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에필로그 1. (8/9)

에필로그 1.

‘내가 가진 것 중에 가장 예뻐. 내가 돈을 주고 산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다 포함해서.’

‘난 어느 쪽이야?’

‘뭐가?’

‘돈을 주고 산 것과 그렇지 않은 것 중에서 어느 쪽이냐고.’

‘그게 중요해?’

그때도 위스키를 마시고 있었다. 현우는 이제 거의 얼음밖에 남지 않은 위스키 잔을 바라보며 2년 전 송정의 말을 회상하고 있었다.

결국 돈이었다. 그 관계를 규정짓는 것은. 남녀 사이의 감정과 서열도 누가 더 많은 돈을 가지고 있느냐에 의해 결정되는 게 현실이었다. 송정과의 관계에서 생겨날 감정 따위 애초에 없었지만 현우는 그런 세계에 속해 있다는 것 자체에 이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치 중독된 것처럼 본인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그 알력 관계에 의지하고 있었다. 잃을 것이 너무나 많았고 하루하루 불안은 더해져 갔었다. 꼴도 보기 싫을 만큼 환멸을 느끼면서도 손에 다 그러쥐고 감당하지도, 그렇다고 놓아 버리지도 못하는 것. 그중에 하나가 송정이었던 시절이었다. 아주 짧은 시기였지만.

송정은 현우 앞에서 자신이 가진 것을 아무렇지 않게 과시하곤 했다. 평범한 직장인의 몇 년 치 연봉에 달하는 슈퍼카를 선물한다거나 현우의 취향을 깡그리 무시하고 자신이 좋아하는 장소, 자신이 좋아하는 값비싼 음식, 자신이 허락하는 사람들만을 고집함으로써.

미술도 송정이 아집을 부리는 분야 중 하나였다. 그녀가 원할 때 갤러리 전체를 빌려 두 사람만이 전시를 관람하곤 했는데, 자신이 탐탁지 않아 하는 작품 앞에 현우가 오래 서 있는 것조차 참지 못하곤 했었다.

‘넌 내가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것 중에 하나지.’

송정은 차가운 손끝으로 그의 턱을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었지만, 현우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이미 돈으로 구입 당해졌다는 걸. 그게 이 세계의 생리라는 걸.

그런 말을 들을 때면, 현우는 자신이 마치 무참하게 일그러진 추상화가 된 기분이었다. 경매에 붙여져 열띤 경쟁 끝에 고가에 낙찰됐지만 도무지 무엇을 그린 것인지 의도와 의미를 알 수 없는. 결국 물건에 불과한, 숨이 붙어 있지 않은 무생물.

그렇게 그녀와 갤러리를 들락거리고 예술계 인사들을 자주 만나면서 자연스레 알게 됐었다. 그림 경매를 통해 한성그룹이 어마어마한 비자금을 만들 수 있다는 걸. 일반인은 범접할 수 없는 그들의 ‘고급 취향’이라는 건 불법과 저열한 속임수로 점철된 그들의 천한 돈벌이로 뒷받침된다는 걸.

하지만 아는 척하지 않았었다. 그들에게 또 하나의 작품이 되어 줌으로써, 말 없고 취향도 없고 생각도 없는 텅 빈 오브제가 되어 줌으로써 현우는 자신만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아는 체하고 그들에게 동조하게 되면 자기 밑바닥에 남아 있는 일말의 자존심마저 빼앗겨 버릴 것 같았다.

현우가 모르는 척하는 것을 그들은 정말 모르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현우 앞에서 점점 더 과감하게 그들의 비리와 온갖 추잡한 술수를 다 드러내 보였었다. 심지어 현우를 이용해 경매를 홍보하고 그림값을 부풀리는 데 동참시키기까지 했다.

