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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06)화 (107/113)

106화

생각보다 목소리가 크게 나와서 연회장이 삽시간에 고요해졌다. 당연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 상황을 판별할 수는 없지만, 차라리 안 보이는 게 더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러 사람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건 상당히 불편해지는 일인지라.

“……이건 또 뭐람? 미친 여자가 황궁 연회장까지 어떻게 들어온 거야?”

“분수도 모르는 천한 것이 지금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호통을 쳐?! 이분이 뉘신 줄 모르느냐? 펠렙 후작가의 영애이시다!”

아직 제국의 귀족 가문을 전부 외운 건 아니었으나, 펠렙 후작가라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가벨론 공작의 여동생이 펠렙 후작 부인이라지.

그 펠렙 후작이 오랫동안 가벨론 공작과 한배를 탔다고 하였다. 게다가 공작의 여동생을 부인으로 맞이하였으니 더욱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펠렙 후작 영애가 에쉬에 대한 소문을 저리 잘 알고 떠들어대는 것일 테고.

그나저나 미친 여자라니. 단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귀족으로 보기에 어려움이 있기는 하겠지만, 어디에서도 이런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어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저들이 내 정체를 알고도 저런 망발을 지껄일 수 있을까?

“펠렙 후작 영애시라면 꽤나 대단하신 고위 귀족인 줄로 압니다만. 방금 그 언행은 상당히 무례하였고 법으로 따지자면 황족 모독죄로 처벌받을 수 있다는 걸 모르시진 않으시겠지요?”

“뭐, 뭐라? 무례한 건 영애가 아니라 너라는 것을 정녕 모르는 것이냐?! 당장 사과해! 무릎을 꿇고 빌어도 용서할까 말까 하는데 감히 영애를 욕보여?!”

내게 호통을 치는 다른 영애 덕분에 이제 연회장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홧김에 저지르긴 했는데, 그냥 조용히 해결할 수도 있었던 일을 너무 크게 만들었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듣고만 있기에는 너무 힘들었다. 에쉬를 모욕하는 것도 참기 어려웠으나 에쉬와 나의 관계를 부정이라 지껄이는 저 괴이하고 악랄한 소문이 더 싫었다.

해서 나는 두 눈을 꾹 감은 채로 주먹을 더욱 꽉 말아 쥐었다.

“사죄를 해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당신들 아닙니까? 귀족의 체면을 위해서라면 그 저렴하기 짝이 없는 가벼운 입으로 황제 폐하를 모욕해도 정당하다는 것이신지요?!”

“누가 황제 폐하를 모욕했다는 게야!”

“방금 두 분께서 떳떳하게 지껄인 그것이 비단 저만 들은 건 아니라 사료됩니다만…….”

짜악ㅡ

순간 뺨이 화끈거리면서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무언가에 가격당한 왼쪽 뺨이 욱신거렸다.

‘설마 나, 뺨을 맞은 거야?’

태어나 처음으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뺨을 맞다니. 내 어머니와 아버지께도 체벌을 받아본 적이 단 한 번도 없건만. 이런 저급한 손찌검을 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감히 어디서 정신 나간 망발을 지껄이는 게냐! 황제 폐하를 모욕하긴 누가 모욕했다고! 거짓을 논하여 귀족을 모욕한 네 더러운 혀를 끊어내 주마!”

“……상대가 천하면 이런 식으로 함부로 대하십니까? 귀족이면 아무나에게 위력을 행세해도 되냐는 말입니다!”

“아니, 그래도 이것이 그 입을 함부로 놀려?! 감히!”

그 여자가 또 내게 손찌검을 하려는 듯 격렬한 언사를 내비쳤다. 안 보여서 피할 수도 없고, 저 손이 어느 쪽으로 날아올지 전혀 예측할 수도 없어서 그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폐, 폐하?”

그러나 기다렸던 손은 감감무소식이었고, 무슨 상황인지는 모르겠으나 여자의 놀란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이어서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이 숨을 들이키며 분주하게 이동하는 소리도 들렸다.

동시에 저벅, 저벅, 묵직한 발소리가 내 앞에서 멈췄고, 뜨겁고 커다란 손이 방금 여자에게 맞은 왼쪽 뺨에 가볍게 얹어진다.

“괜찮습니까, 슈아?”

에쉬다. 불덩이처럼 뜨거운 체온을 담은 거친 손과 다정한 목소리. 너무도 익숙하여 절대 잊을 수 없는 이 감촉. 맞은 뺨이 욱신거리긴 했으나 통증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보이진 않아도 그가 내 앞에 있어서. 그간 만질 수도 없었던 그와 닿게 되어 그리움이란 감정이 파도처럼 밀려와 코끝이 찡하게 울렸다.

“에쉬…….”

“하여간 정말이지, 내 부인은 못 말리겠군요. 그러니 평민 분장은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제국의 귀족들은 아랫것들에게 예의가 부족하여 당신처럼 아껴주지 못한다고 분명히 주의를 주었건만.”

평민 분장?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잠시 혼란이 왔으나 이 또한 그가 계획한 내용 중 하나인가 보다 생각하여 일단 말을 맞춰보기로 했다.

“저는 제국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잖아요. 이 방법이 저들의 속내를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 여겼습니다. 물론, 그로 인해 듣지 말아야 할 거짓 소문과 이런 최악의 상황을 맞게 되었지만요.”

“나는 가슴이 아픕니다. 나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귀하디귀한 내 부인의 얼굴에 감히 손을 대고, 곧 황실의 안주인이 될 황후를 천하다 욕보이기까지 하다니. 얼마나 참담한지…… 당장 전부 도륙을 내버리고 싶어지는군요.”

