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남자의 인성이 조금 이상하다-1화 (1/14)

00. Prologue

애인이 말에서 떨어졌다.

그리고 한때 세상에서 가장 완벽했던 내 남자는 말에서 떨어지며 기억과 함께 인성까지 날려 먹었다.

슈욱-!

날아온 단검이 나의 뺨을 스치고 반대편 벽에 부딪혀 아래로 떨어졌다.

검날이 스쳐 간 자리, 따끔- 하고 핏물이 배어 나왔다.

“저런, 빗나갔네.”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마치 고대의 명화 속에서 걸어 나온 듯한 잘생긴 남자가 거만하게 턱을 괴고 앉아 나를 향해 비식 웃고 있었다.

테오도르 레온느 알브레히트.

대륙에서 가장 광활한 땅의 주인이자 찬란한 알브레히트의 황제. 그리고 나의 애인.

“아쉬워라. X같이 예쁜 얼굴을 제대로 망가뜨려 줄 수 있었는데.”

……이었던 남자.

테오도르는 빗나간 단검과 나를 쳐다보며 나른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그를 둘러싼 또 하나의 소문이 사실이었음을 깨달았다.

[1황자 전하께서는 종종 주변인을 과녁 삼아 유흥을 즐기신다더라.]

심지어 그 소문은 10년도 더 된 아주 옛날의 것이었는데.

힐끔,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은색 머리카락을 보았다.

조금 전 스쳐 간 칼날에 베여 우수수 떨어진 그것들의 신세가 꼭 내 처지 같아 서러움이 울컥 밀려왔다.

“뭐 해? 안 주워 오고.”

문득 들려오는 삐딱한 목소리에 나는 퍼뜩 정신을 차리고서 바닥에 떨어진 그의 단검을 주워 왔다.

“여기 있습니다, 폐하.”

담담히 그것을 바치자, 그는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한쪽 눈썹을 삐딱하게 치켜올렸다.

“흐음…….”

그는 내가 내민 단검을 받을 생각도 않은 채, 내 얼굴만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확히는 어설프게 잘려 나간 내 머리카락을.

“…….”

한참이나 계속되는 대치에 슬슬 팔이 저릴 무렵.

나는 조심스럽게 눈동자를 굴려 그를 훔쳐보았다.

비록 기억과 함께 인성까지 잃어버린 그였지만, 잘생긴 얼굴만큼은 여전했다.

문득 어느 호사가들이 그를 향해 찬양하던 말들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테오도르!

알브레히트 황가의 가장 찬란하게 빛나는 보물!

브리힘 신의 가호가 그에게 있으라!]

검은 머리카락은 어느 고독한 겨울밤과 같이 고혹적인 색채를 띠었고, 태양을 닮은 황금빛 눈동자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보석과도 같았다.

고대 신화 속 남신을 빚어 놓은 듯 조각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하며, 금욕적인 제복 아래 숨겨진 완벽한 몸까지.

그는 누가 뭐라 하여도 현존하는 대륙의 가장 아름다운 남자였다.

나는 테오도르의 저 잘생긴 얼굴과 단단한 몸을 좋아했다.

그렇지만 내가 정말 사랑하는 것은 역사에 길이길이 회자될 그의 완벽한 외모보다도, 다정하고 순수한 그 성격이었다.

테오도르는 언제나 봄바람처럼 따뜻한 남자였다.

누구에게나 상냥했으며, 어린아이만큼이나 순진했다.

물론 밤의 그는 조금 흉포한 한 마리의 짐승 같았지만, 그것은 논외로 하고.

‘그래, 테오는 원래 저런 사람이 아니었어.’

불과 얼마 전까지 그가 내게 보였던 햇살처럼 따스한 미소를 떠올리며 다시 마음을 다잡을 때였다.

“마음에 안 들어.”

잔뜩 불쾌감에 젖은 목소리와 함께 혐오를 넘어 경멸에 가까운 시선이 내게 닿았다.

“내가 이딴 버러지 같은 것을 착각했을 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 고혹적인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것은 마치 어느 고명한 음악가의 영혼을 불살라 작곡한 유작과도 같았다.

얼핏 들으면 욕설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아름다운 선율이었다.

한때 그는 저 아름다운 목소리로 내게 사랑을 속삭였다.

“안 들리나?”

내가 그의 욕설을 들리지 않는 것으로 치부하고 가만히 귀를 닫을 적에, 그가 다시 입술을 열었다.

“당장 꺼지라고, 내 눈앞에서.”

그가 내게 험악한 표정으로 화를 내며 축객령을 내렸다.

“……죄송합니다, 폐하.”

그의 말을 듣지 않고 멍하니 서 있었던 건 내 잘못이기에, 나는 황급히 사과하고 몸을 돌렸다.

그의 집무실에서 돌아 나오는 길.

핏물이 배어난 왼쪽 뺨보다도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손목이 더욱 따끔거렸다.

이를 악물며 밖으로 나오자, 복도에서 수군거리던 기사들이 내게 우르르 몰려들었다.

“괜찮아, 이브 경?”

“이것 봐, 내가 뭐라 했어? 폐하는 인성이 조금…….”

“조금이 아니라 굉장히…….”

“쓰레기…….”

“인성 파탄자…….”

“분리수거도 안 되는…….”

“역사에 둘도 없을 폭군…….”

“알브레히트의 미래가…….”

숙덕거리는 말소리는 대개 황제의 인성에 관한 험담이었다.

“아니야.”

나는 단호한 말씨로 그를 두둔했다.

“폐하는 아직 편찮으시잖아. 그래서 그런 거야.”

그래, 이건 그가 많이 아픈 탓이다.

낙마를 하며 머리를 다쳐서, 그래서 이렇게 변한 것이다.

모두 회복하여 기억을 되찾을 때는 분명 다정했던 과거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그러니까 폐하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마.”

내 앞에서 나의 테오를 욕하지 마.

나는 내 앞에서 그의 욕을 한 기사들을 팩 노려보며 무섭게 경고했다.

그러나 이런 나의 비호와 절대적인 신뢰에도 불구하고, 테오도르의 기억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나를 핍박했고, 잔인한 목소리로 아픈 상처를 주었다.

“끈질기기도 하지. 네가 언제까지 더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버틸 거냐고?

테오도르는 죽은 나를 10년이 넘도록 포기하지 않고 찾아 헤맸다.

그리고 끝내 죽지 않고 살아 있는 나를 찾아냈다.

비록 나는 그의 지난 10년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내가 그의 기억을 기다린 한 달은 그가 나를 찾아 헤맨 날들에 비하면 아주 짧은 시간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그러니까 나는 더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의 테오가, 나를 다시 기억해 낼 때까지.

얼마 전 그가 내게 남긴 뺨의 상처는 희미한 흔적으로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걸 어떡하냐고 나를 대신해 호들갑을 떨었지만, 딱히 상관없었다.

다만 내가 걱정되는 것은 하나였다.

테오도르, 나의 아주 작은 상처에도 대신 아파하던 순수하고 착한 남자.

그가 기억을 되찾았을 때 이걸 보고 울면 어떡하지.

그래.

그뿐이었다, 내가 속상한 건.

“내 눈에 띄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얼굴 보기 역하니까.”

괜찮다.

“얼마나 더 추한 꼴을 보일 참이지?”

괜찮았다.

“너만 보면 기분이 나빠. 영영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참을 수 있어.

“테오……!”

참을 수 있…….

문득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테오’는 오직 나만이 부를 수 있는 애칭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를 그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내가 아닌 다른 여자였다.

그는 다른 여자와 나란히 걷고 있었다.

내게만 보여 주던 표정, 눈빛, 미소로 그 여자를 보았다.

아, 그런데 이건 좀…….

아픈데…….

…….

그가 여자와 눈을 마주치며 다정한 웃음을 터뜨렸다.

싫어.

그런 눈으로 그 여자를 쳐다보지 마.

나를 돌아봐.

내가 여기 있어, 테오.

나는 테오도르가 나를 돌아봐 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쳐다보았으나, 효과는 없었다.

[사랑하는 여자를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멍청하지 않아.]

[네가 어떤 모습이더라도, 나는 너를 한눈에 알아차렸을 거야.]

다시 만났을 때, 분명 그렇게 말했으면서.

애정이 듬뿍 담긴 손짓으로 여자의 뺨을 쓸어내리던 그가 서서히 여자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그의 입술이 여자의 이마에 닿는 순간.

까르륵-!

행복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테오도르는 흘러나오는 웃음소리의 한 자락마저 사랑스럽다는 듯 함께 웃었다.

여자의 머리끝을 손가락으로 돌돌 말며 그 위로 몇 번 더 자잘한 입맞춤을 남겼다.

여자를 향해 둥글게 휜 그 매혹적인 눈웃음에 아플 리 없는 손목이 또다시 욱신욱신 아팠다.

고개를 내려 상처 하나 없는 깨끗한 손목을 보았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몹시 그윽한 눈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어떤 순간에 그런 눈을 하는지 잘 안다.

조금 전과 달리 다소 진득한 분위기 속에서, 여자가 그를 향해 까치발을 들었다.

나는 그 이상 보고 있을 용기가 없었다.

두 사람이 입을 맞추기 직전, 나는 몸을 돌렸다.

그러니까 이건 좀, 참기 힘들었다.

* * *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과거 내가 사랑했던 테오도르는 더 이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나를 볼 때마다 경멸의 시선을 보내는 그 남자와 내가 과거 사랑했던 남자는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걸.

