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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비밀스러운 꽃 (98)화 (99/113)

98화

대체 저 유령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어서 혼란스러웠다. 본가에서 나를 봤다니? 내 잠옷 끈을 풀어? 저 얼토당토않은 말을 나더러 믿으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다가 순간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에쉬가 잠시 내게서 떠나가 있을 때, 에쉬의 꿈을 꾼 적이 딱 한 번 있었다.

잠을 자던 도중에 느껴지던 누군가의 시선에 눈을 떴고, 에쉬가 내 위에 올라타서 요염하게 웃으며 잠옷 끈을 풀어냈던 그것. 반가워서 그를 확 안아주고 싶었으나 예상치도 못한 행동에 상당히 놀라 당황하다가 눈을 끔뻑거리는 사이, 갑자기 그가 사라져서 꿈이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게…… 실제였다고요?”

“곤히 잠든 얼굴이 제법 귀여워서. 대체 동생 녀석이 남들은 다 오르고 싶어 서로의 목숨을 빼앗는 자리를 마다하고 자꾸 황제의 대타를 세우려 했는지 궁금했거든. 알고 보니 그 원인이 당신이더군. 해서 궁금했어. 어떤 여자기에 그리 빠져들었나.”

점점 가까워지는 목소리에 본능적으로 상체가 뒤로 기울어져 버렸다. 하지만 뒤는 침대의 끄트머리였다.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아서 어디로 도망을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이대로 넘어지면 크게 다칠수도 있다. 이 침대가 얼마나 높은지 가늠할 수 없으니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해하던 찰나, 유령의 서늘한 손가락이 내 뺨에 닿자마자 그대로 굳어버렸다. 언제 느껴 봐도 흉흉한 그것은 정말 사람의 온기가 아니었다. 마치 죽은 지 오래되어 식어버린 시체와도 같은 것이어서 그저 끔찍하기만 하다.

“의외로…… 썩 마음에 들어서, 녀석이 그리 헤어 나오지 못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지. 그런데 알고 보니…… 그 여자의 여동생이었더군. 쌍둥이 형제의 보는 눈이 참으로 비슷하다 여겼어.”

둘째 언니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전부터 느끼는 거지만, 자신을 봉인시키게 한 원인인 둘째 언니를 거론할 때마다 묘하게 아쉬움이 느껴졌다. 그것이 복수를 하지 못해 안달이 난 건 아니었다. 내가 잘못 느낀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건 미련이 가득 담긴 애정이었다.

에브린이 짝사랑에 대한 감정을 정리하지 못할 때마다 상대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하던 것과 똑같은 느낌이라서.

“언니는, 산 사람이고 이미 혼인까지 하여 아이도 있어요.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있고, 만약 언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불행해지는 사람이 무척이나 많아요.”

“알아.”

“……알면서도 복수를 해야겠다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가 언제 그녀에게 복수한다 했었나?”

또 이게 무슨 해괴한 헛소리인가 싶다가도, 유령을 봉인한 건 둘째 언니가 아니라 어머니였음을 깨달았다. 원인보다는 결과를 중시하는 편인가?

“당신이 둘째 언니에게 그런 해괴한 짓만 저지르지 않았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었어요.”

“서로 오해가 있었던 것일 뿐. 나는 그저 내 마음을 전달해주고 싶었을 뿐이고, 그녀가 내 말을 오해했던 것이다. 내가 화가 났던 부분은 정확한 정황을 파악하지도 않고 대뜸 봉인해버린 그 백작 부인의 무책임한 행동이야.”

대체 어떤 사람이 유령의 해명 따위를 들어줄까? 억울한 한을 풀어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형체조차 갖추지 않은 채 사랑고백을 하면 누가 그걸 정상적으로 받아줄 수 있겠느냐고.

“당신이 폭주했다고 들었어요. 언니를 해치려고 했다고.”

“그땐 나도 철없는 어린아이였으니까.”

“……본인의 잘못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대하네요?”

