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자의 인성이 조금 이상하다-2화 (2/14)

02. 재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슬픔 속에서도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체르니시아의 이름은 세상에서 잊혀졌고, 에른스트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렇게 10년이 흘렀다. 내가 페르디난트에 몸을 의탁한 지도.

그사이 나는 어엿한 청년이 되었으나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는 내가 기사 서임을 받길 원치 않았다.

때문에 나는 여전히 견습 기사의 신분이었다.

나이 많은 견습 기사의 삶은 퍽 한가하고 여유로웠다.

누군가는 불명예스럽다 여길지 모르나, 오래전 체르니시아의 이름을 상실할 적에 명예와 같은 것은 함께 버렸다.

오전의 할 일이 남아 있었지만 대충 도망친 나는 어느 커다란 나무 위에 올라 한적하게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결에 나뭇잎이 한들한들 흔들렸다.

더위를 피하는 데에 이곳만큼이나 제격인 곳도 없었다.

나무 위에 앉아 흔들리는 나뭇잎을 보고 있노라면, 10년 전의 여름이 떠오르곤 한다.

아주 잠시 내 삶을 스쳐 지나갔던 상냥한 어린 황자님. 오후 두 시의 비밀 친구.

최근 들어 그의 이름이 이곳 페르디난트까지 들려오는 일이 잦았다.

검은 머리의 황제, 잔학한 폭군 테오도르.

그의 이야기가 들려올 때마다 나는 두 귀를 닫고 자리를 떴다.

어차피 두 번 다시 내 인생에서 마주칠 일 없는 남자였다.

‘조금, 씁쓸하네.’

공연히 울적해지려는 기분을 누르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사과를 아삭 베어 먹었다. 마치 훈련장의 여느 사내놈들처럼, 품격 없게.

기실, 벤야민을 제외한 페르디난트의 모두가 나를 남자로 알았다.

체르니시아의 사라진 막내딸이 살아 있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도 이러는 편이 훨씬 나았다.

그랜시 할머니가 살아 이 모습을 보았더라면, 놀라 기절초풍하셨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니 괜히 웃음이 키득키득 흘러나왔다.

그러다 불현듯 웃음이 뚝 멎었다.

왜 그 시절엔 몰랐을까.

그랜시 할머니의 잔소리마저 그리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라고…….

입맛이 뚝 떨어진 나는 먹다 만 사과를 아래로 던졌다.

그때였다.

툭-!

아래에서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소란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보자, 커다란 흑마에 올라탄 남자가 보였다.

아무래도 내가 던진 사과에 머리를 맞은 모양이다.

남자의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사과를 던진 이를 찾겠다며 이를 박박 갈았고, 남자는 무표정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자의 얼굴을 확인한 나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바스락-

나도 모르게 나뭇가지를 흔들었다.

싱그러운 녹색 잎사귀 하나가 아래로 포스스 떨어졌다.

정면을 바라보던 남자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어 떨어지는 나뭇잎을 한 손으로 잡았다.

순간, 그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 자리에 뻣뻣하게 굳었다.

10년이 지났어도 곧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테오도르, 상냥하고 다정한 어린 날의 비밀 친구.

기억 속의 어린 황자님은 어느덧 어엿한 알브레히트의 젊은 황제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초록 이파리가 아래로 하늘하늘 떨어졌다.

“…….”

“…….”

꼴깍, 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나와 그는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대치하였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을까?

[누구든 네 정체를 알아보고 진명을 부르는 이가 있거든, 피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10년 전,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저주와도 같은 마법이 아직 내 몸에 남아 있었다.

외양도, 성별도, 이름도, 출생도 모두 바꾼 채 살아가고 있지만.

혹시나…… 아주 혹시나 그가 나를 알아본다면…….

루돌프의 술식이 발동하는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 상대가 나를 ‘이보네 체르니시아’로 인식할 것.

둘, 상대가 나의 진명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소리 내어 부를 것.

그러니 만약에라도 상대가 나를 알아봤다 싶으면 그 귀족적으로 긴 이름을 모두 읊기 전에 때려눕히고 도망치면 되는 것이었다.

괜스레 전전긍긍해진 나는 여차하면 그를 기절시키고 도망칠 심산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던 남자가 두 눈을 느른하게 휘더니, 잽싸게 몸을 날려 나무 위로 도약했다.

“폐, 폐하……!”

“폐하, 어딜 가신 겁니까!”

“폐하께서 사라지셨다!”

“폐하를 찾아라!”

아래에서 사람들의 외침이 들려오는 와중, 내 가슴은 콩닥콩닥 세차게 뛰어 댔다.

두꺼운 손바닥이 내 입가를 막고 있던 탓에, 나는 아주 작은 비명 하나도 꺼내지 못했다.

“안녕.”

두근-

귓가로 듣기 좋은 저음이 부드럽게 흘러들어 왔다.

동시에 내 입을 막던 손바닥이 느리게 떨어져 나갔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두근두근-

테오도르는 어린 날과 마찬가지로 인형처럼 빼어난 이목구비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오랜 기억과 다르지 않은 따스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 다정한 음성을 들으며 나는 짧게 탄식했다.

기억, 못 하는구나…….

참 다행이다, 그가 나를 알아보지 못해서.

그런데 왜 씁쓸한 기분이 드는 걸까.

“응? 안 알려 주는 거야?”

“……이브 로웰린입니다.”

간신히 입술을 떼자 쓴 물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으응, 이브 로웰린. 이브 로웰린이라고…….”

테오도르는 내가 꺼낸 그 거짓 이름을 단조롭게 읊조렸다.

“그래, 안녕.”

길쭉하고 아름다운 눈꼬리가 반달 모양으로 파스스 휘었다.

홀린 듯이 그를 쳐다보던 나는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우리는 더 이상 어린 날의 비밀 친구가 아니었다.

그는 알브레히트의 황제이고, 나는 황제의 머리 위로 무엄하게 먹다 만 사과를 투척한 무뢰한이었다.

어서 사과를 해야 했다.

“저…… 방금 그 사과는 일부러 던진 게 아니라…….”

“내가 지금 많이 피곤해서 쉬고 싶은데.”

그러나 그는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내 말을 끊어 냈다.

“그때까지 내 옆을 지켜 줄래?”

그가 화사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당겼다. 그러며 투박한 내 손에 자연스레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드는 서늘한 감각에 몸이 움찔 떨렸다.

나는 이 감각을 잘 알았다.

오래전, 체르니시아의 마지막 여름이었던 그해.

황궁 후원에 있던 우리만의 그 비밀 장소에서.

[더워?]

유독 더위를 많이 탔던 내게 그 애는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고.

[또 손부채질을 해 주려고?]

[음…….]

내심 먼젓번의 만남을 떠올리며 묻자 그 애는 슬그머니 웃었다.

[손을 줘 봐, 이보네.]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 애는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우리는 비슷한 또래였음에도, 손가락 길이가 한 마디보다도 더 많이 차이가 났다.

[장갑, 벗겨도 돼?]

[자, 장갑은 왜?]

나의 작은 손이 그의 손안에서 화들짝 놀라 꼼지락거렸다.

그것을 본 그가 눈매를 가늘게 휘며 웃었다.

[신기한 거 보여 줄게.]

무척 창피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선량하고 아름다운 그의 눈웃음에 매료된 나는 그만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장갑을 벗자 작고 투박한 손이 드러났다.

내가 항상 장갑을 끼고 다니는 건 검을 잡느라 여기저기 박인 굳은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건 뭐야?]

테오도르가 내 손목의 상처를 보며 두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얼굴이 새빨개져서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게도 그 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테오도르가 내 손에 깍지를 꼈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그 애의 굵은 손마디에 다시 한번 얼굴이 화끈 더워지던 때였다.

[어……?]

나는 고개를 들어 그 애를 보았다. 테오도르는 화사하게 눈꼬리를 접으며 흐드러져라 웃었다.

[어때? 시원하지?]

그 애의 손을 타고서, 시원한 감각이 넘실넘실 밀려왔다.

더위에 지쳐 있던 몸이 차츰 활력을 찾아갔다.

눈을 가늘게 뜨고 보자 잘못 보았나 싶을 정도로 희미한 빛이 맞잡은 손 위로 일렁였다.

[어떻게 한 거야?]

[으응, 비밀.]

테오도르는 키득키득 웃으며 눈을 찡긋거렸다.

그 애가 내 손목의 비밀을 캐묻지 않았던 것처럼, 나도 그 애의 비밀을 더 파헤치지 않았다.

대신 두 손을 꼬옥 맞잡고서 재잘재잘 떠들다가 어느 틈에 스르륵 잠이 들곤 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옛일이었는데…….

“내가 쉬는 동안 옆에 있어 줘. 그럼 사과를 던진 것에 대해선 넘어가지. 어때?”

재차 묻는 목소리가 나를 현실로 깨웠다.

대답 없이 맞잡은 손만 쳐다보고 있자, 그가 붙잡은 손에 힘을 주어 제 쪽으로 잡아당겼다.

덕분에 내 몸이 그에게로 기울었다.

“싫어?”

나른하게 묻는 얼굴은 애초부터 거절은 기대하지 않는다는 듯, 여유롭고 당당했다.

그는 어린 날 그랬던 것처럼 엄지로 맞잡은 손바닥을 개구지게 간질였다.

어린 날의 그는 내 손을 만지는 걸 무척 좋아했다. 예쁘지도 않은 손인데.

울컥한 감정이 샘솟았으나 볼썽사납게 눈물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잔잔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가 빙그레 웃으며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천천히 감기는 그의 눈꺼풀을 보며, 나는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예쁘장한 이목구비는 여전했는데, 10년 전보다 훨씬 더 남성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부드럽게 감긴 눈꺼풀과 그 끝에 하늘하늘 흔들리는 기다란 속눈썹. 곧고 높은 콧날과 새근새근 숨소리를 자아내는 붉은 입술…….

나는 그것들을 눈으로 훑으며, 한참이나 더 그 옆을 지켰다.

* * *

새근새근-

규칙적인 숨소리가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잠들었네…….”

이보네가 잠든 뒤, 슬그머니 눈을 뜬 테오도르는 잠든 이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보네…….”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목소리 어디에서도 방금 자다 일어난 사람의 기색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초부터 잠든 적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잠들 수 있을까.

오래도록 찾아온 이를 목전에 두고서.

“역시, 살아 있었어…….”

그의 입꼬리가 흐리게 말려 올라갔다.

두근두근-

맞잡은 손에서부터 시작된 심장의 울림이 온몸을 뒤흔들 듯 세차게 흔들렸다.

테오도르는 조심스럽게 그녀의 손목 안쪽을 확인했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팠던 자그마한 화상 자국이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이제 괜찮아, 이보네. 내가 널 찾았으니까.”

그가 이보네의 손목을 엄지로 뭉근하게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러다 돌연 그의 입가에 남아 있던 희미한 미소가 딱딱하게 굳었다.

“어째서 망자의 저주가 남아 있는 거지.”

손목의 상처에서 풍기는 불쾌한 기운에 테오도르는 잘생긴 얼굴 위로 인상을 썼다.

“설마 그자가…….”

테오도르는 페르디난트의 젊은 가주를 떠올렸다. 기분이 퍽 나빠졌다.

“폐하.”

이때 그의 수하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갑자기 사라지셔서 다들 당황했…….”

“목소리를 낮춰라.”

황제의 수석 호위 기사 린든은 자신을 지그시 노려보는 살기등등한 테오도르의 눈을 보고서 흠칫했다.

조금 전, 난데없이 하늘에서 툭 떨어진 먹다 만 사과를 맞고 황제가 사라진 일로 호위단은 비상이 되어 그를 찾고 있던 터였다.

사라진 황제가 걱정되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황제에게 실수로 사과를 떨어뜨리고 만 가엾은 이를 구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막상 찾아낸 황제는 낯선 청년을 소중히 보듬고 있었다.

어찌 된 영문인지 궁금하였으나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영특한 린든은 그것을 묻지 않았다.

대신 눈동자를 데루룩 굴리며 황제의 살벌한 시선을 피했다.

“어…… 음…… 카타리나 양이 폐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만나러 가지 않으시렵니까?”

목소리를 낮추어 묻자, 황제는 어울리지 않게도 온화한 눈빛을 했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이제 필요 없다. 이보네를 찾았으니까.”

“네? 그럼 이분이 바로 그…….”

그 말에 린든이 화들짝 놀라 황제의 옆에 기대어 잠든 낯선 청년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얼핏 보이는 행색은 영락없는 평민 사내였으나, 유독 하얗고 또렷한 이목구비는 눈을 감고 있었음에도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그것을 인지한 순간 눈을 가리던 장막이 걷히며, 황제에게 기댄 청년이 남자가 아니라 남장을 한 여자임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마법에 걸렸다 깨어난 것처럼.

“체르니…….”

“조심해라.”

린든이 이보네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는 순간, 테오도르가 그를 막았다.

“망자의 저주가 남아 있다.”

자세한 설명이 없었음에도, 린든은 테오도르가 말하는 저주가 어떤 종류의 것인지 느낌이 왔다.

