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장. (3/9)

2장.

“신현우! 문 열어! 현우 형!!”

은수는 쿵쿵거리며 601호의 문을 세차게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눈을 떠 보니 바지만 대충 챙겨 입고 방을 나서는 현우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내 현우가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이럴 거야? 형이 나한테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투정을 부리는 듯한 낯선 남자의 목소리가 침실 문 너머로 들렸다. 거실과 침실이 분리된 스위트룸이었기에, 거실 현관으로 들어온 남자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쩐 일이야?”

현우의 목소리는 아직 잠겨 있었다. 간밤의 피로가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무려 4번. 두 사람 모두 온몸의 진이 다 빠졌을 땐 새벽 어스름이 밝아 오고 있었다.

“어쩐 일이냐니? 말이냐 방구냐. 열두 시간 비행기 타고 지 만나러 온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

“나 옷 입고 바로 나갈게, 밖에서 좀 기다려.”

“아 뭐여, 우리 사이에 내외해? 뭘 밖에서 기다리래.”

“아니, 그럴 일이 있으니까 일단 좀 나가.”

“빨리 짐이나 싸세요, 배우 님. 한국 가게.”

두 사람이 투덕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은수는 조용히 옷을 챙겨 입었다. 나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고 있던 그때, 침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근데 이 방은 도대체 얼마나 큰 거…….”

현우가 물을 마신다고 잠시 한눈을 판 사이에 매니저 규호가 침실 문을 열었고, 은수를 발견한 규호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입만 벌린 채 그대로 다시 문을 닫았다. 규호를 저지할 타이밍을 찰나에 놓친 현우는 멍한 규호 옆에 서서 물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뭐야?”

규호가 턱으로 침실 문을 가리키며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좀 앉아.”

현우가 규호를 거실 소파에 억지로 앉히고 침실로 돌아왔다. 바닥에 떨어져 있던 셔츠를 주워 입으며 현우가 말했다.

“미안. 매니저야, 갑자기 찾아올 줄 몰랐네.”

민망해하는 현우에게 은수가 웃어 보였다.

“갈게요, 이만.”

침실 문을 나서려는 은수를 붙잡고 현우가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또 보고 싶어.”

은수는 입꼬리로만 희미하게 웃으며 침실 문을 열었다. 거실 소파에 무표정하게 버티고 앉아 있는 규호에게 목례를 하고, 그대로 스위트룸을 빠져나왔다.

은수를 배웅하고 돌아와 자신의 눈길을 일부러 피하며 딴청을 부리는 현우에게 규호가 이를 가는 소리로 말했다.

“짐 싸시죠, 선배님.”

‘선배’라는 말은 규호가 정말 화가 났을 때만 쓰는 말이었기에, 현우는 대답하지 않고 곧장 샤워실로 몸을 피했다. 규호는 현우의 모습을 흘겨본 후 잠시 앉아 있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난 듯 벌떡 일어나 호텔방을 나왔다.

“저기요! 여자분!”

황급히 로비를 빠져나가던 은수는 한국말에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그 매니저가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매니저가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은수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단 명함을 받아 들었다. 그러자 규호가 말했다.

“혹시 형 전화번호 있으면 지우시고, 무슨 일 있으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일상적으로 처리하는 일을 하듯 무신경하고 성의 없는 말투였다.

“뭐 하시는 분인지 모르겠지만 그냥 파리에서 좋은 꿈 꿨다 생각하시고, 저한테도 연락 안 하시면 제일 좋고요.”

은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명함을 다시 돌려주며 말했다.

“신현우 씨 전화번호 모르고, 이것도 필요 없을 것 같아요.”

규호가 엉겁결에 명함을 돌려받자 은수가 덧붙여 말했다.

“저도 그냥 하룻밤 즐긴 거라서요.”

또각또각 멀어지는 은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규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뭐야, 저 여자…….”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은수는 생각에 잠겼다. 지난밤 자신이 벌인 일을 믿을 수가 없었다. 자기 안에 그런 과감함이 어디에 잠들어 있었을까. 파리의 마법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신현우 단지 그 사람이기 때문이었을까.

처음부터 하룻밤이라고 생각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잠자리에 응하는 여자를 신현우 같은 남자는 무수히 겪었을 테고, 그만큼 가볍고 별것 아닌 일로 치부될 게 분명했다. 그러기에 은수의 입장에서도 오히려 더 부담되지 않았고, 자신을 헤픈 여자로 보든 말든 상관 않은 채 그 순간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었다.

혁준 앞에서는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던, 자신 안에 그런 게 있을 거라고 상상조차 못 했던 격정이 어젯밤 지칠 줄 모르고 뿜어져 나왔다. 혁준이 소나기라면 현우는 태풍이고, 해일이었다. 현우는 마치 불가항력처럼 은수의 깊은 정수를 뚫고 들어왔다. 혁준과는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절정의 환희였다. 혁준의 어떤 움직임도 은수로부터 그런 신음과 그런 뒤틀림을 이끌어 낸 적은 없었다.

한편 현우의 거센 힘을 받아 내는 동안에도 은수는 혁준의 잔상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눈을 감으면 혁준이 떠올랐기에 몸을 섞는 내내 기를 쓰고 현우와 눈을 맞췄다. 은수의 인생에서 혁준은 단 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제 정신을 붙잡고 있지 못할 정도로 거침없이 자신을 몰아붙이는 남자의 품에 안겨 은수는 혁준과 그의 가족에게 복수하고 있었다.

네가 사랑해 마지않던 서은수는 겨우 이런 여자라고.

송혁준 너는 이렇게 헤프기 그지없는 여자를 사랑한 거라고.

너 자신을 경멸하고 나를 더럽다 여기라고.

