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장. (6/9)

5장.

서초동 BJ엔터테인먼트 신사옥의 유리 외관이 초여름 늦은 오후의 햇살을 으리으리하게 반사하고 있었다.

은수는 BJ 강인태 대표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무실에 앉아 있었다. 강 대표의 비서가 건넨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막 들이켰을 때였다.

“우리 서은수 MC님 덕분에 행사 아주 잘 치렀습니다. 고마워요.”

강 대표가 커피를 권하며 시원하게 웃었다. 50대 후반임에도 그의 외모는 상당히 동안에 스타일도 세련됐다. 업계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 특유의 자신감이 넘치는 태도도 그의 아우라를 만드는 데 한몫했다.

“별말씀을요. 대표님 능력이 워낙 출중하셔서죠. 행사 잘 끝나신 것 축하드립니다.”

“아니에요, 서 MC님처럼 젊고 능력 있는 분을 왜 이제야 만나게 됐는지 아까울 정도로, 정말 훌륭하십니다. 한국대 나오셨다죠?”

출신 대학 이야기가 나오자 은수가 눈을 내리깔며 잔잔히 웃었다. 명문대를 나온 사실은 되도록 먼저 말하지 않고, 이야기가 나오더라도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사회생활을 하면서 터득한 비법이라면 비법이었다.

입 발린 말로 강 대표에게 굽실대고 싶진 않았지만, 은수는 진심으로 강 대표를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말단 매니저로 시작해 40대에 자기 회사를 차리고 50대에는 업계 최고가 된 사람. 경쟁 회사에서 잠재력 있는 프로듀서를 스카우트해 아이돌 프로듀싱만을 전적으로 맡김으로써 배우 몇 명으로 돌아가던 작은 회사를 크게 키운 게 신의 한 수였다. 이제는 TV, 스크린, 공연까지 강 대표의 손이 닿지 않는 영역이 거의 없었다.

“영어는 어디에서 공부하셨어요? 제가 요즘 영어에 부쩍 관심이 많습니다.”

강 대표가 은수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아, 따로 영어권에 나가서 공부하진 않았고, 제가 사실 불어 전공이라서요. 프랑스에는 잠깐 교환 학생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아이구. 대단하시네요, 정말. 언어도 재능처럼 타고나는가 봐요.”

“과찬이세요. 감사합니다.”

훈훈한 분위기가 즐거웠다. 강 대표처럼 힘 있는 사람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큰 행운이었다. 애정이 담긴 눈으로 은수를 살피던 강 대표가 소파 옆 테이블에 놓여 있던 상자를 내밀었다.

“혹시 와인 좋아하시나?”

갑작스런 선물에 은수가 눈을 크게 뜨며 강 대표를 바라봤다. 그는 조카와 친해지고 싶은 삼촌처럼 서글서글하게 웃고 있었다.

“아, 대표님. 이런 건…….”

“가져가요. 좋은 날, 좋은 사람들이랑 드셔요.”

“저 페이도 많이 받았는데요.”

“내가 정말 감명 받아서 드리는 거니까 사양 마세요. 내가 연예기획사 대표잖아요. 재능 있는 사람들을 보면 그저 아끼고 싶고, 뭐든 다 주고 싶고 그래요. 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 봅시다.”

손사래를 치던 은수가 조심스레 와인 상자를 받아 들었을 때였다.

노크도 없이 벌컥, 집무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깜짝 놀란 은수와 강 대표의 고개가 함께 돌아갔다.

“신현우, 너…….”

강 대표의 얼굴이 굳어지며 목소리에 약간의 분노가 묻어났다. 어제 행사에서 대본에 없던 돌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것을 질책하려고 직접 집무실로 불렀던 것을 깜빡하고 있었다. 싹싹 빌어도 모자랄 판에 손님이 와 계신데 이렇게 불쑥 얼굴을 들이밀다니. 좀 전의 온화한 미소는 걷히고 강 대표의 얼굴이 금세 붉으락푸르락했다.

‘저거 저 잘난 놈. 잘생기지만 않았어도, 휴…….’

작품 선택에 있어서도 고집이 세고 언제나 자기만의 주관이 확실한 현우였기에 평소에도 약간의 마찰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한 건 용납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티셔츠에 청바지만 걸치고 껄렁한 표정으로 문 앞에 서 있는 그의 얼굴만 봐도 이미 반쯤은 용서가 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늦은 오후의 햇살을 받아 현우의 얼굴이 말갛게 빛나고 있었다. 마치 빛이 그의 얼굴만 따라다니기라도 하듯.

“뭐 해, 왔으면 앉지.”

강 대표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우가 당당한 기세로 걸어와 은수의 앞자리에 앉았다.

“인사해. 이쪽은 서은수 씨. 어제 우리 행사 사회 봐 주신 MC님이셔. 행사 때 보셨으려나?”

강 대표가 은수와 현우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 두 사람 사이의 묘한 기류는 알아채지 못한 듯했다.

“이쪽은 제 애물단지.”

강 대표가 현우를 소개하며 멋쩍게 웃었다. 은수는 와인 상자 포장만 만지작거리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울면서 자기를 받아 달라고 고백하던 어제의 현우와는 다른 사람이 앉아 있는 듯했다. 현우는 깍지 낀 손을 명치 위에 올리고, 소파에 등을 기댄 채 딴청을 부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은수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처음 보는 사람 대하는 듯 어색한 태도에 현우가 은수를 마주 바라보았다. 햇살이 스며드는 검은 눈동자. 은수의 숨이 턱, 하고 막혀 왔다. 현우가 고개만 까딱하고 강 대표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화로 하시지. 왜 바쁜 사람 불러내고 그러세요.”

당장이라도 악다구니를 부리고 싶었지만, 은수 앞이라 그러지 못하고 강 대표는 속만 부글부글 끓였다. 은수는 눈치를 보다가 강 대표에게 말했다.

“저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대표님 오늘 감사합니다.”

“아니, 저 그…… 내가 식사라도 대접해야 하는데. 단둘이 먹는 건 은수 씨가 부담스러울 테니까 언제 우리 행사팀하고 저녁 같이 해요.”

강 대표가 허겁지겁 일어나며 은수를 챙겼다. 턱에 손을 괴고 퉁명스럽게 앉아 있던 현우가 눈동자만 굴려 두 사람의 모습을 빤히 주시하고 있었다.

“사실 오늘 이형진 팀장님이 행사팀 회식에 불러 주셔서요. 대표님도 같이 오시는 줄 알았는데, 아니셨나 보네요.”