그리고 그만큼이나 강력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오직 페르디난트뿐이었다.

“그렇다는 건…… 역시 체르니시아의 몰락에 페르디난트의 개입이 있던 거로군요.”

“하지만 이상하단 말이지.”

테오도르는 두 눈을 가늘게 좁혀 뜨며 중얼거렸다.

“누가 루돌프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를 죽였을까. 그리고 왜 망자의 저주가 사라지지 않고…….”

이보네의 손목에 남은 불쾌한 기운은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것이었다.

그러나 시전자의 죽음과 동시에 사라졌어야 할 저주와도 같은 술식은, 여전히 남아 이보네를 꼭꼭 감추고 있었다.

문득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 이브 로웰린에 대해 조사해 와.”

“네, 폐하.”

짤막하게 명령한 그는 다시 이보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불편해 보이는 머리통을 제 무릎 위에 눕히자 잠든 이의 표정도 한결 편안해졌다.

“이보네…….”

테오도르는 뭉근하게 풀린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짧아진 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오래전의 그녀는 늘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고수하였는데, 지금은 턱선을 조금 넘는 짧은 단발을 하고 있었다.

손가락 사이로 파스스 흩어지는 머리카락 한 올, 한 올마저도 미칠 듯이 사랑스러웠다.

“보고 싶었어, 나의 이보네.”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어울리지 않는 다정한 음색에 잠자코 지켜보던 린든은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테오도르 레온느 알브레히트.

그가 누구인가.

알브레히트 역사에 다시없을 개차반, 무도하고 잔인한 그 폭군이 그런 다정한 목소리를 내었을 리가 없…….

“나의 보물…….”

린든이 애써 고개를 저으며 자신이 들은 것을 부정하려 할 적에 테오도르는 다시 한번 애처로운 음색으로 읊조렸다.

그러다 돌연 고개를 들어 아직까지 그 자리에 있던 린든을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뭐 하고 있지? 너, 지금 설마 이보네를 훔쳐보고 있는 건가?”

마치 품에 안은 이를 허락 없이 담은 버릇없는 수하의 눈알을 도려낼 것만 같은 스산한 분위기가 그의 주위로 감돌았다.

“아, 아닙니다, 폐하!”

“꺼져.”

“네, 넵! 당장 꺼지겠습니다!”

직감적으로 위험을 느낀 린든은 재빠르게 대답하며 도망쳤다.

린든이 떠난 곳에 테오도르와 이보네, 둘만이 남았다.

솨아아-

잔잔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이 그녀의 뺨을 스쳤다.

테오도르는 이맛살을 찌푸리며 조금 전 여름 공기가 스쳐 간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아주 작은 실바람 한 줄기마저 그녀에게 닿는 게 싫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오래전 그 삭막했던 황궁에서, 제가 찾아낸 저만의 보물이었다.

오로지 저만이 알고 저만이 닿고 싶은 보물이었는데, 오랫동안 그녀를 잃어야 했다.

치미는 분노에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자, 그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아…….”

놀란 테오도르는 황급히 손에 힘을 뺐다. 다행히 그녀는 깨지 않았다.

“미안, 이보네. 놀랐어?”

그가 몸을 기울이며 부드럽게 속삭였다.

동시에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하얀 빛이 이보네의 몸을 감쌌다.

찌푸려져 있던 그녀의 얼굴이 다시금 평온해졌다.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잠든 그녀의 얼굴을 하염없이 쳐다보았다.

그러다 그가 시선을 내려 맞잡은 손을 보았다.

천천히 깍지 낀 손을 놓으며,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그리고 일순,

홰액-!

손목까지 오던 그녀의 소매를 어깨 바로 아래까지 걷어 올렸다.

새하얀 팔뚝 곳곳에 희미한 흉터가 남아 있었다. 분명한 학대의 흔적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테오도르의 입매가 기묘하게 뒤틀렸다.

“그 X같은 페르디난트의 것들이 너를 이렇게 만들었어, 그렇지?”

그의 손끝이 그녀의 팔을 쓸어내릴 때마다 황금색 빛무리가 살갗 위로 스며들며 흉터가 하나씩 사라져 갔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 이보네.”

느리게 내려오던 손이 그녀의 손목 부근에서 멈추었다. 그곳에는 다른 것들보다 다소 크고 짙은 흉터가 있었다.

“내가 다 처리해 줄 테니까.”

스산하게 웃으며 속삭인 테오도르는 이내 고개를 숙여 그녀의 손목 위로 입을 맞추었다.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내가 그 나무 위에서 까무룩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느새 하늘은 어둑어둑 저물어 있었고, 내 손을 맞잡고 있던 남자는 보이지 않았다.

‘언제 이렇게 잠든 거지?’

낭패라는 생각에 얼굴을 찌푸리며 아래로 내려갔다.

별채 앞을 지나가는데, 한바탕 난리가 나 있었다. 패악질의 주인공은 카타리나 페르디난트였다.

카타리나는 아주 못된 악마 같은 여자였다. 아마도 모두가 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녀는 저택의 모든 사람들을 싫어하는 것 같았지만, 그중에서도 나를 가장 싫어했다. 아주 어릴 적부터.

‘마녀.’

괜한 사용인들에게 화풀이하고 있는 카타리나를 향해 입술을 비죽 내밀며 속으로 중얼거리던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치고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미 카타리나가 나를 발견한 뒤였다.

“이브 로웰린.”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순간, 나는 조금 전의 실수를 통감했다.

카타리나는 딸이 없는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방계에서 직접 골라 데려온 여자였다.

한때 - 그러니까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세상에서 지워지고 난 뒤에 - 카타리나가 2황자 에른스트와 약혼을 할 거라는 소문이 저택 내에 흉흉하게 돌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차기 황제로 가장 유력한 이는 테오도르가 아니라 강성한 외가를 둔 에른스트였다.

그러나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사후, 두 사람의 혼담이 깨졌다.

그리고 카타리나는…….

“이쪽으로 와.”

카타리나가 나를 향해 손을 까딱였다.

“너, 방금 날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렸지?”

“…….”

“내가 묻잖아, 뭐라고 했냐고.”

잘 관리된 뾰족한 손톱이 내 얼굴을 푹푹 찔러 댔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이고서 입술을 다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손톱 끝을 아프게 세웠다.

“대답, 안 할 거야?”

그녀는 당장 대답하지 않는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나는 안다. 대답을 하면 하는 대로 무언가 트집 잡아 괴롭힐 거란 걸.

“카타리나 페르디난트.”

이때, 구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벤야민 님.”

곧바로 표독스러운 눈빛을 거둔 카타리나가 가증스럽게도 수줍은 표정을 지으며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카타리나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짧은 백발의 미청년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벤야민.

내가 이 지옥 같은 페르디난트에서 버틸 수 있게 해 주었던 그 낡은 3층 방의 친구.

그리고 페르디난트의 젊은 주인.

수년 전,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얼마간 보이지 않던 그는 페르디난트의 가주가 되어 다시 나타났다.

“뭘 하고 있던 건가?”

어느덧 내 옆에 선 그가 카타리나를 내려다보았다.

서리처럼 차가운 눈빛에 기가 죽을 법도 하건만, 카타리나는 당당하게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교육을 하고 있었어요.”

“누구 마음대로?”

“이브 로웰린은 본래 제가 데리고 있던 종자였어요. 돌아가신 루돌프 전대 가주님께서 제게 선물해 주셨지요. 제가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갖게 된 걸 기념하여.”

“하지만 지금은 아니지.”

“네, 벤야민 님께서 이브를 제게서 억지로 뺏어 가셨으니까요. 그리고 아직 값을 치르지 못하셨고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나의 처지를 설명하는 카타리나의 눈꼬리가 얄밉게 접혔다.

“그러니 이브 로웰린은 제가 빼앗긴 게 아니라 빼앗겨 드린 거지요. 저는 어서 벤야민 님께서 제게 정당한 값을 치러 주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답니다.”

정당한 값.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얻은 날, 루돌프는 그녀에게 원하는 선물을 고르라 하였다.

그리고 그녀가 선택한 것은 다름 아닌 견습 기사 신분의 어린 나였다.

알브레히트의 귀족들은 주종 계약 문서에 종속 마법을 거는 일이 왕왕 있었다.

시전 가능한 자가 많이 없어 아무나 하지는 못했다.

루돌프는 카타리나에게 마법이 걸린 주종 문서를 주었고, 그것은 새로 가주가 된 벤야민마저도 함부로 파기할 수 없었다.

오직 소유자가 생각하는 ‘정당한 값’을 치렀을 때에만 소유권을 이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가 벤야민에게 제시한 ‘정당한 값’은 다름 아닌 황후의 자리였다.

벤야민은 그녀에게서 나를 빼내 오기 위해, 물심으로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비로소 성과를 보이기 시작했다.

실은 오늘 테오도르가 페르디난트에 방문할 거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소문이 자자했으니까.

테오도르 황제와 카타리나의 혼담이 오가고 있다고.

‘말도 안 돼. 테오도르처럼 천사 같은 애가 카타리나 같은 마녀와 결혼이라니.’

그러나 오늘 방문하기로 한 테오도르 황제가 중간에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만남이 무산되었다.

그래서 그 분풀이를 아랫사람들에게 하던 카타리나는 마침 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리고 보란 듯이 나를 괴롭힌 거겠지.

나를 괴롭히는 건 벤야민에게 어서 빨리 ‘정당한 값’을 치르라는, 그러니까 어서 빨리 제게 황후의 자리를 달라는 경고이기도 했으니까.

물론 그녀와 테오도르의 만남이 무산된 데에는 나의 탓이 컸으니, 카타리나가 나를 핍박한 것은 매우 현명한 선택이었다.

비록 그녀는 사실을 모르겠지만.

“한 번 더 같은 짓을 반복한다면 페르디난트의 이름을 박탈할 것이다.”

싸늘한 눈으로 그녀를 빤히 쳐다보던 벤야민이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하듯 속삭였다.

그러나 카타리나는 만연한 미소를 입가에 띠며 받아쳤다.

“하지만 그러실 수 없지요. 페르디난트에는 계집아이가 필요하고, 난 당신 아버지가 직접 골라 온 계집앤데.”

“아버지라, 고작 그따위 이유로.”

벤야민은 무기질적인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정말 그러지 못할 거라 생각하나?”

“네, 못 해요. 왜냐하면 당신은…….”

나를 힐끗 쳐다본 카타리나가 벤야민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갔다.

그러고는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귓속말을 속닥였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지?

순간 벤야민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핏기 없는 새하얀 얼굴을 보아하니, 분명 저 못된 카타리나가 나쁜 말을 한 것이다.

카타리나는 그대로 나와 벤야민을 지나쳐 걸어갔다.

그 당당한 걸음걸이를 보자 무척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카타리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그녀가 테오도르의 황후가 되는 건 싫었다.

“이브.”

이때 벤야민이 나의 얼굴을 조심스럽게 감싸며 들어 올렸다.

“손톱자국이 났네.”

내 왼뺨을 지그시 응시하던 그의 두 눈이 느리게 찌푸려졌다.

“괜찮아. 어차피 흉도 안 질 텐데.”

“…….”

그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다물었다.

“정말 괜찮아.”

나는 애써 웃으며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었다.

벤야민이 지금도 나를 위해 얼마나 큰 노력을 해 주고 있는지 안다.

주종 계약을 깨뜨리는 방법은 정당한 값을 치르거나 혹은 소유자를 죽이는 것뿐인데, 그렇다 하여 카타리나를 죽일 순 없지 않은가.

“난 지금으로도 충분히 네게 고마워. 그러니까…….”

가볍게 손사래를 치며 그때까지도 내 얼굴을 감싸고 있던 벤야민의 손을 밀어내고자 할 때였다.

홰액-!

돌연 그가 내 손목을 붙잡아 당기더니, 그 위로 코끝을 묻었다.

“이브.”

“벤야민?”

“기분 나쁜…… 불쾌한 냄새가 나…….”

나직하게 중얼거리던 그가 돌연 내 손목을 덥석 깨물었다.

“아얏.”

카타리나가 내 뺨을 찔렀을 때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따끔한 통각이 느껴졌다.

하얀 손목 위로 선연하게 남은 이빨 자국을 보며, 나는 그를 째릿 노려보았다.

“아프잖아, 벤야민! 미쳤어?”

그러나 벤야민은 대꾸하지 않고 의뭉스럽게 생긋 웃을 뿐이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몸을 돌리려는 때였다.

“그런데, 이브.”

그가 내 옆으로 와 바짝 붙으며 물었다.

“낮에 어디 있었어?”

“응……?”

“찾아도 안 보이던데.”

“음, 뭐…….”

나는 슬금슬금 눈동자를 굴리며 그의 시선을 피했다.

대답해 주지 않자 그가 커다란 몸으로 내게 매달렸다.

“무거워. 저리 가.”

“싫어.”

그러나 그는 내게서 떨어질 생각이 없는 듯 내 어깨 위로 제 고개를 비비적거리며 귀찮게 굴었다.

