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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10)화 (111/113)

110화

“……마리아. 레니를 데리고 잠시 후원 산책이라도 다녀오십시오.”

“예, 폐하.”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마리아와 함께 나가는 레이니드의 뒷모습에 기운이 하나도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황녀는 왜 저러는 거예요?”

“레니는 아마, 내가 제안한 일을 황녀로서 하기는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그런 혼란스러움 때문일 겁니다.”

“무슨 일을 제안했는데요?”

맑은 하늘의 새하얀 뭉게구름처럼 부드럽게 웃는 에쉬가 내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나를 데리고 창가로 걸어갔다. 그 창가 아래쪽으로 이제 막 황후궁을 나서는 레이니드와 마리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두 모녀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던 에쉬가 한숨을 길게 흘리면서 설명을 이었다.

“가벨론 공작에게 무기를 지원했던 그 왕국, 아무래도 감시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있어 그곳 왕세자와 레니의 국혼을 논의하고 있었거든요.”

“아……. 정략혼으로 팔려가는 느낌이겠네요.”

“그렇겠지요. 원래 레니는 이 제국을 벗어나고 싶지 않아 했습니다. 지금이야 어쩔 수 없이 제 어미를 따라 북부의 별장에 머물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제국 수도로 돌아와 살겠다고 벼르고 있던 터라.”

레이니드는 원래 황녀의 신분이라 황궁에 남아 있어야 하지만, 아직 성년도 아니고 목소리를 잃어버린 탓에 보호가 필요한 터라 에쉬가 황명으로 별장에 보낸 거라고 들었다. 방금 마리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종합해보니 그것보다 황태후의 보복이 두려워 마리아가 딸과 함께 있고 싶어 하는 느낌이 강하다.

“황녀도 권력에는 별 욕심이 없나 봐요. 누가 뭐래도 귀부인보다는 왕세자비의 자리가 더 탐날 텐데.”

“슈아 당신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제국의 황후 자리보다 영지 하나 꾸리는 백작가의 후계자가 더 간절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요.”

“저야 가문을 이어갈 아들이 없는 아버지께서 홀로 계시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도 했고, 결혼할 생각도 없었던 터라 그랬다지만요.”

아버지를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구석이 저릿해졌다. 어머니도 계시지 않는데 생활이 얼마나 허전할지. 그래서 곁에 남고 싶었는데 어쩌다 보니 일이 이렇게 된 거라서.

“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겁니까? 백작께서 홀로 외로워하실까 봐?”

내가 늘 아버지의 이야기를 꺼내면 슬픈 얼굴을 한다며 에쉬가 많이 걱정했었다. 지금도 조심스러운 손끝으로 내 뺨을 쓸어내리며 눈썹을 축 늘어뜨린다.

행여 그가 나 때문에 걱정할까 봐 고개를 가로로 저으며 생글 웃어 보였다. 지금 한 달 내내 가벨론 공작의 반역 사건을 마무리 짓느라 고생하는 그를 더 괴롭히고 싶진 않았다.

얼마 전에 나를 보러 온 라이온 백작 부인이 그날 저택에서 만난 이후로 한 달 동안 얼굴도 보지 못한 남편이 원망스럽다며 손수건을 잘근잘근 씹는 표정이 눈앞에 아른거려서. 남편을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퇴청조차 하지 못하게 만든 가벨론 공작을 향한 분노겠지만.

백작 부인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르게 도도한 아가씨 느낌의 얼굴을 하고 귀여운 행동을 하는 여자라 왜 라이온 백작이 길었던 우정을 깨트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아마 애초에 라이온 백작은 백작 부인을 여자로 보지 않았을까?

“왕국에는 언니들도 있고 손주들도 있고, 둘째 언니가 자기 둘째 아들에게 마르엘 백작 후계 수업을 받게 할 생각인 것 같더라고요. 이미 로안트 후작도 허락했대요. 저한테도 물어보길래 아주 좋은 생각이라고 했어요.”

“아, 그렇습니까? 듣던 중 참 반가운 소식이군요.”

“그래서 걱정하지 않아요. 이제 마음이 좀 놓였어요. 아버지가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거든요.”

로안트 후작이 참으로 대단한 결심을 해주어서 고마웠다. 그만큼 둘째 언니가 사랑받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고.

“아참, 슈아에게 전해 줄 좋은 소식이 하나 있는데 잊을 뻔했군요.”

“뭔데요?”

“비엔트 왕국 왕비의 회임이 확실해졌답니다. 태아도 무사히 자리 잡았다고요.”

“어머, 정말이에요?!”

계속되는 유산으로 첫째 언니는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침대에서 생활했다. 그 노력의 결실이 맺어진 것 같아서 내가 다 기뻤다.

부디 출산까지 별 탈 없이 무사하길.

“언니에게 축하 선물을 보내야겠어요. 언제 한번 라이온 백작 부인과 조용히 신전도 찾아가 무사평안을 기원도 하고, 일단 편지부터 써야겠네요.”

“라이온 백작 부인과 최근 자주 만나는 것 같더군요. 어차피 입궁하여도 본궁과 반대쪽이라 라이온 백작을 만나지 못할 텐데.”

“그냥 같은 공간에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그런 기분 아닐까요? 저도 가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비록 우리는 거의 매일 만나지만, 당신이 머무는 본궁 방향을 하루에도 수십 번 보게 되더라고요.”

이렇게 보고만 있어도 계속 보고 싶은 마음인지라 항상 그립고 애가 탔다. 지금 대부분의 귀족은 전부 암묵적으로 모든 모임을 중단한 상태였고, 나 역시 라이온 백작 부인 외에는 누구도 대면하지 않고 있었다.

