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장 (1/6)

1장.

일곱 시 3분 전.

키니라스가 왔다 간 후로 제정신이 아니었지만, 난 필살의 힘으로 오늘 할 일을 다 끝냈다.

그건 다행이었으나 약속 시각이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벌렁벌렁거렸다.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자니?!’

대체 무슨 말을 나누자는 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곧 알게 될 터였다.

일곱 시 3분 전.

남자 알몸 그림이 든 망할 서류철을 가방 안에 깊숙하게 넣고, 난 의자에서 일어섰다.

나가기 전에 문 근처에 있는 전신거울을 흘긋 바라보았다.

연한 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

단정한 느낌이 드는 얼굴로, 그야말로 평범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난 스물두 살의 젊은 나이에 제국 기사단의 회계 부팀장이 될 만큼 능력은 괜찮긴 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 특히 얼굴과 몸매는 그야말로 평균이었다.

‘키니라스는 엄청 잘생겼는데.’

근육질의 미남인데다 부단장인 만큼 실력이 정말 굉장했다.

당연히, 그를 노리는 여자들은 굉장히 많았다.

귀족 가문에서 그를 사윗감으로 노린다는 말이 공공연하게 들릴 정도였다.

‘생각할수록 한숨만 나오네.’

다른 여자들에 비해 내가 유리한 건, 그를 오랫동안 알아 온 소꿉친구라는 것 하나였다.

그걸로 데이트 신청도 하고, 앞으로 좀 잘해 보려고 했었다.

‘그런 그림이나 들키고.’

난 땅이 꺼져라 다시금 한숨을 내쉰 뒤, 문을 열었다.

이번에도 키니라스가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빙긋 웃으면서 장난스럽게 말했다.

“이번에도 얼굴색이 잘 익은 사과 같네.”

“…….”

“가자. 레스토랑 예약해 뒀어.”

정신이 좀 들고 보니, 레스토랑에 와 있었다.

“여긴…….”

각 좌석이 은밀하게 나뉘어 있어 연인들에게 사생활을 보장했고, 어둑한 조명과 어우러진 그윽한 황금빛 촛불 덕분에 로맨스가 넘쳐흘렀다.

“거기지? ‘영원한 미래’라는 레스토랑?”

“맞아. 혹시 와 본 적 있어?”

맞은편에 앉은 키니라스가 어쩐지 떠보는 어조로 물었다.

“아니. 여기 커플만 입장 되잖아. 비싼 데다 예약하기도 힘들고. 처음 와 봤어.”

“그렇구나.”

키니라스는 느슨하게 입매를 풀어 미소 짓고는 테이블 가장자리에 있는 버튼을 눌렀다.

잘 차려입은 직원이 고급스러운 메뉴판 두 개를 가지고 나타났다.

그런데.

‘왜 와인만 적혀 있지?’

음식은 안 쓰여 있을뿐더러, 와인의 가격도 없었다.

“뭐 마실래?”

“음……. 가장 위의 것.”

자고로 메뉴판에서 가장 위의 것이 제일 저렴한 법이었다.

직원은 능숙한 솜씨로 와인을 가져와 따라주고 사라졌다.

“왜 음식 주문은 안 받지?”

“여긴 코스가 정해져 있어. 알아서 나올 거야.”

“아, 그렇구나. 들은 기억이 나.”

“릴리앤, 네가 좋아하는 해산물이 메인이야.”

좀 기뻤다.

“기억하고 있구나.”

“그럼, 당연하지. 네 일인데.”

키니라스는 씩 웃었다.

‘3년 전까지만 해도 저렇게 웃으면 마냥 귀여웠는데.’

지금은 젖살이라곤 전혀 없는 데다 건장한 남자가 되어서 그런지, 달랐다.

성숙해 보이면서도 뭔가 모를 긴장감을 느끼게 했다.

‘저걸 색기라고 하나?’

키니라스는 기사단 제복을 입고 있는 데다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서 아주 단정했다.

하지만 미소 짓자 그 완벽한 차분함이 흐트러지면서 도톰한 입술이 유혹적으로 느껴졌다.

맑게 반짝이는 눈빛도 농염해지면서 보는 이를 자극했다.

