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장. (5/9)

4장.

“좋은 아침!”

김 대표가 언제나처럼 파이팅 넘치는 목소리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한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담긴 홀더를 들고 있었다.

“서 MC! 어제 잘 들어갔어?”

“네, 대표님. 인사도 못 드리고 죄송해요.”

김 대표가 걱정스런 눈빛으로 은수의 얼굴을 살폈다.

“서 MC 괜찮으면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김 대표가 커피를 들어 보이며 자기 방으로 따라오라고 고갯짓을 했다. 은수는 곧장 따라나섰다.

‘어제 너무 갑자기 사라져서 그러시나…….’

김 대표가 그런 사소한 일로 트집을 잡을 사람이 아니기에, 은수는 의아해하며 자리에 앉았다. 김 대표는 컵 뚜껑을 열더니 얼음 가득한 라테를 숨도 안 쉬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은수가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폈다.

‘한희 언니, 이렇게 뜸을 들일 사람이 아닌데…….’

김한희는 시원시원한 성격 하나로 사업을 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력도 미진하고 6개월이나 공백이 있었던 은수가 행사 전문 MC로 채용될 수 있었던 것도 그녀의 가능성을 믿은 김 대표의 배포 덕분이었다.

“저기, 서 MC야.”

“네, 대표님.”

은수가 도리어 걱정하는 눈빛으로 김 대표를 바라보았다.

“내가 서 MC한테 크게 잘못한 거 같아서.”

“네? 무슨…….”

김 대표는 정말 미안해서 어쩔 줄 모르는 것 같았다. 눈을 크게 뜬 은수가 되물었다.

“아니, 그 여자 자인 미술관 관장 말이야. 혁준 씨 누나라며.”

은수는 혁준의 이름에 흠칫하며 커피를 내려놓았다. 말을 아끼는 은수에 비해 김 대표는 잠깐의 침묵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 정말 내가 미친년이지. 혁준 씨랑 만나는 동안 너를 그렇게 탈탈 털고 진상, 진상 개진상을 부린 여자가 송정이었다니. 아니, 그렇게 잘나고 교양 있는 여자가 어쩌면 그렇게 지독하게 너를 괴롭혔다니? 응? 하여간 있는 것들이 더하지. 사이코 아니니? 사이코?”

김 대표는 미안함에 아무 말이나 던지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아셨어요, 대표님?”

송정.

한성그룹의 둘째딸이자, 어제 오픈한 자인 미술관의 관장이자, 송혁준의 누나.

혁준과 만나는 동안은 물론이고, 헤어진 이후에도 은수는 그 여자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얽히고설킨 넝쿨처럼, 거미줄처럼 은수의 존재를 옥죄어 오는 그 이름.

“내가 그 여자가 그 여잔 줄 알았으면 내가 진짜 너를 거기 진행을 왜 시키니. 나는 괜찮아, 나는 어찌 됐든 뭘 해도 을병정 인생이니까. 근데 너는 무슨 죄로 사장 잘못 만나서 평생 다신 안 마주쳐도 될 그런 인간을 거기서 딱 마주치냐고……. 에휴.”

은수는 씁쓸히 웃었다.

평생 다신 안 마주쳐도 될, 전혀 다른 세계에 속한 사람들.

그 여자도, 송혁준도.

애초에 마주쳐서도 안 됐을 사람을, 금기와도 같은 사랑을 만나고 했던 게 은수의 원죄였다.

석고대죄 할 기세로 자책하는 김 대표를 은수가 위로했다.

“대표님, 저 괜찮아요. 그 여자가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 대표님이 다 들어 주고 막아 주셨지, 저는 우아하게 행사 진행만 했잖아요. 마주칠 일도 없었어요.”

“어휴 서 MC 네가 거기서 어떤 마음이었을지 생각하면 내가 정말……. 어제 잠도 못 잤어, 미안해서.”

은수가 손을 뻗어 김 대표의 손을 잡고 눈꼬리를 내리며 웃어 보였다. 연신 한숨만 내쉬는 김 대표에게 은수가 재차 물었다.

“근데 대표님, 어떻게 아셨어요? 혁준 씨랑 송정이 가족이라는 거…….”

“아니, 어제 파티장에 혁준 씨가 있더라구.”

은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혁준이 그 자리에 있었다니.

신현우가 나타났던 그 자리에.

세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다시 마주치는 것을 상상만 해도 오한에 몸서리가 쳐졌다. 악몽처럼 충격을 남긴 어젯밤 현우와의 재회가 다시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억센 손에 잡혀 있던 두 팔이 욱신거렸다. 그 사람한테 그렇게 묶여 있는 걸 혁준이 또 봤더라면……. 은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혁준 씨랑 딱히 반갑게 인사할 사이도 아니고, 그냥 멀찍이서 눈인사 정도 했는데 옆에서 누가 그러더라구. 송정 관장 동생이라고, 오늘 한성그룹 막내아들 공식 데뷔하는 날이라고. 진짜 내가 그때 간 떨어질 뻔한 걸 생각하면…….”

은수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그랬구나, 당연하다. 이제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경영 수업 받아야 하니 그 세계 사람들 앞에 나설 시기가 됐겠지. 그래서 나 같은 구질구질한 과거와는 진작 멀어졌어야 했겠지.’

“송정 그 여자가 아주 눈에 꿀이 뚝뚝 묻어 가지고, 여기저기 소개시켜 주고 다니더라고. 누가 보면 동생이 아니라 지 애인인 줄 알겠어.”

그 여자의 동생 사랑은 유난했다. 동생에 대한 사랑이 깊은 만큼, 동생 옆에 붙어 있는 은수에 대한 경멸 또한 지독했다.

“야, 서 MC! 너는 근데 어쩌면 그 오랜 세월을 혁준 씨 그런 사람인 걸 깜찍하게 속이냐? 내가 너 전에 있던 직장에서부터 그렇게 예뻐해 주고 같이 밥도 사 주고. 참나, 간에 벼룩을 빼먹지. 한성그룹 아들내미가 중소기업 사장한테 왜 밥을 얻어먹어? 그 집에서 너를 떼어 놓을라고 그렇게 안달복달을 한다길래 그냥 좀 있는 집인 줄 알았지, 세상에 한성일 줄은 내가 꿈에서나 알았게?”

원망인지 하소연인지 모를 김 대표의 말을 은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대학교 4학년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며 김 대표를 처음 알게 된 후 2년이 흘렀다. 김 대표를 유난히 믿고 따랐기에, 은수는 혁준과의 사이에서 있었던 많은 일들을 김 대표와 공유했지만 혁준의 집안 배경에 대해서만큼은 털어놓을 수 없었다.

김 대표를 알게 된 시절의 혁준과 은수는 이미 송정에 의해 갈기갈기 찢겨진 상태였고, 은수는 이미 그 관계의 끝을 예상하고 있었다. 혁준이 은수와 같은 대학에 다니게 되면서 시작된 그 불행한 관계의 끝을.

***

4년 전.

혁준의 입학 소식은 이미 공공연한 뉴스였다. 재벌 아들이 아이비리그에 합격하고도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기로 했다는 사실도, 훤칠한 외모와 재벌답지 않은 소탈한 성품도, 하나부터 열까지 그가 가진 모든 것과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뉴스거리였다.