나는 피식- 웃으며 그의 짧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자 기분이 좋은 듯 갸르릉거리는 게 꼭 커다란 새끼 짐승 같았다.

‘이렇게 순해서야. 어떻게 페르디난트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나는 괜히 그가 걱정되어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전대 가주인 루돌프와 비교하면, 벤야민은 너무 착하고 순진했다.

“조금만 참아. 곧 널 빼낼 테니까.”

그 말에 문득 내 걸음이 멈추었다.

정당한 값.

그것을 떠올리자, 비록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로 웃던 낮의 테오도르가 뭉실 생각이 났다.

그는 오래전 기억처럼 한결같이 상냥하고 친절했다.

‘다시 볼 수 있을까?’

그리고 그러한 나의 의문은 만 하루도 되지 않아 풀렸다.

“안녕.”

전날과 같은 시각, 같은 장소. 소리 없이 나타난 그가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널 데리러 왔어.”

테오도르.

그가 나를 데리러 왔다.

뎅- 뎅-

오후 두 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아스라이 번져 나갔다.

* * *

평소와 다름없이 나무 위에서 무료하게 휴식을 취하던 중,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퍼뜩 놀라 아래로 떨어질 뻔했다.

삐끗거리는 내 몸을, 그가 부드럽게 붙잡았다.

한 팔로 내 허리를 낚아챈 테오도르는 나를 안고서 아래로 부드럽게 착지했다.

잠시간 테오도르의 품에 안겨 있던 나는 퍼뜩 놀라 그를 밀어내고는 경계의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를, 왜요……?”

테오도르가, 나를?

왜?

설마 나를 알아본 건가?

쿵, 쿵, 쿵-

거세게 뛰는 심장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묻자, 그가 눈매를 부드럽게 휘었다.

“이브 로웰린.”

그러나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나의 거짓 이름이었다.

“아직 서임식은 치르지 않은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 그대를 황제 직속 기사단에 영입하려고.”

뒤늦게 그가 나를 알아본 게 아니란 걸 깨달았다.

안도인지 혹은 무엇인지 모를 감정이 가슴 안에서 솟구쳤다.

“그러니까, 왜 저를…….”

“그대의 기사로서의 솜씨를 보았어. 아주 훌륭하던데.”

“네? 제가요?”

순간 나는 당황해서 되물었다.

다른 사람과 착각한 게 아니고……?

체르니시아의 성을 잃은 이후로, 한 번도 남들 앞에서 제대로 검을 잡은 적이 없었다.

“폐하께서는 제가 검을 휘두르는 것도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응. 내게는 아주 뛰어난 안목이 있거든. 그대가 나를 지키는 검이 되어 줄 거라는 믿음이 들어.”

“하지만 저는 페르디난트의…….”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그럼 문제없지 않나?”

“…….”

물론 문제가 있었다.

나는 페르디난트의 소속이면서 동시에 카타리나와 주종 관계로 엮여 있으니까.

“그러니까 나와 함께 가지 않을래?”

나는 망설임이 가득한 눈으로 내게 손을 내미는 그를 쳐다보았다.

반달 모양으로 휜 황금빛 눈동자는 차마 거역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웠다.

어떡하지.

불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도 모르게 그의 아름다움에 홀려 비척비척 다가가려 할 때였다.

“이브.”

문득 나타난 벤야민이 나와 그 사이에 끼어들며 가로막았다.

화사하게 웃고 있던 테오도르의 두 눈이 내 어깨 위로 자연스럽게 얹은 벤야민의 손을 힐긋 쳐다보았다.

언제나 따사롭던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식어 갔다.

“페르디난트의 새 주인 아닌가.”

테오도르가 처음 듣는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벤야민에게 알은체를 했다.

그제야 벤야민이 뒤늦게 반응하며 테오도르를 쳐다보았다.

“테오도르…… 황제 폐하.”

벤야민은 나를 뒤로 숨기며 그에게 고개를 까딱였다.

“벤야민 페르디난트가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벤야민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테오도르에게 인사했다.

졸지에 벤야민의 뒤에 숨게 된 나는 주위를 둘러싼 묘한 기류에 얼떨떨하여 두 눈만 끔뻑였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

“애석하게도, 그대를 만나러 온 게 아니야.”

테오도르의 시선이 벤야민을 지나쳐 내게 닿았다.

딱딱한 금안이 언제 그랬냐는 듯 둥글게 휘었다.

“이브 로웰린 경.”

테오도르는 물 흐르듯 유려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내 쪽을 향해 팔을 뻗었다.

홰액-

굵은 손이 예고 없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이쪽으로 와.”

“폐하……?”

그리고 내 몸이 그대로 그에게 이끌려 가는 동시에.

“안 돼, 이브.”

덥석-

반대쪽 팔이 벤야민에게 붙잡혔다.

“…….”

“…….”

“…….”

기이한 정적이 우리 세 사람을 감돌았다.

벤야민을 향한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삐딱하게 치솟았다.

“무슨 짓이지?”

“폐하께서야말로.”

벤야민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반문했다.

일국의 황제에게 보이는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치 불손한 눈빛이 테오도르에게 향했다.

“이브 로웰린은 페르디난트의 기사. 아무리 알브레히트의 주인이라 하더라도 이유 없이 데려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브 로웰린은 아직 기사 서임을 받지 않았으니, 정확히는 틀린 말이지.”

테오도르는 비식 웃으며 덧붙였다.

“황제 직속 기사단에 영입할 것이다. 이미 이브 로웰린 경에게 허락도 구했지.”

“네……?”

제가……요? 언제요?

당혹스러워 기억을 더듬어 보았으나 그의 제안에 승낙한 기억은 없었다.

“정말이야, 이브?”

벤야민이 내게 물었으나 대답은 테오도르에게서 흘러나왔다.

“이브 경의 눈동자가 내게 그리 말하는 것을 보았다. 황궁으로 데려가 달라고.”

그 뻔뻔한 대답에 나와 벤야민은 동시에 말을 잃었다.

“……이브의 허락을 구한 게 아니군요.”

“그렇다면 황명을 내리지. 나를 따라와라, 이브 경.”

테오도르가 왜 이렇게 갑자기 내게 집착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의 의사와는 별개로 나는 페르디난트를 함부로 뜰 수 없었다.

“불가합니다. 페르디난트의 가주로서 허락지 못합니다.”

벤야민은 내가 페르디난트의 소속이기 때문에 불가하다고 말했지만, 실상은 카타리나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주종 계약서가 있는 한 나는 이곳을 벗어날 수 없었다.

“마땅히 값을 치르겠다.”

그래서 테오도르가 그렇게 말했을 때,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나를 얽매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정당한 값’은 오직 하나뿐이었으니까.

카타리나에게 황후 자리를 주는 것.

그것 외에는 카타리나의 주종 계약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으니까.

“역시 불가합니다.”

이때, 벤야민의 단호한 거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 그가 카타리나와의 계약을 발설할까 봐, 나는 못내 노심초사해야 했다.

비록 테오도르가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에게 나의 비루한 신세를 알리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그러나 벤야민이 이어 꺼낸 말은 조금 뜻밖이었다.

“이브 로웰린을 대신할 값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두 사람의 황당한 대치에 난처한 와중에도 조금 감동스러운 발언이었다.

하지만 감동을 받은 것은 나뿐인 듯, 테오도르가 몹시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페르디난트의 젊은 주인은 욕심이 많군. 꼭 그대의 부친처럼.”

“폐하께서도 알아보셨듯이 이브 경은 뛰어난 실력자니까요.”

잠깐. 지금 그가 말하는 ‘이브 경’이 나를 말하는 건가?

내가 언제부터 뛰어난 실력자였다고?

페르디난트의 이브 로웰린은 서임식도 치르지 못하고 나이만 차 버린 한심한 한량 아니었나?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

이때, 내내 내 손목을 붙들고 있던 테오도르의 손이 스르륵 빠져나갔다.

그는 삐딱하니 팔짱을 끼고서 나를 쳐다보았다.

“그대의 말마따나 이렇게 실력도 뛰어난 시해범을 그대로 둘 순 없으니…….”

일순 그의 얼굴에 남아 있던 표정이 모두 사라졌다.

그것을 마주한 순간 섬찟한 기운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내 기억 속의 그는 언제나 온화한 낯이었기에, 표정이 사라진 테오도르는 이제껏 내가 알던 이와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낯설었다.

그가 시린 눈동자로 나를, 그리고 벤야민을 쳐다보았다.

“이브 로웰린을 황제 시해범으로 구속할 것이다.”

황제 시해……?

무어라 대꾸할 틈도 없이 테오도르가 허공 위로 손짓했다.

그러자 멀찍이 떨어져 있던 그의 기사들이 순식간에 나를 에워싸며 검을 겨누었다.

“시해범……?”

고개를 갸웃하는 벤야민을 향해, 테오도르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말 그대로.”

“이브, 폐하를 죽이려 했어?”

벤야민이 무척 심각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아, 아니! 절대 아니야!”

나는 억울해 항변했다.

“억울합니다, 폐하. 저는 결코 그런 적이…….”

“나의 신하들이 모두 보았다. 그대가 내 머리를 겨냥하며 둔기를 투척한 것을. 하마터면 생명이 위험해질 뻔했지.”

문득 머릿속에 스치는 장면이 하나 있었다.

설마 사과 떨어뜨린 그거?

“그건 실수……!”

그때 분명 용서해 준다고 했으면서!

억울해서 눈물이 핑 돌려던 찰나.

“그래, 그 작은 실수는 그냥 넘어가기로 했었지.”

테오도르는 나른하게 고개를 까딱이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아름다운 황금안 속에 내 얼굴이 비쳤다.

“하지만 나는 변덕이 심한 황제라서. 알브레히트의 젊은 폭군과 관련된 소문을 듣지 못했나 보지?”

사르륵-

생긋 눈꼬리를 접어 내린 테오도르가 예쁘게 웃으며, 살벌하게 위협했다.

움찔, 떨리는 몸을 벤야민이 꼬옥 붙잡아 주었다.

가느다랗게 휜 눈매는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아름답고 고혹적이었다.

그러나 그 사이로 번득이는 안광은 진실로 상대를 집어삼킬 듯 섬뜩했다.

짧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알브레히트의 젊은 황제를 향한 그 흉흉한 소문이 모두 사실인지도 모른다고.

어른이 된 테오도르는 내 기억 속 어린 그와 달리, 잔학하고 냉정한 폭군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른다고.

“그렇지만 이브 로웰린 경. 나는 한편으로 아주 자애로운 황제라서, 특별히 아량을 베풀어 줄 수 있어. 그대가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협박……하시는 겁니까?”

“황제 시해범이 되어 목이 잘리는 건 싫잖아?”

“…….”

그는 내게 그를 해칠 의도가 없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협박을 하고 있음을 부인하지 않았다.

“목이 잘리고 싶은 거야?”

“…….”

아무런 대답도 못 하고 있자 그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독특한 취향이 있네, 이브 로웰린 경.”

“아, 아니요!”

자칫 가만히 있다가는 정말로 내 목을 벨 것만 같아서, 나는 재빨리 대답했다.

세상에 누가 목이 잘리는 취향 같은 걸 갖고 있단 말인가?

누구보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나를 괴롭히는 악랄한 카타리나로부터 벗어나고 싶었고, 나를 약해지게 만드는 기억들로부터 벗어나고 싶었다.

다만 나는 내 거취를 결정할 권리가 없을 뿐이다.

벤야민을 힐긋 보았으나, 그는 나보다도 더 심각하게 굳어 있었다.

“이래도 이브 로웰린을 내게 보내지 않을 텐가?”

“그런 억지를 부리셔도 불가합니다. 이브는…….”

그가 나를 놓지 못하고 창백한 낯으로 테오도르를 노려보고 있을 때였다.

타닥, 탁, 탁-

뛰어오는 구두 소리와 함께 등장한 이는 다름 아닌 카타리나였다.

“폐하……!”

몇 발짝 거리에서 멈춰 선 그녀가 기묘한 대치 속 중앙에 자리한 나를 노려보았다.

그녀의 시녀가 귀엣말로 무언가 속닥여 주자,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듯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러나 이내 화를 꾹 눌러 참는 표정을 지으며 싱긋 웃었다.

“페르디난트의 카타리나가 위대하신 알브레히트의 주인을 뵙습니다. 알브레히트에 영광을.”

그녀는 나와 벤야민은 보이지 않는 듯 테오도르를 향해 다가가 허리를 숙였다.

“예고도 없이 납셨다기에 달려왔습니다. 또 지난번처럼 엇갈려 뵙지 못하고 보내는 무례를 드릴까 봐요.”

그녀가 말끝을 늘이며 나를 찌릿 노려보았다.

“그런데 이브 로웰린을 데려가러 오셨다고요.”

카타리나의 입에서 내 이름이 나오자, 그제야 테오도르가 시선을 돌려 그녀를 쳐다보았다.

카타리나는 우아하게 웃으며 내게 친근하게 팔짱을 꼈다.