‘갑자기…… 좀 덥네.’

이 레스토랑의 로맨틱한 분위기 탓이었다.

더군다나 아직 부끄러움이 가라앉지 않았다.

‘얘는 왜 이런 곳에 오자고 한 거지? 나 벗겨 먹으려는 건가?’

과거, 우리는 싸우거나 서로에게 잘못하면 상대에게 맛있는 걸 사 주는 것으로 사과 겸 해결하곤 했다.

일종의 화해 방법이었다.

‘내 그림을 비밀로 해 줄 테니 대신 여기서 밥 사 달라는 거겠군.’

이 정돈 괜찮았다.

나도 여기에 한 번은 와 보고 싶었으니까.

‘좀, 아니, 많이 비싸겠지만.’

어쨌거나 마음은 편해졌다.

내가 웃으니까 키니라스도 기쁜 듯 더 크게 웃었다.

‘왜 이렇게 잘생겨진 거야?!’

심장이 벅차올랐다.

“오늘의 전채 요리는 새우 칵테일입니다.”

직원은 나오는 모든 음식을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홍합 수프, 바지락 파스타, 농어 그릴 스테이크까지 뭐든 다 근사했고 맛도 굉장히 좋았다.

난 흡족하게 웃었고, 그건 키니라스도 마찬가지였다.

‘맛있는 걸 먹을 때의 표정은 예전이랑 똑같네.’

약간 어색했었는데,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우리는 식사 사이사이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지난 3년간의 근황이었다.

그동안 키니라스는 수많은 일을 겪은 모양이었다.

극비라 그런지 대략적으로만 말해 주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엄청 힘들었겠다.”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사실 조금 힘들었긴 해. 하지만…… 내가 바라던 거였어.”

“그럼 또 파견 나갈 거야?”

걱정되어 물었다.

키니라스는 즉각 고개를 저었다.

“아니, 다신 안 나갈 거야. 당시엔 그럴 필요가 있어서 나갔던 거였는데…… 3년으로도 충분했어.”

그는 뭔가 알 수 없는 묘한 눈빛으로 날 응시했다.

“그럴 필요라니?”

“음, 그런 게 좀 있었어.”

더 묻지 말아 달라는 뜻으로 들렸다.

왠지 조금 서운했지만, 난 고개를 끄덕였다.

“릴리앤, 네 이야기도 좀 해 봐. 3년 동안 잘 지냈어?”

“응. 난 네가 파견 나가기 전과 딱히 다른 건 없어. 일만 했지, 뭐. 이번에 승진한 건 운이 좋았던 거지만.”

전 회계 부팀장이 은퇴했고, 다음 부팀장으로 꼽히던 사람이 아내의 출산으로 육아를 하겠다고 사직하면서 내게 자리가 돌아왔다.

정말 운 좋게 승진한 거였다.

“운도 실력이야. 다 네가 노력한 덕분이지.”

좀 쑥스럽기도 하고 기뻐서, 난 배시시 웃었다.

키니라스는 다시 아까의 그 색스러운 미소를 짓더니 잠시 망설였다.

뭔가 말하기 곤란한 것을 꺼내려는 것 같았다.

난 선수 쳤다.

“그림 이야기하려는 거지? 그거, 설명할게!”

“설명?”

“응. 나 사실 화가가 되고 싶었거든.”

“기억나. 너 어렸을 때부터 종종 낙서로 그림 많이 그렸잖아.”

키니라스는 정말 기억력이 좋은 모양이었다.

“맞아. 부끄러워서 나이 들면서 다른 사람들 앞에선 안 그렸지만……. 화가가 되고 싶어서 꾸준히 그림을 연습했어. 네가 오늘 본 게…… 그런 거야.”

“인물화를 그리고 싶은 거야?”

“응. 추상화나 다른 것 말고, 인물화가 좋아. 특히 근육이 좋아. 기사단에 있다 보면 알게 되잖아. 기사들이 얼마나 노력하는지. 근육이란 건, 그 사람의 노력이라고 생각하거든. 그런 걸 그리고 싶어.”

“그렇구나. 정말 잘 그렸더라.”

