고가 났다.
발단은 사냥 대회에 참가하겠다던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에게 말 타는 법을 가르쳐 달라고 칭얼거리면서 시작됐다.
[어떡하지, 피앙세. 나는 오늘 무척 바쁜데.]
[그럼 이브 경에게 부탁해도 되나요?]
[그래, 물론.]
테오도르는 자신이 바쁘다며 카타리나를 내게 떠맡겼다.
이제 와 내가 카타리나에게 주종 관계로 묶여 있던 때와 지금, 무엇이 달라졌는지 모르겠다.
언제는 나를 노예로 두려고 그곳에서 빼낸 게 아니라고 했으면서.
카타리나가 말에 올라타려다 떨어져 다친 것은 순전히 그녀의 잘못이었다.
그녀는 내 설명을 듣지 않은 채 멋대로 고삐를 잡아당겼고, 놀란 말이 움직이는 바람에 그대로 추락했다.
급히 황궁의 의사가 그녀를 치료했으나, 팔 위쪽에 남은 상처는 그녀의 약혼식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터였다.
“너 때문에 나는 약혼식 날 입을 드레스를 다시 준비해야 해! 이제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그게 왜 나 때문이야, 라고 속으로 꿍얼거릴 때였다.
“이쪽으로 와, 이브.”
카타리나는 씩씩 화를 내며 내 무릎을 꿇렸다.
“훈육 시간이야.”
그녀가 생긋 웃으며 내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
설마, 하는 눈으로 쳐다보자 그녀의 입가에 머무른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테오가 이미 너에 대한 모든 권한을 내게 줬어.”
“뭐라고요……?”
“왜 그래, 이브? 처음 있는 일도 아니잖아.”
그 순간 나는 오래전 카타리나의 패악질 속에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무력하던 어린 이브 로웰린으로 돌아갔다.
카타리나는 사악하게 웃으며 내 소매를 걷었다.
“어머, 팔이 깨끗해졌네?”
“지금, 뭘 하려고……?”
뒤늦게 정신을 파드득 차린 내게 그녀에게서 팔을 빼내고자 손목을 비틀었다.
“나만 흉터를 갖고 있을 순 없잖아? 너도 똑같이 흉이 나야 공평하지!”
“그게 왜 공평이에요?”
“닥치고 얌전히 팔을 내밀어. 그러지 않으면 테오를 부를 거야.”
“폐하를 부른다고 내가 얌전히 당신 말을 따를 것 같아?”
“테오가 보는 앞에서 그의 시종들에게 붙들려서 내게 훈육을 당하고 싶진 않잖아, 너도?”
멈칫.
키득키득 웃으며 터져 나온 말에 나는 움직임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머, 정말로 얌전해지는 것 좀 봐. 너 혹시 테오를 좋아하니? 여자로서?”
“…….”
“가엾어라. 주제를 알아야지.”
그녀의 조롱에 입술을 꾹 앙다물고 그저 노려볼 때였다.
“다쳤다고 들었는데.”
달칵- 문이 열리고 느긋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테오도르였다.
설마, 카타리나가 다쳤다고 여기까지 온 걸까?
“테오!”
카타리나는 돌연 불쌍한 척을 하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그가 방 안의 광경을 느리게 훑어보며 눈가를 찌푸렸다.
“뭘 하고 있는 거지……?”
“이브 경이 저를 다치게 했어요.”
카타리나는 울먹이며 테오도르에게 달려가 매달렸다.
그러자 그가 자연스럽게 그녀의 허리를 한 팔로 휘감아 안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런, 다친 곳은 괜찮아?”
“상처가 남았어요. 약혼식 때까지 사라지지 않을 거래요.”
카타리나가 그의 가슴팍에 머리통을 비비적거리자, 테오도르의 손바닥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속상하겠군.”
“네, 너무 속상해요. 드레스도 새로 맞춰야 한다고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황궁 재단사를 보내 줄게. 금방 새 드레스를 맞출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카타리나가 반색을 하며 그를 올려다봤다.
“정말인가요?”
“그래. 그러니 기분 풀어, 피앙세.”
그가 카타리나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고마워요, 테오. 역시 내겐 당신뿐이에요. 그런데…….”
카타리나의 손가락이 테오의 가슴팍을 나른하게 쓸어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요. 부주의하게 굴어서 나를 다치게 한 이브 경 때문에.”
“…….”
그녀의 고자질에 테오도르의 표정이 험악하게 변해 갔다.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나는 괜히 주눅이 들 것 같았다.
“그래서 질책을 하려고 했는데,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잖아요?”
“정말인가?”
테오도르가 내게 물었다. 나는 정말로 억울했다.
“제 부주의가 아니라, 카타리나 양이 설명을 듣지 않고 멋대로 행동한 거였어요.”
“어머나, 저것 봐요! 또 나를 모함하고 있어요!”
카타리나가 씩씩거리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테오, 내가 당신의 약혼녀로서 이브 경을 징벌해도 될까요?”
그녀의 물음에 테오도르는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러도록 해.”
“감사해요, 테오.”
카타리나는 까르르 웃으며 테오도르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그러고는 내 쪽으로 다시 다가왔다.
“당신도 원한다면 구경해도 좋아요.”
“일이 바빠서. 이브 로웰린의 징계는 그대에게 모두 일임하지. 안녕, 피앙세.”
그는 카타리나를 향해 생긋 눈웃음을 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려 자리를 떴다.
“아, 아쉬워라. 테오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그가 문을 닫고 나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보던 카타리나가 비릿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며 나를 돌아봤다.
“들었지? 이브 로웰린을 내 앞에 제대로 꿇려.”
테오도르가 나의 징계를 그녀에게 일임한 탓에, 시종들이 곧바로 그녀의 명령에 따라 나를 붙잡아 바닥에 꿇렸다.
뾰족한 구두 굽이 바닥을 짚던 내 손등을 짓밟았다.
아팠다.
오랫동안 아픔에 익숙했던 몸은, 테오를 만나며 아픔과 멀어졌다.
오랜만에 느끼는 통각이 에일 듯이 아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그녀의 명에 따라 뜨거운 찻주전자를 가져왔다.
뭘 하려는 거지……?
“자, 이브. 팔을 걷어.”
카타리나가 생긋 웃으며 찻주전자를 들어 올렸다.
* * *
이브 로웰린이 이상해졌다.
그것은 카타리나가 말에 오르다가 넘어져 다친 그 이튿날, 테오도르가 느낀 감상이었다.
언제나 반짝이던 녹색 눈동자에 빛깔이 사라졌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질척거릴 정도로 애정이 담긴 눈으로 자신을 보던 여자였다.
그 여자의 무심한 시선은 아까부터 자꾸만 저를 비껴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지……?
테오도르는 그녀의 무심한 태도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이고 기분이 좋질 않았다.
그래서 돌연 일어난 심술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바닥에 툭 던졌다.
데구루루-
신성력을 담은 만년필은 그녀의 발치까지 데굴데굴 굴러가다가 그녀의 발끝에 닿고는 툭 멈추었다.
그것을 발견한 이브 로웰린이 소리 없이 몸을 숙이더니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테오도르에게 가지고 왔다.
그 일련의 동작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테오도르는 문득 그녀의 손목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잠깐, 너……!”
테오도르는 책상 위에 만년필을 올리고 돌아서는 이브의 팔을 그대로 붙잡더니, 그녀의 손목을 확 걷었다.
“……!”
그리고 드러난 팔을 보며, 그는 놀라 잠시간 말을 잃었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깨끗했던 그녀의 손목과 팔에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상처들이 보였다.
순간 테오도르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하필이면 이보네의 얼굴을 하고서, 그녀의 약점이었던 상처를 손목에 갖고 있는 여자라니…….
탁-!
이때, 그녀가 제게서 팔을 빼냈다.
“어쩌다 다친 거지?”
“…….”
이브는 대답하지 않고 그저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은은한 녹색 눈동자에 이보네가 생각이 났다.
‘아냐. 이보네는 저런 눈으로 나를 쳐다보지 않았어. 이보네가 아니야.’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과 이보네를 겹쳐보지 않기 위해 하루에도 수십 번, 수백 번씩 마음속으로 곱씹어야 했다.
“실수로 찻물을 쏟았습니다.”
이브는 담백하게 대답하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는 이상하게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오늘은 그냥 가서 쉬어.”
“괜찮습니다.”
“내 말을 이해 못 하나? 팔 하나도 간수하지 못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으니까 내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아…….”
그러자 이브가 느리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녀의 눈꺼풀에 매달린 촘촘한 속눈썹이 위아래로 흔들리는 모습에 테오도르는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네, 그럼.”
이브는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하고 돌아나갔다.
너무나 쉽게 물러나는 그 뒷모습을 보는 테오도르는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하여 그는 이브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에도 하루 종일 그녀를 생각했다.
결국 참다못한 테오도르는 그 저녁에 이브 로웰린의 숙소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곳에는 그보다 먼저 그녀를 찾은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눈엣가시 같은 이복동생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 네가 여기서 뭘 하는 거지?”
“아, 테오도르 형님.”
어릴 적부터 테오도르를 무서워했던 에른스트는 그의 등장에 화들짝 일어났다.
그러며 은근히 이브를 제 뒤로 감추는 모양에 테오도르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이브가 다쳐서, 약을 가져다주러 왔어요.”
“약?”
뒤늦게 에른스트이 손에 들려 있는 작은 약병이 보였다.
테오도르는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뜨거운 찻물을 흘렸으면 곧바로 의사를 찾아 치료를 했어야지.
지금도 의사를 찾기는커녕 저런 하잘것없어 보이는 연고나 바르려 하다니.
이미 자리 잡은 흉터는 사라지기 힘들 것이다.
“멍청하긴. 이따위 연고나 발라서 나을 상처가 아니야.”
테오도르는 에른스트의 약병을 그대로 빼앗아 바닥에 버렸다.
“의사를 부르면 되는 걸, 왜 안 부르고 방치했지? 바보같이 찻물이나 쏟는 실수를 하고.”
그의 빈정거림에 에른스트가 소심하게 발끈했다.
“무슨 말씀이세요, 형님? 형님의 약혼녀가 그런 거잖아요.”
“뭐?”
“황제의 이름으로 징벌을 받는 중에 생긴 상천데…… 황궁의 어떤 의사가 그 상처를 치료하겠어요.”
옅은 원망이 묻어나는 에른스트의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실수로 찻물을 쏟았습니다.]
담담하게 답하던 이브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몰랐다.
카타리나, 그 영악한 여자가 이런 방법으로 체벌을 했을 줄은.
“…….”
“…….”
테오도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이브를 빤히 쳐다보았다.
무심한 녹색 눈동자가 저를 힐긋 보더니 다시 비껴갔다.
‘나 때문에…… 다쳤다고.’
미안하다는 말이 목구멍 아래에서 맴돌았으나 나오지 않았다.
하여 그는 미안하다는 말 대신 퉁명스럽게 말했다.
“팔을 이리 줘 봐. 내가 치료할 수 있어. 의사에게 보이는 것보다 나을 거야.”
“괜찮습니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두 번째 ‘괜찮습니다’에 테오도르는 발끈 역정을 냈다.
“당장 그 팔을 이리 내 보라고 하잖아!”
“혀, 형님, 그렇게 말하면 이브가 놀라…….”
“이브? 언제부터 황제의 측근 호위를 그따위 격 없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 거지?”
“네…… 네……? 아, 그, 그게…….”
그의 날 선 눈빛에 에른스트가 어깨를 움츠렸다.
“바보 같긴.”
피식. 테오도르는 그런 에른스트를 비웃었다.
“이 여자는 네가 어릴 적 같이 놀았던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아니야.”
“……!”
그 말에 에른스트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갔다.
“아…… 어…… 음…….”
그가 어쩔 줄 몰라 하며 테오도르와 이브를 번갈아 쳐다보며 눈치를 살폈다.
“그게, 갑자기 무슨 말씀…….”
“멍청하게도 이 여자를 다른 이와 착각하는 것 같은데.”
테오도르는 이보네와 저 여자를 구분하지 못하는 에른스트가 정말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착각할 만도 하겠지. 나조차도 현혹시킬 만큼 이보네와 닮았으니까.’
대체 저 여자는 몇 명의 남자를 괴롭히는 거지?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에게 홀려 버린 어리석은 이복 아우가 안쓰러웠고, 동시에 동질감을 느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불쾌했다.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측근 호위가 된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십거리지. 공연히 너까지 추문에 휩싸이지 말고 돌아가라.”
“아…… 네…….”
에른스트는 이브를 계속 힐끔힐끔 쳐다보다가 돌아갔다.
이브의 얼굴엔 아무런 표정도 찾을 수가 없었다.
울컥한 기분을 억누르며, 테오도르는 나름 친절한 말투로 다시 말을 건넸다.
“다시 팔을 줘. 내가 치료해 줄게.”
그러자 그녀가 그를 쳐다보며 툭 말했다.
“저보다는 카타리나 양에게 가 보시는 게 좋지 않겠어요?”
“뭐?”
“그쪽은 드레스를 새로 맞춰야 한다고 울상이던데.”
“갑자기 그 여자 이야기는…….”
“저는 어차피 검을 잡는 몸이라 상처 같은 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
애써 호의를 베풀었건만 담담하게 거절하는 그녀로 인해 테오도르는 화가 치솟았다.
“별 같잖은 게 이제 와서…….”
홰액-!
그가 그녀의 멱살을 강하게 움켜잡으며 쏘아붙였다.
“내가 내 주변에서 꺼지라고 했는데, 꺼지지 않고 맴돈 건 너잖아?”
“폐하?”
“그렇게 눈앞에서 사라지라고 했는데도, 네가 알짱거렸으면서……! 그런데, 왜! 왜 네가……!”
이렇게 신경 쓰이게 만들고서, 이제는 저를 본체만체하는 그녀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화를 낼 일인가 싶을 만큼 화가 났다.
더 이상 귀찮게 알짱거릴 일 없으니, 옳다구나 내쫓으면 되는 일 아닌가?
혹 저도 지금 이복동생처럼 그녀를 이보네와 겹쳐 보고 있는 걸까?
애써 부정하였는데도, 결국 이 얼굴에 넘어가 버린 걸까?
아닌데.
이 여자는 이보네가 아닌데.
<이보네 체르니시아, 라는 이름의 여자는 어디서도 들어 보지 못했어요. 다만, 체르니시아와 관련된 중요한 뭔가가 페르디난트에 숨겨져 있어요.
가주만 들어갈 수 있는 문서고에 그 비밀이 있는 것 같은데. 접근이 힘들어요. 마법이 걸려 있는데, 제 힘이 약해서.
