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조용하던 연회장이 술렁거렸다. 사실만을 증언하기로 황제에게 약속한 이가 감히 황제의 앞에서 거짓을 꾸밀 리는 없을 테고, 사실이라 생각하면 정말 가벨론 공작이 반역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니까.
하지만 지금까지 번번이 암살에 실패했던 것은 카시안 때문일 텐데. 그의 존재를 쉬쉬한다 해도 황궁에 자기 사람을 여럿 심어둔 공작이 모를 리는 없을 거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에쉬를 무력으로 제압할 수 있다고 여기는 걸까?
“감히, 내 아버지께서 그리 아끼고 소중하다 여겼던 이 제국을……. 그리도 탐이 날 정도로 가지고 싶었더라면 내 아우를 대신하여 국정을 살필 때 잘 좀 하지 그랬소. 국고를 그 더러운 아가리에 집어처넣을 생각만 하지 말고.”
여전히 에쉬의 목소리에서는 크게 오르내리는 감정이 느껴지질 않았다. 오히려 잔잔한 호수와도 같은 평화로운 분위기여서 괴리감이 느껴질 정도다.
“파빌리엔. 나머지도 내오도록 해.”
“예, 폐하.”
파빌리엔이 결연하게 대답하였고, 곧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까는 그리도 반박하며 아니라더니 가벨론 공작도 조용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서슬 퍼런 칼끝이 목을 노리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그 불편한 고요 속에서도 나를 감싸고 있는 에쉬의 손은 분주하게 움직이느라 바빴다. 내 어깨부터 팔뚝까지 쓸어내리며 다독거리고 손은 마사지하듯 조물조물 주물러댔다. 아주 천연덕스럽게.
색욕을 드러내는 느낌은 아니었으나 일단 그의 손이 닿기만 해도 입술이 바짝 마르고 몸이 뜨거워진다. 곧 이곳에 피바람이 불어 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임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그야말로 본능과도 같았다.
곧 몇 사람의 묵직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그것은 마치 사형을 진행하기 위하여 단두대에 올라서는 집행자의 발소리처럼 들려왔다.
“폐하께서 명령하신 자료들입니다. 가벨론 공작이 반역을 주도했다는 모든 정황이 담긴 서류, 또한 이 반역에 가담한 이들의 명단, 마지막으로 저들이 멋대로 빼앗은 국고들이 사용된 거래내역 등. 모든 증거자료를 이 자리에서 제출하겠습니다.”
“시, 시온……! 네 녀석!”
낯선 목소리여서 누군가 했는데, 그 증거자료를 가져온 이가 아까 증언한 남자가 말했던 시온 도련님이라는 사람인가 보다. 가벨론 공작이 분을 이기지 못하여 이를 갈며 외쳤으나 시온이라는 남자는 개의치 않아 하였다.
“이 모든 자료들은 제가 직접 빼돌린 증거입니다. 가벨론 공작 전하의 측근으로 오랜 기간 충성을 다해왔으나, 반역을 꾀하는 작태를 도저히 지켜만 보고 있을 수가 없기에 목숨의 위협을 무릅쓰고 세상에 낱낱이 밝히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용은 이미 확인하였다. 그 서류에 적힌 모든 것들이, 정녕 사실인가?”
“참담하지만 일절 거짓 없는 사실입니다. 이 모든 것은 가벨론 공작 전하께서 주도하였으나, 실상 뒤에서 전하를 조종한 건…… 황태후 폐하십니다. 그에 대한 증거 또한 이 안에 담겨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실이 밝혀지는구나. 국혼이 치러지는 날, 결전의 순간이라고는 들었지만 설마 국혼 자체가 엉망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렇다고 아쉽거나 하진 않다. 지난 건국기념 연회도 엉망이 되긴 했었지.
시국이 이러하니 어쩔 수 없고, 오늘을 기점으로 에쉬가 지금보다 더 안전해질 수 있다면 아무래도 좋다. 이번에 최종적으로 정리되길 바랄 뿐이다.