가십과 뉴스는 매일같이 확대 재생산됨으로써 오히려 설득력과 희소성을 잃었고, 학기 초를 지나면서 사람들은 서서히 송혁준의 존재를 뉴스가 아닌 현실로 받아들였다.

꽃샘추위가 한창인 때였다. 혁준이 겁도 없이 은수의 세계에 발을 들인 것은.

“서은수 누나죠? 불어교육과 14학번.”

중앙도서관에서 나오는 은수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은수는 뒤를 돌아보았고 한눈에 알아봤다. 송혁준이다.

한 번도 마주한 적 없었지만, 동기들이 하는 말을 듣고 진작부터 얼굴과 체격을 알아볼 수 있었다. 애써 찾아보지 않아도 ‘쟤야, 송혁준.’이라고 알려 주는 사람들이 주변에 수두룩했다.

혁준은 언제나처럼 짧은 머리에, 경제학과 학과 점퍼를 입고, 커다란 운동용 숄더백을 멘 채 서 있었다.

“서 비서님한테 말씀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저도 이 학교 다니니까 앞으로 친하게 지내요.”

키가 183 정도 되려나. 은수도 가까이 서니 올려다봐야 했다. 말갛게 웃는 얼굴이 아직 소년 같았다.

‘뭘 믿고 이렇게 해맑지?’

은수는 엉겁결에 그가 내민 손을 맞잡으며 목례했다. 따뜻한 혁준의 손이 은수의 손을 더 그러쥐었다. 손마디가 제법 굵고 왠지 모르게 믿음을 주는 힘이 있었다.

‘재벌가 사람들은 이렇게 기운부터 남다른 건가?’

아버지가 그 집에서 비서로 불린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누군가의 입을 통해 아버지의 직책을 듣는 것도, 그 집안사람을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도 처음이었다.

‘교양 있으신 분들이라 기사라는 호칭은 지들 격에 안 맞는다는 거야?’

남자다운 이마에, 입가엔 소년 같은 미소를 머금은 혁준을 눈앞에 두고 은수는 차오르는 열등감에 몸 둘 바를 몰랐다.

은수의 아버지는 20년째 한성그룹 부회장의 기사로 일하고 있었다. 사람을 가리는 부회장이 20년 넘게 곁에 둔 거의 유일한 인물로, 그 집에서는 언젠가부터 은수의 아버지를 기사가 아니라 비서라고 불러 주었다.

제 아버지가 타는 차를 운전해 주고, 문을 열어 주고, 커피와 생수를 사다 바치는 사람의 딸에게, 그 잘난 인생에 털끝만한 영향력도 끼치지 않을 하찮은 존재에게 대체 무엇을 위해서 손을 내미는가?

은수는 다시 가볍게 목례하고 혁준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제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혁준이 오래도록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는 걸 은수는 알지 못했다.

“경제학과 15학번 송혁준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혁준과의 두 번째 만남은 동아리 신입생 환영회에서였다. 혁준의 우렁찬 인사에 다들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혁준의 소개 차례가 되기 전부터, 아니 이미 혁준의 등장부터 지하 호프집의 모든 이목은 그를 향해 있었다.

“환영합니다! 환영하는 의미에서 거국적으로 한잔 합시다, 짠!”

동아리 회장이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맥주잔을 치켜든 후에야 몇몇 사람이 호응하기 시작했고, 맥주잔이 비어지는 만큼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어우, 혁준이 술 잘 마시네.”

“네, 못 마시진 않아요.”

“성격도 시원시원하고, 난 성격 좋은 사람 제일 좋아해. 이제 우리 베프야, 베프!”

동아리 회장이 혁준의 어깨를 감싸며 객기를 부렸다. 은수는 일부러 더 외면하고 있었지만 이상하게 자꾸 눈이 마주치는 것 같은 혁준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야, 근데 재벌 이런 거 떠나서 객관적으로 진짜 잘생기지 않았어?”

“그치, 저 얼굴이면 거지에 여자 등쳐 먹는다고 해도 만나지.”

“거지에, 사기꾼이라도 쟤가 너는 안 만나 줄걸?”

동아리 여자애들만 모인 테이블에서는 송혁준에 대한 얘기 말고는 안주가 없는 듯했다. 은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수연이 물었다.

“은수 네가 보기엔 어때? 저런 남자 친구 어떨 거 같아?”

은수가 혁준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저런 애는 나 안 좋아해.”

“야, 그냥 하는 말이지! 만약에, if 가정법! 남자 친구면 어떨 거 같냐고.”

“근데 은수랑 좀 잘 어울리긴 하겠다. 우리 학교에서 저 급에 어울리는 얼굴은 은수밖에 없잖아.”

“음대 박예린도 예뻐.”

“야, 걔는 좀 싸 보이게 생겼지. 그리고 걔 다 뜯어고쳤대. 고급지면서도 자연스럽게 예쁜 건 은수 못 따라와.”

은수가 뭐라 대답할 틈도 없이 대화가 계속 이어졌다. 2차로 자리를 옮기고, 그곳에서도 두세 번쯤 테이블이 돌았을 때였다. 내내 다른 테이블에만 있던 혁준이 은수 앞에 자리를 잡았다.

“누나도 사진 찍는 거 좋아해요?”

눈가가 약간 발개진 혁준이 물었다. 취한 것 같진 않았다.

“네, 좋아해요.”

“저두요. 대학교 들어오면 꼭 하고 싶었어요. 사진 동아리.”

혁준이 맥주를 채워 달라는 듯 은수 앞에 잔을 내밀었다. 은수가 김빠진 맥주를 혁준의 잔에 따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좀체 떠오르지 않았다.

“주말에 식물원 출사 가요?”

혁준이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입가에 남은 물기를 손등으로 닦으며 물었다.

“네, 아마 갈 것 같아요. 가요?”

은수가 되물었다.

“네, 누나 가면 저도 가려구요.”

어두운 조명 속에서도 눈을 마주치며 빙긋 웃는 혁준의 미소가 빛났다. 해를 끼치지 않을 사람의 미소. 선한 미소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귀하게, 아무 부족함 없이 자란 사람만이 내뿜을 수 있는 특별한 아우라라고. 선함 또한 특권이라고.

하나둘씩 화장실에 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더러운 소파에 얼굴을 묻고 쓰러질 때쯤, 은수는 수연과 함께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프집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수연의 남자 친구와 인사를 한 후 둘을 먼저 보내고, 은수는 정류장 쪽으로 몸을 돌렸다.

밖으로 나오자 선선한 밤공기에 술이 좀 깨는 듯했다. 몇 걸음도 채 떼지 않았을 때였다.

“은수 누나.”

뒤를 돌아보자 커다란 학과 점퍼를 입고 어깨에 가방을 대충 둘러멘 혁준이 허겁지겁 따라오고 있었다.

“무슨 일로…….”

당황한 은수가 말끝을 흐렸다.

“누나, 말 놓으세요.”

혁준의 낮은 목소리가 밤거리에 울렸다.