어디까지나 추측이지만, 어쩌면 체르니시아가 몰락한 배경에 페르디난트가 있는 것 같아요.
만약 정말로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개입한 거라면, 그리고 그의 사후 가주가 된 벤야민이 관련 내용을 알게 되었더라면, 두 사람은 결코 체르니시아의 어린 딸을 살려 두지 않았을 거예요.
그러니 이곳에서 그 여자의 흔적이 없기를 바라시는 편이 더욱 나으리라고 생각되어요.>
카타리나가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어쩌면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이보네를 해쳤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이브 로웰린은…….
<그리고 이브 로웰린, 그 애가 페르디난트에 오기 전 흔적이 전혀 없어요. 오래된 사용인의 말을 들으니 전대 가주가 어느 날 주워 왔다고 하는데, 그가 부리던 흑마법과도 관련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수상하지요? 어쩌면 체르니시아의 몰락과 이보네 체르니시아의 실종에 그 애도 관련이 있을지 몰라요.
조만간 벤야민이 긴 외출을 하니, 그때를 다시 노려 원하는 내용을 찾아볼게요. 근시일 내에 다시 편지를 드리도록 하지요.>
잡힐 듯 말 듯 한 이보네의 종적. 그녀를 찾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런데, 왜 자꾸 난 이보네를 흉내 낸 수상한 여자를 신경 쓰고 있는 거지?
혹 이것도 흑마법의 힘인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내게 암시를 걸었나?
이브 로웰린.
이 여자는 대체 무엇을 노리고 내 주위를 맴돌았던 거지?
대체, 무엇을…….
홰액-
테오도르는 그대로 이브 로웰린의 고개를 당겨 예고 없이 입을 맞추었다.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그녀가 놀라 파르륵거렸다.
그 와중에도 코끝이 부딪치지 않도록 고개를 살짝 비트는 품이 아주 자연스러웠다.
사람들 앞에서 입 맞추는 시늉만 하였지, 이게 진짜 첫 키스인 자신과 달리 이 여자는 키스도 많이 해 본 것 같았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더 화가 났다.
거칠게 입을 맞추다가 입술을 확 떼어 내자, 그녀가 붉어진 눈가를 하고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
“…….”
그녀는 굉장히 애틋한 표정을 하고 있었고, 테오도르는 몹시 이상한 기분으로 숨을 헐떡였다.
그녀가 제게 손을 뻗었다.
손목의 상처에 시선을 빼앗긴 사이, 그녀의 손끝이 제 눈가를 더듬고, 까칠한 뺨을 쓸고, 축축한 입술을 매만졌다.
“테오…….”
그러다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테오도르는 정신이 확 깼다.
“젠장.”
테오도르는 나직한 욕설을 뇌까리며 다시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그녀가 두 팔을 벌려 그의 목에 매달렸다.
보다 더 제게 호응하는 그녀의 모습과 그 와중에도 너무나 능숙하게 느껴지는 그녀로 인해 테오도르는 혼란스러웠다.
“이브 로웰린.”
그리고 그 입맞춤 끝에 그는 그녀를 밀어내며 비릿하게 웃었다.
“여자인 걸 숨기고서 내 옆을 맴돌았던 게, 이런 걸 바란 것이었나?”
“테오……?”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아, 그런 게 아니…….”
“황제의 정부라도 되고 싶었나 보지? 주제에 감히 황후 자리를 바란 것은 아닐 테고.”
그의 조롱에 이브의 입술이 다시 꾹 다물렸다.
“이제 조금 알 것 같아. 기억을 잃은 내가 왜 너 같은 걸 곁에 내버려 뒀는지. 그런 눈빛으로 나를 현혹했나?”
테오도르는 서걱서걱 가라앉는 그녀의 눈동자와 조금 전까지 자신과 입을 맞추었던 그 뽀얀 입술을 가만히 훑었다.
“하지만 어떡하지. 네게 줄 화대는 동전 한 닢도 아까워서.”
“…….”
“……더럽고 추악해.”
그리고 이내 경멸의 시선을 던지며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실상 그가 경멸하는 것은 그녀가 아닌 그 자신이었다.
이보네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흥분한 자신이 더러웠다.
카타리나는 한동안 황궁에 오지 않았다.
그 얼굴을 보지 않는 것은 기뻤으나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테오도르를 호위하는 내 기분은 여전히 저조했다.
내 숙소에 불쑥 찾아왔던 그날 이후, 그는 날 괴롭히는 것을 조금 멈추었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시선을 슥 피해 버리곤 한다.
처음 그가 불현듯 내게 입을 맞추었을 때, 나는 그가 기억을 되찾은 것인 줄 알았다.
혹은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벼락처럼 깨달았다거나.
그게 아니라면 그가 내게 입을 맞출 이유가 없지 않은가. 그는 이보네 체르니시아가 아닌 이브 로웰린을 끔찍하게 싫어하니 말이다.
그러나 이어진 것은 나를 헤픈 여자 취급하는 경멸 어린 시선이었다.
나의 사랑은 언제부터 더럽고 추악한 것이 되었을까.
그의 약혼식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이제 일주일 뒤면 그가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
결혼이 아니니 다행이라 여겨야 하는 걸까?
그는 자신의 약혼녀로부터 도착한 편지를 천천히 읽어 내리고 있었다.
“아…….”
중간중간 작게 앓는 소리와 함께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해 갔다.
마치 아주 그리운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가.
꼭 울 것 같기도 한 그 표정은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의 얼굴과 비슷했다.
“이브 로웰린.”
한동안 의식적으로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 것 같던 그가 나를 불렀다.
“페르디난트가로 가라.”
“네?”
“카타리나 양에게 사과를 하고 와. 너 때문에 아직도 화가 많이 난 것 같거든.”
“사과를…… 하라고요?”
나는 이미 그녀에게 과한 징벌을 받은 터였다.
그런데 또 사과를 하라고?
“반드시 그녀를 만나 사과를 하고 그녀가 전하는 게 있거든 받아 와야 해, 꼭.”
심술이 싹 빠진 진지한 말투였다.
나는 그의 명에 따라 페르디난트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타며 생각했다.
테오도르.
너는 정말로 그 여자를 사랑하고 있구나.
만약 네가 기억을 찾으면, 그때의 너는 어떡할 거야?
기억을 잃기 전 나를 사랑했던 너와, 기억을 잃은 후 카타리나를 사랑하는 너 사이에서 방황할까?
그럼 나는…….
나는 어떡해야 하지…….
혹 네가 기억을 찾는 게 너무 늦어져 그 여자와 결혼을 한 뒤라면, 그때의 나는 또 어떻게 되는 걸까?
너를 혼란스럽고 방황하게 만드는 존재로 남게 되겠지.
이건 정말 생각하고 싶지 않을 만큼 우울한 가정이다.
그렇지만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는…… 조금만 더…… 그 곁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어차피 나는 갈 곳도 없고…….
그렇게 고민하던 사이 끔뻑끔뻑 잠이 들고 말았다.
“도착했습니다, 기사님.”
마부의 부름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요 며칠 사이, 유독 졸음이 많아졌다.
우울한 감정이 몸으로 나타나는 걸까?
좋아하던 음식을 보아도 속이 메슥거리고 구토감이 치밀어 오를 때가 잦았다.
돌아가면 의사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페르디난트 저택에 도착한 나는 그 닫힌 문 앞에서 한참 동안 망설였다.
여전히 내게는 싫은 곳이었다.
이 문을 넘는 순간 다시 그 우울한 여자아이가 될 것 같았다.
“에휴.”
짧은 한숨을 내쉬고,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난트의 사용인이 문을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이브…… 로웰린?”
“카타리나 양을 찾아왔어요.”
나를 알아본 사용인에게 용건만 짤막하게 말했다. 그러자 그가 나를 카타리나의 별채 앞으로 안내했다.
“잠시만 기다려.”
나는 카타리나의 별채 앞에서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과 달리 10분이 지나고, 2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난 뒤에도 그녀는 나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내게 사과를 하고 오라 지시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하던 바였다.
상대를 문 앞에 세워 두는 건 귀족가의 레이디들이 아직 화가 풀리지 않았다는 완곡한 표현이기도 했으니까.
‘그냥 돌아가면, 분명 또 테오가 화를 낼 텐데.’
그나마 미리 예상한 덕에 얇은 옷을 겹겹이 입고 와서 다행이었다.
나는 그렇게 차가운 공기 속에서 조금 더 그녀를 기다려 보았다.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고…… 어느덧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할 때까지.
차츰 내리는 눈이 어깨 위에 쌓일 무렵, 문득 내 머리 위로 그림자가 졌다.
고개를 슬쩍 들어 올리자 그곳에는 축축한 백발의 미남이 나를 보고 있었다.
“벤야민.”
그가 손을 뻗어 내 머리와 어깨 위에 쌓인 눈을 털어 주었다.
“여기서 왜 이러고 있어? 추워, 이브. 나랑 들어가자.”
“안 돼, 황명이야.”
“입술이 파래졌어.”
그가 내 얼굴을 빤히 보며 손을 뻗었다.
“얼굴도, 차갑고.”
그의 손등이 내 뺨을 스쳤다.
“테오도르 황제가 너를 함부로 대해?”
그가 제 아랫입술을 깨물며 물었다. 내게 화가 난 표정을 보이는 벤야민은 처음이었다.
그건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그냥 지금 그가 조금 아파서 이상해진 거라고 말해야 하는데, 쉽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페르디난트로 다시 돌아와, 이브. 카타리나 때문에 페르디난트가 싫다면 그 여자를 없애 버릴게. 저택에 남은 옛 기억이 싫은 거라면, 건물을 모두 허물게. 지나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기 싫다면, 사용인도 모두 갈아 치울게.”
“…….”
“네 기억 속 음울하던 페르디난트는 내 손으로 무너뜨릴 테니, 그러니까 이브.”
이상하게도 절절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는 피시식 웃고 말았다.
“고마워.”
“그냥 하는 말이 아니야.”
그가 곧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벤야민……?”
“너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내가 도울게. 나를 이용해도 좋아.”
“응……?”
물론 최근 들어 나를 힘들게 하는 건 매우 많았다. 그렇지만 조금 뜬금없는 제안이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네 멋대로 이용해도 좋다고, 이브.”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잠시 눈을 깜빡이던 나는, 그가 마법을 사용했음을 알아차렸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너를 괴롭히는 게 무엇이든, 내 힘이 널 도울 수 있을 거야. 틀림없이.”
“네 힘이라면…….”
벤야민 페르디난트.
제국을 수호하는 양대 가문 중 하나인 페르디난트의 수장.
그의 힘이 날 도울 수 있다고?
“마법을 말하는 거야?”
그는 대답 대신 내 손목을 당겼다. 그러고는 가만히 소매를 걷어 올렸다.
테오도르의 치료를 거부한 탓에, 그곳에는 얼마 전 카타리나가 남긴 우울한 상처가 남아 있었다.
벤야민이 그것을 빤히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약점이…… 다시 생겼네.”
그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의 입술이 나의 상처 위로 닿으려던 때였다.
문득 과거 테오도르가 내게 해 주었던 말이 생각이 났다.
[신성력과 술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지.]
[모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기인해.]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디난트의 술법이 약점을 파고드는 것과 달리, 레오브란테의 신성력은 아픔을 치유한다는 거야.]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을 파고드는 페르디난트의 술법…….
그리고 내 손목 위로 술식을 그리던 루돌프와, 같은 부근에 입을 맞추며 저주를 해제하던 테오도르.
그러니까 이제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나의 친부가 내게 남겼던 손목의 상처는 나의 가장 큰 약점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같은 자리에 새로이 남은 이 상처도…….
홰액-!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나는 황급히 손목을 비틀어 빼냈다.
그러고는 반사적으로 한 발짝 뒤로 물러나며 벤야민을 쳐다보았다.
“왜 그래, 이브?”
경계하는 나의 눈빛에 벤야민이 두 눈을 순진하게 끔뻑였다.
“너야말로 방금 뭘 하려고…….”
내가 그에게 미심쩍어하며 물으려던 때였다.
“이브 로웰린.”
내내 나를 차가운 공기 속에 세워 둔 여자의 목소리에 나와 벤야민은 동시에 그녀를 돌아보았다.
“벤야민 님께서도 함께 계셨군요. 여전히 두 사람은 사이가 참 좋아요. 질투가 날 정도로.”
“…….”
어느덧 내 옆에 선 벤야민이 그녀를 싸늘하게 노려보았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예전과 달리 주춤하지 않고 생긋 웃었다.
무엇이 그녀를 저토록 당당하게 만들었을까.
어쩌면 저 당당함은 테오도르의 사랑으로 만들어진 건지도 모른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테오도르의 사랑을 받았던 지난 반년간, 항상 당당하고 밝게 웃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 웃음은 내가 아닌 카타리나의 것이겠지.
새삼 상기한 처지에 입꼬리가 축 늘어졌다.
“들어와.”
카타리나는 짤막하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나는 벤야민과 대화를 매듭짓지 못하고 그녀를 뒤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별채의 구조가 익숙했다. 복도를 따라 들어간 그녀의 방에서, 카타리나는 모두를 내보내고 나와 단둘이 남았다.
“참 굉장하지, 우리 테오? 너 때문에 기분이 울적하다는 말에, 단박에 너를 이리로 보내 주고.”
카타리나는 깔깔 웃으며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거울을 보지 않아도 눈에 젖은 내 몰골은 영 엉망일 것이다. 화려하게 차려입은 그녀와 달리.
“있지 말이야, 이브. 내가 정말 굉장한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카타리나가 내 귓가를 향해 고개를 숙이며 나지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그게 너야?”
“……!”
순간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카타리나가 그 이름을 어떻게……?
놀라 커지는 나의 눈을 보며 그녀가 어이없다는 듯 픽 웃었다.
“발뺌해도 소용없어. 이미 다 조사했으니까. 10년 전에 사라진 역적 가문의 딸이라니.”
“…….”
“그럼 설마, 테오도 그걸 알고서 너를 황궁에 데려갔던 거니? 반역자의 자식을?”
그녀가 대놓고 나를 조롱했다.
“하, 정말 기가 차고 말도 안 나오는 일이네.”
“…….”
나는 가만히 카타리나를 쳐다보았다. 점점 내 안에서 의문 하나가 싹텄다.
내가 왜 이 듣기 싫은 소리를 계속 듣고 있어야 하는 거지?
그러잖아도 최근 들어 감정 기복이 들쑥날쑥했던 차에, 확 짜증이 치밀었다.
“이브, 네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고 테오와 어떤 관계였는지 더 이상 묻지 않을게. 그냥 멀리 떠나.”
