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기억과 인성의 상관관계
테오도르가 말에서 떨어졌다. 내가 감기 기운에 해롱거리느라 그의 옆을 지키지 못한 사이에.
갑작스러운 낙마 소식에 놀란 나는 사색이 되어 그의 침실로 달려갔다.
“이브 경……!”
“괜찮아? 감기가 심하다고…….”
침실 앞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나를 보고 알은체했다.
“폐하께서, 폐하께서 낙마를 하셨다고 들었어. 괜찮으신 거야?”
숨을 헐떡이며 묻자, 그들이 미묘한 표정으로 서로 눈짓을 했다. 이에 나는 덜컥 불안해졌다.
“왜 그래? 상태가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음, 그게…….”
“크게 다치진 않으셨어. 다행히 금방 일어나기는 하셨는데…….”
이윽고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에 나는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나의 테오가 지금…… 머리를 다쳤다고……?
겉보기엔 멀쩡한데, 조금 이상해졌다고……?
나는 그대로 닫혀 있던 문을 열고 유독 적막하게 느껴지는 침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침대 위에 앉아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그가 보였다.
머리를 다쳐 붕대를 감고 있었지만, 잘생긴 얼굴은 여전했다.
멀쩡하게 앉아 있는 그의 모습에 나는 안도하며 가슴을 쓸었다.
“폐하.”
옆에 있는 그의 보좌관을 의식하여 그렇게 부르자, 내내 고개를 숙인 채 미간을 찌푸리던 그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좁히며 나를 쳐다보았다.
처음 보는 그 표정에 순간 나는 당황했다. 많이 아픈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더욱 걱정이 밀려왔다.
“많이 다치신 건…….”
그때였다.
홰액-!
돌연 내 손목을 움켜쥔 그가 나를 홱 잡아당겼다. 며칠째 감기로 비실거리던 내 몸이 그대로 그에게 끌려갔다.
“폐하, 왜, 왜…….”
나는 당혹스러워 말을 더듬었다.
이곳은 그와 나만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비록 테오도르는 때와 장소를 모르는 짐승이었지만, 언제나 다른 이들의 눈이 없는 곳에서만 한정된 일이었다.
체르니시아의 복권 문제가 매듭지어질 때까지는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지 않다는 내 의견을 그가 존중해 주었기 때문이다.
“넌…….”
그가 나를 보며 황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흔들었다.
* * *
테오도르가 눈을 떴을 때, 가장 먼저 느낀 것은 후두를 강타하는 강한 충격이었다.
“윽…….”
뒤통수뿐만이 아니었다. 온몸이 둔탁한 것으로 아프게 얻어맞은 듯 아렸다.
“폐하, 정신이 드십니까!”
옆에서 들린 다급한 목소리는 보좌관 아르민의 것이었다.
“닥쳐. 머리가 울리잖아.”
한 손으로 이마를 부여잡고 나직한 욕설을 뇌까리는데, 문득 주위가 고요해졌다.
그 기이한 기류에 테오도르가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자, 아르민이 몹시 당황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이에 그는 기분이 더욱 나빠졌다.
“눈구멍이 왜 그 모양이야? 아픈 사람 처음 봐?”
“……죄송합니다, 폐하. 그저 놀라워서.”
그 이상 시선을 마주쳤다가는 눈알을 도려낼 것만 같은 흉흉한 눈빛에 아르민은 황급히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
그러자 테오도르가 무슨 뜻이냐는 듯 이맛살을 구기며 그를 노려봤다.
고개를 숙였음에도 느껴지는 매서운 기세에 아르민이 재빨리 대답했다.
“폐하의 욕설을 들으니 몹시 그리운 느낌이 들어 제가 실수를 했습니다. 한동안 바르고 고운 말만 사용하셨으니까요.”
“……?”
테오도르의 미간에 잡힌 주름이 더욱 짙어졌다. 별 시답잖은 개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며, 그가 무심코 고개를 돌릴 때였다.
순간 창밖을 바라본 테오도르의 눈이 자그맣게 커졌다.
“눈…….”
“말에서 떨어지셨습니다. 다행히 머리의 상처 말고는 크게 다치신 곳이 없다고 합니다만, 혹 불편한 곳이 있으시다면…….”
“아르민 마이어.”
테오도르는 아르민의 설명을 끊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이 계절에 눈이 내리는 거지?”
“네……?”
그러자 당황한 것은 아르민이었다. 그는 혹시 황제가 또 난처한 질문으로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진지하게 고민했다.
지난여름 이후로 이상하게 유순해졌으나, 황제는 종종 괴상한 질문으로 아랫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를 지녔으니까.
“그야 당연히 이 계절이니까 눈이 내리는 거겠지요……?”
아르민은 최대한 테오도르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이래 봬도 그는 호위단장 린든과 더불어 황제를 가장 오래 모셔 온 사람이었다.
바꿔 말하자면, 누구보다 성격 더러운 상사의 비위를 맞추며 살아남는 법을 잘 아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테오도르의 얼굴은 눈에 띄게 험악해졌다.
“지금 나와 말장난을 하는 건가?”
“폐, 폐하……?”
아르민은 겉으로는 두려운 시늉을 하며, 속으로는 ‘아, 이 새끼 또 시작이구나.’라고 생각하며 설움을 삼켰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잘…….”
“한여름에, 눈이 내린다고? 그게 당연해?”
“네? 한여름이라니요, 지금은 겨울인데…….”
아르민은 이것이 자신을 괴롭히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여름이라 여기는 건지 알 수 없어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테오도르 또한 아르민이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돌연 사납게 물었다.
“지금이, 겨울이라고?”
그러며 그는 자신의 침실 안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깔린 두툼한 카펫과 두꺼운 재질의 커튼. 그리고 지금 그가 앉아 있는 침대 위의 침구는 몇 번을 다시 보아도 겨울에 사용하는 것이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오랜 기억 속의 소녀가 유독 싫어하였던 더운 여름이었는데.
혹 누군가 질 나쁜 장난이라도 하는 걸까?
하지만 누가?
누가 감히 저를 상대로 이딴 짓을 벌인단 말인가?
목숨이 열한 개쯤 되는 게 아니고서야…….
테오도르는 이 질 나쁜 장난질의 주동자를 찾아내기만 하면 열 가지의 방법으로 상대를 반복해서 죽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궁의 모든 이들이 황제의 그런 잔혹함을 알았다.
“……내가 말에서 떨어졌단 말이지.”
테오도르는 듬성한 기억을 더듬었다. 마지막 기억 속의 그는 과연 말을 타고 있었다.
뜨거운 여름 볕 아래, 말을 타고 가던 그는…….
“사과…… 분명 사과가 머리 위로 떨어졌는데…….”
누군가 먹다 만 사과 조각을 그에게 던졌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가…… 눈이 부시게 내리쬐는 햇살 사이로…… 오랜 그리움의 얼굴을…….
“윽…….”
애석하게도 거기까지 생각하는 순간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테오도르는 한 손으로 아픈 이마를 짚으며 아르민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사과를 맞고 말에서 떨어진 것이냐?”
“네?”
아르민은 점점 더 황제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워졌다.
조금 전까지 한여름 타령을 하더니, 갑자기 사과는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폐하께서는 신년 행사에 참석하시던 중이었습니다. 본래 다른 일로 바쁘시어 행사 참여를 기피하셨으나, 신년제이니만큼 빠지지 못하고 참석하시었고…….”
“신년제? 그럼 오늘이 신년 첫날이라고?”
“네, 그렇습니다.”
“…….”
잠시 입을 꾸욱 다물던 그가 섬뜩하게 벼려진 목소리로 명령했다.
“당장 의사를 불러와라.”
이에 불과 몇십 분 전에 황제의 몸에 이상이 없음을 확인했던 의사가 다시금 부랴부랴 달려왔다.
의사의 진단은 가히 절망적이었다.
황제의 기억이 끊겼다. 대단하신 알브레히트 황제께서 기억상실증에 걸리신 것이다.
황제의 보좌관도, 황궁의도 모두 황송하여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적막한 고요가 방 안에 흘렀다.
“별 X같은 병을…….”
욕설을 지껄이던 테오도르가 지끈거리는 두통을 이기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 문을 열고 안쪽으로 뛰어 들어왔다.
“폐하.”
자신을 부르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올리던 테오도르는 문득 멈칫했다.
입고 있는 행색을 보아하니, 분명 저의 측근 호위인 것 같은데…….
홰액-!
그가 낯선 기사의 손목을 움켜쥐고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그러자 누가 보아도 당황한 것에 틀림없는 기사의 얼굴이 눈앞에 가득 담겼다.
“넌…….”
그 얼굴을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테오도르는 이 얼굴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어린 날, 지긋지긋한 황궁에서 찾아낸 저의 보물.
정말 이보네인 걸까?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가슴이 미친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다. 마지막 기억 속에서도, 그는 이보네를 찾고 있었다.
“네가 어떻게…….”
떨리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문득 기묘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는 그대로 잡은 손을 뒤집어 그녀의 손목을 보았다.
기사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깨끗한 손, 그리고 마찬가지로 작은 상처 하나 없는 새하얀 손목…….
테오도르는 이보네의 손을 기억한다. 그녀의 손은 이렇게 깨끗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장 아픈 약점이었던 흉터가 이 손목에 있었고, 10년 전 테오도르는 그곳에 자신의 신성력을 심어 두었다.
그 애가 어디로 사라지든, 다시 찾을 수 있게.
비록 그 족적이 체르니시아의 몰락 이후 페르디난트에서 끊겼으나, 만약 페르디난트의 종자들이 마력으로 뒤덮은 것이라면 이 흰 손목에 작은 마기나마 남아 있어야 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목에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다시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보았다.
누구보다 그녀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이보네가 아니다.
이보네를 흉내 낸 가짜…….
이보네를 응시하는 테오도르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테오도르는 한동안 나의 손목을 붙들고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폐하……?”
“…….”
테오도르의 상태가 조금 이상했다. 나를 담고 있는 황금색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떨고 있는 건 시선뿐만이 아니었다. 내 손목을 움켜쥔 굵은 손도 함께 떨고 있었다.
정말로, 많이 아픈 건가……?
