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듯했다. 꼭 누가 한 대 친 것 같은 기분이어서 머리가 순간 멍했다.
가벨론 공작가에 아직 미혼인 영애라면 지난번 그 여자였다. 공작의 막내딸. 그런데 황족의 씨를 잉태하였다면, 그게 가능한 것인가? 형님이……?
그러다가 다시 찬물을 뒤집어 쓴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무리 유령이 실체화를 한다 해도 사람의 생리 현상을 똑같이 겪을 수는 없는 법이다. 어머니의 배 속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형체를 가져 본 적 없는 형님은 인간으로서의 성욕을 알지도 못할뿐더러 정상적인 성기능이 불가능했다.
그런 형님의 아이를 밸 리는 없고.
“황족의 씨가 아니군.”
“그렇습니다. 과거 황태후 폐하께서 저질렀던 일처럼, 폐하의 외형을 닮은 남자를 사들여 밤을 보냈고, 임신이 되자마자 그 남자를…… 조용히 살해하였습니다.”
역시. 고작 생각하는 것이라고는 저리도 단순해서야 원.
“그대는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그래.”
“황태후 폐하께서 조용히 지내신다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황궁 깊숙한 곳에서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쥐죽은 듯 살고 있는 건 가짜입니다. 믿지 못하시겠다면 오늘 밤, 황태후 폐하께서 연못가 산책을 하시는 시간에 조용히 확인해 보십시오.”
황태후가 가짜라니. 그럼 대역을 세워 두고 궁을 빠져나가 숨어 지낸다는 뜻인가. 워낙 두문불출이라 따로 찾아뵙진 않았으나, 대역일 거라는 생각 자체를 해 본 적이 없다.
이 또한 함정일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겠지만.
“그럼 황태후 폐하께서는 지금 어디에 머물고 계시지?”
“듣기로는 가벨론 공작가의 사유지에 별장을 새로 지어 그곳에서 기거하신다 하였습니다. 확실한 건 잘 모릅니다, 폐하. 워낙 그것만큼은 철저하게 비밀 유지를 하고 계신 터라 저 역시 언뜻 듣기만 하였습니다.”
사유지의 별장이라. 조사를 해 볼 필요가 있겠군. 다른 이도 아니고 황태후가 궁을 몰래 나가 지내고 있는 거라면 그곳이 반역의 무리들이 접선하는 장소가 될 것이다.
“좋다. 너를 믿어 보지. 네가 원하는 조건으로 서약하여 끝까지 네 안위를 보장해 주마.”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폐하.”
이중 첩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이온 백작이 그에 대한 믿음이 없었다면 이런 짓을 저지르진 않았을 것이고.
게다가 라이온 백작이 직접 증인이 되어 주겠다 나서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적일지도 모를 이에게 선뜻 호의를 베푸는 건, 네 취향이 아니라 생각하는데.”
두 개의 서약서를 작성하여 공작의 측근 손에 서약서를 쥐어 준 채 보내고 난 뒤, 나는 소파에 앉아 손깍지를 끼며 의문을 담아 백작을 떠보았다. 그러자 픽 웃은 라이온 백작이 답지 않게 울적한 표정으로 방문을 바라보았다.
“끊어진 인연이었고, 죽은 줄 알았습니다. 한때…… 어린 시절의 우정이 떠올라 기분이 참으로, 묘하더군요.”
“아는 사이인가?”
“아마 황자 전하께서도 기억하실 겁니다. 저 역시 황자 전하 덕분에 알게 된 친우였거든요.”
“파빌리엔이?”
워낙 파빌리엔은 나와 다르게 사람 사귀는 걸 좋아했었다. 붙임성도 오지랖도 넓어 어릴 때부터 주위에 친구들이 많았다. 파빌리엔이 황자라서 친분을 다지려는 목적이 있는 건가 싶었으나, 여섯째 황자로 서열에서 뒤처지는 그 녀석에게 얻어먹을 것이 뭐 있겠나 싶기도 하였지.
“제 기억에 의하면 황제파에 소속되어 있던 남작가의 셋째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죄를 뒤집어쓰는 바람에 가문의 모두가 참수형에 처해졌었지요. 저놈은 당시 황자 전하와 함께 산에 올라 정신없이 놀다가 화를 면했던 것으로 압니다.”
“……해서 공작에게 복수하고자 배신을 한다는 뜻인가?”
“저의는 알 수 없지만요. 그게 벌써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라서 가물가물합니다. 저희가 열 살이 채 되기도 전이었으니까요.”
귀족으로 태어나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고, 아바마마께 구원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그 삶이 녹록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작위를 달라고 하지 않은 건, 그 두려움이 뼛속 깊이 새겨져 있기 때문일 테고.
“그런데 폐하, 아까 그건 대체 무슨 일이었습니까? 서재 뒤에 비밀 공간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다시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묻는 라이온 백작의 눈빛은 묻고 싶은 것이 태산 같다는 듯 빛나기 시작했다. 눈치도 빠른 편이라서 아까 나와 카시안의 대화만으로도 대략적인 상황을 이해는 했을 거고. 결국 지금껏 숨겨 두었던 집무실 휴게실의 존재가 드러나게 되는 것인가.
“함부로 떠벌리지 마라. 그곳은 황제만이 출입할 수 있는 휴게실이다.”
“집무실을 지키던 황궁 기사들도 전혀 모르는 눈치던데요. 제가 떠벌리지 않아도 뭐, 언젠가는 소문이 퍼지기 마련 아니겠습니까? 그것도 예상하지 못하고 비밀 공간에 그리 대놓고 들어가셨으니, 무언가 대단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던데요.”
