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프롤로그. (1/9)

프롤로그.

또각또각.

파리의 특급호텔 중에서도 가장 화려하기로 꼽히는 페닌술라 호텔의 6층 복도를 걷고 있는 자그마한 동양인 여자.

길게 웨이브 진 회갈색 머리에 여리여리한 뒷모습과 달리, 눈빛엔 정처 없는 한숨과 이름 모를 독기가 동시에 서려 있었다.

‘정말…… 일까?’

복도 끝 스위트룸을 향하던 발걸음이 일순간 멈칫했다.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여자의 손에 쥐어진 보랏빛 카드키에 땀이 맺혔다.

‘삼 년의 사랑을, 한때 내 전부였던 사람을 하룻밤에 지울 수 있을까?’

은수가 고개를 들어 커다란 나무문을 바라봤다. 어느새 몇 걸음만 더 가면 손에 닿을 수 있는 거리까지 가까워져 있었다.

‘이 문 뒤에 그 사람이 있다. 로뎅의 작품 앞에 조각보다 더 조각 같은 아름다움으로 서 있던, 나에게 하룻밤의 천국을 장담한 그 사람…….’

악마의 속삭임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토록 충동적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책임도, 결과도 생각하지 않고 오직 하나의 생각에 몰두하게 하는 건, 차디찬 파리의 밤일까 아니면 거부할 수 없는 눈빛의 그 남자일까.

손을 마주 잡는다면, 아주 가까이서 그의 눈을 들여다본다면, 숨결이 몸에 닿는다면…….

궁금했다. 미치도록 궁금했다.

카드키를 대고 손잡이를 돌렸다.

철컥.

복도를 지나 거실로 들어가니 그의 뒷모습이 보였다. 호텔의 주인이라고 해도 믿을 만한 아우라를 풍기면서. 반짝이는 에펠탑의 야경을 등지며 돌아서는 그의 옆태가 눈부셨다.

“안 오는 줄 알았어.”

정갈한 딕션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그의 모든 것에는 사람을 사로잡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차마 그의 눈을 바라보지 못하고 애꿎은 입술에 눈을 맞추고 있었다. 위스키에 젖은 그의 입술로부터 스모키한 향이 여기까지 퍼져 왔다.

그가 위스키 잔을 협탁에 내려놓자 얼음이 짤랑, 소리를 냈다. 그때부터 모든 순간이 일시에 느려졌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은 착각.

그가 다가오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영화 같았다. 분명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오는데 그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은수의 작은 입술은 이미 위스키 향으로 뒤덮여 있었다.

“읍!”

그의 손이 감싸고 있는 뒷머리와 허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워졌다. 거칠게 감쳐 드는 그의 혀가 제 것과 섞이며 묘한 울음소리를 냈다. 그 소리에 현우의 손과 혀는 더 흥분해 꿈틀거리며 그녀를 감아쥐었다.

현우의 힘에 못 이겨 은수의 허리가 점점 더 뒤로 꺾이자 그는 그녀의 허리를 더 바싹 끌어안으며 떨어지지 못하게 붙들었다. 두 사람의 하체가 밀착했고 은수는 그가 이미 부풀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우는 제 입술이 은수의 귀와 목덜미에 녹아들 듯 탐닉하고 있었다. 뜨거운 숨이 닿는 곳마다 흥분이 일었고, 그 전율이 한데 모여든 곳은 다름 아닌 그가 바싹 닿아 있는 바로 그 부분이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완성되었을 때의 아드레날린이 겁도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하앗.”

은수가 얕은 신음을 내뱉으며 비틀거리자 현우가 양팔로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침실로 들어가는 와중에도 두 사람의 혀는 서로에게서 조금도 떨어지지 않으려 했다.

현우는 은수를 침대에 내려놓고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어두운 침실 안으로 야경의 불빛이 스며들고 있었다. 현우의 빚은 듯한 복근이 서서히 드러났다. 이내 그가 은수의 위로 엎드려 왔다.

마치 처음인 것처럼 그가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고요한 가운데 두 사람이 서로를 물었다 놓았다 하는 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웠다. 부드럽고 여유로운 키스. 좀 전처럼 급하게 서두르지 않아 더 심장을 조이는 키스였다. 현우의 오른손이 은수의 왼쪽 가슴 위로 올라왔다. 커다란 손이 봉긋한 가슴을 살짝 쥐었다 풀기를 반복할 때, 그의 입술은 그녀의 아랫입술을 지분거리며 농락하고 있었다.

‘……상관없어, 이젠.’

그의 말이 거짓이라 해도 어쩔 수 없었다. 돌이킬 수 없게 발을 들여 버렸다. 꿀처럼 끈적하게 잡아끄는 그의 체취로부터 이젠 벗어날 방법을 못 찾겠다. 아니, 찾고 싶지 않았다.

바지 단추를 풀기 위해 잠시 몸을 일으킨 그의 눈을 그제야 제대로 바라보았다. 까맣고 맑은 구슬 같은 그의 눈동자에 작은 불티같은 것이 비쳤다. 올려다보는 그녀가 귀엽다는 듯 그가 살짝 웃어 보였다. 긴장한 탓인지 땀으로 젖은 살결에 순간적으로 오한이 일었다. 소름이 오소소 돋아 오르는 것을 보고 현우가 그녀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팔을 따라 천천히 내려오더니 손등에 키스를 하고 그 손을 마주 잡아 단단히 고정하고 불현듯 그녀 안으로 찾아 들어왔다.

“하읏.”

키스에 정신이 팔린 사이 그가 다가오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한꺼번에 깊숙이 그녀 안으로 밀려 들어온 그는 붉도록 선명했다. 다리 사이로부터 배꼽까지 꽉 차오르는 그의 강직함에 숨까지 턱 막혀 왔다. 이미 젖을 대로 젖어 있었기에 그의 움직임에는 일말의 부자연스러움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이렇게 됐었어야 했던 것처럼,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두 사람의 몸 섞임에는 태고를 닮은 리듬이 있었다.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아…….’

은수는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그의 목덜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긋한 체취는 파리의 그 어느 값비싼 와인보다도 감미로웠다. 벌게진 눈이 저절로 감겼다.

“하앗.”

꾹 다문 입술 사이로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점점 더 거칠어지는 그의 몸놀림을 소리 없이 받아 내는 건 애초에 불가능했다. 애써 부정해 봐야 소용없었다. 고통스러운 동시에 지나치게 황홀했다.

“미쳤나 봐…….”

자기도 모르게 속마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현우가 움직임을 멈추지 않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미쳐도 돼.”

몸은 혹사되고 있는데 그의 말이 말도 안 되게 위안이 돼서 헛웃음이 날 지경이었다.

“괜찮아. 미쳐도 돼, 나랑.”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달콤한 말이 뜨거운 가슴에 닿았다. 진심이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진심 따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래서 더 달아올랐다. 절정으로 치닫는 가파른 경사를 한숨에 뛰어넘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숨이 턱하고 막혔을 때 은수는 까무룩 기절한 듯도 했다.

절정의 고지에서 필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의 어깨 너머로 파리의 밤이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다. 눈물 맺힌 눈망울 위로 부유하는 별빛처럼 오랜 도시의 잔상이 밀려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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