우리의 찬란했던 사랑을 진흙 구덩이 속에 파묻으라고.

폭풍우가 몰아친 후 은수의 마음은 고요하고 잠잠했다. 매니저의 등장이 두 사람 사이를 깔끔하게 정리해 줘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은수는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오후에 일할 에너지를 회복하기 위해 잠시 눈을 붙였다. 샤워 후에도 지워지지 않은 현우의 짙은 숲 향을 느끼며.

***

“어쩔 거야?”

“뭐가?”

“그 여자, 어쩔 거냐고.”

현우는 규호의 추궁에 대답하지 않았다.

“들러붙진 않을 거 같더라.”

“뭐?”

“아까 형 샤워할 때 따라 내려가서 명함 줬더니, 받지도 않고 쌩하니 가더라고. 파리 사는 여자야? 굉장히 시크해 아주. 개방적이셔.”

“넌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내가 형이 뭐 시켜서 하는 사람이냐? 형 뒤치다꺼리하는 게 내 일인데.”

현우는 머리를 감싸 쥐고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 피곤해서 좀 자야겠어.”

“그래 피곤하겠지. 어제 아주 좋았나 봐, 응? 다크서클이 턱밑까지 내려왔어.”

퍽.

현우는 규호의 뒤통수를 한 대 세게 때리고 침실로 들어왔다. 아직 방 안에는 두 사람의 체취와 땀 냄새가 뒤섞여 가득했다. 현우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며 지난밤의 은수를 떠올렸다. 여린 몸이 부서질 듯이 애처로웠다. 자신의 힘을 받아 내는 동안 기절할 듯 신음하면서도 또렷한 눈빛만은 사그라들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결의 감각과 뒤틀리던 허리의 곡선이 아직 손안에 남아 있는 듯했다.

몸을 섞는 동안 그렇게 자신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는 여자는 이제껏 단 한 명도 없었다. 으리으리한 재벌가의 사모님도, 업계에서 기가 세기로 유명한 여배우나 요즘 제일 잘나가는 아이돌도, 자신의 스킬에 몸이 녹기 전 이미 눈부터 풀려 있었다. 자신의 눈을 피해 천장을 보거나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여자들은 더 이상 현우의 구미를 돋우지 않았다. 그 이후부터 현우는 단지 정해진 루틴에 따라 정사를 마무리할 뿐이었다.

‘……다시 만나야겠어.’

밖이 조용해 나가 보니 규호는 소파에 옆으로 누워 잠들어 있었다. 장시간 비행이 피곤했던 모양이었다. 현우는 백팩에 대충 짐을 욱여넣고 조용히 호텔룸을 나왔다.

***

온몸이 욱신거리고 힘이 하나도 없었지만, 은수는 다행히도 별일 없이 하루 일을 마무리했다. 목요일 밤, 파리지앵들은 천천히 한 주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주말까진 아직 하루가 더 남았기에 늦게까지 술을 마시진 않았지만, 다가오는 주말 기분을 즐기기 위해 퇴근 후 한두 잔의 여유를 찾는 사람들이 많았다.

마지막 주문을 주방에 전달하고 은수는 동료 앙리에게 뒷정리를 부탁했다. 하루 사이에 얼굴이 해쓱해졌다며 저녁 내내 은수를 걱정하던 터라, 앙리는 어서 가라고 은수의 등을 떠밀었다.

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 은수는 아파트 현관 앞에 누군가가 웅크리고 앉아 있는 것을 발견했다.

‘설마…….’

가까이 다가갈수록 커다란 어깨와 긴 다리를 익숙하게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릎을 세운 채 웅크리고 있던 현우가 제 앞에 다가와 멈춰 선 그림자를 보고 고개를 들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말했잖아요. 또 보고 싶다고.”

현우는 은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은수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장난치지 말고, 가세요. 한국 가야 하잖아요.”

현우가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넓은 가슴이 은수의 눈앞에 바싹 다가와 있었다. 은수는 고개를 들어 현우의 얼굴을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장난 아닌데. 진짜 보고 싶었는데.”

현우가 은수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은수가 원망하듯 그렁그렁한 눈으로 현우를 올려다봤다.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걸어들어 가게 만들지 말라는 강한 거부를 담은, 그래서 그만큼 강렬하게 끌려오는 은수의 속마음을 방증하는 그 눈빛에 현우는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보고 싶었어.”

입술에 입을 맞추고 현우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눈가에 입을 맞추고 현우가 말했다.

“보고 싶었어.”

관자놀이에 입을 맞추고 현우가 말했다. 자신의 머리를 감싼 현우의 오른손을 잡아 내리며 은수가 말했다.

“……그럼 오늘 딱 하루만 더 봐요, 우리.”

현우가 웃으며 은수의 코트 주머니에서 열쇠 꾸러미를 꺼냈다. 두 사람은 꼭대기 층까지 계단을 단숨에 뛰어올라가곤 현관문을 닫자마자 서로에게 키스를 퍼부었다. 떨어져 있던 몇 시간을 이렇게라도 보상받아야겠다는 듯이.

