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장. (7/9)

6장.

현우는 자인 미술관을 향해 거칠게 차를 몰고 있었다. 촬영이 끝나자마자 규호를 보내고 혼자였다. 현우의 미간이 심하게 찌푸려졌고, 운전대를 잡은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송정에게서 몇 년 만에 연락을 받은 것은 두세 달 전이었다. 예전 같으면 무시했을 연락이었지만 송정과 은수의 악연을 이미 알고 있었기에, 현우는 앞으로 혹시라도 벌어질 일에 대비하는 심정으로 답했다. 송정은 얼마 후에 있을 미술관 개관식에 꼭 와 줬으면 좋겠다며, 회사를 통해 정식 섭외 요청이 갈 거라고 말했다. 내키지 않았지만 송정 그 여자의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라, 한성그룹이 자신의 기획사를 상대로 하는 제안이었기에 현우는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미술관 개관식에서 만난 송정은 몇 년 전과는 분위기가 사뭇 달라져 있었다. 이십 대에도 뱀 같은 간교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송정은 너무나 닳고 닳아 버린 기업인이자 협상가의 풍모를 지니고 있었다. 세간에서는 그녀를 두고 언젠가 언니, 오빠를 제치고 한성그룹의 오너 자리를 꿰찰 거라는 말이 정설처럼 돌았다. 한성그룹 송명곤 부회장 또한 원하는 것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손에 넣고 마는 둘째딸이 자식 중 자신과 가장 많이 닮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난 현우 씨가 원하는 모든 걸 다 줄 수 있어. 그리고 난 현우 씨를 원해.’

몇 년 만에 만난 송정의 제안에는 거침이 없었다. 미술관 개관식 행사가 끝난 늦은 밤, 송정은 현우를 관장실로 불러들였었다. 커다란 원목 책상에 기대선 그녀의 빨간 드레스 슬릿 사이로 길고 흰 다리가 드러나 있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소파에 앉은 현우를 향해 그녀가 천천히 다가왔다. 자신의 두 다리 사이에 현우의 무릎을 끼고 상체를 살짝 구부리며 두 손으로 현우의 얼굴을 들어 올렸다.

‘무슨 말인지 정말 몰라?’

송정이 귓가에 속삭이자 현우는 소름이 끼치는 것을 느꼈다. 송정이 현우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한쪽 가슴에 대며 말했다.

‘예전처럼 섹스만 하는 것도 괜찮아. 어차피 나도 결혼은 다른 사람이랑 할 거니까.’

송정이 현우의 무릎에 앉아 두 손으로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아무리 찾아봐도 너만 한 물건이 없더라고. 너랑 하는 게 제일 좋았어.’

송정의 숨이 내뿜는 지독한 향수에 현우는 구역질이 올라올 것만 같았다.

‘그니까 너, 내 거 해.’

송정이 입을 맞추려는 찰나, 현우는 그녀를 허리를 잡아 소파에 내려 두고 일어섰다. 송정의 당황한 시선을 뒤로 느끼며 현우는 문을 열고 걸어 나왔다.

그렇게 걷어차다시피 박차고 나온 그 문을 현우가 2주 만에 다시 열고 들어가며 소리쳤다.

“이게 대체 뭐하는 짓이야?”

부하 직원으로부터 보고를 받고 있던 송정은 잠시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침착하게 부하 직원을 내보내고 관장실 문을 닫았다. 숨 막히는 향수 냄새가 보름 전의 밤을 떠올리게 해 현우는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말했잖아. 현우 씨 갖고 싶다고.”

송정이 커다란 원목 책상 뒤로 돌아가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송정은 무서우리만치 뻔뻔한 태도로 기사를 낸 장본인이 자신임을 인정하고 있었다. 현우는 말문이 막혀 송정을 쏘아보고만 있었다. 이런 여자를 은수가 상대했어야 했다.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여자를.

“왜, 기사 때문에 현우 씨 뭐 손해 보는 거 있어? 없잖아. 현우 씨 값은 오히려 더 올라갈걸?”

송정의 뒤로 높은 통창을 통해 한여름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지만 실내의 분위기는 서늘하기만 했다.

“이게 값의 문제니?”

“그럼 마음의 문제야?”

송정이 예리하게 현우를 파고들었다.

“요즘 만나는 여자 있어? 현우 씨 예전엔 그런 거 없었잖아.”

송정의 뱀 같은 눈을 피해 현우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거 아니니까. 기사 내려 줘, 부탁이야.”

현우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은수가 기사를 보고 당황할 것을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이 사태를 정리하고 은수에게 가야 했다. 간절한 눈으로 부탁하는 현우를 빤히 바라보던 송정이 핸드폰을 열었다.

“기사 내리라고 해. 정정 보도도 하고.”

핸드폰을 딸깍, 내려놓는 소리가 현우의 마음을 바닥까지 떨어뜨리는 듯했다.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알 수 없는 예감이 현우의 목을 서서히 조여 오는 것 같았다. 그런 현우를 바라보며 송정이 말했다.

“여전히 너무 귀엽다, 현우 씨……. 욕심나게.”

쇼윈도의 물건을 쳐다보듯, 탐나는 명품을 이리저리 뜯어보듯 현우를 살피는 송정의 시선에 현우는 마치 발가벗겨진 것 같은 모욕감을 느꼈다. 은수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빨리 그녀에게 가야 했다.

송정이 어떤 속셈으로 이렇게 유유히 자신을 놔주는지 더 이상 생각할 겨를 없이 현우는 다시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쳐나왔다.

***

은수는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수연을 구태여 먼저 보내고, 어두운 골목을 혼자 걷고 있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자신을 지켜보는 수연을 도리어 달래야 했다.

TV 뉴스나 다른 사람들의 말 속에서 송정의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은수가 발작적으로 숨을 못 쉬고 손을 부들부들 떨던 때가 있었다. 지금 아무렇지 않아 하는 은수를 수연은 오히려 더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은수는 정말 괜찮은 거냐며 몇 번이나 확인을 받는 수연에게 희미하게 웃어 보이며 혼자 있고 싶다고 말했다. 이상한 일이지만 현우와 그 여자의 이름이 함께 언급되는 것에 대해 화가 나거나 슬프지 않았다. 잠시 혼란스럽기는 했지만 아직 현우보다는 송정 그 여자를 더 잘 알기에 곧 차분해질 수 있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그 여자라면 이런 일을 충분히 꾸며 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은지도 몰랐다.

자신을 향한 현우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타인으로부터 이렇게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은. 아버지는 언제나 과묵했고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가장으로써 가족을 지키면서 동시에 아내의 부재를 감당해 내기에 급급해 한수와 은수는 감정적으로 방치된 채 스스로 커야 했다. 혁준을 사랑했지만 그도, 은수도 너무나 어렸다.