제국에 피바람이 불고 있는 상황인지라 그저 황족으로서의 예법 교육을 받고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후원의 산책 정도? 그마저도 위험하다고 항상 기사와 시녀들이 뒤따르곤 해서 여유로움 따위는 없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는 건 이미 포기했지만.

그때 나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던 에쉬가 내 턱을 들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살포시 입을 맞춰왔다. 보드라운 입술이 포개어졌다가 살짝 떨어지고, 말캉한 혀로 아랫입술을 가로로 길게 핥자마자 뺨이 간질간질.

그 어떤 감미로운 악기 연주도, 미각을 자극하는 황실의 환상적인 요리도 그의 키스만큼 달콤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황후의 자리는 외로운 자리라고 하지요. 당신을 외롭게 만든 것 같아서 이 죄스러움을 어떻게 사죄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외롭다는 뜻은 아니었는데, 내가 본궁을 바라보게 된다는 말이 그렇게 들렸나 보다. 그가 너무 미안해해서 내가 더 미안해져 당황해버렸다.

“그, 그런 뜻이 아니라……. 외롭지 않아요, 저. 외로울 시간도 없고, 당신과 가까운 곳에서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냥 기뻐서 그런 거지, 절대 투정을 부리려던 건 아니에요.”

“솔직해져도 되는데. 애써 감추려고 하지 않아도 됩니다.”

의미심장하게 웃는 에쉬가 허공에 손짓을 하자, 응접실에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과 황궁 기사들이 전부 잽싸게 나가버렸다. 덕분에 얼굴에 열이 화끈 올라버렸다. 아주 가끔, 삼 일에 한 번꼴로 이렇게 벌건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야한 행위를 저질렀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가족들 생각에 조금 울적해질 때 위로를 해줄 생각으로 이러는 것 같기도 하고. 뭐, 그 덕분에 새 황후가 황제 폐하의 끝 모를 사랑을 받는다며 다들 부러워한다고, 라이온 백작 부인이 수줍게 뺨을 붉히면서 말해 주었다.

손님을 맞이해야 할 응접실에서 이래도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한번 불길처럼 솟아오른 뜨거운 분위기는 쉬이 사그라지지 않았다.

“오늘 만찬에 손님이 합석하기로 했습니다.”

“하아……. 손님, 이요?”

“슈아 당신을 아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인지라, 차마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나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 누굴까?

한바탕 거친 불바다의 거센 파도가 나를 삼켰고, 신비로우면서도 아찔한 쾌감에 취했던 가을날의 오후. 짧다면 짧을 사랑을 나누고 나면, 기다렸다는 듯 대기하던 황궁 시녀들이 젖은 수건과 마른 수건을 전해 주었다. 처음에는 그게 너무 부끄럽고 민망했는데, 이젠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멀쩡하게 정리하는 것도 자연스러워졌다.

“그럼 만찬 때 봅시다, 슈아. 준비되면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기다릴게요.”

그래도 아쉬워서 몇 번 더 짧은 입맞춤을 나누었다가 밖에서 시종장이 너무 지체되었다며 자꾸 재촉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보내주어야 했다.

때마침 산책을 마치고 다시 찾아온 마리아가 오늘은 이만 가봐야겠다며 여전히 울적해 있는 레이니드와 다시 북부로 떠나버리고 말았다. 아직 어린데, 벌써 정략혼이 정해진 자신의 운명을 얼마나 비극으로 여기고 있을지. 나도 처음 황제의 구혼서를 받았을 때 세상이 다 무너지는 기분이었으니까.

배웅을 하러 나온 김에 산책을 하였다. 황후로서의 삶은 생각보다 더 단조롭고 여유로웠다. 이래서 많은 귀부인이 보석과 드레스로 허한 마음을 채우고 모임이든 티타임이든 바쁘게 지내는구나, 하는 생각이 이해가 될 정도로.

차라리 귀족이라면 어디든 출입하기가 쉽겠지만, 황후는 황궁을 떠날 수가 없었다. 공식적으로 외출을 허락받지 않는 이상, 또는 휴양으로 황실의 사유지인 별장으로 갈 수는 있어도 거기서 밖으로 나가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였다.

에쉬라면 내가 몰래 나갈 수 있도록 조치를 해주겠지만. 괜한 입방아에 오르는 건 내 쪽에서 사양인지라.

“황후 폐하. 황제 폐하께서 황후 폐하를 모셔오라 하십니다.”

태양이 서서히 산등성이 위로 내려앉기 시작하면서 환하던 하늘이 점차 그림자에 먹혀들어 갔다. 책을 읽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던 차여서 책갈피로 책을 고정하여 덮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식사를 하기에는 조금 이른 시간 같은데. 보통 완전히 해가 지고 나서야 식사를 했었기에 혹시 식사 전에 누굴 만날 생각인가 싶었다. 아까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다고 했으니까.

에쉬의 시종장이 직접 나를 모시러 왔고, 그의 안내를 받아 본궁으로 향했다. 보통 식사는 각 궁에서 해결하곤 했는데, 손님을 맞이하여 함께 하는 식사는 본궁에서 진행된다는 설명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본궁 입구에서 에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나와 계세요? 재판은 잘 끝냈나요?”

“며칠만 더 진행하면 마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재판 내내 집중을 하지 못하여 라이온 백작이 얼마나 따갑게 흘겨보던지. 그만큼 당신이 너무 보고 싶었어요.”

하여간 왜 이렇게 예쁜 말만 해서 나를 이렇게 흔들어놓는지. 흐뭇하게 웃으며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본궁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만찬이 준비된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그 자리에 멈춰서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뭐예요? 이 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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