[임신했습니다.]

의사의 그 말만 아니었더라면 내 기억 속 상냥한 그가 돌아오길 조금 더 기다렸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대로 있다간 그 여자에게 죽임을 당할 테지.

나도, 배 속의 아이도.

한때 나와 사랑을 속삭였던 남자의 약혼녀에게 죽는다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그 전에 내가 먼저 그 사랑을 놓을 참이다.

“아니지. 사랑을 놓은 건 내가 아니야. 네가 먼저 놓았어, 테오도르.”

더 이상 나와 그가 사랑했다는 흔적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직 하나.

나와 함께 종적을 지워 낼 작은 흔적을 제외하고는.

나는 아이가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 그 납작한 아랫배를 가만히 매만져 보았다.

“아직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는데…….”

이제 떠날 것이다.

이틀 뒤, 두 사람의 약혼식이 시작되기 전에.

그는 내게 약혼식장에서 그 여자를 호위하라고 명령했지만, 내가 그녀를 지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시 생각해 보니 조금 짜증이 났다.

언제는 내게 두 번 다시 검을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면서.

“그래 놓고 그 여자를 위해서 다시 검을 들라고 해? 폭군 새끼…….”

격한 욕설을 짓씹던 나는 불현듯 배 속의 아기가 욕을 들었을까 걱정이 되어 멈칫했다.

“괜찮아, 아기야. 다 잘못 들은 거야. 나쁜 말은 모두 잊어버리렴.”

나는 아랫배를 한 번 토닥이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분노를 꾹꾹 담아 짤막한 편지를 남겼다.

<안녕히 계세요, 폐하.

폐하의 심기만 어지럽히는 X같은 XX 새끼는 이만 사라져 드리겠습니다.

약혼 선물이라 생각하십시오.

만나서 X같았고, 다신 보지 맙시다.

부디 유병장수하시길.>

나는 잠시 쓰던 걸 멈추고 종이 위의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지난 10년간 입이 험한 견습 기사들 틈에서 자라야 했던 나는, 결코 욕을 할 줄 몰라서 그동안 참았던 게 아니다.

혹 그가 이걸 보고 열 받아서 나를 죽이겠다고 찾아오면 어쩌나 슬쩍 걱정이 되었으나…….

“괜찮겠지, 뭐.”

어차피 그와는 이제 영영 만날 일 없을 것이다.

황제의 측근 기사, 이브 로웰린은 공식적으로 죽은 사람이 될 테니까.

그동안 내가 당해 온 것을 생각하니, 이대로 떠나기가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다시 만년필을 들었다.

<그런데 그거 아세요?

네 얼굴이 제일 X같았어, XX XX야.>

그렇게 나는 미련 없이 두 문장을 더 휘갈기고서 그를 떠났다.

01. 검은 머리 황자님

이보네 체르니시아.

알브레히트의 가장 어린 검.

대대로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를 배출해 온 체르니시아 가문의 막내딸.

그것이 어린 시절의 나를 가리키는 수식어였다.

알브레히트 제국의 2황자 에른스트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가문의 어른들끼리 미래를 약속한 사이이기도 했다.

당시의 나는 너무 어렸고, 그래서 어른들끼리 약속했다는 그 ‘미래’가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어른들의 잔소리를 피하기 위해 그들이 시키는 대로 종종 황궁을 방문해 에른스트를 만나야 했다.

그날도 나는 에른스트를 만나러 황궁에 방문하는 길이었다.

[잘 들어, 이보네. 황궁에 가면 테오도르 1황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오늘도 언니들은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신신당부하였다.

언니들이 그렇게까지 붙잡고 이야기하지 않아도 테오도르 1황자에 대한 소문은 나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1황자궁에서는 매일 시체를 치운다더라.]

[피 냄새와 비명 소리가 끊이는 날이 없고…….]

[살아 있는 사람을 과녁 삼아 유흥을 즐기는데…….]

[순결한 짐승의 피로 목욕을…….]

으으으…….

나는 공연히 드는 한기에 오싹하니 소름이 돋아 양팔을 문질렀다.

그러나 1황자에 관련된 이야기 중에서 가장 으스스한 것은 바로 그것이다.

[특히나 그 검은 머리카락이 아주 불길하기 짝이 없어…….]

그가 지녔다는 검은 머리카락.

알브레히트 제국에서 검은색은 아주 불길하게 여겨졌다.

아주 오래전, 마물을 세상에 풀고 사람들을 위협한 ‘고대의 어둠’을 상징하는 색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제는 전설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지만, ‘고대의 어둠’을 물리친 세 가문이 이끄는 제국에서는 여전히 검은색을 끔찍하게 생각했다.

고위 귀족가에서 검은 머리나 검은 눈의 아이가 태어나면 가문 밖으로 내다 버릴 정도였다.

그런데 황가에서 검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태어나다니.

[있지, 이보네. 사실 테오도르 황자님은 ‘고대의 어둠’이 사람의 몸을 빌려 현세에 태어난 거래.]

나는 언젠가 브리안 오빠가 해 주었던 이야기를 떠올리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니야! 그건 브리안 오빠가 지어낸 거짓말이야!’

짓궂은 막내 오빠 브리안은 나를 괴롭힐 때마다 ‘테오도르 1황자에게 시집보낸다’며 그와 관련된 무서운 소문들을 들려주곤 했다.

그러면 나는 으아앙 울며 리하르트에게 달려가 브리안의 괴롭힘을 미주알고주알 일러바쳤다.

[저런, 브리안이 또 이보네를 괴롭혔나 보네.]

상냥한 첫째 오빠 리하르트는 브리안의 말이 거짓이라고 했다.

[괜찮아, 이보네. 그건 브리안이 널 놀리려고 지어낸 거짓말이야.]

[정말? 정말 거짓말이야?]

훌쩍이며 재차 묻자 리하르트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너를 그런 악마 같은 황자에게 시집보낼 리 없잖아.]

[…….]

그러니까 리하르트는 나를 1황자에게 시집보낸다는 브리안의 놀림이 거짓이라고 했지, 1황자에 대한 무시무시한 소문들을 부정한 게 아니었다.

‘어, 어차피 나랑은 마주칠 일 없는 사람이니까…….’

나는 창밖으로 보이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며 1황자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위해 노력했다.

‘1황자궁은 황후궁이랑 멀리 떨어져 있으니 괜찮겠지?’

황궁 외진 곳에 궁전을 얻고 홀로 생활한다는 1황자와 달리, 내가 지금 만나러 가는 2황자 에른스트는 아직 나이가 어려 황후궁에 기거한다.

에른스트의 어머니인 마르가라테 황후와 전 황후 소생인 테오도르 1황자는 사이가 썩 좋지 못했다.

그러니 황후궁에 가면 1황자와 마주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하자 마음이 조금 편안해졌다.

나를 태운 마차가 어느덧 황궁의 정문을 넘어섰다.

“이보네!”

마차에서 내리자 에른스트가 방방 뛰며 내게 달려왔다.

“안녕, 에른스…… 으악!”

“보고 싶었어!”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에른스트가 나를 덥석 끌어안으며 외쳤다.

강한 포옹에 버둥거리던 나는 그를 밀어내며 째릿 노려보았다.

“숨 막히잖아!”

그러나 나의 매서운 눈길에도 불구하고 에른스트는 그저 생글생글 웃었다.

“어머니의 후원에서 놀자!”

“잠깐만, 황후 폐하께 인사를 먼저…….”

“괜찮아! 어머니는 지금 손님을 맞이하느라 바쁘시단 말야! 어서 따라와, 이보네!”

에른스트에게 막무가내로 끌려가는 나를 보며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쿡쿡 웃었다.

“있지, 있지, 이보네. 우리 소꿉놀이…….”

“숨바꼭질할래?”

소꿉놀이를 하자며 칭얼거리는 에른스트의 말을 끊으며 대뜸 물었다.

“숨바꼭질?”

새로운 놀이에 에른스트가 흥미를 보였다.

“규칙은 간단해. 술래가 눈을 감고 100까지 세는 동안 숨는 거야.”

에른스트가 그 화사한 백금발을 흩날리며 나를 향해 씨익 웃었다.

“그럼 술래는 내가 할래!”

무더운 날씨에 그날따라 움직이기 귀찮았던 나는 얕은꾀를 냈다.

에른스트가 눈을 감고 100까지 세는 동안, 정해진 공간을 슬금슬금 벗어났다.

척 보기에도 몸을 숨기기 좋아 보이는 커다란 나무를 발견한 나는 그 위로 올라타 시원한 나무 그늘에 몸을 숨겼다.

‘여기 있으면 한동안 아무도 귀찮게 하지 않겠지!’

나는 스스로의 재치에 감탄하며 키득키득 웃었다.

유난히 더위를 많이 탔던 나는 그렇게 나무 기둥에 기대어 그늘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그렇게 멀뚱멀뚱 시간을 보내다가 스르륵 잠이 들고 말았다.

끔뻑끔뻑 졸다가 다시 눈을 떴을 적에.

“……?”

내 위로 짙은 그림자 하나가 드리운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웬 남자아이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누구지?’

나와 비슷한 또래 같았는데도 키가 굉장히 크고 예쁜 남자애였다.

나무 그늘 아래 그 머리카락은 평범한 짙은 밤색처럼 보였으나, 흰 얼굴 위로 자리 잡은 눈코입이 무척 화려했다.

