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과거 어머니께서 지내던 제국 내의 거처는 현재 비어 있었다. 번화가가 아닌 한적한 숲길 초입쯤 위치한 그곳은 원래 황실 사유지였다. 어머니가 제국에 처음 당도하였을 때, 그저 빈집이라 여겨 들어가 살았다고 하였다. 어떻게 보면 이미 그때부터 황실과 인연이 생겼던 걸지도 모른다.
나중에 르슈아와 함께 다녀오고 싶었는데. 한 치 앞도 모르는 게 인생이라지만 하루가 멀다 않고 사건의 연속이니, 이래서 제왕의 자리 따위 욕심내지 않으려 했었는데.
‘불빛은 없군.’
말을 탈 수가 없어서 걷고 뛰기를 반복하니 어느덧 동이 터오기 시작하였다. 푸르스름한 어스름이 내려앉은 하늘이 오늘따라 어둡게 느껴진다. 그래서인지 사유지의 작은 2층 저택에 도착했을 때에는 근처에서 인기척 하나 느낄 수가 없었다.
카시안이 옆에 있었다면 마력이 느껴지는지 확인할 수 있었을 텐데.
여차하면 검을 빼 들 각오로 검집을 꽉 쥔 채 저택의 현관까지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온 신경을 곤두세웠으나 나를 향한 살기나 시선이 느껴지진 않았다.
조용히, 아주 천천히 소리가 나지 않도록 굳게 닫혀있는 묵직한 문을 앞으로 밀었다. 곧 퀴퀴한 먼지 냄새가 나를 덮쳐왔고, 빛 하나 없어 어두컴컴한 홀이 드러났다. 어둠에 익숙해지려고 시력에 최대한 집중하며 안으로 조심히 진입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왔을 때와 바뀐 건 없었다. 누군가 침입한 흔적도 없었고. 분명 형님이 나를 불러낸 장소가 여기인데.
쿵.
그때 분명히 들었다. 위층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충돌한 소리를. 모든 오감의 신경을 집중하고 있어 들을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듣지 못했을 만큼 아주 작은 소리였다.
잔뜩 경계한 채로 계단을 올라 소리가 난 방향으로 걸음을 재촉하였다. 연달아 유리가 떨어져 깨지는 소리와 무거운 가구가 살짝 밀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설마 슈아에게 무슨 일이라도?!’
분명 일부러 내는 소리가 아니다. 해서 나는 소리가 들리는 방문 앞에 서서 숨죽인 채로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너무 쥐죽은 듯 고요하여 내가 헛것을 들었나 싶을 정도다.
‘짐승이라도 들어온 건가. 그보다 슈아는 대체 어디에……?’
라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달칵, 소리와 함께 방문이 스르르 열렸다. 바로 코앞에서 느닷없이 벌어진 상황에 순간 반사적으로 검을 빠르게 뽑아 들었다.
“힉!”
검이 뽑히는 날카로운 마찰음에 놀란 누군가가 숨을 들이키며 그 자리에서 얼어붙는다. 분명 사람의 숨소리였다. 빛 하나 없는 그 새카만 어둠 속에서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 시신경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슈아?”
흐릿하게 드러난 윤곽. 항상 맑은 샘물처럼 청아하게 반짝거리는 청록빛 눈동자. 귀엽게 솟은 콧대와 늘 나를 갈증에 시달리도록 만드는 도톰한 입술.
확실히 그녀였다. 그 모든 것이 어둠에서조차 빛이 나는 듯했다. 그 영롱한 눈동자를 마주 보는 순간, 전신에 퍼지는 떨림과 심장의 발작이 느껴졌다.
르슈아가 무사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서 안도감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그녀가 잔뜩 겁에 질린 것처럼 그대로 굳은 채 천천히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슈아, 접니다. 에쉬.”
“……가, 가까이 오지 마!”
그녀를 향해 한 발 더 내딛자마자 나를 향해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목소리에는 떨림이 담겨있었다. 그것은 두려움이 내포된 비명과도 같았다.