그의 머리를 감싼 흰 붕대 위로 붉은 얼룩이 져 있었다. 퍽 아파 보이는 핏자국에 마음이 상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붙들리지 않은 반대편 팔을 뻗었다. 그 위로 달라붙어 있는 검은 머리카락에 손끝이 닿을 때였다.
홰액-!
별안간 그가 팔을 휘둘렀다. 그에게 손목이 붙잡혀 있던 탓에, 몸이 휘청거렸다.
요 며칠 지독한 몸살로 앓느라 힘이 빠진 내 몸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아…….”
아프게 바닥에 부딪힌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알알한 몸을 매만졌다.
왜 그러느냐고 묻고자 고개를 들어 올리려던 순간이었다.
스르릉-
서늘한 검날이 목덜미에 겨누어졌다.
“……?”
무심코 고개를 들려던 나는 순간 내리쬐는 찌를 듯한 살기에 섬찟 몸을 굳혔다.
“아르민, 네가 대답해. 이건 뭐지?”
서늘한 목소리에 담긴 것은 확연한, 살의였다.
“……이브 로웰린 경입니다. 폐하께서 친히 데려와 옆에 두었던 폐하의 측근 호위지요.”
“호위?”
불쾌함이 가득 실린 목소리가 보좌관에게 반문했다.
“명색이 황제의 호위라는 자가 저렇게 비실거린다고?”
“아, 그건 최근 이브 경이…….”
“측근 호위라면서, 내가 낙마할 땐 뭘 하고 있던 거지?”
“이브 경의 몸이 좋지 않아…….”
“영 수상한 일이 아닌가.”
아르민이 무어라 설명하려 하였으나, 테오도르는 단 하나도 제대로 듣지 않고 제멋대로 말을 끊어 버렸다.
그러고는 내 목에 드리운 검날을 더욱 바싹 세우며 스산하게 명령했다.
“고개를 들어.”
“…….”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얼굴이 급격히 일그러졌다.
“폐…….”
“X발.”
그리고 이어 흘러나온 욕설에 나는 화들짝 놀라 토끼처럼 똥그래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러나 몇 번을 감았다 떠 보아도 내 앞에 있는 것은 분명 테오도르였다.
“빌어먹게도 닮았군.”
그가 나직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의 표정도 덩달아 심각해졌다.
“폐…….”
방금 그건,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거…….
“읏…….”
다시 그를 부르고자 했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그를 부르기 위해 입을 연 순간, 그가 날카로운 검날을 내 살갗 위로 세웠기 때문이다.
숨을 꼴깍 삼키며 그를 쳐다보자, 일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검신이 부르르 떨렸다.
챙그랑-
검을 내던진 그가 살벌하게 나를 노려보며 윽박질렀다.
“당장, 꺼져.”
“…….”
황망한 마음에 나는 입 한번 벙긋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니 올려다봤다.
그러자 보다 못한 아르민이 내게 다가와 일으켜 주었다.
“이브 경, 지금 폐하의 상태가 썩 좋지 않으니, 일단 나가시지요.”
“폐하께서 많이 편찮으신 건가요?”
“네, 뭐…… 아니, 그런데 폐하보다는 경이 더 아파 보이는군요. 빨리 가서 치료를 해요.”
그가 손수건으로 내 목덜미를 꾸욱 눌러 준 다음에야, 나는 내가 피를 흘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욱신-
뒤늦은 아픔에 지혈을 하며, 나는 테오도르를 힐긋 보았다.
그는 정말로 많이 아픈 건지,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양손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었다.
그러다 돌연 나를 노려보는 흉흉한 시선과 마주칠 적에, 아르민이 나를 밖으로 떠밀었다.
“마이어 공, 정말로…… 정말로 폐하께서 괜찮으신 것 맞지요?”
“제가 나중에 찾아가겠습니다. 일단은 나가요.”
결국 그에게 등이 떠밀린 나는 다시 복도로 퉁 나오게 되었다.
“……말도 안 돼.”
닫힌 침실 안에서 겪은 일들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X발이라느니…… 꺼X라느니…….
하지만 나의 테오가 그렇게 상스러운 말을 그 예쁜 입에 담을 리가 없잖아?
설마, 테오도르의 탈을 뒤집어쓴 가짜인 건가? 그렇다면, 해치워야 하는데…….
“세상에, 이브 경! 이 피는 뭐야?”
“저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어?”
“넋이 나가 있잖아? 이브 경,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혼란스러워하는 내게 다가온 기사들이 시끄럽게 말을 던졌다.
나는 그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중얼거렸다.
“폐하께서…… 비속어를 사용하셨어.”
그리고 모두를 놀라게 할 나의 이야기에, 일동 침묵했다.
“……?”
“……?”
“……?”
하긴, 다들 충격적이겠지.
어리둥절한 그들의 표정을 보며, 나는 안색을 어둡게 굳히며 자리를 떴다.
* * *
한편, 이보네를 내보낸 테오도르는 점점 선명해지는 기억을 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그의 기억이 끊긴 지점은 이보네를 추적하기 위해 페르디난트에 걸음하던 날이었다.
이보네에게 남긴 흔적은 페르디난트에서 끊겼고, 그곳을 주시하던 중 그쪽에서 먼저 혼담을 제의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그것을 빌미로 페르디난트를 파헤치기 위해 방문했다. 호위단장 린든과 함께.
당연히 혼담 따위는 이보네를 찾기 위한 부수적인 과정 중 하나였을 뿐, 그 찝찝한 페르디난트의 딸과 결혼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린든은?”
“몇 달 전 폐하께서 비밀리에 임무를 주시고 멀리 보내셨습니다. 임무의 내용은 제게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다.”
“…….”
테오도르는 속으로 욕지거리를 삼켰다. 하필이면 그날 자신을 가장 지척에서 보좌하였을 린든이 자리를 비웠다니.
그는 조금 전 보았던 이브 로웰린을 떠올렸다.
그녀는 한눈에 보아도 여자임을 알 수 있는 어설픈 남장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굉장히…… 예뻤다.
당연했다. 이보네와 착각할 만큼 닮아 있었으니까.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통제를 벗어난 심장이 두근, 두근- 뛰어 댔다.
껍데기만 뒤집어쓴 가짜에게 반응하는 심장이 역겨워 도려내고 싶을 정도였다.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였던 날, 그 이후로 기억이 끊겼다.”
“정확히 반년의 기억이 소실되었군요.”
“혹 내가 그날 특별한 행동을 하지는 않았던가?”
“린든 경과 함께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셨던 그날이라면…… 본래의 목적과 달리 카타리나 양을 만나지 않고 돌아왔습니다. 어찌 된 일이냐 여쭈었더니 더 이상 혼담을 이어 갈 필요는 없다고 하셨지요. 그리고…….”
아르민이 반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말했다.
“난데없이 측근 호위를 위협하여 쫓아내셨습니다. 그리고 굳이 새 호위를 구하지 않아도 된다 하셨고요. 그 일로 린든 경이 근심이 많았는데, 다행히도 폐하께서 바로 이튿날 페르디난트를 방문하여 이브 경을 손수 데려오셨습니다.”
“내가 그놈을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고?”
“네, 폐하.”
테오도르의 눈가가 더욱 가늘어졌다.
이브 로웰린. 기억 속 이보네를 닮은 얼굴을 하고서, 제 주위를 맴도는 수상한 여자.
그런데 페르디난트에서 데려왔다니, 더욱 수상했다.
그곳은 이보네의 족적이 끊긴 곳이 아닌가.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렸다.
벤야민 페르디난트, 도무지 무슨 꿍꿍이를 지녔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의문스러운 작자였다.
문득 테오도르는 어쩌면 이브 로웰린은 그자가 보낸 첩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와 자리를 만들어라. 그를 일단 만나 보아야겠군.”
“네, 폐하.”
아르민은 피로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다른 측근 호위를 구해.”
“다른…… 호위요?”
그러다 이어진 황제의 명령에 멈칫했다.
“다른 호위라니, 갑자기 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명령을 들었다는 사람의 표정으로 토를 달자, 테오도르가 그를 스윽 한 번 쳐다보았다.
“…….”
그 무언의 시선에 놀란 아르민은 히끅 딸꾹질을 삼켜야 했다.
* * *
그날 오후, 아르민 마이어는 약속대로 내게 찾아왔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정말 괜찮은 것인지 재차 묻는 내게 그의 상태에 대해 몹시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폐하께서는 근 반년 사이의 기억을 잃으셨습니다.”
“…….”
기억 상실이란다. 마치 통속 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말에 나는 아주 잠시 말을 잃었다.
테오가 기억을 잃었다고…….
그래서 지난 반년을 기억하지 못하고, 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고…….
나는 아주 잠시 그 말을 납득할 뻔했다가,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무리 기억이 사라진다고 해서, 사람의 성격까지 그렇게 바뀔 수는 없지 않나?
“그러니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브 경. ……뭐, 별다를 건 없습니다. 그저 폐하께서 그 수상한 가식을 내던지고 본래의 성격으로 되돌아가신 것뿐이니까요.”
“아니요, 그 사람은 폐하가 아니었어요. 폐하는 절대 그렇게 상스러운 욕설을 하며 상대를 위협하는 분이 아니세요.”
“후후, 그야 이브 경은 그렇게 생각하시겠지요. 여태껏 그분의 내숭만 보아 왔으니…….”
나는 반년 전, 나를 카타리나로부터 구해 주었던 테오가 그 여자에게 협박을 하고서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기억한다.
내가 영 수상해하며 생각을 곱씹을 적에, 아르민이 내 옷자락을 붙잡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부탁입니다, 이브 경. 부디 폐하의 곁을 떠나지 말아 주세요.”
“떠나다니요?”
“이제껏 이만큼이나 오래 그 자리를 버틴 이는 이브 경밖에 없었습니다.”
“걱정 마세요, 저는 폐하의 곁을 떠날 생각이 없으니까요.”
“하, 그게…….”
아르민이 한숨을 푹 내쉬며 설명했다.
“폐하께서 또 무슨 변덕이신지, 새 측근 호위를 구하라 하십니다.”
“새 측근 호위요?”
“만약 폐하께서 이브 경을 쫓아내겠다고 마음을 먹으셨다면, 분명 아주 심술궂고 고약한 방법으로 경을 괴롭힐 거예요.”
테오가 나를 쫓아내고 다른 사람을 옆에 두려 한다고?
역시 수상했다. 내가 아는 테오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이었다.