인형처럼 아름다운 이목구비에 홀린 듯 멍하니 쳐다볼 때였다.

“안녕.”

그 애는 나른한 목소리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

흘러나온 목소리가 그 얼굴만큼이나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고 말았다.

그러자 그 애는 즐겁다는 듯 두 눈을 가늘게 휘며 웃었다.

“왜 웃어!”

발끈, 성질을 내며 외치자 그 애가 내 앞에 무릎을 굽히며 시선을 맞추었다.

“그냥. 귀여워서.”

담담하게 흘러나온 말씨에 화르르 얼굴이 붉어졌다.

“어? 빨개졌네?”

“더, 더워서 그래. 여름이니까…….”

웅얼웅얼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맞받아치며 눈동자를 데구루루 굴렸다.

그런 내 모습을 보며, 그 애는 더욱 예쁘게 웃었다.

“더워? 시원하게 해 줄까?”

그 애는 허락도 없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고는 아이답지 않게 길쭉한 손바닥으로 내게 손부채질을 해 주었다.

“어때? 시원해?”

솔직히 말하자면, 그 애가 해 주는 손부채질은 하나도 시원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애가 베푸는 친절이 이상하게도 간질간질한 기분이 들어서, 나는 거짓말을 했다.

“응.”

그러자 순진한 그 애는 내 말을 철석같이 믿으며 기뻐했다.

“그런데 넌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

“친구랑 숨바꼭질. 그러는 너는?”

나의 물음에 그 애가 그 예쁜 황금빛 눈동자를 사르르 휘며 웃었다.

“보물찾기.”

“보물찾기? 아, 그거 뭔지 알아! 해 본 적 있어! 그런데 보물 안 찾고 여기서 나랑 같이 있어도 되는 거야?”

그 애는 대답 대신 더욱 예쁘게 웃었다.

어쩌면 이 애도 나처럼 더위를 피해 여기로 온 건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애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다 보니, 어느덧 날이 서서히 저물어 갔다.

붉어진 하늘을 발견한 나는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나 이제 가 봐야 해!”

큰일이다.

이렇게까지 오래 숨어 있을 생각은 없었는데, 지금쯤 에른스트가 나를 찾고 있을 것이다.

눈물 많은 에른스트가 울고 있지는 않을지 조금 걱정이 되었다.

“나는 황후궁으로 가야 해. 너는?”

“1황자궁.”

그 애가 두 눈을 깜빡이며 대답했다. 그럴 때마다 함께 흔들리던 그 애의 길고 촘촘한 속눈썹을 감상하던 나는 순간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응?”

“1황자궁.”

“테, 테오도르 1황자의 궁전 말하는 거야?”

하마터면 너무 놀라 나무 아래로 떨어질 뻔한 순간, 그 애가 나를 와락 붙잡았다.

“괜찮아?”

졸지에 그 품에 안기다시피 하게 된 나는 왠지 부끄러운 마음에 그 애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웅얼 답했다.

“으응, 괜찮아. 잠깐 놀라서…….”

한여름의 뜨거운 공기 탓인지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렸다.

“1황자궁은 어때? 황자님이 무섭지 않아?”

“……?”

조심스럽게 묻자 그 애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간 얼굴로 나를 보았다.

그 순진한 모습에 나는 조금 답답해졌다.

“그…… 테오도르 1황자는…….”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을 알지만 목소리를 슬쩍 낮추어 물었다.

“조금만 심사가 뒤틀리면 사용인들의 목을 벤다며? 1황자궁은 매일같이 시체를 치운다던데, 정말 그래?”

“뭐?”

“1황자님은 시체를 장난감 삼아 논다고…….”

그 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다 헛소문이야. 순진하게 그런 걸 믿는 거야?”

“아, 아니야! 나도 그런 거짓말 하나도 안 믿었어!”

나는 새빨개진 얼굴로 외쳤다.

그러자 그 애는 더욱 짙은 웃음을 머금으며 나를 보았다.

그렇게 웃는 그 애가 너무 예뻐서, 자꾸만 심장이 쿵쿵 뛰었다.

* * *

황후궁을 향해 바삐 걸음을 옮기는 이보네의 뒷모습을, 소년은 가만히 응시했다.

마침내 이보네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소년의 짙은 밤색 머리카락이 천천히 검은색으로 바뀌어 갔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소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 이보네의 흔적을 좇으며 자그맣게 읊조렸다.

이보네가 이름을 밝히지 않았음에도 그는 그녀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어떻게 사람이 저렇게 생길 수가 있지?”

순수한 의문이 뒤따르는 자리에 자그마한 열망이 함께 했다.

“예뻐…….”

느리게 고개를 돌린 그가 조금 전까지 이보네가 앉아 있던 자리를 보았다.

톡-.

하늘에서 붉은 핏방울 하나가 그의 뺨 위로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고개를 젖혀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성인 남자 두 명이 대롱대롱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흡사 시체와도 같은 처참한 몰골로.

남자들은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암살자였다. 입이 막힌 탓에 그들은 소리를 낼 수 없었다.

테오도르와 눈이 마주치자 남자들의 눈동자에 두려움이 서렸다.

테오도르는 가만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그의 손끝에서 흰 빛무리가 흘러나왔다.

쿵-!

묶여 있던 암살자들이 아래로 떨어졌다.

테오도르는 축축한 흙바닥 위에 엎어진 남자들의 위로 사뿐히 착지했다.

마르가라테 황후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황후궁 근처까지 찾아온 터였다. 커다란 나무는 척 보기에도 무언가 숨기기 좋아 보였다.

수하들을 시켜 반시체가 되어 버린 남자들을 나무 위에 매달던 도중, 고요히 잠들어 있는 작은 소녀를 발견했다.

테오도르는 곧바로 암살자들의 입을 봉한 뒤, 수하들에게 물러나라고 손짓했다.

그러고는 소녀를 구경했다.

부드럽게 물결치는 은색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은색 빛깔을 띤 길고 하늘하늘한 속눈썹. 그 아래 눈을 감고 있음에도 오밀조밀 반듯한 이목구비.

소녀는 예뻤다. 꼭 인형처럼 예뻤다.

눈을 감고 잠든 모습이 너무 예뻐서 한동안 떠나질 못했는데, 잠에서 깨 눈을 뜬 모습은 더 예뻤다.

새하얗게 빛나는 은발과 싱그러운 녹음을 머금은 녹색 눈동자를 보며 한눈에 알아봤다.

이 여자애가 세간에 소문난 그 체르니시아의 막내딸이라는 걸.

“정말 예뻤어, 그렇지?”

테오도르는 온몸이 칭칭 묶인 채로 바닥에 나뒹굴던 암살자에게 말을 걸며 사르륵 웃었다.

그러나 입이 막혀 있던 암살자는 당연하게도 대답을 할 수 없었다.

그것을 모르지 않을 텐데, 테오도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왜 대답을 안 해? 너는 그 애가 예쁘지 않았어?”

그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황금색 빛무리가 기다란 검의 형상으로 변해 갔다.

순간 남자들의 몸이 들썩였다.

그들은 불과 몇 시간 전, 소년이 저 검으로 자신의 동료들을 어떻게 난도질하였는지 기억하고 있었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저희의 배후라는 것을 밝히고 간신히 살아남았는데, 이 자리에서 입을 잘못 놀렸다가 생목숨을 잃을 순 없었다.

“그렇게 인형처럼 예쁜 애는 처음 보았는데…….”

작은 소년의 중얼거림에 남자가 맞장구를 치듯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쇄액-!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성력으로 만들어 낸 긴 검이 남자의 목을 베어 버린 것은.

“감히, 더러운 마음을 품고 있었군.”

테오도르는 순식간에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서늘히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그 옆에서 공포에 질려 덜덜 떨고 있던 다른 남자에게 다가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그 애, 정말 예뻤지?”

눈앞에서 동료의 죽음을 목도한 남자가 읍읍거리며 무언가 말을 해 보려 하였으나, 테오도르의 성력으로 봉해진 입은 어떤 소리도 만들어 내지 못했다.

남자는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거칠게 가로저었다.

조금 전 죽은 동료와 정반대의 답을 내어놓는 남자의 모습에 테오도르가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내 말을 부정하는 건가?”

그리고 그의 읊조림이 채 끝나기도 전에,

쇄애액-!

아직 피가 마르지 않은 검이 남은 남자의 목을 마저 베었다.

쯧.

작게 혀 차는 소리가 공터를 울렸다.

한두 명 정도는 살려 자비로움을 보여 주고자 했는데, 모두 죽여 버리고 말았다.

테오도르는 손에 쥔 검을 아무렇게나 던졌다.

그러자 황금색 빛무리로 형성된 검이 파스스 흩어지며 공기 중에 사라졌다.

테오도르가 뺨에 튄 핏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낼 적에, 기사복을 입은 남자가 그에게 다가왔다.

남자는 혈흔이 낭자한 것을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그 앞에 무릎을 꺾으며 고개를 조아렸다.

“전하, 말씀하신 대로 황자궁에 잠입한 황후의 끄나풀을 모두 색출했습니다.”

“응, 저것들이랑 같이 황후궁으로 보내.”

테오도르는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남자들의 시신을 힐끗 턱짓하며 말했다.

“지금 말입니까? 황후궁이 조금 소란스럽던데요. 2황자의 손님이 사라졌다고…….”