‘겨우 이런 말 하려고 이렇게 급하게 따라 나온 건가?’

“네?”

“말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 살 어리잖아요. 우리, 인연이기도 하고.”

쑥스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 혁준 앞에 은수는 속에서부터 무언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울분이었을까, 열정이었을까.

‘인연이라면, 우리 아빠가 너네 아빠 부하 직원인 그런 인연을 말하는 거니?’

은수는 묻고 싶었지만 말은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대신 혁준이 말을 이어 갔다.

“저 사실 누나 본 적 있어요. 서 비서님이 사진 보여 주셔서……. 대학교 입학식 사진이요. 서 비서님이 되게 자랑 많이 하셨어요. 과외 한번 안 받고 명문대 들어갔다고.”

은수의 뺨이 붉게 달아올랐다.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술이 갑자기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요.”

어떻게 하면 당황한 티를 내지 않고 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까, 은수는 온통 그 생각뿐이었다. 은수의 두 눈이 어디에 닿아야 할지 몰라 방황했다.

“사진 동아리에서 만나게 돼서 너무 신기해요. 저 생각했었거든요, 누나 되게 미인이라고. 언젠가 꼭 사진 찍어 보고 싶다고.”

은수는 그제야 혁준을 똑바로 올려다봤다. 심장이 거짓말처럼 부풀어 오르고 밤바람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의 선한 눈매가 내 주인은 거짓말을 할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혁준은 수줍게 웃고 있었다.

혁준도, 은수도 알지 못했다. 술김에 내지른 혁준의 고백이 은수의 세상을 어떻게 뒤집고 온통 헤집어 놓을지, 아직 여물지 못한 두 사람의 몸과 마음을 어떻게 산산조각 낼지.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가 어떻게 서로의 전부가 되고, 그 전부가 어떻게 무너져 내리고, 무너져 내린 무저갱 속에 남겨진 존재는 얼마나 무력하고 처참할지.

그리고 그 파멸의 한가운데에 짐승처럼 웅크리고 앉아 으르렁대는 또 하나의 존재를 은수는 감히 상상한 적도 없었다.

그녀를 수렁에서 건져 올리고, 그녀를 구원하고.

다시 그녀를 차가운 얼음 바닥 위에 내친 포식자.

날개를 가진 악마이자 탐욕스러운 구원자.

핏빛 발톱 안에 알몸의 그녀를 잡아 가둔 성난 괴물.

다시는 마주하고 싶지 않은…….

미친 듯이 빨려드는 그의 존재.

***

“서 MC야! 굿 뉴스, 굿 뉴스!”

전화를 받고 돌아온 김 대표가 잔뜩 신이 나 호들갑을 떨었다.

“무슨 일이에요, 대표님?”

“내가 방금 어디서 전화 받았게?”

지난주 자인 미술관 개관식 이후로 은수에게 미안해하며 풀이 죽어 있던 김 대표가 오랜만에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녀에게는 곁에 있는 사람까지 덩달아 에너지를 받게 하는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어디서 받으신 건데요?”

김 대표는 대단한 비밀이라도 알려 주는 것처럼 눈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BJ엔터테인먼트.”

BJ라는 이름이 나오자 옆에 있던 직원들의 이목이 일순간 집중됐다.

“어머! 거기 강유랑 이동운 소속사 아니야?”

“신현우도 거기 소속이야.”

“대박! 거기서 우리 회사를 왜 찾았대요?”

김 대표가 으쓱해하며 말했다.

“다 잘난 사장님 덕분 아니겠냐.”

직원들이 아무런 반응 없이 얼굴만 쳐다보자 김 대표가 머쓱해하며 말을 이었다.

“농담이고. BJ에서 이번에 국제 행사를 하나 하는데, MC랑 통역을 은수한테 해 달라네?”

“에이, 뭐예요 대표님. 그냥 서 MC님 개별 섭외 들어온 거잖아요. 우리랑은 상관도 없는 일이네. BJ면 행사팀 따로 있을 테니까 용역이 필요하진 않을 거고.”

“야, 서 MC가 우리 회사 소속인데. 서 MC 일이 우리 회사 일이고, 서 MC가 가서 잘하면 우리 회사 홍보하는 거고. 그게 다 그런 거지…… 지금 따지냐?”

“그렇긴 하죠. 잘됐네요. 서 MC님.”

들뜬 김 대표와 직원들에 둘러싸인 은수는 말이 없었다. 누가 자신을 섭외했는지 알 것 같아서였다.

“자인 미술관 개관식 때 BJ 관계자가 있었나 봐. 그때 MC 봤던 여자 분이 꼭 사회 봐 줬으면 좋겠다면서 아주 나한테 사정, 사정을 하더라고. 휴! 내가 인물을 뽑긴 했지. 우리 은수 그렇게 고생하더니 내가 이렇게 활짝 필 날 곧 올 줄 알았다, 알았어. 이번 행사 MC 보고, 이참에 방송 진출도 하고, 해외도 나가고……. 은수야, 내가 너 잘돼도 발목 안 붙잡을게. 그니까 파이팅해서 잘하자, 응?”

잔뜩 흥분해서 혼자 먼 미래까지 내다보는 김 대표에게 은수는 뭐라 말을 할 수 없었다. 회사에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을 명분이 없을뿐더러, 짐작은 가지만 그 일의 배후에 있는 게 현우가 확실한지 확인도 못한 상황에서 일을 거절할 핑계도 없었다.

은수는 현우와 마주쳤던 지난주 개관식의 밤을 떠올렸다. 6개월만이었다. 6개월 전 파리에서 혁준을 그런 식으로 보내고,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을 수 없었다. 혁준이 현우와 자신을 목격한 바로 그 밤, 은수는 현우를 피해 파리를 떠났다. 혁준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으로 한국에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곳에 남아 현우를 다시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현우는 자신을 과거의 수렁으로부터 건져 내 한 줄기 빛을 보게 한 다음, 다시 더 깊은 수렁으로 내동댕이쳤다. 현우를 원망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와의 인연이 그런 것이었을 거라고,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사이였을 거라고 은수는 체념했었다. 현우는 은수 자신의 욕망, 복수심, 그리고 갈 곳 잃은 사랑의 집결체이자 상징과 다름이 없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혁준의 눈앞에서 죄로 불태워졌다.

그런데 불과 며칠 전의 그 밤, 텅 빈 미술관에서 현우는 마치 지옥으로 떨어졌다가 살아 돌아온 야수처럼 생생하게 은수 앞에 나타났다. 회피할 수 없는 진실처럼 그녀의 숨통을 옥죄면서.

‘……도대체 왜? 나한테 왜?’

은수는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만 깨물 뿐이었다.

***

“혁준이는 그 뒤로 못 만났고?”

둘이서 소주를 한 병 다 비웠을 때에야 수연이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성수동 은수의 원룸 근처 작은 이자카야에서 둘은 아주 오랜만에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응.”