일단은 그가 정말 나의 테오가 맞는지 확인해 보아야 할 것 같았다.
* * *
이튿날 아침.
나는 짧았던 병가를 끝내고 테오도르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아직 열이 완전히 떨어진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일을 못 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집무실 안쪽으로 한 발짝 내디딘 순간, 날 선 목소리가 날아왔다.
“저건, 뭐야?”
그 물음은 보좌관인 아르민에게 향했으나, 흉흉한 눈빛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내가 어제 말한 것을 전하지 않았나?”
“아, 물론 전했습니다. 그런데 새 호위를 구하기가 어려워서요. 기존의 기사들도 다들 폐하의 측근 호위 자리를 두려워하고…….”
“…….”
그 말에 테오도르가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최대한 빠르게, 새 호위를 구해.”
그는 냉랭하게 말하고 내게 관심을 거두었다.
‘정말로 나를 못 알아보네.’
어제와 변하지 않은 모습에 나의 마음속에 품은 의심이 더욱 커져 갔다.
그를 힐끔힐끔 관찰하던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미지근한 찻주전자를 발견했다.
테오도르는 내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책상 위의 서류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이 기회였다.
나는 아직 미지근한 찻물이 담겨 있는 주전자를 들고서 그에게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러고는 책상 위에 놓인 그의 빈 찻잔에 찻물을 따르는 척하다가 손을 비틀며 그에게 쏟아 버렸다.
“앗……!”
어색한 비명과 함께 촤르륵- 하고 찻물이 그의 셔츠를 적셨다.
“…….”
“…….”
집무실 안에 있던 아르민과 시종들은 턱이 빠질 듯 입을 턱 벌리며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고, 짧은 침묵이 방 안에 맴돌았다.
뚝, 뚝-
주전자에 남은 찻물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이젠 별 같잖은 짓을…….”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테오도르의 잇새로 음산한 중얼거림이 새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지?”
무시무시한 시선이 내게 향했다. 그렇지만 내게도 변명거리는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 손이 미끄러져서.”
“그러니까 네가 왜 내 찻잔에 손을 대냐는 소리다.”
“폐하의 다과를 담당하는 게 본래 제 역할이었던지라.”
뻔뻔하게 대꾸하자 그가 눈을 희번득 뜨며 아르민에게 물었다.
“이 말이 사실인가?”
“……아, 네, 폐하. 폐하의 간식은 늘 이브 경이 챙겼지요. 폐하께서도 이브 경의 간식을 살뜰히 챙기셨고…….”
아르민이 반 박자 느리게 답하다가 테오도르의 무시무시한 시선에 말끝을 흐렸다.
테오도르는 짜증스럽게 한숨을 내쉬며 이마 위로 내려온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와.”
화를 꾹꾹 참는 듯한 음성이었다.
그의 명령에 시종 하나가 재빠르게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테오도르는 젖은 옷이 불편했던지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어 헤쳤다.
나는 유심히 그 모양을 훔쳐보며, 셔츠 깃 아래로 숨어 있던 그의 목덜미와 단단한 살결을 훔쳐보았다. 그리고 그는…….
정말…… 테오도르가 맞네…….
어떻게 알았냐고? 다 방법이 있다. 어른들의 사정이라 자세히 설명할 순 없지만.
아무튼 그는 정말로 나의 테오였다. 그렇다면 나의 테오가 왜 저렇게 변해 버린 거지? 역시 머리를 다쳐서…….
“미쳤나? 어딜 훔쳐보는 거지?”
이때 그가 단추를 풀다 말고 나를 대뜸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아, 음……. 몸이 좋으시네요. 절로 시선이…….”
홰액-!
그의 책상 위에 굴러다니던 찻잔이 그대로 내게 날아왔다.
물론 나는 아주 쉽게 그것을 피할 수 있었다.
“당장 꺼져.”
결국 나는 어제와 마찬가지로 복도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렇지만 성과가 영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그가 나의 테오라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그의 기억의 공백을 메워야 했다.
머리를 다치며 성격까지 이상해진 모양이지만, 기억이 돌아오면 모든 것이 해결되리라.
하다못해 내가 어릴 적의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만 알릴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나는 문득 서러워졌다. 그때는 바로 알아봤다고 했으면서, 이번에는 왜…….
“거짓말쟁이…….”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그에게 원망스러운 마음이 일순 치솟았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가 일부러 기억을 잃은 것도 아니고, 다쳐서 그리된 것 아닌가.
게다가 그가 다친 이유에는…….
[말에서 떨어지다니, 한 번도 그런 실수를 해 본 적이 없으신 분인데…….]
그의 보좌관은 그가 그런 실수를 할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가 그날 아침까지 무려 일주일이나 나를 병간호하느라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측근 호위 기사였던 내가 고작 감기에 걸렸다는 이유로 그의 곁을 지키지 못했던 사실도…….
그러니까 그를 원망하지 말아야지.
어서 말끔하게 나아서 다시 예전의 테오로 돌아오도록 도와야지.
그렇게 결심한 나는, 어째서 그가 나를 바로 알아보지 못하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그가 깨어난 직후에 찾아갔을 때, 테오는 나를 보고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그때 그는 분명…….
“내 손목을 살폈었는데. 설마 상처가 없어져서 그런 건가?”
나는 깨끗해진 내 손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굳은살과 물집과 흉터가 가득했던 손은 그를 만난 뒤에 깨끗해졌다.
그의 신성력이 닿았던 손목의 상처는 흔적도 없이 말끔하게 사라진 채였다.
검기가 담긴 상처라 신성력이 아니면 없어지지 않는 것이라지만, 본인이 치료해 주었으면서 그 사실마저 홀라당 잊어버리다니.
“어쨌든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알리기만 하면 돼.”
한참 동안 인상을 쓰며 생각에 잠기던 나는, 마침내 결론을 냈다.
일단 테오를 만나러 가야 하는데, 방금 막 그의 집무실에서 쫓겨난 처지라 어떡하면 좋을지 망설이던 참이었다.
마침 반대편에서 그의 시종이 갈아입을 옷을 들고 오는 게 보였다.
“그거 이리 주세요. 제가 폐하께 대신 가져다 드릴게요.”
가타부타 설명 없이 옷 바구니를 냉큼 뺏어 들자 시종은 기뻐했다.
나는 다시 문을 열고 그의 집무실로 들어갔다.
“분명, 꺼지라고 했는데.”
“옷 바구니를 들고 오던 시종이 오다가 복도에서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바람에 제가 대신 왔습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답하자, 그가 가차 없이 중얼거렸다.
“쓸모없는 놈이군.”
나는 사람을 그런 식으로 평가하는 그가 너무 어색해서 빤히 쳐다보았다.
“뭘 하나? 당장 갈아입을 옷을 내놔.”
“아, 여기 있습니다.”
바구니의 새 셔츠를 내밀자, 그가 옷을 갈아입었다. 나는 그가 옷 갈아입는 것을 가만히 구경했다.
매일 밤 보아도 질리지 않던 그 탄탄하게 짜여진 근육이 모습을 드러냈다.
꼴깍-
나도 모르게 숨을 삼키며 음흉한 시선을 던지다가 그의 눈총을 받고 재빨리 시선을 거뒀다.
‘쳇.’
조금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닌데, 치사하긴.
물론 내 시선이 조금 음흉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의 잘못도 있다.
내가 그 몸을 좋아하게 만든 것은 전적으로 테오도르였으니까.
졸지에 치한 취급을 당한 게 억울해서,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어느새 뽀송한 새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잠그던 그가 내 시선을 힐긋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폐하, 제가 드릴 말씀이 있는데…….”
그러나 나는 굴하지 않고 그에게 말을 붙였다.
그에게 내가 이보네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을 알려야 했으나, 하필이면 방 안에 아르민과 다른 시종들이 함께 있어 말하기 쉽지 않았다.
그들의 눈치를 보던 나는 간절한 눈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주위를 물려 주신다면…….”
“뭐? 주위를 물려? 단둘이 있는 틈을 타서 날 공격할 셈인가?”
“네? 제가 왜 그런 짓을 합니까?”
공격이라니. 어떻게 하면 사고가 그렇게 흐를 수 있지?
당혹스러워 두 손을 내젓자, 그가 몹시 수상하다는 시선으로 나를 훑었다.
“그럼-.”
이에 그가 비릿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나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덮치기라도 하려고?”
“아니요, 폐하. 저는…… 절대…….”
느릿하게 흘러나오는 고혹적인 음색에 순간 홀려 버린 나는 다시 한번 꼴깍 숨을 삼키며 마지막 단추를 채우고 있는 그의 손끝을 쳐다보았다.
그런 음흉한 생각은 아주 조금도 하고 있지 않다고 대답해야 하는데, 아주 잠시 말을 잃었다.
그런 내 상태를 알아차린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더니 두 눈을 부릅뜨며 내게 축객령을 내렸다.
“당장, 나가!”
결국 나는 버럭 소리를 내지르는 그에게 또다시 쫓겨나고 말았다.
벌써 세 번째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내가 생각해도 쫓겨날 만했다.
내가 그의 몸을 음험한 시선으로 본 것은 사실이니까, 그도 놀랐겠지.
하지만…….
[저런, 이브. 왜 그렇게 음흉한 눈으로 나를 보는 거야? 잡아먹고 싶게.]
……예전에는 내 음흉한 시선이 귀엽다고 그랬으면서.
나는 괜히 속상해진 마음에 입술을 삐죽 내밀며 터덜터덜 돌아갔다.
테오도르는 어깨를 축 내려뜨리며 밖으로 나가는 이브의 뒷모습을 보며 바득바득 이를 갈았다.
“저 미친 여자가…….”
불쾌한 기색이 역력한 중얼거림에 방 안의 사람들이 다들 그의 눈치만 살폈다.
“저, 폐하…… 정말로 이브 경을 쫓아 버리려는 것은 아니지요?”
그런 테오도르 때문에 아르민은 정말로 불안했다.
그나마 이브가 있었기에 지난 반년간 조용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황제궁에 사람 하나 들락거리는 것도 몹시 절차가 까다로운데, 이브 로웰린이 떠나 버리면 이제 또 매일같이 새 사람을 구하느라 쓸데없는 힘을 빼야 할 것이 아닌가.
그렇지만 그는 한 가닥 희망을 놓지 않았다.
