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12월 초순의 파리는 온통 빛 축제였다. 짧아진 해가 어스름으로 사라지고 나면 때를 기다리던 거리의 불빛들이 곳곳에서 밝아지기 시작했다. 가로수에 장식된 작고 무수한 전구들이 샹젤리제 밤거리를 환하게 비추었고, 주홍빛으로 반짝이는 에펠탑은 한 해를 갈무리하는 파리지앵의 미소 같았다.
빛의 향연 속에서 은수만이 어둠으로 침잠해 들어가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출국이었다. 직장을 그만둔 다음 날로 비행기를 탔다.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그렇게 도망치듯 한국을 떠났다.
파리에 처음 온 것도, 말이 통하지 않는 것도 아니었지만, 한 달 넘도록 은수는 마치 다른 차원의 세계에 불쑥 떨어진 사람처럼 모든 걸 낯설게 느끼고 있었다. 파리가 아닌 다른 곳에 있었더라도 그렇게 느꼈을 거라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하루 대부분을 아파트에 틀어박혀 지냈다. 3년 전 교환학생으로 처음 파리에 왔을 때 홈스테이 했던 마리 아줌마의 집이 마침 비어 있었다. 파리 8구의 200년도 더 된 그 아파트 맨 꼭대기 층이 먼 나라에서 온 외로운 이방인의 은신처가 돼 주었다.
그렇게 지내기를 한 달, 언제까지 집에만 있을 순 없다는 생각에 얼마 전 근처 식당에서 서빙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첫 휴일인 비 오는 금요일,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조차 너무나 힘들었다.
비는 어느새 눈으로 바뀌어 있었고 집 안의 공기는 습하고 스산했다. 은수의 두 눈은 너무 울어 모래를 끼얹은 것처럼 따가웠다. 지난 한 주 고된 아르바이트에 지쳐 잊고 지냈던 감정들이 한꺼번에 올라왔던 터였다. 밥을 먹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무심결에 창밖을 바라보다가도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그런 눈에 렌즈를 낄 수도 없었고, 안경도 어디 갔는지 찾을 수 없어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채 밖으로 나왔다. 익숙한 집 앞 골목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미아가 될 일은 없기에 그냥 그 상태로 집을 나섰다.
12월의 첫 금요일, 파리 8구는 일찍부터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러 나온 쇼핑객들과 팔짱을 낀 채 걸어가는 연인들로 가득했다. 거리는 이미 트리와 성탄 장식으로 화려했고 사람들의 들뜬 분위기로 포근하기까지 했다. 닿을 수 없는 포근함에 눈이 시려 왔다.
익숙한 골목을 몇 블록 지나치자 센강이 눈앞에 흐릿하게 펼쳐졌다. 에펠탑이 잘 보이면서도 관광객으로 북적이지 않는 앵발리드 다리 위로 한걸음씩 내디뎠다. 에펠탑의 형체가 빛으로 반짝거렸다. 다리의 중간쯤 왔을 때 은수는 천천히 걸음을 늦추었다. 커피와 크래커 말고는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은 탓에 살짝 현기증이 났다. 걸음을 멈추고 강 쪽으로 몸을 틀었을 때였다.
「Do you speak French?(불어 할 줄 알아요?)」
은수가 뒤돌아봤을 때 프랑스인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 두 명이 서 있었다. 한 명은 키가 크고 한 명은 중간쯤, 두 명 다 더티블론드. 은수의 눈에는 어렴풋한 형체밖에 보이지 않았다.
「No, I don’t. I am sorry.(미안하지만 못해요.)」
은수는 거짓말을 했다.
「You definitely speak English, though.(근데 영어는 확실히 하네요.)」
프랑스 남자들이 웃으며 말했다. 역시 처음부터 대꾸하지 말았어야 했다. 귀찮은 일이 생긴 것 같아 한숨이 절로 났다. 공기 중에 은수의 하얀 입김이 헛되이 흩어졌다.
「Where are you from? China? Japan?(어디서 왔어요? 중국? 일본?)」
뭐라고 핑계를 대고 이 상황을 벗어나야 할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기력이 없어서 말을 이어 가기에도 힘에 부쳤다. 단어는 머릿속에서 흩어지고, 이제는 말랐을 거라 생각했던 눈물이 다시 차오를 것만 같았다.
「Were you crying? Why? Do you miss your boyfriend?(울고 있었어요? 왜? 남자 친구 보고 싶어서?)」
그녀의 눈가가 붉은 것을 보고 남자들이 짓궂은 질문을 이어 갔다.
「I am sorry, but could you please leave me alone? I am not in the mood to talk to someone.(미안하지만 나 좀 내버려 둘래요? 누구랑 얘기할 기분이 아니어서요.)」
유창한 영어로 매몰차게 선을 긋는 은수에게 잠시 당황한 기색이었지만 프랑스 남자들은 이내 미소로 응수하며 말했다.
「Well then you should come with us for a drink. You need a drink, and you don’t have to talk at all.(그럼 우리랑 술이나 마시러 가요. 술 한 잔 필요한 것 같은데, 얘기는 안 해도 돼요.)」
프랑스 남자들이 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은수는 뿌리치지 못하고 당황한 채 얼어붙어 있었다. 이대로 강한 힘에 끌려갈 것만 같았다. 본능적으로 소리를 지르려 하는 찰나였다.
누군가 은수의 어깨를 잽싸게 잡아챘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수는 누군가의 커다란 품에 안겨 있었다.
「What do you want from my sister?(내 동생한테 볼일 있어?)」
청명한 목소리가 센강의 밤공기를 갈랐다. 스모키한 향수 냄새, 은수는 낯선 남자의 팔에 안겨 위를 올려다봤다. 큰 키에 검은 머리, 코트 깃에 가려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No, no. we are sorry.(아니요, 죄송합니다.)」
갑자기 나타난 커다란 동양인 남자의 서슬에 프랑스 남자들은 손사래를 치며 뒤로 물러났다. 프랑스 남자들이 은수와 그를 흘깃거리며 다리 저쪽 끝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동양인 남자는 팔을 풀고 은수를 놔주었다.
은수는 그제야 앞에 선 남자의 모습을 눈에 다 담을 수 있었다.
넓은 어깨에 작은 머리. 190은 족히 될 것 같은 큰 키에 기다란 검은 코트를 입고 있었다. 진눈깨비를 맞은 검은 머리칼이 다리 위 가로등의 주홍빛에 반짝거렸다.
‘……한국인인가?’
「Are you ok?(괜찮아요?)」
「Yes, thank you.(네, 고마워요.)」
은수는 더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몰라 눈만 깜빡거렸다.
“혹시, 한국인이세요?”
자기도 모르게 은수의 입에서 질문이 튀어나왔다.
“네. 한국인이시구나. 괜찮으신 거죠?”
남자는 은수의 안부를 재차 물었다.
“네,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남자의 얼굴도 표정도 잘 보이지 않아, 하얀 입김 너머로 살짝 웃고 있는 것 같은 남자의 존재가 비현실처럼 느껴졌다.
“그럼 이만.”
은수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만 가셔도 좋다는 몸짓을 했다. 남자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발길을 돌렸다. 그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은수는 여전히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다리 난간에 기대 센강을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저 여자. 누굴 기다리기라도 하는 건가? 저렇게 있다가 또 누가 귀찮게 하면 어쩌려고…….’
강바람에 흩날리는 은수의 긴 머리를 바라보며 남자는 걱정스런 마음이 들었다. 낯선 유럽의 도시에서 만난 한국인이어서인지, 한참 운 것 같은 앳된 얼굴이 마음 쓰여서인지, 이유를 알 순 없었다.
화장기 없이 말간 얼굴에 눈가와 입술만 붉었다. 하얀 입김만큼이나 흰 피부가 유난히 빛이 났다. 화려한 이목구비는 아니었지만 오목조목 조화를 이뤄 분위기가 예쁜 얼굴. 그리고 하얗게 드러난 가는 다리가 너무 추워 보였다.
그는 자신도 모르는 새 그녀 곁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혹시 댁까지 모셔다 드릴까요?”
은수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아니요 괜찮아요. 바로 이 근처라서…….”
남자는 아까 그 프랑스 남자들이 하던 짓을 자기가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아까 그 남자애들, 다시 나타날까 봐요. 제가 걱정이 돼서 그래요. 옷도 얇게 입으셨는데 계속 여기 계시면 감기 들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게 아니라 여자는 외투도 제대로 갖춰 입지 않고 있었다. 눈비가 내리는 이런 날씨에 짧은 원피스와 살구색 스타킹, 집에서 입는 것 같은 카디건만 대충 걸친 여자. 이상하게 신경 쓰이는 여자다.