은수가 잔을 내려놓으며 답했다. 어떤 이야기도 숨김없이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였지만, 수연에게도 파리에서 만난 남자가 신현우라는 사실과 혁준이 어떤 장면을 목격했는지는 차마 말하지 못했다. 파리에서 우연히 만난 한국 남자와 같이 있는 것을 혁준이 보고 그 길로 돌아섰다는 정도로 축약해서 전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차라리 잘됐어. 그렇게 안 됐으면 지금까지 질질 끌고, 괜히 너만 힘들었을 거야.”

“응, 그랬겠지.”

“마음 잘 추스른 거지?”

은수는 수연의 걱정하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응, 수연아.”

“그래, 얼굴 좀 좋아졌네. 파리에서 막 돌아왔을 때는 애가 얼마나 마르고 매가리가 없던지.”

엄마처럼 잔소리를 하는 수연이 고맙고 귀여워, 은수는 웃음이 났다.

“고마워, 수연아. 그때 너 아니었으면 진짜 힘들었을 거야.”

수연 덕분에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7개월 전 혁준을 버리고 파리로 떠난 사람이 다름 아닌 은수 자신이었지만, 그녀조차 진심으로 이별을 받아들이지는 못한 상태였다. 그의 가족을 포함해, 두 사람이 맺어질 수 없는 수많은 이유들로 인해 오랜 기간 서서히 지쳐 갔지만, 혁준은 은수에게 쉽게 끊어 낼 수 있는 종류의 사람이 아니었다.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다는 말을 이해하게 해 준 첫 사람이었다. 자신의 가장 순수하고 여린 시절을 함께 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다른 남자와 침대 위에서 뒹구는 모습을 보인 그날 밤이야말로 은수에게는 혁준과의 돌이킬 수 없는 이별 그 자체가 되어 버렸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트라우마로 남겨진 이별로 힘들어할 때 수연이 곁을 지켜 주었다. 자신의 집 근처에 은수가 지낼 원룸을 알아봐 주고,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은수를 보살펴 주었다. 은수는 그런 수연 덕택에 한 달 만에 기운을 차리고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할 수 있었다.

수연과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은수는 적당히 기분 좋게 취해 있었다. 수연과 이렇게 여유 있게 저녁을 먹은 것도 몇 달 만이었다. 은수도 새 직장에 적응하느라 정신없었고, 로펌에 다니는 수연은 야근과 주말 근무가 일상이었다. 바쁘게 지내는 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은수도, 수연도 생각했다. 힘들었던 과거는 덮고 이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때였다.

그런데 6개월 만에 그가 다시 은수의 삶에 등장했다. 파리에서의 인연으로 끝이 났어야 할 그가, 겨우 서울 생활에 적응해 나가고 있는 은수 앞에 악몽처럼, 불행의 전령사처럼 나타났다.

은수는 지난 6개월간 잊으려고 무진 애를 쓰면서도 그와 파리에서 함께 한 환희의 순간들을 한시도 잊을 수 없었다. 혁준과의 이별에 가슴 아파하면서도, 현우와 함께 걸었던 파리의 거리 곳곳, 에펠탑의 정경과 도시의 야경, 따뜻했던 그의 몸과 모든 것을 다 줄 거라 말하는 듯했던 눈빛이 여전히 선연하게 은수의 존재를 지배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 무심코 돌아보면 전광판에서, 버스 정류장에서, TV와 스크린에서 하루에도 몇 번이나 그의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은수는 그와 한 몸이었을 때 느꼈던 그 충만함에 다시 사로잡히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저릿해졌다. 마치 주문에 걸린 것처럼, 은수는 자신의 신체와 정신 모두를 그 사람에게 빼앗기고 만 것 같았다.

그렇게 6개월을 보내고 자인 미술관의 개관식에서 다시 만난 그를 떨쳐 내는 일은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자신을 막아선 현우를 앞에 두고, 그토록 몸서리치게 그리워했던 그의 입술이 뜨거운 숨을 자신의 이마 위에 내뱉으며 달싹이는 것을 바라만 보는 일은 초인적인 인내력을 필요로 했다. 당장이라도 그에게 키스를 퍼부을 것 같은 자신을 억누르기 위해 너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네가 다 망쳐 놨다고 모진 말을 쏟아 내야만 했다.

결국 그가 먼저 시작한 키스로부터 헤어 나오게 만든 것은, 그 키스로 인해 다시 무너져 내리고 있던 은수를 신현우라는 미궁으로부터 빠져나오게 만든 것은 이번에도 혁준의 잔상이었다. 현우의 날카롭고도 감미로운 키스는 온몸의 감각을 일깨우며 정신을 또렷하게 만들었고, 은수의 가슴 속에 가시처럼 박힌 혁준에 대한 죄책감을 더욱 뾰족하게 살려 냈다.

하릴없이 또 그날 밤을 떠올리며 은수가 서울의 밤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집이었다. 이 골목만 돌아서면…….

“서은수.”

고개를 들자 거짓말처럼 그가 눈앞에 서 있었다.

어두운 골목길, 가로등 불빛이 희미했지만 분명 그가 맞았다. 다시 볼 수 없을 거라고, 다시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모습과 목소리.

“……혁준아.”

오랫동안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이름이었던, 그러나 이젠 울음과 함께 삼켜야 하는 이름이 되어 버린 ‘혁준’이라는 단어가 모래처럼 은수의 목구멍을 긁었다.

혁준은 위아래로 깔끔한 감색 슈트 차림이었다. 수연으로부터 그가 한성그룹의 계열사에서 과장 직급으로 일을 시작했다는 말을 들었다. 낯선 슈트 차림의, 깔끔하게 머리를 넘겨 올린 혁준의 실루엣은 마치 날이 서 있는 것 같았다. 그와 처음으로 마주 섰을 때, 꽃샘추위가 한창이던 교정을 다 녹일 만큼 따뜻했던 그의 눈은 이제 아무런 표정도, 온도도 지니고 있지 않았다. 마치 다 쓰고 버릴 물건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에 은수는 벌써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조용한 데 가서 얘기 좀 해.”

혁준의 목소리가 지극히 차가웠다.

“어디로…… 어디로 갈까?”

은수는 눈물을 감추려 허둥거렸다. 이렇게 혁준이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파리에서 그렇게 끝난 것이라고, 첫사랑에 대한 예의도 없이 그토록 추잡하게 혁준과는 끝이라고 생각했었다. 설령 그와 다시 만난다 해도 얼굴을 똑바로 들고 그를 마주 볼 자신도 없었다. 그가 어떤 상처를 받았을지 감히 가늠할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제대로 헤어지려고 왔어.”

두 사람 말고는 손님이 없는 포장마차 안, 혼자 몇 잔째 소주만 들이켜던 혁준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은수는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부여잡으려 조심스레 첫 잔을 들이켰다. 소주잔을 내려놓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처음 헤어졌을 땐, 네가 말도 없이 사라져 버려서 제대로 이별하지 못했고, 두 번째 헤어졌을 땐, 네가 다른 놈이랑 뒤엉켜 있는 바람에 제대로 못 했잖아. 두 번 다, 나한텐 어떤 말도 할 기회가 없었어. 그거 아니?”