어른 남자가 한 여자를 사랑할 때 얼마나 필사적일 수 있는지, 은수는 현우를 보며 느꼈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갈급함이 그와 마주 잡은 손에서, 끌어안은 뒷목에서 퍼져 나왔다.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고, 너 없이는 못 산다고 온몸의 숨구멍과 작은 세포 조각 하나하나로 그는 말하고 있었다.

은수는 자신을 감싸는 그의 강렬한 기운에 손으로 팔을 감쌌다. 상상만으로도 뜨거워지는 그의 숨결과 체취를 지금 당장 원했다. 눈앞에 그가 있었으면, 그를 향해 달려가 품에 안았으면 하고 바랐다.

그리고 눈을 들었을 때, 집 앞에 서 있는 현우를 발견했다. 환영인가 싶었지만, 그녀를 발견하고 그가 천천히 눈을 감았다 다시 뜨는 것을 보았을 때 비로소 현우가 실제로 거기 서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은수야…….”

“보고 싶었어, 신현우.”

가슴에 쏙 들어오는 그녀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고 현우는 낮게 숨을 내뱉었다. 은수는 현우의 심장 고동 소리에 맞춰 자신의 가쁜 숨이 차차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은수야.”

“잠깐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이대로 있어요.”

현우는 마음이 급했지만 나무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필요로 한다면. 내 여자가 그러기를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그게 영원일지라도.

말하지 않아도 두 사람은 느끼고 있었다. 지금 우리 두 사람 외에 중요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전히 이 세상 속에 우리 두 사람뿐. 이 손을 놓게 만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은수의 원룸으로 함께 들어와 자리를 잡고 앉았을 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기사난 거 거짓말이야.”

은수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현우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고 은수의 눈에는 순간적인 불꽃이 일었다.

“2년 전쯤에 몇 번 만난 적이 있었어. 깊은 감정을 주고받을 만큼 오래 만나지 않았고 서로 공유한 것도 없었어. 사람을 물건 다루듯 하는 여자라 가까이하고 싶지 않아서 가끔 연락이 와도 무시하고 지냈었어.”

은수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밖은 어둡고 고요했다. 현우의 잔잔한 목소리만이 은수의 작은 원룸을 채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얼마 전 미술관 행사에서 다시 마주치게 됐고……. 예전처럼 다시 만나고 싶다면서 내게 다가왔었어. 그날 나는 너와 마주친 이후로 제정신이 아니었고, 제대로 답도 못 하고 뿌리치듯이 그 자리를 떠났어. 내가 확실히 했었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은수야. 이런 일 겪게 해서.”

현우는 물기 어린 두 눈을 떨어뜨리며 몸 둘 바를 몰라 했다.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곁에 앉았다. 현우와 나란히 앉아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미세하게 떨리는 그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나 그 여자 잘 알아요.”

은수의 말에 현우의 입술이 달싹였다. 네가 그 여자 때문에 겪은 일을 모두 알고 있다고 말해야 할까 고민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묻어 두고 싶은 일이었다. 자신의 입으로 은수의 마음을 아프게 할 과거를 말하게 하는 일은 죽어도 없게 하고 싶었다. 그녀가 스스로 말을 꺼내게 되는 일도 물론 없기를 바랐다. 담담한 그녀의 어조에 현우는 마음이 짓눌리듯 저려 오는 것을 느꼈다.

“혁준이 누나예요, 그 여자.”

현우는 분노와 연민으로 온몸이 떨리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은수가 살아온 시간으로부터 송정과 송혁준을 도려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었다. 현우가 입술을 깨물며 한 팔로 조용히 은수의 어깨를 안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현우 씨와 그 여자 결이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어요. TV에 나온 내용이 사실이 아닐 거라고, 그냥 직감처럼 알 수 있었어…….”

현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있던 은수가 고개를 들어 현우를 올려다봤다.

“근데 이상한 건, 나한테 그런 게 사실이든 아니든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는 거야.”

현우가 눈을 질끈 감았다. 타오르는 가슴을 주먹으로 쳐 삭일 수 있다면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제 가슴을 치고 싶었다. 겨우 눈을 뜨고 은수를 바라봤을 때 그녀가 두 손으로 현우의 얼굴을 감싸며 제 쪽으로 돌렸다.

“그 여자한테서 당신이 상처받았을까 봐, 그 마녀 같은 여자가 어떤 독기 어린 말로 당신을 털끝만큼이라도 다치게 했을까 봐……. 그게 제일 겁났어.”

현우는 은수의 투명하고 당당한 눈동자에서 자신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내 숨이 붙어 있는 동안 이 여자를 지키리라. 어떤 값을 치러야 한다 해도, 나를 잃는다 해도 이 여자의 두 눈망울을, 가녀린 숨과 입가의 미소를 지켜 내리라.

“……괜찮은 거야? 현우 씨, 제발 괜찮다고 말해 줘.”

도리어 자신을 걱정하며 얼굴을 매만지는 은수를 보며 현우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 그녀의 뺨을 핥고, 그녀의 양어깨를 세게 쥐며 키스를 퍼부었다. 소금기 어린 키스의 맛은 슬픔과 안도를 동시에 담고 있었다. ‘그 힘든 시절을 지나 왜 우리는 지금에서야 서로를 찾을 수 있었나’라는 격정은 불타오르는 동시에 평화로웠다.

“알고 있었어.”

눈물범벅이 된 현우가 겨우 은수의 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그 여자, 송정이 너한테 겪게 한 일. 나 다 알고 있었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은수의 눈동자가 커다란 유리구슬처럼 좌우로 흔들렸다.

“……어떻게 현우 씨가, 그걸 어떻게 알았어?”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치부였다. 혁준을 사랑했기에 감내해야만 했던 일 모두 자신의 죗값인 것 같았다. 죽음 같은 골짜기를 지나야 했다. 그 암흑으로부터 자신을 건져 낸 빛과 같은 사람에게는 죽어도 들키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멍멍해진 귓가에 수군거리는 말소리가 들려왔다.

‘쟤야, 서은수! 몸 팔아서 학비 낸다는 애. 송혁준도 엎어뜨려서 꼬셨다며? 기술이 아주 뭐, 대단하신가 봐? 나도 한번 먹어 보고 싶다. 쓰읍.’

‘카톡방에 사진 뜬 거 못 봤냐? 완전 다 나왔어, 야 진짜 미쳤어……. 눈앞에 있는 거 같아. 나 어제 그거 보고 두 번 쌌잖아.’

‘미친놈아! 하……. 동영상 없는 게 졸라 아쉽다.’

