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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05)화 (106/113)

105화

“유모, 일단 조금만 더 서둘러줘.”

“네, 아가씨.”

오랜만에 만난 유모와의 재회를 만끽할 시간도 없었다. 빠르게 머리부터 감고 며칠간 제대로 씻지 못해 찝찝했던 몸을 씻어내니 조금은 숨이 쉬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동안 젖은 수건으로 직접 몸을 닦긴 했지만, 물로 씻어내는 것만큼 상쾌하진 않았으니까.

“그런데 어쩌다가 눈이 그리되신 겁니까? 앞을 보지 못하는 상태라고 하여 어찌나 놀랐는지. 영구적인 것은 아니라고 하셨지만,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건지요?”

“나도 모르겠어. 설명하기가 좀 어려워.”

“국혼이 진행되면서부터 아가씨에게 별의별 일들이 다 생기네요. 갑자기 아가씨가 사라진 뒤로 백작께서 소수의 인원만 두고 나머지는 전부 본가로 돌려보냈거든요. 아가씨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수도도 몇 번 발칵 뒤집혔답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딱 한 번 아버지께 편지를 받았던 이후로는 별다른 이야기를 듣지 못했는데. 나에 관련된 일이라고 하니까 더욱 궁금해졌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빠르기로 나를 씻겨주는 유모가 짧고 간단하게 설명을 해주었다.

“아가씨께서 제국으로 떠났다는 건 백작저에서도 극소수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교계에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초대장에 대한 답신이 전혀 없으니 아가씨께서 다른 남자와 사랑의 도피를 하였다는 둥, 국혼을 거부하여 목숨을 잃었다는 둥,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말도 있었고요. 

“내가 없는 사이에 별 헛소문이 다 돌았나 보네.”

“근자에는 아가씨가 유령이 되어 억울하다는 듯 흐느끼며 왕국을 배회한다는 걸 본 사람도 있다고 하더랍니다.”

버젓이 살아있는데 유령 취급까지 받게 되니 조금 불쾌해졌다.

“대체 왜 그런 소문까지 돌았을까?”

“아가씨께서 사라진 이후, 왕국 수도에 황제 폐하께 이미 연인이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거든요.”

그 소문이 벌써 왕국에도 퍼졌을 줄이야. 역시 안 좋은 소문은 아주 빠르게 잘 퍼지는구나 싶다. 더군다나 제국의 황제에 대한 소문이니 씹어 먹기 딱 좋은 이야깃거리겠지.

“그래서 나에 대한 그런 소문이 퍼진 거였구나. 그럴싸하네. 그렇지 않아도 내가 국혼에 대해 굉장히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도 다들 알고 있을 테니까.”

“그런데 정말, 폐하께 연인이 있는 겁니까? 저는 아가씨의 생각을 도통 모르겠습니다. 밖의 저분과 너무도 잘 어울리는 한 쌍이셨는데…….”

대체 이 유모가 지금 무슨 끔찍한 소리를 하나 싶다가 아직 유모는 에쉬가 황제인 것을 모르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니 밖에 있는 저 유령이 에쉬라고 생각했을 터. 둘이 워낙 똑같이 닮기는 했으니까.

이걸 어떻게 설명한담?

“더 늦으면 곤란해. 어서 나와.”

유모에게 말을 해줄까 말까 고민하던 찰나, 뒤쪽에서 들려오는 유령의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설마 또 안으로 들어온 건 아닐 테지?!

그러나 유모는 별다른 대꾸 없이 한숨을 푹푹 내쉬며 최대한 빠르게 목욕을 마무리 지었다. 드래곤의 레어가 있는 동굴에는 사람이 살 수 있을 법한 침실과 욕실과 목욕용품이 구비되어 있다는 사실에 신기해하면서.