“아, 이 팀장 이 녀석, 알아서 잘 챙겼구만. 대표가 눈치 없이 그런 자리끼면 큰일 나죠. 바쁘신 분 오라 가라 하는 게 아닌가 신경 쓰였는데, 겸사겸사 이쪽으로 오실 일이 있으셨네요.”

“네, 팀장님이 워낙 잘 챙겨 주셔서 행사팀 분들하고도 금방 친해졌고, 사회도 수월하게 잘 볼 수 있었어요.”

“그래, 그래요. 잘됐네요. 이제 은수 씨는 BJ에 코가 꿰인 겁니다.”

강 대표가 호탕하게 웃어 제치며 은수를 배웅했다.

“예, 예, 가세요.”

집무실 문을 닫고 자리에 돌아온 강 대표의 얼굴은 다시 싸늘해져 있었다.

“후…….”

강 대표가 숨을 고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잘못했어요.”

“……잉?”

강 대표가 못 볼 것을 봤다는 듯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현우를 바라봤다. 신현우 입에서 잘못했다는 말이 나오다니.

“중요한 행사 자리인데, 제가 경솔했어요.”

담담하게 말했지만 허투루 하는 말은 아닌듯했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현우에게 더 따져 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지나간 일을 돌아보고 후회하는 성격도 아니었기에, 강 대표는 침착해지기로 했다. 더구나 신현우가 아닌가. BJ에서 제일 값나가는 보석이자 원석.

강 대표는 현우가 한국에 있기 아까운 인재라는 점을 진작 알아보았다. 그의 외모는 물론이고 연기에 대한 열정과 괴물처럼 발전하는 연기력은 한국과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뻗어 나가기 충분했다. 언젠가 현우를 앞세우고 칸의 레드카펫을 밟는 것을 상상하곤 했다. 이런 사소한 일로 내 배우의 컨디션을 흐트러뜨리지 말자. 자고로 배우란 그런 존재가 아니겠는가. 충동적이고 즉흥적이고 쉽게 사랑에 빠지고. 그렇게 순간 몰입할 수 있어야 진정한 배우라고 강 대표는 생각했다.

“영어 공부는 잘하고 있냐?”

“저 영어 잘해요. 대표님.”

“하우 알 유, 아임 파인 땡큐, 같은 생활 영어 말고 이 녀석아.”

현우가 피식하며 강 대표를 흘겨봤다. 할리우드 진출은 현우의 꿈이자 강 대표의 숙원 사업이었다. 아이돌로 활동하던 현우에게 처음 연기를 제안한 것도 당시에는 다른 회사 대표였던 강 대표였다. 우연히 함께 한 술자리에서 무대 위 노랫말을 표현하는 현우의 표정 연기가 인상적이라며 용기를 주었었다. 그 뒤로 드라마를 몇 편, 강 대표의 회사로 옮기고 나서는 영화까지 연기는 현우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열어 주었다. 대본을 읽고 캐릭터를 분석하고 전혀 다른 사람이 돼 카메라 앞에 서는 일 자체에 희열을 느꼈다.

“영어로 대본 연습도 하고, 오디션 준비도 하고 있냐고.”

“해야죠, 이제. 그동안 드라마 때문에 바빴잖아요. 시간이 없었어요.”

잠시 생각에 잠긴 강 대표의 뇌리에 은수가 스쳐 지나갔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기 막히는 사업 아이디어가 생각났다는 듯이 강 대표가 현우 쪽으로 몸을 숙이며 눈을 반짝였다.

“방금 다녀간 서은수 MC 말이야. 너 영어 배워 볼래?”

현우가 당황해 코웃음을 쳤다.

“갑자기 무슨 말이에요, 그게?”

“아니, 한국대 나오신 분이라고. 영어 기깔나게 해. 배워 봐, 영어. 나는 네가 그렇게 영어 했으면 좋겠어. 고급스럽고 우아하게.”

한번 꽂힌 생각은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강 대표였다. 현우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라도 은수와 만날 핑계를 만들 수 있다면. 어색하고 힘들겠지만, 그렇게라도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

“자,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청담동 미소락의 다인실에 흥이 넘쳤다. 은수에게 BJ 행사팀 사람들은 이제 제 식구처럼 친밀했다. 큰 행사를 같이 치르고 나면 끈끈해지는 무언가가 있었다. 비록 같은 회사 소속은 아니더라도 은수는 2주 전부터는 행사팀 회의에 꼬박꼬박 함께 참여하며 책임감을 갖고 일했다. 행사 총괄책임자인 이형진 팀장이 은수를 치켜세우며 건배를 권했다.

“서 MC님, 진짜 고마워요. 보통 MC들 당일 아침에 뿅 나타나서 리허설 한 번 하고 주는 대본 읽고 가는 게 다인데, 서 MC님은 회의마다 와서 시나리오 작성에, 번역에, 행사 아이디어까지 도와주시고……. 자, 우리 서 MC님한테 박수!”

일곱 명 남짓한 행사팀 스태프들이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하얗게 불태운 행사가 잘 끝난 덕에 다들 신이 나 있었다.

“다들 고생 많으셨어요. 저는 잠깐 나타나서 노는 손만 조금 보탠 거지, 진짜 고생은 행사팀원들이 다 하셨죠. 밤도 많이 새셨죠?”

안타까움을 눈빛에 담아 스태프들을 두루 둘러보는 은수의 말에 몇몇이 우는 시늉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행사 많이 하긴 했어도 대부분 팬미팅이나 사인회 정도가 다지, 이렇게 큰 글로벌 행사는 처음이었거든요. 외주 안 주고 나름대로 해 보자 해서 한 건데, 이렇게 품이 많이 들 줄은 몰랐네요. 서 MC님이 자문위원 역할 잘 해 주셔서 무사히 끝났습니다.”

“그래요, MC님 명예 BJ 직원 하세요.”

형진이 내미는 잔에 은수가 수줍게 웃으며 제 잔을 부딪혀 주었다. 은수에게도 모처럼 일하는 기쁨을 느끼게 해 준 프로젝트였다. 복잡한 생각은 잠시 잊고 오늘을 즐기기로 한 참이었다.

-드르륵.

그때 미닫이문이 열리며 누군가 얼굴을 내밀었다.

“어, 왔어?”

형진이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더 올 사람이 있었나, 생각하며 고개를 돌린 은수의 눈에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현우가 행사팀 스태프들과 반갑게 인사하며 자연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형진이 은수를 보며 양해를 구했다.