나는 그녀를 도발하지 않기 위해 그 자리에 서서 방 안쪽 실내를 빠르게 훑어보았다. 커튼 안쪽으로 은은한 달빛이 새어 들어와 복도만큼 어둡지 않은데. 왜 나를 보고 놀라는 걸까?
“슈아?”
“오지 마. 부르지 마. 가까이 오면 진짜 혀 깨물고 죽어버릴 거야!”
겁에 질린 협박에 대충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형님이 몹쓸 장난을 쳤을 것이고, 아마 그에 깜박 속아 넘어갔을 테지. 그래서 지금 나를 형님으로 오인하여 저렇게 경계를 하는 것이라 추측한다.
어렸을 때도 몇 번 그랬었다. 내 모습으로 사람 골탕 먹이는 걸 즐겨하여 참다 참다 한번 크게 화낸 뒤로는 하지 않던 것인데.
이를 어쩐다? 해명이랍시고 말이라도 걸면 진짜 혀를 깨물 태세라 섣불리 접근할 수도 없었다.
‘……응?’
그때 르슈아의 뒤로 드리워지는 달빛이 더욱 밝아지며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나를 형님으로 오해하고 있다 하지만, 정처 없이 흔들리는 르슈아의 눈동자가 단 한 번도 내 시선과 닿은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자세히 살펴보니 초점이 맞지 않은 듯 동공이 조금 확장된 것 같았다.
‘눈이…… 보이지 않는 상태인 건가?’
전부터 르슈아가 나와 형님을 구별할 때 가장 먼저 확인하는 것이 뺨에 남아있는 흉터였다. 게다가 지금은 형님의 얼굴 반쪽에 마력으로 인한 상처가 있어 더욱 구별하지 쉬울 텐데.
아무래도 이것 역시 형님이 벌인 짓궂은 장난일 것이다. 장난이라기엔 조금 심한 경우지만.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풀어가야 할지…….
***
이렇게 새까만 세상은 처음이었다. 마치 동굴 속에 갇힌 기분이었다.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이렇게나 불편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시력이 사라져버릴 것을 예상한 적은 한 번도 없으니까.
처음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떴을 때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분명 눈을 떴는데도 내가 눈을 뜬 건지 감은 건지 판단조차 불가능했다.
그저 정신을 잃기 직전의 기억을 다시 상기시키며 눈을 꾹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슈아. 정신이 듭니까?”
바로 옆에서 들려오는 에쉬의 목소리에 안도감이 확 밀려왔다. 보이질 않아 허공에 헛손질을 할 때에 내 손을 조심스럽게 잡아준 그의 도움으로 겨우 앉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에쉬? 아까 그 유령이 나를 찾아왔었는데…….”
“이제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다 해결되었거든요.”
침착하게 내 어깨를 다독이며 안심시켜주는 그가 나를 조심히 안아주기까지 하여 그의 품에 완전히 몸을 맡겼다. 그러나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졌다. 날이 추운 것도 아닌데 그의 몸에서 온기가 아닌 냉기가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까도 그의 손이 닿을 때도 너무 경황이 없어서 설마 유령일 거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나는 진저리치듯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최대한 뒤로 물러났다.
그러다가 침대 끄트머리에서 뒤로 훅 넘어갈 뻔했지만.
“이게 무슨 짓이에요. 당신, 그 유령이지?”
“섭섭하군요, 슈아. 당신을 구하기 위해 그 모든 위험도 마다치 않고 사력을 다하였는데. 칭찬도 부족한 마당에 의심부터 하는 겁니까?”
정말 서운하다는 목소리라 긴가민가했다. 눈이 보이질 않으니 제대로 된 상황판단이 너무 어려웠다. 분명히 정신을 잃기 직전에 유령이 어떤 수법을 사용했는지는 몰라도 잠에 빠졌기 때문에. 여기는 어딘지, 정말 내 앞에서 나를 마주 보고 있는 저 남자가 에쉬가 맞는 건지.