그가 기억하는 황제는 마음에 안 드는 일이 있으면 직접 위협해서 쫓아냈지, 이처럼 관대하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폐하, 그래도 이브 경만 한 사람이 없습니다. 젊은 기사가 근면하고 책임감 있고, 또 성격도 좋아서 서임식이 반년이나 미뤄졌는데도 서운해하지 않고…….”
아르민이 이브를 향한 칭찬을 좌르르르 쏟아 냈다. 가만히 듣던 테오도르가 코웃음을 쳤다.
“서임식을 미룬 게 아니라 받을 수 없던 거겠지. 여자의 몸으로 황제의 기사가 되었다가 추문에 휩싸일 수도 있으니까.”
“네? 이브 경이 여자란 말씀입니까?”
아르민이 놀라 물었다. 그런데 한번 의혹을 품자마자, 곧바로 스스로 납득하여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아, 그래요. 분명 여자로군요. 그 얼굴, 그 자태는…….”
이브 로웰린은 여자였다. 망막 위로 드리우던 장막이 한 꺼풀 벗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왜 이제까지 알아보지 못했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가 풀려난 것 같군요.”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아르민의 모습에 테오도르의 안색이 다소 심각해졌다.
“마법이라……. 페르디난트의 술법이라면 성별을 감추는 것쯤은 크게 어렵지 않았겠지. 하지만…….”
제아무리 페르디난트의 술식이 새겨져 있다 한들, 저를 속이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기억을 잃기 전의 자신 또한 그녀를 보자마자 여자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보았을 테다.
그런데도 반년 동안이나 옆에 두었다니.
혹…… 이보네와 닮은 그 얼굴에 현혹되었던 걸까?
아주 이해가 안 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녀가 수상하다 여기면서도, 냅다 목을 베지 못하고 참고 있으니까.
이보네와 닮은 그 어여쁜 푸른 눈동자와 시선을 마주할 때면…… 그녀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수상해. 내게 의도적으로 접근을 하는 것 같아. 게다가 방금 그 시선, 꼭…… 치한 같았어.”
테오도르는 몸을 부르르 떨며 음산하게 중얼거렸다.
“감히, 황제의 몸을 그딴 추잡한 눈으로 훑다니……. 당장 경을 쳐도 모자란데…….”
잠자코 그 중얼거림을 한 귀로 흘려듣던 아르민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게 말하고 있는 테오도르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 시선을 즐기고 있는 건가?’
아르민은 뜨악한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보았다.
어쩌면 자신의 상관이 변태인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물씬 들었다.
그것도 그냥 변태가 아니었다.
그가 모시는 황제는 인성 파탄 또라이라고 정평이 나 있는 이였다.
그러니 그의 상관은 그냥 변태가 아니라 또라이 변태가 되는 것이다.
‘저런 또라이 변태를 상관으로 모셔야 하다니, 아이고 내 신세야. 그러고 보니 상대를 괴롭히며 반응을 즐기는 변태들이 있다고 했는데…….’
한편 테오도르는 그런 보좌관의 속마음은 전혀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이브에 대해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의 목적은 이보네의 얼굴을 하면서 자신을 현혹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점차 확신이 굳어 갔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분명 사주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벤야민 페르디난트의 방문일이 언제라고 했지?”
테오도르는 조만간 만나게 될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리며 이를 악물었다.
* * *
테오도르가 기억을 잃은 지도 벌써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는 나와 단둘이 있는 시간을 극도로 경계했다.
나는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어제부터는 아예 내 말을 무시하고, 없는 사람 취급을 시작했다.
“폐하.”
“어디서 개가 짖는군. 개 소리가 들리지 않나, 아르민?”
“폐…….”
“정무 회의 시간이군. 가지.”
탁- 소리 나게 서류를 덮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멍하니 그 뒷모습을 쳐다보던 나는 쫄래쫄래 뒤를 쫓았다.
그러자 내가 쫓는 것을 아는지 그의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나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치사해.’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가 이렇게 치사한 사람이 되어 버릴 줄이야.
덕분에 그와 단둘이 대화를 하려던 나의 시도는 번번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고 내가 체르니시아의 딸이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공개할 수도 없고…….
고심하던 나는 숙소로 돌아와 그에게 편지를 썼다.
말로 전하는 건 다른 이들의 시선 때문에 조금 어려우니까, 대신 글로 전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편지를 쓰는 것은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되기도 했다.
그가 편지를 보고 내 말을 믿어 줄까?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나는 막 회의장에서 나온 그에게 수줍게 편지를 내밀었다.
“폐하, 제가 드릴 게 있습니다.”
“…….”
그는 무심히 내가 내민 편지를 건네받았다.
드디어 그에게 전달되었다는 생각에 내 얼굴이 밝아지려던 찰나.
찌익- 찌이익-
그가 눈앞에서 그것을 찢어 버렸다.
“볼 가치도 없는 쓰레기 따위를.”
북북 찢긴 편지가 촛불에 그을리며 재가 되어 갔다.
“어…….”
나도 모르게 입 밖으로 앓는 듯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가슴이 싸해져 어떤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아니야, 속상해할 것 없어. 테오가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잖아.
테오는 지금 아픈 거니까……. 조금 아파서 그러는 거니까…….
그러니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이며 그를 쳐다볼 때였다.
문득 그와 눈이 마주쳤다고 느낀 순간, 그가 자그맣게 욕설을 뇌까렸다.
“젠장.”
그가 잘생긴 얼굴을 온통 일그러뜨리며 입매를 비틀었다.
“그러니까 방금 내가 한 짓은…….”
그가 내게 무언가 말을 걸려던 때였다.
“폐하!”
아르민이 황급히 우리 사이로 끼어들었다.
“도착했습니다.”
“……?”
“일전에 말씀하신 새 측근 호위 말입니다.”
그의 곁에는 낯선 얼굴의 기사가 서 있었다.
“…….”
테오도르는 입술을 꾸욱 닫았다. 그러더니 이내 내게서 고개를 홱 돌렸다.
“이브 경.”
아르민이 내게 어서 나가 보라며 눈짓했다.
나는 울적한 마음으로 밖으로 나왔다.
테오는 나와 대화하기를 완강히 거부하고 있었고, 이제 그는 정말로 다른 호위를 들여 버렸다.
그럼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이브 경, 괜찮습니까?”
어깨를 추욱 늘어뜨리며 우울해할 적에, 뒤따라 나온 아르민이 내게 물었다.
“아무래도 폐하의 표정이 심상찮아 말려야 할 것 같았는데…… 도움이 되셨나요?”
“방금 일부러 새 호위를 내세웠다는 거예요? 그럼 저는 이제 폐하의 곁에 있을 수가 없잖아요.”
당황하여 되묻자, 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내지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하루 정도 짧은 휴가를 얻었다고 생각하세요.”
나는 그의 의미심장한 웃음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말로 다른 사람을 데려온 아르민이 미웠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채 반나절도 되지 않아 들려왔다.
* * *
아르민은 머쓱한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미안합니다, 이브 경. 하루 정도 푹 쉬게 해 드리려고 했는데, 도무지 새로 온 사람이 폐하의 성격을 견디지 못해서…….”
기쁘게도, 아니, 애석하게도 새 호위가 반나절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둔 것이다.
나는 기쁘게 본래 나의 자리였던 그 빈자리를 찾아갔다.
“오늘만이다.”
테오도르가 험악한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새 호위가 오면 두 번 다시 너 같은 놈은 볼 일 없어.”
“네.”
나는 그저 싱글벙글 웃으며 답했다.
테오도르는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나는 다시금 그를 호위(한다는 명목으로 관찰)하며, 가만히 생각에 빠졌다.
그는 나와 대화를 거부하고, 편지조차 받지 않고 찢어 버렸다.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전할 수 없으니, 대신 다른 방법을 써야 했다.
붕대를 풀어 이제는 다쳤다는 게 실감 나지 않는 그의 머리통에 힐끗 시선이 갔다.
‘낙마를 할 때 머리를 크게 다쳤으니까, 다시 머리를 다치면 기억이 돌아오지 않을까?’
오래전에 읽었던 통속 소설의 내용이 생각이 났다.
딱히 통속 소설을 즐겨 읽지는 않았으나, 페르디난트에서 지낼 적에 카타리나가 그것을 좋아했다.
황후가 되길 꿈꾸었던 그녀는 주로 여주인공이 황후가 되는 이야기를 읽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속으로 그녀를 향해 혀를 비죽 내밀었다.
‘백날 읽어 봐라. 그런다고 황후가 되나.’
그러며 곁눈질로 슬쩍 구경한 통속 소설 중에는 등장인물이 기억을 잃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은 강한 충격을 받고 다시 기억을 되찾았다.
그러니 어쩌면 테오도르도 강한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강한 충격…….’
문득 테이블 위에 놓인 화병이 눈에 들어왔다.
‘저걸로 맞으면 무척 아프겠지.’
나는 가만히 그것을 들어 보았다. 그리고 화병과 테오의 뒤통수를 번갈아 보았다.
‘힘 조절을 할 수 있을까?’
한 손으로 화병을 든 채로 위아래로 흔들던 나는, 조심스럽게 일어났다.
테오도르는 아르민과 머리를 맞대고 사이좋게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다가가는 것에는 작은 결심이 필요했다.
‘미안해, 테오. 하지만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거야.’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며, 그를 향해 화병을 높이 들어 올린 순간이었다.
“……뭘 하는 거지?”
“…….”
마침 뒤를 돌아본 그의 물음에 나는 뻘쭘히 화병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팔 근육을 단련하고 있었습니다.”
어색한 정적 끝에 답하자, 그가 또다시 묘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 * *
테오도르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르민이 새 호위를 구해 왔으나, 나름 상냥하게 대해 주었는데도 병든 닭처럼 안색이 창백해지더니 반나절 만에 그만두고 말았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이브 로웰린을 다시 불러온 그는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며 보좌관과 사이좋게 머리를 맞대고 정책을 논의하던 중이었다.
“이 정책은 누구의 머리에서 나온 거지?”
“아, 그건 제가…….”
“미치도록 훌륭한 정책이군. 너무나 감탄스러워서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야.”
“죄, 죄송합…….”
테오도르의 시선은 손에 든 보고서에 박혀 있었으나, 온 신경이 아까부터 그 여자에게 가 있었다.
