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보이지 않으니 불편한 건 그거다. 주변에 누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것.
그보다 설마 에쉬가 그 소문을 공개적으로 입에 담을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의 손이 내 허리를 감싸 안으며 이어지는 또 다른 이야기에 배 속이 후끈 달아올랐다.
“더군다나 내가 평생을 살아오며 품어본 여자는 마르엘 백작 영애가 유일한데. 이 여자 저 여자를 품었다는 소문의 나는 대체 누구일까?”
국혼 전부터 과거가 전부 드러나게 되는 건가. 결혼할 사이라지만, 너무 공개적인 자리여서 얼굴이 잘 익은 토마토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에쉬는 개의치 않고 내 머리에 뺨을 비비며 모두가 보는 앞에서 애정행각을 끊임없이 퍼부었다.
“한 번 더 말하지만, 나는 가벨론 공작저의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으며 공작 영애를 따로 만난 적도 없다. 그러니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는 내 아이가 될 수 없지. 그럼에도 그 아이가 황족이라 우길 수 있겠나, 공작?”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폐하! 그렇다는 것은 저의 딸이 폐하가 아닌 다른 사내와 정을 나누었고, 배 속에 든 그 아이가 폐하의 아이라 거짓말을 하고 있다 여기시는 것입니까?!”
“착각할 수도 있지. 내가 아니라 나를 닮은 누군가를 잘못 만났을지도.”
“폐하!”
“그 전에, 묻고 싶은 것이 있소. 듣자 하니…… 공작께서 황좌를 노리고 있다 하던데……?”
그렇지 않아도 쥐죽은 듯 고요한 연회장이 이번에는 찬바람이 쌩쌩 불 정도로 냉랭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이 자리에서 반역에 대한 이야기까지 거론할 줄은 몰랐다.
에쉬의 성격상 만반의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저런 도발은 하지 않을 텐데. 설마 공작의 측근이라는 자가 공개적으로 자백을 하겠다고 했을까? 반역을 꾸미는 이들의 명단을 넘겼다 했지만, 공작은 만약을 대비해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었을 것이다. 또한 분명 공작이 반역을 위해 몰래 준비시킨 사병들은 오늘 밤 수도에 도착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머릿속이 정신없이 바쁘게 돌아갔다. 상황을 전혀 모르니까 그저 얌전히 대화에 집중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연회장을 뒤덮은 천년설의 공기를 살짝 밀어낸 건 가벨론 공작의 어이없다는 웃음소리였다.
“그 말씀은, 소인이 반역이라도 꾸미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대체 어디서 그런 헛소문을 듣고, 설마 저를 의심하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저희 가벨론 공작가는 제국 건국 초기부터 폐하를 모셔왔습니다. 그걸 잊으신 것입니까?!”
오히려 더욱 역정을 내며 따지기까지. 누가 들으면 진짜 애먼 사람 잡는 줄 오해하겠다. 증거도 있다는데, 어쩜 저렇게 뻔뻔할 수 있는 걸까?
“대체 누가 폐하께 저에 대한 모함을 하는 것입니까?! 저를 모욕하는 건, 황태후 폐하를 욕보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모르시는 건 아니시겠지요?”
“그 황태후 폐하께서 내 소중한 여자의 눈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하던데.”
에쉬가 왜 이런 거짓말을 하는지 대충 이해는 갔다. 나름의 복수겠지. 가벨론 공작 측에서 에쉬에 대한 터무니없는 소문을 흘렸던 것처럼, 똑같이 어떤 기분이지 느껴보라고 겁주는 것 같았다.
반역은 사실이겠지만.
“누굽니까. 그런 어처구니없는 소문을 흘리는 자가, 폐하께 그런 천인공노할 거짓을 고한 자가 대체 누구냐 말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해야 하는데, 아무래도 가벨론 공작은 다혈질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듯했다. 권력자에겐 득보다 실이 될 성향인데. 그는 가주로서의 재질을 타고나진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저렇게 나올수록 더 자신의 목이 조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 건지.
“나 역시 묻고 싶소. 정말 듣기도 민망하고 가관인 나에 대한 여성 편력 소문은 대체 누가 흘렸을까? 아,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황제궁에 몰래 잠입한 간 큰 놈을 하나 데리고 있는데 말이지.”
그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단상 옆쪽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열리면서 누군가 질질 끌려 들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등장하는 누군가를 보고 여기저기에서 숨을 헉 들이켰다. 사람들이 잔뜩 긴장한 게 느껴졌다.
그리고 바로 발치의 계단에서 풀썩 주저앉는 소리와 함께 비릿한 피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귀족들의 반응이 왜 그랬는지 조금은 이해가 된다. 아마 그 붙잡혔다던 첩자는 내 상상 이상으로 엉망인 모습일 것이다.
지난번 에쉬가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죽지 않을 정도로만 손봐준다고 했던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어서 괜히 등골이 오싹해졌다.
“꽤 오래 버티긴 했으나, 결국 입을 열었는데…… 가벨론 공작 그대가 나를 염탐하라 시켰다 하더군.”
“그런……! 그건 거짓입니다, 폐하! 누군가의 사주를 받아 그리 거짓을 고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가? 그럼 이자에게 다시 묻겠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거짓 없는 솔직한 증언을 해 보도록.”
새로 즉위한 황제가 피에 굶주린 미치광이라더니, 왜 그런 말이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피를 잔뜩 흘린 이가 숨쉬기도 힘들다는 듯 끙끙 앓고 있는데, 에쉬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명령했다.