“죄송하지만 폐하, 이브 로웰린은 제 소유랍니다. 데려가는 것은 불가해요.”

테오도르는 자신을 막아서는 여자를 빤히 쳐다보았다.

“못 들으셨나요? 이 애와 제가 주종 계약으로 묶여 있다고.”

“…….”

뚫어질 듯 물끄러미 응시하는 첨예한 눈빛에 카타리나의 두 뺨이 슬그머니 달아올랐다.

그녀의 성질머리를 모르는 이가 보았더라면 감탄하였을 만큼 수줍고 어여쁜 자태였다.

한참 뒤, 이내 테오도르의 입꼬리가 비릿하게 말려 올라갔다.

“너구나.”

“폐하……?”

그 서늘한 황금안에 카타리나가 순간 흠칫 놀랐다. 그렇지만 그녀는 숨을 꼴깍 삼키며 용기를 냈다.

“이브 로웰린을 데려갈 거라면 정당한 값을 치르세요.”

“정당한 값이라…….”

“네, 정당한 값이요. 황후 자리를…….”

카타리나가 끝내 자신의 욕심을 내비치려던 순간이었다.

스윽-

서늘한 칼날이 카타리나의 목덜미에 닿았다.

“나도 좋아해. 정당한 값을 치르는 거.”

테오도르가 생긋 눈매를 휘며 검날을 느슨하게 휘둘렀다.

“아아악!”

나를 포함한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놀라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카타리나는 터져 나오는 비명을 참으며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새빨간 핏물이 그녀의 살갗 위로 배어 나오고 있었다.

“정당한 값은 이걸로 하지.”

테오도르는 어느 때보다도 예쁘게 웃으며 말했다.

“네 목숨.”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카타리나를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는 무생물을 대하듯 차가웠다.

이러다 정말로 사람이 죽겠다 싶어 간담이 서늘해지는 순간이었다.

“물론, 네 목숨값 따위로 이브 로웰린은 지나치게 과분하지만.”

모두가 경악한 와중에 오직 테오도르만이 느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사, 살려 주세요……!”

그 적나라한 살의를 버티지 못한 카타리나가 울며 살려 달라고 애원했다.

“이, 이브 로웰린을 드릴게요, 그러니…….”

그녀가 헐떡이며 자신의 품속을 뒤졌다. 그 안에서 종속 마법이 걸린 문서가 튀어나왔다.

‘저걸 계속 갖고 다녔다고?’

마치 언제든 누군가에게 내줄 날을 기다린 것처럼 곧바로 튀어나온 문서를 보며 나는 조금 당황했다.

대체 나를 얼마나 더 괴롭히려고 매 순간 저것을 지니고 다녔단 말인가.

“흐음.”

테오도르는 천천히 검을 거두었다.

카타리나가 내미는 주종 문서에는 어린 시절의 내가 루돌프에게 붙들려 억지로 찍은 지장이 있었다.

테오도르가 그것을 건네받는 순간 소유자의 이름이 그의 것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정당한 값’은 소유자가 주관적으로 느끼는 바람직한 몫의 대가였다.

내내 황후 자리를 원했던 카타리나가 결국 죽음의 공포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그 무엇보다 ‘정당한 값’으로 스스로 인지한 것이다.

‘그럼 나는 이제…….’

나는 테오도르의 손에서 펄럭이는 주종 문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테오도르의 종자가 된 건가……?’

내가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찌지직- 찌익-

얇은 종잇장이 그의 손에서 갈기갈기 찢어져 형체를 잃었다.

“린든.”

“네, 폐하.”

테오도르의 부름에 나타난 젊은 남자가 찢어진 종잇장을 주섬주섬 챙겼다.

“태워.”

“알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까딱 끄덕이고는 다시 물러났다.

나는 다소 충격받은 얼굴로 멍하니 서서 그 광경을 모두 지켜보았다.

오랫동안 나를 압박해 온 주종 문서가 너무나 쉽게 사라진 것이다.

“왜……?”

나도 모르게 황망한 질문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그 순간 테오도르가 나를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조금 전까지 나를 악랄하게 협박하던 모습은 거짓인가 싶을 정도로 깨끗하고 온유한 눈웃음이었다.

“나는 그대를 노예로 데려가려는 게 아니야, 이브 로웰린 경.”

두근-!

그 말에 가슴이 이상하게 뭉클해졌다.

“이제 방해되는 건 없겠군. 따라올 거지?”

“아…….”

“다시 한번 언급하지만, 그대가 오지 않는다면 황제 시해죄를 물을 거야. 물론 이건 아주 진지한 협박이고.”

“…….”

테오도르는 몹시 자애로운 얼굴로 나를 협박했다.

그리고 그 협박에 내 고개가 느리게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차피 더 이상의 선택지는 없지 않나. 무려 폭군의 협박인데.

긍정의 답에 순간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화사한 웃음기가 번져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를 따라 웃지 못하고 벤야민을 힐긋 돌아보았다.

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벤야민, 나 폐하를 따라가야 할 것 같아.”

“꼭 가야 해?”

“아무래도…….”

“……그래.”

벤야민이 어색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궁에 가서도 건강히 지내. 조만간 찾아갈게.”

“응, 고마워. 너도 잘 지내.”

벤야민과 작별 인사를 나눈 나는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한 번도 생각지 못한 갑작스러운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늘 바라 왔던 일이기도 했다.

음울한 어린 날의 기억이 남아 있는 이곳 페르디난트를, 언제나 벗어나고 싶어 했으니까.

멍하니 서 있는 벤야민과 카타리나를 힐끔힐끔 뒤돌아보다가, 이내 테오도르의 뒤를 쫄래쫄래 쫓아갔다.

더 이상 그들이 보이지 않을 즈음 문득 테오도르가 걸음을 멈추었다.

그러고는 나를 돌아보며 가만히 손을 뻗었다.

나도 모르게 움찔 몸을 떨었는데, 그의 길쭉한 손끝이 내 머리카락에 닿았다.

“미안해, 이브 경. 많이 놀랐지?”

“폐하……?”

어느새 내가 알던 다정한 얼굴로 돌아온 그가 상냥하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그대를 저곳에서 꺼내고 싶었으니까.”

문득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아직도 손이 떨려……. 내 손을 잡아 줄래?”

“……?”

내가 멍하니 쳐다보자 그가 내 손을 잡아당겨 손바닥을 펼쳤다.

그리고 그 안으로 자신의 손을 밀어 넣으며 단단하게 깍지를 꼈다.

“내가 피를 무서워해서…….”

나는 잠시간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 두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는 느리게 반문했다.

“……저를 위해 일부러 폭군 흉내를 냈다는 거예요?”

나를 왜……?

“조금…… 어색했나?”

테오도르는 수줍게 귓불을 붉히며 두 눈을 내리깔았다.

“많이 이상했지? 그런 모습을 보이는 건…… 나도 처음이라…….”

“아니요, 그게 아니라…….”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뒤늦게 내 의문을 알아챈 그가 생긋 두 눈을 휘었다.

“말했잖아, 내게는 아주 뛰어난 안목이 있다고. 그대가 마음에 들어.”

“하지만 폐하께서는 저와 만난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당혹스러워 우물쭈물 대꾸하는데, 그가 내 말을 부드럽게 잘랐다.

“처음 본 순간부터.”

그 순간, 테오도르의 황금빛 눈동자가 햇살에 반짝 빛났다.

“그때부터 그대가 마음에 들었어.”

“…….”

숨을 홉 들이마시는 나를 향해 그가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대를 이름으로 불러도 될까?”

이상했다. 문득 그의 얼굴 위로 어린 날의 한 장면이 겹쳐 떠올랐다.

[여기서 뭐 하고 있었어?]

[친구랑 숨바꼭질. 그러는 너는?]

[보물찾기.]

뭘 하고 있었냐는 물음에 그 예쁜 눈동자를 사르르 휘던 어린 테오도르…….

그가 생각하는 첫 만남과 내가 기억하는 첫 만남은 분명 서로 다른 순간일 텐데도, 이상하게 나는 내 기억 속 어린 그가 생각이 났다.

“이-브.”

느릿한 음색이 자아내는 보드랍고 연한 두 음절의 이름자가 이상하게 내 가슴을 간지럽게 만들었다.

허락을 구하듯 생글생글 웃으며 쳐다보는 그를 향해, 나는 그만 홀린 듯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 * *

예고 없이 페르디난트에 난입한 황제는 그렇게 막무가내로 이름 없는 견습 기사를 빼돌려 갔다.

본디 페르디난트와 오가던 약혼 이야기는 아예 꺼내지도 않고 쏙 들어가 버렸으나, 카타리나는 화도 내지 못할 만큼 상태가 안 좋았다.

“세상에, 어떡해! 카타리나 아가씨……! 당장, 당장 의사를 불러야겠어요! 아무리 황제라 해도 어떻게 이런 끔찍한 짓을…….”

“조용히 해, 머리가 울려. ……들어가자.”

카타리나는 창백해진 낯으로 황제와 이보네가 사라진 자리를 쳐다보다가 몸을 돌렸다.

그리고 남겨진 벤야민은 바닥에 떨어진 혈흔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 새빨간 선혈을 쳐다보노라니, 어린 날의 기억이 밀려왔다.

붉은 피를 흘리던 이브 로웰린…….

아니, 이보네 체르니시아.

지금은 죽고 없는 부친께서 체르니시아로부터 훔쳐 낸 그 작은 아이.

처음 만났을 때, 그 애는 비릿한 혈 향을 품고서 낡은 3층 방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었다.

[왜 울어?]

그렇게 묻자 그 애는 흠칫 놀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달빛에 드러난 그 애의 얼굴이 깜짝 놀랄 만큼 예뻐서, 벤야민은 저도 모르게 나른한 웃음을 흘리며 인사를 건네었다.

창백하리만치 하얀 피부와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그리고 보석처럼 찬란하던 녹색 눈동자와…….

뺨에 묻어 있던 새빨간 혈흔. 그곳에서 죽음의 향기가 났다.

붉은 선혈이 벤야민을 흥분하게 했다.

너는 혈 향을 품고 왔구나…….

어디서 온 걸까?

벤야민은 그 애가 궁금해졌다.

남자아이처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어두운 색깔의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벤야민은 한눈에 그 애가 여자애라는 것을 알아봤다.

루돌프가 벤야민을 훈육할 때 종종 사용하였던 그 낡은 3층 방은 그 애처럼 작고 귀여운 애가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다.

[네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처럼 작은 여자애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으나 그 애는 움직이지 않았다.

어떻게 왔는지 물어도 알려 주지 않던 그 애는 이름을 묻는 말에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이브 로웰린.]

울음에 잠식된 꺼끌꺼끌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벤야민은 운명을 느꼈다.

그 이름이 거짓인 것을 알면서도, 그렇기에 더욱 마음이 이끌렸다.

동화 같잖아.

혈 향을 품고 나타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거짓인 작은 여자애.

너의 피는 무슨 맛일까. 분명 달큼하겠지.

울음을 터뜨릴 때 눈가를 적시던 작은 눈물방울처럼, 분명 황홀할 거야.

나의 작은 이브 로웰린…….

이후로 벤야민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그 애를 찾아가 챙겨 주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애의 진명을 알게 되었다.

[하마터면 ‘그릇’이 다칠 뻔했어.]

[그래도 다행이지. 미리 알아차려서 ‘그릇’을 보호하고 황제까지 저 상태로 만들었으니, 우리에겐 잘된 일이야.]

아버지 루돌프와 고모인 마르가라테 황후의 대화를 엿들은 게 계기였다.

[게다가 체르니시아의 사생아까지 손에 넣었잖아. 그 애를 제물로 사용하면…….]

체르니시아라고?

멸문한 체르니시아의 사생아라면 오직 한 명뿐이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작고 힘없는, 그러나 예쁜 여자애.

그 애를 갖기 위해, 저는 무슨 짓들을 했었지?

굶지 말라고 먹을 것을 주고, 아프지 말라고 약을 발라 주었다.

악몽을 꾸지 말라고 자장노래를 불러 주고, 잠든 그 애의 손을 꼬옥 잡아 주었다.

누구도 해치지 못하도록 새벽이 밝을 때까지 옆을 지켰다.

삶의 의지를 놓지 말라고 재잘재잘 이야기를 해 주었다. 말수가 적은 벤야민에게 이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그 애를 괴롭힌 한심한 또래 기사 견습생들을 찾아가 무참하게 도륙 내 주었다.

종내에는 아버지를 죽이고, 마르가라테 황후까지 죽였다.

그 덕에 테오도르가 황제가 된 것은 굳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 알았더라면, 그 또한 함께 처리했어야 했는데.

“찢어 죽일 레오브란테.”

품고 있는 격한 욕설과는 달리,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음색은 무미하기 짝이 없었다.

“누구 덕에 그 자리에 올랐는데, 은혜를 모르고 원수로 갚아…….”

벤야민은 상황을 믿을 수 없어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빠드득-

고요히 말아 쥔 주먹에서 뼈마디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테오도르 황제가 체르니시아의 어린 검과 친분이 있었다고는 알려지지 않았는데…….”