내 손을 만지작거리는 행동을 멈추지 않는 에쉬가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지금 에쉬의 표정이 어떠한지 보고는 싶은데. 그 한숨 하나에 참담한 심경이 담긴 것 같아 마음이 좋지 못하였다.
“들으셨습니까, 어마마마? 어마마마께서 가벨론 공작을 이용해, 아들인 저를 해치려 하였답니다.”
에쉬가 공식적인 자리에서는 황태후를 어마마마라고 부르는구나. 하지만 그 애틋한 호칭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부드럽지 않았다. 오히려 소름 끼칠 만큼 스산하였다.
그나저나 황태후가 이 자리에 있었구나. 아무 말도 없어서 참석하지 않은 줄 알았다.
해서 이어지는 황태후의 목소리에 귀를 잔뜩 기울였다.
“참으로 재미있는 이야기로군요. 어미로서 귀한 아들의 목숨을 노릴 리가 있겠습니까? 또한 이미 성군이라 칭송받는 우리 황제 폐하의 찬란한 앞길을, 막을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지.”
누가 들으면 정말 혈연관계로 착각할 만큼 애정이 자리 잡은 다정한 음성이었다. 그러나 그 이질감, 내가 유령을 통해 꿈으로 들었던 그때의 목소리와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똑같은 억양, 똑같은 음색을 가졌음에도 그의 어머니를 겁박하던 그 목소리에는 가시가 느껴졌었다. 지금은 그때 느꼈던 가시가 없는 것 같으면서도 뭔가 비아냥거리는 느낌이기도 하고. 모르고 들으면 패륜이라 생각될 정도로 에쉬는 어머니를 의심하는 나쁜 아들 같으나, 황태후의 본색을 알기에 속지 않을 수 있었다.
설마 그 유령, 이런 것까지 대비하여 내게 그 목소리를 들려준 거였을까?
“그렇지요? 어마마마께서 정녕 제 앞길을 생각하신다면, 과거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께 독을 먹이는 파렴치한 행위를 하지도 않았을 것이고요.”
“……무슨 말인지, 도저히 모르겠구나. 내가 그리했다, 누가 그런 말을 전하더냐?”
“글쎄요. 누구일까요. 오 년 전, 제 와인에 독을 타 살해하려 했던 그 주범도, 황태후 폐하라 자백하던데……?”
레이니드다. 그 독을 레이니드가 직접 에쉬의 와인에 탔고, 차마 에쉬를 위험에 빠트릴 수 없어 직접 그 와인을 마시고 목소리를 잃었다지. 역시 그건 황태후의 짓이었어.
참으로 무서운 사람이다. 자신과 자신의 아들인 당시 황태자의 위치를 위협하려는 에쉬와 에쉬의 어머니를 수없이 살해하려 했던 끔찍한 사람. 대체 그 권력이 무엇이기에. 그런 거짓말로 세상을 속이고 이용하고, 파렴치한 행위 또한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을까?
“참으로 용의주도하게 일을 처리하셨더군요. 스스로의 손에는 피를 묻히기 싫어 여러 사람을 이용하고, 버리고, 죽이고. 생명이 그리 하찮다 여겨지십니까? 설마 제가 지금까지 그것을 모르고 있었을까요? 대체 황태후씩이나 되시는 분이 궁을 비우고 가벨론 공작령에 숨어계시질 않나. 황족이라는 자각이 있기는 하신 건지요!”
평정심을 유지하던 에쉬가 조금 격해진 억양으로 외쳤다. 아마도 본인의 목숨을 해하려 했던 것보다 어머니를 위협하고 해쳤다는 점이 더 괴로운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겠습니다. 대답 여하에 따라 상상도 하지 못할 지독한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 지금처럼 편안하게 여생을 감옥에서 썩게 할지 결정하도록 하지요.”
“…….”