은수의 두 눈에서 과거로부터 상기된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눈앞이 흐려지려 할 때 송정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 따위가, 감히 너 같은 게 내 동생을 사랑한다고?’

다리에 힘이 풀려 가는 은수를 현우가 단번에 끌어 올려 으스러지도록 세게 안았다.

“내가 그 여자 밟아 버릴 거야. 너한테 한 짓 죽을 때까지 후회하게 아주 짓이겨 놓을 거야.”

“현우 씨…….”

현우의 강한 팔에 안겨 은수는 아득해지는 정신을 다시 붙잡았다. 눈앞이 또렷해지자 단 하나의 생각만이 점점 더 강렬해지고 있었다.

‘제발, 제발 이 사람 다치지만 않게 해 주세요……. 이 사람을 지켜 주세요…….’

은수는 믿지 않던 신을 향해 처음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

“너 대체 뭐 하는 물건이야?”

송명곤 부회장의 호통 소리가 한성빌딩 32층 그의 집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송정은 잠자코 소파에 앉아 구두 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딴따라 새끼랑 만난다고 온 세상에 자랑이라도 하는 거냐? 서방질을 하려면 몰래 숨어서 하면 되지, 뭐 대단한 일이라고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게 만들어?”

아무리 친자식이라도 송명곤 부회장의 걸걸한 입버릇에 익숙해지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를 닮아감으로써 송정은 아버지를 버텨 내고 있었다. 송정은 어렵지 않게 멘탈을 가다듬고 아버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일어섰다.

“……갖고 싶어서 그랬어요. 갖고 싶은 물건이라서.”

“뭐?”

“아버지가 그러셨잖아요. 가져야 하는 게 있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가져야 한다고. 어르고 달래고, 그래도 안 되면 위협하고 겁박해서라도, 그게 한성의 방식이라고 누누이 말씀하셨잖아요. 아버지 방식, 제일 잘 배운 게 저 아니에요?”

잠시 침묵하던 송명곤 부회장의 한쪽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놈이 네가 갖고 싶은 물건이냐?”

“네.”

“그래서 가졌어?”

꼿꼿하던 송정의 기세가 미세하게 누그러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은 송명곤 부회장의 눈빛이 예리하게 빛났다.

“곧……. 곧 갖게 될 거예요.”

“그런 다음엔 어떡할 거냐?”

송정이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아버지를 바라봤다.

“쓸모없어지면 버릴 거냐?”

송정은 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그런 그녀의 옆얼굴로 공기를 찢는 듯한 송명곤의 음성이 화살처럼 내리꽂혔다.

“넌 애초에 갖고 싶은 대상을 잘못 골랐어. 그런 건 일단 갖고 나면 곧 쓸모없어질 뿐만 아니라 되팔 때 제값을 받을 수도 없지. 뭐든 되팔 때 더 비싸게 팔 수 있는 걸 가져야 해. 무슨 말인지 알겠냐?”

송정이 두 주먹을 꽉 말아 쥐며 표독스럽게 쏘아붙였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말씀이세요?”

송명곤이 태연하게 웃으며 서랍에서 시가를 꺼내 들었다. 불을 붙이고 깊게 첫 입을 빨아들이는 행동에 어떤 조급함도 엿보이지 않았다. 송정의 마음만 불붙은 시가 끝처럼 타들어 가고 있었다.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지. 그러면서 배우는 거다.”

송명곤이 내뿜은 독한 시가 연기가 송정의 코끝에 시큰하게 닿았다.

“뭐든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당연한 거야. 그게 본능이지. 다만 대상을 잘못 골랐을 땐, 늦게나마 그걸 깨달았을 땐…….”

주름진 양 볼을 오목하게 만들며 음미하듯 두 번째 연기를 빨아들이느라 송명곤이 잠시 말을 멈추었다. 후- 내뿜는 연기 속으로 그의 말이 이어졌다.

“부수어 버리면 돼. 너도, 남도 갖지 못하게.”

송정이 아버지의 집무실을 빠져나왔을 때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권종욱 실장이었다.

“관장님. 방금 사진 보내 드렸습니다. 신현우가 미술관에서 나와서 곧장 성수동으로 갔습니다. 서은수와 만나서 같이 서은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불이 꺼진 걸로 봐서는 오늘은 그 집에서 머물 듯합니다.”

핸드폰을 든 손이 차갑게 굳는 것을 느꼈다. 송정이 또각또각 엘리베이터로 향하며 사무적인 어투로 답했다.

“권 실장, 내일 그 여자 좀 내 앞에 갖다 놔야겠어요.”

아버지의 말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질 수 없다면 망가뜨릴 수밖에.

***

자정이 지난 시간, 은수는 따뜻했던 옆자리가 허전해진 듯한 느낌에 눈을 떴다. 밤은 깊어 있었고, 현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증거는 최대한 확보한 거야?”

잠시 멈추었던 말소리는 드문드문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계속 이어졌다.

“……경매를 통해서 돈세탁을……. 그렇게 세탁한 돈이 한성으로…….”

쏟아지는 노곤함에 다시 눈이 감겼고, 그의 목소리는 저편으로 멀어져가고 있었다.

“그래, 고생했다. 제현아.”

‘제현? 제현이라는 이름 어디서 들어봤는데? 언제였더라…….’

잠 속으로 완전히 빠져들기 직전 은수가 마지막으로 들은 것은 제현이라는 사람의 안전을 바라는 현우의 걱정 어린 당부였다.

“다 끝날 때까지 몸조심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뭐든지 말해.”

***

“여기예요, 은수 씨!”

카페로 들어오는 은수를 발견한 이형진 팀장이 손을 높이 흔들었다. 겨우 며칠 만에 보면서도 무척 반가운지 연신 싱글거렸다.

“저번엔 잘 들어가셨어요?”

“네, 팀장님도 잘 들어가셨죠?”

은수의 미소에 형진이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저 그때 완전 꽐라 돼서……. 죄송해요. 현우가 택시 안에 욱여넣은 건 기억이 나는데, 그 뒤론 어떻게 집에 들어갔는지 기억이 안 나네요.”

너부데데한 인상으로 사람 좋게 웃는 형진을 향해 은수가 괜찮다며 웃었다.

“은수 씨 어떻게 들어가셨어요?”

“저는 신현우 씨 매니저님이 오셔서 집까지 데려다주셨어요.”

“아, 규호가 모셔다 드렸구나. 잘 들어가셨겠네요. 다행이다.”