칭찬에 기쁨을 느끼기 전, 키니라스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이어 말했다.

“거기 빼고.”

“…….”

“왜 거기는 그렇게 이상하게 그렸어?”

“…….”

난 조용히 식탁에 이마를 박았다.

“릴리앤, 나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키니라스는 진지한 어투였다.

하지만 난 얼굴이 완전하게 익은 것 같았다.

귀 끝은 물론, 목덜미도 마찬가지였다.

“혹시 말이야, 본 적이 없어서 그런 거야?”

“…….”

“그런 거지?”

“…….”

“계속 답 안 할 거야?”

“…….”

그저 침묵만 계속되었다.

키니라스가 이런 말을 했다.

“거기 그리는 문제는……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난 슬그머니 눈을 들었다.

키니라스는 지극히 진지한 표정이었다.

“어떻게……?”

“그전에 답해 봐. 너 그 부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서 제대로 못 그린 거 맞지?”

“……응. 다른 사람들 그림을 좀 보긴 했지만, 그게 세밀하게 나와 있는 그림은 찾아보기 힘들고…… 무엇보다 난 아직 연필로 정밀 묘사를 연습하는 단계거든. 그, 그 부위가 정밀 묘사로 그려진 건 아직 한 번도 못 봤어.”

털어놓으니까 마음은 조금 편했다.

그동안 많이 고민했던 것이기도 하고, 키니라스는 확실히 좋은 대화 상대였다.

말하는 게 그나마 편했다.

쥐구멍에 들어가고 싶을 만큼 부끄럽지만.

“그렇구나. 근데…… 그동안 사귄 남자가 한 명도 없었나 봐?”

어째 떠보는 것처럼 느껴졌으나, 난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응. 그럴 시간이 어디 있었겠어. 일하느라 바빴는데. 이제 좀 정신이 들어서 간만에 그린 거야.”

“그런데 나한테 들킨 거고?”

난 키니라스를 노려보고야 말았다.

그는 그제야 웃었는데, 비웃는 건 결코 아니었다.

장난기로 그득했다.

하지만 곧, 진지해졌다.

“있잖아, 릴리앤. 한 번도 제대로 말한 적이 없는데…… 난 너희 부모님과 네가 항상 고마웠어. 어머니랑 날 참 많이 도와줬잖아. 너희 가족 덕분에 우리가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야.”

키니라스는 아빠가 없었고, 병약한 엄마뿐이었다.

가난한 나머지 자주 굶곤 해서 우리 집에서 두 사람을 종종 챙겨주곤 했었다.

“어머니가 조금이지만 더 오래 사신 것도, 내가 기사가 된 것도 너희 부모님 덕분이야. 정말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 꼭 은혜를 갚고 싶어.”

“그러지 않아도 돼. 이웃끼리 당연한 일이었는걸.”

“아니야. 이웃들 가운데 너희 집만 우릴 도와줬는걸. 내가 갚을 수 있게 해 줘.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할 것 같아. 돌아가신 어머니도 그러실 거야.”

키니라스가 저렇게 말하자 더는 거절할 수가 없었다.

“네 마음이 편할 것 같다면, 그래. 그렇게 해.”

“그럼, 앞으로 네가 바라는 도움을 줄게. 그림 말이야.”

“그림?”

“응. 나 이제 기사단의 부단장이잖아. 황실 화가분께 널 가르쳐 달라고 부탁할 수 있어. 그분과 인연이 있거든. 교습비도 내가 낼게.”

“황실 화가분은 부담스러워. 아직 난 초보 수준이거든.”

“그럼 그건 나중으로 미루고, 지금은 필요한 재료를 다 사 줄게. 그건 어때?”

더 거절하기 그래서,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근데 너 초보자 수준 아니던데. 진짜 잘 그렸더라. 그 부분만 빼고.”

난 다시 뜨끈뜨끈한 얼굴을 식탁 위에 박았다.

“방금 내가 거기 그리는 문제를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잖아.”

“응? 응.”

“그걸 실제로 보면, 잘 그리지 않을까?”

“어……. 그렇긴 하지.”

“그러니까 말인데.”