은수는 처음 보는 한국인 남자의 참견에 당황했지만 한편으로는 이해가 됐다. 외국에서 한국인을 만나면 더 반갑고 챙겨 주고 싶은, 그런 마음이겠지. 은수 또한 한 달 만에 한국어로 이야기할 수 있어서 잠깐이지만 기쁜 마음이 들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어차피 돌아가려는 참이었기에 집까지 걸으며 좀 더 얘기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네, 그럼. 부탁드려도 될까요?”
은수가 미소 지어 보였다. 두 사람은 함께 비에 젖은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프랑수와 1가에 진입했을 때 남자가 먼저 침묵을 깼다.
“여행 중이세요?”
“네. 잠깐 여행 왔어요.”
은수가 입술을 살짝 떨며 대답하는 것을 보고 남자는 목도리를 풀어 은수에게 내밀었다.
“많이 추워 보이셔서.”
잠시 망설이던 은수는 이내 목도리를 받아 들고 어깨에 숄처럼 둘렀다. 품에 안겼을 때의 그 향수 냄새가 은수를 더 짙게 감싸 안았다. 한 겨울 숲 속의 외로운 오두막을 연상시키는 우디하고 스모키한 향.
“저도 여행 중이에요. 좀 쉬면서 한달살이 하러 왔어요.”
“아, 요즘 그런 거 많죠? 한달살이.”
은수가 대답했다. 돌아갈 계획도 없이 무작정 파리로 떠나온 지, 정리되지 않은 것들을 남기고 도망쳐 온 지 꼭 한 달.
‘얼마나 더 있어야 할까. 내가 한국에 돌아갈 용기를 낼 수 있을까.’
혼자만의 생각으로 머릿속이 다시 복잡해지려 할 때 남자가 다시 물었다.
“무슨 일 하세요?”
“저는 통역하고 국제 행사 진행, 프리랜서예요. 무슨 일 하세요?”
“아, 그럼 여행하는 데 좀 자유로우시겠다. 저도 프리랜서…… 예요. 방송 쪽.”
남자는 멋쩍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은수는 가만히 그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지만 피부가 반짝일 정도로 매끈하고 선이 고운 얼굴.
‘혹시 모델이나 연예인? 그러고 보니 많이 들어 봤던 목소리이기도…….’
낮게 깔리지는 않지만 강약의 리듬을 타며 울리는 목소리였다. 어떤 단어를 말하더라도 귀에 정확히 꽂히는 딕션이 익숙했기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혹시 배우예요?”
은수는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아…… 네, 신현우라고 합니다.”
은수는 깜짝 놀라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신현우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이돌로 데뷔하자마자 톱스타가 된 걸로 모라자서 배우로 승승장구하더니, 얼마 전 첫 주연 영화로 단번에 천만 관객을 모은 그 신현우라니.
“아, 죄송해요. 신현우 씨를 몰라뵙고……. 너무 죄송해요. 제가 렌즈를 안 끼고 있어서 눈에 보이는 게 없어서요. 정말 죄송해요.”
은수는 몇 번이나 허리를 숙이고 사과했다. 그러자 현우가 오히려 더 어쩔 줄 몰라 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황당하셨죠? 눈앞에 두고 신현우 씨를 못 알아보다니……. 진짜 죄송해요.”
은수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고양이 같은 눈망울로 현우를 올려다봤다.
“모르실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여긴 한국도 아니고.”
현우가 웃으며 말했다. 프랑스에 사는 동양 여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얼핏 들었지만 영어 발음이 원어민 같았고, 한국 여자 특유의 꾸밈이 없어서 더 그런 인상이었다. 한국에 사는 한국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몰라 볼 확률은 거의 제로이기도 했고.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파리 8구의 거리. 눈비가 그치고 나서 바람이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이제 집으로, 식당 안으로 자리를 찾아 들어가고 있었다. 현우는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건넸다.
“우리 이렇게 서 있지 말고, 어디 들어가서 따뜻한 차라도 마셔요. 차 한 잔 사 주세요. 저한테 신세진 일도 있고, 미안한 일도 있으시니.”
은수는 형체만 뿌옇게 보이는 현우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봤다. 파리의 흐드러진 겨울 불빛을 배경 삼아 그린 것 같은 고운 실루엣. 첫사랑이 무너진 이후 폐허처럼 멍들어 버린 가슴 속에서 무언가 몽글한 것이 피어오를 것만 같았다. 은수는 거절할 수도 왠지 거절하고 싶지도 않았다.
“저쪽 코너에 괜찮은 카페가 있어요. 그리로 가요.”
은수가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
훈훈한 카페로 들어오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은수는 점원에게 자신이 자주 앉는 창가 자리로 안내를 부탁했다. 은수의 아파트 바로 맞은편 건물 1층에 있는 이곳은 오전엔 브런치를, 저녁엔 술을 파는 전형적인 파리의 카페였다.
두 사람이 안내된 자리는 버건디색의 쿠션이 벽처럼 둘려 있었다. 카페의 홀이 보이면서도 두 사람만의 아늑한 공간이 조성됐다. 카페의 테이블과 소파, 집기들은 파리의 다른 모든 것이 그러하듯 오랜 시간 정성스런 손길에 잘 관리된 상태였다.
웨이터가 다가와 메뉴를 건네고 향초에 불을 붙였다.
“뭐 드실래요? 차 종류는 여기.”
은수가 손가락으로 메뉴판을 가리켰지만 모두 프랑스어로 돼 있어서 현우는 난감해했다. 차 종류는 뭐가 있냐고 물으려다가 현우는 마음을 바꿨다.
“혹시 마티니 있어요?”
은수가 고개를 끄덕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은수의 눈짓을 보고 어느새 다가온 웨이터에게 그녀가 능숙한 불어로 마티니 두 잔을 시켰다.
“불어도 하시는구나. 아까 영어도 되게 잘하시던데.”
“전공이 불어라서요.”
은수가 쑥스러워하며 또 웃었다. 웃으니까 사람이 달라 보인다고 현우는 생각했다. 처연하게 울고 있던 모습이 아직 눈에 선한데, 은은한 불빛 아래 여전히 눈가와 입술이 발간 채 알아듣지 못할 말을 유창하게 발화하는 이 여자는 마치 다른 여자 같다. 미지의 세계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이름이 뭐예요?”
현우가 마티니 글래스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서은수라고 합니다.”
은수가 대답하고 마티니 한 모금을 들이켠 후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다 갑자기 저 혼자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영문을 모르는 현우가 빤히 바라보자 은수가 말했다.
“아까 많이 당황하셨죠? 한국 사람이라면서 신현우 씨를 몰라보고. 뭐 이런 여자가 다 있어, 하셨을 거 아니에요?”
“아,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TV 안 보실 수도 있고. 모를 수도 있죠.”
“광고나 영화 많이 나오셨잖아요. 인터넷 안 하는 사람 아니고서야 어떻게 신현우 씨를 몰라요.”
“영어 잘하셔서 외국에서 오래 사신 한국 사람인가 보다 했어요.”
은수는 애꿎은 마티니 글래스만 계속 만지작거렸다. 현우는 은수의 하얗고 여린 손가락을 무심코 바라보았다. ‘저 손가락이 입술에 닿으면 어떤 느낌일까, 차가울까.’라는 생각이 스쳤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밖과 안의 온도차로 창문에는 습기가 뿌옇게 어렸고, 두 남녀의 풋풋한 침묵 사이에 촛불이 일렁이고 있었다.
“너무 아쉬워요. 이런 대스타를 무려 파리에서 마주쳤는데, 얼굴도 제대로 못 보고 있다니…….”
은수가 푸념하듯 말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서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 좋다는 생각을 속으로 삼켰다. 텅 빈 아파트에 스스로를 가둔 채 지낸 한 달, 외롭다거나 향수를 느낀 적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럴 틈도 없이 첫 이별의 고통 속에 몸부림쳤었으니까.
그렇지만 고국의 언어로 이야기할 수 있는 지금, 은수는 자신이 한국 사람과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 고국의 사람과 정을 나누는 것을 자신도 모르게 그리워하고 있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런 그리움을 불러일으키는 상대가 신현우와 같은 톱 연예인이라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지금 이 시간이 끝나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 촛불처럼 일렁였다.
은수는 마티니를 계속 홀짝였다. 빈 위장에 독한 술을 마시니 금세 취기가 올라왔다. 취기 어린 눈으로 마티니 글래스를 잡은 현우의 긴 손가락만 속절없이 바라보았다. 현우의 동공과 콧대가 너무 반짝거려서 힐끗거릴 때조차 크게 마음을 먹어야 했다. 여전히 잘 보이지 않긴 했지만 가까이 마주 앉아 있으니 그 얼굴의 매혹적인 분위기만으로 사로잡히는 기분이었다.
“근데 아까 왜 울고 있었어요?”