왜 굳이 규호가 은수를 데려다주었는지, 그러면 현우는 어떻게 집에 갔다는 건지 궁금해하지도 않는 형진이 참 그답다고 은수는 생각했다. 행사를 같이 하며 겪은 그는 좀 둔한 편이었지만, 세세한 일에 신경 쓰기보다는 굵직한 흐름을 잘 잡는 리더 타입이었다. 이런 사람과 현우 씨가 오랜 친구라는 생각에 든든하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하며, 은수는 또 현우를 떠올리고 있었다.

‘내 사람. 내가 지켜야 할 내 사람…….’

“아, 이 자식 왜 이렇게 안 오지?”

형진이 손목시계와 출입문을 번갈아 보며 초조한 기색을 내비쳤다.

“또 누가 오세요?”

은수의 당연한 물음에 형진이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사실을 털어놓았다.

“아……. 저 그때 회식 때 말씀드렸던 제 친구요. 소개시켜 드리고 싶다고 했던, 걔가 지금 여기로 오는 중이에요. 미리 말씀드리면 안 나오실 것 같아서…….”

형진의 눈빛이 사고를 쳐 놓고 주인 눈치를 보는 커다란 강아지 같았다. 은수는 현우와의 관계는 꿈에도 모르고 또 다른 절친을 소개시켜 주겠다는 그에게 한편으로 미안하고 또 한편으론 고마우면서도, 이 어이없는 상황에 헛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아, 팀장님, 저는…….”

어떻게든 이 상황을 벗어나려는 은수와 붙잡으려는 형진이 무언의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한 남자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왜 바쁜 사람 불러내고 그러냐, 너는. 전화로 얘기하면 되지.”

남자가 자연스럽게 형진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제야 은수를 발견했는지 앞에 앉은 여자는 누구냐는 시선으로 형진을 바라보는 걸 봐서, 그도 이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 모르고 나온 게 분명했다.

“이쪽은 서은수 씨. 제 친구 김제현입니다. 근처에 있다길래 잠깐 얼굴만 보자고 불렀어요.”

형진이 은수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미션을 완성했다는 듯이 뿌듯하게 웃는 형진이 어이없었지만, 은수는 초면인 제현에게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제현도 웃으며 은수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형진만이 이 상황이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아이구, 이런 어쩌지? 내가 오늘 급한 일이 있는데 깜빡하고 있었네!”

로봇이 책을 읽는 것처럼 딱딱한 말투였다. 멍하게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두 사람을 두고 형진이 삽시간에 짐을 챙겨 일어났다.

“야야야, 이형진!”

그제야 형진을 붙잡으려던 제현의 필사적인 손길을 피해 그는 유유히 뒷걸음치고 있었다.

“은수 씨 미안해요! 내가 진짜 급한 일이 있어서.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두 사람 얘기하다 가요. 안녕!”

형진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며 두 사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수초간의 침묵이 지나고 비로소 생판 처음 보는 사람과 마주 앉은 채 남겨졌다는 것을 깨달은 두 사람은 어색하게 마주 보며 웃었다.

“형진이 쟤가 좀 엉뚱한 데가 있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려요.”

얄궂은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억지로 참으며 은수가 말을 받았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김제현 씨라고 하셨죠?”

제현이라면, 어젯밤 잠결에 현우가 통화하던 그 사람인 듯했다. 현우의 친구니, 최대한 정중하게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서은수 씨, BJ 행사 때 강 대표님 통역하고 사회 보셨다던 그 서은수 씨인 거죠?”

당황했던 모습은 어느새 사라지고 차분히 자신을 바라보는 제현의 태도가 어쩐지 예사롭지 않았지만, 은수는 형진이 자신을 이미 소개했나 보다 여겼다. 그러고 보니 회식 자리에서 자신도 제현이 회계사라는 사실을 전해 들었었다.

“네, 맞아요. 형진 팀장님이 같이 행사하면서 저를 좋게 보셨나 봐요. 소개시켜 주고 싶은 분이 있다고 말씀하셨었는데, 이렇게 빨리…… 동의도 없이 자리를 마련하실 줄은 몰랐네요.”

은수가 웃음을 섞어 말했다. 제현은 여전히 차분했다. 뭔가 알고 있는 듯 꿰뚫어 보는 눈빛이 묘하게 신경 쓰였다. 그제야 제대로 살피게 된 그의 인상은 우직하면서도 예리한 기운이 있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차림이 전형적인 회사원 같았지만 단호한 입매는 왠지 모를 결단력과 추진력을 느끼게 했다.

“형진이가 좀 그런 게 있어요.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면 남들 배려 안 하고 밀어붙이는 게. 오지랖도 넓은 편이죠. 그래도 나쁜 애는 아니에요. 악의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네, 말씀 들었어요. 두 분 고등학교 때부터 제일 친한 친구셨다고.”

“현우까지 셋이요.”

현우의 이름에 은수의 눈빛이 금세 반짝였다.

“말씀 많이 들었어요, 현우한테.”

침착하게 은수를 바라보는 제현의 표정에서 은수는 알 수 있었다. 현우와 자신의 사이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걸.

“갑작스럽긴 하지만 형진이 덕분에 예상보다 일찍 만나게 됐네요. 뵙고 싶었어요. 은수 씨 어떤 사람인지 궁금했거든요.”

“몰랐어요. 현우 씨가 친구분께 제 얘기 하는 줄은.”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여기저기 떠들고 다니는 성격은 아니죠. 저한테도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얘기한 거예요. 은수 씨에 대해서.”

“……그럴 만한 일이라면, 어떤?”

은수의 물음에 멈칫하던 제현이 눈을 피하며 말을 이었다. 입매를 꾹 다물었다 푸는 모습이 긴장을 감추려는 버릇인 듯도 했다.

“곧, 곧 알게 되실 거예요. 은수 씨가 자기한테 아주 소중한 사람이라면서, 은수 씨를 지키는 일을 도와 달라고 저한테 부탁했어요. 우선 그렇게만 알아주세요.”

진지한 그의 분위기에 압도돼 은수는 더 캐묻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은수가 혼자만의 생각에 빠지려는 찰나, 제현이 묻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몇 년 전에, 제가 아직 회계사 공부하고 있을 때 엄마가 쓰러졌었어요. 아빠 돌아가시고 엄마 혼자 저 키운다고 고생만 하시다가 직장에서 뇌출혈로 쓰러지신 거예요.”

갑작스런 말에 은수는 영문을 몰랐지만 그의 말을 들어 보기로 했다.

“저는 공부한다고 핸드폰도 하루에 한 번만 켜던 때라 엄마 쓰러진 줄도 몰랐었는데, 현우가 엄마 수술시키고 제가 올 때까지 자리 지키고 있었더라고요. 저는 진짜 쥐뿔도 없던 때였는데, 현우가 저한테 묻지도 않고 수술비에 간병인까지 다 챙겨 줬었어요. 현우 아니었으면 엄마 아마 못 살렸을 거예요.”