얼마 못 가 송정과 헤어졌기에 그 세계와도 이별하게 됐지만 그들이 작동하는 방식을, 그런 방식으로 예술계뿐만 아니라 정치와 경제, 사회에서 흔히 주류라고 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를 이미 모두 파악한 후였다.

그 후로 현우는 연예계에서 자신의 위치 때문에, 즉 톱의 자리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하기보다는 작은 역할이라도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역할을 연기하며 작품 활동에 온전히 몰입하게 됐었다. 자신이 환멸을 느꼈던 사람들에 대한 앙갚음으로 그들이 그토록 추앙하는 ‘예술,’ ‘고급 취향’이라는 꿈을 좇았다.

그렇게 스타보다는 배우로 자리 잡게 되고 나니, 돈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게 됐고 그래서 잊고 지냈었다. 송정에게 무언가를 갚아 줄 만큼 미운 감정이란 것도 남아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은수를 만나고, 송정이 은수에게 과거에 한 짓을 알게 된 후론 아니었다. 말할 수 없이, 미치도록 누군가를 꺾어 버리고 싶은 살기가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고 올라왔다. 증오가 치열할수록 현우의 머리는 차갑게 식었다. 끓어오르는 가슴을 터뜨려 무작정 달려들기보다는 냉정하고 치밀하게 준비해 적절한 타이밍이 왔을 때 단칼에 베어 버리는 방식으로 해결하고 싶었다. 물론 그래야만 하는 상대이기도 했다.

그때 생각난 게 제현이었다.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상하고 제현을 도왔던 건 아니었지만, 제현이 그런 부탁을 들어 줄 거라 감히 기대하기도 어려웠지만, 도움을 청할 사람이 제현밖에 없었다. 고맙게도 제현은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현우의 부탁을 수락했다.

한성그룹에서 사람을 뽑을 때 경력 조회나 뒷조사를 허술하게 하진 않을 것으로 예상해 미리 제현의 이력이나 신분을 현우와는 전혀 관계없을 사람으로 만들어 놨다. 다행히도 제현의 업계 평판이나 실력 또한 워낙 출중했기에 운 좋게 자인 미술관의 재무 담당으로 입사할 수 있었다.

송정이 미술관 관장이었지만, 재무나 경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진 않았다. 미술관 자체의 운영보다는 뒷구멍을 이용한 비자금 조성과 한성그룹 후계 구도에 훨씬 더 신경 썼기에 비리로 인해 실제 장부가 누더기처럼 훼손되는 건 모르고 있었다.

심지어 송정은 제현의 존재조차 몰랐고, 입사 후 얼마지 않아 재무팀장의 신임을 얻은 제현은 거의 모든 장부와 증빙에 접근할 수 있게 됐다. 어이없게도 보안이 그리 철저하지 않았던 탓에 제현은 검찰에 제출할 증거들을 어렵지 않게 확보했고, 그렇게 조용히 이뤄진 제현과 현우의 합작으로 대그룹 한성은 어마어마한 타격을 입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주가 폭락, 국제적인 망신, 기자들 앞에서 고개를 숙인 송정의 모습이 연일 보도되는 아수라장 속에서 그 배경에 현우가 있을 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내부 고발자의 양심 고백에 의해 한성그룹 비자금 조성과 정경 유착의 증거가 세상에 드러났다.’로 사건은 일단락됐고, 그 후폭풍은 여전했지만 세상은 또 다른 뉴스거리로 시끄러울 따름이었다.

한강의 야경을 내려다보며 위스키 잔을 한쪽으로 기울였을 때, 뒤에서 자신을 감싸는 여린 두 팔을 느꼈다.

“……뭘 그렇게 생각해?”

등 뒤에 얼굴을 묻어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은수가 물었다.

“그냥, 내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

은수가 몸을 돌려 현우의 앞으로 안겨 오며 물었다.

“그게 뭔데?”

올려다보는 은수의 두 눈을 깊게 바라보며 현우가 말했다.

“너를 만나고, 너를 지킨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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