현우가 거칠게 은수의 코트를 벗기고 속옷 안으로 오른손을 집어넣었다. 바깥에 오래 있어 얼어 버린 현우의 손이 은수의 따뜻한 가슴을 휘어잡듯 강하게 움켜쥐었다. 왼손으로는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대로 바닥에 던졌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서 입을 떼지 않은 채 거실 소파로 향했다. 현우가 은수를 먼저 소파에 눕히고 무릎으로 은수의 다리를 단단히 고정시킨 채 제 상의를 벗었다. 은수의 스웨터를 벗기고 나서 현우는 뽀얗게 드러난 은수의 상체를 내려다보며 연청색 레이스로 장식된 브래지어를 만지작거렸다. 현우의 손가락 아래에서 은수의 하얀 가슴이 크게 부풀어 올랐다가 가라앉기를 반복했다. 현우는 어제에 비해 한껏 여유를 부리고 있었다. 은수는 현우의 어마어마한 힘과 속도를 알기에 폭풍전야의 심정으로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긴 손가락 끝이 은수의 쇄골, 어깨, 그리고 가슴골을 놀리듯 스치고 지나갔다. 차가운 손끝이 닿는 부위마다 다르게 몸서리쳐졌다. 현우가 속옷의 어깨끈을 내렸다. 천천히 내려가는 속옷 위로 감춰져 있던 은수의 가슴이 볼록 튀어나왔다. 현우는 속옷을 다 벗기지 않은 채로 말캉한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현우가 조심스러운 혀 놀림으로 은수의 젖꼭지를 물었다.

은수가 낮은 신음을 뱉으며 몇 번이나 몸을 뒤튼 후에야 현우는 그녀의 브래지어를 벗겨서 치웠다. 그녀의 상체가 온전히 다 드러났고, 현우는 가슴골에서 갈비뼈, 배꼽으로 천천히 내려오며 애무했다. 더 이상 애무할 맨살이 없어지고 나서야 현우는 고개를 들어 은수를 바라봤다. 불을 켜지 않아 집 안은 어둑했지만, 건너편 건물의 불빛이 새어 들어와 은수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예뻐.”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예뻐. 못 참겠어.”

현우가 은수의 치마 안으로 머리를 넣고 스타킹을 내렸다. 그는 은수의 가는 발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그녀의 두 다리를 들어 올렸다. 브래지어와 같은 색 속옷 아래 봉곳하게 올라온 곳을 현우가 살짝 깨물었다. 은수가 허리를 활 모양으로 꺾으며 신음했다. 현우가 다시 올라와 은수와 눈을 맞추며 왼손을 속옷 밑으로 넣었다.

“왜 이렇게 젖었어?”

현우가 놀리듯 물었다.

“나도 모르겠어요.”

은수는 모르는 척 대답을 피했다. 그녀의 눈가가 흥분으로 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왜 몰라? 원하는 게 뭐야, 말해 봐.”

현우가 은수의 귓가에 속삭였다. 뜨거운 입김과 현우의 체취로 은수의 정신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넣어 줘요.”

은수가 갸르릉대는 소리를 내며 겨우 답했다. 마침내 원하는 대답을 들은 현우가 만족한 미소를 띠며 벨트 버클을 풀고, 속옷과 함께 바지를 내렸다. 현우의 그곳이 이미 딱딱하게 굳어 위를 향해 뻗어 있었다. 현우는 망설임 없이 은수 안으로 밀고 들어왔다.

은수는 자신의 가장 여린 속살이 현우로 인해 빈틈없이 꽉 차는 것을 느꼈다. 현우가 은수의 어느 한구석도 빠뜨리지 않고 챙기려는 듯 천천히 다가왔다가 천천히 멀어져갔다. 가까이 밀려들어 왔다가 다시 쓸려 나가는 파도처럼.

그러나 파도는 곧 풍랑이 됐고, 은수라는 작은 배를 온통 헤집고 거꾸로 뒤집어 버렸다. 단 몇 분 사이 은수는 점점 거칠어지는 현우의 움직임을 더 이상 감당할 자신이 없어지고 말았다. 아찔한 고통과 천상의 쾌락이 극도의 아드레날린을 분출시키며 그녀를 절정에 올려놓았다가 다시 떨어뜨려 놓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만, 더 못하겠어요.”

은수는 한 손으로 현우의 땀에 젖은 어깨를, 다른 한 손으로 격동하는 그의 배를 밀어내려 힘을 줬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현우는 은수의 양 팔목을 한 손에 잡고 그녀의 머리 위로 올렸다.

“아앗! 제발 멈춰 줘.”

현우는 멈출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 오히려 더 맹렬하게 그녀를 쫓았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은수의 쇄골에 닿았다. 두 사람의 몸은 이미 서로의 체액과 땀으로 범벅이었다.

“……기절할 거 같아.”

은수가 겨우 목을 짜내 소리쳤다. 거실은 두 사람의 몸이 부딪히는 소리와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다. 숨소리와 몸의 움직임이 끝을 모르는 듯 달아오르다 마침내 두 사람이 동시에 절정에 이르렀다.

“하앗.”

그 순간 사위가 고요해지고 모든 것이 멈춘 듯했다. 현우가 은수의 몸 위로 쓰러졌다.

두 사람은 숨을 고르며 한참을 그렇게 누워 있었다. 벌거벗은 어린 짐승들처럼 두 사람은 서로의 맨살을 쓰다듬으며 서로를 위로했다. 말없이 서로가 살아온 인생을, 지나온 고난을, 아물지 못한 상처를 정성스레 핥아 주었다.

현우가 상체를 일으켜 팔로 머리를 지탱한 자세로 고쳐 누웠다. 은수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현우가 집게손가락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은수의 이마를, 콧대를, 입술을, 그리고 턱을 아주 소중한 것을 다루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은수는 그 손길을 느끼며 까무룩 잠에 빠지고 말았다.

***

엄마의 장례식장에 열여덟 살의 은수가 상복을 입고 앉아 있다. 장례식장은 썰렁하고 적적하다. 엄마와 알고 지냈다는 친구 몇이 다녀간 후 그나마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친척 아주머니들이다.

‘저 기집애는 엄마가 죽었는데 눈물 한 방울 없는 거 봐, 독하다 독해!’