벤야민은 아랫입술을 아프게 깨물며 눈동자를 서늘하게 가라앉혔다.

이보네를 쳐다보던 테오도르의 눈빛이 자꾸만 거슬렸다.

그 눈이 꼭…… 그녀를 보는 자신의 것과 닮아 있었다.

두 사람이 재회한 지점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어제 황제의 방문 뒤, 그녀의 손목에서 그 남자의 기운이 불쾌하게 풍겼으니까.

“안 돼, 이브.”

낮고 몽롱한 목소리가 마치 꿈을 꾸듯 중얼거렸다.

“내가 널 위해 무슨 짓까지 했는데. 네가 이렇게 날 두고 떠나면 안 되지.”

마치 스스로에게 세뇌를 하듯 뇌까리는 음성이 스산하기 짝이 없었다.

“널 다시 데리러 갈게. 그러니까 기다려, 내 사랑.”

벤야민의 눈꼬리가 사르륵- 둥글게 휘었다.

얼떨결에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쫄래쫄래 뒤따르게 된 나는 그를 따라 페르디난트 저택의 정문을 넘어섰다.

지난 10여 년간 나를 옭아맸던 장소를 벗어나는 바로 그 순간 굉장히 기묘한 감각이 내 안에서 술렁거렸다.

“이브, 괜찮아?”

“네, 네, 폐하! 죄송합니다.”

잠시간 감상에 빠져 있던 나는 뒤늦게 그가 내 이름을 수차례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라 답했다.

그러다 나를 지그시 쳐다보는 황금안과 마주치고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시선이 꼭…….’

둥글게 휜 눈동자 속에는 다정함과 그리움의 빛깔이 머물러 있었다.

‘그 시절 같아…….’

그것을 깨달은 순간 문득 주변의 공기가 후덥지근하게 달아올랐다. 마치 그 오랜 옛 여름의 날들처럼.

이브 로웰린을 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은 이보네 체르니시아를 보던 그의 것과 닮았다.

그건 아마도 그가 천성적으로 따뜻하고 상냥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해 보면 테오도르는 어린 날 처음 만났을 때에도 마냥 친절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이름도, 무엇도 모르던 때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착한 사람이 왜 그런 흉흉한 소문에 휩싸인 걸까? 폭군이라니, 말도 안 돼.’

나는 시선을 내려 깍지 낀 두 손을 보았다.

조금 전 피를 봐서 무섭다고 파르르 떨던 게 생각나 안쓰러웠다.

“어서 타, 이브.”

페르디난트 저택 앞에는 알브레히트 황가의 문양이 새겨진 번쩍번쩍한 황금 마차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네? 하지만, 전…….”

“아직도 떨림이 가시질 않아서, 그대가 함께 있어 주면 좋겠어.”

황송한 마음에 머뭇거리자 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재촉했다.

“나의 기사가 되어 주기로 했잖아? 나를 지켜 줘야지.”

“아직 기사 서임을 받은 것도 아닌데…….”

“그럼 오늘은 나의 손님으로 함께 마차를 타자, 응?”

그가 생긋 눈웃음을 치며 손을 흔들었다.

그 아름다운 눈웃음에 매료되어 버린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마차에 올랐다.

다른 기사들이 나를 흠칫흠칫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처럼 신분도, 실력도 불분명한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황제의 마차를 함께 타는 게 마음에 안 드는 게 틀림없다.

어제는 분명 말을 타고 왔던 것 같은데, 왜 오늘은 마차를 타고 와서 이런 시련을 주는 걸까.

마차는 부드럽게 굴러갔다.

그리고 마차가 굴러가는 그 짧은 시간 내내, 테오도르는 양손으로 꽃받침을 하고서 내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저…….”

나는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원래 모두에게 이러시나요?”

“응?”

“모두에게 이렇게 친절을 베푸시고, 그리고…….”

모두에게 이렇게 무섭다며 손을 잡아 달라 하고, 얼굴을 빤히 쳐다보냐며 묻고 싶어 말을 고를 때였다.

“혹시 내가 이러는 게 불편해?”

그가 눈꼬리를 추욱 늘어뜨리며 되물었다.

흡사 소중한 간식을 빼앗긴 강아지처럼 축 처진 모습에 나는 괜히 미안해져서 두 손을 내저었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그러자 그의 눈매가 다시금 포스스 접혔다.

“다행이네.”

그렇게 웃는 그의 두 눈이 너무 예뻐서, 나는 결국 그에게 답을 듣지 못하고 마차가 도착할 때까지 그의 시선을 받아 내야 했다.

* * *

황궁에 도착한 테오도르는 곧바로 집무실로 향했다.

“이브 로웰린에게 나의 측근 기사직을 맡길 것이다.”

황제의 수석 호위 기사라는 린든 경이 테오도르가 대충 휘갈겨 쓴 종잇장을 받들었다.

“네, 폐하.”

린든을 따라 밖으로 나가니, 복도에 서 있던 기사들이 내게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이브 로웰린이라고?”

“정말로 폐하의 측근 기사가 된 거야?”

“아직 기사 서임도 못 받았다고 했지?”

나는 제대로 서임도 받지 못한 내가 그 자리를 맡아 다들 기분 나빠하지 않을까 걱정이 되었다.

“아, 저는…….”

“고마워, 이브 경! 그대가 우리를 살렸어!”

“네, 네?”

그러나 걱정과 달리 그들은 무척 기뻐했다.

“오늘은 축하 파티를 하도록 하지.”

“이브 경, 그대도 반드시 필참이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당혹스러워하는 찰나, 린든이 내게 설명해 주었다.

“우리는 모두 진심으로 그대의 등장을 반기고 있어. 폐하의 성격이…… 음, 다소 까칠해서 아무도 측근 기사직을 맡고 싶어 하지 않아 했거든.”

테오도르가 까칠하다고?

저렇게 다정하고 상냥한데?

“까칠하다는 건 사실 아주 순화한 표현이지.”

“솔직히 저건 까칠한 게 아니라 그냥 지랄 맞은…….”

“벤트, 말을 조심해라.”

린든이 다른 기사의 경박스럽게 튀어나온 비속어를 자르며 흠흠 헛기침을 했다.

“아무튼 이브 경, 폐하의 내숭에 속지 말도록.”

“내숭요……?”

고개를 갸웃하자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과묵하게 생긴 거구의 기사가 한마디 덧붙였다.

“왜 저러는지는 모르겠지만, 틀림없이 더 크게 괴롭히려는 못된 속내일 것이다.”

“……?”

동시에 여기저기서 안쓰럽다는 시선들이 내게 꽂혔다.

“아까 마차에 올라탈 때도…… 지켜 주지 못해서 미안해.”

“정말 무시무시했지? 폐하의 표정…….”

무시무시하다니?

테오도르는 계속 웃고 있었는데?

“그렇게 웃을 때 가장 조심해야 한다, 이브 로웰린.”

“맞아. 폐하는 웃는 얼굴로 상대의 얼굴에 칼을 꽂는 분이시니까.”

으응? 보통은 웃는 얼굴로 상대의 등에 칼을 꽂는다고 표현하지 않나?

“가엾은 이브 경. 힘든 일이 있으면 언제든 우리에게 털어놔.”

“하지만 부디 그 자리를 오래 지켜 주었으면 좋겠어.”

“한 달…… 아니, 보름, 아니, 일주일만이라도…….”

그들이 한마디씩 거들수록 나는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 * *

그날 이후, 테오도르의 손을 잡고 페르디난트를 나온 내게 무려 ‘황제의 측근 기사’라는 새로운 삶이 생겼다.

아주 오랫동안 내 삶의 주인인 적이 없었던 나는 한동안 굉장히 얼떨떨했다.

체르니시아가 몰락하기 전, 열 살 남짓의 내게는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참 많았다.

그러나 눈앞에서 목격한 가족들의 죽음과 그곳에서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이 서서히 내 안의 나를 죽여 갔다.

석 달.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잊히는 시간은 굉장히 짧았다.

그 시간 동안 루돌프 페르디난트는 나를 기억 속 낡은 3층 방에 가두고 방치했다.

나는 그곳에서 하루에 두 번 딱딱한 빵과 수프를 가져다주는 나이 든 하녀 외에는 누구도 만나지 못했다.

슬픔과 괴로움, 죄책감…… 그리고 그 뒤에 찾아온 것은 쓸쓸한 고독감과 외로움이었다.

나를 홀로 살려 내 페르디난트에 가둔 에른스트를 조금 원망했던 것 같기도 했다.

사실 그 애는 아무런 잘못도 없었는데 약해진 마음이 그 애를, 그리고 세상을 전부 원망하게 만들었다.

[왜 나를 살렸지? 결국 이렇게 혼자 남겨 둘 거면서. 그냥 가족들과 함께 그 화마에 삼켜졌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런 너저분한 감정이 가슴 한구석을 갉아먹던 순간, 내 시야에 끝이 뭉툭한 식기가 띄었다.

나도 모르게 홀린 듯이 그것을 집어 들었다.

남들에게는 평범한 포크일지라도, 체르니시아의 손에 들린다면 언제든 다른 용도로 변질될 수 있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알브레히트의 가장 어린 검.

오래전 나를 따라다니던 ‘알브레히트의 검’이라는 칭호는 그저 검을 다루는 이들에게 붙여지는 것이 아니었다.

검기를 발현한 이들에게만 붙여지는 칭호로서, 체르니시아가 몰락하기 이전에도 제국에 단 세 명밖에 받지 못한 칭호였다.

손에 쥔 것을 물끄러미 쳐다보자 이내 푸른 빛깔이 그 주위를 에워쌌다.

그대로 그것을 높게 들어 올리던 순간이었다.

대뜸 뻗어 나온 손이 그것을 홰액 낚아채 갔다. 벤야민이었다.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마.]

그날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나를 막아선 벤야민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아마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말리지 마. 나는 죽어야 하는 사람이야.]

[네가 왜 죽어?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도 죽지 않고 살아 도망쳤다는데, 네가 왜?]

[뭐……?]

체르니시아를 떠나온 이후 처음으로 듣는 가족들의 소식에 나는 벤야민을 붙잡고 물었다.

[그게 정말이야?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라고? 누구?]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그러나 그는 더 이상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하지만 가족들 중 누군가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말에 나는 죽지 못했다.

석 달이 지나 낡은 3층 방을 탈출한 나는 견습 기사의 신분으로 또래들과 생활을 시작했다.

애석하게도, 쉽사리 그 무리에 끼지는 못했다.

하긴, 다들 나를 싫어하는 게 당연했다.

당시에 나는 아무렇게나 싹둑 자른 머리카락에 볼품없는 옷차림을 하고서 매양 말없이 음울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내게도 먼저 말을 걸어 준 친구가 있었다.

유독 더위를 많이 타는지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 있던 아이였다.

그 애는 내게 간식거리를 주면서 친구가 되자고 했다.

[좋은 일 있어, 이브? 표정이 평소랑 달라.]

그 순간만큼은 나도 무척 설레어서, 그날 밤 나를 찾아온 벤야민에게 신이 나 그 사실을 자랑했다.

[있지, 벤야민. 나 오늘 새 친구가 생겼어. 이거 봐. 맛있겠지? 재키가 준 거야. 아, 그 애 이름이 재키인데…….]

[으응, 친구가 생겼구나. 축하해.]

그러나 슬프게도 재키라는 이름의, 나처럼 유독 더위를 많이 타던 아이는 다음 날부터 나를 무시했다.

내 인사에 표정을 굳히고 등 돌려 쌩하니 가 버리는 그를 보고, 나는 그게 말로만 듣던 따돌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체르니시아에서는 한 번도 겪지 못한 일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야, 이브?]

너무 속상하고 창피해서 벤야민에게 그 사실을 숨기려 했다. 그러나 나를 걱정하는 벤야민의 목소리에 눈물이 터져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까, 이브. 다른 친구 같은 건 만들 생각 마. 내가 너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 줄 테니.]

그렇게 나는 페르디난트에서 지내는 지난 10년간 벤야민 외의 다른 또래와는 교류 없이 지냈다.

어느 날 갑자기 저택에 나타난 카타리나가 나를 종자로 부려 먹겠다고 데려간 뒤로는, 삶이 더 팍팍해졌다.

카타리나는 종종 나를 때리고 괴롭혔다.

몸에 상처가 늘어났으나, 별생각 없이 방치했다.

나중에 그것을 알게 된 벤야민은 몹시 화를 냈다.

늘 감정의 변화가 적던 벤야민이 그렇게 화를 낼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날 처음 알았다.

벤야민은 내게 은인과도 같은 친구였다.

그렇지만 오랫동안 버팀목이 되어 준 벤야민이 있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페르디난트는 늘 내게 벗어나고 싶은 곳이었다.

물론 그곳을 벗어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건 딱히 없었다.

막상 페르디난트를 벗어난 지금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제까지 나는 당연하게도 평생 카타리나에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페르디난트를 벗어나지 못하고 죽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 내가 테오도르를 만나 황제의 측근 기사가 되었다.

