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현우는 자신이 차린 저녁을 맛있게 먹는 은수를 말없이 바라봤다.
“왜? 내 얼굴에 뭐 묻었어요?”
시선을 느낀 은수가 물었다.
“예뻐서.”
현우가 자못 진지하게 받아치자 은수가 더 뾰로통하게 대꾸했다.
“오빠 소리 한 번만 더하면 얼굴에 구멍 나겠네.”
샤워를 마치고 바로 나온 은수의 머리는 아직 젖어 있었다. 화장을 하지 않아도 스물다섯, 가장 예쁜 나이의 은수는 빛이 나고 있었다. 시선이 어색해지기 시작했는지 은수가 물었다.
“왜 안 먹어요? 배 안 고파?”
“고파. 서은수 고파.”
“응?”
물을 한 모금 삼키려던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되물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만 왠지 바로 알아들은 티를 내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렇지만 이미 소용없었다. 현우의 눈가와 입가에 야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눈을 피하려고 했을 때 현우의 긴 팔이 테이블 너머 은수의 얼굴을 향했다. 현우의 엄지손가락이 입술에 닿는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현우가 그녀의 입가에 묻었던 양념을 쓰윽 제 입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쪽.
제 엄지손가락을 쪽, 하고 빠는 현우의 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하얀 이빨 사이로 살짝 비친 입 안의 속살이 핑크빛으로 빛났다. 은수는 그 맛을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달큰하면서도 날렵하고 부드러우면서도 저돌적인.
현우가 은수의 손을 붙잡아 그녀의 몸을 일으켰다.
“나 아직 다 못 먹었는데…….”
은수가 일부러 시선을 피하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려고 했지만 현우는 이미 뜨거워져 있었다. 샤워 가운 아래 아무것도 걸치지 않았기에 허리끈을 풀어 헤치는 현우의 손짓 한 번에 은수는 알몸이 되었다. 금세 얼굴이 새빨개진 은수는 양손으로 가슴과 밑을 나누어 가렸지만, 그럼으로써 현우의 욕정을 더 증폭시킬 뿐이었다. 손가락 사이로 꼿꼿해진 젖꼭지가 삐져나왔다. 현우는 강한 팔로 은수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은수를 침대에 던져 놓고 현우는 거칠게 자신의 옷을 벗어 제쳤다. 함께 지낸 며칠간 이제 세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많은 절정의 순간들이 있었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몸 속 깊숙한 곳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끓어올랐다. 은수의 알몸이 은은한 어둠 속에 대리석처럼 유연하게 빛을 내고 있었다. 우윳빛 곡선에 그림자가 지는 것을 보자 미칠 것 같았다.
“……현우 씨?”
짐승처럼 덤벼드는 현우의 열정에 은수는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거친 숨소리와 내리꽂는 듯한 애무에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현우의 움직임은 성난 황소를 연상케 했다. 거침없이 사방으로 질주하며 거대하고 단단한 뿔로 상대를 들이받는……. 은수는 어느새 자지러질 듯이 신음하고 있었다.
사위가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의 숨소리와 신음 소리만이 가득했다. 불 꺼진 파리에, 아니 이 세상 전부를 통틀어 오직 두 사람만이 있는 듯한 순간이 여러 번 지나갔다. 머리로 생각할 필요 없이, 말로 따질 필요 없이 본능이 이끄는 대로 환희를 찾아 떠나는 여정과 그 여정의 끝에 마주하게 되는 쾌락은 이미 이 세상의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끝에 이르는 모든 순간은 폭죽이 터지는 듯했고 광폭한 파도가 몰아치는 듯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이미 온전한 합일에 이른 것을 깨닫지 못하고 끊임없이 서로를 탐닉하고 있었다. 더 깊이. 더 세게. 더 빠르게. 그저 더, 더 할 수 없음에 속이 탔다.
현우는 땀으로 흥건히 젖어 신음하는, 새빨개진 얼굴의 은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랑해.”
은수의 눈이 순간 당황하는 듯했지만 현우를 피하지 않았다. 대답을 기대한 말이 아니었다. 그저 그 순간 내뱉지 않으면 자신 안에서 영원히 맴돌며 자신의 전부를 파괴할 것 같았다. 현우로서는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내뱉듯, 그 순간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키스해 줘요.”
은수가 자신의 깊은 곳에 들어와 있는 현우의 일부를 더 강하게 조이며 말했다. 현우는 더 단단해지며 더 깊숙이 그녀의 정수를 파고들었다. 은수가 소리 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현우는 혀를 내밀어 은수의 입을 막았다. 도망갈 곳이 가로막힌 두 개의 혀가 끈끈하게 서로를 감싸고 세밀한 구석까지 엉겨 붙었다.
“처음 너는 어땠는지 궁금해.”
현우가 자세를 바꿔 자기 위에 은수를 올려 태우며 말했다. 잠시 떨어졌던 두 사람은 은수가 예민하게 둔부를 움직여 맞는 자리를 찾아 들어감으로써 다시 하나가 됐다. 은수가 현우의 아름다운 복근 위에 두 손을 받치고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 그리고 곧 춤추듯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처음의 나?”
은수의 허리 돌림이 서서히 빨라지고 있었다.
“아무도 너를 갖지 못했을 때의 너.”