‘지 엄마가 독했잖아. 생긴 것도 지 엄마 똑 닮아 가지고, 눈꼬리가 매꼬롬한 게 남자 좀 후리게 생겼네.’

은수가 여섯 살, 오빠인 한수가 열한 살 되던 해 집을 나가 다른 남자와 살림을 차렸던 엄마. 은수는 그 이후로 엄마를 본 적도, 엄마를 그리워한 적도 없었다. 엄마의 빈자리를 느낄 땐 눈물보다 원망으로 제 마음을 지켰다. 엄마는 그 남자와도 얼마 못 가 헤어지고 남편도, 아이도 없이 혼자 살았다고 했다. 남아 있는 친인척도 없어 결국 한수가 상주 역할을 해야 했다. 한수는 술에 취해 있다.

‘에이 씨발. 그런 말 지껄이러 일부러 찾아왔어요?’

한수가 행패를 부리기 시작한다. 아버지는 말없이 앉아 있고, 은수는 오빠를 말리려다가 뿌리치는 힘에 못 이겨 주저앉고 만다.

‘아이고, 바람나서 즈이 버리고 간 년도 애미라고, 죽고 없는 애미한테 이제라도 효도하고 싶은가 보지, 응? 효도하고 싶으면 살아 있는 느이 애비한테나 좀 해라, 지 애비 퇴직금까지 가불로 끌어다가 되지도 않는 사업한다고 홀랑 다 말아먹고. 네가 사람이냐?’

맥주병이 깨지고, 상이 엎어지고, 장례식장은 한순간에 난장판이 된다. 아수라장 속에서 정신없이 시달리던 은수는 어느새 장례식장이 아닌 평창동 혁준의 집에 와 있다. 스물셋, 2년 전의 은수가 그 으리으리한 집의 햇빛 가득한 거실에 앉아 있다.

‘우리 혁준이하고 이제 2년 넘게 만났죠?’

향이 좋은 커피를 한 모금 삼킨 송정이 묻는다. 그녀가 값비싼 커피 잔의 얇은 입구를 긴 손가락 끝으로 매만진다. 그녀의 존재는 이 집만큼이나 위압적이다. 은수는 그녀 앞에서 벌레처럼 쪼그라드는 자신을 발견한다.

‘혁준이가 그래요. 예쁘고 건강한 품종묘보다 길에서 쓰레기 먹고 사는 불쌍한 고양이들, 그런 거에 더 마음 쓰는.’

은수는 부들부들 떨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은수 씨 오빠가 서 비서님 속을 그렇게 썩인다면서요? 재벌가 드나드는 아버지 보면서 헛바람이 들었는지 카드값에 술값에, 사업 핑계로 돈을 억 단위로 쓰면서 정작 제 능력으로 버는 돈은 없으시다고…….’

송정은 손끝까지 기품이 묻어나는 여자였다. 아름다운 얼굴과 더할 나위 없이 우아한 자태로 은수의 뼛속 깊은 열등감을 잔인하도록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었다.

‘더구나 은수 씨 어머니.’

은수의 눈빛이 파리하게 빛난다.

‘은수 씨 어릴 때 바람나서 도망가셨다고.’

은수가 입술을 깨문다. 너무 세게 깨문 나머지 입 안 가득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 착실히 공부해서 명문대까지 가시고, 은수 씨 정말 대단해요. 오늘 이렇게 얼굴 보니, 혁준이가 왜 그렇게 빠졌는지 이해도 되네요.’

송정의 시선이 차가운 칼날처럼 은수의 가슴에 닿는다. 가슴이 막혀 숨을 쉴 수 없는 지경이 된다.

‘근데 거기까지예요. 남자들 다 그래요, 금방 질리고. 더구나 혁준이하고 은수 씨는 태생부터 안 어울리잖아요. 혁준이도 알아요, 은수 씨랑 어차피 안 되는 거. 그래서 지금 더 애틋할 거예요. 그리고 요즘 은수 씨 자취방으로 혁준이 자주 끌어들인다면서요. 그럼 더 금방 질릴 거고. 어차피 안 될 거 아니까, 내가 굳이 나서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이렇게 부른 건…….’

송정이 잠시 말을 멈추고 무언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린다. 은수는 눈을 들어 그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송정을 노려본다. 참았던 눈물이 폭발하듯 터진다.

‘피임 기구예요. 선 잘 지키면서 하시라구. 설마 혁준이 말고 다른 남자들하고 하시고 그러진 않죠? 어머니는 좀 그러셨던 것 같던데.’

은수는 도망치듯 그 집을 뛰쳐나오고 한참을 달린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얼마나 달렸을까, 그녀 앞에 갑자기 나타난 혁준이 있다. 어린아이처럼 울며불며 소리치는 은수 앞에 혁준은 망연히 서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은수가 소리치며 혁준에게 한 발 더 다가선다. 은수가 다가선 만큼 혁준이 멀어진다. 혁준은 여전히 아무 표정이 없다. 은수가 혁준을 붙잡으려 손을 뻗자, 혁준은 아예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먼 곳으로 멀어진다.

‘혁준아!’ 하고 혁준의 이름을 부르고 싶지만 목소리가 꽉 잠겨 나오지 않는다. 소리를 짜내려고 발버둥 쳐도 소용없다.

“……아!”

은수는 땀에 젖은 채 잠에서 깼다. 하얀 커튼 너머로 아침 햇살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알몸의 은수는 이불로 가슴께를 대충 가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들어 자신이 있는 곳을 확인했다. 금요일 아침, 파리 8구의 꼭대기 층 아파트. 만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낯선 남자와 그러나 왠지 모르게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것처럼 몸과 마음이 통하는 어마어마하게 잘생긴 남자와 두 번째 밤을 보낸 곳.

