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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11)화 (112/113)

111화

너무도 익숙한, 내가 아주 잘 아는 두 사람이 먼저 착석해 있다가 나를 보고 동시에 일어났다. 나는 이렇게 놀랐는데, 그 두 사람은 너무 태연하게 웃기만 한다.

파빌리엔이야 가끔 몇 번 궁에서 에쉬와 함께 만난 적이 있었지만, 에브린은 정말 예상치 못한 손님이어서.

“내가 말했잖습니까? 당신을 아주 보고 싶어하는 손님이라고.”

“그, 그래도…… 너무 갑자기…….”

왕궁에서 끝끝내 만나지 못하고 제국으로 오게 되어 앞으로 못 만나는 건가 싶었다. 그래도 유일한 친구인데, 아버지께 제대로 된 인사를 하지도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던 것만큼 아쉬움이 크게 남아 있던 터라.

순간 너무 반갑기도 하고 놀라워서 목이 멘다. 지난번 내 국혼식 날은 에쉬가 아버지께 아주 소수의 인원만 간추려서 보내라고 미리 언질을 해 주었다기에 원래 둘째 언니와 에브린이 동행하려던 것을 취소했다고 들었다. 어차피 그때 이후로도 한동안 유령이 내 시력을 되돌려놓지 않아서 왔어도 보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은 몰라서 이게 다 꿈인지 생시인가 싶다. 아마 에브린이 쑥스럽게 웃으며 내게 다가와 내 손에 손수건을 꼭 쥐여주지 않았더라면 환상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어머, 우리 슈아 못 보던 사이에 울보가 다 되었네? 아니지, 이제 황후 폐하라고 불러야 되는구나. 존대도 써야 하지만, 오늘 하루 친구로서 만찬을 즐기겠다고 하면 제 목을 치실 건가요, 황제 폐하?”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지. 슈아가 불쾌해하지 않는다면 그럴 일은 없을 테고.”

나는 에브린이 준 손수건으로 눈가를 콕콕 누르며 호흡을 고르고 감정을 다스렸다. 원래 감정 기복이 심한 편은 아니었는데, 최근 들어 눈물이 많아진 건 사실인지라.

“어떻게 된 거야, 브링?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오질 않아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긴 줄 알았어.”

“무슨 일이야, 생기긴 생겼었지. 나, 네가 제국으로 떠난 이후에 바로 왕국을 떠나 숨었거든.”

“숨어? 왜?”

“일단 앉자. 해 줄 이야기가 너무 많아.”

에쉬가 왜 이른 시간에 나를 데리고 왔는지, 에브린의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고 알았다. 에브린의 입에서 나온 말들은 도저히 식사를 하면서 들을 수 없는 내용인지라.

내가 왕국을 떠났던 그 날 밤. 파빌리엔이 에브린을 지키기 위해 붙여두었다던 기사가 잔인하게 살해된 채로 저택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고. 한 사람만의 짓이 아님을 깨닫고 그날은 저택의 지하실에 몸을 숨겨 밤을 보냈는데, 아침에 올라와 보니 누군가가 침입한 것처럼 방이 온통 엉망진창이 되어있었단다.

“왜 널 노렸을까?”

“인질이 필요했던 거야. 비엔을 협박하기 위한 용도로.”

“설마, 가벨론 공작이……?”

“맞아.”

파빌리엔과 공작의 측근인 시온은 오래전부터 친구 사이였고, 공작가에서 벌어지는 비밀스러운 일들을 시온이 파빌리엔에게 공유하고 있었다는 말에 새삼 놀랐다. 그 시온을 이중 첩자로 만든 이가 바로 파빌리엔이었다고.

그래서 일이 이렇게 쉽게 끝날 수 있었던 거였다. 아니었으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어렵다.

“그래서 왕국을 떠나 몸을 숨기고 있었다는 건 이해하겠는데, 가벨론 공작을 잡아들인 지 벌써 한 달이나 지났잖아.”

“혹시 모를 일에 대비하는 거지. 모든 일이 완전히 정리될 때까지. 나 제국에 있었는데, 계속?”

