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그러나 그건 내 바람일 뿐일지도 모른다. 저 말도 다 지어낸 것일 수도 있다. 유령이 에쉬에게 내 위치를 알려줬다면, 굳이 나를 기절시키면서까지 휴게실에서 빼내온 이유가 없지 않은가.
이번에 확실히 깨달았다. 유령의 존재가 내게 정신적으로 지나치게 큰 혼란을 끼얹어주고 있다는 것을.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존재이니 망자의 세계로 돌아가야 한다던 둘째 언니의 말에 아주 크게 공감되었다.
매번 에쉬를 의심하게 되어서. 만일 내 앞에 있는 그가 진짜 에쉬라면 너무도 미안해지는 상황인지라.
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러나 여전히 눈앞은 그저 암흑일 뿐이었다.
“여기가, 어디라고요?”
“내 어머니께서 제국으로 건너와 유모와 함께 머물던 집입니다. 애초부터 황실 사유지였으나 어머니는 그것을 모르고 그저 빈집이라 여겨 지내다가 관리하러 온 이들에게 발각되었죠. 다행인 것은, 운 좋게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게 가능한 건가요?”
“자세한 건 알지 못하지만, 그 관리자들에 의해 황궁 하녀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였지요. 그런데…… 눈이 보이질 않는 겁니까?”
“당신이 이래놨잖아요.”
일부러 한 번 더 떠볼 생각으로 나직하게 반격했더니 땅이 꺼져라 깊은 한숨을 푸욱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 한숨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있는 것 같았다. 다만 내게 서운하다는 뜻은 아닌 것 같았다. 물론 그건 내 짐작이지만.
“카시안.”
“예, 주군.”
카시안? 카시안이 있어?
카시안의 대답이 바로 들려와서 깜짝 놀랐다. 동시에 또다시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아버렸다. 카시안이 주군이라고 하는 상대는 세상 유일하니까.
“바로 나오는 걸 보니 형님은 근처에 없는 건가?”
“찾아보니 이 저택과 근방에 유령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군. 아마 주군께 직접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었나 봅니다.”
그렇다는 것은, 진짜 에쉬가 나를 찾아왔다는 거야? 실제로? 꿈은…… 아니겠지?
차라리 눈에 보였더라면 확실하게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그 유령은 이런 것을 예상해서 내 시력을 이렇게 만들어놓았겠지. 내가 쉽게 판별하지 못하도록.
‘정말이지 교활한 유령 같으니라고.’
순간적으로 에쉬에게 너무 미안해졌다. 의도치 않게 항상 유령 때문에 그를 의심하는 것 같아서. 이런 적이 한두 번도 아니고. 그걸 전부 다 이해해주는 에쉬가 참으로 대단하다는 생각도 든다.
“정말, 에쉬인 거 맞죠?”
“미안합니다, 슈아. 형님이 또 민폐를 끼쳤습니다. 안일하게 생각했던 내 불찰이기도 하고요. 일단 돌아갑시다. 당신에게 해줄 이야기도 많고, 그 눈도 상태를 조금 봐야겠습니다.”
서운할 법도 한데, 그는 조금의 서운한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자신을 거부할까 봐 걱정하며 아주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와 내 손부터 꼭 잡아주었다.
그 딱딱하면서도 부드러운 손이 너무도 따뜻하여 가슴이 아릿해진다. 내가 아는 그 느낌을 간직한 손. 추운 겨울바람 사이로 드리워지는 따뜻한 햇살처럼 귀하고 소중한 온기.
그 고결한 손을 꼭 맞잡으며 떨리는 숨을 흘리는데.
“주군!”
나와 그의 손을 재빠르게 쳐낸 카시안의 외침에 화들짝 놀랐다. 가격당한 손등이 욱신거린다. 엄청 단단한 돌에 맞은 것처럼 뼈가 부러지는 줄 알았다.
그 밀려오는 통증과 함께 묘한 느낌이 나를 덮친다. 창문은 닫혀있었는데 갑자기 바람이 밀려와서는 내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그런 기분이었다.