은수의 가슴이 한 방향으로 찰랑이는 것을 눈동자로 끈적하게 따라가며 현우가 말했다.
“궁금해서 미칠 것 같아.”
현우가 은수의 허리를 거칠게 휘어잡으며 말했다. 그는 은수를 엎어 놓고 허리를 끌어 올렸다. 가는 두 팔목을 한 손으로 잡아 그녀의 등 뒤에 묶어 놓듯 고정시켰다. 얇은 허리가 한 줌에 잡힐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의 뒤에서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온몸의 무게를 오른쪽 뺨과 세운 두 무릎으로 지탱하며 폭주하는 현우의 힘까지 받아 내느라 눈물이 날 만큼 힘겨웠지만 은수 또한 타오르는 쾌락을 멈출 수는 없었다.
‘그 새끼가 너를 처음 가졌을 때, 그때도 너는 이렇게 신음했을까? 이렇게 몸을 뒤틀며 울부짖었을까? 나는 영원히 갖지 못할 그 순간의 너는 지금처럼 이렇게 따뜻하고 미쳐 버리게 예뻤을까?’
현우의 움직임이 점차로 광폭해지며 마치 자신에게 바쳐진 제물을 희롱하는 괴물처럼 변해 갔다. 그는 겁먹은 제물을 손 안에 가둔 채 조건 없는 숭배를 강요하고 있었다.
“……그만! 더 못하겠어요.”
무릎으로 버티던 은수의 몸이 무너져 내렸지만 현우는 멈추지 않았다. 등 뒤로 고정시킨 그녀의 두 손을 오히려 더 꽉 잡은 채 그녀를 한 치도 내어 줄 수 없다는 듯이 가득 조여들었다. 두 손이 묶인 은수의 몸통이 격하게 진동했다. 환희에 찬 격동인지, 고통을 견디지 못한 몸부림인지 설명할 수 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녀는 힘겹게 신음하고 있었다. 은수가 자제력을 잃고 까무러치기 직전 마지막 신음을 내뱉었다.
“하으읏!”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두 남녀는 서로의 나른한 온기 속에서 평온함을 느꼈다. 태풍이 지나간 후 하늘과 바다의 정적 같은 것이 두 사람 사이에 있었다. 조용히 스며들었다 이내 물러가기를 반복하는 숨소리는 얌전한 파도를 닮아 있었다.
타인의 맨살에 기대 이토록 안정감을 느껴 본 게 얼마 만이었을까. 어쩌면 처음인지도 몰랐다. 혁준와의 관계를 끝낸 후에는 언제나 씁쓸한 죄책감과 모멸감이 차올랐던 터였다. 그가 상징하는 그 모든 것 때문에 세상과 타협한 것 같은, 마치 몸을 팔아 무언가를 얻은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혁준에 대한 자신의 순수한 사랑마저 스스로 의심케 하는 그 관계는 은수를 속에서부터 곪게 만들어 버렸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깍지 낀 손을 바라보며 현우가 물었다.
“그냥, 신기해서.”
“뭐가?”
“현우 씨 품 안에서 이렇게 편안한 게 신기해. 이미 오래 만난 사람처럼, 몸에 아주 잘 맞고 너무 포근한 스웨터를 찾은 것처럼 아늑해.”
현우가 팔베개를 한 팔꿈치를 접어 은수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우리가 만나지 않았다면 너무 슬펐을 것 같아. 그 다리 위에서 현우 씨가 날 못 보고 지나갔다면, 아님 보고도 그냥 지나쳤다면…….”
“그러기엔 네가 너무 예뻤어.”
현우가 농담처럼 웃으며 대꾸했다.
“정말 예쁜 사람들 매일매일 보면서.”
은수가 눈을 흘기며 현우의 가슴을 주먹으로 살짝 내리쳤다.
“어후.”
현우가 자신의 반도 되지 않는 은수의 주먹에 타격을 입기라도 한 것처럼 아픈 척을 하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그 손에 가는 팔이 다 그러쥐어졌다. 현우가 팔을 제 쪽으로 휙 끌어당기자 어느새 은수가 그의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가슴이 닿은 채로 현우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그녀가 부끄러워했다. 붙잡힌 팔을 빼내려 안간힘을 써 봐도 소용없었다.
“아, 아파. 진짜 아파…….”
이번엔 은수가 앓는 소리를 냈다. 팔을 억지로 빼려 할수록 더 아팠다. 현우가 웃으며 손을 살짝 풀며 몸을 홱 돌려 은수를 침대 위로 쓰러뜨리곤 이번엔 자신이 위로 올라왔다. 팔을 세워 자신의 상체로 커다란 그늘을 만들었다. 땀에 젖은 앞머리가 이마 위로 드리워졌다. 은수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흐르는 윤기마저 완벽한 현우의 얼굴이 별빛처럼 쏟아져 내렸다.
고운 얼굴.
당신이야말로 이렇게 예쁜 얼굴을 하고.
“……너무 예뻐.”
억누를 새도 없이 마음속 말이 밖으로 나와 버렸다. 현우가 말없이 은수를 바라보았다. 은수는 한 손을 들어 현우의 눈썹, 관자놀이, 미간, 그리고 코끝을 차례차례 터치했다. 손끝으로 느껴지는 그의 아름다움이 비현실적이었다.