“현우가 오랜만에 오늘 회사 나왔다 길래 밥 같이 먹으려고 불렀어요. 저희 다 친한 사이거든요. 괜찮을까요?”

“형진님이랑 둘이 절친이에요. 고등학교 동창.”

눈치 빠른 오 대리가 은수에게 설명해 주며 형진을 거들었다. 은수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현우의 등장을 반기는 듯했다.

“네, 그럼요. 아까 뵙고 또 뵙네요.”

은수가 가볍게 목례하며 현우에게 말했다.

“뭐야, 이미 만났어요?”

궁금해하는 형진에게 빈 잔을 내밀며 현우가 강 대표 사무실에서 우연히 만났다고 답했다.

“대표님이 오늘 부르셨구나. 대표님이 은수 씨 칭찬을 그렇게 하더라고. 예쁘고 똑똑한데 성격도 좋다고. 며느리 삼고 싶다고 노래를, 노래를 부르셔 가지고…….”

“대표님 아들 고3 아니야?”

“대표님은 맘에 드는 사람 있으면 꼭 그렇게 사무실에 부른다?”

“신사옥 자랑하시고 싶은 거지.”

대표님이 선물로 주셨다며 오늘 받은 와인을 꺼낸 은수 덕분에 분위기가 더 후끈 달아올랐다. 지글거리는 와규와 함께 프랑스산 고급 와인에 모두의 얼굴이 금세 불콰해졌다. 몇몇은 강 대표가 선물한 와인이 얼마짜리냐며 검색을 하고 있었고, 몇몇은 모자란 안주를 더 시키자며 메뉴판을 보고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형진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은수의 시야에 그의 옆에 앉은 현우가 걸렸다.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않아도, 말없이 와인만 들이켜며 잠자코 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있는 현우를 느낄 수 있었다.

“서 MC님, 남자 친구 있어요?”

형진의 갑작스런 물음에 은수가 바로 답을 못하고 잠시 망설였다.

“아, 이런 거 물어보면 실롄가? 만약에 없으시면 소개하고 싶은 사람 있어서요.”

형진의 말에 현우가 반응하는 게 느껴진 건 은수의 착각이었을까.

“아니요, 없어요.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해 주세요.”

“아, 정말요? 잘됐다! 요즘 외롭다고 하는 회계사 친구가 한 명 있거든요. 제현이 사진이…… 잠시만요.”

형진이 핸드폰을 뒤적이는 걸 현우가 빤히 지켜보다가 갑자기 끼어들었다.

“김제현? 걔는 안 돼.”

형진이 얼빠진 표정으로 현우를 바라봤다.

“신현우 네가 뭔데, 안 된대. 제현이가 어때서?”

“아무튼 안 돼.”

“……뭐래.”

뜬금없이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며 술을 들이켜는 현우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졌던 형진이 기어코 제현의 사진을 골라 은수 앞에 들이밀었다.

“어때요, 괜찮죠? 우리 셋 중에 공부 제일 잘했어요. 전교 1, 2등.”

현우와 함께 셋이 고등학교 때부터 절친이었다며 옛날 사진을 찾기 시작한 형진의 핸드폰을 빼앗아 테이블 위에 탁 놓으며, 현우가 말했다.

“서은수 씨는 그런 스타일 안 좋아해.”

“이 새끼가 뭐래 진짜? 그리고 네가 은수 씨 언제 봤다고, 은수 씨가 어떤 스타일 좋아하는지 어떻게 알아?”

따지는 형진을 무시하며 현우는 은수를 똑바로 바라봤다. 마주 바라보는 은수의 눈빛에 제발 거기까지만 하라는 간청이 담겨 있었다.

“서은수 씨는 섹시한 스타일 좋아해.”

“풉!”

형진이 뿜을 뻔했던 물을 겨우 삼키며 웃음을 터뜨렸다. 순식간에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현우에게로 집중됐다.

“어떻게 섹시한 스타일? 신현우 너처럼 섹시한 스타일?”

“섹시하면 신현우지. 퇴폐미의 대명사.”

“맞아, 맞아! BJ의 섹시 다이너마이트.”

현우를 놀리는 형진을 거들어 행사팀 식구들도 신이 났다. 모두 격의 없이 친해 보였고 즐거워했지만 은수와 현우, 두 사람만이 어색한 기류에 휩싸여 있었다. 다행히 모두들 적당히 취한 터라 그런 기색을 눈치 채진 못하는 것 같았다.

“아 맞다! 현우 씨 어제 그거 뭐예요? 웬 사랑 고백? 공적인 자리를 막 사적인 이벤트로 그렇게 이용해도 되는 겁니까?”

오 대리가 번뜩 생각난 듯이 얘기를 꺼냈다.

“아씨, 맞아. 이 자식. 너 어제 그거 뭐냐?”

형진이 현우를 타박하며 따져 물었다.

“뭐예요, 현우 씨 연애해요? 우리 몰래 연애하고 그러면 돼요, 안 돼요? 언제 어디에서 만났는지부터 딱 말해요, 지금.”

막내 이 주임이 현우의 어깨를 붙잡고 흔들었다. 은수는 현우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조마조마했다. 와인 맛도 느끼지 못한 채 몇 모금을 연달아 들이켜며 타는 목을 달래야 했다.

“……파리에서 만났어.”

뜸들이던 현우가 말을 꺼냈다. 진지하게 목소리를 깔고 말하는 현우에게 일동 당황하는 듯했지만, 이내 텐션을 높이며 현우를 놀리려고 달려들었다.

“오, 파리! 파리의 연인!”

“파리, 파리! 샹젤리제!”

“그럼 얼마 안 됐네요. 근데 짝사랑이라면서요. 어떤 여자예요? 프랑스 여자예요?”

“야, 얘가 프랑스 여자랑 말이 통하겠냐?”

“말 안 통하는 사랑할 수도 있지, 눈빛으로 찌릿찌릿.”

“몸으로 하는 대화 나눴나 보지.”

“하긴 신현우 정도 섹시 다이너마이트면…….”

취기로 시끌벅적한 가운데 현우가 은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현우의 검은 눈동자가 깊게 반짝였다.

“한국 여자야. 평범한 회사원.”