“내가 왜?”
그리고 순간 뒤틀린 감정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녀에게 사과를 하고 오라던 황명도 잊고 불쑥 쏘아붙였다.
“뭐, 뭐?”
경어를 거두고 대꾸하자 카타리나가 눈에 띄게 당황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는데?”
“너 지금 나한테 감히……!”
웃음기를 싹 거둔 카타리나가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텁-
그러나 허공을 가르며 휘두르려던 그녀의 못된 손은 내게 곧바로 붙잡혔다.
“내가 누군지 이제 알았다며.”
나는 그 손을 휙 놓으며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그럼 그것도 알겠네. 체르니시아의 어린 검이 세 살 때부터 검기를 다뤘다고.”
테이블 위에는 가시 돋친 말린 꽃송이들이 꽂힌 화병이 있었다.
나는 그 안에서 가장 키가 큰 꽃송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가느다란 초록 줄기에 뾰족뾰족 돋아 있는 가시를 훑는 내 얼굴 위로 나른한 미소가 피어났다.
잠시간 그것을 쳐다보던 나는 아주 오랫동안 스스로 봉인하였던 검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순식간에 무형의 기운이 넘실거리며 꽃송이를 휘감았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뭐, 뭐야, 이 기운은……?”
카타리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감지한 것인지 불안해하며 주위를 휙휙 둘러보았다.
그녀 또한 어렸을 때부터 페르디난트의 사람이 되겠다며 마법에 몰두하던 때가 있었으니, 어느 정도 나의 검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네가 지금까지 살아 있을 수 있던 게 무엇 덕분이라 생각해?”
“이, 이브 로웰린?”
겁먹은 카타리나가 나를 피해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나 나는 그녀에게 다가가지 않으며 느긋하게 도망치는 그녀를 감상했다.
“루돌프가 강제로 지장을 찍게 한 그 빌어먹을 계약서가 아니었더라면, 너는 진작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거야.”
쯧, 혀를 치자 카타리나의 얼굴이 사색이 되어 질려갔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나는 스산하게 웃었다.
“어디, 한 번만 더 말해 봐.”
내가 요 며칠 참았던 것은 모두 테오도르 때문이었다.
그가 아프니까. 그가 나을 때까지 기다려 주겠다고 결심했으니까.
그렇지만 내가 참아 주었던 대상은 테오도르였지, 카타리나가 아니었다.
마침 이곳에는 테오도르도 없었고, 다른 지켜보는 눈도 없었으며, 카타리나와 나 둘뿐이었다.
다시 말하자면, 카타리나의 입막음만 제대로 한다면 내가 이곳에서 무슨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소리였다.
어차피 그녀는 내가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들킬 것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고.
그 사실을 깨달은 내 얼굴 위로 아주 사악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는 배우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잘했다. 어렸을 적 군터 할아버지도 그런 나를 칭찬했었다.
그리고 나는 최근 테오도르의 곁에서 그의 흉한 인성을 온몸으로 체득한 터였다.
“나에 대해 다 조사했다면서, 왜 그렇게 함부로 입을 놀려.”
손에 든 꽃송이를 마치 다트처럼 집어 든 나는, 테오도르가 아랫사람들을 괴롭힐 때 그러하듯이 예쁘게 생긋 웃으며 카타리나를 향해 꽃을 던졌다.
쇄애액-!
검기가 담긴 꽃송이는 카타리나를 스치고 날아가 반대편 벽에 박혔다.
“꺄아악!”
그것을 본 카타리나가 놀라 동공을 잘게 흔들며 말을 더듬었다.
“벼, 벽을…….”
“자, 더 말해 봐. 카타리나.”
꽃송이의 초록 줄기가 벽을 뚫고 박힌 게 여간 신기한가 보다.
나는 그런 카타리나를 향해 협박하듯 한 번 더 웃어 주며, 화병에 남은 것 중 그다음으로 큰 꽃송이를 집었다.
“으음……. 꽃꽂이를 하려면 가시는 잘라 내지 그랬어. 취향도 독특해라.”
“아, 아아…….”
겁에 질려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조금은 통쾌했다.
다른 이의 공포를 보며 즐거워하다니, 내가 테오도르도 아니고…….
그렇게 아주 잠시 나의 인성에 대해 되돌아보며 반성하던 때였다.
“너, 너 때문에 테오가 힘들었다는 건 알아?”
카타리나가 나를 향해 삿대질을 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 어깨를 떨며 눈치를 봤다.
“테오가, 나 때문에 힘들었다고?”
“체, 체르니시아를 복권하겠다며 한바탕 황궁에 일었던 난리를 모른다고 하진 않겠지?”
순간 나는 멈칫하며 검기를 거두었다.
그러자 내가 그 말에 주눅이 들었다고 생각한 것인지, 다시 자신감을 되찾은 카타리나는 턱 끝을 젖히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천박하게, 몸으로 그를 유혹해서 가문을 다시 일으키려고.”
“…….”
“그래서 테오도 너를 잊어버린 거야. 너는 테오에게 해악만 되는 존재니까.”
“닥쳐.”
도무지 짜증이 나서 더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한 번 더 검기를 실어 꽃송이를 날렸다.
이번에는 꽃송이가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날아갔다.
검기가 스쳐 간 자리, 그녀의 머리카락이 우수수 베이며 바닥에 떨어졌다.
“너, 너, 이, 이 무슨……!”
한쪽 머리카락만 우스꽝스럽게 한 움큼 싹둑 베인 그녀의 몰골을 보자 조금 전까지 치솟았던 짜증이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테오도르에게 고자질할 생각은 하지 마. 그랬다간 다음번엔 머리카락이 아니라 네 머리를 벨 거야.”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려던 그녀는 이어진 나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 * *
카타리나가 공포에 질린 덕에 그녀와의 대화는 30분도 채 되지 않아 끝이 났다.
몇 시간 동안 추위에 떨며 밖에서 기다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였다.
나는 카타리나가 내게 준 나무 상자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나는 황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마차 벽에 기대어 몸을 움츠렸다.
물론 그녀의 머리를 베겠다는 것은 허세였다.
사람을 죽이다니, 그것은 살인이 아닌가.
내가 테오도르 같은 인성 파탄자도 아니고 그런 짓을 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아…….”
나는 어느새 내가 그를 인성 파탄자라고 여기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모두가 테오도르 황제는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이라고, 분리수거도 되지 않는 예쁜 쓰레기라며 그 얼굴에 속지 말라고 했을 때 한 귀로 흘려들었는데.
하지만 누구든 나와 같은 상황이었더라면 그에게 속고 말았으리라.
마치 신이 조각한 것처럼 아름다운 얼굴로 그토록 예쁘게 내숭을 부리는데, 어떻게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도 나는 그가 그 예쁜 얼굴로 훌쩍이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면 받아 줄 용의가 있다.
그래, 아직까지는…….
욱신-
“아얏.”
순간 저릿한 느낌에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조금 전 검기를 사용했던 손끝에서부터 심장까지 이어진 혈관이 조일 듯 괴롭게 아파 왔다.
너무 오래 봉인되어 있던 힘을 사용해 미숙해서 그런 걸까.
꼭 군터 할아버지에게 들었던 검기의 반작용 같았다.
하지만 어렸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다시 저릿한 손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랫동안 힘을 안 쓰다가 쓴다고 해서 반작용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물론 검기를 사용하면 위험한 상황이 몇 있긴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으로 알려져 있는 건…….
[임신한 상태에서는 특히 검기를 사용하면 안 된단다, 이보네. 태내의 아기가 검기에 놀라 다치지 않도록 임신한 몸이 스스로를 방어하며 반작용을 일으키기 때문이지.]
설마……?
나는 느리게 시선을 내려 내 아랫배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내저었다.
“어휴, 내가 지금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아무래도 황궁에 돌아가면 해야 할 일이 많았다.
의사도 찾아가고…… 검기의 반작용에 대해서도 조사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 *
황궁에 돌아왔을 때, 테오도르는 내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대뜸 험악하게 구겼다.
“왜 이렇게 늦었지?”
“죄송합니다, 폐하.”
“카타리나 양이 전한 물건은?”
나는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에게 전해 달라던 나무 함을 그에게 내밀었다.
“여기요.”
테오도르는 그것을 받아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안에 있는 것을 보더니, 돌연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나를 담은 그의 황금빛 눈동자가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뭐지?
물건을 잘못 받아 온 건가?
내가 무슨 실수라도?
“……나가 봐.”
내쫓는 목소리가 기이하게 뒤틀려 있었다.
나는 영문을 몰라 하며 밖으로 나갔다.
이미 하늘은 어두워져 있었다.
돌아오면 곧장 의사를 만나 보려고 했는데, 카타리나를 기다리느라 시간을 너무 오래 지체해 버렸다.
밤이 깊었으니 오늘은 이만 자고 내일 일찍 일어나 의사를 만나 보아야겠다고 다짐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머리가 무겁고 귀가 먹먹했다.
떠지지 않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일어났는데, 영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콜록, 콜록.”
아무래도 어제 차가운 곳에서 눈을 맞은 게 문제인 듯했다.
일단 출근을 한 뒤에 몸이 아프다고 말할 심산이었다.
“세상에, 이브 경. 안색이 왜 그래?”
그의 집무실까지 걸어가는 길에 동료 기사들일 나를 보며 걱정의 말을 한마디씩 던졌다.
“가벼운 감기예요.”
말을 할 때마다 목이 까끌까끌했다.
잔뜩 쉰 목소리에 동료들이 짐짓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오늘은 쉬어야 하는 거 아냐?”
“안 그래도 폐하께 말씀드리고 의사를 만나러 가 보려고요.”
그들이 보기에도 내 꼴이 영 좋지 않나 보다.
노크를 하고 안으로 들어가자, 내 쪽은 쳐다도 보지 않고 있는 테오도르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잠잠히 일에 집중하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았다.
몸이 좋지 않아 그런 걸까.
유독 그의 얼굴을 보자 마음이 서걱서걱 아팠다.
“폐하.”
갈라진 목소리로 그를 부르자, 그가 고개를 들어 나를 힐끗 보았다.
“뭐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오늘은 쉬어야 할 것 같습, 콜록! 콜록!”
제대로 말을 끝맺지 못하고 기침을 하자, 나를 보는 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죄송합…… 아…….”
그것을 보는 순간 핑-! 하고 현기증이 밀려왔다.
덥석-!
휘청거리며 넘어지려는 순간, 그가 나의 한쪽 팔을 움켜잡았다.
“아, 감사…….”
그에게 고맙다고 말하려는 순간, 머리 위에서 ‘쯧-’ 하고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누가 상관이고, 누가 호위인지.”
짜증스러운 그의 목소리가 먹먹한 귓가에 맺혔다.
전과 같았더라면 아주 작은 기침 한 번에도 걱정해 주었을 남자인데.
어느새 그의 불친절에 익숙해진 것만 같아 흐릿한 웃음이 번졌다.
그러고 보면 그는, 대체 얼마나 열심히 본성을 감추고 내숭을 부렸던 걸까.
참 힘들었겠다, 테오.
네가 날…… 참 많이 좋아했었구나.
이보네를 참 많이 사랑해 줬구나, 네가.
뿌연 시야 사이로 이제는 나를 향해 웃어 주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며 피식피식 웃고 있는데, 돌연 그가 멈칫했다.
“너…….”
그가 한 손으론 여전히 내 팔을 붙잡은 채로, 다른 한 손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몸이 너무 뜨거운데.”
누구나 해 줄 수 있는 그저 그런 흔한 걱정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이곳까지 오는 길에도 동료 기사들로부터 무수한 그런 걱정을 들었다.
그런데 유독 그의 걱정에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났다.
“테오…….”
어쩌면 나는 열에 취한 건지도 모른다.
“나, 너무…… 아파…….”
열이 아니었더라면 이렇게 입 밖으로 나오는 대로 아무렇게나 말하지 않을 것이다.
“너무, 너무 아파서…… 그래서…….”
“많이 아픈 건가?”
미간을 좁히는 그의 얼굴 위로, 감기게 걸린 나를 걱정하며 일주일 내내 밤새 간호해 주던 다정한 그의 모습이 겹쳐 떠올랐다.
아까부터 눈가에 아롱아롱 차올랐던 울음이 그대로 툭- 떨어졌다.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아파…….”
나는 그의 옷깃을 붙잡고서 아프다고 훌쩍거렸다.
눈물로 흐려진 시야 속, 그가 당혹스러운 표정을 보일 때였다.
“폐하, 카타리나 양이 방문했습니다. 일단 응접실로 모셨는데, 어떡할까요?”
“아…….”
순간 그의 얼굴 위로 화색이 돌았다.
스르륵-
내 팔을 움켜쥐던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의 옷깃을 붙잡던 나의 손도 맥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내가 가지.”
그가 나를 두고 문밖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 나갔다.
나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싫어, 가지 마.
그 말이 목구멍까지 꾹 밀려왔다.
내가 마음속으로 외치던 말이 그에게 닿은 걸까?
문밖으로 한 발짝 내딛던 그가 멈칫하더니 다시 나를 돌아보았다.
“의사를 찾아가도록 해. 오늘은 더 이상 호위를 하지 않아도 된다.”
다시 내 쪽으로 오는 걸까, 짧은 기대는 금세 사그라들었다.
테오도르는 나를 그곳에 두고 카타리나에게 가 버렸다.
남겨진 나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어서 의사를 찾아가 보라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에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차츰 식은땀이 올라오며, 호흡이 가빠졌다.
젠장…….
눈앞이 핑글 도는 순간, 나는 그대로 발을 헛디디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이브……!”
누군가의 애타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상대를 확인하지 못하고 그만 눈을 감고 말았다.
* * *
한편, 이보네가 쓰러진 시간.
테오도르는 막 응접실에서 카타리나와 마주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물린 채였다.
카타리나는 전날 이보네와 있었던 일로 엉망이 된 머리카락을 결국 잘라 내고, 가발을 썼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에게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그저 그녀의 바뀐 머리카락을 힐긋 보고 말 뿐이었다.
“어떻게 됐지?”
가벼운 인사도 없이 대뜸 묻는 테오도르의 목소리가 절박했다.
“찾았나?”
“죄송하게도 찾으시는 사람은 더 이상 페르디난트에 없었어요.”
“아…….”
그 말에 테오도르가 앓는 소리를 내며 괴로워했다.
카타리나는 이보네가 이브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알아냈지만, 결코 그에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그가 이보네를 찾고 나면 더 이상 자신을 옆에 두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테오도르는 그녀가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는 것을 돕겠다고 약속하였지만, 인성 더러운 테오도르 황제가 신의 같은 것을 지킬 리 없지 않나.
