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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01)화 (102/113)

101화

그 배꼽시계 소리에 놀랐는지 백작 부인이 설핏 웃음을 흘려서 얼굴이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애써 참으려고 했으나 터지는 웃음까지 막을 수는 없어 보였다.

“어제 오후부터 계속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어서 드세요. 옆에 음료도 있으니 조심히.”

거의 잠만 잤어도 배는 고프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다. 에쉬와 있을 때는 배고픈 것도 잘 몰랐는데.

나는 손 감각에 의지해 한입 크기의 빵과 과일을 갈아 만든 음료를 위장에 천천히 집어넣었다. 음식물이 목구멍을 타고 들어가는 도중에도 꼬르륵 소리가 들려와 정말 얼굴을 들 수가 없을 정도다.

“오늘 동이 트자마자 폐하께서 직접 백작저에 방문하셔서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저의 그이는 아직 궁에서 퇴청조차 하지 못한지 벌써 사흘이 넘었는데, 소식도 없이 갑자기 들이닥치셔서는 저를 찾으시기에 제가 무슨 큰 잘못이라도 저질렀나 싶어 가슴을 졸였었지요.”

입 안에 빵을 한가득 밀어 넣어 오물오물 씹고 있을 때 백작 부인의 이야기를 듣게 되어 대답도 못 하고 안절부절못했다. 그러자 백작 부인이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바로 말을 이었다.

“괜찮습니다. 일단 드시면서 들어주세요. 영애께 하소연이나 좀 해볼까 하여 제멋대로 흘리는 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소연이라. 나더러 에쉬가 얼마나 민폐를 끼쳤는지 뒷담화라도 할 생각인 건가? 아니면 남편 좀 집으로 보내달라고 에쉬에게 부탁이라도 전해달라고?

“주인 없는 백작저에 찾아오신 것도 모자라 주변인까지 다 물려달라는 말에, 남편이 용서받지 못할 죄라도 저지른 건지 아니면 또 위험한 업무를 맡아 처리하다가 변이라도 당한 건지. 정말 별의별 생각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더랍니다. 워낙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사건 사고가 유별나게 벌어지곤 했거든요.”

“……백작이 위험에 처했던 적이 있었던 건가요?”

“몰래 숨어 들어갔다가 갇힌 적은 있었다고 했습니다. 워낙 날렵하기로 유명하여 덫에 쉽게 걸리는 편은 아니라고 자만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거 아니겠습니까?”

라이온 백작이 에쉬에게 뼛속까지 충성심을 보이고 있다는 건 이미 여러 번 들어서 알고 있었다. 듣자 하니 파빌리엔과 자주 어울려 다녔다던데. 두 사람 성향이 비슷하다고 하니까 왠지 백작 부인이 조금 안쓰러워지기도 하고.

“뭐, 애초에 제가 먼저 결혼하자고 떼를 썼을 때부터 목숨을 보존할 수 없어 일찍 사망할 수도 있다며 몇 번 거절하기도 했었지요. 어차피 정계에 진출할 생각도 없으면서 감히 내 구혼을 거절하나 싶어 화도 났었고요.”

에브린과 비슷한 성향 같다. 얼굴이라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백작 부인의 이야기도 꽤 흥미로워서 절로 귀가 기울여졌다.

“당시 넷째 황자 전하께서 황위에 앉아 계실 때였습니다. 셋째 황자 전하께서 황위에 오르면 결혼해준다기에 이 남자가 반역을 꿈꾸고 있나 싶어 어찌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하, 지금 생각하면 정말이지, 몇 달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전전긍긍. 사람이 사람 노릇을 하지도 못할 정도였지요. 결국 성공하긴 해서 그를 남편으로 맞이하고, 작위도 새로 얻긴 했지만요.”

“백작 부인께서도 참으로 다사다난한 해를 보내셨겠습니다.”

“말도 못 합니다. 지금이니 웃으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거지, 그때는 그냥 수녀원에나 들어가 살까 고민도 했었거든요.”