은수가 눈을 들어 현우의 얼굴을 살폈다. 표정의 실루엣이라도 뜯어보면 질문의 의도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현우 또한 자신을 향한 은수의 눈 안에 촛불이 아른거리는 것을 잠자코 바라봤다. 두 사람의 시선이 촛불을 사이에 두고 정면으로 마주쳤다. 은수가 자신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주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그녀를 혼자 훔쳐보고 있는 것 같은, 뭔가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야릇했다.
시나브로 움직이며 촛불이 만들어 내는 빛과 그림자가 은수의 눈가를, 입가를, 콧대를 시시각각 다르게 비추었다. 현우는 마티니에 젖은 은수의 입술이 열리는 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한국에 두고 온 게 생각나서요.”
적당히 둘러대고 넘어갈 수 있었지만 은수는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낯선 사람, 어쩌면 살면서 어디에서도 다시 마주치지 않을 타인 앞에서 오히려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자신을 옭아매는 현실로부터. 혁준과의 이별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
은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며 겨우 몸을 일으켰다. 창밖은 진작에 환했고, 어젯밤 과음의 여파로 속이 울렁거렸다.
어젯밤, 현우는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편안했다. 그도 그럴 것이, 영화나 드라마에서 많이 보고 목소리도 귀에 익었던 터라 도무지 처음 만난 사람 같지 않았다. 살면서 두 번 다시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생각 또한 그 사람 앞에서 깊은 속마음을 털어놓도록 그녀를 부추겼다.
“왜 그렇게 쓸데없이 얘기를 많이 했지…….”
비어 가는 마티니 잔의 수만큼이나 은수는 많은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첫사랑 혁준과의 긴 연애가 끝을 맺은 이야기, 자신을 핍박하는 그의 가족을 견디지 못해 도망치듯 파리로 떠나왔지만 실은 자신의 부재로 충격에 빠질 혁준이 찾아와 주길 기다리는 속마음, 혁준을 사랑하면서도 그가 가진 많은 것들을 질투하며 열등감에 허우적대던 지난날들.
평소 친한 친구에게도 속에 있는 말을 잘 하지 않는 성격이기에 은수는 어젯밤의 자기 자신이 무척이나 생경했다. 사람 마음을 툭 내려놓게 만드는 그 목소리 때문이었을까. 그의 얼굴 표정을 잘 볼 순 없었지만 함께 하는 시간 동안 한순간도 흐트러지지 않고 경청하는 그를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잘 들어 줬는데 나 막 꼬장 부렸으면 어떡하지? 아, 나 어떡해…….”
필름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지만 기억이 조각조각 나 있었다. 혹시나 실수를 했으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은수는 눈을 질끈 감으며 머리를 세차게 털었다.
아르바이트를 가기 전까지 아직 시간이 충분히 남아 있었다.
***
토요일 근무는 유난히 품이 많이 들고 고됐다. 오후 3시부터 밤 11시까지 뛰어다니며 주문을 받고, 테이블을 세팅하고, 그릇을 나르다 보면 눈 깜짝할 새에 하루가 지나갔다. 숙취 때문에 더 고생할 걸 각오한 은수는 흰색 레이스 달린 앞치마를 단단히 둘러맸다.
‘정신 차리자!’
당차게 결심하며 야외석으로 나서자마자 은수는 깜짝 놀라 들고 있던 메뉴판을 떨어뜨릴 뻔했다. 햇살이 비치는 차양 아래 신현우가 다리를 꼬고 앉아 있었다. 그제야 은수의 머릿속에 기억 조각 하나가 떠올랐다.
‘은수 씨 저 파리 가이드 좀 해 줄 수 있어요?’
어젯밤 헤어지기 전 현우가 은수에게 물었다. 살짝 비틀거리는 그녀를 부축해 카페 맞은편 은수의 아파트 정문 앞까지 걸어온 참이었다. 은수는 그런 현우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가이드요?’
‘네, 제가 오늘 술도 샀고 은수 씨 대나무숲도 해 드렸잖아요.’
그러고 보니 본인이 사 주기로 약속해 카페까지 데려와서는 술에 취해 정작 계산은 손님이 하게 만들었다. 더구나 저녁 내내 귀가 따갑도록 자기 얘기를 들어 주기만 했으니, 은수는 도무지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주문 안 받아요?”
현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은수가 메뉴판을 내밀었다. 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얘기도 했던 기억이 어렴풋이 떠오르고 있었다.
“뭐 드시겠어요?”
“뭐가 맛있어요, 여기?”
은수가 오늘의 요리를 읊으려는 찰나, 현우가 다시 말했다.
“근데 가이드 언제 해 줄 수 있어요?”
‘진심이었구나…….’
은수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글쎄요. 오늘은 일이 늦게 끝나서요.”
“그럼 내일?”
“내일이랑 모레는 6시에 마치긴 하는데, 그때 되면 해가 다 져요.”
“그럼 그 다음 날. 저 시간 많아요, 사실. 아무 때나 괜찮아요.”
싱글거리는 현우 앞에서 은수는 더 이상 핑계를 댈 수 없었다. 처음 보는 남자 앞에서 잔뜩 취해 비틀거렸던 자신을 원망해도 소용없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시그널을 보낸 걸 수도 있다고, 그로서는 충분히 오해할 만하다고도 여겨졌다.
어쩌면 사실은 시그널을 보내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걸 그때의 은수는 모르고 있었다.
‘저 빛나는 얼굴에 대고 어떻게 No라고 하겠어.’
은수는 자기 속마음을 읽는 것 같은 그의 투명한 눈빛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겨울바람이 찌릿하게 그녀의 귓불을 스쳤다.
***
가이드를 해 주기로 약속한 날 아침, 나갈 채비를 하는 은수는 설레는 마음을 억누르려 애썼다. 신현우가 돈이 없어서 가이드를 구하지 못하는 건 아닐 테고, 전문 가이드도 아닌 자신에게 구태여 해 달라는 이유를 상상하는 일은 감히 엄두조차 내지 않았다. 그렇게 예쁜 사람과 하루 종일 단둘이 파리를 여행한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게 꿈같은 일이었다.
‘그래,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이 너무 예쁜 거야. 실연의 상처로 심장이 고장 났다고 해도 톱스타 앞에서 잠깐 다시 작동하는 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지. 그러니까 죄책감 갖지 말자. 내가 객지 골방에서 고독사 할까 봐 걱정한 하느님이 정신 차리라고 처방해 준 충격요법이라 생각하자. 침착하자, 침착해 서은수. 신세 갚으라는 거니까, 나대지 말고 가이드 역할에만 충실하면 돼!’
스스로에게 되뇌며 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아파트 1층 현관문을 열었을 때 신현우가 보였다.
‘신현우다. 정말 신현우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나흘 전의 밤에는 코앞조차 제대로 보이지 않았었고, 그다음 날 낮에는 일하는 식당에 갑자기 나타난 그를 챙길 여유도 없이 일하기에 바빴다. 말 붙일 새도 없이 테이블과 주방을 오가는 틈틈이 그를 흘깃거리긴 했었지만, 이렇게 제대로 이 사람을 마주한 것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봉주흐.”
현우가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아이보리색 니트에 청바지, 흰 운동화가 그린 듯이 잘 어울렸다. 수수한 차림에도 화보가 따로 없다고 은수는 생각했다. 짙은 버건디 컬러의 목도리가 매끄러운 피부를 더 돋보이게 했고, 검은 코트는 무심히 손에 걸쳐져 긴 다리 옆에 늘어뜨려져 있었다.
<퇴폐미와 소년미의 양면성을 한 몸에 지닌 완벽한 오브제.>
어느 잡지에서 봤던 신현우에 대한 묘사가 떠올랐다.
“봉주흐.”
은수가 화답하며 그 앞으로 다가섰다. 12월치고 푹한 날씨에 햇빛이 쨍했다. 은수는 손차양을 만들어 현우를 올려다봤다. 햇빛에 눈이 부신지 그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길게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주름진 미간마저 그림 같다고, 은수는 감탄했다.
“다행히 날씨가 좋네요.”
“그러네요. 잘 잤어요?”
현우가 은수 쪽으로 한 발 가까이 다가서며 물었다. 발성과 울림이 좋은 목소리. 진짜 신현우라니. 신현우가 아침 인사를 건네고 있다니…….
“네, 잘 주무셨어요?”
“아뇨. 설레서 잠 설쳤어요.”
은수가 의아한 눈빛을 보내자 현우가 슬며시 웃었다.
“농담이고, 원래 잘 못 자는데 파리 와서는 이상하게 잘 자네요.”
“다행이네요. 어떻게 오셨어요? 걸어서?”
현우가 머문다는 페닌술라 호텔은 은수의 아파트로부터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현우의 긴 다리로 걷는다면 10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았다.
“네, 충분히 걸을 만하던데.”
“오늘 많이 걸어야 돼요. 각오하셨죠?”
“그럼요. 이만 보 걸을 준비 됐어요.”