그리고 카타리나 그녀 역시 테오도르 못지않게 신의가 없는 사람이었다.
왜곡된 이야기로 증거를 조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제가 보내 드린 것은 확인하셨나요?”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멈칫하며 카타리나를 쳐다보았다.
그의 얼굴 위로 드러난 가느다란 실금을 보며, 카타리나는 속으로 짧게 코웃음을 쳤다.
“어땠나요?”
“……검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역시나, 흑마법이네요.”
“그 수정구가 잘못된 건…….”
“오, 결코 아니에요. 걱정되신다면 흑마법사를 찾아 실험해 보셔도 좋아요. 확실히 흑마법에만 반응하게 되어 있는 것이니까요.”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보낸 나무 함에는 작은 수정구가 하나 들어 있었다.
흑마법의 흔적과 반응하여 색이 새까매지는 수정구였다.
그리고 그 수정구는 어제 그것이 담긴 함을 운반한 이브 로웰린에게 반응하여 색이 검어졌다.
그러니까, 이브 로웰린에게 흑마법의 흔적이 남아 있던 것이다.
이브 로웰린이 수상하다고, 내내 그렇게 의심해 왔던 테오도르이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 확증을 얻으니 마음이 더욱 가라앉았다.
“흑마법의 시전자는 틀림없이 벤야민일 테지요. 이브 로웰린과 가장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무슨 종류의 술식을 그렸는지는 모르겠지만, 폐하께선 이상한 점을 못 느끼셨나요?”
“…….”
이상한 점이라면 너무나 많았다.
일단 그녀는…… 처음 본 순간 제가 착각할 정도로 이보네와 닮아 있었다.
만약 어린 날 제가 남긴 신성력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를 이보네라 믿었을 정도로.
단순히 얼굴만 닮은 것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텐데, 불쑥불쑥 이보네를 생각나게 할 때가 있었다.
테오도르의 기억 속 이보네는 열 살 무렵의 어린아이였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조금 전만 해도 그렇다.
그 여자가 열에 취해 헛소리를 중얼거리는데, 이상하게 마음이 쓰였다.
평소의 그였더라면 아랫사람이 아프든 말든 내버려 두었을 것이다. 테오도르는 본래 인정 따위 없는 황제였으니까.
휘청거리던 그 여자를 저도 모르게 붙잡았다.
그리고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하마터면 그대로 안아 들고 의사를 찾아갈 뻔했다.
카타리나의 방문 소식에 정신을 차리지 않았더라면 정말로 그런 실수를 저질렀을지도 모른다.
“폐하께서도 이상한 점을 느낀 거로군요. 그렇지요?”
“…….”
테오도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차마 대답할 수 없었다. 그 여자가 자신을 현혹하기 위해 온 것 같다고.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
“잠깐.”
잠잠히 생각에 잠겨 있던 테오도르가 불쑥 날카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브 로웰린이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연인이라고? 처음 듣는 소린데?”
“어머, 제가 이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가요?”
카타리나는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으며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특별히 아꼈다고만 했어.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이브 로웰린을.”
“아아, 네, 분명 그랬지요.”
오묘한 미소가 카타리나의 입가에 피어났다.
“그러니까 그 두 사람의 관계가……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일방적인 마음을 보냈던 게 아니라…….”
“벤야민은 그 여자를 아꼈고, 그 여자도 그걸 즐겼지요.”
카타리나는 꼿꼿한 목소리로 답했다. 이브 로웰린은 황제의 곁에 두기에 위험한 여자였다.
혹시나 테오도르가 그녀에게 어떤 호감 비슷한 감정을 느끼기 전에 싹을 잘라 내야 했다.
“제가 봤어요. 이브 로웰린이 매일 밤 벤야민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
순간 테오도르는 기분이 무척 가라앉았다.
이브 로웰린.
이보네를 흉내 낸 그 여자가 누구와 어떤 관계이든 저와는 상관없지 않나.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날 것 같지?’
테오도르는 테이블 아래로 보이지 않는 두 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매일 밤 그 남자의 침실에서 나왔다고?’
상상을 하는 순간, 거센 욕지기가 목구멍 아래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장 그 여자를 찾아가 따지고 싶었다.
네가 정말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그런 관계가 맞냐고.
감히 나를 그런 눈으로 보아놓고서, 뒤로는 정숙하지 못하게…….
‘아니야. 그 여자는 이보네가 아니야. 화를 낼 필요도, 흥분할 필요도 없어.’
테오도르는 울컥하는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깊은숨을 내쉬었다.
카타리나가 그런 그의 동요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약혼식이 얼마 남지 않았어요.”
이제 나흘만 지나면 두 사람의 약혼식이었다.
“그렇지만, 명심해. 황후 자리는 네 것이 아니야.”
“하지만 폐하께서도 약속을 지켜 주셔야 해요.”
“그래서, 벤야민을 어떻게 몰아낼 건지 생각해 두었나?”
“이건 저도 정말 생각지 못한 수확이었는데…….”
테오도르의 물음에 카타리나가 은밀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속삭였다.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었어요. 폐하께 드릴 수정구를 확인하던 중에 그것이 깨졌어요. 가장 지독하고 음습한 흑마법이 페르디난트의 안뜰에서 시현되었어요.”
그 순간 테오도르의 미간이 천천히 구겨졌다.
살인 마법은 흑마법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고 동시에 절대적으로 금지되는 마법이었다.
“제가 아는 한, 그 어려운 술식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은 두 사람뿐이에요. 죽은 루돌프와 벤야민.”
위험한 마법인 만큼 발동 조건이 까다롭고 난해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쯤은 되어야 시현할 수 있을 만큼.
“술식을 찾아낼 수 있는 건 오직 강한 신성력뿐이니까, 신전에 연락을 해서…….”
“아니. 그럴 필요 없어.”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말을 단호하게 끊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확인하러 가지.”
“폐하께서요?”
“내가 아는 자 중에 강한 신성력을 지닌 자가 있다.”
“하지만 아무리 폐하라 하셔도 저택 안뜰에 걸음 하시는 건…….”
“뭐가 문제지?”
테오도르는 짧게 코웃음을 쳤다.
“약혼녀를 만나러 왔다 하면 아무도 막지는 못하겠지.”
“아무 때나 접근할 수 없어요. 괜히 오셨다가 위험해지실 거예요.”
“감히, 누가 나를 위협한다고?”
“페르디난트의 금제가 걸려 있어요. 가주의 허락을 받은 자만 드나들 수 있는.”
“젠장.”
테오도르는 욕설을 뇌까렸다.
살인 마법의 흔적이 있다는 말에 조금 초조해졌다.
카타리나와의 약속을 이행하여 벤야민을 몰아 내주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 여자가 페르디난트의 주인이 되든 말든 그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카타리나가 생각했던 것처럼 테오도르는 신의 따위 헌신짝처럼 내다 버릴 수 있는 썩을 인성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가 걱정한 것은 혹시나 그 살인 마법이 이보네에게…….
‘아니야.’
테오도르는 그 이상의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서, 어떻게 그걸 확인하겠다고?”
“딱 한 가지 방법이 있어요. 강한 신성력을 가진 자를 저택 안뜰로 부를 수 있는 방법이.”
“……?”
“저택 안뜰에 커다란 수목이 있어요. 대대로 페르디난트가의 사람들은 임신을 하면 그곳에서 신관의 축복을 받았지요.”
테오도르의 두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임신?”
“네, 임신이요.”
카타리나는 붉은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생긋 웃었다.
* * *
“임신입니다.”
그 한마디에 정신이 퍼뜩 들었다.
“방금, 뭐라고?”
나보다 더 놀라 하며 의사에게 물은 이는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이브……!]
의식을 잃기 직전 내가 들은 목소리는 다름 아닌 에른스트의 것이었다.
마침 내게 전할 말이 있어 찾아오던 그가 맞은편에서 쓰러지던 나를 발견하고 황자궁에 데려와 의사를 불러 준 것이다.
다행히도 빠른 처치로 의식을 되찾았으나, 여전히 열은 떨어지지 않았다.
혼미하던 와중에 의사가 조금 이상한 점이 있다며 다시 진찰을 해도 되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열에 들끓어 몽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심각한 표정으로 몇 가지 문답을 했다.
[혹 최근에 입맛이 없다거나, 음식을 앞에 두고 구토감이 치밀었다거나…….]
[잠이 쏟아진 적은…….]
[실례되는 질문이지만, 달거리가 끊긴 것은 언제인지…….]
그리고 그 끝에 그가 말했다.
“틀림없는 임신입니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고.
“그게 무슨……!”
에른스트는 기겁을 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 순간 머리가 울려서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그는 금세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다시 얌전히 앉았다.
나는 잠잠히 테오도르와의 마지막 관계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가 기억을 잃기 전, 아직 그가 다정한 나의 테오였을 때.
“확실한가요?”
“네.”
간신히 입술을 떼며 묻자 의사는 재고의 여지 없이 단호히 말했다.
잠시간 방 안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의사는 몇 가지 처방과 함께 주의해야 할 점을 일러 주었으나, 제대로 들리지가 않았다.
멍하니 넋을 놓고 고개만 끄덕이는 나를 대신해서 에른스트가 열심히 주의 사항을 전해 들었다.
마침내 의사가 나가고 방 안에 나와 에른스트만 남게 되었을 때.
“이, 이브, 이, 이, 임신이라니, 이게 도대체…….”
에른스트는 목소리를 달달 떨며 말을 더듬었다.
그만큼이나 그에게는 나의 임신이 충격적인 모양이다.
하긴, 그는 나와 테오의 정확한 관계를 몰랐으니까.
“그럼, 그럼 아기의 아버지는…….”
“…….”
내가 아무런 답도 하지 않자 그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더니 돌연 안색이 새하얘져서 물었다.
“설마 테…….”
“닥쳐, 에른스트.”
“…….”
힘없는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살벌한 욕설에 에른스트가 입을 꾹 다물었다.
“……아, 미안.”
나는 뒤늦게 내가 욕을 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깜짝 놀랐지, 아기야? 나쁜 말을 써서 미안해.”
“…….”
옆에서 에른스트가 나를 힐끔 쳐다보았다.
“왜?”
“아니, 그냥…….”
“할 말이 있으면 말해.”
“나는 걱정이 돼서…….”
나는 그의 말을 흘려들으며 납작한 나의 아랫배를 빤히 쳐다보았다.
임신…….
그러니까, 이 배 속에 아기가 있다.
나와 테오의 아기가…….
의사에게 그 말을 전해 듣는 순간, 놀라움과 함께 알 수 없는 감정으로 가슴이 두근- 뛰었다.
한 번도 어머니가 되고 싶었던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내 배 속에 생명이 생겼다는 두려움과 당혹감이 이내 놀라우리만큼 큰 애정과 사랑으로 바뀌는 것은 정말 한순간이었다.
‘내게 가족이 생긴 거야.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진짜 가족…….’
나는 잠시 아기의 아버지인 나의 테오를 떠올려 보았다.
그 순간 조금 전까지 몰아쳤던 기쁨과 환희가 금세 쪼그라들었다.
내 아기의 아버지는 나흘 뒤에 다른 여자와 약혼을 한다.
‘하지만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까…….’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몸을 일으켰다.
“이브? 어, 어딜 가려고?”
에른스트가 화들짝 놀라며 나를 부축했으나, 나는 그를 밀어내며 거절했다.
“괜찮아. 이제 혼자 걸을 수 있어.”
아까만큼 머리가 어지럽지는 않았다. 오히려 맑아졌다.
지금 내가 해야 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 것만 같았다.
테오도르를 만나야 했다.
그가 막 기억을 잃었을 당시, 수차례 대화를 시도해 보고자 하였으나 그의 철벽과도 같은 수비 속에서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마지막 시도는 아마 그때였을 것이다.
그의 침실에 몰래 침입했던 그 밤,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그를 보고서 나도 모르게 도망쳐 버렸고…….
그 이후 과거의 기억을 건드릴 때면 두통에 시달리는 그를 알게 되어…….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은 알리지 못하더라도, 아기의 존재만은 알려야 해.’
나는 허리에 매단 검을 가만히 집어 보았다.
임신을 하였으니 검기는 사용하지 못할 테지. 그렇지만 검기를 사용하지 못한다 하여 나의 검술이 영 엉터리인 것은 아니었다.
이래 봬도 체르니시아의 딸이었으며, 밥을 먹고 숨을 쉬듯 검을 배웠다.
오늘은 기필코 테오도르를 검으로 두들겨 패서라도 대화를 해 보리라.
혹 지난번처럼 다른 여자와 함께 있다면 미련하게 당황하지 말고, 그 여자도 아프게 때려서 쫓아 버려야지.
어차피 그와 함께 있을 것으로 짐작되는 여자는 카타리나밖에 없으니까, 아프게 때리겠다는 결심에 어떤 죄책감도 없었다.
그가 나를 믿어 줄까.
확률은 낮았다. 여전히 나와의 대화를 받아들일 가능성은 낮았고, 내 말을 믿어 줄 가능성은 그보다 훨씬 더 낮았다.
그렇지만 배 속의 아기를 생각해서라도 주춤거리며 물러날 수는 없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씩씩하게 그의 궁전을 찾아갔다.
여전히 핏기가 없는 내 얼굴을 보고 다들 의사는 만나 본 거냐며 한마디씩 던졌으나, 나는 아주 괜찮다고 말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어디 계시지?”
“아, 그게…… 오늘은 일찍 일정을 마치시고 방에서 휴식 중이신데…….”
일상적인 물음이었는데도 다들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오늘따라 아주 화끈하셔서.”
“……?”
“영 기분이 좋으신 모양이야.”
“폐하가 기분이 좋으시다고?”
“응.”
그가 기분이 좋다는 말에 나는 마음이 조금 더 안정되었다.
아무래도 기분이 좋으면 조금 더 기꺼운 마음으로 나의 대화 시도를 받아 줄 것이 아닌가.
차츰 경쾌해져 가는 걸음을 내딛던 나는, 문득 맞은편에서 걸어오는 여자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여자 또한 나를 발견하고 멈추어 서더니, 이내 나른하게 웃었다.
“안녕, 이브 경.”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내 앞에서 벌벌 기던 카타리나가 마치 승리자의 미소를 입가에 띠며 즐거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잘 부탁해.”
“……?”
“내 약혼식 날 말이야.”
내게 한 발짝 다가온 그녀가 귓가에 대고 자그맣게 속닥거렸다.
“무려 체르니시아의 검에게 호위를 받다니, 정말 굉장하잖아.”
“무슨 소리를…….”