어디선가 가져온 새 속옷과 받쳐 입는 옷가지를 걸치고 나서 밖으로 나가, 낯선 드레스를 입혀주었다. 그리고 머리를 단장해주는 대신 대충 빗어 말려주기만 하였는데, 이유는 옆에 있는 유령이 계속해서 재촉했기 때문이다.

“다 되었습니다.”

“그럼 유모는 다시 데려다주고 올게.”

“어? 자, 잠깐요! 아직 인사도……!”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만남인데, 앞으로는 유모를 다시 볼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서운해서 어쩌냐고 한마디 하려 했으나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대체 얼마나 급하길래? 유령이 저만큼 다급하게 일을 처리하려는 건 처음 본다.

곧 다시 나타난 유령이 또 내 손목을 덥석 잡자 미간이 절로 좁혀졌다.

“그렇게 막 손대지 말라니까?! 기척이라도 내던가! 놀랐잖아요!”

“국혼 행렬이 황궁에 도착했고, 네 대역이 곧 황궁에 들어올 텐데? 이미 수도에 입성하여 황궁에 거의 다다랐거든.”

“……어서 가시죠. 급하니까.”

그렇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해서 마음이 급해졌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지만, 이미 전부 틀어진 계획이었으나 일단 부딪쳐봐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건 지금껏 스무 해가 넘도록 살아온 나만의 고착된 신념을 완전히 깨부수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곧 거친 바람이 나를 집어삼키듯 불어왔고, 그 바람이 잠잠해질 때쯤에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동시에 누군가의 거친 목소리가 실내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소중하고 귀한 제 딸아이의 하나뿐인 아비로서, 그리고 이 제국의 앞날을 걱정하는 백성으로서 더는 폐하의 지나친 독재를 두고 볼 수만은 없습니다!”

저건 가벨론 공작의 목소리인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당최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저기, 제 눈 좀 어떻게 해주면 안 되나요?”

“안 보는 게 정신 건강에 좋아.”

하여간 순 제멋대로……!

들리는 상황으로 미루어보아 가벨론 공작이 에쉬를 겁박하듯 훈계를 하는 모양이다. 결혼식 도중인 건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지금 그대가 내게 하고자 하는 말이, 이 결혼식을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가?”

“황손을 잉태한 저의 딸이, 그저 폐하의 정부로 남게 되는 지금의 이 상황이 도무지 납득이 되질 않습니다. 폐하의 어머니였던 선황 폐하의 정부가 어떠한 인생을 살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는지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알지. 내 어머니를 살해한 그 범인 누구인지, 죽기 전에 꼭 밝혀내어 엄벌에 처할 생각이다.”

에쉬의 어머니가 살해당했던 거였어?

그러고 보니 그에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도 묻지도 않았었다. 설마 살해를 당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올해로 어머니의 기일이 십사 년이라고만 들었지.

왠지 그의 어머니를 해친 이가 황태후일 것만 같다. 이미 한번 아이를 사산시키기 위해 독을 먹였던 전적도 있고, 그 독으로 자칫 죽임을 당했을지도 모를 일.

그렇다면 아이와 함께 죽일 생각으로 독을 마시게 했던 것이 아닐까? 그런데 죽지 않고 살게 되어 다시금 기회를 엿보았을 수도 있을 터였다.

아마도 에쉬가 나를 혼자 두지 못해 전전긍긍하던 그 마음이 그때의 충격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저릿하였다. 갑작스러운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상처가 아직도 내 심장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욱신거리는 가슴에 손을 얹은 채로, 의기양양하게 외치는 가벨론 공작의 이어진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안타까운 일을 소인 또한 또렷이 기억하고 있사옵니다. 하여 그 일이 재발이 될까 두렵습니다. 그것이 저의 귀한 딸의 미래가 될까 저어되옵니다. 그저 피눈물을 삼키며 홀로 외로워하다가 질투에 눈이 먼 누군가의 저주로 허망한 목숨을 잃을까 봐 두렵사옵니다.”

“왜 하필 지금일까? 그간 국혼에 대한 준비를 하면서 침묵을 고수하더니?”