마침내 손이 입술에 닿았을 때 자신도 모르게 그의 입 속으로 검지손가락을 넣었다. 아니, 넣었다기보다는 빨려 들어갔다. 현우는 마주 보고 있는 시선을 떼지 않고 은수의 손가락을 조심히 애무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뾰족한 혀끝으로 손가락 끝마디를, 그러다가 점점 유연하게 혀를 놀리며 손가락 관절 사이사이를, 검지와 중지 사이의 골을 깊게 파고 들어왔다.
은수의 얼굴이 점점 붉게 달아올랐다. 다른 여자에게도 이렇게 하는지 묻고 싶은 마음이 목젖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뱉을 수 없었다.
“놀리지 마요.”
은수가 손가락을 빼며 힘겹게 고개를 돌렸다. 현우가 살포시 웃으며 은수의 손목 안쪽에 키스를 했다. 몸을 일으켜 창가로 가서 담뱃불을 붙이는 현우를 보며 은수는 한숨지었다.
‘자기가 한 약속 같은 거, 내 첫사랑을 잊게 해 주겠다는 말 같은 건 이미 기억에서 지웠겠지. 저 사람한테는 별 의미 없는 말이었을 테니까. 나와 자려고 그냥 해 본 말이었을 테니까. 그런 말에 넘어간 나도 참.’
벌써부터 애달파지는 자신의 맘을 꾹 눌러 담으면서 은수는 짐짓 객기를 부렸다.
“현우 씨 쓸 만하네.”
멀리 밖으로 담배 연기를 내뿜던 현우가 고개를 돌렸다.
“뭐가?”
“피지컬이…… 테크닉도.”
은수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장난 아니지?”
“응. 듣도 보도 못 했어, 이런 건.”
현우가 고개를 숙이며 가볍게 웃고선 자못 진지하게 말했다.
“은수 너랑 잘 맞는 거 같아. 아무하고나 이러는 건 아니야. 이런 느낌, 되게 오랜만이야.”
‘또 이런다.’
속마음을 읽기라도 하는 듯이, 저 남자는 그 순간 내가 듣고 싶은 말을 한다. 이런 말들도 다 계산된 걸까. 아님 눈앞의 여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저 남자의 본능인 걸까.
“그야 그건 나도 한 쌔끈 하니까. 내가 남자를 은근히 자극하는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하더라고.”
은수가 팔로 머리를 받히고 옆으로 누워 깊게 굴곡진 허리 곡선을 드러냈다. 현우가 반이나 넘게 남은 담배를 급하게 비벼 끄며 침대로 돌진했다.
“까불래, 서은수? 그런 못된 말은 어디서 배웠어?”
“몰라, 타고났어.”
현우에게 두 팔을 붙잡힌 채 발버둥을 치면서 은수가 입맞춤을 요리조리 피했다.
“혼내 줘야겠어, 서은수. 어떻게 혼내 줄까?”
“아, 담배 냄새 나. 저리 가!”
힘으로 버텨 봤자 소용없었다. 금세 두 팔이 시트 위에 붙박여서 은수는 꼼짝없이 현우를 올려다보게 됐다. 은수가 저항을 멈추자 현우가 웃음기를 거두고 속삭였다.
“미치도록 자극적이야. 은근히 아니고 미친 듯이. 내가 만나 본 어떤 여자보다도 더…….”
현우가 천천히 힘을 풀며 은수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눈을 감고 입을 맞추려는 찰나, 은수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팔 사이로 빠져나와 침대를 벗어났다.
“어디 가아.”
그녀는 황망히 웃는 현우를 놀리는 표정으로 빼꼼히 뒤돌아보고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와인을 좀 가지고 들어와 나눠 마실 생각이었다. 잔은 하나만 가지고 와서 나눠 마셔야지, 아님 입에 넣고 키스하며 나눠 마실까, 생각하며 방문을 여는 순간, 은수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무섭도록 싸늘하게 방 안의 공기가 바뀌었다. 본능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는 어떤 살기 같은 것에 휩싸였다.
언제부터 이 앞에 서 있었던 걸까……. 혁준이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직된 채로 발끝을 내려다보고 있는 이 사람은 믿을 수 없었지만 분명 혁준이었다.
‘네가 왜, 네가 왜 여기에……?’
몇 초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순식간에 온몸이 얼음처럼 굳으며 깨지는 듯한 고통이 일었다.
“혁준아.”
은수가 토해 내듯 그의 이름을 불렀다. 혁준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 표정도 없었다. 방 안을 응시하고는 있지만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이불로 겨우 몸을 가린 은수 뒤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는 현우가 시야에 들어왔다. 혁준은 그 모습을 보고 그대로 뒤를 돌아 뛰쳐나갔다.
“……혁준아!”
은수가 거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샤워 가운을 대충 걸치고 미친 듯이 혁준을 쫓아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혁준은 이미 저만치 뛰어 내려가고 있었다. 은수는 나선형 계단 아래 혁준의 모습을 확인하면서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한의 속도로 내달리고 있었다.
“혁준아!”
계속 소리쳐 불렀지만 그는 대답을 하지도, 뒤를 돌아보지도 않았다. 은수는 거리로 나간 그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바닥은 오후에 내린 비가 얼어 곳곳에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은수는 살이 깨지는 듯한 아픔에 그제야 자신이 맨발인 것을 알아차렸다.