제현의 반듯한 눈이 은수를 똑바로 주시하고 있었다.

“현우는 그런 애예요. 자기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요. 저도 현우한테 그런 사람이 되고 싶고. 그래서 현우가 부탁한 일을 하고 있어요. 현우와 알고 지내는 십 년 넘는 시간 동안 저한테 처음 한 부탁이죠. 은수 씨를 지키기 위한 일이에요. 그러니까 걱정 마세요. 은수 씨. 걱정 마시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은수는 제현의 말을 곱씹었다. 현우의 부탁으로 자인 미술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인지 아무리 생각해도 종잡을 수 없었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는 두 사람이 시간차를 두고 카페를 따로 나가야 하고, 계획된 일이 끝날 때까지는 우연이라도 마주치지 않아야 한다고 당부했었다.

어떤 일이든 현우가 위험해지는 일만은 아니기를 바라며, 은수는 점점 집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집까지 한 블록이 남았을 때 검은 세단에서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내리는 것이 보였다. 둥그런 안경에도 뾰족한 인상이 가려지지 않는 남자가 저벅저벅 은수의 앞으로 다가섰다.

“서은수 씨?”

“……누구시죠?”

경계하는 은수의 눈앞에 남자가 명함을 내밀었다.

<자인 미술관

-비서실 권종욱 실장->

명함을 받아 든 은수의 두 손이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같이 가시죠. 관장님께서 뵙고자 하십니다.”

거절한다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여자가 부르면 은수는 그 앞에 가서 설 수밖에 없었다. 죄지은 사람처럼 한껏 쪼그라든 채로.

도망치려는 시도조차 의미 없었다. 표적의 공포를 감지한 사냥꾼처럼 점점 더 거칠게 목을 조여 오는. 아무 데도 없으면서 어디에나 있는 존재처럼 그 여자는 무시무시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막대한 자본과 권력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 그런 힘 앞에 은수는 늘 보잘것없는 약자였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세단 뒷자리에 올라타는 은수의 마음가짐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올 테면 와라.’

은수는 제 스스로가 믿기지 않을 만큼 침착했다. 무슨 말을 하든, 어떤 짓을 꾸미든 굽히지 않을 자신이 맨몸에서 솟아나는 것을 느꼈다. 말로 설명하기 힘든 에너지가 자기 안에 차오름에 벅찰 지경이었다.

***

자인 미술관의 관장실.

무거운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송정은 적당히 달라붙는 펜슬 스커트와 풍성한 프릴 장식이 달린 아이보리색 블라우스를 입고 조각처럼 앉아 있었다. 야하기는커녕 점잖고 기품 있는 차림이었지만 큰 키와 굴곡진 볼륨 때문에 오묘한 섹시함을 풍기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 서은수 씨.”

송정의 낭랑한 목소리가 팽팽한 공기를 갈랐다. 넓은 공간에 두 여자만 남긴 채 은수의 등 뒤로 문이 닫혔다.

“앉아.”

은수가 천천히 발을 떼고 소파로 다가왔다. 자신을 응시하는 송정의 시선을 침착하게 받아 내며 은수가 물었다.

“무슨 일로 보자고 하신 거죠?”

“몰라서 묻는 거야?”

송정이 커다란 책상 뒤에서 낮은 소파에 앉은 은수를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잘 아시다시피, 혁준 씨와는 완전히 끝났어요. 덕분에.”

은수의 말에 송정이 코웃음을 쳤다.

“여전히 엉큼하네, 서은수 씨.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게. 그게 서은수 씨 비법인가 봐?”

송정이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은수를 노려봤다. 숲 속에서 뱀을 마주친 것 같은 싸한 느낌 때문에 관자놀이까지 소름이 올라왔다.

“신현우 말이야.”

송정의 목소리로 현우의 이름이 발화되는 순간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더 이상 피할 데가 없었다. 정면으로 마주해야 할 때였다.

“사랑하는 사이예요. 신현우 씨와 저.”

송정이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서은수 씨가 말하는 사랑, 혁준이랑 했던 그 소꿉놀이 말하는 건가?”

또각또각 송정이 천천히 다가와 은수 앞에 섰다. 뱀의 비늘이 몸에 닿듯 몸서리쳐지는 감각에 은수는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안 돼. 이대로 무너질 수 없어. 다시는 너 같은 악마한테 내 소중한 사람을 뺏기지 않을 거야. 네가 나를 죽인다고 해도…….’

송정이 긴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은수의 뺨을 훑었다. 그 손아귀에 턱이 잡힌 채로 은수의 고개가 젖혀졌다. 거미처럼 기다란 손가락들이 은수의 몸을 옥죌수록 그녀는 도리어 점점 더 고요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이 선명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여자는 나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나를 살릴 수도, 죽일 수도 없다.’

“참 신기해. 대체 매력이 뭘까? 신현우가 대체 너한테서 뭘 본 거지? 너처럼 아무것도 아닌 여자한테서.”

송정의 독침 같은 말이 공중에 흩어졌다. 어떤 말도 은수의 마음에 닿지 못했다. 송정이 불현듯 은수의 턱을 팽개치며 말을 이었다. 뺨이라도 맞은 것처럼 은수의 고개가 한쪽으로 휙 돌아갔다.

“근데 그러면 뭐해. 어차피 너덜너덜해져서 버림받을 걸.”

송정이 은수의 앞자리에 마주 앉으며 그녀를 똑바로 바라봤다. 은수는 흐트러진 옆머리를 정리하고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송정을 마주 봤다.

그녀 앞의 송정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다른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악의를 품는다면 그 어떤 추악한 일도 서슴없이 할 수 있는 여자.

그러나 그런 송정을 대하는 은수는 달라져 있었다.

“어쩌면, 하나도 변한 게 없으시네요.”

처음 듣는 은수의 안타깝다는 말투에 송정은 등을 칼날처럼 꼿꼿이 세웠다. 날개를 짓이겨 다시 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나비가 망가진 날개로 날아오르는 모습이라도 본 것처럼, 예상치 못한 자극에 송정은 당황한 것 같았다. 애써 평정심을 되찾으려는 것 같았지만 일그러진 입술과 한층 표독스러워진 말투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평온한 상태로 자신의 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은 은수 쪽이라는 사실을.

“신현우 같은 남자, 내가 잘 알아. 늘 비싸고 귀한 것만 보다가 너 같은 싸구려를 봤으니, 신기하고 재밌었겠지. 입 발린 뻔한 말로 조금만 구슬려도 가랑이 벌렸을 거고, 손쉽게 가지고 놀다가 내버리기 딱 좋으니까.”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오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하, 내뱉는 숨과 함께 짧게 웃음 짓는 순간 송정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쏘아붙였다.