은수는 말없이 그의 얼굴을 마주 보고 있었다. 주홍빛 조명을 받은 그의 얼굴에 어린 취기가 파리를 떠올리게 했다. 파리 8구의 어느 카페에서 자신을 사로잡았던 그 얼굴. 보이지 않는 눈으로도, 상상만으로도 가슴 벅차게 아름다웠던 바로 그 얼굴.

다행히 현우는 더 얘기하지 않았다. 누군가 다시 강 대표 얘기를 꺼내면서 순식간에 상사 욕을 하는 성토대회로 분위기가 흘러갔다. 밤이 무르익고 다들 취할 대로 취하고 나니, 어느덧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자, 이제 가자. 집에 가자! 사장님 문 닫으실 시간이래.”

몸을 못 가누는 형진이 먼저 비척거리며 룸을 나섰다. 사람들에 섞여 밖으로 나왔을 때 은수는 취기가 훅 올라오며 눈앞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같은 방향인 사람들끼리 택시를 타고 떠날 때 일일이 인사를 해 주고 정신을 차려 보니 형진과 은수, 그리고 현우 이렇게 셋만이 남아 있었다.

“어? 우리 은수 씨 안 가셨네. 택시 불러 드려야지. 야, 현우야 택시 좀 잡아 봐! 은수 씨 집이 어디예요?”

인사불성이 된 형진이 현우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은수를 챙겼다. 현우가 부른 택시가 도착하자 현우는 은수 대신 형진을 뒷좌석에 구기듯이 밀어 넣었다. 목적지도 말하지 않고 쓰러져 버린 형진 대신 현우가 합정동으로 가 달라며 택시 기사에게 현금을 쥐여 주었다.

은수는 형진이 탄 택시가 출발하자마자 현우를 쳐다보지도 않고 인사를 건넸다.

“갈게요, 저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빠르게 걸음을 옮기는 은수의 뒤통수에 대고 현우가 말했다.

“규호가 데리러 올 거야. 규호 차 타고 가.”

은수가 잠깐 멈칫하다가 반만 뒤를 돌아보고 말했다.

“괜찮아요. 큰길가로 나가면 택시 많아요.”

다시 발걸음을 떼려는 찰나, 그에게 손목이 붙잡히고 말았다. 은수는 그의 뜨거운 손에 데기라도 한 것처럼 황급히 손목을 떨쳐 냈다. 눈앞은 어지럽고 여름밤의 공기는 감미로웠다. 공기에 와인 향이 배어 있는 듯 은수를 점점 더 취하게 만들었다. 아니, 어쩌면 눈앞에 있는 이 뜨거운 사람에게 취해 들어가고 있는지도.

몽롱한 정신으로 현우의 눈을 바라보는 몇 초가 수분처럼 느껴지려는 그때 규호가 도착했다.

“타고 가.”

현우가 손수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말했다. 규호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아무것도 묻지 않고 조용히 은수의 반응을 기다렸다. 말을 듣지 않으면 억지로라도 차에 태울 게 분명했다. 은수는 잠자코 규호의 차에 올라탔다.

사이드미러 안에서 현우의 모습이 점점 조그맣게 멀어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작아질수록 은수의 마음속에서는 그가 크게 자리 잡는 것 같았다. 하얀 도화지에 검은 잉크가 툭 떨어진 것처럼 신현우에게 물들고 있는 자신을 어지러운 취기 속에 어렴풋이 느꼈다.

규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운전만 하고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차가 막히지 않았다. 텅 빈 서울 거리를 쌩하니 내달리고 있었다.

“창문 좀 열어도 돼요?”

은수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규호가 말없이 조수석 창문을 내려 주었다. 도시의 밤공기가 차 안으로 밀려들었다. 곧 완연한 여름이 될 것 같았다.

“현우 형이 서은수 씨 때문에 많이 힘들어해요.”

규호의 갑작스런 말에 은수는 무어라 답해야 할지 모른 채 창밖만 주시했다.

“형하고 무슨 일 있었는지 말해 주실 수 있어요? 제 배우라서, 제 배우의 컨디션과 관계된 일은 뭐든지 제가 다 알고 있어야 하는데, 형이 말을 안 해 주네요.”

“파리에서 잠깐 만나다가 헤어졌어요.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에요.”

“서은수 씨.”

규호의 목소리에 단호함이 묻어 나왔다. 자기 사람을 지켜야 한다는 사명감과 진심이 배어 나오는 태도였다.

“현우 형 이런 모습, 알고 지낸 지 7년 만에 처음 봐요. 배우로 전향하고서는 저와 죽 함께했고, 그 전엔 가수 활동 때문에 훨씬 더 바빴으니까 제가 아는 한 한 번도 없었어요, 누구를 진심으로 좋아했던 일은. 서은수 씨가 처음일 거예요, 아마.”

은수는 여전히 창밖으로 지나치는 서울의 야경만 바라보고 있었다.

“스쳐 가는 사람들은 많았죠. 근데 다 그뿐이었어요. 신현우라는 사람을 잘 모르고 형의 인기나 돈만 쫓는 여자들. 형한테 매달리는 여자들도 많았지만 한 번도 평범한 사람처럼 사랑을 주고받고 깊은 관계 속에서 서로 성장하고, 그런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형이 많이 서툴고, 어떻게 사랑해 주고, 아껴 줘야 하는지도 몰라요.”

“왜 저한테 그런 말씀 하시는 거예요?”

은수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규호를 돌아보며 물었다.

“서은수 씨도 형 좋아하잖아요.”

담담하게 정곡을 찌르는 규호에게 은수는 더 이상 따질 말을 찾지 못했다.

“제가 사람을 많이 만나는 직업이다 보니 눈빛이나 분위기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특히 사람에 대한 감정에 관해서만큼은 제가 유난히 촉이 좋아요. 서은수 씨가 형 마음에 두고 있는 거, 파리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어요.”

“우린 어울리지 않아요.”

“그걸 왜 서은수 씨가 판단하죠?”

현우보다 두 살 어림에도 규호는 나이답지 않은 어른스러운 면모가 있었다. 하루하루 녹록치 않은 연예계에서 버티며 얻은 능력이라면 능력이었다. 사람을 보는 혜안이라는 것이 톱스타의 매니저인 규호에게 없어서는 안 될 자질이기도 했다.

그가 보기에 서은수는 신현우에게 이미 꼭 필요한 존재가 되어 버렸다. 두 사람의 끝이 설령 좋지 않다 하더라도, 적어도 지금만큼은 그녀가 신현우의 공기나 다름없었다. 지금 내 배우에게 필요하다면. 그가 그토록 간절히 원하는 것이라면.