혁준의 뒷모습을 쫓아 정신없이 내달렸지만 어느 골목 사이로 혁준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한 겨울밤, 샤워 가운만 걸친 맨발의 동양 여자가 정신없이 사방을 휘저으며 누군가를 찾는 모습을 파리의 시민들은 힐난하듯 흘겨보고 있었다.
은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눈에 보이지 않고, 그저 혁준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황망히 혁준이 없는 거리의 곳곳을 훑다가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차오르고 있었다. 은수는 그대로 주저앉아 미친 사람처럼 울부짖기 시작했다.
끝의 끝. 세상이 끝난 절망감이 은수의 존재를 내리눌렀다. 이대로 바닥에 짓눌려 무저갱 속으로 파고 들어갈 것 같은 기분. 은수는 사람들의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어미 잃은 작은 새처럼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 피어오르던 감정은 시뻘건 페인트칠로 망가진 채 쓰레기통에 처박힌 듯했다. 목 안에서 비릿하고 역하게 쓴물이 올라왔다. 토할 것 같은 현기증이 일었다. 발가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린 것 같은 수치스러움에 몸서리가 쳐졌다.
어느새 다가온 현우가 커다란 코트로 은수의 몸을 감싸더니 그녀를 바닥에서 번쩍 들어 올렸다. 현우에게 안겨 집 안으로 옮겨지면서도 은수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자기 존재의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그녀가 겨우 자신을 되찾은 것은 집으로 돌아와 현우의 품에 안겨 있은 지 한참이 지난 후였다.
현우는 꽁꽁 언 그녀의 온몸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제 몸으로 감싸 안고 있었다. 진이 다 빠져 버릴 정도로 울던 은수를 깨운 것은 어떤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뭔가 잘못된 것 같은, 함정에 빠진 것 같은 싸한 기분. 온몸의 힘이 다 빠져나가자 불행을 감지하는 촉은 오히려 더 날카롭게 살아났다.
“……그 사람, 나 여기 있는 거 어떻게 안 거야?”
은수가 부은 눈을 들어 현우를 올려다봤다. 현우는 그녀의 눈을 피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샤워를 하면서 분명히 벨소리를 들은 것 같았지만 부재 중 전화 표시도, 수신 기록도 없었던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말해 봐. 아까 그 사람 전화 받았어?”
은수의 목소리는 이미 심하게 쉬어 있었다. 은수의 갈라진 목소리가 두 사람 사이의 공기를 찢는 듯했다.
“어, 내가 받았어.”
은수의 눈빛이 변해 있었다. 현우에게 자신의 온 존재를 진심을 다해 바치던, 불과 몇십 분 전의 그녀는 온데간데없었다.
“왜?”
은수가 따지듯이 물었다. 현우가 그녀의 뜨거운 눈빛을 더 이상 외면하지 못하고 마주 보며 대답했다.
“끝장내고 싶었어. 너와 그 사람의 관계를……. 너를 고통 속에 내버려 둔 그 새끼를 벌주고 싶었어.”
“네가 뭔데! 네가 신이라도 돼?”
은수가 소리쳤다. 그녀의 두 눈은 증오로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격분하는 그녀의 두 팔을 현우가 강하게 붙들었다.
“널 갖고 싶어서!”
“…….”
“그 새끼가 아직도 네 마음속에 문신처럼 박혀 있는 것 같아서, 나랑 사랑하고 있을 때도 그 새끼를 떠올리는 것 같아서, 아무리 너를 가지고 또 가져도 너한테서 그 새끼를 지워 낼 수 없을 것 같아서 미친 듯이 질투가 났어. 그래서 그랬어.”
은수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현우를 노려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혹한 저주의 말을 퍼부으려고 이를 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보며 현우는 묘하게도, 그것마저 감내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처음부터 이런 짓을 벌일 수는 없었다.
“이렇게 찾아 올 줄은 나도 몰랐어.”
현우가 변명하듯 말했다. 그가 찾아올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은수의 카메라 속 사진에서 세상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던 그 얼굴을 짓이겨 놓고 싶었지만, 이렇게 현실이 되리라고는 감히 바라지 못했다.
“그럼 문은 왜 열어 놨어?”
“그건, 그건 네가 또 잠그지 않고 들어온 걸…….”
“내가 잊어 먹어도 항상 챙겨서 잠가 뒀었잖아. 이번에도 그럴 수 있었잖아. 그럼 이렇게 추한 꼴은 보이지 않아도 됐잖아!”
은수는 누구를 향해야 할지 모르는 분노와 원망으로 다시 무너지고 있었다.
“나가 줘.”
차갑게 식은 은수가 말했다. 어떤 설명이나 위로도 지금 그녀의 마음을 달랠 수 없다는 걸 현우는 알았지만 그대로 물러날 순 없었다. 이대로 일어난다면 그녀를 영영 잃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무덤처럼 엄습해 왔다.
“제발, 제발 나가 줘. 혼자 있고 싶어.”
은수는 어느새 울면서 애원하고 있었다. 체념으로 텅 비어 버린 은수의 눈을 보며, 현우는 더 이상 이기적일 수 없었다. 그러기엔 그녀를 이미 너무나 사랑하고 있었다. 현우는 천천히 일어나 코트를 챙겼다.