어차피 숨겨 봐야 나중에는 다 알게 될 문제라서, 이참에 내게 무조건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라이온 백작에게는 알려야 할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해서 나는 르슈아가 황궁에 머물렀었고, 형님이 그녀를 납치하였다는 이야기까지 전부 전달해 주었다.
“카시안의 말로는 르슈아가 공작의 손에 넘어가진 않을 거라던데. 아까 그 공작의 측근이 한 말이 사실이라면 더욱 가능성이 커질 것이고.”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그에 대한 것을 더 정확히 물어봤을 텐데요.”
“그를 그리 믿나?”
“……믿고 싶습니다. 그가 공작의 측근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부모님의 복수를 위해서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문이 몰락한 건 결과적으로 가벨론 공작의 지시 때문이었으니까요.”
오랜 시간을 공작가에 충성을 다하면서 쌓아온 신뢰가 복수 때문이었다면, 그놈도 지독하군. 부모의 원수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끔찍했을 텐데. 그럼에도 공작의 신뢰를 얻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기까지, 대단한 인내심으로 버티고 참아가며 가면을 유지할 정도의 인재라면 그냥 보내기가 아까울 정도다.
“일단 이번 일을 잘 끝내 보도록 하지.”
“이 상자는 어찌할까요? 아까 그가 가벨론 공작의 반역에 대한 모든 증거를 담았다 하였습니다.”
나는 그 평범한 갈색 상자를 내려다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처럼 모든 증거를 파악하여 정리해서 가져오도록.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예, 폐하.”
르슈아의 일만 아니면 함께 이번 일에 대한 의논을 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무엇 하나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아마 형님은 이걸 예상하고 르슈아를 납치해 간 것일 텐데.
꽤 기특한 생각을 다 하셨습니다, 형님. 제 약점을 아주 정확하게 파악하셨군요. 그러나 이번 일은 절대, 형님을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다시 황궁으로 복귀해서도 뜬눈으로 밤을 꼬박 새웠다. 자책감에 빠져 정말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편으로 내가 이렇게 무능한가 싶기도 했고, 나는 왜 이런 상황에 미리 대비하지 못했을까 자학도 했다. 복합적인 분노의 감정에 머릿속이 홀랑 타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는다 하여 해결될 일도 아닙니다, 주군.”
“……왜, 머리가 쥐어뜯기는 기분이 영 못마땅한가?”
“고통을 즐기는 사람도 있던가요? 있다면 제정신이 아닌 건 분명합니다만.”
불쾌하다는 듯 인상을 쓰는 카시안의 얼굴도 꽤 볼만했다. 늘 여유작작하게 비웃기만 하던 얄미운 녀석이라, 이참에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닫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말 온몸을 다해 괴로움을 토해 내었다.
그 괴로움이 진심이었긴 했지만.
그럴수록 더 짜증을 부리며 신경질적으로 초조해하던 카시안이 움찔거리며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녀석의 검붉은 눈동자가 금빛으로 변했다가 돌아오는 것을 확인하였다. 그것은 누군가 근처에서 마력을 사용했음을 뜻했다.
바로 허리춤에 찬 검을 조심히 손에 쥐고 주변을 경계하자, 카시안이 목 긁는 위협적인 소리를 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무슨 일이냐.”
“옵니다.”
카시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장에서 푸른빛이 땅으로 내리꽂혔다. 푸른 마력은 형님이 부리는 것. 행여 형님이 이곳까지 들어왔나 싶어 주위를 샅샅이 둘러보았으나 형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 푸른빛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하얀 종이가 팔랑팔랑 춤을 추며 하강하였다. 그것을 낚아챈 카시안이 내용을 빠르게 훑어보고는 미간을 더욱 좁히면서 험악하게 얼굴을 구겼다.
“아가씨를 원하면 주군이 직접 찾으러 오랍니다. 단, 혼자.”
“다녀오마.”
나는 카시안의 손에 있는 종이를 빼앗듯 갈취하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방문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러나 순식간에 내 앞을 가로막고 선 카시안에게 방해를 받아 녀석을 위협적으로 노려보았다.
“비켜라.”
“안 됩니다.”
“두 번 말하지 않는다.”
“가면 죽습니다, 주군.”
“형님은 나를 죽이지 못해. 그러니 걱정할 것도 없다.”
“이것이 그들의 함정이라면, 그래도 가시겠습니까? 지난번 암살자들의 총공격에 의해 죽음의 문턱까지 다녀오신 경험을 벌써 잊으신 겁니까?”
그건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최악의 기억이기도 했다. 카시안은 나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해 자신이 소멸할까 두려워하고 있었다. 삶에 그리 미련을 가지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카시안. 일단 나는 형님을 ‘혼자’ 대면할 생각이다. 혼자, 그 누구도 대동하지 않고 이 종이에 적힌 곳을 찾아가겠다는 뜻이다.”
내가 종이를 팔랑거리며 혼자라는 단어를 강조하자,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카시안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머리가 좋은 녀석이니 내 말뜻을 충분히 이해했을 것이다.
해서 나는 카시안을 그대로 지나쳐 방을 조용히 벗어나 집무실로 향했고, 비밀 통로를 이용해 황궁을 다시금 빠져나왔다. 이미 늦은 새벽이어서 황궁을 지키는 병사들의 경비가 삼엄하였으나 내게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했다.
나는 손에 든 종이를 다시 훑어보며 내가 가야 할 장소를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그곳은 과거 어머니께서 별궁에 입궁하기 전, 유모와 함께 머물렀던 거처였다.
그 익숙한 형님의 필체가 담긴 종이를 서늘한 시선으로 노려보며 조각조각 잘게 찢었다. 위협적인 상황이 닥치더라도 상관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을 것이고, 사랑하는 이를 꼭 지켜낼 테니.
‘기다리세요, 슈아. 곧 당신을 구하러 가겠습니다.’