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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100)화 (101/113)

100화

어차피 저 이기적인 유령이 우리를 완전히 도울 생각은 없어 보였다. 괜히 바라는 것보다야 차라리 무시해버리는 것이 심신 건강에 더 이로울 것이다.

그나저나 카시안은 에쉬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테니 결국 내가 움직여야 에쉬와 카시안도 함께 움직일 수 있다는 건데. 정말 황태후가 황궁을 들쑤셔놓겠다는데 아무 방비를 하지 않아도 되는 걸까?

어디선가 굵은 나뭇가지를 구해온 카시안이 내 손에 쿡쿡 찔러 쥐게 했고, 에쉬가 반대쪽 끝을 잡은 채 다시 나를 실내로 안내하였다. 그를 뒤따라가는 내내 황태후가 황궁을 들쑤셔놓을까 저어되었다.

“에쉬.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어차피 저 유령이 내게 마력을 걸어두었으니 유령이 아닌 자들이 내게 쉬이 손대진 못할 거잖아요? 그래도 당신은 황궁을 지켜야 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에쉬는 전혀 걱정 없다는 말투였다.

“황궁은 절대 위험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그래도 당신이 나고 자라 평생 이끌어가야 할 제국인데, 나는 당신이 조금이라도 위험해지는 건 싫어요.”

“황태후는 지금 황궁에 없습니다. 아니, 없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황태후가 두문불출하는 이유는 황궁 안에 있는 황태후가 대역으로 세운 가짜이기 때문이랍니다.”

“……네?”

대역이라니. 이게 다 무슨 말인가 싶었는데 에쉬가 방으로 안내하는 내내 자신이 보고 들었던 것을 그대로 나열해주었다.

공작의 측근이라는 자가 과거 귀족이었으며 선황의 은혜를 입어 목숨을 건졌고, 자신의 부모를 나락으로 떠민 공작에게 복수하기 위해 지금껏 공작가에 가짜 충성을 다하였다고. 그를 만나 저들이 반역을 꾸미고 있음을 전해 들으면서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역시. 최종 목표가 그거였군요.”

“내 생각에는 곧 자신들의 뜻을 밀어붙일 것 같더군요. 아마 조만간 있을 우리의 국혼을 이용하여 나를 끌어내릴 시도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당신의 여성 편력에 관한 소문을 이용해서요?”

“……흠, 일단 앉지요. 아, 거기는 깨진 유리가 있으니 이쪽으로.”

눈이 보이지 않아서 표정을 가늠하긴 어려웠지만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조금 당황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직접 표정도 봤으면 더 좋았을 텐데. 당황하는 에쉬는 내 가슴을 크게 뛰게 할 정도로 귀엽단 말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소파가 아닌 침대 끄트머리로 나를 안내해주어 그곳에 걸터앉았다. 그리고 에쉬는 어디선가 의자를 끌어와 내 앞에 마주 보고 앉는 것 같았다.

“저도 그 측근에게서 들은 이야기인데, 듣고 놀라지 마십시오. 조금 충격적인 이야기라서…….”

“이제 그 어떤 이야기를 들어도 놀라지 않을 자신 있어요.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요? 혹시 뭐 누가 황제의 아이를 가지기라도 했대요?”

그냥 농담 삼아 콧방귀를 뀌며 뱉은 말에 에쉬가 얼음처럼 굳어버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내가 너무 심한 말을 해서 어처구니가 없어 말문이 막힌 걸까?

“농담이에요, 에쉬. 왠지 그들이라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 같기는 하지만요.”

“……방금 당신이 제 머릿속에 들어갔다 나온 줄 알았습니다.”

“그게 무슨…… 어머, 진짜 그런 소문이 있어요?!”

“흠, 흠. 지난번 건국기념제 연회 날에 가벨론 공작의 막내딸 말입니다. 그녀가 황제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하더군요. 아직까지 비밀로 하고 있는 것 같기는 하지만.”

연회가 시작되기 전, 파빌리엔에게 일부러 와인을 쏟았다는 그 영애 말인가. 판세를 뒤엎어 에쉬를 끌어내리고 파빌리엔을 왕좌에 세운 뒤 자신의 딸을 황후로 맞이하려던 그들의 계획은 완패였으니까. 아마 다른 계략을 꾸미고는 있었을 거다.

에쉬를 닮은 유령이 실체화를 한 채로 공작가에 들락날락했다는 몹쓸 정황을 일부러 소문낸 이유도 이것을 위해서일 것이고. 아이는 그럼…… 황태후가 오래전 써먹었던 그 방법을 이용했겠지. 진짜 임신인지 아닌지도 모르겠지만. 황족을 전부 없애더라도 그 아이가 황실 적통이라고 공표하면 누구도 의심하진 못할 것이고.

“정말 그런 쪽으로는 머리가 비상하게 돌아가네요. 아이는 무슨 죄람. 그저 말뿐이길 바라요.”

“인간이 권력에 눈이 멀면 부모의 목숨도 가벼이 여긴다고, 국혼을 치르기도 전부터 당신에게 제국에 대한 이면을 보여주는 것 같아 마음이 좋지 못합니다.”

“이미 황자의 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던 터라 놀랍지는 않아요. 역사적으로도 권력을 탐내던 이들의 몰락이 아주 상세하게 기록되어있으니까요.”

결국 살아남은 쪽이 승자가 되는 법. 에쉬가 절대 저들에게 당하지는 않을 것 같지만 작년 암살자들에 의해 죽을 뻔했던 일을 떠올리면 방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도 모르고 당하는 것보다야 낫네요. 아니까 아는 만큼 조금 더 마음의 준비도 할 수 있을 테고요.”