“……마력인가?”
“손대지 마십시오. 아마 아가씨께 마력을 걸어둔 것 같습니다. 방어마력이라 손대면 주군께서 다칩니다.”
마력이라니. 그럼 그 유령이 에쉬에게 내가 있는 곳을 알려준 이유가, 만나도 내게 손대지 못하게끔 만들려고?
어쩜 이렇게 잔인한 짓을……!
“마력을 풀 방법은?”
“공격마법보다 방어마법이 더 까다로워서 자칫 저희가 더 위험해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마력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합니다만.”
이를 부득부득 가는 에쉬의 초조함이 피부로 느껴졌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장난질의 도가 지나치다.
곧 내 주위에 불던 바람이 다시금 사그라지면서 고요해졌다. 아마도 누군가 나를 건드리면 그 방어마력이 나를 감싸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고 혼자 가자니 눈이 보이질 않아서 제대로 걷는 것도 불가능하고.
……손이 닿지 않으면 되는 거 아니야?
“에쉬. 천이나 끈이 있을까요?”
유령의 뜻대로 이곳에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내게 무슨 해코지를 할지 모르니까. 이곳에 혼자 남겨지는 것보다 어떤 역경이 있어도 그와 함께이고 싶다.
내 생각을 알았다는 듯 실내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천을 찢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그리고는 내게 천의 끝자락을 건네주며 침착하게 당부하였다.
“절대 놓지 말고, 보이지 않는다 해서 겁먹지 말아요. 일단 여길 나가서 나뭇가지라도 구해보겠습니다.”
“네.”
침착하게 그의 안내를 받아 방을 나와서는 긴 복도를 지나 가장 아찔한 순간인 계단을 안전하게 내려왔다. 그래도 의지할 것과 길을 안내해주는 그가 있어서 아까만큼 불안하진 않았다.
그렇게 막 현관을 벗어나려던 때.
“지금 가면 너무 이른데.”
뒤쪽에서 들려오는 유령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랐다. 동시에 에쉬인지 카시안인지, 둘 중 한 명이 칼을 뽑아 드는 소리에 어깨가 바짝 좁혀진다. 저 날카로운 소리는 언제 들어도 살벌해서.
“……이번 장난은 도가 지나쳤습니다, 형님. 저는 형님과 척을 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슈아에게 걸어둔 마력을 제거해주시지요.”
“다 이유가 있어서 해놓은 거니 재촉하지 마라. 그리고 내가 아직은 이르다고 하지 않았어? 가능한 동이 틀 때까지는 이곳에 머무는 것이 신상에 이로울 텐데?”
에쉬의 목소리가 양쪽에서 들려와 혼란스럽다. 말투만 조금 다를 뿐, 아무리 쌍둥이여도 목소리가 이렇게 똑같다니.
“이유가 뭡니까? 제가 지금 황궁으로 돌아가면 안 되는 이유, 납득이 되게끔 설명해보십시오.”
“아까 그 공작의 측근을 만났으니 대략적인 이야기는 알 것이고. 황태후가 오늘 본궁을 염탐하러 사람을 보낸다 하였거든. 너의 그녀에 대한 소문이 황궁에 퍼지고 있던데, 듣지 못했나?”
“황궁에서 슈아를 본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나와 카시안을 제외하고 말입니다.”
“과연 그럴까? 황제의 집무실에서 여자의 목소리를 들었다, 또한 황제궁의 뒤쪽 창가에서 낯선 여자를 얼핏 보았다. 이게 다 황궁 시녀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소문이라던데?”
원래 소문이라는 게 당사자는 알지 못하는 사실이 퍼지기 마련이다.
사실 밖의 풍경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종일 커튼을 열고 지냈고, 가끔 사람이 돌아다니지 않는 것을 확인하고 발코니에서 머물렀던 적도 있었는데 어쩌다가 나를 본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진 않았어도 바로 옆이 집무실이었을 거고, 그곳을 지키는 황궁 기사들이 있었을 테니 그들도 귀가 있다면 새어나가는 목소리를 들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휴게실 관리를 담당하는 시녀장이 매일 끼니와 간식을 챙겨다 주었으니 한 사람의 먹거리가 더 생기는 건 눈에 보이는 소비이기도 해서.