“뭐어?!”

“가장 믿을 만한 가문인 라이온 백작가에 신세를 지고 있거든. 원래 텐부르크 후작가에 머물려고 했는데 후작 부인이 출산을 앞두고 있어서.”

같은 제국에 있었는데, 어떻게 나한테까지 아무런 언질도 해 주지 않았는지. 아주 조금 서운해지려고 했으나 나 역시 황궁에 숨어 있으면서 누구에게도 내 위치를 발설하지 못했던 때를 떠올리면 충분히 이해가 되기도 하였다.

“그랬었구나. 라이온 백작 부인이 이래저래 수고를 많이 해줘서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네.”

“그 백작 부인에게 너에 대한 소식도 자주 들었어. 마음 같아서는 당장 나 여기 있다고 알려주고 싶었지만, 모든 일이 전부 정리될 때까지는 참으라고 해서. 결국 이렇게 못 참고 널 만나겠다고 떼를 써버리긴 했지만.”

에브린이 파빌리엔을 향해 수줍은 표정으로 눈꺼풀을 빠르게 팔랑거리자 가만히 듣고만 있던 그가 시선을 재빨리 피하더니 목을 가다듬는다. 그런 파빌리엔의 귀 끝이 빨갛게 변하는 것을 보니, 의외로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나 싶다.

저런 걸 보면 그저 친구 사이로 남은 것 같지 않은데.

내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에쉬가 그 궁금증을 해결해주었다.

“파빌리엔은 조만간 작위를 새로 받아 출궁할 예정입니다. 어차피 가벨론 공작의 빈 자리를 채워 넣어야 하니 평생 놀고먹을 생각은 접어야겠지만요.”

“놀고먹을 생각을 했어요, 파빌리엔?”

“그냥 제국을 떠날 생각이 더 컸던 것뿐입니다. 형님이 꼭 저렇게 몰아세우는 경향이 있어서 웬만하면 정치적으로 엮이고 싶지 않았거든요.”

대외적으로는 에쉬의 말을 아주 잘 듣고 고분고분하게 굴더니, 속으로는 아니었나 보다. 안 보이는 곳에서 충돌이 꽤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럼 작위를 받으면, 에브린하고 다시 합치는 걸까? 그럼 에브린이 대공비가 되는 거고?

“저 녀석이 대공작이 되려면 일단 결혼부터 해야 하거든요. 어차피 평생 책임지고 지키기로 마음먹었다면, 평생 옆에 끼고 살라고 등 떠밀었습니다. 하여간 녀석도, 쉬운 일을 그리 어렵게 생각하더니.”

혀를 끌끌 차는 에쉬의 말은 이러하였다. 한 번 크게 상처를 준 에브린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멍청하게도 주변을 배회하기만 하기에, 에브린을 직접 만나 사정을 설명하고. 결국 에브린이 파빌리엔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고.

에브린이야 워낙 마음을 정리하기 어려워했으니 그 제안을 덥석 물었을 것이고, 상처 준 것에 대한 잘못은 앞으로 살아가면서 천천히 갚으라고 했을 것이 분명하다. 어쨌든 잘 어울리던 두 사람이 다시 만나 행복한 미래를 꾸리게 된 것에 괜히 감격하여 또 눈물이 새어 나와 버렸다.

“주책맞게, 자꾸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지…….”

“아까부터 너 수상하다? 갑자기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건 임신 증상이랑 비슷한데.”

“……응?”

“매일 그렇게 붙어있고, 매일 밤 함께 한다며. 게다가 안 그러던 애가 갑자기 눈물바람을 흩날린다면 좀, 한 번쯤 수상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 아니야?”

아주 잠깐 뒤통수를 한 대 가격당한 기분이었다. 황후궁에 든 첫날부터 계속 에쉬가 나를 찾아와 함께 밤을 보낸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임신이 이렇게 쉽게 될 리가. 지금까지 에쉬와 수없이 관계를 가지면서 달거리는 꼬박꼬박 찾아와 한 번도 의심해본 적이 없었다.