***
현우는 의식도, 목적도 없이 파리 시내를 걷고 있었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듯했지만 잃어버린 그 무언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알지 못해 방황했다.
이틀째 연락이 되지 않는 은수를 찾아갔을 때 아파트는 굳게 닫혀 있었고, 그녀가 일했던 레스토랑에서는 갑자기 그만두고 이제 안 나온다는 말만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한국에 돌아간 건가? 한국에 가면 만날 수 있는 건가?’
현우는 어디서부터 일을 해결해야 할지 판단하지 못했다. 자신이 벌인 일을 곱씹어 보며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가에 대한 후회와 은수를 아프게 했다는 죄책감으로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쳤고, 복잡한 머리는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혁준을 쫓아 미친 듯이 내달리던 며칠 전의 은수처럼 이제 자신이 은수의 흔적을 찾아 미친 사람처럼 여기저기 쏘다니고 있었다. 그녀의 발길이 닿았을 법한 파리의 그 어느 곳에도 그녀는 없었다. 그녀는 마치 꿈처럼 사라져 버렸다.
이미 한국에 돌아간 규호로부터 전화를 받은 건 강바람이 세차게 부는 앵발리드 다리 위에 서 있을 때였다. 은수를 처음 만난 바로 그곳.
-형, 나야.
“어.”
-안 오냐?
“며칠만 더 있다 갈게.”
-며칠만, 며칠만 그 소리가 지금 몇 번째야? 내가 거기까지 가서 형 못 데리고 그냥 왔다고 강 대표한테 얼마나 탈탈 털렸는지 알아? 나 좀 살려 줘라 제발.
규호는 거의 울 것 같았다. 현우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규호에겐 미안했지만 지금 현우에게 중요한 것은 은수를 찾는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알아봐 달라고 했던 그 여자하고 혁준이라는 남자…….
수화기 너머로 그 이름을 들었을 때 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내가 알아본 게 있어. 한국 오면 말해 줄게. 형 그 여자 때문에 한국 안 오는 거지?
규호는 벼르고 있었던 것 같았다. 현우가 다급해할수록 규호는 침착하게 현우로부터 귀국하겠다는 다짐을 받아 내고서야 이야기를 시작했다.
-학교에서 되게 유명한 CC였대. 여자가 2학년, 남자가 1학년 때부터 사귀어서 최근까지 3년 넘게 만났던 모양이더라고. 여자는 예쁘고 똑똑한데 별 볼일 없는 집안이고, 남자는 대단한 집이라 더 유명했다나 봐. 남자네 집에서 당연히 여자를 탐탁지 않아 했고, 그 가족이 온갖 더러운 소문을 퍼뜨려서 여자를 엄청 괴롭혔나 보더라고. 밤에 업소에 나가면서 학비를 번다느니, 임신을 했는데 남자가 너무 많아서 누구 애인지도 모르고 낙태를 시켰다느니, 학점 잘 따려고 교수랑 잤다느니……. 한 번은 여자 나체 사진이 그 학교 남자애들 단톡방에 나돌아서 한동안 난리가 났었는데, 결국 여자가 형사 고소하고 친구들이 경찰에 탄원서 보내고 해서 합성 사진 만들고 소문 퍼뜨린 주도자를 잡았는데 그 남자 누나 사주를 받아서 한 짓이라고 밝혀졌다더라고. 그 집안도 워낙 대단한 집안이라 기사 안 나오게 입 틀어막고 유야무야 마무리됐는데 여자가 졸업하고 얼마 안 지나서 둘이 결국 헤어졌대. 그러고 나서 파리에서 형을 만난 거고.
현우는 잠자코 듣고만 있었다. 은수를 처음 만난 날, 술 취한 그녀로부터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녀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은수에게 상처를 준 그놈과 그 가족들을 찢어 죽이고 싶은 분노로 가슴에서 불이 지펴지는 것 같았다. 규호는 현우가 일단 한국에 돌아오면 은수를 찾는 일은 자기가 도와주겠다며 그를 달랬다.
-근데 형, 그 남자 한성그룹 아들인 건 알고 있었던 거지? 그럼 송정이 그 남자 누나인 거잖아.
규호의 말에 현우는 잊고 있던 이름을 떠올렸다.
한성그룹 송정.
2년 전 현우가 배우로 막 전향했을 때 잠깐 만났던 사이였다. 클럽 VIP룸에서 처음 만나 저녁 식사를 한두 번, 잠자리를 서너 번 한 것이 다였다. 그 후로도 몇 번 송정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은 있었지만 일을 핑계로 만나지 않았었다.
“……아니, 몰랐어.”
-헐, 그래? 알아보니까 이래저래 얽혀 있길래 난 당연히 형이 뭔가 알고 물어본 줄 알았지. 참 사람 인연이라는 게 무섭다. 어떻게 이렇게 엮이냐……. 인연이랄 것도 사실 딱히 없긴 하지만. 형한테 그렇게 스쳐 간 여자가 한둘도 아니고. 근데 그 여자 세상 교양 있는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어떻게 동생 여친을 그렇게 괴롭히냐? 하여튼 있는 것들이 더 무섭다더니.