이브 로웰린.
기억이 없는 동안 옆에 두었다는 수상한 여자.
‘하필이면 그따위로 예쁘게 생겨서는, 쯧.’
그가 속으로 그녀에 대해 생각할 때였다.
문득 뒤편으로 그림자가 지는 게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홱 돌려 뒤를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는 뜬금없이 화병을 높게 들고 있는 이브 로웰린이 있었다.
“……뭘 하는 거지?”
그 의심쩍은 모양을 보며 묻자, 그녀가 말없이 화병을 아래로 내렸다.
잠시 저걸로 제 뒤통수를 내려치려 한 것인가 의심이 들었다.
자세가 딱 그런 모양이었기에 의심하기 좋았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곧바로 의심을 거두었다.
그녀에게서 아무런 살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만약 그런 마음을 품었더라면 분명 제가 먼저 느꼈을 것이다.
‘그럼 정말 팔 근육을 단련 중이었던 건가?’
이브 로웰린을 응시하던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느다랗게 좁혀졌다.
참 이상한 여자였다.
이보네가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여서 괴로웠다.
하여 멀리 쫓아 버리고자 자그마한 눈길 하나에도 화를 냈고, 인격을 짓밟는 말들을 수시로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굳건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신기하기도 했다. 작정하고 못되게 구는데도 더러운 성정을 견딘다는 게.
오랫동안 옆을 지켜 온 아르민이나 린든보다도 대단하게 느껴졌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격이 그다지 좋지 못하다는 것을 스스로 잘 인지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나쁘게 대했다.
그들이 뒤에서 제 욕을 숙덕거리는 것을 알았으나 개의치 않았다.
저를 향한 그들의 두려움이야말로, 그가 가장 즐기는 시선이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유독 이브 로웰린, 그 여자에게는 그게 잘 안 됐다.
못된 말을 하고 윽박지르다가도 그 얼굴을 마주할 때면 저도 모르게 멈칫하고 만다.
단순히 얼굴 때문인 걸까?
테오도르는 이브의 얼굴 위로 어린 날 제가 좋아했던 여자아이의 얼굴을 겹쳐 떠올려 보았다.
같은 사람이라 해도 믿을 만큼 닮은 얼굴…….
‘아니. 이보네는 저것보다 훨씬 더 밝고 사랑스러운 얼굴이었어.’
테오도르는 애써 두 사람이 닮았다는 것을 부정하고자 했다. 그 순간이었다.
“윽…….”
테오도르는 문득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싸맸다.
“폐하? 괜찮으세요? 의사! 의사를……!”
챙그랑-
놀란 그녀가 들고 있던 화병을 내던지며 화급히 그의 상태를 살폈다.
고통에 찬 신음을 터뜨리던 테오도르는 고개를 들었다가 멈칫했다.
‘어라?’
이브 로웰린이 사색이 된 얼굴로 의사를 찾았다. 그리고 걱정이 되어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머, 머리가 아프신 거예요? 어디가 어떻게 아파요? 혹 낙마 사고의 후유증인 건…….”
“…….”
테오도르는 그녀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깨달았다.
‘뭐야. 이거 지금…….’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녀의 팔을 홱 잡아당기자, 그 몸이 그대로 딸려 왔다.
놀란 얼굴이 시야에 가득 찼다.
파르르 떨리는 녹색 눈동자.
살풋 달아오른 두 뺨.
그 와중에도 숨기지 못하고 있는 저를 향한 걱정과…… 애정…….
‘나를, 좋아하잖아.’
두근-
그녀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기분이 나빠 심장이 뛰었다.
두근, 두근, 쿵쾅, 쿵쾅-
“불결하게…….”
테오도르는 아랫입술을 꾸욱 베어 물며 중얼거렸다.
붙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멀리 쳐내자, 그녀가 영문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그러다가 곧 들어온 의사에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의사의 질의를 건성으로 답하며, 테오도르는 속으로 고심했다.
이브 로웰린, 저 수상한 여자가 자신을 좋아하고 있다.
그렇다면 저는…….
“음…….”
내내 굳어 있던 그의 입매가 비스듬히 말려 올라갔다.
상대를 괴롭히고 상처 주는 것은 매우 쉬웠다.
적어도 그에게는 전혀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심지어 상대가 제게 호감을 품고 있다면, 더욱더.
테오도르는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양과 달리, 누구보다 사람 괴롭히는 법을 잘 알았다.
의사를 내보낸 뒤, 그는 아르민을 불렀다.
“새 호위를 구해 오라는 명령은 철회하지.”
“네? 정말입니까, 폐하?”
반색하는 아르민과 그 너머로 두 눈을 끔뻑이고 있는 이브 로웰린을 보며 테오도르는 사르륵 눈꼬리를 접어 내렸다.
“물론.”
저 여자가 제풀에 지쳐 떠나는 것을 볼 생각이었다.
* * *
테오도르의 기억은 전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나를 향한 싸늘한 태도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어느 날을 기점으로 갑자기 여러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여 노닥거리기 시작했다.
“안녕. 그러니까…… 실베니아 양?”
“아이참, 폐하. 세실리아예요.”
“아, 미안. 그대의 호수처럼 아름다운 눈동자에 홀려, 내가 잠시 착각을 했지 뭐야.”
낯선 여자들을 향한 달콤한 눈웃음과 듣고 싶지 않아도 들리는 느끼한 사랑의 밀어들.
“어머나,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말씀을.”
“정말이야. 그대의 미모에 나는 눈이 멀 것 같아. 아니, 이미 멀어 버렸지.”
하하 호호 웃는 남녀의 모습을, 나는 멍하니 쳐다보았다.
속이 메슥거리는 게 저 느끼한 대사들 때문인지, 아니면 속이 상해서인지 잘 모르겠다.
처음에는 몹시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차차 나는 이것 또한 현실임을 받아들여야 했다.
저게 본모습이었던 거야.
그러고 보니 나한테 접근할 때도 심상치 않았지.
[예쁜 걸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응, 그래, 예뻐.]
[어떡하지.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그때는 마냥 설렜는데…….
내 마음을 농락당한 것 같아 새삼 억울했다. 동시에 화가 났다.
조용히 숨어 살던 내게 사랑을 알려 준 것은 그였고, 그 사랑이 얼마나 달콤한지 알려 준 것 또한 그였다.
나는 그가 기억만 되찾으면 흠씬 두들겨 패 줘야겠다고 생각하며 주먹을 꾸욱 말아 쥐었다.
그러나 정작 나의 현실은 그의 여자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신세였다.
“저런, 차 맛이 별로인가?”
“네? 아니요, 향이 정말 좋…….”
“오, 이런, 나의 아기 새! 방금 X같다고 했나?”
“네, 네……?”
“젠장, 대체 누가 그대에게 X같은 향이 나는 차를 올린 거지?”
“아니요, 폐하, 향이 좋…….”
“너무 낙심하지 마. 이 X같은 차는 당장 치우고 새것으로 가져오라 할 테니. 이브 로웰린, 네가 다녀와.”
테오도르는 응접실 내에 무수한 시종들을 두고서 굳이 나를 콕 집어 잔심부름을 시켰다.
“네, 폐하.”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여자의 화장품 자국이 남은 찻잔과 찻주전자를 치웠다.
새삼 서러워진 처지에 복도를 걸었다.
테오도르가 하루가 멀다 하고 상대를 바꿔 가며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인 이후, 나는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것을 알릴 기회가 더욱 없어졌다.
차라리 그가 잠을 잘 때 몰래 침입할까?
‘그래,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그날 밤, 나는 그의 방에 불이 꺼진 것을 확인한 뒤 소리 없이 움직였다.
희미한 촛불이 주위를 밝히는 어두운 복도에는, 낯익은 얼굴의 기사들이 졸음을 참고 있었다.
“어, 이브 경?”
“쉿.”
나는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대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폐하께서는 주무셔?”
“어, 음…… 응. 폐하를 뵈려고?”
“응.”
고개를 끄덕이자 그들이 결연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침실 문을 열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브락-
쿵-!
이때, 저 안쪽에서 무언가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다.
“테오?”
나는 놀라 안쪽으로 뛰어 들어갔다.
짧은 순간, 머릿속에서 수만 가지 생각이 교차했다.
대체 무슨 일이지?
혹 그에게 위험한 일이 일어난 건 아닌가?
그러나 막상 침실 안쪽에서 그를 발견하였을 때, 나는 그만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테오도르는 혼자가 아니었다.
낮에 보았던 입이 거친 여자가 테오도르와 함께 바닥을 나뒹굴고 있었고, 그 거친 입을 테오도르의 굵은 손바닥이 아프게 틀어막고 있었다.
어두운 침실……. 낯선 여자…….
여자는 눈물을 찔끔 흘리고 있었다.
문득 나는 밤의 그가 얼마나 난폭하고 짐승 같았는지 떠올렸다.
그러니까, 설마 이건…….
“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짧은 탄식이 정적을 깼다.
“뭐지?”
그가 인상을 왈각 찌푸리며 물었다.
놀란 나는 아무런 답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몸을 돌려 후다닥 바깥으로 도망쳤다.
차가운 밤공기 사이로 뛰고, 또 뛰었다.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롱아롱 고여 있던 울음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결국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한참을 서럽게 울던 때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브? 무슨 일이야! 괜찮아?”
“에른스트……?”
“산책을 하는데, 울음소리가 들려서…….”
에른스트는 내 앞에 쭈그려 앉아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속상한 일이라도 있었던 거야? 누가 널 힘들게 했어?”
상냥한 위로에 나는 더욱 서러움이 밀려와 더 큰 소리로 울었다.
당황하던 에른스트는 이내 토닥토닥 내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울다 지친 나는 에른스트의 어깨에 머리통을 콩 기대고 밭은 숨을 내쉬었다.
차츰 울음도 가쁜 호흡도 함께 잦아들 무렵, 바스락거리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자 그곳에는 테오도르가 있었다.
“…….”
“…….”
“…….”
그가 나를, 그리고 에른스트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오래전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있었다.
그때의 테오도르는 처음으로 내게 버럭 화를 냈었다.
[그때는 왜 그렇게 화를 냈어?]
[그때?]
[에른스트랑 같이 있었을 때. 화를 냈잖아.]
[아, 그거.]
내가 그날에 대해서 물었을 때.