뭔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난 다시 눈만 들어 키니라스를 응시했다.

그는 느긋한 태도였으나 눈빛은 기묘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겠다는 듯, 열렬했다.

“내 거 보여 줄까?”

“……응?”

“네겐 해당 부위를 보여 줄 모델이 필요해. 하지만 제3 기사단의 회계 부팀장이 그런 목적으로 누드모델을 고용하면 말이 나올 수도 있어. 기사단의 일원으로서 우린 황실의 명예를 위해 그런 부분도 신경 써야 하는 게 의무지. 그렇잖아?”

“어……. 그렇지…….”

“내가 모델을 해 줄게. 당연히 비밀로. 새어나갈 염려는 없으니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하는데. 널 믿어. 하지만…….”

“하지만?”

“그건 좀…… 좀…… 좀…….”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돼.”

“……넌 안 부끄러워?”

“너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일인데, 안 부끄럽지. 이렇게라도 갚을 수 있다니, 기뻐. 이번 토요일에 내가 너희 집에 갈까?”

“어……. 그게…….”

“브런치 사 가지고 갈게. 네가 좋아하는 아보카도 새우 샌드위치, 어때?”

“당연히 좋지.”

“그래. 그렇게 하자. 식사 다 했지? 일어나자. 너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음, 그래.”

난 멍하니 키니라스를 따라 나왔다가 깨달았다.

“잠깐, 식사비를 안 내고 나왔어!”

“내가 예전에 냈어. 여긴 예약할 때 미리 전액을 내야 하거든.”

“헉, 네가 왜 내?”

“왜긴, 내가 낼 만하니까 내지. 나 이제 여유 있어. 앞으로 우리 식사할 때 내가 다 낼게. 예전에 너희 가족이 해 준 거에 비하면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키니라스는 아주 기분 좋은 듯 씩 웃었다.

“집까지 데려다줄게. 가자.”

“응? 응.”

키니라스는 말한 대로 날 데려다준 뒤, 자리를 떴다.

“토요일에 만나!”

어려운 목표를 달성한 것처럼 쾌활하게 웃으면서.

난 멍하니 집으로 들어왔다가 깨달았다.

‘내 거 보여 줄까?’

“……!”

그의 성기를 보기로 했음을.

* * *

‘이건 미친 짓이야.’

며칠 동안 난 숱한 생각을 했다.

‘그래선 안 돼.’

물론 키니라스의 말은 맞았다.

황실 기사단의 회계 부팀장은 누드모델을 고용해선 안 되었다.

아무리 그림을 위해서라도, 황실의 명예에 누를 끼치는 길이 될 터였다.

‘난 짤리겠지.’

내 미래가 영영 날아가는 일이 될 터.

전 기사단원이자 은퇴 기념으로 여행을 간 부모님께도 어마어마한 폐를 끼치게 될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키니라스가 누드모델이 되어 주는 건!’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물론…….’

난 침을 꼴깍 삼켰다.

‘궁금하지만.’

남자의 성기가 정확히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었다.

키니라스의 그것도 궁금했다.

‘……클까?’

친구들에게 들으니, 남자들은 성기 크기에 엄청 집착한다고 했다.

‘실제로 잠자리에는 크기보다 테크닉이 더 중요하다던데.’

어찌 됐거나 누드모델을 서겠다고 할 정도라면.

‘키니라스도 크겠지……? 얼마나 클까? 설마 몽둥이만 하진 않겠지? 아니, 크기가 무슨 상관이야?’

내 속에 들어올 것도 아닌데.

‘아니야. 만약 연인이 된다면 당연히 들어오겠지만…….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리자. 정신 차리고, 거절해야 해.’

키니라스가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이해한다.

우리 가족들에게 큰 빚을 졌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최선을 다해 도와주고 싶으리라.

솔직히 화가 지망생으로서 반가운 말이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나 때문에 그런 일까지 하는 건 좀 아니었다.

‘……조금 아쉽지만.’

사실 조금이 아니었다.

‘그래도, 이건 아니야! 토요일에 오면, 아니, 그전에 말해야지.’

괜히 헛걸음하게 만들 수는 없었다.