뭔가 편한 친구 같은 느낌이다. 내가 예비 황후여서 나와 친분을 다지기 위한 가식으로 느껴지진 않았다. 어차피 그럴 이유도 없지. 라이온 백작이 에쉬와 각별한 사이이기도 하고 가장 충성스러우며 그의 오른팔쯤 된다고 했으니까.

“지금의 폐하께서 즉위하시고 우여곡절 끝에 결혼까지 하면서 백작위를 받았는데, 결혼 생활 반년도 채 되지 않았건만 아직도 독수공방 신세랍니다. 거의 열흘이나 보름에 한 번 얼굴을 볼까 말까, 그마저도 매일 밤을 새우다시피 하여 엉망인 몰골에 가슴이 참 아프기도 하였지요.”

“듣기만 해도 속이 꽤 번다해집니다. 어서 제국에 안정이 찾아와야 백작 부인께서도 행복한 신혼을 만끽하실 텐데 말입니다.”

“네. 그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이만큼 버틸 수 있었던 것이고요. 아무튼 폐하께서 제게 닷새간 영애의 보필을 맡겼고, 잘만 하면 그이에게 휴가를 내어주신다 약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위험한 일이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저밖에 없다고요.”

위험한 일이긴 하지. 마력도 없는 카시안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마력으로 저택 전체에 허가받은 이들만 출입이 가능하도록 해놓았다고 하였다. 그 마력을 풀기 위해서는 더 강한 마력이 있어야 하는데, 저들이 작정하고 마법사를 동원하면 내 목숨은 물론이고 백작 부인도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에쉬는 그것을 걱정하여 나를 혼자 이곳에 두는 걸 꺼려했었다. 또 유령의 마음이 바뀔 수도 있는 노릇이다 보니.

“해서 앞으로 닷새간 저 역시 이곳에서 지낼 생각입니다. 어차피 백작저에 남아 있어도 따분하던 차였는데, 영애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남편 뒷담화도 좀 하고 그래야겠네요.”

정말 신난다는 듯 작게 웃는 백작 부인의 목소리가 상당히 기뻐 보였다. 왠지 조금 귀엽다고 해야 할까? 지난번에 한번 보았던 텐부르크 후작 부인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친해지면 앞으로의 황궁 생활도 심심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준비해준 빵과 음료를 천천히 해치우면서 백작 부인과 이러쿵저러쿵 수다를 이어갔다. 백작 부인이 라이온 백작과 어렸을 때 아카데미에서 만났고, 십 년이 넘도록 친구 사이로 지내다가 연애를 하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왜 이렇게 흥미롭던지.

“어느 쪽에서 먼저 고백한 거예요?”

“딱히 고백이랄 것도 없이 그냥 어쩌다가 분위기에 휩쓸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키스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게 황실에서 주최하는 무도회에 같이 참석했다가 그런 사달이 나는 바람에……. 책임지겠다고 하길래 그러라고 했죠.”

“책임지겠다던 남자가 결혼은 안 한다고 그랬어요?”

“저는 귀족이 아니었어서 정확한 사연은 잘 모르지만, 당시 제국의 상황이 위태위태했었지요. 그때 남편이 텐부르크 후작의 차남이었고, 그 가문이 황제파가 아닌 귀족파였거든요.”

“귀족파요?!”

지금 후작 가주인 라이온 백작가의 형, 텐부르크 후작이 황제파이나 그 어느 곳에도 몸담지 않는 독립적인 위치에서 중립을 고수하고 있다는 말에 상당히 놀랐다.

그건 에쉬에게 듣지 못한 이야기였다. 텐부르크 후작가가 원래 귀족파였다니. 그렇다면 가벨론 공작과는 아예 반대 노선을 타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이게 되는 건가. 황위가 바뀌면서 파벌도 바뀌게 되는구나 싶어 정치는 참 어렵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그런데 영애께서는 제가 귀족이 아니었다는데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백작 부인이 호기심을 가득 담아 묻기에, 방금 자기는 귀족이 아니었다고 한 말이 떠올랐다. 그게 놀라야 할 내용인가 싶기도 하다. 내 어머니도 귀족이 아니었다고 했으니까.