거실로 나가니 진한 커피향이 포근했다.

“악몽 꿨어? 무슨 소리를 그렇게 지르면서 일어나.”

은수가 돌아보자, 주방에서 현우가 아침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상의는 챙겨 입지 않고 청바지에 앞치마만 두른 차림이었다. 은수가 이불로 몸을 감싸고 현우에게 다가갔다. 현우가 헝클어진 은수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가서 더 누워 있어. 아침 만들어서 가져다줄게.”

악몽에서 깨어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현실이 신현우라는 사실에 은수는 잠시 어안이 벙벙했다. 다만 입맛을 돋우는 버터 향과 간밤 무리한 마찰로 인한 둔부의 쓰라림이 은수를 악몽에서 깨어나게 도와주고 있었다.

은수는 현우의 말대로 다시 거실 소파에 누웠다. 불과 얼마 전까지 자신의 현실이었던 악몽으로부터 깨어나 마주하게 된 지금이 말도 안 되는 축복 같았다. 이렇게 과분한 순간을 맘껏 누려도 되는 것인지, 곧 다시 빼앗길 행복이 아닌지 걱정될 지경이었다.

“자, 드시죠.”

현우가 커다란 쟁반을 소파 옆 낮은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은수는 스크램블드에그, 미니 크루아상과 오렌지 주스, 커피가 제법 구색을 갖춘 것을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것도 할 줄 알아요?”

“어젯밤에 잘해서 주는 상. 아프다면서도 참고 계속 받아 준 거 예뻐서.”

현우가 은수의 옆에 바싹 붙어 앉으며 다시 은수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근데 왜 다 하나씩이야?”

포크와 나이프도 한 개, 주스와 커피도 한 잔씩인 걸 보고 은수가 물었다. 현우가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선명한 복근이 아침 햇살에 눈부셨다.

“난 아침은 커피랑 담배만. 테라스에서 담배 피워도 돼?”

“응.”

은수가 포크를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 안에서 녹아내리는 크루아상에 엄마, 송정, 그리고 혁준의 악몽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은수가 식사를 다 하고 주방에서 정리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페닌술라 호텔의 루프탑 레스토랑에서 들었던 에릭 사티의 곡.

‘……현우 씨?’

거실로 나가 보니 현우가 그랜드피아노 앞에 앉아 있었다. 은수의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 웃어 보이는 와중에도 연주를 멈추지 않았다.

앞머리가 헝클어진 채 살짝 부은 눈을 하고 입에는 반쯤 줄어든 담배를 물고 있었다. 깊은 두 눈과 날카로운 콧대, 도톰한 입술, 그 어느 하나 아름답지 않은 데가 없었고, 그 모든 지점이 작은 얼굴에 조화롭게 자리 잡고 있었다. 창문의 하얀 커튼 사이로 빛이 부서져 들어왔고 현우의 적당히 그을린 듯한 상체가 조각처럼 반짝였다. 긴 팔의 힘줄은 아침 햇빛에 그림자가 지며 더 도드라져 보였고, 건반 위를 천천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강하면서도 예민해 보였다.

어젯밤 그 손가락들은 은수의 은밀한 곳에 찾아 들어와 여자라는 악기를 연주했다. 은수는 그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예리하게 전율하며 각기 다른 소리를 내는 악기가 되었다. 은수는 저도 모르는 사이 촉촉이 젖어 들었다.

“예전에 배역 때문에 잠깐 배웠었는데 안 까먹었네.”

연주를 마친 현우가 담배를 마저 피우며 말했다. 은수가 천천히 다가와 그의 무릎 위에 앉았다. 오른팔로 현우의 몸을 감싸 안고 왼손을 뻗어 현우의 입에 물려 있던 담배를 빼냈다.

현우가 그런 은수를 가만히 바라봤고, 은수는 잠시 눈을 마주다 현우에게 입을 맞췄다. 현우는 이내 눈을 감고 은수의 입맞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현우는 입을 떼지 않은 채 은수를 안아 올려 침실로 향했다.

***

정사와 애무의 끊임없는 반복이 깊은 잠으로 잠시 멈춘 후 두 사람이 잠에서 깼을 땐 이미 석양빛이 완연해 있었다.

“이렇게 같이 있어서 너무 좋다.”

현우가 은수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내일은 일하러 가야 돼요.”

“안 가고 나랑 놀면 안 돼?”

커다란 남자의 어린애 같은 투정에 은수는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은 은수가 머무는 작은 방의 침대에 꼭 붙어 누워 있었다. 비스듬한 창으로 들어온 노을빛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우리 한국 가서도 볼까?”

갑작스런 물음에 은수는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현우 씨 마음대로.”

“왜, 나 만나기 싫어?”

“응. 싫어요.”

은수는 장난처럼 받아치며 당황한 마음을 감추려 했다. 은수는 웃으며 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현우는 웃고 있지 않았다.

“왜?”

현우가 몸을 일으켜 은수를 내려다봤다. 은수도 웃음기를 거두고 몸을 일으켜 현우를 똑바로 보고 앉았다.

“상처 받을까 봐 겁나서.”

은수는 금세 울 것 같은 얼굴이 됐다.

‘이 남자 앞에서는 왜 이렇게 속마음을 다 터놓게 되는 거지…….’

현우가 잠시 은수를 바라보다 조심히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 새끼, 대체 얼마나 나쁜 놈이었니?”