현우와 만날 때도 송정은 집착이 심한 편이었다. 아직 정식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 관계를 혼자 속단하고 현우를 구속하려 했었다. 일도 사랑도 한번 꽂히면 앞뒤 가리지 않고 무섭게 파고드는 스타일인 듯했고, 자신에게도 그럴 조짐을 보였던 것이 현우 쪽에서 일찌감치 관계를 끊은 이유였다. 재벌가 여자와 사귀어 나쁠 건 없었지만 더 진전되기 전에 정리했었다.
그 무서운 여자가 은수를 철저하게 짓밟고 유린했었다. 여자로서 절대 겪지 말아야 할 일을 겪게 하고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단지 자신의 남동생을 사랑한다는 이유로. 은수는 그런 수모를 겪으며 지켜 낼 만큼 그를 사랑했었던 걸까?
현우는 반짝이는 센강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자신을 처음 만난 그 밤, 은수는 대체 어떤 마음으로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을지. 그 모든 일을 겪고 사랑을 잃고 외딴 곳에서 혼자 참아 냈을 아픔들. 그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겪는 듯, 현우의 마음이 산산이 무너져 내렸다. 굵고 강한 창으로 가슴이 밑바닥부터 뚫린 것 같은 커다란 상실의 고통이었다.
현우는 한국으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 한국에서 은수를 찾고 그녀 앞에 무릎 꿇고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그래야 자신이 살 것 같았다. 눈먼 사랑과 뒤틀린 욕망으로 과거의 혁준을 은수의 현재에 불러들임으로써 은수를 다시 고통 속에 던져 넣은 사람이 다름 아닌 바로 자신이었기에.
***
6개월 후 서울.
자인 미술관의 개관식은 예상대로 성대했다. 미술품이 전시된 실내 전시장 건물이 네 개의 높은 벽을 이루었고, 그 중앙에 정원이 조성됐다. 정원의 야외 전시장에서 개관식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정치인들, 재력가들과 연예인들이 화려한 조명 속에서 제각기 걸친 명품과 그에 걸맞은 미소를 뽐내고 있었다. 은수는 마치 TV를 보는 것처럼 멀찍이 서서 반짝이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중정을 둘러싼 1층 회랑은 조명과 인파를 피해 그늘 속에 숨어서 사람들을 관찰하기에 꽤나 적절한 곳이었다.
‘신물 나.’
뒷짐을 지고 벽에 기댄 채 고개를 살짝 치켜들면 같은 높이에 있더라도 저 사람들을 살짝 내려다볼 수 있었다. 그렇게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깐 채로 은수는 그 어떤 조명보다도 번쩍거리는 사람들을 찬찬히 뜯어보았다. 환멸에 진절머리를 치면서도 은수는 단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그 모든 게 아름답게 정돈돼 있었기에. 증오한다고 해서 부수어 버릴 순 없는 것이었기에.
“고생 많았어, 은수 씨.”
어느샌가 다가온 김 대표가 샴페인 잔을 은수의 코앞에 들이밀었다. 초여름 밤, 이곳의 공기를 가득 채운 재즈 선율과 돔페리뇽 향이 은수의 청각과 후각을 동시에 파고들었다.
“대표님도 고생 많으셨어요.”
은수가 김 대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길게 늘어뜨려진 귀걸이가 은수의 목덜미에서 달랑거리며 빛을 반사했다.
“그래. 나, 진짜 고생 많았지. 그래도 이런 큰 행사 맡아서 한 게 우리 회사에 앞으로 큰 도움될 거야. 솔직히 난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 우리 같은 신생 에이전시에 한성그룹이 이런 큰일을 맡기다니.”
은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고객만 살짝 끄덕이며 씁쓸히 미소 지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거의 다 마무리된 거죠?”
“그치, 테이프 절단식 끝났고 주요 인사 사진 촬영 잘했고 지금 리셉션 한창이니까……. 다 끝났다고 봐야지.”
“좀 쉬세요, 대표님. 이틀 밤이나 새셨잖아요. 무슨 일 있으면 제가 전화드릴게요.”
은수가 핸드폰을 들어 보이며 김 대표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봤다.
“에이, 어떻게 그래. 저어기 갑님이 두 눈 퍼렇게 치켜뜨고 있는데. 하……. 격하게 담배 피우고 싶다 너어무. 샴페인 한 모금에 담배 한 모금, 캬.”
“피우세요, 저기 나무 뒤에 숨을 데 많던데.”
“야, 서 MC야. 그랬다가 불이라도 내 봐, 업계에 소문 쫙 나고 나는 바로 사업 종 치겠지. 한성그룹 미술관 개관식에서 담뱃불에 정원 태워 먹은 행사 업체 대표로 인생 마감, 끽!”
손칼로 목을 긋는 시늉을 하는 김 대표의 넉살에 은수는 웃음을 터뜨렸다. 김 대표의 이런 서글서글한 사람 됨됨이가 고된 회사 일을 버틸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너무 상상력 풍부하신 거 아니에요?”
웃으며 대꾸하는 은수의 말에 김 대표는 이번에는 빈손으로 담배 피우는 시늉을 했다.
그때였다. 빛 무리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김 대표를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했다. 김 대표가 벽에 기댄 몸을 부리나케 일으키며 말했다.
“갑이 부르신다.”
한껏 차려 입은 사람들 속에서도 유난히 빛이 나는 한 여자, 한쪽 어깨를 드러낸 붉은색 실크 원피스가 마치 입고 태어난 듯 잘 어울리는, 흰 피부의 키가 큰 여자였다.