현우가 자기 허벅지를 툭툭 쳐 보였다. 은수가 웃으며 손짓으로 길을 안내했다.
“오르세 미술관부터 가요.”
우선 센강을 향해 큰길로 나가서 강변을 따라 25분 정도 죽 걷다 보면 콩코드 광장이 나오고, 좀 더 걸어서 뛸르리 정원이 보일 때 다리를 건너 파리 7구로 넘어가면 오르세 미술관이 나온다.
옛 기차역을 개조해 만든 오르세 미술관은 은수가 파리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 중 하나였다. 아이콘과 상징으로 점철된 난해한 종교화 대신 눈에 익고 아름다운 고흐, 마네, 드가의 작품들을 천천히 감상할 수 있는 공간. 가끔은 작품을 보지 않고 그 장소가 자아내는 분위기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됐다.
“그림 좋아하세요?”
은수가 물었다.
“잘 모르긴 하지만, 보는 건 좋아해요. 다른 생각 안 해도 되고 그냥 감상하면 되니까.”
“저도요. 언어로 표현 안 되는 것들을 캔버스 안에 담아 놔서 그걸 보는 동안에는 언어로부터 좀 자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그쵸. 우리가 사는 세상은 뭐든지 말로 다 하려고 하니까.”
“맞아요. 진짜 중요한 건 말로 표현 못 하는 것들인데.”
현우가 나란히 걷고 있는 은수를 슬쩍 바라봤다. 무릎 위로 올라오는 회색 플리츠스커트에 남색 울 코트를 입은 모습이 파리지앵 같다고 생각했다. 미묘하게 다른 장식과 형태를 품고 있지만 전체적으로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 파리의 미색 건물들을 배경으로 은수의 작은 발걸음이 영화 같았다.
“은수 씨 파리에 오래 산 사람 같아요.”
“그래요? 한 달밖에 안 있었는데……. 아, 대학교 다닐 때 교환학생으로 와서 6개월 정도 살긴 했었어요.”
“그땐 어땠어요, 파리?”
“최고였죠. 지금보다 더 좋았던 거 같아요. 지금은…….”
은수가 말끝을 흐리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현우가 눈치를 보다가 짐짓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은 한국에서 기다리는 남친도 없고, 서글프구나? 그때 내가 꼬장 부리는 거 받아 주느라 얼마나 진이 빠졌는지.”
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우를 바라봤다. 그런 은수의 뒤로 센강의 물결이 겨울 햇빛에 반사돼 눈꽃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저 그때 꼬장 부렸어요?”
“기억 안 나요?”
은수는 이내 심각해져서 허공을 바라보며 기억을 더듬는 듯했다. 마음을 숨길 줄 모르고 다 드러내는 여자.
‘이 여자 정말 어떡하지?’
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농담이에요. 꼬장 안 부렸어요.”
“저한테 농담하지 마세요. 저 바보라서 농담, 진담 잘 구분 못 한단 말이에요.”
“그렇게 바보는 아닌 거 같은데.”
어느새 강 건너편으로 오르세 미술관이 보이기 시작했다. 콩코드 광장을 지나치며 은수는 뛸르리 공원 뒤편의 제불롱에서 점심을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저 사실 그날 꽃뱀으로 오해하셨으면 어떡하나 좀 걱정했었어요.”
“꽃뱀이요?”
현우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네. 처음 만난 여자가 그렇게 술에 취해서 술값도 안 내고 집에 데려다 달라고 하고. 더구나 신현우 씨니까 그런 일 얼마나 많았겠어요. 불쾌하셨다면 진짜 죄송해요.”
은수는 퍽 진지한 것 같았다. 하지만 현우는 정말 엉뚱한 여자라고 생각했다.
“일단 꽃뱀은 자기가 먼저 그렇게 취하지 않고요, 그리고 세상 어느 꽃뱀이 헤어진 첫사랑 얘기를 그렇게 구구절절 늘어놔요. 그리고 은수 씨가 데려다 달라고 한 적 없고, 댁이 바로 카페 앞이라 제가 부축만 좀 해 드린 거예요.”
“……그쵸? 그렇긴 해요.”
민망한 듯 샐쭉 미소 지으며 빠르게 수긍하는 은수 옆에서 현우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은수는 그런 현우를 곁눈질했다. 활짝 웃을 때 입동굴이 생기는 시원한 미소. 윗입술이 살짝 말려 올라간 모양이라 웃고 있지 않을 때에도 입 꼬리가 위쪽을 향해 있다. 누구에게나 오해를 살 만한 입술이라고 은수는 생각했다.
‘누구에게나 이렇게 웃어 줄 것이다, 이 남자는.’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
화요일 오전 미술관은 한산한 편이었다. 여름보다는 적지만 겨울에도 관광객들은 파리 어디에나 많았고, 또 곧 다가오는 성탄절 연휴를 파리에서 보내려는 유럽 인근국 여행객들도 차츰 늘어나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한적하진 않을 거라 생각했었는데, 예상 밖이었다.
동쪽의 조각상 전시관은 그날따라 유난히 인기가 없는 듯했다. 다소 붐비다가도 이내 사람들이 사라져, 어느 순간 다섯 평 남짓한 공간에 은수와 현우의 발소리만이 고요를 수놓고 있었다. 은수는 전시관 한쪽의 등받이 없는 소파에 잠시 걸터앉았다. 현우는 로뎅의 『지옥의 문』 앞에 한참이나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천재 조각가 로뎅이 20년에 걸쳐 매달렸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다는 그 작품은 미완성이기에 오히려 더 완벽했다. 격정과 고통에 사로잡혀 지옥으로 끌려가는 인간 군상을 표현하기에, 다듬어지지 않은 거친 질감만큼 절묘한 틀은 없을 듯했다.
은수는 커다랗고 네모난 문 모양의 석고 앞에 미동도 없이 조각상처럼 서 있는 현우의 뒷모습을 잠잠히 바라보고 있었다.
몸집에 비해 작은 엉덩이가 위로 바싹 올라붙어 긴 다리가 더 돋보였다. 넓은 어깨는 안 그래도 작은 머리통을 더 작아 보이게 만들었다. 몸의 선은 강한 남자다움과 우아한 기품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어떤 위대한 예술 작품도 살아 있는 신현우의 자태 앞에서는 존재 의미를 잃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마침내 현우가 고개를 돌렸을 때 창으로 비쳐 드는 아침 햇살이 역광을 만들었다. 잠깐 그의 얼굴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은수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나 전시관을 나가는 현우를 따라나섰다. 그를 놓치면 큰일이라도 난다는 듯이.
자신의 큰 보폭에 발을 맞추려 종종거리는 은수를 바라보는 현우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끌로 조각한 것처럼 움푹 팬 입꼬리. 지옥으로 통하는 문이라 하더라도 따라 들어오게 만들어 버릴 현우의 마력에 은수는 공포와 희열을 동시에 느꼈다.
은수는 또한 생각했다.
‘혁준과 함께일 때 나는 왜 기꺼이 지옥으로 따라나서지 못했나……. 첫사랑, 모든 처음을 함께한 그 사람을 지옥의 문 앞에 남겨 두고, 나는 어쩌면 그렇게 매몰차게 도망칠 수 있었나. 나는 혁준을 얼마만큼 사랑했던 걸까. 그가 내게 베푼 과분한 사랑 앞에 나는 왜 그토록 이기적일 수밖에 없었나…….’
***
뛸르리 공원 뒤편의 제불롱은 매일 다른 점심 메뉴를 합리적인 가격에 파는, 교환학생 시절부터 은수가 가장 좋아하는 식당이었다. 은수는 현우에게 오늘의 메뉴를 해석해 주었다.
“양파스프, 라즈베리 샐러드, 오리고기 스테이크, 그리고 후식은 크림브륄레예요. 후식까지 다 드시면 38유로, 후식이나 전식 중에 하나 빼면 33유로. 음료나 물은 별도예요. 어떻게 드실래요?”
가격까지 세세하게 말해 준 후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자신을 바라보는 은수가 귀여웠다. 어릴 때 집안이 넉넉한 편이 아니었고, 연습생 시절에도 배고픈 날이 많았지만, 스물두 살에 데뷔한 후 지금까지 7년간, 가격을 따져서 음식을 주문한 적은 거의 없었다. 자신과 함께한 자리에서 음식 가격을 챙기는 여자도 은수가 처음이었다.
“맛있다. 역시 파리 오길 잘했네.”
따뜻한 치즈가 뭉근하게 속을 데워 주는 스프를 한 입 먹고 나서 현우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은수가 물었다.
“파리에 오고 싶었던 특별한 이유가 있었어요?”
“음, 일단 한국에서 멀어서 좋았고. 프랑스 영화, 프랑스 배우들도 좋고. 뭔가 영감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서?”