현우의 어깨 위로 은수의 눈물이 흘러내렸다. 현우의 커다란 품에 안긴 은수는 어느새 오열하고 있었다. 지난밤의 악몽 탓이었을까, 지난 세월 그녀가 밟아 온 고된 길의 여독이 이제야 풀린 탓이었을까, 어떤 호소나 응석도 다 받아 줄 것 같은 이 단단한 가슴 앞에 은수는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되어 버렸다. 누구 앞에서도 이렇게 목 놓아 운 적이 없었다.

현우는 울다 지쳐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은수를 눕히고 그녀가 잠들 때까지 그녀를 바라보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침내 그녀가 잠든 모습을 내려다보며 현우는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를 지켜 줘야 한다는 마음이 자기 안에서 피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누군가 현우 앞에서 이렇게 자기감정을 다 드러내 보이는 것은 아주 어릴 때 말고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모는 형밖에 몰랐고 그나마 이혼 후에는 아무도 현우를 챙기지 않았다. 현우가 성공한 후에야 그가 마치 그들의 보험인 양, 맡겨 놓은 빚이 있는 것처럼 그들이 필요할 때만 현우를 찾았다.

현우가 몸담은 연예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모두 화려한 가면을 쓰고 있었고 어느 누구도 그를 ‘배우 신현우’가 아닌 ‘인간 신현우’로 존중하지 않았다. 앞에서는 온갖 입에 발린 말과 가식적인 미소로 현우의 마음을 사려고 했고, 뒤에서는 더러운 소문을 만들어 내며 자기 배를 불렸다. 그들에게 현우는 돈을 벌어다 주는 꼭두각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피 터지는 경쟁을 이기고 운 좋게 꼭대기까지 올라왔지만 그 위치는 너무나 황폐하고 외로웠다. 아무도 없이 홀로 정상을 지키기를 몇 년, 현우는 속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수면제 없이 잠들지 못한 지 1년이 넘은 어느 날, 현우는 무작정 짐을 챙겨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너를 만나기 위해서였을까. 이렇게 아기처럼 잠든, 나를 닮은 너. 나처럼 상처받고, 나만큼이나 외로운 너…….’

***

현우는 외투를 챙겨 입는 은수를 뒤에서 껴안으며 매달렸다.

“진짜 가야 돼?”

“응, 진짜 가야 돼요.”

은수가 현우의 팔을 풀며 웃었다.

“대신 돈 많이 벌어 와.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고.”

계단을 내려가던 은수가 갑자기 멈춰서 뒤돌아보며 핀잔하듯 물었다.

“근데 한국 안 가요?”

“나 한국 가면 혼자 뭐 하려고? 나쁜 짓 하고 못되게 놀려고?”

현우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엉덩이를 그러잡으며 말했다. 은수는 몇 걸음 돌아와 까치발을 들고 입 맞췄다. 현우가 어린애처럼 해사하게 배시시 웃었다.

현우는 은수에게 더 이상 연예인 신현우가 아니었다. 그는 화면 속의 객체가 아니라, 살냄새로, 따뜻한 숨결로, 배꼽 근처의 보송한 털 같은 것으로 존재했다. 커다란 강아지 같은 그를 두고 아르바이트를 나가야 하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은수가 떠난 후 현우는 거실로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핸드폰 전원을 켜니 톡과 문자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다. 대부분 규호와 회사에서 온 연락이었다.

-형 어디야? 나 피 말려 죽일 거야?!

신호가 두 번 채 울리기도 전에 규호가 전화를 받았다.

“규호야.”

-이름 부르지 마라.

규호가 이를 갈고 있을 것을 생각하니 왠지 더 놀리고 싶었다. 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나 더 있다 갈 거야. 먼저 가.”

-형 왜 그래 진짜, 강 대표 지금 난리 났어! 형 다음 달 광고 전에 빨리 몸 만들어야 되는데 파스타랑 마카롱 먹고 살찌면 어떡하냐고 발 동동 구르고 난리 났다고.

“파스타는 이태리 음식이고.”

-이씨, 신현우! 지금 그게 중요하냐?

현우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밤이고 낮이고 은수와 운동하느라 살찔 틈이 없다고 얘기하려다가 규호가 울 것 같아 그만두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 어디야? 그 여자랑 같이 있어?

“어.”

-에휴.

규호의 깊은 한숨이 수화기 너머로 전해져 왔다.

“나 좀만 더 있다 갈게. 며칠만 봐줘.”

-형, 설마 그 여자 좋아해?

어떤 여자도 본인의 정해진 스케줄이나 일에 방해를 받으면서까지 만나지 않는 현우였기에, 규호는 이 상황이 너무나 생경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래서 부탁인데, 규호야…….”

-이름 부르지 말라고 했지?

“형 부탁이잖아.”

잠시 뜸들이던 규호가 결국 대답했다.

-뭔데, 내가 뭘 하면 되는데?

“여자 이름은 서은수고, 여자가 한국에서 만났던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좀 알아봐 줘.”

-형. 뭐야 진짜?

“부탁할게. 이름은 혁준, 성은 모르고. 은수랑 같이 한국대 다닌 거 말고 다른 건 몰라. 아, 사진 동아리도 같이 했었고. 나이는 아마 이십대 중반.”

현우는 투정하는 규호의 대답을 제대로 듣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규호가 자신의 부탁을 흘려들을 리 없었다. 아이돌로 데뷔했을 때부터 연예계의 온갖 구정물을 함께 다 맛보았던, 배우로 전직을 위해 회사를 옮기면서 유일하게 데려온 식구이자 이제는 가장 친한 친구였다.

현우는 천천히 텅 빈 아파트를 둘러보았다. 이 아파트에 혼자 있는 것은 처음이었다. 은수가 없는 이 아파트는 너무나 넓고 공허했다. 익숙지 않은 유럽식 아파트의 구조를 살펴보고 있자니 파리에 있는 것이 새삼 실감 났다.