그녀를 담은 은수의 눈빛이 한순간에 차갑게 식었다.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후다닥 달려간 김 대표가 그녀에게 귀를 기울이며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어떤 말도 안 되는 지시라도 다 따르겠다는 몸짓이었다.
은수는 차분히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행사 앞단의 진행을 깔끔히 끝낸 것으로 사실상 제 역할은 다 한 셈이고, 그 후로 긴장이 풀린 것도 사실이었다. 손님으로 초대된 것처럼 이 파티를 즐겨도 그만이었지만 아주 많은 이유로 은수는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은수는 천천히 눈을 감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본의 향기, 고급스러운 음악, 교양 있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어우러지는 지금 이 시공간 속에 자신이 속해 있다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은수의 두 눈은 맞은편 어둠을 향해 꽂혔다. 파티가 한창인 중정을 가로질러 정반대편의 회랑, 그 어둠 속에서 누군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은수가 깜짝 놀라며 숨을 들이켰다.
저 큰 그림자.
어둠 속에서도 형형한 광채를 발하는 검은 두 눈.
은수의 숨결이 얼어붙었다. 초여름의 훈훈한 밤공기가 순식간에 증발하고 겨울의 기억이 환기됐다. 살얼음 낀 거리를 맨발로 디뎠던 고통의 기억. 한 발 내딛을 때마다 깨질 듯이 아팠던 뒤꿈치의 고통보다 더한 건 가슴을 통째로 도려낸 것 같은 상실의 고통이었다.
그리고 그 상실을 초래한 그 남자에 대한 기억.
“……신현우?”
은수는 자기도 모르게 그 이름을 내뱉었다. 은수와 마찬가지로 조명을 피해 회랑의 그림자 속에 서 있던 그가 천천히 빛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날카롭게 빛나는 검은 구두, 길쭉하게 뻗은 다리는 우아한 퓨마를 연상케 했다. 은수는 포식자 앞에 얼어붙은 초식동물처럼 넋이 빠진 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비스듬히 비껴 내리는 빛 속에서 양쪽 주머니에 무심하게 걸친 두 손이, 원 버튼의 슈트 재킷이, 깔끔한 흰 셔츠와 보타이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삼삼오오 모여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모습도, 그들이 떠드는 말소리와 음악 소리도 은수의 눈과 귀에서 멀어졌다. 뿌옇게 멀어지는 그 광경을 헤치고 반대편 막다른 곳에 서 있는 그의 모습만 점차 선명해졌다.
이윽고 그의 얼굴이 드러났다. 깊은 두 눈이 발하는 빛은 ‘너는 나에게서 도망갈 수 없어’라고 말하는 듯 자신감이 넘쳤다.
온 존재를 사로잡는 눈빛.
‘맞아, 신현우가 맞아…….’
그는 살짝 삐딱하게 고개를 숙인 채 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 있는 그 어떤 사람도, 어떤 일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의 큰 두 눈의 시선은 50미터 건너편의 은수만을 향해 있었다.
잡아먹을 듯한 위세에 은수의 동공은 본능적으로 확장됐고, 등 뒤엔 순식간에 식은땀이 죽 흘러내렸다.
은수는 살기 위해 도망쳤다. 나선형 계단을 올라가면 2층 전시장 안에 화장실이 있다. 저 뚫을 듯한 눈빛을 피해서 도망가야만 했다. 자기도 모르게 발부터 빠르게 움직였다.
어떻게 도착했는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 올라와 여자 화장실 안으로 피신했다. 은수는 두 팔을 뻗어 세면대에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왜 여기, 그가 여기에 왜…….’
은수는 눈을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파티를 즐기는 사람들의 말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고, 멀어진 음악 소리만 텅 빈 2층 전시관 복도를 스산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이 아닌 것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그와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자리다.
현재 한국에서 가장 잘 나가는 톱스타.
가장 성공한 아이돌 출신 배우.
재벌가와 명품 업계가 가장 사랑하는 모델.
피지컬과 연기력을 동시에 갖춘 완벽한 피사체.
이름 석 자만으로 한국의 모든 돈과 여자를 끌어들일 법한 영향력.
그게 바로 신현우였다.
한국 재계 1위 한성그룹이 야심 차게 준비한 미술관을 세상에 처음 선보이는 자리에 신현우를 초대하는 것은 충분히 예측 가능한 일이다.
‘바보같이. 왜 생각하지 못했지? 왜 덜컥 이 일을 맡아선…….’
은수는 거울 속 자신을 원망하는 눈빛으로 흘겨보았다. 찬물로 세수하며 마음을 진정시키고 밀려드는 기억을 떨쳐 내려 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몇 분이 흘렀을까,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몸을 곧추세웠다.
‘그래, 나가자. 파티가 끝날 때까지 여기 숨어 있을 수도 없잖아. 어차피 파티 주인공 역할 하느라 나랑 마주칠 일도 없을 텐데. 김 대표님한테는 죄송하지만 먼저 간다고 톡 하고, 1층 주차장으로 통하는 비상계단으로 내려가면 돼.’
행사 리허설 때문에 미술관을 여러 번 와 본 게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고 생각하며, 은수가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을 때였다.
커다란 그림자가 날카롭게 은수의 팔을 낚아채며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한 그녀를 끌고 가기 시작했다.
