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서늘했던 가을이 지나 새하얀 눈송이가 소복이 내려앉는 겨울을 맞이한 것도 엊그제 같은데, 얼어붙은 땅을 비집고 나온 새싹들이 서서히 돋아나는 봄이 찾아오고 있었다. 계절이 지나는 만큼 서서히 배가 나오기도 했고, 점차 태아를 위한 몸으로 바뀌고 있음을 체감하기도 하였다.
가슴이 조금 더 커지고 아랫배만 살짝 나온 정도지만. 이제 태동도 느껴져서 태아와 대화도 하고는 했다. 비록 내 혼잣말이긴 하지만. 슬슬 배가 더 산만큼 불러올 거라고 하여서 마음의 준비만 하고 있었다.
“작년 이때쯤이었던가요. 내가 마르엘 백작저를 떠나기로 했던 날이.”
“그러네요. 그게 벌써 일 년 전이라니. 이제 와 말하지만, 당신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아서 설마 버려진 건가 하는 생각도 했었어요.”
“저런. 자칫 내 목숨에 문제라도 생겼다면 평생 당신의 원망을 들을 뻔했군요.”
에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전,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산책할 겸 후원을 거닐었다. 항상 바쁜 그가 저녁 식사만큼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나와 함께 해야 한다는 철칙이 있어서, 그 시간이 되면 보좌관들이 알아서 일을 정리할 정도라고.
그동안 꽤 많은 일이 있긴 하였으나, 정작 나는 국혼을 치르자마자 바로 회임이 되어 벌써 몇 달째 놀고먹는 중이었다. 내가 뭐만 하려고 하면 제발 쉬시라고 간곡히 부탁을 하길래 아무것도 못 하고 책만 읽어서 이젠 머리에 쥐가 날 정도라고 툴툴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황후궁 시녀들이 겁에 질린 채로 안절부절못하기에 왜 저러나 싶었는데, 황제의 애틋한 총애를 받고 있는 황후가 조금만 투정을 부려도 황후궁 시종시녀들이 전부 갈려 나갈 거라는 소문이 돈다더라. 에쉬가 워낙 피바람을 몰고 다녀서 어느 정도 이해는 되었다.
에쉬는 그저 나를 무시하는 이들이 없어 다행이라던데.
“아, 미리 말을 해 두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데요?”
“곧 비엔트 왕국과의 교섭으로 사절단이 방문하는데, 그 사절단을 통솔하는 이가 마르엘 백작이라고 하더군요.”
“……정말요? 아버지가요?!”
“예. 방금 전해 들은 소식이어서 당신께 가장 먼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오랜만에 뵙게 되겠군요.”
살다 보면 언젠가는 한 번쯤 뵐 수 있겠지 하는 희망은 가지고 있었는데, 이렇게 빠르게 그것도 정식적인 절차를 걸쳐 뵙게 될 줄은 예상도 못 해서. 벌써부터 잔뜩 기대가 되어 웃음이 절로 났다.
“제국이 안정적인 시기에 방문하는 거라서 마음이 놓여요. 진짜, 가벨론 공작이 마지막까지 뻔뻔했던 그 상황은 절대 잊지 못할 거거든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가벨론 공작의 처형은 내 눈으로 지켜봐야겠다고 에쉬를 설득하여 그 처형식에 참석할 수 있었다. 에쉬와 내 어머니의 원수. 악인이 곧 심판 될 것이라 믿고 수도 구석진 곳의 형장에 함께 참석하였다.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패악을 부리며 에쉬를 모독하였다. 황족이 아니라는 둥, 에쉬의 어머니가 간음하여 낳은 아이라는 둥, 선황 폐하는 사내구실을 하지 못하는 이였다며 돌아가신 분을 능욕하기까지.
[아바마마께서 차기 황제로 나를 지목하였던 건 사실이오. 돌아가시기 전에 내게 이 검을 넘기셨으니까. 이 검이 무엇을 뜻하는지 혹 알고 있소?]
에쉬는 허리에 차고 있는 황금빛 검을 내보이며, 그 안에 들어있는 진짜 인장을 꺼내 모든 이들에게 똑똑히 확인시켜주었다. 선황 이후 사용된 인장은 전부 가짜이고, 이것이 진짜라고.
원래 지금껏 대대적으로 그 검에 대한 진실을 숨겨왔다고 한다. 황제들만 아는 사실이었지만 에쉬는 굳이 이것을 숨기면서까지 비밀을 엄수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고. 해서 자신의 뒤를 이을 아이에게 자신과 같은 아픔을 겪도록 하지 않겠다며 진짜 황제의 인장을 만천하에 공개하였다.