“그래, 지금…… 아.”

남자의 말을 한 귀로 흘려듣던 테오도르가 멈칫했다.

사라졌다는 2황자의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 버린 탓이다.

“린든.”

테오도르는 조금 벅찬 목소리로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나, 사랑에 빠진 것 같아.”

“네……?”

“첫눈에 반했다는 말이 뭔지 알 것만 같다.”

그러자 그의 호위 기사인 린든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이야기를 들은 사람의 표정으로 테오도르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대체 무슨 말을 들은 거지?

사랑……?

세상에, 제 주인과 이렇게나 어울리지 않는 말이 있을까!

어떻게 그런 수줍고도 말랑말랑한 말을…….

그러다 그는 이내 싸늘해진 표정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테오도르의 시선에 히이익 놀라며 고개를 땅에 박아야 했다.

* * *

어둑해진 시간.

황후궁으로 돌아왔을 때, 그곳은 사라진 나를 찾느라 한바탕 발칵 뒤집혀 있었다.

나를 찾았다는 소식에 에른스트는 훌쩍훌쩍 울며 달려 나왔다.

“이, 이보네에…… 흐아아아아앙.”

퉁퉁 부은 두 눈과 새빨개진 코를 한 에른스트가 내게 쪼르르 달려와 포옥 안겼다.

“에, 에른스트?”

“나, 나는 네가, 네가 갑자기 안 보여서, 끕…… 그래서, 네가 잘못된 줄 알고…… 흑, 윽, 흐읍…….”

서럽게 우는 에른스트를 보니 조금 미안해져서 마주 안아 주었다.

몇 번 등을 토닥여 주자 에른스트의 울음이 서서히 멎었다.

‘에른스트는 왜 이렇게 애 같지.’

아이처럼 우는 에른스트를 보자, 조금 전까지 함께 있었던 그 애가 더욱 어른스럽고 남달리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이름도 안 물어봤네.’

그날 만났던 이름 모르는 아이와의 하루는 내게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이후로도 나는 종종 그 애를 생각했다.

웃을 때마다 초승달 모양으로 예쁘게 접히던 황금빛 눈동자와 그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상냥하고 포근한 말씨…….

그 잔상은 오래도록 남아 사라지지 않았다.

밥을 먹을 때에도, 공부를 할 때도, 그리고 리하르트 오라버니와 검을 휘두를 때도…….

“이보네!”

이크-!

귀청이 떨어질 듯 날카로운 목소리에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어깨를 움찔 떨었다.

“또, 또, 또 검을 휘두르고 있었구나!”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그랜시 할머니는 가주인 군터 할아버지의 후처였다.

3년 전에 저택에 들어온 그녀를, 우리는 ‘노마님’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녀의 매서운 시선을 피해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뒤로 쏘옥 숨었다.

그렇지만 그랜시 할머니의 잔소리를 피할 순 없었다.

“이렇게 쓸데없이 검을 휘두를 시간에 단장을 하고 2황자님을 찾아가라 하지 않았니!”

체르니시아의 가풍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랜시 할머니는 내가 검을 배우는 걸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녀는 내가 어른들끼리 약속한 에른스트와의 그 ‘미래’를 위해 얌전히 자수를 놓고 차를 우리며 그들이 생각하는 ‘좋은 숙녀’가 되길 바랐다.

하지만 나는 오라버니와 언니들처럼 검을 배우는 게 좋았다.

“쓸데없다니요, 노마님.”

“그렇지 않아요.”

시무룩해진 나를 대신해 나서 준 것은 리하르트 오라버니와 헬가 언니였다.

“우리 체르니시아는 오래도록 그 자긍심을 지켜 온 검술의 명가이자 알브레히트의 검. 남녀를 가리지 않고 검을 배워 왔습니다.”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단정한 목소리에 그랜시 할머니의 두 눈이 샐쭉해졌다.

“맞아요, 노마님. 설사 이보네가 황자비가 된다 하더라도, 체르니시아의 딸이란 건 변함이 없으니까요. 이 애가 검을 배우는 걸 막으면 안 돼요.”

두 사람의 손이 내 어깨를 따스하게 감싸 주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랜시 할머니의 앞에서 주눅이 들었던 나는, 이내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런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던 그랜시 할머니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돌아갔다.

“하여튼 그놈의 체르니시아…….”

구시렁거리는 그랜시 할머니의 뒷모습을 보며 우리는 키득키득 웃었다.

오라버니와 언니들의 든든한 비호 속에서 나는 내가 체르니시아라는 사실이 몹시 뿌듯했다.

* * *

그러나 그해 여름의 끝물에 다다랐을 무렵.

나는 결국 노마님에게 붙들려 황후궁의 손님이 되어 한 달간 머물러야 했다.

에른스트와 야외 테이블에 앉아서 다과를 먹고 있으려니, 황후궁의 사용인들이 묘하게 흐뭇한 눈으로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왠지 부담스러운 시선 속에서 문득 마지막으로 황궁에 방문했던 날 만났던 이름 모를 남자애가 생각이 났다.

“있지, 에른스트. 너 혹시 이만한 키를 가진 남자애 못 봤어?”

“응?”

“짙은 밤색 머리카락에 황금색 눈동자를 가졌고, 또 아주 예쁘게 생겼는데…….”

에른스트는 얼굴을 갸우뚱 기울이더니, 이내 전혀 모르겠다고 답했다.

‘하긴,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황자님께서 황궁에서 일하는 남자애를 어떻게 알겠어.’

나는 손에 쥔 포크로 접시 위의 케이크를 깨작거리며 생각에 잠겼다.

알브레히트에는 제국을 수호하는 3대 가문이 있다.

대대로 훌륭한 검사를 길러 온 검술 명가 체르니시아.

뛰어난 마법사를 배출하였던 페르디난트.

경이로운 신성력으로 제국에 축복을 내리는 레오브란테.

1황자의 생모인 헤르멜린다 전 황후는 레오브란테 가문의 서녀였다.

자식이 없었던 레오브란테의 노마님은 남편의 사생아를 자식으로 입양해 황후로 만들었지만 끔찍이 미워했으며, 남편이 죽은 뒤에는 절연하다시피 했다.

정치적인 이해관계와는 별개로 그 존재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헤르멜린다 황후가 죽고, 페르디난트의 딸 마르가라테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얼마 지나지 않아 황자를 순산했다.

그녀의 아들이 바로 에른스트였다. 에른스트는 페르디난트와 마르가라테 황후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자랐다.

반면 외가인 레오브란테의 지지를 얻지 못한 테오도르는 끈 떨어진 신세가 되고 말았다.

가뜩이나 그를 둘러싼 흉흉한 소문 때문에 1황자의 상황은 더욱 좋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2황자 에른스트가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울보 에른스트가 나중에 자라서 황제가 된다는 게 믿기지 않았지만…….

“황자 전하, 이제 공부 시간입니다.”

시종이 다가와 에른스트의 공부 시간을 알렸다.

에른스트는 정말 가기 싫다는 표정으로 일어났다.

“나는 산책 좀 하다 갈게.”

“지난번처럼 또 길을 잃으면 어떡해?”

에른스트의 걱정에 조금 미안해졌다.

지난번 숨바꼭질을 하다가 사라진 건 길을 잃은 게 아니라 에른스트와 노는 게 귀찮아서 숨은 거였으니까.

그렇지만 솔직하게 말하면 에른스트가 더 크게 울 게 뻔해서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혼자 산책하는 건 위험하단 말야!”

결국 나는 에른스트가 붙여 준 황후궁의 시녀들과 함께 산책을 해야 했다.

그녀들은 멀찍이 거리를 두고 따라왔기 때문에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종종거리며 후원을 돌아다니다가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그 애를 다시 발견했다.

“어? 너, 너는……?”

짙은 밤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년이 나의 외침을 듣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놀라 허겁지겁 그 애에게 달려갔다.

그 애는 창백한 안색으로 파랗게 질린 입술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너, 너……! 괜찮아?”

“아…….”

눈이 마주친 그 애가 나를 보며 흐리게 웃었다.

“안녕.”

입술을 달싹이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지, 그 애가 눈가를 찡그렸다.

콜록, 콜록.

그 애가 내 시선을 피해 마른기침을 했다. 그러고는 오한이 든 사람처럼 몸을 웅크리며 파들파들 떨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괜찮아, 그냥 감기, 콜록. 그보다 잘 지냈…… 콜록콜록.”

“지금 이렇게 인사를 할 때가 아니잖아!”

나는 버럭 외치며 그 애를 일으켰다.

“어서 의사에게 가자!”

황후궁으로 데려가려는 내 팔을, 그 애가 덥석 붙잡았다.

“황후궁은…… 가기 싫어. 1황자궁으로 가자.”

멈칫.

언젠가 언니들이 해 주었던 말이 다시금 귓가에 메아리쳤다.

[황궁에 가면 테오도르 1황자와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해.]

‘하지만 그건…… 다 헛소문이랬잖아.’

언니들이 내게 전해 준 건 사람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들이었다.

그리고 내게는 1황자궁에서 직접 일하며 그 소문이 거짓이라 부정해 준 증인이 있었다.

계속 망설이기에는 그 애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았다.

“그래, 네가 편한 곳으로 가자.”

나는 그 애를 부축하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멀찍이서 뒤따르던 시녀들이 다가와 나를 붙잡았다.

“이, 이보네 아가씨. 저, 저…….”