“마력을 사용할 줄 아는 상대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홧김에 그랬던 거지. 진짜 죽일 생각도 없었고, 그녀가 그런 마력에 쉽게 죽을 정도로 나약하지도 않았고.”

어쩜 저리 뻔뻔할까? 정말 자기 생각으로만 정당성을 펼쳐서 기가 찼다. 둘째 언니가 이 유령이라면 치를 떠는 이유를 알 것 같기도 하고.

“당신은 그게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하나요?”

“사랑이라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을 정의하는 건데?”

몰라서 묻는 내용이 아니었다. 내가 어떤 정의를 내릴지 궁금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만큼 청각이 예민해져서 그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말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의 목소리가 워낙 솔직함을 담고 있기도 하고.

“정확히 정의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상대가 나로 인해 아프지 않길 바라는 거라고 생각해요.”

“나는 말이다. 내 동생처럼 한번 마음에 품은 상대가 무조건적으로 행복해지길 바라고 있어. 그녀가 나를 미워하는 건 참을 수 있어도, 그녀가 위험해지는 건 절대 참지 못해.”

“언니와 혼인하길 원했다면서요.”

“그녀를 곁에 둘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행복한 결혼 생활을 훼방할 생각도 없고, 그저 멀리서 그녀의 삶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해. 그게 사랑이 아니면, 무슨 감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저 말이 전부 진심이라면 감히 내가 범접할 수 없는 애틋한 마음일 것이다. 말만 들어도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는데. 살아있다면 인간이 아니더라도 그 감정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었을 텐데.

“역시 순진하네. 의심하나 없이 믿어버릴 줄은 몰랐는데? 놀려먹기 딱 좋으니 황궁 생활이 쉽진 않겠어.”

동정까지는 아니어도 어쩐지 안쓰러워져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넬까 고민하던 때, 숨죽여 웃는 유령의 웃음소리에 기분이 팍 상해버렸다.

“……설마 또 거짓말인가요?”

“믿을지 말지는 스스로가 결정하는 거지. 마음대로 생각해.”

앉아 있는 침대가 꿀렁거려 또 흠칫 어깨를 좁히고 경계했으나 다행히 다가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해서 주위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청각을 힘껏 곤두세웠는데 쥐죽은 듯 정적만이 이어졌다. 상대가 유령이어서 실체화가 풀린 건지, 아니면 정말 사라진 건지 모르겠어서 섣불리 움직일 수도 없었다.

나, 감시당하고 있는 걸까?

뭐가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정신을 잃기 전, 유령이 모든 일에서 손을 떼겠다고 한 것도 나를 방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내 눈이 보이지 않는 건 유령의 짓일 거고, 지금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게 할 생각이었겠지. 도망칠 수도 없게 만들려고.

하지만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다. 대체 내 눈에 무슨 짓을 한 걸까? 둘째 언니에게 받은 팔찌를 눈 근처에 가져다 대었지만 아무 반응도 없었다. 팔찌에 마력을 담았다는 것이 거짓말은 아닐 텐데.

“제발……!”

간절한 바람과 다르게 무엇을 해도 다시 시력이 돌아오진 않았다. 눈두덩을 비비고 감았다 떠도, 한 곳을 집중적으로 빤히 쳐다보고 팔찌를 풀어 가져다 대도 그대로다.

그저 실내가 빛 하나 없이 어두워서 보이지 않는 것일 뿐일까?

답답한 마음에 손으로 더듬거리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발끝으로 바닥을 가늠해보았다. 다행히 딱딱한 바닥이 느껴졌다. 그 바닥에 발바닥을 대고 천천히 일어나보았다.

그렇게 침실 주변을 탐색하다가 벽으로 느껴지는 곳에 달라붙어 호흡을 골랐다. 앞이 보이지 않는데도 무척이나 어지러웠다. 내가 제대로 서 있는 건지, 이곳의 공간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도 되지 않아 너무도 혼란스러웠다.