“제가 형보다 나이는 어려도, 연애도 많이 해 봤고 사회 경험도 훨씬 많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바로 일 시작하면서 별별 일을 다 겪었죠. 겪어 보니까 그렇더라고요, 사랑이라는 게. 좋은 이별이 어디 있겠어요. 근데 끝이 나더라도, 상처만 남기고 헤어지더라도 그래도 사랑했던 그 순간은 남더라고요. 끝을 생각하고 현우 형을 밀어내는 거라면 그러지 말아 주세요. 깨지고 부서지더라도, 그래도 두 사람이 사랑했던 순간의 진심은 어떤 누구도 뺏어 갈 수 없는 두 사람의 것으로 남는 거니까. 지금 당신이 신현우에게 받고 있는 사랑은 영원히, 온전히 당신의 것이니까.”

여름밤의 바람이 은수의 뺨을 비껴가고 있었다. 어느새 흘러내린 눈물을 시원히 씻겨 주면서.

***

이제는 퇴근 시간에도 밖이 여전히 환했다. 완연한 여름이었다. 은수의 민소매 블라우스가 후덥지근한 바람에 펄럭거렸다. 은수는 한남동 리츠빌리지 입구에 서서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입주민 외에는 출입할 수 없는 첫 번째 문이 드르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현우가 알려 준 비밀번호를 누른 후에야 7층에 불이 들어왔다. 강 대표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현우에게 영어 수업을 해 달라는 부탁을 처음에는 한사코 거절했지만 그는 은수가 아니면 안 된다며 고집을 부렸다. 강 대표는 은수가 이미 제 사람이 된 것처럼 친근하게 굴었고, 은수도 업계의 큰손인 강 대표의 제안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701호 문 앞에 서서 심호흡을 크게 하고 초인종을 누르려는 찰나, 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란 은수의 머리 위로 현우의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현우는 깔끔한 홈웨어 차림이었다.

“들어와.”

은수가 쭈뼛거리며 어색한 첫발을 내딛었다. 실내화로 갈아 신고 나서 현우를 뒤따라 천천히 복도로 걸어 들어왔다. 긴 복도를 지나치자 넓은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하얀 실내가 더할 나위 없이 깨끗했고 몇 군데 원목 가구로 포인트를 주어 포근한 분위기였다. 거실의 넓은 창으로는 한강이 가로지르는 서울의 일몰이 내려다보였다. 집의 분위기에 압도된 은수가 잠시 멍하니 있자 현우가 돌아보며 말했다.

“편하게 있어. 안 잡아먹을 테니까.”

현우가 이쪽으로 앉으라는 듯 손짓으로 식탁을 가리켰다. 식탁 위에 현우가 보던 영어 교재와 대본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은수가 가방을 놓고 자리에 앉자, 현우가 주방으로 가 포트에 물을 담았다.

강 대표의 제안을 수락하면서 현우와 단둘이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걸 이미 각오했었지만 이렇게 현우의 집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BJ의 빈 사무실이나 한적한 카페 같은 곳도 생각을 했지만, 현우의 사정상 보는 눈이 많은 곳에서 수업을 할 순 없었다. 은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무진 애를 쓰며 식탁 위에 놓인 영어 교재를 들춰 보았다.

“수업 시작해요. 시간 얼마 없어요.”

은수가 사무적인 말투로 현우를 재촉했다. 현우가 군말 없이 자리에 앉았다. 어디 해 보라는 듯 은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은수는 애써 시선을 피하며 가방에서 노트를 꺼냈다. 은수는 대학생 때부터 과외는 이골이 났기에, 고집 센 학생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일단 학생이 본인의 목표와 그에 걸맞지 않은 현재 상태를 직시하게 만들어 기선 제압을 해야 한다.

‘그래, 고집 센 학생이다……. 살을 섞고 부대끼며 나에게 꿈같은 환희를 안겨 줬던 남자가 아니라…….’

그녀는 마주 앉은 현우의 목덜미에서 피어오르는 향기로 파리의 기억이 온몸에 퍼지려는 것을 가까스로 거부하고 있었다.

“수업에서 얻고 싶은 게 뭐예요?”

침을 꿀꺽 삼키며 은수가 물었다. 펜을 쥔 오른손이 떨리는 것을 들킬까 봐 조마조마하면서.

“선생님이랑 친해지는 거요.”

담담한 그의 말이 기가 막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장난치지 마요.”

“장난 아닌데. 선생님이랑 친해져야 말을 많이 하고 영어를 잘하지. 영어 그렇게 배우는 거 아닌가?”

현우가 지지 않고 은수의 눈을 정면으로 주시하다가 영어 교재 아래 놓여 있던 대본을 꺼내 들었다.

“다음 주 오디션이야. 촬영해서 LA에 보낼 거고. 대사 좀 같이 봐 줘.”

현우가 내민 대본에는 ‘My Savior(나의 구원자)’라는 제목이 적혀 있었다. 포스트잇을 붙여 놓은 페이지를 펼치자 갖가지 색깔의 형광펜으로 필기된 글이 보였다. 어려운 단어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한국어 번역이 적혀 있었다.

“72페이지부터 봐 주면 돼. 죽은 형의 여자 친구를 사랑하는 역할이고, 형의 죽음이 나와 관계있다고 오해한 여자가 나를 원망하는 장면이야. 내가 대사 치는 걸 봐 주고, 케이트의 대사는 네가 읽어 주면 돼.”

현우의 자연스러운 리드에 은수는 잠시 넋이 빠졌다. 쓸데없이 철벽을 친 스스로가 민망할 만큼 현우는 순식간에 장면 속으로 몰입하고 있었다.