“왜 그래?”

“그, 그, 그…… 흐익!”

시녀들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창백해진 얼굴로 도망가 버렸다.

‘왜 저러지? 1황자에 대한 소문들 때문에 그러는 건가?’

시녀들의 행동이 몹시 의아했지만, 그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내 어깨에 기대어 있는 그 애의 숨소리가 순간 멎을 듯 가늘어졌기 때문이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내가 부축해 줄게.”

“고마워…….”

아픈 와중에도 나를 보며 힘겹게 웃는 그 애의 모습에 가슴이 찡해졌다.

나는 그 애를 부축해서 1황자궁까지 갔다.

막상 도착한 1황자궁은 소문처럼 으스스하지도, 마귀 성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여기가 정말 그 소문의 1황자궁이 맞나 의심될 정도였다.

지나가던 사용인들이 우리를 힐끔 쳐다보았지만, 이내 뻣뻣하게 고개를 돌리며 모른 체했다.

‘어린아이가 이렇게 아픈데 모른 척하다니.’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도 어색하게 못 본 척을 하는 행태가 무척 괘씸했다.

그나마 죄책감은 느끼는 건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는 이들이 보였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다가와 도와주는 이는 없었다.

“네 방은 어디야?”

“으응, 저쪽…….”

“히이이익!”

이때,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남자가 우리를 발견하곤 두 눈을 휘둥그레 뜨더니 괴상한 소리를 내었다.

남자는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홰액 돌렸다.

1황자궁의 사용인들이 보이는 한결같은 모습에 나는 조금 화가 났다.

그렇지만 공연히 나섰다가 1황자와 마주치고 싶지 않아 그저 한 번 노려보았다.

내 옷자락을 꼬옥 붙잡으며 어서 가자고 속삭이는 그 애의 목소리에 걸음을 옮기려던 찰나였다.

“이, 이보네……!”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뒤를 돌아보자 공부하러 간다던 에른스트가 이쪽으로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에른스트?”

그런데 에른스트의 표정이 이상했다. 꼭 무서운 것을 본 사람처럼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이보네를 돌려주세요!”

“……?”

황자인 에른스트가 존댓말을 하고 있었다.

에른스트가 마르가라테 황후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처음 보았다.

두 눈을 끔뻑이던 나는 이내 에른스트의 시선이 내가 아닌 내게 기대어 있는 남자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제, 제, 제가 부탁드릴 테니, 이, 이, 이보네는…….”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에른스트가 고개를 푹 숙이며 애원하듯 말했다.

“부, 부탁이에요, 테오도르 형님.”

응? 잠깐만, 누구라고?

나는 고개를 홱 돌려 내게 기대어 있던 남자애를 쳐다보았다.

‘테, 테오도르 1황자라고? 이 애가?’

그 애는 입술을 꾸욱 다문 채 에른스트를 가만히 쳐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테오도르 1황자는 분명 검은 머리를 지녔다고…….’

에른스트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정말 1황자 전하……세요?”

어색하게 말끝을 올리며 묻자, 그 애가 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나, 아파.”

내가 물은 것과 전혀 관계없는 답을 내놓으며 내 어깨에 머리통을 툭 기댔다.

“헉! 이, 이보네!”

그것을 본 에른스트가 울먹이며 발을 동동거렸다.

“제발 이보네를 살려 주세요.”

그러면서도 겁 많은 에른스트는 차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엉엉 울었다.

“제가 물은 것에 먼저 대답해 주세요. 정말 1황자 전하인가요?”

“…….”

다시 묻는 내 목소리 끝이 살짝 떨렸다. 애써 씩씩한 척하고 있었지만, 조금 무서웠다.

그러자 그 애가 고개를 들어 나를 빤히 보았다. 할 말이 많은 표정이었으나, 그 애의 입술은 꾹 다물려 있었다.

약간의 침묵 끝에, 이윽고 그 애의 입술이 열렸다.

“그게 중요해?”

“…….”

꼴깍.

나는 숨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 애가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뜨며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라락-

짙은 밤색을 띠던 그 애의 머리카락이 서서히 검은 빛깔로 물들어 갔다.

“……!”

정말 검은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놀라 양손으로 입을 가리며 뒷걸음질을 쳤다.

“이보네!”

그 순간 에른스트가 내 손목을 낚아채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나도 덩달아 같이 도망치게 되었다.

그 바람에 나는 남겨졌을 그 애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 * *

“그 애 앞에서 티 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차가운 목소리에 1황자궁의 사용인들은 제각기 사색이 되어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전하!”

“잘못했습니다, 전하!”

“죽을죄를 지었습…….”

“사, 살려 주십…….”

조금 전, 저도 모르게 테오도르를 발견하고 티 나게 괴상한 소리를 내었던 사용인이 바닥에 이마를 쿵쿵 찧으며 빌었다.

테오도르는 그를 스윽 쳐다보더니 이내 몸을 홱 돌렸다.

뒤에서 살려 달라며 통곡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렇지만 지금 테오도르의 머릿속에는 다른 생각으로 가득 차 그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에른스트.

1년에 두어 번 마주칠까 말까 하던 이복동생 때문에 모두 망쳐 버렸다.

저를 보며 뒷걸음질 치던 그 애의 표정이 자꾸만 생각이 났다.

“이래서, 숨기려고 했던 건데…….”

어차피 제 정체를 계속 숨길 생각은 없었다. 그렇지만 조금 더 그 애가 마음을 열 때까지 말하지 않으려 했다.

“귀찮게 됐네.”

테오도르는 조금 짜증이 났다.

* * *

그 후로 며칠이 더 지났다.

“이보네, 너 정말 아무 일도 없던 것 맞지?”

에른스트는 재차 물었다.

“테오도르 형님이 네게 해코지한 뒤에 입막음한 거라거나…….”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에른스트. 1황자님의 몸이 안 좋아서 부축해 드린 것뿐이야.”

나는 정말로 아무런 일도 없었다.

그저 소문으로 듣던 검은 머리카락을 실제로 봐서 조금 놀란 것뿐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검은색은 불길하다고 배워 왔으니까.

그 바람에 제대로 된 인사도 없이 그대로 도망쳐 버린 것에 대해 뒤늦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 뒤로 그 애를 만나지 못했고, 미묘한 죄책감이 목에 걸린 가시처럼 껄끄럽게 남았다.

“정말 다행이야. 네게 큰일 생기기 전에 데리고 나올 수 있어서.”

에른스트의 과도한 반응에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에른스트뿐만이 아니었다. 그날 에른스트와 함께 황후궁으로 돌아오자, 안절부절못하던 시녀들이 나를 붙잡고 다친 곳은 없는지 살폈다.

사람들은 1황자를 마치 나를 잡아먹는 마귀처럼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과 내가 보았던 1황자의 모습이 너무나 달라서 한동안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나는 점점 1황자에 대한 생각을 잊어 갔다. 새로운 근심거리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보네! 이보네, 어디 있어?”

저 아래에서 나를 찾는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귀찮은 에른스트를 피해 나무 위에 숨어 있던 참이었다.

에른스트는 물론 좋은 친구였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온종일 그 애와 놀아 주는 것은 너무나 고역이었다.

그리고 그즈음의 나는 그랜시 할머니가 말한 ‘미래’가 무엇인지 보다 명확하게 알게 됐다.

황후궁의 시녀들이 숙덕거리던 것을 우연히 들은 것이 계기였다.

시녀들을 탈탈 털어 진실을 알게 된 나는 곧바로 에른스트를 찾아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너도 알고 있었어, 에른스트? 너와 내가 결혼을 할 거래!]

[어, 음…….]

그러나 에른스트는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두 눈만 데룩데룩 굴렸다.

[정말 끔찍해!]

그러다 내가 이어 외친 말에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왜 끔찍해……?]

[당연하잖아?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 거라고.]

[…….]

나와 같이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 분개할 것이라 여겼던 에른스트는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너 설마……?]

두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에른스트는 얼굴을 더욱 붉게 물들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아, 아니야, 이보네!]

나의 시선에 에른스트는 울먹이며 외쳤다.

[너, 널 좋아하는 게 아니라, 나는, 나는…….]

에른스트는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며 울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른스트는 거짓말에 능숙하지 못했다.

에른스트가 나를 좋아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사실이 껄끄럽게 여겨졌다.

특히나 그 이후로 언뜻 눈이 마주칠 때마다 발견하는 그 애의 홍조 띤 두 뺨이라든가…….

새빨개진 귓불이라든가…… 하는 것들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나와 에른스트가 결혼이라니. 그건 너무 이상하잖아.’

그런 생각을 품으며 나뭇가지 위에 앉아 두 다리를 까딱일 때였다.

바스락-

나뭇잎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자 눈앞엔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 테오도르가 있었다.

“1황자 전하……!”

“쉿.”

놀라 소리치려는 내 입을, 그 애의 손바닥이 부드럽게 막았다.

“에른스트한테 들키겠어.”

“헙!”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아래를 보았다.

다행히 에른스트는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다른 방향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조금 뒤, 더 이상 에른스트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나는 아주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이듯 입술을 달싹였다.

“저, 저…….”

그러나 막상 입을 여니 무슨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망설일 적에, 테오도르가 불쑥 내게 물었다.

“이제 내가 싫어진 거야?”

그렇게 묻는 그의 얼굴이 퍽 속상해 보였다.

“미리 말 안 해서 미안해.”