내가 그녀의 호위를 맡기로 한 것은 사냥 대회 때였다.
그것도 그녀가 테오도르에게 보란 듯이 나를 콕 집어서 칭얼거린 것 때문에 그날 하루만 억지로 그녀를 호위하게 된 것이 아닌가.
그런데 갑자기 약혼식 날을 부탁하겠다니.
무슨 소리냐고 되물으려던 순간 나는 멈칫하고 말았다.
그녀의 목덜미에 테오도르의 것이 분명한 흔적이 남아 있던 것이다.
내가 잠시 굳어 있는 사이 카타리나는 깔깔 웃으며 멀어져갔다.
문득 가슴이 불안하게 뛰었으나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여기서 이럴 시간이 없었다. 빨리 테오도르를 만나야 했다.
불안하게 쿵쿵거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테오도르의 방에 도착했을 때.
“폐하, 드릴 말씀이…….”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걸음 했던 나는 다시 한번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뭐지?”
나를 발견한 그가 인상을 찌푸리며 돌아봤다.
보란 듯이 묻어난 여자의 화장품 흔적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아…….”
잠시간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가 먼저 나를 불렀다.
“마침 잘 왔다, 이브 로웰린.”
그가 웬일로 나를 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나흘 뒤 약혼식 날, 네가 해 주어야 할 일이 있어.”
기억을 잃은 이후로, 그가 나를 향해 이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넨 건 처음이었다.
“카타리나 양이 내 아이를 가졌다. 마땅히 황족으로 대우하며 각별히 그녀의 호위를 맡아야 할 거야.”
순간 나의 표정이 무너졌다.
방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의 아이를 가졌다고?
“그러니 네가 나흘 뒤에…….”
“…….”
“이브 로웰린?”
멍하니 선 채로 대답이 없자 테오도르가 재차 나를 불렀다.
“이브 로웰린, 내 말을 듣고 있는 건가?”
그 소리에 퍼뜩 정신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이맛살을 미미하게 찌푸린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 그러니까 카타리나, 나흘 뒤에 테오도르의 약혼녀가 되는 여자가 그의 아이를 가졌다고…….
나는 자신의 약혼녀가 아이를 가졌노라 말하는 내 아이의 아버지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그만 그대로 밖으로 뛰쳐나가고 말았다.
뒤에서 테오도르가 무어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으나, 더 이상 그 자리에 있을 수가 없었다.
정처 없이 달리다 보니,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눈앞에 보였다. 오후 두 시의 약속의 나무였다.
그 앞에 선 나는 밀려오는 헛구역질에 욱, 욱 토악질을 했다.
차가운 밤공기가 살갗을 스치며, 차츰 머릿속이 정리되어 갔다.
카타리나가 테오도르의 아이를 가졌다.
그리고 그 둘은 나흘 뒤에 약혼식을 거행할 것이다.
‘그럼 내 아이는…….’
나는 조심스럽게 아랫배를 감쌌다.
‘황제의 사생아가 되는 거야.’
문득 모골이 송연해졌다. 배 속에 있는 아이의 존재를 만약 들킨다면…….
‘카타리나는 분명 아이를 죽이려고 할 거야. 나뿐만이 아니라 아이까지 위험해져.’
오래전부터 황후가 되길 꿈꿔 왔던 카타리나가 제 아이의 황권을 위협할 황제의 사생아를 살려 둘 리 없었다.
‘안 돼. 아이를, 지켜야 해.’
테오도르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과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있다는 것을 알리고자 했으나, 카타리나의 임신 소식이 그런 나의 결심을 무너뜨렸다.
덕분에 그 어느 때보다 확고한 새로운 결심이 섰다.
그를 떠날 결심이.
* * *
한편,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의 새하얘진 안색에 걱정이 되었다.
“측근 호위라는 작자가 쓸데없이 몸이 약해서는, 쯧.”
그는 이브가 뛰쳐나간 문 쪽을 쳐다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 뒤늦게 자신이 카타리나를 만나러 가기 직전 그녀의 상태가 심상찮았단 게 생각이 났다.
“의사를 만나지 않은 건가?”
테오도르의 인상이 와락 구겨졌다.
오늘 아침,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녀는 썩 아파 보였다. 그리고 그녀가 어쩌다 그리 앓은 건지 짐작이 갔다.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때문이겠지.’
유독 날이 추웠던 어제는 눈이 왔다고 했다.
카타리나와 연락을 취하기 위해, 그녀에게 사과를 하라는 명목으로 이브 로웰린을 페르디난트로 보냈다.
상대를 밖에 서 있게 하는 건 귀족 아가씨들이 화가 났다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카타리나가 곧바로 그녀를 안으로 들이지 않았을 테니, 저 약해 빠진 호위는 몇 시간을 그렇게 차가운 바깥에서 눈을 맞으며 기다렸으리라.
그 성질 나쁜 여자가 그러리란 걸 알면서도 보냈다.
이브 로웰린을 위해 자신과 협력 관계인 카타리나의 기분을 불쾌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이브 로웰린은 그래도 되는 여자였으니까. 제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으니까.
눈치 빠른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이 자신을 좋아한단 사실을 알았다. 그렇지만 굳이 여자란 사실을 숨겨 가면서까지 제 호위가 된 것은 그 여자이질 않나.
제가 그 여자에게 좋아해 달라 말한 것도 아니고…….
[아파, 너무 아파. 너무 아파…….]
그러니 자꾸만 떠오르는 그 여자의 아픈 얼굴과 애달픈 목소리, 뜨거웠던 체온 따위는 잊어야 한다.
실제로도, 한순간 잊었었고.
이브 로웰린이 제 옷깃을 붙잡으며 아프다고 울먹이던 순간, 저에게 더 중요한 것은 카타리나가 가져온 소식이었다.
10년을 넘게 찾아온 이보네의 종적이 끊긴 지점. 그리고 같은 자리에서 발견된 살인 마법의 흔적.
어쩌면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이보네를 해쳤을지도 모른단 생각 때문에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제가 폐하의 아이를 임신한 것으로 알려요. 그러면 벤야민도 어쩔 수 없이 우리를 그곳에 출입시켜 줄 거예요.]
[고작 그런 이유로?]
[페르디난트의 전통이니까요. 마르가라테 황후도 에른스트 황자를 가진 뒤 그곳을 찾았었고요.]
[…….]
퍽 내키는 제안은 아니었으나, 이보네의 흔적을 좇기 위한 일이었다.
하여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부러 요란하게 애정 행각을 벌였다.
임신이라는 말도 안 되는 거짓으로 페르디난트의 눈을 가리고 그곳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곳에서 어떤 위험천만한 흑마법이 이루어졌는지 확인해야 했다.
신관은 필요 없었다. 제가 갖고 있는 신성력이 어지간한 신관들의 것보다 훨씬 더 나을 테니까.
그곳에 가면, 뭐든 알게 되지 않을까.
이보네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래, 제게 중요한 것은 오직 이보네뿐이었다.
이브 로웰린, 그 불쾌한 여자에 대한 생각은 이만 거두는 게 옳았다.
어떻게 해야 이보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을지 골몰하기에도 아까운 시간이었다.
게다가 그 여자는…….
[어찌 되었든 조심하세요. 흑마법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
흑마법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어쩌면 이보네를 해친 이들과도 깊은 연관이 있을지 모르는 수상한 여자였다. 마땅히 경계하고 멀리해야 할 여자였다.
“그런데 왜 자꾸…… 그 여자가 생각나는 거지.”
테오도르는 불쾌한 듯 중얼거렸다.
자꾸만 그 여자에게 신경이 쓰이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저를 담고 애처로이 휘던 그 예쁜 눈동자 때문에?
혹은 저를 움켜쥐던 뜨겁고 연약한 손길 때문에?
그도 아니면 금방이라도 바스러질 것만 같은 목소리로 저를 부르던 그 순간의 기이한 공기 때문에?
어찌 되었든 그 가냘픈 애원을 테오도르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이유는 없었다.
게다가 이보네의 실종과 관련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자에게 느끼는 이 양가적인 감정은…… 이보네에 대한 배반이 아닌가.
그러니 제가 그 여자에게 느껴야 하는 것은 이 미약한 죄의식이 아니라 온당한 경각심과 거부감이어야 했다.
“그래. 내가 그 여자에게 죄책감을 느낄 필요 또한 없어.”
테오도르는 구태여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마치 스스로를 설득하듯이.
* * *
생각을 차분히 정리한 나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꼽아 보았다.
‘일단은 테오도르를 피해야 해.’
내가 자신의 사생아를 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그의 반응을 짐작할 수 없었으나, 결코 평탄하지 않으리란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카타리나야 얼마 전에 겁을 주었으니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지만, 테오도르는 달랐다.
아직 세간에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테오도르는 강한 신성력의 소유자이다. 그리고 동시에 알브레히트의 가장 큰 권력을 틀어쥔 황제였다.
온전히 내 힘만으로 그를 피할 수 있을까?
‘아니, 그건 불가능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의 나는 검기도 함부로 방출하지 못하고, 그의 말 한마디에도 언제든 목이 잘릴 수 있는 그런 처지였다.
나를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당장 생각나는 건 두 사람이었다.
[이보네……. 많이 힘들면 나랑 같이 나갈래?]
[너를 힘들게 하는 게 있다면 내가 도울게. 나를 이용해도 좋아.]
벤야민과 에른스트. 상냥한 나의 두 친구들.
그렇지만 에른스트는 테오도르에 비해 힘이 약했다. 그를 따라 황궁을 나갔다가 혹여나 테오도르가 내 임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를 장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페르디난트의 가주인 벤야민이라면, 나를 도와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선택지가 정해진 후, 나는 곧바로 황궁의 담을 넘어 벤야민을 찾아갔다.
“도와줘, 벤야민.”
밤늦은 시각이었지만, 그는 갑작스럽게 방문한 나를 향해 느른한 눈웃음을 지었다.
“말해, 뭐든.”
“황궁을 떠날 수 있게 도와줘.”
나는 그의 옷깃을 붙잡으며 대뜸 말했다.
“황궁을?”
“응. 그리고…….”
단순히 황궁을 떠나는 것만으로는 안심이 되지 않았다.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사라진 나를 다시 찾을 생각도 하지 못하도록, 약간의 장치가 필요했다.
“죽음을 위장해 줘.”
“그래.”
벤야민은 이유도 묻지 않고 흔쾌히 답했다.
그런 그가 고마워서, 나는 카타리나의 임신 소식을 들은 뒤 처음으로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우리는 몇 가지 이야기를 더 나누며 세밀한 계획을 짰다.
내가 떠나는 날은 카타리나의 약혼식 직전이 될 것이다.
어느덧 동이 틀 시각이 가까워져 갔다.
이대로 황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욕구가 불쑥 치솟았으나, 그럴 수 없었다.
완벽한 죽음을 위장하기 위해 다시 황궁으로 돌아와야 했다.
습관처럼 발걸음이 테오도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딜 다녀온 거야, 이브 경?”
“응, 그냥. 폐하께선?”
“집무실에.”
“집무실? 아직 동이 트지도 않았는데, 벌써 일어나신 거야?”
“밤을 새우신 것 같아. 너도 들었지? 카타리나 양의 임신 소식. 그것 때문에 들뜨셨나 봐.”
“…….”
주절주절 떠드는 동료 기사의 이야기를 뒤로하고, 나는 테오도르의 집무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황궁을 뛰쳐나가기 직전에 본 것과 전혀 다를 바 없는 모습을 하고 있던 테오도르가 나를 힐끔 쳐다보며 물었다.
“의사는 찾아갔나?”
“……?”
대뜸 묻는 말에 영문을 몰라 하자 그가 헛기침을 하며 덧붙였다.
“몸이 여전히 안 좋던 것 같은데.”
“아…….”
그러고 보니 낮에도 그의 앞에서 쓰러질 뻔했었다. 하루 종일 정신이 없어 잊고 있던 것이 다시 생각났다.
내가 아픈데도, 아프다고 붙잡는데도 카타리나에게 가던 그의 뒷모습이…….
“의사도 찾아가지 않고 어딜 다녀온 거지?”
그가 내게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냥, 잠시…….”
나는 말끝을 흐리며 정확한 답을 피했다.
그에게 널 속이고 도망치기 위해 벤야민과 작당을 하러 갔다고 말해 줄 순 없었으니까.
“이브 로웰린.”
이때, 테오도르가 문득 내게 한 발짝 다가서더니 내 손목을 낚아챘다.
홰액-!
순간 멈칫하려는 찰나, 그가 내 손목에 코끝을 파묻으며 냄새를 맡았다.
“……페르디난트의 냄새가 나는군.”
내 손목을 움켜쥔 테오도르의 손아귀에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갔다.
“설마,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만나고 온 건가?”
하여튼, 눈치는 참 빠르다.
“네.”
순순히 대답하자 테오도르가 화를 짓씹어 참는 듯한 목소리로 사납게 물었다.
“이 시간에, 내게 말도 없이 그 남자를 만나고 왔다고?”
나는 그가 왜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는 나를 보기만 하면 화를 냈다. 나는 그게 참 서럽고, 이해가 가질 않았다.
“왜 화를 내세요?”
“…….”
그러자 그가 어금니를 바드득 갈며 나를 노려보았다.
예의 그 경멸 어린 눈동자와 비슷하였으나, 무언가 조금 다른 빛깔이 머물러 있었다.
“한 가지만 해. 나를 좋아하든지,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만나든지.”
“네?”
“더럽게 이리저리 몸 굴리고 다니지 말고.”
나는 내게 독설을 내뱉는 테오도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더 이상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될 수 없는 남자의 얼굴은, 이 와중에도 참 더럽게 잘생겼다.
“폐하.”
그가 왜 갑자기 벤야민의 이름을 꺼내며 화를 내는지 모르겠지만, 이젠 확실히 해야 할 때였다.
“저는 폐하 안 좋아합니다.”
“넌 정조도 없…… 뭐?”
그는 계속해서 내게 쏘아붙이다가 뒤늦게 멈칫했다.
“저는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요.”
이내 그의 얼굴이 더욱 험악하게 변해 갔다.
“허튼소리 지껄이지 마. 그딴 더러운 눈으로 나를 봤으면서, 이제 와서 뭐? 나를 안 좋아해?”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본 적도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담담하게 사실을 답했다.
“우스운 소리 하지 마. 너 분명…….”
“네, 폐하를 좋아하긴 했지요.”
멈칫.
이번에야말로 정말 굳어 버린 테오도르가 내내 쥐고 있던 내 손목을 놓쳤다.
“조금 많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좋아했습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것처럼 더러운 감정은 아니었어요.”
“…….”