「I am the one who saved you after Eric died.(에릭이 죽고 나서 너를 구해 준 사람이 바로 나야.)」

그가 내뱉는 영어 대사가 전혀 어색하지 않아 은수는 적잖이 놀랐다. 영어를 못하지 않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대사로 들으니 그가 배우라는 걸 새삼 다시 느낄 수 있었다. 가수 생활의 영향인지 리듬감이 탁월했고, 억양만 조금 고치면 완벽할 것 같았다. 은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Yes, after he died, exactly. Where were you when he was dying alone in the dark?(그래. 죽고 나서 말이야. 그가 어둠 속에서 혼자 죽어갈 때 넌 어디 있었어?)」

「I was there with you! Why won’t you accept that? I was always there for you.(난 네 옆에 있었잖아! 왜 인정하지 않는 거야? 난 언제나 네 곁을 지켰어.)」

「I never asked you to do that. You should’ve died not Eric. You are no one to me.(내가 너한테 그렇게 해 달라고 한 적 없잖아. 에릭이 아니라 네가 죽었어야 했어. 넌 나한테 아무도 아니야.)」

케이트의 대사 아래로, 남자주인공 지미가 그녀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고 키스한다는 지문이 이어졌다. 캐릭터에 몰두해 흔들림 없이 견고한 현우와 달리 은수는 다음 대사를 치지 못하고 대본만 붙들고 있었다. 다음 지문대로라면, 케이트가 자신을 덮친 지미를 밀쳐내고 뺨을 때린 후 그의 형과 그를 비교하는 대사를 할 차례였다. 현우가 지문을 건너뛰고 대사만 읊으라는 듯 눈치를 줬지만 은수는 다음 대사를 하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화장실에 몸을 숨긴 은수는 심장이 튀어나올 듯 격하게 뛰는 것을 간신히 가라앉혀야 했다. 며칠 전 현우와 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파리에서의 키스, 그의 숨결과 손길 모든 게 그녀 안에서 생생히 되살아났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그는 이미 거부할 수 없는 숙명처럼 그녀의 삶에 자리하고 있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너무나도 혼란스러워 보였다.

‘서은수, 대체 여기서 뭐하는 거야? 강 대표를 핑계 삼아서 여기까지 제 발로 걸어 들어와서는……. 네가 원하는 게 정말 뭐야?’

야옹.

그때 화장실 문을 비집고 작은 샴고양이 한 마리가 들어왔다.

‘모리……?’

파리에서 현우가 종종 모리 이야기를 했었다. 무무가 두 사람 곁에서 갸르릉거릴 때면 한국에 돌아가서 모리를 소개시켜 주겠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네가 모리구나?”

처음 보는 은수를 경계하지 않고 그녀의 다리에 제 몸을 비비며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는 듯한 모리가 사랑스러웠다. 까만 얼굴을 자세히 보려고 은수가 허리를 숙여 모리를 안아 들었다.

“네 얘기 많이 들었어, 눈이 정말 예쁘네…….”

은수는 모리의 파란 눈에 마음을 빼앗겨 현우가 다가오는 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모리야.”

반쯤 열린 문틈 사이로 현우가 서 있었다. 마주 선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이윽고 현우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은수는 두 손으로 감싸 안은 모리를 놓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할 만큼 긴장하고 있었다. 심장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모리를 더 강하게 끌어안았다. 현우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현우가 자신을 향해 긴 두 팔을 뻗는 것을 보고 은수가 눈을 질끈 감았다. 곧 따뜻하고 자그마한 털 뭉치가 제 품에서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세게 끌어안으면 어떡해. 모리 숨 막히잖아.”

눈을 뜨자 현우가 품에 폭 안긴 모리를 다독이며 뒤돌아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후…….”

은수는 그제야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천천히 정신을 가다듬고 거실로 다시 나왔을 때 현우는 책을 덮고 식탁을 정리하고 있었다.

“오늘은 첫 날이니까 여기까지 해. 대본 가져가서 다음 수업 전에 다 읽고 와 줄래? 스토리를 알아야 더 잘 봐 줄 수 있으니까.”

“그래요, 그럼.”

주섬주섬 대본을 가방에 챙겨 넣는 은수를 보며 현우가 말했다.

“혼자 갈 수 있지?”

데려다 주겠다는 말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평소라면 집 앞까지 은수를 챙기는 현우였기에 다소 의아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내 분위기가 그전과는 달랐다.

‘대체 뭐야……. 이랬다저랬다. 뜨거웠다 차가웠다, 사람 헷갈리게.’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하며, 은수가 구두에 아무렇게나 발을 욱여넣었다.

“네, 그럼요. 그만 가 볼게요.”

“조심히 가.”

현관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몇 걸음이나 떼어 놓았을까, 은수가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철제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은수는 파리에서 그와 함께 보았던 석고조각을 떠올렸다. 로뎅의 작품인 『지옥의 문』. 그러나 지금 저 문은 지옥의 문처럼 보이지 않는다. 저 문을 다시 열고 들어가 천국의 환희를 맛보고 싶다. 설령 그 후에 지옥에 떨어질지라도 천국에서 경험한 쾌락은 언제까지고 은수의 것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지옥 불에서 활활 타오를지라도 기꺼이 웃을 수 있다면.

은수는 저도 모르게 되돌아가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문 열어 줘요!”

은수의 작은 주먹이 철제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복도에 울렸다. 몇 초 후 문이 열리고 현우가 상기된 얼굴을 내밀었다.

“……뭐야, 너.”

은수가 체념과 욕망이 뒤범벅된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죽음 같은 상처를 불사하겠다는 욕망과 그 욕망 앞에 이제 자신도 자신을 어쩌지 못하겠다는 체념이 두 눈에서 동시에 반짝였다. 현우는 강한 팔로 은수를 낚아챈 후 문을 닫았다. 한쪽 벽에 은수를 밀쳐놓고 두 팔로 그녀의 몸을 가로막았다.

“왜 그렇게 나한테 차가워요?”

은수가 현우를 똑바로 올려다보며 쏘아붙였다.

“뭐?”

혼란스러운 얼굴로 현우가 되물었다.

“아물지 않을 상처 같다며? 아무도 못 보게 자기만 보고 싶고, 안 보면 궁금해서 미칠 것 같다며? 내가 이렇게 앞에 있는데 왜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고 외면해요? 왜?”

“너야말로 왜 이렇게 사람 헷갈리게 해. 나를 원하는 거야, 아닌 거야? 내가 오늘 어떻게 참았는데. 너를 해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또 참았는데. 이렇게 제 발로 다시 걸어 들어오면 어쩌자는 거야?”

은수가 두 손으로 현우의 멱살을 잡고 제 쪽으로 거칠게 당겼다. 당황해 갈 곳을 잃었던 현우의 두 눈이 곧 감기고 은수가 초대하는 세계 속으로 이내 빠져들었다. 현우가 두 손으로 은수의 뺨을 부여잡자 그녀의 몸이 천천히 힘을 풀면서 내려앉을 듯했다. 현우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받치며 입술을 뗐다.

“이제 못 참아. 더 안 참아.”