테오도르는 울적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날 피할까 봐 그랬어. 내가 누구인지 알면 다들 떠났으니까.”

“아…….”

“미안해. 더 이상 불편하게 하지 않을게.”

“아, 아니에요!”

슬픈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돌아서려는 테오도르를, 나도 모르게 덥석 붙잡고 말았다.

“나, 난 그런 거짓 소문들 안 믿어요!”

그러자 테오도르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정말?”

“네, 정말…….”

나는 숨을 꼴깍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너무 놀라서, 황자님일 거라곤 생각을 못 해서, 그래서 실례를 저질렀어요. 죄송해요.”

“그럼 내가 싫어서 도망친 게 아니야?”

“네, 절대, 절대 그런 거 아니에요.”

내 대답에 그의 눈꼬리가 둥글게 휘었다.

기쁘게 웃는 그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숨을 헉 삼켜야 했다.

“그런데 그 머리카락은…….”

힐끔 쳐다보자, 짙은 밤색의 머리카락이 검은색으로 변했다.

“……!”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자, 그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설명해 주었다.

“마법이야. 내 머리 색을 끔찍하게도 싫어하는 아버지가 페르디난트에 부탁해 마법을 심어 두었거든.”

담담하게 대답하는 말씨에 나는 왠지 가슴이 시큰해졌다.

어린 날, 나를 볼 때마다 화를 내던 친부가 생각난 탓이다.

죽은 부인을 그리워하던 체르니시아의 후계자가 술에 취해 체르니시아령의 작부를 부인으로 착각하고 하룻밤을 보냈다가 덜컥 생긴 아이.

그게 나였다.

만일 어린 시절의 내가 검기를 발현하지 않았더라면, 친부가 나를 거두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어렸을 때, 나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엄마는 자주 콜록거리고 자주 아팠다.

그렇지만 돈이 없어 제때 병을 치료할 수 없었다. 치료는커녕 매일같이 빚쟁이들에게 시달렸다.

[죄송해요, 콜록…… 몸이 나을 때까지만, 콜록…….]

[빚을 못 갚겠으면 딸년이라도 내놓든가.]

연약한 여자와 어린아이를 괴롭히는 데에도 그들은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린 나이에도 퍽 온순한 성격이 아니었던 것 같다.

[우리 엄마 괴롭히지 마!]

나는 버럭 외치며 남자들을 향해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졌다.

우연히 집어 던진 포크가 푸른빛을 내며 반대편 벽면에 꽂힌 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쩌저적, 쩌적.

포크가 꽂힌 벽면 주위로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콰앙! 소리를 내며 벽이 무너졌다.

[히이이익!]

[거, 검기……!]

남자들은 마치 유령을 본 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후다닥 달아나 버렸다.

[세상에, 이, 이브……?]

그리고 그것은 나의 엄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그길로 나를 데리고 으리으리한 저택을 찾아갔다.

그곳에는 나와 같은 은발에 녹안을 지닌 남자가 둘이나 있었다.

[오스발트 님의 아이입니다. 부디 아이를 받아 주세요.]

엄마의 말에 둘 중 조금 더 젊은 남자가 발끈했다.

[내 아이라니, 무슨 소리! 그럴 리가……!]

[가만있어라, 오스발트.]

그러나 늙은 남자가 그를 제지하며 엄마에게 물었다.

[정말로 이 아이가 검기를 썼다고?]

[네, 포크를 던졌는데 푸른빛을 내며 날아가 벽면을 무너뜨렸어요.]

늙은 남자는 사람을 시켜 진상을 확인하라 일렀다.

그리고 조금 뒤, 수하의 보고를 받은 그는 나의 녹색 눈동자를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확실하다. 체르니시아의 아이군.]

엄마는 늙은 남자에게 돈을 받아 뒤도 보지 않고 떠나 버렸다.

내가 그녀가 사라진 자리를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자, 늙은 남자가 나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이보네 체르니시아, 그것이 앞으로 네 이름이란다.]

늙은 남자는 나를 위로하듯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남자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나는 네 할애비다. 그냥 편하게 군터 할아버지라고 부르렴.]

군터 할아버지는 체르니시아의 역대 주인들 중 어느 누구도 이처럼 빠르게 검기를 체득한 이가 없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체르니시아에는 검기를 체득한 자는 열 살이 될 때까지 영지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다는 가풍이 있었다.

때문에 나는 친부와 단둘이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그러나 그와 둘이서 보낸 시간들은 내게 썩 즐겁지 않은 나날들이었다.

내가 아홉 살 무렵의 일이었다.

[에휴.]

나는 손목에 난 상처를 보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얼마 전 친부가 남긴 것이었다.

이따금 죽은 부인이 생각나는 날이면, 친부는 나의 존재를 못 견디게 혐오스러워했다.

다시 정신을 차린 뒤에는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이보네 아가씨? 그 상처는 뭡니까?]

[앗, 아, 아니야,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니긴요? 이리 줘 보십시오.]

영지의 성을 관리하던 집사가 결국 손등의 상처를 발견하고 말았다.

그는 친부가 아닌 군터 할아버지의 사람이었다.

집사는 곧바로 군터 할아버지에게 나의 학대 정황을 일러바쳤고, 진상을 파악한 군터 할아버지는 친부를 가문 밖으로 쫓아냈다.

약한 이를 돌보지 않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체르니시아 가풍에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미안하구나, 아가. 이제 누구도 너를 해치지 못하도록 내가 지켜 주마.]

나는 군터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수도의 체르니시아 저택에 발을 디뎠다.

내게 제대로 된 동성의 보호자가 필요하다고 판단한 군터 할아버지는 늦은 나이에 후처를 들였다.

그랜시 할머니는 체르니시아와 어울리지 않는 여자였으나, 어찌 됐든 나를 살뜰히 챙겼다.

그랜시 할머니와 나는 서로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사랑하는 가족이었다.

그랜시 할머니는 내 몸에 남은 상처를 치료해 주고자 의사들을 불렀다. 자잘한 상처들은 모두 치유가 되었으나 손목의 상처만이 그러지 못했다.

[이건 의술로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입니다.]

마치 뜨거운 것에 덴 것 같은 그 상처는 검기가 스쳐 간 자리였다.

[강한 신성력으로만 치유할 수 있으나…….]

의사는 말끝을 흐리더니 이어 설명했다.

[아시다시피 마지막으로 신성력을 다루었다고 알려진 레오브란테의 전대 가주는 이미 수년 전에 병사하였습니다. 애석하게도 아가씨의 손목에 난 상처는 치료할 수가 없습니다.]

아무튼 그 때문에 치료하지 못한 내 상처는 아직까지 옅은 흉터로 남아 있었다.

시간이 지나서도 손목의 상처를 볼 때마다 친부의 얼굴이 드문드문 생각이 나서 서러워질 때가 있었다.

테오도르에게도 나와 같은 아픔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참을 수 없이 그가 안타까웠다.

옛 기억을 떨쳐 낸 나는 그를 향해 느리게 손을 뻗었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이 손끝에 사락사락 스쳤다.

“끔찍하지 않아요.”

나도 모르게 속에 있던 생각을 무심결에 흘려보낸 순간, 그가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

테오도르가 멍하니 나를 쳐다보았다. 그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수를 한 건가?’

조금 전의 말이 너무 주제넘었던 것 같아, 왠지 민망해졌다.

내가 그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려던 때였다.

“고마워.”

테오도르가 활짝 웃으며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흠칫.

그의 웃는 얼굴이 너무 예뻐서 나는 숨을 멎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예쁠 수가 있지…….

“그럼 우린 계속 친구인 거지?”

“네, 네!”

고개를 세차게 끄덕이자 그가 내 손가락 사이사이로 깍지를 끼며 내 몸을 당겼다.

“친구끼리는 그런 식으로 대화하는 거 아니야.”

“하지만 황자님인데…….”

“에른스트에게도 황자님이라고 불러?”

그 말에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내저었다.

“테오도르. 테오도르야, 내 이름.”

내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자신의 이름을 각인시켜 주듯이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하는 테오도르의 모습에 괜히 웃음이 나왔다.

“테오도르.”

내가 이름을 불러 주자 테오도르는 함박웃음을 내지었다.

몹시, 예쁘게.

그 예쁜 웃음에 매료되어 한동안 눈을 못 떼던 나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곤 내내 걱정되던 것을 물었다.

“아픈 건 이제 괜찮은 거야?”

“응, 이제 괜찮아.”

다행히 테오도르는 감기 기운을 모두 물리친 듯했다.

“여긴 어떻게 올라온 거야?”

“네가 보여서.”

“……?”

이따금 테오도르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어쩌면 그랜시 할머니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와 테오도르 사이에도 이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는 건지 모른다.

“……아무튼, 그래서 이달 말까지는 황후궁에 머물러야 해.”

“으응, 그렇구나.”

나의 설명에 테오도르는 싱긋 웃으며 기뻐했다.

“그럼 매일매일 볼 수 있겠다.”

“매일매일?”

“앞으로 매일 오후 두 시 정각에 이곳에서 만나는 거야. 에른스트 몰래, 너와 나 둘이.”

“조, 좋아!”

우리는 그렇게 은밀한 약속을 나누었다.

그러자 무슨 대단한 비밀이라도 공유한 사이가 된 것처럼 테오도르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나무 위에서 소곤소곤 다정한 이야기를 속삭이는데, 아래에서 에른스트가 또다시 나를 찾아다니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아래를 내려다보려는데, 그 순간 테오도르가 내 두 뺨을 부드럽게 감싸 쥐며 제 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테오도르……?”