“당신의 경멸이 서러울 만큼, 애틋하고 소중한 감정이었습니다. 폐하를, 참 많이 좋아했어요. 정말 많이 사랑했어요.”
“…….”
감정이 실리지 않은 나의 고백에 그의 입술이 느리게 벌어졌다.
“그런데 이제는 아닙니다.”
내 고백이 시작된 이후로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나를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그제야 거칠어진 목소리를 입 밖으로 꺼내었다.
“아니……라니?”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게, 무슨…….”
테오도르는 꼭 고장 난 사람처럼 말을 잘하지 못했다. 무언가에 충격을 받은 사람 같기도 했다.
왜 그런 반응이지?
내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인가?
‘하긴, 제 잘난 맛에 사는 남자니까…….’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테오도르는 상대가 그렇게 끔찍하게 싫어하는 이브 로웰린이라 할지라도, 자신을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
참 테오도르답다는 생각이 들며, 피식 웃음이 나왔다.
“밤을 새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조금이나마 눈을 붙이는 게 좋지 않으시겠습니까? 사흘, 아니 이틀 뒤면 약혼식도 있으신 분께서.”
그의 건강을 걱정하며 무심하게 고하는데, 그는 다른 것을 지적했다.
“……왜 웃지?”
“네?”
내가 웃었나?
머쓱해져 나도 모르게 입가를 만져 보았다. 그러자 내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가 있는 게 느껴졌다.
뭐, 웃었나 보다.
그렇지만 고귀하신 황제께서 내 웃는 얼굴을 보기 싫다니, 다시 표정을 굳혀 주었다.
“하!”
돌연 테오도르가 차가운 헛웃음을 터뜨렸다.
“네 사랑은 정말 값싼 애정인가 보군.”
그러더니 공연히 내 사랑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내가 좋다고 달라붙더니, 다른 여자와 약혼한다는 말에 곧바로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찾아간 건가? 그러고는 이제, 꼴 보기 싫으니까 썩 침대 구석으로 꺼져 버리라고?”
그의 과대한 해석에 어이가 없어 실소가 나왔다.
“왜 그렇게 해석하세요?”
“네가 갑자기 이상한 소리를 하잖아. 이젠,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아니, 카타리나가 제 아이를 가졌다며?
그런데도 내가 자신을 계속 좋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가?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지만, 나는 그런 감정을 최대한 꾹꾹 누르며 물었다.
“제가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 않는 게 폐하께도, 카타리나 양에게도 좋은 거 아닙니까?”
“어리석긴. 내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다른 남자가 생긴다면, 난 그 남자를 죽여서라도 내 사랑을 쟁취할 거야.”
그 말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죽여요?”
“그래.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테오도르는 장난기 하나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니까 넌 날 사랑한 게 아니야.”
그는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돌연 나를 내쫓고 문을 쾅 닫았다.
복도에 남겨진 나는 닫힌 문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뭐야, 진짜……. 인성 파탄자…… 또라이 새끼…….”
왠지 카타리나가 불쌍하게 여겨졌다.
* * *
쾅!
문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동시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참을 수 없이 분출했다.
“저건 사랑이 아니야.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흔들릴 필요도 없어.”
기분이 나쁘고, 불쾌했다.
“나를 정말 좋아했다면, 응당 카타리나 페르디난트를 제거하고 내 옆에 있어야지.”
그래, 자신이라면 분명 그리했을 것이다. 만약 이보네에게 다른 남자가 생겼더라면, 제일 먼저 그 남자를 해쳤을 것이다.
어린 날, 그녀가 알지 못하게 에른스트를 겁주어 쫓아 버렸던 것처럼.
그러니까 자신을 사랑했다고 주장하는 이브 로웰린의 말은 거짓인 것이다.
그녀의 사랑은, 그만큼이나 빈궁하고 조악한 것이었다.
그딴 여자의 말에 이렇게나 제 마음이 휘둘릴 필요도, 동요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 그딴 게 사랑일 리 없어.”
테오도르는 고개를 주억이며 중얼거렸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무슨 작당을 벌여 놓고서, 내 옆에 붙어 있던 핑곗거리를 찾느라 사랑이라는 이유를 갖다 붙인 걸 테지. 가증스럽게도.”
……하지만 정말 다른 꿍꿍이를 가진 거였더라면, 날 보던 그 눈빛은 뭘까.
분명, 날 좋아하던 그 눈빛은…….
지금은 더 이상 보여 주지 않는 눈빛은…….
테오도르는 그 눈동자를 다시 한번만 더 보고 싶었다.
이따금 애틋하고, 서럽기도 하였던, 이보네를 닮은 그 아름다운 녹색 눈동자.
그 눈동자 또한 거짓이었던 걸까?
나를 현혹하기 위한?
이브 로웰린이 꿍꿍이를 숨기고 제게 접근했다 생각하니 기분이 나빴다.
차라리 자신을 좋아해서 곁을 맴돌았다고 믿는 게 더 기꺼울 만큼.
“망할 여자 같으니.”
그렇게 한참 씩씩거리던 테오도르는 조금의 시간이 더 지난 뒤에야 마침내 평온을 되찾았다.
“동요할 필요 없어. 그 여자가 정말 많이 수상하다는 걸 알았으니 옆에 두고 지켜보면 되는 거야.”
그래. 벤야민 페르디난트와 더 이상 만나지 못하게, 매일 같이 제 옆에 찰싹 붙여둘 것이다.
“되도록 황궁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단속을 해야겠군.”
벤야민과 만나지 못하게 하는 데에 딱히 다른 의도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두 사람이 만나 못된 작당이라도 하면 안 되니까. 그러니까…….
“내 옆에 있다 보면 그 여자도 보다 확실히 알게 되겠지. 벤야민 페르디난트 같은 쭉정이에 비해 내가 얼마나 괜찮은 남자인지.”
구겨진 얼굴을 편 그는 못 잔 수면 시간을 보충하는 대신 시종을 불러 따뜻한 차를 내오게 했다.
창가에 서서 차츰 밝아지는 하늘을 감상하며 찻물을 음미하던 그는 문득 드는 의문에 찻잔에서 입술을 뗐다.
“그런데 왜…… 나는 벤야민 페르디난트를 죽여 버리고 싶을까?”
반쯤 기울어진 찻잔에서 찻물이 흘러내려 그의 구두코를 적셨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 채 찻잔을 더욱 기울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끝내 들고 있던 찻잔마저 바닥으로 떨어뜨린 그가 스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새벽이슬을 맞으며 돌아온 이브 로웰린에게서는 분명 그 남자의 냄새가 났다.
그 야심한 시각에, 마땅히 자신을 호위해야 하는 임무조차 제쳐 두고 나가서 그자와 밤새 뭘 한 걸까?
몸도 좋지 않았으면서, 그자를 만나러 간 걸까?
차츰 그의 눈가가 가늘게 일그러졌다.
“하…….”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창가에서 돌아섰다.
“대체 내가 왜 그딴 여자를 신경 쓰는 거야.”
이보네의 흔적을 찾기에도 모자랄 시간이었다.
역시 그 얼굴 탓이다.
빌어먹게도 이보네를 떠올리게 하는 그 얼굴 때문에, 이다지도 그 여자를 신경 쓰고 마는 것이다.
그 여자는 이보네가 아니란 걸 알면서도.
“젠장.”
테오도르는 욕설을 짓씹어 삼켰다.
* * *
떠나기 위한 준비가 시작되었다.
나는 겉보기에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제 테오도르의 약혼식은 이틀이 남았다.
내 손으로 카타리나를 호위할 생각은 없으므로, 그 이전에 황궁을 뜰 참이다.
이왕이면 재수 없는 카타리나의 약혼식도 조금 망쳐주고.
“괜찮아, 아기야.”
나는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배 속의 아기에게 속삭였다.
“다 괜찮을 거야.”
종이와 만년필을 꺼내 테오도르를 향해 마지막 편지를 작성했다. 이것은 나의 유서가 될 터이다.
<안녕히 계세요, 폐하.
폐하의 심기만 어지럽히는 X같은 XX 새끼는 이만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약혼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부디 유병장수하시길.>
내내 하고 싶었던 말들이 예쁘게 쓰여진 것을 보니 마음이 조금 후련해졌다.
이어서 사직서를 쓴 뒤, 유서는 책상 서랍 안쪽에 숨겨 두었다.
나는 사직서만 들고서 아르민 마이어를 찾아갔다.
“마이어 공.”
“무슨 일입니까, 이브 경?”
마침 복도에 있던 그를 불러 세워 사직서를 건넸다.
“사직서입니다.”
“네, 사직서를 가져오셨……. 네? 사직서요?”
아르민이 세상을 모두 잃은 듯한 표정으로 외쳤다.
“아니, 이브 경! 왜 갑자기……!”
당황한 그가 내 손을 붙들고 절망스럽게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 소란에 다른 기사들이 모여들었다.
“뭐? 이브 경이 떠난다고?”
“안 돼, 이브 경! 그대가 떠나면 우린 어떡해!”
“맞아. 폐하의 성질을 감당할 수 있는 건 그대밖에 없는걸.”
“최근에 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폐하가 그대를 박해했나?”
간절한 시선들이 일제히 나를 향했지만, 나는 가뿐하게 그 눈빛을 무시하며 답했다.
“그냥, 몸이 안 좋아서. 다들 알잖아, 최근에 나 쓰러진 거.”
“그런 거라면 차라리 폐하께 휴가를 받아 내서…….”
이때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틈을 비집고 차가운 목소리 한 자락이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아, 폐하…….”
테오도르였다.
“그게…….”
모두가 입을 꾹 다물고 테오도르를 원망의 시선으로 노려보았다.
누구도 대답을 않자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꿈틀 치솟았다.
그런 그의 기색을 재빠르게 알아챈 아르민이 앞으로 나서며 대답했다.
“이브 로웰린 경이 몸이 안 좋아서 폐하의 호위직을 그만두겠다고 합니다.”
“뭐?”
테오도르의 표정이 사아악 굳었다.
“그러니 폐하께서 어서 이브 경을 좀 말려 주십시오.”
“네, 이브 경은 저희 기사단에 없어서는 안 되는 귀한 인재가 아닙니까, 하하.”
“마침 폐하께도 내일 경사가 있으시니, 이참에 휴가도 좀 내어 주시고…….”
주위에서 나를 비호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굳이 그럴 필욘 없는데.’ 하고 생각할 때였다.
“사직은 불가하다.”
아르민의 손에서 사직서를 낚아채 간 테오도르가 딱 잘라 말했다.
그 단호한 거절에 발끈한 내가 물었다.
“어째서요?”
“너는 카타리나 양의 호위를 맡기로 하지 않았나. 설마 내 약혼식을 망칠 셈인가?”
“하하, 폐하. 일단 내일모레 카타리나 양의 호위는 벤트 경이 맡고, 이브 경에게는 휴식을 조금…….”
“번복은 없다. 내 아이를 가진 여자가 이브 로웰린을 호위로 원해. 그렇다면 응당 그에 따라야지.”
테오도르는 몸이 안 좋다는 나에게 자신의 약혼녀의 호위를 부득불 밀어붙였다.
마땅한 이유도 없이, 그저 그 여자가 나를 지목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모두 그를 쓰레기 보듯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시선 중 하나는 바로 내 것이었다.
‘내가 몸이 안 좋다는데도 카타리나만 신경 쓰여?’
심지어 그는 내가 그를 좋아했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그러니 그 말이 내게 상처가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러했다.
내가 그에게 마음을 고백했다고 해서 그가 날 좋아해 주어야 한다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사람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공감 능력이라는 게 있지 않은가.
“쓰레기…….”
나는 아랫입술을 꾸욱 깨물며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주위가 조용했던 탓에 그 소리가 모두에게 들렸나 보다. 나를 둘러싸던 이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테오도르가 험악하게 한쪽 눈썹을 치켜뜬 순간 모두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사직은 불가능해.”
테오도르는 사직서를 쭉쭉 찢어서 버렸다.
“농땡이 부릴 생각 말고 일이나 해라. 따라와.”
어차피 쉽게 사직서가 받아들여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에, 짧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뒤를 쫓았다.
“테오!”
저 멀리 마차에서 내린 카타리나가 환하게 웃으며 뛰어와 그의 품에 안겨 들었다.
“저런, 조심히 와야지, 나의 피앙세. 그러다 배 속의 아기가 놀라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테오도르는 다정하게 그녀를 끌어안으며, 그녀의 정수리에 입을 맞추었다.
나를 볼 때와는 달리 웃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우리 아기가 어서 빨리 아빠를 보고 싶다고 보채는걸요.”
테오도르의 팔에 매달려 애교를 부리는 카타리나는 몹시 행복해 보였다.
그녀를 향해 허리를 숙인 테오도르가 카타리나의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나긋한 목소리로 아기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쳐다보며 힐끔 내 아랫배를 보았다. 하필이면 내 배 속에서 생명을 틔우고 만, 사생아밖에 될 수 없는 내 아이가 가엾었다.
‘괜찮아, 아기야. 너는 엄마가 많이 사랑해 줄게.’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게 내 아랫배를 쓰다듬으며 울컥 올라오는 감정을 삼켰다.
속으로 삼켜 낸 말이 아기에게 전해질지는 모르겠지만, 온 마음을 다해 그렇게 다짐했다.
‘비록 아버지는 없어도…… 내가 그만큼 더 많이 사랑하고 아껴 줄게.’
그러니 내 아기는 행복할 것이다. 저 인성 파탄자들의 아기보다도, 더.
‘생각해 봐. 태어났는데 아버지가 테오도르고 어머니가 카타리나라니. 정말 끔찍하잖아?’
내가 그들의 아기로 태어난다면, 분명 태어나자마자 죽고 싶어질 것이다.
‘분명 아기도 내 아기로 태어나서 더 기쁠 거야.’
나는 애써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며 기운을 냈다.
그사이 마차에서 내려 천천히 걸어온 벤야민이 테오도르에게 인사를 했다.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그러고는 테오도르의 뒤편에 있던 나를 향해 슬쩍 눈인사를 건넸다. 내가 그와 시선을 마주치며 화답하려는 때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그대가 온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테오도르가 삐딱한 목소리로 벤야민에게 시비를 걸었다.
“약혼식 준비를 위해 페르디난트의 가주로서 함께 왔습니다.”
“네가 없어도 충분해.”
“하지만 카타리나가 폐하의 아이도 가졌으니까요. 혼자 보내기엔 걱정이 되어서요.”
“…….”
아무래도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와 둘만의 시간을 기대했으나 벤야민이 함께 온 것으로 불쾌해진 모양이다.