거기까진 잘 참던 에쉬였는데, 가벨론 공작이 갑자기 내 어머니를 욕보이기 시작하면서 화가 난 에쉬가 직접 공작의 혀를 잘라내는 바람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었다.
[끝까지, 사람이길 포기하려는 게요? 그럼 어디 짐승처럼 죽어보든가.]
결국 에쉬는 처형장에 사방이 막힌 우리를 세웠고, 그 안에 굶주린 늑대를 집어넣었다. 그렇게 공작은 최후를 맞이하였다. 그 장면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다. 고통 속에서 서서히 숨이 끊어져 가는 모습이 잔인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이제라도 그에게 희생당한 모든 이들이 조금이라도 편해지길 바라요. 또 우리 왕국에 계신 당신 어머니의 유골함도, 이제는 선황 폐하의 곁에 놓아드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반대하던 이들은 전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으니. 당장 건의를 해봐야겠군요.”
어머니의 유골함을 먼 곳에 두어야 하는 아들의 심정이 어떨지 충분히 이해가 되어서. 훗날 아이가 태어나면 에쉬의 어머니에 대해서 물을 테고, 조금 복잡한 내용이긴 하겠지만 적어도 네 아버지 역시 너만큼 사랑 속에서 자랐다고 떳떳하게 말해 주고 싶었다.
“에브린과 파빌리엔의 결혼식도 며칠 남지 않았네요. 너무 늦게 식을 치르게 해서 미안해져요.”
“식만 늦을 뿐, 이미 대공비로서 역할을 해내는 것 같더군요. 어쩔 수 없었습니다. 레니의 국혼이 더 먼저라서.”
결국 레이니드는 정해진 순리에 따라 정략혼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대신 약혼을 먼저 치르고 성년이 되면 그때 정식으로 국혼을 치르기로 약속했다고.
또한 성년이 될 때까지 수도에 머물게 해달라고 하여 마리아와 함께 살 거처를 수도에 마련해 주었다.
언뜻 마리아에게 듣기로 아들인 제 5황자는 이미 자신의 신분을 버리고 평민으로서 어느 왕국에 기거하여 결혼까지 했고 아이까지 낳았다고 하던데. 어차피 황족의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돌아올 생각도 없어 보여서 네 인생이니 알아서 살되, 어머니와 아들의 인연도 끊자고 하였단다. 그건 조금 마음이 아팠다. 그래도 자식인데 어미로서 신경이 안 쓰일 수는 없을 테니까.
아무튼 레이니드의 약혼식에 정말 엄청난 인력과 금액을 투자했다던데. 우리가 치렀던, 나는 알지도 못하는 우리의 국혼 때만큼 화려한 거라고. 곧 있을 파빌리엔과 에브린의 결혼식 역시 그만큼 화려하겠지만.
“황실 행사가 연달아 생기네요. 이후에 잠잠해지면 조금 아쉬워지겠어요.”
“이 아이가 태어나면 그때부터는 연회에 무도회에 정신없이 바쁠 수도 있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가 부드럽게 내 배를 어루만지면서 흐뭇한 미소를 그렸다. 에쉬도 나도, 이렇게 빨리 부모가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터라 아직도 서로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라면 분명 좋은 아버지가 되어 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다가 그의 뒤에 서 있던 나무의 꼭대기에 생긴 낯익은 잎사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에쉬! 저기 봐요, 저기! 겨우살이예요!”
잎이 덜 자란 초록 줄기. 저건 분명 겨우살이가 확실했다. 에쉬가 나를 잠시 떠나있던 날, 그가 내게 진심 어린 고백을 하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면서 저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를 하였지. 겨우살이 아래에서 키스한 연인은 무조건 행복해진다고.
에쉬도 위를 올려다보며 겨우살이를 보고 가지런한 치아가 드러날 만큼 환하게 웃었다.
“정말이군요. 황궁에서 겨우살이를 보게 될 줄이야. 마치,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 찾아온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럴까요? 아니, 그런 거라고 믿고 싶네요. 우리의 앞날이 그저 행복하길 바라는, 당신과 나의 어머니가 보내온 선물이라고 생각할래요.”
험난한 위험 속에서도 지금 여기까지 무사히 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 힘만으로 이뤄낸 것이 아니다. 억울하게 죽은 영혼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다.
반역의 무리를 처단하였으나 우리를 위협할 이들은 언제 어디서든 나타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제국을 사랑했던 선황들의 돌보심이 앞으로도 쭉 이어져야 우리의 미래도 밝아질 것이다.
부디, 우리와 우리의 아이들까지 안전하고 무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바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