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2.
제법 선선한 바람이 부는 늦여름 밤, 한남동 리츠빌리지 테라스에 별빛이 내리고 있었다.
제현과 형진, 그리고 형진의 여자 친구를 불러 함께했던 청첩 모임을 끝내고 현우와 은수, 두 사람만 테라스에 남아 있었다. 시끌벅적한 손님들이 휩쓸고 간 후라 더 조용하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밤이었다.
2인용 소파에 나란히 앉아 은수는 현우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깍지 낀 손에 입을 맞춘 현우가 물었다.
“이제 딱 한 달 남았다. 아직 할 거 많지?”
“본식 드레스 골라야 하고, 하객 리스트 확정해야 하고……. 또 뭐 있지?”
할 일이야 셀 수 없이 많았지만 현우의 소속사와 웨딩플래너가 알아서 진행해 주는 일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신부가 직접 신경 써야 할 것은 거의 없었다. 모든 옵션들이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상의 것이었고, 그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기만 하면 됐다. 친구들은 복에 겨웠다며 부러워했지만 애초에 결혼식에 대한 로망 같은 게 없던 은수에게는 잘 치러 내야 하는 큰 행사처럼 여겨졌다.
‘나한테 중요한 건, 이 남자와 함께하겠다는 약속을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선포하는 일. 내가 무슨 옷을 입든, 얼마나 대단한 손님들이 오든, 사실 상관없어.’
은수가 현우의 옆얼굴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멀리 야경을 바라보던 현우가 무언가 생각난 듯 갑자기 쭈뼛거리며 말을 꺼냈다.
“파리 출장 갔을 때 너 몰래 샀던 게 하나 더 있는데…….”
“응? 반지 말고 또 있어?”
은수가 왼손 약지에서 반짝이는 다이아몬드 반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몇 주 전 파리 화보 촬영에 동행했었다. 현우의 단독 잡지 촬영이 주목적이었지만 시간을 빼 두 사람의 웨딩 사진도 찍게 됐고, 촬영 중 현우가 프러포즈하며 끼워 준 반지였다.
“응, 안 좋아할 수도 있는데……. 그래도 너무 예뻐서, 너 하면 진짜 잘 어울릴 것 같아서 샀어.”
“뭔데 그래?”
평소답지 않게 뜸을 들이며 안절부절못하는 현우가 큰 강아지 같았다. 은수가 웃으며 재촉하자 현우가 잠깐만 기다리라며 집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기다리니 그가 정사각형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상자를 하나 들고 촐랑거리며 돌아왔다. 은수의 두 손에 상자를 안겨 주며 잔뜩 상기된 모습이었다.
“열어 봐도 돼?”
“열기 전에……. 이거 싫어해도 되는데, 나는 안 싫어할 거라고 약속해 줘.”
“뭔데 그래, 정말! 뭐 이상한 거라도 들었어?”
“아니야! 이상한 거 진짜 아니야. 연인 사이에 충분히 줄 수 있는 선물이야, 내 생각에는…….”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일말의 여지를 남기는 현우가 너무 귀여워서 더 놀리고 싶었지만, 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상자를 열었다.
“헉, 이게 뭐야? 나 이런 거 처음 봐…….”
핑크빛 띠종이가 잔뜩 깔린 상자 안에는 검은색 망사와 레이스로 장식된 화려한 속옷 세트와 함께 페이크 퍼로 만들어진 수갑이 들어 있었다.
은수는 섬세한 자수와 얇은 끈으로 아슬아슬하게 이어져 있어 조금만 잘못해도 끊어질 것 같은 속옷을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속옷을 요리조리 뜯어보는 은수의 얼굴 기색을 살피며 현우가 물었다.
“……어때? 예쁘지 않아? 맘에 안 들어?”
은수가 잠자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으니, 현우는 답답해 미칠 지경인 듯했다. 이윽고 은수가 입을 열었다.
“너, 변태니?”
입가를 부들부들 떨며 흘겨보는 은수에게 현우는 세상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싫으면 안 입으면 되잖아……. 내가 이거 입으라고 강요한 것도 아니고. 그냥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내 딴에는 너 생각해서 산 건데…….”
“정말 내 생각해서 산 거 맞아? 가슴에 손 얹고 말해 봐.”
“……아니, 뭐 이런 일로 가슴에 손까지 얹으래.”
“이 수갑은 뭔데, 이거 현우 씨가 찰 거 아니잖아. 이렇게 쪼그매서, 자기 손가락 두 개도 안 들어가겠다.”
“아, 싫으면 하지 마. 줘, 이리. 파리 가서 물러오면 되잖아……. 비싼 건데.”
현우가 미간을 잔뜩 구기며 어린애처럼 상자를 뺏으려 했다.
“누가 싫대?”
그제야 은수가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상자를 도로 뺏으며 은수가 말했다.
“10분 있다가 침실로 와. 나도 선물 있으니까.”
만면에 가득했던 웃음을 이내 색기 어린 미소로 흘리며 은수가 일어났다. 늦여름의 산뜻한 바람 한 줄기와 함께 옆으로 지나가는 은수의 손끝이 현우의 어깨를 야릇하게 스쳤다.
***
어느새 십 년 같은 10분이 흐르고 현우가 조심히 침실 문을 열었다.
“들어, 가도 돼?”
