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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03)화 (104/113)

103화

순간적으로 내가 들었던 두 사람의 상황과 비슷하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에쉬의 어머니와 황태후.

오래전 황태후가 황후였던 시절, 에쉬의 어머니가 첫아이를 임신하였을 때 그녀에게 아이를 사산하는 약을 먹였다고 했었다. 그때의 충격이 뇌리에 깊게 남아 있어서 그런지 지금 들려오는 두 여자의 대화가 마치 그 상황 같았다.

황족의 아이를 가진 여자, 어떻게든 자신의 위치를 공고하게 지키기 위해 태아를 없애려는 황후.

왜 갑자기 이런 사실적인 대화가 내 귀에 들려오는 걸까?

[착각하지 마라, 루시. 네가 아무리 그렇게 날뛰어도, 감히 탐낸다고 하여 가질 수 있는 자리가 아니다.]

[저는 폐하의 자리를 탐낸 적이 없습니다.]

[아니, 내 자리가 아니라 너의 그 더러운 배 속에 있는 그 존재가 고귀한 나의 황태자를 위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는 뜻이지.]

[……언제까지 모두를 속이고 황제 폐하를 기만하실 겁니까?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습니다. 이제라도 모든 사실을 밝히시어 그 죄를 조금이라도 덜어놓으세요.]

[완전한 비밀이 없다……? 너만 죽으면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폐하……?]

심각한 대화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누군가 내 손을 덥석 잡는 바람에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하지만 비명이 나오기도 전에 누군가의 손바닥이 내 입을 꾹 눌러 막았다.

“그만 일어나지? 그 이상 듣게 되면 정신이 온전치 못할 수도 있어.”

이어서 들려오는 에쉬의 목소리에 두 눈을 번쩍 떴으나 여전히 시야는 새까매서 내가 눈을 뜬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그러나 내 입과 손을 붙잡은 온도가 상당히 낮은 것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유령이 나를 꿈에서 깨어나게 한 걸까? 그런데 어떻게 알았지? 저번에 그 꿈에서 건질 수 있는 건 카시안 뿐이라고 했는데.

“진정이 좀 되었나?”

서늘한 손이 내게서 떨어졌고, 나는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도 벌떡 일어나 이불을 끌어다가 안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물론 스스로만 노려보았다고 느꼈겠지만.

“꿈보다 당신 때문에 더 놀랐거든요?! 자꾸 나한테 손댈 겁니까?!”

“그 꿈에서 깨려면 접촉이 필요하거든. 뭐야, 지금 나한테 앙탈 부리는 거야?”

자기 좋을 대로만 생각하는 건 여전하다. 이렇게 제멋대로인 상대는 처음 보는 것 같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나타난 겁니까? 나한테 또 무슨 짓을 하려고?”

“자꾸 나를 악당 취급하는데, 지금 나는 너희를 도와주고 있는 거거든? 물론 약간의 복수도 가미되어 있기는 하지만.”

“그걸 지금 나더러 믿으라는 거예요?”

“믿든 안 믿든 그건 네 자유고. 사실 나는 황궁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범인이 누구인지 알거든. 그래서 그걸 알려주려고 왔는데…… 네가 잠꼬대로 어머니를 부르길래 내 옛날 추억이 떠올라 잠깐 들려준 것뿐이야.”

내가 잠꼬대를 했어? 그것도 어머니를 불렀다니.

그보다, 그럼 그 검은 그림자의 악몽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저 유령도 가능하다는 걸까? 조금 더 자세하게 말해달라고 하고 싶지만, 지난번처럼 또 나를 기절시켜 놓을까 봐 걱정이 되어서 아무 말도 못 하겠다.

갑자기 멀쩡하다가 속수무책으로 당해버렸던 그 기억이 딱히 좋지만은 않았기 때문에.

“안 궁금해? 어떻게 된 건지?”

내가 당연히 물어볼 줄 알았는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나에게 그가 의아하게 되물었다. 뻔뻔한 유령 같으니라고.