“내 어머니께서 기거하시던 별궁에 당신이 몰래 밀어 넣은 황궁 시종. 그자가 내 어머니를 농락하여 수치심에 자결을 하게끔 종용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누굽니까, 그 남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전신에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끔찍하고 더러운 이야기였다. 세상에, 정말 저 일이 사실이라면 너무 충격적인데.
“확인받고 싶습니다. 이미 그자가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어마마마께 직접 듣고자 합니다. 괜히 엄한 사람의 목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침묵으로 일관하겠다, 라고 해석하면 되겠습니까?”
그럼에도 황태후는 입을 열지 않았다. 침묵은 긍정의 뜻. 에쉬가 자신을 도발한다 생각하여 굴하지 않겠다는 의미일지도 모르고.
“……형님. 형님의 증언이 필요합니다. 잠시 모습을 드러내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결국 나를 찾을 줄 알았지. 역시 내가 없으면 일이 원만하게 해결되진 않는군.”
바로 옆에서 유령의 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유령이 실체화를 했는지 조용하던 귀족들이 기함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에쉬와 외형적으로 똑같은 남자가, 그것도 에쉬가 형님이라 부르는 이가 갑자기 현신하였으니 당연히 놀라겠지. 에쉬에게 형제라고는 파빌리엔뿐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귀족이 없을 테니까.
“그래서, 이제 뭘 어떻게 해줄까? 여기 있는 자들을 다 쓸어버리면 되는 건가?”
마력을 운용하는지 옆에서 불꽃을 태우는 소리가 퍼졌다. 뜨겁진 않았다. 지난번 둘째 언니가 불꽃으로 화살을 만들어 에쉬를 겨냥했던 것과 비슷할 테지.
갑작스러운 위협으로 연회장이 발칵 뒤집히면서 비명이 여기저기 터져 나왔다. 원래 마법사라는 이들은 신기하면서도 두려운 대상이기도 하다. 못된 마법사들이 악한 마음을 먹는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을 불태워 없앨 수도 있으니까.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은 건들지 마십시오. 형님께서 가장 먼저 처리해야 할 일은 따로 있잖습니까.”
“아, 그 황태후궁의 시종 말인가? 흠, 마침 저기 있네. 황태후의 바로 옆에 저 남자.”
“……힉! 컥!”
순간 누군가가 목이 졸린다는 듯 숨 막히는 소리를 흘린다. 에쉬의 어머니를 그렇게 만든 이가 이 자리에 있을 줄이야.
“내가 지하세계와 좀 친해. 그곳에서 어머니의 기억을 엿보았거든. 그때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네놈은 진작 죽은 목숨이었겠지. 아, 걱정하지 마라. 지금 당장 죽이진 않아. 아주 서서히, 제발 죽여 달라고 사정해도 죽이진 않으마.”
비록 태어나기도 전에 죽음을 맞이하여 어머니에게 사랑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겠지만, 그래도 자신의 남동생을 아끼는 것처럼 어머니에 대한 애정은 있었나 보다. 혈육은 죽어서도 혈육이라더니.
에쉬도 유령을 말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그저 입맛을 다시며 모든 일을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오늘을 기점으로 반역을 꾸민 가벨론 공작과 그에 가담한 이 명단의 귀족들은 그 가족과 방계가문까지 전부 엄벌에 처할 생각이다. 곧 재판이 열릴 것이고, 그때 그대들의 죄를 하나씩 나열해보도록 하지. 선황 폐하께서 승하하신 이후 사 년, 그간의 기록들이 그대들의 죗값을 결정할 것이다.”
“폐, 폐하……!”
“파빌리엔. 반역에 가담한 자들의 명단을 확인하여 잡아들이도록.”
온갖 비명과 살려달라는 외침이 난무하는 가운데, 가벨론 공작을 포함하여 총 스물네 명의 귀족들이 끌려갔다. 또한 바로 황궁 기사들에게 수도에서 진을 치고 있는 가벨론 공작의 사병들을 전부 잡아내라 명하였고, 그렇게…… 국혼은 제대로 치르지도 못한 채 엉망으로 끝이 나고야 말았다.
이미 예상한 바였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