지난 며칠,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조차 잊을 정도로 은수에게 빠져 있었다. 방해와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기에 그녀에게 더 집중할 수 있었지만, 그 장소가 파리라는 것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현우에게 파리가 중요한 이유는 이곳에서 은수를 만났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던 시절의 은수가 한때 머물렀던 곳이라는 사실뿐이었다.

아직 학생이던 이십대 초반의 은수가 6개월을 보냈다는 이 아파트. 그는 구석구석을 둘러보며 ‘학생 때 은수는 어땠을까, 지금처럼 예쁘고 당당했을까, 화장을 거의 하지 않고 긴 머리를 찰랑이며 캠퍼스를 누볐을 그 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그 시절에 은수를 만난 그놈은 스스로 얼마나 운 좋은 놈인지를 알았을까…….’라는 생각에 젖어 들었다.

야옹.

어디선가 나타난 무무가 현우의 무릎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배고파? 밥 줄까?”

현우가 묻자, 무무가 다시 바닥으로 뛰어내려 주방과 서재 사이의 복도로 향했다. 무무를 따라가니 그 복도 한쪽 바닥에 고양이 밥그릇과 물그릇이 있었다.

주방에서 사료를 꺼내 밥을 챙겨 주고 일어서려는 찰나, 복도에 놓인 작은 서랍장 위에 카메라 하나가 보였다. 하얀 미러리스 카메라로 은수의 다른 짐들과 뒤섞여 있는 걸 보아 그녀의 것인 듯했다. 현우는 카메라를 집어 들고 거실 소파로 돌아와 전원을 켰다.

카메라는 파리의 풍경 사진으로 가득했다. 센강 변의 꽃집, 거리의 화가들, 여러 각도에서 찍은 에펠탑, 공원 벤치에 나란히 앉은 노부부, 루브르 박물관 앞의 피라미드, 벼룩시장에 나온 골동품들, 멋지게 차려입은 연인들……. 은수의 시선이 머무는 곳은 형형색색 아름답고 따뜻했다.

그렇게 계속 사진을 뒤로 돌리다 보니 한국의 풍경 사진들이 나왔다. 파리의 겨울에서 한국의 가을로 카메라 속 시간이 거꾸로 가고 있었다. 낙엽 지는 남산, 삼청동 거리, 이태원의 루프탑 카페, 그리고 한강의 야경 사진을 넘기며 현우는 은수가 다녔을 서울의 길들을 생각했고, 또 미래의 어느 좋은 날 그 거리를 은수와 함께 걷는 상상을 했다.

‘사진 동아리 했다더니 제법이네. 나도 찍어 달라고 해야겠다.’

현우는 은수의 카메라 앞에 설 생각에 벌써 설레는 자신이 어색하면서도 웃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렇게 사진을 계속 넘기는 와중에 갑자기 풍경이 멈추고, 어떤 젊은 남자의 피사체가 등장했다.

흰 피부가 깨끗하고 선한 미소가 아름다운 남자. 카메라 뒤에 있는 사람을 의심의 여지없이 지극히도 사랑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눈빛. 스물넷, 혹은 다섯 정도로 보이는 애송이였지만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수컷의 냄새가 진동하는, 남자라면 알아볼 수 있는 눈빛이었다. 현우는 자신의 심장이 요동치고 피가 거꾸로 솟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은수와 깍지 낀 손을 자랑하듯 카메라 앞에 들이미는 사진, 은수와 함께 침대에 누워서 찍은 듯한 사진과 샤워를 마치고 수건 하나로 몸을 가린 은수를 몰래 찍은 듯한 사진을 현우는 차례로 넘겨 보았다. 하지만 이 중 그 어떤 장면도 마지막 단 한 장보다 더 난폭하게 현우를 뒤흔들지는 않았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온 우주처럼 사랑하는 두 남녀가 주고받는 교감을 단 한 컷으로 완벽히 보여 주는, 피사체를 향한 벅찬 사랑과 그 사랑에 대한 피사체의 절대적인 믿음을 담고 있는, 혁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 한 장의 사진이었다.

***

“어, 수연아.”

퇴근길, 은수는 수연의 전화를 받았다. 톡은 자주 주고받았지만 전화는 오랜만이라 무슨 일인가 싶었다.

-잘 지내고 있어?

다행히 수연의 목소리는 전과 다름없었다.

“응, 수연아. 잘 지내.”

-목소리가 전보다 힘이 있네, 그래도. 기운 좀 차린 거야?

은수는 상기된 목소리를 짐짓 감추려는 자신이 민망해졌다.

“응, 다행히. 너도 잘 있지? 한국에 별일 없고?”

-나야 잘 지내지. 요즘 갑자기 추워져서 난리야.

날씨 얘기로 시간을 끄는 수연이 조금 이상했지만 그러려니 했다.

“난 이제 퇴근하는 길이야. 한국은 지금 새벽 아닌가?”

-어어, 지금 막 두 시 됐다.

“늦게 자는 거 여전하구나.”

-어, 주말이라 괜찮아. 알바는 할 만하고?

“그럼, 고등학교 때부터 알바에 이력이 났었잖아, 나.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래.

은수는 이상한 기미를 느꼈다. 이렇게 빙빙 말을 돌릴 사이가 아니었다.

“……수연아, 무슨 일 있어?”

잠시 뜸을 들인 수연이 낮은 목소리로 어렵게 말을 꺼냈다.

-며칠 전에 혁준이가 찾아왔었어.

센강 변을 따라 걷던 은수의 발걸음이 뚝 멎었다. 바람이 찼지만 혁준의 이름을 들은 순간 추위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너 어디 있냐고 울면서 묻는데, 그냥 보낼 수가 있어야지…….