“아, 우와. 맞아, 독립 영화나 예술 영화도 몇 편 출연하셨었죠? 그 영화 되게 좋았는데, 범죄자의 아내를 사랑하는 형사 역할로 나오셨던…….”
“그 영화 봤어요? 별로 본 사람 없는데.”
“네, 저 두 번 봤어요. 너무 좋아서.”
“사실 그 영화, 제가 제일 아끼는 작품이에요. 조연이었지만 뭔가 연기하는 재미를 처음 느끼게 해 준, 그런 영화라서.”
“오. 멋지다!”
은수의 시선이 반짝거리자 현우는 쑥스럽게 웃었다. 남들 앞에서 이런 얘기를 하는 게 처음인 것 같았다. 회사에서는 돈이 되는 상업 영화 시나리오밖에 받지 않았고, 사람들은 현우의 연기와 작품을 대하는 태도보다는 겉모습과 멋진 역할에만 관심 있었다. 그의 앞에서 수없이 터지는 플래시, 그중 어떤 것도 현우의 깊은 내면에서부터 끓어오르는 연기에 대한 열정에는 주목하지 않았다.
“근데 좀 의외예요. 파리 처음이시라는 게.”
은수가 스테이크를 썰며 말했다.
“왜요?”
“그냥 뭔가 신현우 씨는 다 다녀 보셨을 것 같아서.”
“그래요? 아직 안 가 본 데 많은데. 사실 일로 간 거 말고는 해외여행 자체를 많이 안 해 봤어요.”
“그러시구나. 근데 파리랑 너무 잘 어울리세요.”
은수는 아까부터 현우를 힐끔거리는 파리 여자들의 시선을 신경 쓰고 있었다. 콧대 높고 시크한 파리 여자들이 저렇게 대놓고 남자를 쳐다보는 건 처음 보는 일이었다. 저 동양 남자 좀 보라며, 모델인 것 같다고 수군거리는 말소리를 은수는 무시하려 애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현우가 말갛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데뷔하기 전까지 그렇게 넉넉하게 살지 못해서요. 부모님 사이도 안 좋으셨고. 형 그늘에 가려서 사랑도 많이 못 받았어요.”
갑작스러운 고백에 은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마침 웨이터가 빈 접시를 치우고 후식을 내왔다. 현우가 처음 보는 프랑스 과자를 앞에 두고 당황해하자 은수가 보고 따라 하라는 듯 티스푼을 들어 톡톡 과자의 표면을 깼다. 딱딱한 설탕 코팅을 뚫고 스푼을 집어넣어 퍼 올리자 부드러운 크림이 딸려 올라왔다. 현우는 달콤함을 한입 베어 물고 뿌듯하게 미소 짓는 은수와 눈을 맞췄다. 위로가 되는 미소라고 생각하면서.
잠시 후 식사를 마치고 거리로 나왔을 땐 날이 흐려져 있었다. 하루에도 몇 번이나 변덕을 부리는 파리 날씨답다고 은수가 말했을 때였다.
“……신현우 닮았어.”
길 건너편의 한국 여학생들이었다.
“에이, 아니야. 신현우 실제로 보면 외계인 같고 별로래. 저 사람이 신현우보다 훨씬 키도 크고 잘생겼는데?”
은수는 목도리를 추켜올려 얼굴을 가리는 현우의 눈치를 살폈다. 은수는 현우의 옷소매를 잡아끌어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는 좁은 골목으로 안내했다.
‘생각 못 했다. 이렇게 다니는 게 불편할 수도 있는데, 바보처럼 혼자 들떠 있었다. 하긴 사람들과 어울려서 패키지 투어를 다닐 수도 없고, 프라이빗 가이드를 고용해도 전형적인 관광지만 갈 테니 사람들과 많이 마주칠 걸 걱정했을 테고…….’
은수가 속으로 자책하고 있을 때 현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어디 가요?”
***
몽마르트르 언덕이 보랏빛 석양에 잠겨 있었다. 겨울 파리의 해는 일찍 저무는 대신 매일 다른 빛깔로 하늘을 물들여 주었다. 보라, 분홍, 주홍으로 매일 다르게 그려지는 하늘은 마치 천상에서 선사한 축복 같았다. 현우와 은수는 몽마르트르 언덕에서도 가장 높은 지대에 위치한 사크레쾨르 성당 앞 전망대에서 해 지는 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은수는 저 멀리 에펠탑이, 개선문이, 건물 사이로 센강이 석양빛에 반짝이며 곧 다가올 어둠을 겸허히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눈을 떼지 않은 채 길었던 오늘 하루를 되새기고 있었다. 신현우도 결국 누구나와 다름없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그 역시 고민하고 상처받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는 당연한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오늘 겪은 현우는 커리어와 미래에 대해 불안을 안고 사는 여느 평범한 이십대 후반의 한국 남자와 다름없었다. 재벌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부족함이나 열등감 같은 것은 모르고 자란 혁준보다 오히려 현우와 감정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느낄 정도였다.
은수는 고개를 돌려 현우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하나둘 켜지는 파리의 불빛과 남색으로 짙어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현우의 긴 속눈썹이, 반듯한 콧대가, 선이 고운 입술이 왠지 모르게 애달팠다. 그의 옆얼굴은 적막하고 외로운 겨울 숲의 향을 간직하고 있었다.
“배고프다.”
현우의 말에 그를 보며 웃었다.
“그쵸? 진짜 오늘 이만 보 걸었나 봐요. 여기 좋죠?”
“네, 오르세 미술관도 좋고, 마레지구도 좋고 여기도 다 좋았어요.”
“다행이다. 저 이제 신세 다 갚은 거죠?”
은수가 현우의 눈을 보며 말했다.
“네, 오늘 진짜 고마워서 제가 저녁 사 드릴게요.”
“아니에요, 점심도 사 주셨잖아요. 저녁 제가 살게요.”
“저녁 엄청 비싼 거 먹을 건데. 호텔 가서.”
당황하는 은수를 잠시 지켜보던 현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수 씨 친구들한테 놀림 많이 받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은수의 표정이 정말 억울하다는 듯했다.
“이마에 써 있어요. 나 좀 놀려 달라고.”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워요? 아재 같아.”
“우리 네 살밖에 차이 안 나요.”
현우가 대답하며 다시 풍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내뱉는 하얀 입김이 이제 제법 어둑해진 풍경 속에 흩어졌다. 지대가 높아 파리 도심보다 밤공기가 더 싸늘했다. 현우가 목도리를 풀어 은수에게 감아 주며 말했다.
“한식 먹으러 가요, 우리. 내가 사는 대신 내가 먹고 싶은 거 먹을래요.”
***
한식당들이 모여 있는 오페라 가에 도착했을 때, 날은 완전히 저물어 있었다. 상점과 식당들은 퇴근 후 쇼핑과 외식을 즐기는 사람들로 가득했고, 화려한 전구 장식과 곳곳에서 퍼져 나오는 캐럴로 성탄 분위기가 완연했다.
김치찌개 맛집으로 유명한 한식당 앞에 도착한 은수는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성탄 연휴 한국 갑니다. Merry Christmas!>
사장님이 붙여 둔 짧은 메시지를 황망히 바라보는 은수를 달래며 현우는 다른 데를 찾아보자고, 한식이 아니어도 좋다고 말했다.
“저도 한식 먹고 싶어졌단 말이에요. 신현우 씨 때문에. 아! 저쪽으로 두 블록 가면 불백 맛집 있어요. 가요.”
현우는 위기에서 벗어난 듯 안도하며 당당하게 길을 안내하는 은수를 웃으며 뒤따랐다. 주린 배와 지친 다리를 이끌고 파리 불백 맛집 앞에 도착했을 때 은수는 또 한 번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식당 문 앞에서 안을 들여다보니 안은 한국인으로 보이는 관광객들로 가득했다. 은수가 울상으로 현우를 돌아보며 자책했다.
“아, 제가 생각을 못했어요. 한식당에 한국 사람들 항상 많거든요. 파리까지 와서 왜 굳이 한식당을 그렇게들 찾아오는지……. 불편하시겠죠?”
굳이 한식당을 가자고 제안했던 현우도 미처 생각지 못한 지점이었다. 은수의 머리 너머로 안을 힐끗 들여다보니, 저 정도면 금요일 저녁에 장사 잘되는 강남 여느 식당에서 먹는 거나 마찬가지일 것 같았다. 현우도 답을 찾지 못해 머뭇거리고 있을 때 은수가 말했다.
“저희 집 가실래요? 국이랑 계란말이 정도는 해 드릴 수 있는데. 밑반찬도 몇 개 있어요.”
소녀처럼 말간 얼굴을 하고 은수가 묻고 있었다.
‘이 여자 대체 뭘 믿고 이렇게 해맑지?’