“지금 웃었어?”

눈썹과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억지로 분을 삼키는 송정을 앞에 두고 은수는 어느새 고개를 젖히며 웃고 있었다. 은수의 초연한 듯 해맑은 웃음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절벽 같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한참을 웃어 젖히던 은수가 천천히 목을 가다듬고 똑바로 송정을 응시했다.

“어떻게 그렇게 남자에 대해서 잘 아세요?”

“뭐라고?”

송정이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되물었다. 기품과 고상은 어느새 그 얼굴에서 찾아볼 수 없게 돼 있었다. 시장 바닥에 널부러진 생선 잔해처럼 더럽고 비린내가 날 것 같은 표정이었다.

“혁준 씨하고 만날 때도 그렇게 똑같이 말씀하셨던 거 아세요?”

“너 미쳤니?”

은수는 씩씩거리는 송정에게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한 적 있어요?”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이 송정이 입을 벌린 채 은수를 바라봤다.

“아니, 한 번이라도 누군가를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한 적 있어요? 돈을 주고 사든, 남에게서 빼앗든, 갖고 싶으면 어떻게든 손에 넣었다가 지루해지면 버리는 물건이 아니에요, 사람은.”

“너 지금 나 가르치니?”

은수는 거침없이 말을 이었다.

“당신처럼 다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모르겠죠. 아마 평생 모를 거예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부족한 게 없을수록 더 가져야만 하겠죠. 그래야만 당신의 욕망을 채울 수 있을 테니까. 근데 말이죠.”

은수의 두 눈은 확신에 차 있었다.

“사랑은 그런 게 아니에요. 상대방의 부족함을, 그리고 나 자신의 부족함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사랑이에요. 완벽하고 잘나서 갖고 싶은 게 아니라 유리처럼 약하고 부서질 것 같아서 지켜 주고 싶은 게 내가 말하는 사랑이에요. 혁준 씨도 그랬고, 현우 씨도 그렇죠.”

송정은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손에 잡히지 않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 듯했지만, 은수는 머리로 이해할 수 있는 말을 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 송정은 어렴풋하게나마 그걸 느끼고 있었고, 이대로는 은수를 제어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서로의 나약함을 끌어안고 서로를 구원하는 게 내가 말하는 사랑이에요. 그렇게 구원받고 나면, 그 사람이 내 시야에 머물지 않아서 볼 수 없을 때도, 내 손 안에 붙잡고 내 맘대로 흔들지 못하더라도, 그리고 설령 헤어지게 되더라도 상관없게 돼요. 온 힘을 다해서 서로의 존재를 끌어안고 난 후에 서로에게 주어진 시간과 인연이 다했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송정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허공만 응시하고 있었다.

“신현우 씨와 언젠가 헤어질 수도 있겠죠. 그렇다고 하더라도 당신 때문은 아닐 거예요. 당신이 하는 모든 말에 불에 덴 듯 상처받았을 때가 있었어요. 지금은 아니에요.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신현우 씨 덕분에. 내 존재가 누군가로부터 이토록 무한한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걸 알기 전과 그 후의 나는 전혀 같을 수 없으니까. 한 번이라도, 이런 감정 느껴 본 적 있어요? 나도 전엔 당신과 같았어요. 갖지 못한 것을 끊임없이 원하고, 또 원하고, 욕심내고, 탐하고……. 끝이 없었죠. 이제 난,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괜찮아요. 현우 씨로 인해서 천국을 맛봤으니까. 죽으면 내가 갈 곳이 그 어디라 해도 나는 지금 이미 천국에 와 있는 셈이니까.”

은수가 말을 끝맺고 차분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은수의 등 뒤로 송정의 차가운 일갈이 꽂혔다.

“내가 재밌는 시나리오 하나 들려줄게.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나가는 대형 톱스타가 어느 날 술에 취해서 기억을 잃어. 다음 날 아침에 모르는 여자가 옆에 누워 있고, 이 여자가 톱스타한테 성폭행을 당했다고 고소를 하지. 남자는 당연히 아무것도 기억을 못 하고 언론은 난리가 나. 경찰서와 법원에 들락거리는 동안, 광고는 끊기고 예정됐던 작품도 줄줄이 취소되겠지. 증거가 없어서 남자가 무혐의로 풀려나고 여자를 무고죄로 고소하는 걸로 일이 마무리돼도 남자는 이미 회생 불가로 추락한 뒤야. 어렵사리 재기한다고 해도 예전만 할 수 있을까? 어때, 그럴싸하지? 너 우리 혁준이 망쳐 놨던 것처럼 신현우도 망가뜨리고 싶니? 너의 그 잘난 천국이 천장부터 무너지는 꼴을 보고도, 그런 꼴 같지 않은 말 지껄일 수 있을 것 같아?”

송정의 말이 끝날 때까지 돌처럼 굳은 채로 문 앞에 멈춰 서 있던 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문을 열고 나갔다.

***

은수는 현우의 집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기다리는 한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질 만큼 초조하게. 송정 앞에서 무너지지 않으려 사력을 다하느라 진이 빠져 있었다.

얼마 후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고 현우가 들어왔을 때, 은수는 문 앞으로 뛰쳐나가 그를 세차게 끌어안았다.

“서은수…….”

“현우 씨. 우리 도망가자.”

“무슨 말이야, 갑자기. 왜 그래, 서은수.”

그를 올려다보는 은수의 눈가가 촉촉해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어?”

은수는 송정을 자극한 것을 혹독하게 후회하고 있었다.

“현우 씨. 그 여자가, 송정이 현우 씨 다치게 할지도 몰라……. 내가 오늘 그 여자를 도발했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현우 씨가 다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 미칠 것 같아. 제발 우리 도망 가자. 지방이든 외국이든, 우리 갈 수 있는 곳으로 도망가자.”

현우는 먹먹한 눈으로 은수를 내려다봤다. 애틋한 그 눈동자에 담긴 알 수 없는 자신감에 은수는 혼란스러웠다. 그의 따뜻한 눈은 담담하고 흔들림이 없었다. 송정이 꾸미는 일이 뭐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앞으로 밀고 나아가겠다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현우 씨?”

“그래, 가자.”

그가 한 손으로 은수의 허리를 감싸고, 다른 한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 주며 말했다.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고 소중한 손길이었다.

“응?”

예상치 못한 답변을 들은 것처럼 당황하는 은수를 향해 현우가 다시 말했다.

“가자, 도망. 지금 갈 거야. 짐 챙겨.”