수연은 혁준과 은수의 시작과 끝을 모두 함께 지켜본 거의 유일한 사람이다. 한 달 전, 은수가 혁준에게 통보하다시피 이별을 고하고 갑자기 사라져 버린 후, 수연 또한 은수의 부탁으로 혁준의 연락을 피해 왔었다. 은수를 모욕하고 처절하게 짓밟은 혁준의 가족과 그들로부터 은수를 지켜 주지 못했던 혁준에게 수연도 함께 분노했었다. 하지만 몰라보게 초췌해진 모습으로 자신을 찾아온 혁준을 차마 그냥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너 파리 갔다고만 얘기했어. 어디에 있다고 자세히 얘기는 안 하고. 좀 쉬고 곧 돌아올 거니까 좀만 기다렸다가 나중에 만나라고. 너 한국 오면 내가 연락 주겠다고 해서 돌려보냈어.

“그래, 고마워.”

은수는 마음을 추스르고 겨우 답했다.

-곧 올 거지?

수연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은수는 애써 웃으며 답했다.

“……응, 그럼. 가야지. 가서 직장도 구하고.”

-그래, 잘 쉬고. 어여 들어가.

전화를 끊고 나서도 은수는 잠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파리 시내를 서성거렸다.

혁준과의 연애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스물한 살의 여름밤 집 앞 골목에서 그에게 들었던 고백, 백일 기념 여행을 떠나 함께 걸었던 바닷가, 빈 강의실에서의 첫 키스, 어느 밤 쏟아지던 별들 아래에서 영원을 다짐하던 혁준의 목소리. 3년 넘게 함께한 만큼 추억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현우와 함께 한 며칠간의 기억으로 대체되고 말았다. 현우의 체취에 몸을 맡기고 그 눈을 바라볼 때, 혁준의 기억은 점점 옅어지고 있었다. 마치 취한 것처럼, 혹은 사로잡힌 것처럼 현우의 존재가 자신의 신체와 정신을 장악하고 있는 것을 느꼈다. 운명 같은 사랑을 믿진 않지만 온몸과 정신의 강렬한 이끌림은 어쩔 수가 없었다. 며칠째 거의 하루 종일 현우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현우와 함께 있을 때는 물론이고, 함께 있지 않을 때조차 체취와 온기와 감촉이 느껴질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어와 은수의 머리카락을 흩뜨려 놓았다. 은수는 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

“왔어?”

은수가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집 안은 훈훈한 기운과 맛있는 냄새로 가득했다.

“뭐예요?”

현우가 주방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은수가 다가가 현우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현우의 큰 등을 두 팔로 감싸 안고 그의 향기를 듬뿍 들이마시자 하루의 피로가 눈 녹듯 사라졌다.

“떡볶이. 먹고 싶다며.”

“대박, 오빠 최고!”

“오…… 오빠?”

은수가 현우의 팔과 허리 사이로 머리를 쏙 집어넣어 현우를 올려다봤다.

“응, 오빠. 맛있는 거 해 주면 다 오빠.”

현우는 은수의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거리고 있었다. 은수는 귀가 빨개진 현우를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눈으로 바라봤다.

“원래 잘생기면 다 오빠 아니야? 그래도 뭐 어쨌든 은수한테 오빠 소리는 처음이네, 흠흠. 심심해서 나갔다가 한인 마트 보이길래 재료 좀 사 왔어. 놀면 뭐 하나, 무무 밥도 내가 챙겨 줬고. 잘했지? 씻고 와. 이제 시작해서 좀 걸려. 만두도 굽고 하려면, 흠흠.”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말을 늘리는 현우에게서 팔을 풀고 은수는 웃으며 화장실로 향했다.

“서은수가 애교를 다 부리고, 떡볶이가 되게 좋긴 하나 보네.”

현우는 재료를 손질하며 입술을 비죽거렸다. 짐짓 미간을 찌푸렸지만 입꼬리는 천장을 향해 있었다. 화장실에서 솨, 하는 물소리가 들렸다.

그가 찬장에서 필요한 재료를 더 꺼내려던 찰나에 식탁 의자에 걸어 놓은 은수의 코트 안에서 핸드폰 벨소리가 울렸다. 그동안 은수에게는 거의 걸려 오는 전화가 거의 없었다. 무시하려 했지만 한국에서 온 중요한 전화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현우는 핸드폰을 꺼냈다.

[혁준 010-XXXX-XXXX]

그의 이름.

두 글자만으로 현우의 눈에 서릿발을 내리게 하는 존재.

지금은 제 손안에 있지만 언젠가 바람처럼 사라져 버릴까 두려운, 그런 여자의 한때 전부였던 첫사랑.

그 작고 여린 몸이 감당해야만 했던 무수한 고통의 원인 제공자.

그녀의 모든 것이었다고, 처음 만난 자신 앞에서 그녀가 그렇게 눈물 흘리며 고백했던 이야기의 주인공.

지금 자신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갖고 싶은 이 여자를 세상 모든 사랑이 담긴 눈으로 바라봤던 바로 그 남자.

현우는 잠금을 열고 전화를 받았다.

-……은수야.

수화기 너머로 당황하면서도 안도하는 듯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저음으로 낮게 깔리는 묵직한 목소리였다.

-은수야, 나야.

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 지금 파리야. 드골 공항 내려서 지금 막 시내 도착했어.

“…….”

-수연이한테 들었어, 너 파리에 있다고. 내가 갈게. 어디에 있어?

“…….”

-은수야.

“은수랑 같이 있는 사람이에요.”

-…….

“프랑수와 1가 23번지 6층. 은수와 내가 있는 곳이에요.”

-당신 누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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