테오도르는 잠시 생각하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푸스스 웃음을 터뜨렸다.
[질투가 나서. 네가 에른스트와 단둘이 있는 게.]
[뭐? 하지만 에른스트는 네 동생인걸?]
[나는 앞으로도 네가 그 애와 단둘이 있는 걸 보면 화를 낼 거야.]
[나와 에른스트의 사이를 의심하는 거야?]
[의심하는 게 아니라 질투하는 거야. 나는 질투가 아주 심하거든. 그러니 조심해야 해, 이브.]
테오도르는 그렇게 말하며 내 뺨에 입을 맞췄다.
질투라는 게 그토록 사랑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나는 그날의 대화가 생각이 나, 조금 긴장되었다.
같은 장소, 같은 사람들, 비슷한 상황…….
숨 막힐 것 같은 정적이 흘렀다.
그러고 그는 이내 관심 없다는 듯 그냥 지나쳤다.
아, 이제는 더 이상 질투도 하지 않는구나.
가슴이 서걱서걱 시리게 가라앉았다.
* * *
테오도르는 그 엉뚱한 여자가 오늘쯤에는 사고를 칠 거라고 생각했다.
오늘만큼은 그 이브 로웰린이 움직이길 바랐다. 그러지 않으면 또 시답잖은 여자들을 황궁으로 불러들이는 수고를 해야 했으니까.
그는 오후에 불렀던 실베…… 어쩌고 하는 여자를 일부러 보내지 않고 침실로 데려왔다.
“폐, 폐하……? 저, 집에는 언제 갈 수 있는…….”
“닥쳐 봐.”
요 며칠 테오도르는 이브 로웰린 때문에 한껏 예민해진 상태였다.
낮에 막 황궁을 방문하였을 때만 해도 수줍은 표정을 짓던 여자는, 이제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두려움에 달달 떨어 댔다.
기실, 이 여자뿐만 아니라 요 며칠 황궁을 방문하였던 모든 여자들이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제게 겁을 먹는 바람에 매일 갈아치우는 귀찮음을 무릅써야 했다.
지나치게 겁을 준 게 잘못이었을까.
침실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계획한 장면을 연출하고자 하였을 때.
실비아…… 어쩌고 하는 여자는 제가 다가가자마자 화들짝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그러다가 그대로 바닥에 쿵 넘어지며 나뒹굴었다.
테오도르는 간신히 손을 뻗어 놀라 비명을 지르려는 여자의 입을 틀어막을 수 있었다.
다행히도 무슨 오해를 한 건지 이브 로웰린은 상처받은 얼굴로 자신을 보더니 그대로 달아났다.
분명 계획하에 연출한 것이었으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새하얗게 질리던 그 얼굴에 괜히 마음이 쓰였다.
“젠장.”
결국 그는 나지막한 욕설을 내뱉으며 그녀가 사라진 흔적을 쫓아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애써 찾은 그녀는 하필이면 제가 제일 싫어하는 이복 아우와 함께 있었다.
테오도르는 에른스트가 싫었다. 아주 어린 날부터 그랬다.
제 어미의 뒤에 숨어 순진한 눈동자를 끔뻑이던 남자애.
동생이란 이름으로 친한 척 말을 걸어오던 그 애를 무섭게 쫓아낸 뒤로, 그 애는 두 번 다시 제 곁에 얼씬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 더 자라 그가 이보네와 가문 간에 미래를 약속한 사이라는 것을 알고 난 뒤에는 더 싫어하게 됐다.
[너도 알고 있었어, 에른스트? 너와 내가 결혼을 할 거래!]
우연히 그 대화를 엿듣고 난 이후로는 그 애로부터 이보네를 독점하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이보네와 닮은 얼굴로 에른스트와 함께 있다니.
꼴도 보기 싫었다.
화가 난 테오도르는 그 둘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그대로 몸을 홱 돌려 침실로 돌아왔다.
돌아온 침실에는 실버…… 어쩌고 하는 여자가 혼자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덜덜 떨며 울고 있었다.
“폐, 폐하, 이, 이제 집에 가도…….”
“썩 꺼져.”
테오도르는 화를 버럭 내며 여자를 쫓아 버렸다.
기분이 몹시 더러웠다.
그는 시종을 불러 술을 찾았다.
홀로 술병을 기울이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건지 알 수 없었다.
그 밤, 성질을 박박 내는 테오도르로 인해 황제궁이 발칵 뒤집혔다.
* * *
부은 눈두덩이를 꾹꾹 누르고 숙소로 가는 길이었다.
“이브 경……!”
호위단의 기사 하나가 다급한 얼굴로 나를 불러 세웠다.
“폐하께서 지금 주무시지 않고 계시는데…….”
“나도 알아.”
나는 잠긴 목소리로 심드렁하니 대꾸했다.
“그게, 경이 지금 가 줘야 할 것 같아서…….”
“내가?”
그는 황제가 아닌 밤중에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데, 매우 난폭해서 아무도 가까이 가지 못한다고 전해 주었다.
그나마 그 패악질을 견디는 아르민마저 퇴근을 하고 없었고, 린든 경은 몇 달 전부터 황궁을 비운 터였다.
“그래도 경은 우리 중 폐하의 고약한 성격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잖아.”
동료는 거듭 내게 황제의 옆을 지켜 달라 부탁했다.
시종장마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다니, 별수 없었으나 이해는 갔다. 기억을 잃은 테오도르는 정말 성격이 이상해졌으니까.
닫힌 침실 문을 열기까지는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조금 전 보았던 충격적인 장면이 아직 가시질 않은 탓이다.
“그런데 아까 그 여자는…….”
“여자? 아, 레이디 세실리아? 진작 도망갔지. 대체 왜 멀쩡한 레이디들을 한 명씩 불러들여서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히고 울리시는지…….”
하루가 멀다 하고 괴롭혀 울리다니…….
그럼 침실에 여자를 들인 게 그 여자가 처음이 아니라는 걸까?
꾸욱-
손잡이를 움켜쥔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어찌 됐든 더 이상 그 여자가 없다는 말에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과는 달리 그의 침대 위는 깨끗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그의 침대 버릇을 생각하자면, 정말 아무 일도 없었나 싶을 정도로 깔끔했다.
‘내가 착각을 한 건가?’
안쪽으로 들어가자, 겁에 질려 달달 떨고 있던 시종들이 나를 보고 반색했다.
그러더니 내게 자리를 맡기고 한 명씩 슬금슬금 사라져 버렸다.
테오도르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연거푸 술잔을 들이켜고 있었다.
스르륵-
고개를 들어 올린 그가 나를 보며 불쾌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빛이 불손해.”
“…….”
“한 잔 마실 텐가?”
그가 내게 술잔을 내밀며 물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그가 피식- 하고 한 번 웃더니, 그대로 제 입에 알싸한 액체를 털어 넣었다.
술을 마시는 그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문득 지금 이 자리에 그와 나 둘만 남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니까, 내가 이보네라는 사실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드릴 말씀이 있어요.”
“…….”
차가운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는 한 손에 술잔을 쥔 채로 나를 삐딱하니 응시했다.
너 따위가 내게 감히 무슨 말을 건네려는지 어디 한번 들어나 보자는 듯한 그 시선이 유독 서늘하여 살갗이 아려 왔다.
그렇지만 내가 말을 걸려고 할 때마다 무시로 일관하던 것을 생각하면, 참으로 관대한 아량을 베푼 것이었다.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아시죠?”
나는 혹여나 그의 마음이 바뀌어 또다시 대화를 단절하기 전에, 재빨리 입을 놀렸다.
“계속 찾았잖아요. 내가 이보네예요. 반년 전에 폐하가 페르디난트에 왔을 때…….”
챙그랑-!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아래로 떨어졌다.
두서없이 주절주절 늘어놓던 나는, 문득 그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
그의 눈동자가 풀려 있었다. 안색은 새하얗게 질려 있었고, 급기야 창백한 얼굴 위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폐하……?”
“으, 윽…….”
“폐하? 폐하!”
나는 놀라 그에게 다가갔다.
“크으윽…….”
고통스레 일그러진 얼굴로 머리를 싸매던 그는 정신을 잃으며 테이블 위로 머리를 쿵, 박았다.
“의사! 의사를 불러와!”
나는 경련하는 그의 몸을 붙들며 복도를 향해 외쳤다.
늦은 시각에 뛰어온 의사는 간신히 그를 진정시키며 몸을 진찰했다.
“휴우…… 폐하께서는 괜찮으십니다.”
“괜찮다고요? 조금 전까지 굉장히 고통스러워하셨어요! 당신, 돌팔이 아니에요?”
“돌팔이라니요! 어떻게 그런 심한 말씀을!”
의사는 태어나서 가장 무례한 말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이 시뻘게져서 씨근덕거렸다.
“그럼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폐하의 몸에 큰 문제가 아직 남아 있는 건……!”
“폐하의 몸에는 아무 문제 없습니다! 낙마 때 입은 상처도 모두 다 회복했다고요! 혹시 이브 경이 폐하의 기억을 억지로 건드린 건 아닙니까?”
역으로 묻는 의사의 질문에 순간 내가 멈칫하고 말았다.
“기억을 건드리다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되묻는 내 목소리가 살풋 떨리었다.
나는 테오도르가 쓰러지기 직전, 그에게 나를 알리려 했던 것이 생각났다.
그리고 낙마 직후, 그가 나를 보고 극렬한 두통을 느꼈던 것도…….
문득 불안한 감각이 엄습했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러나 의사는 냉정하게도 나의 불안에 쐐기를 박았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폐하께선 잃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려고 하실 때마다 두통을 호소하셨습니다.”
“폐하의 두통이…… 기억 때문이라고요?”
“네, 이게 참 의학적으로 설명이 안 되는 일인데…… 허허…….”
의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어 말했다.
“거꾸로 말하자면 폐하의 기억만 건드리지 않으면 두통을 호소할 일도 없다는 뜻입니다.”
“…….”
그간 테오도르가 내 앞에서 두통을 호소한 적이 몇 번 있기는 했다.
단순히 낙마의 후유증이라 생각했는데, 그게 모두 잃어버린 기억과 관련이 있었다니.
“이브 경을 볼 때마다 유독 머리가 아프다고 하시는 것도 아마 같은 맥락일 겁니다. 이브 경은 폐하가 기억을 잃은 그 반년 사이에 만난 새 인연이니까요.”