현우는 은수를 다 이해하진 못했지만 그래서 더 흥미로웠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무슨 말을 하고 어떻게 대처할지 이토록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자는 처음이었다. 어린 소녀 같기도 하고,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어른 같기도 한 이 여자. 감정은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정작 마음 깊은 곳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은수의 아파트는 오페라 가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십 분 정도 구불구불 골목을 지나 은수의 아파트 현관 앞에 도착했다. 은수는 열쇠 꾸러미를 꺼내 들었다. 찰랑대는 열쇠 소리가 조용한 주택가 골목을 울렸다.
“열쇠가 진짜 많네요.”
“그쵸? 여기 사람들은 도어락이나 카드키 같은 거 안 쓰더라구요. 굳이 열쇠를 써요.”
현우는 앞장서 계단을 올라가는 은수의 뒤를 따르며 웃었다. 커다란 열쇠 꾸러미를 짤랑이며 사뿐거리는 뒷모습이 유독 작아 보였다.
“계단 너무 많죠? 죄송해요, 꼭대기 층이어서.”
은수가 숨에 가빠하며 본인이 죄송할 일이 아닌 일에 사과했다. 오래된 건물이라 엘리베이터가 없는 듯했다. 나선형 계단을 돌고 돌아 6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찰칵 열쇠 돌아가는 소리에 문이 열리고, 은수는 들어오라며 손짓했다.
야옹.
어둠 속에서 고양이 소리가 났다.
“무무, 잘 있었어?”
은수가 불을 키자 어느 샌가 발밑에 다가와 있던 고양이가 보였다. 그녀가 털이 복슬복슬한 오렌지색 고양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곤 고양이 얼굴에 자기 얼굴을 몇 번이나 비빈 후에서야 뒤돌아보며 물었다.
“아, 맞다! 고양이 있는 거 말씀 안 드렸네요. 혹시 알레르기 같은 거…….”
“없어요. 고양이 좋아해요. 저도 한 마리 키워요. 모리라고.”
현우가 자연스럽게 무무를 받아들며 말했다.
“무무, 안녕?”
낯을 가리는 무무가 현우의 품에 안겨 갸르릉거리고 있었다. 고양이마저 그가 내뿜는 어마어마한 페로몬에 사로잡힌 듯했다. 은수는 달리 신현우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외투를 벗어 문 옆 고리에 걸고, 현우의 외투를 받아 주겠다고 손짓했다. 그때 현우가 물었다.
“근데 문 안 잠가요? 제가 잠글까요?”
“아, 도어락 쓰던 게 버릇이 돼서……. 맨날 까먹어요.”
은수가 현관문을 잠그는 사이, 현우는 아파트 안쪽으로 한 걸음 더 들어와 실내를 둘러보았다. 거실 한가운데 그랜드피아노가 있고 책장엔 책이 빼곡했다. 모든 물건에 주인의 깔끔한 성정과 오랜 사연이 묻어 있는 듯했다. 공기는 아직 차갑지만 분위기는 아늑했다. 화려하지만도 소박하지만도 않은 전형적인 유럽의 중산층 아파트였다.
“집 좋네요.”
“예쁘죠?”
은수가 분주히 주방을 오가며 말했다. 물을 끓이려는 듯했다. 현우는 천천히 피아노 쪽으로 다가갔다.
“마리 아줌마 남편이 피아니스트예요. 지금 공연 때문에 유럽 순회 중이에요. 마리 아줌마랑 같이.”
“홈스테이 하셨다는 그 집이구나.”
“네, 그때 무무는 완전 애기였는데. 벌써 세 살이에요.”
현우가 책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 은수가 차를 내왔다.
“우선 이것 좀 따뜻하게 드세요. 카모마일에 꿀 좀 넣었어요.”
은수가 거실 소파에 앉아 얼굴을 다 가릴 정도로 큰 머그잔을 후후 불고 있었다.
“마리 아줌마가 책을 많이 읽나 봐요.”
“네, 아줌마는 통역사예요. 저처럼.”
“통역사와 예술가 커플이구나.”
현우가 머그잔을 집어 들며 말했다. 할 말이 없어진 은수가 그의 눈을 피하며 뜨거운 차를 한 모금 삼켰다.
야옹.
무무가 은수의 소파 팔걸이로 폴짝 뛰어올랐다. 큰 눈과 작은 코가 은수를 닮았다고 현우는 생각했다.
“무무.”
고양이 이름을 부르는 은수의 입술이 앞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동그란 눈은 어린아이 같은데, 입가엔 알게 모르게 색기가 흘렀다. 붉고 작은 입술. 햇빛을 욕심껏 받고 탱글탱글하게 여문 과일 같았다. 깨물면 상큼하고, 촉촉한 과육이 입 안을 황홀하게 적실 것 같은. 손에 넣고 짓이기면 과즙이 잔뜩 흘러내려 한참을 달큰하게 할짝거려야 할 것 같은.
현우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은수가 일어나 주방으로 향하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센강에서 처음 봤을 때 현우는 어쩌면 은수의 뒷모습에 끌렸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곧게 뻗은 가는 다리가 아름다웠다. 골반이 작은 대신 엉덩이에 볼륨이 있었고, 그만큼 가슴도 알맞게 부풀어 있었다. 적당히 달라붙은 하얀 니트가 동그란 가슴을 부각시켰다.
‘저 여자, 본인이 오늘 위험할 수도 있는 걸 알고는 있는 건가? 아니면 지금 대놓고 꼬시는 건가?’
“북엇국 괜찮아요?”
냉장고를 뒤적이던 은수가 현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자신의 시선을 들킨 것 같아 흠칫하며 현우는 좋다고 말했다.
‘진짜 모르겠다. 후-’
냉장고에서 꺼낸 재료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던 은수가 다시 현우를 향해 말했다.
“심심하시죠? 무무랑 놀고 계세요. 아니면 뭐 볼 거라도 꺼내 드릴까요? 아, 아까 로뎅 좋아하시는 거 같던데, 로뎅 작품집 보실래요?”
현우가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은수가 책장 앞으로 다가와 선반 제일 위 칸으로 손을 뻗었다.
“그게 여기 어디 있었는데……. 되게 큰 책이라 튀어나와 있거든요.”
은수가 머리 위로 뻗은 손을 더듬거리며 책을 찾았다.
“이건가?”
은수가 책 한 권을 뽑아 꺼내는 순간, 옆에 있던 무거운 책들이 우수수 현우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책을 찾는 데 정신이 팔려, 책들이 자신을 덮치려는 순간 이미 다가와 있던 현우가 날렵하게 제 몸을 감싸 준 것도 모르고 있었다. 책들이 먼지를 날리며 바닥으로 떨어진 지 수 초가 지나도록 은수는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귓가에 현우의 숨결이 느껴지고 있었다.
“……괜찮아요?”
그리고 겨울 숲 같은 현우의 향기.
이대로는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더 이상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한 은수가 빠져나오려고 몸을 뒤튼 순간, 현우는 오히려 더 바싹 은수를 향해 다가섰다. 책장에 기댄 은수와 그녀를 막아선 현우 사이에 빈틈이라곤 두 사람이 숨을 내쉴 때 사그라드는 가슴과 가슴 사이의 작은 공간뿐이었다. 자기 위로 웅크리고 있는 현우의 명치에 자신의 봉곳한 가슴이 닿을까 봐 은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물이 끓어넘치는 소리가 팽팽했던 고요를 갈랐다.
“아, 물이 끓어서…….”
은수가 밀치듯이 현우의 품에서 빠져나와 주방으로 뛰어갔다. 혼미해진 정신을 부여잡으며 은수는 황급히 불을 줄였다. 애꿎은 식재료와 그릇들을 만지작거렸지만 무엇부터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미쳤나 봐, 서은수. 대체 왜 이러는 거야.’
은수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무진 애를 쓰며 식사를 준비하는 데 집중하려 했다. 뒤에서 현우가 일어나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났다. 은수는 더 이상 무슨 일이 일어나기 전에 선수를 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마음을 정하고 뒤를 돌아봤을 때 현우는 현관 앞에서 코트를 챙겨 입고 있었다.
“저녁은 먹은 거로 칠게요.”
현우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여유 있게 미소 짓고 있었다. 은수는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자석에 이끌리듯 현관문 앞으로 나왔다.
“저녁 금방 준비되는데……. 드시고 가세요.”
은수의 속마음은 제발 이대로 가 달라고 소리치고 있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겨우 짜낸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현우가 알아차리지 못하길 바라며.
“오늘 고마웠어요.”
현우가 은수를 내려다보며 웃었다. 은수가 문을 열어 주자 그는 망설이지 않고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저도 오늘 감사했습니다.”
말로라도 더 붙잡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은수는 애써 침착히 인사했다. 문 밖의 어둠 속에서 현우는 미소로 대답을 대신하고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은수는 차가운 문에 기대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한참이나 진정시켜야 했다.