이제는 황궁에 머물게 되었으니까 그저 가족들의 생사라도 알 수 있으면 좋겠는데.

살아 있다면 소식이라도.

죽었다면 무덤이라도.

그리고 그다음엔…….

‘어렸을 때의 난 뭘 하고 싶었지?’

무려 10년 만에 갖게 된 자유는 나를 헤매게 했다.

어렸을 때의 나는 체르니시아의 막내딸로 태어나 그저 검을 잡고 뛰어다닌 것 말고는 한 게 없었다.

가문의 대를 잇는 것은 내 역할이 아니었다.

언니들을 따라 기사가 되고 싶다는 생각도 했지만, 그랜시 할머니는 내게 에른스트와 결혼하여 황자비가 될 것을 강요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조금 이상하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살아 있을 때까지만 해도 차기 황제로 거론되던 것은 에른스트였다.

그러니 황자비로 내정되었던 나는 별다른 이변이 없었다면 자연스럽게 황후가 되었을 것이다.

카타리나만 해도 그렇다.

체르니시아의 몰락 이후, 루돌프는 에른스트의 짝으로 키울 소녀를 방계에서 데려왔다.

어린 카타리나가 페르디난트에 입적되자마자 혹독하게 황후 교육을 받았던 게 기억난다.

그런데 왜 군터 할아버지는 마찬가지로 에른스트의 짝으로 점찍어져 있던 내게 황후 교육을 시키지 않았던 걸까?

-따위의, 불과 몇 주 전이었더라면 하지 않았을 쓸데없는 생각들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계속 서 있으면 다리 아프지 않아, 이브?”

괴롭히는 카타리나가 없고 배가 따스우니 별별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던 중, 테오도르의 나긋한 목소리가 그 지난한 생각의 꼬리를 뚝 잘라 주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폐하.”

나는 군기가 바짝 들어간 목소리로 대답했다.

내가 있는 곳은 테오도르의 집무실이었고, 황제의 측근 기사로 임명된 나는 그의 지척에 서서 그를 지키고 있었다.

“으음…….”

읽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뗀 테오도르는 몹시 불만족스러운 눈동자로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나는 편하게 앉아 있는데 그대만 이렇게 서 있는 걸 보니 마음이 아파.”

응? 하지만 나는 그의 측근 호위 기사이고, 앉아서 호위를 할 수는 없는 노릇…….

“황명이야.”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테오도르가 나의 두 팔을 단단히 붙잡고서 소파로 안내했다.

“여기 편하게 앉아서 쿠키를 먹어라, 이브 로웰린.”

“하지만 저는 폐하를 호위해야 하는데…….”

“앉아서 하면 돼. 이제껏 그대가 오기 전에 나의 측근에서 호위를 맡았던 이들도 모두 한 번씩 이 자리에 앉았으니까. 그렇지 않나, 아르민?”

테오도르가 엄청난 두께의 서류를 들고 보고하던 자신의 보좌관에게 동의를 구했다.

“……물론 그들은 그랬지요.”

황제의 보좌관 아르민 마이어가 나를 힐끔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지, 이브?”

테오도르는 생긋 웃으며 나를 억지로 소파 위에 앉혔다.

……그렇구나. 앉아서 호위를 할 수도 있는 거구나.

나는 미심쩍어하면서도 그가 앉히는 대로 소파 위에 앉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자꾸만 눈이 가던 쿠키를 슬그머니 집었다.

눈치를 슬쩍 보며 쿠키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자 그가 만족스럽다는 듯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나는 편하게 앉아 테오도르가 일하는 것을 힐끔힐끔 구경했다.

황제의 측근 기사가 된 이후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그를 유심히 관찰했다.

뒤에서 욕하던 기사들의 말과 달리 막상 내가 지켜본 그는 친절함 그 자체의 사람이었다.

그는 집무실로 찾아오는 대신들에게도 몹시 친절했고.

[재무대신의 혜안이 굉장히 놀랍군. 이렇게 훌륭한 일 처리라니, 몹시 흡족해. 그대에게 친히 포상을 내리고 싶은데…… 그동안 고생도 많이 했으니 이제 아주 길고 깊은 안식을 가져 보는 건 어떤가?]

황궁의 사용인들에게도 친절했고.

[이 디저트를 만든 게 너라지? 아주 굉장한 솜씨더구나. 그 잘난 입을 한번 벌려 보는 게 어떠니? 내가 손수 먹여 줄 테니까. 자, 맛이 어때? 맛있지? 어디 한번 맛있다고 말해 보렴.]

심지어는 그를 뒤에서 욕했던 기사들의 복지까지 돌보아 줄 정도로 친절했다.

[기사단의 일이 힘들지 않나? 호위 인력을 줄일 것이다. 앞으로 저녁 시간 이후로 곧바로 귀가하도록. 걱정하지 말거라, 내게는 훌륭한 측근 기사가 있으니까. 그대들은 더 이상 내 눈에 띄지 않았으면 좋겠어.]

테오도르는 한결같이 상냥하게 그들을 대했으나, 이상하게 모두 그를 두려워했다.

그 모습에서 묘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이를테면 안식은 필요 없다며 울부짖는 대신이라든가.

디저트를 먹여 준다는데 바닥에 머리를 콩콩 찧으며 죽여 달라 하는 사용인이라든가.

혹은 사색이 되어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기사라든가.

“정말 이상하네…….”

소파 위에 앉아 편한 자세로 쿠키를 오독오독 씹어 먹던 나는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천사처럼 선량한 테오도르의 얼굴을 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왜 다들 폐하를 두려워하는 거지…….”

이때, 보좌관을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서류에 무언가를 휘갈기던 테오도르의 손이 멈칫했다.

이내 보좌관이 나가고 나와 테오도르, 둘만이 남게 되었을 때.

“하아…….”

돌연 그가 한숨을 푸욱 내쉬며 양손으로 얼굴을 싸맸다.

“폐하……?”

“힘들어.”

“불편하신 곳이라도……?”

혹여나 몸이 아픈 건 아닌가 걱정되어 묻자, 몹시 울적한 낯을 한 테오도르가 내 쪽으로 걸어왔다.

“그대가 나를 위로해 줄래?”

“……?”

“손을 잡아 줘, 이브.”

내 옆자리에 폭삭 앉은 그가 내게 얼굴을 들이밀며 물었다.

“손이요?”

고개를 갸웃하며 시선을 내리자 파르르 떨고 있는 그의 손이 보였다.

다시 만난 테오도르는 자주 손을 떨었다.

수전증이 있는 건 아닐까?

“그대도 보았지? 다들 나를…… 두려워하는 거.”

“아…….”

그도 느끼고 있었나?

하긴, 모를 수 없었을 테다.

그렇게 다들 확연하게 두려운 티를 내는데.

“황제라는 자리 때문에…….”

신이 빚어낸 것처럼 아름다운 그의 두 눈동자가 상처받은 모양으로 휘늘어졌다.

“모두가 나를 어려워하고, 두려워해. 하지만 나도 가끔은 위로를 받고 싶은데…….”

나직이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거 알아, 이브? 아주 오래전 돌아가신 어머니와 그대뿐이야, 이제껏 내 손을 잡아 준 건…….”

테오도르는 두 눈을 추욱 내리뜨며 말끝을 흐렸다.

기다란 속눈썹이 그의 얼굴 위로 그늘을 만들었다.

나는 그런 테오도르가 무척 안쓰러워서 가만히 손을 잡아 주었다.

‘그런데, 나도 어렸을 때 손을 잡아 줬는데……. 이제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기억 못 하는 걸까?’

어쩌면 그가 더 이상 어린 날의 비밀 친구는 기억하지 못한다는 생각에 조금 속상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워낙 옛일인 데다가 아주 어렸을 때이기도 하고, 지금도 날 알아보지 못하니까…….’

“무슨 생각 해?”

테오도르가 까칠한 내 손을 조물조물 만져 대며 물었다.

“아닙니다, 아무 생각도…….”

“그래? 그건 좀 속상하네.”

“네……?”

“그대가 내 생각을 하고 있길 바랐는데.”

테오도르는 언제 그렇게 울적했냐는 듯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나는 종종 그대 생각을 하거든.”

“폐하께서, 제 생각을요……?”

당혹스러워 되묻자 그의 두 눈이 더욱 예쁜 호선을 그리며 접혔다.

“예쁜 걸 생각하는 건 인간의 본능이잖아.”

무슨 말인지 선뜻 이해되지 않아 두 눈을 끔뻑일 적에, 그가 푸스스 웃으며 덧붙였다.

“그리고 그대는 예쁘고. 내가 태어나 본 것들 중 가장 예뻐, 이브.”

테오도르의 말에 당황한 나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멍해졌다.

예쁘다니…….

생각해 보면 그는 옛날에도 비슷한 말을 했다.

[내가 태어나 본 것들 중 네가 가장 예뻐, 이보네.]

그냥 모든 사람들에게 저런 말을 하는 걸까?

하지만 지금 나는 남장을 하고 있잖아?

“눈도 예쁘고, 코도 예쁘고, 입도 예쁘고, 손도 예쁘고…….”

핑글핑글 도는 내 머릿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는 생긋 눈웃음을 치며 꼬옥 깍지를 꼈다.

나는 손가락 사이사이로 느껴지는 굵은 손마디를 힐긋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여전히 나를 지그시 쳐다보고 있는 그의 모습에 숨이 절로 꼴깍 넘어갔다.

“놀리지…… 마십시오, 폐하.”

“음…….”

“예쁘다는 말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저, 저는 남자인데…….”

그렇게 항변할 적에 말을 조금 더듬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 기울이며 내게 물었다.

“그럼 예쁜 걸 뭐라고 해야 하지?”

그가 두 눈을 깜빡일 적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흔들렸다.

누가 보아도 부정할 수 없는 그 아름다운 자태에 나는 다시 한번 말을 잃고 말았다.

새삼 깨달았다.

남자도 예쁠 수 있다는 걸…….

“그대의 서임식은 한동안 미룰 생각이야.”

테오도르는 곧바로 화제를 전환해 버렸다.

“황궁 내의 일이 많아 여유가 없어서. 혹 서운하거나 그러진 않지?”

그리고 그에 홀라당 넘어가 버린 나도 금세 조금 전의 껄끄러운 대화는 잠시 미뤄 두고 새로운 화제에 응답했다.

“네, 폐하. 저는 이렇게 그곳에서 저를 데리고 나와 주신 것만으로도…… 아, 그러니까, 제가 그곳에 있었더라면 평생 견습 기사 신분을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까…….”

횡설수설하는 내게 그는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으응, 그렇게 말해 줘서 기뻐, 이브.”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내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에 이상하게 몸이 노곤해져서, 나는 나도 모르게 또다시 스르륵 잠들어 버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그의 집무실 소파 위에 웅크리고 누워 있었다. 몸을 일으키자 조금 전까지 그가 걸치고 있던 겉옷이 스르륵 미끄러졌다.

“아…….”

테오도르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측근 호위의 본분을 잊고 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와중에도 그가 내게 보인 배려가 고마워서, 나는 그의 겉옷을 꼬옥 움켜쥐고 황망히 밖으로 나왔다. 그러자 복도에 있던 기사들이 나를 발견하고 우르르 몰려왔다.

“괜찮아, 이브 경?”

“혹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지?”

“무슨 일이라니요?”

갑작스레 쏟아진 관심에 멀뚱멀뚱 묻자 내 몸을 샅샅이 훑던 그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폐하께서 혼자 나오시기에 경이 그 안에서 잘못된 줄 알았어.”

“우리는 혹여나 이브 경이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혀서 큰일이 난 줄 알고 걱정이 돼서…….”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어서 다행이야.”

“그러잖아도 요새 폐하께서 자꾸 그대를 붙잡고 놓아주질 않잖아?”

“우리에게 사실대로 말해도 돼, 이브 경. 혹시 그 인성 파탄자, 아니, 그러니까 폐하께서 그대를…….”

테오도르를 향해 쏟아지는 험담 속에서 조금 전 황제의 자리가 외롭다고 울적한 표정을 짓던 안쓰러운 그의 얼굴이 생각났다.

테오도르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사람인지 알지도 못하고 그렇게 상관의 욕을 하는 그들이 얄미웠다.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한마디 했다.

“폐하는 그런 분이 아니에요. 그러니 다들 폐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씩씩거리며 외치는데, 복도 끝에서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을 알아챈 기사들이 동시에 고요해졌다.

유유히 웃으며 걸어온 이는 다름 아닌 테오도르였다.

“무슨 일이야, 이브?”

복도에 흐르는 미묘한 기색을 알아차린 그가 주위를 스윽 훑더니 내게 물었다.

“아닙니다, 폐하. 아무것도.”

“흐응…….”

그가 등장하기 전까지 동료들을 향해 씩씩대던 내 얼굴은 아마도 아주 조금 붉어져 있지 않을까.

“이브, 나 지금부터 산책을 할 건데.”

그러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열기는 결코 그의 잘생긴 얼굴이 코앞에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같이 가자.”