촉촉해진 두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봤다. 눈앞의 이 남자 말고는 이제 보이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참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를 더 옭아매고 더 몰아붙이고 싶었다. 사랑의 덫에 갇혀 궁지에 몰린 그가 얼마나 거세게 몸부림치는지 알기에. 그와 한 몸이 되어 움직인다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고통조차 느낄 수 없는 황홀경에 이를 것을 잘 알기에.

현우는 거칠게 은수의 아랫입술을 감쳐물었다. 그의 턱이 위아래로 휘몰아치며 그 안에서 요동치는 혀를 상상하게 했다. 너무나 기다려 왔던, 미치도록 그리웠던 이 감촉과 온기가 어떻게 자신의 몸을 훑고 지나가는지 은수는 한순간, 한순간을 놓치기 싫어 발버둥 쳤다.

은수의 키에 맞춰 웅크리고 있던 현우가 은수의 허리를 붙잡아 번쩍 들어 올리며 제 상체를 일으켰다. 은수가 까치발을 들고 거의 공중에 떠 있다시피 해야 했다. 그가 하체를 은수에게 바짝 붙이며 그녀를 벽에 고정시켰다. 은수는 그의 페니스가 이미 최대로 부풀어 올라 있는 것을 알았다. 금방이라도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그것을 상상하니 안쪽에서부터 촉촉이 물기가 차올랐다.

현우가 은수의 하늘색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스타킹과 팬티를 한꺼번에 끌어 내렸다. 젖은 그곳에 현우의 손가락이 닿자마자 은수는 밭은 신음을 내뱉으며 몸서리쳤다. 이 감촉. 목숨을 빼앗긴다고 해도 거둘 수 없는 쾌락.

“아……. 그만 놀려요, 제발.”

현우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씨익 웃었다. 그리곤 자신의 것을 한 번에 깊게 쑥 밀어 넣었다. 커다란 두 손으로 감싸 쥔 은수의 허리가 부르르 진동했다. 단숨에 은수의 배꼽까지 치고 들어간 현우의 끝과 은수의 몸속 깊숙한 곳이 만나 일으키는 원초적인 전율이었다. 안정적으로 한 몸이 되자 은수의 두 다리가 자연스럽게 현우의 허리를 휘감았다. 두 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자 현우가 응답하듯 그녀의 허리에서 손을 떼 은수의 엉덩이를 받쳐 쥐었다.

현우가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

은수가 고개를 쳐들며 숨을 삼켰다. 현우가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쇄골 언저리를 애무하기 시작했다. 유리로 된 현관 신발장에 두 사람의 모습이 비춰지고 있었다. 은수는 발개진 채 미간을 잔뜩 찌푸린 자신의 얼굴과 현우의 성난 엉덩이를 번갈아 바라봤다. 현우의 작은 엉덩이가 예민한 리듬으로 근육과 이완을 반복하고 있었다. 은수의 반응에 따라 느려지기도 빨라지기도 하면서. 은수의 엉덩이가 차가운 벽에 부딪히는 소리가 불규칙했다. 탱글탱글하게 찰싹 울리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질퍽하게 쓸려 올라갔다.

“나 변탠가 봐요. 아픈데…… 아픈데 너무 좋아. 미치겠어. 멈추지 마요.”

그들의 움직임에 따라 센서등이 켜졌다 꺼졌다를 반복했다. 은수는 불이 켜질 때마다 자신의 두 눈에 아프게 느껴질 만큼 어마어마한 쾌락이 번뜩이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발끝은 공중에 들린 채 현우의 거친 숨결에 맞춰 전율하고 있었다.

“오늘 죽었어, 너. 그동안 참았던 거 다 갚아 줄 거야.”

현우가 한 팔로 은수의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고, 한 손으로는 엉덩이를 받힌 채로 은수를 벽에서 떼어 냈다. 한 발씩 침실로 향하는 현우의 발걸음이 조심스러웠지만, 우려가 무색하게 현우의 페니스는 은수의 몸속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현우의 골반이 좌우로 흔들림에 따라 커다란 뱀이 은수의 동굴 안에서 새로운 자극점을 찾아 농밀하게 혀를 놀렸다.

그 노련한 희롱에 굴복하지 않겠다는 듯, 해 볼 테면 해 보라는 듯 은수는 힘을 주고 더 꽉 조여들었다. 그런 그녀의 노력을 귀엽게 여기며 침대에 그녀를 눕힌 채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쓸어 주는 현우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졌다. 은수가 현우의 목에서 팔을 풀고 긴장을 살짝 덜어 냈다.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현우를 받아들일 준비를 하며 새하얀 이불을 손에 말아 쥐었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아. 이대로 죽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아…….’

은수는 눈을 감고 온전히 그를 맞아들였다. 그녀는 그를 향해 한없이 열려 있었고, 모든 움직임은 미리 짜 놓기라도 한 듯이 매끄러웠다. 두 사람은 마치 한 몸처럼 호흡하고 있었다.

“다시는 놓칠 수 없어, 너를. 영원히 내 안에 가둬 둘 거야.”

현우가 끊이지 않는 태고의 파도처럼 은수의 몸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어느 지점을 지나고 나니 시간의 흐름이 무색해져 버렸다. 현우는 수그러들기는커녕 점점 더 뜨거워졌고, 은수는 정신을 잃지 않고 그를 다 끌어안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쳐야 했다. 온몸이 불타는 듯했고 더 이상 버티다가는 정말 제 몸이 닳아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은수가 까무룩 정신을 잃는 것을 느낀 현우가 황급히 몸을 빼냈다. 한 시간이 넘게 꼿꼿한 그의 것을 그는 제 손으로 숨죽여 놓아야 했다. 은수는 그의 몸이 자신의 위에 축 늘어지는 것을 느끼며 기절하고 말았다.

***

“현우 씨, 집 좋다.”

창밖으로 여명이 밝아오는 것을 보며 은수가 나직이 말했다. 현우는 품에 안긴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고 있었다.

“여기서 같이 살까?”

은수가 살포시 웃으며 몸을 돌려 그를 안았다. 그녀의 작은 몸이 커다란 품 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조용하고, 아무도 방해하는 사람 없고. 파리에 있을 때 생각나.”

은수의 말에 현우가 눈을 들어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기보단 파리가 더 좋지. 서울은 나한테 감옥 같아.”

은수가 한 손으로 현우의 넓은 가슴을 쓰다듬으며 잠자코 그의 말을 들었다. 무언가 쏟아 내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아 살며시 되물었다.

“감옥 같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이렇게 좋은 집에 살면서.”