‘장난친 거겠지? 이런 건 그 사람한테 아무 일도 아닐 텐데. 숨도 제대로 못 쉬는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래도 잘 끝난 거야. 더 나가지 않고 여기서 끝난 게 나한테 훨씬 다행인 일인 거야. 어차피 다시 안 볼 사람, 내가 좀 우스워졌다고 그게 뭐 어때서.’
현우를 다시 못 볼 거라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으로 정말 다시 못 보게 될까 봐 아쉬워하는 자신을 외면했다. 밥 생각이 전혀 없어져서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 채비를 했다.
은수는 자그마한 손님방에 머물고 있었다. 파리의 어느 건물에나 있는 꼭대기 층 작은 방은 옛날 하녀들이 머물던 자투리 공간으로, 밖에서 보면 지붕에 창이 난 다락방처럼 보였다.
은수는 젖은 머리를 다 말리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뉘었다. 머리맡의 비스듬한 창을 통해 그녀의 눈에 들어온 하늘은 캄캄했지만, 도시에서 퍼져 나오는 불빛이 희미하게나마 방을 비추었다.
***
은수의 집을 나온 현우는 불빛 찬란한 파리의 골목을 걷고 있었다. 옷 사이로 스며 들어오는 찬바람을 곧추 세운 코트 깃으로 가리고 큰 보폭으로 호텔을 향해 걸어갔다.
그가 손을 내밀어서 가질 수 없는 여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자신이 원한다면 오늘 밤 은수를 가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적어도 오늘밤만큼은 참고 싶었다. 그녀가 자신을 흔쾌히 허락했다면 지난 며칠간 그녀와의 기억이 뻔한 하룻밤으로 퇴색될 것 같았다. 끊임없이 그에게 다가오고, 그를 떠보고, 그를 소유하려 하고, 그러다가 결국 그를 원망하며 떠나갔던 여자들의 기억처럼.
연습생 때 처음으로 순수하게 좋아했던 선배 가수가 있었지만, 그 후로는 일이 너무 바빠 진득하게 어느 한 사람을 만날 시간이 없었다. 그를 스쳐 간 많은 사람들은 모두 껍데기에 불과했다. 신현우의 명성과 돈과 인기를 쫓는 껍데기들. 무대에서 내려오고 나면 손에 남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더 은수를 함부로 할 수 없었다. 센강이 흐르는 다리 위에 위태롭게 서 있던 그 여자의 뒷모습이 공허한 그의 마음속 무엇인가를 건드렸다. 티 없이 맑게 웃다가도, 세상 모진 일을 다 겪은 듯 텅 빈 눈을 하고 멀리 알 수 없는 곳을 응시하는 그녀가 어딘가 모르게 자신과 닮았다고 느꼈다.
‘역시 여기서 이렇게 끝내는 게 좋을까?’
현우는 그렇게 생각하며 호텔방으로 들어갔다.
***
은수는 수연이 보낸 톡을 브레이크 타임이 돼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주방 한편에 쪼그리고 앉아 핸드폰을 보던 은수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벌떡 일어났다.
[신현우 파리에 있다는데? 집에만 있지 말고 밖에 나가서 잘 찾아봐.]
찡긋 웃는 이모티콘과 함께 수연이 보낸 ‘신현우 파리 파파라치’라는 제목의 기사 링크를 클릭했다. 어제 현우의 차림새 그대로였다. 화질이 그리 좋지 않고 목도리로 하관을 살짝 가리긴 했지만 누가 봐도 신현우였다. 은수는 떨리는 손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다행히 자신이 함께 찍힌 사진은 없었다. 오르세 미술관에서 두 사람이 잠깐 떨어져 있던 사이, 누군가 몰래 찍은 사진인 것 같았다.
포털 검색어 순위는 ‘신현우 파리’, ‘신현우 파파라치’, ‘신현우 유럽 여행’과 같이 현우와 관련된 키워드로 꽉 차 있었다. 은수는 어디를 봐도 자신이 노출되진 않은 것 같아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자신을 엄습하는 현실감에 묘한 기분이 됐다.
‘진짜 신현우랑 파리를 여행했구나, 내가……. 어제 일이 꿈은 아니었구나…….’
미술관, 마레지구와 몽마르트르, 그리고 어제 밤까지 생각이 미치자 은수의 두 뺨이 일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귓가에 그의 뜨거운 숨결이 다시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앞으로 여행하기 더 힘들어질 텐데. 한달살이 할 수 있을까, 그 사람? 아마 곧 떠나겠지. 그래, 차라리 잘됐어.”
오늘 일을 하는 내내 어제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은수의 심장을 툭하고 내려놓았다. 당분간은 어쩔 수 없겠지만 이제 다시 볼 일 없을 테니 며칠간의 해프닝으로 생각하고 흥분을 가라앉히기로 마음먹었다.
‘신현우랑 데이트했다고 하면 김수연 아마 까무러치겠지?’
은수는 사진이라도 한 장 찍어 놓을 걸 그랬다고 아쉬워하며, 마지막 테이블을 치웠다. 그리고 빠르게 그릇을 정리해 주방에 가져다주고 퇴근 준비를 했다.
***
퇴근길 파리의 풍경은 종전과 다르지 않았다. 거리는 여전히 화려했고 은수는 그 속을 무던히 혼자 걷고 있었다. 속절없이 또 혁준을 생각하고 있었다. 신현우와 보낸 어제가 하룻밤 꿈과 같다면, 혁준은 여전히 은수의 몸과 마음에 깊게 뿌리박힌 현실이었다. 그 잔인한 현실 또한 한낱 꿈처럼 끊어졌지만 그 상실로 인한 고통은 은수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첫사랑이었고, 첫 이별이었다. 은수는 그 커다란 실연의 아픔 속으로 다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밖에 나와 햇빛을 보며 처음 보는 손님들과도 웃고 떠드는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적막 위에 옛 기억이 드리워졌다. 상실이 익숙지 않았기에 결국 자신을 상처 입히는 줄 알면서도, 함께한 작고 두서없는 그 어느 장면 하나 놓치지 않으려고 끊임없이 되뇌고 있었다.
그렇게 걷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해 있었고, 열쇠를 찾기 위해 고개 숙인 은수의 머리 위로 그림자 하나가 드리워졌다. 그리고 겨울 숲의 향기도.
“무슨 세상 걱정 다 짊어진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에요?”
은수가 고개를 들었을 때 눈앞에 신현우가 있었다. 거부할 수 없는 현실처럼, 무서우리만치 생생하게 살아서 눈앞에 있는 신현우를 은수는 말없이 바라봤다.
“어제 못 먹은 저녁, 같이 먹어요. 시간 괜찮죠?”
***
은수는 현우를 따라 페닌술라 호텔 안으로 들어왔다. 파리의 많은 곳을 다녀 봤지만 특급호텔은 처음이었다. 로비는 2층까지 훤히 뚫려 있었고, 높이를 가늠하기 힘든 천장에 크리스털 샹들리에가 눈부시게 반짝였다. 체크인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람들, 벨보이와 함께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사람들, 라운지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 그 모두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속한 듯했다. 잘못하다간 길을 잃을 것 같아 저도 모르게 현우에게 바싹 붙어 걸었다.
페닌술라 호텔의 루프탑 레스토랑은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겨울이라 유리 천장을 모두 닫아 놓은 상태였고, 유리에 실내가 반사돼 야경은 한층 환상적으로 증폭되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흥분이 조금 가라앉았다.
“여기 달팽이 요리도 괜찮고 굴 요리도 맛있던데, 어때요?”
테이블 건너편, 멀리 반짝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앉은 현우가 은수에게 물었다. 일부러 뷰가 좋은 자리에 은수를 앉힌 듯했다. 그녀는 손깍지 위에 턱을 괸 채 자신을 찬찬히 살펴보는 눈을 피하며 어떤 것이든 좋다고 대답하고 화이트 와인을 한 모금 들이켰다.
“되게 좋네요, 여기. 예쁜 옷 입고 올 걸 그랬어요.”
은수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우리나라엔 아직 들어오지 않은 것 같은 이름 모를 명품으로 우아하게 꾸민 사람들이 저마다 불어, 영어, 독일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레스토랑 중앙 무대에서는 목선이 드러나는 남색 드레스를 입고 머리를 틀어 올린 피아니스트가 에릭 사티의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예뻐요.”
현우의 깊은 두 눈이 맑게 빛났다. 식기도, 조명도, 야경도 온통 빛나는 것투성이였다. 은수는 저도 모르게 마음이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혁준과 그가 속한 세상을 바라보며 자신이 느꼈던 감정. 빛나는 것들 속으로 도무지 섞여 들어갈 수 없었던 자신의 아픈 과거가 떠올랐다.
은수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는 걸 보고 현우는 긴장했다.