에브린의 말을 듣고 나서 잠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기 바쁘던 에쉬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시종장을 불렀다.

“황궁의를 불러와. 지금 당장!”

누가 들으면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겠다. 그러더니 안절부절못하면서 자리에 앉아 내 손을 꼭 잡았다가 뺨도 쓰다듬고, 다시 일어나 초조하게 서성거리기를 반복하였다.

그래서 내가 더 민망해 죽을 맛이었다. 그러다가 아니면 어쩌려고. 분명 지난달에 달거리를 했으니까 만약 임신이 되었더라도 확실하게 판명 나긴 어려운 날짜 아닌가? 첫째 언니도 임신 소식이 있고 나서 거의 두 달 뒤 정확한 결과를 받은 거로 아는데.

“황궁의를 불러도 소용없을걸? 어차피 대답은 뻔해. 확실한 건 정확한 날짜가 지나야 알 수 있다고 하겠지.”

그때,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대화에 끼어드는 유령이 태연자약하게 팔짱을 끼며 벽에 등을 기댄 채로 싱긋 웃었다. 가끔씩 저렇게 예고도 없이 나타나는 경우가 종종 있어서 이젠 놀랍지도 않고. 에브린만이 기겁을 하면서 비명이 나오려던 입을 손바닥으로 턱 막기만 하였다.

해서 나는 한숨을 푹 뱉어내며 유령을 흘겨보았다.

“손님이 계신 자리까지 그렇게 난입하는 건 실례예요. 사람은 누군가가 갑자기 나타나면 놀란다니까요?”

“내 알 바는 아니고. 황궁의보다 내가 더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는데, 듣고 싶지 않아?”

그 말에 그 자리에 있던 다섯 사람, 갑자기 난입한 유령에 의해서 어디선가 소리 소문 없이 튀어나온 카시안까지, 모두의 시선이 유령에게 꽂힌다. 그중 가장 궁금해하는 건 에쉬였다.

“태동이 느껴지기라도 합니까?”

“더 자세하게 알려면 배 속에 들어가 봐야 하는데, 괜찮겠나?”

배 속엘 어떻게 들어간다는 건지. 유령인 채로 내 배를 탐색해본다는 걸까? 조금 끔찍하긴 하지만 또 궁금해지기도 해서.

유령은 지난번 에쉬가 여러모로 위협을 받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어서 그런지 전과는 태도가 조금 변하긴 하였다. 내 눈동자에 덮어두었던 마력을 제거하면서 그런 말을 했었지.

[복수는 이런 식으로 아주 사소하게 천천히 해 줄 테니 안심하기는 일러.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다니도록.]

죽을 때까지 귀찮게 해주겠다는 뜻으로 들리기는 하였지만 그러든지 말든지 신경을 쓰지 않기로 마음먹었었다. 에쉬가 말하기를 적어도 복수를 하기 위해 나를 어떻게든 살려둘 테니 그저 건방진 호위 기사 하나 곁에 두었다고 생각하라고도 했고.

“만약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당신, 용서 못 해요. 카시안이 반대쪽 얼굴도 똑같이 만들어버릴 테니까.”

괜히 으름장을 놓자 유령이 코웃음을 치면서 내게 다가와 손을 뻗어 내 납작한 배 위에 손바닥을 얹는다. 순간 덜컥 겁이 났으나 긴장하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유령의 표정을 집요하게 확인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움찔거리더니 내게서 손을 떼며 뒷걸음질을 친다. 조금 놀란 표정으로 두 눈을 깜빡거리기까지.

“왜 그래요?”

“……뭐가 있기는 한데, 확실히는 잘 모르겠다. 조금 더 시일이 지나 봐야 알 것 같아.”

정말 임신인가? 그런데 유령이 답지 않게 사색된 얼굴을 유지하면서 시선을 피하고는 갑자기 사라지는 바람에 더 묻지도 못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난 이후에서야 내 배 속에 귀한 아기님이 자리하고 계시다는 황궁의의 확답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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