“궁금하다 그러면 또 알려주는 척하고 나를 잠재울 거잖아요.”

“에이, 내가 바보도 아니고 한번 써먹었던 걸 왜 또 써먹겠어? 그건 머저리나 하는 짓이고. 그땐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다니까 그러네.”

“……지금 나한테 짜증 부리는 거예요?”

“그 사망했다던 황태후궁의 시종, 그자가 너를 염탐하고 있었어. 그건 너를 그 위험한 곳에서 데리고 나오기 위한 방책이었을 뿐이었고. 좋게 설명했어도 내 말을 믿었을까?”

사망한 그 시종이 나를 염탐하고 있었다고? 설마 했었는데 정말 내 생각이 맞았던 걸까?

“어, 어떻게 알았어요? 그걸?”

“그야 가벨론 공작가에서 황궁에 심어둔 간자 중 한 명이니까.”

저 말을 어디까지 믿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다. 하지만 에쉬가 해준 말에 의하면 가벨론 공작 측에서도 저 유령을 그저 이용하기 위해 협력하기로 했던 것뿐이고, 실상 완전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진 않았다고 했으니. 정말 유령이 우리를 도와줄 생각이 있었다면 내부사정을 몰래 파악했을 것이다.

에쉬가 항상 그랬었지. 자신의 형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자기를 해치지 않는다고. 홧김에 복수하겠다는 말을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하면 안 된다면서.

“그래서요? 설마 그 시종, 당신이 죽인 거예요?”

“개인적인 신념 같은 게 있어. 살생은 금물. 그 여자와 똑같은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거든.”

“그 여자?”

“황후. 지금의 황태후. 나는 물론이고 내 동생과 내 어머니까지 죽이려던 그 여자 말이다.”

유령에게 무슨 신념인가 싶다가도 그는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피해자였음을 깨달았다.

“그럼 내가 방금 꿈에서 들었던 그 대화가…….”

“내가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 들었던 거지. 과거 황실에 인외종족을 황후로 들인 적이 있었거든. 그래서 어쩌다 보니 평범치 않게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별의별 이야기를 다 듣게 되었고.”

마법을 이용해 자신의 어머니가 마신 독을 흡수하여 본인은 죽고 두 사람을 살렸다고 했었다. 그 인외종족의 특별한 피 때문일까? 그 끔찍한 기억을 안고서도 살생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도 어떻게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그럼 그 시종은 누가 해친 건가요?”

“네가 정확하게 파악했던데? 가벨론 공작의 측근이자 배신하여 내 동생에게 협력하기로 했던 그 아이. 더 재미있는 것은 그 녀석이 황태후궁에 직접 그 시종을 보냈고, 시종에게서 너에 대한 정황을 얻자마자 가차 없이 그의 목을 찔러버리더군.”

정말 이 남자는 모르는 게 없구나. 그는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쉽게 발설하지 않고 혼자만 이 상황을 즐기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하여간 악질은 악질이네. 한번 구축된 성향은 절대 바뀌는 법이 없다더니.

“그런 일을 저지르면 의심을 받을 수도 있을 텐데. 참 대단하네요.”

“가벨론 공작이 생각보다 더 믿고 의지하는 측근이던데? 거의 혈육이나 다름없이 아끼더군. 오랜만에 꽤 쓸만한 녀석을 봐서 흥미롭기도 했고.”

“그런데 왜 내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거예요? 나는 당연히 이 이야기를 에쉬에게 전해줄 텐데요.”

“바쁘다는 핑계로 나를 버린 못된 동생에게 직접적인 도움을 주는 건 사양이거든. 그리고 어차피 그 녀석을 만났으니 이미 알고 있을 거고.”

그래도 조금 안도가 되었다. 황궁에서 나와 에쉬를 해치려는 이가 따로 있을 줄 알고 걱정했는데. 가벨론 공작도 자신의 울타리 안에 그런 큰 복병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건 아주 큰 행운일지도 모른다.

“좋은 소식을 알려주어 고마워요. 덕분에 조금은 마음 편히 기다릴 수 있겠네요.”