“눈이, 보이질 않아요. 안보여서 당신이 누구인지 확실하게 모르겠어요.”
“당신은 안전합니다. 또한 여기는 아주 안전한 곳이고, 그 누구도 당신을 해칠 수 없어요.”
“……진짜, 에쉬예요?”
“예.”
아닌 것 같다. 내가 아는 에쉬라면 저렇게 단답으로 말을 끝내지 않을 것이다. 항상 내가 유령인지 에쉬 본인인지 의심할 때마다 그는 실망하기보다 본인임을 어필하려는 성향이 더욱 강했다. 충분히 내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면서.
나는 손으로 밑에 깔린 침대시트를 만지작거리면서 오감을 총동원해 질감을 느껴보았다. 내가 머물던 휴게실의 침실은 황실에서 사용하는 것을 증명하듯 아주 보드랍고 포근한 느낌이었다. 그게 좋아서 침구를 자주 만지작거리던 버릇이 있어서 그때의 기억을 최대한 되살려보았다.
하지만 이건 좀 뻣뻣했다. 아예 느낌 자체가 달랐다. 게다가 항상 은은한 꽃향기가 느껴졌는데 지금은 오래된 먼지 냄새가 전부였다. 사람이 머문 지 오래되었음을 증명하는 빈집 느낌.
그렇다는 건, 여기가 휴게실이 아니라는 건데.
“여기, 어디예요?”
“황궁에서 늘 당신이 머물던 곳입니다.”
태연하게 대답하는 그가 유령임을, 저 유령이 지금 에쉬인 척 연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가 아니라는 것이 온몸으로 느껴진다.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드는 건 처음이니까.
나는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거짓말. 당신 에쉬 아닌 거 다 알아요. 여기 황궁 아니지요? 날 어떻게 한 거예요? 여긴 대체 어디죠?!”
“……눈치 하난 참 빠르네. 어떻게 알았지? 보통 잘 모르던데.”
내가 에쉬와 오랜 기간 함께하지 않았더라면 깜박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체온은 거짓말을 하지 못하지만. 말투까지 너무도 흡사하여 눈으로 직접 보지 않으면 더욱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였다.
픽 코웃음을 치던 유령이 다시 목을 가다듬고는 또 에쉬와 똑같은 말투, 똑같은 목소리를 흉내 내었다.
“여기는 아까 내가 말했던 대로 안전한 곳입니다. 이곳이라면 아무도 당신을 찾지도 해치지도 못하니까요. 당신이 여기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모릅니다.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곳이거든요. 나 빼고.”
“……그 입 다물어요.”
“이런, 왜 나를 미워합니까? 나는 정말 선의로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준 것일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지금 에쉬를 똑같이 따라 해서 나를 현혹하려는 게 가장 질이 나쁜 행동이에요. 그게 내게 얼마나 위협이 되는지, 알고는 있나요?!”
“왜지요? 안심하라고 일부러 힘든 연기까지 하면서 도와주고 있는데, 내 선의를 무시하는 겁니까?”
정말 말도 상식도 통하지 않는 상대라서 차라리 정신을 잃었던 순간이 더 나았을 뻔했다.
“당신하고 말싸움도 하기 싫고,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까 내 질문에 솔직하게 대답이나 해요. 내 눈, 당신이 그런 거죠?”
“이거 참……. 점점 더 서운해집니다. 왜 그리 냉대하는 건지. 처음 만났을 때에는 나를 그리도 반겨주었는데, 정말 너무하는군요.”
“누가 누굴 반겨요? 당신 처음 봤을 때, 내가 겁에 질려 도망갔던 건 기억 안 나나 보죠?”
“아니 그 전에 한번, 만났던 적이 있지요.”
그 전에?
“무슨, 말이에요?”
“한 여름날 밤. 당신의 본가에서. 잠들어있던 당신의 잠옷 끈을 풀어내던 나를, 그리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