나는 내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머리가 아프다며 험상궂은 표정을 짓던 테오도르를 떠올렸다.
그러니까 그건 심술궂은 괴롭힘 따위가 아니었다.
나를 보는 게, 그리고 나와의 기억을 떠올리는 게, 그에게는 정신을 잃을 만큼 끔찍하게 아프고 괴로운 일이 되어 버린 것이다.
참 슬프고 잔인한 일이었다.
“그럼 폐하의 기억은 어떡하지요? 영영 못 찾는 거예요?”
“그건 나도 모르겠습니다. 뭐, 기다릴 수밖에요.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억이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
“아무리 낙마를 하셨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반년간의 기억만 싹둑 잘려 나간 건지. 허, 참…….”
의사가 나간 뒤, 적막한 방 안에서 나는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
고요히 잠든 그의 얼굴이 이상하게 괴로워 보였다.
아프고 속상한 건 난데, 왜 그가 이런 표정을 짓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의 기억이 돌아오길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그의 앞에서 이보네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도 할 수 없게 되어 버렸으니까.
테이블 위에 엎어졌다가 침대 위로 급히 옮겨진 몸은 이불을 깔고 있었다.
나는 그가 이불을 덮고 따뜻하게 잤으면 했지만, 잠든 그의 몸은 꿈쩍도 않았다.
결국 나는 이불 대신 입고 있던 겉옷을 펼쳐 그의 몸 위로 덮어 주었다.
“사랑하는 여자도 기억하지 못하는 바보는 아니라며.”
옅은 원망을 담아 속삭였으나, 잠든 그는 듣지 못했다.
나를 잃어버린 그가 미웠고,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는 그의 기억이 얄궂었다.
나는 땀에 젖어 이마 위로 달라붙은 그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 넘겨 주며 생각했다.
기억을 찾으면, 내게 한 행동들을 미안해할까?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며 사과를 하더라도, 내 마음이 풀릴 때까지 절대 받아 주지 않을 거다.
낯선 여자와 함께 있던 건 내가 오해한 거라 할지라도, 그가 내게 보인 차가운 모습과 내 편지를 읽지도 않고 찢던 순간의 속상한 마음이 사라지지는 않을 테니까.
“절대, 절대 쉽게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조금 전 아파하던 그의 얼굴을 떠올린 순간, 곧바로 마음이 약해졌다.
“그렇지만 넌 내가 사랑했던 남자니까, 특별히 용서해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그러니까 빨리 기억을 되찾아, 테오.”
나는 한참 동안 잠든 그의 머리맡에서 속삭이다 자리를 떴다.
* * *
이튿날 아침, 내가 그의 집무실로 출근을 하였을 때, 그는 돌연 성질을 내며 내게 옷을 던졌다.
“누가 이딴 걸 달랬나?”
어젯밤 잠든 그의 위로 덮어 주었던 나의 겉옷이었다.
담담히 그것을 받아든 나는 이제 알 것 같았다. 어째서 다들 그의 호위가 되기를 꺼려 했는지.
어쩌면 이제까지 내 앞에서 보였던 상냥한 모습은 다 내숭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성격 파탄자…….”
그가 들리지 않도록 아주 자그맣게 중얼거렸다.
“방금 뭐라고 했지?”
그러나 예민한 그는 그 작은 소리도 알아듣고 무시무시한 목소리로 나를 위협했다.
“아, 아닙니다.”
비굴하게 둘러대며,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들추는 그의 옆얼굴을 힐끔 쳐다보았다.
어젯밤에 내 앞에서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일은 기억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때, 시종이 들어와 그에게 고했다.
“폐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손님이란 말에 나는 귀가 쫑긋했다.
오늘도 손님이 오기로 했나?
설마 또 여자를 부른 걸까?
“가지.”
테오도르는 거만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일어났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가던 나는 응접실에 도착해 있는 반가운 얼굴을 보았다.
‘벤야민……!’
무려 반년 만에 만나는 벤야민이었다.
그도 나를 발견한 듯, 내 쪽을 보며 작게 눈인사를 했다.
반가워하던 나는 그 옆에서 테오도르를 향해 인사를 하는 카타리나를 발견하고 멈칫했다.
카타리나가 왜 여기 온 거지?
공연히 기분이 나빠졌다. 그리고 기분 나쁜 나의 예감은 적중했다.
“하여, 페르디난트는 황실에 끊겼던 혼담을 다시 제의하고자 합니다.”
혼담이라니.
그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나를 제외한 모두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나는 홀로 넋 나간 표정으로 그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도중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둘이서 자리를 비웠다.
“이브.”
자리에서 일어난 벤야민이 내게 다가왔다.
“오랜만이야.”
그가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나는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벤야민.”
“잘 지냈어?”
“응, 뭐.”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내리자, 그가 내 손목 위를 엄지로 뭉근하게 쓸어내렸다.
오래전에는 자연스러웠던 그의 접촉이 유독 거북스럽게 느껴졌다.
“너는?”
손을 비틀어 빼내며 묻자, 그가 멈칫하더니 이내 잔잔하게 웃으며 답했다.
“잘 못 지낸 것 같아. 네가 보고 싶어서.”
“음…….”
짐짓 장난스럽게 건네는 말에도 나는 웃지 못했다.
아까 혼담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가슴이 울렁거리고 속이 메슥거려서 무엇도 할 수가 없었다.
오랜만에 만난 벤야민에게는 무척 미안했지만.
“머리를 길렀네.”
“이상해?”
“아니, 잘 어울려.”
“…….”
그 말에 내 표정이 흐려졌다. 내게 머리를 길러 보라 권유했던 남자는 더 이상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이브? 표정이 왜 그래?”
그런 내게 벤야민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마른 뺨 위에 그의 손이 닿는 때였다.
벌컥, 문이 열리고 테오도르와 카타리나가 돌아왔다.
나갈 때와는 달리, 몹시 살갑게 팔짱을 끼고서.
다정한 그 모습에 나는 그만 얼굴을 딱딱하게 굳히고 말았다.
* * *
테오도르는 제 팔에 매달린 여자가 무척 거추장스러웠다.
다행히 여자는 똑똑해서, 대화가 금방 통했다.
[대화를 하지.]
[저와…… 단둘이 말입니까?]
은은한 두려움이 감돌던 여자의 눈동자는 이어진 말에 차츰 흥미로운 빛깔이 번져 갔다.
[찾는 사람이 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10년 전 사라진 체르니시아 가문의 막내딸. 페르디난트에서 족적이 끊겼다.]
[10년 전이라면 제가 페르디난트에 입적되기 전이에요.]
[그렇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찾을 수 있겠지.]
[물론 폐하께서 제게 그만한 힘을 실어 주신다면요.]
여자는 비릿하게 웃으며 욕심을 내비쳤다.
[황후 자리를 원해요. 그걸 약속해 주시면 저도 말씀하신 사람을 찾아보도록 할게요.]
[그건 줄 수 없어. 대신 다른 것을 주겠다.]
감히, 황후 자리라니.
테오도르는 대놓고 불쾌한 낯으로 거부했다.
단호한 어조에 카타리나는 차마 다시 황후 자리를 언급하지 못하고 고민했다.
[그럼 페르디난트를 제게 주세요.]
카타리나는 욕심이 많았으나, 처음부터 가질 수 없는 것은 딱 잘라 포기하는 성미였다.
[대신 폐하께서 제가 페르디난트 내에 입지를 다질 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해요.]
[좋아. 그렇지만 페르디난트의 가주를 처리하는 것까진 내가 해 줄 수 없어.]
[괜찮아요. 폐하께서 조금만 도와주신다면 벤야민은 제 선에서 처리할 테니까.]
거래는 빠르게 끝이 났다.
[그리고 이브 로웰린, 그 여자에 대해 알고 싶은데.]
그 물음에 카타리나는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브 로웰린이 여자라고요……?]
[설마, 몰랐나?]
[아니요, 몰랐을 리가요. 다만 폐하께서 그걸 알고 계실 줄은 몰라서 조금 놀랐을 뿐이에요.]
은밀한 거래를 마치고 다시 응접실로 돌아왔을 때, 방 안의 분위기가 기묘했다.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가 이브 로웰린의 뺨을 쓸다가, 제가 돌아온 것을 보고 손을 뗐다.
‘뭘 하고 있던 거지?’
카타리나는 두 사람이 본래 각별한 사이였다고 말했다.
[벤야민이 그 애를 특별히 아꼈지요. 나도 건드릴 수 없을 만큼 싸고돌았으니 말 다 했지요. 그런데 그렇게 아끼던 아이를 폐하께 보낸 것은 저도 조금 의아했어요.]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내게 보낸 거라고?]
[저는 정말로 벤야민이 그 출신 모를 여자애를 정부로 앉힐까 봐 걱정했거든요. 그런데 무슨 심경인지 그 애를 황궁에 보내고서 태평한 게 영 수상쩍어…….]
카타리나의 말을 떠올리자 괜히 더 울컥해졌다.
그저 얼굴에 뭐가 묻어서 떼어 줬을 수도 있고, 정말 별것 아닌 행동이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괜히 그쪽에 신경이 쓰였다.
“대화는 잘 마치신 것 같군요.”
벤야민이 사이좋게 팔짱을 낀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네, 벤야민 님. 덕분에요.”
카타리나가 활짝 웃으며 재잘재잘 떠들었다.
그러나 테오도르는 그녀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리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던 순간 표정을 굳히며 시선을 피해 버린 이브 로웰린이 신경 쓰여서.
괜히 거슬리고 거북해서.
다른 말은 하나도 귀에 들리지가 않았다.
꼭 목구멍에 가시가 걸린 것처럼 꺼칠한 기분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 불쾌한 감각을 애써 무시하며 벤야민을 향해 말했다.
“페르디난트가의 혼담, 받아들이지.”
* * *
[페르디난트가의 혼담, 받아들이지.]
그날, 벤야민을 향해 그렇게 말하던 테오도르의 얼굴은 내가 이제껏 보았던 그 어느 때보다도 낯설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페르디난트의 딸이 황후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황궁 내에 파다하게 퍼졌다.
소문을 접한 모두가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
테오도르 황제와 경쟁 구도였던 에른스트 2황자의 어머니 마르가라테 황후가 페르디난트 가문의 사람이었다.