구체적인 자초지종도 묻지 않고, 그녀가 왜 이렇게 다급한지도 묻지 않은 채 현우는 그저 태연하게 은수를 내려다보았다. 은수는 그런 현우가 한편으론 의아하면서도, 그를 믿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의 계획이 무엇이든, 그를 따라가기로 마음먹고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간단한 짐을 챙겨 차를 타고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창문을 열자 시원한 여름밤 공기가 흩어지듯 차 안으로 스며들었다.

현우는 마음속에 정해 둔 목적지가 있는 듯 핸들을 잡은 손길에 거침이 없었다. 은수는 어디로 갈 예정인지, 도착하려면 얼마나 걸리는지 묻지 않고 그저 바람에 온 얼굴을 맡기고 있었다. 얼굴에 맞닿는 바람결에 한낮의 피로가 씻기는 기분이었다. 그러면서 묘하게 노곤해졌다.

“피곤할 텐데 좀 자.”

눈을 감고 있는 은수를 곁눈질하며 현우가 말했다.

“……응. 조금만 잘게.”

등받이를 살짝 뒤로 기울인 후 은수는 눈을 감았다. 감은 눈꺼풀 위로 지나가는 풍경들을 상상했다. 서울의 야경이 지나가고, 드문드문 불빛이 비추는 외곽의 들판과 그 후로는 어둠에 잠긴 산의 능선이, 하늘과 경계를 이룬 모습이 눈에 선했다.

목적지를 모른 채 현우가 이끄는 길로 몸을 맡긴 채 눈을 감고 있는 지금, 그녀는 생각했다. 죽기 전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면 바로 이 장면일 것이라고.

얼마나 오래 잠이 들어 있었는지 모를 정도로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났을 땐 귓가에 파도소리가 들렸다. 현우는 운전석의 차 문을 활짝 열어 놓은 채 보닛에 기대어 서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의 넓은 등이 은수의 시야에 들어왔다. 은수는 현우가 덮어 주었을 담요를 걷어 내고 밖으로 나가 현우의 옆에 나란히 섰다. 어깨에 가만히 머리를 기대어 오는 은수에게 그가 말했다.

“잘 잤어?”

“응. 여기 어디예요?”

“천국.”

현우가 낮게 웃으며 말했다. 은수가 그의 손에 깍지를 끼며 나란히 웃었다.

깊은 밤. 여름밤은 높아 무수한 별들이 쏟아질 것 같았다. 서울에서 많이 멀어지지 않은 것 같은데, 요즘도 이렇게 많은 별을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니. 은수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대로 죽었으면 좋겠다. 영원히 천국에 머물게.”

“죽긴 왜 죽어. 여기 내가 잘 아는 민박집도 있고, 맛있는 식당도 많아. 여기서 살자. 나는 고기 잡고, 너는 애기 낳아 기르고.”

“애기?”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우를 올려다봤다.

“응, 애기. 나 아가들 엄청 좋아해. 아가들도 나 좋아하고. 낳아 주기만 하면 내가 다 키워 줄 수도 있어.”

“고기 잡는다며.”

“음, 그럼 넌 낳기만 해. 낳고 나서 밖에 나가서 네가 고기 잡아. 애는 내가 키울게.”

은수의 웃음소리가 고요한 바닷가에 울렸다. 강원도의 어디쯤일까, 서울보다 약간 쌀쌀한 밤공기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자갈이 깔린 해변은 소담했다. 파도가 밀려들어 오고 다시 먼 곳을 향해 빠져나갈 때, 자그마한 자갈들이 물에 쓸리는 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헤드라이트가 비추는 정면을 제외하고 주위에 불빛이라곤 없었다. 사방이 조용하고 어두운 가운데 헤드라이트를 등진 두 사람의 그림자만이, 두 사람의 목소리만이 온 우주를 채운 것 같았다.

“여기, 잘 아는 곳이에요?”

“종종 오던 곳이야. 혼자 있고 싶을 때. 이삼 년 전에 너무 지치고 힘들었을 때가 있었는데, 서울에서 빠져나와서 무작정 아무데로나 차를 몰다가 우연히 발견했어.”

멀리 캄캄한 수평선을 응시하는 현우의 두 눈이 등대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데려와줘서 고마워. 소중한 곳에.”

현우가 은수를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얌전한 키스가 끝나고 그가 말했다.

“이제 너 없는 나는 상상할 수 없어. 어디에 있든, 뭘 하든 너와 함께할 거야. 너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도, 나는 너와 함께 있는 것 같아.”

귀를 씻어 주는 파도 소리를 배경으로 현우의 목소리가 청량하게 울렸다. 밤바다처럼 깊은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은수는 묻어 두었던 불안이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이 평화로운 행복을 놓치게 될까 봐 그녀 안의 불안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현우 씨, 송정 그 여자가…….”

“그 여자 얘기는 하지 말자. 여기 있는 동안은.”

현우가 단호하게 은수의 말을 잘랐다. 그러면서 은수의 등을 떠밀어 조수석에 태우고 다시 차를 몰기 시작했다.

***

해변을 빠져나오니 자그마한 마을 입구가 나왔다. 낮은 담장과 알록달록한 지붕을 몇 개 지나친 후 현우가 차를 세운 곳은 전형적인 바닷가 마을의 시골집이었다. 일반 가정집에 민박이라는 간판만 내건 모양이었다.

“할머니, 저 왔어요!”

현우가 안을 향해 소리쳤다. 불투명한 유리 덧문 안에서 불이 켜지더니, 이내 등이 구부정한 할머니 한 분이 나오셨다.

“꺽다리 총각 왔는가? 한밤에 차 소리가 자네인가 싶더라니…….”

자다 깨신 모양인지 눈을 비비면서도 할머니는 현우를 향해 웃고 있었다. 할머니는 현우 옆의 은수를 발견하고는 더 반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구야, 총각! 드디어 색시를 데리고 왔네. 내가 말했지? 곧 좋은 색시 만날 거라구.”

현우가 웃으며 은수의 등을 밀며 할머니 가까이로 다가갔다. 은수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드리니, 민박집 할머니가 은수의 등을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색시, 예쁘기도 하네. 어디서 이렇게 예쁜 색시를 구했대? 꺽다리 능력도 좋네. 어떻게, 밥은 먹었어?”

“아뇨, 할머니 저희 배고파요. 밥 주세요.”

“그래, 내가 안 그래도 진적에 항구 나가서 오징어 사다가 오징어 뭇국 맛있게 끓여 놨구만. 금세 데워 줄 테니까 들어가 쉬고 있어.”