“꼭 귀족만이 귀족가와 부부의 연을 맺어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과거야 어찌 되었든 지금 백작 부인이시니까.”

“그래도 다른 귀족들은 표정에서 티가 나거든요. 남편이 폐하의 측근인지라 겉으로 드러내진 않아도 천박하다는 눈빛으로 깔보거나 무시하거나. 예상은 했지만, 막상 그런 태도를 당해보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던지라.”

말하는 걸 보니 대범할 것 같으면서도 은근 소심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귀족들, 특히 고리타분한 귀부인들의 선 긋기와 파벌 나누기는 왕국에서도 자주 벌어졌던 일이기도 하고.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 쓰면 부인께서 피곤해지셔요. 사람은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황권이 조금 더 안정적으로 다져지면 그때부터는 백작 부인과 친분을 다지려고 무척이나 애를 쓸 거예요. 황제 폐하의 오른팔이라는데, 누가 함부로 대할 수 있겠어요?”

“……그럴까요?”

“부인이 곧 백작가의 얼굴이고, 그만큼 공을 세웠으니 황실과 가장 가까운 가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지금 백작 부인을 업신여기는 이들 모두 언젠가는 부인께 살갑게 웃으며 다가갈 터이니 크게 심려할 것도 없으십니다.”

“아……. 어머, 저 주책맞게 감동해서 눈물이 다 나요. 어쩜, 그이가 절대 약해지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젖은 목소리가 살짝 떨리면서 코를 훌쩍거리고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린다. 직접 얼굴을 보지 않아도 그간 얼마나 힘들었을지 이해가 되었다. 더군다나 뒷배 하나 없이 그 자리에 올랐으니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하고 오롯이 혼자 버텨야 했을 거고.

“행여 폐하께라도 제가 울었다는 이야기는 하지 말아주세요. 그이가 알면, 아마 분명히 놀릴 거예요. 처음 보는 예비 황후 폐하 앞에서 눈물 바람을 흩날렸다고. 제가 아카데미에서는 싸움으로 져본 적이 없었거든요!”

“제가 말하지 않아도 눈이 붉어진 건 티가 날 것 같은데요?”

게다가 왠지 에쉬라면 여기 혼자 올 것 같지 않았다. 내가 에쉬여도 혼자 오는 눈치 없는 짓을 하진 않을 것 같고.

그리고 잠시 뒤, 에쉬가 저택에 도착하여 내가 머무는 방으로 올라왔다. 혼자가 아니라 라이온 백작과 함께.

“헉? 케, 케인! 당신이 여기 왜 와요?!”

백작 부인은 예상도 하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비명처럼 외쳤다. 방금 울어서 눈이 조금 부어있을 테니까.

“폐하께 끌려왔지. 나를 보고 놀라기 전에 폐하께 예를 갖춰야 해, 엘린.”

“핫! 죄송합니다, 폐하. 너무 놀라서 그만…….”

듣기만 해도 라이온 백작과 백작 부인은 상당히 귀여운 부부인 것 같았다. 며칠째 남편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까, 두 사람이 오늘만이라도 회포를 풀길 바랐다.

“아, 내가 말 안 했던가? 라이온 백작과 함께 오겠다고?”

“……안 하셨는데요.”

“이제라도 알았으니 되었지. 그만 나가보도록. 오늘은 밤에 다시 돌아 가봐야 하니 딱 두 시간 주마.”

그 말에 두 사람이 방을 나갔고, 에쉬가 침대 끄트머리에 앉았는지 침대가 살짝 출렁거렸다.

“황궁에 무슨 일 있어요?”

“무슨 일이야 항상 있어서 그게 더 문제지요. 황태후궁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졌거든요.”

살인사건……? 궁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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