때문에 테오도르 황제와 페르디난트의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고 공공연히 알려진 바였기 때문이다.
하여 사람들은 만일 테오도르 황제가 결혼을 하게 된다 하더라도, 2대 가문인 페르디난트나 레오브란테가 아닌 다른 가문의 딸을 황후로 맞이할 것이라 여겼었다.
그러나 처음에는 소문을 믿지 않던 사람들도 이내 믿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에서 펼쳐진 황제와 카타리나의 애정 행각이 너무나 적나라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게 있다면 무엇이든 말해. 그대를 위해서라면 알브레히트를 통째로 바칠 테니.”
“저는 이렇게 폐하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걸요.”
카타리나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황궁을 방문했다. 그러곤 테오도르의 팔에 매달려 그와 함께 사랑을 속삭였다.
사람이 있는 곳에서도, 없는 곳에서도.
“폐하와 떨어져 있는 시간이 너무 슬퍼요.”
“나도 마찬가지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그대를 황궁으로 데려오고 싶어.”
“저를 위한 궁전을 내어 주시면 안 되나요? 그럼 매일 같이 폐하의 옆에 있을 수 있을 텐데.”
“오, 그대를 아무 궁전에나 머물게 할 수 없지. 조금만 기다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궁전을 그대에게 바칠 테니까.”
“아니요, 그럼 시간도 돈도 많이 들잖아요. 저는 지금 당장…….”
“괜찮아. 그대는 나의 유일한 여자이니, 충분히 그만한 가치가 있어.”
테오도르는 카타리나를 위해 마르가라테 황후가 사용했던 궁전을 뒤집어엎으며, 그녀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첫눈에 반했다는 게 뭔지 알 것 같군. 내 시간이 둘로 나뉘는 것 같아. 카타리나를 알기 전의 시간과 알고 난 후의 시간.”
“아이참, 폐하.”
까르륵 웃으며 품 안으로 파고드는 카타리나는 무척 행복해 보였다.
테오도르는 막 사랑에 빠진 사춘기 소년처럼,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자랑이라도 하듯 그 사랑을 온 천하에 과시했다.
그의 사랑은 이제까지 소소하게 여자들을 불러들여 티타임을 가졌던 것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그에게 내가 이보네라는 것을 알릴 수 없는 나는 그 떠들썩한 연애를 가만히 지켜보아야만 했다.
누구보다 그와 가까운 거리에서.
* * *
“폐하, 정말 페르디난트의 딸과 결혼하실 겁니까?”
아르민이 영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아르민에게 속으로 동조하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결혼하지 못할 이유라도.”
테오도르는 무심히 답하며 시계를 힐긋 볼 뿐이었다.
시간을 확인한 그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카타리나 양이 곧 도착할 시간이군. 준비하지.”
카타리나를 만나기 위해 응접실로 향하는 그의 발걸음이 경쾌하기 그지없었다.
“어머, 폐하!”
“저런, 언제 왔지? 내가 먼저 그대를 기다리려고 했는데.”
그가 몹시 다정한 목소리로 카타리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제 알았다.
그의 다정함이 굉장히 특별하다는 것을. 모두에게 향하는 다정함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이제 그의 특별함은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 또한.
“폐하가 뵙고 싶어 조금 일찍 왔어요.”
하하 호호 웃는 두 사람의 모습을 본 나는 배알이 꼴렸다.
‘많고 많은 여자들 중 하필이면 카타리나라니. 쟤가 얼마나 성격이 더러운데.’
괜히 보고 있으면 울적해지기만 해서, 입술을 삐죽 내밀며 고개를 숙였다.
“잠시 자리를 비워야겠군. 금방 올 테니 기다려, 나의 피앙세.”
테오도르는 카타리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곤 자리를 비웠다.
그사이, 카타리나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안녕, 이브. 너 사실 여자라며?”
“…….”
그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했으나, 그다지 그녀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던 나는 입술을 꾹 다문 채 발끝만 내려다봤다.
“폐하께서 그러시던데, 꼴사납게 남장하고 주위를 알짱거리는 모습이 아주 같잖다고.”
그러나 카타리나는 어떻게든 내게 시비를 걸고 싶었나 보다.
굳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앞에 다가와 속닥거리는 것을 보면 말이다.
“있지, 이브. 내가 경고 하나 할게. 되도록 빨리 폐하의 곁을 떠나. 나는 네가 너무 거슬리거든.”
“…….”
“너도 봤지? 폐하께서 내게 푹 빠져 계시는 모습.”
움찔.
반응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괜히 못 볼 꼴 보지 말고…….”
계속되는 그녀의 시비를 끊어 준 것은 테오도르였다.
“두 사람, 뭘 하고 있는 거지?”
나와 카타리나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테오도르가 굉장히 험악한 표정으로 우리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화를 내고 있었다.
왜 화가 난 거지?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 그래서, 나를 괴롭히는 카타리나에게 화가 난 건가?
나는 갑자기 가슴이 뛰었다.
“폐하……!”
이때, 카타리나가 그의 품에 와락 안겨 들었다.
테오도르는 그녀를 끌어안으며 나를 노려봤다.
“이브 로웰린, 네가 내 약혼녀 될 여자를 건드렸나?”
그가 화를 내는 상대는 그녀가 아니라 나였다.
아주 잠시 설레었던 가슴이 툭 떨어지며, 무척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두 번 다시 카타리나 양에게 무례하게 행동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당장 나가.”
그는 화를 내며 나를 쫓아냈다.
가슴이 싸르르 아픈데, 이상하게 점점 익숙해지고 무뎌지는 기분이었다.
그 순간 정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사랑한다던 남자는 나를 기억하지 못하고, 이제 다른 여자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그 여자와 결혼을 하겠다고…….
‘그래, 성격 파탄자들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
억울한 마음에 속으로 분을 터뜨리며 내 방에 돌아왔는데, 문득 그가 선물해 주었던 머리핀이 눈에 띄었다.
그의 어머니의 유품이기도 한 물건이었다.
[사랑해, 이브.]
테오는 내게 저것을 주며 사랑을 고백했다.
“…….”
나는 그가 주었던 머리핀을 손에 꽈악 쥐며 생각했다.
기다리자.
테오는 죽은 사람이었던 나를 10년이나 찾아 헤맸어.
그러니까 나도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리자.
* * *
이튿날 오전. 나는 부러 그가 선물하였던 머리핀을 하고서 그의 집무실로 출근했다.
이 머리핀을 보면, 그가 날 기억해 주지 않을까 싶은 마음이었다.
그러나 이른 오전부터 보기 싫은 얼굴이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하필 아침부터…….’
카타리나가 그의 집무실 소파에 제 자리처럼 앉아 쿠키를 집어 먹고 있었다.
원래 저 자리에 앉아 디저트 따위를 먹으며 일하는 그를 관찰하는 것은 내 몫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와 멀찍이 떨어진 문 앞에 서서, 그와 그의 여자를 지켜보아야 하는 처지였다.
카타리나는 보란 듯이 그에게 쿠키를 먹여 주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거절하지 않고 그녀가 주는 쿠키를 받아먹었다.
참 눈꼴 시린 광경이었다.
“아이참. 이브 경, 이것 좀 치워 봐.”
바닥에 쿠키를 떨어뜨린 카타리나가 대놓고 나를 부려 먹었다.
나는 속으로 욕을 짓씹으며 그들의 앞에 떨어진 것을 치우고자 다가갔다.
이때 테오도르가 내 머리 위에 꽂힌 머리핀을 발견하고 반응했다.
“너, 그 머리핀은…….”
“폐하께서 제게 주셨던 거예요.”
담담하게 대꾸하며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러자 그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어머나, 예쁜 머리핀이네.”
잠시를 참지 못하고 끼어든 것은 카타리나였다.
“정말인가요, 테오? 테오가 이브 경에게 이 머리핀을 준 거예요?”
테오?
순간 말아 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이름은 오직 내게만 허락된 애칭이었는데, 언제부터 카타리나가 그를 테오라고 부르게 된 거지?
심지어 나조차도…… 둘만 있는 곳에서만 그를 그렇게 부를 수 있었다. 사람들 앞에서는 깍듯이 폐하라고 부르지 않았나.
“예쁘다. 나 이거 갖고 싶은데, 그래도 되지요, 테오?”
“싫어요.”
그 ‘테오’라는 애칭에 불쑥 화가 치솟은 나는 대뜸 표정을 굳히며 사납게 말했다.
그러자 카타리나가 샐쭉해진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려 테오도르에게 칭얼댔다.
“테오, 나 저 머리핀이 갖고 싶어요. 내게 주세요, 네?”
“…….”
잠자코 있던 테오도르가 내게 명령했다.
“머리핀을 카타리나 양에게 넘겨.”
“줄 수 없습니다. 이건 폐하께서 제게 주신 거예요.”
이 머리핀은 그의 어머니가 남긴 유품이라고 했다. 동시에 그가 내게 건네준 사랑의 증표였다.
결코 다른 사람에게 넘길 수 있는 물건이 아니었다.
“지금 내 말을 거역하는 건가?”
내가 한사코 완강히 버티자,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자박자박 내게 다가왔다.
“…….”
“…….”
그의 시선이 내 머리 위에 장식된 머리핀으로 향했다.
절대 내놓을 수 없다는 태도로 한 발짝 물러나려던 때였다.
쇄액-
돌연 내 쪽으로 상반신을 수그린 그가 내 허리춤에 장식처럼 매달려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후드득-
내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잘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 순간 오래전 체르니시아 저택이 불타고 마르가라테 황후의 사람들에게 머리카락이 잘려 나가던 그날의 기억이 겹쳐지며,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짧아진 머리카락에 고정이 풀린 머리핀이 바닥으로 퉁-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허리를 숙인 그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핀을 주워들었다.
“이제 장식할 머리카락이 없으니, 머리핀은 필요 없겠군.”
“테오, 나를 위해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테오도르는 그대로 집무실 밖으로 나가 버렸고, 카타리나가 기뻐하며 그 뒤를 따랐다.
아르민과 시종들 사이에 남겨진 나는 바닥에 떨어진 은색 머리카락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수군거리는 목소리와 동정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마치 오랫동안 소중히 간직해 왔다는 그의 애정 같아서 서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