‘……너무 진부한가?’
오늘 기사 때문에 파리를 곧 떠나기로 마음먹은 차였다. 한국에 돌아가서 은수를 다시 찾는 방법도 있었지만 이곳 파리에서 그녀를 더 보고, 안고 가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았다. 한번 떠오른 생각은 강박이 돼 현우를 놓아주지 않았고, 결국 그녀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집 앞을 찾았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두 사람은 입 안을 감도는 고급 요리의 풍미와 부드러운 분위기에 녹아들고 있었다. 은수는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맛과 향기의 감각에 취하는 듯했다.
현우는 거침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이끌면서도 경청했고,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자신이 이 영화의 여자주인공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이토록 아름다운 남자의 온 신경이 자신에게 집중돼 있다는 황홀함에 여차하면 휩쓸릴 것 같았다.
아마 죽을 때까지 이보다 더 영화 같은 경험은 할 수 없을지도 모를 거라 생각하며, 은수는 눈앞의 현우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항상 이렇게 꼬셔요?”
은수가 물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차가운 것을 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이렇게 비싸고 화려한 데 데려와서 맛있는 음식 먹이고, 듣기 좋은 말로 꼬드기면 신현우 씨한테 넘어오지 않는 여자, 여태껏 없었죠?”
은수는 이제와는 다른 사람 같아 보였다. 첫사랑의 아픔을 얘기하며 눈물짓던 어린아이는 사라지고, 신랄한 말로 정곡을 찌르는 어른 여자가 앉아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해요?”
적잖이 당황했지만 현우도 지지 않고 응수했다. 그녀를 갖기로 이미 결정했으니까. 이번엔 은수가 당황한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서은수 씨 꼬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둘 사이의 긴장이 예기치 못하게 고조됐다. 은수의 입가가 굳어 있었다. 여유 만만한 저 아름다운 얼굴이 보기 싫으면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외국에서 우연히 만난 아무것도 아닌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잘해 줄 이유 없잖아요.”
“하필 그 시간 그 장소에서 기가 막힌 우연으로 만난 인연이고, 은수 씨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건 정말 아니죠. 왜 그렇게 본인을 깎아내려요?”
방심하던 차에 정곡을 찔려 버렸다. 자신을 깎아내려야만 유지가 가능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배려하고 양보하고 겸양을 떨어야만 인정해 줬다. 누구 앞에서도 자신이 가진 빛나는 것들을 드러내 보이고 자랑하는 일은 금기나 마찬가지였다. 묵직한 은 나이프를 쥔 그녀의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서은수 씨, 매력 있어요. 처음 봤을 때부터 어떤 사람일까 궁금했어요. 보면 볼수록 더 많이 알고 싶었어요. 솔직히 말하면 꼬시는 거예요. 그럼 넘어올 거예요?”
은수는 말없이 현우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흔들림 없는 두 눈. 그 눈에 거짓은 없어 보였다. 설령 거짓이라고 할지라도, 하룻밤 상대로 자신을 결박했다가 연기처럼 사라진다 할지라도 상관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생경했지만 사실이 그랬다.
현우가 테이블 위로 보랏빛 카드 키를 내밀었다.
“601호예요. 그 사람, 은수 씨가 그렇게 사랑해 마지않았던 그 남자, 내가 잊게 해 줄 수 있어. 원하지 않으면 안 와도 돼.”
치명타.
그렇게 현우는 치명타를 입히고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을 떠났다. 은수는 한참을 그 자리에서 꼼짝없이 앉아 있었다. 수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어지럽히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지금 이 순간 그녀를 강렬히 사로잡는 유일한 생각은 자신의 가슴 속에서 끓어오르는 울분에 대한 것이었다.
혁준과의 관계를 순수한 의도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처음엔 그가 미웠고, 그다음엔 그가 궁금했고, 그다음엔 그를 사랑했다. 혁준이 쏟아붓는 순수한 열정에 그녀 또한 모든 것을 주었다.
그를 사랑하는 동안에도 그가 가진 많은 것들에 비해 너무나 못 가진 자신이 초라하고 슬펐지만 그를 사랑하기에 견딜 수 있었다. 그러나 거대한 힘으로 두 사람을 흔드는 그의 가족 앞에 어린 사랑은 결국 힘없이 무너졌고, 무너진 사랑을 애도할 틈도 없이 은수는 그 폐허로부터 도망쳤다.
복수심이라고 해야 할까, 누구를 대상으로 해야 온당한 것인지 알 길 없는 증오가 은수의 가슴을 뜨겁게 불태웠다.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나 레스토랑 밖을 향해 걸었다.
***
601호 문 앞에 선 순간, 은수는 더할 나위 없이 냉정했다. 타오르던 은수의 가슴은 결국 하얀 재로 변해 있었다. 이제 그녀의 마음속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듯했다.
텅 빈 공허. 육체의 뒤섞임으로 그것을 채울 수 있을까?
카드키를 대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가니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호텔의 주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아우라를 풍기면서, 반짝이는 에펠탑의 야경을 등지며 돌아서는 그의 옆태가 눈부셨다.
“안 오는 줄 알았어.”
정갈한 딕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모든 것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위스키에 젖은 그의 입술로부터 스모키한 향이 여기까지 퍼져 왔다.
그가 위스키 잔을 협탁에 내려놓자 얼음이 짤랑, 소리를 냈다. 그때부터 모든 순간이 일시에 느려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
그가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영화 같았다. 분명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수의 작은 입술은 이미 위스키 향으로 뒤덮여 있었다.
“읍!”
그의 손이 감싸고 있는 뒷머리와 허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거칠게 감쳐 드는 그의 혀가 제 것과 섞이며 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현우의 손과 혀는 더 흥분해 꿈틀거리며 그녀를 감아쥐었다.
현우의 힘에 못 이겨 은수의 허리가 점점 더 뒤로 꺾이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 바싹 끌어안으며 떨어지지 못하게 붙들었다. 두 사람의 하체가 밀착했고 은수는 그가 이미 부풀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우는 제 입술이 은수의 귀와 목덜미에 녹아들 듯 탐닉하고 있었다. 뜨거운 숨이 닿는 곳마다 흥분이 일었고, 그 전율이 한데 모여든 곳은 다름 아닌 그가 바싹 닿아 있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완성되었을 때의 아드레날린이 겁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앗.”
은수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리자 현우가 양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침실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혀는 서로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현우는 은수를 침대에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어두운 침실 안으로 야경의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현우의 빚은 듯한 복근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내 그가 은수의 위로 엎드려 왔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가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를 물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부드럽고 여유로운 키스. 좀 전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 더 심장을 조이는 키스였다. 현우의 오른손이 은수의 왼쪽 가슴 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손이 봉긋한 가슴을 살짝 쥐었다 풀기를 반복할 때, 그의 입술은 그녀의 아랫입술을 지분거리며 농락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이젠.’
그의 말이 거짓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게 발을 들여 버렸다. 꿀처럼 끈적하게 잡아끄는 그의 체취로부터 이젠 벗어날 방법을 못 찾겠다. 아니, 찾고 싶지 않았다.
바지 단추를 풀기 위해 잠시 몸을 일으킨 그의 눈을 그제야 제대로 바라보았다. 까맣고 맑은 구슬 같은 그의 눈동자에 작은 불티 같은 것이 비쳤다. 올려다보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그가 살짝 웃어 보였다. 긴장한 탓인지 땀으로 젖은 살결에 순간적으로 오한이 일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오르는 것을 보고 현우가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팔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더니 손등에 키스를 하고 그 손을 마주 잡아 단단히 고정하고 불현듯 그녀 안으로 찾아 들어왔다.
“하읏.”
키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꺼번에 깊숙이 그녀 안으로 밀려들어 온 그는 붉도록 선명했다. 다리 사이로부터 배꼽까지 꽉 차오르는 그의 강직함에 숨까지 턱 막혀 왔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었기에 그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됐었어야 했던 것처럼,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두 사람의 몸 섞임에는 태고를 닮은 리듬이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은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체취는 파리의 그 어느 값비싼 와인보다도 감미로웠다. 벌게진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하앗.”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의 몸놀림을 소리 없이 받아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애써 부정해 봐야 소용없었다. 고통스러운 동시에 지나치게 황홀했다.
“미쳤나 봐…….”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현우가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쳐도 돼.”
몸은 혹사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말도 안 되게 위안이 돼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괜찮아. 미쳐도 돼, 나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말이 뜨거운 가슴에 닿았다.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진심 따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달아올랐다. 절정으로 치닫는 가파른 경사를 한숨에 뛰어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이 턱하고 막혔을 때 은수는 까무룩 기절한 듯도 했다.
절정의 고지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의 어깨 너머로 파리의 밤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눈물 맺힌 눈망울 위로 부유하는 별빛처럼 오랜 도시의 잔상이 밀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