“…….”

그런데 대답이 들려오질 않았다. 대답을 바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콧방귀를 뀌면서 뭘 이 정도쯤이야, 라고 응수할 줄 알았는데.

그새 실체화가 풀린 걸까?

“설마 해서 말하지만 유령으로 내 주위에 머물러 나를 감시하진 말아요. 특히 의복을 갈아입을 때나 목욕할 때 훔쳐보면 그거 범죄예요.”

경고해도 무시할 것 같지만 지난번에 욕실에서 홀딱 벗고 있을 때 나타나기도 했었기 때문에 그때만 생각하면 아직도 아찔하다.

다시 자려고 누우려던 찰나, 침대 가장자리에서 풀썩 앉는 소리와 함께 침대가 꿀렁거려 깜짝 놀랐다. 사라진 줄 알았더니 아닌 건가?

“여태까지 살면서 고맙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 같네. 기분이 조금 이상했어.”

“……왜 이상해요?”

“설명하기 어렵지만,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야.”

몸이 무거워진 느낌이라. 보통 인간은 칭찬을 받는 만큼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는다고 느낀다. 인정을 받아야 자신감이 생기면서 그 틀 안에 소속감이 생기기 마련이고.

아마 유령에겐 그럴 기회가 전혀 없었겠지. 유령을 볼 줄 아는 이들은 놀라거나 피하기 급급했을 것이고, 에쉬 역시 자신의 형에게 잘했다 칭찬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며, 그의 어머니는 그를 보지 못했을 테니까.

대충 어떤 감정을 표현하고 싶은지 이해가 되었다. 덕분에 조금 복잡한 감정이 샘솟는 것 같았다. 십수 년을 살아오면서 그 누구에게도 좋은 말을 듣지 못했으니 저만큼 삐뚤어지게 큰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고.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지자 저 제멋대로인 성격도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오해는 하지 말아요. 미리 전해준 건 고맙지만 그렇다고 당신이 나를 마력으로 잠재워서 납치하고 시력을 빼앗은 것도 모자라 에쉬와 닿지도 못하게 마력까지 걸어놓은 건 절대 고마운 일이 될 수 없으니까요.”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은 정확하게 선을 그어놓고 칭찬할 건 칭찬하고 혼낼 건 혼내는 것이 내 어머니의 훈육방식이었다. 타고난 성향이라는 것도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인간은 교육에 의해 성장하는 법이니까.

물론 저 유령은 이미 늦은 것 같기는 하지만.

그가 있건 없건 신경 쓰지 않고 다시 편하게 누워서 잠을 청하였다. 그리고 그날, 오랜만에 어머니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나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있었고, 그런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주시며 환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의 얼굴이 아주 선명하게 보여서 순간 울컥하기도 하였다.

며칠을 보이지 않은 채로 살다 보니 그나마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혼자 다니는 건 여전히 불가능하지만 침대 근처에 어떤 장애물이 있는지는 파악이 되어서 그 주변을 돌아다니는 건 가능해졌다.

“보이지 않는 것에 이만큼 적응하다니. 놀랍군요, 슈아.”

내가 벽을 손으로 짚으며 창가를 따라 걷기에 집중하고 있을 때 나를 찾아온 에쉬가 감격에 찬 목소리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해서 나는 수줍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라도 씹어 먹어야지요. 최악의 상황이 닥쳤다고 포기할 내가 아니거든요.”

“확실히, 당신에게 반한 이유가 명확해지는군요. 당신이 아니면 그 누구와도 국혼을 치르지 않았을 겁니다.” 

“마찬가지예요. 그보다, 왕국에서 출발한 국혼 행렬이 내일 제국에 입성한다고 했지요?”

“그렇습니다. 또한 가벨론 공작이 꾸미고 있는 반역의 무리들도 내일 밤, 몰래 수도에서 모이는 것으로 확정 지었다고 하더군요.”

드디어 그날이 도래한 것이다. 황태후와 가벨론 공작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릴 그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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