“새삼 슈아 당신의 정신력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만큼 나를 믿어주어 고맙습니다. 절대 당신에게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할 겁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차피 살아도 같이, 죽어도 같이라고 약속했잖아요. 그러니까 죽지 마세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아요. 그래야 내가 살아요.”

승패를 가늠할 수 없는 싸움이 다가오는 만큼 비장한 결심을 하게 된다. 아마 나보다 에쉬가 더 큰 부담을 떠안고 있을 테지. 선황의 유지도 있고, 아무리 제국보다 내 목숨이 더 소중하다 해도 그의 부모가 지켜낸 이 제국을 쉽게 내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서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손이라도 맞잡고 있으면 더 좋았으련만. 서로 닿을 수 없다는 점은 고문에 가까웠다. 이렇게 곁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품과 다정한 손길을 느낄 수 없는 건 처음인지라.

“해가 뜨기 시작하는군요. 하늘이 밝아지고 있습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 싶다. 기절하고 정신을 차린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그와 대화를 나누면서 곰곰이 생각해보았는데, 역시 나는 황궁에 있어 봐야 그에게 도움이 되진 않는 것 같았다. 유령이 나를 죽일 의도는 아니라 하였고, 사자 없는 산에 토끼가 왕 노릇을 한다고 황궁의 주인이 오래 자리를 비울 수는 없는 노릇.

“에쉬, 내 말 서운하게 듣지 말아요. 나는 기본적으로 제국 내의 안정이 나와 당신을 포함한 모두가 평화로울 수 있는 길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당신이 황제로서의 의무를 다했으면 좋겠어요.”

“나름 황제로서의 의무는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닙니까?”

“지금까지 잘 해왔으니 앞으로도 더 잘하셔야지요. 그러니까 어서 돌아가서 저들의 권모술수에 대비하세요.”

“……혼자는 안 갑니다.”

내가 등 떠미는 것을 눈치챈 듯 그가 단호한 입장을 내세운다. 예상을 못 했던 건 아니지만.

“저는 사랑하는 사람의 걸림돌이 되는 건 사양이에요. 목숨이 경각에 달린 일이었다면 살기 위해 매달렸겠지만, 지금은 누구보다 안전하다고 생각해요. 유령의 속내를 알 수는 없지만 적어도 지금은 누구도 나를 해치지 못할 테니까요.”

곧 국혼을 위해 우리 비엔트 왕국에서 나를 배웅하는 행렬이 출발할 것이다. 그 마차 안에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대신 얼굴을 가린 대역이 있을 거고, 중간 지점에서 황실 기사들의 보호를 받으며 제국에 입성하겠지.

그때까지만 버티면 된다. 국혼을 치르는 당일에만 황궁에 도착하면 될 것이다. 방금 에쉬와 나눈 이야기가 그 국혼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그러니까 당신은 일단 황궁을 지켜내세요. 감히 그들이 섣불리 탐내지 못하도록 당신의 위치를 견고하게 만들길 바라요.”

“앞으로 짧아야 닷새입니다. 그동안 여기 혼자 있겠다는 뜻입니까?”

“고작 닷새뿐인 것을요. 그 이후에는 얼마든지 함께 있을 수 있잖아요. 당장의 기쁨보다는 앞으로의 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더욱 단단하게 다져놓길 바라요.”

적어도 내 부탁은 거절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를 설득하는 것도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그가 영 못마땅해하면서 불만스러운 호흡을 토해내는 것이 상당히 귀여웠다. 직접 표정을 보지 못해 유감일 정도로.

“그렇게 말한다면 당신의 말에 따라야겠지요. 대신 이곳에 아무도 얼씬거리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그럼…… 라이온 백작가에 도움을 요청하여 백작 부인에게 당신을 도우라 명하면 되겠군요.”

해서 에쉬는 카시안을 시켜 저택 주변에 결계를 쳐놓았고, 기어코 밤에 다시 올 테니 기다리라는 말만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노크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여전히 눈을 떠도 새까매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라이온 백작 부인입니다. 영애를 뫼시라는 폐하의 전언을 받아 찾아왔습니다.”

“아, 들어오세요.”

카시안의 결계가 세워진 이 저택은 카시안의 허락 없이는 아무도 출입할 수 없는 구역이 되어버렸다. 세상에 이만큼 안전한 공간이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드래곤의 레어도 이 정도는 아닐 듯.

달칵, 문이 열리면서 작은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한 명은 아니고, 두 명 이상인 것 같은 느낌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영애께서 눈이 불편하시어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들었습니다. 일단 이곳을 먼저 청소부터 시킬 테니 번거롭더라도 조금만 참아주십시오. 청소하는 이들은 백작가에서 저를 보필하는 아이들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궁금하다. 에쉬를 보필하는 그 라이온 백작의 부인이 누구인지, 저렇게 다정한 목소리로 나를 배려해주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훗날 황후의 자리에 오르면 그래도 텐부르크 후작 부인과 저 라이온 백작 부인이 내 편이 되어줄 테니 마음이 놓이기도 하고.

청소를 위해 창문을 열자 시원하고 깨끗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조금 엉망이 되어있을 바닥을 청소하고 먼지를 닦는 사이, 라이온 백작 부인은 내가 앉아 있는 침대로 다가왔다.

“이것은 옷가지입니다. 영애께 마력이 걸려있어 손대지 못한다고 하여 일단 여기 놓겠습니다. 그리고 먹기 좋게 자른 빵이니 이것으로 허기를 좀 채우시어요. 드시고 싶으신 것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시고요.”

꼬르르륵ㅡ

코끝에 스치는 고소한 빵 냄새에 갑자기 배꼽시계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건 내 귀뿐만 아니라 방 실내에 있는 이라면 누구나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큰 소리였다.

오늘 처음 만난 백작 부인 앞에서 이런 추태라니. 이 눈치 없는 위장 같으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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