왜 그러냐고 물었으나 그 애는 대답 대신 빙그레 웃을 뿐이었다.

테오도르에게 얼굴이 붙잡힌 채로 그와 마주 보고 있으려니, 왠지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이거 놔줘.”

소심하게 반항하듯 말했으나, 그 애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대신 두 눈을 더욱 둥글게 휘며 예쁘게 웃었다.

“예쁘다.”

나보다 예쁜 테오도르로부터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몹시 이상했다.

“예쁘긴, 무슨…….”

나는 괜히 그 애의 시선을 피하며 투덜거렸다.

“예뻐, 이보네.”

그러자 테오도르가 한 음절씩 힘주어 말했다.

“내가 태어나 본 것들 중 네가 가장 예뻐, 이보네.”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한여름도 아닌데, 늦은 여름날의 열기가 무척이나 뜨거웠다.

테오도르는 빙긋 웃으며 뒤늦게 내 얼굴을 놓아주었다.

나는 그의 손이 닿았던 뺨을 양손으로 감싸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느새 우리는 나란히 앉아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재잘재잘 이야기 나누었다.

주로 내가 말을 하고, 테오도르는 내 손을 꼬옥 맞잡은 채로 경청해 주었다.

그러다 이따금 눈이 마주칠 때면 그 애는 아주 예쁘게 웃었다.

테오도르는 참 이상했다.

그 애는 굳은살이 박인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걸 좋아했다.

다른 귀족 아가씨들의 것처럼 그다지 예쁘지도 않고 사랑스럽지도 않은, 투박하고 거칠고 작은 내 손을.

사락사락,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테오도르의 어깨에 기대어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테오도르는 잠든 이보네의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녀의 손목 안쪽에 남아 있는 희미한 흉터가 신경이 쓰였다.

강한 검기에 의해 생겨난 흉터였다. 동시에 그녀의 약점이었다.

검기에 의해 만들어진 상처는 오직 성력으로만 없앨 수 있었다.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력으로 그녀의 상처를 없애 주고 싶었으나, 그게 잘 안 되었다.

외가로부터 물려받은 이 빌어먹을 힘을 이용해 누군가를 치료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의 외가인 레오브란테는 브리힘 신의 축복이라 불리는 강한 성력으로 알브레히트를 지탱해 온 3대 가문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전대 가주의 사후 더 이상 성력을 발현한 자가 나타나지 않아 서서히 힘을 잃고 쇠퇴해 갔다.

테오도르는 친모인 헤르멜린다 황후를 핍박하여 죽음까지 이르게 한 외가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부러 성력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외가의 도움을 받아 성력을 제대로 연마한다면, 보다 쉽게 이보네의 상처를 없애 줄 수 있겠지만…….

“미안, 이보네. 내가 더 연습해서 꼭 치료해 줄게.”

테오도르가 그녀의 손목 안쪽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시간은 많을 테니까…….”

아직은, 제 성력을 철저하게 비밀에 부치고 싶었다.

이따금씩 불가피하게 성력을 드러내야 하는 순간이 올 때도 있었다. 이를테면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암살자들을 상대해야 하는 순간이라든가…….

요행히도 그의 성력을 알아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살아남지 못했다.

테오도르는 이보네의 상처를 없애 주지 못한 대신 그녀의 상처에 제 성력을 담아 두었다. 그녀가 어디에 있든, 곧바로 찾을 수 있도록.

물론 절대 이보네에게는 말할 생각이 없었다. 너무 음험한 행동이었으니까.

테오도르는 자신의 성격이 다른 사람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뭐라고 숙덕거리는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이제까지 그는 한 번도 그런 것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보네를 만나게 되며 생각이 달라졌다.

이상했다.

이보네를 처음 본 순간부터 강한 운명에 이끌리듯 그녀에게 빠져들었다.

예쁘장한 외양 때문일까?

물론 이보네는 예뻤다. 세상에 그녀보다 더 예쁜 사람은 없을 만큼.

그렇지만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밤하늘처럼 예쁜 머리 색인걸요.]

조금 전, 그녀가 제 머리카락을 사르륵 쓰다듬으며 속삭이던 말이 아까부터 자꾸만 가슴 위로 간질간질 맴돌았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테오도르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러자 여전히 제 망막에 맺히는 잠든 이보네의 어여쁜 얼굴에 자그마한 미소가 입가에 머물렀다.

“이보네! 이보네에-!”

이때, 아래에서 이보네를 찾아다니는 에른스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력으로 재웠으니 깊게 잠든 이보네가 그 소리에 깰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이보네의 이름을 제 것인 양 외치고 다니는 에른스트는 조금 거슬렸다.

테오도르는 나무 아래로 가뿐히 착지했다. 그러자 그를 발견한 에른스트가 히익 놀라며 뒷걸음질을 쳤다.

“안녕, 에른스트.”

“테, 테, 테오도르 형님…….”

눈이 마주치자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웅얼거리는 에른스트를 보며, 테오도르는 코웃음을 쳤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어떻게 저런 게 차기 황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이, 이보네를 혹시 보지 못했나요?”

그러나 다음 순간 에른스트가 이보네의 이름을 입에 담았을 때.

테오도르는 죽일 듯한 살기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이 자리에서 성력을 사용한다면 에른스트를 가뿐히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테오도르는 그러지 않았다.

성력을 쓴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 않기도 했거니와, 겁 많은 에른스트 따위는 성력이 없이도 충분히 치울 수 있으니까.

“꺼져.”

“시, 싫어요.”

살벌한 위협에 에른스트가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버텼다.

그 모습에 테오도르의 한쪽 눈썹이 까딱 치솟았다.

“당장 꺼지지 않으면 1황자궁으로 데려갈 거야.”

꿀꺽, 에른스트가 침을 삼켰다.

“너, 시체를 본 적 있어?”

“네, 네……?”

“1황자궁에서 밤마다 시체가 실려 나간다는 소문은 들었지?”

“…….”

점점 무서워지는 말의 수위에 에른스트가 울먹이기 시작했다.

“어? 너 설마 우는 거야?”

“아, 아니에요!”

“아니긴. 겁먹은 표정인데.”

“이, 이상한 말 하지 말고 어서 이보네가 어디 있는지 알려 줘요!”

꿋꿋이 버티며 이보네를 찾겠다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렇지만 테오도르는 화를 내는 대신 빙그레 웃으며 속삭였다.

“이보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싶어?”

은근한 목소리로 묻자 에른스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네는 너 같은 거 꼴도 보기 싫다고 숨어 버렸어.”

“그럴 리가…….”

“네가 맨날 귀찮게 해서 짜증 난대. 바보 같고 툭하면 울어서 싫다고 했어.”

에른스트의 얼굴이 점점 푸르뎅뎅해져 갔다.

“너 같은 겁쟁이랑 친구를 하느니, 바퀴벌레랑 친구가 될 거래.”

“거, 거짓말!”

결국 울음을 터뜨리고 만 에른스트가 뒤돌아 뛰어갔다.

무심하게 그것을 쳐다보던 테오도르가 뛰어가는 에른스트의 발목을 향해 성력을 움직였다.

콰당-!

볼썽사납게 넘어지는 에른스트를 바라보는 테오도르의 두 눈이 가늘게 휘었다.

* * *

한 달은 빠르게 지나갔고, 다시 체르니시아로 돌아가야 하는 날이 다가왔다.

처음 황궁을 방문했을 때와는 달리 나는 떠나는 순간이 퍽 아쉽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마도 나의 이 착하고 상냥한 새 친구 때문이리라.

“있지, 테오도르. 다음엔 네가 체르니시아에 놀러 올래?”

나는 테오도르가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언니들에게 꼭 알려 주고 싶었다.

“좋아. 꼭 초대장을 보내 줘, 이보네.”

테오도르는 웃으며 내 손가락에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그러나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그해 겨울이 지나기 전에, 체르니시아는 갑작스러운 역모에 휘말렸다.

사랑하는 나의 오라버니 리하르트, 둘째 언니 헬가와 셋째 언니 율리아, 막내 오빠 브리안과 군터 할아버지, 그랜시 할머니까지.

모두 두 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시리던 겨울.

유일하게 도망쳐 살아남은 건 바로 나, 이보네 체르니시아였다.

* * *

체르니시아를 집어삼킨 화마 속에서 나를 살린 것은 다름 아닌 에른스트였다.

리하르트 오라버니가 죽었다.

그 광경을 목격한 나는 목청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검을 들고 난리의 중앙으로 뛰어들려는 나의 두 팔을, 낯선 이들이 붙잡았다.

“놔……!”

“안 됩니다, 이보네 양.”

“이거 놓으란 말야!”

“죄송합니다. 황후 폐하의 명입니다.”

“놔! 놓으라고! 이거 놔……!”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냈다는 낯선 이들은 발버둥 치는 어린 나를 억지로 붙들어 어디론가 끌고 갔다.

어느 한적한 숲에서 그들이 놓아준 뒤에야,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비겁하게도, 혼자 살아남았음을.

“이보네…….”

“…….”

“흑, 다, 다치진, 않, 흐윽…….”

더 이상 악다구니를 쓸 힘마저 남지 않았을 때, 나는 흙바닥 위로 털썩 주저앉았다.