생긋 웃으며 건넨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뒤를 돌아보며 그를 험담하던 이들에게 매서운 눈빛을 쏘아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테오도르를 따라 건물 밖으로 나오자 어느새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몇 발짝 뒤에서 테오도르의 뒤를 따르던 나는 이곳이 어디인지 깨달았다.

우리의 오랜 옛 약속의 장소가 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

순간 어린 날의 기억이 물씬 밀려와서 멍하니 서 있다가 뒤늦게 그를 쫓아 종종거리며 뛰어갔다.

그런데 문득 걸음을 멈춘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 귓가에 꽃송이 하나를 꽂아 주었다.

“예쁘네.”

그 말에 나는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나, 낮에도 말씀드렸지만 예쁘다는 말은…….”

“응, 그래, 예뻐.”

낮에 어물쩍 넘어갔던 화제를 조금 더 확실하게 매듭짓고자 하였으나, 테오도르는 내 말은 듣지 않고 자기 할 말만 했다.

더 이상 감히 어떤 대꾸도 할 수 없을 만큼 단호하면서도 나긋한 목소리로.

“…….”

“…….”

우리는 말없이 서로를 마주 보았다. 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이 유독 깊고 짙었다.

솨아아-

불어오는 바람에 꽃나무 가지에 달린 어여쁜 꽃잎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꼭 꽃비가 내리는 것 같은 그 광경을 배경으로 한 채, 테오도르는 그 자리에 박힌 것처럼 나만을 지그시 쳐다보고 있었다.

둥글게 휘어 있던 그의 두 눈에서 차츰 웃음기가 사라져 갔다.

“이-브.”

그가 나의 이름을 길게 늘어뜨리며 나른한 음색으로 읊조렸다.

“…….”

대답을 해야 하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테오도르의 얼굴이 서서히 내게 기울었다.

질끈-!

나도 모르게 두 눈을 감았다.

두근두근, 쿵쾅쿵쾅. 그 짧은 순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댔다.

스윽-

문득 머리 위로 닿는 감각에 눈꺼풀을 찔끔 들어 올리자, 그가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폐하……?”

“…….”

흡사 입을 맞출 것처럼 다가왔던 그는 그렇게 내 머리카락을 헝클이고서 다시 물러났다.

그러고는 나를 향해 생긋 웃었다.

“머리에 나뭇잎이 떨어져 있어서.”

그렇게 말하는 그의 손에는 나뭇잎 같은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두 눈을 끔뻑이는 나를 향해 그가 눈가를 아름다이 휘며 웃었다.

달빛에 반사된 그의 얼굴은 마치 옛 전설 속에 등장하는 요정들의 것처럼 요요하고 고혹적이었다.

눈앞에 흐드러진 꽃잎 사이에 화사하게 웃는 그의 얼굴만이 머릿속에 유독 강하게 각인되었다.

* * *

나는 한동안 그날의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잠시만 생각을 느슨하게 하면, 흐드러지게 웃던 그의 얼굴이 뭉실뭉실 생각이 났다.

멍하니 있다가 실수를 하는 일이 잦아졌다.

“그거, 먹는 게 아닌데.”

평소와 같이 소파 위에 앉아 쿠키를 집어 먹던 중이었다.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건넨 테오도르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헉!”

그리곤 내가 쿠키가 아닌 화병에 꽂혀 있던 꽃을 씹어 먹는 중이란 사실을 깨닫고 화들짝 놀랐다.

“쿠키 맛이 별로였던 거야, 이브? 꽃을 대신 씹어 먹을 만큼?”

테오도르가 킥킥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안 되겠네. 주방장을 불러 혼을 내야겠어. 이런 형편없는 쿠키를 내오다니. 그자의 목을 베어 네게 선물해 줄까?”

“그 무슨 폭군 같은 말씀이세요.”

어느새 정신을 차린 나는 그의 짓궂은 장난에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처음 몇 번 이런 장난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더니, 그는 때때로 나를 놀리듯 말도 안 되는 농담을 건넸다.

“당연히 장난이지, 이브. 내가 그런 폭군 같은 짓을 저지를 리 없잖아.”

그가 푸스스 눈웃음을 내지으며 내 입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여기, 묻었어.”

굵은 손끝이 내 입술 주위를 뭉근하게 매만졌다.

“……!”

순간 나는 꼼짝도 못 하고 얼어붙고 말았다. 그러자 그가 내 입가에서 떼어 낸 꽃잎을 들고 눈앞에서 흔들었다.

덕분에 나는 창피해서 온 얼굴에 열기가 화악 끼쳤다.

그 모습을 보며 생긋 웃는 그는 꼭 이런 내 반응을 즐기는 것 같았다.

결국 그 자리를 버티다 못한 나는 잠시 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리를 비웠다.

그가 조금만 덜 예뻤더라면 나도 이렇게까지 바보 같은 모습을 보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예쁘게 웃을 수 있는 거지.’

나는 또다시 그날 흐드러진 꽃잎 사이로 웃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정처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를 피하기 위해 도망치듯 나왔으나 애초에 나는 황궁에 아는 곳이 많이 없었다.

그러다 내가 발을 들인 곳은 어린 날의 내가 종종 찾아왔고, 불과 며칠 전에 그와 함께 거닐었던 바로 그 정원이었다.

‘젠장.’

나는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욕지거리를 속으로 짓씹었다.

이곳에 오니 눈앞에 아른거리던 그 예쁜 얼굴이 더욱 짙어졌다.

이대로 다시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하며 한숨을 푸욱 내쉬던 찰나였다.

바스락-

풀 잎사귀 스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낯설면서도 익숙한 인영이 눈앞에 우뚝 멈추어서 나를 보고 있었다.

“아……!”

햇살에 반짝이는 화사한 백금발과 고양이를 닮아 슬쩍 올라간 눈꼬리. 그리고 꼭 울 것 같은 탄성.

나는 금세 그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아아, 에른스트.

나를 살려 내고 지옥으로 떠민 잔학한 나의 구원자.

데리러 오겠다고 했으면서 끝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던 거짓말쟁이.

“이보네……. 이보네 맞지?”

창백하게 질린 낯으로 그가 물었다. 그러더니 돌연 울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차마 내게 다가오지 못하고 서럽게 우는 에른스트를 보며, 나는 묵은 원망마저도 꺼내지 못하고 도로 집어넣어야 했다.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약속을…… 너와 약속을…….”

“울지 마, 거짓말쟁이.”

그 말에 그가 목청을 높여 흐느꼈다.

나는 그를 달래 주는 대신 그저 가만히 지켜보았다.

예나 지금이나 너는 눈물이 많구나, 에른스트…….

그가 우는 것을 계속 쳐다보려니 이상하게 나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나는 울고 싶지 않아서 부러 쌀쌀맞게 말했다.

“난 이보네가 아니야.”

“너 맞잖아, 이보네 체르…… 흡.”

내 진명을 소리 내어 부르려는 에른스트의 입술을 손바닥으로 막았다.

“조심해. 그 이름 잘못 부르면 넌 죽어.”

내 경고를 위협이라 생각했는지, 에른스트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히끅히끅 딸꾹질을 했다.

“이브 로웰린. 그게 내 이름이야.”

“으, 응…….”

에른스트는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굳이 루돌프의 술식에 대해 부연 설명할 필요는 없었다.

체르니시아, 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오래전부터 금기되었으니까.

조금 진정이 된 에른스트와 나는 풀밭 위에 나란히 앉아 해묵은 이야기를 꺼내었다.

“계속, 흑, 만나러 가려고 했는데…….”

그는 나를 만나러 오려고 수차례 시도를 했으나,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에게 막혀 그러지 못했다고 했다.

“계속 널 생각했어.”

“카타리나와 약혼하려 했잖아.”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내가 하고 싶었던 게 아니야! 약혼을 하면 너를 만나게 해 준다고 했어.”

문득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와 루돌프 삼촌이 동시에 그렇게 가 버리고 약혼도 없던 이야기가 됐는데, 그 뒤로는…….”

그 뒤로는 말하지 않아도 안다.

마르가라테 황후와 루돌프 페르디난트의 갑작스러운 죽음.

그 후 에른스트가 지지 기반을 잃은 사이, 갑자기 치고 나선 테오도르가 황태자위에 올랐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제가 되었다.

에른스트가 황위에 욕심이 없다는 것과 테오도르가 얼마나 선하고 고운 심성을 지녔는지와는 별개로, 에른스트는 그 존재만으로도 언제든 황위에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해야 했을 것이다.

그런 처지에 과거 역모죄로 얽힌 친구를 찾아 나설 수 없었겠지.

“됐어. 다 지난 일이니까.”

나는 피식 웃으며 대화를 돌렸다.

“그나저나 용케도 알아봤네. 이렇게나 자라고, 모습도 많이 변했는데.”

단발 길이로 짧아진 은색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중얼거리자니, 문득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는데…….

“내가 널 알아보지 못할 리 없잖아.”

에른스트와 이런저런 옛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을 터뜨릴 때였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는 이가 보이지 않아 걱정했더니.”

잘 벼린 검날처럼 첨예한 목소리가 나와 에른스트를 가르며 날아들었다.

“폐하……?”

“형님……!”

나와 에른스트는 동시에 벌떡 일어났다.

테오도르가 처음 보는 딱딱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주 나태하군. 근무 시간에 호위해야 할 대상을 떠나 외간 이와 한가롭게 노닥거리고 있고.”

“폐하, 그게…….”

“따라와.”

무언가 변명을 하고자 하였는데, 그는 조금의 여지도 없이 화를 내며 먼저 몸을 돌렸다.

“…….”

“…….”

그의 집무실까지 따라가는 내내, 우리 사이에는 어떤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화가 아주 많이 난 것 같았다.

이제 근무를 태만히 했다고 혼이 나는 걸까?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그가 차갑게 굳은 눈으로 내려다봤다.

“그곳에서 뭘 하고 있었지?”

나는 그의 서늘한 눈빛과 냉정한 목소리가 너무 속상해서, 가족들이 죽은 이후 처음으로 서러운 눈물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브……?”

소리 없이 우는 내 모습에 놀란 착한 그는 나를 질책하던 것도 잊고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래 주었다.

“우, 울지 마, 이브. 나는 그대를 울리려던 게 아니라…….”

울지 않으려 두 눈에 힘을 주어 보아도, 자꾸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막 새로운 사실 하나를 깨달은 참이다.

나는 테오도르를 좋아한다.

……내가, 테오도르를 좋아한다.

* * *

그날 이후로 테오도르는 다시금 상냥한 본래의 그로 돌아왔다.

그러나 그를 좋아한다는 걸 깨달은 나는 몹시 울적해졌다.

일단 그는 황제이고, 나는 그의 호위 기사였다. 그 전에 역모죄로 몰락한 가문의 사람이었고, 무엇보다도 그는 내가 여자인 줄도 모른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혼란스러워져, 우울한 얼굴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자 정원을 걸을 때였다.

“이브……!”

조심스러우면서도 반가운 기색이 묻어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지난번의 만남 이후로 처음 마주친 것이었는데, 그는 착실하게 내가 알려 준 가명으로 나를 불렀다.

그는 루돌프가 내게 해 온 구체적인 폭력에 대해서는 알지 못했고, 나도 알려 줄 생각이 없었다. 그걸 알려 주면, 이 마음 약한 배신자는 울며 자책할 테니까.

“그날은 괜찮았어?”

내게 쪼르르 다가온 에른스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날 우리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화를 낸 테오도르 때문에 그대로 끝나고 말았다.

“응, 뭐.”

나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그다지 테오도르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있잖아, 이브.”

에른스트가 주위를 휙휙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며 속삭였다.

“체르니시아의 복권 이야기가 나오고 있어.”

순간 나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체르니시아는 이제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잊혀진 이름이었다.

이제는 유일하게 나를 아는 친우로부터도 불릴 수 없게 된 저주받은 이름이 아닌가.

“형님이 직접 꺼낸 이야기야.”

테오도르가,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직접 입에 담았다고?

“그게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에른스트가 전해 준 놀라운 소식에 가슴이 설렜다.

비록 나를 알아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체르니시아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어린 시절의 비밀 친구도…….

체르니시아가 복권된다 하더라도 나의 처지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루돌프의 저주가 있으니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할 테니까. 그렇지만…….

‘살아 있다는 체르니시아의 생존자를 만나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이 두근- 하고 뛰었다.

가족들을 다시 만날 수만 있다면, 평생 진명으로 불리지 못하고 체르니시아의 그림자로 살아가도 좋았다.

* * *

그날 저녁, 황제의 집무실에서 테오도르를 호위(라는 명목으로 관찰)할 적에, 그가 유독 더욱 사랑스러워 보였다.

“왜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꼭 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빛이야.”

나의 뜨거운 시선을 알아차린 걸까?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살피던 테오도르가 나를 돌아보더니,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게 물었다.

“소녀라니요, 실례되는 말씀이에요.”

나는 뜨끔한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술을 삐죽이며 외려 딴소리를 했다.

“저는 소녀가 아닙니다, 폐하.”