에쉬의 분노가 험악한 목소리를 통해 아주 확실하게 전해지고 있었다. 아까 유령이 보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로울 것이라고 말했었는데. 설마 이 모든 걸 예견하고 말한 건가.

“일단 갑시다. 당신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가 아닙니다.”

조심스럽게 팔로 내 어깨를 감싸 안는 에쉬가 아주 부드럽게 에스코트를 해주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아주 다정해졌으나 주변은 그 누구의 숨소리도 들리지 않을 만큼 긴장감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보다 방금 내 뺨을 때린 그 영애의 얼굴을 보고 싶은데.

“데이런 백작 영애입니다. 당신에게 무례한 언사와 행동을 보인 그 여자.”

“……얼굴을 보지 못해 유감이네요.”

“보지 않는 편이 더 나을 수도 있습니다. 아마, 오늘 기점으로 다시는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

작은 웃음소리와 섞인 나직한 목소리에 살벌함이 깃들어있어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일었다. 내가 없는 사이 무언가 확신한 것이 있다는 듯, 그의 태도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저 말인즉, 내게 손찌검을 한 저 여자도 가벨론 공작의 파벌이고 오늘 가벨론 공작과 내통한 이들을 전부 벌하겠다는 뜻이겠지. 유령이 에쉬에게 이번 반역에 가담한 자들의 명단을 건네주었다고 했으니까.

게다가 지금 아무래도 나를 데리고 가는 곳이 방금 그가 서 있던 자리 같아서. 단장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공식적인 자리에 서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폐하. 그 여자는 대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에쉬의 인도로 걷는 것에 집중하는 사이, 가벨론 공작의 당황한 목소리가 귓가에 스쳤다. 마치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것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기겁을 한 것 같기도 하였다.

내가 황궁에 없던 며칠 사이, 혹 공식적인 내 신변에 무슨 문제라도 있었던 것일까?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 목소리에서 감정이 느껴지고 있어서 그런 의구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에쉬는 그에 대한 대답을 바로 하지 않았고, 몇 걸음 나아간 후 내게 상냥한 목소리로 알려주었다.

“앞에 계단이 있습니다. 지난번 보았던 연회장의 그 단상 기억하지요? 계단이 세 개 있으니 조심히 하나씩 오르면 됩니다.”

“네.”

오로지 그에게만 의지하여 계단을 하나씩 천천히 올랐다. 그런데 이 단상, 황제만 설 수 있는 황좌가 놓인 장소 아닌가.

아직 국혼이 완전히 끝난 건 아닌 거로 아는데.

그는 여전히 나를 한 팔로 감싸 안은 채로 내 손까지 꼭 잡아 쥐었다. 그리고 아주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뱉어내며 고압적인 목소리로 살벌한 분위기를 풍겨냈다.

“지금, 연회장 입구를 전부 봉쇄하겠다. 파빌리엔, 시작해.”

“예, 폐하.”

파빌리엔도 있었던 건가? 꽤 오래 보지 못했고 소식도 듣지 못하여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었는데. 그가 무사해서 다행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곧 쿵, 소리와 함께 연회장 곳곳에 위치한 입구들이 전부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언가 큰 사달이 벌어지겠다는 느낌은 있었다. 설마 이 자리에서 반역의 무리를 처단할 생각인 것일까?

“가벨론 공작. 그대가 내게 물었지. 이 여자가 누구냐고.”

“……제 눈에는 비엔트 왕국의, 마르엘 백작 영애로 보입니다. 폐하와, 국혼을 치르기로 한…….”

“맞소. 과거 황자 시절에 내가 누군가의 사주로 인해 암살자들과 싸워 크게 다쳤었지. 스스로도 살 가망이 없다 여길 정도로 위태로울 때, 내 목숨을 살려낸 영애이자 내가 처음으로 반한 상대다.”

그 말을 하면서 내 손을 더욱 꼭 잡아 쥐어 심장이 발작하듯 크게 뛰었다. 그러더니 맞잡던 손을 풀어내고 팔뚝을 쓸어 올라오더니 커다란 손바닥으로 내 눈두덩을 덮는다.

“사랑하는 이를 얻기 위해, 또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올랐고, 평생 배우자로 낙점하여 이 자리에 세우려 하였으나…… 또 누군가의 계략으로 인해 내 여자가 시력을 잃게 되었다. 해서 나는 감히 예비 황후가 될 귀한 몸을 해치려 한 자를, 오늘 이 자리에서 꼭 그 죗값을 치르도록 만들 생각이다.”

이게 다 무슨 소리인가 싶다. 내 시력을 앗아간 이는 유령인데, 에쉬도 그것을 알고 있건만 누굴 어떻게 잡아낼 생각이라는 건지. 설마 그 유령의 존재에 대해서 공개할 생각일까?

“가벨론 공작.”

다시 내 눈두덩에서 손을 떼어 둥근 어깨를 감싸 쥐었다. 해서 나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은 평온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노력하며 최대한 청각을 곤두세웠다.

“예, 폐하…….”

“제국 수도에 퍼진 내 소문, 내 입으로 나열을 해야 할까, 아니면 그대가 떠들어볼 텐가?”

“…….”

“내가 밤마다 이 여자 저 여자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던데. 그중 하나가 가벨론 공작 영애이고, 왕국의 백작 영애를 황후의 자리에 세우려는 의도는 내가 어떤 정부를 들여도 쉽게 항의하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라고 하던가? 그 누구처럼 말이지.”

그 누구라는 건 황태후를 겨냥하는 말일 터. 설마 이 자리에 황태후가 참석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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