어두운 침실에는 촛불만이 일렁이고 있었다. 빛이 아스라이 비추는 침실 한가운데, 은수가 모로 누워 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헙…….”
현우가 치솟아 오르는 입꼬리를 주체 못 하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귀까지 잔뜩 상기된 현우의 눈에 은수의 나신이 비쳤다.
상상했던 대로였다. 아니,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야했다. 은수의 평소 수수한 스타일은 이런 과감한 속옷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에 그 상반성에서 오는 섹시함이 더 폭발적이었다.
“뭐 해, 와서 수갑 채워 줘.”
은수가 은은한 빛이 감도는 눈동자로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슴 부분은 망사와 끈으로 이루어져 살이 비쳤고, 그 끈이 배꼽까지 휘감고 내려가 밑까지 가리는 디자인이었다. 여러 겹의 끈으로 이루어진 팬티 라인은 엉덩이를 채 다 가리지 않았다.
그녀에게 현우가 천천히 다가갔다.
“선물…… 너무 멋지다.”
“무슨 선물?”
“이거, 너 이거 입은 거 선물 아니야?”
현우가 조심스레 엉덩이를 어루만지며 물었다. 정말 갖고 싶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손에 넣고 너무 소중해서 막상 가지고 놀지 못하는 어린애처럼.
“선물은…….”
은수가 몸을 일으켜 현우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선물은 내가 아니라, 앞으로 내가 할 거야.”
현우는 얼굴이 온통 새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얼굴 말고도 피가 몰리는 곳이 또 있었다.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며 단단하게 차올랐다.
“뭐…… 뭐, 할 건데?”
“현우 씨가 원하는 거 뭐든. 얼마나 야한 거든 다 할 수 있어.”
“너, 너 이런 거 어디서 배웠어? 이렇게 못된 거…… 읍.”
은수가 현우의 아랫입술을 깨물며 입을 막았다. 입 속으로 파고드는 작은 혀를 느끼며 현우 또한 스르르 눈을 감았다. 현우가 천천히 은수의 몸을 침대 위로 눕혔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와 두 사람의 몸을 감쌌다. 소름이 돋아 오른 은수의 옆구리를 현우의 손이 살짝 감아 들었고 이내 팬티 라인으로 손끝이 미쳤다.
“으응.”
은수가 고양이처럼 앙큼한 신음을 냈다. 현우는 촉촉한 입술을 다디단 사탕처럼 할짝거리며 서서히 은수의 다리 사이로 손가락을 뻗었다. 여러 겹의 끈으로 이루어진 아랫부분을 해치고 들어가니, 입술보다 더 깊이 젖은 은수의 샘이 왜 이제 왔냐는 듯 기다리고 있었다. 눈을 들어 그녀를 보았을 때 은수는 못 참겠다는 듯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은수가 발갛게 눈가를 흘기면서 말했다.
“어떻게 할 거야?”
현우가 행동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한 손은 깊은 샘을 계속 탐험하게 두었고, 다른 한 손을 들어 가슴 한쪽을 움켜잡은 뒤 망사 위로 튀어나온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아앗.”
은수가 허리를 꺾으며 신음했다. 그 소리에 반응하듯 현우의 손놀림이 더욱 격렬해졌다.
“하아, 하아…….”
방 안에는 은수의 신음 소리와 현우의 손가락이 질퍽대며 속살 사이를 헤집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그 와중에 열린 창문으로 도시의 찻소리가 섞여 들어 마치 밖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두 사람은 그런 기분을 느낄 겨를 없이 둘만의 시간 속에 흠뻑 빠져들었다.
“아아, 나 쌀 거 같아.”
은수가 다급하게 소리치며 현우의 팔을 붙들었다. 현우는 조금도 멈출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의 강한 팔은 더 빠른 속도로 움직이며 은수의 밑을 자극했다.
“하아, 악! 하앗.”
은수의 온몸이 부르르 떨리더니 이내 맑은 체액을 토해 냈다.
“미쳤나 봐…….”
은수가 부끄러워하며 현우의 눈을 피했다.
“이제 시작이야.”
현우가 은수의 손을 잡아당겨 수갑을 채웠다. 그녀가 하늘거리는 검은색 페이크 퍼가 간지럽다고 느끼는 사이, 현우가 은수의 다리 사이로 뾰족하게 치고 들어왔다. 정신을 차려 보니 손은 결박돼 머리 위로 들려 있고, 두 다리도 천장을 향해 들려 있었다.
현우는 오늘 유난히 단단하고 힘이 넘쳤다. 몸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뚫고 들어올 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거리낌도 없었다.
너는 온전히 내 것이라는, 그리고 나는 온전히 너의 것이라는.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눈빛, 그의 몸짓으로.
심지어 그가 내뿜는 땀과 숨으로. 그 체취로.
“이대로 죽어도 상관없어…….”
입으로 속옷을 찢어 내는 현우의 뒷목을 쓰다듬으며, 은수가 자신도 모르게 속마음을 내뱉었다. 은수는 이내 완전히 벗은 몸이 되었다.
“죽지 말고 나랑 오래오래 살아.”
현우가 은수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나신의 젊은 남녀는 완연한 하나가 된 채 늦여름의 밤바람을 맞고 있었다. 바람이 더 차가워지더라도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겨울이 온다 하더라도.
서로의 체온에 기대어서.
서로를 구원함으로써.
영원이 아니라 하더라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