황제로서 당연한 태도이지만, 그가 얼마나 인간적인 사람인지 알기 때문에 이런 상황은 조금 낯설기만 하다. 그가 황제의 자리를 욕심내지 않았던 이유도 바로 이 괴리감 때문은 아니었을까?
“폐하의 명이다, 론.”
파빌리엔이 근처에 있는지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론이라면, 지금 내 앞에 피투성이로 있을 그의 이름인 걸까? 첩자를 부르는 목소리치고 굉장히 다정하게 느껴진다. 마치 아는 사람인 것처럼 안타까움도 내포되어있었다.
“여기서 증언을 하면 너는 물론이고 병상에 누워있는 네 여동생의 치료도 황실에서 책임지고 진행해 주겠다고 약속했었지. 선택은 너의 몫이지만, 네가 협조해주지 않는다면 시온의 목숨도 보장할 수 없어.”
뭘까? 정말 아는 사람인 걸까? 아니고서야 적인 상대를 저리 친근하게 대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데.
“……증언, 하겠습니다. 하늘에 맹세코, 사실만을 증언할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말하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내가 황궁에 몰래 입궁하던 그날에 붙잡혀 심문받았을 터. 거의 열흘 정도 감옥 생활을 했을 테니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저는…… 아픈 여동생의 치료를 위해, 시온 도련님께서 몸담고 계시는 가벨론 공작 전하의 명령을 받아…….”
“감히! 그 무슨 가당치도 않은 소리냐! 폐하, 더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저자는 지금 저를 모함하기 위해 얄팍한 거짓말로 폐하를 농락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증언이 끝나지 않았소, 공작.”
가벨론 공작이 언성을 높이자, 에쉬는 그와 대조되게 당장 씹어 삼킬 듯 음산하게 읊조렸다. 그리고 이어진 침묵 속에서 증언하는 남자가 마른 침을 삼키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긴장이 흠씬 묻어 있었다.
“작년, 그러니까 넷째 황자께서 황위를 지키고 있을 때에 가벨론 공작 전하께서 은밀히 사병을 키웠고, 넷째 황자 전하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 사병을 통솔하는 단장이었습니다.”
“내 아우를 암살하여 그 자리를 찬탈할 계획을 꾸미고 있었던 것인가?”
“그렇습니다.”
“폐하!!”
챙!
가벨론 공작의 분노 어린 외침과 함께 날카로운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건 검집에서 칼날을 꺼내 드는 소리였다.
“공작. 아직, 그대의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음을 정녕 모르는가? 한 번만 더 방해한다면, 그대의 목이 멀쩡하게 붙어있지 못할 것이다.”
“…….”
“계속하도록.”
왜 유령이 내 시력을 되돌려놓지 않았는지 조금은 이해가 되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을 터. 그의 말대로 보지 않는 것이 내 정신건강에 이로운 상황이었다.
“셋째 황자 전하께서 즉위하신 이후, 가벨론 공작 전하의 다음 타깃이 변경되었을 뿐, 반역은 여전히 진행 중이었고 몇 번 암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마다 번번이 실패하였고, 폐하의 약점으로 지목된 이가 바로 마르엘 백작 영애셨습니다.”
갑자기 내 이름이 들려와 움찔 놀랐다. 가벨론 공작이 내 목숨을 노리고 있었을 줄이야.
설마…… 유령이 그걸 알고 왕국을 찾아왔던 것일까? 제 손으로 복수하기 위해서 나를 살려둔다 하였으니. 나를 죽이러 올 이들에게서 피하라는 뜻으로 그리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순수하게 도우려는 목적은 아니긴 하겠지만.
“하지만 마르엘 백작저로 보낸 이들이 영애는 이미 제국으로 몰래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때 황궁도 비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벨론 공작 전하의 명령을 받아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투입되었던 그날, 황궁 기사들에게 발각되어 붙잡혔던 것입니다.”
“그저 명령을 받았을 뿐이다?”
“아픈 동생을 살리기 위해서 당장 상상 이상의 금액이 필요하였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시온 도련님께서 금전을 지원해 주기로 하였고, 그 대가로 가벨론 공작 전하의 수하로 들어갔습니다.”
저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가족을 살리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하면 안 되는 일에 발을 담그게 된 것이다. 시온이라는 사람이 대체 누굴까? 아까 파빌리엔도 그 이름을 입에 담았었고, 도련님이라고 지칭하면 귀족일 텐데.
“하나만 더 묻겠다. 가벨론 공작이 사병을 키운 위치가 어디인가?”
“…….”
“이 대답 여부에 따라 너와의 약속을 지킬 수도, 지키지 못할 수도 있다. 네 입장에서 이 증언이 얼마나 위험천만한 일인지 잘 알고 있으니 앞으로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저 남자가 사병을 통솔하였다고 했으니 그 위치를 모를 리는 없을 것이다. 지금 에쉬는 이 자리에서 가벨론 공작은 물론이고 황태후까지 그 자리에서 끌어내리려 하고 있었다.
그 사병을 키우는 장소는 황태후가 황궁을 빠져나가 머물던 비밀 장소라고 하였으니까.
“그곳은…… 현재 비어 있을 것입니다.”
“무슨 의미지?”
남자는 떨리는 숨을 토해내며 굳은 결심을 한 듯 강한 의지를 담은 어조로 대답하였다.
“가벨론 공작 전하가 몰래 키운 그 사병들은 이미, 수도 곳곳에 밀집하여 명령하달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