“집무실의 비밀 장소 염탐을 위해 오늘 황태후 쪽 측근이 황제궁에 몰래 침투할 예정이다. 그쪽 일은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너는 동이 틀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려.”
“나의 제국이고 나의 황궁이며 나의 거처를 염탐하러 오는 이들을, 그저 모른 척하라는 뜻입니까? 농담이 과하십니다, 형님.”
“저들에게 먹잇감을 던져준 건 너잖아.”
“그래서 제가 직접 해결할 생각입니다. 한데 지금 제게 이런 사실을 알려주시는 것과 슈아를 납치해 이런 상태로 만들어놓은 건, 대체 저를 돕겠다는 게 맞습니까? 형님의 의도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언제부터 내 의도를 궁금해했나? 나는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뿐인데.”
픽 웃는 유령의 목소리만 들어도 너무 얄밉다. 딱히 중립이라고도 할 수 없는, 어떻게 보면 정말 악당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미운 짓만 골라서 하다니.
에쉬도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듯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푹 내쉬며 코웃음을 쳤다.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껴서 역시 영혼의 단짝이 맞다는 생각에 다른 의미로 웃음이 나기도 했고.
“좋습니다. 그럼 제가 슈아와 이곳에 머문다면 형님께서는 어찌할 작정이십니까?”
“글쎄. 저 버릇없는 악마 녀석이 나를 이 꼴로 만들어놓지만 않았어도 다양한 방법이 있었을 텐데.”
카시안을 원망하는 소리에 순간 검을 휘두르는 소리가 들려와서 흠칫 놀랐다. 청각에만 집중하고 있어서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조차 소름 끼치게 살벌하였다.
“그 영혼을 전부 태워버릴 수 있던 기회였는데. 이참에 네가 죽나 내가 죽나 한번 해볼까?”
“아서라. 그랬다간 저 여자한테 걸린 내 마력을 풀지도 못할걸?”
“마력은 마력으로 풀면 돼. 네까짓 것보다 더 대단한 마법사는 세상에 얼마든지 많거든.”
“카시안. 도발하지 마라.”
다행히 에쉬가 중재하였고 카시안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참 난감한 상황이다. 그래도 황제궁을 염탐하러 오는 이들이 있다면 에쉬가 자리를 지키고 있다가 잡아들이는 게 낫지 않을까? 나만 없으면 되는 문제이긴 하니까.
“에쉬. 그래도 에쉬는 황궁을 지켜야 하지 않아요?”
“당신을 여기 두고 혼자 갈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감히 당신을 감시하려 찾아오는 이를…….”
“슈아.”
그가 내 손을 잡으려다가 흠칫 놀라면서 바로 떼었다. 그의 피부가 살짝 닿았다가 떨어져서 알 수 있었다.
“당신이 납치당하는 광경을 똑똑히 목격했기 때문에 나는 당신과 절대 떨어지고 싶지 않습니다. 저들이 염탐해온다 하여도 상관없습니다. 내겐 제국보다 당신이 먼저니까.”
확실히 에쉬도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 같지만. 내게 해될 것이 없는 비정상적인 집착이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아서 눈이 보이질 않는 지금 더욱 그가 의지 되었다.
“형님 말대로 이곳에 남겠습니다. 다만 슈아에게 걸어둔 방어마법이라도 풀어주십시오.”
“싫은데?”
에쉬와 내가 붙잡고 있던 천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것을 느꼈다. 저 못된 유령이 웃으며 장난스럽게 대꾸한 말에 나와 에쉬가 동시에 천을 쥔 손에 힘을 더욱 실었기 때문이었다.
저 악령 놈을 꼭, 퇴마에 성공하여 이 세계에서 사라지도록 만들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