“제가 반대한다고 하여 폐하께서 절대 꺾지 않으셨을 것이고, 그것이 황손을 잉태한 제 딸아이에게 화가 미칠까 두려웠습니다.”

대체 저 거짓말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저러는 걸까? 과거 선황께서 친자 검사를 했었다는 걸 잊은 건 아닐 텐데. 어차피 오늘 당장 거사를 치러 반역에 성공한다면 아직 아이는 태어나지 않았으니 상관없다 이건가.

입술이 바짝 마르면서 조마조마하다. 설마 가벨론 공작이 식장에 난입하여 저런 행태를 부릴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지난번 연회 때처럼 자신이 망신당했던 만큼 당해보라는 식으로 저러는 걸 수도 있지만.

그때, 실내를 가득 메우는 에쉬의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참, 재미있군. 나도 모르는 내 아이가 있다니. 정말 내 아이가 확실한가?”

“폐하께서 간혹 제 딸아이를 몰래 만나셨다는 것을 압니다. 이 녀석이 하도 비밀로 해달라고 당부하여 아비로서 못 본 척하기는 하였지만, 이런 상황에서 도저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거참 희한한 노릇이오. 나는 태어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가벨론 공작저를 찾아간 적이 없는데 말이지. 또한 따로 만난 적도, 말 한번 제대로 섞어보지도 못한 영애가 내 아이를 가졌다니…… 임신이라는 것이 이처럼 공개적인 장소에서 눈 몇 번 마주쳤다 하여 가능한 일이었나?”

“그야 아이가 태어난 후 친자 검사를 해보면 알게 될 일, 적어도 그때까지는 국혼을 연기해주시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국혼을 방해하는 건 그저 눈속임일 뿐. 그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기에 더 불안해진다. 게다가 주변에 있는 귀족들의 수군거리는 목소리가 나를 상당히 불편하게 만들었다. 

“뭐야? 공작 영애가 정말 황족의 씨를 밴 걸까요?”

“워낙 황제 폐하께서 다양한 여자를 섭렵하셨다잖아요. 평민이든 귀족이든 가릴 것 없이 그저 성욕을 푸는 도구로만 여긴다고 했으니까. 며칠 전에는 황궁 집무실에 여자를 끌어들였다던데요?”

“황족들은 원래 다 그런가 봐요. 엮이는 것도 싫지만 실망스럽네요. 이번 황제 폐하께서는 즉위하자마자 귀족들을 배척하여 적도 많다던데.”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과거 그 친자 확인도 조작이었대요. 이미 제국은 황족이라는 게 무의미해졌을지도 모르죠.”

“그게 정말이에요?!”

소문은 단지 소문일 뿐이라지만, 그 소문을 사실로 믿어버리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감히 황족을 능멸하고 확실하지도 않은 소문을 퍼트리는 이들은 이번 반역에 가담한 자들이겠지.

“아, 그러고 보니 전에 어떤 평민 여자와 몰래 외유를 나가 숲속 호숫가에서 남부끄러운 짓을 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직접 본 사람이 있다더라고요.”

“어머, 야외에서요?”

“네. 달밤에 버젓이 의복까지 전부 벗고 호수에 들어가 난잡한 행위를 하더래요. 아무래도 지금 황제 폐하의 성적 취향이 좀, 유별난가 봐요.”

숲속 호숫가면 지난번 에쉬와 제국으로 올 때의 일인 것 같다. 그때 카시안이 엿보는 이가 있다 했었는데, 그마저도 에쉬에 대한 좋지 못한 이야기로 와전되는 것을 두 귀로 똑똑히 듣게 되니 순간 분노가 치밀었다.

이대로 그저 보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 나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큰 소리로 사납게 외쳤다.

“황족을 우롱하고 저급한 소문에 빗대어 농락하다니. 제국의 귀족들은 도의라는 것도 없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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