이제는 꼭 아주 오래전처럼 느껴지는 시간 속에서, 그는 나와의 시간을 방해받을 때면 늘 저런 반응을 보이곤 했었다.
테오도르는 기분 나쁜 표정을 짓더니 돌연 나를 홰액 노려보았다.
“이브 로웰린. 주방을 찾아가 오늘 오찬에 벤야민 페르디난트도 합석할 것이라 알려라.”
갑자기 불똥이 나에게 튀었다. 굳이 나를 콕 집어 보낼 일이 아니었는데도 나를 지목한 걸 보니, 괜한 심술일 게 뻔했다.
그러나 나는 당장 이 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에 기뻐하며 몸을 돌렸다.
* * *
벤야민은 성큼 다가온 약혼식과 관련하여 테오도르와 함께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던 중 슬쩍 자리를 떴다.
그러고는 곧바로 이보네를 찾아갔다.
전날 페르디난트를 찾아온 그녀에게 술식을 새겨 두었기에 곧바로 그녀가 있는 곳으로 이동이 가능했다.
벤야민이 도착한 곳은 황궁의 정원, 커다란 나무 앞이었다.
“이브.”
나른한 목소리로 부르자 나무 위에서 눈을 감고 있던 그녀가 스르륵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왔네, 벤야민.”
그녀가 나무 아래로 폴짝 뛰어내렸다.
“황제와는, 어떻게 됐어?”
“사직서를 내려고 했는데 거부당했어.”
“역시 조용히 떠나는 건 불가능하겠네.”
“응. 그렇다면 역시 방법은…….”
벤야민의 오늘 방문은 지난밤에 세운 계획을 실천에 옮기기 위함이었다.
예상했던 대로, 테오도르 황제는 이보네를 놓지 않으려 했다. 그녀를 새까맣게 잊은 주제에, 참 우스운 집착이었다.
벤야민은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이보네의 손목을 힐긋 보았다.
술식을 새겨 놓은 손목에서 자신의 향이 나는 것 같았다. 벤야민은 그 사실이 너무나 기껍고 좋았다.
“네가 저택에 돌아오면…….”
벤야민의 손이 이브의 머리카락을 스윽 건드렸다.
“저택을 온통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꾸밀 거야. 정원에는 아름드리나무를 심고, 늦은 시간에도 네가 홀로 산책할 수 있도록 이곳저곳에 마력으로 주위를 밝히는 등불을 달 거야. 너는 사색을 좋아하는 편이니까 네가 산책을 할 땐 누구도 방해하지 못하게끔…….”
살랑살랑 흔들리던 은색 머리카락이 그의 손가락에 돌돌 감겼다. 벤야민은 그 머리카락 위로 코끝을 묻었다.
“그러니까, 이브. 나는 네가 그곳을 조금 더 편하게 생각했으면 좋겠어. 우리의 보금자리로…….”
“…….”
그녀가 무언가 대답을 하고자 할 때였다.
“이브 로웰린.”
불쑥 끼어든 차가운 목소리에 이보네와 벤야민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지금쯤 카타리나와 함께 있어야 할 테오도르가 두 사람을 흉흉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주방에, 찾아가라고 하지 않았나.”
테오도르가 어금니를 악물며 음산한 목소리로 물었다.
“네, 다녀왔습니다. 그러다 마침 벤야민 님을 마주쳐서요.”
“우연히, 마주친 거라고?”
이보네의 답에 테오도르는 코웃음을 쳤다.
“장난하나.”
두 사람이 같은 공간에 있는 게 거슬려서 이브 로웰린을 멀리 치워 버린 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벤야민이 자리를 뜨자, 테오도르는 그 순간부터 묘한 불안감에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하여 혹시나 싶은 마음으로 찾아왔건만…….
두 사람이 발견된 곳은 심부름을 보낸 곳과 한참 떨어져 있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우연히 마주쳤다기엔 정말 말도 안 되는 장소였다.
[벤야민이 그 애를 특별히 아꼈지요.]
[저는 정말로 벤야민이 그 출신 모를 여자애를 정부로 앉힐까 봐 걱정했거든요.]
[제가 봤어요. 이브 로웰린이 매일 밤 벤야민의 침실에서 나오는 걸.]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두 사람이 밀회를 벌여 놓고 자신을 속이려 드는 게 분명했다.
[무려 벤야민의 숨은 연인이니…….]
직접 눈으로 보고 확인한 것은 귀로 듣고 상상한 것보다 훨씬 더 최악이었다.
게다가 자신을 쳐다보는 이브 로웰린의 눈동자는 왜 이렇게 담담한지.
[더 이상 폐하를 좋아하지도 않고,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더러운 눈으로 폐하를 보지도 않을 거니까 걱정하지 마십시오.]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가?
이제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진짜로?
테오도르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으나,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이전과 달리 자신을 향한 애틋함이 사라진 그녀의 눈동자.
그리고 무엇보다…… 조금 전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을 그리던 벤야민의 말을 듣고 말았기에.
그 얼토당토않은 말을 잠잠히 경청하던 그녀를 보고 말았기에.
자신을 좋아했다면서, 이렇게 쉽게 포기하고 만 이브 로웰린에게 화가 났다.
그래서 테오도르는 사나운 목소리로 그녀를 몰아붙였다.
“뻔한 거짓말은 집어치워. 내가 이딴 허술한 개소리에 넘어갈 것 같나? 둘이서 지금, 몰래 만난 거잖아.”
“…….”
이보네는 잠시간 대답을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이내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우연히 마주친 게 아니라, 이곳에서 벤야민 님과 밀회를 나눈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둘이서 내 눈을 피해서……!”
“그런데, 그럼 안 되나요?”
“…….”
이번에는 테오도르의 입이 다물렸다.
테오도르는 순간 멍해져서 말을 잃고 말았다.
“벤야민 님과 대화를 나누는 게 죄를 짓는 것도 아니고 법을 어기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녀의 말이 옳았다. 안 될 것은 없었다.
“그러니 계속 이야기를 나눌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 주시겠어요?”
그녀의 대답이 너무나 논리적이어서, 테오도르는 더 화가 났다. 그래서 그는 유치하게 성질을 냈다.
“이 황궁이 모두 내 것인데, 내가 왜 비켜야 하지?”
“그럼 저희가 비키지요.”
이번에는 벤야민이 그 특유의 나른한 목소리로 답하며, 이브의 어깨를 슬며시 감싸 쥐었다.
그녀의 어깨에 닿는 벤야민의 손을 보자, 테오도르의 가슴 안쪽에서 불길이 화르르 치솟았다.
“감히, 근무 시간 도중에 어딜 가려고…….”
테오도르가 결코 보내 주지 않겠다는 의지로 그들을 막아서며 스산하게 중얼거릴 때였다.
“테오!”
멀리서 카타리나의 목소리가 눈치 없이 들려왔다.
“약혼녀분께서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폐하. 어서 가 보셔야지요.”
이브가 어서 카타리나에게 가 보라고 테오도르를 재촉했다.
이에 벤야민이 피식 웃었다.
테오도르는 분명 아무런 의미도 없을 그 웃음이 이상하게도 자신을 비웃는 것처럼만 느껴져 불쾌했다.
두 사람은 테오도르를 두고 휘리릭 떠나 버렸다.
“폐하, 갑자기 그렇게 무서운 얼굴을 하고서 사라지시면 사람들이 우리 사이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던 테오도르는 괜히 뒤늦게 나타난 카타리나에게 성질을 버럭 냈다.
“정말로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꿍꿍이가 있어서 이브 로웰린을 내게 보낸 게 맞나?”
“네?”
그가 화를 내는 영문을 알지 못하는 카타리나는 두 눈을 끔뻑이며 반문했다.
“꿍꿍이가 있어서 보낸 거라면, 왜 다시 데려가려고…… 아니야, 됐어.”
테오도르는 홱 몸을 돌리며 반대편으로 걸었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 * *
테오도르는 한동안 계속 생각에 잠겼다.
카타리나는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 좋지 않은 의도가 있어 제게 이브 로웰린을 보낸 것이라 주장했다.
썩 믿기지 않았으나, 그녀에게서 발견된 흑마법의 흔적이 이를 뒷받침하였다.
그렇지만 조금 전 보았던 벤야민은…… 어떻게든 그녀를 다시 데려가고 싶어 하였다. 꼭 설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왜지? 꿍꿍이가 있어 내게 보낸 거라면 굳이 설득까지 해 가며 그녀를 데려가는 게 앞뒤가 안 맞지 않나?
테오도르는 문가에 딱딱하게 서 있는 이브 로웰린을 흘깃 쳐다보았다.
카타리나가 돌아간 뒤에야, 다시 나타난 그녀는 내내 저렇게 경직된 채로 문가에 서 있었다.
제가 없는 동안 그 남자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그 남자가 또 보금자리 운운하며 그녀를 꼬여내려 했을까?
조금 전의 그녀는 그 남자에게 무슨 대답을 하려 했던 걸까?
“그 남자는 그다지 좋은 남자가 아닌 것 같군.”
테오도르는 불쑥 벤야민의 흉을 보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말이야.”
어느 정도 근거 있는 주장이었다. 자신의 꿍꿍이를 위해 연인을 황궁으로 보낸 남자가 아닌가.
“네.”
그러나 이 건방진 호위는 그녀를 위한 조언에도 불구하고 몹시 무심하고 짤막하게 대답할 뿐이었다.
제 말은 들은 척도 안 하는 이보네의 모습에 테오도르는 화가 났다.
“설마 사직을 한다는 것도 그놈이 종용한 건 아니겠지?”
생각 없이 튀어나온 물음이었으나, 스스로 여기기에도 꽤나 신빙성 있는 추측이었다.
그래, 이브 로웰린은 나를 좋아하잖아. 이제는 좋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만, 분명 나를 좋아하는 게 확실한 눈으로 보았잖아.
어쩌면 벤야민은 자신의 꿍꿍이를 완성하기 위해 저 여자를 보냈다가, 저 여자가 나를 좋아하게 된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걸지도 몰라.
그래서 이제 와 그녀를 다시 데려가려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자 내내 거슬리던 퍼즐 조각이 온전히 딱 맞아떨어지는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이브 로웰린은 유독 딱딱하게 느껴지는 말투로 답했다.
그런 그녀에게서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냄새가 더욱 짙어져 있었다.
정확히는 체향이 아닌 마력의 기운이었다. 어느 정도 경지에 다다른 이들은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손목 부근에서 은은하게 느껴지던 벤야민의 마력 냄새가, 이제는 그녀의 온몸에서 진동을 하고 있었다.
마치 그자와 한 몸이라도 된 것 같은 짙은 냄새에 테오도르는 속이 뒤틀렸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저만큼이나 냄새가 짙어진 거지?’
테오도르가 알기로 이만큼이나 향이 짙어지려면…….
‘아니. 아닐 거야.’
그는 애써 떠오른 가정을 지워 냈다. 생각만으로도 불쾌했다.
‘그저 긴 대화라도 나눈 거겠지. 어쩌면 그 새끼가 일부러 나를 자극하려고 일부러 냄새를 남겼을지도 모르고.’
테오도르는 더 이상 자신을 쳐다보지 않는 이브의 눈동자를 쳐다보았다.
저 눈동자가 다른 남자를 담았다고 생각하니 너무 화가 났다.
문득 그는 그녀의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눈, 코, 입…… 이목구비가 모두 참 예뻤다. 당연했다. 이보네를 닮았으니까.
‘아니야. 이보네가 자랐더라면 분명 더 예뻤을 거야.’
그는 잠시간 제 오랜 기억 속 어린 이보네를 떠올려 보았다.
처음 본 순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생길 수 있나’ 하고 감탄했던 그 예쁜 얼굴을…….
‘이보네였다면 틀림없이 저 여자보다 훨씬 더…….’
그러나 막상 그의 상상 속에서 그려 본 이보네의 자란 모습은, 빌어먹게도 저 여자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벌떡!
테오도르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미쳐 버린 게 아닐까?
페르디난트가 나에게 술법이라도 건 건가?
그게 아니라면 대체 이 감정은 뭐지?
그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할 수 없어 이브 로웰린을 그 안에 남겨 둔 채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 * *
나는 나무 위에 앉아 벤야민과 함께 불 켜진 테오도르의 침실을 보았다.
나도 이제 그의 마음을 모르겠다.
화를 냈다가, 괴롭혔다가, 경멸했다가, 집착했다가, 또 화를 냈다가…….
‘애초에 정상인이 또라이를 이해하려고 하는 게 잘못이지, 뭐.’
어차피 떠나고 나면 두 번 다시 볼 일 없는 이였다.
그래도 오늘 카타리나가 방문한 덕분에 벤야민을 만나 남은 계획을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나의 사직서를 수리할 생각이 없었고, 나는 그를 피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곳으로 떠날 생각이었다. 완벽한 죽음과 함께.
역시 누가 뭐라 해도 눈앞에서 죽는 게 가장 확실하지 않겠나.
물론 테오도르의 눈을 속이는 건 어려울 테니 다른 사람들의 눈앞에서 죽음을 위장할 것이다.
한편으론 오래전 이보네 체르니시아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던 그에게 다시 한번 제 죽음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까닭도 있었다.
비록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와 달리 이 인성이 파탄 난 기억 잃은 테오도르는 내 죽음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겠지만, 그래도…….
* * *
테오도르와 카타리나의 약혼식 하루 전날, 황궁은 축제의 분위기였다.
나는 마지막 인사를 위해 에른스트를 찾아갔다. 미안하지만 에른스트도 내가 속여야 할 대상 중 하나였다.
“어? 이보네?”
나를 발견한 에른스트가 놀라 물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는 거야?”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돼?”
“아니, 그게 아니라…… 이상하네…….”
에른스트는 고개를 갸웃하며 중얼거렸다.
“방금 테오도르 형님을 찾아갔는데, 네가 지금쯤 내일 카타리나 양을 호위하는 일로 황궁 밖에 있을 거라고 그래서…….”
나는 에른스트를 빤히 쳐다봤다.
이 거짓말 못 하고 순진한 녀석에게 도주 사실을 알렸다가 혹여나 테오도르의 귀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체르니시아에서 온 연락은 없었어?”
나는 그를 찾아온 목적이 이것인 양 물었다.
“응……. 그런데 이브, 정말 나랑 같이 안 떠날래? 그 허락을 받아 내려고 테오도르 형님을 찾았거든.”
에른스트가 내 아랫배를 힐끔 훔쳐보는 게 느껴졌다.
“황궁에 계속 남아 일을 할 순 없잖아.”
“그래, 네 말이 맞아. 아기는 금방 태어나고 또 자라며 손이 많이 가겠지.”