은수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다는 말조차 혀 밑에 꾹 막혀 나오지 않았다. 은수가 눈물을 흘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왜 몰랐을까, 네가 이렇게 이기적인 여자인 줄. 그저 네가…… 네가 너무 좋았어. 서 비서님이 보여 준 사진 속에서 웃고 있는 스무 살의 너를 봤을 때부터. 너는 나한테 처음 경험하는 자유였고, 나만 들어갈 수 있는 성역이었고, 내 여신이었어.”

은수는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에 앞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혁준의 모든 말이 과거형이라는 사실에 가슴이 짓이겨지는 듯했다.

“그러려고 떠났니? 다른 남자랑 붙어먹으려고?”

혁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은수가 어렵게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아니라고, 너를 떠나고 싶지 않았다고, 너는 내 전부였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 어떤 말도 발화되지 않았다. 혁준과 그녀의 사이에는 이미 거대한 골짜기가, 건널 수 없는 높고 깊은 절벽이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참기 어려운 것은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혁준의 눈빛이었다.

“넌 우리 기억마저 더럽힌 거야. 네가 저지른 일이, 우리 사이에 있었던 그 기억들을 다 아무것도 아닌 걸로 만들어 버린 거야. 내 인생에서 그 시간들을 다 도려내고 싶을 만큼 천박하고 역겨워. 너 같은 여자를 사랑했던 내 시간들이…….”

은수는 차라리 자신을 때리고 욕했으면, 정신 못 차리게 뺨을 휘갈겨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이걸로 끝이야. 서은수 너랑 나. 이제 아무것도 아니야, 우린.”

혁준이 일어나 떠난 빈자리가 은수의 눈을 쑤셨다. 이제 혁준의 이름과 우리라는 말은 함께 쓸 수 없음에 귀가 멍멍하도록 눈물이 쏟아졌다.

아주머니가 조용히 문 닫을 준비를 하는 포장마차 안에서 은수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한참을 혼자 울었다.

***

광고 촬영장은 신현우의 등장만으로 이미 압도돼 있었다. 관계자와 모든 스태프들의 시선이 카메라 앞 신현우 한 사람에게 쏟아지고 있었다. 광고의 대상인 신형 세단은 신현우의 신전을 꾸미는 장식품 정도로 보일 뿐이었다.

“괜히 신현우, 신현우 하는 게 아니구나.”

“풍기는 아우라부터 다르네, 정말.”

“어떻게 한국인한테서 저런 비율이 나오지?”

“남자가 봐도 저건 인정.”

검은 머리칼이 잘 정돈돼 뒤로 넘겨진 모습은 자동차의 유려한 곡선을 닮아 있었고, 셔츠와 슈트, 그리고 구두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맞춰 입은 모습은 퇴폐적인 아름다움마저 뿜어내고 있었다.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우상이자, 이제 자본주의를 지배하게 된 우상의 모습이었다.

강남, 돈, 인기의 상징성을 의인화한 것 같은 신현우의 모습은 무섭도록 완벽했지만, 눈빛만은 허기진 야수처럼 정처 없었다. 그것을 알아보는 사람은 규호뿐이었다. 광고 촬영을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규호가 먼저 입을 열었다.

“형, 그렇게 안 자다가 정말 큰일 난다.”

“…….”

“윤 박사님 만나 볼래?”

“됐어, 그냥 며칠 좀 못 잔거야.”

규호는 백미러로 현우를 힐끗 보았다. 현우는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형, 혹시 그 여자 때문이야?”

“아니야.”

“미술관 행사에서 그 여자 만나고 온 후로 죽 그러잖아. 뭔데, 말해 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규호는 걱정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직후 바로 들어간 드라마 촬영이 최근에야 끝이 났다. 작품 한 편을 마친 후에는 긴장이 풀려 늘어지기 마련이었지만, 이렇게 지친 현우의 모습은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지난 7년간 현우는 워커홀릭처럼 일에 매달렸고 일을 할 때 가장 즐거워 보였었다. 규호가 지쳐서 일을 그만두려고 했을 때 그를 붙잡고 다독인 사람도 다름 아닌 현우였다. 잠을 못 자고 밥을 못 먹어도,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 얼마 남지 않게 됐어도, 현우는 육체적인 피로나 사적인 감정이 일에 영향을 미치도록 내버려 두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현우는 겉만 멀쩡한 허깨비 같았다. 파리에서 돌아온 이후 내내 그런 상태였지만 드라마 촬영을 하는 동안은 스스로 다잡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일이 끝나고 나자 나사 풀리듯 현우가 무너져 내리는 것을 규호는 알 수 있었다.

백미러로 보이는 현우는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리고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파리에서 돌아온 후로 밀린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정신없이 바빴다. 지방에서 드라마를 촬영하면서 틈틈이 광고와 화보 촬영에, 인터뷰에, 드라마 홍보에 서울을 오가며 하루 서너 시간 차 안에서 쪽잠을 자는 게 익숙해져 버렸다. 드라마가 끝나고 시간이 많아진 후에도 현우는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침까지 뜬 눈으로 지샌 날이면 현우는 규호가 주소를 알아봐 준 은수의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워 두고 그녀가 출근하는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오늘은 용기를 내서 만나야지, 저녁에 다시 와서 얼굴 보고 얘기해야지, 다짐만 하기를 수없이 반복했었다. 그러다 일주일 전 자인 미술관 개관식에서 그녀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현우는 자기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너무 오래 참고 꾹꾹 눌러둔 그리움과 원망과 투정 부리고 싶은 마음, 그 모든 것들이 뒤섞여 결국 그녀를 힘으로 옭아매고 강제로 묶어 두려 했다. 마치 소중한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 힘을 주다가 오히려 그것을 망가뜨려 버리는 어린아이처럼, 현우는 은수 앞에서만 서툴고 어리석었다. 자신이 그런 것을 알면서도 그녀에 대해서는 도저히 이성적일 수 없음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현우는 긴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멀리 지평선 너머로 땅거미가 지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되돌릴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널 가질 수 있지? 어떻게 하면 내가 널 다시 웃게 만들 수 있는 거니…….’

***

은수는 행사 사회자를 위해 따로 마련된 대기 공간에서 큐카드를 반복해서 읽고 있었다. 전체 행사 시작은 30분 후였고, 마지막 장비 체크와 동선 체크로 모든 스태프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대기실 안에서 단장을 마치고 가만히 앉아 있는 은수에게도 바깥의 분주함과 활기를 고스란히 전달되고 있었다.

은수는 현장의 생동감이 좋았다. 불어를 전공했기에 안정적인 교사나 일반 기업의 해외 마케팅으로 진로를 정할 수도 있었지만, 대학생 때 우연한 기회로 국제 행사 진행 요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꿈을 갖게 됐다. 행사장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언어로 연결해 주고, 그들 사이에서 부가가치가 창출되도록 돕는 일이 보람 있었다.

오늘 행사는 BJ엔터테인먼트가 기획한 디지털 플랫폼 런칭 행사로, 외국계 투자가들과 BJ 소속 연예인들의 국내외 팬이 함께 모이는 자리였다. BJ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소속 아이돌 그룹의 엄청난 인기로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유치할 수 있었고, 그 덕에 연예인과 팬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플랫폼을 만들게 됐다. 오늘은 그 결과물을 처음 세상에 내놓으면서 팬들에게 홍보하는 자리였다. 은수의 역할은 메인 행사인 오프닝 사회와 BJ 회장의 플랫폼 설명회 통역이었다.