금요일 저녁, 난 고민하다가 퇴근한 뒤 키니라스가 소속된 제2 기사단의 건물로 갔다.

“안녕하세요, 릴리앤 피치 님.”

“네. 안녕하세요.”

날 알아본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 걸었다.

“앗, 오늘 회의가 있었나요?”

날 발견한 제2 기사단의 회계팀장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요. 그게 아니라 친구를 만나러 왔어요. 키니라스 타르칸 부단장님은 어디에 계신가요?”

“저희 부단장님과 친구셨어요?”

“네. 소꿉친구예요.”

“아하.”

회계팀장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리더니, 흐뭇하게 웃었다.

‘뭔가 좀……?’

“어디 보자, 지금 견학 지도 중이실 거예요.”

“그렇군요. 그럼 전 휴게실에서 기다릴게요.”

“아니에요. 거기로 가시죠. 이미 끝났을 시간인데 아직 안 오시는 거 보니 시달리고 계신가 봐요.”

“시달려요?”

“네. 저희 부단장님이 견학 지도를 할 때는 주로 귀족 영애들이 오곤 하는데, 필요 이상으로 부단장님께 다가서거든요.”

“아…….”

기분이 확 나빠져 버렸다.

“물론 부단장님은 싫어하십니다. 소꿉친구로서 이럴 때 가서 구출해 주면 좋죠.”

“네. 그렇겠네요. 어서 가죠!”

“안내해 드릴게요!”

회계팀장은 재미있는 것을 발견한 것처럼 씩씩하게 앞장섰다.

키니라스가 있는 곳은 연무장이었다.

외부 견학 날이라 그런지 여러 기사들은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간 태도로 열심히 수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견학 중인 십여 명의 귀족 영애들 중 대다수는 한 사람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키니라스였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친절하게 웃으면서 영애들을 대하고 있었다.

3년의 공백이 있었고, 키니라스의 외모가 많이 달라지긴 했다.

하지만 난 알아볼 수 있었다.

‘짜증이 났네.’

탈출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난 가까이 다가가며 조금 큰 목소리로 인사했다.

“키니라스.”

“왔어?”

기사라 그런지 진작부터 날 알아차렸던 키니라스는 환하게 웃었다.

방금까지 예의 삼아 내보이던 미소와는 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나만이 아니라 영애들도 다들 그걸 알아차렸다.

영애들은 즉각 몸을 돌려서 날 응시했다.

‘음…….’

사냥 중에 눈에 거슬리는 방해물을 발견한 사냥꾼의 눈빛이었다.

솔직히 살짝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난 꿋꿋하게 웃으면서 한 걸음 다가갔다.

“늦었어. 어서 가자.”

“그래. 여러분, 전 가 보겠습니다. 약속에 더 늦으면 안 되거든요. 이다음부터는 필립이 설명해 드릴 겁니다. 그럼 이만.”

키니라스는 환하게 웃는 얼굴로 서둘러 영애들에게서 탈출했다.

빠르게 다가와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손잡아도 돼? 제발, 부탁해.”

“어……. 그래.”

키니라스는 정말로 기쁜 듯, 방금보다 훨씬 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았다.

그러다가 깍지를 꼈는데, 그의 손이 워낙 커서 그런지 폭 파묻힌 느낌이었다.

아니, 완전하게 포위된 것 같았다.

‘엄청 단단하다.’

굳은살이 아니라 딱딱한 철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인간미가 없는 건 아니었다.

따듯한, 아니 언뜻 뜨겁게 느껴지는 체온이 가득 흘러넘쳤다.

키니라스의 손에 포위된 내 손만이 아니라 다른 곳으로도 열기가 전달되는 것 같았다.

‘……더워.’

“휴우, 고마워.”

키니라스는 제2 기사단 건물에 나온 뒤에야 손을 놓았다.

왠지 좀 아쉬웠다.

‘계속 잡고 싶었는데.’

사실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저 손이 다른 곳에도…… 아니, 내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릴리앤, 너 얼굴색이 또 잘 익은 사과 같아.”

“……네가 내 손을 잡아서 그런 거야. 놀랐잖아. 사람들 앞에서.”