“침착하게. 하나씩. 천천히.”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벽을 짚고 다니다 보니 창문으로 보이는 유리도 느껴졌고 창문 틈 사이로 옅은 바람이 밀려들어 오는 느낌도 전해졌다. 그러다가 얇은 커튼이 바람을 타고 다리에 스치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그대로 넘어져 엉덩방아를 찧기도 하였다.

아픈 것보다 두려움이 먼저여서. 주변이 안전한지 팔을 휘적거리자 손가락 끝에 옷감 같은 느낌이 닿아 또 흠칫 놀랐다. 혹시 사람인가 싶어서 마른 침을 꼴깍 삼키고 떨리는 손으로 그 무언가를 만져보았다.

‘아, 소파구나.’

대충 그런 촉감이었다. 굴곡도 그렇고 푹신푹신한 등받이와 둥글넙적한 팔걸이까지. 그 소파에 천이 씌워져 있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빈집이라는 것 같은데.

그 소파를 잡고 일어나 서서 다시 근처를 샅샅이 탐색해보았다. 조심스럽게 움직였는데도 무언가 손에 걸려 옆으로 쓰러졌고, 그것이 챙그랑! 소리를 내면서 깨지는 바람에 얼마나 놀라고 죄송스러웠는지 모른다.

“하아. 어렵다.”

깨진 방향에 발을 댔다가는 상처가 날 것 같아서 그 반대편으로 걸음을 옮겨 최대한 벽이 있는 곳으로 가서 등을 붙였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고 그만큼 불안감도 높아져 한껏 예민해졌다. 정말 저 못된 유령을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손을 뻗었는데 문고리 같은 것이 잡혔다.

이건 분명 신의 은총이다 여기면서 문고리를 잡아 돌려 조심히 당겼다. 부드럽게 열리는 것을 보아하니 방문이 확실했다. 이 밖에 무엇이 있는지는 모르지만, 언제까지 이곳에 갇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나가서 도움이라도 요청하는 것이 더 빠를 수도 있으니까.

챙!

“힉!”

순간 쇠붙이 소리가 들려와 숨이 멎는 기분이었다. 날카로운 마찰음은 분명 검을 뽑아 드는 소리와도 흡사하였다.

앞에 누가 있는 걸까? 설마 나를 죽이려고?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점령하면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데.

“슈아?”

“오지 마. 부르지 마. 가까이 오면 진짜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에쉬의 목소리가 들려와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또 그 유령이 나를 현혹시키는 건가 싶어서. 아까도 그랬으니까. 저 달콤한 목소리로 나를 안심시켜놓고 멋대로 나를 만지고 농락당하는 건 사양이다.

“농담 아니에요. 이 이상 엄한 짓은 그만둬요. 당신은 즐거울지 몰라도 상대는 아니에요. 그러니까 우리 언니가 당신을 그렇게 미워하지! 사람 가지고 노는 게 그렇게 재미있어요?! 정말 최악이야……!”

너무 화가 났다. 목구멍부터 머리끝까지 화끈거릴 만큼 분노가 치밀었다. 아무런 힘도 없이 당하기만 하는 내가 너무 비참하다. 저 간교한 장난질에 온갖 감정이 시달려 울컥, 눈물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사람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면 왜 눈물부터 나오는 건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참으려고 했지만 서러움과 그리움이 강물처럼 쏟아져 나와 멈추어지질 않았다.

“여기는 황실 사유지이자 내 어머니께서 성인이 되기 전까지 지냈던 곳입니다. 슈아 당신이 여기 있다는 형님의 쪽지를 받았습니다.”

“시끄러워! 하지 말랬잖아!”

“슈아…….”

그 달콤한 음성에 소름이 일었다. 너무도 애절하고 고통 어린 그 음성에 심장이 찌르르 울렸다. 진짜, 에쉬 같아서. 아니라는 것을 아는데, 진짜 에쉬가 이곳에 있을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그가 진짜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정말, 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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