“그래. 그럼 그냥 사랑에 빠진 눈빛 정도로 할게.”

테오도르는 짓궂게 웃으며 일어나 내가 앉아 있는 소파를 향해 다가왔다. 긴 다리 덕인지 몇 발짝 걷지 않았는데도 그는 금세 내 앞에 섰다.

그가 소파 팔걸이와 등받이를 각기 양손으로 짚으며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 바람에 나의 시야 안에 가득 찬 미려한 얼굴에 나는 숨을 꼴깍 삼켜야 했다.

“나를 사랑하는 거야, 이브?”

그가 유혹하듯 눈웃음을 치며 물었다.

“그럴 리가요. 폐하는 제 이상형이 아닌걸요.”

부디 목소리가 떨리지 않길 바라며 단호하게 잡아뗐으나, 이미 내 얼굴은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을 것이다.

“으음.”

그가 나른한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정말 아니야?”

그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하노라니, 정원에서 함께 꽃비를 맞던 그 밤의 일이 다시 생각났다.

“어떡하지.”

그가 난처하다는 듯, 그러나 전혀 난처하지 않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말은 내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나는 너를 사랑하는 것 같은데.”

“……!”

갑작스러운 고백에 놀라 굳어 있는 사이, 테오도르는 사르륵 두 눈을 접으며 내게 입을 맞췄다.

촉-

그의 입술이 내게 닿았다가 부끄러운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사랑해, 이브.”

“저, 저는…….”

황망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적에, 그가 다시 한번 내게 초옥- 입을 맞췄다.

그러다 뒤늦게 퍼뜩 정신을 차린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나며 횡설수설했다.

“이, 이건 뭔가 잘못됐어요. 저는 일단 남자이고.”

“여자란 건 이미 알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

두 번째 충격이었다.

내가 여자란 걸 알고 있었다고? 언제부터?

그러나 나는 놀랄 틈도 없었다. 그가 이어 세 번째 충격을 던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네가.”

스윽 손을 뻗어 온 그의 손이 까칠한 나의 뺨을 스쳤다. 깊고 그윽한 시선이 내 얼굴로 향했다.

“나의 오랜 기억 속 이보네라는 것도…….”

“안 돼요!”

순간 화들짝 놀란 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가 나를 알아보았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보다 공포가 먼저 나를 덮쳤다.

“아니에요, 저는…….”

“괜찮아, 이보네.”

그가 웃으며 내 손목을 감싸 쥐었다.

“나는, 괜찮아.”

“그게 무슨…….”

그곳에는 오래전 나의 친부가 남긴 상처가 남아 있었다. 루돌프의 저주와도 같은 술식이 남은 상처이기도 했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

테오도르는 말릴 틈도 없이 나의 진명을 읊으며 그 위로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서늘한 기운이 나를 감싸며, 동시에 손목의 상흔이 사라졌다.

“어떻게…….”

나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깨끗해진 나의 손목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에게 남다른 힘이 있다는 것은 어릴 적부터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벤야민마저 알아보지 못한 루돌프의 술식을 단박에 파악하고 해체할 줄은…….

“페르디난트의 망령은 모두 지워 냈으니.”

그가 입꼬리를 씨익 말아 올리며, 다시 한번 내 입가에 입을 맞추었다.

“-이제 너를 사랑해도 될까?”

“…….”

“너도 나를 사랑해 줄래?”

“…….”

나는 멍하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다소 깊고 진득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 *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우리는 그의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있었다.

나는 이불로 몸을 돌돌 싸매고 있었는데, 테오도르는 그런 내가 귀엽다는 듯 피식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오도르가 나를 기억한다.

내게 남겨진 저주를 해체하고, 내 이름을 불러 주었다.

그리고 나를 사랑한다.

……테오도르가 나를 사랑한다.

나는 이 모든 게 꿈만 같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내 손목에 입술을 지분거리는 그를 느끼며 이게 꿈이 아니란 것을 새삼 깨달았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나는 문득 물었다. 입을 맞추기 전에 해야 했던 질문이었다.

“응?”

“제가, 이보네라는 걸…….”

“아아.”

그가 다정하게 웃으며 땀에 젖은 내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다시 만난 순간부터.”

그러고는 내 두 눈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예고 없이 뒤통수를 감싸 당겨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실은, 처음 본 날부터 단 한 번도 너를 잊은 적이 없었지. 정말 오랜 기간 찾았어, 이보네.”

내 이마에서 슬며시 입술을 떼어 낸 그가 다시 콧잔등과 입술 위로 입을 쪽쪽 맞추었다.

거침없고 노골적인 그의 애정에 황송할 지경이었다.

“저는 당연히 폐하께서 저를 기억 못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흔들림 없이 꺼낸 그 말에 기쁨이 샘솟았다.

“그럼 왜 처음부터 아는 척하지 않으셨던 거예요?”

“네가 도망갈까 봐. 내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사라질 것 같았거든.”

그의 대답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어떻게 알았지?

물론 그 당시에는 그가 나를 알아보는 순간 튈 준비를 하고 있었다만…….

“사실은 조금 더 천천히 다가가려고 했는데, 날 보는 네 눈이 너무 예뻐서 참을 수가 없었어.”

“그럼 이, 이건 어떻게 한 거예요? 분명 루돌프 페르디난트가 제게 술식을 걸었는데…….”

궁금한 게 무척 많았던 나는, 질문을 끊을 수가 없었다.

그런 나를 보는 테오도르의 눈동자에는 셀 수 없이 무수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신성력이야.”

그가 내 손에 깍지를 끼더니 제 쪽으로 당겼다. 그러고는 손등 위로 자신의 뺨을 비비며 대답했다.

“신성력이요?”

“레오브란테의 힘이 내게로 넘어왔을 줄은,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겠지.”

문득 오래전 율리아 언니가 해 주었던 제국의 3대 가문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대대로 훌륭한 검사를 길러 온 검술 명가 체르니시아.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하였던 페르디난트.

그리고 경이로운 신성력으로 제국에 축복을 내리는 레오브란테.

테오도르의 친모는 레오브란테의 딸이었다.

“레오브란테의 늙은 여자가 이걸 알면, 얼마나 분해할까.”

그가 말하는 레오브란테의 늙은 여자란, 그의 의붓할머니였다.

“신성력과 술법은 본질적으로 같은 근원에서 시작되지.”

테오도르가 이제는 깨끗해진 내 손목의 과거 흉터가 있던 자리를 꾸욱 누르며 설명했다.

“모두 인간의 가장 약한 부분에서 기인해. 다른 점이 있다면 페르디난트의 술법이 약점을 파고드는 것과 달리, 레오브란테의 신성력은 아픔을 치유한다는 거야.”

“…….”

“네 상처를 처음 본 날부터, 치유해 주고 싶었어. 그래서 다시 만날 때에는 내 힘으로 없애 주려고 열심히 연습했는데…….”

그는 그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나는 그 뒷말을 알 것 같아.

10년 전의 여름. 나는 그에게 흉터를 보였고, 우리는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네가 죽었다는 말, 안 믿었어.”

10년 전에 이미 죽은 사람이었던 나를, 그는 홀로 오랜 기간 찾아 헤맸다고 했다.

정작 나는 나의 슬픔과 우울에 함몰되어 그를 생각하지 못했는데…….

가슴이 두근두근 벅차올랐다.

“폐하께서 체르니시아의 복권을 준비 중이라고 들었어요.”

“응. 네 가문을 복권시킬 거야. 그리고 그 이후에 너를 나의 부인으로 맞이할게.”

“…….”

“그러니 조금만 더 참아 줘.”

그가 내 손등과 손목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는 잠시간 쏟아지는 그의 애정 속에서 숨을 삼키다가 간신해 대답할 수 있었다.

“……고마워요, 폐하.”

나는 그와 입을 맞춘 이후 처음으로 그를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런데 나의 웃는 얼굴이 이상했던 걸까.

그는 마주 웃어 주는 대신 그저 나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돌연 못마땅하다는 듯 이맛살을 좁혔다.

“그런데 왜 계속 내게 존대를 하는 거야?”

“폐하?”

“그렇게 부르지 마.”

그가 고집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테오도르. 내 이름을 불러 줬잖아, 예전에는.”

“아……. 그렇지만…….”

이제는 그와 나의 처지가 달라지지 않았나. 그런데 어떻게 감히 그렇게 부른단 말인가.

내가 머뭇거리며 쉬이 답하지 못하고 있자, 그가 깍지 낀 내 손가락 하나하나 입을 쪽쪽 맞추며 사근거렸다.

“테오. 이제는 그렇게 불러 줄래?”

그의 입술은 나의 열 손가락에게 공평히 사랑을 나누어 주었으나, 황금빛으로 일렁이는 두 눈동자는 오롯이 나만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으응?”

그는 내가 대답을 할 때까지 조르겠다는 듯, 감히 거절할 수 없는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칭얼댔다.

“테오…….”

결국 그에 이기지 못한 내가 조심스럽게 이름을 부르자, 테오도르의 얼굴 위로 화사한 웃음이 번져 나갔다.

단언컨대 나는 남자가, 아니, 사람이 그렇게 예쁘게 웃는 것을 처음 보았다.

“사랑해, 이브.”

그가 내 머리카락을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는 듯 서랍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 오더니, 작은 머리 장식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품이야. 어머니가 황가에 시집올 적에 쓰셨던 거래. 받아 줘.”

작지만 척 보기에도 귀해 보이는 보석과 화려한 세공이 유독 눈에 띄는 머리핀이었다.

“하지만…….”

나는 나의 짧은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망설였다.

페르디난트에서 지낼 적에 아무렇게나 싹둑 잘랐던 머리카락은 어깨에도 닿지 않을 만큼 짧은 단발 길이였다.

“머리는 금방 자랄 테니까.”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생긋 웃었다.

“머리를 길러 보는 건 어때? 지금도 예쁘지만, 머리를 예전처럼 길러도 예쁠 거야.”

머리를 다시 기르고 싶다는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이야기하니 꼭 기르고 싶어졌다.

“그래.”

“아…… 이브…….”

수줍게 대답하자 그가 돌연 앓는 소리를 내더니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어느 부분에서 그가 흥분했는지 모르겠으나, 나는 지칠 줄 모르는 체력의 그에게 밤을 내어 주어야 했다.

그리고 그 밤을 기점으로 나와 그의 사이가 변했다.

내가 그의 측근 기사였기에, 당연하게도 우리는 늘 붙어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점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아졌고, 점점 대담해졌다. 사람들의 눈이 없는 곳이라면 어디서든 사랑을 나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 * *

체르니시아의 복권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테오도르는 지지부진한 복권 문제로 머리가 아픈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내색하지 않았기에, 나 또한 그저 기다려 주었다.

나는 그사이 머리가 상당히 길었다. 그가 선물해 준 머리핀으로 머리를 장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어울려, 이브.”

테오도르는 뿌듯한 얼굴로 내 머리카락을 쓸었다.

“감기는 어때?”

“나아 가고 있어.”

나는 쉰 목소리로 콜록거리며 답했다.

지난 주말, 그와 정원을 산책하다가 밤을 홀딱 새워 버렸다.

덕분에 나는 심한 감기에 걸렸고, 이렇게 침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테오도르는 그 모든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절절맸는데, 어느 정도는 그의 잘못이 맞았기에 내버려 두었다.

그가 그 어둠 속에서 입을 맞추지만 않았어도, 추위를 잊은 채 애정을 나누지는 않았을 것이다.

감기는 생각보다 독해서 빠르게 낫지 않았다. 덕분에 나는 휴가를 내고 황궁의 숙소에서 자리보전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테오도르는 하루도 빠짐없이 내 옆에 꼬옥 붙어 밤새 간호해 주었다.

지난밤에도 잠을 자지 못하고 내 곁을 지켜 준 그의 얼굴에 숨길 수 없는 피로가 가득했다.

그의 호위라는 명목으로 황궁에 붙어 있으면서 오히려 그의 간호를 받는 상황이 조금 미안해졌다.

“미안, 이브. 오늘은 일정이 있어 가 봐야 해.”

“같이 갈까?”

“으음, 마음 같아서는 아주 작게 만들어서 주머니에 담아 가고 싶지만.”

그가 열이 남은 내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괜찮아, 이브. 너는 푹 쉬고 어서 나아서 내가 돌아올 때 안아 주면 돼.”

“하지만…….”

“사랑해, 이브.”

그렇지만 괜찮다는 말과 달리 테오도르는 아쉬움이 가득 남은 자잘한 입맞춤을 내 얼굴 곳곳에 남긴 뒤에야 몸을 돌렸다.

며칠간 그가 나를 간호하느라 제대로 자지 못했음을 알았기에 괜한 걱정이 들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약 기운에 스르륵 잠이 들었다.

* * *

막 첫사랑에 빠져들었던 어린 나는 그가 내게 쏟아 주는 애정에 홀려 모든 마음과 몸을 다 내주었다, 어리석게도.

불행은 소리 없이 다가왔다.

아침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사랑을 나누던 그가 생전 처음 보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차가운 목소리로, 누구냐고 물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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