행사 경험이 적진 않았지만 매번 긴장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더구나 오늘은 유독 더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오늘 행사를 잘 끝내고 나면 은수의 커리어에 새로운 발판이 되어 줄 게 분명했다.

BJ는 한국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기획사계의 신흥 강자였고, 그런 BJ가 주최하는 수천 명 규모의 국제 행사 진행은 은수 같은 신입 MC에게 탄탄대로를 열어 주는 천혜의 기회였다. 이 기회를 자신에게 준 것이 누구인지는 잠시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집중하자. 잘 해낼 수 있어.’

은수는 동그란 조명이 달린 거울 속 자신에게 다짐하며 다시 큐카드를 넘겼다.

***

“사회 잘 보네, 서은수 씨. 영어도 엄청 잘하고.”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보며 규호가 말했다. 천장의 커다란 화면에 마침 은수가 클로즈업돼 나타났다. 오프닝 세리머니와 BJ 신입 아이돌의 축하 공연이 끝난 후 강 대표의 플랫폼 설명회가 진행되고 있었다. 은수는 연분홍색 슈트를 입고 포디움에 서서 강 대표의 말을 동시통역하는 중이었다.

머리를 만져 주는 스태프의 팔 사이로 힐끗 모니터를 한 번 보는 것으로 현우는 규호의 말에 대한 대답을 대신했다.

“형, 엘리트 취향이었냐?”

스태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를 틈타 규호가 현우에게 바짝 다가와 속삭이듯 물었다.

“얼굴 저리 치워라.”

현우는 성가시다는 듯이 규호에게 손사래를 쳤다. 규호는 멀찍이 피해 가면서도 그만둘 생각이 없는 듯했다. 현우를 이렇게 놀릴 기회는 흔히 찾아오는 게 아니었으니 당연했다.

“한국대 나온 여자는 다르구나. 되게 멋있네. 세상 참 불공평해 그치? 요즘은 공부 잘하는 애들이 얼굴도 더 예쁘고 잘생겼다니까? 이성윤 형 봐 봐, 형 그 형이랑 친하지 않아? 말은 통해? 형은 공부 못했지?”

“아이씨.”

현우가 규호를 때리는 시늉을 하며 일어섰다.

“신현우 배우님, 스탠바이해 주세요.”

그때 현우의 대기실 문을 빼꼼히 열고 현장 스태프가 안을 향해 소리쳤다.

“가자, 가자. 얼른 가자! 신현우 배우님.”

규호가 입가에 미소를 흘리며 현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현우는 부대행사 중 하나에 참가해야 했다. 강 대표의 설명회가 진행되는 메인 무대와는 좀 떨어진 별도의 볼룸에서 BJ 소속 배우들의 팬들과의 만남이 진행되고 있었다. 정식 팬미팅이 아니었고 급하게 공지됐음에도 500~600명 정도의 팬들이 모여들었다.

“네, 신현우 배우님을 소개합니다. 큰 박수로 맞아 주세요!”

개그맨 출신의 사회자가 현우를 소개하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쏟아졌다. 현우는 감색 슈트를 아래위로 맞춰 입고 하늘색 드레스 셔츠에 노타이 차림이었다. 현우가 무대에 등장하자 행사장 전체에 청명한 바람이 이는 듯했다.

현우 외에도 BJ 소속 배우들이 몇몇 연이어 등장하고, 배우들의 인사말과 근황 토크가 이어졌다. 여러 배우들을 이렇게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없었기에 현장의 분위기는 금세 달아올랐다.

“네, 이번에는 신현우 씨에게 질문을 좀 해 보겠습니다.”

현우가 웃으며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신현우 씨 새로 들어가는 영화에서 아주 찐한 멜로를 선보인다고 하시는데, 어떠신가요? 본격 멜로는 처음이시죠?”

“네, 꼭 해 보고 싶었던 장르였지만 그동안 기회도 없었고, 자신도 없어서 망설였었는데요. 이번에 좋은 시나리오를 운 좋게 만나게 됐습니다.”

“아, 기회가 없으셨다는 건 알겠는데, 자신이 없었다는 건 무슨 말씀이시죠?”

정해진 대본대로였다면, 현우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장르라 선뜻 시작하기 어려웠다고 말했어야 했다. 현우는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그동안 일만 하고 사느라 제대로 연애를 해 본 적이 없어서 멜로는 영 자신이 없었는데, 이제는 좀 감정이입을 할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아……. 네, 감정이입을 하실 수 있게 됐다구요?”

사회자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규호는 사색이 되어 무대 뒤에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었다. 설명회를 마친 강 대표가 현장 체크를 위해 곧 이쪽으로 넘어올 참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설명회가 이미 끝났는지 BJ 소속 직원들 몇이 객석 뒤편에서 서성이며 강 대표를 맞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설명회를 성공적으로 마친 은수는 대기실로 향하고 있었다. 본인의 진행과 통역을 모니터한 후 BJ 행사 팀장에게 확인만 받으면 오늘 할 일은 다 한 셈이었다. 현장은 여전히 시끌시끌했다. 대기실로 향하는 길 복도에 설치된 모니터 앞에서 스태프들이 모여 웅성대고 있었다.

“네, 최근에 제대로 된 연애를 좀 해 본 것 같아서요.”

“아, 하하하……. 네, 그러시군요.”

사회자가 객석의 눈치를 보며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가야 할지 고민했다. 객석은 현우의 뜬금없는 고백에 분위기가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뜨거워지고 있었다. 사회자는 임기응변을 발휘하기로 했다.

“이번 영화에 앞서서 미리 뜨거운 사랑을 경험하셨나 보죠?”

현우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지켜 주고 싶은 여자를 만났는데, 쉽지가 않네요.”

“아, 혹시 현재 진행 중이신 건가요?”

“네. 일단 저는요.”

은수는 모니터 앞에 멈춰 서서 더 이상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짝사랑이라는 말씀이신 건가요?”

“그런 것 같아요. 제가 그 여자를 지켜 주려다가 도리어 더 상처를 주게 된 일이 있었는데, 그 일로 저를 많이 미워하게 됐어요. 시간을 돌리고 싶을 만큼 너무 마음이 아프고,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어요.”

“아, 신현우 씨를 이렇게 애태우다니……. 정말 대단한 여자분인 것 같네요.”

“대단한 여자라기보다는, 저와 좀 닮은 것 같아요. 목표하는 바가 있으면 이뤄야 하고, 세상 앞엔 당당하지만 혼자 외로움을 많이 타는 게, 혼자 끙끙 앓고 남몰래 슬퍼하고 그런 게 많이 닮았어요. 그 여자를 보고 있으면 제 자신의 가장 약한 부분을 보는 것 같아요. 극복하지 못할 약점 같고, 아물지 않을 상처 같고 그래요. 아무도 못 보게 저만 보고 싶고, 자꾸 들여다보게 되고, 안 보면 생각나고 궁금해서 미칠 것 같죠. 만나서 마주 보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싶은데, 용기를 못 내고 있는 제 자신이 너무 미워지고. 나를 사랑해 주는 것까진 바라지 않을 테니까, 그냥 내 앞에서 다시 웃어 주기만 했으면 하고 바라는 마음…… 아시나요? 저 어떻게 해야 되나요? 다들 이렇게 힘들게 사랑하시나요?”