“그냥 어딜 가도, 집에 혼자 있어도 언제나 감시 받는 기분이야. 유리 상자 안에 발가벗겨진 채로 갇혀서 일거수일투족이 다른 사람들 눈에 노출된 느낌? 가끔 그런 꿈도 꿔.”

은수가 이해한다는 듯, 천천히 그의 쇄골 언저리를 매만졌다. 현우가 그녀의 손을 입으로 가져가 조용히 입 맞췄다.

“파리에서 너를 만났을 때, 아주 오랜만에 그런 느낌에서 해방됐었어. 사람들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마음껏 내 자신이 되어도 될 것 같은 기분. 다른 사람이 써 준 각본대로 움직이는 인형이 아니라, 긴장을 풀고 아무렇게나 팔을 휘두르며 길을 걸어도 될 것 같은 기분. 그래서 이 손을 놓치고 싶지 않았어. 이 손을 놓치면 나 자신을 놓칠 것 같아서.”

현우가 몸을 일으키더니 상체를 은수를 향해 숙였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빛이 간절했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해도 돼?”

당신이 먼저 놓지 않는 한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은수는 눈으로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현우가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시 입술을 포개 왔다.

***

“그래서 지금 네 맘은 어떤데?”

수연이 은수의 빈 잔에 맥주를 따르며 물었다.

“지금은, 지금 이대로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난 그냥 네 맘 편해졌다면 그거 하나로 됐어. 에휴. 서은수 너도 참, 도화살이 끼었나……. 예쁘고 잘나면 얼굴값 한다더니, 팔자가 왜 이렇게 파란만장하냐.”

수연이 은수의 뺨을 쓰다듬으며 짐짓 너스레를 떨었다. 은수가 수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잔잔히 웃었다.

“그러게. 이렇게 휘둘리며 사는 게 내 타고난 팔잔가 봐.”

“한편으로는 부럽기도 하고.”

은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크게 뜨고 수연을 바라봤다.

“나는 경재랑 1학년 때 만나서 다른 남자 손도 못 잡아 봤잖아. 군대 기다려 줘, 취업 기다려 줘, 내가 업어 키우다시피 해서 이제 아까워서 남도 못 줘. 이 결혼 엎고, 나도 불같은 사랑 한번 해 봐? 불나방 한번 돼 봐?”

수연은 첫 남자 친구인 경재와 곧 결혼을 앞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오랜 연인처럼 안정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크고 작은 사건들을 잘 이겨 내며 비교적 순탄하게 사귀어 왔다.

“야, 그런 말이 어딨어. 나는 너네가 세상에서 제일 부러워. 나는 맨날 울고, 지지고 볶고, 난리를 치고.”

“다 자기 몫의 십자가가 있는 거지. 너는 고난의 십자가, 나는 권태의 십자가.”

수연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은수가 수연의 넉살에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그런 기분이야 진짜. 이게 나한테 주어진 거라면, 그 사람이 내 십자가라면, 내가 감히 거기서 벗어나려고 하면 안 되는 게 아닐까. 나한테 밀려들어 오는 그 사람을 억지로 밀어내는 일 자체가 오만하고 비겁한 일 아닐까, 하는 생각. 그렇게 한번 받아들이고 나니까 긴 터널을 빠져나온 기분이 드는 거 있지.”

수연이 장난기를 거두고 애틋한 눈으로 오랜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은수가 한때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절망의 바닥에 있었다는 걸 수연은 알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합성된 사진을 남자 동기들이 돌려 보고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여자 친구의 상처를 보듬어야 했을 시기에, 격분해 싸움을 벌이며 밖으로만 나돌던 혁준을 도리어 은수가 말리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녀야 했을 때. 그랬던 혁준이 그 일을 벌인 게 제 누나라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싸우기를 포기했을 때.

순탄치 않은 어린 시절을 보냈기에 또래에 비해 강단 있고 어른스러운 은수였지만, 그때는 한시라도 지켜보고 있지 않으면 무슨 일을 내지는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불안한 하루하루가 이어졌었다.

그때 은수는 수연의 어깨에 기대 울면서 더 이상 삶에서 아무것도 기대되는 게 없다고 말했었다. 이 치 떨리는 순간조차 지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닌 일이 될 거라고, 더 좋은 날이 올 수도 있다고 하더라도. 살다 보면 힘든 일과 기쁜 일이 번갈아 찾아오기 마련이라는 걸 스물셋 어린 나이에 이미 깨달을 만큼 많은 일을 겪은 그녀였지만, 앞날에 그 어떤 환희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하더라도 당장 눈앞의 하루를 더 살아 낼 용기가 없다고 말했었다.

“이 사람하고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어떤 파도가 몰아쳐도 당당히 맞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 설령 그 파도가 나를 집어삼킨다 하더라도 이 사람 손을 잡았던 걸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 같은 거. 그 후에 찾아오는 어떤 절망도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은.”

“아, 어떤 남잔지 되게 궁금하네. 언제 소개시켜 줄 거야?”

눈빛이 촉촉해진 수연이 일부러 크게 기지개를 켜며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사이 호프집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에 우연히 수연의 시선이 멈췄다. 화면에 나오는 자막을 보고 수연의 눈살이 급격히 찌푸려졌다.

[신현우, 한성그룹 차녀와 한 달째 열애 중!]

수연이 재빨리 은수의 눈치를 살폈다. 은수의 눈은 이미 모니터를 향해 얼음처럼 굳어 있었다.

‘한성그룹 차녀라면, 송정 그 여자다…….’

은수의 삶이 송정으로 인해 얼마나 망가졌었는지 너무나 잘 알기에, 수연은 은수를 바라보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만 태웠다. 얄궂게도 호프집 사장이 TV 볼륨을 키우고 있었다.

-네, 오늘 들어온 속봅니다. 배우 신현우 씨와 한성그룹 차녀 송모 씨가 한 달째 뜨거운 열애 중이라는 소식인데요! 두 사람은 2년 전 사교 모임에서 처음 만나 친분 관계를 이어 오다가 최근 한성그룹의 자인 미술관 개관식에서 다시 만난 것을 계기로 연인으로 발전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영화와 예술에 조예가 깊은 송 씨는 신현우 씨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이 잘 통해 두 선남선녀의 만남을 기대하는 이가 많았다고 하는데요.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기반을 잡았으며 그만큼 연애에도 신중할 것이라는 점에서 곧 결혼 소식이 들리지 않겠냐는 것이 업계의 관측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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