“그러니까 나랑 같이 나가자.”
고맙게도 그는 더 이상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따위의 쓸데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다.
다만 함께 황궁을 나가자고 재차 제안했다.
“그래서, 폐하의 허락은 받아 냈어?”
“아니…….”
나의 물음에 에른스트가 울적한 목소리로 답하며 고개를 푹 숙였다.
“테오도르 형님은 성격이 더 이상해진 것 같아. 황궁을 나갈 때 너를 데리고 나가고 싶다 했더니, 갑자기 화를 내면서 나를 쫓아내잖아.”
“폐하의 성격이 이상한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잖아.”
“하지만…….”
“폐하가 허락해 주질 않는데 어떻게 여길 나가겠어.”
담담하게 대꾸하자 그가 나보다 더 분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조심해야 하는 때인데, 그 여자의 호위를 하라니. 이건 정말 있을 수 없는 일이야!”
나를 대신해 화를 내주는 그의 모습에 나는 짧은 웃음을 흘렸다.
“왜 웃어?”
“그냥, 고마워서.”
이게 웃을 일이냐며 비난하는 듯한 말투에도 나는 그저 그가 고마웠다.
그리고 동시에 미안했다.
이 눈물 많은 친구는 왠지 내 죽음에 정말 많이 슬퍼할 것 같아서…….
에른스트는 울보니까…….
“에른스트. 내가 없어도 잘 살아야 해.”
나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했다. 그러자 그가 영영 헤어질 사람처럼 말하지 말라며 입술을 삐죽였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인사라는 걸, 에른스트는 알까.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날이었지만 테오도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정무를 보았다.
에른스트에게 혼자만의 작별의 인사를 건넨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기 위해 그를 찾아갔다.
“왜 네가 있는 거지?”
그가 의아하다는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오전에 카타리나 양을 호위하러 황궁을 나선 게 아니었나?”
“그랬는데 잠깐 잊은 게 있어 다시 돌아왔습니다.”
혹여나 그가 나를 쫓아낼까 봐, 나는 황급히 덧붙였다.
“카타리나 양의 호위에는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주무실 때까지만 옆에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덧붙이는 내 얼굴 위로 쓴웃음이 번졌다.
“……오늘은 그 새끼의 냄새가 나지 않는군.”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나한테서 냄새가 나나?
비록 그가 날 기억하지 못하고 경멸한다 하더라도, 마지막 기억은 좋은 모습으로 남기고 싶었다. 안 좋은 냄새라도 나면 큰일이다.
나는 괜히 내 옷깃을 킁킁거려 보았으나, 딱히 무슨 냄새가 나는 건진 잘 모르겠다.
“그래. 내가 일을 마칠 때까지 여기 있도록 해.”
무슨 심경의 변화인지, 그가 퍽 관대한 아량을 베풀며 말했다.
그런데 그는 도무지 일을 끝내지 않았다. 서서히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져 가는데도 불구하고.
이러다 너무 시간이 늦어지면, 황궁을 탈출할 때를 놓칠 것이다.
“내일 중요한 일도 있는데, 오늘은 일찍 주무시는 게 낫지 않을까요?”
조심스럽게 묻자, 그가 괜히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덮었다.
“옆에서 종알거리는 소리에 집중이 하나도 안 되는군.”
“저 때문이 아니라 내일 약혼식을 앞두고 계셔서 마음이 들뜬 탓이겠지요.”
“…….”
테오도르는 나를 지그시 노려보더니 일어나 침실로 향했다.
그를 침실까지 호위하고 이만 돌아서려는 때였다.
“기다려.”
그가 나를 붙잡았다.
“아직 안 잘 거야.”
그는 고집스럽게 말하며 술을 내오라 했다.
시종을 시키면 될 일을 굳이 내게 시키는 심술이 참 그다웠다.
술이 동날 때마다 그것을 새로 내오는데, 양이 퍽 과했다.
“약혼식을 하루 앞둔 남자가 저래도 되는 건가.”
“뭐, 그만큼 기분이 좋으신가 보지.”
복도에 있던 기사들이 혀를 쯧쯧 차며 대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폐하는 원래 술을 좋아하시잖아.”
“폐하가 술을 좋아하신다고?”
처음 듣는 이야기에 되묻자 그들이 내게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아, 이브 경은 몰랐겠네. 하긴, 이브 경이 들어온 이후로 술을 뚝 끊으셨지?”
“폐하는 원래 매일같이 술을 안 마시면 잠들지도 못할 정도였는걸.”
“…….”
나는 다시 만난 테오도르가 술을 마시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그가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있었으나, 그것은 그가 기억을 잃은 뒤였다.
새삼 신기했다.
쓰레기 같은 인성과 더불어 술 마시는 습관까지 꼭꼭 숨길 만큼 나를 정말 많이 사랑해 주었던 기억을 잃기 전의 테오도르를 떠올리자 흐릿한 미소가 입가에 피어났다.
새 술병을 들고 돌아왔는데, 그는 테이블 위에 고개를 박고서 잠들어 있었다.
새근새근 잠이 든 그는 더 이상 나를 노려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그는 또한 나를 사랑하는 눈으로 보지도 않았고, 그 다정한 목소리로 밀어를 속삭여 주지도 않았다.
나는 문득 마음이 아파서 울었다.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는 더 이상 세상에 없잖아.’
그 사실이, 그다지도 서러웠다.
‘있지, 테오. 만약에, 아주 만약에라도 네가 기억을 찾는다면……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고 행복하게 잘 살았으면 좋겠어.’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왜냐하면, 언젠가 기억을 되찾을 테오도르는…… 내가 그토록 사랑했던 바로 그 테오도르일 테니까.
솔직히 말하자면, 그를 떠나고 나서도 나는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릴 적 친구와 다시 만나, 내가 그를 사랑했던 시간은 고작 반년 남짓.
그렇지만 그는, 기억을 되찾을 그는 10년이란 긴 시간 동안 나를 잊지 못해 찾아 헤맸다고 했다.
그 기나긴 시간을 변하지 않는 마음으로 나를 좋아했다고 했다.
그런 그에게 나의 죽음이 되풀이되는 것은 너무 잔인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고, 그렇지만 한편으론 기억을 되찾을 그에게 나의 존재가 얼마나 혼란스러울지 알아서 그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는 이미 카타리나라는 새 연인이 생겼다. 아니, 그녀는 아마 그에게 단순한 연인을 넘어 인생의 동반자가 되리라.
그 여자의 배 속에 그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다. 그의 정당하고 합법적인 가족이 될 아이가.
나의 존재는 결국 그에게 혼란, 그 외엔 무엇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안녕, 테오…….”
내가 이 순간 눈물을 흘리는 건 나를 경멸하고 증오하던 테오도르가 아닌, 내가 한때 사랑했던 착하고 상냥한 어린 날의 비밀 친구 때문이었다.
이제 영영 다시 만날 일 없는, 기억 속에 묻혀 버린 나의 테오.
네가 내게 남긴 흔적은 모두 하나씩 지워 낼 테야. 그러니 너도 나를 잊어. 차라리 영영 잊어버려.
“왜 울고 있지?”
머리 위로 목소리 한 자락이 떨어졌다.
흐릿한 시야를 닦아 내니, 그가 일어나 있었다. 그사이 술이 좀 깼나 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계속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내게 화를 내던 테오도르마저도 소리 없이 우는 내 모습에 멈칫했다.
“몸이 아직 안 좋은 건가?”
“아니요, 이제 괜찮아요.”
그의 걱정이 좋아서 흐리게 웃으며 훌쩍였다. 그러자 그의 표정이 기괴하게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곧바로 독설이 날아왔다.
“질질 짜려거든 나가 울어. 듣기 싫으니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곧 영원히 눈앞에서 사라져 드릴 겁니다.”
그러니 너무 뭐라 하지 마, 테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나는 차마 그에게 전하지 못하는 말을 속으로 삼켜냈다.
모든 걸 놓아 버린 탓인지, 이런 상황에서도 그저 웃음만 피식피식 나왔다.
“사라져?”
그러나 테오도르는 웃지 않았다. 그는 흉흉한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 가려고?”
“아니요.”
순간 그에게 들킨 건가 싶어 뜨끔했으나, 곧바로 태연한 거짓을 답했다.
테오도르는 내 말의 진의라도 파악하듯 두 눈을 가늘게 좁히며 나를 보았다.
“솔직히 말해 봐. 벤야민 페르디난트 때문이 아니라면 갑자기 호위 일은 왜 그만두겠다는 거지? 몸도 괜찮다며?”
“애초에 폐하를 호위하는 일을 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폐하께서 억지로 끌고 오시지만 않았더라면.”
“내가 널 끌고 왔다고?”
그가 믿기지 않는단 표정을 지었다.
“네, 페르디난트에 방문하셨다가 기사로서의 저의 재능을 알아보셨다며 데려오셨잖아요.”
“……이브 로웰린.”
그가 이를 악물며 내게 다가왔다.
“나는 널 볼 때마다 유독 머리가 아파. 기분이 나빠져.”
“네, 네. 그러시겠지요.”
나는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건성으로 대답하지 마.”
그러자 무엇이 그리도 그의 신경을 건드린 건지, 그가 내 턱을 움켜쥐며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의 황금빛 눈동자 안에 갇혀 있는 내 잔상을 발견한 순간, 나는 충동적으로 그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무슨 짓이야!”
그 짧은 입맞춤에도 테오도르는 버럭 화를 냈다.
“폐하도 전에 저한테 멋대로 입을 맞추셨잖아요.”
“너와 내가 같다고 생각하나?”
그가 씩씩거리며 내게 쏘아붙였다.
어쩌면 이 순간이 그에게 보이는 마지막 기억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요. 저와 폐하는 다르지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예쁜 표정으로 활짝 웃었다.
그러자 테오도르가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
“…….”
짧은 정적과 함께 민망함이 밀려왔다.
“그럼 저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편히 주무세요.”
이제는 정말 떠나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돌연 그가 내 손목을 낚아채며 입을 맞춰 왔다.
“……!”
순간 놀라 숨을 홉 참는 사이.
그의 입술이 잠시 떨어지는가 싶더니, 다시 붙었다.
이제껏 내가 그를 알아 온 모든 시간 속에서도 한 번도 없었던 깊고 격한 입맞춤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도 모르게 그의 입맞춤에 호응하고 있었다.
그가 내게 퍼붓는 뜨거운 입맞춤 속에서 나는 등에 닿는 폭신한 것이 침대 시트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를 묵직하게 누르는 무게가 테오도르라는 것도 함께.
굵은 손바닥이 내 얼굴을 스치고, 천천히 아래로 미끄러져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더 아래로 내려와 내가 입은 셔츠의 단추를 툭 건드렸다.
흠칫.
나는 양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안 돼요.”
“돼.”
다시 다가오려는 그를 향해, 나는 필사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는…… 내일 카타리나 양과 약혼을 하잖아요.”
“그래서?”
마치 인성을 말아먹은 듯한 뻔뻔한 답변에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 그럼 안 되는 거잖아요? 어떻게 연인을 두고 다른 사람과…….”
“내일이면 약혼할 남자한테 먼저 입을 맞춘 건 너잖아.”
“저와 폐하는 다르잖아요? 제가 들이대도 폐하는 거절해야 맞잖아요.”
“내가, 왜?”
“아니, 그, 연인 간에 지켜야 할 도리라는 게 있고…….”
“그딴 거 몰라.”
“…….”
와, 얘는 정말…… 안 될 애로구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은 건, 어쩌면…… 체르니시아의 조상신들이 날 도운 걸지도 모른다고.
카타리나가 다시 한번 더 불쌍해졌다.
“저는 폐하의 정부가 되고 싶지 않아요.”
“누가, 너 따위를?”
그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몸을 붙였다.
“하룻밤 여자가 될 생각은 더더욱 없고요.”
이번에는 그의 눈썹이 험악하게 치솟았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에게는 그렇게 쉽게 내어 줬으면서.”
“내어 주다니요? 뭘요?”
“시치미 떼지 마.”
테오도르의 입술이 내 살갗을 훑었다.
“카타리나 양은 폐하의 아이를 가졌어요.”
“아까부터 계속 쓸데없는 소리만 하는군.”
“그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사랑하지.”
테오도르는 무심하게 답하며 내게 집중했다. 그러나 이다음에 흘려보낸 나의 질문이 그를 처음으로 멈추게 했다.
“그럼 저는요?”
“넌…… 내게 아무것도 아니야.”
“아무것도 아닌 여자와 이런 짓도 해요?”
“뭐 어때.”
“만약 제가 폐하의 아이라도 가지게 되면 어떡하시려고.”
“그럴 일은 없어.”
“모르는 거잖아요. 혹시나.”
“…….”
그는 잠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다소 짧지만은 않았던 고민의 끝에 그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만약 정말 그런 일이 생긴다면, 내가 뿌린 씨앗이니 내 손으로 거두어야겠지.”
그의 웃는 얼굴을 본 순간 가슴이 철렁해졌다.
기억을 잃은 뒤의 그는 어지간해서는 내 앞에서 웃지 않았다. 나를 괴롭힐 때를 제외하고는.
“……거둔다니요? 그게 무슨 뜻이에요?”
“글쎄.”
숨을 꿀꺽 참고 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그게 무슨 뜻일 거 같아?”
나는 주춤거리며 그를 피해 뒤로 물러났다.
“설마…….”
차마 그 뒷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너무 끔찍해서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 댔다.
그러니까…… 내 아기를 위협하는 건 카타리나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세상에는 해도 되는 행동과 하면 안 되는 행동이 있어요.”
나도 모르게 아랫배를 감싸며 쏘아붙이자, 그의 두 눈이 가늘게 접혔다.
“나한텐 그런 거 없어.”
테오도르가 그 어느 때보다 예쁘게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더 이상 그를 피할 구석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손에 집히는 대로 아무거나 움켜쥐었다.
“그러니까 괜한 걱정은 집어치우고…….”
퍽-!
그의 고개가 푹 꺾이며 옆으로 쓰러졌다.
내 손에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있던 흰 베개와 함께 은은한 녹색의 빛무리가 감돌고 있었다.
검기를 실은 베개에 머리를 얻어맞은 그는 기절하여 잠든 채였다.
검기를 사용한 반작용인지 가슴 부근에서 아랫배까지 이어진 몸속의 혈관이 강하게 조이는 것 같았다.
“미안, 미안해, 아기야…….”
나는 기절한 테오도르를 내버려 두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내가 사랑했던 내 남자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쓰레기였다.
다시 쓸 수 없는 인성 파탄자, 인간쓰레기.
나는 그대로 황궁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