행사장의 모든 사람들이 어느새 현우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현우의 눈빛에는 그가 연기한 어떤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볼 수 없었던 슬픔과 따뜻함이 감돌고 있었다. 객석은 조용히 숨죽여 그의 독백에 귀 기울였다.

규호는 객석 한쪽에 숨어 사회자와 눈이 마주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드디어 사회자와 눈이 마주치자 규호는 손칼로 목을 치는 시늉을 하며 입모양만으로 ‘잘라, 자르라고!’를 외쳤다.

“……아, 예! 여기까지 신현우 씨 말씀 잘 들었고요, 새 영화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우리 이아정 배우님 만나 볼까요?”

정신을 차린 사회자가 급하게 다음 순서를 진행했고, 현우는 옆에 앉은 여배우에게 마이크를 넘겼다.

***

은수가 거리로 나왔을 때 밖은 이미 어둑해져 있었다. 요즘 들어 해가 제법 길고 쨍해졌지만 오늘 저녁은 바람이 불고 하늘에 먹구름이 가득했다. 곧 비가 쏟아질 모양인지 대기가 습하게 찐득거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를 타려면 행사장 건물에서 십 분 정도 떨어진 정류장까지 걸어가야 했다. 행사를 무사히 끝마친 안도감과 성취감을 느낄 겨를도 없이 은수는 현우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복잡해져 버렸다. 정류장으로 가는 방향이 맞는지 확인도 하지 않은 채 그저 발길이 닿는 대로 걷고 있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지? 대체 왜?’

퇴근길 꽉 막힌 강남대로를 멍하니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현우가 묵묵히, 그렇지만 꾸준하게 자기 삶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반대하고 막아도 소용없는 일이라는 예감이 엄습했다. 설령 결국 상처받고 끝날지라도 이미 시작된 일을 돌이킬 수 없게 되어 버린 것 같은 예감.

생각에 잠겨 있는 은수 앞으로 은회색 SUV가 멈춰 섰다. 창을 내려 드러난 운전석의 얼굴은 다름 아닌 현우였다. 당황한 은수를 무표정하게 바라보며 현우가 말했다.

“데려다줄게, 같이 가자.”

은수는 차갑게 고개를 돌리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심장이 망가진 것처럼 제 맘대로 뛰기 시작한 것을 절대로 들키고 싶지 않았다.

“안 타면 내려서 소리 지를 거야. 시민 여러분 저 신현우예요! 저 여기 있어요! 이렇게.”

천천히 주행하며 은수를 쫓아오는 현우는 손나팔까지 만들어 정말 큰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은수는 얼빠진 얼굴로 어쩌지 못하고 황급히 주변을 살폈다. 러시아워에 짜증이 날 대로 난 운전자들이 여기저기서 경적을 울려 대고 있었다. 현우는 아랑곳 않고 은수 앞에 멈춰 서 있었다. 태연하게 그녀를 응시하며 기 싸움을 벌이던 그가 이윽고 운전석의 창문을 내리고 밖을 향해 소리를 지르려던 찰나, 은수가 어쩔 수 없이 조수석에 탔다.

“우회전해서 저 쪽 큰길가에 내려 주세요.”

은수가 강남대로를 벗어나는 우측 차선을 가리키며 말했다.

“집으로 가, 데려다줄게.”

사방이 막힌 차 안, 그와 실랑이를 벌이느니 잠자코 있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은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차창 밖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붉은 후미등의 행렬만을 뚫어져라 주시하고 있었다. 자인 미술관에서 마주친 이후로 또다시, 현우와 이렇게 좁은 공간에 단둘이 있게 돼 버렸다. 은수는 단호하게 뿌리치지 못하고 차에 타 버린 자신을 원망했다.

지난주 혁준과의 이별 후 은수는 도리어 담담해진 차였다. 모진 말을 듣고 실컷 울고 나니 혁준과는 정말 끝이 났다는 걸 받아들일 수 있었다. 지난했던 이별의 끝에 다다른 느낌이었다. 더 이상 쏟을 눈물도 미련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차분히 혼자 마음을 추스르고 있던 그녀에게 오늘 현우의 일방적인 고백과 무모한 도발은 원치 않은 파장이었다. 그에게 이런 식으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힘겨웠던 첫사랑을 끝내고 이제야 자신을 돌아보게 된 지금, 이 남자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버거웠다. 생채기 가득한 그녀의 삶 속으로 잔뜩 발톱을 세운 그를 끌어들일 순 없었다. 상처받을 일들이 너무나 두려웠고, 그에 대한 원망과 분노를 가장해 그의 손을 마주 잡지 못하는 자신의 용기 없음을 억지로 감추기 힘에 부쳤다.

이제라도 내려 달라고 말하려 했을 때, 은수는 현우의 차가 성수동으로 진입하고 있는 것을 알아챘다.

‘우리 집 말해 준 적 없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은수가 눈을 가늘게 뜨고 현우를 바라봤다. 현우는 전방만 주시한 채로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규호가 알아봐 줬어. 어디 사는지. 몇 번 찾아갔었어, 너 보려고.”

앞뒤 안 가리는 솔직한 대답에 은수는 더 분통이 터졌다.

“매니저 시켜서 나 스토킹이라도 해요?”

잠시 말이 없던 현우가 왼팔을 창턱에 걸고 왼손으로 턱을 쓸며 은수를 한번 쳐다보곤 답했다.

“왜, 하면 안 돼?”

당당한 눈빛에 기가 찬 은수는 고개를 돌려 다시 창밖을 바라봤다. 더 눈을 마주칠 수 없을 것 같았다.

‘대체 무슨 꿍꿍이야, 이 남자…….’

빗방울이 차창을 때리기 시작했다. 한두 방울 천천히 시작된 비는 금세 소나기로 변했다. 습기와 빗소리가 바깥과의 장막을 형성하며 둘만의 공간으로 더 고립시키는 듯했다. 그의 향기가 짙어질수록 점점 더 세게 울리는 자신의 심장박동을 은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잠시나마 상상했다.

‘이런 식으로 꼬이지 않았다면, 이 남자를 절대 놓고 싶지 않았겠지. 미워하고 밀어내기는커녕 숨 막히게 끌어안고 도망가지 못하게 꽉 붙잡았겠지.’

은수의 눈에 물기가 어리려던 찰나, 현우의 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어느새 그녀의 집 앞이었다.

‘벌써…… 다 왔네.’

은수는 보란 듯이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지만 얼어붙은 것처럼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빗소리만이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을 채우는 가운데, 은수의 오른손이 차 문을 향해 달싹이다가 이내 가라앉았다. 앞을 주시하고 있는 은수의 시야에 기어를 바꾸는 현우의 오른손이 걸렸다.

“비가 많이 오네. 좀 있다가 비 그치면 가.”