“괘, 괜찮, 괜찮아, 이보네……. 어머니가…… 흑, 어머니가 나랑, 약속…….”

정신을 차려 보니 자주색 후드를 뒤집어쓴 에른스트가 내 앞에서 울고 있었다.

아까부터 훌쩍거리던 소리의 주인이 그였나 보다.

왜 그가 여기 있는지 따위를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체르니시아로 돌아가야 한다.

오직 그 생각에 사로잡혀 다시 몸을 일으키려 할 때였다.

휘청-!

“이보네!”

힘이 없어 넘어지려는 내 몸을, 에른스트가 재빨리 붙잡았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손과 발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이 이상해…….”

그제야 나는 나를 이곳까지 데려온 낯선 이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저질렀다는 걸 알아챘다.

마르가라테 황후는 대대로 마법 명가라 알려진 페르디난트의 딸.

그녀가 부리는 마법사들이 내게 구속 마법을 건 것이다.

“이거 풀어 줘. 나 다시 가야 해. 리하르트 오라버니가…….”

“미안해……. 미안해, 이보네.”

에른스트는 코를 쿨쩍이며 내 손을 꼬옥 붙잡았다.

“그렇지만 어머니가, 흑, 어머니가 나랑 약속했어. 어떻게든 너를 살려 줄 거라고…….”

“그럼 나는 다시 못 돌아가는 거야? 리하르트 오라버니가 거기 있는데……. 춥고 아플 텐데…….”

“이보네, 그러니까, 그러니까…… 흑, 흑, 흐아아아앙…….”

훌쩍거리며 나를 챙기던 에른스트는 결국 큰 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에 비해 나는 눈물조차 모두 말라 담담해진 상태였다.

체르니시아로 돌아가지 못한다.

비겁하게 혼자 살아남은 이보네 체르니시아는 더 이상 그곳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오직 그 끔찍한 사실 속에 내 몸을 침잠시켰다.

마르가라테 황후가 보낸 사람들이 내 머리카락을 짧게 잘랐다. 잘려 나간 머리카락이 서러웠다.

에른스트는 자신이 두르고 있던 후드가 달린 망토를 내게 둘러 주었다.

난리 중에 간신히 몸만 피했던 나는 영락없이 꾀죄죄한 어린 남자애의 몰골로 어디론가 이동됐다.

그들이 나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에른스트의 외가, 페르디난트였다.

체르니시아를 압도하는 거대하고 으리으리한 규모의 대저택이 우리를 맞이했다.

문득 시꺼멓게 재가 되어 가라앉은 체르니시아의 저택이 생각났다. 그리고 혼란의 틈바구니에 두고 온 가족들도…….

“이제 정말 괜찮아, 이보네. 여기는 안전할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조금만 기다리면…….”

에른스트가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야기할 때였다.

“황자 전하.”

낯선 목소리가 그의 말을 뚝 끊어 냈다.

고개를 돌리자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마리가 말한 아이가 이 아이로군요. 알브레히트의 가장 어린 검, 이보네 체르니시아.”

나는 흠칫 그를 올려다봤다. ‘검’이라는 칭호는 오직 검기를 발현한 이들에게만 주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직 성년이 되지 못한 내가 검기를 발현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몇 없었다.

가문의 일원인 그랜시 할머니조차도 모르는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라는 건…….

“루돌프 삼촌……!”

에른스트가 남자를 향해 외치는 순간, 나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인했다.

루돌프 페르디난트.

마르가라테 황후의 남매이자 페르디난트의 가주인 남자.

에른스트의 외삼촌이기도 한 그는, 눈물이 많은 에른스트와 달리 차가운 인상의 소유자였다.

남자는 마치 품평하듯 나를 위아래로 스윽 훑어보았다.

“전하께서는 이만 돌아가시지요.”

“이보네랑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어. 이보네를 혼자 둘 수 없어.”

남자가 내게서 에른스트를 떼어 내고자 했으나, 에른스트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으며 버텼다.

“안 됩니다. 황후 폐하와의 약속을 기억해야지요.”

“이보네는 지금 많이 힘들단 말야. 내가 옆에 있어 줘야 해.”

“전하께서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다면, 저도 부탁하신 부분을 장담할 수 없군요.”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눈이 정확히 내 얼굴에 꽂혔다.

“하지만…….”

에른스트는 망설이다가 이내 내 손을 덥석 잡으며 외쳤다.

“이보네! 내가 꼭 다시 너를 데리러 올게! 체르니시아의 억울함도 풀어 주고, 너의 가족들 모두 찾아서 데리러 올 거야!”

“…….”

굳세게 외치는 그를 향해, 나는 어떤 대답도 해 줄 수 없었다.

에른스트는 그렇게 지키지 못할 약속을 하고 황후의 사람들에게 떠밀려 돌아갔다.

남겨진 나를 향해 마치 벌레를 보듯 경멸과 혐오의 시선이 스쳤다.

“따라와라.”

루돌프 페르디난트는 저택 뒤편의 낡은 건물로 나를 데려갔다.

“이제부터 너는 체르니시아가 아니다. 우연히 내 눈에 띄어 페르디난트의 견습 기사가 된 평민 고아 소년이 되는 거다.”

차가운 방에 나를 밀어 넣으며 윽박지르던 남자가 돌연 내 손을 잡아당겼다.

“어린 레오브란테의 흔적……? 아니, 그럴 리가. 레오브란테의 성력은 끊긴 지 오래인데…….”

그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내 손목 안쪽을 아프게 눌렀다.

서늘한 손끝이 내 손목 위에서 여러 가지 복잡한 술식을 그렸다.

“누구든 네 정체를 알아보고 진명을 부르는 이가 있거든, 피의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다.”

남자는 그것이 나를 지키는 마법이라 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이 꼭 나를 향한 저주처럼 느껴졌다.

두 번 다시 체르니시아로 돌아가지 못할 거라는, 세상에서 가장 우울한 저주…….

그렇게 체르니시아의 이름이 내게서 박탈되었다.

“앞으로 석 달, 사람들의 기억에서 체르니시아가 지워질 때까지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말고 이곳에 머물러라.”

끼이익-

낡은 문이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닫혔다.

닫힌 문을 멍하니 응시하노라니, 그제야 말라 있던 눈물샘이 다시 터졌다.

정말 혼자가 되었다는 게 실감이 났다.

리하르트 오라버니의 죽음을 내 눈으로 보았다.

다른 가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무릎을 세워 모은 채, 그 위로 고개를 파묻고서 훌쩍훌쩍 흐느낄 때였다.

“피 냄새…….”

열린 창밖에서 새하얀 소년이 나를 보며 몽롱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느리게 고개를 들어 시선을 마주하던 나는 뒤늦게 내가 있는 곳이 3층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놀라 두 눈을 끔뻑이자 소년이 폴짝 창을 넘어 안으로 들어왔다.

“왜 울어?”

“…….”

겨울날 내린 첫눈처럼 깨끗한 순백색 머리카락이 유독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네 집으로 돌아가. 여긴 너처럼 작은 여자애가 있을 만한 곳이 못 돼.”

머리를 짧게 자르고 에른스트의 망토를 둘렀는데도 소년은 내가 여자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내 얼굴 위로 서서히 번져 가는 당혹감에 소년이 나른한 웃음을 터뜨렸다.

“비밀이었나 보네. 수상해라, 정체를 숨긴 작은 여자애라니.”

뻣뻣하게 굳어 있자, 소년의 눈에 푸른 이채가 서렸다.

“넌 누구야?”

“…….”

“이름이 뭐지?”

“이보…….”

무심코 답하려던 나는 조금 전 루돌프가 내게 걸었던 술식을 떠올렸다.

더 이상 체르니시아의 이름으로 불릴 수 없었다.

나는 울컥거리는 감정을 억누르며, 이제는 기억에 희미한 여자의 이름을 대신 꺼냈다.

“……이브 로웰린.”

생경한 이름을 읊조리는 목소리는 꼭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꺼끌꺼끌했다.

“그거 말고, 네 진짜 이름.”

“내 이름, 맞아.”

이브는 나의 아명이었고, 로웰린은 나를 낳아 준 여자의 성이었다.

체르니시아에 입적되기 전까지는 그게 내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나의 고집이다.

더 이상 체르니시아로 불리진 못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잃지 않겠다는.

가만히 입술을 다물자 흐릿하던 소년의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이 났다.

“그래, 그럼 그걸로 하지, 네 이름.”

소년은 나른한 미소를 얼굴에 띠며 내게 인사했다.

“난 벤야민이야.”

작은 바람에도 훅 꺼져 버릴 것 같은 희미한 미소였다.

그리고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인 사이, 그의 얼굴 위로 떠올랐던 미소는 정말로 빠르게 훅 사라졌다.

그의 눈동자 담겼던 한순간의 빛과 함께.

몽롱한 낯을 한 소년이 고요히 내게 다가와 몸을 굽혔다.

소년의 손등이 내 뺨을 스쳤다.

따끔-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 모를 상처에서 핏물이 배어났다.

그가 생리적인 고통에 찡그린 내 눈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아팠어?”

그 손끝이 내 눈가에 매달린 눈물방울을 툭 건드렸다.

아프냐고?

아팠다. 정말 많이…….

애써 무시하던 아픔을 상기함과 동시에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이 왈칵 터져 버렸다.

“어…… 울리려던 건 아니었는데…….”

난처한 중얼거림은 이내 내 울음소리에 묻히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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