“이, 이거 놔!”
은수가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정식 개관 전인 미술관의 2층 전시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1층 중정에서 무르익는 분위기에 취한 사람들은 2층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은수는 어둠 속에서 그의 뒤통수를 알아봤다.
넓은 어깨와 작은 머리.
흑단처럼 윤기가 흐르는 까만 머리칼.
그 모습은 그를 처음 봤을 때의 기억과 달라진 것이 없다. 하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반항할 수 없는 엄청난 힘으로 자신을 잡아끄는 현우에게 은수는 매달리다시피 끌려갔다.
“현우 씨, 제발…….”
저벅저벅 규칙적인 현우의 발소리에, 끌려가는 은수의 하이힐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쌓였다. 한 걸음씩 제대로 딛지도 못하는 은수의 발목이 부러질 것처럼 위태위태했다.
현우는 목적지에 이르자 은수를 거칠게 벽으로 몰아붙였다. 1층 중정을 향해 돌출된 야외 테라스였다. 두 사람은 1층에서는 보이지 않는 테라스의 사각지대에서 몸을 바싹 붙이고 있었다.
은수를 막고 선 커다란 어깨 너머로부터 사람들의 말소리와 재즈 선율이 선명히 들렸다. 현우는 은수의 두 팔을 꽉 잡고 벽에 고정시킨 채 그녀의 어깨 위에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은수의 겁먹은 신음은 그의 단단한 가슴에 가로막혀 밖으로 발산되지 못했다.
사로잡은 먹잇감을 삼키기 전, 그 나약함과 무력함을 약 올리듯 현우는 힘이 다 빠져 버린 은수를 더 강하게 옭아매었다.
“이러지 마.”
숨죽여 애원하는 은수의 말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한 층 아래 중정의 파티는 흥청망청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소리 지를 거야.”
“질러.”
은수를 손에 넣은 지금,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이 현우는 차갑게 내뱉었다. 뜨거운 눈물이 은수의 뺨을 타고 흘렀다. 씩씩대던 현우의 숨결은 은수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를 반복할 때마다 조금씩 차분해졌다. 현우의 입술이 더 바싹 가까이 은수의 얼굴을 향해 다가왔다. 달큰한 향기에 아찔해져서 은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내가 무서워?”
현우가 커다란 손으로 은수의 턱을 잡고 다시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입술이 닿을 만큼 가까이, 눈앞에 바로 그, 신현우가 있었다.
“네가 다 망쳐 놨어.”
은수가 입술을 떨며 참았던 한 마디를 내뱉었다. 비로소 용기를 내자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었다. 깊이를 알 수 없이 심오한 두 눈.
“왜 그렇게 도망갔어?”
은수의 원망을 현우는 질문으로 되받았다. 은수는 대답하지 못하고 눈물만 삼켰다.
“도망가면 내가 못 찾을 수 알았어? 도망가면 모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될 줄 알았어? 넌 비겁해. 넌 항상 이런 식으로 도망만 쳐.”
“그래, 나 비겁해. 문제가 생기면 도망가 버리면 돼. 왜냐면 너 같은 문제는 얼굴 맞대고 상종할 필요가 없거든. 인생에서 마주치지 않아도 될 문제거든! 너 같은 건!”
소리치는 은수의 입이 현우의 억센 힘에 막혔다. 그의 턱이 눈물범벅인 은수의 얼굴을 집어삼킬 듯했다. 은수는 거센 힘으로 파고드는 현우를 막을 재간이 없었다. 무력함에 몸이 녹아내릴 것 같았다.
‘잡아먹히는 게 이런 기분일까…….’
풀어진 동공에 파티의 불빛이 어른거렸다.
‘몇 걸음만 난간 쪽으로 다가서면 1층 파티장의 사람들이 우리를 발견할 수 있을 텐데. 그럼 현우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
현우의 거센 힘에 포위당한 채 은수는 실현 불가능한 대책을 모색했다. 어떻게 해도 이 사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몸도, 마음도.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숨이 막혀 몽롱해지는 은수의 머릿속에 기억의 잔상들이 떠올랐다.
겨울비가 내린 후 센강이 내뿜던 습기.
앵발리드 다리 위에서 마주친 커다란 그림자.
에펠탑의 야경에 대고 건배했던 마티니 글래스.
햇살이 내리쬐는 오후, 파리 8구의 조그마한 아파트에 숨어들어 벌거벗은 채 엉겨 있던 한 쌍의 이방인.
그리고 혁준.
뇌리에 꽂힌 혁준의 이름에 은수의 눈이 번쩍 뜨였고, 게걸스럽게 자신을 탐하는 현우의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아…….”
그제야 현우가 짧게 탄성을 내뱉으며 입술을 뗐다. 손등으로 훑어 내자 피가 살짝 배어 나왔다. 자신을 누르던 현우의 힘으로부터 벗어나자마자 은수는 팔을 뿌리쳐 거세게 현우의 뺨을 올려붙였다.
“제발, 제발 나 좀 놔줘.”
은수가 나직이 읊조렸고, 현우는 뺨을 손으로 감싸 쥔 채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현우가 내뿜던 뜨거운 열기는 밤공기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은수는 현우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몸을 돌려 복도를 빠져나왔고, 그 길로 밖을 향해 쉬지 않고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