현우의 말에 은수는 속마음이 들킨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자신을 붙잡는 말에 자극받아 은수는 용기를 낼 수 있었다.

“데려다줘서 고맙습니다. 그만 가세요.”

차문을 열고 다리를 내미려는 순간, 현우가 조수석으로 몸을 뻗어 차 문을 다시 닫았다. 은수의 코앞으로 그의 뜨거운 목덜미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고, 잠깐 열린 문틈으로 후드득 빗방울이 그의 팔목에 내려앉았다.

“왜 이래요, 정말.”

정신이 아찔해져서, 화가 날 정도로 아득해져서 은수가 그에게 짜증을 토해 냈다.

“사과하고 싶었어.”

그의 말투에 물기가 묻어났다. 아까 그녀를 차에 태우던 뻔뻔한 태도는 수그러지고 없었다.

“뭘요?”

퉁명스러운 은수의 물음에 현우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너한테 상처 준 것 같아서. 내가 다 망쳐 버린 것 같아서.”

“당신이 뭔데 나한테 상처를 줘요?”

커지는 빗소리와 함께 은수의 목소리도 격앙되고 있었다.

“당신이 뭘 알아서?”

참았던 눈물이 폭발하듯 흘러내렸다.

“그날 밤은…….”

“그날 밤 얘기하지 마세요. 감히, 당신이 입에 올릴 일 아니잖아.”

“…….”

“그 사람과 내가 얼마나 많은 계절을 함께 지나왔는지, 어떤 비를 맞고 어떤 바람 속을 헤쳐 왔는지 당신이 알아?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

은수는 자신이 그에게 이토록 화를 내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혁준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은 그의 탓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혁준을 잊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찾아와서 혁준이 없어도 충분히 살아 낼 수 있다고, 어쩌면 새로운 사랑을 시작할 수도 있다고 일깨워 준 사람이었다. 그리고 혁준과의 마지막 끈을 제 손으로 끊어 준 사람이기도 했다.

도리어 그에게 고마워해야 하는 게 아닌가, 스스로 의문을 품으면서도 은수는 말이 반대로 나가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독한 말을 쏟아 내면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다는 듯이. 새로운 사랑으로 자신을 구원해 주려는 그를 밀어내고 자기 연민에서 영영 벗어나지 않음으로써 혁준에 대한 죄책감을 덜 수 있다는 듯이.

“당신처럼 제대로 된 사랑 한번 못 해 본 사람이 뭘 알아요. 기껏해야 몸정이 다 아니에요? 착각하지 마요. 그딴 거 아무것도 아니니까. 애초에 나한텐 당신 같은 사람 안중에도 없었고, 그 잘난 몸뚱이 내가 이용한 거예요. 여자 몸이 고프면 다른 데서 찾으라고. 당신 충분히 그럴 수 있잖아.”

줄곧 차분하던 현우가 큰 숨을 몰아쉬며 소리쳤다.

“지난 사랑으로 왜 그렇게 너 자신을 혹사시켜? 대체 뭘 위해서? 그 사람은 널 상처 입히고 널 짓이겼어. 왜 거기서 벗어 나오지 못해? 제발 너 자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찾아.”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 어쩌면 난 그렇게 태어났나 봐요. 나 자신을 혹사하도록, 나 자신을 학대하고 상처 입히도록. 당신은 모르잖아, 내가 어떻게 자라고 어떤 일을 겪으면서 컸는지. 나 되게 이기적이고 되게 꼬였어요. 그래서 당신 이용한 거야.”

은수는 눈물 흘리며 현우를 노려보았다. 현우 또한 폭발하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시 소리쳤다.

“그러는 넌 나에 대해서 뭘 알아?”

“뭐라고?”

“네 그 잘난 사랑에 빠져서 내가 정말 보이기나 했니? 널 지켜 주고, 널 안아 주고, 널 보듬어 주는 날 한 번이라도 진심으로 생각했어?”

현우의 말에, 은수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처럼 충격에 빠졌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상처를 입은 건 자신만이 아니었다. 화려하고 강한 겉모습 뒤에 사랑하는 여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그저 그뿐이면 되는 한 남자가 자리하고 있는 것을 은수는 지금껏 외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상처받는 쪽은 언제나 자신일 거라고 너무 쉽게 속단하고 있었다. 은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 사랑을 시작할 수는 없어. 또 이렇게 시작부터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은 사랑에 내 인생을 걸 수는 없어…….’

“네 말대로 처음이야, 나는. 이렇게 누군가를 머릿속에서 떠나보낼 수 없는 게, 누군가를 생각만 해도 가슴이 저며 오는 게. 하루하루 더 애달프고 네가 너무 안쓰럽고, 그러다 보면 네가 너무 고파. 못 보면 미칠 것 같아서 네가 만나 주지 않을 거 알면서도 집 앞에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 근데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너한테 어떻게 사과하고 어떻게 구애해야 하는지 방법을 몰라서 네 앞에 나서지도 못했어. 그냥 나 좀…… 나 좀 이렇게 받아 주면 안 돼? 그냥 이대로?”

그린 것처럼 맑은 눈물이 현우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멈추기는커녕 점점 거세게 쏟아붓는 비에 풍경이 뭉개지는 만큼 두 사람의 시야도 안개가 차오르듯 흐려졌다.

***

늦은 시간, 자인 미술관의 관장실.

송정은 검은 슈트를 입은 삼십대 중반의 남자와 얘기를 나누고 있다. 3년째 송정의 개인 비서로 일하고 있는 권종욱 실장이었다.

“신현우가 왜…….”

송정은 전송받은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사진에는 은수가 은회색 SUV에서 내리는 모습이 찍혀 있었고, 열린 문틈으로 보이는 얼굴은 신현우가 분명했다.

“서은수 집 앞에서 찍힌 사진입니다. 송혁준 씨는 지난번 그날 이후로, 한 번도 서은수를 찾지 않았고요.”

권 실장의 보고를 듣는 둥 마는 둥, 송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짜증 섞인 손짓으로 사진을 넘겼다. 은수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혁준과의 사이를 감시하려 사람을 붙였건만, 이런 의외의 결과물을 얻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신현우라니. 그토록 탐났던, 그 어떤 다이아몬드보다 단단했던 신현우가 이렇게 퉁퉁 부은 눈으로 고작 이런 여자애를 집 앞에 내려 주고 있다니.

“……대체 뭐하는 년이야.”

송정은 입술을 잘게 깨물며 핸드폰을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자인 미술관에서 재회한 신현우는 여전히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돈을 주고 살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송정의 외모에도, 돈과 지위에도 혹하지 않았었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고,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가장 예쁜 것. 송정은 그가 미치도록 갖고 싶었다.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해 두고 내 것이라고 세상에 자랑하고 싶었다.

‘그런데 서은수, 고작 너 같은 애랑 같이 있다고?’

송정은 관장실의 통창 밖으로 보이는 서울의 야경을 무섭게 노려보며 말했다.

“신현우와 서은수, 무슨 사이인지 알아봐 줘요. 둘이 뭘 하는지, 뭘 먹는지, 어디서 만나는지 하나도 빼놓지 말고 다 감시해서 보고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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