할머니가 두 사람의 등을 집 한쪽의 문 앞으로 떠밀고 있었다. 할머니가 천장이 낮은 자그마한 방으로 들어온 두 사람을 잠시 살피고 방문을 닫고 나가자 다시 사위가 고요해졌다. 이렇게 작고 낯선 공간에 갇히듯 둘만 있는 것은 처음인지라 현우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은수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먼저 입을 열었다.

“꺽다리?”

“어어……. 할머니 내가 누군지 모르셔. TV에서 본 적 없냐고 여쭤보니까 한 번도 본 적 없으시대. 그나마도 9시면 끄고 주무셔서, 내가 나오는 드라마는 아마 진짜 못 보셨을 거야.”

현우가 민망해하며 말을 길게 늘였다. 은수가 웃음을 멈추지 않고 다시 물었다.

“할머니 잠귀 어두우셨으면 좋겠다.”

“……응? 왜?”

현우가 묻자, 잠시 뜸을 들이던 은수가 눈썹 끝을 살짝 올리며 말했다.

“오늘 밤에 현우 씨 막 물고 빨고 싶어서.”

은수의 말에 현우의 귀가 순식간에 빨갛게 달아올랐다.

“왜 그래, 왜 그렇게 부끄러워해. 갑자기?”

은수가 장난스런 미소를 거두지 않은 채 현우를 향해 다가왔다.

“왜 그러는 데, 싫어? 그냥 손만 잡고 잘까?”

현우가 제 팔을 툭툭 치며 거리를 좁혀 오는 은수를 피해 뒷걸음질 치며 눈을 피했다. 몇 걸음 못 가 벽에 등을 부딪치고 말자, 현우가 그만하라는 듯 투정을 부리며 은수의 손을 낚아챘다.

“에잇 정말, 조그만 게 까불어.”

현우의 강한 손에 두 팔을 붙들린 은수가 가만히 현우를 올려다봤다. 두 사람이 입술을 포개려는 순간이었다.

“엣헴.”

방문이 열리고 바닥에 내려놓은 상을 들어 올려 방 안으로 들이려는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현우가 다급하게 은수를 밀어내고 할머니 손에서 상을 받아 들었다.

“차린 건 없지만 맛있게들 들어. 나는 이제 잘라니까 먹고들 해, 먹고들. 든든히 먹어야 힘도 나니께. 여기가 아주 터가 좋아. 아들 들어서는 터여, 여기가.”

할머니가 뒷짐을 지고 나가며 하는 말에 현우는 사래가 걸린 듯 헛기침을 해 댔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진 은수가 밥상을 앞에 두고 한참을 깔깔댔다.

얼마 후 삼삼하고 정갈한 시골 밥상을 맛있게 먹고 나서 상을 물리자 어느새 새벽 한 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얇은 이불을 덮고 현우와 나란히 누운 은수는 자그마한 창으로 들어오는 달빛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디선가 풀벌레 소리도 들려왔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이 거짓말처럼 오래전 같았다. 정말 이대로 영원히, 둘만 있을 수 있는 곳에 머물 수 있다면…….

“……은수야, 자?”

“아니.”

은수가 현우를 향해 돌아누우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일 서울 가면 많은 게 달라져 있을 거야.”

은수는 현우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현우는 일어나려는 은수를 잡아끌어 제 품 안에 안았다.

“나 믿지?”

은수가 현우의 가슴에 얼굴을 댄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단한 가슴 안에서 그의 심장이 차분히 뛰고 있었다. 어떤 동요나 긴장도 없는, 은수의 심장까지 침착하게 가라앉히는 완벽한 박동이었다.

두근두근. 그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은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다음 날 아침, 두 사람은 일어나자마자 할머니가 차려 준 아침을 든든히 먹고, 서울로 향하는 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아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좁은 길을 빠져나오자마자 현우는 핸들을 왼손에 맡기고, 오른손으로 은수의 손을 찾아들었다. 송정을 만나고 나서 은수를 잠식했던 불안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왜인지 모르게 서울로 향하는 마음에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다. 하늘은 푸르게 높았고 구름 한 점 없었다. 현우가 라디오를 켰다. 채널을 찾아 이리저리 돌리던 현우가 뉴스에 다이얼을 고정시켰다.

-네, 속봅니다. 오늘 아침 한성그룹 차녀인 자인 미술관 송정 관장이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입건됐습니다.

은수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그런 은수를 잠시 살피고 다시 앞을 주시했다. 괜찮다는 듯이 마주 잡은 손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었다가 다시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더 꽉 잡았다.

-내부 고발자에 의해 밝혀진 사실에 따르면 자인 미술관은 설립부터 한성그룹의 비자금 조성과 돈세탁을 목적으로 치밀하게 설계됐습니다. 관련 증거가 이미 검찰에 넘어갔고 상당 부분 혐의가 입증된 상황에서, 송정 관장과 한성그룹이 구속 수사를 피해 가긴 어려울 것으로 보입니다.

현우는 가만히 볼륨을 줄이고 은수에게 말했다.

“제현이라고, 은수 너도 알 거야. 내부 고발자라는 사람 내 친구, 김제현이야. 처음부터 그럴 목적으로 자인 미술관에 입사했어. 너와 그 여자가 그렇게 얽혀 있는 걸 알고부터, 미술관에 대해 뭔가 알아내면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어. 나와 친구 사이라는 건 철저하게 숨기고 미술관에 대해서 알아봐 달라고 제현이한테 부탁했었어. 이렇게 빨리 일이 해결될 줄은 나도 몰랐는데, 이제 그 여자가 너와 나 괴롭히는 일 더 이상 없을 거야.”

은수는 앞을 바라보며 눈물만 흘리고 있었다. 지난 세월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하나가 된 것처럼 마주 잡은 두 손을 들어 눈을 꾹 눌러 봐도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막을 수가 없었다.

“서울 가면 결혼하자, 서은수.”

쏟아지는 아침 햇살과 눈물 때문에 앞을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물기와 빛만 가득한 흐린 시야 속에 어느 밤, 파리의 추운 겨울 다리 위에서 그녀에게 다가왔던 커다란 한 남자가 떠올랐다.

화려한 불빛처럼 찬란하게 다가왔던 그 남자.

까만 머리칼이 눈꽃처럼 빛나고, 커다란 그림자가 센강을 온통 덮을 것 같았던 사람.

이 미친 세상에 태어나고, 숨 쉬고, 살아 있는 것 자체가 고역이라고 생각했었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일이 죄처럼 여겨졌기에 나 자신을 사랑하는 건 꿈조차 꾸지 못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겼었다.

나 자신이 나 자신이어도 된다고 믿게 해 준 단 한 사람.

암흑 속에서 나를 건져 낸 나의 구원자.

은수는 그의 커다란 손에 입을 맞추며 흐르는 눈물 사이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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