“미안. 근데 다음에 또 그래도 돼?”

“왜?”

“아까 봤잖아. 나한테 쓸데없이 접근하는 거. 이전에는 평민이라고 신경도 안 쓰더니, 파견 근무에 성공한 공으로 부단장이 된 후로 아주 난리도 아니야. 너무 싫어.”

키니라스는 무척 불쾌한 기색이었다.

“그러니까, 도와줘. 사귀는 것처럼 보이게 해 줄래?”

“응?”

“누가 우리한테 사귀냐고 물으면 아니라고 답하지 말고, 그냥 웃기만 하면 안 될까? 그럼 다들 사귀는 줄 알고, 나한테 저렇게 접근 못 할 거야.”

키니라스는 고개를 숙이면서 내 앞에 두 손을 기도하듯 딱 붙였다.

“부탁해!”

“……알았어.”

키니라스가 안됐기도 했고, 무엇보다.

‘기분 나쁘네.’

저 여자들이 싫었다.

“정말이지?”

“응. 정말이지. 친구끼리, 이 정도는 뭐.”

환하게 웃던 키니라스는 약간 얼굴이 굳었는데, 그야말로 찰나였다.

‘내가 잘못 봤나?’

“고마워! 저녁 먹으러 가자! 내가 쏠게!”

우리는 자연스럽게 근처의 식당으로 가서 같이 식사했다.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았는데, 이제는 어색함 같은 게 전혀 없었다.

유쾌하게 웃고, 재미나게 대화하다 보니 나중에나 기억났다.

“아, 맞다. 내가 오늘 왜 왔냐면.”

“응.”

식당이 시끄러워서 다른 테이블에 있는 사람들에게 안 들릴 것 같았다.

하지만 난 괜히 신경 쓰여서 주변을 슥슥 둘러보고는 두 손을 입 앞에 모아서 확성기처럼 만들었다.

“그, 그거 말이야.”

“잘 안 들려. 내가 옆으로 갈까?”

기사라서 귀가 밝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난 키니라스의 맞은편에서 옆자리로 옮겨갔다.

곁에 바싹 다가가자, 어쩐지 그는 좀 긴장한 것처럼 보였다.

‘왜 그러지?’

아무튼 간에 난 두 손을 다시 확성기처럼 만들어서 키니라스의 귀에 댔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숨결이 그의 귀에 닿는 것 같았지만, 속삭였다.

“그, 누드모델 말이야.”

“……응.”

“그거, 굳이 안 해 줘도 돼. 도움받은 걸 갚고 싶은 마음은 알겠어. 근데 원치 않는데 그런 걸 해 주는 건.”

“괜찮아.”

키니라스는 내 숨결이 간지러웠던 모양이었다.

목덜미가 새빨갛게 붉어지더니 옆으로 한 뼘 움직여서 멀어졌다.

“하고 싶어.”

“……누드모델이 하고 싶다고?”

“응, 응.”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괜찮아.”

“……정말이야?”

“응. 정말이야.”

얼굴은 붉어졌지만, 키니라스는 진심인 것 같았다.

‘정말 괜찮은가 보네. 키니라스는 누드모델이 되고 싶었던 거구나……!’

내가 남자 성기를 그리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처럼, 키니라스도 그런 소망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 알았어. 고마워!”

난 마음의 짐을 털고, 웃었다.

키니라스는 그제야 안심한 듯 마주 웃고는 작게 물었다.

“근데, 준비해야 해?”

“준비?”

“응. 혹시…… 털 밀어야 해?”

“무슨 털? 아.”

얼굴에 불이 붙은 것 같았다.

“그…… 아니야. 그러지 않아도 돼.”

“자연스러운 걸 선호하는구나?”

“그게…… 응, 그렇지. 자연스러운 게 좋지.”

말하면서도 내가 대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니라스는 재미있다는 듯 눈을 흥미롭게 반짝였다.

“알았어. 그럼 내일 깨끗하게 씻고 갈게.”

“그, 그래.”

“이만 나가자.”

키니라스는 오늘도 날 집 앞까지 데려다주었다.

난 멍하니 침대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내일, 누드모델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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